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발타 왕실은 현재 고단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 쓸모없는 놈!”
발타의 궁전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피부의 남자가 버럭 성질을 냈다. 그의 손에는 막 건네받은 융단이 들려 있었다.
“귓구멍이 막힌 거니,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하는 거니?”
시종장은 허리도 펴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개만 조아렸다.
“내가 어떤 호랑이를 수놓으라 했었지?”
시종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귀, 귀여운 호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가 눈에 불을 켜며 시종장에게 융단을 집어 던졌다. 그의 얼굴에 부딪친 융단이 촤르륵 펼쳐졌다. 한 중앙에 통통하고 어린 호랑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니 이게. 이게 어딜 봐서 귀여운 호랑이야! 이 큰 대가리를 좀 봐, 수컷이 틀림없어! 당장에라도 뛰쳐나와 날 물어 죽일 것만 같은걸! 이 세상에 귀여운 수컷이라고는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모를 리도 없으니, 내가 전하의 사랑을 받는다고 질시하는 것이야? 아니면, 내가 외인이라고 이런 하찮은 부탁마저 업신여기는 것이냐!”
금사로 수놓은 호랑이 융단이 하찮은 부탁에 들어가다니. 시종장은 이를 악물었다. 남자가 리비타의 궁에서 왕비라도 된 양, 시종들을 손끝으로 부리게 된 것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간 궁을 떠났던 간제가 데리고 온 남자였다. 현재 일라베니아 남부는 발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고, 그 안의 모든 자원 또한 발타의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일라베니아 노예들이 생겨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것이 리비타의 궁까지 얼굴을 들이밀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간제 왕녀가 장난감을 데리고 왔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발타 왕실은 남자의 출신 때문에 그가 간자일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하지만 남자는 일반적인 간자가 보일 법한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행동 따위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물이 뜨겁다, 차갑다. 다시 해 와라. 입맛에 안 맞는다. 지금 내 것만 요리를 이따위로 하는 거냐.
보물 창고를 개방해라. 왕녀 전하께서 나 다 준다고 하셨는데 네깟 것들이 왜 난리냐.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니 보석상을 불러라. 열 손가락에 전부 금강석 반지를 끼고 싶다. 향유는 이걸로 해라. 어, 근데 생각보다 향이 역하다. 내가 이걸 선택하겠다고 말했을 때 왜 안 말렸냐, 등등.
까탈스럽기는 얼마나 까탈스럽고 지랄 맞기는 얼마나 지랄 맞는지. 수려한 외모의 사내는 매일매일 다채로운 패악을 부려 댔다.
오늘도 시종장은 귀여운 호랑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남자에게 잔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간제의 총애가 사라지거든 리비타 궁에서 곧바로 사라질 인물이라고는 하나, 살의가 솟구쳤다.
그때, 간제가 방 안에 들어왔다. 까칠하게 시종장을 갈구던 남자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서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전하아!”
남자가 그녀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매달렸다. 왕실의 핏줄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간제는 가뿐하게 남자를 안아 올렸다.
“아니, 타타라. 무슨 일이지? 또 누가 너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눈물로 가리려 한 것이냐.”
남자는 훌쩍이며 간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맹렬하게 시종을 가리키고 있었다.
“흐흑, 저는…… 그저 전하께서 귀여운 것도 좋아하시고 호랑이도 좋아하시니까, 귀여운 호랑이를 수놓은 융단으로 방을 장식하여 기쁨을 드리고 싶었을 뿐인데…… 저 치가 저렇게 흉측하고 무서운 것을 가져왔지 뭡니까. 저는 너무 무서워서 그만 정신을 잃을 것만 같습니다!”
맨날 보는 광경임에도 시종과 시녀들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간제는 남자를 안아 올린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이 바닥에 펼쳐진 융단을 향했다. 귀여운 새끼 호랑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간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아이라 했을 텐데, 감히 네놈들이 눈물짓게 만들어?”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이게 어딜 봐서 귀여운 호랑이냐! 대가리가 큰 것을 보니 수컷이 틀림없어. 아주 무시무시해! 이 세상 귀여운 수컷은 우리 타타라밖에 없는데, 아직도 그걸 몰라?”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간제는 마구 성을 내며 사람들을 물렸다. 방 안이 텅 비게 되자 두 사람이 눈을 맞췄다. 간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촉촉한 눈동자로 미모를 잔뜩 뽐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눈은 나른해졌고, 얼굴 근육도 느슨해지며 의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인상이 되었다. 밝은 금발만 분홍빛이었다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라헤안시의 모습이었다.
간제가 흐트러진 옷을 펴며 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이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요즘 제가 잘 먹어서 몸무게가 좀 늘었는데.”
“뭘 그 정도로. 우리 타타라는 깃털만큼 가벼운걸요.”
두 남녀가 마주 보며 낄낄 깔깔 웃었다.
힉살라를 치료하고자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면 뭘 할까. 현재 리비타의 궁은 하카브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거기에다가 간제는 하카브에게 숨기지 않고 반감을 드러냈기에 리비타 궁의 경계 대상 1호로서 언제나 삼엄한 경계를 받았다.
그녀가 가지고 나가고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이라면 바늘 하나 실 한 올 까지 확인받는 상황에서 인간을 몰래 숨겨 들어갈 만한 방도는 없었다. 라헤안시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나선 이유였다.
하카브는 간제가 소유한 것에 한정해서 매우 넉넉한 태도를 보였다. 어차피 제 손안의 동생이며, 동생의 장난감 하나 못 사 주겠냐는 느낌에 가까웠다. 간제는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의 소유물인 애완 인간 ‘타타라’를 보란 듯이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일국의 왕녀가 망측하게 남자 애인, 그것도 지금 전쟁을 치르는 타국의 인간을 옆에 둔다는 사실에 많은 인사들이 기함했다. 하지만 간제가 저질렀던 일은 대부분 기함할 일이었기에, 저 인간이 또 하던 짓 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자들이 많았다.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의심이 아닌 경멸의 시선을 보면서 간제가 뿌듯하다는 듯 얘기했는데, 나름 내놓은 자식에 속하는 라헤안시도 그때만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경계는 생각보다도 빠르게 느슨해졌다. 제 오라비가 없는 틈을 타서 간제가 세력을 키우려거나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탓도 있으나, 라헤안시의 탁월한 연기 솜씨가 그에 한몫을 크게 더했다. 며칠 전 리비타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간자라 의심받았던 라헤안시는 왕녀의 총애를 받아 겁 없이 날뛰는 애완 인간 정도로 입지가 굳어지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조만간 아틸라크가 근처 요새로 중요한 회동을 하기 위해 궁을 나선다고 하는군요.”
재상 아틸라크는 하카브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라헤안시의 그 대단한 연기에도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있는 이상 힉살라의 궁에 발을 들여 놓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한데 마침 딱 좋게 아틸라크가 궁을 비우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제국군 중,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병력이라 생각되는 군대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닌 탓이었다. 끝을 보는 그녀의 성정은 발타에서도 유명했다. 문제가 심화되기 전에 처리하기 위해서 현 발타의 책임자가 나서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궁을 비워 둘 수는 없는 법. 또 다른 책임자가 아틸라크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간제가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리비타에서 가장 가까운 요새에 브네학스가 있습니다. 그를 부를 겁니다.”
타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서 깊은 가문 ‘아문’의 가주의 이름이었다.
“아틸라크는 차라리 귀엽다 싶을 정도로, 궁의 경비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입니다. 지긋지긋하죠. 평생에 제대로 된 일탈 한번 해 본 적 없는 저마저도 그를 보면 주눅이 들 정도라고 할까요.”
많이 혼났나 싶었다. 라헤안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면 더욱 상황이 나빠지는 게 아닐까? 그 의문은 곧바로 간제의 말로 증명이 되었다.
“무척 곤란한 상황이 되기는 할 겁니다. 그가 오는 즉시 귀여운 타타라는 지하로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받으며 추궁당할 예정이라서요. 이 시국에 일라베니아인이라니 너무 수상하잖습니까.”
“저기, 저만 일방적으로 곤란해지는 것 같은데요!”
귀여운 타타라가 기겁했다. 간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물론 끌려가기 전에 수를 쓸 겁니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간제는 뒷말을 삼켰다. 그 미심쩍은 표정으로 라헤안시는 제 운명을 깨달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곧 헤어지게 될 제 열 손가락에 안녕을 고했다.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서러운 기세였던 터라 간제가 급히 그를 위로했다.
“제가 아틸라크 대신 브네학스를 바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맹점입니다.”
라헤안시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간제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같이 딱딱한 남자를 떠올렸다. 브네학스 아문. 원칙주의자, 번견. 여러 단어로 그를 나타낼 수 있으나 발타에서는 ‘아문’이라는 가문 자체가 그러한 뜻으로 통용되었다. 힉살라에 살고 힉살라에 죽는다. 일라베니아로 치자면 붉은수레바퀴쯤 될 것이고, 실상은 그보다 더 심했다.
그것이 하카브가 아직까지 브네학스 아문의 충성을 받아 내지 못한 이유였다. 힉살라가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간제가 기대고자 하는 부분 또한 그것이었다. 몇 배로 삼엄해진 경비 속에서 유일하게 힉살라의 방으로 갈 지름길이 될지도 몰랐다. 그 눈부신 충성심!
‘설마 지금 발타가 우세한 상황이라고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겠지?’
평소에는 영감탱이들보다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하다고 욕했지만, 부디 그의 마음이 평소처럼 꼬장꼬장하기를, 간제는 간절히 바랐다.
* * *
발타로 남하했던 제국군과 리카르디스의 수색을 위해 남았던 일부 병력 또한 몇 번의 교전 끝에 무사히 탈출했다. 일라베니아의 땅을 밟았으나, 이곳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제국군은 은밀하게 움직이며 산길같이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이동했다.
리카르디스는 높은 지대에서 불탄 마을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바람이 불자 검은 재가 마을을 한 번 휘감고 지나갔다. 전쟁 이후 숱하게 보아 왔지만, 날이 추워진 탓인지 더욱 황폐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시야를 까맣게 물들이는 잿빛 바람에서 눈을 떼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완만한 산길이 지친 병사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지리도 익숙해 진군에 어려움은 없었다.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마수들만 뺀다면. 다행히도 마력을 아주 잘 감지하는 몇몇 인물이 있었기에 조금의 피해도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로젤린은 마카롱에게 배운 대로 여우 마수를 한 대 쥐어 패고 으름장을 놓은 다음에 다시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다시 군에 합류하기 위해 터덜터덜 걸어가다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와 거대한 절벽, 산짐승들이 지나가며 만들어진 숲길의 정경이 낯익었다. 과거 형체 없이 떠돌던 시절에 지냈던 곳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마의 산’이라 불리는 마수들의 서식지이자, ‘로젤린’과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숲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붉은 석양이 드리웠다.
산을 벗어나기 전에 밤이 찾아왔다. 산에서 많은 인력이 머물 만한 곳은 몇 군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사냥 대회 때와 동일한 장소에 야영지가 세워졌다. 병사들이 부지런히 야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로젤린은 야영지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과거 사냥 대회 때, 디에즈의 막사가 있었던 곳을 지나치고, 쫓기며 달렸던 풀숲을 지나, 그녀는 이내 익숙한 장소에 도달했다. 석양빛이 섞인 밤하늘 아래의 절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로젤린은 몇 걸음을 더 옮겨 절벽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섰다.
앙상한 나무조차 없는 절벽 끝에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듯했다. 로젤린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까마득해진 숲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디에즈가 그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았다.
망상 속 디에즈의 날카로운 발톱이 재차 자신의 등에 와 닿기 전, 로젤린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아래에서부터 그녀를 밀어 올리는 바람이 불었다. 섬뜩한 부유감과 함께 머리가 흐트러져 휘날렸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맡긴 채 추락하다, 튀어나온 나무뿌리와 돌출된 곳을 밟고서 가볍게 착지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십 개가 모여 있는 장소였다. 로젤린은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워진 황량한 공간 속, 무리 지은 바위의 모습은 거대한 짐승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젤린은 바위 위에 앉았다. 이곳은 추락한 ‘로젤린’이 죽어 가고 있던 장소였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아래는 과거의 자신이 있던 자리였다. 과거 ‘그것’으로 ‘로젤린’을 바라보던 기억과 ‘로젤린’이 자신을 바라보던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묘한 상념에 잠길 찰나, 로젤린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
어, 뭔가 좀…… 익숙한데. 여길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로젤린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과거 ‘그것’으로 지냈던 산이니만큼 당연히 익숙하겠지만,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기시감은 공간을 새삼스럽게 조명했다.
‘나는…… 이곳을 본 적이 있어.’
로젤린은 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군, 여기는…….’
일라베니아 대신전의 지하 감옥에 갇혔던 마인들은 오랜 시도 끝에 마침내 탈옥에 성공했다. 지나가던 마차를 탈취하기도 했고, 작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마을에서 음식을 훔쳐 먹으며 다른 나라로 달아나고자 했으나, 결국 국경지대와 가까운 어느 산에서 인간의 생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아주 짧게 로젤린을 스쳤던 기시감은 반복해서 돌아올 때마다 더욱 선명하게 덧칠해졌다. 그녀는 조각나 완전하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과거, 달빛마저 가릴 정도로 무성했던 나뭇잎은 겨울이 아니더라도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성인 남자 다섯이 둘러 안으려 해도 길이가 부족한 거대한 나무는 어느 마수가 부순 것인지 밑동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몸을 숨겼던, 서로가 기대듯 자란 이상한 모양의 나무와 바위에 난 커다란 흠집, 굴러떨어졌던 가파른 단층 지대. 무너진 절벽의 바위들이 엉겨 있는 이 장소만은 수백 년이 지났으나 기억과 같이 자리에 있었다.
로젤린은 앉은 채로 풍경을 바라보며, 이따금 바람이 숲을 스치며 내는 괴괴한 소리를 감상했다.
바스락, 로젤린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어두운 숲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이었다. 점점 다가오던 사람은 나무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내 달빛이 닿는 바위 무덤까지 도달했다.
“마카롱.”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 않은 마카롱이었다. 그녀는 로젤린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네가 바위 무덤에 있을 거라 하던데.”
“응, 여기.”
“이름 한번…….”
잘 어울리네, 무덤이라니. 마카롱이 어이없다는 듯 감탄했다. 두 사람은 잠시간 머무르다 장소를 떠났다. 마카롱이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줬기 때문이었다.
“네가 눈앞에 없으면 불안하대.”
여태껏 저지른 화려한 전적이 있어서 로젤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두운 숲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홀로 달빛을 받는 것 같은 바위 무덤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무덤을 떠올리면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이 드니 이상한 건 아닌가 싶었다.
“죽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덤에 왜 꽃을 들고 가나 했거든. 삭막해 보이니까 좀 화사한 거로 중화하려고 그랬나 봐.”
“그런가.”
“다음에 꽃 들고 같이 올래?”
“그래. 다음번에는 샌드위치랑 케이크도 들고.”
소풍 같고 좋겠다. 붉은수레바퀴 성에 있을 때는 몇 번 갔었는데. 두 사람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발타로 남하한 제국군의 패배, 총사령관의 부재, 초토화된 일라베니아 남부의 상황까지. 거듭된 악재 속에서도 제국군은 중부 관문을 지켜 내는 중이었다. 수비하는 측이 유리한 전쟁의 특성상, 버티기만 하면 지친 발타에게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힐리사고를 포함한 크고 작은 왕국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위태로운 것은 중부 관문뿐만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필연적으로 중부 관문에 결집해 있던 병력 또한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부 관문의 방어벽이 줄어들게 된 그때, 여태껏 보이지 않던 발타의 무기, ‘파편’과 마인 부대까지 투입되어 전장을 휘젓기 시작했다.
바람 앞의 촛불. 그 말로도 이 위태로움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일라베니아 중부 관문.
“백작, 그대가 데리고 온 무리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중부 관문의 사령관인 푸른등불 공작이 부담스럽게 얼굴을 가깝게 들이대며 질문했다. 그의 어깨 위에서는 화려한 색의 커다란 앵무새가 후미약 울면서 칼릭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몸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다 알면서 그러시는군요.”
“……정말 그들이 마인이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되어 중부 관문으로 오게 된 지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그를 가장 먼저 부를 정도로, 칼릭스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붉은수레바퀴 백작’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 왔다. 심지어 어제 마독 ‘파편’이 투입된 전장에서도.
갑작스럽게 픽픽 쓰러져 가는 병사들과 어깨에 화살을 맞고 사망한 지휘관의 모습에서 모두가 ‘파편’의 존재를 눈치챘다. 지휘관을 잃은 자들과 그 위력을 실감해 겁먹은 병사들의 동요에 전장이 어수선해졌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데리고 온 용병 군단들이 나서서 중독자들을 살핀 것은 그때였다.
신성력도 통하지 않는 파편에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부상자들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신관들의 치료를 받은 병사들은 당장 전투에 투입되어도 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 파편의 중독자가 빠르게는 수분, 늦게는 수십 분 안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파편은 마력과 독이 섞인 물질.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력을 분리해 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는 반드시 마인의 힘이 필요하며, 이는 로젤린의 증언으로 입증된 바 있었다. 이후 체내에 남은 독을 따로 치료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평범한 독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평범한 해독 약으로 살아난 지금의 부상자들처럼.
푸른등불 공작과 중부 관문의 지휘관들은 그제야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움직이지 않던 부대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들 모두가 마인이었다.
일라베니아의 지휘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이 모두 마인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연합군의 세작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여태껏 숨긴 걸 보니 뭔가 좀 수상하다 등등.
그러한 논의와 의심이 오고 갔다는 얘기를 칼릭스도 막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등불 공작이 찾아왔고, 지금의 이 상황이 되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중부 관문의 사령관으로서 사기고 전의고 다 잃어버린 병사들을 이끌고 여태껏 버틸 만큼 유능했으나, 무척 깐깐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의 뾰족한 질책에 지휘관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메말라 갔다. 제 몫을 넘치게 하는 칼릭스는 메말라 가는 지휘관들 옆에서 푸른등불 공작과 잔을 부딪치며 여유로운 티타임을 가졌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 듯 보였다.
“마인들을 대체 어디서 데리고 온 건가, 백작?”
“데리고 온 게 아니라, 그들이 직접 온 겁니다. 저는 제의를 했고,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어, 백작의 사람이라…… 위험한 말을 하는군. 지휘관들이 백작의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그대도 들었을 텐데.”
칼릭스는 푸른등불 공작의 날카로운 시선을 차분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이유를 모르진 않습니다. 마인에 대한 일라베니아인의 불신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며, 중부 관문 지휘관들은 제 사람들을 모르지 않습니까. 이해는 합니다만…… 그런 의심과 불신이 지금의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요.”
푸른등불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애초에 마력을 숭배하는 발타와 싸우는 이 공간에, 마인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제가 그들을 믿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보다 그들을 모르는 이들이 못 믿겠다 밀어내려고 하는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들을 신뢰하겠습니까. 어떤 증거와 어떤 증언이 있어야만 믿겠습니까.”
푸른등불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칼릭스가 그의 침묵 아래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이 마인인 이상,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 아닙니까.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저는 많이 답답하군요. 현시점의 중부 관문에 필요한 건 그런 편협한 불신보다는 마인들의 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마인이 아니라 크레안 티다니온이라도 손을 잡아야 할 판국에 어떤 인사가 답답하게 믿음 운운하고 있습니까. 혼자서 전쟁이 아니라 소꿉놀이라도 할 모양이지요.”
쯧, 혀를 찬 칼릭스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정중히 푸른등불 공작에게 사과했다. 가만히 칼릭스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푸른등불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지금 상당히…….”
칼릭스는 방금 전 자신이 보인 건방진 태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다.
“멋있군.”
“…….”
칼릭스는 귀를 의심했다.
“멋있어! 멋있어!”
공작의 어깨에 앉은 앵무새가 그의 말을 반복했다. 아까까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던 까칠한 중부 관문의 사령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몹시 인자한 미소를 띤 채로 칼릭스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뭐지, 이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공작의 모습에 칼릭스는 얼떨떨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투도 잘해, 지휘도 잘해, 말도 잘하고, 숨겨 둔 한 수도 있고, 나랑 생각도 잘 통하는군. 백작, 나는 유능한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네. 아니, 사랑하지.”
“사랑해! 칼릭스 사랑해!”
중년 남자와 두 눈이 붉은 앵무새가 자아내는 악몽 같은 하모니가 칼릭스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고 머리도 없는 놈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게. 그냥 어린놈이 잘나가는 꼴 보는 거 배 아프다고 괜히 시비 거는 것이니. 백작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게나. 내가 다 막아 줄 테니.”
칼릭스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그는 마인들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며 약속했다. 쓰고 버리는 도구처럼 이용하지 않겠노라고.
“안 그래도 적은 수라, 충원이 어려워 전투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신관과 같이 움직이게 하며 파편과 마인의 움직임을 읽고 대응하는 정도에만 그쳐도 되겠습니까?”
다른 지휘관이었다면 수가 적건 많건 간에 힘도 세고 전투도 잘할 테니 마인들을 최전방으로 내보내야 한다며 입에 게거품을 물 게 분명했다. 하지만 푸른등불 공작은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걸친 채 칼릭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기만 했다.
“옳은 말이군. 전적으로 동의하네.”
반응이 제법 좋았다. 여기서 좀 더 가, 말아? 칼릭스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애수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저를 믿고 따르는 이들입니다. 다른 지휘관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 잠도 잘 못 자고…… 그러다 보니 요즘 머리가 좀 굳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쓰나. 백작은 내 직속의 군으로 따로 빼서, 다른 이들의 협조 요청을 가장한 명령은 들어가지 않게 해 두겠네.”
얻을 것도 다 얻었겠다, 칼릭스는 순한 양의 탈을 벗어던지고 포식한 맹수의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실망 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이 그거라고 말했던가?”
푸른등불 공작이 흐뭇하게 웃고는 막사를 나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방금 전의 따스한 봄날 같은 목소리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른등불 공작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마자 누군가와 조우한 모양이었다.
“푸른등불 제2군 흑수리대 부장이 아닌가? 잘 자고 잘 처먹었는지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하군. 깐 달걀인 줄로만 알았네. 나라면 입에 물 한 방울도 못 넣었을 텐데, 큰 사람이라 그런지 그 정도 실수는 대범하게 넘기는군. 뻔뻔한 건가? 허허. 농이 아닐세. 순수한 나의 진심이야.”
어제의 전투에서 실수를 저지른 지휘관인 듯했다. 앵무새가 뒤따라서 싸늘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뻔뻔하기 짝이 없네!”
뭐야, 인간이 말하는 줄 알았잖아. 칼릭스는 식겁했다. 잠시간 서류를 살피던 칼릭스는 똑똑, 막사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 소리 죽인 인기척이 막사 안에 고요히 스며들었다.
“백작님.”
뒤를 돌아보자 최근 익숙해진 얼굴이 보였다.
“길레드.”
남자가 순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뒷골목의 불법 투기장에서 칼릭스와 만났던 허수아비 길레드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하던 차, 칼릭스는 그 표정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방금 전의 대화를 들었나?”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네.”
칼릭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는 제안했고,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믿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등등. 손을 잡은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당사자한테 들키니 어쩐지 부끄러웠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길레드가 입을 열었다. 감격 어린 말투였다.
“정말 다정하시군요, 백작님…….”
칼릭스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을 느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에 발린 소리는 쉽게 믿지 않는 게 좋아.”
칼릭스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아차 했다. 괜히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새침 떠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염려했던 바와 같이, 길레드는 퉁명스러운 말을 들은 사람답지 않게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칼릭스는 수치스러움을 가까스로 숨기고 물었다.
“됐고. 용건은?”
“아,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네요. 동부 전선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곧 전령이 올 테지만,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동부 전선이라고 하면 지금 중부 관문보다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곳이었다. 칼릭스는 진지하게 듣다가 묘한 표정으로 길레드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미리 알았나?”
“최근 저희들 일로 시끄러운 것 같기에, 몰래 몇 명이 잠입해서 엿듣고 있었거든요. 제법 험한 얘기까지 오갔더라고요. 명령만 하시면 처리하겠다는데요.”
칼릭스는 얼마간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마인? 마인의 공통점인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이래? 다 이런 사고뭉치들이야?
길레드의 성정이 유해서 가끔 잊어버렸지만, 그는 가장 험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지역, 그것도 뒷골목에서 오랜 시간 구른 사람이었다. 법보다는 불법이 조금 더 가까운, 그런 사람.
칼릭스는 뒤 목을 살짝 붙잡고 앞으로 그런 짓을 하면 돌려보낼 거라 무섭게 윽박질렀다. 길레드는 순순하게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그냥 대답만 잘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곧 알게 될 부분이니만큼 칼릭스는 길레드가 알아 온 정보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반가운 소식이자 놀라운 소식이었다.
“연합군이 퇴각했다고 합니다. 1차 전선 밖까지.”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인데.”
칼릭스는 팔짱을 꼈다. 전선이 무너진 후, 부랴부랴 급하게 형성한 2차 전선까지 뚫리기 직전이었는데, 연합군을 퇴각시켰다? 심지어 1차 전선 밖까지?
동부 전선을 맡은 지휘관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외부의 도움이 있지 않은 이상 구명할 길이 없었다.
‘외부의 도움?’
칼릭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다시 길레드와 눈을 맞췄다.
“설마…….”
“맞습니다. 연합군의 후미에서 아군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남하했던 병력이 대다수 돌아온 걸로 아는데. 그러면…… 많아도 팔천 정도겠군.”
길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릭스에게 서신을 넘겨주었다. 그곳에는 보다 자세한 전황이 서술되어 있었다. 엿듣기만 한 게 아니라 서류도 빼돌렸단 말이지…… 칼릭스는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떨치고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이에는 동부에 있는 병력과 대치 중이던 연합군의 수. 그리고 뒤에서 나타난 제국군의 병력과 당시의 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군이 왔다고 해도 제국군 쪽이 열세라는 판단밖에 들지 않았다.
칼릭스의 눈이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빠른 판단, 지리와 지형을 활용한 책략, 훌륭한 지휘관의…… 몇몇 단어가 그의 눈에 담겼다.
발타의 땅으로 남하했던 제국군은 누구보다도 뼈아픈 패배를 겪은 자들이었다. 드높은 사기는 짓뭉개진 지 오래였으며, 우두머리를 잃고 나서는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했다. 말이 좋아 원군이지, 실상은 도망쳐 온 패잔병 무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들을 이끌고 동부 전선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단순한 지휘 능력뿐 아니라, 병력을 규합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과 신임을 받는 자가 있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동부 전선의 승리도 중요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승리 뒤에 누가 있느냐’였다. 어쩌면, 그 사람은…….
칼릭스와 중부 관문에 있는 눈치 빠른 지휘관들이 동부 전선 쪽으로 급히 사람을 보냈다. 얼마 뒤, 다시 돌아온 정보원들이 리카르디스의 가신 몇몇에게만 은밀히 서신을 전달했다. 칼릭스 또한 서신과 함께 책 한 권을 받았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이었다. 어릴 적, 로젤린이 칼릭스에게 읽어 줬던 책이었다. 종이 사이에 하얀 꽃, 리쉬가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칼릭스는 그날 밤 그 동화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으며, 보고하러 소리 없이 들어왔던 길레드는 ‘귀염둥이 칼’의 진면목을 깨닫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 * *
동부 전선의 승리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장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승리의 가치는 더욱더 값지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 기적 같은 승리가 이룩해 낸 것은 동부 전선에 있는 연합군의 일시적인 후퇴일 뿐이었다. 연합군은 건재했고, 일라베니아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한데 그 승리를 기점으로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연합군 측으로 흐르던 기류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전쟁의 판도가 잠시나마 주춤거리게 되었다. 동부 전선의 연합군 대다수를 구성하는 룩세인 왕국이 갑작스럽게 전선에서 발을 빼며 연합군이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룩세인 왕국. 성채, 마이라.
마이라에서는 금보다 물이 비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성채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커다란 우물이 마이라의 유일한 수원이었으며, 물을 뜰 수 있는 시간 또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거리는 멀고, 하루에 한 번, 새벽에만 나갈 수 있었다. 그런 구조적 특성과 시간적 제한이 더해지니 물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상 시간의 제한은 잘 지켜지지 않는 편이었다. 하루에 한 번 새벽에만 성문이 열린다는 법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평화로운 성채에서는 그 언제든 ‘새벽’이었다. 아침밥 먹고 난 이후도 ‘새벽’. 점심 먹고 오후 티타임을 즐긴 이후에도 ‘새벽’. 술 먹고 기절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난 누군가에게는 그때가 ‘새벽’이었다. 자유롭다면 자유롭고 나태하다면 한없이 나태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곳이었다.
마이라 성채에서는 여인들이 낮잠을 자는 병사들을 지나쳐 직접 성문을 열고 나가 물을 뜨고 오는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이 방만한 행위가 수십 년 동안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새벽 별이 빛나는 이른 아침. 성문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여인들은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다소 느슨했던 병사들이 시간을 칼같이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의 무대가 룩세인 왕국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대륙에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룩세인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성과 요새가 불온한 무리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잦아졌다며 왕실에서 공문이 내려오기도 한 참이었다.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끼기긱, 성문 옆의 작은 문이 개방되고 여인들이 줄지어 성채를 나섰다. 병사들은 우물로 걸어가는 여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잡담을 나누었다.
“미젤 요새도 함락당했다면서? 완전히 전소되었다던데. 그런 걸 보면 다른 나라가 침략한 건 아닌 것 같지?”
미젤 요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만약 룩세인 왕국을 침략할 셈이라면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채 사용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 사실을 이해하는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으로 병력이 빠지니까 도적 떼가 기승을 부리는 거지.”
“중앙에 남아 있던 기사단이 직접 뒤를 쫓고 있대. 곧 잡히지 않겠어?”
시시한 잡담을 나누던 남자들은 곧 주사위 도박에 푹 빠졌다. 위에서 쪼아대는 통에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고생하고 있지만, 전쟁이고 위험이고 사실 먼 나라의 얘기였다. 직접 겪지 못했으니 체감할 수도 없었고, 그런 만큼 태도가 갑자기 바뀔 리도 없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주사위 도박에 푹 빠진 때에, 물을 길은 여자들이 돌아왔다. 병사들은 의자 대용으로 쓰던 나무 상자에서 일어나 귀환하는 주민을 맞이했다. 딴 돈과 잃은 돈 때문에 정신이 없던 터라 그 사이에 몇몇의 새로운 인물이 끼어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병사 한 명만은 이질감을 느끼고 어느 여인을 주시했다. 여인 또한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험악한 인상의 병사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나, 날씨가 참 좋네요.”
여자는 대답 대신 눈을 휘며 싱긋 웃기만 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난 뒤, 병사가 멍청하게 말을 흘렸다.
“아름다운 사람이로군…….”
마이라 성채 내부. 구석진 곳에 이방인 여덟 명이 옹기종기 모였다.
“날씨가 참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름다운 사람아, 얘기 좀 해 봐.”
“오,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니.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렴, 하늘에게도 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 줘야지. 태양이 널 질투할까 봐 그러니?”
아까 전 병사에게 안부 인사를 들었던 여자가 무리의 가운데에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고 있었다.
“아무런 제재 없이 성문을 통과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네놈들도 비슷한 상황이거든?”
“아니지 완전 달라. 내가 손 키스를 날려도 꿈쩍도 안 했을걸. 너는 그냥 웃기만 했잖아.”
“아니야, 웃기도 전에 말을 걸었다고. 숨만 쉬었는데 홀린 거야, 그건.”
“살아만 있는데 홀리다니. 크으, 역시 우리의 투표 1위.”
여인으로 치장한 한 남자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혼자 벽에 기대어 조용히 상황을 관람하던 여자가 웃으며 서서히 움직였다.
“내 눈에는 너희들 모두가 어여뻐 보인단다.”
누가 너희들을 마른가시나무군의 병사들이라 생각하겠니? 세실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주 전.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은 리카르디스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은 채 룩세인 왕국 영토에 발을 들였다.
오랫동안 평화에 물들어 병사들의 경계심이 느슨한 것을 제외하면 마이라 성채는 정석적인 공성전으로는 함락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몇 차례 성채와 요새를 함락한 마른가시나무군을 뒤쫓아 룩세인 왕국군이 움직이고 있어서 시간도 길게 끌 수 없었다.
세실은 리카르디스에게 들었던 마이라 성채의 특징을 다시금 복기해 내었다. 하루에 한 번, 특수하게 열리는 시간대가 있다. 아침에 물을 뜨러 나오는 것은 모두 여자뿐.
‘섞여 들어가야겠군.’
그게 지금 세실을 제외한 일곱 명의 남자들이 여장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맨 처음, 세실이 직접 작전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자,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의 단장인 렉시드가 의욕을 내보였다. 하지만 눈이 멀어 버린 자도 남자라고 알 수 있을 만큼 사내의 특징이 뚜렷했던 터라 그의 의견은 기각당하고 말았다.
그 후, 마른가시나무군 내에서 체구가 작고 예쁘장한 병사를 골라내는 것에만 하루가 걸렸다. 그렇게 수백, 수천 명의 투표와 토너먼트를 반복해서 뽑힌 다른 의미의 정예병 일곱 명은 여인들 무리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탓에 도리어 눈에 띄어 버리긴 했지만, 잠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슬슬 움직일까.”
낄낄 껄껄 웃던 여장 남자들이 세실의 말에 눈을 빛냈다.
정확하게 한 시간 뒤, 성문이 열렸다. 기사단장 렉시드는 군의 일부를 이끌고 성채에 발을 들였다. 얼굴 여기저기에 피가 튄 얼굴로 웃고 있는 세실이 그를 반겼다. 지휘관의 머리를 잡아 쥐고서 단검을 목에 들이밀고 있는 사람치고는, 참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낯이었다. 그녀가 주문처럼 낮고 느릿하게 말했다.
“취할 것은 취하고, 모두 불태워라.”
세실에게 붙잡힌 마이라 성채의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국의 군대가 불타는 마이라 성채를 발견했을 무렵에는, 침략자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일개 마을 따위가 아닌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마이라 성채가 함락당한 후, 룩세인 왕국은 태도를 바꿔 더욱 본격적으로 나섰다. 불순한 분자들을 뿌리 뽑고자 대대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고 수색망을 펼쳤다.
하지만 이름 모를 집단은 그런 룩세인 왕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덜미를 잡을 즈음이면 귀신같이 도망쳤다. 어떻게 타국의 군대가 지리를 이만큼이나 잘 알 수 있겠느냐. 이것은 내부의 소행이다. 어쩌면 병력이 빠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룩세인 왕국군은 일라베니아의 동부 전선을 채 넘어서기 전에 급하게 군대를 물려야 했다. 구색 맞추기용으로 조금 남겨 둔 병력으로는 동부 전선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그 덕분에 여유가 생긴 동부 전선의 병력이 다시 중부 관문으로 이동, 휘청이던 일라베니아 제국의 숨통이 조금 트였다.
리카르디스는 막 그 소식을 전해 받은 참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일을 잘해 줬군.”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겠죠.”
사자갈기의 드윗이 눈을 감고 있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을 그녀를 잠깐 떠올려 보는 듯 했다.
그 누구도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일라베니아 제국군이라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일라베니아의 갑옷을 벗어서가 아니라, 그저 누가 봐도 훌륭한 산적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병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모습과 그들은 너무나도 달랐다.
마른가시나무군을 목격한 룩세인 왕국 사람들은 그들의 전투 방식과 악행을 보고 범죄자 집단일 거라 확신했다. 실제로도 마른가시나무군에는 범죄자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그렇게 의심군에서 벗어난 그들은 리카르디스가 알려 준 경로를 통해 이동하며 빠르게 주변 왕국을 휘저었다. 때로는 몇 백 정도의 소부대, 때로는 몇 천의 강력한 군대의 규모로. 잠입, 뇌물, 변장 등. 다양한 편법을 이용한 마른가시나무군은 성과 요새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그들이 그렇게 타국을 휘젓는 동안 덜미를 잡히지 않은 배경에는 리카르디스의 지식, 거기에서 더 나아가 황금정원이 있었다. 일라베니아에서부터 뻗어 나간 대상단 황금정원은 타국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황금정원의 클로에가 리카르디스를 만나면서부터 그 성질은 조금 더 정보기관에 가깝게 변모했고, 금전과 물품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수많은 정보가 수년간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알기 어려운 뒷길과 산길, 이맘때쯤이면 물이 빠져 길을 드러내는 계곡, 각 왕국의 병력과 주요 성채에 머무는 주둔 병력 등등.
준비가 갖춰져 있다고는 하나 급조된 계획들이었다. 변수는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었음에도 왕국이 빠르게 꼬리를 마는 꼴을 보면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평소와 같이 잘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붉은수레바퀴와 마른가시나무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전하?]
리카르디스는 생각나는 게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세실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둘 다 황제의 개라고 불린다는 거죠. 표정을 보니까 알고 계신 모양인데요.]
[……본인 앞에서 하기는 참 힘든 말이라.]
[그러게요. 제 앞에서 떠드는 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군요.]
목숨이 서너 개쯤 되지 않는 이상, 그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겨울바람에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뭐, 아무튼. 둘 다 황제의 개이긴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붉은수레바퀴가 번견이라면, 마른가시나무는 사냥개에 가깝거든요.]
세실이 씩 웃었다.
[그리고 보통 사냥개는 목줄이 풀리고 나서야 일을 더 잘하는 법이지요. 염려 마십시오, 전하. 저도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 호언장담대로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일을 잘 처리해 줬다. 덕분에 당장에라도 뚫릴 것 같던 방어선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일 터였다.
리카르디스는 대충 날을 헤아려 보았다. 보름달이 뜰 때까지 이 주 가량이 더 남아 있었다. 만약 구름이 달을 가려 버리면, 다음 시기까지 버텨야 할 수도 있었다.
‘……할 수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어떻게든 해야지.”
어떻게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은 자기 자신을 다독이려는 듯 몇 번이고 울렸다.
* * *
시종장은 서늘한 인상의 사내를 보자마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도착할 것이라는 얘기는 전달받았지만, 그게 12시 종이 울리고 다음 날이 된 지 1분쯤 지난 지금을 이르는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아문의 가주를 뵙습니다. 모, 모실 준비가 미흡하여 송구…….”
당황한 시종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인사는 남자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흩어졌다.
“소란 피우지 말아라. 환대를 받고자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삼엄해야 할 리비타 궁의 경비가 미흡한 것은 송구할 만한 일이긴 하지. 대체 책임자가 무얼 했기에 경비가 이렇게 방만하게 구는 것인가. 힉살라의 밤을 방해할 종자들이 날뛰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렇게 될 시 면구스러워 리비타의 궁전에서 내내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으니 당장 경비대의 책임자를 불러라. 내 친히 문책하도록 하겠다.”
시종장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하카브의 옆에 붙어 아첨하며, 아랫것들을 쥐어짜고 제 배 불리기 바쁜 재상 아틸라크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경비대장을 부르러 가려던 시종장은 궁전 한쪽에서 황급하게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을 발견하고 잠깐 발을 멈췄다. 브네학스 또한 이 밤의 고요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눈으로 베어 버릴 듯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시종장은 기겁해서 그들을 불렀다.
“이, 이 무슨 소란이냐!”
테이블, 의자, 찻주전자 등을 분주하게 옮기던 시종들은 시종장 뒤의 브네학스를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시종과 시녀가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자 브네학스가 시종장의 어깨를 밀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인가.”
시종 중 한 명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말에 답했다.
“그, 그것이. 간제 왕녀 전하께서 밤놀이를 가신다 하여……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잠시간 시종을 빤히 내려다본 브네학스는 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해라. 경비 임무를 소홀히 하는 병사들이 이 어둠 속에서 왕실의 귀한 핏줄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으니, 내가 직접 뵈어야만 하겠다.”
브네학스는 새파랗게 변해 버린 시종과 시녀들의 낯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간제 왕녀와 엮이면 문제가 없었던 적이 더 드물긴 했지만서도.
시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는 리비타 궁전의 정원 중 호수가 크게 자리한 곳이었다. 시녀와 시종들이 간단한 다과와 담요 등을 나르는 중이었고, 호수 근처에서는…….
“아하하, 전하!”
한 남자와 여자가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고 있었다. 브네학스는 잠깐 제 눈을 의심하고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달도 선명하게 뜬 이 오밤중에? 나 잡아 봐라?
“이런 앙큼 상큼한 귀염둥이 같으니! 잡으면 혼내 줄 테야!”
“…….”
브네학스는 순간 할 말을 잃어 입을 여닫는 행위만 반복했다. 사뿐한 달음박질은 일 분 여간 지속되었다. 간제가 남자를 뒤에서 잡아 끌어안았다. 달리던 힘을 이기지 못한 두 사람이 풀밭을 굴렀다. 꺄르륵,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브네학스는 이마에 잠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골치가 아파 왔다.
간제는 자신을 몸으로 덮치듯 누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타타라, 잡히면 내가 어쩐다고 했지?”
남자가 촉촉한 목소리로 답했다.
“혼내…… 주세요…… 전하.”
브네학스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걸어간 그는 간제 왕녀의 위에 겹쳐 올라간 남자의 옷을 붙잡았다. 한 손으로 성인 남자를 번쩍 들어 올린 브네학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무엄하다. 감히 왕실의 핏줄을 욕보이다니.”
남자는 조이는 옷자락 때문에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켁켁 거리는 소리만 냈다. 브네학스를 발견한 간제는 자세를 바꿔, 풀밭에 모로 누운 채 턱을 괴었다.
“이게 누구야. 아문의 가주가 아닌가. 내일 온다 들었는데, 아니지. 종이 울렸으니 내일이 되긴 했군. 시간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니까.”
“브네학스 아문이 고귀한 발타의 따님을 뵈옵니다. 상황이 이러하여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그 전에 그 손부터 놓아라.”
브네학스는 간제를 응시한 채, 손에 힘만 풀었다. 풀려난 남자가 재빠르게 간제의 뒤에 숨었다. 그가 눈물을 글썽였다.
“전하, 저 난폭한 이는 대체 누구죠? 타타라는 너무너무 무서워요.”
“일라베니아인이군.”
타타라, 라고 불린 남자의 억양을 확인한 브네학스는 그의 출신을 확신했다. 브네학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웃지도 못했다. 리비타 궁전에서 일라베니아인? 그것도 이런 전시에? 그의 눈동자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브네학스는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찌하여, 이 상황에 대해 보고 받지 못한 건가.”
대답은 다른 곳에서 왔다.
“아문. 애꿎은 사람 잡지 말게.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음을 알 텐데.”
간제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재상 아틸라크와 브네학스 아문은 앙숙이었다. 브네학스는 리비타의 주인을 두고 제 입맛대로 행동하는 아틸라크가 마음에 찰 리 없고, 아틸라크는 사사건건 옳은 말만 해 대는 브네학스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타타라’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점 또한 그 일환이었다.
아틸라크는 자신이 문제없다 판단한 애완 인간 건에 대해 브네학스가 민감하게 굴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수상한 인물을 들이냐며, 브네학스가 제 속도 뒤집고, 궁도 뒤집을 미래가 빤히 보였으니, 아틸라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자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겠습니다.”
“나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서 말이야. 이만 물러가라.”
“상황의 엄중함을 헤아려 주십시오, 전하.”
“물러가라 하였다.”
숨도 쉬지 않는 듯 빠르게 말을 주고받은 남녀는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곧 브네학스가 뒤따라온 수하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데려가라.”
무게를 한껏 잡고 있던 간제가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아, 저 개싸가지.”
병사 두 명이 흉흉한 기세로 타타라에게 접근했다. 타타라는 히익 높은 비명 소리를 내며 간제의 등에 찰싹 붙었다. 다가오는 병사들을 살벌한 눈으로 바라보던 간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만!”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간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웃었다.
“브네학스 아문.”
“하명하십시오.”
하명은 개뿔. 입만 살아서는, 쯧. 간제가 다 들리게끔 그를 욕했다.
“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첩자가 아닌 내 손님이다. 신체적 상해를 입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성껏 대우해야 할 것이다. 감히 내 귀여운 타타라를 개처럼 끌고 가서 죄인 취급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해했습니다.”
“우리 타타라는 나랑 놀 때 빼고는 바닥을 밟지 않는다. 귀한 아이거든. 그러니,”
간제가 웃으며 브네학스를 검지로 콕 가리켰다. 브네학스는 간제의 눈동자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이겨 보겠다는 열정이 불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대가 직접, 안아서 곱게 옮겨라.”
간제의 심술궂은 말에 타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네학스는 잠시간 가만히 간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받듭니다.”
아주 자그마한 미동도 없는 브네학스의 표정에 간제는 패배를 직감하고 씩씩 성난 숨을 내쉬었다. 브네학스는 타타라를 향해 척척 걸어갔다. 타타라는 숨도 못 쉬고 눈만 뎅그러니 뜬 채로 굳어 있었다. 한 발, 두 발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히, 히익.’
엉덩이 걸음으로 조금 물러선 것으로는 브네학스를 피할 수 없었다. 타타라는 결국 공주님처럼 브네학스의 너른 품에 안기게 되었다. 타타라가 얼굴을 구깃구깃 일그러트렸다.
“모시겠습니다.”
브네학스는 제 머리통에 과자를 집어 던지는 간제의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갔다. 브네학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궁전 복도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무섭도록 일정한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타타라가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귀하게 자라서…….”
브네학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간제와 하하호호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수상한 것 이전에 좀 이상한 인간인 것 같았다.
“하지만 타타라는 깃털만큼 가벼우니까요, 괜찮으시죠?”
“…….”
리비타 궁전, 지하 감옥 안.
곱게 안아서 모신 간제의 애완 인간 ‘타타라’는 지하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소파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편히 있으라고 예의상 말했다지만, 편해도 정말 너무 편해 보였다.
브네학스는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고생 한 점 묻지 않은 백옥 같은 피부, 햇살 같은 눈부신 백금발, 수려한 외모까지. 겉보기는 그럴싸했으나, 간제는 이성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부류가 아니었다. 간제와 짝짜꿍이 잘 맞는 이 수상쩍은 인간이 어떤 경로로 굴러들어 왔을까. 브네학스의 눈이 빛났다.
“출신은?”
“일라베니아요.”
“일라베니아 어디.”
“지금 발타의 노예상이 어디서 제일 활발하게 활동하는지 아세요?”
“남부.”
타타라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검지로 브네학스를 콕 가리켰다. 대충 ‘바로 그거예요.’ 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몸짓이었다. 문 옆에 선 병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허,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들과 달리 브네학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둥의 사소한 반응도 없었다. 말없이 허리춤의 단도를 꺼내 들었을 뿐이었다. 타타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 간제 전하께서 나에게 상해를 입히지 말고 귀하게 대하라…… 아악!”
브네학스는 타타라가 말하는 도중 그의 손을 잡아 테이블에 고정하고, 단도로 내리찍었다.
쾅!
얼마나 세차게 내리찍었는지, 테이블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타타라가 밭은 숨을 뱉어 냈다. 단도는 중지와 검지 사이에 정확하게 꽂혀 있었다. 브네학스가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상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이후 끈질기게 추궁한 끝에 일라베니아 황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여, 정보를 얻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노라…….”
브네학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테이블에서 단도를 뽑아내었다.
“그렇게 전하께 전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브네학스는 꽉 쥐고 있던 타타라의 손목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가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테이블로 끌려왔다. 단도를 한 바퀴 돌린 브네학스가 타타라의 목덜미 아래에 단검을 댔다.
“일라베니아와 달리 발타의 고문은 세분화되어 있다. 산 채로 해부되어 본 적 있나?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게 될 것이다. 순순하게 입을 열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주겠다.”
브네학스는 남자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을 보았다.
“저,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전하의 사랑을 받아서 좀 겁대가리가 없어지긴 했는데, 지금 다시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아, 맞아…… 겁대가리란 이런 거였지…… 하고 기억나기 시작했다고요!”
브네학스는 말없이 단도를 그의 목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감각이 닿자 타타라가 끼엑 소리를 내며 진저리쳤다.
“신분 증명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 그게…….”
남자가 문 양옆에 서 있는 병사 두 명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나가라고 하세요.”
브네학스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옷을 벗어야 보이는 건데, 제가 부끄럼을 많이 타서…….”
“…….”
브네학스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고, 병사들의 표정도 애매하게 변했다. 타타라가 앙칼지게 병사들을 다그쳤다.
“왕녀 전하의 총애를 받는 내 몸을 그렇게 보고 싶은 거야? 이 미모가 아무리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징그러운 털보들 같으니!”
귀밑 수염, 턱수염이 풍성한 털보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브네학스는 하,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털보들이 씩씩거리며 방에서 퇴장했다. 브네학스는 병사들이 나간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타타라와 눈을 맞췄다.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 줄지 기대해 보지.”
타타라가 작은 소리로 꿍얼거렸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브네학스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멀어지던 단검에 제 목을 들이댄 타타라 때문이었다. 하얀 살갗 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 놓은 단검이라, 생각보다도 깊게 상처가 생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짧은 시간 대치했다. 타타라는 목에 큰 상처가 난 사람 같지 않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흐르던 피가 이내 테이블 위로 툭툭 떨어졌다. 끈적한 피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타타라가 아래를 흘끗 쳐다봤다.
“오, 씨. 이, 이게 왜 이렇게 많이 흘러.”
담담하게 웃고 있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호들갑이었다.
“이, 이거 흉 지면 어떻게 하죠.”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 뭐…… 브네학스는 타타라가 허둥지둥하는 꼴을 관람했다. 뭘 보여 준다더니, 바보짓이었나 싶었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마음이 식어 가던 때였다.
브네학스는 눈을 크게 떴다. 목의 상처를 감싼 타타라의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길고 깊은 상처가 빛 아래에 빠르게 아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종래에는 목 부근의 핏자국만 아니었다면 방금 전의 상황을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 말끔하게 사라졌다.
브네학스도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신성 제국이라는 점 때문에 신성력이 일라베니아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곤 했으나, 사실 치유의 힘을 지닌 이들은 일라베니아뿐만이 아니라 대륙 여기저기에서 태어났다. 발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력을 숭배한다고 해도 늙고, 병들어 죽는 것에 예민한 권력자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리비타 궁전에 속한 치유사들 중에서도 이렇게 순식간에 상처를 아물게 하는 자는 없었다. 귀족 가문에 의탁하여 지내는 치유사들은 작은 생채기 정도만 회복하는 정도도 허다했다. 그것은 일라베니아의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특수한 사람들만 빼면 한적한 영지의 신관 같은 경우에는 큰 힘을 지니지 못했다.
이 정도의 힘을 쓸 수 있는 자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이리라, 브네학스는 확신했다.
“……너는…….”
타타라는 손수건을 꺼내 붉게 젖어 있는 손과 목, 테이블, 단도 등을 닦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난로에서 은은하게 불타오르는 장작 위로 손수건을 던졌다. 뒤돌아선 남자가 브네학스와 눈을 맞췄다.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은 피곤한 듯 나른해져 있었고, 연극이라도 하는 것같이 풍부하던 표정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일라베니아에 단 일곱뿐인 대신관, 라헤안시. 발타의 힉살라를 치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노니. 그대, 아문의 가주 브네학스는 필시 나에게 예를 갖춰야만 할 것이다.”
브네학스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타타라, 라헤안시는 도도하게 연기 중이었다가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잠깐 몸을 굳혔다.
“좋아, 이건…… 기대 이상이로군.”
라헤안시는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대지가 새하얀 색으로 뒤덮이며,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제국군은 원래 목적이었던 중부 관문으로 다시 이동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쉬지도 못하고 이동한 후, 곧바로 동부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인지, 아니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 때문인지 행군 속도는 평소보다도 처져 있는 상태였다. 연합군 측 또한 비슷한 상황이라는 점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병사들이 주위의 눈과 말라비틀어진 초목을 정리하고 야영을 준비했다. 리카르디스는 막사에서 벗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았다. 제국에서 발타 왕국으로, 그리고 끈질긴 추적을 떨쳐 내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와 격렬한 전투까지. 쉴 틈 없이 혹독한 시간을 보내 온 병사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중부 관문에 도달한다고 해도 큰 전력이 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전달받은 서신을 통해 각지의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 황실에서 파견된 지원군의 규모, 늘어나는 연합군 측의 병력과 파괴되거나 함락당한 일라베니아의 주요 거점들까지. 길게 서술했으나 결국에는 중부 관문 또한 이미 한계에 달했다는 사실을 이르고 있을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후 한숨을 쉬었다.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신관님! 날도 추운데 안에 들어가 계시지…….”
리카르디스가 빙긋 웃는 것으로 병사의 말에 답했다. 제국군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 이 군을 이끄는 것은 대외적으로 사자갈기의 드윗이었으며, 리카르디스는 그의 옆에서 이따금 조언-명령-을 건네는 신비스러운 고위 신관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신관들이 하는 일,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에 힘을 많이 쓰기도 했더니 알아보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평소 같으면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을 리카르디스의 옆구리에 몰래 꿍쳐 둔 꿀이나 말린 과일 등을 끼워 주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로젤린에게 그대로 넘겨줘야겠다 싶었다. 얼음낚시를 하러 간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그녀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리카르디스는 헐레벌떡 달려오는 정찰병의 모습을 보고 곧바로 지휘부 막사로 귀환했다.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정찰병 사이에 있는 낯선 제복의 병사를 발견했다. 부러진 화살이 아직 꽂혀 있었으며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지탱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지친 모양새였다. 리카르디스를 발견한 정찰병들이 반색했다.
“신관님!”
리카르디스는 가까이 다가가 남자의 상태를 자세히 확인했다. 부르튼 얼굴과 갈라진 입술, 여기저기 얼굴에 난 생채기, 어깨에 꽂힌 부러진 화살 등. 명백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우선, 치료부터 하도록 하지요. 안쪽으로.”
병사 두 명에게 걸쳐져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망토가 휘날렸다.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따뜻한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사내는 잠시 기절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틈을 타서 치료사들과 함께 남자를 보살폈다. 때마침 로젤린이 돌아왔다.
“혹시 아는 얼굴인가?”
작게 속삭이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날이 선 기세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붉은말 남작의 장남, 데런입니다.”
붉은말은 붉은수레바퀴의 가신으로서 주인이 없는 빈 백작령을 지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붉은수레바퀴령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정찰병들은 붉은말의 데런이 향하던 곳이 지금의 사자갈기군 진영이 아닌, 중부 관문 측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지원 요청이로군.”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쓸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단순한 도적의 소행일 수도 있으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큰 전투라면 연합군과 충돌했다고 보는 쪽이 더 확률이 높았다. 영토가 광대한 만큼 일라베니아에는 빈틈이 많았다. 수십, 수백 개의 방어선, 험준한 산길 등. 그 빈틈을 뚫은 병력이 기어코 중부에 침입했다는 것이다.
치료사가 막 데런의 어깨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화살을 받은 로젤린이 수통을 열어 피가 엉겨 있는 화살촉을 씻어 냈다. 그녀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금속이 비쳤다.
“발타의 화살입니다. 연합군이 길을 돌아온 모양이로군요.”
그 말을 듣는 즉시 사자갈기의 드윗이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윗이 소리 높여 외쳤다.
“중부 관문에 서신을 보낸다. 미처 감지하지 못한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서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휘관 사자갈기 드윗은 이 사태를 엄중하다 판단하여, 사자갈기군과 제국군을 이끌고 곧바로 붉은수레바퀴령으로 진군하겠다. 부디,”
중부 관문에 얼마쯤 뒤면 당도할 예정이라 알렸는데, 그 일정이 뒤틀어지게 되었다. 합류할 지원군만 기다리고 있던 중부 관문으로서도 큰 출혈이었다.
막사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운을 빈다.”
붉은말의 데런은 이동하기 직전 깨어났다. 곁에 서 있던 로젤린을 발견한 그는, 그녀의 머리 색이 갈색이건, 코와 입을 가린 상태이건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부터 펑펑 흘렸다.
“아가씨! 죽여 주십시오!”
로젤린이 황급하게 데런의 입을 막았다.
“잘 봐, 나는…… 경의 아가씨가 아닐 거야.”
“……?”
로젤린도 아직까지는 실종되었다 알려져 있었기에, 사자갈기군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위장 중인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데런은 잠시간 로젤린의 말을 해석하며 눈알을 굴리다가 “우리 아가씨 맞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로젤린이 멋쩍어 하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막사의 모두를 둘러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사람은 좋은데 눈치가 조금 부족해서…….”
로젤린의 입에서 나오니 무척 이상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데런과 얘기를 나눈 결과, 확률 높은 가설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소수의 부대로 방어 병력에 들키지 않게 잘게 쪼개져서 국경을 넘은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었다. 외성을 넘은 그들은 백작령의 사람들을 학살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내성 안으로 피신하여, 고군분투 중이라 했다.
붉은말의 데런은 목숨을 걸고 빠져나와 중부 관문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추격대가 따라붙어 부하도 다 잃고 본인도 부상을 입었지만,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중부 관문으로 가던 중 사자갈기군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전대 백작 부인께서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영지민들에게 미리 일러 둔 덕에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병력의 차이가 커서 얼마나 더 버틸는지…….”
데런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며 세차게 움직였다. 어쩌면 지금쯤 함락되었을지도 모르겠노라는 말을 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땅을 짓밟고자 하는 병력은 대략 육천여 명으로, 현재 사자갈기군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였다. 그 사이에 마인이 있다면 수의 차이는 무색해질 테지만, 성 내부의 병력이 있으니 전투는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함락된 상황에서는 뾰족이 대응할 수단이 없다는 얘기였다. 반드시 함락되기 전에 도착해야만 했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붉은수레바퀴령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도, 연합군과 대치할 정도의 병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이 사자갈기군뿐이었다. 병사들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친 발걸음을 애써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사자갈기의 드윗, 로젤린과 데런, 오소리 부대를 포함한 기병대 천기는 무리에서 벗어나 한발 빠르게 이동했다. 로젤린은 무리의 선두에서 달렸다. 하아, 하아. 급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눈앞에서 하얗게 번졌다.
[아가씨, 오늘 날씨가 좋지요?]
로젤린은 자신을 보면 환하게 웃어 주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싱그러운 풀잎과 향긋한 과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 위로 번지는 저녁때의 굴뚝 연기.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로즈, 아가.]
‘로젤린’을 사랑한 누군가까지도.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어릴 적 로젤린에게 일라베니아란 오로지 붉은수레바퀴령, 에스터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세계의 전부, 그녀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포근한, 그녀가 사랑하는 곳이었다.
좌절에 쓰러지거나 흔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로젤린은 홀로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달리자, 말이 지쳐 쓰러지면 내 발로 달려가자. 그녀는 고삐를 세게 그러쥐었다.
* * *
헤사는 달리는 말 위에서 웩 속을 게워 내었다. 로젤린이 걱정스레 뒤돌아보자 몇 달 새 부쩍 자란 소년이 망토로 입을 슥 닦고는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 때문에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헤사가 아직 어려 고된 일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지친 말을 쉬게 할 때를 제외하고서는 먹고 마시는 것도 전부 말 위에서, 밤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화톳불 근처에서 찌그러져 자야만 했으니, 괜찮은 사람이 더 드문 시점이었다.
그렇게 삼 일을 달린 결과, 로젤린은 드디어 붉은수레바퀴령의 경계를 밟았다. 땅은 여기저기 불타고, 건물들은 이미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군마들이 땅을 진동시키자 와르르 잔해가 쏟아져 내렸다. 흙먼지가 뽀얗게 떠오르며 내리는 눈과 뒤섞였다.
한때 전투와 살육으로 시끄러웠을 장소는 고요했다. 거리에는 영지민과 연합군 병사의 시체, 병장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위에 뒤덮인 눈의 두께로 사건 발생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지원군이 오기 훨씬 전에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다.
멍하니 거리를 보던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성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과거의 어리고 작은 소녀가 말했다.
로젤린은 전쟁에 나가 본 적 있어? 무섭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 무서워.
숨이 턱 막혀 왔다.
로젤린은 성을 향해 내달렸다. 성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이 보였다. 입은 옷과 갑옷의 양식으로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의 병사나 제국군의 병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로젤린의 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감정이 끓었다.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가 로젤린의 피부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녀는 창대를 우그러트릴 듯 강하게 쥐고서 등자에 무게를 지탱한 채 몸을 일으켰다.
지휘관처럼 보이던 이를 향해 투창하려던 로젤린의 손이 우뚝 멈췄다. 시야에 이상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의 문양.
로젤린은 잠시 얼어 창을 쥔 채 그대로 달리기만 했다. 로젤린에게서 힘이 빠진 걸 느낀 군마가 발걸음을 늦췄다. 그사이 옆에서 달리던 붉은말의 데런이 뛰쳐나갔다.
“감히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에 발을 들이고도-!”
로젤린은 그 비통해하는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아, 잠깐만. 말할 틈도 없었다. 로젤린은 급히 손을 뻗어 데런의 망토를 쥐었다. 그가 켁 소리 내며 뒤로 이끌렸다. 데런을 옆의 건초 더미에 던진 로젤린이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려 뒤따라오던 기병대를 멈춰 세웠다.
기병대의 돌진으로 거리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 희뿌연 공간 안에 두 무리가 대치했다. 사자갈기의 드윗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로즈 경,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로젤린은 그의 말에 답하며 말에서 내려섰다.
“적이 아닙니다.”
성문 쪽에 있던 거구의 남자가 귀를 후비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휘날리는 깃발에 새겨진 문양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로젤린이 가장 잘 알았다.
“셍고· 제르타예. 라고슈의…… 지원군입니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남자를 향해 다가간 로젤린이 두 팔을 쫙 벌려 그를 안았다.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로젤린의 등을 살살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뭐지? 내가 지금 뭘 하는 거고,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거지? 하는 표정은 계속 지워지지 않았다.
건초 더미에서 겨우 빠져나온 데런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로젤린은 그제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 * *
로젤린은 성안의 뜰, 정원 가릴 것 없이 모닥불을 피워 돼지나 말 등을 통째로 구워 먹고 있는 라고슈의 병사들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데런이 대신 했다.
“그 연기가…… 이 연기였군요…….”
성이 불타는 줄 알았지, 설마 음식을 하는 연기였을 줄이야.
성문에서 만난 셍고·제르타예는 부족의 일원 중 한 명이 아닌, 셍고의 수장이었다. 그는 라고슈 지원군의 사령관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있었던 일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붉은수레바퀴령을 지나쳐 중부 관문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발타 개후레잡놈들이 어슬렁거리는 걸 보고 그냥 콧바람 한번 뀌었더니 다 뒤져 버렸다는, 그런…….
“상황 파악에 크게 도움이 되는 설명은 아니네요. 그렇죠, 아가씨?”
쓸데없이 솔직한 데런이 뒤에서 로젤린에게 속삭였다. 로젤린도 동의하는 바였다.
익숙한 정원과 복도를 지나쳐, 커다란 홀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왔다. 여기저기 의자나 카펫 위에 적당히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문이 열리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그중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화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중년 남자는 로젤린이 아는 누군가를 많이 닮아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아버지이자, 갈라·제르타예의 수장인 귈테였다.
드윗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 제국, 사자갈기군의 사령관 드윗이라 합니다.”
“라고슈 지원군의 책임자, 갈라·제르타예의 귈테다.”
대뜸 반말부터 하는 귈테의 첫인사에도 드윗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라고슈의 꺼지지 않는 불꽃에 대한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오늘에서야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위기에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성은…… 내 딸아이가 있는 곳이지. 누구에게도 감사 받을 일은 아닌 것 같군. 다름 아닌 일라베니아의 땅 한복판에서 내 딸이 위험했다는 점에서, 미안해야 하는 것 같긴 하고.”
드윗이 웃는 얼굴로 슬쩍 뒤를 돌아 로젤린과 눈을 맞췄다. 이,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라고슈 산産 딱딱한 얼음 인간이 경의 할아버지인 것 같은데, 정말 곤란하네요. 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때, 문이 급하게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일 정도로 숨을 크게 몰아쉬는 에델바이스였다. 로젤린은 빠르게 그녀를 훑었다.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을 보니 남아 있던 한 줄의 긴장마저 풀리는 게 느껴졌다.
드윗이 에델바이스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
“드윗 경!”
“예?”
“피곤한 분을 붙잡고 이러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에델바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제 볼을 쓸고 있었다. 전투의 여파로 아직 불안한 것일까. 로젤린은 투구 속에서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사벡.”
귈테가 점잖게 에델바이스를 만류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드윗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발타에 남하할 당시 사자갈기군이 총사령관님 휘하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에, 그렇습니다.”
“호, 혹시…….”
에델바이스는 이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드윗은 에델바이스가 총사령관과 함께 실종된 그녀의 딸에 대해 묻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로젤린의 생존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부인, 진정하시고, 편히 앉으신 후에 물어보시지요.”
“그래요. 그래야죠.”
에델바이스는 애써 진정하려는 듯 차분히 숄을 매만졌으나, 숨은 여전히 거칠었고 눈동자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돌연 멈춰 섰다. 드윗에게 가려져 있던 로젤린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드윗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투구를 벗고 있었나 싶었는데, 하다못해 바이저도 열려 있지 않아 눈조차 보기 힘든 상태였다. 투시 능력이 있지 않은 이상 로젤린을 알아볼 길은 없었다.
에델바이스는 잘게 몸을 떨며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한동안 투구를 빤히 바라만 보던 그녀가 천천히 로젤린의 손을 맞잡았다. 에델바이스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손이 차군요.”
로젤린의 손등 위로 에델바이스의 눈물이 뚝 떨어졌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모두…….”
에델바이스는 떨어트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다 가세요.”
* * *
하루하고도 반나절 후, 사자갈기군의 본대가 붉은수레바퀴령에 당도했다.
사정을 전해 들은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숨을 푹 내쉬었다. 눈앞이 깜깜했건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군 덕분에 한차례의 위기를 또 넘기게 되었다.
라고슈 왕실은 일라베니아, 정확히는 2황자 리카르디스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그 지원이 여태껏 일라베니아에 도착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라고슈를 벗어나기도 전에 인접한 주변 국가, 미테이트 왕국과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때가 공교로웠다. 리카르디스는 라고슈를 향한 도발 행위에 발타의 입김이 들어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제 힘이 되지 못할 거라면, 일라베니아도 쓰지 못하게 만들려는 하카브의 수작임이 분명했다.
최근까지도 지원 병력이 계속 북부에 묶여 있다는 얘기를 전달받았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병력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라고슈의 지원군을 전력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모든 계획과 전략을 수립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에 그들이 나타난 것은 그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갈라·제르타예의 수장인 귈테는 태연하게,
“지도에서 미테이트 왕국을 지우고 오느라 조금 늦어 버렸군.”
하고 말해서, 데런의 탄성을 자아냈다.
“아가씨의 할아버지 완전 멋있어요.”
로젤린은 제 옆에서 소곤거리는 데런의 말에 동의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왕국이라곤 하지만, 그 짧은 새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오다니. 그 단편적인 부분만으로도 라고슈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원군에는 총 여덟 개의 제르타예 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각 부족의 수장이나, 수장 대리 격의 핏줄들이 테이블에 한 자리씩 차지한 채, 사자갈기의 드윗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귈테.”
“뭔가, 셍고.”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 놓고 여기까지 와서 하긴 좀 그런 말인데.”
모두의 이목이 턱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향했다.
“2황자가 죽었다면서, 우리는 왜 여기 있나? 우리가 지원하기로 한 건 2황자 아니었나?”
“어, 그러게.”
“오, 그러게. 웬일로 맞는 말을 하시는데 삼촌이.”
젊은 남자와 여자가 심드렁하게 턱을 괸 채 대꾸했다.
“아무 가치 없는 놈들을 위해 피를 흘릴 셈인가? 그냥 사벡만 데리고 가자고.”
사자갈기의 드윗은 벽면에 서 있는 신관 차림새의 리카르디스를 한 번 몰래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반대로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살아계시면 그 지원은 유효하다 보아도 무방한지요?”
사자갈기의 드윗이 생글생글 웃었다. 제르타예 중 한 명이 재수 없다는 듯 침을 퉤 뱉었다. 귈테는 무표정한 얼굴로 데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붉은수레바퀴령에 발을 들인 군의 최고 지휘관이라 소개를 한 사람이 왜 계속하여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하는가 하고.”
“이런, 들켰습니까.”
“제국인과의 말장난을 즐겨 하는 편이 아니다.”
드윗은 대답하는 대신 웃는 얼굴로 일어나 의자에서 한 걸음 비켜섰다. 제르타예들은 뭐야, 뭔데 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벽 한쪽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후드까지 눌러쓴 신관이 정적인 공간에서 홀로 움직이자 시선이 모였다.
리카르디스는 빈자리에 앉은 후,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후드를 젖혔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사르륵 흐트러졌다. 오, 미남 하는 소리가 테이블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쪽의 사정으로, 첫 만남이 불투명했던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제국의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라고슈의 지원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귈테와 달리 다른 이들은 전혀 예상조차 못 했는지 입을 떡 벌렸다. 그중 한 명이 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건국제 때 딤라와 관디테를 호위했던 할잉겐·제르타예의 수장이었다. 유일하게 리카르디스를 본 적 있는 이에게 이목이 몰렸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귈테가 다시 리카르디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 형제들이 경망스럽게 입을 놀린 점을 사죄드립니다.”
2황자 죽은 거 아냐? 2황자 죽었으니까 돌아가자! 옳소 옳소! 했던 이들이 입을 합 다물고 귈테의 눈치를 살폈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밤이 찾아오면 이델라브힘의 욕도 한다 하니 말이야.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으니 군장도 괘념치 말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승리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현재의 전황을 크게 뒤집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일라베니아의 패배를 예감한 나라들이 한 발 걸쳐 보고자 연합군과 동맹을 맺고 지원군을 보내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적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지. 라고슈 지원군 사만이 더해진다 하더라도 수의 차이가 커. 물론 전장 한두 군데의 전황을 좌지우지할 수는 있을 테지만, 이 전체적인 전쟁의 흐름 자체를 뒤엎을 수는 없으리란 사실만은 명확한 상황.”
리카르디스는 현재 제국군이 처한 상황을 기탄없이 서술했다. 지나치게 솔직해 제르타예들이 당혹스러워할 정도였다.
“희망적으로 상황을 관측해 보아도 언제 무너지느냐의 차이이며, 만약 일라베니아가 무너질 경우 지원했던 라고슈마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음…….”
제르타예들은 음, 정말 맞는 말인 거 같아. 지금이라도 발을 빼는 게 낫지 않나…… 하고 리카르디스의 말에 설득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이목이 그를 향했다.
“2주를 버틴다면 승산이 있다.”
“2주라…….”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초저녁, 아직 다 차오르지 못한 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2주 후, 연합군 병력의 반 이상은 일라베니아에서 발을 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라베니아와 라고슈 측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되겠지.”
리카르디스는 2주 후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내부의 몇몇 가신들만 알고 있는 정보였으나, 지원군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었다. 제르타예들이 눈을 크게 뜨고 끔벅거렸다. 뭔가 준비를 잘한 것 같으면서도, 운도 무척이나 필요하고, 한마디로…… 도박이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르타예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나?”
귈테는 그 질문을 듣고도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라고슈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귈테가 제르타예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찬성.”
그가 던진 한마디에 제르타예 전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는군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로군.”
귈테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리카르디스도 그를 따라 피식 웃었다.
“2주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버틸 수 있겠나?”
다리를 꼬거나, 뒤로 한껏 누워 있거나, 옆 사람에게 반쯤 기대는 둥. 자유분방하게 앉아 있던 제르타예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어두워진 공간 속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러기 위해 왔습니다.”
귈테가 말했다.
“그러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가 끝났다. 하녀와 하인들이 드나들며 서류와 지도가 널브러져 있던 테이블 위를 음식 접시로 채우기 시작했다.
셍고·제르타예는 앞에 음식 접시가 놓이자마자 손을 뻗었다. 곧바로 옆에 앉은 귈테가 손등을 찰싹 쳐 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불만스러워하는 눈빛을 잠시간 주고받다가 리카르디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동맹국의 총사령관이 있는데 그게 먼저 입으로 들어가냐, 아 그러면 배고파 죽겠는데 어떻게 하냐. 라는 대화가 들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예법과 자신의 존재까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편히 먹으라고 말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제르타예들은 아직 식사 준비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음식에 무섭게 달려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식에 대한 욕구가 뛰어난 그들을 바라보며 무심코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가 아차 했다.
‘로젤린!’
그는 회의에 집중하느라 잠깐 잊고 말았던 자신의 호위 기사를 급하게 찾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채 고요히 서 있었다. 투구로 가려진 안쪽에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
정체를 밝히지 않은 탓에 자리에 앉지도, 함부로 음식에 손대지도 못하고 있던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한껏 아래로 휘었다. 불쌍하고 귀여웠다.
하인들이 음식 접시를 다 나르고, 식사 준비를 끝낸 후 나가자마자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불렀다.
“로젤린 경. 이리로.”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자신을 ‘로젤린 경’이라고 부른 시점에서 투구를 벗어 던진 상태였다. 그리고 후다닥 달려가 리카르디스의 옆에 서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겨우 단속하고 제르타예들을 둘러보았다. 귈테와 생고·제르타예의 수장이 로젤린이라는 이름에 반응해 식사를 중단한 채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잠깐 위장 중인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이다. 그대들에게는 각별한 이가 되겠군.”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에게 흘끗 눈짓했다. 인사할 기회가 드디어 만들어졌다. 로젤린은 배고픔의 고통을 간신히 견뎌 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식욕에 눈이 돌아갔어도,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음식에 먼저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지켜야 할 순서가 있으니 우선 그 순서부터 빠르게 진행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다시 후다닥 달려간 로젤린이 귈테의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손등에 제 이마를 대었다.
“갈라·제르타예. 사벡의 장녀 로젤린입니다!”
로젤린의 식욕 때문에 감동적이었어야 할 만남이 5초 만에 얼렁뚱땅 지나가게 되었다. 귈테는 어안이 벙벙한지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는 로젤린의 눈에서 욕망을 읽어 내곤 그녀를 곧바로 일으켰다.
“……많이 컸구나. 일단 허기질 테니 식사하며 천천히 얘기를 나누자꾸나.”
“네, 할아버지!”
로젤린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귈테가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순간 귈테의 턱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무척 좋아하는데 간신히 참아 내는 모양새였다.
제르타예들 사이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맨손으로 고기를 뜯고 있던 제르타예도, 독한 술을 들이마시던 제르타예도, 노릇노릇 잘 구워진 돼지 귀를 잘라먹던 제르타예도 벌떡 일어나 로젤린의 주위에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사벡의 딸이라고? 살아 있었구나! 얼른 사벡을 불러와!”
“아이고, 애가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이것도 먹어.”
“갈라 놈을 아주 쏙 뺐구만.”
“사벡이 몸이 연약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애는 예쁘게 잘 낳아 놨네.”
“아이고 이 비쩍 마른 거 봐라. 아주 그냥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겠어. 잘 좀 먹어야겠다.”
각각 사촌이나, 삼촌, 이모, 할아버지뻘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통에 가장 가까운 혈족인 귈테는 저 뒤로 밀려나야 했다.
회의장에서 내내 험악한 기운을 풍기던 이들이 엄마 아빠의 재롱을 보는 아기마냥 방싯방싯 웃는, 나름 진귀한 풍경이 펼쳐졌다.
로젤린은 그 한가운데에서 행복하게 식사했다. 음식 접시가 그녀 앞에 잔뜩 쌓였고, 잠깐 입안이 비는 것 같으면 누군가가 고기를 입안에 꽉 차도록 넣어 주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 진정한 천국이란 저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테이블의 다섯 번째 자리.
그렇게 로젤린이 행복에 겨워할 때, 회의 시간 내내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에델바이스가 들어왔다. 손님들에게 음식이 입에는 좀 맞느냐 묻기 위해 왔던 그녀는 로젤린을 둘러싼 소란을 보고 잠깐 멈춰 섰다.
에델바이스가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며 민망해했다. 제국의 총사령관이 있건 말건 자기들끼리 연회를 벌이고 있지 않은가.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 핏줄들이 원체…….”
에델바이스는 말을 골랐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도와 좋게 포장해 주었다.
“정이 깊고 가족을 많이 아낀다더니, 참 보기 좋군.”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리카르디스를 지나친 에델바이스는 서서 떠드는 제르타예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으며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일라베니아인들은 전혀 듣지 못했다.
곧장 무리가 해산되었다.
“저거, 저거 성격 안 죽은 거봐라…….”
“결혼하고는 좀 괜찮아졌나 했는데…….”
제자리를 찾아가는 제르타예들이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뭔가 협박이라도 받은 듯한 모양새였다. 정숙하고 기품 있는 붉은수레바퀴 전대 백작 부인이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저 야생마들이……?
리카르디스는 무리의 한 중앙에 있던 로젤린도 달달 떨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후에 물어보았지만, 로젤린은 제 목을 베어도 결코 말하지 않겠다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어머니 되는 자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리카르디스는 생각했다.
주책바가지 사촌, 삼촌, 이모, 작은 할아버지 등등을 쫓아낸 에델바이스가 로젤린의 왼쪽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저번에 붉은수레바퀴령에 들렸을 적, 로젤린이 보였던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델바이스와 정확하게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잘 알았다. 로젤린도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던 아까보다 지금이 불편한지 먹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진 상태였다.
에델바이스는 그런 로젤린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음식 접시를 그녀 앞에 밀어 주었다. 농후한 소스가 뿌려져 있는 소고기 요리로, 로젤린이 선호하는 계통의 맛이었다. 과거 단순하고 기본적인 맛을 추구했던 ‘로젤린’에 비해, 지금의 로젤린은 크림, 소스, 향신료 등.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미각을 한계까지 이끌어 내는, 한마디로 입안이 화려해지는 맛을 좋아했다.
그러니 에델바이스가 주고자 한 음식을 받는 사람은 과거의 제 딸이 아닌, 현재의 로젤린이었다. 로젤린도 그를 깨달았는지 잠시 멍하니 음식 접시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곧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 접시를 비워 냈다. 에델바이스는 그런 로젤린의 옆에서 계속해서 음식 접시를 밀어 주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그녀가 좋아할 법한 요리들로만.
그것은 참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심스레 그들을 훔쳐보았다. 딸을 잃어버린 여인은 속 끓는 슬픔과 고통, 미련을 여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다. 복잡한 상념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에델바이스는 한걸음 내디뎌 나아가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과거의 로젤린을 잊는 게 아니라, 지금의 로젤린과 과거의 그녀를 완전히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현실에 눈 돌리지 않고, ‘로젤린’의 기억과 흔적을 지닌 지금의 로젤린을 오롯이 마주 보는 것. 그것에 가슴이 더욱 헤집어져 상처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참 강인한 사람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모녀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왁자지껄한 식사 시간이 끝났다. 에델바이스도 성의 주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로젤린이 분주하게 제 품을 뒤지며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그러고 꺼낸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소라 껍데기였다.
“……이, 이거, 발타에서 빠져나올 때, 바닷가를 지나쳤거든요.”
로젤린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에델바이스는 그녀의 손 위에 놓인 소라 껍데기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귀를 대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좋아하셨던 게 기억나서.”
연신 눈치를 보던 로젤린이 귀밑을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그래서 가지고 왔는데…….”
갈라·제르타예는 바다 근처에 터를 두고 있었다. 사나운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라 온 에델바이스는 따뜻한 내륙 지방의 생활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따금 바닷가에 있는 별장에 머무르기도 했고, 바닷가를 떠날 적이면 항상 큼지막한 소라 껍데기를 들고 와 밤마다 듣곤 했다.
그걸 기억했던 로젤린은 우연히 지나가게 된 바닷가에서 소라 껍데기를 주워 보관했다가 혹시나 싶어 건네 본 것이었다. 에델바이스는 로젤린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역시 괜한 짓이었나? 하는 마음에 로젤린이 다시 껍데기를 집어넣으려 했을 때였다.
“라고슈의 바람은…… 매섭단다.”
에델바이스가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칼날 같은 바람이 바다 위를 스칠 때면, 검은 해변에 하얀 포말이 부서져 흩어지고, 절벽 끝까지 파도가 치달았지. 라고슈에서 지낼 때는 몰랐는데, 떠나고 나니 계속해서 그 소리가 그리웠어. 사랑했던 거지. 그래서 그립고,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수 없어서…….”
에델바이스는 로젤린이 건네준 소라 껍데기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녀가 귓가에 껍데기를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거 아니? 소라 껍데기 소리와 내가 기억하는 파도 소리는 무척 달라.”
에델바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 볼 수 없다고, 듣지 못한다고 해서 라고슈의 바다가 사라진 건 아니잖니. 나는 그걸 잘 알고 있거든.”
에델바이스가 다시 눈을 뜨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눈동자 속에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담겼다.
“그 소리는 내 안에 있어. 내가 기억해. 그러니 나는 괜찮을 거야.”
에델바이스가 소라 껍데기를 꼭 끌어안았다. 제르타예들은 에델바이스의 말에서 묻어나는 라고슈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아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치 없이 지켜보고 있는 일라베니아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드윗의 망토를 잡아채 끌고 나갔다.
리카르디스는 닫히는 문틈으로 에델바이스의 얼굴을 봤다.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안에 있어. 그러니 너와 나는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들은 로젤린의 눈이 휘었다. 그녀가 행복하다는 듯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 * *
하카브는 잠든 디에즈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깔린 막사 안. 공기조차 멈춘 것 같은 정적이 그의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에 흔들린 촛불이 그림자를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림의 한 장면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무지, 살아 있는 생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디에즈는 며칠간을 잠들지 않다가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잠으로도 피로를 푸는 둥. 인간으로서는 따라갈 수도 없는 일정을 소화해 내었다. 그때와 비교하니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다. 하카브는 그 변화의 시발점이 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누군가는 죽음이라고 부르던 로젤린의 실종이었다.
잠이 늘었다. 멍하니 있다가도 사소한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린아이처럼 손을 물어뜯기도 했다. 가끔은 악몽을 꾼 듯 급하게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불안해 보였다. 이는 지금 전쟁을 겪는 사람 중 열에 여덟은 보이는 모습이었다. 특별할 게 없었으나, 대상이 디에즈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왕실의 숭배 대상이자, 인간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였다.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미지의 흐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휘둘리기만 하는 평범한 인간과는 궤가 달랐다.
하지만 이렇게 디에즈가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잠이 많아진다. 하카브는 어릴 적 많은 동물을 길렀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약초를 뜯어 먹는 것도 아니고,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도 아니고. 이런 미련한 수면 행위가 대체 무엇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일종의 기도와 같은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뤄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하고 나면 제 마음의 위안이 되는. 하지만 하카브는 디에즈가 이 긴 잠 끝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나? 그러나 디에즈는 로젤린을 죽이고자 했다. 칼로 찔렀으나 실패했다며 싸늘한 얼굴로 얘기했었다. 그래 놓고서는 이제 와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굴다니. 그런 양가적인 감정을 가진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 아닌가? 하카브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의문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검은 달이 뜨지 않은지 몇 백 년이 지났던가. 마력이 없는 자들도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신성한 밤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카브는 조급해졌다. 대체 그 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기에 한 나라가 이다지도 광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단 말인가.
의문이 짙어졌을 때, 디에즈를 만나게 되었다. 하늘에 뜬 ‘검은 달’처럼 확실하게 증명 가능한 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력. 인간을 초월한 존재. 디에즈는 그야말로 검은 달이었다. 그래서 하카브는 한때, 정말 신이라도 만난 마냥 들떠 있었다.
“흠.”
하카브는 잠든 디에즈의 볼을 쓸었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익숙했다.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었다. 디에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곧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훔쳐보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자는 사람을 만지진 마시죠.”
눈을 뜨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디에즈가 하카브의 손을 틱 치워 냈다. 사춘기 동생 같아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진짜 사춘기였던 간제는 웃음이 나올 만한 정도의 소소한 규모로 일을 치진 않았기에, 하카브는 금세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다.
“귀엽게 논다는 식으로 웃는 거 보기 싫으니까 나가세요.”
아무리 봐도 간제와 비슷해지고 있는 게 맞았다. 둘이 별로 붙여 놓은 적도 없는데. 뭐야, 문제는 나인가? 나였어? 하카브가 태어나 처음으로 반성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막사의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어, 어. 안 됩니다.”
“어허, 이 사람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이 힘차게 펄럭였다. 이렇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올 인물이라고는 하카브가 아는 내에서는 한 명뿐이었다.
“디에즈님!”
장신의 여자가 성큼 막사 안에 발을 들였다가 하카브를 보고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아, 이런…… 전하도 계셨네요.”
그녀는 발타의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람가’의 가주로, 연합군 본대에서 굵직한 전투를 치러 온 전사였다. 마인이라 그런지 디에즈의 마력을 한번 느끼고 난 이후로는 어미 새 따라다니듯 그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하카브는 그녀를 괘씸하게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내 편끼리 사이좋게 지내니 기뻐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차호트.”
디에즈는 하카브를 대할 때와 달리,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카브 전하가 없을 때 얘기하려고 했는데, 에이 공쳤네.”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해.”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지금부터 전하는 안 계신 겁니다.”
차호트 람가는 디에즈가 누워 있는 침상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넓은 막사 안에 침대 주위로만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디에즈는 이 관심이 불편한지 어색하게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검은독사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산맥을 통해서 일라베니아에 침투하기로 한 애들이 무사히 성공해서 붉은수레바퀴령까지 닿았는데, 그게 글쎄.”
차호트가 연극적이게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멈췄다. 그리고 뒷말을 기다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얘기할까 말까? 해 줄까 말까? 놀리는 기색이 역력해 하카브가 그녀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인내심 되게 없으시다니까.”
차호트가 껄껄 웃고 말을 이었다.
“실패했답니다. 라고슈 측에서 원군이 왔다네요.”
“근데 그 얘기를 왜 나 없을 때 하려고 하나.”
“전하께서 얼마나 성질내실지 디에즈 님이랑 내기하려고 했거든요. 원래 키티랑 하는데, 지금 없더라고요. 원래 사람들은 누구 욕할 때 단합이 제일 잘되잖아요. 디에즈 님이랑 친분도 쌓을 겸 몰래 욕하려고 그랬는데 왜 눈치 없이 끼어 드셔서 제대로 욕도 못 하게 합니까, 거.”
“대놓고 욕하고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없는 셈 치람서요. 한 입으로 두말하시면 쓰나요.”
하카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말로 못 이기는 유일한 인물이 차호트였다.
“흠, 어쨌거나…… 정말 잘 버티는군. 이번에는 기대를 제법 걸었는데 말이야. 실망이 커.”
하카브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말을 흘렸다.
“우리 애들이 좀 연약해야죠. 어떤 미친놈이 겨울에 전쟁을 해요.”
차호트 람가는 아차, 하고는 디에즈를 바라보았다. 그가 목덜미를 쓸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맞다. 디에즈 님 때문이었지. 이건 말 안 한 걸로 칩시다.”
발타에서 자유분방하기로는 간제보다 더한 인물이라 그런지, 디에즈도 하카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곧 전령이 도착해 서신을 전달했다. 차호트가 말했던 불발된 계획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하카브가 턱을 쓸며 웃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대답은 없었다. 하카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일했군.”
차호트는 술병을 꺼내서 꿀꺽꿀꺽 마시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라베니아 유람은 이제 끝내도록 하자.”
서늘한 목소리가 땅을 기는 듯 낮게 울렸다.
“라고슈의 병력이 더해진 중부 관문은 더욱 단단해지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 맞춰 더욱 강하게 문을 두드려야 할 테니. 이르라. 일라베니아 전역에 퍼진 연합군 병력 모두 중부 관문으로 집결하라고. 총력전이다.”
차호트가 입가로 흐른 술을 닦으며 씩 웃었다. 곧 일어선 그녀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고귀한 주인의 명을 받듭니다.”
이제야 좀 재밌어지겠네. 바깥으로 나가는 차호트의 발걸음이 룰루랄라 가벼웠다. 하카브가 어이없다는 듯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길레드!”
칼릭스가 화내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허수아비 길레드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슨 일?”
순진무구하고도 태평한 대답에 칼릭스는 잠깐 이마를 부여잡고 씨근덕댔다.
“내가 올해 가장 많이 부른 인물이 누님에서 네 이름으로 바뀌기 직전이라는 건 알고 있나?”
“요즘 저를 자주 부르시긴 했죠.”
객관적인 사실만을 짚고 있을 뿐이란 걸 알아도 머리에 열이 올랐다. 칼릭스가 이를 갈며 말을 씹어 내뱉었다.
“이, 사고뭉치들은 대체 어디 있어.”
그 말에 길레드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또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저지르다마다!”
칼릭스와 계약한 마인들은 대략 사백여 명이었다. 이번 전쟁의 규모로 따지자면 결코 큰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편과 적군 측 마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해 큰 타격을 입기 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역할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전력이었다.
칼릭스는 병력을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마인’에 대한 좋지 못한 인식으로 벌어질 나쁜 일로부터 그들을 보호 중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마인들. 이, 사고뭉치들. 칼릭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하…….”
로젤린도 사고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이들은 수가 많은 만큼 어떻게 조절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식량 저장고에 몰래 들어가서 술 먹고 놀다가 실수로 화재 사고를 일으켰더군.”
로젤린이었다면 깔끔하게 흔적을 지워서 나왔으리라. 화재 같은 실수 따위를 저지를 리 없었다. 우리 누님이 그런 쪽으로는 철저하지. 흥하고 콧방귀를 뀐 칼릭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몰래 훔쳐 먹어도 된다는 건 아닐 텐데. 철저하지 못한 사고뭉치와 철저한 사고뭉치를 둘 다 겪어 보니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다행히도 책임자가 근처에서 순찰을 돌던 중이라 바로 진화했다지만 자칫하면 일이 커질 뻔했어!”
길레드는 눈알만 도르륵 굴려 대고 있었다.
“사고 수습하겠다고 책임자들한테 먹인 뇌물만 얼만 줄 알고 있기나 해! 돈이 아까운 게 아니야. 애들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느냐 하고 부패한 권력자가 제 새끼 두둔할 때 내뱉는 뻔뻔한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몹시 화가 나!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닌데 당황한 나머지 절로 튀어나왔어!”
사건이 정식으로 보고되면 얘기가 퍼지기 쉽고, 얘기가 쉽게 퍼지면 그만큼 마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최악은 푸른등불 공작이 마인 부대에 대한 권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인들을 보호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이래저래 뇌물이 최선이었다지만, 백작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런 불법적인 일에 엮이다니. 하늘에서 보고 계실 아버지가 통탄할 일이었다.
“죄, 죄송…….”
“어제부터 안 보이는 놈들이 다섯 정도 되는 거 같아. 분명 그놈들이겠지. 에렌, 딘, 체이시, 시온, 벨벳 이놈의 자식들! 빨리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해!”
“이름을 다 외우셨습니까?”
몇 백 명이나 되는데?
“사고 치는 놈들은 고만고만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백 명 이상은 외운 상태야. 그만큼 돌아가면서 사고를 잘 쳤다는 얘기지…… 길레드!”
칼릭스는 차분하게 얘기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큰소리를 냈다. 길레드는 그가 뒤 목 잡고 쓰러지기 전에 재빨리 바깥으로 나섰다.
길레드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알터가 들어왔다. 이 겨울철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더워서 저러나 싶었는데, 안색은 새파랬다. 최근 알터가 이런 식으로 들어왔을 때는 마인들이 사고 쳤을 때밖에 없었다.
“아, 제발.”
칼릭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 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푸른등불 공작에게 했던 말을 당장에 철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칼릭스가 불안감에 다리를 떨자 알터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흔들었다.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지도 몰라요!”
알터는 새파랗게 질린 그 얼굴 그대로 횡설수설했다.
“들키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니까!”
“…….”
아마 아닐 텐데, 그거. 있던 일이 없게 되지는 않을 텐데.
“다행히 목격자는 없거든요!”
“…….”
참 다행이죠? 하고 울먹이는 알터를 보며 칼릭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님이 보고 싶어.”
테이블 위로 엎어진 칼릭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 어린 말에 알터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칼릭스는 한참을 눈을 감은 채 테이블에 볼을 대고 있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홀로 사색을 즐기려 했건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으하하, 으헤헤, 꺄르륵 웃어 대는 병사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릭스가 알기론, 붉은수레바퀴 진영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막사 앞에서 저런 크기의 목소리를 낼 만큼 간이 크지 않았다.
칼릭스는 힘겹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간이 투기장을 만들어 싸움박질하는 어른 사고뭉치들이 보였다.
“백작님! 어디에 거실래요!”
붉은수레바퀴 산하 특별 마인 부대, 원숭이 대의 대장이 내깃돈 장부를 열심히 작성하며 칼릭스를 향해 소리쳤다. 대장이라는 인간이 대원들을 단속하지는 못할망정, 부추기고 판을 키우고 있다니. 하지만 칼릭스에게는 더 이상 그들을 교육할 힘이 없었다. 허술한 투기장 안의 선수를 확인한 칼릭스가 체념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금니에게.”
어금니는 어금니 대의 대장을 이르는 말이었다. 칼릭스는 품에서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동전이 꺼내어, 엄지손톱 위에 놓고 튕겼다. 반짝이는 금속은 원숭이 대 대장의 손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가 끄악 비명을 질렀다.
“부자!”
그녀가 귀한 성물이라도 대하는 마냥, 두 손으로 금화를 들어 올렸다.
“부자님이 오셨다아, 이 거지새끼들아!”
“부자 최고!”
“백작님을 찬양하라!”
원숭이와 어금니가 칼릭스의 허벅지 아래에 어깨를 받치고 그를 띄웠다. 두 사람의 어깨에 칼릭스가 앉게 된 셈이었다. 칼릭스는 팔짱을 낀 채 초연한 표정으로 그들이 둥개둥개 우리 부자 백작님을 부르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칼릭스는 잠시 높아진 눈높이에서 붉은수레바퀴 진영을 한번 훑어보았다. 막사 뒤에서 뭔가 암거래를 하는 것 같은 인간, 간이 투기장을 만든 인간, 지나가는 병사의 주머니를 슬쩍하고 있는 인간, 말 앞에 뛰어들어 자해 공갈을 하는 인간까지.
“들키지만 않으면 없는 일이라.”
참 좋은 말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칼릭스가 까마귀 대 대장에게 뺏은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투기장의 판돈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백작님!”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칼릭스의 코앞에서 넘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식량 창고 방화 사건의 범인이리라 예상되는 5인조의 대장 격인 에렌이었다. 칼릭스는 오늘 있었던 화재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사색이 된 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암거래를 하던 사람도, 간이 투기장에서 싸우던 사람도, 응원하며 깔깔 웃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입을 다문 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아주, 감이 더러웠다.
“모, 몰래 엿들었는데요.”
제국군 중앙 진영에서 또 뭔가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하지 말라고 설교라도 했을 테지만, 칼릭스는 그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을 재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인내심을 쓰고 있었다.
“중부 관문으로 오던 사자갈기군으로부터 서신이 왔어요.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을 침략해서 예정된 합류를 틀어, 에스터를 지원하러 간다고 했어요.”
어렵고 난해한 단어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칼릭스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붉은수레바퀴령, 연합군, 사자갈기. 예정된 합류를 틀어, 에스터를 지원…….
칼릭스는 입안을 감도는 피 맛에 정신을 차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이로 짓씹은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손수건으로 피를 꾹 누른 채 고개를 들었다. 중앙 본대에서 파견된 전령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칼릭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 있을 전투를 대비하여 마인들에게 빨리 잠자리에 들라고 다그치기만 했다.
“안 가도 괜찮을까요?”
“……붉은수레바퀴령을 침범한 병력은 사자갈기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 보고되었다. 내가 간다고 해도 이미 전투가 다 끝난 뒤라 별다른 도움도 되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중부 관문에 큰 빈틈을 만들게 될 뿐이지.”
어금니 대 대장이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백작령에는 전대 백작 부인께서 계신 것 아닙니까?”
칼릭스는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킨 후에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는 호락호락하게 성을 넘겨주실 만한 분이 아니고, 붉은수레바퀴령에 머무르는 가신들의 병력 또한 있다. 난 그들을 믿는다.”
칼릭스의 말은 어떤 바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믿는다. 무사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 할 일을 해야지. 이곳을…….”
피곤한 듯, 지친 듯한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종래에는 뚝 끊겼다. 복잡한 상념들이 칼릭스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는 것으로 일순 드러났던 감정을 모두 지워 버렸다.
“쉬어라.”
그렇게 말한 칼릭스는 겨울철 싸늘한 공기에 하얀 입김을 뿜으며 돌아섰다. 마인 부대의 각 대장들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뒤를 지켜보았다. 칼릭스가 머무르는 막사의 불은 그날 밤이 지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부터 마인들이 사고를 치는 빈도수가 확연하게 줄었다. 뒷골목에서 자란 사람들이 대다수라, 법과 규칙이 뚜렷한 장소에 적응하느라 마찰을 빚는 줄 알았더니. 조절하자면 조절할 수 있었잖아?
‘이 인간들이?’
칼릭스는 살짝 울컥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게 어딘가 싶었다. 생각과 온 신경이 붉은수레바퀴령으로 쏠려 있는 그 가운데에서도 마인들의 조신해진 행동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묘하게 잠잠해진 며칠이 흘렀다.
칼릭스는 둔영지를 걷던 도중,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한 발짝 물러섰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은 원숭이 대의 대장이었다. 칼릭스는 3층에서도 곧잘 뛰어내리는 누이를 혈육으로 둔 자로서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백자악님!”
“원숭이, 다른 사람들이 놀라니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건 좀 자제하도록 하고. 그래, 무슨 일인가.”
짐승이 엎드린 자세로 착지한 여자가 헤엑 헤엑 숨을 몰아쉬었다. 급하게 건물 위를 달려온 모양이었다.
“몰래 엿들었는데요!”
“……그래.”
그렇겠지.
“사자갈기군이 앞서 보낸 전령이 지금 도착했어요! 중부 관문으로 오고 있답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은 무사하대요! 백작 부인께서도 무탈하시고, 영지도 큰 피해 없이 전투가 마무리되었대요!”
원숭이가 다다다 쏟아 낸 말을 듣고 여기저기에서 마인들이 튀어나왔다.
“뭐? 무사해?”
“백작님! 무사하시대요!”
저번에 연합군이 붉은수레바퀴령에 침략했다는 소식을 훔쳐 듣고 미리 알려 준 에렌도 굴러 나와 허엉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제 고향인 줄 알 것 같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겼다. 칼릭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곧 마인들이 급조한 악기들을 들고 와 엉망진창으로 연주했다. 원숭이와 어금니는 몸을 들썩이다가 흥에 못 이겨 또다시 칼릭스를 어깨에 태웠다. 춤추며 노래를 부르기를 몇 십 분째, 칼릭스는 두 사람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원숭이, 어금니. 이제 그만 내려 줘. 나는 본대에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연회를 벌이는 무리 바깥에서 본대로부터 도착한 전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는 게 칼릭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높은 곳의 이점이었다.
“백작님께서 본대에 가야 한답신다아!”
그들은 인간 가마 고객의 바람을 훌륭하게 하나만 접수하여, 그대로 중부 관문 제국군 본대 둔영지까지 이동했다. 둥둥, 짤랑짤랑, 뿌우우 갖은 소음을 내는 무리를 본 제국군 병사들이 질린 표정으로 길을 텄다.
푸른등불 공작은 난데없이 들리는 소음에 막사를 나왔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칼릭스가 뒷골목 깡패 같은 이들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뭔…….”
수다쟁이 앵무새도 이 진귀한 장면을 구경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였다.
칼릭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인간 가마에서 내려 푸른등불 공작에게 다가갔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칼릭스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 * *
중부 관문 제국군 둔영지에 사자갈기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운 점은 사자갈기군뿐 아니라, 라고슈의 지원 병력도 더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건물 밖을 서성이다가 하얀밤 기사단에 끼어 있는 미레이미를 발견하고 화색을 지었다. 그 얼굴을 목격한 미미는 이를 두고두고 놀렸다. 길 잃어버린 어린애가 엄마를 찾은 표정이었다면서.
낄낄 웃은 미미는 전신 갑주를 입고 있는 어떤 기사를 가리킨 후, 수평으로 큰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원을 와구 와구 퍼먹는 시늉을 더 했다.
‘큰…… 접시…… 많이 먹어? 누님?’
칼릭스의 눈이 반짝이자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후드를 뒤집어쓴 어떤 신관을 가리킨 후, 자신의 얼굴도 한번 콕 찍고는 엄지를 두 개 추켜올렸다.
‘얼굴이…… 무척이나 최고야? 리카르디스 전하?’
이번에도 정답일 것 같았다. 칼릭스는 참았던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 전선의 승리와 선물 받은 동화책. 그 사이에 끼어 있던 리쉬 한 송이로 로젤린이 무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불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총사령관의 실종에 사기는 낮아진 상태였다. 다행히 동부 전선과 여기저기에서 승전보가 울려 퍼지며 조금 회복되었다지만,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를 알리는 것만큼의 효과는 없을 게 분명했다. 그걸 감안하고도 생존 사실을 숨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칼릭스는 계속해서 한 명에게 가려는 시선을 애써 떼어 내고 건물로 발을 들였다.
중부 관문의 지휘관들은 라고슈의 지원 병력과 제국군의 일부가 도착한 현 상황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을 마친 후에는 여전히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소의 피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자갈기군과 하얀밤 기사단, 일부의 남부 관문 병력과 라고슈의 지원군은 논의 후 적합한 곳에 배치되었다. 푸른등불 공작은 몇몇 사람들만 남기고 지휘부를 해산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푸른등불 공작, 황금정원 자작, 큰뿔산양 후작 등등. 전부 리카르디스에게 충성을 바친 이들뿐이었다.
하급 지휘관들이 주르륵 나가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드윗의 뒤에 서 있던, 후드를 눌러쓴 신관에게로. 얼굴을 반쯤 가린 신관이 턱을 쓸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나란 걸 아는 거지?”
“코와 입만으로도…… 전하 같으셔서.”
황금정원 자작은 ‘코와 입만으로도 충분히 잘생기셔서’라는 말을 둘러말했다. 후드를 젖힌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벽에 기대어 선 신관 앞에 방 안의 사람들이 일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일어나라. 모두 수고가 많았다.”
푸른등불 공작은 평소의 냉철하고 까칠한 모습은 어디로 지워 버렸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콧수염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공작이 고개를 숙이자 리카르디스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살아 계실 거라 믿었습니다.”
“못난 주인을 만나 고생이 많아.”
다들 훌쩍이느라 아니라는 대답을 못 했다. 정말 못난 주인을 만나 고생이 많은 자들이 되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모두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라고슈의 지원 덕에 위기를 넘겼다. 차후 보답에 관해 논의해야 할 테지만, 타국의 병력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게 우선 되어야겠지.”
“명을 받듭니다.”
“바다협곡과 고래무덤이 해상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라고슈의 해군 또한 합류할 예정이라고 하니, 해안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연갈색 나무 조각은 일라베니아의 병력을, 검은 나무 조각은 연합군의 병력을 뜻하는 모형이었다. 압도적으로 검은색의 수가 불어나 있었다. 멀리 떨어진 나무 조각들조차 모두 중부 관문을 향했다. 병력의 집결. 총력전이 펼쳐질 양상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연합군의 병력이 중부 관문으로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카브도 더 이상 시간을 끌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으니 말이야. 발타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도 견제해야 하고, 금전적으로도, 병사들의 체력적인 면으로도 시간을 끌면 피차 좋을 게 없으니까.”
리카르디스는 턱을 괸 채 연합군 본대를 뜻하는 검고 큰 나무 조각을 응시했다.
“앞으로의 전투는 더욱 치열해지겠지. 이미 한계나 다름없는 병사들은 하루에도 수천씩 죽어 나갈 것이며, 미래가 없어 보이는 전쟁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일어날 수 있음에도 쓰러지는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비관적인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탁자에 앉은 이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쓰러지거든 일으켜 세워라. 거짓말을 하든, 돈을 쓰든, 그들의 어머니와 자식의 이름을 불러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붙들어 둬라. 2주. 단 2주다.”
리카르디스는 잠깐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아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방 안의 모두를 지나친 눈동자는 단 한 사람만을 담았다. 로젤린을 응시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검은 달이 세상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수백 년간 잃어버렸던 ‘축복의 밤’을 말하는 사람답지 않은 담담한 말투였다.
* * *
“저기요.”
라헤안시가 짜증스레 말을 내뱉으며 옆에 서 있는 사람을 흘겨보았다. 내내 팔짱을 낀 채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던 브네학스였다.
“성력 한 번 쬐면 힉살라께서 뿅 하고 일어나실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반듯한 브네학스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뭐, 뿅이라니? 감히 힉살라께 뿅? 이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멀찍이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간제가 간식을 먹으며 그 신경전에 끼어들었다.
“뭐, 치유의 힘을 가진 자들이 리비타의 궁에도 있긴 합니다만, 애초에 마인은 건강하고 다쳐도 빨리 나으니까 성력을 접해 볼 기회가 적긴 하지요. 아문은 마인 중에서도 강한 축이라 감기도 걸려 본 적 없을걸요.”
“어쩐지. 며칠 동안 고생에 절어 밤마다 시체처럼 늘어지는 나를 무능하다는 식으로 쳐다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라헤안시가 표독스럽게 브네학스를 노려보았다.
“힉살라께서 쓰러진 게 몇 년 전인지는 일라베니아인인 나도 알거든요? 마인인 힉살라를 중독시켜 의식불명 상태까지 만들려면 쓰러지기 훨씬 전부터 작업에 들어갔을 거고! 근 십 년 이상 중독 상태였던 사람이 하루 이틀 치료받는다고 괜찮아질 줄 아는 게 양심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요, 전하!”
“저 사람이 좀 그런 경향이 있죠. 앞뒤로 꽉꽉 막혀 가지고서는, 쯧. 우리 타타라가 이렇게 힘들게 쥐어짜 내고 있는데.”
두 사람의 공격에도 브네학스는 눈썹 한 번 움직이지 않았다.
“무척 자신만만해하기에, 하루면 일어나실 줄 알았지요. 일라베니아의 단 일곱뿐인 대신관도 사실 별 볼 일 없나 보군요.”
라헤안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참나, 몇 달은 더 이렇게 성력으로 치료받으셔야 할 겁니다. 해독 약도 계속 드셔야 하고요. 만약 5일 정도로 힉살라를 ‘꿈틀’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신…….”
그 순간 힉살라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간제를 제외한 두 남자 모두 목격했다.
“악!”
짧은 비명을 지른 라헤안시가 자신의 팔을 마구 쓸었다. 유능함이 도가 지나쳐 소름 끼쳤다. 알고 보니 내가 신? 라헤안시는 정신력으로 마지막 한 방울의 성력까지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하얀빛은 여태껏 보았던 것보다 환하게 빛났다.
갑작스럽게 두 남자가 산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간제도 이상을 깨닫고 일어났다. 몇 년의 세월 동안 노인처럼 변모한 힉살라의 주름진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라헤안시가 땀을 뻘뻘 흘리며 간제에게 말했다.
“왕녀 전하! 힉살라의 손을 잡으시고 계속 말을 걸어 주세요. 의식이 깨어 계실지도 모르니까!”
간제가 두 손으로 힉살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위대한 힉살라시여. 하카브 위 리비타가 힉살라를 중독 시켜 의식을 잃게 만든 다음 궁전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과를 위조해서요. 진짜를 찾기만 하면 곧바로 노친네를 죽이겠다던데. 오라비가 말하는 그 노친네가 아마도 힉살라인 게 아닐까? 하고 이 간제는 짐작만 하고 있답니다.”
‘과’는 힉살라의 징표로, 힉살라의 이름 아래 펼쳐지는 모든 문서에 찍히게 되는 도장이었다. 발타의 역사와 함께한 과가 없으면 힉살라의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힘을 얻지 못해 허수아비처럼 세월만 보내게 될 뿐이었다.
“힉살라께서 뒤 목 잡고 다시 쓰러지시겠네, 아주 그냥!”
아버지,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흐흑, 어서 깨어나세요. 이런 것쯤을 바랐던 라헤안시가 기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 크윽…….”
수년 동안 잠들어 있던 힉살라가 눈을 번쩍 떴다.
“힉살라시여!”
브네학스가 탄성을 터트렸다. 리비타의 주인이 깨어난 것에 감격한 그와 달리, 라헤안시는 힉살라가 조금 가여웠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듣는 내용이 저딴 거였으니, 혈압이 오를 만도 하지.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매일매일 쥐어짜 내는 성력도 이제 한계였다. 오늘까지만 치료하고, 며칠 지난 뒤에야 다시 힘을 쓸 예정이었는데 힉살라가 깨어난 것이었다. 의식을 유지할 정도로 회복시켜 놓아야만 했다.
몇 십 분 후. 비틀거리는 라헤안시를 브네학스가 부축했다. 땀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도 옷소매로 다정히 닦아 주었다. 다정한 행동이 몹시나 역했지만 라헤안시에게는 그를 떨쳐 낼 힘이 없었다.
힉살라는 긴 수면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으나, 브네학스와 간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걸 보니 회복되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네가…… 아문의 가주가 되었느냐.”
“그러하옵니다.”
힉살라가 이를 갈았다.
“어린, 아이였는데……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브네학스는 답지 않게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우선 식사를 먼저 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냐며 간제에게 의견을 구했다. 간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 좋은 고기를 올려야겠노라 진지하게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서 라헤안시는 지친 와중에도 힘겹게 말을 꺼내야만 했다.
이 무식하게 튼튼한 마인들, 십여 년간 잠들어 있던 노인의 위장을 기름칠하며 학대하려고 하다니.
“무조건, 소화가 잘되는, 아기들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두 남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걸 먹고 우리 아빠가 힘이 날까? 힉살라께 감히 그딴 걸 먹일 수는 없지 않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계셔서 자극적인 음식이나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힉살라께서는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이니, 제발, 음식은 소화하는데 힘이 필요한 종류가 아니라, 알아서 소화되는 거로, 하라고…….”
말의 끝은 짜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모르는 분야인 만큼 라헤안시의 말을 존중하기로 했다.
브네학스가 분주하게 방을 나선 사이, 간제는 힉살라의 곁에 앉아서 여전히 혈압이 오를 만한 과거의 일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하게 서술했다. 하카브가 궁전을 장악하고 나서 힉살라의 세력부터 먼저 잘라 내었다던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어린 황자도 결국 암살당했다던가 하는 하카브의 악행과 관련된 얘기였다. 그게 잘 먹힌 것인지 힉살라는 연신 부들부들 몸을 떨어 댔다.
과거에서부터 흐른 얘기가 현재를 따라잡았다. 대륙에 발발한 전쟁과 간제, 그녀 자신이 오로지 힉살라에 대한 애정 하나로만 위험을 감수하고 대신관을 리비타 궁전으로 데려온 것, 브네학스의 협조와 힉살라가 눈을 떴다는 얘기까지.
“네가 수고가 많았구나, 제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어찌 수고라 할 수 있을까요? 간제가 바라는 것은 힉살라께서 무사히 깨어나시길,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딱 두 가지뿐이었답니다. 저에게는 이제 힉살라밖에 안 계신걸요.”
라헤안시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게 통하나 했는데, 어린 시절의 간제만을 기억하는 힉살라는 진심으로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간제는 그를 깨운 진짜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예상 밖이었다. 진짜 과는 어디 있냐. 전쟁을 방관하려는 건 아니지? 당장에 하카브를 불러들이자. 등을 당장에 말할 줄 알았는데.
‘음…….’
저 간제가 숙일 만한 인물이라니. 아들에게 배신당해 십여 년간 잠들어 있던 불쌍한 노인이 아니라, 힉살라는 힉살라란 말이었다. 은연중 그를 불쌍하게 여겼던 라헤안시는 제 생각을 잽싸게 철회했다.
힉살라의 명령 아래,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몸을 회복하여 운신할 수 있기 전까지 조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힉살라의 방 안에는 소수의 시종과 브네학스, 간제와 간제의 사람들, 라헤안시만이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고요하게 불기 시작한 태풍을 눈치챈 것인지 리비타의 궁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힉살라가 깨어나고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잠들어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과를 찾아와 명령을 내린다든가, 군대를 물리려고 한다든가 하는 행동은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의지도 엿볼 수 없었다.
라헤안시는 그런 그를 매일 치료했다. 라헤안시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힉살라는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리비타 궁전의 치료사, 일라베니아로 따지면 신관인 자들이 힉살라를 얼마나 방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라헤안시는 힉살라의 방으로 걸어가던 중 간제와 마주쳤다. 그녀는 라헤안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묻고 싶은 부분이 어떤 건지 안다는 듯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하시네요. 하카브가 일라베니아를 자빠뜨리기 일보 직전이라 말했는데도요.”
라헤안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우리의 신뢰는 깨지지 않겠지요. 전하? 나름 목숨으로 맺어진 인연인데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는 있답니다. 생각보다도 노친네가 완고해서 그렇지.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는데도 여전하네요.”
“이해는 합니다.”
어느 나라건 그런 경향이 있으나, 발타는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경향이 조금 더 강했다. 간제가 위험을 감수해 빛나는 공을 세웠다지만, 부모인 힉살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라고 인식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때부터 의심을 받을 게 빤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엮여 있는 간제로서는 힉살라를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라헤안시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군요.”
“면목 없습니다.”
“책망하려 한 말이 아닙니다, 그저.”
라헤안시는 걸음을 옮기며 말을 끝맺었다.
“오늘로 끝내야만 하겠습니다.”
힉살라는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놀랍게도 고기를 먹고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미친 마인들 같으니. 라헤안시는 질색하는 얼굴로 힉살라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생긋 웃었다.
“오, 대신관. 왔는가.”
“몸은 좀 어떠십니까.”
“덕분에 두통도 많이 가라앉았다네. 힘도 점점 돌아와서 이제는 걸어 다녀도 될 정도야.”
힉살라가 껄껄 웃었다.
“체력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러면 오늘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라헤안시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힉살라의 심장 부근에 성력을 흘려보냈다.
“손 떨림도 많이 가셨군요. 추이를 조금 더 지켜봐야겠습니다만, 약을 꼬박꼬박 복용하면서 치료를 받으면 금방 쾌차하시겠습니다.”
힉살라는 시체 같은 몰골을 벗어던졌다. 흰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자랐으며, 늘어졌던 얼굴 피부도 다시 젊어지기 시작했다.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처럼 손을 떨던 것도 자세히 봐야만 눈치챌 정도였다. 라헤안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생긋 웃었다.
“이제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세우셔도 되겠습니다.”
힉살라는 호탕하게 웃으며 라헤안시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이 늙은 몸에게 무슨 힘이 있겠나.”
간제는 한쪽 벽면에 서서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여태껏 그녀가 꺼내지 못했던 본론이,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있었다.
“과는 어디 있습니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간제는 살짝 당황했다. 저렇게 대뜸 과가 어디 있냐고 묻기부터 할 줄이야. 흘끗 힉살라를 바라보니, 잔뜩 얼굴이 굳은 채였다.
“나를 치료해 준 은인이라고는 하나, 외부인이 감히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이다. 이번만은 넘어가겠다. 그러니,”
“제가 만약 힉살라였다면 말입니다.”
라헤안시는 힉살라의 말을 뚝 잘라먹고 제 말을 시작했다. 힉살라의 얼굴도 구깃, 브네학스 아문의 얼굴도 구깃구깃해졌다.
“이 상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요.”
라헤안시가 타타라였을 때에 보이던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힉살라의 얼굴에는 어느덧 호랑이 같은 맹수의 기질이 떠올라 있었다.
“아들에게 배신당해 수년의 세월을 잠들었고, 그사이 재상과 발타의 다섯 가문 중 네 개의 가문이 넘어가고, 궁인들 또한 하카브의 손아귀에 있다고 하고. 여기서 과연, 아문의 가주와 하카브 왕자 전하의 동복동생인 간제 왕녀 전하의 충성심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라헤안시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
“이것 또한 내가 숨겨 둔 과를 찾기 위한 아들놈의 농간은 아닐까?”
“아주 재밌는 말을 하는군, 대신관.”
힉살라는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트린 채 웃고 있었다. 라헤안시가 손바닥을 마주쳐 짝 소리를 냈다.
“이것이 힉살라의 발에 채워진 하나의 족쇄입니다. 그리고 상황을 끌면 끌수록, 나라의 위기에 적진 한가운데까지 들어올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한 저 ‘대신관’이 그 위급함에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리라. 이게 힉살라의 다른 발에 채워진 나머지 족쇄 하나입니다. 두 개의 족쇄 때문에 한 걸음도 앞으로 걷지 못하시는군요, 제가 깨워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럴 거면 오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
방 안은 싸늘하다 못해 시린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 한 번 삼키기 힘든 분위기 속, 매서운 눈으로 라헤안시를 노려보던 힉살라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리비타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배짱이 대단하군.”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뿐이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쓸데없이 웃음을 흘렸다.
“멀리서 온 손님이 급한 모양이니, 슬슬 탁 터놓고 얘기를 해 볼까. 우선 한 가지 말하자면, 대신관이 말한 그 첫 번째 족쇄는 오늘로 풀렸소. 며칠간 지켜보고 일도 시켜 봤는데 너무 순수한 충성심뿐이라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지. 알고는 있었지만 아문가의 아이들은 대대로 참 거짓말을 못 하는군.”
구석에 서 있는 브네학스 아문은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가 남은 셈이지. ‘적진 한가운데까지 들어올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한 저 대신관이 그 위급함에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리라.’라고 말했던가? 그래, 대신관은 내게 감히 실례를 저지를 만큼 퍽 다급해 보이긴 하는군.”
힉살라가 제 무릎을 탁 치고 라헤안시와 눈을 맞췄다.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씩 올라갔다.
“그에 합당한 가격은 얼마인가?”
“얼마를 바라십니까?”
힉살라는 흐음, 하며 말을 끌더니, 둥그런 모양의 전통 과자를 하나를 집었다. 그러고 반을 뚝 잘라 라헤안시에게 내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깔끔한 걸 좋아했었지. 딱 이만큼만 받겠다.”
이 아저씨가 미쳤나…… 라헤안시는 속마음을 숨긴 채, 그가 내민 과자의 반대편을 잡고, 뚝 끊었다. 순식간에 1/4쪽이 되었다. 힉살라의 풍성한 수염이 꿈틀 움직였다.
“일라베니아가 함락될 시, 발타가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일라베니아의 전체가 아닙니다. 그 점을 확실히 하셔야겠습니다. 연합군에 포함된 다섯 개의 왕국, 크고 작은 소부족까지. 그 수만큼 조각나 분배되겠죠. 물론 공로가 큰 발타가 가장 많이 얻을 테지만, 그게 일라베니아의 반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선 이렇게 하고.”
하고? 힉살라의 의문스러운 눈빛 아래, 라헤안시가 과자를 다시 얌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1/8개가 되었다.
“이만큼이 적당하겠군요.”
이번에는 힉살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베어 문 건, 힉살라의 목숨 값입니다. 설마 힉살라의 목숨에 그 정도 가치도 없으려구요.”
그 정도가 안 된다고 하면 제 가치를 깎아 먹게 생긴 셈이었다. 힉살라가 무어라 불만을 터트릴 기색을 보이자 라헤안시가 과자를 앞니로 살짝 갉아 먹었다. 이 미친놈이? 힉살라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욕심이 과하십니다.”
“욕심이 과하다……? 가만히 있으면 대신관이 말한 대로 제국의 커다란 부분이 발타의 것이 될 터인데?”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더욱 커지고 부강, 부유해진 발타에.”
라헤안시가 힉살라를 바라보며 히쭉 웃었다.
“힉살라께서 계시겠습니까?”
챙,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라헤안시는 제 목에 와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흐흐 웃었다.
“어찌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은근 쉬운 사람인 거 알까 모르겠네.”
라헤안시는 자신을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브네학스 아문을 보고도 웃기만 했다. 힉살라는 브네학스를 만류하지 않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만약 이 싸움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실 텐데요. 하카브 전하에게 이번 전쟁의 승리는 단순히 ‘얻어 들이는 재화가 많아진다.’에 그치지 않습니다.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으로서 동맹국의 신임을 받고 세력을 더욱 불리게 될 겁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힉살라는 병을 오래 앓아 이지가 흐려져 있다 알려질 것이며, 그렇다면 가짜 과가 진짜 과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라헤안시는 태연한 얼굴로 목에 난 생채기를 치료했다. 힉살라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굳어 있었다.
“하카브 전하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는 현시점에서 많아 보이지 않는군요. 그가 일개 왕자의 신분일 때라든가, 혹은 왕자 전하가 전쟁에 정신이 팔려 힉살라의 움직임을 읽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라든가. 세상에, 그러면……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라헤안시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는 듯 시늉했다.
“저만큼이나 힉살라께서도 꽤나 급해 보이십니다.”
그 말대로였다. 간제에게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힉살라는 라헤안시와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이 하카브를 끌어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만약 연합군이 승리하게 될 경우, 발타에 이득이 돌아올지언정, 세력을 불린 하카브로 인해 자신은 끌어내려지게 될 것이다.
많은 권력자들이 그러하듯, 힉살라 또한 나라의 부강보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 앞서는 자였다. 그러니 반드시 전쟁이 끝나기 전에, 힉살라의 명령으로 군대를 돌려 하카브를 패배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패배와 연합군의 승리로 얻게 될 이득 또한 아까웠다. 발타의 오랜 적인 일라베니아의 패배가 어찌 달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방법은 없는가?
자신도 조급한 상황이지만, 나라를 잃게 생긴 대신관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힉살라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 라헤안시가 서서히 고조되는 감정에 휘둘리게끔. 지금 보니 휘둘리기는커녕, 의도를 빤히 다 읽고 있어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린 것 같긴 했지만.
황실의 핏줄이라는 대신관은 생각보다도 머리 회전이 빠른 듯싶었다. 힉살라는 이 거래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이득이 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갖은 경우의 수가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힉살라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라헤안시는 잠깐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무얼 쳐다보는지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가 다시 힉살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힉살라시여.”
“말하라.”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
“죽은 땅이 살아나는 기적이 펼쳐질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 종교. 각자의 이유로 다투던 모든 이들이 검을 놓고 환희에 가득 차 노래를 부를 겁니다.”
힉살라는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축복의 밤은 하얀 밤뿐 아닌 검은 달이 함께합니다. 성력뿐 아닌 마력도 필요합니다.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신의 깊은 뜻을 알리기 위한 화합의 장일지도 모릅니다. 세계는 오랫동안 멈춘 채, 그 사실을 망각하여 고통받았습니다. 검과 검이 맞부딪쳐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쇠퇴하고 있는 지금의 일라베니아가 증명합니다.”
라헤안시에게서는 일견 장난스러워 보이고, 상대를 흔들려던 정치꾼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중한 눈빛과 태도, 차분히 이어 가는 담담한 말투는 성서를 읽는 듯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번 말을 끊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사에 새겨질 새로운 세상의 첫발이 코앞에 있습니다. 부디 손을 맞잡고,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새 시대를 함께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힉살라는 잠시 숨을 멈춘 채 눈만 깜빡이며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대신관이 맞기는 한가 보군. 며칠간 보아 온 가벼운 언동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흠…….’
힉살라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한참 후 힉살라가 씩 웃었다.
“집단의 우두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게 무엇인 줄 아는가, 대신관?”
뜬금없는 질문에 라헤안시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집단의 우두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
“돈?”
역시 좀, 지나치게 솔직한 인간이긴 한 것 같았다. 힉살라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조금 더 둘러서, 이득이라고 말하겠네. 마을의 장만 해도 어떤 것이 마을에 도움이 될까, 어떤 게 이득일까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게 일국의 왕이라 하면 어떻겠나.”
“더…… 많은 돈?”
“……그래, 뭐……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아무튼, 아까 전까지 그 작은 과자 조각 정도의 이득으로는 움직일 마음이 안 들었네만.”
라헤안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의 대신관이 한 말이 추를 기울이게 했네.”
힉살라가 씩 웃으며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이라.”
껄껄 웃던 힉살라가 라헤안시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좋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라헤안시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잡았다.
“우두머리들이 돈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뭐냐면 완장일세. 직위, 완장. 이런 거에 환장을 해. 돈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지. 대륙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고통을 끝낸 선구자. 이는 돈으로도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이름이 될 터.”
“아, 그러면…….”
돈은 안 받는 거로? 라는 말을 하기 전에 힉살라가 정색했다.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아, 예…….”
힉살라가 손을 내밀었다. 라헤안시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손을 맞잡고 함께 새 시대를 열어 보자 하지 않았나.”
라헤안시는 흐흐 웃으며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서 과는 어디 있습니까?”
“…….”
이놈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힉살라의 눈에 불신이 스며들었다.
“새 시대가 찾아오지도 못하고 수렁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란 말입니다!”
“뭐…… 알겠네.”
얼른 얼른! 재촉하는 라헤안시를 힉살라가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라헤안시는 막연하게 과라는 것이 어느 깊숙한 금고나, 그가 믿는 가신 중 한 명이 맡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려 그 하카브가 수년을 찾아 헤매고, 수백의 인간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한 귀물이었다.
그게 있어야만 일이 진행될 수 있어서 빨리 내놓으라는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그게 어디에 있기에 하카브의 눈을 피해 간 걸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힉살라는 그런 호기심 충만한 라헤안시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애가 따로 없었다.
“여기 있네.”
그러고 힉살라가 툭 친 것은 제 다리였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간제와 브네학스도 응? 하고 의문스러워했다. 다시 한번 힉살라가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에.”
힉살라의 다리. 허벅지 안쪽에 있다는 말이었다. 세 명이 숨을 크게 들이켜며 기겁하는 때에, 힉살라가 잠깐 멈칫하더니 중얼거렸다.
“……오른쪽인가?”
“…….”
수년간 잠들어 있던 탓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제 다리를 주물럭거리더니 역시 왼쪽이로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제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러니 하카브가 그 고생을 해도 못 찾을 수밖에.
“시간을 끈 것은 대신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려던 것도 있었지만.”
역시나 그랬군. 라헤안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칼을 대어도 괜찮을 만큼 몸을 회복하려고 기다리는 것도 있었지.”
힉살라가 침상 위에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앉았다.
“이제 준비가 끝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