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어두운 밤. 범람한 미노가 강.
강물에 다양한 것이 떠내려왔다. 나무, 배, 사체 등. 빠른 유속을 감당하지 못해 갈가리 찢기거나 부서진 채였다.
땅 깊게 뿌리박은 거대한 나무는 간신히 떠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강물 아래의 둥치에 무언가가 세게 부딪친 듯 나무가 텅, 하고 진동했다. 곧 물속에서 창백하리만치 하얀 손이 솟아났다. 나무 기둥을 몇 번 더듬은 손은 옹이구멍과 굵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점차 기어 올라왔다.
“하아, 하……!”
곧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리카르디스를 어깨에 걸친 로젤린이었다. 두 사람의 무게가 더해지자 여태껏 잘 버티던 나무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짧게 욕을 내뱉었다. 뿌리가 뽑히며 기울어지는 순간 로젤린이 나무를 박차고 뛰었다. 강기슭 위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얽혀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는 몇 번 침을 더 뱉어 낸 후에 급하게 리카르디스의 투구를 벗겨 냈다. 물에 젖은 은색 머리카락이 검은 땅 위로 흘러내렸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창백한 얼굴은 마치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로젤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떨리는 그녀의 손이 리카르디스의 턱 바로 아랫부분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 헉…….”
로젤린은 머리를 한쪽 손으로 잡으며 비틀거렸다.
[로젤린…… 무사해서, 다행이야.]
세티스티아 황녀의 모습이 리카르디스의 위로 끝없이 덧대어졌다. 싸늘해진 살갗의 온도. 도무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까지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로젤린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는 누군가가 세게 누르는 것처럼 먹먹하고, 고통스러웠다. 안쪽부터 뜨거워졌다. 그게 코까지 치닫는다 했더니 기어코 피가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로젤린의 손 위로 붉은 자국이 번졌다. 피 냄새를 맡은 그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스타스가 피를 흘리던 모습이 로젤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라.]
생각해, 생각해라. 움직여.
로젤린은 이를 악물고 제 허벅지를 퍽 내려쳤다. 굳어 있던 몸이 통증에 꿈틀거렸다. 그녀는 곧바로 리카르디스의 턱을 붙잡아 입을 벌렸다.
‘입안의 이물질 확인, 고개를 뒤로 젖히고…….’
로젤린은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끝없이 되뇌었다. 숨을 불어넣기 위해 입술을 가져다 대었으나, 차갑게 식어 버린 입술의 감촉은 로젤린을 더욱 무섭게 옥죄었다.
‘숨을 불어넣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에게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압박하는 행동을 몇 번 반복했다. 억겁의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고,
콜록, 콜록. 리카르디스가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물을 토해 냈다. 로젤린이 급하게 그의 머리를 옆으로 돌려 물을 뱉는 걸 도왔다.
“전하!”
로젤린은 비명을 지르듯 부르자, 리카르디스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내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나며 로젤린을 담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응시한 채 간절하게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르디스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로젤린은 붉어진 눈을 거칠게 문지른 후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은 쉰다. 맥동은 느릿하지만,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머리의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다리. 아무래도 왼쪽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몸을 더듬어 보니 갈비뼈 쪽에도 이상이 느껴졌다.
낙마하고 급류에 휩쓸려 심장까지 멎었다 겨우 살아난 사람이 겨울의 찬 공기에 그대로 노출된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갑옷을 강물에 던지고 자신의 갑옷도 던져 버렸다. 곧 그를 안아 든 그녀가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로젤린은 버려진 민가를 찾아냈다. 주위를 살핀 그녀는 리카르디스를 안으로 데리고 가 그의 옷을 급하게 벗겨 냈다. 집안에 정체불명의 알 수 없는 천이 있어서 물기를 닦아 내고, 남은 것으로는 그를 감쌌다.
밖을 보니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무성하고 어둠이 빛을 가렸으니, 연기가 크게 티 날 것 같지는 않았다. 로젤린은 밖으로 다시 나갔다. 장작을 구하려 했는데, 내리는 비로 나뭇가지들이 다 젖은 상태였다. 그녀는 나무를 부숴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껍질을 벗기고 안쪽을 갉아 내, 마른 부분을 모았다.
사각, 사각.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가 로젤린의 흥분을 점차 가라앉혔다.
부싯돌이 젖어 점화되지 않았다. 로젤린은 다소 원시적인 방법으로 불을 붙여야만 했다. 마음이 급해서 몇 번씩이나 실패했으나 결국에는 그녀의 손안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제야 젖은 옷을 벗었다. 철벅, 철벅. 나무 바닥에 젖은 옷이 달라붙으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도 하나로 모아 빨래를 짜듯이 하자 후드득 물이 쏟아졌다. 맨살에 와 닿는 서늘한 공기에 로젤린은 팔을 쓸며 부르르 떨었다.
“아!”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 사이로 수통이 보였다. 너무 급해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로젤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밤 기사단에게 배분된 수통의 내용물은 죄다 성수였다. 그것도 질 높은.
로젤린은 허벅지에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올리고 수통을 기울여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성수는 입안에 고이기만 할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젤린은 성수를 입에 머금고 리카르디스에게 입을 맞춰 흘려 넣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그래도 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로젤린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그의 손과 발을 주물렀다. 살갗을 비비며 아주 짧은 순간 돌았던 온기는 금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덮고 있는 담요를 들춘 후 안에 쏙 들어갔다. 마력으로 체온을 높이고 싶었으나, 혹시나 주위에 수색대가 있을지도 몰라 사용할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 밀착해서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살갗에 와 닿는 그의 차가운 온도가 심장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픈 숨소리가 쌕쌕 울렸다. 그녀는 눈물을 훌쩍이다 그를 더 끌어안았다.
로젤린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을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만약 이렇게 했으면, 이쪽으로 갔으면, 기존의 대피로를 따라 이동했다면. 그랬으면.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없이 자신을 혹독하고 매섭게 다그치다 어느 순간 잠들어 버렸다.
쓰라리게 피곤한 밤이었다.
* * *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손 하나 까딱하는 일도 힘든지 몸이 잘게 떨렸다. 머리는 띵하고 부서질 듯 아팠다. 거기에 더해 열이 나는지 정신이 흐릿하기까지.
‘정말…… 완벽한 몸 상태군.’
리카르디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나무 벽의 벌어진 틈을 따라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는…….’
고개를 돌릴 힘도 없어 눈앞에 보이는 시야로만 상황을 판별해야 했다. 눅눅한 습기가 가득 찬 낡은 가옥이었다. 양식으로 보아 발타의 것이었고.
리카르디스는 두통이 인 머리로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냈다. 앞에서 달리던 스타스가 갑작스럽게 말고삐를 쥐고 틀었다. 그렇게 비스듬히 자신을 가리자마자 스타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심장에는 검고 뾰족한 철을 박은 채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리카르디스는 감기는 눈꺼풀의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았다. 시야가 깜깜해지자 그 위로 투구 너머로 마주쳤던 눈동자가 그려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급박한 눈. 위험하다 피하셔라. 그뿐이었으리라. 심장에 보기만 해도 끔찍한 쇠를 달고도 그뿐이었으리라.
눈이 뜨거워졌다. 머리와 이마를 뜨겁게 하던 열이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가슴에 통증이 인다 생각했더니, 숨이 턱 막혔다. 리카르디스는 숨을 들이마시지도 내뱉지도 못한 채 괴로워했다. 얼굴이 붉어지며 목에 혈관이 돋아났다. 그렇게 바르작거리며 나무 바닥을 손톱으로 긁고 있을 때였다.
“전하.”
사람의 기척에 놀라서인지 갑작스럽게 숨이 터졌다. 리카르디스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머리맡에 앉아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단추 좀…… 제대로 잠가…….”
로젤린은 막 일어난 듯 허술한 옷차림새였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하얀 피부의 넓은 면적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순간 당황해 버렸다.
단추를 대충 잠근 로젤린이 손을 뻗어 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손길에 잠깐 움츠러들었다. 그는 곧 로젤린의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 자신이 뜨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의 손바닥은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단단했다.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으나 리카르디스는 안온함을 느끼며 볼을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비비듯 문질렀다. 눈을 감자 통증과 고열 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젤린이 엄지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훔쳐 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른 후, 리카르디스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스타스 경은……?”
로젤린은 멈칫하고 몸을 굳혔다. 그 짧은 반응으로 리카르디스는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훌륭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탁한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성인이 되고 처음 같이 술을 마신 날…… 스타스가 그랬지. 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젤린은 자신 또한 리카르디스에게서 빛을 본 사람이었기에, 스타스가 한 말이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패배보다…… 내 한 사람이 죽은 것이 더 슬프고,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
“전하…….”
로젤린이 그의 가슴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려 두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외면하듯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가슴 위에 놓인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고통에 겨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언뜻 간절함이 비쳤다.
“원래, 사람은 아프면…… 약해지잖나. 그러니까 오늘만 이렇게 할게……. 내일부터는…… 다시, 할 테니까, 오늘만…….”
딱 오늘 하루만. 중얼거리던 리카르디스는 곧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로젤린은 그가 붙잡은 손을 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잃어 올 때마다 혼자서 아파했을 그가 안타까워 함부로 어떤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그렇게 옆을 오랫동안 지킬 뿐이었다.
짐승들이 질척이는 흙과 땅을 짓밟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정신을 깨웠다.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고 있다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리카르디스를 살폈다. 손등이 이마에 살짝 맞닿기도 전에 불에 덴 듯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이마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계속해서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리카르디스를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에 합류지와의 거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음식물을 섭취한 지 하루가 다 되어 갔다.
로젤린은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은 작은 가방 속에 있던 말린 과일과 육포를 빗물과 함께 끓였다. 약한 불로 한 시간 정도 끓이자 거무튀튀하고 비린 맛이 가미된 새콤달콤한 과일 죽이 되었다. 리카르디스가 직접 섭취할 수 있는 방안이 없어서 결국은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야 했다.
의식 없는 리카르디스가 으윽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좀 미안했다. 리카르디스에게 죽 한 그릇을 다 먹인 후에야 로젤린은 남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충 배를 채웠다.
‘약이 필요해.’
하지만 집 안에는 지푸라기나 찢긴 천 조각만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삐뚤어진 문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잠시 바깥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로젤린은 까만 재를 찍어 나무 바닥에 글을 남겼다. 적군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시기에 리카르디스를 떠나는 것은 불안했지만,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 냈다가, 다시 돌아와 리카르디스의 담요를 정리한 후에 문을 닫고 나섰다.
로젤린은 비어 있는 민가 몇 채를 더 조사했다. 평민들조차 들고 가지 않는 쓸모없는 물건들 사이에서 운 좋게도 발타 양식의 여성복을 구할 수 있었다.
폐가에서 나온 로젤린은 구한 물품을 가방에 집어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뜬 뒤에 보는 풍경은 밤보다 더욱 삭막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땅이 검고 질척해, 썩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일라베니아에서는 간간이 잡초 같은 리쉬라도 자라나고는 했으나, 이곳은 정말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였다. 썩은 나무들은 부서지거나 메말라 괴괴한 분위기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그림자의 위치가 바뀔 만큼 걸었음에도 풍경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일라베니아와 마찬가지로, 그보다도 심하게 발타의 땅은 죽어 가고 있었다.
한참 뒤,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보였다. 로젤린은 벽에 몸을 붙여 은폐하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다.
‘억양이 독특해.’
로젤린의 눈이 지나다니는 아낙들의 옷차림새를 훑었다. 천 위에 수놓아진 자수는 발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양식보다는 일라베니아와 많이 닮아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발타인보다 연한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재빠르게 정보를 훑어 결론을 내렸다.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하지만, 몇 백 년간 붙어 있는 나라끼리 교류가 없을 리 없었다. 그중 일라베니아인과 가정을 꾸리게 되는 소수의 발타인들이 그들을 배척하는 마을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을을 조성했다고 들었다.
다른 마을과 교류가 적은 탓에 발타 보다는 일라베니아의 억양을 닮아 있었으며, 문화 양식 또한 오묘하게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딱 로젤린이 보는 지금의 마을처럼.
‘투라르…… 많이 떠내려왔는걸.’
흘끗, 한 번 더 마을을 살펴본 로젤린은 곧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리카르디스가 있는 버려진 민가와도 전혀 상관없이 동떨어진 곳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감은 채 주위의 기척을 읽었다. 바람이 황량한 숲속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 무성했다. 사람은커녕 동물조차 없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다시 눈을 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이거 힘든데.”
중얼중얼 혼잣말로 한탄한 로젤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마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우득, 우두득. 로젤린에게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구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몸에서 무언가가 울룩불룩 움직였다. 체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며, 머리 색과 눈동자 색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흑색에서, 진한 고동색으로. 페리도트를 닮은 녹색에서, 연한 갈색 빛으로.
“으윽…….”
한참이 지난 후, 무릎을 꿇고 있던 로젤린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자신의 팔다리를 살폈다. 딱 맞던 옷이 헐렁거리며 길이와 품이 남아돌았다. 시야가 달라지니 기분이 묘했다. ‘로젤린’의 모습으로 살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 눈높이가 익숙해졌는지.
팔을 휘둘러 보니 느낌이 달랐다. 힘과 속도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발타의 여성들은 일라베니아의 사람들보다 키가 작고 아담했다. 원래 모습은 눈에 띌 가능성이 높기에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목과 어깨를 휘휘 돌리며 걸어가던 로젤린이 작은 웅덩이 앞에 멈춰 섰다. ‘로젤린’이라 생각할 수 없는 여자가 그 안에 있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마을로 향했다.
혼혈들이 이룬 마을, 투라르.
투라르는 강가에 위치한 또 다른 마을의 이재민들로 한창 북적이는 중이었다.
“제국군 놈들이 댐을 터트렸다지 뭐야!”
“그 개도 안 물어 갈 놈들 같으니!”
“쳐 죽일 놈들!”
로젤린이 터트린 댐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콕콕 찌르는 양심을 애써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한 로젤린은 피곤에 지친 듯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에 지친 이재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터덜터덜 걷던 로젤린이 어느 여자를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뭘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완벽한 투라르의 사투리를 구사하며 로젤린이 힘겨운 미소를 띠었다.
* * *
몽롱한 의식 속, 리카르디스는 입술에 무언가가 와 닿는 걸 느꼈다.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던 그것은 사이를 파고들며 입을 부드럽게 열었다. 리카르디스는 끙끙 앓으며 열띤 호흡을 내뱉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 헐떡이자, 누군가가 달래듯 볼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굳은살이 박인 익숙한 살갗의 감촉에 리카르디스는 숨을 쉬며 몸의 긴장을 느슨하게 했다.
그 순간 산뜻한 숨결과 함께 말랑한 무언가가 입에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판별하기도 전에, 지옥 같은 쓴맛이 그의 입안으로 쏟아졌다.
“윽.”
리카르디스는 본능적으로 입안에 들어온 무언가를 뱉으려 했지만, 뒤 목을 감싼 자는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물컹하고 미끄러운 무언가가 혀뿌리를 꽉 누르는 바람에, 결국 쓰고 역한 액체를 꿀꺽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몸을 떨던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짓누르는 누군가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달래듯 말을 내뱉었다.
“일어나셨어요? 깨워서 죄송합니다.”
속눈썹과 눈가가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던 터라 시야가 흐렸다. 하지만 검은색 머리카락만큼은 똑바로 보였다. 로젤린, 부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뺏었다.
“아 하세요. 이건 입가심이에요.”
그렇게 말한 로젤린이 숟가락으로 무언가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썩은 구정물의 맛이리라 생각했는데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진득이 퍼졌다. 리카르디스는 잔뜩 찌푸렸던 인상을 펴며 입을 우물거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로젤린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힘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이마를 쓸었다. 식은땀이 흥건히 묻어 나오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정신이 또렷했다. 여전히 상태가 좋지는 않아도 당장 기절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기절하기 전, 제 입안에 들어왔던 썩은 구정물 같은 액체의 정체가 약이 아니었을까 결론을 내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리카르디스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돌아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실루엣은 로젤린의 것이 아니었다. 로젤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였다. 그녀가 성큼성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리카르디스는 담요를 움켜쥐며 눈을 흘끗 옆으로 돌렸다. 손이 닿는 거리에 검이 놓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끝끝내 손을 뻗어 검을 쥐지 않은 이유는 처음 보는 여자가 부르는 ‘전하’라는 말에서 왜인지 모를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단어, 어조의 문제가 아닌 분위기라고 할지, 혹은 그 호칭을 오랜 세월 입에 담은 만큼 쌓인 시간의 흔적 같은 것이라 해야 할지.
무어라 뾰족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지만, 무척이나 낯익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처음 본 사람이 낯익다니.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좁힌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다가온 여자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확인하고, 들어온 외부의 빛으로 안색을 확인하는 둥, 대단히 부산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여자를 응시했다. 머리 색과 눈 색만 보면 발타인인데, 피부색이 연했다.
‘혼혈인가?’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눈매가 익숙했다.
“괜찮으세요?”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던 여자가 살짝 미소 지었다. 담담하게 웃는 모습도 어쩐지 낯익었다.
‘대체 누구지?’
계속해서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던 차, 여자가 태연하게 담요로 손을 뻗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옷을 전부 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달리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여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 하는 짓, 윽…….”
급하게 움직이느라 통증이 생겨 얼굴은 평소보다 사납게 구겨졌다.
여자, 로젤린은 잔뜩 경계하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목소리가 왜 저렇게 싸늘하지? 우리 전하는 나한테는 안 저러는데…….
“……아.”
로젤린이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귓가로 작은 속삭임이 울렸다.
“로젤린입니다.”
“……그게 무슨…….”
리카르디스는 여자를 밀어내려다가 그녀의 생김새를 보고 멈췄다. 전체적으로 작고 동글동글하지만 이목구비가 로젤린과 비슷했다. 로젤린의 동생이라든가, 사촌이라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곧 몇 달 전 사냥 대회 전날 로젤린이 보여 줬던 신묘한 기술을 떠올렸다. 키를 키우고, 줄이고, 골격을 미세하게 바꾸는 등의.
“로젤린?”
“예. 전하. 로젤린입니다.”
로젤린이 소리를 죽여 작게 말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인 후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담요는, 안 돼.”
“……몸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럼 여기까지만.”
리카르디스가 대충 가슴 위까지 선을 그었다. 대체 뭘 보라는 거지? 로젤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의 배꼽까지 가상의 선을 그리며 여기까지는 봐야 한다고 했다.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라는 그녀의 엄한 질책에 리카르디스는 결국 배꼽 위로 합의를 봤다.
로젤린이 그의 담요를 성큼 걷어 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이 참혹한 상황을 최대한 외면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가슴이나 갈비뼈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길을 느낀 후, 어떤 것도 회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서는 다시 눈을 떠야만 했다.
“……지금의 상황은?”
리카르디스의 몸을 만지며 상태를 파악하던 로젤린이 잠시 손을 멈췄다. 그녀는 리카르디스가 어제 기절하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까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겠다던.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말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에 얽매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속이야 어떻든지.
로젤린도 보고서에 가깝게 사실을 나열하는 식으로 현재의 상황을 서술했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가렸다. 한참 후, 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댐이…… 부서졌나?”
“예. 제가.”
로젤린에게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기세가 감돌았다. 그 어떤 고통도 감미롭게 만드는 짜릿한 희열이 리카르디스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1차 폭발로 균열이 가 있던 덕입니다. 댐이 터진 후 바로 물살에 휘말려 버린 터라 연합군의 피해 규모를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강가에 있었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가.”
“강물이 불어나 며칠은 강을 건너지 못할 겁니다. 당분간은 몸을 회복하시는 것만 생각하세요.”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댐이 붕괴됐다. 연합군은 몇 번의 전투로도 발생하기 어려운 큰 피해를 입었고, 제국군은 도주할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도망친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은 정해진 합류지에 모일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가까스로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음이 조급해져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이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통증이 일어났다. 머리, 한쪽 다리와 가슴, 갈비뼈 쪽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이런 때는 성력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어떻게 살아 있나 싶을 정도의 몸 상태였다. 로젤린이 약을 구해 오지 않았다면 정말 이델라브힘의 품으로 떠났을지도 몰랐다.
“여기는 어디지?”
“투라르 근처의 버려진 민가입니다.”
“투라르라…….”
리카르디스가 지금의 위치를 대충 머릿속으로 그렸다. 멀긴 하지만 합류지를 찾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몸 상태와 더불어 장소까지 도달하는데 들키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외형이 달라진 로젤린이면 몰라도 자신은 너무 눈에 띄었다.
리카르디스가 생각에 잠긴 사이, 로젤린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허름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옷, 먹을 것, 지도, 발타식 단검까지.
“이게 다 어디서 났나?”
“투라르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친구 집에 잠시 놀러 갔다 왔다는 식의 가벼운 어조였다. 리카르디스는 갈비뼈와 위 그쯤을 붙잡고 헐떡댔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요. 몇 시간 지켜보면서 행동 양식을 익힌 후 움직였어요.”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며, 어조는 독특했다. 잘 모르는 리카르디스가 듣기로도 흉내 내기가 아닌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체불명의 풀 무더기까지 꺼내자 그제야 가방이 텅 비었다. 리카르디스는 지금 자신의 몰골과 그녀의 차림새를 보았다. 돈이 나올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 시선을 깨달은 건지 그녀가 머쓱하게 웃었다.
“전하의 검에서 보석만 빼고 버렸는데…… 돌아가면 비슷한 거로 하나 사 드릴게요.”
“……그래.”
전투용이 아닌 예식용 검을 말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푸른빛의 강옥과 금강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자신의 검을 떠올렸다.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보석들은 쉽사리 볼 수 없는 상등품이었다. 너무 눈에 띄는 게 아닐까 하고 리카르디스가 염려하려는 찰나 로젤린이 말을 이었다.
“강옥이 질이 좋고 크기가 크다 보니 출처를 의심받을 것 같아서 몇 조각 내어 일부만 팔았습니다.”
단단한 강옥을 대체 어떻게……? 하고 잠깐 궁금했으나, 대충 힘으로 해결을 보았겠거니 싶었다.
“집안의 가보인데, 치료비를 위해 팔아야겠다고 했더니 눈물을 글썽이더군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로군.”
“눈물을 글썽이며 저에게 사기 쳤습니다. 반 이상을 깎던데요.”
“…….”
“시골 여자가 보석 시세에 너무 밝은 것도 수상할 것 같아, 우선 주는 대로 받았습니다.”
보석의 처분이며, 뒤처리까지 완벽했다. 리카르디스 열 오른 머리로 감탄했다.
“저는 이번 침수 피해가 가장 심한 알락 마을의 생존자입니다. 간신히 홍수를 피해 도망쳤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이 부상당한 상황이죠.”
부상당한 남편? 리카르디스의 눈에 의문이 떠오르자 로젤린이 손으로 그를 콕 가리켰다.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수줍은 가리킴에 리카르디스도 얼굴을 붉혔다.
“남편은 힐리사고의 용병으로, 대륙을 떠돌다가 저를 만나게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그렇군…….”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연인이나 부부들은 경계를 덜 하더군요. 아무튼, 남편이 많이 다쳤다고 하니 대도시로 나가는 편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투라르에는 변변한 치료사가 없다고요. 다행히 한 달에 한 번씩 큰 도시에서 상단이 온다고 하는군요, 그때 삯을 주고 같이 이동해야겠습니다.”
로젤린이 지도를 펼쳐 이동 경로를 그려 냈다. 어느 지점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여기서 이동하면 삼 일 거리입니다.”
로젤린이 가리키는 곳은 제국군이 모이기로 한 합류지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빛내고 있는 로젤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잠들어 있는 짧은 사이 그녀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지금의 상황을 헤쳐 나갈 방안까지 마련해 왔다.
몇 개의 정보만으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타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알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짧은 순간 사람들의 사투리를 익혀 활용하고, 환자를 데리고 발타를 가로지르는 대담한 작전까지.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그녀는 지식, 경험, 능력.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깨우며 성장해 가고 있었다. 잠시 잠자고 있던 꽃봉오리가 이슬을 맞으며 일시에 개화하는 것처럼. 그것은 굉장히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 * *
계획이 정해진 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준비로 바빴다. ‘한창 알콩달콩할 때의 연인’을 흉내 내어 연습해 보기도 했고, 마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부터 폐쇄된 길과 영지 등을 알아내며 주변 정세 또한 살폈다.
투라르 인근의 다른 마을에도 다녀온 로젤린이 무언가를 리카르디스에게 보여 줬다.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종이였다.
“전혀 안 닮았습니다.”
발타 특유의 거친 화풍으로 그려진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는 실물과는 달리 얍삽한 범죄자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솔직히 그냥 나가도 못 알아볼 것 같긴 하지만, 그림과 함께 기재된 정보가 문제였다.
[은발 머리, 푸른 눈, 큰 체구, 미남]
리카르디스는 잠깐 ‘미남’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뒀다가 혼자 겸연쩍어했다. 체구나 미남 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이었지만, 빛을 받으면 백색처럼 빛나는 은발 머리만큼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지표였다. 두 사람은 우선 그 확실한 지표부터 없애기로 결정했다.
로젤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풀 무더기를 찧어서 물과 섞어 끓여 냈다. 뭔가 했더니 옷을 염색하는 염료의 원재료였다. 그녀가 단검을 들고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머리를 조금 자르셔야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엉덩이 아래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나는 힐리사고의 귀족들 또한 머리가 긴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족과 귀족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육체노동이 많은 평민과 용병들이 머리를 거추장스럽게 기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리카르디스가 머리를 자르기 위해 단검을 받으려 하자 로젤린이 손을 뒤로 확 뺐다.
“그냥 둘까요?”
“…….”
긴 머리가 취향인가? 마음속 어딘가에 정보를 저장한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들고 있는 단검을 뺏었다. 그러고 머리를 모아 잡아 확 끊어 냈다.
“아악!”
비명을 지른 로젤린이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글썽거렸다. 곧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리카르디스를 노려보았다.
“아니! 조금이면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많이 자르시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성질내는 걸 생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언젠가 한 적이 있었다. 그걸 지금 목격하는 중이라 기분이 굉장히 싱숭생숭했다.
‘대체 내 긴 머리를 얼마나 좋아했던 거지.’
로젤린은 씩씩 성질내면서도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정리했다. 그는 자신이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세 번 정도 사과해야 했다.
머리를 물들이고, 씻고, 말리고 하는 과정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하자,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은 어두운 남색 빛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일부러 대충 정리해 거칠게 만들었다. 앞머리는 눈을 살짝 살짝 덮을 정도로 길었고, 뒷머리는 그의 목덜미를 가리며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정리 정돈 된 결 좋은 은빛 머리를 늘어트린 황자는 온데간데없고, 칭칭 감고 있는 붕대와 부상이 잘 어울리는 거친 용병의 모습만 남은 상태였다.
로젤린은 그의 색다른 모습에 잠깐 혹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결 좋은 긴 머리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이것 나름대로…… 호오…….
“멋있습니다.”
“……고마워.”
“아니, 정말…….”
로젤린은 뭔가 더 미사여구를 붙이고 싶어 했지만, 결국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진짜…… 잘생겼다.”
그것 외에는 별다르게 표현할 말이 없는 듯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버려진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사실 좀 더 쉬어야 하는 몸 상태였다. 아직 회복 운운할 정도까지도 되지 못했고, 미열이 계속 있어 머리도 둔했다. 하지만 몸이 받은 충격을 다 풀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총사령관의 부재는 적군뿐 아닌 아군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만들어 준 간이 목발을 짚고 혼자 걸어 보았다. 절뚝거리는 데다가, 움직일 때마다 안 아픈 곳이 없긴 했지만, 내내 누워 있던 때를 생각하면 이게 어딘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걸어서 마을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제가 안아서 옮겨 드리겠습니다.”
“차라리 기어서 갈 거다. 농담 아니니까.”
차마 리카르디스를 기어가게 만들 수는 없었던 로젤린은 아직 수위가 높은 강가 근처에서 부서진 수레와 함께 힐리사고 양식의 검을 구해 왔다.
“음…… 한번 고쳐 볼게요.”
그렇게 말한 로젤린은 부서진 수레를 붙잡고 몇 십 분 동안 뚝딱 뚝딱거렸다. 부서진 부분을 제거, 나무로 비슷하게 부품을 만들고, 마을에서 사 온 끈과 못으로 고정하더니, 기어코 수레를 굴러가게끔 만들었다. 요모조모 능력이 있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자신의 코끝에 내려앉은 나무 부스러기를 입으로 숨을 후 불어 제거한 로젤린이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타요, 달링.”
몇 번을 들어도 파괴력이 넘치는 애칭이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다리우. 달링. 그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글자가 단 두 글자로 축약되며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입게 될 줄은, 그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 로즈.”
거기에 더해, 사랑하는 부인이 끌고 가는 수레에 타야 한다는 죄책감이 그를 몹시 서글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집 부려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건 본인이 더 잘 알았다. 리카르디스는 얌전하게 수레 위에 올라탔다.
“로즈. 안 힘들어?”
“하나도요.”
“지금은 당신도 힘이 약하잖아.”
추적당할 위험이 있어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좀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으음…… 달링보다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생각해 준다고 끝을 흐리는 것 같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미 다 내뱉은 후라 말을 흐리는 의미가 없었다.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던 리카르디스는 덜컹이는 수레 위에 얌전히 앉아 있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멀리서 마을의 목책이 보였다. 제일 먼저 세워진 혼혈 마을인 만큼 규모도 상당히 컸다. 로젤린은 수레를 근처에 세워 두고 리카르디스를 부축했다. 느린 걸음으로 마을 입구에 다가가자, 어떤 청년이 껄렁거리며 다가왔다. 창을 들고 있긴 하지만, 병사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을 자치대의 일원 같은데 뭐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통행권은?”
로젤린이 깜짝 놀라-는 척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바야, 갑자기 무슨 통행권이에요?”
“아니이, 로즈 너는 그렇다 치고, 저놈은 완전 외부인 아냐? 뭘 믿고 마을로 들여보내 줘? 뭐 힐리사고 용병이라고? 이 비리비리…….”
며칠간 앓은 것 때문에 수척해지긴 했지만, 리카르디스의 몸매는 여전히 탄탄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남자가 말을 재빨리 바꿨다.
“희멀건 해서 검이나 한번 휘둘러 봤을까 싶은 놈이 용병일 리가 있나. 너한테 거짓말 한 거라고, 로즈.”
로젤린은 당황하는 척하며 속으로 살짝 혀를 찼다. 힐리사고의 용병들은 실력 좋고 거칠기로 유명했다. 리카르디스 또한 야성적으로 꾸미긴 했지만, 눈앞의 청년을 만족시키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로젤린과 달리, 리카르디스는 남자가 시비를 거는 진짜 이유를 눈치챘다.
‘저 자식이……?’
호감 있는 여자 앞에서 수컷들이 보이곤 하는 눈빛, 몸짓, 분위기까지. 전형적이어도 이렇게 전형적일 수가 없었다. 로젤린에게 마음이 있는 놈이었다. 때문에, 옆에 있는 자신을 거슬려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로젤린의 어깨를 끌어 리카르디스에게 떼어 놓았다.
‘죽일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볼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죽이자.’
인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리카르디스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물론 미리 설정해 둔 대로 움직이는 것이긴 했지만, 개인적인 감정도 넘치게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남자가 허술하게 들고 있는 창을 그대로 빼앗았다.
“어?”
말 그대로 어? 하는 사이에 창을 빼앗긴 남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대비하기도 전, 리카르디스는 창을 한 바퀴 돌려 뭉툭한 뒷부분으로 남자의 목을 정확하게 겨눴다. 창과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의 손놀림이었다.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방심했던 남자는 당혹스러운 듯 눈만 깜박였다.
리카르디스는 일부러 목소리를 긁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손 떼.”
“이, 이 미친놈이…….”
“목에 구멍 뚫리고 싶으면 계속 잡고 있어 보든지.”
목을 꾹 누르는 창의 감촉에 남자가 콜록 기침하며 뒤로 물러섰다. 로젤린을 안고 있던 손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목책과 창 사이에 갇힌 남자는 눈만 깜박거렸다.
“어머, 달링도 참.”
그때 로젤린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남자의 목을 뚫을 듯 겨누던 창이 로젤린의 나긋한 접촉에 쑥 내려갔다.
“여기는 힐리사고가 아니라니까요, 달링. 발타에서 이 정도는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인사예요.”
힐리사고 남자들의 부인은 결코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손을 대면 안 된다’의 의미는 정말 손끝 하나도 스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제 부인과 어깨가 닿았다며 칼부림을 한 남편이 있을 정도였다.
남자가 흘깃흘깃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힐리사고 놈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왜 다 저 모양이지? 하는 표정이었다. 짙은 남청색 머리카락 사이로 살벌하게 빛나는 눈을 본 남자는 결국 백기를 들고 길을 텄다.
“무, 문제 일으키면 아주, 혼날 줄 알라고!”
남자의 말을 흘러 넘긴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부축을 받아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입구를 지나치니 북적이는 거리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일순 집중되는 사람들의 눈길에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눈에 띄는 피부색과 입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절뚝이는 불편한 행동 아래 긴장을 삼켰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저 사람…….”
리카르디스는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로즈가 말한 집착이 심한 잘생긴 남편이로군.”
“아, 성격은 별로지만, 로즈한테는 잘해 준다는?”
“어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주 개차반이라고 그냥.”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로젤린에게 반쯤 업혀 가는 그 와중에도 대화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잘했죠? 라고 묻는 것 같은 태도에 리카르디스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확실히 잘생긴 것 같긴 한데.”
“로즈가 아깝지.”
“맞아. 힐리사고 놈들은 성격이 별로라고.”
리카르디스는 잠시 칼릭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칼릭스가 어떻게 ‘귀염둥이 칼’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는지의 경위도 잠깐.
“그래도 로즈를 지키다가 다쳤다잖아?”
“그거라도 해야지.”
실상은 로젤린이 지켜 줬다는 점에서 리카르디스는 자괴감에 휩싸여 괴로워해야 했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등을 토닥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로젤린은 친해진 부인의 집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퉁퉁한 부인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리카르디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상의 인물 ‘로즈’의 집안에 결혼 허락을 받으러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그래도 원래 냉랭한 사람이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로젤린을 대할 때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로젤린의 볼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꼭 껴안기까지 했다. 로젤린도 해사하게 웃으며 여자의 볼에 입을 맞췄다. 누가 보면 십몇 년은 알아 온 친한 이웃 사이인 줄 알 것 같았다.
“잘 지내셨어요?”
“안 본 사이 더 예뻐졌구나, 로즈. 어서 들어오렴. 그리고 그쪽도.”
‘그리고 그쪽도’라는 대목에서 온도가 뚝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어쨌건 간에, 로젤린은 정말 훌륭하게 투라르에 녹아드는 것에 성공한 듯 보였다.
두 사람은 전쟁 때문에 상단이 오는 날이 불규칙해졌다는 불우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상단이 예상보다 늦게 도착할지도 몰랐다. 초조할 만도 한데 로젤린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마을 사람들을 따라 일을 다니며 품삯을 받아 오기까지 했다. 그 돈으로 리카르디스를 입히고, 먹이고, 치료했다. 헌신적인 로젤린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 깊어 했다.
로젤린이 대외적으로 활동한 덕에 리카르디스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몸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리카르디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밖을 나서는 것이었다. 로젤린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 신경 쓰여 도리어 회복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가끔 거리에 출몰하게 된 남자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 로젤린이 있었다. ‘로즈’의 말대로 사교성이고 사회성이고 죄다 가뭄인 남자는 마을 사람들과 말 한번 섞지 않고 오직 부인만 바라보는 집착을 보였다.
오늘도 소문의 그 남자는 나무 상자위에 걸터앉아 마을 아낙들과 어울리는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구경하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콧대가 높고 날렵해. 턱도 남자답고, 몸도 좋아. 역시 용병은 용병인가 봐.”
우호적인 뜻이 담긴 말에 누군가가 재빠르게 반박했다.
“근데 싸가지 없어.”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내가 과일 말린 걸 주니까, 말의 거시기가 쪼그라든 것 같이 생겼군. 이러지 뭐야?”
“힐리사고 놈들이 그렇지. 음담패설을 안 하면 말을 못 하는 놈들이잖아.”
“그런데 어이없는 게 뭔 줄 알아? 저번에도 발타는 인사를 왜 그런 식으로 하냐는 거 있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발타의 인사는 다소 친밀해 보이는 감이 있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볼에 입맞춤이라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느끼기로는 파격적이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발타에서 몇 년을 지냈지만 아직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리카르디스 흉을 보던 중이었다. 마을 아낙들과 빨래를 끝내고 지나가던 로젤린이 그를 발견하고 쪼르륵 달려와 볼에 입을 맞췄다. 남자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굉장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게.”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러게.”
* * *
상단의 마차가 도착했다. 싣고 온 상품들을 마을에 풀었으니 마차도 가벼워진 참이었다. 어차피 가는 길, 한두 사람 더 태우고 삯을 받을 수 있으면 이득이었기에 상단주와의 교섭은 빠르게 이뤄졌다.
로젤린은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이 다 낫거든 다시 돌아오겠다며 훌쩍이는데 얼마나 절절한 이별인지, 리카르디스의 가슴이 다 아플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마차는 덜컹거리며 길을 달렸다.
멍하니 풍경을 보는 리카르디스의 입안으로 로젤린이 불쑥 무언가를 집어 넣었다. 우물우물 씹어 보자 부드럽게 녹아들며 고소한 맛이 퍼졌다. 치즈였다. 로젤린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맛있죠. 오늘 갓 만든 치즈예요. 아주머니가 작별 선물로 주셨어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큰 상단이라 그런지 발타 변두리의 마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빙긋 웃으며 가까이 있는 그녀의 입에 쪽 입을 맞췄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할 때는 뻔뻔하더니, 막상 당하니 그녀도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당신이 먹여 주니까 더 맛있어.”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몸을 돌려 자신의 앞에 앉혔다. 그러면서 그녀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실력자들이 꽤 있는 것 같아.’
로젤린의 손가락이 리카르디스의 손등 위로 원을 그렸다. 그러고는 깍지를 끼는 척하며 손바닥에 잽싸게 다른 암호를 남겼다.
‘죽이다. 숨기다.’
죽여서 목격자를 없애 버린다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에 타기 전 확인했던 상단의 인원수를 확인했다. 상단의 사람들만 해도 열 명이 넘었고 용병까지 합해 도합 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황금정원의 클로에를 통해 상단과 금전의 흐름에 따라 정보가 얼마나 손쉽게 이동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놓치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다 전력이 되지 못하는 만큼, 로젤린의 발목을 잡게 될 상황 역시 간과할 수 없었다. 들키기 전까지는 최대한 숨겨야 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볼에 입 맞춘 채 애교 있게 속삭였다.
“아니야, 내가 더 사랑해.”
로젤린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알겠다는 뜻이었다. 훔쳐보던 남자들이 어머 어머, 쟤들 좀 봐, 하면서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심은 점점 풀렸다. 로젤린이 며칠간 마을 아낙들을 훔쳐보며 눈으로 익힌 발타의 생활 풍습은 흠잡을 곳 없었고, 리카르디스 또한 힐리사고의 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틈날 때마다 붙어서 쪽쪽 거리는 두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연인. 그 이외의 단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참 좋을 때다’ 와 같던 반응이, ‘진짜 작작 좀 하지 꼴 보기 싫어 죽겠네’로 변할 때까지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연기를 지속했다.
그렇게 며칠 이동하던 중, 소식이 들려왔다. 일라베니아 제국군과 연합군의 정보였다. 그때 당시 제국군의 뒤를 치러 왔던 연합군이 댐의 붕괴로 반절가량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예상보다 큰 연합군의 피해에 내심 놀랐지만, 심각한 표정 아래에 생각을 숨겼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으면 나쁜 소식도 있는 법.
“하카브 왕자께서는 다시 일라베니아로 떠나셨다는군.”
“발타에 남은 잔당들은 어쩌고? 잔당이라고 말할 만큼 적은 규모도 아니라 생각하는데.”
“우리 연합군의 피해가 컸다지만, 일라베니아 놈들도 만만치 않으니까. 총사령관도 실종됐고, 아니 실종이 뭐야. 죽었겠지 뭐. 아무튼, 그런데다가 제국군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야. 그런 오합지졸 군대 정도로 리비타를 함락하기는 무리지. 함락은 무슨. 곧 수색대에게 지근지근 밟힐 걸세.”
남자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곧 병력이 총집결해서 중부 관문으로 나아갈 거라는군. 이번 해를 넘기기 전에 어쩌면 결판이 날지도 모르겠어.”
중부 관문 다음은 황도였다. 남자의 말대로 중부 관문이 버티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함을 가리기 위해 용병들이 준 싸구려 담배를 물었다. 연기가 입김처럼 번져 나갔다.
* * *
앞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느리게 움직이던 마차가 완전히 멈췄다. 리카르디스는 긴장한 용병들의 태도를 바라보곤 흘끗 로젤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아리에 매어 둔 단도가 있는 위치였다. 리카르디스도 옆에 풀어 둔 검을 가까이에 두었다.
바깥에서 오고 가는 소리가 길어졌다. 마차 안 다른 자들의 이목이 밖으로 쏠렸을 때, 로젤린이 잽싸게 수화로 무언가를 말했다.
[수색대]
발타의 수색대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다. 철걱, 철걱. 갑주를 입은 병사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투라르에서 태운 젊은 부부 외에는 전부 저희 상단의 용병들입니다.”
병사의 시선이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들을 날카롭게 죄였다.
“투라르…… 강가에서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못 걸어갈 거리는 아니군. 거기에다가 힐리사고의 용병이라. 발타에는 언제 처음으로 왔나?”
“3년 전쯤입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3년이나 발타에 있었는데, 흠. 상단주. 투라르에 들를 때 근처 마을에 힐리사고 용병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 있나? 좁은 곳이라 금세 소문이 퍼질 텐데.”
상단주는 곤란해 보이는 낯으로 수색대의 대장과 리카르디스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리카르디스가 주머니를 뒤적이자 수색대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용병들이 피는 싸구려 담배였다. 그가 담배를 물고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여유로운 숨과 연기가 퍼져 나갔다.
“3년 내내 발타에 있지는 않았죠. 힐리사고와 발타를 돌아다니며 일했습니다. 아름쉬에의 무지개 비늘 상단. 거기에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무지개 비늘 상단은 발타를 가장 많이 오가는 힐리사고의 큰 상단 이름이었다. 하지만 당장 확인할 수 없는 이상 수색대의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용병 일은 발타 내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부인이 있는데도 제법 떠돌이 생활을 즐기나 보군.”
리카르디스는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경계하는 시선이 모여 든 상황.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이곳이 전장으로 변할 터였다.
그때 로젤린이 나섰다.
“아, 그게…….”
리카르디스를 향하던 뾰족한 시선들이 로젤린에게 옮겨 갔다.
“이 사람이 힐리사고에도 가정이 있거든요.”
백여 명 넘는 사람들이 있는 길가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남자들의 시선은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싸늘해진 상태였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연기를 내뿜어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이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웃었다.
“저를 사랑하지만, 힐리사고에 있는 부인도 버릴 수 없다고 그랬어요.”
“뭐, 이 미친…….”
“저 개…….”
수색대의 대장이 리카르디스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따가운 사내들의 시선을 피했다. 로젤린이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하게 말했다.
“아뇨, 이상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가 진정한 운명이지만, 이미 혼인을 해 버렸으니까요. 그 부인도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거래요. 너무 멋있지 않나요?”
리카르디스는 순식간에 순진한 여자를 꾀어내 두 집 살림하는 천하의 개망나니가 되었다. 수색대의 대장이 들으라는 식으로 혀를 찼다.
“으흐흠, 부인은 남자 보는 눈을 좀 기르셔야겠소!”
수색대가 떠난 뒤, 상단의 사람들의 눈빛도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싸가지는 좀 없지만, 부인을 아끼는 놈을 보는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개잡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중점을 흐리는 훌륭한 화술로 그들의 경계를 벗어났으나, 리카르디스는 속이 쓰렸다. 옆을 바라보니 로젤린이 남몰래 엄지를 척 치켜세우고 있었다. 얄미웠다.
그렇게 따가운 눈총 아래 마차가 굴러가고 있을 때였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품에 기대어 잠을 자는 척했다. 체력이 약한 여성이라면 이즈음 피곤하겠지, 하는 철저한 계산속에 이뤄진 행동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있던 로젤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동시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도적이다!”
안 그래도 수색대의 대장이 떠나기 전에 이르고 간 내용이었다. 최근 전쟁 때문에 높아진 세율로 마을을 버리고 어설픈 강도 흉내를 내는 자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날아오는 화살을 감지하고 벽에 붙어 있던 리카르디스를 잡아당겼다. 1초 전까지 그가 등을 기대고 있던 벽면에 화살촉이 비죽 솟아 있었다. 같이 마차를 타고 있던 용병들이 튀어나갔다. 둘만 남자 로젤린이 종아리에 매 둔 단검을 잽싸게 꺼냈다. 그녀가 밖을 슬쩍 보다가 한 발짝 물러섰다. 곧바로 그 자리에 또다시 화살이 꽂혔다.
상단의 사람들보다 도적의 수가 두 배 이상이 많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농기구를 들고 있는 어설픈 산적이 아니라, 무기와 방어구를 갖춘 집단이었다. 전황이 불리했으나 로젤린은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헤어진 수색대 중에 마인이 있다면 마력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는 이르지만, 무리를 벗어나야겠습니다.”
재빨리 판단을 마친 그녀가 마부석에 앉았다. 곧 말 두 필이 이끄는 작은 마차가 홀로 길가를 벗어났다. 전투를 벌이던 용병들이 그 모습을 목격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적들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끊임없이 화살을 날려 보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아하니 쫓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길가 옆에 난 나무가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적들이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였다. 로젤린이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틀어 보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나무 기둥이 떨어지며 쿵! 하고 땅을 울렸다. 놀란 말이 앞다리를 치켜들고, 나머지 한 마리는 나무에 부딪쳤다. 마차가 기우뚱 기울었다.
발밑이 불안해진 순간 리카르디스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로젤린을 보았다. 그녀가 껴안자마자 마차가 쓰러지며 비탈을 굴렀다.
마차가 비스듬한 면을 따라 뒤집힐 때마다 리카르디스는 온몸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까지 몸이 다 낫지 않은 상황에서 버티기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시야가 초 단위로 바뀌었다. 바닥이 천장에 가 있고 천장을 밟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게 또 순식간에 뒤집혔다.
로젤린은 안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몸이 고통으로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텅, 등이 벽에 부딪치며 튕겼다. 그리고 발이 다른 면에 닿는 순간, 로젤린은 또 다른 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뻥 뚫린 틈으로 두 사람의 인영이 얽혀 빠져나왔다. 텅 빈 마차는 계속해서 산비탈 밑으로 굴러가며 부서져 내렸다.
“으윽…….”
리카르디스는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통증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짧은 사이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달링!”
정신이 혼미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뇌리에 똑똑히 박히는 애칭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헐떡이며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겨우겨우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릿해 그녀가 두세 명으로 흩어져 보였다.
“……괜찮아. 그대는?”
“저는 괜찮지만,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마력을 써 버렸어요. 마차에서 탈출하려다가 그만…….”
명백한 실수였다. 리카르디스의 상태가 악화되는 걸 방지하고자 한 행동이지만, 그 배경에 과거 마차 사고의 기억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도 분명히 있을 텐데 순간 머리가 굳어 버리며, 본능만 작용해 버린 것이었다.
“빨리…… 이동하는 게, 좋겠어.”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다 시선을 휙 돌렸다. 보이지도 않는 저 먼 곳에서부터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젠장.”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추 눈치챘다. 그녀가 이를 갈듯 말을 씹어 내뱉었다.
“들켰습니다. 빨리 이동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산길을 내달렸다. 리카르디스는 갈비뼈를 붙잡고 애써 신음을 참아 냈다. 거대한 짐승의 발이 땅을 구르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칼로 찌르는 듯한 선명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로젤린도 그런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눈치챘으나 멈출 수 없었다.
마인의 기운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마차에서 탈출하고 난 후부터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용케 위치를 파악하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탄 말보다 한 사람이 탄 말이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추격자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근접한 상황이었다.
끈질긴 추격전은 두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고 나서야 멈추게 되었다. 한걸음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찔한 절벽 아래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말이 푸르르 투레질했다.
로젤린은 말에서 내려와 주위를 살폈다. 쫓아온 자의 숫자는 오십여 명. 그중 마인은 다섯쯤 되는 것 같았다. 상대하지 못할 숫자는 아니지만,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면서 싸워야 했기에 불리했다. 조금만 방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천천히 숨을 내뱉은 로젤린이 검을 뽑아 끝을 땅으로 향하게 했다. 사각, 무딘 검 끝과 자갈이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둘러싼 발타의 병사들이 일시에 몸을 굳혔다. 자그마한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기운뿐 아닌, 눈으로 보이는 경이로운 광경 때문이었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더니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짙은 갈색에서 완전한 흑색으로, 두피에서 머리끝까지. 그녀는 검을 꽉 쥔 채 몸을 웅크렸다. 바닥에 닿아 있던 검 끝이 땅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등, 어깨, 드러난 팔의 근육이 섬유의 위로도 보일 만큼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마력의 기운이 멎었다. 천천히 웅크린 몸을 펴는 그녀는 아까와 달리 키와 체구가 훌쩍 자라 있었다. 갈색빛을 띠던 눈동자 또한 어느새 여름의 이파리처럼 푸릇하게 변한 채였다.
[검은 머리, 하얀 피부, 녹색 눈, 장신]
총사령관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와 함께 실종되었다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 정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로젤린이 입을 꾹 다물며 검을 들어 병사들을 향해 겨눴다. 그제야 발타의 병사들은 잠에서 깨어난 듯 일시에 움직였다.
“……?”
로젤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병사들이 검을 뽑거나 공격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고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잠시간 그들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방심하게 하려는 수작인가?
로젤린이 교전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상대들을 잽싸게 살해해 버리려 마음을 먹었던 때, 가운데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 로젤린에게 남자 보는 눈 좀 키우라 했던 수색대의 대장이었다.
“저의 주인께서 귀한 분을 뵙고자 청하니, 부디 모시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 *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로젤린의 눈은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정비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어 흔들림이 심하지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지금의 그에게는 큰 충격이 되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 바닥에 누운 채 숨을 쌕쌕 토해 내고 있었다. 로젤린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이마를 매만졌다. 아까보다도 체온이 높아져 있었다. 로젤린은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 마차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한번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나절을 달리고 나서 당도한 곳은 발타의 작은 요새 중 하나였다. 수색대의 대장이 신분 패를 보이고 요새의 문을 통과했다. 로젤린은 마차 안에서 검을 빼어 든 채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도 바깥에서 불순한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오거든 안전하게 보호하겠노라는 제의를 받았다. 수색대의 대장이 아닌 그의 ‘주인’으로부터의 전언이었다.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카브가 눈에 불을 켜고 리카르디스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타인이 몰래 리카르디스를 빼돌리고자 한다니.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결국 그 제의를 승낙했다. 쫓아온 추격자들이 우위에 서 있는 상태였음에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과 ‘주인’이라는 자의 이름이 기묘한 신뢰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멈췄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부축한 채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미로같이 복잡한 곳이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고, 왼쪽으로, 중앙 길로,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계층을 오르고. 로젤린은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 지리를 익혀 두었다.
병사들이 큰 방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천으로 가려진 안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주인님.”
로젤린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하녀들이 천을 걷었다. 막 일어서던 여자와 로젤린의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경.”
로젤린이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색대의 대장에게 들었던 대로, 간제가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왕녀 전하.”
생글생글 웃던 그녀가 로젤린에게 반쯤 기대다시피 한 남자를 보고는 인상을 굳혔다.
“전하인가요?”
“…….”
“전하로군요. 야라. 그분을 모시고 오렴.”
로젤린은 간제가 안내한 너른 침대에 리카르디스를 눕혔다. 그는 신음을 겨우 삼키고서 간제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분이군요. 왕녀.”
“그런가요? 저는 제가 나름 일관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요.”
곧 시녀들과 함께 온 남자는 간제만큼이나 놀라운 인물이었다.
“아아니! 로젤……!”
완벽한 문장이 구사되기 전, 간제가 남자의 입을 확 막아 버렸다. 라헤안시는 그제야 자신이 발타 한가운데에서 발타인들이 간절히 죽이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라헤안시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두 손을 모아 하트를 그렸다. 대충 반갑고 너무나 좋다는 뜻이겠거니 싶었다. 로젤린은 답변을 돌려주는 대신 라헤안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질질 끌고 간 로젤린이 라헤안시를 던지다시피 침대에 밀어 넣었다.
당혹스러워하던 라헤안시는 침대 위에서 신음을 내뱉는 남자를 발견하고서는 표정을 굳혔다. 머리 길이와 색이 달랐지만 누군지 금세 알아챈 듯했다. 라헤안시가 자세를 잡고선 리카르디스의 몸 위로 손을 얹었다. 그 주위로 하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팔짱을 낀 채,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만히 그의 곁을 지켰다.
거칠던 리카르디스의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변했다. 상처가 날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손 또한 느슨해졌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곧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안에 가장 먼저 담긴 사람은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아직 손톱자국이 박혀 있는 손을 그녀에게 뻗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라헤안시의 성력이 거기까지 미친것인지, 그녀의 눈앞에서 벌겋게 드러난 속살이 아물었다.
로젤린의 가슴을 꽉꽉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눈물이 투두둑 흘러내렸다. 그녀는 리카르디스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그 위에 젖은 얼굴을 묻었다.
* * *
리카르디스는 새벽이 찾아올 즈음 눈을 떴다. 옆구리가 따뜻했다. 언제나처럼 로젤린이겠거니 해서 반사적으로 부드럽게 끌어안은 순간, 리카르디스의 후각에 낯선 향이 감지되었다. 그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리 시야가 흐릿하다지만 검은 머리와 분홍 머리를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
이 자식이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 울컥하던 마음은 초췌한 라헤안시의 몰골을 본 후 많이 누그러졌다.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났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숨쉬기도 힘들던 어제에 비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까딱거리다가 익숙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퍼진 하얀 빛이 그의 몸에 다시 파고들었다.
“……하.”
몸 안에 퍼진 따스한 기운이 남아 있는 통증마저 걷어 갔다. 정말 악몽 같은 나날이었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 다리를 까딱이며 움직였다.
‘로젤린은 어디 있지?’
리카르디스는 침대의 천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어제는 제대로 보지 못한 방 안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발타의 궁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호화롭고 넓은 방이었다. 그 벽의 정중앙에 요새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리비타에서 멀지 않은 곳이군…….’
리카르디스는 기존의 목적지였던 리비타, 그리고 그 안에 있을 힉살라를 잠시간 떠올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이곳에 있었다. 일국의 왕녀가 이 전시 상황에 수도의 궁전에서 벗어나, 적군의 총사령관을 은밀하게 찾아 보호했다. 단순한 일탈이라 말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우선 간제부터 찾아봐야 할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방을 살폈다. 큰 응접실과 연결된 작은 방에 들어가니 문가에 서 있던 호위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흘끗, 중앙의 침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리카르디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넓은 침대 위에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간제와 로젤린. 두 사람이 사이좋게 손목과 손목을 붉은 천으로 묶어 둔 채로 잠들어 있었다.
“…….”
리카르디스가 간제의 호위에게 눈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호위도 아는 바가 없는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기척에 로젤린이 깨어났다. 그녀는 문가에 있는 리카르디스를 보고 덜컥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게도 연결되어 있는 간제가 피해를 입었다.
“악!”
어깨가 빠질 뻔한 간제가 비명을 질렀고, 로젤린은 그때야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다. 로젤린은 단단히 묶은 끈을 풀 여유조차 없는지, 간제를 한쪽 어깨에 위에 얹고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잠에 덜 깬 간제가 우으으 하면서 그녀의 어깨 위에 늘어졌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살폈다.
“저, 전하. 몸 상태는…….”
로젤린의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다친 곳 중 어디를 먼저 만져야 하나 마음만 앞선 것 같았다. 그 산만한 손놀림에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 괜찮아.”
로젤린은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으나, 손을 내리는 척하며 그의 가슴팍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괜찮대도.”
곧 방 안의 모든 인원이 일어나 한자리에 모였다. 로젤린, 리카르디스, 간제, 라헤안시까지.
“궁금한 점이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어보시면 기꺼이 답해 드리지요.”
간제의 말에 리카르디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끈으로 손목을 연결한 채 자고 있던 겁니까?”
그것부터 물어볼 줄이야.
“……아, 네. 그건 제가 인질이라서.”
“인질?”
“네, 로젤린 경이 제가 어떻게 왕녀 전하를 믿겠냐며 저를 인질로 삼고 싶다고 해서요. 혹시나 자는 도중 놓칠지도 모르니 손에 끈을 묶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왕녀는 그에 동의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인질이 생긋 웃으며 다과를 인질범에게 밀어 주었다. 인질범은 그걸 또 좋다고 먹고 있었다. 희한한 광경이었다.
“사실 로젤린 경이 마음먹으면 묶고 있건 없건 별반 차이는 없을 겁니다. 그냥 마음의 위안만 더할 뿐인 일이니 못할 이유가 없지요. 궁금증은 풀리셨나요?”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러고 자야 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간제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가 의문스러웠다. 간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발타에 떨어진 세 명의 일라베니아인은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그녀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로젤린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그런 불편함까지 감수할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리카르디스는 우선 그 의문을 넣어 둔 채 궁금했던 다음 얘기를 물었다.
“라헤안시 대신관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건 라헤안시가 대신 설명했다.
“도망치고 있는데 갑자기 저기에서 물이 해일처럼 밀려오잖아! 어쩌다 휘말려서 떠내려갈 뻔했는데, 누가 나를 건져 줬어. 근데 그게 발타의 병사들이지 뭐야. 아, 나는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 몰래 빼돌리더라고! 와, 뭐지? 이제 죽겠구나 싶었거든? 근데 날 구해 준 사람의 상사가 왕녀 전하였지 뭐야!”
라헤안시가 리카르디스의 귓가에 뒤 내용을 속삭였다.
“그래서 뭐지? 이제는 진짜 죽겠구나 싶었는데, 살려 주더라!”
“……그래. 잘됐구나.”
이 빈곤한 어휘력으로 대체 어떻게 설교를 하고 살았던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앞에서 생글 웃고 있는 간제를 바라보며, 가장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왕녀가 바라는 건 뭡니까.”
“순수한 선의라고는 믿지 않으시겠죠.”
“예.”
간제는 흠, 하며 코로 숨을 쉬고는 두 손을 겹친 채 꼬물거렸다. 망설임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저와 제 오라비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얼마나 좋지 않느냐면…….”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많이 안 좋습니다.”
“…….”
말 안 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개인감정을 미뤄 두고서라도 저에게는 하카브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발타예요.”
“발타를 위해서라…… 발타는 지금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왕녀.”
“승리가 과연 발타에 뭘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간제가 상체를 숙이며 턱을 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에 닿아 소리를 냈다. 간제는 그때마다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요소를 꼽았다.
“자부심?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일라베니아의 영토? 황성에 쌓인 보석과 황금?”
“대개는 그런 것들을 얻고자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게요, 말하고 보니 승리도 나쁘진 않겠어요.”
간제가 피식 웃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저에게는 자부심보다 전쟁으로 죽어 나가는 많은 발타인의 목숨이 소중하고, 개중 비옥하다고는 하나 마찬가지로 노쇠해 가는 일라베니아의 영토도 그다지 탐나지 않습니다. 보석과 황금. 그것은 빠르게는 수년, 늦게는 백여 년 안에 가치를 잃고 아무 가치 없는 반짝거리기만 하는 돌덩이가 될 겁니다. 그것을 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간제가 제 팔찌를 와구 와구 먹는 시늉을 했다.
“전쟁에 이긴다 해도 결국 검게 변해 썩어 가는 땅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 위에 서 있는 수많은 백성들도 대륙과 함께 서서히 죽어 가겠죠. 물론 저의 부귀영화는 보장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하는 생물이니까요. 그 짧은 시간 동안은 대륙이 버텨 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가 죽은 뒤에는? 백 년 뒤에는? 이백 년 뒤에는요?”
간제는 하카브와 마찬가지로 미소로 무장하여 본심을 숨기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거 일라베니아의 성에서 “하카브는 저를 결코 죽일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던 때와 지금만큼은 가면이 벗겨지고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결코 변명이나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진심이 보였다.
“발타에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닌 축복의 밤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하카브가 모든 걸 망쳐 버리려는 미친놈일 뿐입니다. 그리고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유일하게 필요한 걸 주실 수 있는 분이고요.”
“……그렇군요.”
리카르디스는 간제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조금 찝찝한 듯,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런 박애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셨다고요?”
리카르디스가 대답 없이 가만히 다른 곳만 바라보자 간제가 깔깔 웃었다.
“인상과 풍채가 좋은 노인이 했으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을 법했지요, 이해합니다.”
그것보다는 그 말을 꺼낸 게 간제라서 모호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세상 하루만 사는 사람처럼 하카브와 반목하고자 했던 이유가 제 나라를 사랑해서라니. 정말 이런 생각은 실례지만,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간제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부드럽게 리카르디스를 응시했다.
“하지만 제 이상과 전하의 이상은 완전히 같지 않겠죠. 그러니 저는 전하의 온정에 기대어 부탁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이것은 거래입니다. 제 조건을 말씀드리지요.”
그녀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러고는 하나를 접으며 얘기했다.
“축복의 밤을 부를 것.”
리카르디스는 잠깐 그 부분에서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려 했으나, 결국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기를 선택했다. 간제의 손가락이 하나 더 접혔다.
“전쟁으로 일어난 어떠한 피해도 발타에게 묻지 말 것.”
간제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무언가를 꽉 움켜진 듯한 모양의 손 뒤에서 간제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3왕녀 간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
그녀가 입을 닫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간제를 응시했다.
“조건이 추상적이군요,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볼까요.”
“축복의 밤은 말씀드렸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전쟁으로 일어난 어떠한 피해도 발타에 묻지 말 것.’부터 얘기해 볼까요?”
간제가 아까 그 말을 하며 접었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필이면 중지라서 기분이 모호해졌다.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으셨음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그녀가 중지를 곧게 세우더니 제 손가락을 보며 열렬하게 외쳤다.
“하카브 그 미친 인간! 그놈 하나가 사두마차의 말 네 필이 되어 끌고 간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죄를 물으려면 그놈 하나에게 물으세요!”
대단한 기세에 리카르디스와 라헤안시가 움찔거렸다. 간제는 씩씩거리던 걸 진정하고 다시 침착하게 얘기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발타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제가 ‘2황자 리카르디스를 살린다’라는 선택으로 그 예정된 운명이 틀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합당한 값으로 두 번째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간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발타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시 일라베니아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그 미래를 비튼 값으로 발타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이득일 수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간제가 휴 하며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3왕녀 간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 이 세 번째 조건은 두 번째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무턱대고 이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서 발타를 쏙 빼 달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질타를 받을 인물을 내세워야겠죠. 저는 그걸 하카브로 할 생각입니다. 발타 왕실은 하카브와 아무 상관 없다! 이런 느낌으로, 평소에 왕실이 검은달에 대해 변명할 때처럼요.”
“그 말을 왕녀의 입에서 들으니 굉장히 기분 이상하군요.”
“그러게요, 저도 말하면서 좀 기분이 이상했네요. 아무튼…… 하카브가 쥐고 있는 주도권을 뺏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힉살라뿐이지 않겠습니까?”
간제가 흘끔거리며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그 눈빛은.”
세 번째 조건은 분명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3왕녀 간제를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 인데 이야기가 묘한 곳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설마 저보고 힉살라를 설득해 달라든지, 혹은 반역 일으키는 걸 도와서 왕녀를 힉살라로 만들어 달라든지 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아니긴 하지만 힉살라께서도 제 말보다는 리카르디스 전하의 말을 좀 더 귀 기울여 들으실 것 같다는 점에서 그 의견도 나쁘진 않네요.”
“나쁩니다.”
“아, 네.”
지금 자신은 발타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어떤 권력, 무력도 동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빤히 알면서 무얼 도와달라고 하는 것일까. 가진 것이라고는 신성력밖에 없는데.
‘아.’
그 순간 한 가지 가설이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힉살라의 치료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눈치가 빠르시군요, 전하.”
발타의 힉살라를 대신해 하카브가 왕실을 통제하기 시작한 건 올해로 7년쯤 되었다. 그동안 힉살라는 내내 투병 중이라 알려지긴 했으나,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실상은 그가 죽은 사람일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돌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도 그 음모론을 믿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카브의 행태는 나날이 갈수록 도를 지나쳤고, 만약 힉살라가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런 그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몇 년째 의식이 없으십니다. 독에 중독된 상태지요.”
“……발타 내에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있을 텐데요.”
“전부 하카브의 사람들입니다.”
치료하지 않고 일부러 놔둔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손마디로 턱을 쓸었다.
“……제가 리비타로 가야 한다는 얘기인 것 같군요.”
간제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말을 망설였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국의 총사령관이 발타의 궁전으로? 호랑이의 아가리에 핏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들고 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전하께서 위험한 일에 처하지 않으리라 장담 드리긴 어렵습니다. 리비타의 궁전에는 하카브의 사람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해 뒀답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간제가 진실을 토해 냈다.
“아주 조금이지만요. 그래도 전하를 눈에 띄지 않게 이곳까지 모시고 올 정도는 되는데.”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 인정합니다. 순식간에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니까요. 하지만, 치료가 끝난 힉살라께서 간제 왕녀와 같은 뜻이리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일라베니아 황성에 발타의 깃발을 꽂기 직전인 이 상황을, 발타의 힉살라가 기껍게 여기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간제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 오라비와 힉살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대화할 여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과격하게 재워 두지는 않았겠죠.”
“사이가 안 좋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간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오라비가 적법한 후계자들을 죄다 죽여 버렸거든요.”
“후계 다툼이야 어느 세대고 일어나는 일일 텐데요. 이제는 그가 적법한 후계자 아닙니까.”
“아뇨, 힉살라께서는 하카브의 존재 자체를 몹시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마력이 없는 자는 인간 취급을 안 하셔서.”
리카르디스가 ‘뭔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군.’이라고 생각하자마자 간제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지금 그 아빠에 그 아들이라 생각하셨죠.”
“설마 그럴 리가요.”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었다. 간제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힉살라가 계시는 한, 마인이 아닌 하카브는 결코 왕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게 놈이 아직 왕자라고 불리는 이유죠.”
그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왕녀 전하.”
“예, 로젤린 경.”
“늦었지만, 위태로운 상황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머, 별말씀을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는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리비타의 궁전으로 가시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습니다.”
간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숨기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간제를 응시할 뿐이었다.
“계획은 확실하지 않고 변수는 많으며, 깨어난 힉살라께서 하카브 왕자를 후계자로 여기지 않을 거라는 말 또한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만 보고 제국의 총사령관께서 위험을 감수하실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더하는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졌다. 간제는 그런 로젤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름 평화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는 호위들이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말은 하기 싫었지만, 로젤린 경은 지금의 상황을 자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는 발타의 한가운데이며, 너희들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간제의 말대로 이곳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간제의 협박에 응수했다.
“왕녀 전하께서도 현실을 아셔야겠습니다. 어제 인질이 되어 달란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봅니다.”
아무리 마인이라고 해도 로젤린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고, 그 점은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간제는 로젤린이 손을 뻗었을 때 닿는 거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위협이라는 걸 지금 와서 자각했다. 숨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압박감이 공간을 메웠다.
그렇게 소리 없이 시선만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저, 저어…….”
라헤안시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며 살짝 손을 들었다. 굳은 표정의 두 여자가 동시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헤안시는 소스라쳤다.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두 번 끼어드느니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쪼그라든 위엄을 도닥인 후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총사령관님이 아니더라도 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모두가 그 말뜻을 이해했다. 라헤안시, 그가 리카르디스를 대신해서 리비타로 가겠다는 얘기였다. 세 명의 얼굴을 번갈아 본 라헤안시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쟤도 있었네’ 같은 반응인데…… 이거 생각보다 상처가 되네요.”
간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곧 그녀의 눈이 라헤안시를 향했다.
“몇 년 동안 중독된 중상자를 치료할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여도 대신관 중에서도 네 손가락 안에 듭니다.”
일곱 명 중에 네 번째? 애매하지 않나? 그런 기색을 느낀 라헤안시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일라베니아에서 리카르디스 전하를 제외하고 네 번째!”
그렇게 말하니 생각보다는 괜찮게 들렸다. 버럭 성질냈던 라헤안시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저도 총사령관께서 리비타에 가는 것은 아니라 봅니다. 연합군이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흩어진 제국군을 규합하여 연합군을 막을 수 있는 건 리카르디스 전하밖에 없습니다. 위험성과 계획의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리비타의 궁전을 넘어 힉살라의 방에 침입한 뒤, 치료를 끝내고 제국군과 합류해 중부 관문으로 간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게 분명했다. 간제는 라헤안시가 말한 대로 리카르디스에게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간제 왕녀께서 말하신 부분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인 만큼.”
“대신관님께서?”
“예, 제가 가지요. 그사이 총사령관께서는 제국군을 이끌고 연합군을 막아 주시길 바랍니다.”
예상했던 내용이지만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위험을 남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혀 한쪽에 혓바늘이 돋은 것 같은 껄끄러움과 불편함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위험할 거다. 라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가 사용한 제 애칭에서 그의 걱정을 읽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형이라니깐.’
라헤안시는 씩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형, 걱정 마.”
“네가 나라면 걱정을…….”
라헤안시가 낄낄거렸다.
“신에게 빌기만 한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으니 움직여야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신관이라는 인간이 말하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으나, 그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헤안시가 꽉 주먹을 쥐었다. 긴장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터트리기 전에 잔뜩 힘을 응축하듯 견고해진 모양새였다.
라헤안시가 주먹을 불쑥 리카르디스에게 내밀었다. 리카르디스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주먹을 맞대었다. 라헤안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렸다.
“우리 지금 되게 멋있지 않았어? 역사서에 기록되면 ‘발타. 위험의 한가운데에서도 우애로 얽힌 맹세가 일어났노니…….’ 이런 식으로…….”
“그럼 대화를 마무리 지어 볼까요, 왕녀.”
리카르디스가 무시하자 라헤안시가 툴툴거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간제를 향한 후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고 했던가요. 그 말대로 되었군요.”
간제는 막 엎어질 뻔한 거래가 간신히 이뤄졌음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간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으며 크게 외쳤다.
“우리 힘을 모아 하카브 그 개자식을 죽여 봅시다!”
“……그래요. 좋은 생각입니다.”
* * *
계약이 성사되긴 했으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축복의 밤이 지난 이후 마인이 어떻게 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로젤린과 간제가 둘만의 작은 연회를 흥청망청 즐기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에게 그 건에 관해 물어보았다.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최초의 신전에서 가져온 역사서들을 탐독했다는데, 소득이 전무 했단다. 리카르디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손에 손을 잡고 하카브 개자식을 죽여 보자고 동의한 게 언제인데, 말을 번복해야 한다니. 리카르디스는 깔깔 웃고 있는 간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예?”
“먼저 얘기를 못 한 점은 양해해 주길 바랍니다. 왕녀가 무슨 말을 꺼낼 줄 알고 대뜸 그 얘기부터 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로젤린 경의 안전이 확실시되기 전까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의식은 미뤄야겠습니다.”
“……그.”
간제가 급히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리카르디스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에게는 그녀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건은 협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잠시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던 간제가 손으로 입을 턱 가렸다. 실망한 것인가 싶었는데, 눈빛이 기묘하게 초롱초롱했다. 자세히 보니 어깨도 들썩거리는 중이었다. 엎어진 계약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함에 입을 떼려고 할 찰나, 간제가 옆자리에 있는 로젤린의 손목을 덥석 잡아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귓가에서 간제가 속삭였다.
“세상에, 로젤린 경. 저 얼음 같은 분을 어떤 매력으로 함락시킨 건지요? 비법 좀 전수해 주시죠!”
로젤린의 볼이 불그스레하게 변했다.
“……힘?”
속삭이는 내용이 다소 컸던 터라 모두 다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간제를 불렀다.
“왕녀.”
간제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얼굴까지 오른 열을 식히고 있었다.
“너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세상도 버릴 수 있어. 이런 말을 살아서 듣게 될 줄이야. 조금 설레고 많이 낯간지럽네요.”
대화가 많이 왜곡된 상태였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피로감을 나타냈다. 간제가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진지하셔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저에게 중요한 부분이라 말했을 텐데요.”
“예, 그렇죠. 그런데 그게…….”
말을 끌던 간제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며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알고 있거든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세 명의 일라베니아인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왕실 서고에 있는 터라 당장 확인시켜 드릴 수는 없지만, 발타에 그 정보가 있습니다. 마인의 안전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정말 세심하고…….”
피곤한 성격이었다.
“세심하시네요.”
간제는 애써 포장을 마쳤다. 리카르디스는 조급한 표정으로 간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의식이 마인에게 안전하다는 말입니까?”
“음, 안전하냐, 안전하지 않냐를 묻는다면 안전하다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륙을 소생하는 거대한 힘의 주축이니 만큼, 후에 변화가 있긴 합니다.”
“변화라 하신다면?”
“마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더군요. 그냥, 평범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릇은 무사하되, 그 안에 있는 거대한 힘만 빠져나간다는 얘기였다. 간제가 말한 얘기는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최악을 가정해 둔 상태였다. 죽을지도 모른다.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에 비하면 마력을 잃는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건 제 입장일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곧장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제 목숨까지 바치겠다 맹세했습니다, 전하.”
곧고 다정한 시선이었다. 어딜 가고, 어느 아름다운 광경을 보아도 그녀의 눈동자만큼 귀한 가치를 지닌 것은 없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말아 쥐고 로젤린을 보며 마주 웃었다.
그쯤, 짙은 연애 농도 속에 가쁘게 호흡하던 간제가 라헤안시를 끌고 방을 나섰다.
* * *
힐리사고 왕국이 일라베니아의 동맹이 아닌 발타의 연합군에 속해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 대륙에 널리 퍼졌다. 경악할 일이었다. 힐리사고가 일라베니아를 배신하다니.
이것은 일라베니아가 발타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대륙의 아버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영원한 영광. 일라베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발타와 결탁을 하다니. 대륙의 많은 권력자들이 힐리사고를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힐리사고 왕국이 정식으로 소명하며 기류는 점차 뒤바뀌기 시작했다. 유일 제국이라는 일라베니아의 이름 아래 그들이 얼마나 횡포를 저질러 왔는가? 권리만을 누리고자 하고 그에 따르는 의무는 수백 년간 저버리며 대륙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았나.
또한, 힐리사고 왕국은 ‘대륙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모두 일라베니아 때문’이라는 발타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들의 역사서에 잠자고 있던 빛바랜 증거를 내세우며.
그 역사서에는 아주 오랜 옛날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축복의 밤을 부르는 것은 성력과 마력을 가진 두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발타가 전쟁을 선포하며 널리 알린 바 있으나, 일라베니아를 언제나 음해하고자 했던 세력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나라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일라베니아의 친구였던 힐리사고가 전면적으로 나서며 증거까지 내세우자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성력뿐 아닌 마력도 필요하다.
그 점을 이해하는 순간 일라베니아의 피로 물든 역사가 다시금 조명되었다. 마인을 죽이고 불에 태우고, 사냥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을 오가며 한층 더 잔인하게 부각되었다.
일라베니아가 진정 제 욕심만 챙기려다 대륙을 죽음으로 물들였단 말인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이에 대해 사실무근, 조작된 증거라 일축했다.
그렇게 힐리사고의 참전으로 외부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는 가운데, 내부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발타와 힐리사고가 연달아 일라베니아에 손가락질하며 어이없는 증거 따위를 드밀어도 콧방귀만 뀌던 병사들의 낯이 어두워졌다. 지원을 보내기로 한 국가들 측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시간을 미루는 것은 물론, 발타 연합군 측으로 돌아선 국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철 같은 믿음이 있어도, 외부에서 흔들리니 내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탈영병이 속출하고, 황실 직속 지휘관에 반발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황도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어느 기관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수라장이었다.
간제가 최근의 정세를 막 전해 준 참이었다. 일라베니아고 대륙이고 엉망진창이라는 얘기를 듣는 라헤안시의 표정은 정말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간제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자 라헤안시가 꺄르륵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일라베니아의 추잡한 민낯이 드러난 걸 보니 너무 기분 좋아서!”
간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헤안시를 한 번 보더니 리카르디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라베니아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노라는 나쁜 소식을 전달했건만 반응이 남달랐던 탓이었다.
“……어느 집안이든 문제는 있나 봅니다.”
엉망인 집안 꼴을 들킨 기분이라 낯이 화끈했다. 리카르디스는 괜히 얼굴을 한번 쓸었다. 이어서 간제가 연합군에 관한 짧은 정보를 말했다.
“연합군의 일부가 남아 일라베니아군을 추적 중이라고 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와 로젤린 경도 아주 열렬히 찾고 싶어 하더군요. 시체라도 가지고 오라나 뭐라나.”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귀한 물건을 보는 표정이었다.
“제가 먼저 찾은 줄도 모르고 개고생하고 있겠지요. 멍청하기는.”
이쪽도 정말 집안 꼴 장난 아니었다.
* * *
화톳불 위에서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갔다. 지글지글, 표면에서 끓던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고소한 냄새가 연기와 함께 모락모락 퍼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오랜 시간 굶주린 남자들은 식욕이라는 본능마저 잃어버린 듯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망토 아래로 흙과 먼지, 피로 더럽혀진 하얀밤 기사단의 갑주가 빛났다. 백여 명이 넘게 모여 있는 숲속은 바람 지나가는 소리만 이따금 씩 날 뿐, 고요했다.
그때, 구석에 몸을 말고 있던 남자가 주먹으로 바닥을 퍽퍽 쳐 대기 시작했다.
“멍청한 새끼…….”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맨주먹으로 흙바닥을 치고 있던 터라, 금세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에버하르트, 그만.”
옆에서 레티시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서는 계속해서 의미 없는 자학을 반복했다. 레티시아는 이마를 쓸며 한숨을 쉬었다.
에버하르트의 머릿속에서 급류에 휩쓸리는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모습이 계속 반복되는 중이었다. 그 당시 에버하르트는 그들의 바로 옆에 있었다. 하지만 땅의 진동과 갑작스러운 댐의 붕괴에 허둥지둥해서 미처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그들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는데.
에버하르트는 이번에야말로 부숴 버리겠다는 듯 주먹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바닥으로 채 향하기도 전에 손목이 붙들렸다. 에버하르트가 눈에 불을 켜며 홱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놓, 어? 미, 미미 양?”
“이게 어디서 눈을 부라려?”
마카롱이 검지와 중지로 에버하르트의 두 눈을 콕 찔렀다. 그가 으악 하며 눈을 감싸고 쓰러졌다. 그녀가 무성의하게 에버하르트의 손목을 팩 내팽개쳤다. 쯧, 혀를 차는 모양새가 불량했다. 에버하르트가 잠시간 눈을 잡고 흑흑 우는 사이에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미 양!”
“미미 양,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같이 움직이는 미미는 이따금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가 불쑥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지금도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다들 걱정하던 참이었다.
“알아서 뭐 하게.”
마카롱이 뜨거운 고기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먹으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고기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흙과 먼지, 피로 더러워진 갑주. 산발이 된 머리, 우울한 표정의 인간들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단이나 그의 부관 레이몬드, 몇몇의 상급 기사 등. 무리를 이끄는 수뇌부들은 당장 닥친 일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나, 그런 그들조차 우울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패잔병 무리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마카롱 또한, 로젤린이 급류에 휩쓸렸다는 얘기를 듣고는 한번 미쳐 날뛰긴 했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로젤린의 신체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마카롱이었다.
몇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해 속에서 로젤린은 살아남았을 거라고 마카롱은 확신했다. 리카르디스는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카롱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는 빨간 두 눈을 끔벅이고 있는 에버하르트의 입에 고기를 쑤셔 넣었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에버하르트는 울먹울먹한 눈으로 고기를 꾸역꾸역 씹었다.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왜 당장 로젤린을 찾으러 가지 않을까.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질질 짜는 놈의 입에 고기까지 물려 주는 자신의 행태가 어이없었다. 뭐 하냐, 나?
탈출 욕구가 머리끝까지 치솟을 즈음이면, 번번이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던 남자였다. 스타스.
실핏줄이 터져 눈에서 피가 흘렀다. 가슴이 꿰뚫린 고통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고 떠나는 하얀밤 기사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손을 꽉 잡았다.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스타스는 턱을 덜덜 떨며 겨우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목 끝까지 피가 가득 찼는지 피만 연신 토해 냈다. 시시각각 눈빛이 흐릿해졌다. 스타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가 뭘 말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마카롱이 대답하자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고 있는지. 타박하기도 전에 스타스는 고개를 떨궜다.
무릎을 꿇고 그대로 굳어 버린 스타스의 모습에 마카롱은 그가 들려 준 얘기를 떠올렸다. 어린 소년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던 그때의 이야기. 마치 그때의 시작이 생각나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그는 시작처럼 끝났다.
그 이후부터 그냥 두면 수색대고 연합군이고 뭐고 다 걸려서 금세 죽어 버릴 인간들을 나단과 함께 어르고 달래며, 엉덩이도 걷어차서 끌고 온 것이 마카롱이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쳐 가지고 알겠다고 대답했구나. 마카롱은 짙은 회의감에 휩싸여 자리에 털썩 앉았다. 주위를 정찰하러 잠시 떠났던 나단이 그 즈음 돌아왔다.
“미미 양. 걱정했다네.”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남자를 바라보며 마카롱은 다시금 제 처지가 서글퍼졌다. 하얀밤 기사단 내에 있을수록 자신이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카롱은 손에 묻은 기름을 에버하르트의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수색대가 강에서 전하의 갑옷을 발견했다더군요.”
어느 가게의 스튜가 맛있다던데, 하는 말투였다. 그 때문에 단원들은 그 얘기를 듣고도 잠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실종 이후 처음 듣는 첫 소식이었다. 단원들의 한걸음 뒤에서 마카롱을 바라보던 나단이 부하들을 퍽 밀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갑옷?”
“네, 갑옷만.”
마카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던 표정을 고수하던 남자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가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델라브힘이시여…….”
마카롱은 그 감동적인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어이없네요. 전하를 건진 사람은 따로 있을 텐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옆집 아저씨가 받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역시 로젤린 경이로군.”
마카롱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갑옷을 발견했다고? 시체는 없었다는 거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정보가 반드시 리카르디스가 무사할 거라는 보증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말의 희망을 자라나게 할 수는 있었다.
한 명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울기 시작하자 옆에 놈도, 그 앞에 놈도 울기 시작했다. 에버하르트는 입안에 고기를 구겨 넣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기름과 함께 침이 질질 새어 나오는데 정말 더러웠다. 그가 마카롱의 망토를 붙잡고 히끅 히끅 울었다.
‘단장님, 대체 이런 것들을 데리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마카롱은 환장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사르체군의 상급 지휘관이자 마인이었던 차가. 로젤린에게 붙잡힌 후 살아남기 위해 그 누구보다 제 나라를 열심히 팔아먹었던 남자. 그 또한 덮쳐 오는 홍수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휩쓸렸다. 댐이 무너질 당시 멀리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에 압도되어 몸이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살아남았다. 차가는 뿔뿔이 흩어진 발타의 병사들과 함께 근처의 요새로 잠시 몸을 의탁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상급 지휘관인 만큼 차가는 발타의 요새에서도 환영받았다.
“역시…… 나는, 신에게 사랑받는 남자야.”
운이, 너무 좋아. 말도 안 되게 좋아. 소금바위 영지에서 사르체군의 9할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살아남고,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거기에다가…….’
그 무시무시한 사람에게서도 벗어났다. 차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고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가는 상념에서 벗어나 거울 앞에서 꽃단장했다. 귀한 분이 불렀다는 소식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용사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싶은지도 모른다. 곧 시녀가 안내를 위해서 방문했다. 차가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뒤따랐다.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문을 열고, 시녀들이 몇 겹으로 쳐 있던 천을 걷어 냈다. 그 안에 있던 사람의 얼굴을 보기도 전, 차가는 황급히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사르체군의 천인장 차가가 고귀한 발타의 따님을 뵈옵니다!”
“고개를 들어라.”
3왕녀 간제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래, 일라베니아군에 잡혀 있었다고 들었다.”
“예, 전하!”
“총사령관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도 보았느냐?”
“예!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렇구나.”
간제가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임무를 내리기 위함이다. 내 친구들이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안전하게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차가는 옆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방에 들어갔던 시녀가 막 나오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뒤,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중 한명과 눈이 마주친 차가가 숨을 들이켰다.
“헉!”
차가는 제 심장이 멈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저, 저, 저, 저, 저분이 왜…… 여기에?’
차가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리며 간제를 향했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반응이 왜 그럴까. 혹시, 아는 얼굴이기라도 한가?”
“예에……?”
차가는 너무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아는, 얼굴이냐고.”
간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 물었는데?”
간제는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음이 분명해보였다. 차가는 모든 판단을 끝냈다.
“왕녀 전하의 손님을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가시는 곳이 어디든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차가가 머리를 바닥에 쿵 박았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느스름해지자, 간제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원래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눈치가 빠르다는 거죠.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 없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이제는 대놓고 얘기하는군. 차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별로 믿음직스럽진 않군요. 누구보다 빠르게 배신할 것 같아서.”
그때 로젤린이 나섰다.
“괜찮습니다. 배신…….”
로젤린이 말을 끌며 몇 걸음 더 걸어 차가에게 다가섰다. 차가가 몸을 떨며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못 할 테니까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였다. 그렇겠지. 못 하겠지. 차가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 그럼요, 그럼요. 또 사르체군에서 신용하면 차가라고 입 모아 말합니다.”
차가는 침을 삼키며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댐이 붕괴되기 직전, 멀리서 퍼져 나오던 마력의 파동이 떠올라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발타는 마력을 접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중에서도 마인이 특히 많은 집단에 속해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가는 마력이 강한 축에 속했는데, 그런 그보다도 두 배 정도 되는 마력을 소유한 자도 있었고, 결정으로 인조적인 마인이 된 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차가는 단 한 번도 그런 마력을 접해 보지 못했다. 고요하게 온 세상을 뒤덮는, 티 한 점 없는 검은 바다 같은 마력은.
태초의 세계에는 어떠한 것도 없이 빛과 어둠뿐이었다 전해졌다. 차가는 어쩌면 그 태초의 어둠이 로젤린이라는 사람이 지닌 마력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전쟁이 일어났던 초기만 해도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국의 장자가 사망한 일과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휩쓸려 불안해했을 뿐이었다. 일라베니아는 절대적인 강자며 지배자였다. 신의 안배 아래 쓰디쓴 고난이 곧 달콤한 승리로 바뀌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단단한 믿음은 남부 관문이 무너지며 한번 흔들리고, 남하했던 제국군의 패배와 총사령관 리카르디스의 실종으로 크게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 중부 관문에서 보일 정도로 근접한 까만 대군의 모습으로 기어코 산산조각 나 무너지게 되었다.
겨울철의 싸늘한 바람이 일라베니아 제국군과 연합군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방벽 위에 선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떨었다.
중부 관문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대와 수도를 지키는 방벽이었다. 그런 만큼 방비 또한 단단했지만, 문제는 그 중부 관문에 있는 병사들이었다. 평화로운 세대에 변변찮은 전투를 겪어 봤을 리도 만무했고, 발타라는 악명 높은 세력을 마주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제국군의 병사들은 눈앞을 빼곡히 메운 연합군 한 명 한 명을 옛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느끼며 두려움에 떨었다.
병력과 물자, 지휘관만큼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것이 기세와 흐름이었다. 지금 이 공간의 흐름은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일라베니아군이 뾰족한 수를 쓰지 않는 한 이것은 뒤집기 힘들었다.
중부 관문의 사령관인 푸른등불 공작은 방벽 가장 높은 곳에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겨울 안개 너머의 연합군이 가까워지며 점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델라브힘이시여…….’
신을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던 평화로운 대지는 안개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 *
“잠깐 정지.”
연합군의 수색대는 반대 방향에서 오던 50여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멈춰 세웠다.
수색대의 대장이 무리를 쭉 훑었다. 발타인으로 보이는 병사들 사이에 흰 피부를 가진 이들이 몇몇 보였다. 다른 나라의 용병들이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제국군이 발타의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 상황이다 보니 주의 깊게 살펴야만 했다.
무리의 책임자처럼 보이는 이가 일행을 한번 돌아보고 나섰다. 그 또한 하얀 피부의 사람이라 수색대 대장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껄렁껄렁하게 걸어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건성건성 건네는 인사에 수색대 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주머니를 뒤져서 신분 패를 내밀었다.
사르체군의 천인대장임을 증명하는 패였다. 수색대의 대장은 뒤늦게나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 차가는 귀찮은 듯 손을 저으며 인사를 물렸다. 그리고 곧이어 왕실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꺼냈다. 수색대의 대장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바쁜 분을 붙잡고 제가 실례를 하하…….”
“뭐 실례까지야. 요즘 제국놈들 때문에 수색대도 정신없을 테니 우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갑시다.”
한 명 한 명의 신분을 확인해야 하는 원래의 절차를 넘기라는 얘기였다. 사실 그건 수색대에게도 반가운 말이었다. 지나다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신분 패를 확인하는 작업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수색대의 대장은 반가운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이 근방에서 제국군 놈들이 날뛴다고 하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거 나쁜 놈들일세,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말이야.”
“그렇게 말입니다.”
하하 껄껄 웃던 수색대의 대장은 다시 바쁘게 길을 떠났다. 차가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끝났습니다, 경.”
짐마차에 고개를 빼꼼 들이민 차가가 작게 속삭였다. 그림자 진 안쪽, 로젤린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검을 손질하던 중이었는지,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번쩍였다. 차가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여차하면 뛰어나와서 내 목이든 남의 목이든 뎅겅뎅겅 잘랐겠지.’
차가와 수색대 대장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수색대의 병사들은 흩어져서 무리를 살폈다. 이 짐마차 까지도.
그때 몰래 흘린 식은땀으로 차가의 등은 이미 축축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긴장감 넘치던 상황이 무색하게 수색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떠났다. 로젤린의 머리색이 검은 빛이 아닌, 연한 갈색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는 동료들을 의식해 머리색만 변형한 상태였다. 허술한 변장이었기에 그녀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스쳐 지나가는 이목을 피할 정도는 되는 듯 했다.
로젤린은 무심하게 차가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출발하라는 얘기였다. 왜 말을 하지 않나 했더니, 검푸른 머리의 사내가 그녀의 무릎을 벤 채 잠들어 있었다. 힐리사고의 용병으로 위장하고 있는 리카르디스였다.
차가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맹수를 앞에 두고서 잠을 자다니. 심지어 맹수에게 머리라는 급소를 온전히 맡긴 채로! 저쯤 되어야 일라베니아의 총사령관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차가는 부르르 떨며 소리 없이 부하들을 재촉했다.
곧 덜컹거리기 시작한 마차는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진동에 리카르디스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더 주무세요.”
자신이 잠들었던 것도 몰랐던 리카르디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졸았다 하면 로젤린이 즉시 제 허벅지를 대령해 대는 터라 이번만 해도 네 번째인데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분한 듯 입술을 물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지도를 펼쳐 두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정해 둔 발타 내의 합류지들을 살폈다. 현재의 위치와 합류지의 거리는 손가락 두 마디에 불과했음에도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시간이 너무 흘렀군.”
연합군이 중부 관문으로 나아가고 있는 촉박한 상황이었다. 제국군의 원래 목적은 힉살라를 잡아 연합군을 분열시키는 것이었으나, 힐리사고의 참전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연합군을 막아 줄 방패가 없는 지금 공성전을 치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다.
남은 제국군마저 다 잃을 수는 없었기에, 남은 길은 하나였다. 발타 내 흩어진 병력을 모아 중부 관문에 있는 제국군과 합류하는 것. 그리고 지휘관들은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니 합류지에서 이미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데 아까 전, 마주친 수색대의 대장이 근처에 제국군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 경고했다. 합류지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병력인지, 아니면…….
“전하를 찾기 위해 일부의 병력이 남은 게 아닐까 싶은데요.”
로젤린도 비슷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해가 지고 일행은 야영 준비를 하기 위해 산 중턱에서 멈춰 섰다. 로젤린은 잠시간 메마른 숲의 정경을 눈에 담다가 불을 피울 장작을 줍기 시작했다.
“멀리 가지 마.”
리카르디스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로젤린이 건성으로 “네.” 대답하며 더 깊이 들어가려 하자 그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나 무서우니까.”
“아, 네!”
그 말 이후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뒤에서 차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고서 복귀하던 로젤린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바람이 뒤에서부터 불어왔다.
‘피 냄새.’
로젤린의 눈이 번쩍였다. 장작을 내려놓은 그녀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리카르디스와 대부분의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차가를 비롯한 마인들은 일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모였다.
“너머에서 피 냄새가 난다.”
병사들이 코를 킁킁거렸다.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니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주위를 경계해라. 잠깐 살펴보고 오겠다.”
로젤린이 흘끗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도를 응시한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곧 차가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스라치게 놀란 차가는 고개부터 끄덕였다. 뭘 시킬지는 몰라도 무조건 알겠다는 얘기였다.
“믿겠다.”
차가는 그 믿음을 배반했을 시의 일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로젤린은 빠르게 숲을 내달렸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얼마쯤 야영지에서 벗어났을 무렵. 저 멀리에 서 있는 인영이 로젤린의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멈칫하던 인영이 로젤린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발타 병사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도망간 걸 보면 일라베니아 측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잡아 놓고 얘기하자.’
로젤린은 침착하게, 그리고 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굵은 나무뿌리가 많은 곳이라 성큼성큼 뿌리를 건너며 뛰어야만 했다. 그렇게 힘차게 발을 구른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강한 힘에 이끌린 로젤린이 비틀거렸다. 휙,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새에 시야가 뒤집혔다.
“…….”
함정이었다. 로젤린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몇 초 정도 뒤집혀 대롱거리기만 했다. 무력과 기민한 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자존심이 몹시 상해 버렸다.
하지만 로젤린은 발목을 휘감은 올가미를 끊어 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함정에 걸린 이후 도망가던 사람이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이 약자처럼 보이는 지금의 이 모습이 목표로 가는 빠른 길이리란 걸 직감했다.
로젤린의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조용하던 숲속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겹쳐졌다. 하나, 다섯, 십, 오십, 백…….
곧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익숙한 듯이 대형을 갖추며 그녀를 에워쌌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병사의 몸놀림이었다. 그중 한 명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는 무리에서 벗어나 로젤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흘러내린 로젤린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남자가 흐음, 하는 콧소리를 냈다.
“이런, 아가씨였을 줄이야. 험하게 다룬 걸 사과드리겠습니다.”
산듯한 듯,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
로젤린은 뒤집힌 채로 몸을 굽혀 다리를 잡았다. 단검으로 밧줄을 끊어 내려 하자 남자가 태연하게 만류했다.
“머리부터 떨어지면 많이 아플 텐데.”
로젤린은 콧방귀를 뀌고서는 밧줄을 끊어 냈다. 높은 나무에서 추락하는 그녀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남자가 감탄하며 검을 뽑았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걸 보니, 혹시 마인인가? 계급이 높으면 좋겠는데. 사냥도 이제 지쳐서 말입니다.”
로젤린을 둘러싼 남자들이 일시에 검을 빼 들고 간격을 좁혀 왔다. 로젤린은 피식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사냥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로젤린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어?”하는 소리를 냈다.
“마인도 맞고 계급도 높거든요.”
남자가 머리를 덮고 있는 후드를 젖혔다. 눈이 휘둥그레 변해 있었다. 그다지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이 솟았다.
“오랜만입니다.”
사자갈기의 드윗이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산의 중턱에 위치한 큰 동굴 안.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포함된 발타 부대와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한자리에 모였다. 드윗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리카르디스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살아계시리라 믿었습니다.”
“나도 그대가 끈질기게 살아남았을 거라 생각했지.”
장난기 어린 말투에 드윗이 살짝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드윗을 일으켜 세웠다.
“그대도 이제 나에게 반가운 얼굴이 되어 가는군.”
드윗이 감동이 일렁이는 촉촉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포옹하려는 듯한 드윗의 행동에 리카르디스가 곧바로 정색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야.”
“아, 네.”
간제 휘하의 발타 병사들과 사자갈기군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저녁 준비를 끝냈다.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 드윗만 대화를 나눴다.
“누군가가 함정에 걸렸을 때만 해도 이거 월척이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도 대어였지 뭡니까.”
“함정에 걸렸다고? 로젤린 경이?”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젤린은 다 먹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물고기 꼬치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진 후 드윗을 노려보았다.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저라고 해도 감지하기가 힘듭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얼굴을 팩 돌려 버렸다. 잔뜩 뿔난 듯한 모양새였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예상대로 제국군의 대부분은 발타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수색대가 눈에 불을 켠 상황이라 힘들 법도 한데, 무사히 국경을 건넜다는 소식에 리카르디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여기저기 병력을 흩트려서 치고 빠지는 솜씨가 어찌나 대단한지. 덕분에 이목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습니다.”
그렇게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시선을 끄는 사이 제국군은 발타에서 탈출, 일부의 병력만이 남아 리카르디스를 수색하고 있었다. 사자갈기군과 하얀밤 기사단, 오소리 부대 외의 두 개의 부대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저의 빛나는 충성심이 나침반이 되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리카르디스가 감흥 없이 대답하자 싱거운 소리만 하던 드윗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전하를 찾아낸 포상 같은 것은 없습니까?”
“발타 측에 내 위치를 찌르면 포상 비슷한 게 나올 텐데, 한번 시도해 보든지.”
드윗은 실망한 얼굴로 배급된 스튜를 푹푹 퍼먹었다.
밤늦게까지 드윗과 정보를 나누며 얘기하던 리카르디스가 눈을 깜박깜박하며 졸기 시작했다. 드윗이 무어라 말하려 하자 리카르디스의 옆에 앉아 있던 로젤린이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기울여, 다섯 번째로 제 허벅지에 눕혔다. 그녀가 손짓하자 저 멀리서 쉬고 있던 발타 병사가 달려와 모포를 건넸다.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미노가 강 전투로 몸이 많이 상하셔서.”
“지금은 괜찮으신 겁니까?”
“치료는 했지만 떨어진 체력이 돌아올 만큼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따금 피곤해하시더군요.”
로젤린이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었다. 드윗은 그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적국의 땅. 도망자. 싸늘한 온도, 더러운 동굴. 그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이곳에 있었다. 안락함, 평온한 숨소리, 화톳불의 색이 담긴 따뜻한 시선, 거친 담요에서 일어난 민들레 씨 같은 보푸라기들, 그리고 그 위를 다정하게 덮고 있는 부드러운 손길까지.
드윗은 둘 사이에 일국의 총사령관과 호위 기사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애틋함이 녹아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로젤린이 어떤 행동을 더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광경이었다.
드윗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있던 로젤린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갖고 싶은 게 있습니까?”
리카르디스를 대하는 것과 조금도 닮아 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예?”
“포상을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갖고 싶은 게 있나 싶어서요.”
정중한 말투에는 의심의 빛이 섞여 있었다. 농담처럼 꺼낸 말 속에서 어떤 진의를 파악했던 모양이었다. 드윗은 흠, 하며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특별하게 갖고 싶은 건 없지만, 주시겠다고 하면 마다할 성격은 아니라.”
그가 평소처럼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보통은 무언가를 얻고자 전장에 뛰어들곤 하지 않습니까? 나도 그런 겁니다.”
드윗은 턱을 괸 채 다른 한 손으로 돌멩이를 만지작거렸다. 곧 그가 돌을 던졌다 받았다 하는 손장난을 시작했다.
“나름 험하게 자랐다 자부하고 있지만, 요즘만큼 험하게 굴러 본 적이 없어요. 전쟁이라. 막연하게 떠올린 상상보다 조금 더 지긋지긋하군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도, 우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것 같지 뭡니까.”
“위로는 못하지만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경답군요.”
피식 웃은 그가 낙하하는 돌멩이를 탁 낚아채었다. 돌을 꽉 붙잡자 주먹을 단단하게 쥐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드윗이 타오르는 불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원하는 것은 모두 얻어 가야죠. 그래야 수지가 맞겠어요.”
“…….”
가느스름한 로젤린의 눈초리를 목격한 드윗이 아차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상한 거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의미심장하긴 했는데, 진짜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죠. 뭐.”
그 의심의 눈초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무자비하게 부러지고, 나무들이 콰직 콰직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장애물이 있건 말건, 일직선이었다. 그 집요하고 악착스러운 행동에서 뚜렷한 목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적의, 살의.
하얀밤 기사 단원들은 소리를 감지한 후 신호를 나누는 것만으로 모든 준비 태세를 마쳤다. 모두의 눈이 날카로워진 채 가까워져 가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길가에 가깝게 난 아름드리나무가 박살 나며 날아가는 것으로 그것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털, 세 개의 눈. 일반 곰보다 몸집이 큰 마수였다. 흰자위가 붉은 것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마수라고 판단할 수 있는 외향이었다.
크와악, 귀가 멎을 듯한 소리를 터트린 마수가 전열의 파르딕트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앞발을 세차게 휘둘렀으나, 두터운 앞발은 방패에 채 닿기도 전에 막혔다. 곰의 앞발을 막아 낸 자는 그 몸집의 반의반의 반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여자였다.
“미미 양!”
뒤에서 나단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마인이라지만 저렇게 흉포한 마수 앞에서는…….
“이 자식이 건방지게 손을 들어?”
마카롱이 곰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렀다. 나무에 머리를 부딪칠 때도 개의치 않던 곰이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잠시간 고통에 입을 다물고 있던 곰이 마카롱을 희번덕거리며 보았다.
“확 씨.”
마카롱은 곧바로 주먹으로 곰의 머리를 내리치며 응징했다. 곰이 허우적거리며 앞발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마수가 물기 어린 눈을 마구 굴려 댔다.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강아지가 주인에게 혼났을 때 보이는 표정과 흡사했다. 귀가 처지고 자세를 낮춘 채로 눈알만 데굴데굴. 한참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는 마카롱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뒤에 있는 하얀밤 기사단에게로 고정되었다. 마수의 콧잔등이 다시 구겨졌다.
크르릉……. 마수가 공격성을 띤 그 순간, 마카롱이 검집으로 곰의 코를 강하게 내려쳤다. 다시 한번 마수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이게 좋은 성격 다 버려 놓네…….”
그녀가 곰의 엉덩이를 퍽 걷어찼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안 가?”
마카롱이 다시 때리려는 듯 시늉하자 마수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힐끔힐끔 아쉬운 듯 인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카롱이 발로 땅을 구르며 으르렁거렸다. 기회를 엿보던 마수는 그 위협에 꼬리를 내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나단은 얼떨떨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수가 인간을 두고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은 공격성을 가진 마수와의 조우는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의 결말밖에 없었다. 무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사람들이 마수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네? 아아…….”
마카롱은 공성 무기 같은 크기의 마수와 마주쳐 놓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매를 툭툭 털고 있었다.
“쟤네가 다른 건 몰라도 마력을 느끼면 조금 주춤거리더라고요. 어? 이거 공격해도 되나? 이런 식으로.”
“오, 그렇군. 위협적으로 느끼는 건가.”
나단은 혼자 학구열에 불타는 듯했다. 흥분에 떨리는 남자의 콧수염을 바라보며 미미가 피식 웃었다.
“글쎄요.”
예전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마수,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 그것들은 대게 무엇을 공격하거나 누구를 잡아먹는 것으로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그것들을 메우고 있는 것이 오직 분노뿐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파편’을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일부분 되찾은 후, 마수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과거의 자신이, 친구와 부모가, 연인이, 사랑스럽다 여긴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파편이었다.
마수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공격성을 드러내지만, 마력을 가진 것에 한해서는 달라진다. 그것들 또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보다는 동족애라든지?”
나단이 자리를 떠났기에 마카롱이 중얼거리는 말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마카롱은 방금 만난 마수의 존재로, 아득한 옛날을 떠올렸다. 여태껏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미레이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적이었다. 약초를 캐던 중, 마수가 나타났다. 그때 당시도 갑작스럽게 나타나 으르렁거리는 건방진 짐승을 가만히 놔둘 만한 성질머리가 아니었다. 언제든지 한 대 패 버리려고 마력을 사용한 순간, 늑대가 갑작스럽게 위협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킁킁 냄새를 맡던 늑대가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
마카롱은 그렇게 가까이서 마수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실핏줄이 터진 마수의 눈에서는 피와 눈물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붉은 눈을 순하게 깜박거렸다.
마카롱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늑대의 대가리를 쓰다듬었다. 피가 엉겨 질척해진 털의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다른 동물들보다도 뜨거웠다. 고통과 분노에 타들어 가는 그것들을 보며 마카롱은 본능적으로 연민을 느꼈었다.
불쌍하다. 정말 너무 불쌍해. 이렇게 평생을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의 마카롱은 그때와 달리 실소했다. 그 생각이 지금에 와서 고스란히 돌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그때 불쌍하게 여긴,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는 기괴한 짐승은 과거의 잃어버린 제 친구였으며, 부모였고, 연인이고,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어린아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었다.
“…….”
마카롱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분노였다. 과거의 분노는 너무나도 깊게 새겨져 세월이 흐른다고 퇴색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로젤린을 지키기 위해 잠시간 뚜껑을 닫아 뒀을 뿐이었다.
‘이 분노는 온당하다. 나는 분노할 자격이 있어. 하지만…….’
마카롱은 멀어져 가는 마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닿았던 뜨거운 체온이 기억났다. 피부가 갈라져 드러나고, 뼈는 기괴하게 튀어나와 있으며, 눈은 왜 하나 더 달고 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플 것 같았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로젤린을 떠올릴 때면 항상 하던 생각이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분노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없는 괴로움에서 홀로 발버둥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분노는 온당하며, 나와 우리는 분노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너를 괴롭게 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걸 보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마카롱은 발타 왕실에서 보았던, 수북이 쌓인 마수의 결정을 떠올렸다. 지금은 인간의 몸에 이식되어 다시금 자라나고 있을 과거의 싹이자 ‘우리’의 일부. 모든 것이 흘러가는 동안 그것만 시간을 멈춘 채 굳어 있었다. 마카롱, 그녀와 디에즈처럼.
‘디에즈.’
마카롱은 그와 자신은 결코 이 분노를 잊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우리를 마지막으로 하자.’
마카롱은 지금 간절하게 원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누군가의 분노를 녹여 흘려보내고 싶었다. 과거의 그들이 더 이상 괴롭지 않도록. 방법은 모르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 주고 싶었다.
본래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으로.
‘……그런데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지?’
마카롱은 인상을 쓴 채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우선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벌레, 짐승에게 먹힐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를 먹은 벌레나 짐승도 죽을 것이고, 땅으로 흩어지거나 물에 섞이거나…….
‘뭐가 이렇게 복잡해.’
마카롱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어디로든 가겠지 싶었다. 그리고 그곳은 수백 년 동안 분노에 휩싸여 있던 지금보다는 훨씬 좋을 것이다.
멀어지는 마수가 보였다. 씁쓸해하던 마카롱은 곰이 이를 드러내며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노려보는 걸 보고 손을 위협적으로 들어 올렸다. 움찔한 짐승이 다시 바쁘게 제 갈 길을 갔다.
그때 바라보는 방향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마카롱은 먼지가 들어갈까 싶어 눈을 살짝 감았다. 사사삭,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곰탱이가 그새를 못 참고? 울컥한 마카롱이 검집을 들 찰나 익숙한 향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싱그러운 풀잎의 냄새였다.
눈을 뜨자 검은 인영이 팔다리를 쫙 펼친 채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받아 볼 테면 받아 보라는 기개 넘치는 모습에 마카롱이 기겁해서 팔을 벌렸다. 그 인영의 뒤에서 해가 쨍하게 비쳐 얼굴이 안 보였지만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쿵, 소리가 무섭게 몸을 묵직하게 무언가가 눌렀다. 아까 전 떨어질 때에는 거미처럼 쫙 다리를 벌리고 있던 인간이 닿자마자 등과 다리를 꼭꼭 옭아맸다.
“마카롱…….”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마카롱은 그녀를 꾹 안았다.
“다녀왔어.”
* * *
마카롱을 덮친 갈색 머리의 여자가 로젤린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 들썩였다. 레이몬드와 에버하르트, 헤사는 통곡했으며 레티시아를 포함한 몇몇 기사들도 눈물을 보였다.
곧이어 그녀가 걸어온 경로에서 나타난 발타의 병사들을 보고 모두 경계 태세를 갖췄다.
“다들 건강해 보이는군.”
후드를 젖히며 태연하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리카르디스였다. 다시 대 통곡의 장이 벌어졌다. 머리 길이와 색이 달라서 ‘어? 저 잘생긴 얼굴은? 어디선 본 것 같은데?’ 하고 주춤거리는 시간이 3초 정도 걸리긴 했지만.
무릎을 꿇고선 오열하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보고 리카르디스도 잠깐 울컥한 듯 미간을 좁혔다.
“다들 목청도 참 좋지. 동네 사람들 다 뛰쳐나와서 보겠네.”
마카롱이 툭 내뱉은 말 때문에 다들 울음을 끅끅 삼켜야만 했다.
이후 로젤린은 씻지 않아 냄새나는 사내들에게 돌아가면서 안겼다. 위험을 감수하고 리카르디스를 구해 내고 끝끝내 살려 낸 점. 지금까지 안전하게 그를 보호한 점. 로젤린의 활약상은 일일이 말하기가 입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공로보다도 그녀를 살아서 본 것이 반가워서 하는 행동이었다. 로젤린도 그걸 아는지 코를 막긴 했지만, 동료들에게 얌전히 안겼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산 길목에 간이 막사가 세워졌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하얀밤의 상급기사들, 마카롱, 사자갈기의 드윗까지 그 안을 채웠다.
리카르디스는 짤막하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강에서 떠내려 와 작은 마을에 도착했고, 합류지로 이동하려던 와중 간제가 심어 놓은 병력과 마주했던 일. 간제와 라헤안시를 만나고 나눴던 내용까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흘끗흘끗 보며 놀라워했다. 리비타를 점령해 힉살라를 볼모로 붙잡으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전투에서는 패배해 병력과 사기를 잃었다.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들은 근근이 목숨만 붙은 상태로 공격받는 중부 관문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일라베니아에 승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리카르디스는 우연히 간제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무려 하카브를 몰아내고자 하는 동맹. 이 어둡고 끝없는 절망 속에 한 줄기 빛이 아닐 수 없었다.
“발타인들 역시 축복의 밤을 신성시 여긴다. 검은달이 뜨는 신성한 밤에는 피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첫 번째 율법이라고 하더군.”
“그 말은…….”
“전쟁이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겠지.”
발타뿐 아니라, 일라베니아를 공격하는 연합군의 대다수가 공격을 멈출 것이다. 그들은 축복의 밤을 볼모로 대륙을 쥐고 흔들던 일라베니아를 규탄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축복의 밤이 뜨게 된다면 명분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사실 그것보다도 몇 백 년 만에 하늘을 메운 하얀 밤과 찬란하게 빛나는 검은 달을 보고 태연하게 전쟁할 만한 정신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리카르디스의 추측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축복의 밤에 대한 정보를 말했다. 황제를 의식해 몇몇 수하들을 제외하고서는 알지 못했던 정보였다.
“보름달이 뜬 밤. 마력과 성력을 지닌 두 사람, 결혼식에 쓰이는 언약문?”
몇몇 기사들이 리카르디스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중얼중얼 되뇌었다. 축복의 밤에 성력뿐 아닌 마력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는 놀라는 자도 있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었다. 발타가 내세운 주장을 허투루 듣지 않은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거…… 결혼하는 기분 나겠는데요. 수면에 비치는 게 달이 아니라 해였다면 더더욱 비슷해졌겠군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발타는 결혼식을 저녁에 치르곤 하지. 일라베니아가 의식을 숨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밤을 낮으로 바꿔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눈을 굴리던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긴 한데…….”
사람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리카르디스는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낀 하늘은 평소보다 둔하고 탁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군.”
필요한 것은 보름달뿐이 아닌, 수면 위에 비치는 ‘보름달’ 이었다. 구름이 가리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보름달은 구름에 갇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 지날 때까지 리카르디스는 잠들지 못하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어스름 해가 뜰 때까지도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