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틀 동안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굵은 빗줄기는 시야를 흐릿하게 하고 체온을 빼앗아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십 일간 중부 관문 일대를 울리던 금속음이 일시적으로 멎었다.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이 틈을 타서 관문을 보수하고 무기를 점검, 비로 망가질 무기 위에 가죽을 덮어 보호하는 둥 쉴 새 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날이 밝았다. 새벽까지도 흐릿하던 하늘은 아침이 될 무렵 맑게 개어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쏟아 냈다. 리카르디스는 이른 아침에 중부 관문의 방벽 위로 올라섰다. 연합군 진영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싸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작정했나 보군.”
중부 관문을 포위하듯 둘러싼 연합군의 수가 전쟁이 중단된 이틀 사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일반적으로 중부 관문은 일라베니아의 수도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세렘 관문만을 뜻했다. 국경 지대 못지않게 훈련된 병사들이 상주하며, 삼엄하고 까다로운 검문으로 일라베니아를 위협하는 요소를 걸러 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 시에는 세렘 관문에서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는 바르제 방벽까지 통틀어서 중부 관문이라 말하곤 했다. 보통 때에는 커다란 벽에 불과하지만, 파괴한다면 어쨌거나 지나갈 수 있는 문이 생기는 것이었으니.
제국군은 두 개의 ‘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였다. 이따금 투입되는 마인과 ‘파편’, 수적 우위로 찍어 누르려는 연합군의 매서운 공세에도 세렘 관문은 힘겹게나마 버텨 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바르제 방벽이 무너졌다. 지휘관이 재빠르게 대응한 덕에 적을 방벽 뒤로 허용하지는 않았으나, 보수할 틈도 없이 적군이 매일매일 밀려들며, 위기가 지속되었다. 막아 내기 위해서는 병사들이 무너진 벽 바깥으로 나와 기존 바르제 방벽의 역할을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이 가진 수와 힘의 이점을 눌러 주는 수단인 방벽이 사라지니 급격하게 전황이 기울었다. 최근 제국군 측 사상자의 8할이 바르제 방벽에서 발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국군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사자갈기군과 라고슈가 바르제 쪽의 전장에 합류하기로 결정되었다.
무너진 바르제 방벽 앞의 제국군 진영.
아침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 연합군과 제국군은 너른 전장을 두고 대치하는 중이었다. 방벽이 무너진 이후 계속된 사투에 지친 제국군 병사들은 줄지 않는 적군의 수를 보며 질린 표정을 하거나, 겁을 먹은 듯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들조차 마찬가지였다.
그런 중이라 선두에서 말을 탄 채 팔짱을 끼고 육포를 씹는 이의 무심한 태도가 더욱 눈에 띄었다. 사자갈기군의 ‘로즈 경’으로 위장한 로젤린이었다. 그녀는 소속인 사자갈기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장미’라는 이름의 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전장에 나와 있었다.
“대장.”
고개를 돌리자 말 위에 앉아 한쪽 발을 안장에 얹은 불량한 자세의 쥬쥬와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이 품에서 육포를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뭐, 그걸 달라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마카롱이 입으로 육포를 가로채고는 질겅질겅 씹었다.
로젤린의 옆에 강한 여자 마인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는 시점이었다. ‘로즈 경’ 옆에 미미가 있다면 정체를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탄로 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고려한 마카롱이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미미가 안 되면, 쥬쥬로 옆에 있으면 되지!
그렇게 미레이미가 사라졌다. 죽음을 넘어, 동고동락해 온 미미가 사라지자 하얀밤 기사단의 거의 모든 인원이 그녀를 찾아 댔다.
아,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마카롱은 귀찮아 죽을 뻔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대충 변명했다. 미미의 엄마가 미미를 애타게 찾으셔서 가 봤다는, 전장에서 이탈하는 이유치고는 참신하기도, 어이없기도 한 내용이었다.
[엄마가…… 있었어?]
[……엄마도 없을 것 같았나 봐?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으려고.]
쥬쥬는 기가 막혀서 농담같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실상 정답에 가까웠다. 자유분방하고 강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인, 미레이미는 가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는 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은근 실례했다는 걸 깨닫고 그 자리에 없는 미미에게 미안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쥬쥬를 바라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
어디서 한번 본 것 같기는 한데? 라는 말에 쥬쥬는 “걔 오라비요” 하고 대답해서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껄렁껄렁, 불량하고 위아래를 모르는 쥬쥬의 모습은 하얀밤 기사단에게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 남매 맞구나.
그런 이상한 연결 고리로 혈연을 입증한 쥬쥬는 부관으로서 로젤린의 옆에 서게 되었다. 대체로 부관이 맡는 일은 하지 않고, 찾을 때마다 없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부관이긴 했다.
오늘도 내내 보이지 않던 쥬쥬는, 지금 막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육포부터 뜯고 있었다. 그가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무심히 말했다.
“어디서 소리 들리지 않냐.”
“무슨 소리?”
“장미대의 겁쟁이들이 다리를 달달 떠는 소리.”
로젤린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쥬쥬의 말대로 장미대의 병사들이 겁먹은 강아지처럼 눈동자를 굴리며 떨고 있었다. 추위가 아닌, 순수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대장으로서 안심시켜 줘야 하지 않겠어?”
로젤린이 픽 웃었다.
“날 못 미더워 해서,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할걸.”
병사들은 자신이 어떤 군에 소속되는지에 굉장히 민감했다. 어떤 지휘관을 만나느냐에 따라 승리와 패배가, 더 나아가 죽고 사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명의 기사가 오천의 대를 이끄는 지휘관을 맡게 되었다. 무척이나 뛰어난 무장이자 지휘관이다. 라는 짧은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단순히 들은 말로 한 사람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귀족 나으리라 그냥 한자리 꿰찼겠거니 하는 시선들이 만연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하면 믿지도 못해.”
전방의 연합군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 로젤린의 속눈썹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그러니 보여 줘야지.”
미소 지은 로젤린이 투구를 꾹 눌러썼다. 마카롱이 한 손으로 그녀의 삐뚤어진 투구를 똑바로 고쳐 주었다.
제국군. 좌익 만 오천, 중앙 이만 오천, 우익 이만.
연합군. 좌익 삼만 오천, 중앙 사만, 우익 삼만.
장미대가 포함된 제국군의 좌익은 연합군의 우익과 마주 보고 있었다. 만 오천 대 삼만.
전장에서의 수 차이가 얼마나 유의미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기 이전에, 덩치를 불린 적의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끼는 것이 먼저였다. 제국군 병사들의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고요함 속에서 대치하기를 얼마, 연합군 진영에서 한 장수가 말을 탄 채 걸어 나왔다.
“저 개 같은 놈.”
찰진 욕설이 정적을 뚫고 로젤린의 귀에 박혔다. 장미대의 천인 대장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발타나 마람 쪽의 장수들은 대다수가 마인이잖습니까. 일대일로 붙으면 반드시 이길 거라는 걸 아니까, 매일 아침마다 저렇게 승부를 걸어옵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면 겁쟁이라는 둥, 사내가 맞냐는 둥 도발을 해 대서 그것 때문에 전 대장도…….”
과연, 그만한 수의 병력을 이끄는 장이 왜 없나 했더니. 로젤린이 코로 흠 숨을 쉬었다.
“안 나가면 안 되나?”
아르고의 얼굴에 불신이 어렸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우리 대의 대장이어도 괜찮은 건가? 하고 미심쩍어하는 모양새였다.
“조롱을 듣고 감내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거기에다가 만약 해치울 수만 있다면 적의 지휘관을 대군을 뚫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거니까요.”
로젤린을 다시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제국군과 연합군이 대치 중인 한 가운데. 연합군의 장수 한 명이 창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발타의 장군 자릿이 제국의 장수에게 일대일 대결을 신청하오!”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국군 병사들이 술렁이며 동요했다. 일주일째 계속된 일대일 대결로 목숨을 잃은 제국군 측의 기사만 해도 벌써 다섯이었다.
장군 자릿이 다시 소리쳤다.
“이 자릿과 대결할 만한 인물이 일라베니아에는 없는가 보오?”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장미대의 병사들이 욕설을 얹었다. 아, 재수 없어. 속 깊이 우러나온 누군가의 진심에 로젤린이 피식 웃었다. 로젤린은 등자에 발을 걸친 채, 말의 옆구리를 살짝 두드렸다. 군마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 어?”
“대장?”
대장이 왜 나가? 장미대의 병사들이 기겁했다. 대장을 잃은 지 얼마 되었다고, 또!
5일 동안 지휘관 다섯을 잃고 난 후, 제국군 측도 연합군의 도발에 더 이상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장미대가 어수선해졌다. 부관인 쥬쥬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전장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자릿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곧 중앙에 도달한 그녀가 말을 멈춰 세웠다. 전장에 모인 수만의 이목이 단 두 명에게 집중되었다.
“일라베니아 제국, 장미대의 대장 로즈가 자릿 장군의 승부를 받아들이겠다.”
자릿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력을 등한시하는 일라베니아의 특성상 고위 관직을 마인이 맡고 있을 리 없으니, 그냥 평범한 인간일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여자라니. 이전에 죽였던 지휘관들이 한주먹거리라면, 그녀는 반주먹거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릿은 다른 나라에 있는 ‘기사도’ 어쩌고를 떠올리며 한번 선심을 썼다.
“돌아갈 기회를 한번 드리겠소.”
그녀는 재깍 돌아서 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주 조금 분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답 없이 석상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서로 응시하기를 한참, 그녀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박장대소가 아니라 가볍게 코웃음을 친 것이었다.
“나도 장군에게 돌아갈 기회를 한번 주도록 하지.”
아까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자릿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은혜가 원수로 돌아왔군. 부디 후회하지 마시게.”
“쓸데없이 말이 많군.”
추위에 붉게 튼 자릿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두 사람은 말 위에서 무기를 꽉 그러쥔 채 마주 보았다. 로젤린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자릿을 주시했다. 남자의 호흡이 거칠었다. 쉭쉭 숨을 쉬느라 코가 벌렁거렸다. 무기를 쥔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았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목격한 로젤린은 자릿이 움직이는 때를 포착했다.
자릿이 달리는 것과 동시에 로젤린도 움직였다. 백 보, 팔십 보, 오십 보.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남자가 비쳤다. 그가 창을 들어 올렸다. 로젤린은 가상의 선을 그어 창의 궤도를 추측했다.
‘오른쪽 어깨를 꿰뚫겠다?’
로젤린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까 전의 도발 때문에 한 번에 죽이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자릿과 달리 로젤린은 그를 깔끔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잔뜩 주눅이 든 제국군의 사기를 끌어 올릴 만큼,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도발을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흥분한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손쉬운 일은 없으니까.
로젤린은 창을 들어 올렸다.
삼십 보, 열다섯 보, 일곱, 셋, 하나.
쾅!
일대에 굉음이 퍼져 나갔다. 두 장수는 한 번의 충돌 이후로 엇갈린 채,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각자 반대편 진영으로 나아갔다. 양 측의 병사들이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거리가 멀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로젤린은 천천히 방향을 틀어 뒤에 있는 자릿을 보았다. 터벅, 터벅. 군마가 걸어가는 그 작은 흔들림에 자릿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패배한 남자의 추락에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우아아악!”
“미쳤나 봐!”
“멋있어!”
제국군 측에서 비명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연합군은 숨죽인 채 동요했다. 어깨를 노리는 창을 비스듬히 흘린 후, 투구 아래의 목을 찌른 것. 딱 한 합만에 결판이 났다. 일대일 대결을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승부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작게는 몇 분에서 많게는 한 시간 가까이까지 길어지는 경우도 허다한데, 단 한순간에 승패가 갈린 것이다.
로젤린은 방금 전까지 결투를 한 사람답지 않게 덤덤한 모습으로 제국군 진영에 복귀했다. 장미대 병사들이 감격에 겨워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대장!”
“대장! 완전 멋있습니다!”
꺄악 꺄악 소리치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귀여워 로젤린이 슬쩍 웃었다. 연합군 측은 자릿의 시신을 수습하고 동요하고 있는 병사들을 다독였다.
유능하고 강한 장수 한 명이 죽었지만, 수의 차이가 좁혀진 것은 아니었다. 로젤린은 잠시 들떴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 * *
해가 저물었다. 사상자만 수천에 달하는 오늘의 혈전도 마무리되었다.
무시무시한 양의 마력을 운용하는 로젤린, 쥬쥬와 일라베니아인보다 두 배가량 체구가 큰 라고슈 지원군의 힘이 합해진 돌파력은 연합군이라 해도 막아 내기 힘들었다.
제1선, 2선, 예비 보병대까지 돌파한 장미대는 연합군의 본진을 향해 그대로 달려갔다. 그 중앙에 있던 연합군의 지휘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허둥지둥하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단신으로 뚫고 들어온 장미대 대장에 의해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황망히 있는 병사들을 두고 탈출한 로젤린과 장미대는 빙 둘러 아직 교전 중인 연합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정면의 제국군과 치열하게 전투 중이던 연합군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지휘관이 막 살해당한 탓이었다.
장미대는 이후로도 연합군 장수의 목 두엇을 따고, 밀리는 제국군을 지원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혼란한 전장 속에서 어디가 중심인지, 어디가 위기에 처했는지 판별하는 눈은 연합군의 지휘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개인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쟁은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었다. 장미대가 부단히 노력하긴 했으나, 사상자는 비슷하게 발생했다. 같은 수라면 제국군의 피해가 훨씬 큰 셈이었다.
로젤린은 전장에 널브러진, 아직 수습조차 하지 못한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사이사이에 얼굴이 낯익은 시신 몇 구가 있었다. 장미대의 병사였다.
로젤린은 하아 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공간에 그녀의 숨이 하얗게 번져 나갔다. 그녀는 잠시간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둔영지로 돌아갔다. 피에 젖은 땅도 잠드는 시간이 찾아왔다.
중부 세렘 관문. 제국군 진영.
푸른등불 공작을 포함한 제국군의 상급 지휘관들은 인상을 찌푸린 채 테이블 위의 서류를 훑었다. 한참 동안 계속된 침묵을 뚫고 푸른등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음,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그건 연합군이 소극적으로 나온 탓도 있는 것 같군.”
비 때문에 이틀간 전쟁이 중단되었다. 그사이 양측은 내부를 점검하고 여태껏 치러 왔던 전쟁을 분석, 새롭게 전략을 수립했다. 서로 상대편이 어떤 대비책을 준비했는지 모르니만큼, 경계하며 움직임을 살핀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할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휘관들이 더욱 힘을 써야겠네.”
지휘관들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가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었지만, 중부 관문이 곧 무너질 거라며 자포자기한 이들도 많더군. 그건 병사만을 이르는 얘기는 아닐세. 이런 말을 하긴 싫었지만, 지휘관들은 아래 사람들을 잘 단속하시게.”
혹여 연합군 측과 결탁하는 인사가 없는지 감시하라는 뜻이었다.
“사령관님!”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빛모래 남작이 매수되어 연합군을 들이려 했다…… 는데요?”
어미가 이상했다. 했습니다! 도 아니고, 들였습니다! 도 아니고, 들이려 했다는데요?
“뭐? 빛…… 뭔 남작?”
테이블을 쾅 치고 일어난 푸른등불 공작은 버럭 성질부터 낸 후, 빛모래 남작이 어디 소속인지 기억을 뒤졌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신관이 작게 속삭였다.
“쌍둥이 망루의 책임자로군.”
푸른둥불 공작은 신관으로 위장하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휙 하고 바라보았다가 다시 경계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어찌 되었나!”
“다, 다행히 잡았…… 긴 합니다만…… 그게, 잡은 사람이…….”
병사가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모두의 시선이 눈동자의 방향을 따라갔다. 팔짱을 낀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갑자기 주목된 시선에도 태연한 태도였다.
“내 부하들인가?”
병사가 대답 대신 막사 입구의 천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들이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당사자의 얘기를 들어 보지.”
푸른등불 공작이 상황을 대충 정리했다.
곧 여자 용병과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청년이 막사에 발을 들였다. 칼릭스는 제 휘하의 사람들이 일에 엮였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마음속에 작성해 두었던 목록을 떠올려 보았다. 일을 칠 만한 인간들의 이름을 적어 둔 것이었는데, 그 목록에서도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었다.
원숭이 대의 대장과 사고뭉치 에렌이 칼릭스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
이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용케도 저런다 싶었다. 칼릭스는 목소리에 조금 짜증을 담아 병사에게 얘기했다.
“내 부하들을 포박해 놓은 이유를 들어야만 하겠는데?”
살벌해지기 시작한 칼릭스의 표정을 본 병사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가 소란을 듣고 갔을 때는 이미 빛모래 남작과 연합군 병사들이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이쪽의 두 명뿐이었고요. 소속을 확인해 보니 붉은수레바퀴라 하여…….”
“그런데.”
“그런데…… 붉은수레바퀴 측의 병력이 그 시간에 망루에 있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본인들도 입을 열지 않아……”.
칼릭스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알아챘다. 목격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연합군 병사들을 들이고 애꿎은 남작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협조자인지 알 길이 없다는 얘기였다.
만약 이것이 이들이 처음 저지른 사고였다면 칼릭스도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크고 작게 사고 치는 인간들 사이에서 단련된 칼릭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또 명령을 개무시하고 여기저기 몰래 듣고 다녔구나 싶어서 약간 열 받을 뿐이었다.
“내가 순찰을 명했다.”
“백작, 그대가?”
놀란 듯 되묻는 푸른등불 후작의 말에 칼릭스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최근 빛모래 남작을 한번 본 적 있습니다.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의 불안이 단순히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듯하여 주시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아군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여 좋을 것이 없으니, 직접적인 조사 이전에 몰래 붙여 놨던 참입니다. 비밀스러운 임무라 제 수하들이 말을 아낀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제 독단으로 벌인 일이니, 이에 대한 책임은 제가 물겠습니다.”
푸른등불 후작은 잠시 굳어 있다가 칼릭스를 꼭 껴안았다. 하급 지휘관들을 단속하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터진 일이었다. 만약 칼릭스가 아니었다면 일이 나도 아주 크게 났을 것이다.
“대체, 백작은 어디 있다가 지금에서야 내 앞에 나타난 건가?”
“……글쎄요.”
칼릭스는 알 만하다는 듯 웃고 있는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 연극의 전말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사고뭉치 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의 곁에서 오래 고통받은 탓인지 눈치가 아주 비상했다.
원숭이와 에렌도 칼릭스가 대뜸 내뱉는 말에도 당황해하지 않고, 연극의 신빙성을 높이는 순진무구하고 청렴결백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것들.’
칼릭스만 속으로 차오르는 열을 식히느라 바빴다.
사건의 개요를 간략하게 전해 들은 푸른등불 후작이 수색을 명령했다. 병사들은 빛모래 남작의 막사를 갈아엎듯이 뒤졌고, 곧 간이침대의 밑, 땅 아래에 묻힌 금화 주머니를 찾아내었다. 연합군 측이 다른 망루의 책임자들에게도 접선해 오지는 않았는지 확인이 필요한 때였다.
지휘관들이 바삐 막사를 나섰다. 칼릭스도 원숭이, 에렌과 함께 붉은수레바퀴 진영으로 복귀했다.
“길레드!”
분노에 찬 칼릭스의 목소리를 들은 길레드가 자다 말고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길레드는 칼릭스의 양손에 뒷덜미가 잡혀 있는 원숭이와 에렌을 발견하고 절망했다.
“그래도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나 보고 말해!”
칼릭스는 제 막사에 두 사람을 던지듯 집어넣고 의자에 앉았다. 원숭이와 에렌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헤헤 웃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제국군에 도움을 줬으니 이건 괜찮겠지 하는 계산이 깔려 있는 웃음이었다. 칼릭스는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대체 거기에, 왜 있었나.”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에렌이 해맑게 말을 이어 갔다. 칼릭스가 임기응변으로 남작의 수상함을 포착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밤, 둔영지를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남작이 금속음이 나는 커다란 주머니를 옮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빈틈을 타서 그의 막사 안에 침입한 두 사람은 땅에 묻어 둔 주머니를 발견, 속에 있는 것이 금화와 보석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오호라, 전쟁터 한복판에 이런 거금을 몰래 숨겨 두다니.]
[냄새가 나는데요, 누님.]
[그건 그렇고 숨기는 장소에 참신함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심하네요. 제 동생도 다섯 살 이후로는 침대 밑에 안 숨기던데.]
원숭이와 에렌은 몇 개를 슬쩍하고 난 뒤, 다시 주머니를 묻어 두고 남작의 뒤를 밟았다. 그렇게 쫓아다니던 중, 바로 오늘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주머니를 통째로 훔치진 않았군.”
놀랍게도. 라는 말은 뺐다.
“아이참, 우리도 양심이란 게 있어요, 백작님.”
에렌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칼릭스는 양심은 그런데 쓰는 단어가 아니라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에 잠깐 사로잡혔다. 끄덕거리며 에렌의 말에 동조하던 원숭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증거가 필요할 거 아녜요.”
그런 머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왜 죄다 죽여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자칫 잘못하면 너희들이 몰릴 뻔했어.”
“그게, 놈이 제법 신망이 있더라고요. 살아서 입 터는 쪽이 좀 더 위험할 것 같아서.”
남작이 살아 있을 경우, 자신들이 죄를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망루의 책임자가 버젓이 있는데, 뜬금없이 다른 진영에 있는 병사들을 걸고 넘어지는 게 얼마나 황당한 말이겠느냐마는, 애초 마인들은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죄야 벗겨질 것이다. 하지만 결백이 입증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는 불 보듯 빤했다.
칼릭스는 원숭이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화가 식은 듯 보이자 한쪽 구석에 두 사람의 보호자로 서 있던 길레드도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칼릭스는 다리를 떨며 다른 곳을 응시한 채 말했다.
“우선, 이번 일은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해 줘 고맙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군. 하지만 네 입으로 말했다시피, 자칫 잘못하면 너희가 위험할 뻔했어. 차라리 내게 와서 말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바빠 보이셔서.”
“……말해.”
칼릭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원숭이와 에렌, 길레드까지 고개를 급하게 끄덕였다. 칼릭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그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예엡!”
“네!”
“아이고, 그럼요.”
다들 참 해맑았다.
“왜 일라베니아를 위해 싸우기로 마음먹었나?”
사실 진작에 물었어야 할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칼릭스는 일개 평민으로는 가지기 힘든 액수의 돈과 전쟁 후 붉은수레바퀴령에서 마인임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그들은 승낙했다. 마인들이 전장에 와 있는 것도 그 제안의 가치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계약 내에 있는 일뿐만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보 빼돌리기와 기밀 훔쳐 듣기, 수상한 인물과 배반자 제거하기 등, 하나같이 불법적인 느낌이 가득한 일들이었지만. 어쨌거나 노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칼릭스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에 일라베니아에 희생당했다던 강한 마인 가문뿐 아니라, 그 힘이 엮인 모든 이들이 일라베니아의 이름 아래 억압받았다.
이딴 나라 망해 버리라지.
그런 마음을 먹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세 사람은 칼릭스의 질문을 듣고 잠깐 입을 다문 채 고민했다. 눈치 보던 에렌이 가장 먼저 답했다.
“저는…… 아저씨들이랑 누나들이 한다고 그래서요.”
“……그래.”
자라나는 새 나라의 청년이 지나치게 순수해서, 전쟁이 끝나는 대로 교육시켜야 할 것 같았다. 단순명료한 에렌과 달리 원숭이와 길레드는 긴 시간을 고심했다. 그들의 복잡한 심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길레드가 입을 열었다.
“음, 과거의 일과 지속되어 온 핍박으로 대다수의 마인들이 발타나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지요.”
“그렇지.”
“그러면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왜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친지를 두고 떠날 수 없었나?”
“뭐, 사실 이유야 다양하겠죠. 마인이라고 서로의 마음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삶과 생각이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몇 세대 위의 일을 제가 어떻게 짐작하겠습니까? 떠나지 못했을 수도, 떠나지 않았을 수도. 하지만 이따금 현세대의 마인들과 얘기를 해 보면 항상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칼릭스는 길레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누가 도와줬다.”
잠시간 뜸을 들인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숨겨 줬다.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 줬다.”
“…….”
“살려 줬다.”
길레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 그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인을 증오하고 핍박했기에 이러한 기조가 형성된 것이긴 하죠. 하지만, 이따금 도움도 받았다는 겁니다. 저희를 밀어내는 손이 백 명의 것이라면,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별 게 아니라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들은 그 한두 명을 평생 잊지 못해요.”
길레드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래서 저는 이따금, 못 견디게 일라베니아인이 증오스러울 때면 제 손을 잡아 준 사람을 떠올리곤 합니다.”
길레드가 칼릭스와 눈을 맞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면 우리가 일라베니아의 땅에 태어난 것도, 아주 오래전 마인 사냥을 당했던 이들을 숨겨 주고, 도와주고, 살려 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요. 물론 속 편한 자기 위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 허수아비. 참 속 편하게 살았구나.”
원숭이가 감동적인 분위기에 초를 쳤다. 바닥을 뒹굴거리던 그녀가 바로 앉아 옷을 툭툭 털면 말했다.
“저는 뭐, 허수아비같이 심각하게 인류애가 넘치는 부류가 아니긴 하지만 동감하는 부분도 있네요.”
“나두 나두.”
에렌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내 손을 잡아 준 백 명 중 한 명. 저는 딱 그 사람만 챙겨요. 마인들은 은혜와 원수를 두 배로 갚는다는 말 아시죠.”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우리는 결코, 손을 잡아 준 사람을 배신하지 않아요.”
항상 으헤헤 소리를 내며 웃던 사람 같지 않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여기 있어요. 과거의 나를 도와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과 일라베니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백작님을 위해서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칼릭스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았던가?”
“물론 처음부터는 안 잡고 있었죠. 사고 수습하시는 모습이 좀 짠했을 뿐이지.”
칼릭스는 약간 울컥했다. 원숭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아까 전에 우리가 남작 나부랭이 죽였다는 말 듣고 뭐라고 생각하셨어요?”
“또 시작이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진짜 죄송한데, 그거 말고요.”
“손을 좀 과하게 썼지만, 잘했다?”
원숭이가 다시 바닥을 구르며 낄낄 웃었다.
“우리가 막사 안에 들어갔을 때 다른 지휘관들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죠? 다들 우리를 의심하고 있었다고요.”
“그건 몰랐군.”
“내 나이가 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연합군의 세작인지 아닌지 판별할 시간도 정보도 없으면서, 믿으셨잖아요. 말씀드렸죠. 저는, 우리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을 결코 배신하지 않아요.”
원숭이가 씩 웃었다. 에렌과 길레드의 눈이 어둠에 가라앉은 채, 진지하게 칼릭스만을 응시했다. 그건 아주 기묘한 방식의 감정의 전달이었다.
* * *
전쟁이 재개된 후로부터 삼 일이 지났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승리와 패배가 생겨났으나 그것이 중부 관문의 함락이나 연합군의 패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인적, 물적 자원은 빠르게 소모시키며 서로의 몸집을 조금씩 깎아 내는 양상이었다.
연합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반쯤 무너진 바르제 방벽을 둘러싼 공방전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제국군의 끈질긴 방어에는 라고슈 지원군의 합류가 큰 역할을 했다. 단순히 병력 4만이 더해졌다는 것뿐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전사라는 점에서 그들의 전략적 가치는 본래의 수를 훨씬 웃돌았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르제 방벽의 새로운 지휘관이었다.
비가 오기 전과 비가 온 후, 제국군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자란 머릿수를 메우는 뛰어난 전술은 여태껏 까다롭다고 생각한 전 지휘관의 능력을 무색하게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연합군 사령관이 전략을 짜면, 마치 그걸 옆에서 본 듯이 대응했다. 일방적으로 패를 다 까 놓고 하는 카드 게임 같았다.
그 전략 아래 라고슈의 지원군이 기세와 힘으로 전장을 지배했고, 발타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강한 마인 두 명을 필두로 한 좌군의 장미대는 단순한 무력뿐 아니라 전략에 포함되었다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둥. 당최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연합군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장미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 무시무시한 돌파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묘한 움직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 장미대의 대장 로즈가 발타의 장수에게 일대일 결투를 청한다.”
“…….”
매일 아침 벌어지는 결투에서 그녀의 이름이 울려 퍼지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전장의 중앙에 홀로 나온 로즈 경을 보며 연합군 측은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할 때는 좋았는데, 당해 보니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마인들이 지닌 마력의 양은 사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승패는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운용하느냐, 얼만큼이나 단련하고 힘을 길렀느냐에 따라 갈라졌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 마인이 아니었다. 뛰어난 모든 능력치가 빛바래 보일 정도로 범상치 않은 양의 마력을 지닌 자였다.
연합군의 마인들이 일반인을 조금 사나운 강아지쯤으로 여겼다면, 장미대 대장 로즈의 앞에서 마인들은 온순한 토끼쯤 되었다. 싸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약자를 상대로 힘을 자랑하며 낄낄거렸던 건 애초에 연합군이 먼저였다.
“연합군 측에서는 나를 상대할 장수가 없나! 아픈 게 무서울 정도로 연약하면 집 안에나 박혀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추한 꼴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
“제국군의 기사들은 불리한 조건의 승부에도 응하여 명예롭게 결투를 벌였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아, 혹시 명예의 뜻을 모르는 것인가?”
연합군 장수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였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그 비어 버린 머리에 내가 친히 명예가 무엇인지 주입해 줄 테니, 무섭거든 친구 손을 잡고 나와도 좋다.”
몸놀림만큼이나 날래고 치명적인 로즈 경의 도발은 아직까지 호기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장수들을 번번이 결투의 장으로 불러들였다. 뼈아픈 역지사지였다. 제국군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은 매일 아침마다 한 명의 장수를 잃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렇게 바르제 방벽에서 로즈 경이나 장미대가 연합군 장수의 목이든, 작은 승리든 성과를 일궈 내면 그 업적은 중앙의 세렘 관문까지 빠르게 퍼졌다. 무서운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했다는 소식만으로도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연합군 장군 누구의 죽음, 어느 전장에서 연합군의 패배, 제국군 병사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다양한 승리만 얽어 보면 연합군은 곧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 같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전과 같으며 간신히 버텨 내고 있을 뿐이었다.
병력이 충분해서 교대하며 쉴 수 있는 연합군의 형편에 비해, 제국군 병사들은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다치면 다친 대로, 팔이 없으면 팔이 없는 대로 매일 전장에 나서야 했다. 연일 발생하는 사상자가 수습할 수도 없을 만큼 늘어 갔다. 날이 추워 전염병이 돌지 않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서류를 읽다가 휴 한숨을 내쉬었다. 인조 마인 부대와 파편도 본격적으로 투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라니. 아무리 전략을 짜내도 전쟁은 결국 머릿수 싸움이었다. 로젤린은 누구보다 강하지만, 그녀 혼자 수만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심란한 마음에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 곳은 로젤린이 잠들어 있는 그의 침상이었다. 침대 가에 앉은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부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말라붙어 있고, 머리카락에는 재 따위가 엉긴 채였다. 이런 집요한 시선에도 로젤린은 눈을 뜨지 않았다. 무척 지쳐 보였다.
로젤린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전장 속에서 병력을 이끌며, 놀라운 활약으로써 제국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쉼 없이 쌓아 온 업적은 그 어떤 훌륭한 장수라고 한들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로젤린의 행보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하다는 한마디로 넘길 수 없었다.
그는 로젤린이 이 전쟁에서 더 이상 피 흘리지 않기를 바랐다. 일라베니아의 업보로 일어난 전쟁에 일라베니아의 희생자가 나선 꼴이었으니.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에는 이보다 황당한 일이 없었다.
그대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며 만류하려던 참에, 로젤린이 그의 팔에 손을 살며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싸우겠습니다.]
단호하고 진지한 눈동자는 리카르디스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로젤린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서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흩어져 버린 과거와 달리, 로젤린은 지금 검을 들고 죽이는 것이 아닌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자 했다. 그녀의 신념을 단순히 ‘지친 너를 보기 힘들다.’라는 이유로 꺾어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이렇게 지쳐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면, 하지 못한 말을 담아 둔 입이 달싹이며 열리려 했다. 전장에 나가지 마. 오늘 낮에 중앙 돌파하는 작전은 너무 위험했어. 이것 봐,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무리하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그렇게 자꾸만.
로젤린이 눈을 떴다. 그녀가 초점을 맞추듯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로젤린의 눈동자에 비치는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풀리고, 경직되어 있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로젤린.”
“예.”
매일 다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로젤린, 여기서 그만…….
“오늘도 수고 많았어.”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듯 꼭 쥐었다. 로젤린이 배시시 웃었다.
해안을 지키는 고래무덤과 바다협곡 측에서 대어를 낚았다는 소식이 도달하기가 무섭게, 그 대어가 중부 관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 쌓인 중부 관문의 공터. 그곳에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시간이 흘러도 마차의 문은 열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쪽에서 대기하던 리카르디스는 급한 마음에 직접 아래로 내려갔다.
푸른등불 공작과도 친분이 깊어 보이는 고위 신관의 등장에, 마차 주위의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리카르디스가 병사들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께서는 뭘 하고 계십니까?”
도착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미적거리고 올라올 생각을 안 하느냐는 뜻이었다. 병사들이 대답하기 전, 마차 안쪽에서 우렁찬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추하게 침까지 흘리면서 잠든 남자가 보였다. 피부가 거칠고 눈 밑이 퀭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보여 그 추한 모습을 보고도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아주 약간 찡해졌다.
컥, 숨 막힌 돼지 소리를 낸 남자가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와 그의 눈이 딱 마주쳤다. 라헤안시가 눈물을 글썽였다.
“전쟁 끝나면 은퇴할 거야.”
대신관은 종신직이었다.
리비타로 떠났던 대신관 라헤안시가 귀환했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의 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카르디스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상태의 남동생을 억지로 끌고 가서 세수시킨 후 방으로 밀어 넣었다. 라헤안시는 조금 전의 몰골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고아한 태도로 가신들에게 인사한 후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의 이목이 쏠렸을 때 라헤안시의 입이 열렸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통 이런 경우 나쁜 소식이 핵심이고 좋은 소식은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뿐이던데.”
라헤안시가 리카르디스의 눈을 슥 피했다. 대충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시점에서 기대를 버렸다.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좋은 소식은?”
“우선, 거래가 성립되었습니다.”
힉살라에게서 협조를 이끌어 내었다는 좋은 소식을 누를 정도의 나쁜 소식? 불안이 점점 고조되었다.
“……나쁜 소식은.”
“힉살라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협조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애완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열성적으로 수행하고, 고문하겠다, 죽이겠다 협박해 대는 인간과 교섭을 마치고, 죽어 가는 힉살라를 깨워, 원하는 답까지 얻어 내었다. 남은 것은 힉살라의 과가 찍힌 명령서를 들고 왕실 직속 군대와 중부 관문으로 떠나는 일뿐이었다.
그때, 하카브의 오른팔, 재상 아틸라크가 움직였다. 힉살라의 궁에 자주 드나드는 브네학스를 경계하던 그는 은밀한 경로로 힉살라가 깨어났음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힉살라가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발타에 남아 있는 하카브의 병력을 모아서 궁을 장악하려 했다. 하카브와 사전에 얘기를 나눈 듯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발타의 수도 리비타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다. 라헤안시는 무력 충돌이 심화되기 바로 직전에 브네학스의 도움으로 궁전에서 빠져나와, 해상을 통해 일라베니아로 도착할 수 있었다.
“힉살라께서 너무 오래 잠들어 계신 탓인지, 생각보다도 하카브의 세력이 거대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중부 관문으로 오겠다 말은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군요. 발타의 협조가 없는 상황도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헤안시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 어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그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동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말이 늦었구나.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다.”
라헤안시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크게 확률이 높은 계획이 아니었기에, 전략을 짤 때에도 발타의 협조를 배제시켜 놓기는 했었다. 그럼에도 작게 붙잡고 있던 기대마저 놓아 버려야 하니,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해야 하는 일은 명백했다. 미약한 희망을 기다리며 언제나처럼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것뿐이었다.
* * *
로젤린이 바르제 방벽 공방전을 지원한 첫날부터 ‘제국군에 강한 마인 기사가 있다.’는 얘기가 연합군 측에 널리 퍼졌다. 디에즈는 그걸 들은 순간부터 로젤린을 염두에 두었다.
매일매일 ‘강한 마인 기사’에 관한 정보가 덧대어졌다. 압도적인 마력 양, 비교할 수 없는 무력, 비정상적인 활약상. 그 모든 정보가 가리키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살아 있다.
“잠깐 전장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몇 날 며칠 막사 생활만 하던 디에즈가 대뜸 꺼낸 말이었다. 하카브가 ‘왜?’라든지, ‘가서 뭘 하려고’ 같은 질문을 할까 봐 긴장하던 디에즈는 하카브의 대답에 김이 샜다.
“날도 추운데 너무 얇게 입은 건 아닌가?”
하카브가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모피 목도리를 디에즈에게 둘러 주었다. 답답함에 그가 눈살을 찌푸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듭까지 예쁘게 묶었다.
“그쪽이 가장 험하니까, 조심하고.”
중부 관문을 둘러싼 여러 전장 중 어디에 간다 말한 것도 아닌데, 하카브는 디에즈가 가고자 하는 곳을 예상이라도 하는 듯 굴었다. 물론, 정답이긴 했다. 손을 흔들어 주는 하카브를 뒤로 하고, 디에즈는 막사를 나섰다.
무너진 바르제 방벽 앞. 연합군 진영.
디에즈는 연합군 진영에서 저 멀리, 수만과 수만의 군대가 격돌하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숨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마력이 전장을 뒤덮고 있었다.
‘로젤린.’
그녀였다. 디에즈는 인파에 뒤섞여 보이지도 않는 로젤린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어때, 디에즈. 기쁜가?]
로젤린의 생존을 확신했을 즈음 하카브가 디에즈에게 건넨 말이었다. 디에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카브는 알 만하다는 식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디에즈의 분노를 샀다.
디에즈는 오래전 금기를 어긴 대가로 생에 끝점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로젤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신체와 융화되어 가며 점차 나약해지리라. 더 이상은 도망치지도, 숨지도 못한다.
거대한 해일 같았다. 미노가 강의 강물이 몰아치는 양상이 그러했다. 신의 천벌처럼 보이던 그 급류 속에 휘말렸다니. 살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보기는 했으나, 죽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디에즈는 로젤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경계가 아닌, 기대와 가까운 감정이었다.
로젤린을 죽이고자 그녀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었던 그때에 모든 것을 버렸다 생각했는데. 마음은 버린다고 버려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나. 디에즈는 혼자 실소했다.
예상은 했지만, 로젤린은 살아 있었다. 이 살벌할 정도의 짙은 마력이 그녀가 아니라면 그게 더 문제였다. 로젤린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생각과 목적, 감정이 각기 날뛰며 또다시 디에즈를 흔들었다. 슬프고, 원망스럽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고, 기쁘다.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로젤린을 좇고 있었다. 디에즈는 이를 꾹 물고 애써 눈을 돌려 그녀가 아닌 전장을 넓게 바라보았다. 잘리고, 찔리고, 부서지고, 꺾인 시체들이 널브러진 채였다. 간절히 바란 일라베니아의 죽음이 여기에 있었다.
기쁘거나 통쾌하지는 않았다. 성취감 같은 감정과도 달랐다. 그저,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디에즈는 말에 올라타 격전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돌진했다. 마력의 묵직한 압박감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디에즈는 마력을 온몸에 두른 채, 덤벼 오는 제국군 병사들을 베어 내며 전진했다.
얼마나 그렇게 검을 휘둘렀을까. 불어오는 바람이 아래로 처져 있던 깃발들을 휘날리게 했다.
‘장미.’
디에즈는 그중 장미가 그려진 깃발을 찾아냈다.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이 싸우고 있는 어지러운 공간 속, 그 깃발 아래에 있는 어느 기사까지도. 마력의 중심이었다.
디에즈는 돌격해 오는 병사의 목을 맨손으로 꺾으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휙, 옆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디에즈를 세게 강타했다. 디에즈는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거칠게 돌진해 온 것은 물체가 아닌 갑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낙마한 디에즈를 덮치듯 몸에 올라탄 남자가 디에즈의 투구를 벗겨 냈다. 좁았던 시야가 단숨에 넓어졌다.
“오랜만이다?”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사납게 웃고 있었다. 디에즈는 곧 얼굴이 옆으로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얻어맞았다. 입 안쪽이 터지며 피가 흘렀다. 주먹이 아니라 망치로 맞은 듯했다.
남자의 정체는 잘 알고 있었다. 로젤린의 곁을 떠도는 독수리의 다른 형태였다. 사냥 대회 날, 로젤린을 찌른 직후 만나 봤기에 낯이 익었다. 마카롱인가 뭔가 하는 우습지도 않은 이름을 지녔었지.
디에즈가 비죽 웃자 마카롱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으르렁거리던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려던 차, 용감한 발타의 기병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이게 어른이 대화하는데 어딜 끼어들어.”
마카롱이 바닥의 돌을 주워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화살처럼 날아간 뾰족한 돌이 군마의 눈에 박혔다. 발작하듯 날뛰는 군마의 움직임에 버티지 못한 기병이 나가떨어졌다. 안타깝게도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1초 만에 사람 한 명을 죽인 마카롱은 방금 전의 일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용건을 이어 갔다.
“가서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못 보내 주겠네. 우리 애가 좀 심약해야 말이지.”
그 심약한 애는 연합군 장수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디에즈는 입안에 고인 피를 마카롱의 얼굴에 뱉어 내며 단검을 잽싸게 빼 들었다. 무방비한 목으로 향하던 일격은, 마카롱이 디에즈의 손목을 붙잡으며 허무하게 끝났다. 마카롱이 날카로운 단검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하냐.”
디에즈의 손목을 죽 당긴 마카롱이 단검을 그대로 제 목에 박아 넣었다.
“인간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까먹었냐? 설마 내가 이런 걸로 죽겠니, 어휴 모자란 놈.”
목에 칼을 꽂은 채 다정하게 말한 남자가 다시 디에즈의 얼굴에 주먹을 쾅 내리꽂았다. 그의 머리가 바닥에 세게 부딪쳤다.
마카롱은 디에즈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덤벼드는 발타의 병사의 목을 꺾고, 베고, 찌르고, 집어던졌다. 시체들을 방어벽처럼 만든 후, 다시 디에즈에게 돌아온 마카롱이 그의 멱살을 잡고 다시 뺨을 짝 때렸다. 디에즈의 입가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사냥 대회 때, 찔린 로젤린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호전적이고 격정적인 반응이었다.
“여기까지는 내 분풀이.”
마카롱이 제 목에 박혀 있는 단검을 쑥 빼내어, 디에즈의 목에다가 가져다 대었다. 디에즈는 미동 없이 남자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단검이 치켜 올라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디에즈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단검은 목이 아닌, 그의 어깨에 꽂혔다. 차가운 날붙이가 살과 근육을 가르고 깊숙이 박혔다. 디에즈가 이를 악물며 몸서리쳤다.
“이거는 저번에 걔 찌른 값.”
마카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디에즈의 위에서 일어났다. 디에즈가 이를 갈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살려 줄 테니 곱게 꺼져. 애한테 접근하는 모습 보이면 그때는 진짜 뒤진다.”
디에즈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왜, 나를…… 살려 두는 거야. 일라베니아에 붙은 네가, 감히 나를 동정이라도 하는 건가?”
“개소리하지 말자.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이야, 나.”
마카롱은 잠시간 디에즈를 바라보며, 부나방처럼 날아드는 병사 몇을 처리한 다음 대답했다.
“네가 비록, 멍청한 개자식에 앞뒤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머저리라고 해도…….”
욕이 신랄한 걸 보니 악감정은 제대로 쌓여 있는 듯했다.
“봐야 할 게 있으니까.”
“봐야, 한다니?”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
그렇게 말한 마카롱이 디에즈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일 초 전에 살아 있으라고 말하더니, 정작 공격은 내장이 터질 듯이 강력했다. 마카롱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한참을 시체처럼 누워 있던 디에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단검도 뽑아 바닥에 버렸다. 어깨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혼란한 전장 속을 걸었다.
연합군 진영으로 걸어가던 디에즈는 다시금 살벌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기운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파에 파묻혀 로젤린은 보이지 않았다. 대지를 뒤덮어 버린 시체만이 디에즈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고자 하는 것은, 봐야 하는 것은 오직 이뿐이었다. 그 이외에 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연합군, 발타 진영.
“아이고, 디에즈 님! 누가 이랬어요!”
차호트가 디에즈의 얼굴을 붙잡고 끄악 비명 질렀다. 디에즈는 고개를 살짝 트는 것으로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디에즈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의 힘을 믿고 잘 놀다 오라고 말했던 하카브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어깨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얼굴에는 새카만 멍이 들어 있었다. 대체 뭐로 쥐어 터져야 멍이 붉거나 파랗지 않고 저런 색이 되는 걸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 자식입니까?”
하카브가 미묘한 표정으로 차호트의 질문에 대신 답했다.
“그녀의 옆에 붙어 있는 다른 동족인 듯싶은데. 로젤린 경은 디에즈를 이렇게…… 찢어진 천 조각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지 않고 깔끔하게 보내 주려고 할 것 같거든.”
디에즈는 어깨의 피를 지혈하며 말을 돌렸다.
“차호트는 세렘 관문에 있던 게 아닌가요. 왜 이쪽에 왔습니까.”
“아, 내일부터 바르제 방벽 쪽을 지원할 거라서요.”
차호트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디에즈의 멍 위로 살살 문질렀다. 디에즈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디에즈 님께서 전장에 계시는 동안 여기도 일이 많았어요. 식량 창고가 불탔다고 알리는 전령이 도착했거든요. 어쩐지 보급이 늦더라니.”
“……음.”
흔히들, 전쟁은 식량의 싸움이라 말하곤 했다. 보급이 끊기면 수만의 병력이 굶주리게 되며, 이는 당연히 전쟁의 승패로 이어졌다. 디에즈가 미간을 좁혔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대충…….”
멀리서 대화를 듣기만 하던 케틀린이 대답했다.
“한 사 일 정도면 사이좋게 굶어 죽을 수 있어요.”
그녀의 냉소적인 대답에 차호트가 낄낄 웃었다.
“아, 키티 말 너무 재밌게 한다. 쟤가 저렇게 웃겨요.”
도무지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디에즈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매만지기만 했다. 차호트가 다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디에즈의 멍든 피부 위로 살살 펴 바르며 말을 이었다.
“뭐 중부 관문 안쪽에는 식량이 있겠죠. 군량 건이 아니더라도 슬슬 이쪽에 올 예정이었는데 겸사겸사 잘됐네요.”
그녀가 씨익 웃었다.
“디에즈 님의 복수도 할 겸.”
“마음은 고맙지만 접근하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겁니다. 나름 안면 있는 사이라고 봐준 거라서요, 이게.”
“앗차, 맞다. 디에즈 님이 나보다 강했지. 그럼 복수는 빼고 갑시다.”
“……좋은 생각이네요.”
디에즈가 하카브에게 손수건을 받아 들여 차호트가 묻힌 침을 닦아 냈다.
* * *
늦은 시간, 갑작스럽게 회의가 열렸다.
“세렘 관문에 있던 차호트 람가가 바르제 방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피곤한 얼굴의 리카르디스가 푸른등불 후작에게 서류를 받아 들며 읽어 내렸다.
“수는 대략 삼만. 라고슈 지원군이 더해진 이점이, 이로써 완전히 없어졌군.”
리카르디스는 무력으로 득세한 발타의 가문 중 람가를 가장 경계했다.
사르체는 전투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전투광,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 함정을 파 놓고 유인하면 된다. 아문은 발타 왕실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날카로운 검. 이쪽은 융통성이 없어서 예상외의 상황을 만들어 발을 묶을 수 있다.
하지만 람가는 그런 단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힘이 있고, 기술도 있다. 일정한 규칙에 속해 있다가도 자유롭게 움직일 줄 알아 전략의 짜임새를 폭넓게 한다. 물러서도 되는 싸움과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을 안다.
그나마 단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제 흥미가 가지 않으면 나태하게 군다는 점이었다. 하카브의 명령이라 해도 건성으로 일하는 경우가 빈번하단다. 물론 딱 책잡히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지켜서 벌을 받은 적은 손에 꼽는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얻게 된 패배와 실패가 많아, 람가보다 사르체가 강하다 받아들여지고는 했다. 하지만 람가가 마음먹고 나선 전장에서는 언제나 승리의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세렘 관문 공방전에서는 람가의 진가가 나오지 않았겠지만, 백병전이 벌어지는 바르제에서는 무엇보다 위험한 수가 될 터. 병력을 보강하여 장미대를 중심으로 배치를 새롭게 한다.”
말인즉슨 밤샐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람가의 가주가 나선 전투는 몇 되지 않았다. 전술을 어떤 식으로 세워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중, 전령이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 이번만큼은 반가운 일이었다.
“차호트 람가가 바르제 방벽 쪽에 온 이유가 있었군.”
리카르디스가 오랜만에 웃었다. 피곤해하던 지휘관들의 얼굴에도 지금만큼은 화색이 돌았다. 연합군의 보급선에 문제가 생겼다.
그들은 점령한 일라베니아의 성채를 병참 기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발타와 각 나라로부터 오는 식량, 그리고 일라베니아 영토 내에서 수탈한 것들까지 보관하며, 일정한 주기마다 중부 관문으로 보급품을 지원하던 참이었는데…….
그중 가장 거대한 병참 기지가 활활 불타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이것 참.”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턱을 쓸었다.
“이번에도 완달 타탄의 패배인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정말 한번 물면 놓지 않는군. 다들 그녀가 적이 아님을 감사하게 여기게.”
지휘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이 병참 기지를 기습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현 시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룩세인 왕국에서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던 마른가시나무 백작군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병참 기지의 책임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서의 패배로 일시적으로 직위가 강등된 완달 타탄이었다. 그때의 패배에 이어 또 다시 세실에게 당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혹시 몰라서 연합군이 점령한 병참 기지의 정보를 넘겨 뒀을 뿐인데, 역시나 백작이야.”
“…….”
지휘관들이 모호한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았다. 적이 되지 않아서 다행인 건 리카르디스라는 인물에도 해당되는 말인 듯해서.
“이것은 앞으로의 전장에서 호재이자 악재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식량 부족은 전투력의 저하와 무리의 분열을 야기한다. 연합군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중부관문을 넘어서려 더욱 필사적으로 공세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대충은 알겠군. 하지만, 이건…….”
리카르디스는 지도 위, 바르제 방벽 앞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전장보다 가장 많은 나무 조각이 대치하고 있었다.
“……힘들겠어.”
그 한마디에 모두가 앞길의 험난함을 예감했다.
* * *
날이 밝았다. 더욱 불어난 연합군의 병력 사이로 람가 가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로젤린은 오늘도 전투에 앞서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다. 혹여 람가의 가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으나, 로젤린의 원색적인 도발에 걸려든 것은 하급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코코 사르체였다면 누구보다 가장 먼저 뛰쳐나왔겠지. 하지만 람가는 승산 없는 싸움에는 몸을 사릴 줄 아는 부류거든.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어젯밤 리카르디스가 말했던 부분이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좀 아쉬웠다. 하급 지휘관을 처리한 후, 발걸음을 돌려 본대로 귀환하려던 로젤린은 돌연 뒤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에 말고삐를 잡아채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고개만 살짝 틀어 연합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수백 명의 마인이 마력을 쓰기에 공격이라도 감행하나 싶었는데, 별다른 소란 없이 잠잠할 뿐이었다. 뭐지?
로젤린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마력이 거슬려서 걷다가 뒤돌아보는 행위를 반복했다. 본대에 돌아갈 때까지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그녀와 달리, 마카롱은 상황을 파악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마카롱과 가까이 있던 리카르디스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뭐, 오늘 새로운 장수가 여기 왔다고? 걔가 총지휘관이고?”
“그래. 람가의 가주, 차호트다.”
“저거 아주 또라이네.”
마카롱은 눈가를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긴 채 고정했다. 시선은 여전히 연합군 측 진영을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력을 쓰더라고. 한 이백 명 정도가 뭉쳐서.”
“아, 그래서 로즈 경이 저렇게.”
뼈다귀를 어디에 묻어 두고 온 강아지 마냥……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간신히 생략했다.
“이것들이 뭔 개수작하나 싶었는데, 잘 보니까 우리 대장한테 신호를 보내는 거였구만.”
신호?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선전포고?”
“아니.”
마인들은 여전히 마력을 운용한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군대 사이에서 규칙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좌우 대칭의 완만한 곡선, 두 개의 봉우리와 뾰족하게 만나는 하나의 점까지.
“하트.”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씰룩였다. 뭔 소리를 하느냐고 묻고 싶은 듯 보였다. 마카롱은 그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기 전에 마저 말을 이었다.
“마인들로 하트를 그리고 있다고. 우리 대장님의 결투가 마음에 쏙 들었나 봐.”
“…….”
리카르디스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곧 로젤린이 본대로 귀환했다. 람가군의 마인들이 마력을 쓰고 있다며, 왜 저러냐고 투덜거리는 그녀에게 리카르디스는 들은 대로 그 의미를 일러 줬다. 잠깐 다시 뒤를 돌아본 로젤린이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하트 모양이었던 듯했다.
“그런데 왜……?”
로젤린이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다른 어떤 누구도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사이 연합군에서도 오늘 사망한 하급 지휘관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을 끝냈다.
양 측의 군대가 대치한 채 투기를 발산했다. 묘한 점은 마치 입을 맞춘 듯이 각각 좌익, 중앙, 우익군을 두고서 거대한 한 개의 군대가 본대의 뒤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합군 진영에서는 람가군이, 제국군 진영에서는 규모가 늘어난 장미대가 예비대의 역할로 물러나 있었다. 서로 주력부대가 빠진 셈이었다.
여태껏 이 전장에서 활약했던 연합군의 마인들은 본대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움직이며, 제국군의 측면을 기습 공격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 때문에 로젤린의 장미대 또한 좌익군 소속이라는 틀을 벗어나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전투를 치른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미 검증되었고, 막 바르제에 등장한 람가의 마인 군대가 어느 쪽을 향할지 알 수 없으니 따로 빼내어, 그 움직임을 읽은 후 출진할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삼만이나 되는 병력이, 심지어는 최고 지휘관이 지휘하는 군대가 중앙이 아닌 예비 병력으로 빠져 있는 것은 리카르디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뿔피리가 울리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만과 수만의 덩어리가 충돌하자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람가군과 장미대만이 격전지에서 동떨어진 채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람가군의 군마들이 투레질하며 앞발을 들어 올리는 즉시, 장미대도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세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제 정체를 아는 지휘관들을 우선으로 급히 소집했다.
“우리가 한참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야. 연합군 측이 식량 문제로 전전긍긍하여 제국군의 주력부대부터 파훼하려 들 거라 여겼건만.”
그가 하, 숨을 내뱉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람가의 목적은 장미대가 아닌 제국군 그 자체였군.”
로젤린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여태껏 연합군의 장수들은 장미대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제국군의 방어벽을 두텁게 하는 눈에 띄는 요소였으니까. 그래서 람가군 또한 장미대를 처리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고 생각했다.
“람가의 군대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장미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양측의 주력부대가 참전하지 않는 것이지만, 전체적인 머릿수는 저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병사들의 체력 또한 비할 바가 못 돼. 이런 식의 소모전으로는 우리의 한계만 빠르게 드러나겠지.”
장미대라는 무기를 봉쇄한 채, 제국군의 머릿수를 깎아 내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수가 줄어들게 된다면 장미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연합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한번 차고는 지도를 빠르게 살폈다.
“세렘 관문에 지원을 요청한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연합군은 바르제 방벽을 통과하는 방법을 택한 것 같군. 예비 병력을 모두 이쪽으로 돌려야겠다.”
그의 말에 잇세리온이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써 내리고 바깥으로 나섰다. 펄럭이는 천막 밖으로 하늘에 걸려 있는 해가 보였다.
까만 어둠 속에서는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도 힘들뿐더러 상대측의 움직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기습 외에는 큰 효용을 볼 수 없고, 도리어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해가 지면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재정비하여 다음 날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으로써는 밤이 되기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당장 마인 군대의 위협이 사라진 전장에 새롭게 전술을 전달하고 그에 맞춰 대응하도록 명령했다. 람가의 군대를 경계하던 제국군도 조금 더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연합군이 우세했다. 어림잡아 추산한 제국군의 사상자는 어제의 두 배에 달하는 수였다.
드디어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전투를 마무리 짓고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 이게…….”
제국군의 지휘관이 질린 듯 말을 더듬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누구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하늘은 검게 물드는데, 짓눌리며 부서지는 두 무리의 격전은 식을 줄을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호트 람가. 그녀가 제국군의 지휘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밤하늘 아래에서 더욱 거세게 제국군을 도륙했다.
* * *
하카브는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의 전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가 보고 싶군.”
느끼한 말을 내뱉은 남자가 재빨리 말을 이어붙였다.
“오해하지 말아, 디에즈. 리카르디스 황자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얘기야.”
디에즈와 케틀린이 얼굴을 구겼다. 하카브는 두 사람의 반응에도 그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모든 연합군이 중부 관문 앞으로 결집하여 전보다 거세게 공세를 펼치는 중이었으나, 일라베니아는 끈질기게도 버텼다. 종횡무진 전장을 휘젓는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을 필두로 한 제국군은 이따금 예상할 수 없는 전략에 따라 움직이며 이 상황을 버텨 내는 것 이상의 힘을 보이기도 했다.
거센 저항에 연합군의 사기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점차 추워지는 날씨가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량 창고마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털렸다. 그전에도 결코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이제는 마른가시나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렇게 악재가 겹친 상황에 차호트 람가가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식량이 다 떨어지기 전에 중부 관문을 무너트리면 되죠, 뭐.]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못 해서 아직 이러고 있는 거다, 차호트.]
차호트는 펼쳐진 지도 위, 제국군과 연합군을 의미하는 나무 조각을 달각달각 움직였다.
[지금 우리 군의 병력이 이쪽에 많이 집중되어 있잖습니까.]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세렘 관문이었다. 거대하고 두꺼운 관문을 공략하는 전투는 일반적인 전투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전력을 요구했기에, 반 이상의 병력이 세렘 관문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그걸 여기로.]
차호트가 세렘 관문의 병력을 바르제 방벽 앞, 장미대가 있는 전장으로 옮겼다. 다른 곳에 비해 바르제 방벽 측의 전장은 상대적으로 공간이 협소한 편이었다. 많은 수가 있다 해도 한꺼번에 공세는 불가능하고 예비 병력으로 놀게 두는 수밖에 없었던 터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일정한 수준의 수만 유지하고 있었다. 차호트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사실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만 아니면 바르제 방벽은 뚫려도 진즉에 뚫렸을 거잖아요. 그 둘만 발을 묶어 두면 일이 수월해지겠죠.]
[어떻게?]
[제가 다른 전장에 있는 마인 애들까지 전부 모아서 데리고 갈게요. 수가 많을수록 그쪽도 맞춰서 편제할 거고.]
차호트가 나무 조각 몇 개에 서투른 솜씨로 장미 문양을 그려 넣고는 제국군 중앙군 뒤에 놓아두었다.
[내가 마인들을 데리고 있다는 걸 아는 제국군 측에서 어중이떠중이에 머릿수만 믿은 군대를 붙일 리는 없잖아요? 결국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이 나를 견제하려 들 겁니다. 내가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일 거고, 내가 안 움직이면 그들도 못 움직이겠죠. 치열하게 눈치 싸움이나 해 볼까 합니다.]
차호트가 무슨 소리를 하나 가만히 듣던 하카브가 그녀의 의중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모든 마인을 람가의 깃발 아래 소집한다. 그 파괴력 넘치는 군단을 막기 위해 장미대를 포함한 정예병이 꾸려질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람가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장미대와 제국군의 정예병 또한 발이 묶이게 된다.
전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장미대와 라고슈 지원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수로써 찍어 누른다면 이 전쟁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수도 있었다.
[가끔 보면 굉장히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실례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시는 점이 전하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차호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전쟁은 머릿수면 머릿수, 식량이면 식량, 장수면 장수. 상대보다 뛰어난 것으로 찍어 눌러야죠. 지금 연합군이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머릿수 하나 아닙니까.]
그녀는 말하면서도 나무 조각을 계속 바르제 방벽 쪽으로 옮겼다. 하카브도 람가의 문양이 새겨진 나무 조각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장미대가 발이 묶이면 그렇게까지 많은 병사가 필요하진 않을 텐데?]
[필요합니다. 오래 싸울 예정이라.]
[오래?]
차호트의 눈에 타오르는 촛불이 비쳤다. 그녀가 악동처럼 개구 진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차호트가 연합군의 나무 조각 두 개와 제국군의 나무 조각 두 개를 치웠다.
[그 다음 날의 아침과 밤까지.]
그녀가 또다시 양측의 말을 몇 개씩 제거했다. 제국군 측은 장미대와 작은 나무 조각 몇 개밖에 남지 않은 반면, 연합군은 여전히 큰 나무 조각들이 줄지어 있었다.
[잠도 못 자고, 물도 못 마시고, 밥도 못 먹고. 그렇게 몇 시간, 몇 십 시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연합군 또한 피해가 클 테지만, 시간이 촉박한 이상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확실히, 이런 방식으로 전투를 지속한다면 제국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길어도 며칠입니다, 전하. 그 안에 무너트려 보겠습니다.]
하카브는 미소로써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어제 나눴던 얘기가 오늘 실현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카브는 어두워진 전장 너머, 바르제 방벽을 바라보았다. 실종된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그는 아마도 중부 관문, 그것도 장미대가 있는 바르제 방벽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라고슈의 지원군이 합류한 날로부터 갑자기 바뀐 전투 방식은 영리하고도 효율적이었으며, 허를 찌르는 한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여태껏 들어 본 적 없는 마인 기사 ‘로즈 경’이 이름 모를 지휘관의 검이 되어 전장을 휘저었다.
로즈 경이 로젤린이라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하카브는 리카르디스 또한 살아 있으며, 그가 지금 중부 관문의 전투를 지휘하는 책임자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총사령관이 왜 아직까지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리지 않는가?
우두머리의 부재는 무리의 전체적 사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사항이었다. 분명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기에,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의 수를 떠올려도 지금의 전황을 뒤집을 만한 수단은 없었다.
없다, 없는데.
‘리카르디스.’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지 않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반드시 무언가를 준비해 두는. 주도면밀한 리카르디스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말의 경계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로써 끝이었다.
하카브는 차호트 람가의 계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제국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둥그런 달이 어두워진 전장을 비추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야간전에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식으로 밤낮없이 전투를 지속했다간 내일 아침이면 전부 지쳐 검을 들 힘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부우우-
몇 시간 동안 들리지 않던 출진의 뿔피리가 울렸다.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아침과 낮 내내 람가군만을 경계하던 장미대가 움직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돌진하는 기세는 여태껏 터트리지 못했던 투기를 한 번에 발산이라도 하는 듯 자못 사나웠다.
갑작스러운 장미대의 출진에 대다수의 지휘관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차호트 람가가 움직였나 보군.”
로젤린이 이동하는 마인 부대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구름이 많아 달빛마저 희미한 공간 속에 벌어진 난전을 지켜보았다. 찢어지는 괴성들만 무성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횃불이나 이따금 빛을 반사하는 갑옷 정도였다.
장미대와 연합군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인과 거인이 무기를 맞부딪친 듯한 굉음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를 악물었다.
‘로젤린.’
이 어둠 속에서 그녀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함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시각.
돌진한 로젤린은 벌써 장수의 목을 둘 베어 내었다. 발타군의 지휘관들은 대개 마인이었고, 이런 어둠 속에서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지표가 되어 로젤린을 이끌었다. 그녀는 저 멀리에서 기운을 발산하는 인조 마인 군단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차호트 람가 또한 로젤린의 접근을 알아채고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제국군을 학살했다. 직접 부딪치는 상황을 피하고 제국군의 수를 줄이는 것에 주력하려는 속셈이었다. 로젤린은 앞을 가로막는 연합군 병사들을 흉폭하게 베어 넘겼다. 하지만 적이 아무리 쓰러져도, 람가군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적이 너무 많아.’
로젤린은 뒤를 돌아 어둠 속에 위축된 사자갈기군과 라고슈 지원병들을 확인했다. 화살과 날카로운 창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튀어나왔다. 평범한 공격에도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더 이상 파고들 수 없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전멸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후욱,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전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대한 구름이 달을 가렸다. 희미하던 달빛조차 어둠에 잠겨 버렸다.
“딱 좋네.”
로젤린의 바로 옆에 있던 마카롱이 한 말이었다. 로젤린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쥬쥬가 연합군 병사 한 명의 머리를 잡아서 멀리 날려 버리고는 투구를 벗어 던졌다.
“기왕 안 보이는 거 우리도 써먹어야지.”
찰나의 순간에 쥬쥬에게서 짙은 마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형체가 삽시간에 흐물거렸다. 야행성 동물의 눈을 빌리고 있는 로젤린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대충 날뛰고 온다.”
말에서 풀쩍 뛰어내린 마카롱의 모습이 어둠과 인파에 가려졌다. 곧 지상에서부터 무언가가 화살처럼 쏘아지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삐이익, 전장 위로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독수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스칠 정도의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비행하며 군대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장미대와 교전 중인 연합군이었다.
바람 소리에 접근하는 기척을 숨긴 독수리는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형태를 허물어 다른 모습으로 변이했다. 검고 거대한,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진 흑표범이 하늘에서부터 비스듬히 쇄도했다. 연합군의 병사는 코앞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잠시 몸을 굳혔다.
콰직, 무언가가 뜯겨 나갔다.
“으아아악!”
어둠 속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전장에서 들리는 그 어떤 비명보다 고통에 차 있었다. 주위의 병사들이 고개를 휘휘 둘러보았으나, 흑표범은 이미 어둠 속에 녹아든 상태였다. 빛나는 두 눈만이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흑표범은 온몸으로 돌진하고, 물어뜯으며 전열을 흐트러트렸다. 땅에 발돋움한 흑표범이 병사의 방패를 밟고 뛰어오르며 다시 독수리로 화했다. 그것은 크게 날갯짓하며 조금 더 중앙부로 이동했다.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연합군의 한복판에 뚝 떨어졌다. 이번엔 흑표범이 아닌 거대한 곰이었다.
크와아아!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전장을 쩌렁하게 울렸다. 거대한 곰이 앞발을 휘두르자 병사 다섯이 갑옷 채로 찢겨 나가며 절명했다.
“으아악!”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공격당하는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러 댔다. 무작정 도망가는 사람, 사태를 깨닫지 못해 전방의 제국군 병사에게만 집중하는 사람, 혼란의 원인을 처리하기 위해 무리를 거슬러 가는 사람들까지. 일정했던 연합군의 흐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집단이 개인이 되며, 연합군의 치밀했던 대열이 성기게 변모했다.
로젤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뭉쳐 연합군을 돌파했다. 뜨거운 핏방울이 그녀의 투구에 선을 그리듯 튀었다.
* * *
아침 해가 붉게 물든 대지를 비췄다.
로젤린은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백? 이백? 셀 수도 없었다. 적어도 오백 이상은 베어 넘긴 듯했다. 여린 살과 근육을 가르는 감각도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갑옷은 온통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고, 피가 끈적하게 엉겨 붙은 무기는 날카로움을 잃었다.
밤새 분전했으나, 연합군과 제국군의 병력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제국군이 연합군의 부대를 궤멸시켜도 병력을 다시 투입해, 수적 우위를 철저하게 지키며 제국군을 압박했다.
허억, 헉. 장미대의 병사들이 말라붙은 숨소리를 냈다. 호흡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로젤린은 장미대와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던 람가군과 드디어 격돌했다. 하지만 마력이라는 신체 강화 수단을 지닌, 훈련받은 병사들의 집합은 로젤린이 부딪친 그 어떤 적보다도 강력했다.
파편까지 사용하는 마인 군대의 거친 공세에 해치운 적보다 쓰러진 아군이 훨씬 많아졌다. 로젤린은 단신으로 돌파하여 차호트 람가를 잡고자 했으나, 두텁고 견고한 벽은 허물어도 허물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후 장미대의 측면을 연합군이 공격해 왔다. 장미대가 측면의 공격에 고전하는 사이, 람가군은 유유히 자리를 벗어나 또다시 제국군의 약한 부분을 파쇄해 나갔다.
차호트 람가는 현장에서 전략을 곧바로 수정하고 다른 군대와 협공하는 등의 움직임으로 전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장악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 흐름을 끊어 내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차호트 람가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금은 무리야.’
병사들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람가의 군대를 뚫고 차호트 람가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힘도, 수도 부족했다.
바로 그때, 제국군 진영에서부터 뿔피리 소리가 퍼져 나왔다.
부우우-
로젤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오천 정도의 병력이 전장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끌어 모은 최후의 증원군인 듯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의 위로 붉은수레바퀴 기가 펄럭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전장을 급하게 이탈해서 붉은수레바퀴 깃발을 건 무리에 다가갔다. 가장 선두의 기사가 바이저를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로젤린은 그 눈동자를 본 순간 흥분으로 들떠 있던 정신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입니다. 군을 구성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군요. 늦지는 않았을지요.”
“장미대의 로즈입니다. 적절한 때에 오셨습니다.”
주위 사람을 의식하며 딱딱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으나, 칼릭스의 눈만큼은 둥글게 휘어 로젤린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겁나 늦으신 것 같은데.”
마카롱의 타박에 그의 눈이 곧바로 원상 복귀했다.
두 사람은 바닥에 지도를 펼치고 차호트 람가를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다. 훈련된 병사들로 이루어진 람가군의 벽은 견고했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싸운다면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기습 같은 예상외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람가군은 다른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는 중에도 계속해서 장미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습이 통할 리 없으니, 여태껏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붉은수레바퀴군이 그 역할을 맡는 수밖에 없었다.
장미대가 정석적으로 람가군을 상대하는 사이, 붉은수레바퀴군이 람가군의 측면으로 돌격한다. 측면의 방비는 다소 허술하니 그 틈을 뚫고 중앙부의 차호트까지 도달하라는 것이 이번 작전의 표면적인 내용이었다.
붉은수레바퀴군에는 마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리고 전투를 할 수 없는 마인들을 빼고 남은 수는 대략 삼백여 명. 적은 수였지만 지금의 싸움에서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준비가 끝나고, 장미대가 다시 전장으로 돌진했다. 이동하던 람가군이 장미대와 충돌했다. 삼만 대 일만. 수적으로도, 힘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미대의 병사들은 람가군의 주의를 이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했다.
시간이 흐르고, 람가군의 이목이 장미대만을 향했을 때, 붉은수레바퀴군이 람가군의 측면을 쳤다. 차호트 람가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함성과 충돌음에 고개를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깃발을 확인한 그녀가 슬쩍 웃었다.
“붉은수레바퀴라, 아버지의 복수라도 하러 왔나.”
차호트가 휙 휘파람을 불었다.
“딸과 아들의 협공이라니. 이거 악당이 된 기분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차호트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워 버린 것은, 지금 막 돌격해 온 붉은수레바퀴군이었다. 정확히는, 붉은수레바퀴군에서 느껴지는 마인들의 존재.
창처럼 뾰족하게 힘을 응축한 형태로 돌격하는 그들의 행보에, 람가군의 측면이 침입을 허용했다. 차호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를 긁적였다.
“아, 되게 놀랐네.”
뜬금없이 제국군 측에서 마인 집단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마인의 씨가 말랐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라베니아에서.
하지만 그런 당황도 아주 잠시였다. 측면의 병사들이 차호트와 마찬가지로 평정을 되찾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군이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람가군이 그들을 포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차호트가 쯧쯧 혀를 찼다.
‘시도는 좋았지만, 아쉽게 됐어.’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모두가 강한 게 아니었다. 일라베니아의 마인들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평범한 인간들보다 낫다 정도였다. 힘만 세고 기술이 없거나, 마력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몰라 헛되게 소비할 뿐. 그에 비해 발타군의 마인들은 대다수가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은 전사였다.
마인들을 이만큼 모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쉽게 뚫을 수 있을 리가. 차호트가 흐뭇하게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공성전에서 완달 타탄이 괜한 복수심에 불타 인조 마인 부대의 반을 날려 먹지만 않았어도, 사실 전쟁은 쉽게 끝났을 것이다. 차호트는 그 점을 상기할 때마다 입안이 썼지만, 소문의 그 로젤린 경이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으로 기분을 달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것부터 먹어 치우자. 붉은수레바퀴군을 뭉개 버려라.”
부관에게 명령을 내린 차호트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라 예상되는 기사의 전투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놀랍게도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무기를 흘리고 베어 나가는 행위가 마치 손가락을 움직이는 듯이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그건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검을 휘둘러 왔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검 실력도 유전인가.’
차호트는 남부 관문에서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에게 베였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방심한 대가가 흉터로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차호트는 혀로 거친 입술을 한번 핥고는 활을 들었다. 팽팽한 시위에 손가락을 걸어 당기자 활이 부러질 듯 휘었다. 화살촉 너머로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보였다. 차호트가 씩 웃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지.”
활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뒷덜미와 가슴 안쪽을 물들이는 오한이 돌연 차호트를 덮쳐 왔다. 많은 전투를 치러 온 전사로서의 감각이 인지에 앞서 차호트에게 경계를 보내고 있었다.
차호트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앞뒤 양옆. 말 그대로 사방이 다 막혀 있는 이 상황에서 오한이 느껴질 정도의 위험이라니? 설마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왔단 말인가?
사고의 흐름에 따라 차호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아주 느릿하게 흐르는 찰나의 시간 속, 그녀가 밟고 선 땅이 새카맣게 뒤덮이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새?’
차호트는 생각과 동시에 활을 하늘로 겨누었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이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그림자를 드리운 무언가의 정체를 목도한 순간, 그녀의 숨이 일순간 멈췄다. 예상을 까마득하게 벗어난 광경이었다.
위를 스쳐 지나가는 독수리 아래로, 한 사람이 빠르게 낙하하고 있었다. 차호트는 다급히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떨어지는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 사람, 로젤린은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 차호트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위다!”
차호트가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마인들이 차호트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떨어지는 게 먼저였다.
쾅!
굉음과 함께 차호트가 군마를 탄 채 쓰러졌다.
흙먼지가 일었다. 차호트는 엎어진 채 콜록거렸다. 머리가 세게 부딪쳤는지 어지러워 일어설 수 없었다. 흔들거리는 시야에 공격을 막기 위해 내밀었던 검이 산산조각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로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이건, 누구의 피……?
그 생각을 끝맺기가 무섭게 차호트가 왈칵 피를 토해 내었다.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더듬었다가 깨달았다. 갑옷 채로 심장이 꿰뚫려 있었다.
“하, 이…… 이런…….”
차호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땅에 착지한 후 먼지를 툭툭 털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장미대가 미끼. 붉은수레바퀴가 주공 부대라고 생각했건만, 붉은수레바퀴가 미끼역이었던 것이다. 마인들과 측면 돌파를 감행한 붉은수레바퀴군에 주의를 뺏긴 사이, 로젤린이 단신으로 날아와 공격하는 계획이었던 듯했다. 하늘에서 떨어질 적군을 어떻게 예상하라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호트가 입가로 침과 피를 주르륵 흘리며 웃었다.
“……나의, 완패다.”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던 차호트의 숨이 완전히 멎었다. 햇살 아래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빛바래어 흐릿해져 있었다. 가장 강했고, 가장 까다로웠던 적의 죽음이었다.
아군 진영의 한복판에서 지휘관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로젤린에게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로젤린의 압도적인 무력과 마력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신의 사도와 같이 느껴졌다. 기세에 눌린 연합군의 병사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로젤린은 독수리가 던져 주는 장미대의 깃발을 낚아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장미대의 로즈가 차호트 람가를 죽였다!”
그에 호응하듯 전장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장미대의 로즈가 차호트 람가를 죽였다!”
“차호트 람가가 죽었다!”
차호트 람가의 가치는 단순한 장군 한 명, 지휘관 한 명 정도에 그치지 않았던 듯했다. 술렁이던 람가군의 병사들이 이내 눈물을 떨어트렸다. 존경하는 무인이자 주인이었던 이의 허무한 죽음에 그들은 전의를 불태우기보다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로젤린은 죽은 차호트 람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 부근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흘러나온 목걸이에 반지가 걸려 있었다. 로젤린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거칠게 목걸이를 뜯어 내었다. 여기저기 흠집 난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가 손바닥 안에서 도르륵 굴렀다. 로젤린은 그걸 손에 꾹 쥔 후, 품에 곱게 넣었다.
“후…….”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땀을 식혔다.
* * *
우두머리를 잃어버린 람가군은 전만큼의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그들이 싸우는 전장은 물론이고, 람가군의 활약으로 덕을 보던 연합군까지 주춤하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장에 직접 가신다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푸른등불 공작이 기겁하며 만류했다. 리카르디스는 분주히 준비하며 르원에게 갑옷을 가져오라 일렀다.
“정보와 명령을 주고받는 시간이 너무 늦어. 전장에서 바로바로 전략을 수정하고 지시를 내릴 사람이 필요하다. 밤사이 연합군의 공세에 제국군이 찢긴 상태라 이대로는 저녁까지 버티기 힘들어. 차호트 람가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열세인 상황이고, 조만간 하카브가 나서게 되면 그들의 동요 또한 가라 앉을 테니 지금이 아니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다. 그러니 불필요한 입 싸움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리카르디스는 사슬 갑옷을 안에 착용하고 다시 신관 로브를 뒤집어썼다.
“걱정 말게, 공작. 드윗 경도 데리고 갈 거거든. 그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날 지켜 주겠지.”
푸른등불 공작과 같이 리카르디스를 말리기 위해 손을 엉거주춤하게 들어 올렸던 사자갈기의 드윗은 갑작스러운 호명에 놀라 굳었다. 예? 갑자기 저요? 드윗은 뭔가 묻고 싶었지만 푸른등불 공작이 눈에 불을 켜며 쳐다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게!”
“보통 그런 다짐은 당사자가 말해야 하는 부분 아닙니까?”
곧 준비가 끝났다. 리카르디스는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예비 보병대, 군대가 귀환하지 않아 하루 동안 푹 쉰 신관들과 군의관 모두를 이끌고 직접 출진했다. 대외적으로는 사자갈기의 드윗이 이끌게 되는 부대였다.
리카르디스는 밤사이 뿔뿔이 흩어져 연합군 사이에 고립된 아군들을 모아 차츰 전열을 가다듬어 갔다. 리카르디스의 의도를 읽은 장미대가 적절하게 전장을 휘저으며 연합군을 교란했다. 마치 리카르디스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듯 보였다.
작전이 다소 무모한 감이 있다 생각한 사자갈기의 드윗은 로젤린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정리되는 상황에 감탄했다.
“로젤린 경도 대단하군요. 미리 말해 두신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저 멀리서 파괴적으로 돌진하는 장미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로젤린 경과 체스 게임을 많이 했었거든. 그만큼 나에 대해 잘 알기도 하겠지.”
세티스티아가 살아 있을 적, 셋이서 종종 어울리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상념을 털고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연합군의 흐름을 끊어 내기 위해 집중했다.
리카르디스는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침착하게 병사들을 통제하며, 방어에 주력하는 방진을 점점 넓혀 갔다. 병사들로 벽을 친 안쪽에는 신관과 보급 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관문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었다. 지친 병사들은 목을 축이고 배를 채웠다. 밀려드는 부상자에게 신관과 군의관들이 달라붙었다.
수백 명의 부상자가 있는 공간에 리카르디스가 발을 들였다. 그가 숨을 후 쉬고 손을 뻗었다.
‘농도는 옅게. 범위는 넓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치료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당분간 싸울 수 있는 정도로만, 체력을 조금 회복할 수 있는 정도로만 끝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힘을 퍼트렸다.
하얀 안개 같은 빛이 방진 안을 가득 메우는 듯이 퍼져 나갔다. 반딧불이처럼 보이는 작은 빛 덩어리가 그 사이를 춤추듯 돌아다녔다. 빛무리에 휩싸인 병사들의 자잘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친 몸에 활기가 도는 것을 느끼고 입을 벌렸다. 언젠가부터 등장한 고위 신관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수백 명에게 한꺼번에 성력을 쓸 정도였다니.
저쪽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성수를 퍼 나르는 대신관 라헤안시조차도 이 정도의 성력을 가지지는 못 했을 텐데. 차기 대신관 후보인가? 병사들이 술렁였다.
곧 빛무리가 사라졌다. 눈을 뜬 리카르디스가 부상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거무죽죽한 안색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음, 이 정도인가. 고개를 끄덕인 그가 멍청하게 뒤에 서 있는 신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다.”
참 쉬운 일 아니냐는 듯 말한 리카르디스는 다른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총총 자리를 떠났다.
연합군, 발타 진영.
하카브는 막 들어온 소식에 미간을 좁혔다. 디에즈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졌다.
“차호트가, 흠…… 이건 또 예상외인데.”
차호트는 전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장수와 장수가 맞붙는 것이 아닌, 집단과 집단의 격돌이라는 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개인의 명예나 자존심 따위를 내세우며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괜히 덤비는, 코코 사르체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의 상황은 차호트가 코코 사르체처럼 행동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탄생한 람가군의 방어벽은 그 무엇보다도 강했다. 로젤린이 마인들의 벽을 뚫고 차호트에게 접근할 방법은 없었다. 차호트가 로젤린에게 일대일로 붙어 보자며 덤비지 않는 이상에야.
전령이 사건의 전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것이…… 장미대의 대장이 하늘을 날아서, 가주를 덮쳤다고 합니다.”
하카브와 디에즈는 비슷한 표정을 했다.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늘을 날았다고.”
“독수리의 발을 잡고 날아, 가주님 위로 도달하여 떨어지면서…….”
디에즈가 손을 들어 올려 병사의 말을 중단했다. 갑옷을 착용한, 단련된 기사의 무게는 100kg을 상회했다. 그런 사람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괴물 같은 독수리라고는 디에즈가 아는 내에서 딱 하나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디에즈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한참 뒤에 말을 내뱉었다.
“이건 차호트가 운이 나빴군요. 상대가 너무 안 좋았어요.”
차호트 람가는 발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장이었다. 전장을 보는 눈도 있고 부하들의 신임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여러 상황을 가정하여 대비했겠지만, 차호트로서도 로젤린이 독수리의 힘을 빌려 하늘에서 날아올 거라는 상상을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히 운이 나빴다는 말 외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녀의 불운함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것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야. 전체적인 전황은 여전히 연합군이 우세하다. 흔들리는 것들을 바로 잡아야겠어. 기껏 차호트가 제국군의 병력을 그만큼 깎아 놨는데, 오늘 안에 중부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면 미안하지.”
“어떻게 하시려고요?”
“람가군과 연합군을 한 번에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달리 있겠나.”
하카브가 웃고는 병사에게 준비를 하라 일렀다. 뒤돌아선 그가 디에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겠느냐는 물음에, 디에즈는 하카브의 손을 잡는 대신 무기를 점검했다.
어제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그날의 밤과 오늘의 새벽을 지나, 해가 저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장장 삼십여 시간 동안 벌어진 격전은 양측의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듯 몰아쳤다.
계속해서 새로운 전력을 투입하는 연합군과 달리 제국군은 한정된 병력 내에서 긴 시간을 버텨 내야만 했고, 아침 해가 뜰 무렵 한계가 드러났다. 힘겹게 전투를 치르던 제국군의 한 축이 무너지며 전황이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호트 람가가 장미대 대장 로즈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 퍼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연합군은 혼란에 휩싸였고, 제국군은 그 틈을 타서 신관과 치료사들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보조했다. 로젤린의 시기적절한 활약과 리카르디스의 빠른 판단 덕분에 제국군은 이 전투를 더 이어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눈에 띄게 전투력을 상실했던 연합군도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하카브를 바르제 방벽 전장의 지휘관으로 맞이하며 반격에 나섰다. 반드시 오늘 안에 중부 관문을 넘어서고야 말겠다는 듯, 아주 매섭게.
촤악, 검날이 목을 베어 갈랐다. 터져 나온 피가 투구 안쪽까지 침범했다. 칼릭스는 붉은색으로 흐려진 시야를 걷어 내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 잠깐 멈칫한 사이 마인 병사 한 명이 칼릭스의 사각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나마 반응했으나, 적은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쾅!
충돌음이 한차례 주위를 휩쓸었다. 마지막까지 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던 칼릭스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병사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어금니대의 대장이 달려와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이었다. 연합군의 병사가 마차에 치인 듯 어딘가로 날아가 박히자 붉은수레바퀴군의 마인들이 칼릭스를 감싸듯 보호했다.
“내 금덩어리!”
“백작님 죽으면 우리 계약서도 죽는 거야!”
아직 농담할 힘이 남아 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투구를 벗은 칼릭스는 눈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인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에 비해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다른 제국군보다 뒤늦게 전장에 투입되었지만, 다른 그 어떤 곳보다도 험난하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전장의 최전방에서 수 시간 전투를 치른 탓이었다.
칼릭스와 칼릭스의 마인대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슬슬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넘어지고, 무기를 놓치고, 평소 같으면 손쉽게 막아 냈을 일격에 피해를 입는 둥.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원초적인 행동조차도 버거워했다. 그야말로 정신력과 고집 하나로 버텨 내고 있는 시점이었다.
칼릭스는 자신을 감싸듯 포진해 있는 마인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춘 것을 알아챘다. 어딘가로 향하는 그들의 시선이 칼릭스의 눈길을 이끌었다. 연합군 측의 인조 마인 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적군 사이에서 단 한 명의 병사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로를 짓뭉개는 전장 속, 한 연합군의 병사만이 멀거니 서 있었다. 그는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덜덜 몸을 떨던 남자는 제 몸을 감싸 안으려는 듯 옹송그렸다. 곧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귀를 날카롭게 스치는 비명이 인간의 본능을 건드렸다.
이건…… 위험하다.
칼릭스는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른 인조 마인 병사가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얼굴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온 얼굴의 피부를 찢어 버릴 듯 강하게 문지르던 남자가 성급하고 서투른 손놀림으로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목과 얼굴의 피부 위로는 굵은 혈관이 올라와 불룩거리며 움직이고,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는 피와 눈물이 섞여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아프지도 않은지 벌어진 살갗 위로 손톱을 세워 몇 번씩이나 목을 긁어 댔다. 그가 침을 주르륵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그즈음 칼릭스의 마인대가 한 발짝씩 물러났다.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행동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그들을 한번 살핀 후, 다시금 아까의 병사를 바라보았다. 잠깐 눈길을 뗀 사이, 남자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드득, 까드득. 뼈가 자라고, 근육이 팽창하며 찌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체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눈에 띌 정도의 기괴한 변화에 그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병사는 일 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완전히 변이했다. 흰자위는 완전히 붉게 되었고, 이마의 한쪽 뼈가 뿔처럼 튀어나왔다.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송곳니가 길게 자라 그 사이로 침을 줄줄 흘려 댔다.
소란스러웠던 전장이 마치 멈춘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기괴한 생명체는 성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잠자는 맹수가 깨어날까 두려운 사람들처럼.
철걱.
정적을 뚫는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제국군 병사가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진 병장기를 걷어차고 만 것이었다. ‘그것’의 근육이 갑작스러운 금속음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크아아아!
그때부터 멈췄던 전장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이 괴이하게 울부짖으며 팔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에 제국군 병사들이 가리가리 찢겨 날아갔다. 기괴한 모습의 외형과 갑옷을 입은 사람을 두 동강 내 버리는 믿을 수 없는 힘에서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변이한 ‘그것’의 정의를 내렸다.
“마, 마수다…….”
대치 중이었던 제국군의 병사들은, 그것의 손톱에 아군이 가리가리 찢겨 나가자 모든 투지를 상실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도망가야겠다는 본능뿐이었다.
“으아악!”
“괴, 괴물이야!”
뒤돌아선 제국군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짓밟혔다. 통째로 머리를 뜯어내어 씹어 버리고, 몸으로 깔아뭉개며 들이받고, 팔다리를 잡아 뜯어 버리는 그것의 방식은 연합군 측의 병사들조차 겁을 먹을 정도였다.
칼릭스는 혼란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주위의 마인들은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있었다. 칼릭스는 저 괴물의 문제가 단순한 외형이 아닌, 그를 변화시킨 마력 자체라 직감했다. 마인들의 눈에는 대체 저것이 무엇으로 보이는 것일까.
인조 마인의 마력을 마주한 몇몇 마인들이 말했었다. 마수와 같은 종류의 힘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터져 나갈 듯 날뛴다고.
[마수의 몸속에 있는 걸 인간한테 이식했다고요?]
토 나오는데요. 어금니대의 대장이 정말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윤리적으로?]
[그것도 그건데…… 뭔가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도 마수는 몇 번 본 적 있어서 아는데요, 그게 막 함부로 인간 몸에 쑤셔 넣고 할 만한 게 못 되는 것 같아서요.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에요. 아니 그걸 어떻게 인간한테 집어넣을 생각을 했지? 삶이 지루하대요? 색다르고 짜릿한 걸 원한 겁니까?]
[난들 아나.]
[참나, 발타 놈들도 제정신 아닌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어금니는 마수들의 불길한 마력을 반추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걸? 그 무서운 걸 어떻게…… 그의 혼잣말은 칼릭스는 감지할 수 없는 마수의 마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줬다.
어떻게, 그걸.
어금니의 예상대로, 마수의 힘은 일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던 듯했다.
‘이것도 하카브의 계산에 들어가 있었나?’
그에 대한 답은 곧바로 얻을 수 있었다. 마수의 주위, 몇 분 전까지 동료였던 인조 마인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칼릭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 밖의 상황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왜 지금…….’
상황을 되짚어 보던 칼릭스는 왜 병사가 저런 불운을 맞이해야만 했는지 깨달았다.
이틀간의 전투가 그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마수의 힘이 장기간 전투에 지친 육체와 정신력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순간 오한이 칼릭스를 덮쳤다.
수백이 넘는 인조 마인들. 이들이 전부 불이 붙지 않은 폭발물이었다. 이는 어떻게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모두-!”
퇴각 명령을 내리려던 칼릭스는 인간들을 뭉개며 전진하는 마수의 앞에 덜덜 떨며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사고뭉치 에렌이었다. 전쟁터에 발을 들이기는 너무 이르다 생각해 떼어 놓고 왔건만, 몰래 숨어 온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에렌!”
에렌은 굳어만 있었다. 아예 소리를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도망치는 병사들을 거스른 칼릭스는 마수가 에렌을 짓뭉개기 전에 당도했다.
후욱, 피비린내와 역한 냄새가 섞인 뜨거운 숨결이 불어왔다.
마수는 바로 코앞에 있었다. 칼릭스는 에렌을 밀쳐 내며 검을 들어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시야를 가득 메운 거대한 마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칼릭스는 직감했다.
‘안 돼.’
어떤 방법을 써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마수가 크게 팔을 휘둘렀다. 칼릭스는 몸을 숙여 공격을 피했다. 마수의 발아래에 활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칼릭스는 날 듯이 앞으로 구르며 활을 집었다.
마수가 사라진 목표물을 찾는 것 보다, 그 시야 한참 아래에서 칼릭스가 자세를 잡는 게 먼저였다. 화살을 시위에 건 칼릭스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괴물의 얼굴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 화살이 마수의 눈에 박혔다.
“크아아악!”
마수가 고통스러워하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화살을 쏘자마자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칼릭스는 마수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창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움직임이 단순해졌군.’
칼릭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며 창 하나를 던졌다. 일부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방패에 맞췄던 터라 소리가 크게 났다. 마수의 주의가 그곳으로 향했다.
칼릭스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들어가며 마수의 심장에 창을 박아 넣었다. 두터운 근육을 뚫고 심장까지 닿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꿰뚫린 심장은 상처가 난 즉시 몸 안을 거칠게 도는 마력에 의해 수복되기 시작했다.
창을 비틀어 확실하게 타격을 주려 했던 칼릭스는 다시금 발악하듯 팔을 휘두른 마수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칼릭스가 나가떨어졌다.
“커억!”
바닥을 구른 칼릭스는 속이 뒤집어지는 통증에 일어서지 못했다.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이 정도라니. 물소가 들이받은 것만 같았다. 칼릭스는 잠시간 숨을 쉬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피와 침이 섞여 그의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흔들리고 부예진 시야로 심장에 창을 꽂은 마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음에도 칼릭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끝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곧 누군가의 발이 칼릭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갑옷이나 부츠 따위가 아닌, 맨발이었다.
칼릭스는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바지만 걸친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보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독수리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마카롱이었다.
“마, 마카롱 님…….”
칼릭스가 헐떡이며 그를 불렀다. 마카롱은 흘끗 칼릭스를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마수를 마주했다.
칼릭스는 역광으로 그림자가 드리운 남자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은 분노를 곱씹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눈물을 간신히 참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어 움직였다.
“……그 쓰레기 같은 것들이, 감히…….”
끓다 못해 녹아 버린 분노가 얽혀 있는 목소리였다.
마카롱은 눈앞의 괴물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분노는 인조 마인들을 만들어 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마카롱의 팔에 핏줄이 올라오더니 손톱이 날카로워졌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달려들었던 괴물의 최후는 허무할 정도였다. 마카롱이 괴물의 어깨에 손을 쑤셔 넣자마자 그 큰 몸이 털썩 쓰러졌다. 심장에 창을 박고도 날뛰었던, 그것이.
마카롱의 손에는 검붉은 결정이 들려 있었다. 피로 젖은 보석은 석양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인조 마인의 근원인 마수의 결정이었다.
마카롱이 피가 묻은 손으로 제 얼굴을 닦아 냈다. 속눈썹에 고인 핏방울이 투두둑 흘러내렸다. 눈에서 볼을 지나, 턱으로. 마카롱의 얼굴에 붉은 궤적을 남긴 피가 눈물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쯤에는 원숭이가 달려와 에렌의 등짝을 때리고, 어금니와 까마귀대의 대장이 다가와 칼릭스를 부축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마카롱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칼릭스도 그를 부르지 못했다.
* * *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아까 전의 일이 우연이 아니라는 듯, 인조 마인들 중 폭주하는 인원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급격한 변이를 버티지 못한 인조 마인들의 기괴한 형태와 그보다 더 놀라운 무력에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급급했다. 힘을 합쳐 그것들을 죽여 보고자 한 시도도 있었지만, 생명을 깎아 가며 타오르는 힘 앞에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으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에 디에즈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감각과 차가운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갑작스럽게 마수의 기운이 증폭하더니, 기묘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의 결정을 버텨 내지 못하는 실패작들의 모습이었다. 몸을 지배하려는 마수의 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정예병들만 모은 군대였건만, 그들조차 실패작이었단 말인가?
디에즈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하카브는 인조 마인들이 완전히 변이하기 전에 제국군의 중앙으로 몰아넣었다. 연합군에 피해가 오기 전에 먼저 패를 버린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제국군 사이에서 위기에 몰린 인조 마인들이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디에즈의 예민한 감각에 전장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마수의 마력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른 들판에 불이 옮겨붙는 듯한 빠른 속도였다.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조 마인들은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울부짖었다. 위협적인 모습의 일면에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몸을 뒤틀고, 눈물을 흘리며, 제국군을 찢어발겼다.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일라베니아로 나아가는 변이자들에게는 아주 뚜렷한 목적이 있는 듯 보였다.
디에즈는 그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의 몸 안쪽에서 사납게 요동치는 감정이 마력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롭다. 고통스러워, 온몸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아. 반드시, 너희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너른 하늘 아래의 전장을 메운 감정이라고는 오직 그뿐이었다. 그 분노가 디에즈가 가지고 있는,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일깨웠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목적. 우리가 바라는 것.
디에즈는 거친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겼다. 그는 과거의 파편들과 함께 인간들을 짓밟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디에즈는 날아오는 무기를 건틀렛으로 쳐 내고, 맨손으로 병사의 목을 잡아 뜯었다. 눈알에 피가 튀어도 눈 깜짝하지 않았다. 중부 관문과 그 너머를 향하는 집요한 시선에는 똘똘 뭉친 집념이 느껴졌다.
무너져, 무너져라.
쿵, 쿵. 거인들의 진군이 땅을 흔들었다. 디에즈는 다시금 누군가의 목에 검을 꽂아 넣으며 한걸음 더 앞으로 걸었다. 이제는 무너져라. 끝없이 속으로 그 말을 되뇌며.
무서운 맹공격이 이어졌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죽음조차 불사하는 발타의 병사들은 괴이한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변이자들 때문에 혼란에 잠긴 제국군에게 영리한 타격을 가하며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차츰 밀리고 밀려, 이내 바르제 방벽 바로 앞까지 밀려났다. 경계 없이 잘게 흩어져 뒤섞인 두 세력은 별다른 전략도 없이 개싸움을 벌였다.
허억, 헉.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듯 선명하고 크게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힘겹게 연합군의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앞으로 넘어질 뻔한 그녀를 에버하르트가 겨우 지탱했다.
괴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의 병사들은 장시간의 전투를 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제국군을 밀어붙였다.
하늘 끝까지 오른 사기는 감히 그 누구도 꺾지 못할 만큼 견고해 보였다. 제국군도 그런 그들을 힘겹게 막아 내고는 있으나, 해치운 적보다도 덤벼드는 적의 수가 훨씬 많았다. 모래성 위로 거대한 파도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다.
레티시아는 바싹 말라 거칠어진 입술을 혀로 훑었다.
‘목말라.’
그녀는 달려드는 병사의 검을 쳐 내며 멍하니 생각했다.
‘쉬고 싶어.’
허억, 숨을 크게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목구멍 안쪽에 쩍쩍 달라붙었다. 감각이 하나씩 무뎌졌다. 코를 찌르던 역겨운 피 냄새가 사라졌다. 여기저기 찔리고 베인 상처들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눈으로 전장을 보면서도 이것이 무슨 광경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이게 뭘까. 대체.’
레티시아는 무뎌진 상념 아래 또 병사 한 명을 베어 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또 한 명.
‘뭘 위해서, 우리는…….’
한계에 몰린 정신이 발목을 붙들려 했지만, 숨을 쉬는 것처럼 훈련해 왔던 지난날의 본능이 레티시아의 몸을 이끌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 살짝 고개를 틀어 피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내 공격을 예측하고, 막아 내고, 죽이고, 피하고, 죽였다.
삐걱거리는 몸은 꿈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주저앉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 고통이 지속되는 걸까. 레티시아의 몸이 휘청였다. 무릎이 꺾였다.
[레티시아.]
이 전쟁통에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여자의 목소리가 레티시아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곧…….]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레티시아가 다리에 힘을 주고 쓰러지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덜그럭. 금속음이 가까이서 나기에 바라보니, 발 위로 검이 떨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찰나 떨어트린 것이었다. 주울 힘조차 없었다. 레티시아는 비틀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쓰고 달려드는 살육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상대를 찢어발길 듯한 사나운 악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눈앞에 있는 적들이 아닌, 사각에서 오는 본능의 경고를 감지했다. 날카롭게 회전하는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자신을 향하지 않았으나, 옆에는…….
지쳐 있던 레티시아는 한쪽 발로 땅을 디디며 몸을 회전시켰다. 빠르게 손을 뻗는 것은 그녀가 소리를 감지한 그 순간 이뤄진 일이었다.
캉!
에버하르트를 향해 날아가던 도끼의 궤적에, 레티시아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며 높은 소리를 울렸다.
“레티시아!”
에버하르트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레티시아는 흐릿한 감각을 난폭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작은 도끼가 건틀렛을 뚫고 살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레티시아는 덜덜 떨었다. 이보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적은 있지만, 이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좁은 혈관과 신경을 가시 줄기가 파헤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헐떡거리며 헛구역질했다.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반응에서 이것이 단순한 부상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가 급하게 그녀의 건틀렛을 벗겨 냈다. 피부 바로 아래 혈관들이 튀어나올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파편’이었다.
“누가……!”
에버하르트는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쇠와 독이 날아다니는, 그저 살의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레티시아를 치료할 만한 그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에버하르트는 쓰러진 레티시아를 질질 끌고 가며 후퇴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검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사람 같지 않은 괴력이었다.
“허, 윽…….”
핏줄이 터진 레티시아의 눈이 붉게 변했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한계를 넘은 고통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짐처럼 끌려가던 레티시아는 주위에서 픽픽 쓰러지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도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에 비친 광경을 멍하니 되새길 뿐이었다.
‘…….’
그러고 보니 이렇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레티시아는 멍한 머리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차호트 람가가 죽은 후, 해가 질 무렵이었다. 로젤린은 장미대를 이끌 권한을 다른 지휘관에게 넘기고 전장을 떠나려 했다.
그때, 돌아선 로젤린이 하늘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그녀가 뭐라고 말했더라?
[곧…….]
로젤린의 입이 움직였다.
[밤이 온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붉은 석양빛은 사라지고 밤의 장막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놋쇠저울과 소금바위, 마른가시나무, 발타와 동부 전선, 붉은수레바퀴령까지의 길고 험난한 여정과 모래성 같은 중부 관문을 지키며 필사적으로 버텨 낸 2주의 시간. 그 간절한 기다림의 끝이 찾아왔다.
별이 빛나는 까만 밤하늘이 레티시아의 눈동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훅, 바람이 불었다. 무너진 방벽 위의 깃발을 흩날리게 하고, 에버하르트의 눈물을 얼어붙게 만들며, 땅에 닿아 있는 레티시아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이 일대 모두를 휩쓸 듯 몰아치는 거대한 돌풍이었다.
밤바다를 표류하는 배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던 구름이 떠밀렸다. 어두웠던 땅 아래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하얀 보름달에서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과 함께, 조용한 변화가 피어올랐다.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던 디에즈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거대한 고요가, 노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선명하고 생생했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깊은 바다였고, 태고의 숲이었으며, 수억 개의 별이 흐르는 강을 품은 밤하늘이었다. 모든 것을 잠기게 하는 거대한 생명의 힘. 디에즈는 이 힘을 느껴 본 적 있었다.
“……로젤린.”
디에즈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수백 년 전, 세상의 법칙을 순식간에 뒤틀며 새로운 종을 탄생시켰던, 어린 왕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그 힘은 그때처럼 다시금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때처럼 고통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전장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디에즈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떨어트린 채,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라베니아를 향하던 과거의 분노가 로젤린의 힘에 이끌리듯 변화하고 있었다. 수백 년의 원념, 마수의 결정은 어떤 보석보다 단단했고,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었다. 디에즈는 최소한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디에즈의 눈앞에 있던 변이자 한 명이 갑작스럽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털썩, 육중한 무언가가 땅에 충돌하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났다. 변이자들이 기절하듯 쓰러졌다.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흘러내린 그것은 이내 땅으로 녹아내렸다. 바람에 섞여 불어오며, 치달았다. 달빛 아래 찬란히 비산했다.
오로지 마력을 가진 이들만이 느낄 수 있었다. 눈이 시큰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 감각의 세계에 그려졌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에는, 일라베니아를 향하던 과거의 원념들이 모두 녹아, 멈춰 쓰러져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디에즈의 손이 잘게 떨렸다. 우리가 바라던 결말은 이게 아니지 않았나? 일라베니아는? 일라베니아의 죽음은…….
디에즈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종래에 그의 시선은 전장이 아닌 제 발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피 묻은 자신의 검이 있었다. 한 번 떨어트렸지만,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손이 닿는 그곳에 여전히 있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디에즈는 허리를 숙여 검을 집었다. 꽝꽝 얼어 딱딱해진 땅이 손마디에 닿았다.
그 순간, 검을 집은 손가락 사이를 무언가가 간지럽혔다. 아주 부드럽고, 작은 무언가였다. 디에즈는 피 묻은 손으로 검을 치웠다. 그 아래 가려져 있던 푸른 새싹이 드러났다.
한겨울, 군데군데 눈이 덮여 있는 검은 땅 위에서 누가 새싹을 보리라 생각했을까. 디에즈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적조차 까먹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환각임이 아님을 알리듯 얼어붙은 땅을 깨고 자라나더니 꽃망울을 맺었다. 곧 터지듯 개화한 하얀 꽃송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흔한 잡초였다.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불모지에서도 끈질기게 꽃을 피워 내는, 리쉬.
가장 먼저 피고, 가장 나중에 진다. 지금의 세대에는 퇴색되어 버린 지난날 ‘축복의 밤’의 상징이었다.
디에즈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발아래로 녹색과 흰색의 연약한 생명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하나, 셋, 일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무성하게. 널브러진 무기와 시체의 옆에 자라난 꽃은 피가 굳어 검어진 땅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어느새인가부터 금속음이 들리지 않았다. 마력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멈춰 서 있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만이 공간을 울렸다.
디에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달이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전설로 치부했던 ‘축복의 밤’이었다.
깜박.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방금 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물든 세상에 떠 있는 검은 달이 빛을 쏟아 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어두웠다가, 그 무엇보다도 밝게 빛났다. 그것이 검은 것인지 하얀 것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보아 왔던,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뒤집혔다. 빛과 그림자의 법칙을 모르는 누군가가 그려 놓은 명화 속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몸을 떨며 숨조차 멈췄다. 모두가 하늘을, 꽃이 핀 땅을 바라보았다.
그 정적인 공간 속. 갑작스럽게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만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무너진 성벽 위에 한 남자가 있었다. 피와 재, 진흙과 오물, 시체가 늘어선 광경에 그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대신관의 의복과 금박을 입힌 화려한 하프까지.
제국군의 병사들은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대신관 라헤안시였다. 그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흘렀다.
비현실적인 신의 세계 속. 사람들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세간에 떠돌기 시작했던 ‘예언’을 상기했다.
이델라브힘의 사자, 독수리의 가호를 받는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어둠을 걷어 내고 대륙을 빛으로 물들일 것이라는 내용의.
삐이이익---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창공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독수리가 하얀 밤과 검은 달빛을 가로지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독수리는 검은 달에서부터 날아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쳤다. 이내 그것이 도달한 곳은 전장 옆의 높은 언덕이었다.
검은 달 아래의 언덕 위. 두 사람이 있었다. 백마를 타고 있는 남자와 흑마를 타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가 팔을 들어 올리자 독수리가 천천히 날갯짓하며 그 위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한순간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긴긴밤의 끝을 알리는 빛이 찾아와.”
위대한 예언을 한 대신관이 엄숙하게 말했다.
“대륙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낼 것이다.”
발타의 병사들은 신성한 검은 달 아래 더 이상 검을 들지 못하고 떨어트렸다.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 * *
로젤린은 조용한 공간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말을 꺼내었다.
“조용하네요.”
로젤린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상상해 본 적 있습니다. 제 오랜 고통의 끝은 어떻게 찾아올지.”
리카르디스는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웠고, 무서웠고, 거대해서…… 그래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무너질까, 댐이 무너지는 듯 사나울까…….”
로젤린이 다시 눈을 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수천, 수만의 인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마치 그림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 그 자리에 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런 거였네요.”
로젤린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전장에 내리깔린 정적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렇게 고요한 거였어요.”
언덕 아래에서부터 밀어 올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넓게 흩날렸다. 그 뒤로 검고 거대한 달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 * *
늦은 밤부터는 부슬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검은 달빛이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져 비산하는 광경은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오랫동안 기억할 광경이었다.
새벽이 될 무렵 온 세상을 환상처럼 물들였던 축복의 밤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슬이 맺혀 있는 푸른 잎과 하얀 꽃송이들뿐이었다.
중부 관문, 연합군 진영.
각국의 사령관들이 모이는 대회의가 열렸다. 연이은 승리에 취해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낭패가 서려 있었다.
“전쟁을 재개하겠다, 이 말입니까?”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이에 하카브는 그 말이 더 당혹스럽다는 듯 말을 비꼬았다.
“그러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라도 할까요? 대체 무어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유를 모르리라 생각하진 않는데.”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그의 호위 기사와 축복의 밤을 부른 것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테고.”
정확하게 그 이유 때문이었던 터라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죽지 않았으니 신의 가호로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부를 만한 능력이 있으니 부른 것뿐입니다. 축복의 밤을 띄우는 자가 신의 자식이 아님이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몇 백 년간 지속되어 왔던 일라베니아의 농간에 다시 놀아날 셈입니까. 지레 겁먹고 돌아가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여태껏 들인 공과 피해는 홀로 감수하셔야 될 줄로 압니다.”
이렇게 겁을 줬음에도 아니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심한 인간 같으니. 하카브가 혀를 찼다.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를 규탄하는 전쟁이었다. 때문에 이델라브힘에 대한 믿음도 조금은 흔들렸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 왔던 신앙 자체가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직까지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의 눈앞에, 신의 세계가 열리는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사람들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정말 신이 보낸 사자가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실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리카르디스.’
하카브는 그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정말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생명이 순환하는 밤이라 하였던가. 그 말과 같았다.
죽었던 땅이 살아나는 기적 속에서 마독 ‘파편’과 인조 마인에게 심어져 있던 마수의 힘이 모두 사라졌다. 인조 마인들은 모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변이를 거쳤던 이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변이하지 않은 인조 마인들은 모두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연합군은 전의와 무기.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두 가지를 잃었다. 제국군보다 우세한 병력만큼은 지켜 내야 했다. 코앞이었다.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딱 한 발짝만 더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연합군의 사령관들도 그 때문에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는 것이었다. 두렵긴 한데, 아깝기도 하니까. 온전히 줏대를 세우지도, 완전히 휩쓸려 나가지도 못하는 개만도 못한 종자들 같으니. 하카브는 속에서 분노를 끓였다.
선동이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인지 하카브의 의견에 옹호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났다. 일라베니아를 배신했던 힐리사고도 입장이 입장인 터라,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축복의 밤이 떴을지언정 전쟁은 끝난 게 아니오!”
맞는 말이었다. 축복의 밤으로 일라베니아의 죄의 증거가 사라졌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죄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일라베니아가 있는 한 영원히 새겨져 있을 낙인이었다. 그러니 일라베니아의 횡포 아래 고통받았던 연합군이 전쟁을 지속할 명분은 여전히 있는 셈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고작 이런 내부 분열과 시간 벌기 용도로 축복의 밤을 띄운 것이란 말인가? 하카브는 팔짱을 낀 채 고심했다. 덜컥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니, 뭔가가 더 있을 텐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리카르디스였다. 분명 무언가를 더 준비해 뒀을 것이다. 축복의 밤을 계기로 이 전황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그리고 발아래, 차가운 땅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목까지 올라온 불안이 하카브의 숨을 꾹 조일 때. 그것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총사령관님!”
발타의 병사가 막사의 천을 헐레벌떡 지나쳐 들어왔다. 하카브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는 말을 듣기도 전에 일어나 병사를 밀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막사의 입구를 나서자 쨍한 햇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카브는 손을 들어 올려 그늘을 만들며 눈을 찡그렸다. 빛에 차츰 익숙해진 눈이 낯익은 이의 얼굴을 담아 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 왕국의 3왕녀, 간제 위 리비타. 그녀가 전쟁터가 아닌 궁전이 어울릴 법한 정복 차림새로 연합군의 주둔지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카브의 시선이 간제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브네학스 아문과 포위하듯 둘러싼 발타의 병사들에게 닿았다.
하카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간제는 일국의 왕녀다운 위엄 있는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지고한 신분으로 백성을 겁박하여 불법적인 실험을 자행한 죄, 탐욕에 눈이 멀어 피를 나눈 형제, 자매를 살해한 죄, 과를 위조하여 지엄한 리비타의 법도를 어지럽힌 죄, 힉살라를 음독하여 시해하려 한 죄. 수백 년간 지속된 평화 협정을 깨어 대륙을 도탄에 빠트린 죄.”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하카브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비릿하게 웃었다.
“죽음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무거운 죄로다. 간제 위 리비타가 지고한 힉살라의 명령을 받들어 이 자리에 왔노니.”
간제가 손을 뻗었다.
“죄인을 포박하라.”
하카브의 친위대조차 하카브를 감싸지 못했다. 힉살라의 명령 하에만 움직이는 아문의 가주가 간제와 함께하고 있었으며, 과의 문장이 찍힌 서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에 하카브가 끌고 온 발타의 병력도 간제의 휘하에 흡수된 상태였다. 친위대 몇 천 명 정도로는 그 수에 대항할 수 없었다.
하카브는 덤덤한 얼굴로 반쯤 허물어진 바르제 방벽을 바라보았다.
‘한 발.’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작 한 발짝 남았는데.’
거친 남자들의 손이 무자비하게 하카브를 붙잡아 무릎을 꿇렸다. 간제는 그런 하카브의 모습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 * *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하카브가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이후, 남은 연합군은 더욱 거센 혼란에 휩싸였다.
발타의 새로운 사령관, 간제 위 리비타가 이번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 공표했을 뿐 아니라, 발타의 수족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마람 왕국 또한 병력을 물리겠다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병력의 25 정도가 뭉텅 떨어져 나간 셈이었다. 연합군으로서도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분열이 심화 되었다. 발타와 마람까지 빠진 지금, 중부 관문 공략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더 나아가 중부 관문을 넘어설 수는 있을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심지어는 식량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다른 병참 기지로부터 오고는 있어 굶어 죽지까지는 않을 테지만, 그 사이에 연합군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지고 또 얼마나 분열될지는 빤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너무나도 아까운 것이다. 지금의 이 상황이.
코앞에는 금이 간 중부 관문이 있었다. 그 뒤는 황금이 묻힌 일라베니아의 보고였다.
전쟁에는 나라가 휘청할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갔다. 연합군에 포함된 수 개의 나라들 또한 적지 않은 비용을 소모하며 이 자리에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용한 지금은 선뜻 발걸음을 돌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얻는 것은 둘째 치고, 손실만 잔뜩 떠안고 끝내게 되는 셈이었으니.
발타와 마람의 병력이 사라진 이후 가장 강경한 주전파가 된 힐리사고의 사령관은 그 점을 끝없이 주지시키며 타국의 사령관들을 설득했다.
“축복의 밤만 아니었더라도 바르제 방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틀간의 전투로 제국군이 입은 피해는 몇 시간 정도의 유예로 수복될 만한 것이 아니고, 발타와 마람군이 빠졌으나 여전히 연합군의 수가 우세합니다. 다 이긴 전쟁이라 이 말입니다. 헛된 신의 위명에 겁먹지 마십시오.“
각국의 사령관들은 힐리사고의 주장에 힘을 입어 손을 모아 다시금 힘을 내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대화를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리카르디스가 움직였다.
오호라, 헛된 신의 위명에는 겁먹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겁먹을 만한 걸 어디 한번 찾아볼까. 하는 듯이.
회의 이후. 흩어져 각자의 진영에 도착한 연합군의 사령관들은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양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았다.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반란으로 인해 전복되었다는 것이었다.
“뭐, 이, 미친.”
미노가 강 전투로 사망한 힐리사고의 첫째 왕자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와 있는 둘째 왕자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 * *
마인을 학대하는 풍습을 거슬러 올라간 역사에는 일라베니아의 치부가 새겨져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아니다, 사실무근이다, 증거 있냐, 발뺌했지만 발타와 힐리사고를 포함한 대륙의 여기저기에 그들의 만행에 대한 단서가 조금씩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단서일 뿐, 정확한 증거가 되지 못했다.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목격자나 확인 가능한 증거가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여태껏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황실의 입장과 다르게 반응하는 자들도 있었다. 탐욕스러운 황실 아래 굶주렸던 수많은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제가 ‘신의 아들인 내가, 이델라브힘의 뜻을 받들어 너희들을 굽어살피겠다.’ 하며 너희들도 영광된 신성 제국 아래 살아가는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세금을 많이 내라- 고 얘기했던 그 긴 세월들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신의 힘은 짧은 축복이나 성수만으로 죽은 땅을 되살려 과실을 맺게 하고, 메말라 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황실이 백성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밥상을 엎다 못해 밥그릇까지 깨 버린 상황이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이델라브힘을 맹신하는 마음 아래 묻어 두었던 황실에 대한 불신이 불어오는 바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귀한 분께서 그러시더군요.”
여자는 닫힌 커튼을 살짝 열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둑한 바깥에서 횃불의 무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와아아, 함성과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황실에 대해 욕설을 지껄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퉁퉁한 귀족 남자가 마른 목을 축이려 침을 삼켰다. 테이블에 찻잔이 있음에도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있는 듯 보였다.
여자는 아까의 말을 이어서 했다.
“월계수 나무를 시들게 하려면 어찌하면 좋겠나, 클로에?”
황금정원의 클로에. 백작위를 계승받은 레이몬드의 부인이자, 리카르디스의 가신인 그녀는 황제파 중에서도 세력이 거대한 어느 귀족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이파리를 뜯어 낼까. 굵은 가지를 쳐 낼까. 그것도 아니면 굵은 기둥을 잘라 버릴까. 하지만, 밑동만 남는다 하더라도 긴 세월 뒤에는 다시 가지를 뻗고 푸른 이파리로 그늘을 드리우겠지. 어쩌면 좋을까.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나?”
“……백작 부인.”
클로에는 뒤를 돌아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가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서 저는 ‘뿌리가 밑에서 받쳐 주지 않으면, 그 나무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 말씀을 올렸었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작 각하?”
남자는 클로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설원 위에서도 푸른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월계수라 했다. 그리고 평민들은 그 뿌리라 말했다. 근간이라는 뜻이었으나, 흙바닥 밑에 묻힌 하찮은 존재라 여겨지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기사의 직위를 얻은 평민들을 ‘뿌리’라 부르는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
남자는 지금만큼 ‘뿌리’의 존재를 뼈저리게 실감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클로에를 노려보았다.
클로에가 사뿐히 걸어와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미 없는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각하. 유예 기간은 충분했던 걸로 압니다. 이제 선택해 주셔야겠습니다.”
클로에가 내놓은 선택지란 딱 두 개뿐이었다. 그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위험은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공작은 고개를 숙여 손등에 이마를 댄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황실은 전쟁을 치르며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신에게서 받은 절대적인 권력과 나라를 다스리는 거대한 무력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명으로 점철된 역사뿐이었다.
황실은 백성을 버렸고, 백성도 황실을 버렸다. 나라의 틀을 유지할 수 있는 수백 년의 유대감은 산산조각 나 뾰족뾰족한 형태로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공작도 그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반란이 실패하게 될 시의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그 결말은 단두대뿐일 테니.
남자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달그락. 클로에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척 신중하시군요.”
온화한 목소리였으나 질질 끌어서 짜증 난다는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것이 결정하시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클로에가 뒤에 있는 남자에게 손짓해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잘 접혀 있는 손수건 뭉치였다. 공작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클로에가 손수건을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펼쳐서 나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공작의 얼굴에는 의문이 아닌 경악이 대신 떠올랐다.
황제파와 죽은 1황자 엘피디오파에 속한 귀족 가문들의 문양이 자수 된 손수건이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단순히 친분을 과시하고자 늘여 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변절의 의지를 보인 자들이 내민 계약서였다. 한 장, 두 장, 세 장. 다섯 장, 열 장. 손수건이 계속해서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공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총 스물네 장의 손수건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클로에는 태연하게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고는 다시 남자를 마주했다. 그녀가 느긋하게 찻잔을 집어 들어 공중에서 기울였다.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린 찻물이 그녀의 치마 끝자락을 물들였다.
“어머, 차를 흘려 버렸네요.”
의도적으로 행동해 놓고 클로에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렸다. 공작은 이를 악물고 있다가, 한참 후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좋소.”
클로에가 눈을 접어 생긋 웃었다.
“감사드립니다, 각하”
* * *
리카르디스도 전쟁이 발발한 처음부터 반란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황실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공고히 쌓여 있던 그때 반란을 저질렀다간 고꾸라지게 되는 것은 도리어 리카르디스 쪽이었을 것이다.
한데 전쟁이 진행되는 일련의 흐름이 일라베니아를, 정확히는 일라베니아의 황실을 거세게 흔들었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에서 간제와 동맹을 맺은 이후, 자신이 일평생 겨뤄 왔던 황실에서의 사투와 이번 전쟁을 한 번에 끌어내릴 방법을 찾았다.
몇 주 전, 동부전선.
[축복의 밤을 기점으로 연합군이 분열될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려는 자들도 있을 테고, 이 땅에 축복을 불러온 새로운 신의 아들에게 검을 겨눠도 되는가? 고민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그와 상관없이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겠다는 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자도 있겠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나아가던 이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전쟁은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어 있다.]
‘축복의 밤’을 중부 관문을 보호하는 방벽으로 쓰겠다는 리카르디스의 계획을 들은 클로에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델라브힘을 믿는 나라들은 물론이고, 크레안 티다니온의 영향을 깊게 받는 발타와 마람 또한 하늘에 뜬 검은 달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축복의 밤이 뜨면 전쟁은 잠시간 중단된다. 그건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중부 관문이 함락되는 시간을 늦추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축복의 밤을 띄운다고 해도, 일라베니아가 과거에 저지른 죄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인들을 살해하여 이 땅을 불모지로 만든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은폐하고 수백 년간 대륙을 기만한, 그 죄가.
클로에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빛이 띠자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이.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린다.]
클로에는 잠깐 숨을 멈추고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그 폐허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
클로에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가렸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무언가를 계산한 클로에는 눈이 뻑뻑해질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될 거 같네요.]
[그렇지?]
태연한 리카르디스의 태도에 클로에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일라베니아’를 무너트리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을 테지만, ‘일라베니아 황실’은 방법에 따라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황제가 있는 황실을 점거하는 그 행위 하나만으로 가능한 것이었으니.
힘을 잃고 추문에 휩싸여 있는 일라베니아가 뭐가 예쁘다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싸고 있겠나. 연합군에게 명분만 줄 뿐인데. 필요 없으면 버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물론 여러 문제가 있긴 하지. 상비군과 황제파의 귀족들이 수도에 남아 있는 상황이니. 그러니 일이 있기 전까지, 그대가 해야 할 일이 많아.]
수도라는 공간으로 한정 짓는다면 리카르디스 휘하의 세력보다 황제의 세력이 아직 더 강했다. 황제의 수족을 잘라 내고, 포섭하는 일이 반란의 시작이 될 것이다.
평화로운 일라베니아였다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지금은 전란의 한가운데였다. 일라베니아 제국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황실에 절개를 지킬 이들은 많지 않았다.
[명분은 많으니 적당히 아무거나 갖다 붙여도 말이 되겠군요.]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니까.]
리카르디스가 냉소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대신관 라헤안시가 일라베니아의 죄를 입증할 것이다. 그를 통해 일라베니아를 둘러싼 추문이 진실임을 확인한 2황자 리카르디스가 일라베니아의 땅 위를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해 반기를 들었다는 것쯤으로 해 두지. 비록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미는 용서 못 할 죄를 저지르는 것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노라 하고 말이야.]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그 큰 죄는 살아가시면서 차차 갚아 나가는 거로 하세요.]
클로에가 눈을 초롱거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리카르디스는 몇몇 서류들을 클로에에게 밀어 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얀 밤하늘에 뜬 검은 달은 일라베니아가 가지고 있던 한 줌의 권력마저 앗아 가며, 일라베니아의 권력자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겠지. 그때가 적기가 아니겠나.]
[옳은 말씀입니다. 폐하.]
빠른 호칭 변화에 리카르디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축복의 밤으로 전쟁이 일시적으로 멈췄을 때, 황실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음을 선포한다.]
클로에가 서류에 무언가를 사각사각 적어 내렸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일라베니아가 아니다.]
일라베니아는 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는데.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향해 검을 겨누는가?]
연합군이 말하는 ‘일라베니아에 죗값을 물게 하겠다.’는 명분이,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몇 시간 만에 일라베니아가 새로운 왕국으로 바뀌었다. 연합군이 짓밟고자 하는 땅이 더 이상 일라베니아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힐리사고의 왕자는 서신을 받고 너무 화가 나서 몇 초간 말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왕자는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대처가 정말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놀랍게도, 통했다. 그것도 아주 잘.
비슷한 시각, 리카르디스의 서신을 받은 연합군의 세력 중 이탈하겠다 말하는 이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났다. 힐리사고의 왕자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단체로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짜고 치는 연극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 또한, 한 장의 서신을 더 받게 된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신 위에는 힐리사고와 이웃한 왕국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이들에게서 연락이 올 이유를 찾지 못해 힐리사고의 왕자는 혼란스러웠다.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왜 나에게? 그는 황급히 서신을 열어 펼쳤다.
첫마디는 단조로운 인사말이었다. 차근차근 글자를 읽어 내리던 남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때의 평화 협정을…….]
“젠장!”
평화 협정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왕자는 서신을 쭉 찢어 버렸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질근질근 밟아 버렸다.
평화 협정이란 과거, 서로가 서로의 재화를 탐했던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약속이었다. 그때의 일로 대륙의 인구가 반이 줄었으며, 불태워진 대지는 황폐해지고 썩은 시체들로 전염병이 도는 등. 축복의 밤이 소실되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방지하고자 대륙의 모든 나라가 서명한 평화 협정에는 타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 나라의 맹세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있거든 그를 제외한 모든 다른 나라들이 힘을 합쳐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방금 전 서신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힐리사고의 왕자님, 대륙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일라베니아를 단죄하고자 하는 대의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고 하셨죠. 그런데 일라베니아가 망했다는데 왜 안 돌아오십니까? 혹시, 일라베니아를 단죄하는 것보다 전쟁으로 얻을 이득에 더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시겠죠? 저희 왕국이 설마 침략자랑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었던 겁니까? 세상에, 너무 무서워서 다른 나라랑 손잡고 힐리사고를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라는 뜻이었다.
많은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저 방관하는 나라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힐리사고가 ‘침략자’라는 인식이 찍히게 둘 수는 없었다. 이는 또 다른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있으므로, 일라베니아를 침략함으로써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 훨씬 중했다.
왜 연합군에서 군대가 하나둘 이탈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도 비슷한 내용의 서신을 받았으리라. 왕자가 이를 갈았다.
‘어? 그런데 뭐가 좀……?’
많이 이상했다. 축복의 밤이 뜬 지 얼마나 지났다고 먼 거리에 있는 왕국에서 벌써 이런 서신이 온단 말인가? 축복의 밤이 뜨고, 일라베니아 황실이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고. 그 사실을 알리는 것만 해도 몇 주가 걸려야 정상인데. 다른 나라에서 그 사실을 알고 연합군에 경고를 보내기까지 하다니.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서야.
“…….”
준비해 뒀군.
왕자의 시야에 아까 그가 찢어발긴 서신이 들어왔다. 작은 조각에 글자가 빼꼭하게 새겨져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신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길.]
왕자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 * *
전후 처리와 새롭게 체결될 협정을 위해 각국의 사령관들이 중부 관문에 모였다.
정복과 적대 행위의 금지, 평화 관계의 회복 등. 본래라면 배상청구권에 대한 의논이 필요했을 테지만, 애초에 새로운 나라의 탄생으로 끝난 전쟁이니만큼, 일라베니아의 입장으로 침략자들에게 요구할 권리도 없었다. 하지만 승자와 패자가 없는 싸움이었기에 모두가 크고 작은 피해를 떠안는 셈이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약속이 새겨진 종이 위로 인장을 찍으며 전쟁의 종결을 알렸다.
전 일라베니아 제국, 현 리쉬에 왕국의 중부 관문.
관문의 감옥 안에는 중요한 인물 몇몇이 갇혀 있었다. 디에즈와 검은달의 간부 케틀린, 그리고 평화 협정을 체결한 이후 발타로부터 처분을 양도받은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각각 다른 층에 수감되어 병사 수백 명의 삼엄한 감시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라베니아 출신인 디에즈와 케틀린은 당연히 신생 왕국 리쉬에의 권한이었지만 하카브는 발타의 왕자였다. 그것도 힉살라를 시해하려고 했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
하지만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다. 간제와 동맹을 맺었을 당시, 그녀는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서 발타를 빼는 대신 하카브의 이름을 써 넣으라 했다. 그때의 약조와 더불어 라헤안시가 힉살라에게 끈덕지게 군 덕에 그 권한은 리쉬에 왕국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라헤안시의 말로는 “하카브 왕자도 우리 몫으로 안 떨어질 거면 거래 안 해! 집어치워!”라는 식의 흥정이 오갔다는데 정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 그들 중 한 명을 만나기 위해 감옥에 발을 들였다.
지하 감옥의 최하층. 그 중앙에 몇 겹의 굵은 쇠사슬과 거대한 족쇄로 결박되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색 머리카락은 재와 먼지, 피가 엉겨 탁하게 변해 있었다.
“…….”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검을 겨누던 사이지만, 이런 장소에서 그를 마주하자 착잡한 마음부터 올라왔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디에즈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텅 빈 눈동자에는 어둑한 지하 감옥과 이따금 흔들리는 횃불만이 비쳤다.
리카르디스는 디에즈가 이 지하 감옥으로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디에즈는 인간의 힘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였다. 그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할 시,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지 예측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에즈는 어떤 반항도 없이 아주 순순히 잡혔다고 했다. 일라베니아에 대한 증오 하나로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던 화려한 전적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디에즈는 수감된 이후로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잠을 자지도, 심지어는 음식이나 물을 섭취하지도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보고를 듣고 지금 막 디에즈를 찾아온 참이었다.
그가 이렇게 지하 감옥 안에서 얌전히 지내는 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걸 알아내기 위해.
하지만 지친 표정과 인형같이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에서는 그 어떤 숨겨 둔 진실도 찾을 수 없었다. 숨만 쉬는 시체 같았다. 웃는 얼굴 아래 선연한 분노를 끓이던 사내는 어디에도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디에즈가 단순히 일라베니아라는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로 세운다는 단순한 논리 하나로 디에즈가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이 지하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떠올렸다. 하얀 밤, 그 위로 뜬 검은 달. 빗방울에 비쳐 반사되는 달빛과 그 아래 피어난 꽃송이까지.
그 광경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얼굴을 기억했다. 여정의 끝을 맞이한 모험자는 비로소 검을 놓고 꽃향기가 실려 온 바람을 음미하고 있었다.
어쩌면 디에즈에게도 축복의 밤이 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로젤린과는 다른 형태일지라도.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돌아섰다.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적막만 남은 공간에 하얀 눈송이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리카르디스의 망토 끝자락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눈송이는 나풀나풀 날아, 이내 철창 안까지 굴러갔다. 디에즈의 눈동자에 그것이 비쳤다.
눈이 아니었다. 축복의 밤과 함께 피어난 리쉬의 꽃잎이었다. 디에즈는 결박된 상태로 불편하게 고개를 숙여 바닥에 있는 눈과 꽃, 바람의 잔향을 들이마셨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리카르디스는 감옥을 올라가던 중, 하카브의 감옥 앞에 있는 간제를 발견했다. 철창을 잡고 무어라 말하고 있었는데, 거리가 멀고 워낙 작게 속삭이는 터라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노려보는 하카브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속이 뒤집어지는 소리를 했겠거니 예상할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간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방긋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 지하 감옥에서 뭘 했는지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산책길을 걷는 것처럼 나란히 감옥을 벗어났다.
리카르디스와 간제는 중부 관문의 방벽 위까지 올라갔다. 아직 춥다 못해 시린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아직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며칠 전과 다른 점은 그 시체들 사이사이로 하얀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 있다는 점이었다. 추위에 금세 져 버리긴 했으나, 축복의 밤으로 살아난 대지는 끝없이 생명을 피워 내며 새로운 세계의 태동을 알리고 있었다.
“‘리쉬에’라…… 재밌는 이름이네요”
한참 전장을 바라만 보던 간제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리쉬에는 지금 지천에 널려 있는 리쉬의 정식 명칭이었다. 귀한 꽃이나 약초, 나무가 아닌 한낱 잡초의 이름을 붙였으니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초대 황제의 이름을 딴 나라의 결말이 안 좋더군요.”
“아, 일라베니아요. 좀 안 좋게 끝나긴 했죠.”
두 사람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원래 인간들이 하는 일은 전부 엉망이니까, 자연에 맡겨 보자는 마음으로 지었습니다.”
“아하.”
리카르디스는 국가 전복 계획을 세웠을 당시, 클로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서, 나라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리카르디스는 유례없이 당황했다. 그런 것도 내가 해야 해? 라고 묻는 듯 바라보자 클로에가 그럼 제가 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를 마주 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긴급 소집되었다. 다 큰 성인들이 끙끙거리며 이런저런 이름을 추천했다. 불탄 월계수부터 시작해서 각종 지역 지방의 이름, 리카르디스의 이름까지 전부 끌려 나왔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자포자기한 리카르디스는 대충 로젤린이 좋아할 만한 음식 이름으로 하자는 의견을 냈다가, 로젤린에게 진지해지라는 충고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마땅한 것이 없나 뒤지게 된 식물도감에서 보게 된 이름이었다.
리쉬, 정식 명칭 리쉬에.
현재는 잡초에 불과하지만, 과거에는 축복의 밤의 상징이었다. 죽은 대지에서도 끈질기게 생명을 피워 내는 하얀 꽃, 리쉬에.
그 그림의 아래 짤막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며 피어난다.]
리카르디스는 이보다 좋은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삐이익---
독수리의 울음소리에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어 너른 전장을 바라보았다. 검은 땅 위를 하얀 꽃잎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겨울도 이제 끝나려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