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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으로 임명되기 바로 하루 전, 황제가 리카르디스를 호출했다. 전장에 보내려는 의도가 명확했으므로, 서로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적의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2황자’의 모습. 임명서를 보고도 눈하나 깜빡 안하며 여유롭게 내용을 읽어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되니 괜히 눈치가 보이는 건 황제 쪽이었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다가 목을 가다듬고 급히 얘기를 꺼내었다.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황가의 의무이니.”
리카르디스가 싱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황가의 일원으로 어찌 손 놓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책임이 막중한 자리이기는 하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황제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눈빛이 그를 맴돌았다. 황제는 잠시 후 허허 웃으며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일라베니아에 악재가 따르는 상황에서, 황태자 위를 내리는 것이 마땅치 않다 여겼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만백성이 널 반길 것인즉. 그때야말로 적기가 아니겠느냐.”
리카르디스는 황제가 겸양이 섞인 대답을 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니, 제가 어떻게 황태자 위를 받겠느냐…… 따위의. 리카르디스는 대답 대신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리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폐하. 혹시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황제는 은근한 당황을 내비쳤다.
“무얼 말하느냐.”
“어릴 적, 저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뒀을 때 말입니다. 제가 어리석어 ‘하얀 밤’이 가지는 의미를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해, 그 이름을 달라 청했었지요.”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잊을 리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황족들의 호위는 황실 기사단이 번갈아 가며 맡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경우는 특별했다. 특별하게 두각을 드러내며, 엘피디오의 지위를 위협했다. 그래서 특별하게 위험해졌다. 또한, 황제인 자신이 그 소년을 특별하게 필요로 했다. 여러모로 특별했던 셈이다.
암살자 따위의 손에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던 터라, 호위가 더욱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리카르디스가 금강석 성을 찾아왔다.
[제 호위 기사단에 ‘하얀밤’의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폐하.]
황제는 정말 너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미처 화내지도 못했다.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에서, 심지어는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은 지가 삼백여 년이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일개 황자의 기사단을 ‘하얀밤’이라 칭하겠다?
이것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역모였고,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리카르디스를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허, 허. 경직된 웃음만 내뱉었다. 리카르디스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의 안전을 위해 특별히 호위 기사단의 창설을 허가해 주셨음을 충분히 인지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긴 하나, 저의 쓰임새를 완전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폐하. 조금이나마 이 싸움이 비등해 보이도록, 힘을 실어 주시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또한, 대외적으로는 제가 대신관 누구보다 신성력이 뛰어나니 하얀 밤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하사했다 하신다면, 과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그때까지도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온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물론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엘피디오를 저지하기 위한 꼭두각시라는 사실 정도야 알아챘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모든 항목에서 수재 이상의 평가를 받는 그때의 소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자신이 황실에 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참으로 맹랑했다. 네가 네 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날 데리고 왔지 않으냐, 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제 치부를 온전히 내보였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서긴 했으나, 특별 호위 기사단이 창설되어야 할 만큼 위험한 길에 타인을 끌어들였다는 일말의 죄책감이 순간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리카르디스가 ‘하얀밤’의 주인이 된 이유였다. 물론 언젠가 가깝거나 먼 미래에 곧 사라지게 될 이름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던 덕도 컸다.
황제는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렸던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청년은 부서지는 햇살 아래에서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계의 가장 큰 축복, 일라베니아의 가장 큰 영광. 하얀밤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하사해 주신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이름을 지닌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겠습니까.”
껄끄러웠다. 그때의 죄책감이 살아나는 듯, 언젠가 사라질 ‘하얀밤 기사단’의 미래가 떠오르는 듯. 황제는 입안에 고여 넘어가지 않는 침을 차와 함께 넘겼다. 리카르디스가 맞은편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발타가 일라베니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할지라도, ‘하얀밤’이 결국은 그 어둠을 걷어 내고 제게 승리를 가져다주리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황제의 낯이 굳었다.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하얀밤’은 단순히 그의 기사단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황제는 다르게 느꼈다. 그가 축복의 밤을 불러내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가슴 속 깊은 곳, 가장 뜨거운 심장 언저리부터 싸늘하게 식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리카르디스는 축복의 밤을 부를 권한뿐 아니라, 축복의 밤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대한 지식 또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나, 불안은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특별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몇 개의 가정이 황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몇 개의 가정에서 뻗어 나간 수십 개의 미래 속에서도 황제는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전쟁에 리카르디스를 내보낸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발타라는 큰 위협을 걷어 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지녔다 믿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드시 그 장소에 그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황제가 그린 수십 개의 그 어떤 시간 속에서도 리카르디스는 전장에 있었으며, 또한 수십 번의 죽음을 맞이했다. 반드시 이뤄져야만 할 미래였다. 지금의 리카르디스가 말한 ‘하얀밤’이 의미하는 것이 반역과 관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순수하게 제 안위만을 바라는 소인배라 할지라도.
황제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평소와 같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하다, 리카르디스. 너에게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전장으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예정된 미래가 안배된 곳으로 떠나,
“무사히 돌아오길 이델라브힘께 빌고 있으마.”
부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전장에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어찌나 하고 싶어 하던지.”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꼰 채 무성의하게 말했다. 방 안에 있는 소파, 의자, 테이블 등 적당히 엉덩이 댈 곳에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분개하거나 탄식했다. 욕도 들렸다.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황제에게 우수한 아들이란 정말 너무나도 위협적일 것이다. 그것이 발타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우수한 아들이라면 더더욱. 리카르디스 휘하 세력의 대다수는 그가 평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나, 그러한 이유로 황제가 그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을 납득하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 두었다.
“못난 자식이라 기대에 부응해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괜찮지 않을까요? 폐하께서도 선황께 못난 자식이셨어요.”
클로에가 나긋나긋하게 황제를 욕했다. 남자들이 급하게 입을 가리고 웃음을 삼켰다.
“오늘 모이게 한 이유는, 우리의 적은 발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해서다. 일라베니아도 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니, 발 뺄 기회는 지금뿐이다. 여태껏 나를 따라 준 공로로 대가 없이 보내 주겠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 없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리카르디스가 턱을 살짝 들고는 싱긋 웃었다.
“보통은 이런 분위기에서 손을 들기는 힘들지. 내 노림수가 먹혔군.”
리카르디스의 농담에 사람들이 웃었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올렸다. 파르딕트였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경은 안 돼. 가려면 목을 두고 가.”
“예? 왜 저는 안 됩니까? 아차, 그게 아니라 질문이 있어서 손을 들었습니다, 전하.”
리카르디스가 순식간에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농이었다. 뭔가.”
파르딕트가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로젤린이 있는 쪽이었다. 정확히는 로젤린의 옆. 칼릭스에게.
“……칼릭스 경이 왜 여기 있습니까?”
그래, 왜 칼릭스 경이 여기에…… 왜 여기에 있어? 엘피디오가 죽었다고 돌아섰나? 아까부터 신경 쓰였어. 방 안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소란 속에서 리카르디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내 사람이었다.”
“예?”
“예에?”
“언제부터…….”
“몇 개월 전에 나의 인품을 흠모하였노라 고백했었지.”
“…….”
기가 찬다는 칼릭스의 표정에 모두가 리카르디스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로젤린만 눈을 빛내며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랬어? 우리 전하의 인품을 흠모했어? 언제 충성 맹세를 했어?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칼릭스가 제 누이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다들 그가 제 누이 때문에 왔겠거니 하며 대충 넘어갔다.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일 출진하기 전에 총사령관 임명식이 있을 것이다. 직위를 받을 사람은 당연히 나고.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암살 명단 제0순위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겸사겸사, 전쟁에서 패한다면 그 책임 또한 물으려고 하는 것이고.”
“효율 좋은 책략이로군요.”
“그렇군. 참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군.”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죽으라고 보내는 곳이다. 전쟁에서 발타의 기세를 눌렀다 싶으면 그때부터 내가 위험해지겠지. 그러나, 내가 참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 본다. 그 누구든 무슨 수를 썼겠지. 그래서 나는 기꺼이 검을 들고 전장으로 가겠다. 조금이라도 내가 내 운명을 택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가겠다. 그 사지 속에 아주 좁은 틈의 활로가 있으리라, 믿는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는 한 사람, 한 사람 눈에 담았다. 마지막은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었다. 이런저런 서류로 어지러워진 테이블 위에 섬세한 문양이 그려진 서류가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가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를 대 발타의 병력을 이끄는 일라베니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델라브힘의 가호 아래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대륙을 불안에 떨게 한 발타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라.]
테이블을 짚고 있던 두 손이 꽉 주먹 쥐어졌다. 숨을 깊게 내뱉은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반드시 승리한다.”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총사령관,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일라베니아력 589년에 발발한 대 발타 전을 위해 출진하다.
* * *
햇살과 함께 꽃잎이 내려지는 공간 속, 일라베니아의 국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은 기시감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모두 몇 개월 전, 사절단의 자격으로 발타로 떠났던 날을 상기했다. 정말 똑같았다. 수도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찬 장면과 사지에 제 발로 들어 가야 한다는 상황까지도.
달라진 점을 꼽자면, 그때보다 인원수가 많아졌다는 것과 더불어 일라베니아의 대군을 독수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삐이익---
독수리가 한 번씩 창공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낼 때면 병사들은 번번이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이델라브힘의 가호가 따른다며 무척이나 좋아한다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기가 올라갔다.
[미미나 쥬쥬로 따라갈 생각도 하긴 했지. 근데 인간 놈들이랑 부대껴야 할 생각하니까 토 나와서.]
하고 저 독수리가 악담을 했다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할지 조금 궁금했다.
평탄한 여정이 이어졌다. 리카르디스가 총사령관 임명을 받고 “전군, 출진.” 하며 검을 뽑았던 때만 해도 눈에 예기가 감돌던 병사들은 어느새 관성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다. 나라에 큰일이 닥쳤으나, 그것은 먼 곳의 일이라 여기는 평온하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 안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돌연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듯했다.
똑똑.
바깥에서 마차 문을 두드려왔다.
“무슨 일이지?”
“전하, 그…….”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 스타스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가 짧은 침묵 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손님께서 전하를 알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전쟁터로 진군하는 와중에 손님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이 확실한가?”
스타스는 면목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리카르디스는 창문을 열어 그 ‘손님’의 정체를 확인했다. 병사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분홍색 개털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피로가 밀려왔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두 눈을 다시 뜨고 쳐다봐도 연분홍색 개털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군.’
라헤안시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늙은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 당나귀는 무언가를 천천히 씹으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위의 라헤안시는 헥헥대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당나귀를 어떻게든 재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전혀 빨라지지 않았고 그냥 꼴 보기 싫은 효과만 더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노새를 탄, 라헤안시의 뒤치다꺼리를 일임하고 있는 신관 베르움이 보였다. 그의 피로하고 아연한 표정은 모든 상념을 재로 만들어 날려 버린 듯했다. 한참 느리게 다가온 라헤안시는 마차 옆에 당도하고 나서야 에휴 하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늙은 나귀와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대신관의 복장이었다.
“혀엉!”
“리카르디스 전하라 부르셔야 합니다.”
신관 베르움이 조용히 그를 타박했다.
“형! 이렇게 중요한 걸 두고 가면 어떻게 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술렁였다. 어떤 중요한 걸 두고 갔기에 대신관께서 몸소 당나귀까지 타고 행차한 것이지? 뭘 전해 주러 오신 거지? 그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리카르디스만 자신이 두고 온 중요한 것의 정체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중요한 거? 그러고 보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걸 두고 왔었군.”
그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었다. 입 밖으로 내뱉기 싫었으나, 앞에서 저렇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으니 한번은 맞춰 줘야 할 거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창문에 팔을 걸며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 라헤안시를.”
라헤안시가 우헤헤 웃었다.
“그래! 날 두고 가면 어떻게 해! 바보, 바보!”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난데없이 펼쳐진 깨가 쏟아지는 형제들의 애정 행각에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리카르디스로서도 입 밖으로 내뱉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으나, 라헤안시가 코를 먹는 소리까지 내 가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름 보람을 느꼈다.
어쨌거나, 제 목숨 불사하고 따라나선 게 아니던가.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조차 까먹고 있었지만, 그의 합류는 반가웠다. 누가 뭐라 해도 일라베니아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이었다. 그 실체가 어찌 되었건,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라헤.”
늙은 당나귀를 재촉하던 라헤가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잘 왔다.”
아까와 달리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그걸 느꼈는지 라헤안시도 바보 같은 웃음을 지우고는, 조금 덜 바보 같은 미소를 띠었다. 가만히 그의 개털을 만지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곧 의문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허락은 맡고 왔나?”
라헤안시가 몸을 배배 꼬았다. 그의 뒤에서 베르움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은 되었다.
“자식 농사 폭삭 망하셨군, 황제 폐하께서도.”
“대륙이 죽어 가고 있으니 흉년이 들 수밖에.”
라헤가 낄낄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결국은 웃고 말았다.
* * *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대륙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건이 있기에 앞서 일라베니아를 떠났던 라고슈의 바이페렘, 관디테에게도 그 소식이 닿았다. 왕좌에 앉은 소녀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고 과일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관디테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딤라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몇 제르타예들이 염려스러운 기색을 내보이자 관디테가 과일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설마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이 있던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요즘 발타가 수상쩍게 행동한 걸 모르는 형제도 없을 것이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바이페렘.”
관디테가 과일 한 조각을 다시 입안에 집어넣었다. 가득 퍼지는 새콤한 맛에 말랑말랑한 소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으으…… 아무튼 이것은 예견된 일이었노라.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은 없다.”
“걱정되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이페렘.”
오가는 말을 듣기만 하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발언했다. 관디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엇이냐.”
“혹시나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전쟁 때문입니까?”
혹한의 땅을 이끌어 가는 열두 명의 제르타예 전원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왕실 아래에 묶여 있다고는 하나, 원래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야생마 같은 사람들이었다. 중요한 행사도 귀찮다고 안 오는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해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은 바이페렘의 고유 권한이었다. 하지만 라고슈의 군신 관계는 복종이 아닌 동맹에 더욱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기에, 바이페렘 또한 제르타예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때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때문에 이렇게 제르타예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것은 라고슈에 큰일이 날 때뿐이었으며, 제르타예들이 알기로 현재 라고슈 내에는 큰일이 없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전쟁을 시작했을 뿐이지.
남자가 지적한 부분 또한 그것이었다. 혹시 그들이 싸우는 판에 끼어들겠다고 말하려고, 우리들을 다 불러 모았느냐? 라는 것이었다. 관디테는 손수건으로 입을 쓱쓱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가 염려한 대로, 그렇다. 나는 오늘 일라베니아와 발타의 전쟁에, 라고슈가 참전하겠노라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제르타예를 불러 모았다.”
열두 명의 제르타예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참전이라니요, 바이페렘. 그냥 두면 서로 잡아먹다가 공멸하게 되는 최상의 결과가 펼쳐질 텐데요.”
“그리고 그때 나서서 꿀꺽해 버리는 거지.”
“그거 좋은 생각인데, 아. 바이페렘께서는 어느 편으로 참전하시려고 한 겁니까? 발타는 아닐 테고, 설마 일라베니아?”
“웩.”
누군가가 역하다는 듯 혀를 쭉 뺐다.
“차라리 라펜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지.”
딤라는 제르타예들의 말을 들으며 손으로 눈을 덮었다. 이 자식들을 어쩌면 좋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명, 두 명,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소리가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딤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딱. 유별나게 큰 소리도 아니었음에도 제르타예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반대.”
딤라가 말하자 다들 손을 우수수 들어 올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찬성.”
두 명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찬성의 이유를 들어 보니 가관이었다. 일라베니아를 돕는 척하다가 뒤통수를 치고 오겠단다. 딤라는 지팡이를 휘두르고 싶어졌다. 그 와중에 단 한 명 만이 손을 들지 않았다. 제일 먼저 발언한 남자였다. 관디테와 딤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갈라·제르타예. 형제는 왜 어느 쪽도 손을 들지 아니했나?”
“마음 같아서는 반대에 들고 싶었지만, 이런 중대한 사항을 의논도 하지 않으시고 ‘참전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딤라는 일라베니아의 콧대 높은 귀족들과 겸상을 하느니, 말똥 더미 위에 앉아서 식사를 하겠다는 쪽이었다. 그런 딤라가 일라베니아를 지지하는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
딤라가 갈라·제르타예의 가주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다른 이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보이느냐?”
“소심함?”
“결정 장애?”
“생각! 생각, 이놈들아!”
딤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소심함과 결정 장애라고 말한 남자와 여자를 두들겨 팼다. 다른 제르타예들이 딤라의 건강을 염려해 말리는 사이, 관디테가 갈라·제르타예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일라베니아에서 귀한 사람을 만났다.”
“그게 누굽니까.”
“일라베니아에 있는 갈라·제르타예의 핏줄들.”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주 상냥하고 귀여운 형제들이었노라. 특히 로젤린 경의 경우에는,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곤 했지.”
갈라·제르타예의 가주, 귈테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생? 언니가 아니라? 그가 모호한 표정을 하자 관디테가 흐흐 웃었다.
“냉혹한 추위만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 내리라 생각했으나, 씹다 뱉은 음식물같이 미적지근한 온도를 지닌 일라베니아에서도, 과연 제르타예는 제르타예였다.”
딤라에게 교육받더니 일라베니아에 대한 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혹여, 제 핏줄 때문에 일라베니아의 일에 관여하시려는 겁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딤라가 했다.
“아주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만, 가장 중요한 건 제르타예가 누구의 곁에서 타오르고 있느냐 아니겠나.”
“……2황자 리카르디스를 말씀하십니까.”
“라이노의 첫째 아들놈이 죽어 지금 가장 유력한 다음 대의 황제 후보이기도 하지.”
“그에게서 무얼 보셨습니까?”
그의 말에 딤라는 가만히 지팡이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부족하기는 하다만,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달은 달이라 희미하게 빛나더구나.”
딤라가 관디테를 바라보자, 소녀가 열두 명의 제르타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영원한 서약으로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결코 잊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결정은 오로지 라고슈만을 위한다. 갈라·제르타예.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싸운다고 하지만, 결코 그것은 그 둘만의 일이 아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지났던가. 그 사이 대륙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끼어 도무지 쓸 만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쓸어 버릴 것은 쓸어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긴다.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싹이 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 종국에는 라고슈까지 피어날 수 있도록.”
딤라가 뒤이어 말했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난 황자는 그나마 싹수가 있는 놈이었다. 설원의 월계수에서 어떻게 이렇게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놈이 있나 싶을 정도였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으나, 라이노 그 소인배가 제 권력 유지해 보겠다고 아들을 전쟁터로 밀어 넣었지.”
제르타예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딤라의 말에 호응했다.
“그놈을 놓치면 아마 100년 뒤쯤에나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 나올 게다. 일라베니아의 영향력은 대륙 전역에 미친다. 단순한 남의 나라, 옆 나라의 권력 다툼이 아니란 말이다. 또한, 발타 놈들이 일라베니아의 추악한 치부를 들춘 상황이다. 일라베니아는 전례 없이 휘청이고 있어. 이번 전쟁에 대륙의 명운이 달렸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슈 왕실이 지원하는 것은 일라베니아가 아닌,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가 될 것이다. 그놈과 함께 발타를 쳐 내고, 일라베니아의 썩은 물을 교체한다.”
딤라의 말에 아까까지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제르타예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장난기 어린 모습들은 전부 사라지고, 혹한의 땅을 누비는 강한 전사들만이 남았다.
열두 개의 꺼지지 않는 촛불은 각 영지로 흩어져 병력을 소집하고 전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섰다.
* * *
일라베니아 중부.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오늘 머무르게 될 영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대지는 나무와 풀이 말라붙어 있음에도 황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닦인 도로와 거리를 돌아다니는 분주한 사람들. 반듯한 건물 굴뚝에서 퍼져 나오는 따스한 연기까지.
추위에 잠든 희끄무레한 땅을 석양이 뒤덮자 황금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로젤린은 부쩍 성장해 다른 군마들보다 몸집이 훌쩍 커진 초콜릿의 위에서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발돋움을 했던 곳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령, 에스터.
저 멀리 가시같이 삐쭉삐쭉 솟아 있는 성의 첨탑이 보였다. 가슴 안쪽에 성에가 끼는 듯 그리움이 번졌다.
붉은수레바퀴 성에 다가가던 하얀밤 기사단원과 리카르디스를 맞이하러 온 이는 조만간 백작위를 계승할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였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영광을 그대에게.”
로젤린도 칼릭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안 본 사이 더 말랐는지, 인상이 날렵해져 예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쩐지 죽은 페르탄이 생각났다. 이 거대한 영지와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칼릭스가 날카로운 인상을 누그러트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두 남매는 나란히 이동했다. 잘 지냈느냐 안부를 주고받는데, 칼릭스가 모호한 방식으로 말을 끌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용건을 꺼내지 못하고 빙 둘러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로젤린이 참지 못하고 묻자 칼릭스가 끙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칼릭스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예전 같으면 무얼? 하고 물었겠으나, 로젤린은 사라진 주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 로젤린의 어머니. 그녀가 제 딸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부고 때문에 많이 힘드신 상황이라…….”
“응.”
칼릭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전과 같이 누님을 맞이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로즈, 로즈.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던 마른 여인이 생각났다.
“응.”
로젤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칼릭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2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상을 치르는 중이라 집 안이 번잡하여 불편함을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시는 동안 편안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에델바이스는 백작 부인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말라 있었다. 수척한 낯빛이 그녀를 더 야위어 보이게끔 했다.
“축복을 그대에게, 백작 부인. 환대에 감사하오. 오늘 하루 잠깐 머무르고 갈 예정이지만, 일행이 많아 피해를 끼칠지도 모르겠군.”
“아닌 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칼릭스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낯빛이 좋지 않은데,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을 듯하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에델바이스는 칼릭스에게 손님 안내를 맡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뒤돌아서서 무언가를 찾던 그녀와 로젤린의 눈이 마주쳤다.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곧 계단 위로 사라졌다.
성의 모든 방과 연회장, 공간이 넉넉한 곳은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지낼 수 있게 간단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인과 하녀들을 따라 성에 따라온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흩어졌다.
해가 저물었다. 로젤린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서 목욕하고,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음식을 섭취한 후 자신의 방에서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로 방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의 허락에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에델바이스였다.
“잠시 시간 괜찮니?”
애써 웃고 있는 낯이었다. 로젤린은 가만히 에델바이스를 보다가 그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에델바이스는 시선을 떨군 채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얘기는 대충 들었단다.”
그녀는 손톱을 문지르거나 살갗을 비비는 행동을 했다.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그 말 이후 다시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구나.”
에델바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로젤린을 훑었다. 머리, 이마, 눈, 코, 입…… 발끝까지. 에델바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왼손 좀 줘 보겠니?”
로젤린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에델바이스는 샅샅이 로젤린의 손을 훑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끝에 작게 난 점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로젤린에게 다가온 에델바이스가 성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 아래에 작은 흉터가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풀썩 앉아서는 그녀의 헐렁한 바지를 걷었다. 정강이를 따라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은 그녀가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래…….”
흐느끼는 소리가 거칠어졌다.
“한 군데도 다르지 않은데 어떻게 내 아이가 아니야…….”
그녀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에델바이스를 부축해서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발작하듯 로젤린의 손을 떨쳐 내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보였다. 혐오감도, 두려움도 아닌 오직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는 눈이었다.
한참 뒤, 에델바이스가 비틀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어지러운지 마른 손으로 이마를 짚고선 헐떡였다. 로젤린은 말없이 그녀가 숨을 고르길 기다렸다. 에델바이스는 등받이에 눕듯이 기댄 채,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투두둑. 코끝까지 습한 냄새가 나더라니, 비가 내렸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델바이스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고슈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꽃 이름을 붙여 주는 경우가 많단다. 추운 곳이라 꽃을 보기 힘들거든. 어쩌다 한번 보게 되는 날이면 얼마나 놀랍던지. 그 아름다운 색, 앙증맞은 크기. 너무 예쁘고, 너무 소중하지 뭐니. 그래서 내 딸에게도 꽃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어. 비록 일라베니아에서는 고리타분하다고 받아들여질지언정.”
로젤린이란 꽃 이름은 없었다. 아마 여러 사정에 부딪혀서 애칭만이라도 꽃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리라. 로젤린은 자신을 로즈, 로즈. 하고 부르는 에델바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너무 예쁘고, 너무 소중하지 뭐니.]
정말 그런 목소리였다.
“조금 더 멋있는 이름을 지어 줄 걸 그랬나? 로젤린이 제 이름을 싫어했거든.”
에델바이스는 지친 듯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이마를 덮고 있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는 길을 응원해 줄 걸 그랬나. 어미라는 사람이 볼 때마다 그렇게 뭐라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
그녀의 손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같이 있을 걸 그랬나. 그렇게…….”
에델바이스는 위험해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행복하고, 빛났던 모든 시간이 후회로 뒤덮여, 색이 바래어진 기분에 나는 지금…… 너무나도, 비참하구나.”
로젤린은 걸음을 돌려 담요를 가지고 돌아왔다. 에델바이스의 무릎에 담요를 덮자 그녀가 흠칫 놀라서 눈을 가리던 손을 떨어트렸다. 무릎을 꿇고 담요를 정리 중이던 로젤린과 그녀의 눈이 딱 마주쳤다. 에델바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착하구나.”
그녀가 물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참 착해.”
에델바이스가 손으로 눈가를 훑었다.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에델바이스가 말을 꺼낸 것은 대략 십 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의 이 고통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손을 꼭 마주 쥐었다.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하지만 나의 잘못 또한, 아니야.”
그녀의 상체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에델바이스는 마주 쥔 손 위에 이마를 대고서 천천히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나는 너를 보는 게 몹시 괴롭구나. 앞으로도 너를 볼 때마다 내 행복했던 지난 시간마저 후회하게 되겠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단다.”
숨을 몰아쉬던 에델바이스가 천천히 일어났다. 로젤린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쳤다. 에델바이스는 지쳐 보였다. 눈동자에는 흐릿하고 혼몽한 빛만 감돌 뿐이었다.
“건강하렴. 전쟁에서도 다치지 말고. 그리고.”
그녀가 로젤린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아주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보자꾸나.”
에델바이스가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로젤린에게서 멀어졌다. 로젤린은 이것이 그녀가 건넨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다.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웠다. 자신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인.”
에델바이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로젤린이 그녀의 야윈 뒷모습에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건강하세요.”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달칵 문이 열리고, 달칵 다시 닫혔다. 방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 * *
로젤린은 익숙한 침대에 파묻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코를 킁킁거리니 내리는 비 냄새가 한껏 들어왔다. 그녀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소리였다.
한데 지금은 피부에 닿는 끈적한 공기가 짜증 났다. 잠들 즈음이면 톡 소리를 내서 정신을 깨우는 빗소리가 거슬렸다. 내일 또 행군을 해야 하는데, 진흙 때문에 초콜릿이 고생할 생각을 하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런저런 일과 공기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가며 투덜거리던 로젤린은 자신의 사고가 어느새 아까의 대화로 흐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봐도 결국은 돌아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노력할 수도 없는 일이고,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바뀔 수 없는 일이란, 피치 못한 일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정말 너무나도…….
똑똑.
천장을 쳐다보기만 하던 로젤린은 급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누가 방 앞을 지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누구와 만나 대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
로젤린은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목소리의 잔상을 따라 스르륵 움직였다.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달칵.
열린 문 틈새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해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거라 로젤린은 확신했다. 문을 열자마자 은은하고 청량한 향이 밀려왔다. 리카르디스였다.
“들어가도 될까.”
진군하는 내내 볼 수 없었던 편안한 옷차림새였다. 냉엄한 표정으로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그가 은색 갑주를 벗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딱 다물린 입술,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와 온몸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날카로운 기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 분위기가 다르구나. 로젤린은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더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카르디스는 야심한 시각, 다 큰 아가씨의 방에 들어가도 되냐는 대범한 요청을 한 것치고는 무척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들어올 생각은커녕, 방안을 흘끗흘끗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아차 하고는 발걸음을 옮기긴 했으나, 목을 가다듬는다든가, 손으로 아랫입술을 구깃구깃하게 만진다든가 하는 갖은 쑥스러움을 동반한 채였다.
로젤린은 자신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는 리카르디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온 적 없는 이가 서 있는 광경은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한 채 멈췄다. 무얼 보나 싶어 로젤린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떨궜다. 하얀 맨발이 보였다. 리카르디스의 방문에 놀라 슬리퍼를 신는 것도 까먹은 탓이었다. 예전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맨발로 성을 활보했다지만, 지금은 예법에 통달했다 자부하는 로젤린으로서는 참 민망한 일이었다. 발이 절로 꼼지락거렸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침대 아래에 있는 슬리퍼를 가지고 왔다. 건네받으려고 로젤린이 손을 뻗었으나, 슬리퍼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더 아래로. 로젤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슬리퍼를 쥔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둔한 로젤린이 봐도 그가 뭘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직접 신발을 신겨 주려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너무 충격받아서 리카르디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울 뻔했다. 다행히도 그게 더 실례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에 멈출 수 있었다.
“저, 전하.”
로젤린은 당황하는 제 목소리가 낯설어 더욱 당황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기어코 슬리퍼를 신겨 주고서야 일어났다.
“신고 다녀야지. 다치면 어쩌려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가슴팍에 시선을 둔 채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낮은 테이블을 끼고 앉았다.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작은 트레이에는 투명한 찻주전자와 유리잔, 그리고 찻잎을 담아 두는 나무 상자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차를 드시려는 건가?’
그런데 물이 없었다. 그리고 이 늦은 밤에 갑자기 차를? 뭘까 싶어 바라보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쓸었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차를 마시고 싶은데, 그대가 깨어 있을 것 같아서.”
리카르디스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얘기했다.
“……그냥 그대와 같이 마시고 싶어서 왔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걸 문을 두드리고서야 알았어. 내쫓을 건가?”
약간 불쌍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로젤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젓자 리카르디스도 마주 웃었다.
“그런데 물이 없군요. 가서 떠올까요?”
“……아니, 이건. 특별한 차라서.”
리카르디스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체 얼마나 특별한 차이기에?
리카르디스가 비어 있는 투명한 찻주전자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우선, 빗물을 받아야 해.”
그러고는 딱딱한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거칠게 열었다.
굳이 빗물을? 이렇게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로젤린도 자리에서 일어나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돌출된 부분에는 꽃 화분 몇 개가 올려져 있었고, 찻주전자는 그 옆에서 같이 비를 맞는 중이었다.
투두독.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가 투명한 유리에 달라붙었다. 한 방울이 더 붙으니 무거운지 그제야 스르르 안으로 떨어졌다. 로젤린이 집중해서 바라보는 모습에 리카르디스가 남몰래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맑은 빗물이 담긴 찻주전자를 든 채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로젤린도 창문을 내리고 리카르디스를 따랐다. 큰 램프 위에서 물은 서서히 온도를 높여 갔다.
로젤린은 흔들리는 불빛을 보다가, 이따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좀, 번거롭지.”
“아뇨. 재밌습니다.”
붉은수레바퀴 성의 하녀들과 하던 소꿉놀이도 생각났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말로.”
리카르디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나무 상자를 열었다. 짙은 청색의 마른 꽃잎이 담겨 있었다. 그가 조그마한 집게로 꽃을 집어 잔의 중앙에 놓았다. 그러고 유리잔의 표면을 따라 따뜻해진 빗물을 흘렸다. 투명한 물에 짙은 남색 빛을 띠던 꽃의 색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찻물의 색이 몹시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분이 흐른 뒤, 잔에 담긴 물이 아름다운 남색으로 물들자 리카르디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잠시 눈 좀 감고 있으면…….”
“예?”
“누, 눈 좀.”
로젤린은 그의 요청에 따라 눈을 감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코끝에 상쾌한 과실 향이 느껴졌다.
‘레몬?’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리카르디스가 음흠흠 큼큼하며 심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떠도 된다.”
“와…….”
아까까지 푸른 빛에 가까운 남색이었던 꽃차의 색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분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색이 달라진 거지?
잠시 의아해하던 로젤린은 과거에 헤사가 말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푸른색의 블루멜로우라는 꽃차는 레몬즙을 떨어트리면 분홍색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로젤린이 감탄하며 ‘블루멜로우인가요?’ 하고 묻기 바로 직전, 리카르디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이야.”
“예?”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인 채, 이마에 손등을 맞대고는 다시 한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의 찻잔에, 행복해지는, 요정의, 마법을, 걸었어.”
“…….”
로젤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멈췄다. 아니요, 전하. 이것은 블루멜로우라는 꽃차이며, 차 안에 들어 있는 특정 성분이 레몬즙과 만나 분홍색으로 변한 겁니다. 하고 미처 말할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진정 이 현상을 마법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자신과 에델바이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는 것 또한.
칼릭스가 말해 준 것일까. 그래서 걱정이 되었던 걸까. 머릿속으로 찻주전자를 비장하게 들어 올리던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몰래 숨겨 온 레몬즙을 잽싸게 뿌리고 어딘가로 숨겨 놓았을 거라 생각하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물 아래 잠겨 있는 것 같은 습하고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잠기게 했던 물이 레몬을 만난 블루멜로우의 색처럼 분홍색으로 물드는 듯했다.
로젤린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마시자 따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은은하면서도 시큼한 맛이 너무 웃겨서 로젤린은 블루멜로우 차를 뿜을 뻔했다. 그녀는 자아를 가지고 나서 이렇게까지 깔깔깔 웃고 싶었던 때가 없었다.
속이 간질간질하고, 귀에는 열이 몰리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붕 뜨는 기분. 이게 뭘까.
[행복해지는, 요정의, 마법을, 걸었어.]
어쩐지 답을 알 것만 같았다. 로젤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리카르디스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효과가 굉장합니다.”
손등에 이마를 괸 채 자괴감에 빠져 있던 리카르디스가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래?”
“예. 솔직히 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마시자마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비밀이야.”
그렇게 말한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던 수치심을 걷어 냈는지, 한결 가벼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사기를 쳤다는 걸 자각한 리카르디스는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하던 걸 멈추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콧잔등을 쓸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대가 기분이 좋지 않고, 슬플 때마다 내가 마법을 걸어 줄게.”
로젤린은 손안에 따스한 찻잔을 쥐고 그를 응시했다.
“그대가 행복해지게.”
그저 이 말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한 모금 더 차를 마신 후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