소설리스트

외전 26화 (220/220)

26

덮쳐 오는 어둠에 몸을 웅크렸던 사람들은 다시금 비추기 시작한 햇빛 아래에서 활짝 웃었다. 며칠 전까지 중부 관문이 무너지겠네, 일라베니아 망하겠네, 결국 우리는 죽겠네 하며 죽상을 지었던 일라베니아의 지휘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치렀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맑고 밝은 기운이 중부 관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곧 중부 관문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 이제는 새로운 왕국 리쉬에의 국왕이 된 리카르디스였다. 그는 방 안에서 축배를 드는 지휘관들을 보자마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하하, 허허 하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곧 방 안에 정적이 깔렸다. 지휘관들이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전쟁이 끝나면 무너진 건물과 피해가 알아서 복구되는 것이었나? 축복의 밤이 그런 기적까지 일궈 냈던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검을 든 자들의 싸움은 끝이 났지만, 펜을 든 자들의 싸움은 지금부터다.”

지휘관들은 쌓여 가는 서류와 리카르디스의 닦달에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리다 못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의 보이지 않는 채찍질에 펜잡이들이 데굴데굴 구르는 사이, 칼잡이들도 방 안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수십 일간의 대장정. 그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병사들은 지쳐 쓰러져 먹고 자기만 했다.

로젤린도 전쟁 종결 강화 조약에 모든 국가의 인장이 찍힌 이후, 내리 이틀 동안 잤다. 열여덟 시간이 지난 시점에 그녀의 생사가 걱정되었던 칼릭스가 로젤린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갔다.

그렇게 헤사가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고, 리카르디스가 찾아와서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기를 몇 차례. 끙끙 앓아 가면서 수십 시간 잠만 자던 로젤린이 깨어났다. 어둑한 밤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퉁퉁, 캉캉. 무언가를 두드려 대고, 쨍그랑, 뭘 깨트리고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까지. 로젤린은 침대에 앉아서 몇 분간 그 요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전쟁 중의 중부 관문과 전혀 다른 분위기가 차츰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적막과 날이 서 있는 예민함만이 감돌았던 그때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로젤린은 후드를 대충 뒤집어쓰고 방을 나섰다.

왕국군 주둔지는 아직 일대를 지키는 병사들로 복작복작했다. 모두 이 장소가 주점이라도 되는 양, 웃고 떠들고 바닥에 반쯤 누워서 굴러다녔다.

“마셔라!”

“먹고 죽자!”

기껏 살아난 병사들이 죽자고 소리치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벽은 무너지고, 땅에는 아직 화살이 꽂혀 있고, 상처도 다 낫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탁, 무언가가 풀리며 마음이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잡고 있지 않으면 날아갈 만큼이나 가벼워졌다. 이제야 무언가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로젤린은 동동 뜬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어이, 거기 아가씨.”

로젤린은 뒤를 돌아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추운 날에 얇은 셔츠와 바지 한 장만 걸친 잿빛 머리의 남자가 건들건들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가 말랑말랑한 빵 한 덩이를 툭 던졌다. 로젤린은 여유롭게 그걸 받아 뜯어 먹었다.

“몸은 좀 어때.”

고대부터 내려오는 문헌에는 축복의 밤 이후, 마력을 가진 자는 대륙을 소생하는 대가로 힘을 완전히 잃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로젤린은 여전히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 마인 정도에 불과하지만, 문헌과는 다른 결과였다. 아마도 본래 가지고 있던 마력의 양이 상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로젤린과 마카롱은 추측했다.

축복의 밤 이후 로젤린은 유달리 피곤해했다. 전 같으면 며칠 밤을 새우고도 쌩쌩했을 로젤린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녀가 큰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런 외부적인 요소로만 판별하는 사람들조차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마카롱이 얼마나 그녀의 변화를 뚜렷하게 느꼈을지는 빤했다.

그 때문인지 마카롱은 축복의 밤 이후 대략 한 시간 간격으로 몸은 괜찮냐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심지어 잘 때에는 깨워서 묻기까지 했다.

마카롱이 안부를 집요하게 묻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로젤린의 마력 양이 변화했다는 이유뿐 아니라, 그녀가 변이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금기를 저지른 로젤린은 완전한 ‘그것’으로는 돌아가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변이하여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사용했다. 손이 미끄러워 잼 뚜껑이 안 열릴 때 손바닥 가죽을 빳빳하게 변이한다든지, 편지 봉투를 열 때 페이퍼 나이프가 없어서 손톱을 날카롭게 한다든지 등의 용례가 그러했다. 한데 축복의 밤의 의식에 마력을 쏟아부은 후, 그 변이 능력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로젤린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카롱이 깜짝 놀라 그녀를 중병 걸린 환자 취급하여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몸은 괜찮냐 묻고 있는 상황이었다.

“괜찮아.”

로젤린이 그새 습관이 된 대답을 내뱉자 마카롱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볼이 눌려 입이 부리처럼 나왔다. 그가 로젤린의 볼을 밀가루 반죽이라도 되는 양 조몰락거렸다.

“이거 봐, 말랑말랑한 거. 곰한테 한 대 맞으면 아주 다치기라도 하겠어?”

다치는 게 보통 아닌가 싶었다. 로젤린이 실없이 웃자 마카롱이 곧바로 타박했다.

“웃어? 이게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네.”

“알거든. 예전에 금기 어겼을 때도 한 번 겪어 봤어.”

로젤린은 금기를 저지르고 난 후, ‘그것’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자각했던 때의 당황했던 제 감정을 반추했다. 물론 지금도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가 훨씬 무서웠어.”

“나도 너의 과감함이 무섭다.”

마카롱이 계속 볼을 눌렀다 놨다하며 손장난했다. 로젤린은 천천히 어물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제 진짜 갠차나. 아, 좀 누루지 마.”

로젤린은 마카롱의 손에 잡힌 채로 눈만 굴려 그의 뒤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로젤린의 눈에 겨울날에도 따스하게 빛나는 횃불의 온기가 녹아들었다. 로젤린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났잖아.”

“그래서요.”

“이제 그 힘은 나에게 크게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카롱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 아주 짧은 순간 머무르다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엇일지 결론을 내리기 전, 마카롱이 붙잡고 있는 로젤린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가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마카롱이 손을 뻗어 로젤린의 머리를 마구 헤집듯 쓰다듬었다. 으어, 아으. 로젤린은 마카롱이 쓰다듬는 대로 휘둘리다가,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마카롱의 손으로 시야가 가려져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입매만 얼핏 볼 수 있었다.

마카롱은 로젤린의 머리를 새집으로 만들고 곧바로 뒤돌아섰다.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있는 곳에 같이 가자 청했지만, 그는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마카롱은 빛나는 건물에서 멀어지며 점점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던 로젤린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은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목적지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껄껄껄!”

“하하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바깥과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추운 바깥이 아니라 그런지 웃통을 훌렁 벗은 채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구석에는 라고슈 부족의 수장들과 라헤안시, 그리고 라헤안시의 뒤처리 담당인 베르움이 카드 게임을 벌이는 중이었다. 라헤안시와 베르움은 그들보다 체구가 두 배는 큰 제르타예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사기를 치며 도박판을 흔들고 있었다.

“이건 사기야!”

“아까 내가 버린 패인데!”

젊은 제르타예 두 남녀가 악 소리치자 베르움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 보신 게 아닐지요? 본인의 실력 부족을 사기라 일축하다니. 신께서 지켜보시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신께서 지켜보시는데 손장난하고도 저렇게 떳떳하다니. 베르움이 누구의 영향을 받아 타락했는지 너무 투명했다.

셍고·제르타예의 수장이 로젤린의 할아버지인 귈테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가 2황자한테 뭐 받기로 했었지? 그거 조금만 걸어도 되나, 귈테?”

귀를 의심하던 귈테가 곧 셍고의 수장을 경멸하는 듯 바라보았다. 패가망신이 코앞으로 다가온 셍고·제르타예와 라고슈 지원군 일가의 고뇌는 전혀 닿지 않는 듯, 방의 중앙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탁자 위에서 레이몬드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그의 형인 아렌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로젤린을 발견한 레이몬드가 화색을 지으며 탁자 위의 무언가를 발로 걷어찼다.

로젤린은 날아오는 물체를 덥석 잡았다. 속을 판 동그란 나무 안에 조각을 넣어 소리 나게 만든 악기였다. 로젤린이 관성적으로 잘각잘각 흔들자 레이몬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열정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즐겨야 해!”

“빨리 마셔!”

이제 보니 리카르디스가 없는 틈을 타서 연회를 벌인 모양이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레티시아가 로젤린을 반기며 그녀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말린 무화과였다. 레티시아를 졸졸 따라다니던 에버하르트도 로젤린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호두였다. 헤사도 쪼르륵 다가와 치즈를 넣어 주었다.

상급자한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입에 먹을 것부터 넣다니. 이 사람들도 취했군. 로젤린은 별말 없이 냠냠 씹었다. 어, 이거 나름 맛의 조화가 괜찮은데…….

로젤린이 고심하며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노는 공간에, 누군가가 막 발을 들였다. 머리까지 덮은 신관 로브를 입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로젤린은 그가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조용히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위장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씰룩였다.

“저, 이…… 씨…….”

욕을 하려던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발견하고 황급하게 말을 순화했다.

“부상 입었다는 작자들이 술을 퍼먹고…… 저렇게 심하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 아니지 기분이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부상자 막사에서도 비슷한 꼴을 봤더니 속이 다 뒤집어져! 기껏 살려 놨더니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해!”

일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부상자들이 날뛰는 모습이 더 열 받는 모양이었다. 로젤린도 아까 전 들렀던 부상자 병동에서 이와 비슷한 풍경을 봤던 터라 그저 웃고 넘기지 못했다. 아픈 인간들이 술 먹고 춤추고 쉬지도 않고 놀고 있으니, 치료사와 신관들이 뒤 목 잡고 넘어갈 수밖에.

살짝 미소 지은 로젤린은 흔들던 악기를 리카르디스에게 넘겼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본능적으로 악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소리와 박자가 흥겹게 쪼개어졌다.

“좋은 날이잖습니까. 보다가 영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재우겠습니다.”

“……어떻게? 아니야. 대답하지 않아도 돼. 대충 알 것 같으니.”

분명 무력이 수반되어 있겠지, 그 행위에는.

하, 한숨을 쉰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추기 시작한 에버하르트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미소와 해괴망측한 몸놀림들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미간이 여전히 찌푸려져 있긴 했지만.

“그래, 뭐…… 좋은 날이니까.”

악기를 다시 로젤린에게 넘긴 리카르디스는 벽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하프를 집어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가 연주하는 승리의 찬가와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섞이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냈다. 레이몬드는 몹시 기뻐하며 새롭게 나타난 연주자를 칭찬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인걸!”

그의 상관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꺄르륵거리면서 노는 어른들의 흥을 별말 없이 돋워 주었다. 그의 옆에서 로젤린도 악기를 흔들었다. 차카차카, 잘각잘각. 사람들의 웃음에 그녀가 만든 소리가 녹아들었다.

* * *

리카르디스의 보이지 않는 채찍질 아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칼릭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릭스는 전투의 피로를 다 풀지도 못한 채 리카르디스와 푸른등불 공작의 수족이 되어 다양한 일을 빠르게 처리해 냈고, 그런 그를 몹시 탐내는 푸른등불 공작의 시선을 내내 견뎌야만 했다.

겨우 일을 끝마친 칼릭스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는 참에 길레드와 마주쳤다. 그에게 인사하려던 칼릭스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길레드의 눈빛이 마치 석 달간 쫓은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길레드가 손가락을 물고 삑 휘파람을 불었다. 칼릭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곧 여기저기에서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포위하듯 둘러싼 마인들이 칼릭스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도 잘생겼다…… 내 금은보화.”

까마귀대의 대장이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꼭 내 집이 가지고 싶었지. 방이 두 개 딸린 거로.”

어금니대의 대장도 칼릭스의 주위를 서성이며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높은 난간 위에서 원숭이가 그의 말을 받았다.

“한 삼십 년은 놀고먹기만 해도 되겠지?”

황홀함에 젖어 얘기하는 여자의 눈은 칼릭스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칼릭스는 울컥했다. 자신은 까마귀의 금은보화도, 방이 두 개 딸린 어금니의 집도 아니었으며, 삼십 년의 방탕한 삶을 보증하는 원숭이의 무언가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났다. 완벽한 승리도 아니지만, 최악의 패배 또한 아니었다. 모두가 기뻐하던 때에 유독 기뻐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꿀이 흐르는 붉은수레바퀴 영지에서의 삶과 자유…… 와 많은 돈을 약속받은 마인 부대의 일원들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흐뭇했던 마인들은 틈만 나면 칼릭스의 주위를 서성이며 탐난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저어 백작님…….”

울컥해서 뭐라 하려던 칼릭스는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몰래 출진해서 단단히 혼난 에렌과 그의 친구 네 명, 칼릭스가 사고뭉치 단이라고 부르는 이들이었다.

어른들의 탐욕이 넘치는 얼굴과 달리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청년과 소녀들은 초조한 듯, 불안한 듯 칼릭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말 가족들 다 데리고 가서 붉은수레바퀴에서 살아도 되나요?”

딱딱해지다 못해 얼어 버린 칼릭스의 마음이 살살 녹아 버렸다.

“……물론이지.”

까마귀와 원숭이, 어금니가 뒤에서 어? 하며 의문스러워했다.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대할 때랑 반응이 다른데…….

그러면 같겠냐.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반박한 칼릭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사고뭉치 단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 주었다. 그들은 단순히 붉은수레바퀴령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기뻐하는 게 아니었다.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대는 파편과 인조 마인 등이 포진한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싸운 특별한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를 하사받을 예정이었다. 조만간 계약에 명시된 대로 칼릭스에게 보상도 받을 것이고.

마인들이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일라베니아와 마인에 대한 과거의 비밀이 밝혀지며 사라졌다. 여태껏 마인을 핍박하던 악습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야 없으나, 차츰 변화해 나갈 것이다. 리쉬에 왕실이 그런 흐름을 주도해 나갈 것이며, 이들은 점차 발길이 닿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원하는 곳에, 그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 그런 마인들이 붉은수레바퀴령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에렌이 기뻐하는 이유는 그저 ‘마인’이 필요해서 계약을 하자 말했던 칼릭스가 더 이상 마인이 필요해지지 않은 시점에도 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사람들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태도가 달라지곤 하니까. 마인들은 약자의 입장으로서 그런 이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칼릭스는 어른 마인들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주위를 떠돌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하는 본새가 기분 나빠서 사납게 대했을 뿐이었다.

칼릭스는 흘끗 옆을 보았다. 에렌이 그의 눈치를 보며 반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완벽히 행복한 미소를 짓기에는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전후 처리로 바빠서 마인대를 별로 신경 써 주지 못했더니 자기들끼리 별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피곤한 정신을 애써 한편에 물러 두었다.

‘쉬기는 글렀군.’

방으로 향하던 칼릭스가 방향을 틀자 마인들이 어딜 가냐며 조르륵 따라왔다.

“술이나 한잔하려고. 따라오든가 말든가.”

어른 마인들이 활짝 웃으며 또 인간 가마를 태우려고 들었다. 칼릭스는 필사의 힘으로 싸워 자신의 두 다리로 걸을 권리를 얻어 냈다.

그렇게 이동하던 중, 마인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한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행동에서 칼릭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전장에서 마력을 감지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료 마인들도 널린 이곳에서 단순히 작은 마력에 이들이 이렇게 반응할 리 없었다.

칼릭스는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원인을 알게 되었다.

중부 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디에즈가 탈옥했다.

뒤늦게 마인들이 나섰지만, 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반쯤 폐허가 된 감옥 안. 남은 것은 부수지 못한 쇠사슬에 결박되어 있는 한쪽 팔뿐이었다.

여러모로 위험한 인물이기에 추적은 불가피했다. 추적대를 따로 구성하려던 차, 사자갈기의 드윗이 나서서 디에즈를 쫓겠다 말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의견을 수용하여, 사자갈기군에게 디에즈의 추적 임무를 맡겼다. 수백 마리의 사냥개가 밤을 찢는 울음소리를 냈다.

* * *

수 개 국이 연합한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고 최후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중부 관문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얘기에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절망했었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일라베니아의 땅을 짓밟았던가. 그 피로 물든 발자국이 걸어온 길처럼, 자신들의 운명 또한 그렇게 지리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때였다.

하얀 밤하늘에 검은 달이 떴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아름다운 검은 달빛과 겨울의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목도했다. 전설처럼 전해져 왔던 ‘축복의 밤’이 수천, 수만을 넘어선 대륙 모든 이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축복의 밤이 전쟁에 어떤 효과를 끼칠지 그때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모두가 그 빛에서 희망을 느꼈다.

오로지 황실만이 검은 달빛에 분노했다. 일라베니아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황실은 2황자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황제의 명령에 군대가 소집되어 ‘반역자’ 리카르디스를 처단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황성을 둘러싼 짧은 교전이 발생했다. 그리고 채 하루가 넘어가기도 전에 일라베니아 황실이 전복되었다. 내부에서 황제를 지키는 가문 중 가장 힘이 강한 ‘사자갈기’의 배신 때문이었다.

모래성을 만드는 것보다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왕조가 탄생했으며, 그로 인해 전쟁이 막을 내렸다. 연합군이 중부 관문을 무너트릴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게 얼마 전이었는데, 갑자기 일라베니아 황실이 전복되고, 백성들은 국적이 바뀌었다.

급격한 흐름에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백성들을 아끼고 위하는 리카르디스가 새로운 왕국의 통치자가 되어 침략자들을 몰아내었다는 사실에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타국과의 분쟁을 틈타 황위를 노린 저열한 반역 행위라며. 하지만 1황자 엘피디오도 사망한 지금,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황제가 되었을 리카르디스가 단순히 권력 욕심으로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도리어 사람들은 리카르디스가 패륜아라는 오명을 감수하고서라도 반역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몰고 간 일라베니아 황실의 죄와 황제의 무능을 손가락질했다.

한 명은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을 살려 보겠다고 적진의 깊숙한 한가운데까지 침투할 정도로 위험을 무릅쓴 반면에, 그 아비라는 작자는 편안한 황성 안에 박혀 있다가 일라베니아가 위험하다는 소리에 수도를 버리고 도주하려 했다.

그때부터 월계수의 가치는 사라진 것이었다.

수도 티가드의 성문이 열렸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의 상징인 깃발이 보이자 사람들은 손을 번쩍 치켜들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 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가슴 벅차도록 희망찬 기쁨을 안고 웃고, 울고, 노래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기만 했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그 어느 곳보다 출입이 까다로운 수도 티가드의 성벽과 황성의 문을 지났다. 일라베니아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와 병사들을 마주했으나, 그들은 어떤 방해도 하지 않았다. 반역자 리카르디스가 아닌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자세로 경의를 표하며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상징인 금강석 성에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도달했다. 압도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거대한 성이 리카르디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천천히 숨을 쉬며 그 모습을 훑었다.

아주 오래전, 리카르디스는 이 성과 성의 주인이 주는 압박감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지도 못하고 한참 이 앞을 서성였었다. 모든 것이 버거웠을 때였다. 이후 계단을 서슴없이 오를 때에도 압박감은 언제나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그것을 누를 만큼 성장했을 뿐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언제나 무거웠던 어깨가 아주 가벼웠다. 눈앞에 보이는 금강석 성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계단에는 아직 거뭇거뭇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정렬된 조각상은 부서지고, 유리창은 깨져 있고, 나무는 불탄 채 스산한 분위기를 조성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금강석’이라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던 빛은 바래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금강석 성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자세를 곧게 한 채 화려한 계단의 양쪽 가에 섰다. 엄숙하게 적막을 지키며, 전방만을 주시하는 그들의 뒤에는 계단을 장식하는 조각상들이 깨지고 부서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후,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한걸음 뒤에 있는 로젤린뿐이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나란히 겹쳐졌다. 리카르디스는 그 소리를 곱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리카르디스!”

곧 뒤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3황자 틸렌드의 목소리였다. 헝클어진 머리, 흐트러진 옷차림새, 불콰한 얼굴까지. 누가 봐도 취객 같은 남자가 금강석 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리카르디스에 대한 욕과 저주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틸렌드가 계단에 접근하려 하자 병사들이 황급히 나섰다. 틸렌드는 붙잡히기도 전에 다가오는 병사들의 얼굴에 주먹질하며 패악을 부렸다.

“더럽고 뻔뻔한 놈 같으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틸렌드는 리카르디스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 순간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일시에 검을 빼 들었다.

틸렌드는 화들짝 놀라며 계단에서 급히 발을 떼어 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검을 그에게 겨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워서 자신의 얼굴 앞에 두었을 뿐이었다. 틸렌드는 스스로의 추태에 얼굴을 붉혔다.

리카르디스는 틸렌드가 벌이는 소란이 들리지도 않는 듯,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아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기이한 적막함이 기사들을 석상처럼 보이게끔 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다시 한번 일시에 움직였다. 철컥, 백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만들어 낸 소음이 소름 끼칠 정도로 하나로 맞물렸다. 그들은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며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기사의 예였다.

적에게는 날카로운 검을, 주인에게는 경배를.

틸렌드는 자신을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들의 무덤덤한 태도에 울컥했으나, 두 번은 계단에 발을 올리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뒤를 따르던 검은 머리의 기사가 고개만 살짝 틀어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틸렌드는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검보다도 선명한 무형의 위협을 느꼈다. 검은 머리가 하얀 계단을 불태우는 검은 연기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자, 아까 전 마주했던 녹색 눈동자는 다시 주인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반역이자 즉위 의례의 짧은 과정. 이 계단을 오르는 리카르디스를 다시 한번 방해하는 순간 무사하지 못하리란 것을 틸렌드는 직감했다.

리카르디스는 늘어선 수백 개의 계단을 올라 질릴 정도로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된 거대한 문 앞에 도달했다. 그는 한참 그것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문을 열어라.”

리카르디스의 명령에 나단과 르원이 양 문을 밀었다.

쿠구궁…….

일라베니아가 쌓아 온 역사만큼이나 두텁고 무거운 문이 밀렸다. 안쪽의 텅 빈 공간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동굴처럼 울려 퍼지게 했다.

환한 샹들리에 아래, 언제나 오색찬란한 빛이 부서져 내리던 공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벽면의 촛불 몇몇 개와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만이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빛과 어둠의 선명한 경계에 발을 들였다. 적막한 공간에 그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십 개의 테이블이 있었으나 성한 걸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로 밀리고 깔려, 부서지고 엎어진 채였다. 그 아래에는 잔과 접시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고, 빛나는 대리석 바닥에는 음식물이 말라붙어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쓰레기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일라베니아 제국기와 잘 벼려진 검에 닿았다. 내내 실감이 나지 않던 황권 교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바람이 깨진 유리창을 스치고 들어오며 황량하고 스산한 소리를 냈다. 차가운 공기의 흐름에 따라 리카르디스의 눈이 다시금 공간을 훑었다.

폐허가 된 제국의 심장부. 그 아름다웠던 공간이 이다지도 초라하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리카르디스는 눈으로 보면서도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 장면을 아주 오래 기억하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리카르디스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구깃구깃 주름이 가 있는 붉은 융단이 그의 길을 안내하듯 펼쳐져 있었다. 어지럽혀진 길을 가로지른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일라베니아 황제의 상징인 금색 황좌,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초췌한 한 남자의 앞에서.

평소 같으면 황제를 호위하고 있을 얼음창의 기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백 명이 있어도 여유로운 넓은 공간에는 오직 세 사람의 숨결만이 녹아들었다.

황제,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언제나 위엄 어린 태도를 하고 있던 남자는 어깨에 무거운 무언가를 지고 있는 사람처럼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앉아 있었다. 수염은 정돈되지 않아 지저분했고, 옷매무새 또한 엉망이었다. 누가 그를 황제라고 볼 수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황좌에 앉아 있으나, 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까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걸 잘린 채 숨만 붙어 있는 셈이었다.

반역을 이끌었던 클로에는 성공리에 일을 마무리 지은 후, 황제를 다른 이들처럼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 황제의 수족들만 철저하게 쳐내 버린 채 그저 가만히 두었다.

매일 차려지는 음식, 언제나 지내 왔던 아름다운 성에서의 생활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내일을 보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리카르디스의 귀환까지 약속된 유예일 뿐이란 걸 라이노는 잘 알았다. 호화로운 우리에 갇힌 돼지나 다름없었다. 이럴 바에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것이 나았으리라.

하지만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라이노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이 되면 아무도 없는 금강석 성의 황좌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그렇게 홀로 텅 빈 공간에 앉아 있기를 며칠째. 드디어 방문자가 나타났다. 라이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황좌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도 홀로 빛에 휘감겨 있었다. 황좌의 바로 뒤, 상단부의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정확하게 그를 비췄다. 먼지조차 춤을 추는 듯 너울거리며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돌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그래서 라이노는 여상한 얼굴로 말을 꺼내는 리카르디스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한참 뒤에야 ‘그간 평안…….’이라는 황당한 말을 인식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

리카르디스가 순수한 기쁨을 담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어린 소년의 천진한 미소 같았다.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최하층 계급의 천한 평민 하나가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굴 수 있는 것은 리카르디스가 입에 담은 ‘아버지’라는 말 때문이었다. 자신이 준 이름, 자신이 준 권력, 자신이 준 그 허울 좋은 ‘아들’이라는 이름 덕분에.

과거의 실수를 상기시키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라이노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라이노의 손이 숨겨 둔 단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미처 그걸 잡지 못했던 것은, 빛에 휩싸인 리카르디스 뒤의 그림자, 그 속에서 누군가가 한걸음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빛의 영역에 누군가의 부츠가 불쑥 나타나며 라이노의 긴장을 깨트렸다.

라이노는 시선을 올려 리카르디스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빛에 익숙해진 시야는 단숨에 사람의 얼굴을 읽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빛나고 있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라이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림자에 몸을 숨긴 맹수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라이노는 부들부들 떨며 다시 황좌의 팔걸이에 손을 올려야만 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리카르디스는 찰나에 스치고 간 긴장감을 다 읽어 내린 듯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 운을 뗐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버지. 이 땅을 훌륭하게 지키고 돌아온 아들에게 물론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금 월계관을 주시지요.”

황제의 상징인, 황금으로 만든 월계관은 지금도 라이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라이노는 결국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절했다. 라이노의 머리가 기울자 그 위의 황금 월계관이 툭 떨어졌다. 붉은 융단과 몇 개의 단층을 도르륵 구른 왕관이 리카르디스의 발치에 부딪힌 후 멈췄다.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리카르디스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속을 더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라이노가 너무 빨리 기절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툴툴거리면서 황금 월계관을 집어 들었다.

“내 즉위 의례에서 직접 나한테 씌워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고. 물론 이걸 쓸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로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리카르디스는 문 바깥에 있는 기사들을 불러 황제를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다. 기사들이 물러간 뒤에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

리카르디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층을 훌쩍 올라 비어 있는 황좌 위에 앉았다.

“여기까지 십오 년.”

리카르디스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길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는 남자의 얼굴에는 형언하지 못할 여러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로젤린은 그런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울고, 괴로워하고. 또 울고, 고통스러워하며,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던 소년과 청년과 남자를, 로젤린은 기억했다. 그를 묶어 두던 과거의 상념, 거칠고 따갑기만 하던 감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뒤에서 쏟아지는 빛 아래, 리카르디스는 잠든 숲속의 나무처럼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오랫동안 이런 순간이 찾아오길 바랐었다. 로젤린은 기꺼운 마음에 웃었다.

로젤린이 단층 위로 발을 올렸다. 융단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는 로젤린의 발걸음 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눈을 떴다.

리카르디스의 앞에 선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천천히 그의 망토를 집어 입 맞췄다. 리카르디스는 픽 웃으며 황금 월계관을 던져 버리고 그녀의 얼굴을 잡고서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맞닿은 순간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탕, 탕, 데구르르…… 수백 년의 역사가 쌓인 제국의 황금 월계관이 깨진 유리와 함께 먼지 속을 뒹굴었다.

* * *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해야 할 일은 왜 그렇게 많고,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지. 단순히 황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닌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킨 시점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지금이 중부 관문 전쟁 때보다 고되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겨워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도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카르디스는 미간의 주름을 펴고 들어오라 명령했다.

로젤린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는 온 피로가 다 녹아내리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폐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저건 새로운 일감이 추가되었다는 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아쉬움에 혀를 차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이 총총 다가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리카르디스가 아는 인장이 찍혀 있는 서신이었다.

황후, 트리파. 1황자 엘피디오와 3황자 틸렌드의 어머니이자 일라베니아 제국의 어머니인 트리파의 문양이었다.

“…….”

리카르디스는 곧바로 서신을 뜯어 보았다. 만남을 요청하는 의례적인 문구 하나만 적혀 있었다.

“이걸 지금?”

“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말인즉슨, 지금 만나자는 얘기였다. 달과 별빛이 반짝거리다 못해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에.

리카르디스는 황성으로 귀환한 이후, 황후와 만나기 위해 그녀의 성으로 여러 번 서신을 보내었다. 하지만 황후가 번번이 아프다, 몸이 좋지 않다며 거절한 통에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성의 없는 핑계로 거절할 때는 언제고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상하다 못해 수상할 정도였다. 로젤린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만남을 미루시고, 내일 뵙는 게 어떨지요.”

“변덕스러운 분이라 내일은 또 아프실 수도 있어서 말이지.”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 뵈러 가야겠군.”

황후가 기거하는 진주성.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그 앞에서 의외의 인물과 만났다. 남자는 리카르디스가 진주성에 방문할 예정이란 걸 알고 있었는지 당황하지 않고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사자갈기의 드윗이 주인을 뵙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태양보다 찬란하게 빛나시는군요.”

리카르디스는 드윗의 아첨을 한 귀로 흘리며, 미심쩍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인사하던 드윗은 눈만 흘끗 굴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눈을 내리까는 걸 보니 뭔가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디에즈의 추적을 맡았던 사자갈기군의 지휘관, 드윗이 어떤 보고도 없이 갑자기 황성에 나타나다니. 심지어는 황후의 성 앞에.

리카르디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자식 수상한데? 라는 의미가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드윗은 우물쭈물하다가 살짝 윙크했다. 한 번만 넘어가 달라는 애교 비슷한 무언가인 모양인데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일단 그대와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예, 이 충성스러운 가신은 폐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눈꺼풀 간수를 잘하라. 한 번 더 하기만 해 봐.”

“……예.”

진주성의 시종장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조용한 성을 가로질렀다.

진주성의 응접실. 문이 열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예상외의 사태를 대비했지만, 안쪽에 있는 것은 한 명의 여인뿐이었다.

황후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음에도 창밖의 어두운 밤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짓으로 단원들을 물렸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를 제외한 단원들이 응접실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황후는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조금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 라이노나 그녀의 아들 틸렌드 같지 않게 여전히 고고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참으로 그녀다웠다. 리카르디스는 주인이 반겨 주지 않았지만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 후, 황후의 입이 열렸다.

“나를 보고자 했더군요.”

“예.”

굳이 따지자면 이번에는 황후가 먼저 요청한 것이지만, 리카르디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의 밤이 하늘을 물들인 그날. 반역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황제의 곁에 있던 사자갈기 가문이 변절했다. 클로에가 규합한 집단이 황실을 점거하는 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도 사자갈기 가문이었다. 바깥에서 두드리는 힘은 안쪽에서 문을 여는 힘만 못했다.

실상 황실을 점거하는 일이 시간문제였다 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단기간에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황후의 공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황후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길 뿐 아니라,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배를 옮겨 탔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황후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황후의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허황된 거짓말을 내뱉거나 지켜 왔던 비밀을 말하는 둥, 실수를 저지르니 말입니다.”

황후는 잔에 담긴 와인을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두운 공간 아래 침잠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축복의 밤이 뜬 그날에. 술에 취해 휘청거리시며, 그 천한 고아가, 감히 은혜도 모르고 주인을 물어뜯는다 하시면서요. 리카르디스 그 천한 것이. 그 더러운 것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추하게 바닥에 굴러 넘어지면서, 그렇게.”

여태껏 창밖, 테이블, 와인 잔과 손끝만을 향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리카르디스를 겨냥하듯 주시했다. 리카르디스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녀를 마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냉철한 모습만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리카르디스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대답했다.

“술이 과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다니.”

굳은 얼굴로 있던 황후가 후 코웃음을 쳤다. 이 짧은 대화로 리카르디스는 황후를 만나고자 했던 목적을 충족했다. 황후는 왜 황제를 배신했는가?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의 아들, ‘2황자 리카르디스’가 열 살 무렵 황실에 입성한 이후로 엘피디오는 크게 방황했다. 유일무이한 지위, 드높은 자존심에 금이 가고 그로 인해 점점 비틀리기 시작했다. 엘피디오라는 인물이 원체 그릇이 작기는 했으나, 대개 유년기의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하듯, 그도 그랬다. 어쩌면 황후는 황제에게 그 말을 듣고 계속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리카르디스가 없었다면. 그만 없었다면 엘피디오가 리카르디스에 대항하기 위해 디에즈를 통해 검은달과 손잡고,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황후의 분노는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모든 걸 알고 난 후, 그녀의 화살은 황제에게 돌아갔다. 황후는 황제가 내뱉은 ‘천한 고아, 평민.’이라는 말만 듣고 깨달은 것이었다. 뛰어난 아들에게 황위를 뺏길까 두려워, ‘리카르디스’라는 도구를 만들어 낸 저의를.

황후는 사람을 찔러 죽인 칼이 아니라, 칼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일라베니아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황후도 와인만 홀짝일 뿐,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의 일은 오늘로써 끝났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할 일을 하세요.”

황후가 왜 갑자기 만나고자 한 것인지 지금의 말로 어렴풋하게 유추할 수 있었다.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진주성 밖에서 만난 사자갈기 드윗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후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에 취해 떠드는 건 이만하면 될 것 같군요.”

황후는 다시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 벽면에는 한 장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엘피디오의 장례식 이후,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주었던 어린 시절 엘피디오의 그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시 그걸 눈에 담다가 방을 떠났다.

성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사자갈기의 드윗과 마주쳤다. 진주성에서 리카르디스가 나오길 기다린 듯했지만, 정작 드윗의 얼굴에는 그 기다림이 영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생긋 웃으며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드윗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월장석 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안. 드윗은 앞에 앉은 로젤린과 인상을 찌푸린 채 다리를 꼬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번갈아 보며 바쁘게 눈치를 살폈다. 그가 모호하게 웃으며 상황을 넘기려는 수작을 보이자마자 리카르디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전선에서 돌아오자마자 내가 아닌 전 왕조의 황후를 뵈러 간 것을 뭐라고 해석하면 좋을까. 로젤린 경?”

로젤린은 말없이 검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드윗은 초조해하다가 그 나름의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가 아닌, 가까운 친척 어른을 보러 간 거라고 생각하시면…….”

로젤린이 단검을 빼 들어 손수건으로 삭삭 닦았다. 개소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음.”

곤란한 듯 눈썹을 일그러트린 드윗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래가 있었습니다.”

로젤린은 과거, 발타의 동굴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가지고 싶은 게 있습니까?]

[보통은 무언가를 얻고자 전장에 뛰어들곤 하지 않습니까? 나도 그런 겁니다.]

기억 속 드윗은 돌멩이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손장난하고 있었다.

[나름 험하게 자랐다 자부하고 있지만, 요즘만큼 험하게 굴러 본 적이 없어요. 전쟁이라. 막연하게 떠올린 상상보다 조금 더 지긋지긋하군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도, 우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것 같지 뭡니까.]

[위로는 못 하지만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경답군요.]

피식 웃은 그가 낙하하는 돌멩이를 탁 낚아채었다. 돌을 꽉 붙잡자 주먹을 단단하게 쥐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드윗이 타오르는 불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원하는 것은 모두 얻어 가야죠. 그래야 수지가 맞겠어요.]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로젤린은 다시 현실의 젊은 사자와 마주했다. 로젤린은 비로소 드윗이 했던 그때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던 드윗이 살짝 눈웃음 지었다.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모정이 강하실 줄이야.”

그 말이 엘피디오의 복수. 즉 디에즈의 죽음을 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드윗의 귀환이 목적 달성의 여부와 맞물려 있으리란 것 또한.

“그 대가로 뭘 얻었나.”

“황후 폐하께서는 사자갈기 공작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계십니다.”

드윗이 말을 좋게 해서 그렇지, 사자갈기는 황후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그 전권을 모두 사랑스러운 조카인 저에게 주시기로 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라는 눈빛으로 드윗을 보았다. 그 뜻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지 드윗이 어색하게 웃었다.

“폐하를 따르는 충심 하나만은 진실 됨을…….”

“됐고.”

“……예.”

“그대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거겠지.”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은 잠시 숨을 멈추고 드윗을 바라보았다. 드윗이 가볍게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예.”

* * *

달칵.

로젤린은 방문을 닫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

대체 어떻게 온 거지? 마차에서 내린 건 기억나는데 방까지 도착하는 과정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방 안을 훑었다. 촛불과 벽난로가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로젤린은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으며 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똑똑.

로젤린이 방으로 돌아온 기척을 느낀 헤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뭐 필요한 게 있느냐 물어보려던 소년은 로젤린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서는 곧바로 다시 나가, 와인에 과일과 계피, 향신료 등을 넣고 끓여 왔다. 배고플 때의 표정과 비슷해서 착각한 것이었다.

“밤에 너무 드시면 안 좋으니까 따뜻하게 이거 한 잔만 마시고 주무세요.”

로젤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픈 그녀를 측은하게 여긴 헤사가 견과류 몇 알을 더 챙겨 주고 떠났다.

로젤린은 따뜻한 와인을 테이블에 두고서 침대에 엎어지듯 누웠다. 푹신하고 아늑한 침대가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밤공기가 눅눅하게 달라붙은 이불이 차가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렇게 무리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피로했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던 로젤린은 몸을 구부정하게 만 채 덮쳐 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이불은 계속해서 차가웠다. 이쯤이면 따뜻해질 때도 되었을 텐데. 차가워. 추워.

깜박깜박하는 눈이 흔들리는 불빛을 담아내다 이내 닫혔다. 완전한 암흑 속이었다.

탁탁탁.

누군가가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어둡고 추운 공간을 내달리며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은 너무나도 멀리 있고, 길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복잡한 미로 같았다. 힘없이 떨리는 다리로 한두 걸음 나아갔더니, 소리가 바로 바짝 따라붙었다.

탁탁탁탁탁탁탁.

심장이 크게 부풀었다가 씨앗만큼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뒷덜미의 솜털이 삐쭉 서며 머리끝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리가 떨리고 눈물이 울컥 나왔다. 무서워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손에서 압력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자신이 누군가와 손을 꼭 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괜찮아. 손 놓지 마.]

아플 정도로 꽉 쥔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절대 놓으면 안 돼.]

헐떡이는, 절박한 숨이 섞인 목소리가 지금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로젤린은 결국 주저앉았다. 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로젤린이 넘어질 때마다 일으켰고, 짐처럼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놓지마, 안 돼. 꽉 잡고 있어.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반복했다. 눈물이 계속 흘러넘쳐 시야가 성에 낀 유리창같이 흐렸다.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두운 공간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던 희미한 불빛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축제의 등불이었다.

두 사람의 걸음이 느려졌다. 더 이상 쫓기는 듯 다급하지 않았고, 아프게 쥐고 있던 손도 그저 따스하고 부드럽게 맞닿아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았다.

[걱정 마요.]

디에즈, 그가 따스하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고, 그 누구도 당신을 위협할 수 없으니.]

축제의 등불이 환하게 빛났다. 눈부신 빛에 시야가 이지러지며, 디에즈의 얼굴을 다시 흐리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다. 그가 말했다.

괜찮아. 지켜 줄게, 내가.

로젤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아주 오랜 과거의 기억이었다.

로젤린은 부스스한 몰골로 꿈에서 깨어났다. 벽난로의 장작불이 어느새 꺼져 있었다. 어둑해진 방 안의 모습 때문인지 공기가 더욱 쌀쌀하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담요를 두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입안이 깔깔했다. 로젤린은 테이블에 있던 잔을 집었다. 따뜻하게 데웠던 와인은 식어 버렸지만, 목을 축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로젤린은 달콤한 와인을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디에즈가 죽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의 산에서. 사냥 대회가 있던 장소이자, ‘로젤린’이 죽은 장소이자, 더 과거에는 마인들이 형체를 잃고 흩어졌던, 바로 그곳.

드윗은 디에즈가 오로지 그 장소에 도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바위가 쌓여 있는 절벽 아래에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고. 다가오는 검날을 보면서도 눈을 감을 뿐이었다고. 그렇게 죽었다고 한다.

* * *

고래무덤의 파르딕트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다소 불량스러운 태도로 걸어왔다.

“오늘만을 기다렸지.”

하얀밤 기사단의 연무장. 그 중앙에서 로젤린과 파르딕트가 대치했다. 바쁜 일정에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해 한층 험상궂어진 파르딕트가 목검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악당처럼 웃었다.

“지난날의 굴욕.”

로젤린은 거구의 해적 앞에서도 태연하게 레이몬드가 건네준 쿠키를 오독오독 씹었다.

“지난날의 치욕!”

로젤린이 뒤돌아서 레이몬드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가 로젤린에게 목도리를 둘러 주며, 쿠키 주머니를 하나 더 건네었다.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다녀.”

“안 추워.”

“이제 좀 약해졌다며.”

“그래도 파르파르보다 강해.”

“아니 이 인간들이?”

파르딕트가 씩씩 성내며 로젤린을 닦달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쿠키를 한 움큼 집어 먹고는 목검을 들었다. 대치하던 두 사람은 푸른등불의 카일로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와 함께 격돌했다.

따악! 목검과 목검이 부딪쳤다. 로젤린은 파르딕트의 목검을 자신의 목검으로 밀며 발을 굴렀다. 닿아 있는 접점을 중심으로 빙글 회전한 그녀가 파르딕트의 등을 훌쩍 뛰어넘었다.

서로의 등이 마주한 상태였다. 파르딕트가 등 뒤에 있는 로젤린을 공격하기 위해 오른발을 축으로 돌며 검을 휘둘렀으나, 로젤린은 보이지 않는 등 뒤의 기류를 읽었다. 왼발을 축으로, 파르딕트의 움직임에 거울처럼 반사되듯이 움직인 로젤린이 목검을 뒤로 뻗어 그의 목에 툭 대었다.

대결이 끝났다.

파르딕트가 바닥에 목검을 매섭게 내팽개쳤다.

“약해졌다며!”

“그래도 파르파르보다는 강하지.”

로젤린이 뻐기는 소리에 그는 크윽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후로도 파르딕트와 두 번 더 결투하고, 카일로, 네스터, 레이몬드와 슈텐, 르원 등. 제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검사들과 검을 부딪치며 한껏 약해진 자신의 힘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쳤다.

로젤린은 후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고작 이 정도 움직인 것 가지고 숨이 차다니. 보통의 사람들은 원래 이런 건가?

“파르파르.”

“왜.”

“다들 이렇게 약하게 살고 있었던 거야?”

“…….”

“정말 대단하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악의라고는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었다. 로젤린은 팔을 주물럭거리면서 하, 너무 약한데. 이래서야…… 어쩌고저쩌고 계속 중얼거렸다.

본인의 기준에는 미달이라고 하지만 로젤린은 여전히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최강자의 자리를 지킬 정도로 강했다. 파르딕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재수 없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의 앙탈을 건성으로 넘긴 로젤린은 연무장을 벗어나 아직 겨울에 있는 성을 거닐었다.

낮은 나무의 가지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로젤린은 공연히 그걸 손으로 쓸어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녹아들며, 축축하게 엉겨 붙었다. 후두둑, 하얀 눈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으나, 발이 닿는 모든 곳에서 푸릇하게 자라나는 새싹들은 미처 다 덮지 못했다. 어느새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로젤린의 귓가를 지나갔다. 월장석 성의 어린 시녀들이 참새 떼처럼 모여서 종종 이동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노래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침묵에 잠겨 있던 황성에도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휙,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에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차가운 흰 덩어리가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돌아본 곳에는 월장석 성의 시녀, 미미가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맞으라고 던졌는데.”

“알았어. 다시 해.”

마카롱이 다시 눈을 뭉쳐 로젤린의 얼굴에 퍽 던졌다. 얼마나 옹골차게 뭉쳤던지 온기에 녹아 버릴 눈 덩어리가 제법 매서웠다. 로젤린이 불만스럽게 바라보자 마카롱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까 월장석 애들이랑 눈싸움이라는 걸 했거든.”

시녀들이랑 놀다 온 모양이었다.

“근데 내가 던진 눈에 맞은 애들마다 우는 바람에 쫓겨났어. 나약한 것들 같으니. 야생이었으면 첫 번째로 죽었겠지.”

로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딜 웃고 있어. 너는 두 번째야.”

마카롱도 픽 웃으며 로젤린의 얼굴에 묻어 있는 눈 조각을 털어 줬다. 마카롱은 눈을 찡긋찡긋 감았다 뜨는 로젤린을 코앞에서 응시했다.

“몸은 좀 어때.”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몸은 좀 어때’였다.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질문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그림자 진 얼굴에서 무언가를 예감했다.

전쟁이 끝났다. 한때 모두를 휩쓸어 가 버릴 폭풍처럼 불어 왔던 위험이 사라졌다. 검은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지언정, 검집 안에서 잠자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이제 나에게 그 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겨울은 가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모두가 완연하게 그 따스함을 느끼며 웃고, 떠들고, 행복해했으나 마카롱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무뚝뚝했고, 여전히 시답잖은 시비를 걸고 다니며, 여전히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오로지 마카롱만이 이 공간에서 이질적으로 떠 있었다. 모두에게 전쟁의 종결은 새로운 시작이 되었으나, 마카롱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전쟁에 자신의 목적을 둔 적 없었다. 마카롱이 바라보는 곳은 이 자리보다는 조금 더 멀고, 이보다 더 희미했다. 닿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로젤린은 마카롱을 바라보며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진심을 담아서.

“괜찮아.”

마카롱이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말했다.

“나 이제 괜찮아.”

마카롱이 입가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눈치가 조금 빨라졌네.”

일라베니아 황실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마카롱과 이 공간은 공존할 수 없었다. 보다 뚜렷한 기억을 가진 자로서, 마지막 남은 분노의 파편으로서. 그녀는 단순히 로젤린이라는 동족을 위해 유예를 가졌을 뿐이었다.

“금기를 저지른 동족의 끝을 봐 주겠다 했었지.”

로젤린은 처음 그녀와 만났던 날을 상기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로젤린은 ‘끝’이라는 것이 막연히 죽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새로운 시작은 끝과 맞물려 있었을지도 몰랐다.

마카롱이 자신의 머리에 묶인 리본을 풀어 내렸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마카롱이 활짝 웃었다.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 로젤린의 눈가가 붉게 변하며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카롱의 손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어. 저번의 그 바보보다는 조금 나을지도.”

과거 만났던 동족은 토끼가 되어 사냥꾼에게 잡혀 죽었다고 했다. 지금 그거랑 비교한 거야? 사냥꾼의 고기가 된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처지였어, 나? 로젤린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코를 훌쩍이는 로젤린을 보고 마카롱이 웃었다.

“아니. 제법 괜찮아.”

마카롱이 땅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곧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며 로젤린과 눈을 맞췄다.

“괜찮아 보여.”

마카롱의 말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평화에, 앞으로도 괜찮으리라는 로젤린의 마음에 확신을 더했다. 그녀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로젤린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한참 작은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로젤린은 부디 마카롱이 원하는 곳에 닿기를 바랐다. 그곳이 어디든지. 얼마나 멀든지. 마카롱에게는 아주 긴긴 시간이 있을 테니.

마카롱은 평소와 같이 여기저기 시비 걸면서, 맛있는 걸 많이 먹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떠난 흔적도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긴 여행을 떠날 때 무언가, 옷이나 빗 따위의 사소한 물건이라도 챙기곤 하지 않던가. 그런 빈자리의 흔적이 생겨야 마땅함에도, 마카롱이 떠나기 전과 후의 광경은 조금도 다른 게 없었다. 생각해 보니 마카롱은 자신만의 물건이랄 게 딱히 없었다. 처음부터 떠나기 쉽도록 이별을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편지하라고 했는데, 안 하겠지. 로젤린은 입을 쭉 빼고 툴툴거리다가 서랍을 열었다. 마카롱이 좋아하는 샴페인을 가득 채워 둔 칸이었다.

“어…….”

질서정연하게 줄 맞춰 놓았는데, 병 하나가 빠져 있었다. 마카롱이 가지고 간 것 같았다. 로젤린은 샴페인 한 병을 덜렁 들고 떠나는 마카롱을 상상하고서, 잠시 웃다가 울었다.

로젤린은 부은 눈으로 하루 일과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지나가는 기사 단원들마다 그녀의 퉁퉁 부은 눈을 보고 걱정했고, 카일로는 히죽거리며 로젤린을 놀리다가 한 대 맞았다.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평소보다 더 어수선했다. 로젤린은 다시 출근길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단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별의 슬픔을 곱씹느라 미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한껏 부은 눈을 보고 흠칫했다. 하지만 로젤린이 입을 조가비처럼 딱 다물고 그 의문을 해소시켜 줄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자, 머뭇거리며 말을 마저 이었다.

“음…… 대신전의 기둥이 갑자기 부서졌다는군.”

“…….”

로젤린은 오십 년이 지나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슬픔의 늪에서 단숨에 빠져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신전의 기둥이 부서져?

로젤린의 몸이 눈에 띄게 굳자, 리카르디스가 눈매를 좁게 만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도……?”

“그, 그럴 리가요.”

로젤린은 애써 딴청을 피웠다. 누가 했는지 너무 빤했다. 보아하니 리카르디스도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 개가 무너졌는데 그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기둥들이라서 그런지 붕괴 위험이 있다고 해. 보수하는 도중에 인명 피해가 발생될 우려가 있어서, 철거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나? 꼬장꼬장한 귀족들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리카르디스가 말했다.

“의견을 모았지.”

힘과 권력, 신성력에 정당성까지 지니고 이 땅 위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국왕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시점에 많지 않았다. 분명 신전을 철거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네 집을 철거해 버리고 싶다는 말을 고상하게 바꿔서 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언제였지. 마카롱 경이 대신전을 두 쪽으로 갈라 달라고 했었는데.”

사레가 들린 로젤린이 급하게 기침했다.

“기둥이 부서지지 않았어도 조만간 어떻게든 처리할 예정이었으니, 잘됐지 뭔가.”

“아, 그렇습니까? 정말 잘됐네요. 누가 한 건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일거리를 줄여 준 게 아니겠습니까?”

로젤린이 부은 눈으로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조금만 더 가면 나와요, 로젤린 경.”

로젤린은 헤사가 안내하려는 곳이 대충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최근에 헤사가 기숙사 옆 공터 부지의 땅을 골라서 작은 텃밭을 만드는 걸 본 적 있었다. 며칠 전 씨앗을 사서 심었다는 얘기도 들었던 참이었다. 싹이 나서 자랑하고 싶은 것인가?

그런데 뭔가를 자랑하려는 사람치고는 과하게 비장했다. 용건이 미궁으로 빠질 즈음, 텃밭이 나왔다. 로젤린은 눈을 의심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었는데?

간이 울타리를 쳐 놓은 텃밭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수풀도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허브와 딸기 잎이 엉켜 있는 것이었다. 작게 열매도 맺혀 있었다.

헤사가 풀의 허리쯤을 짚으며 말했다.

“어제까지는 키가 이랬는데요. 오늘은 보시다시피…….”

로젤린은 입을 벌리고 텃밭을 구경했다. 식물의 성장 속도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뭘 길러 본 적이 없으니까, 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전부 싹을 틔우더라고요. 무척 기뻤는데…….”

헤사가 아까의 비장한 얼굴로 텃밭을 보고 있었다. 백 명의 적이 있는 전장에 홀로 돌진하기 전의 표정이었다.

“자라는 것도 정도껏이지, 솔직히 지금은 무서울 정도예요. 내일이면 나무만큼 커서 제 방 창문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요.”

소년이 저주받은 나무에 관한 괴담이 그러했노라 고백했다. 그 수심 어린 얼굴을 보고 로젤린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헤사는 그녀를 따라 살짝 미소 짓고는 허브 몇 장을 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아직 쌀쌀해서 따뜻한 레몬 허브티를 만들려고요.”

헤사가 만든 레몬 허브티는 당도와 산도, 향이 아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로젤린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 중 하나였다. 로젤린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뿌듯해하는 소년이 흙 묻은 손으로 코밑을 슥 훔쳤다.

“내일이면 딸기를 드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감명 깊은 얘기였다. 로젤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박수쳤다. 그게 웃겼는지 헤사가 꺄르륵 하고 뒤로 넘어갔다. 로젤린도 웃으며 소년의 코 밑에 묻은 흙을 닦아 주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장은 헤사의 텃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대륙, 하늘 아래의 모든 영역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열매가 영글었다. 아직까지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축복의 밤을 보았던 모든 이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칭송했다. 의식에 대한 진실이 풀리긴 했으나, 그 진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이 땅에 다시금 생명을 불러일으킨 업적을 퇴색시키진 못했다.

각국의 사절단은 아직 전쟁의 상처가 낫지도 않은 시점에 리쉬에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오늘 저녁에 있을 리카르디스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왕성과 왕성을 둘러싼 거리는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가 만연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과 행복이 가득했다.

몇몇 사람들만 빼고.

“집어치워!”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보게 된 것은 서류를 집어던지며 성질내는 리카르디스였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쨍알 쨍알 시끄러운 노친네들이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어!”

평신관 복장의 누군가가 리카르디스가 집어 던진 종이를 황급히 줍고 있었다.

“비리에 착복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으며 진실을 은폐하기까지 한 기생충들! 목숨 붙여 준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 할 망정 어디서 뚫린 입이라고 하라 마라, 말이 나오나!”

“그, 그게 아니오라, 폐하. 대신관께서는…….”

“권력 남용? 신께서 주신 권력을 함부로 쥐고 흔들 셈이냐고? 정확하다고 전해 줘라. 권력을 쥐고 흔들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그게 내 열 살적부터의 꿈이었지.”

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리카르디스의 커다란 포부를 들은 신관은 모호하고 애매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당장 내 집무실에서 발을 떼지 않으면 권력 남용의 실사례를 몸으로 체감하게 될 터이니.”

“이델라브힘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국왕 폐하!”

신관이 잽싸게 빠져나갔다. 씩씩 성내던 리카르디스는 문가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로젤린을 보고 몸을 굳혔다.

“…….”

두 사람은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나갔다가 들어와.”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말대로 다시 나갔다가 5초 후에 들어갔다. 아까와 달리 그는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흐트러졌던 머리도 어느새 정리되어 있고, 성난 숨도 쏙 들어간 상태였다.

“오늘 날씨가 참 좋군, 로젤린.”

앞서 있었던 일을 모두 잊으라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루 이틀 보는 모습도 아닌데 새삼……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리카르디스가 뾰족하게 물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고 생각했지.”

로젤린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리카르디스가 깍지 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괴로워했다.

“나도 그대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

로젤린의 가슴이 설레어 찌르르 울릴 찰나,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다시 음산해졌다.

“그런데 그것들이 먼저 나를…….”

리카르디스가 울컥 올라온 화를 가다듬었다. 바쁜 일정에 즉위식까지 겹쳐서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실상 바쁜 건 리카르디스뿐 아니라, 리카르디스를 보필하는 모든 하급자들의 운명이었다. 때문에 로젤린도 밀려드는 일에 파묻혀 하루 종일 서류 작업을 하고, 밤을 새우고, 그 와중에 만남을 요청하는 이들과 식사하고, 일을 처리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바빠서 식사도 대충 때운 적이 많았다. 오늘도 테이블 위에 차려진 식사는 서류 작업을 하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종류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로젤린의 표정이 울적하게 변했다.

바깥에서는 하하 호호 웃음과 노래, 음식들이 깔려 있는 축제인데 왜…… 로젤린이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눈물이라도 떨굴 듯 서글픈 표정을 짓자, 리카르디스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가자.”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펜을 집어 던지며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왔다.

“거리 축제가 그렇게 호화롭다지. 즉위식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돌아오면 되겠지.”

로젤린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축제에 가서 이것저것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일탈 그 자체가 설레었다.

물론, 두 사람만의 일탈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쭉 공기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같이 집무실 안에 있던 호위 기사, 푸른등불의 카일로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단에게 그대로 일러바쳤기 때문이었다.

5쿠퍼짜리도 안 되는 입 같으니. 로젤린이 카일로를 노려보았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나단과 잇세리온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후에야 짧은 일탈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하얀밤 기사단원 몇 십 명을 포함해서. 리카르디스는 불만스러워했지만, 일국의 왕이 호위도 없이 거리에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단, 르원, 레이몬드, 파르딕트, 슈텐, 네스터, 클로드, 바스티안,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헤사. 외에도 기사들 중 실력이 좋은 몇몇을 더하여, 평민들의 옷으로 환복한 후에 성을 나섰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 보니, 평민들의 옷을 입고도 너무나도 고상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보였다. 말을 타고 가면서 봐도 귀족이었다. 결국 과거에 썼던 방법이 차용되었다.

“나단 경. 경의 어머니는 그대를 뭐라 부르셨나?”

“다니입니다.”

“…….”

레몬, 파르파르, 루루, 슈슈…… 다니까지. 귀엽고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애칭의 시커먼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도련님은 착잡한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가시지요, 도련님.”

걸걸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정말 아니었는데.”

한숨 쉰 도련님을 중심으로 몇 개의 조가 나누어져 이동했다.

다가오는 봄 축제 날과 리카르디스의 즉위식이 맞물린 거리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로젤린은 그 속에서 놀라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검은색과 은색 머리칼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림자 없는 밤의 축제 때처럼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흔하지 않은 머리 색의 보유자 두 명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계속 거리를 훑었다. 레이몬드가 흐흐 웃으며 옆에서 설명을 붙였다.

“폐하와 로젤린 경의 영향으로 최근 검은색이랑 하얀색 가발이 유행하는 중이잖아. 로즈 네 가발도 정말 예쁘네.”

레몬이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며 로젤린의 망토를 젖혔다. 그녀를 따라 리카르디스도 소심하게 망토를 끌어 내렸다. 그의 남다른 미모에 잠깐 시선이 집중되긴 했으나, 이곳은 축제의 한가운데였다. 모두가 웃고 떠들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이 땅에 축복을 불러온 누군가의 위대한 업적 덕분에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로젤린은 재빠른 동작으로 주위를 훑었다. 고초를 겪으며 황폐해졌던 수도 거리는 수복되기도 전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벽의 균열을 따라서 저렇게 그림을 그리다니! 깨진 유리창 파편에 색을 칠해서 줄에 매달아 조명에 반사되게 하다니!

사람들의 창의력과 어떻게든 축제를 즐기겠다는 집념이 놀라웠다. 어쩌면 평소보다도 볼 게 많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둘러보는 것도 잠시. 로젤린은 거리를 꽉 메운 음식 냄새에 정신을 빼앗겼다.

고기만 있는 대왕 꼬지, 허브 로스트 치킨, 치즈에 꿀을 곁들인 디저트, 돼지고기 스테이크, 따뜻한 스튜, 머랭 쿠키, 눈에 시럽을 뿌린 빙수.

로젤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짜 맞춘 듯이 먹을 걸 볼 때마다 두 개씩 사서 하나는 본인의 입에, 하나는 로젤린에게 건네주었다. 로젤린은 마다하는 법 없이 열심히 받아먹었다.

방긋방긋 웃던 로젤린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헤사는 그것이 맛있음의 한계치를 넘으면 나오는 로젤린의 진짜 반응이란 걸 알고 있었다. 축제 한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냉철하고 싸늘한 걸 보니, 정말 심각하게 맛있는 모양이었다. 헤사도 로젤린을 따라서 대왕 꼬지를 사 먹고 양념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로젤린은 누구의 손이 다가오기에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설탕에 졸인 과일 위로 크림을 끼얹은 것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짧은 행복을 음미했다. 로젤린에게 행복을 선사한 리카르디스는 음식이 다가오면 입부터 벌리고 보는 로젤린의 행동에 착잡해하고 있었다.

아기 새와 동급이로군…….

중얼거리는 소리는 로젤린이 미처 듣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를 호위하던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위험 요소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풀어졌다. 저들끼리 뭘 사 먹거나 기념품을 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한다든지, 축제를 양껏 즐기고 있었다.

로젤린은 자신을 바라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파르딕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파르딕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에, 뒤에서 튀어나온 르원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결국 듣지 못했지만 대충 저기에 맛있는 거 있다, 내지는 어떤 대회가 있으니 같이 참가하자쯤 되겠지 싶었다.

르원이 씩씩대면서 눈치 좀 챙기라고 파르딕트를 혼냈다. 눈치를 챙겨? 무슨 뜻인가 생각하던 로젤린은 곧 깨달았다. 르원이 리카르디스와 자신의 사이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이 정도 눈치는 있지.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리카르디스가 2차로 넣어 주는 딸기 디저트에 아기 새처럼 다시 입을 벌렸다. 한 명은 본인의 기민한 눈치를 자랑스러워하고, 한 명은 착잡해하고 있을 뿐이라 르원의 배려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로젤린은 이것저것을 먹고 다니던 중, 거리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척 봐도 돈깨나 있겠다 싶은 중년 남자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소매치기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의 거리에서 만난 마인 소년이었다. 소년은 그사이 훌쩍 자라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는 짓은 그대로였지만.

그 순간 청년과 로젤린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돈주머니를 쥔 채 굳어 버렸다.

로젤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청년은 꺼냈던 돈주머니를 주인의 품에 잽싸게 넣은 후, 로젤린을 바라보며 두 손을 삭삭 비볐다. 로젤린은 코웃음을 치고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제 앞도 한번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로 딱 와라. 라는 뜻이 전달되었는지 청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가 터덜터덜 천천히 걸어 로젤린의 앞에 섰다. 고개는 푹 숙이고 있는 채였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님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오늘은 사고 안 치기로 했는데…… 아, 결국은 미수에 그쳤으니까 사고는 아닌 건가?”

붉은수레바퀴군, 그 휘하의 마인대에 있는 에렌이었다. 이것저것 많이 받아서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왜 소매치기를? 로젤린의 의문을 읽은 것인지 에렌이 배시시 웃었다.

“허술하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헤헤…… 수도 사람들은 위기감이 좀 떨어지네요.”

뒷골목의 논리에 찌들은 청년의 말에 로젤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마 딱 밤을 맞고 눈물을 줄줄 흘린 에렌은 리카르디스에게 용돈을 받고 신나서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떠났다. 로젤린의 시선이 청년의 뒤를 따라붙었다.

작위를 받기 위해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대가 전원 수도에 오고 있다는 소식은 미리 들었으나, 우연히 만날 줄은 몰랐다. 로젤린은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여기저기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좁은 골목에서 수도의 연약한 건달에게 삥을 뜯다가 치안대에게 걸려서 잡혀 가는 까마귀라든지, 간이 투기장에서 승부 조작하다 걸려서 치안대에게 잡혀 가는 길레드와 원숭이라든지…….

“…….”

리카르디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목도했던 난장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듯했다.

“저건…… 칼릭스 경이 알아서 하겠지.”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느꼈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사고뭉치는 한 명이라 다행이야,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그 뜻으로 쳐다본 게 맞았다. 하지만 전적이 있어서 로젤린도 뭐라 반박하진 못했다.

팡!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뚱하던 로젤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리카르디스의 멱살을 잡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오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주위에서 흐흐 껄껄 웃던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어느새 눈빛을 다르게 하고 로젤린과 리카르디스의 주위를 포위하듯 섰다.

하지만 그들에게 닿은 것은 화살이나 검, 적이나 암살자 따위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얀색 종이와 하얀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여린 잎이 나긋이 내려앉았다.

코끝에 화약 냄새가 희미하게 스쳤다. 아마도 화약을 사용해서 꽃잎을 퍼트리는 장치를 한 모양이었다. 주로 전장에서 사용되는 화약을 축제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중에 터져 나온 하얀 눈송이 같은 것들을 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던 터라,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와아 떠들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예쁘다. 신기하다. 깜짝 놀랐어! 어린아이들이 겅중겅중 뛰며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했다.

굳어 있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사람들의 웃는 소리에 머쓱하게 경계 태세를 풀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좀 바보 같았는지 서로 눈치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정신 차린 로젤린은 자신이 아직까지 리카르디스를 품에 꽉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가 훨씬 큰 리카르디스가 반쯤 구겨져서 자신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뜨는 걸 보니 그도 놀란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똑바로 일어나 반대로 로젤린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두 눈이 마주친 사람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녀가 웃자 리카르디스도 따라 웃었다.

“아, 재밌다. 매일 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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