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2화 (216/220)

22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마른가시나무와 사자갈기의 병력을 흡수해 덩치를 불린 뒤, 빠르게 남하했다. 제국군이 향하는 목적지는 ‘싱’으로, 발타의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영지였다.

정확한 정보가 없는 터라 싱에 남아 있는 병력이 몇인지, 병력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가 한 명 있었다. 소금바위 성채에서 로젤린이 잡아 온 발타군의 지휘관, 차가였다. 그는 자신이 언제 발타의 편이었냐는 양 아는 모든 정보를 술술 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싱만큼은 병력을 보존해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국경과 가까운 영지이다 보니 마른가시나무 성채와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아, 그리고 요새에 가주 두 명이 다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정군에 포함되기에는 어린 나이라서요.”

국경 다음의 방벽이나 다름없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가 차가의 얘기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연합군이 회군할 가능성이 있는 시점에서 공성전을 치른답시고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다. 병력을 분산시키기에는 리비타의 방비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그때 척후병이 들어와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 먼 거리 밖에서 일만 여명 쯤 되는 병력이 접근 중이며, 싱의 깃발을 들고 있다고 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웬…… 굴러온 행운이지?

성벽 너머의 적보다 당연히 성벽 밖의 적이 상대하기 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몇 배에 해당하는 적에게 돌진하려 하다니, 용기가 가상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때 차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지휘부 막사의 이목이 그에게로 모였다.

“제국군 본대를 치러 오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타탄님께서 지원을 요청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른가시나무 성채에서 승패가 갈린 게 며칠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장기전으로 접어들기 전에 승부를 내기 위해 지원을 요청하셨다고 하면 얼추 시기가 맞는 것 같은데요.”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베니아 제국군에 비해 한참 적은 수의 병력으로 전면전을 치르려는 미친 사령관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지는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인 듯했다. 애석하게도 도달하지 못할 테지만.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돌려 마른가시나무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보고 싶어 한다는데, 백작.”

“기대에 부응을 해 줘야겠군요.”

세실이 생긋 웃었다.

진지를 구축하고 함정을 만들 만한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싱 측에서는 제국군의 존재를 모른다는 점에서, 일라베니아에게는 더 없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정면에서 제국군 본대가 상대하는 동안 멀리 돌아간 두 개의 별동대, 로젤린이 이끄는 중장기병대와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이끄는 관문 주둔군이 양옆에서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 거세게 가해지는 심리적 압박은 유일하게 열려 있는 퇴로의 존재를 집중하게 만들 것이다.

“솔직히 나라고 해도 로젤린 경과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양쪽에서 합공하면 항복할 것 같거든.”

그 말을 들은 당사자 두 사람은 농담도 참 잘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리카르디스는 진심이었다.

* * *

쌍둥이 남매 남라와 바유는 마른가시나무 성채를 공략 중인 완달 타탄을 지원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소년이 손을 움직여 가며 수화로 무어라 얘기했다. 그걸 본 남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바유. 가야 돼. 언제까지 어리다고 뒤에 물러서 있을 수는 없어. 게다가 싸우는 건 우리가 아닌걸. 타탄의 가주에게 군대만 빌려주면 되는 문제야.”

‘그러면 장군들만 가도 되는 거잖아.’

소녀가 씨익 하고 콧김을 뿜었다.

“완달 타탄이 맨날 어리다고 무시하잖아! 허허, 직접 올 줄 알았는데…… 장군 두 명에게 지휘권을 줘서 보내다니. 아직은 검보다 장난감이 좋을 나이긴 하지. 하면서 낮잡아 볼 게 빤하다고! 그냥 우리는 딱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하면 돼. 그리고 성채가 함락되면, 다시 싱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고. 쉽지? 전쟁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쉬운 임무를 맡고 있는 거야.”

바유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글자를 그려 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있을 텐데.’

“참나, 성채에 갇혀서 버티기만 하는 사람이 뭐가 무서워. 타탄군에게 아주 쩔쩔매고 있다던데.”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누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남라 님 말씀이 맞습니다. 방벽 뒤에 숨어서 크게 짖는 재주밖에 없는 여자입니다. 미친개다, 뭐다 하지만 관문이 무너진 이후로 성채에 콕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빤하지 않습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문 휘하의 장수, 자르파였다. 가문 내에서도 손에 꼽히게 강한 남자였다. 그런 자르파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서 남매는 두려움을 떨칠 만큼의 충분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자르파는 그 유명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도 ‘소문만 무성하지 별거 아닐 거다’라고 말했던 놈입니다. 어느 정도 걸러 들으셔야겠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된다는 점만큼은 저도 자르파와 의견이 같습니다.”

싱의 또 다른 장수 아만이 웃는 얼굴로 자르파를 공격했다.

“열어 보면 막상 별것 아닌 것들이 많지.”

흥, 자르파가 콧방귀를 뀌었다.

부우우우.

그 순간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군마들이 흥분해 날뛰었다. 마차도 크게 흔들려 소녀와 소년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수백, 수천.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금속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적습이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남라는 정신 못 차리고 휩쓸려 갔다. 마차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기만 하는 남라를 바유가 꽉 끌어안았다.

“전투 준비!”

“진형을 갖춰라!”

아만과 자르파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제국군이 곧 물밀 듯 밀려왔다. 긴 창을 든 기병대 앞에 발타군의 전열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수가 적어도 발타군의 정예병들이었다. 전투태세를 제대로 갖추자 전황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전면에 있는 제국군을 막아 내기 위한 최상의 진형이 갖춰졌을 무렵.

부우우.

뿔피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곧 발타군의 비어 있는 양 측면으로 제국군이 쏟아졌다. 싱의 장군, 자르파와 라닉은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전황을 파악하고 지휘를 바꿨다.

전면과 양 측면이 틀어 막힌 상황이었다. 후미가 유일하게 비어 있긴 하지만, 이것은 제국군이 일부러 열어 둔 것이었다.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적만큼 쉬운 상대는 없으니까. 한, 두 사람 달아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패배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르파가 소리쳤다.

“살고 싶다면 무기를 들고 싸워라!”

자르파의 눈동자가 바람에 휘날리는 마른가시나무 백작 기에 닿았다. 그 앞에 선 발타의 병사들이 겁을 먹은 듯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마른가시나무군은 그 찰나의 머뭇거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메이스로 머리를 으깨며 웃고 있는 미치광이 같은 몰골이 섬뜩했다.

왼쪽 측면부터 사기가 훅훅 깎여 나가는 것이 보였다. 한 번 꺾인 마음을 다시 세우는 것은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자르파는 무엇보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흔드는 일이 지금의 전황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 판단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을 상대하는 측면을 지원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자르파는 뒤에서부터 덮쳐 오는 기운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른가시나무군의 반대편에서 쏟아져 오는 수천 기의 중갑기병들이 있는 곳이었다.

정제된 칼날처럼 절도 있고 강력했다. 하지만 그 수천 기의 기병들보다, 선두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가 단연 눈에 띄었다.

검은 군마를 탄 기사. 자르파와 라닉은 그 기사가 반드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일 거라 직감했다. 단순히 그 기사가 보이는 압도적인 힘뿐만이 아닌, 마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의 크기 때문이었다.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마력은 몸 안을 타고 돌 뿐만 아니라 살기처럼 너울거리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장에 있는 모든 마인들이 느꼈다. 이 넓은 공간, 소용돌이의 중심은 그녀였다.

자르파와 라닉은 그녀를 쓰러트리지 않는 이상 길이 열리지 않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 * *

로젤린의 눈이 재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제국군에는 수도 상비군과 변경 주둔군, 그리고 징집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비군, 주둔군과 달리 많은 수를 차지하는 대다수의 병사들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다. 평범한 농민과 상인에게 갑옷과 검을 들려 보낸 것이라 봐야 했다.

그 때문인지 일반 징집병이 많이 포함된 정면은 발타 정예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로젤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한걸.’

아무리 정예병이라고는 해도 발타군은 기습을 당한 입장이었다. 거기에다 얼핏 보아도 제국군의 병력이 훨씬 그들을 웃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와중에 물러서기는커녕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니.

거대한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져 체계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발타군. 그것은 그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을 이르고 있었다.

로젤린의 머릿속으로 정보가 빠르게 지나쳐 갔다. 싱의 가주는 어리다. 그리고 그 어린 가주를 대신하여 몇몇 장수가 군을 통솔한다. 일라베니아도 지휘관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말할 수 없으나, 싱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장군을 잡아야 한다.’

로젤린은 뒤를 따르는 레티시아에게 명령했다.

“잔챙이들은 두고 돌파한다.”

“돌파한다!”

로젤린은 앞을 막는 병사들을 하나, 둘 쳐 내며 전진했다. 필요한 때를 대비해서 마력을 크게 사용하지 않고 필요한 순간마다 조금씩 운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인지, 그녀의 마력을 감지한 누군가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 또한 숨기지 않고 마력을 사용하고 있어 로젤린도 점차 접근하는 자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흙먼지가 이는 전장. 검과 창, 거대한 갑옷을 입은 사람들로 시야가 어지럽혀져 있었으나, 그들은 마주친 순간 서로를 알아보았다.

쾅!

로젤린의 창과 자르파의 도끼가 충돌하며 전장 속 모든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제국군의 장수와 발타군의 장수가 만나자 틈 없이 공간을 메우고 있던 병사들이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발타군과 제국군은 전투를 멈추고 로젤린과 자르파를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간이 투기장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두 사람의 승패에 따라 오른쪽 측면의 전황이 뒤바뀌게 될 것이다. 갑옷을 착용한 로젤린보다 두 배는 더 큰 거구의 남자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는 게 일라베니아 놈들의 앞잡이라니!”

로젤린은 창을 한 바퀴 휙 돌려 피를 털어 내었다. 창끝이 바닥을 향했다.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

“이 자르파, 여기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의를 불태우던 자르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끊겼다. 그의 시선이 거대한 흑마 위에 앉아 있는 로젤린의 투구를 향했다. 그림자 진 안쪽에서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자르파는 로젤린에게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여태껏 사용하던 마력은 호수에서 물 한 양동이를 사용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느낄 수 있었다. 기세를 펼치기 시작한 그녀의 진정한 저력은 너무 거대해서 미처 가늠할 수도 없었다.

지진이 땅을 흔들고, 바다 너머 높은 파도가 몰아친다. 리비타의 그 어떤 큰 성보다도 높은 파도가 바로 코앞까지 당도해, 곧 자신을 덮쳐 버리리라.

아득히 높은 곳에서 절대적인 존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히 쳐다볼 수도, 감히 대적할 수도 없는 기운이었다. 모든 의지가 바스라 흩어졌다.

자르파의 몸이 소름 끼치는 기운에 반응해 떨렸다. 땀이 뚝뚝 떨어지며 그의 눈가에 스며들었다. 눈을 깜박, 감았다 뜬 사이 갑작스럽게 시야가 바뀌었다. 땅과 하늘이 뒤집어졌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했더니, 아.

‘머리가 잘렸군.’

자르파의 머리가 흙바닥 위를 굴렀다.

* * *

거대한 감옥 수레 안, 작달막한 쌍둥이가 중앙에 몰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어리군.’

라고슈의 바이페렘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싱의 가주들도 어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가주가 두 사람이라니. 좋군요. 한 명은 없어도 되겠습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밥이나 먹자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쌍둥이가 동시에 흠칫 몸을 굳혔다.

“처형하라는 것인가?”

리카르디스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자,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세상에, 총사령관님. 교섭 역으로 한 명을 보내자는 얘기였습니다.”

천하의 몹쓸 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억울함을 애써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군.”

한 명을 남기고 한 명을 싱의 성으로 돌려보낸다. 가주의 권한으로 싱의 성문을 열 수 있으리라.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기사단장 렉시드에게 “피도 눈물도 없으시다니깐.” 하면서 놀리는 어조로 속닥거렸다.

예정에 없던 전투를 치른 제국군은 수습과 재정비를 마친 후 다시 진군했다. 싱의 영지는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부터 며칠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제국군은 성채가 보이기 전에 멈춰 서서 방어하기 좋은 지형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교섭이 결렬되어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한데, 상황은 또다시 묘하게 돌아갔다. 교섭을 위해 먼저 싱의 성채를 찾아갔던 전령과 함께 돌아온 어느 남자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최근에도 건국제 무도회에서 봤었다.

힐리사고의 왕자였다. 통통한 남자가 무릎 한쪽을 꿇으며 리카르디스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비대한 몸을 가졌던 힐리사고의 왕자는 그 짧은 사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힐리사고를 쥐어짰다더니, 그간 겪어 온 마음고생이 눈으로 보였다.

어수선해졌던 막사를 정리하고 나서야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싱은 힐리사고군이 점령 중입니다! 병력이 빠진 덕에 쉽게 함락할 수 있었습니다.”

남라와 바유가 병사들을 이끌고 떠난 사이 일어난 일인 듯했다. 참 때를 잘 맞춘 듯했다. 왕자는 사명감에 이글이글 불타는 표정이었다.

“디에즈 황자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디에즈 황자와 저희 힐리사고와는 어떠한 연도 없음을,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입증하겠습니다. 일라베니아의 충실한 손과 발이 되어!”

힐리사고 왕국은 라고슈와 발타 다음으로 큰 대륙의 나라로 일라베니아의 신하 역할을 자처하는 곳이었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왕실의 후계자를 갈아치우는 일도 빈번할 정도였다.

한데 힐리사고 왕국, 한미한 귀족 가문의 핏줄인 디에즈가 일라베니아의 뒤통수를 치고 발타로 떠났다. 일라베니아와 끈을 하나 대어 놓았다 흡족해하던 힐리사고 왕실 입장에서는 황당하다 못해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으리라.

리카르디스야 디에즈의 속에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으나,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맹을 요청한 나라들 중 가장 먼저 도착한 것만 봐도 그들의 다급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국군이 리비타로 향하겠다 언질한 적은 없었지만, 동향을 보고 힉살라를 노린다 깨닫고 싱을 미리 함락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랜만에 미소를 보이며 왕자의 지원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왕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리비타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공성에 시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왕자가 점령한 싱이 연합군을 막는 방벽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맡겨만 주시지요! 힐리사고의 정예병 2만이 싱의 요새와 함께 동맹군을 반드시 막아 내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힐리사고군의 합류로 바뀌게 된 전략과 전술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차근차근 원하는 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이런 때야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때였다. 승리가 익숙해져 당연해져 갈 때. 전쟁에 ‘무조건’이라든지 ‘반드시’와 같은 말은 있을 리 없으니.

* * *

“네 두 눈이 날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몹시 불쾌해.”

“아, 아닙니다.”

“사람을 왜 착각하게 만들어. 행실 똑바로 하고 다녀.”

“예! 죄송합니다!”

스타스는 저 멀리에서 애먼 병사한테 시비 걸고 있는 과거 월장석 시녀, 미레이미를 발견했다. 로젤린이 자리를 비울 때면 항상 리카르디스의 옆에 있는 그녀의 정체는 알음알음 알려졌다.

로젤린 경의 친구다. 마인이다. 리카르디스 전하의 특별 호위다. 성격이 더럽다. 눈을 마주치면 공격당한다. 소문이란 대개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로 이루어져 있으나, 미레이미의 경우에는 제법 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예의가 필요 없는 곳이라 벗어던졌다는 그녀는 소위 ‘싸가지’라는 것을 대신 걸친 듯 했다. 표정은 언제나 부루퉁하고, 시선은 날카로웠으며, 태도는 뒷골목 건달같이 불량했다.

하지만 그 모든 태도가 허용될 수 있는 것은, 미미의 실력 덕분이었다. 소금바위 성채에서 리카르디스를 구한 이후, 미미는 세 사람의 암살자를 더 잡아냈다. 마인도 있었고, 마인이 아닌 자도 있었다.

심지어는 살해 시도를 하기도 전에 수상함을 포착하는 능력까지 있었는데, 스타스는 그 모습에서 로젤린을 연상할 수 있었다.

“미미 양.”

검지와 중지만 펼쳐 병사의 두 눈과 자신의 눈을 교대로 가리키고 있던 미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스타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난 후 싸늘한 표정을 거뒀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깝긴 했지만.

“단장님. 무슨 일 있나요?”

굳이 말하자면 오늘 하루 고단했을 병사를 괴롭히지 말라는 용건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스타스는 말을 더듬거리다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다들 쉬고 있는데, 미미 양도 쉬는 게 좋지 않겠나. 저기에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모닥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던데.”

“누가 포함되어 있을지 빤하군요. 코 밑에 검댕이 묻는 것도 모르고 또 좋다고 먹고 있겠지.”

스타스는 미미의 말투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로젤린과 친구라 했지만, 그보다 더 친밀해 보였다. 마인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가족처럼 보일 때도 종종 있었다.

“권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제가 가면 단란한 분위기가 깨질 것 같군요. 아직 저를 불편해하는 기사 분들이 있어서 말이죠.”

마카롱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억지로 하하 호호 웃을 마음은 추호도 없어서 사실을 변명처럼 앞세웠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스타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무뚝뚝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예민한 마카롱은 그의 얼굴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음을 포착해 냈다. 최근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다 무너진 마을에서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강아지를 볼 때의 표정이었다.

그 취급이 어이없었던 마카롱이 눈살을 찌푸렸다.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뭐라 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미미 양이 불편하지 않은데. 같이 좀 걷겠나?”

마카롱은 입을 벌린 채, 몇 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스타스는 좀 쑥스러운 듯 보였다. 권유와 대답의 틈이 벌어질수록 침묵이 더욱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카롱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 뭐…… 네.”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켰다는 걸 스타스도 눈치챘다. 두 사람은 막사가 세워져 있는 곳을 벗어나 한적한 숲길을 걸었다. 스타스는 마카롱이 어디 한 곳을 뚫어지라 보고 있는 모습에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잘린 손목이 있었다. 낮의 전투가 이뤄졌던 곳이라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스타스가 슬쩍 걸음을 옮겨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마카롱이 피식 웃었다. 귀여운 짓을 다 한다 싶었다. 암살자들을 두들겨 패고 반죽음 만들던 광경을 봤으면서도 아직 월장석 성의 ‘미미 양’을 대하듯 하지 않은가.

두 사람은 적당한 공터에서 멈췄다. 마카롱이 쓰러진 나무에 앉으려 하자 스타스가 손수건을 꺼내어 깔아 줬다. 갑자기 손수건을 전시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마카롱은 손수건을 피해 다른 곳에 앉았다. 스타스가 어색하게 손수건을 회수했다.

마카롱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마시겠나?”

스타스가 건넨 건 물주머니였다. 마개를 뽑으니 청량한 술 향기가 퍼져 나왔다. 마카롱은 이 물주머니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까 전 고래무덤의 파르딕트가 가지고 있던 술이었다. 몰래 물주머니에 넣어 마시다 기사단장인 스타스에게 딱 걸려서 압수당한 것이었는데, 그게 여기서 나올 줄이야. 마카롱은 주머니를 받으며 입맛을 다셨다.

“군령 위법이라 들었는데.”

“……가끔은 융통성도 필요한 법이니까.”

융통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라 신기했다.

“좋은 말이네요, 융통성. 제가 그거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그녀의 경우에는 융통성이 있다기보다는 무법자라는 단어가 좀 더 어울렸다. 미미가 술 주머니를 기울여 벌컥벌컥 마셨다. 입가로 술이 흘러내렸다. 스타스가 다시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제야 손수건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 셈이었다.

“어허! 좋다. 이거 비싼 거네요. 한 모금 드실래요?”

“……음, 그. 아니. 괜찮네.”

예의상 물어봤던 미미는 시시덕거리며 아주 조금 그를 향해 내밀었던 술 주머니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스타스는 잠시 흐트러졌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본론을 꺼내었다.

“지내는데 특별하게 불편한 점이라도 있나?”

“아뇨 뭐, 다들 잘 해 주고…… 아닌가, 잘 해 주지 까진 않지만, 특별히 나쁠 것도 없어요.”

그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거기에다가 일라베니아 제국의, 일라베니아 제국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이라니. 마카롱은 로젤린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디에즈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을 거라 강하게 확신했다.

마카롱의 대답에 스타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카롱은 그걸 눈치채고 술 주머니를 흔들며 한마디 덧붙였다.

“단장님께서 직접 술을 주시는 건 좋네요.”

“그런가.”

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니 볼에 보조개가 파였다. 마카롱이 그의 얼굴을 훑으며 감상했다. 다른 놈들에게 보조개가 달려 있을 때에는 흠이 있는 감자 같아 보였는데, 잘생긴 사람 얼굴에 있으니 완전히 달랐다.

신이 스타스를 만들고 너무 흡족해서 만지작거리다가 생긴 흔적 같았다. 마카롱이 빤히 바라보자 스타스가 제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슥슥 쓸었다.

“음,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미미 양의 입장에서는 제국군을 돕는 일이 힘들었을 것 같아서 말이네.”

마카롱의 진정한 정체는 알지 못하지만, 일라베니아의 마인. 그것만으로도 사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카롱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한번 술을 홀짝였다.

“로젤린 경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냥…….”

남자가 말을 끌었다. 마카롱이 피식 웃었다.

“뭘요. 전쟁 끝나면 한몫 챙길 건데.”

리카르디스가 일라베니아 황제가 되면 일라베니아를 반 토막 내고 신전을 부수라고 해야지. 안 해 주면 내가 반 토막 내 버려야지, 와 같은 살벌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스타스는 씁쓸하다는 듯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마카롱이 입맛을 다시며 스타스에게 물었다.

“단장님은 어쩌다 전하를 지키게 된 거죠?”

할 말이 없어서 꺼낸 의미 없는 질문인데 답이 돌아오는 게 늦었다. 마카롱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스타스는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생각에 깊이 빠진 표정이었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기사단이 하나 창설될 때에 단장직을 맡게 되는 이는 기존 황실 기사에서 발탁이 되는 게 관례라네. 자격이 되는 이들이 자원하는 식이지. 그런데 리카르디스 전하의 호위 기사단의 단장직은 …… 그러니까, 신생 기사단인 데다가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으니…….”

머뭇거리는 스타스를 대신해 마카롱이 말했다.

“아무도 지원 안 했다는 거로군요.”

“……음.”

그때 당시 거대했던 엘피디오의 세력을 등지고 누가 감히 용감하게 나설 수 있겠느냐마는, 정말 한 명도 자원하는 자가 없었다.

“제비뽑기로 해서 단장님이 뽑히신 건가요? 그림이 좀 별로인데.”

스타스가 동의한다는 듯 웃었다.

아직 어렸던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보호하러 오는 상급 기사들에게 몇 번 단장직을 권했다. 소년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해 친근하게 대해 주려던 기사들조차도 그 권유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 큰 남자들의 변명을 듣는 소년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알겠다 대답했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하고 불안했을 법도 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고. 스타스는 어린 2황자가 영특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때의 위험한 상황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중앙을 무대로 활동하지 않았던 스타스가 리카르디스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황실 도서관에서만 열람할 수 있는 귀중한 서적을 보러 몇 개월 만에 들린 것이었는데, 거기에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책상 위에 두꺼운 책을 잔뜩 쌓아 두고 읽고 있는 은발의 소년을 본 순간, 스타스는 그가 소문의 2황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카르디스는 여기저기 지나다니는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빠르게 책을 넘기며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돌연 리카르디스가 갑작스럽게 손을 움직여 얼굴을 퍽 쳤다. 자세히 보니 코를 틀어막은 것이었다. 그의 손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그대로 있던 소년이 고개를 젖혔다.

주위를 둘러보니 호위 기사들이 있었지만, 각기 졸거나 다른 짓을 하고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타스는 짧게 혀를 차고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젖히시면 안 됩니다.]

머리통에 손을 대는 낯선 이 때문인지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적의 없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리카르디스는 스타스의 말을 따라 곧 고개를 숙였다. 스타스는 리카르디스의 목덜미와 뒤통수에 손을 댄 채, 소년의 콧대를 아프지 않게 압박했다. 그러고도 피가 멎지 않아 이십 분을 더 있어야 했다.

[그대는?]

[가을안개 백작, 스타스라고 합니다.]

[고맙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잘 멎지 않아서 조금 당황했는데 덕분에 잘 넘어갔다.]

스타스가 건넨 손수건으로 피를 닦은 소년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이 손수건은 내가…….]

돌려주겠다 말하려던 것 같았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거기에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호의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보내려 한다 해도, 막상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으리란 계산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 황실 누구라도 엘피디오와 황후의 눈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손수건만 만지작거렸다. 언어, 산술, 역사, 문화, 정치, 사상, 철학, 제왕학. 어른들도 펴자마자 덮어 버릴 것 같은 복잡한 책을 읽는 명석한 소년이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로 보였다. 연약한 기대감이 피로 젖은 손수건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손수건은 제가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자기 자신도 이해 못할 만큼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스타스는 그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애써 담대하게 가슴을 펴고 있으려던 소년의 입꼬리가 움찔움찔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깊게 눌러 둔 짐이 덜어진 기분이었다.

그 우연한 만남이 약혼녀를 잃은 슬픔으로 황실 기사단을 떠났던 스타스를 다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전 얼음창 기사단 단장 스타스가 하얀밤 기사단 단장 스타스가 되었다.

“아, 알죠, 잘 알죠. 어이구 짠한 거, 이 생각 들면 끝난 거라니까. 못 이겨요.”

미미는 너무나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우들조차 종종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라든지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라고 얘기했는데. 암암리에 전투용 다람쥐라고 불리는 미미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기분이 모호했다. 강한 사람이 뒷배가 되어 과거의 자신을 옹호해 주는 느낌이었다.

“이제 보니 단장님이 저랑 통하는 데가 있었네. 어휴. 저나 단장님이나 고생 참 많네요.”

그녀의 말이 굉장히 웃겼던 터라 스타스는 잠깐 입을 가리고 웃었다. 미미가 보물처럼 꽉 쥐고 있던 술 주머니를 그에게 내밀었다. 고생 참 많은 동지끼리 한잔하자는 뜻인 듯했다.

스타스는 그녀에게 건네받아 술을 한 모금 마셨다가 순간 도로 내뱉을 뻔했다. 마시자마자 식도가 타들어 가는 착각이 들 정도의 독주였다. 미미에게 돌려주니 그녀가 마저 주머니를 비우고 일어났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피보호자가 눈앞에서 오랫동안 안 보이면 불안하잖아요.”

“그건…… 그렇군.”

정말 통하는 데가 있었다. 스타스는 다시 한번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 그녀와 함께 걸었다.

* * *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올겨울은 비가 많이 내리는군.”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로젤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먹구름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제국군은 전투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 거리에 떨어져 있는 발타의 강에 도달했다. 계속된 궂은 날씨 때문에 진군 속도가 더뎌져, 예상했던 날보다 며칠 늦어진 상황이었다. 조급해하던 리카르디스는 눈앞에 무너져 있는 다리를 보고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며칠 내내 내린 비로 강의 폭이 넓어지고 유속이 빨라진데다 다리마저 모두 부서져 있었다. 길이 막힌 것이다. 하카브가 동맹군을 이끌고 출정할 당시,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다리를 부수고 간 것일까?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군이 발타의 영토를 침범하리라 예측했다고?’

아니 그렇다 해도 지원군이 지나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이렇게 무턱대고 저지를 리가…….

싱의 군대는 힐리사고 왕국군이 완전히 격파했다고 들었다. 그중 일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르지만, 도망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크고 견고한 다리를 부술 만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근처 요새의 발타 수비군들이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온다는 정보를 접해, 시급하게 부쉈을 수도 있다.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지만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강의 물결만을 바라보자, 스타스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강의 하류와 상류에 다리가 하나씩 더 놓여 있습니다. 리비타와 가까운 쪽은 하류입니다.”

리카르디스는 묘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고심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상류로 간다.”

제국군이 떠난 자리. 다리가 부서져 있는 강가에 비밀스러운 암호가 남겨졌다.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상류로 이동.]

배반자의 속삭임은 누군가에게로 닿아 멀리 퍼졌다.

* * *

하루를 더 걷고서야 상류의 다리에 도착했다. 그 무렵에는 비가 그쳐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드문드문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상류의 다리는 무사했다. 부수다가 중단한 것인지 다리 여기저기에 거친 흠집이 나 있었지만, 제 기능을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그 다리를 방어하고 있는 수비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다리로 가는 길목에 흙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넓은 땅이 아닌 좁은 다리 위에서 일어나는 전투였기에 수의 이점으로 찍어 누를 수는 없었다. 어떤 부대를 내보내야 하나 리카르디스가 고심하던 중, 앞서 일부 합류했던 힐리사고 부대의 지휘관이 용맹한 모습을 보여 드리겠다며 나섰다.

거칠고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힐리사고군의 위력은 리카르디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동맹국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발타의 수비대와 교전할 상대로 힐리사고의 부대가 발탁되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힐리사고군이 발타의 수비대와 교전하는 사이, 제국군의 지휘부는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며칠간 내린 비로 수심이 깊어져 있어 다리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제국군은 그대로 발이 묶인 채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발타 수비대의 방어는 견고했다. 한정된 좁은 면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다. 어느 군대의 정예 병력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초조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잘근 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스타스가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손을 닦아 주었다. 리카르디스가 겸연쩍은 듯 웃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며 해가 기울었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은 높은 지대 위에 올라서서 전투의 흐름을 살폈다. 여전히 엎치락뒤치락하며 답보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는 오늘이 가기 전까지 다리를 건너지 못할 것 같았다.

“사상자가…… 적은 편이군요.”

잠시간 전장을 바라보던 로젤린이 대뜸 꺼낸 말이었다.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로젤린은 손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날카로운 소음이 나는 곳을 주시했다.

전장으로부터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눈이 좋다고 해도 전투의 흐름만 대충 보일 뿐, 사상자가 얼마나 발생했느냐 정도의 자세한 사항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말을 더 붙이지 않고 계속해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공간은 적고, 사람은 많았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니 만큼 전투는 지지부진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가 적은 것은 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뭔가…….’

눈으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그 너머에서 경종이 울렸다. 전투 중이라 예민해져 공연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잘 살펴야 해, 칼.]

과거 칼릭스에게 했던 말이 돌아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붉은수레바퀴의 사람들은 감이 좋으니……]

만약 이 위화감이 괜한 것이 아니라면? 로젤린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전장이 아닌 로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로젤린의 눈이 쉼 없이 움직였다.

그때, 힐리사고 기사의 검날이 발타 수비대 누군가의 머리를 가격했다. 이미 헐거워져 있던 것인지 투구가 털썩 벗겨지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수해서 인상에 남지 않을 법한 사내였으나, 로젤린은 그가 누구인지 보자마자 기억해 내었다.

수개월 전, 발타의 궁전.

하카브는 연회에서 리카르디스를 이끌고 다니며 많은 이들을 소개했었다. 그때 로젤린이 보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지금과 달리, 회상 속 남자는 웃고 있었다.

[아, 황자. 이쪽은 싱의 대장군, 리마입니다. 싱의 어린 가주들을 대신해 이번 연회에 왔습니다]

며칠 전의 기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싱을 함락했다던 힐리사고의 왕자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던 모습이.

[대다수의 병사들은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포로로 억류 중입니다. 대장군을 포함한 지휘관들은 모두 처형했습니다.]

싱의 대장군. 리마.

투구가 벗겨진 그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검이 쇄도했다. 찰나의 순간, 검날의 궤도가 틀어지며, 머리가 아닌 단단한 흉갑 위를 의미 없이 스쳤다. 로젤린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전투는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에 불과하다!

힐리사고는 애초에 싱의 요새를 함락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처형하고 포로로 잡아 두었다던 싱의 군대가 지금 다리에 있는 수비대일 것이라, 로젤린은 확신했다.

로젤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기세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싱의 대장군이 수비대 측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힐리사고는 발타의 동맹입니다!”

힐리사고는 일라베니아의 오랜 친구이자 가신이었다. 백여 년도 더 흐른 시간만큼 쌓인 신뢰가 지금,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로젤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해도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던 지휘부와 달리 리카르디스는 숨을 한번 크게 쉬는 것으로 정리를 끝낸 듯 보였다.

“드윗 경, 로젤린 경.”

근처에 있던 드윗이 급히 다가왔다.

“좌익군이 먼저 출진한다. 다소 피해가 생기더라도 하나하나 처리하지 말고 돌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로젤린 경에게는 현장 지휘관으로서 드윗 경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격을 부여하겠다. 선두에 서는 기병대를 이끌어라.”

“명을 받듭니다!”

“예, 전하. 명을 받듭니다.”

상황과 명령이 빠르게 하달되며 그간 잠잠했던 제국군 진영이 소란스러워 시작했다. 곧 좌익군이 움직이며 좁은 바늘구멍 같은 다리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전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전투가 길어진다 싶더니,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나.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싱의 요새에 주둔하고 있을 힐리사고군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뒤를 든든하게 맡아 줄 아군이 한순간에 적으로 변해 버린 것은 단순히 ‘적이 하나 더 늘었다.’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싱의 요새가 지닌 전략적 이점을 모두 잃어버렸다.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지금의 제국군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어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류로 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나마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어디 있나!”

세실이 급하게 말을 몰고 다가왔다.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지. 힐리사고가 배반했다.”

세실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리카르디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제 말한 그것을 쓸 수 있겠나?”

어젯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리카르디스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녀의 영지 내에 있는 무기 장인이 만들었다는 신무기 때문이었다.

[화약을 이용한 설치용 폭발물?]

[일반적으로 화약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위력이 강할 거라 하더군요. 이것저것을 섞었다고. 그런데 급하게 만든 터라 실험해 볼 틈이 없었습니다. 그 영감이 솜씨는 좋은데 실패도 많이 해서……. 최악은 불발까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내일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화약과 함께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하라.]

그렇게 말한 것이 정말 딱 하루 전이었다. 세실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뭘 폭파하시려는 겁니까?”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강줄기를 따라 손을 뻗었다.

“여기서 조금 더 상류로 올라가면 댐이 있다. 그걸 폭파한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입을 벌렸다. 자신도 과격함 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이건 정말…….

“연합군이 모습을 드러낸 후, 적절한 때가 오면 신호를 보내겠다. 신호는…… 마카롱 경의 울음소리. 지금 당장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힐리사고군이 나타났다. 싱의 요새를 차지했다던 왕자의 군대였다. 연합군이 오기 전까지 발을 묶기 위한 병력이리라, 리카르디스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노림수대로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다리를 건너지 못한 채, 힐리사고군과 교전해야 했다.

해가 질 무렵, 리카르디스의 불안은 실체화되어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석양빛을 등진 검은 그림자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언덕의 능선 위를 빼곡하게 메웠다. 기괴하게 몸을 들썩이는 검은 그림자 무리는 말라 죽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 같이 보였다.

일라베니아의 거대한 방벽을 무너트리고, 남부를 초토화시킨 발타와 마람의 연합군이었다.

거대한 무리에서 한 남자가 호위를 대동한 채, 전열로 나섰다. 멀리에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카브, 그 남자였다. 그가 흡, 숨을 들이켜더니 소리를 질렀다.

“로젤린 에스터!”

막 힐리사고 병사를 발로 걷어차 강물에 빠트린 로젤린이 그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나에게 와라.”

몇 만 명이 모여 있는 강가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카브의 돌발적인 행동에 일라베니아 제국군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측도 당황하고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로젤린에게 쏠렸다. 다 같은 갑옷을 입고 있어, 누가 로젤린인지 모르던 이 조차 그녀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로젤린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창병의 창을 빼앗아 확 던졌을 뿐이었다. 사람 키보다 큰 무기가 화살처럼 쇄도했다.

하카브의 코앞까지 창이 들이닥친 순간이었다.

캉!

높은 쇳소리가 나더니 창이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추락해 바닥에 꽂혔다. 하카브의 앞을 막아선 자는 디에즈였다. 일라베니아의 배신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왕자, 이상한 짓 하지 마시죠.”

디에즈가 짜증난다는 듯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하카브가 하하 웃으며 답했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는 속담이 있어, 디에즈. 어쩌면 그녀도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권해 보기나 한 거야.”

“그래서요, 또 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럴 리가. 이번이 딱 세 번째였어.”

디에즈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은 하카브가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은 들어라! 일라베니아의 중부관문으로 발타와 마람뿐 아니라 힐리사고의 군대까지 진군하고 있다. 너희에게 승산은 없다. 하지만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그저 일라베니아에 태어났을 뿐인 것을. 하여, 기회를 주겠다.”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무기를 내려라. 무릎을 꿇고 복종해라. 그런 자들의 목숨은 내가 가엾게 여겨 거두지 않을 것이다.”

일라베니아의 병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몰린 위기. 돌파구가 없어 보이는 전황. 수많은 적군까지. 여러 요소가 사고를 둔하게 만들고 마음을 흔들었다.

수백 수천 쌍의 눈이 움직이며 서로를 탐색했다. 적군을 앞에 두고 전의를 불태워도 모자랄 판에,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차마 무기를 놓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꽉 쥐고 있지도 못했다.

하카브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는 꽉 짜인 유기체 같던 제국군의 진형이 흐트러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 사이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고리가 헐거워지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카브가 손을 들어 올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것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를 대신한다는 사실은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연합군의 진영에서 화살 한 발이 하늘로 쏘아졌다. 그리고 곧바로 제국군 진영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제국군의 측면, 적막을 끊어 낸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가 그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하카브의 명령을 받고 숲을 돌아서 간 별동대가 제국군의 방심을 뚫고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인 병사 몇몇이 강물에서 튀어나와, 진형의 안쪽에 있던 지휘관들을 살해했다.

어수선해졌던 제국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있었다. 하카브는 이목이 전방을 벗어난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제국군과 대치 중이던 연합군의 전열이 움직였다. 곧 첫 번째 파동이 제국군을 덮치며 사납게 그들을 흔들었다. 예정된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미 전의를 잃었던 자들의 방패는 연약했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발타의 병사들이 활개 쳤다. 한 명 한 명이 무너지자 전체가 흔들거렸다. 그들을 다잡아 줄 지휘관들은 살해당한 지 오래였다. 지휘 계통이 마비된 곳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하라!”

미처 검을 놓을 용기마저 없던 이들이 그 말에 잽싸게 도망쳤다. 연합군은 그런 그들의 후미를 짓뭉개며 전진했다.

하카브가 그 장면을 보며 웃었다.

그때 디에즈와 케틀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상에서부터 하늘로 급격하게 치솟는 마력을 느낀 탓이었다. 거대한 독수리가 화살처럼 쏘아지듯 비상하고 있었다. 곧 전장 위를 덮는 울음소리가 울렸다.

삐이익----

* * *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의 궁병 대장이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불화살은 댐의 앞에 쌓여 있는 화약과 폭발물에 정확하게 꽂혔다.

콰앙!

무언가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로 일대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폭발로 자욱해졌던 시야가 확보된 후에야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렉시드.”

“……예, 백작님.”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보자면 있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녀가 머리를 헝클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수레 열 개 분량의 화약과 신무기가 투입되어 폭발을 일으켰음에도 댐은 여전히 건재했다. 연기가 자욱하게 나고 소리만 요란했지,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이 발타의 개자식들을 보살피는 것 같단 말이다.”

세실이 이를 으득 갈았다. 댐이 붕괴 되었을 때를 대비해 높은 지대로 올라와 있던 것도 허사가 되어 버렸다.

저 멀리 격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댐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 제국군은 강가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기존 계획이 틀어진 이상 정규전을 각오해야 했다.

“본대를 엄호하러 간다.”

“명령을 받듭니다.”

세실은 미련이 이끄는 대로 한 번 더 뒤를 돌아 댐을 바라보았다. 얄미운 댐은 흔들리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혀를 차고 다시 고개를 돌려 이동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군이 떠난 뒤, 연기가 걷혔다. 그곳에는 그녀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희미한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쩌저적, 갈라지는 틈으로 흙 자갈이 떨어졌다.

* * *

멀리서부터 굉음이 들렸다. 저 멀리에서 범상치 않은 크기의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고 있었다. 자주 범람하는 미노가 강의 하천 지대를 위해 설치한 홍수 조절용 댐이 있는 곳이었다.

하카브는 자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며칠간 내린 비로 수위가 한껏 높아진 상태였기에, 만약 댐이 무너졌다면 강가에서 전투 중인 연합군이 다 쓸려 나갔을 것이다.

다행히도 소리만 요란했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단단하게 지어진 댐을 터트리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왜 상류로 왔나 했더니. 이런 걸 준비해 두고 있었군.”

댐이 터지게 되면 연합군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볼 테지만, 제국군도 조금이나마 휘말리게 되어 있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려 한 것이다. 그 곱상한 얼굴로 이런 과격한 방식을 선택할 줄이야.

하카브는 강 건너의 리카르디스를 발견했다.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다른 제국군 병사들과 달리 하얀밤 기사단을 포함한 기병대가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향하고 있었다.

‘댐으로 가는 거로군.’

화약이 실려 있는 수레를 끌고 있는 걸 보아하니 예상이 맞을 것 같았다. 하카브는 빙긋 웃었다.

“호위망이 얕아졌군. 발리스타의 방향을 조절해라. 강줄기를 거슬러가는 제국기 아래. 적의 총사령관이 있다. 그리고 디에즈?”

“뭡니까.”

요즘 한창 반항기를 겪고 있는 터라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그대가 좀 도와줘야겠어. 하얀밤 기사단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든.”

디에즈의 눈에 의문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로젤린과 마카롱이 있는 그 하얀밤 기사단의 치명적 약점?

하카브가 씩 웃으며 말했다.

“로젤린 경을 너무 믿는다는 거지.”

큰 소리가 난 시점으로부터 몇 십 분이 흘렀음에도 강가의 수위는 높아질 줄을 몰랐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댐을 붕괴시키지 않는 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다. 하카브를 암살하는 방법 또한 생각했으나, 그를 둘러싼 수많은 마인 부대와 디에즈의 존재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휘관들 중 다른 이들에게 2차 폭파의 임무를 맡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일이 또 틀어진다면 곤란했다. 임무가 실패한다고 가정할 시, 당장에 명령을 내리고 지휘를 바꿀 만한 사람이 임무에 포함되어 있어야만 했다. 총사령관인 리카르디스가 직접 댐으로 향하게 된 이유였다.

천여 명 되는 부대가 본대에서 빠져나와 강가를 따라 이동했다. 뒤에서 발타의 병사들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옷을 입고 합류한 마카롱이 나무를 쓰러트리며 뒤에서 달라붙는 발타군의 발을 잠시간 묶었다.

마인 병사, 인조적인 마인들, 그리고 파편까지. 사방이 마력으로 일렁였다. 로젤린은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마력’을 위험한 것으로 분류했다. 보지 않는 방향이라 해도 파편과 마인 병사들의 움직임만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덜컹, 둔중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것에 로젤린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이유는, 후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기운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거대한 마력.

디에즈였다. 그가 강대한 마력을 난폭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그걸 느낀 로젤린과 마카롱의 시선이 디에즈에게로 향했다. 그 찰나의 순간, 느슨해진 경계를 뚫고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콰직.

무거운 것이 갑옷을 뚫고, 연약한 살과 근육을 찢는 소리가 끔찍하게도 생생했다.

로젤린은 제 시야 밖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디에즈의 마력이 자신과 마카롱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도.

로젤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 옆에 양팔을 쫙 벌린 스타스가 있었다. 검고 뾰족한 무기가 그의 가슴을 꿰뚫은 채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말발굽에 밟힌 자갈이 튀어 오르고, 먼지가 자욱했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이 리카르디스의 은색 갑주에 닿았다. 스타스의 투구 안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인영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급하게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틀었던 탓인지, 스타스의 말과 리카르디스의 말이 거세게 충돌했다. 두 사람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악!”

누군가가 내지른 비명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로젤린은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파르딕트인가, 르원인가. 어쩌면 자신이 내뱉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되돌아왔다.

낙마한 두 사람의 위로 기병 몇 명이 지나갔다. 말발굽에 갑옷이 절걱, 철걱 밟혔다. 가슴 속 깊숙한 곳을 찌르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였다. 로젤린은 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흙먼지로 자욱한 바닥에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그들이 쓰러져 있었다.

“전하!”

로젤린은 손을 덜덜 떨었다. 리카르디스가 바닥에, 그리고 그 위에 스타스가 있었다. 스타스의 가슴을 꿰뚫은 검은 쇠가 리카르디스의 흉갑에 닿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미동도 없었다. 주위가 소란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로젤린의 손을 누가 덥석 잡았다. 급하게 숨을 토해 낸 스타스였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투구를 벗었다. 눈에는 핏줄이 터져 붉었고,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단, 단장님.”

스타스가 콜록거리며 피를 토했다. 로젤린은 급하게 수통에 담긴 성수를 먹이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고작 그 정도로 치료되지 않으리란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

기병대가 후미의 발타군과 교전하는 사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급하게 주위에 모였다.

“단장님!”

“전하!”

하급 기사들이 눈물을 터트렸다. 애써 눈물을 참는 자들도 많았다. 스타스는 반쯤 기다시피 해서 리카르디스의 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부단장 나단이 급하게 리카르디스의 투구를 벗겨 냈다. 피에 엉긴 창백한 은빛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리카르디스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떨어지며 투구 안쪽에 강하게 찍힌 것인지 이마 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허억…….”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부서진 마차 안, 피 흘려 가며 죽어 가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그와 겹쳐졌다. 그때의 무력감, 그때의 고통과 그때의 좌절이 지금 겹쳐지며 그녀를 쥐어 터트릴 듯 짓눌렀다.

‘나, 나는 또…….’

미처 속으로도 완성하지 못한 생각에 손이 떨렸다. 시야가 깜깜했다.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게 뛰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로젤린이 비틀거리자 상급 기사 카일로가 급하게 그녀를 지탱했다. 나단이 건틀렛을 벗으며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살피고 호흡을 관찰했다.

“잠시 기절하신 것 같지만, 말에서 떨어진 부상이라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빨리 안전한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단이 잠깐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단장과 총사령관이 해를 입은 틈을 타, 발타의 병사들이 화약 수레를 강탈해 물에 집어 처넣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일어섰다.

“작전은 폐기, 서둘러 퇴각한다!”

모든 기사단원이 스타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서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나단의 콧수염이 움찔거렸다. 그가 자신의 가슴 위에 주먹을 올려 두며 스타스를 향해 경례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단을 이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장님.”

숨죽인 울음소리가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들려왔다. 스타스의 눈동자가 하얀밤 기사단원들 훑더니 쓰러진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마지막으로 쳐다본 것은 그간 멍하니 서서 떨기만 하던 로젤린이었다.

스타스가 발을 끌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로젤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타스가 피를 다시 한 움큼 토해 냈다.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다. 내내 멈춰 있던 로젤린은 그제야 움직여 스타스를 지탱했다. 얇은 얼음 막이 그녀를 두르고 있는 것만 같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힘없이 쓰러지려던 남자가 그녀의 뒤 목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마가 세게 쿵 부딪쳤다. 코앞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남자의 붉어진 눈이 보였다. 로젤린은 그 눈에 비친 겁먹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마라…… 로젤린 에스터.”

고통에 찬 그의 눈에서 눈물과 피가 뒤섞여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 뭘 해, 야 하는…… 지. 생각하고…….”

스타스가 한쪽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꾹 잡았다. 로젤린은 이 다음 어떤 말이 따라올지 알고 있었다. 과거, 스타스에게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 시절.

노력하지만 대련에서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았다. 매일매일 검을 휘둘러 고단해진 몸보다도 정신적인 문제가 더욱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남들은 다 하는 걸 왜 나만 못하나. 왜 이렇게 나만 뒤처지나. 결국은 해낼 수 없는 일인가.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는 반복해서 로젤린을 흔들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로젤린은 스타스에게 불려 가 딱 죽지 않을 만큼 굴렀다. 지쳐서 쓰러진 그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젤린은 땀이 맺힌 눈가를 닦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경은 힘이 약한 편이군.]

[……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예?]

무슨 소린가 싶었다.

[힘이 약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로젤린은 더듬더듬 얘기했다.

[근육을 키우거나, 아니면 가벼운 검을 추구하며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그래, 그렇게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경에게 필요한 생각이고, 나머지는 쓸데없는 잡념에 불과하다.]

로젤린은 스타스가 말하는 ‘쓸데없는 잡념’이 여태껏 자신을 흔들어 왔던 고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하겠거든, 생각하지 말고.]

스타스는 그런 로젤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꾀죄죄한 몰골의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로젤린의 등을 털어 준 스타스가 씩 웃었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움직여라, 당장.”

로젤린은 먼 시간에서 돌아와 현재의 스타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스타스는 제 어깨를 밀고 있었다. 한없이 연약하고 위태로운 손길임에도, 로젤린은 스타스가 그때처럼 자신의 등을 강하게 떠밀어 주고 있다고 느꼈다.

내내 멈춰 있던 로젤린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자 눈앞을 부옇게 만드는 입김이 퍼졌다.

“퇴각한다!”

로젤린은 산길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았다. 낮은 지대에 있는 연합군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생물처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그들의 중심이 강가로 이동한 상태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아직 연기가 나는 먼 곳을 보았다. 그녀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로젤린, 파르딕트, 레이몬드, 네스터, 슈텐,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경을 포함한 오소리 대가 전하를 보필, 미미 양은 다른 부대에서 로젤린 경의 역할을 맡아 마인 병사들의 이목을 끈다. 합류지는 기억하겠지.]

[예!]

만약의 때를 대비한 명령은 이미 상급 지휘관들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 그들은 그러한 일정한 계획에 따라 여러 갈래로 쪼개어져 이동하고 있었다.

그중, 제국기와 하얀밤 기사단의 깃발이 휘날리는 중앙 부대에서 강한 마력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미끼 역의 마카롱이 힘을 쓴 것이었고, 그 노림수대로 대부분의 마인 병사들이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부상 입은 리카르디스를 보필하는 소수의 부대만 옆길로 빠져나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기 위해서였다.

리카르디스를 싣고 있던 수레는 도중에 버려야만 했다. 길이 험해지며 썩은 나무뿌리들이 들쑥날쑥하여 통행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에버하르트의 군마에 리카르디스를 맡겼다. 나머지 기사들과 병사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리카르디스와 호위대는 기존의 대피로를 무시하고 다른 길로 달리고 있었다. 호위대의 현 책임자 레이몬드가 입술을 짓이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맡은 호위대가 결코 저질러서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태어나서 로젤린이 그렇게 강력하게 의견을 주장하는 걸 본 적 없었다.

[댐으로 가자, 레이몬드. 연합군의 본대가 강가의 중앙에 몰려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리카르디스 전하의 안위야!]

[우리보다 저들이 지리에 밝을 수밖에 없어. 연합군이 저 수로 수색에 나서면 전하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해.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 연합군이 전부 다리를 건너 강가를 벗어나기 전에!]

[폭파시킬 수 없어, 화약이 다 떨어졌다는 걸 알잖아!]

[1차 시도로 충격을 받았을 거야. 아무렇지 않을 리 없어. 며칠 새 비가 많이 내렸지. 물의 수위는 높아지고, 그걸 담아 두는 댐에도 압력이 높아진 상황이야. 조금의 충격이면 될지도 몰라.]

댐을 폭파한다는 작전은 완전히 폐기한 상황이었음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레이몬드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잘 도주해 제국군과 합류한다 하더라도 뒤바뀐 전쟁의 판국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국군은 뿔뿔이 흩어져 조만간 추적대에게 따라잡혀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잡힐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있다 하더라도 이 전쟁은 그 못지않게 머릿수가 중요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만약 댐에서 방류된 물이 연합군을 쓸고 간다면, 시간을 벌 수 있을뿐더러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결국 댐으로 향하게 된 이유였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멈춰 대응하려 하자 레이몬드가 소리쳤다.

“전력으로 달린다!”

최대한 빨리 댐에 도달해야 했기에, 쓸데없는 교전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레이몬드의 명령에 따라 다들 말을 재촉해 달렸다. 곧 시야에 절벽처럼 보이는 높이의 댐이 들어왔다. 아직까지 연기가 꺼지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그을려 있는 상태였다.

멈춰 선 호위대 뒤로 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힐리사고의 왕자가 포함된 힐리사고의 정예병들이었다. 오백여 명쯤 될 뿐인 호위대에 비해, 힐리사고군은 이천에 달하는 숫자였다. 로젤린이라 하더라도 상대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동안 리카르디스의 안전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힐리사고의 왕자가 한걸음 앞에 나와 거드름을 피웠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리카르디스 전하와 꽤 친하거든.”

일라베니아의 기사들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리카르디스를 직접 보호하는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로젤린은 그사이 댐 아래 다리처럼 축조된 구조물에 올랐다. 폭발 때문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나무판자가 사라져 엉망이었다.

뭐 하는 거야 저거? 누구야? 힐리사고군 측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그녀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로젤린의 주먹이 댐과 충돌했다.

쾅!

작은 전장에서 일어난 소음을 뒤엎는 굉음이 울렸다. 힐리사고군에 끼어 있던 몇몇 마인 병사들이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로젤린이 있는 쪽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다!”

“화살을 쏴!”

“먼저 죽여야 한다!”

모두가 죽을 각오로 막아 내고 있었으나, 수의 앞에서는 힘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포위망이 점차 좁아졌다. 쓰러지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감과 동시에 비명도 늘어났다. 마음이 조급해진 로젤린은 연신 댐의 벽면을 내려쳤다.

쾅!

‘제발.’

쾅!

다시 한번.

쾅!

계속해서. 하지만 댐은 진동할 뿐, 부서지지 않았다. 숨을 토해 낸 로젤린은 한 번 더 댐에 주먹질을 하려다 우뚝 멈췄다. 겨울인 탓에 제 입김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호흡이 거칠어.’

로젤린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파악했다. 호흡은 거칠고,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에 동작만 크고 힘을 싣지 못했다.

로젤린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깊숙하게 몸 안을 타고 돌았다. 맥동이 난폭하게 뛰며 온몸을 둥둥 울렸다.

그것에 아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다. 가리가리 찢겨 기억도 나지 않던, 과거의 순간이었다. 화살이 쏟아지고, 무기를 든 자들의 위협이 가까워져 갔다.

제발, 제발. 눈물을 흘리며 무력하게 하늘의 달에게 빌기만 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제발 그 누구라도 도와주세요.

하지만 구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로젤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에게서 마력의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며 안을 타고 돌았다. 근육이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힐리사고 측의 몇몇 병사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못 박힌 듯이 로젤린만 바라보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로젤린이 눈을 뜨며 주먹을 휘두른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쾅!

땅이 진동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싸우던 것을 멈췄다.

쩍, 쩌적.

그녀의 주먹을 중심으로 균열이 선명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빠르게 사방으로 치닫는 균열의 소리와 댐 너머의 물이 세차게 울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뛰어!”

로젤린은 나무를 부러트려 집어 던지며 힐리사고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굉음과 땅의 진동, 로젤린의 공세 때문에 그들이 잠깐 물러선 사이, 호위대는 강가에서 산기슭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제국군을 쫓으려던 힐리사고군이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쩌적, 댐이 갈라지는 게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댐이 무너진다!”

“퇴, 퇴각하라!”

힐리사고군은 기겁하여 그제야 강줄기에서 벗어나 산비탈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붕괴가 이미 시작된 후였다. 로젤린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댐을 바라보았다.

‘댐이 붕괴되면 물이 쏟아지리라 생각했는데.’

흙이 먼저였다. 토사가 흘러내리며, 그 틈새로 며칠간의 겨울 장마에 가득 들어차 있던 강물이 터져 나왔다. 로젤린은 한달음에 내달려 빠르게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그것은 단순한 홍수라 표현할 수 없는 파괴적인 장면이었다. 탁류가 한 마리 거대한 생물처럼 나무, 흙, 돌, 인간.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한때 부드럽게 흐르던 강물은 섬찟하고도 육중한 소음을 내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발밑을 흔드는 진동에 놀란 군마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중에는 리카르디스를 싣고 있는 말도 있었다. 기사들이 다급히 고삐를 쥐려 했으나, 비틀거리던 말은 비스듬히 난 돌멩이를 밟고 말았다. 땅에서 뽑혀 나간 돌멩이가 구르고, 그 위로 군마도 굴렀다.

“안 돼!”

강물 위로 리카르디스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 로젤린이 재빨리 몸을 던지며 그를 끌어안았다. 물이 가까워지고, 풍덩. 얼음 같은 차가운 온도가 두 사람을 덮쳤다.

“전하!”

“로젤린!”

수면 아래에서 듣는 소리는 너무나 작고 희미했다.

* * *

“……이게, 무슨…….”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낯을 유지하던 하카브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이 사람도 화를 내기는 하네.’

케틀린은 새삼스럽고 당연한 감상에 잠시 휩싸였다 빠져나왔다. 그녀는 아까 전 방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온 방향을 다시 쳐다보았다.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자라면 결코 무시할 수도, 눈을 뗄 수도 없는 힘이었다. 그렇게 시선과 정신을 빼앗긴 사이, 곧바로 무언가가 부서지고 터져 나오는 소리가 연합군이 있는 곳까지 들이닥쳤다.

다행히 케틀린과 하카브는 디에즈와 마인 부대의 도움으로 거센 물길을 피해갈 수 있었으나, 대다수의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은 헤엄쳐 나오려다가도 가라앉아 버렸다. 숲, 나무, 그 일대의 모든 것이 잠겼다. 강가를 뒤덮었던 연합군의 병력은 반절로 줄어 버렸다. 케틀린은 그런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으나 들려오는 비명과 하카브의 싸늘한 목소리로부터 대충의 상황을 짐작했다.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케틀린이 몸을 움츠렸다. 보아하니 하카브가 분에 못 이겨 옆에 있는 나무를 친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본인 손만 아플 짓 왜 하냐고 뭐라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케틀린은 나름 목숨 소중한 건 알았다. 더해서, 자신도 그와 마찬가지로 뼈아팠다. 일라베니아를 조각조각 다져 줄 하카브의 군대가 이렇게 허무하게 쓸려 나가다니.

“리카르디스의 목을, 반드시 가져와라.”

조용히 읊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일대를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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