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새벽이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황실의 석영 성을 포함해 수도 거리를 뒤덮었던 크고 작은 화재들은 사람들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 내린 단비로 끝을 맞이했다.
잿빛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퍼졌다.
“여기, 누가 제발 도와주세요!”
아주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은 고삐를 잡아 멈췄다. 병사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리를 감지하지는 못했으나, 로젤린과 함께 있던 몇 시간의 경험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구조 요청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수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인들의 난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안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에, 황실 기사들 일부가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중에는 로젤린도 있었다.
물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연회장의 사건을 주도한 범인은 모두 수도를 떠났지만, 그렇다고 그게 모든 위험이 없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전에 없던 단호한 태도로 로젤린에게 치안대의 지원을 명령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구하라고.
로젤린은 밤새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 불길도 잡혀 갔으나,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수백이고, 다친 사람은 그의 배가 넘었다. 화재와 괴인들의 난동으로 건물은 부서지고 무너졌다. 간밤보다 훨씬 조용해진 아침이라 해도 로젤린의 귀에는 갖은 신음과 비명, 울음소리가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이 걸음을 옮기자 병사 몇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무너진 건물 앞에서 사람들이 엉엉 울고 있었다. 로젤린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를 뒤로 넘기고 말에서 내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로젤린 경, 로젤린 경! 제발!
로젤린은 한숨을 후 쉬고는 무너진 벽에 다가섰다.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약한 신음이 들렸다. 생존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거뭇하게 물든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장정 다섯이 모여도 들지 못하고, 밀어도 움직이지 못하던 거대한 건물의 잔해가 가볍게 들렸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로젤린 경!”
유명한 로젤린의 활약을 밤새 지켜본 탓인지, 앳된 병사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초롱초롱하게 담겨 있었다.
로젤린은 쫄딱 젖은 채, 미처 성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반쯤 부서진 건물의 지붕 아래에서 비만 겨우 피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체력을 지닌 그녀라고 해도 지칠 만큼 고된 일정이었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건이 벌어질 줄이야.
로젤린은 나무 상자 위에 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병사들은 그녀에게 몇 마디 더 붙이고 싶었지만, 상대가 너무 지쳐 보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미련 가득한 목소리로 경례한 후 발길을 돌렸다.
“어? 이게 여기도 있네요. 꽁지 빠져라 도망치는 와중에 이럴 정신은 어디 있었답니까?”
돌아서는 어린 병사가 툴툴대며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쓰러진 과일 바구니 밑에 있던 종이는 여태껏 내리는 비에도 귀퉁이만 젖어 있었다.
“협력자가 있는 거 아니겠냐? 마인이겠지. 하여간 더러운 놈들 같으니.”
뒤돌아선 남자들의 뒷모습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자의 악관절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더러운 놈들. 한 번 더 욕설을 내뱉었다. 로젤린은 종이에 베인 듯 섬뜩한 기분에 잠시 몸을 굳혔다.
“그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병사들이 화색을 지으며 뒤돌아보았다. 진득하게 붙어 오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예! 이게 무엇이냐면!”
“제가 주웠습니다! 예, 로젤린 경! 여기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발타 그놈들이 얼마나 뻔뻔한지 황성과 거리에 그 사달을 내놓는 것도 모자라 일라베니아를 모욕했지 뭡니까!”
남자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왔다. 로젤린은 자리에 앉은 채 살짝 눅눅해진 종이를 건네받았다.
발타 욕을 한껏 퍼붓던 남자들은 지나가던 상관에게 걸려 모조리 끌려가야 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놀고 앉았어?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상관도 로젤린에게 다가와 수줍게 경례하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떠나갔다.
홀로 남은 로젤린은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갖은 욕설과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법을 빼고 요약하자면, 축복의 밤이 떠오르던 먼 옛날. 일라베니아가 홀로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마인을 음해하였다는 것.
또한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성력뿐만 아니라 마력도 필요했기에 마인들을 황실의 감옥에 오랜 세월 감금하고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 도망친 마인들이 모두 죽어 버리게 된 탓에 더 이상 축복의 밤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진실을 숨긴 비겁자 일라베니아여! 거짓된 영광을 내려놓고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로젤린은 마지막 문장에 시선을 오래 두다 중얼거렸다.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멍하니 보고 있던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가 돌연 사라졌다.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종이의 행방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그녀의 앞엔 마찬가지로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인간 남자 형태의 마카롱이 보였다. 그는 어디서 주워 입은 것인지, 꽃이 수놓아진 연 분홍색 여성용 상의에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복식의 조화에 큰 관심이 없는 로젤린의 눈에도 괴악한 옷차림새였다.
마카롱이 한쪽 손을 허리에 놓고 삐딱하게 서서는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중간중간 감탄사를 넣던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보면 지들이 당한 줄 알겠어.”
그러고는 종이를 두 번 접어 주머니 안에 쏙 넣었다.
“왜 뺏어가.”
로젤린이 마카롱의 허벅지를 찰싹 쳤다. 비에 젖은 가죽 바지에서 아주 찰진 소리가 났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막힌 소리가? 로젤린이 가죽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탐냈다.
마카롱이 자신의 옷자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벅벅 닦았다.
“이게 진흙에서 뒹군 곰이야, 거지야. 분간을 할 수 없어. 꼬질꼬질, 드러워 죽겠네. 어디 가서 나 안다고 얘기하지 마, 창피하니까.”
곰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었다. 보통 평범한 선택지를 넣어 주지 않던가? 로젤린의 눈에 불만스러운 빛이 한껏 담겼다. 마카롱은 피식 웃고는 바닥에서 뒹구는 사과 두 개를 집어 내리는 빗물에 씻었다. 그러고 휙, 로젤린에게 사과 하나를 던졌다.
아삭, 사과를 한입 베어 먹은 마카롱이 반쯤 부서진 문가에 기대었다. 비 내리는 바깥 풍경만 보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키 큰 남자가 반쯤 가린 좁은 문틈 사이의 풍경을 응시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핏물과 잿물이 뒤섞인 바닥은 엉망이었다. 로젤린은 그 장면을 멍하니 흘리며 사과를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굴렸다. 팔꿈치에서 툭 튕긴 사과는 다시 로젤린의 손으로 들어왔다. 빗줄기가 만드는 일정한 크기의 소음이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혔다.
로젤린은 사과를 두 손으로 잡아 아삭아삭 씹었다. 입안 가득 상큼한 과즙이 퍼졌다. 로젤린은 그제야 자신이 굉장히 허기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사과를 씹으며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디에즈와 헤어지고 돌아오던 때였다. 어둠 속에서 아름다운 성이 불타고, 고개를 들어 보면 시릴 정도로 하얀 달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명한 기시감이 들었다.
[……영영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로젤린. 이미 물은 흐르기 시작했고,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아주 오랜 옛날의 기억일지도 몰랐다.
* * *
황실은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 제국의 장자가 죽고, 귀족들이 살해당했으며, 그 주범은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연회장 안에는 많은 신관이 있었으나, 쓰러진 모두를 살려 내지는 못했다. 발타의 비수는 급소를 스쳐 지나가는 법이 없었고,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리카르디스라고 해도 죽은 자를 살려 내는 기적을 일으키진 못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수도는 아직 혼란스러웠다. 그 탓이었을까. 적아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생겨났다.
그날.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만이 ‘디에즈’라는 제국의 배반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카브도, 3왕녀 간제나 고위 귀족 중 그 누구도, 하다못해 디에즈도 잡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나마 납치되었다 알려진 체리트 황녀를 찾아내긴 했지만…….
체리트는 디에즈가 주장했던 것처럼 위험하고 먼 곳에 있던 것이 아닌, 황실 숲에서 고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황실 숲에 대체 왜 있는지 모를 아기자기한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쿨쿨. 동화책 한 장을 떼어다 현실에 가져온 듯한 장면에 사람들은 많이 당혹스러워했다. 디에즈 황자는 애초에 그녀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해칠 생각도 없던 것이다.
체리트 황녀를 구한 일이 험난한 산과 강을 건너, 암살자들과 전투 끝에 이뤄 낸 것이 아니라 그런지, ‘체리트 황녀 전하 구출’ 건은 대수롭지 않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로젤린은 사람들에게 ‘디에즈와 하카브를 놓친 자’일 뿐이었다. 그 말이 ‘디에즈와 하카브를 놓아준 자’라고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장 하카브에게 터트리지 못한 많은 이들의 분노가 로젤린에게 쏠렸다. 연일 계속되는 회의에서는 조금 멀리 있는 전쟁보다 가까이 있는 로젤린의 죄를 명백히 밝혀내기를 더 바랐고, 열 받은 리카르디스가 여러 번 테이블을 뒤엎었음에도 사태는 진정될 줄 몰랐다.
계속해서 감추는 걸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게 아니냐. 떳떳하면 나와서 해명하라는 말만 되풀이될 뿐이라 리카르디스는 여러 조건을 걸고 딱 한 번 회의실에 그녀를 대동하기로 결정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로젤린은 잠결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무언가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로젤린은 벽에 걸린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꿈은 길고도 짧았다.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냄새. 어두컴컴한 공간, 저 멀리에서 보이는 희미한 횃불의 빛. 끈적한 철창, 곰팡이와 이끼가 낀 바닥과 벽의 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덜덜 떨 수밖에 없던 그때의 감정과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눈을 뜨니 머리는 혼몽했고, 잠에서 덜 깬 몸은 축축 늘어져 현실이 도리어 꿈같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눈물도 닦지 않고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코를 훌쩍이고 있는 사이, 멀리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똑똑, 문을 두드린 소년이 정중하게 “들어가겠습니다.” 얘기하고는 문을 열었다.
아무리 깊게 잠들어도 타인의 기척을 예민하게 읽어 내는 로젤린은 언제나 헤사가 깨우기 전에 일어났다. 그래서 헤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먼저 일어나 계셨네요.”라는 말로 아침 인사를 대신 할 예정이었는데…….
로젤린과 눈이 마주친 헤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얼어붙어 십 초 정도 숨을 쉬지 못했다. 너무 충격받아 눈알도 못 굴리던 소년은 멍하니 다가가 그녀의 입에 아침 사과 한 조각을 물려 주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고, 로젤린은 눈물을 그쳤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유령처럼 방 안을 떠돌아다니며 몸에 익은 청소만 관성적으로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모,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당도 높은 사과…….”라며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몹시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시트를 끌어당겨 아직 덜 마른 눈물을 문질렀다. 헤사가 가져온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헤사가 챙겨 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몸단장을 끝내고 나니 헤사가 머리를 정리해 묶어 줬다. 소년은 아직까지도 흘끗흘끗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로젤린은 헤사의 시선을 뒤로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엉망이던 아까와 달리, 평소 같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꿈속에서부터 계속 들러붙어 있던 감정만은 계속해서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헛소리하면 그냥 무시해.”
리카르디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최선이란 걸 알고 있으나, 로젤린을 물어뜯을 준비가 끝난 승냥이 굴로 직접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뜩잖은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쯧, 혀를 차고는 노망난 영감들 같으니, 라고 악담했다가 아차 하고 로젤린의 눈치를 살폈다. 로젤린은 기분이 저조한 와중에도 그를 보며 살짝 웃을 수 있었다.
“어떤 말이 헛소리입니까?”
“일부러 놓아준 게 아니냐. 이런 거.”
“아, 정말 헛소리네요. 알겠습니다, 그냥 무시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와서 박히는 날카로운 눈빛들을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노려보듯 둘러보았다.
“오늘은 부디 그 돌림노래 같은 지겨운 얘기에서 벗어나 성과를 얻고 돌아갔으면 좋겠군. 어제의 약속을 잊지 않길 바란다. 강압적이고 난폭한 어투, 여러 명이 질문을 겹치며 추궁하는 식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기사는 죄인이 아니고, 순수하게 그대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 친히 걸음 한 것이란 걸 유념해라.”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질문은 리카르디스가 대충 이러한 경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고 짚어 준 예상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디에즈 전하가 로젤린 경 당신만 독대하길 바라지 않았나, 무슨 얘기를 했나, 체리트 전하의 위치를 들었으면 디에즈 전하를 제압해도 되는 게 아니었나, 그 후 하카브를 쫓으면 되는 일 아니었나, 설마 모종의 거래를 하고 놓아준 거 아니냐. 등등.
시선은 찌를 듯 예리하고, 어조는 칼날 같았다.
로젤린은 세간에 떠도는 악의 어린 소문들이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 중이었다.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보지도, 알지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설명하면 될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 수많은 시선 가운데 자신은 이미 죄인이었다. 로젤린은 그들이 바라는 대답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써 눌러두었던, 꿈속에서부터 이어받은 감정이 널뛰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무언가가 퍼져 나갔다. 검고, 약하고, 작은 것들이 온몸을 뒤덮어, 몸 위를 기어 다니고, 살갗을 물어뜯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쾌한 감각에 로젤린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그녀 때문에 회장이 술렁였다.
“……경?”
걱정하는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로젤린은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감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디에즈 전하와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에 황녀 전하의 위치만을 가르쳐 주며, ‘파편’을 먹여 두었다고 했다. 일라베니아 황실에 내가 아는 또 다른 마인이 없기에, 우선적으로 황녀 전하의 치료를 위해 돌아온 거다.
로젤린은 무미건조하게 응답했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은 누군가가 펄펄 날뛰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그냥 수면제를 복용한 것으로 판명 나지 않았소!”
“디에즈 전하께서 ‘파편’을 먹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주할 시간을 벌어야 하니 거짓말을 하셨겠죠.”
또 다른 남자가 질문했다.
“하카브 왕자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관심을 둔 인물이 경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원하는 대답이 빤하게 보였다. 로젤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흘렸다. 그녀의 실소에 회장이 다시 한번 싸늘해졌다. 로젤린은 개의치 않고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다 하더군요.”
“공적인 자리 이외에 접촉이 있었나?”
“없습니다.”
재빠른 대답이었다.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태연한 거짓말에 리카르디스는 내심 감탄했다.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거짓말도 잘했다.
가만히 이 토론을 지켜보던 젊은 귀족이 질문했다.
“일부러 놓아주신 것은 아닙니까, 로젤린 경?”
로젤린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남자의 질문을 헛소리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도망갈 수도 있던 디에즈 전하께서 굳이 경을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들을 떼어 놓고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적인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는 얘기를, 경의 입으로만 전해 들었지요.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혼자였고, 디에즈 전하며, 발타의 그 어떤 누구도 잡아 두지 못했습니다. 구한 것은 애초에 위험하지도 않았던 황녀 전하뿐.”
회의실에 모여 있는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의문을 품지 않으려야 품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결백을 증명할 만한 사람이나 물건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로젤린은 눈을 한번 감고, 숨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꾹 누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곧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는 결백합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말밖에 할 줄 모르시는 것도 아닐 테고.”
이쯤,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고 만류하려 했으나, 로젤린이 대답한 게 먼저였다.
“그렇다면 제가 결백하지 않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공간에 잠시간 정적이 일었다. 로젤린을 공격하던 남자는 잠시간 입꼬리만 씰룩였다.
“모든 정황이…….”
“어떻게 정황만으로 사람을 죄인이라 확정 지으려 합니까. 저의 결백이 저의 증언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처럼, 저의 죄 또한, 정황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로젤린이 짧게 혀를 찼다.
“증거부터 가져오시고 이 논쟁을 계속하든가 말든가 하시죠.”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던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내 기사가 저렇게 말을 잘해? 순간 과거 ‘로젤린’을 보는 것만 같았다.
“로젤린 경…… 그대가 말하는 요지는 알겠네만, 무례하군.”
로젤린은 나이가 지긋한 귀족을 바라본 후,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몸을 곧게 세웠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난데없는 충성 맹세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로젤린은 다른 사람들도 익히 따라 말할 수 있을 법한 서약문을 줄줄 외웠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로젤린은 가슴에 두었던 주먹을 다시 등 뒤로 하고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한 번씩 쭉 마주 보았다.
“그렇게 제 목숨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제 목숨을 받으셨습니다. 단순한 정황, 제가 마인이라는 이유에서 생겨난 얄팍한 의심 정도로 폄하 당할 만큼 가벼운 맹세가 아닙니다.”
“아니, 그 맹세야…….”
로젤린이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못 알아먹은 귀족 한 명이 반박하려 반쯤 몸을 일으켰다. 해 봤자, 맹세 그거야 어기면 그만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리라. 리카르디스가 느릿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설마 맹세쯤이야 어기면 그만 아니냐는 발언을 하려던 것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군. 그쪽이야 맹세를 밥 먹듯 어기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기사들은 그렇지 않은 터라.”
남자는 정말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입을 합 다물었다. 리카르디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그 의심은 목숨을 걸고 맹세한 로젤린 경에 대한 무례이고, 또한 그녀의 목숨을 받은 나에 대한 무례다. 이 자리에 로젤린 경이 참석한 것은, 요즘의 불안 속에서 그 정황이 한편으로 나쁘게 받아들여지리란 사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절하게 해명이 아닌 설명을 하러 왔지. 로젤린 경은 검은달의 암살자를 제압하며 검은 달을 가르겠다는 맹세를 증명했고, 그대들이 충격받아 따뜻한 침대에서 요양하는 동안 밤새도록 거리를 뛰어다니며 백성들을 구해 약한 자를 보호하겠다는 맹세 역시 증명했다. 티가드의 수많은 백성이 로젤린 경을 칭송하는 소리는 듣지 못한 건지 듣기 싫은 건지 모르겠군.”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사건 당일, 그 혼란한 와중에 자신더러 거리의 상황을 수습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눈치챘다. 홀로 디에즈를 따라갔고, 누구도 잡아 오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파문이 일어나리라, 리카르디스는 그때부터 예상했던 것이다.
“백성들은 무지하기에 속은 거고, 그대들은 배운 게 많아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 배운 사람답게, 정황만으로는 죄를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빠른 시일 내에 깨닫고 증거부터 들고 와라. ‘그런 행동을 했으니 그런 것이나 다름없다.’ 따위의 어린아이 떼쓰는 말은 말도록.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때에, 이런 쓰잘머리 없는 건수로 시간을 얼마나 허비하려는 셈이지? 발타 측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걸 보니 그대들은 죄다 간자인가?”
“저, 전하!”
귀족들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대충 가늠이 가는가 보군. 지금 나와 내 기사가 딱 그런 마음이니 잘 되새기길 바란다. 자, 슬슬 마무리 지어 볼까. 그대들은 의문이 있었고, 로젤린 경은 충실히 답했다. 이제부터는 그대들도 신중히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남자들은 입가를 가리며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싸늘한 정적 속에 회의는 생산성 없는 말이 몇 번 더 오고 가다가 마무리되었다.
회장이 텅 비었다. 로젤린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리카르디스의 눈을 애써 피했다. 그가 왜 쳐다보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디에즈와 대화를 나누고, 그가 준 작은 조각을 흡수한 후부터였다.
변화의 이유를 알고 있는 자신도 당황스러운데 리카르디스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었다. 그에게라도 디에즈와 나눈 대화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결국은 또 말하지 못했다.
[……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로젤린은 모호한 말로 후일을 기약했었다. 리카르디스는 ‘알겠다’고만 답했다. 그것이 더욱 미안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한 로젤린은 결국 한숨만 토해 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눈부셨던 과거의 맹세가 서서히 빛바래고 있음을 무슨 수로 그에게 말한단 말인가.
* * *
마침 교대 시간이었던 터라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수군수군, 저들끼리 얘기하며 로젤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를 타고 흐르는 부정함이 어딜 가겠어? 남자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더러운 것들 같으니.]
지하 감옥의 병사가 침을 퉤 하고 뱉는 소리가 겹쳐 울렸다.
탁.
로젤린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크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위협하지 않았음에도, 남자들은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흩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주위에 수군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반면, 심장은 빠르게 박동하며 가열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당장 어딘가에 터트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로젤린은 한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탁, 탁. 기사답게 규칙적이고 정돈된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요, 로젤린?]
디에즈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 한 점 없어 공기마저 멈춘 것 같던 순간이었다.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나쁜 짓’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말하는 디에즈의 표정은 평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숨쉬기 버겁고,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기억하지 못할 뿐. 하지만 사절단 이후로 조금씩 떠올릴 수 있었겠죠. 그때의 전투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분노의 파편을 받아들였으니까요.]
로젤린은 디에즈가 말하는 잃어버렸던 분노가 마독 ‘파편’, 정확히는 파편에 섞여 있는 마수의 마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파편을 흡수한 후부터 이상한 꿈을 꾸거나, 황실에 대한 거부감이 짙어졌음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앉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주 자그마한 계기면 충분합니다.]
그 말을 하고서 디에즈가 꺼내 든 것은 과거 마카롱이 발타에서 훔쳐 왔던 것보다 큰 마수의 결정이었다. 달빛을 받은 검붉은 결정의 빛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이건 당신이 잠시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는 것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흡수하지 않는다고…… 영영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로젤린. 이미 물은 흐르기 시작했고,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발치에 결정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이 결정을 따라 이동했다. 시야 밖에서 디에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게 될 겁니다. 그렇길 되기 바랍니다. 부디. 그 망설임이 당신의 발목을 잡아,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멈춰 서게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디에즈는 다람쥐가 떨어트린 돌멩이에 한 대 맞고서도 평온한 표정으로 떠났다. 마카롱은 모든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디에즈가 준 결정을 회수하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젤린은 풀잎 사이로 빛나는 결정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시간이 지나, 꿈에서 흘린 눈물이 차고 넘쳐 현실에서 흐르기까지 일주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결정의 힘뿐만 아닌 다른 요소도 작용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어둠 속 불타는 하얀 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추는 아름다운 하얀 달까지.
과거와 비슷한 상황들은 로젤린이 잊고 있던 기억을 깨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이따금 흔들고는 했던 격렬한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변할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자신을 둘러싼 이 눈빛들이, 적의가, 불합리한 분노가,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자들의 모든 행동이.
‘짜증 나.’
로젤린은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계속 달렸다.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 해도 결국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았지만, 어디라도 좋으니 달아나고 싶었다.
사람들이 시선이 닿지 않을 곳, 숨을 수 있는 곳.
로젤린은 단숨에 달려, 벽을 타고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헤사가 미리 따뜻하게 데워 놓은 방 안의 공기가 훅하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로젤린은 눈을 찡그리며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누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고개만 반대로 휙 돌렸다. 테이블을 끼고 칼릭스와 인간 여자 형태의 마카롱, 미미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미미는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서는 칼릭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 누나 사춘기가 이제야 왔나 보다. 늦되네.”
칼릭스는 낄낄거리는 미미를 노려보았다.
“…….”
참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는데…….
로젤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미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미는 술을 마시고 크하, 하는 걸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뭘 보고 있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장 터질 것 같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미미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았다. 달콤한 과실 향이 목 뒤로 넘어가자, 영영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찝찝함이 조금 덜어진 기분이었다. 로젤린은 술병째로 홀짝홀짝 마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더럭 얘기를 꺼냈다.
“재밌는 얘기 해 줘.”
미미는 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고, 칼릭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는 중이었다.
“빨리.”
로젤린이 탁자를 탁탁 치며 재촉하자 미미가 합세했다.
“그래, 네 누나가 재밌는 얘기 해 보라잖아.”
칼릭스는 초조한지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떨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머뭇거리며 재밌는 얘기를 시작했다.
“음, 일주일 전에 알터가 눈에 커다란 멍을 달고서 집무실로 들어오더군요. 부상의 이유를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아서 묻지 않았는데, 알터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하면서 막무가내로 얘기를 시작하지 뭡니까.”
알터와 그의 여동생 일리야는 평소같이 말다툼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졌다고 한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고, 윗사람으로서의 아량이고 뭐고 간에 진심으로 상대하려 했는데 처참하게 패배했단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동생에게 지고, 분해서 울었다는 알터의 얘기가 너무나 재밌는지 칼릭스는 말하는 중간중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감흥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마치 보고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미미의 얼굴에는 싸늘함이 감돌았고, 로젤린은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하는지 몰라 가만히 술병 입구를 물고 있기만 했다. 정적이 길어지자 칼릭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저는, 재밌다고 생각했는데요.”
미미는 그 회심의 재밌는 얘기를 반추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놀리지도 못할 만큼 처참했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자 칼릭스가 이것 보라는 표정으로 미미를 흘겼다. 미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거는 너의 재밌는 얘기와 아무 상관 없이 그냥 기분 좋아서 웃은 거야. 원래 순한 애들은 가만히 있다가 혼자 웃고 그래.”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얘기하자마자 누님께서 바로 웃으셨는데요.”
로젤린이 흐흐 웃었다.
“웃기다.”
“보세요.”
“또 얘기해 줘.”
“잘 논다.”
칼릭스는 또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여러 재밌는 얘기들을 했다. 하나같이 재밌지도 웃기지도 않은 것들뿐이었으나, 최선을 다하여 ‘재밌고 유쾌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번에 아버지와 함께 갔던 음식점 있지 않습니까.”
“응.”
“저희가 앉았던 자리가 관광 명소처럼 되었다더군요. 이 자리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앉았던 자리, 이 메뉴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한 번 더 시킨 메뉴. 이런 식으로요.”
별거 아닌 이야기에 로젤린이 까르륵 넘어가자 미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뭘 잘못 먹었나 본데.”
“무슨 소리십니까. 제 화술이 뛰어난 것을요.”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에도 로젤린은 술 취한 사람처럼 헤헤거리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칼릭스가 손을 뻗었다. 굳은살과 흉터가 눈에 띄는 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든 아이의 요람을 흔드는 바람이 이러할까.
“무슨 일 있으세요?”
로젤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서.”
로젤린이 오리 입처럼 입술을 쭉 뺐다. 칼릭스가 잔잔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누님께서 왜 화가 나셨을까요?”
어린아이 어르는 듯한 말투에 미미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계속 나한테 뭐라 그러고.”
“나쁜 사람들이네요.”
“손가락질했어. 재수 없어.”
“교양 없는 인간들이로군요.”
“그걸 반대로 꺾어야지 그대로 두냐.”
로젤린은 짜증과 분노를 되짚어 가며 객관적으로 자기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재단하고. 여러 이유가 있으나…….
“그러니까, 내가 예전에는 모르던 걸 알게 되었는데.”
“네.”
“그걸 알게 된 이후로부터 모든 게 달라진 기분이야.”
“음, 그랬군요.”
“그래서 좀 혼란스럽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다시금 디에즈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무엇이 옳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가슴을 죄는 듯한 끈적한 분노와 불안함이 신경을 바늘처럼 가늘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일라베니아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잔혹했다. 그리고 제 가족과 친구들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무자비하게 굴었다. 그것이 불합리하고 지탄받을 일이라는 것은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지금 이 자리. 일라베니아의 황성에 있었다. 일라베니아의 기사로서.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나는 일라베니아의 강인한 울타리.
일라베니아는 나에게 죄를 저질렀고, 나는 일라베니아를 증오한다.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관념이 충돌하자 맹세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괴롭다고, 도무지 견딜 수 없다고 하면 그대로 놓아줄 것만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날 수 없으나, 일라베니아의 과거를 묻어만 둘 수도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칼릭스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응.”
“제가 누님의 모든 사정과 생각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제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응.”
“새로 마주한 사실은 이따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어요.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님. 그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누님에게 가장 중요하느냐……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젤린이 눈만 깜박이자 칼릭스가 살짝 웃었다. 음, 전혀 못 알아들으셨군. 하는 미소였다. 그리고 로젤린은 정확하게 못 알아들은 게 맞았다.
“가볍게 예를 들어 보자면…… 누님께서 맛있게 드시던 스테이크는 사실, 콩으로 만든 겁니다.”
로젤린은 너무 충격받아서 술병을 놓칠 뻔했다.
“어디까지나 예시입니다. 아무튼, 누님. 만약 모든 고기가 콩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기분이 어떨 것 같으세요?”
“너, 너무 혼란스러워.”
“그렇죠. 세상에나. 고기인 줄 알았는데, 콩이었다니.”
미미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얘기를 재밌게 하는 아이였는데, 아까는 왜 그랬담.”
“……안 바쁘십니까, 마카롱 님?”
“전혀?”
칼릭스가 미간을 좁힌 채 계속 얘기했다.
“……그래서 누님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속아 왔던 세월에 분노하게 되겠죠.”
아니, 콩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만 누님은 곧 깨닫게 됩니다.”
칼릭스가 깍지를 끼고 거기에다 턱을 괴었다. 칼릭스를 따라 로젤린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닐까?”
로젤린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콩 맛이 나는 고기보다, 고기 맛이 나는 콩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네?”
“그렇지요. 누님은 어떤 영양학적 정보보다, 맛을 중요시했던 겁니다.”
로젤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도 감탄했다. 정말 맞춤형 설명이라며. 칼릭스는 은근 뿌듯해하며 말을 이었다.
“누님께서 앞으로도 접하게 될 수많은 사실들은,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흔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칼릭스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덮었다.
“일라베니아의 유명한 시인이 사람의 생을 항해에 빗대었습니다. 긴 여행입니다, 누님. 때로 는 거친 파도에, 풍랑에, 폭풍에 배는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배가 흔들릴 때에 무거운 닻이 있다면 중심을 잡아 떠밀려 가지 않을 것이고, 나침반이 있다면 길을 잃어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나갈 수도 있겠죠.”
로젤린은 칼릭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슴푸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누님이 느끼는 혼란 속에 닻이 될 만한 중심과 나침반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걸 잘 생각해 보세요.”
나의 중심.
* * *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신전의 넓은 제단을 둘러싸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1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중앙에는 하얀 대리석이 원형으로 깔려 있으며, 중앙으로 갈수록 층계가 높아지는 형식이었다. 낮은 단을 세 번 올라서야 도달할 수 있는 중앙에는 사람들의 허벅지쯤 되는 높이의 제단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제단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하얀 석관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하얀 꽃에 둘러싸인 채 평안하게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석관의 뚜껑이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혀 있기 때문이었으나,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석관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엘피디오의 시신을 볼 수 없으리란 사실을.
하카브가 도망치고 리카르디스와 황녀 체리트의 증언으로 5황자 디에즈가 제국을 배반했음이 알려졌다. 발타와의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황후 트리파는 제 아들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에만 혈안이었다.
엘피디오의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황후는 거짓된 정보라 일축하고는 많은 인원을 동원해 황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들인 시간과 인력이 무색하리만큼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시체가 소각되었다는 소문의 신빙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후는 수색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엘피디오의 장례가 늦어진 이유였다. 만약 황제가 수색 중단과 장례식의 준비를 명령하지 않았다면, 황후는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재가 되어 사라진 엘피디오를 찾았을 것이다.
엘피디오의 신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암살자에게서 벗겨 낸 얼굴 가죽뿐이었다. 한 사람이 누워도 널찍한 관 안에는 머리 가죽과 황실 인장이 찍힌 반지만이 들어가게 되었다.
땅에 있을 때 이델라브힘의 빛을 널리 퍼트려 어린 백성들을 보살폈던 위대한 영혼은 드디어 육체를 벗어 던졌으니, 하늘로 가는 길은 영광뿐일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축복받은 영혼은 이델라브힘께 돌아가 영광스러운 신의 나라에 머물게 된다. 때문에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아직 그러한 관념을 모르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황후는 언제나 보여 왔던 고고한 태도를 내려놓고서는 머리를 풀어헤친 몰골로 석관 위에 엎어져 있었다. 석관을 쓰다듬다가, 손톱으로 긁어내리다가, 머리를 박고는 숨이 멎을 듯 울었다.
“아, 아아…… 폐하 제발. 엘피디오를 이렇게 보내시다니요! 전하의 첫 아이가 아닙니까! 어떻게 고작 가죽 한 장만을 남기고 영광된 빛의 길로 떠나라 하십니까! 눈이 없어 길을 보지 못하고 발이 없어 걷지도 못할 텐데, 엘피디오를, 어, 어떻게…… 폐하 제발. 조금만 더 찾으면 될지도 모릅니다. 발타의 간악한 것들이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끝까지 욕보이려 하는 수작일 뿐이니 제발, 폐하!”
아이 잃은 부모의 마음을 다들 감히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차마 그녀를 석관에서 떼어 내지 못했다. 석관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손톱이 너덜너덜하게 들린 트리파의 손에서 나오고 있었다. 황제는 딱딱해 보이는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대신관에게 눈짓했다.
나이가 지긋한 대신관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보고는 그대로 장례식을 시작했다. 성스럽고 서글픈 노래에 대신관의 축복이 한 구절 한 구절 더해졌다. 트리파의 울음소리는 영광스러워야 할 장례식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죽음은 시작이 아닌 끝일 뿐이다. 육체를 벗어 던져 무게가 없는 영혼은 그저 떠돌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신의 세계를 입에 담나.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눈물과 울음소리가 애써 포장해 두었던 죽음을 발가벗겨 사람들 앞에 집어 던졌다.
수백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은 마치 대신관과 황후 트리파, 그리고 엘피디오의 석관만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투둑, 투두둑. 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모두의 숨소리마저 가렸다.
다음 대의 황제가 되었을 제국의 1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그의 초라한 끝이 모두의 입안을 쓰게 만들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복잡한 마음을 무표정한 얼굴 아래 숨기고, 시체 없는 장례식이 거행되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트리파가 혼절해서 누군가에게 안겨 나가는 것도, 마지막에 석관 위에 대신관의 성수가 뿌려지는 모습도, 그 석관이 땅에 묻히는 것까지 모두. 장송곡이 멈추며 식의 끝을 알렸다.
리카르디스는 잎을 툭툭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물방울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떨어져 나갔다. 흐릿했던 인영이 또렷해졌다. 로젤린이었다.
구름이 뒤덮은 잿빛 공간 속,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이 빛을 잃어 더 어두워진 검은 머리카락에 조금씩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석관이 묻힌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보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왜일까. 왜 낯선 걸까. 그 이유를 생각하던 리카르디스는 곧 깨달았다. 로젤린은 타인의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언제 어디서나 시선이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기에, 리카르디스의 기억 속 로젤린은 언제나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상념에 잠겨 이런 적나라한 시선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로젤린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속에서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참으로 낯선 일이었다.
그 순간 로젤린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더니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눈이 마주쳤다.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얘기했다.
“장례식은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합니다.”
주위의 동료 기사들이 로젤린을 갓난쟁이 보듯 바라보았다. 파르딕트는 고래무덤의 영지에서는 하루에도 두세 놈씩 죽어 간다며, 자랑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로젤린이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한때 암살까지 생각했던 인물의 죽음이지만 그렇게 기쁘지는 않네요.”
레이몬드가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동시에 기사단원 전원과 기사단장 스타스, 그리고 리카르디스까지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장례식이 끝난 지 오래라 남은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하얀 무리에서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로젤린이 입이 막힌 채 수화로 얘기했다.
[시도한 적 없음]
[여러 차례 반복해 생각만]
[적을 은밀히 죽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들키게 되리라 예상함]
[……라는 친구의 조언]
리카르디스와 스타스는 진심으로 그 친구에게 고마워했다. 스타스는 그 친구가 자신이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올가미 용병단의 임시 단원 쥬쥬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미묘한 반응을 보이긴 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더 굉장한 발언을 하기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빗속을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가끔 뒤돌아보았다. 엘피디오의 관을 보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도 로젤린을 따라 뒤돌았다. 장면은 먹구름 때문에 어두컴컴했으나, 안개가 낀 탓인지 희뿌연 빛이 감돌았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로젤린이 물어 왔다.
“전하도 기쁘지 않으세요?”
“음…….”
그가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엘피디오가 죽기만을 바라 왔지만…….”
세티스티아가 죽고, 이후 밀리아도 제 딸을 따라가듯 목숨을 잃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엘피디오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증오한다는 말로는 엘피디오와 자신의 관계를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기쁘지는 않군. 이건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 한 사람의 죽음에 인도적으로 슬픈 감정이 들어서는 아니야. 나는 그대와 달리 선한 사람이 아니거든.”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저도.”
“……슬프지 않다고 선하지 않은 건 아니지.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까.”
리카르디스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무튼. 이런…… 찝찝한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는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청소를 해야겠어.”
“청소……?”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한 리카르디스가 미소 지었다.
“기분이 찝찝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그가 살짝 눈짓하자 뒤따라오던 잇세리온이 빠르게 다가섰다.
“별관 어디…… 지하에 박아 뒀던가.”
“예, 전하? 무얼 말씀하십니까.”
몇 년 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또 다른 황태자 후보, 리카르디스의 존재 덕분에 황제는 평안한 나날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에서 리카르디스의 생일이 찾아왔다.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황제의 말에 리카르디스는 오직 엘피디오를 괴롭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탁했다.
언제나 형을 가지고 싶었는데, 엘피디오 형님이 있어 너무 기쁘다. 둘이서 사이좋게 있는 모습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다. 내 일생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것이다!
물론 본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리란 예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들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고통에 익숙했고, 어린애 한 명 골리기 위해 그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소원은 곧 엘피디오의 석영 성으로 전달되었다. 엘피디오가 뭔 미친 개소리냐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고 했다. 그 소식이 그해 리카르디스의 가장 기쁜 선물이 되었다. 엘피디오의 반항은 황제의 강압적인 명령에 끝을 맞이했고, 자존심이 있어 그맘때 즈음 입지 않게 되었던 반바지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야만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초상화에는, 꽃으로 꾸며진 하얀 그네 의자에 아름다운 소년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있는 정다운 모습이 새겨지게 되었다. 보이는 곳에 걸어 두자니 흉물스럽고, 버리자니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별관 지하 어디에 처박아 두었었다. 돌연 그 흉물스러운 존재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엘피디오의 석관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황후 트리파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였다. 엘피디오는 자기도취에 빠진 인간이었다. 소설 속 영웅같이 근육이 울룩불룩한 모습의 동상을 세우고, 잔뜩 미화된 자신의 초상화를 성 복도에 쭉 늘여 놓고 감상하곤 했다.
그 많은 엘피디오의 초상들이 이번 사건으로 모두 불탔다. 성인식을 치른 엘피디오의 초상화는 황실에서도 보관하고 있었으나, 어릴 적의 모습을 담은 것은 전부 없어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가지고 있는 초상화는 대륙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엘피디오의 흔적 중 하나가 된 셈이었다.
황후는 야심 있는 여자였다. 엘피디오가 죽었으나 그의 동생 3황자 틸렌드가 있다. 그녀는 또다시 틸렌드를 내세워 자신을 어떻게든 황실에서 솎아 내려 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선물을 보낸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아무리 황후의 모습에서 어머니, 밀리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엘피디오 때문에 밀리아가 그렇게 되었는데. 수년간의 고통은 고작 엘피디오의 죽음 정도로 해소될 만큼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원한은 남아 있었다.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엘피디오는 이젠…….
“……초상화를 수정해라. 덧칠해서 나 하나 지우는 것쯤은 화공에게 일도 아니겠지. 엘피디오만 남긴 다음에 황후 폐하께 전달해 드리도록 해라.”
잇세리온이 헉, 숨을 들이켰다. 리카르디스에게는 말 못 했지만, 어렸던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가끔 지하실에 들러 보고는 했는데! 그, 그걸 지우고 엘피디오 전하만 남겨서 보내라고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대신하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니, 그 이전에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전하의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실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간 서로 죽이고 못 살던 적대 관계의 2황자가 제 아들이 죽자마자 초상화를 보내왔다. 이건 위로를 가장한 조롱이요, 가슴에 난 상처를 다시 헤집는 고도의 전략이다! 황후의 성정 문제가 아니라, 황실은 그것보다 더한 일도 일어나는 곳이었다. 선물 하나도 곱게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라 더욱. 상대가 자신이라 더더욱.
그럼에도 보내려는 이유는 리카르디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보내기에는 수많은 것이 필요하다. 초상화는 필요한 그 한 조각쯤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순수한 선의로만 보낸다고 말할 수 없으니, 황후 폐하께서 나쁘게 해석한다고 해도 별다른 변명은 못하겠어.”
동정이고 연민이었다. 그것에 엘피디오를 향한 원망이 얽혀 엉망진창이었다. 이 감정은 머리를 어지럽히다, 가슴에서 떠돌다, 시간이 지나면 발밑에 끈적하게 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의 발을 잡아끌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필요할 거다. 폐하께도, 나에게도.”
그렇기에 두고 가야 했다. 쓸데없는 것에 발목을 잡혀 자리에 멈춰 설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가 나누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리카르디스는 어떤 장면을 상상했다. 현재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었으나 그곳에 로젤린이란 존재는 없었다. ‘만약’으로 시작하는 의미 없는 가정 속의 장면은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자신은 혼자였다. 죽은 엘피디오의 관을 보며 혼자 끈적한 감정을 곱씹고 휘둘린다.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으니 멈춰 있기만 한다. 버릴 필요를 못 느끼니 끌어안고 있다. 점점 가라앉다가, 가라앉다가. 결국 그렇게 끝맺는 이야기였다. 한 명이 있는 세상과 한 명이 없는 세상은 그렇게 달랐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응시했다. 로젤린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어 로젤린의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담았다.
“가지고 갈 건 가지고 가야지. 그건 더 이상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며칠 뒤, 리카르디스의 선물이 황후 트리파의 성에 도착했다. 잇세리온은 아마도 초상화가 부서진 상태로 반환될 것이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암살자까지도 같이 딸려 오리라 예상해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월장석 성에 도착한 것은 황후의 인장이 찍힌 편지 한 장뿐이었다. 고맙다는 한마디만 쓰여 있었다.
* * *
몇 세대가 지나는 긴 시간 동안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던 균형이 무너졌다. 발타는 ‘검은달’이라는 광신도 집단 이름 뒤에 숨어 일라베니아를 자극하고, 일라베니아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발타를 압박했다. 지지부진하게 작은 전투들이 줄곧 이어지기는 했으나, 이걸 두 나라 간의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사소한 분쟁에 불과했다.
그렇게 수백 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균형을 깨트린 쪽이 발타라는 사실은 일라베니아의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결코 전쟁을 먼저 시작하지 못할 겁니다. 국력의 차이는 명백하며, 하카브 왕자도 그걸 모를 만큼 아둔한 자가 아닙니다. 지는 싸움이 취향이라면 또 모를 일이지만 하하.’라고 호언장담한 것이 무색하다 못해 머쓱해지기까지 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발타의 수상쩍은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아니며, 생각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머저리들만 수뇌부에 앉아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타가 하는 전쟁 준비를 수십 수백 년간 계속된 무력시위의 일환이라 여겼다. 왕실이 건재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극일 뿐이라고.
더군다나 두 나라 간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파편’과 인조적인 마인 부대 정도로 그 틈을 메울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발톱을 드러낸 발타의 일격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건국제 무도회의 참사 이후, 일라베니아는 병력을 대대적으로 움직여 하카브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은 잡지 못했다. 어떻게 확보했는지 모를 도주로와 어떻게 심어 놨는지 모를 첩자들 등.
여러 가지 활약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무도회를 기점으로 국경 지역에 크고 작은 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일라베니아의 권력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에 대비해야만 했다.
전투가 잦던 국경 지역은 발타의 공세에 빠르게 대응했으나, 평소와 달리 승리로 가는 길은 버거웠다. 발타의 병력이 예상했던 수와 힘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어디에 숨겨서 대체 어떻게 키운 건지도 모를 훈련된 병력이었다.
한 가지 더 경악스러운 사실은, ‘파편’과 인위적으로 만든 마인 부대는 아직 투입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세 개로 나누어진 남부 국경 관문을 맡은 국경 사령관들의 활약으로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뿐이었다면 좋으련만, 국경뿐 아니라 수도 티가드도 피해가 막심했다. 국경 관문처럼 대규모의 병력과 마주하지는 않았으나, 병사보다 암살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소규모 집단의 행패로 주요 인물 몇몇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 일라베니아 제국 군사 조직의 우두머리, 총사령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이게 무슨, 개…… 계시 같은 말인지. 하하.”
무슨 개 같은 소릴 하냐는 말을 가까스로 바꾼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황실에서 온 전령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황실 전령을 대함에 적당해 보이는 태도는 그린듯한 미소 하나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장, 렉시드는 세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눈만 굴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해 보라…… 렉시드, 들었니? 어떻게든 해 보래.”
세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차갑게 웃고는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후, 그녀의 입에서 연기가 퍼져 나왔다. 세실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사건이 일어난 지가 언제고, 발타 놈들이 여기저기 쳐들어와서 깽판 놓은 지가 언제인데. 이 사태에 대한 해결 방법이랍시고 전령을 보낸 게 병력을 보내며 권한을 위임할 테니 집결하여 연계하라. 이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든 해 봐라? 잘 막아 봐라? 믿는다, 힘내라?”
“아, 아니 마른가시나무 백작! 말을 꼬아서 듣지 마시오. 현재 황실은 엘피디오 황자 전하와 총사령관까지 변을 당하시어, 병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놈이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텐데? 그나마 없는 쪽이 개소리가 덜해서 일이 빨리 진행되기는 하겠네. 그리고 엘피디오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건 제국의 백성으로 함께 눈물 흘릴 일이기는 하다만, 발타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잖아? 무얼 먼저 처리해야 하겠다는 감이 오지 않나? 살아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지.”
“중앙 상비군은 일라베니아를 지킵니다, 백작! 발타의 공세가 지난 수십 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사나움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아직 그 마인 부대의 움직임을 못 읽어 내지 않았소. 그 부대가 수도로 침투하는 가정을 아주 배제할 수 없음을 알 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중앙의 병력을 분산시키란 말이오! 변경 주둔군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병력이 있지 않소. 계속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은 백작의 무능을 나타내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 잘 생각하고 발언하기를 바라오.”
세실이 눈을 접어 웃었다.
“말 잘했군, 남작. 그래, 아직 마인 부대는 물론이거니와 그 지독한 독마저도 투입되지 않은 상황이지. 이 말이 뭘 뜻하냐면, 전쟁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다는 거야. 일라베니아나 발타나 서로 충분히 여력을 남겨 둔 상황이지. 하지만 이쪽은 하카브가 수도에서 분탕질을 치는 바람에, 위쪽 분들이 너무 불안해하시네? 중앙에서 병력을 많이 빼 주지 못하겠다네? 이게 뭐냐면, 병력의 분산이에요. 왜 분산시키겠냐고, 상대적으로 국경의 방어벽을 얇게 하려는 수작질이 아니겠느냔 말이야. 왜 방어벽이 얇으면 좋을까? 뚫기 쉬울 테니까!”
그녀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진동에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소음을 만들어 내자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게 일라베니아 제국 전체 병력의 삼 할 정도가 주둔하고 있는 관문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남은 병력으로 막아 낼 수 있을까? 다들 하카브가 사고 치고 간 것 때문에 무서워서 머리가 잠시 굳은 모양이라 내가 좋게 좋게 말로 지원 요청하면서, 여기 뚫리면 네놈들도 다 뒤진 목숨이다. 친절하게 알려 준 것 아닌가.”
세실이 파이프를 한번 물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후우, 연기를 내뱉자 남자가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세실이 줄줄 얘기할 동안 얼빠진 듯 입만 벌리고 있던 검은파도 남작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황제 폐하께서 보낸 엄중한 명령에 감히……! 이 무례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사태가 끝나고 나서도 인간 백정 짓으로 가까스로 유지하던 지위를 달고 있을지는 내 확답해 드리진 못하겠소.”
세실은 생긋 웃으며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었다.
“눈치라고는 없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엉덩이 차 버리기 전에 얼른 밖으로 꺼지라는 내 뜻은 읽은 건가 남작? 잘 가시게, 배웅을 꼭 받고 싶다고 해도 그다지 해 주고 싶지는 않아.”
검은파도 남작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다가 크게 콧방귀를 뀌고서는 발걸음을 돌렸다.
쾅!
세게 문이 닫히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실은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었다.
“피곤해라…….”
“와인을 준비하겠습니다.”
“전시인데 무슨 소리야 라고 하고 싶지만, 한 잔만 딱 마실까?”
“한 잔 정도는 전시에 마시기 딱 좋은 수준이죠.”
렉시드가 문가에 서 있던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세실은 눈을 감은 채 아차, 하고 말을 이었다.
“렉시드. 황제 폐하의 전령이 언제 온다고 했지?”
방금 전에 16세 사춘기 남자아이처럼 씩씩대며 나간 남자가 황제의 전령임을 모르고 한 얘기는 아니었다. 뜬금없을 법한 발언에도 렉시드는 조금의 의문도 갖지 않은 듯 보였다. 그가 와인 한 병을 하인들에게 건네받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당도하기 전에 실종되었다더군요. 요즘 시국이 보통 흉흉해야 말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실이 눈을 감은 채 씨익 웃었다. 그녀는 오지 않은 황실 전령의 짐에서 황실의 문양이 찍힌 또 다른 서신을 발견했다. 수신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었다. 전선에서 한 몸 불사르는 공을 치하함과 동시에, 이제 그만 좀 수도로 올라오라고 징징거리는 내용이 고급스럽게 적혀 있었다.
“아니 이 늙은이가…… 나는 알아서 잘 싸워 보라더니?”
세실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황제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은 투견이고, 저쪽은 충견이니. 국경 지역에서 허무하게 죽을 인물은 대체 가능하지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구르라고 하면 구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사람은 구하기 힘들 것이다.
위험한 순간에 써먹게 옆에 데리고 있으려는 모양인데, 내용을 살펴보자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꿈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복은 죽음으로 여기던 인간이 몇 번이나 계속된 것 같은 권고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뭐…… 전달할 필요는 없겠군. 몇 번 동일한 내용을 받은 모양이니.”
세실은 테이블 위의 촛불에 서신을 가져다 대었다. 닿은 부분이 검게 물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아직 너울거리는 불꽃을 품은 재가 테이블 위로 투둑 떨어졌다.
* * *
쩍!
벼락이 돌을 쪼개는 듯한 소리였다. 손바닥이 뺨을 스친 것만으로 이런 소리가 날 수 있을 거라고는. 통증에 볼을 부여잡는 와중에도 호위대의 대장, 둔은 감탄했다.
“건방진 놈! 이거 놓아라!”
“악!”
지금 막 간제가 또 다른 호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간제의 팔을 한쪽씩 잡고 있는 호위들은 오랜 여행에도 지치지 않았으나,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주인의 패악에는 몹시나 고단해 보였다.
간제는 성난 들소보다 무섭게 씩씩댔다. 힘도 들소에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간제를 둘러싼 마인 호위대는 쩔쩔매며 그녀를 억류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치지 않게끔 간제를 제압하는 일이란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3왕녀 간제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인이었기에. 심지어는, 마력의 양으로 따지면 간제 쪽이 우세했다.
둔은 안되겠다 싶어 뒤에서 그녀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팔까지 끌어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 어야 했는데. 간제가 발꿈치로 호위의 발가락을 무참하게 내리찍었다.
“아악!”
둔의 품에서 빠져나온 간제가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둔은 그대로 기절했다. 거친 몸싸움으로 산발이 된 간제는 눈을 형형히 빛내며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호위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간제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룩불룩 솟았다. 기절한 호위대장 둔을 대신하여 부대장이 나섰다.
“왕자 전하의 명령이셨습니다. 일라베니아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어떤 위험과 돌발 상황이 있을지 모르는 터라, 왕녀 전하께서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셔…….”
부대장의 얼굴에 화병이 직격 했다. 쨍그랑! 조각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부대장은 얼굴에 달라붙은 화병 조각과 코피를 쓱쓱 닦으며 말을 이었다.
“부득이하게 그런 결정을 내리셨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간제는 이를 갈았다. 지금 호위가 말하는 ‘부득이하게 내린 그런 결정’은 일라베니아를 빠져나오는 내내 골칫덩이를 수면제로 재워 놓는다는 계획이었다. 확실히 자신이 깨어 있었다면, [여기에 발타의 1왕자 하카브 위 리비타가 있습니다]라고 적힌 깃발을 만들어 흔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강제로 재워 둬?
간제가 긴 수면에서 막 깨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호위가 급하게 그녀의 입에 수면제를 들이부었다. 몽롱한 상태의 간제는 남자의 다급한 숨소리에 이변을 깨닫고 호위의 얼굴에 수면제를 냅다 뱉어 냈다. 순간적인 기지로 남자의 소중한 급소를 까 버린 후, 사투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뭉텅 썰려 나간 시간이 아까워서 열 받는 것은 차치하고, 호위 놈들이 괘씸해서 간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성질냈다. 호위들은 이제 그녀를 재우는 일은 포기한 듯 보였다.
간제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 건물의 구조, 새겨진 문양. 발타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여기저기 막힌 길이 많았을 텐데 재주 좋게 일라베니아를 벗어난 모양이었다. 발타의 수도, 리비타의 궁은 아니었다. 문양 양식이 달랐다.
“오라버니는.”
“……회의 중이십니다. 방해하지 말라 명하셨으니, 우선 허기를 달래고 계시면 저희가…….”
회의 중? 방해하지 말라 하였어? 간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주위의 호위들이 간제의 말에 답한 남자를 퍽 쳤다. 이 멍청한 놈이!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불을 질러서라도 방해할 인간인데……!
간제가 움직이자마자 만류의 손길이 사방에서 뻗쳐 왔다. 간제는 바닥을 굴러 회피하고서는, 창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왕녀 전하!”
“아악! 전하! 아, 내가 진짜!”
“저 개망나니가!”
간제는 바로 아래층의 돌출된 지붕에 착지한 후에 바로 옆 난간에 매달렸다. 호위들이 따라 뛰어내리려 했다. 그녀는 콧방귀를 뀐 다음에 아래층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쨍그랑!
수놓아진 커튼이 불룩 솟으며 간제가 나타났다. 그녀는 유리창 조각이 쏟아진 바닥에 구르며 벌떡 일어섰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눈만 크게 뜨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간제를 바라보았다.
간제는 툭툭 옷을 털며 유리 조각을 털어 내었다.
“눈 뜬 모습은 오랜만이구나, 간제. 건강해 보여 이 오라비도 마음이 놓인다.”
제일 상석에 있던 하카브만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구나. 너의 유능함 덕분일까, 호위들의 무능함 때문일까. 말해 주련?”
품에 숨긴 비수 같은 위험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간제는 머리를 탈탈 털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호위들이 무능했지요. 긴 시간 동안 잠만 자서 비실거리는 연약한 왕녀 하나 못 막을 정도면 알 만하지 않습니까? 죄 갈아엎고 새로 뽑아 주시지요. 기왕이면 잘생긴 놈들로요.”
간제는 맨발로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러 빈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의 중년 남자가 의자를 반대쪽으로 슬쩍 옮겼다. 리비타 왕실의 유명한, 목숨 내놓고 사는 미친 왕녀. 엮이면 피곤할 게 불 보듯 빤했다.
“그래서 여기는 어딘가요.”
“제가 대신 대답하도록 하지요, 왕녀 전하.”
간제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녀와 소년이 보였다. 그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발타는 왕실 ‘위’ 가문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큰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중 쌍둥이 남매가 가주를 맡은 가문이라면 ‘싱’ 외에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싱.”
간제가 먼저 정체를 유추해 내자 소녀가 빙긋 웃었다.
“남라 싱, 바유 싱.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소녀는 말 못하는 소년의 몫까지 말했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두 남매가 같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간제는 일어난 이래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싱은 금속이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검, 활, 갑옷과 각종 고문 기구까지 만들어 내는 전쟁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싱에 들렸다는 것은 아마도…….
간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테이블을 두고 하카브, 남라 싱, 바유 싱. 그리고 재상 아틸라크와 수년 전에 잡혀갔다던 검은달의 간부, 케틀린이 있었다. 또한,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도 다수 보았다. 그들은 간제의 시선이 닿자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췄다.
“차호트 람가,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단단한 근육이 눈에 띄는 장신의 여인과,
“브네학스 아문.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준수한 미남자와,
“코코 사르체.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흉악하게 생긴 거인과,
“완달 타탄,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까지.
싱을 포함한 람가, 아문, 사르체, 타탄.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가문의 가주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어디 소풍 나갈 계획을 짜기 위해 모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간제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리카르디스 전하. 피차 힘든 싸움이 될 테니 알아서 잘 살아 남아 봅시다…….’
하카브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의 한 점을 빤히 바라보다 돌연 씩 웃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 * *
전운이 감돌았다. 시녀들은 연회 준비를 할 때처럼 항상 지쳐 있었고, 기사들은 실전 같은 대련과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징집, 군의 편제가 마무리되어 언제든지 출진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실은 아직까지 침묵하는 중이었다. 나라와 나라의 운명을 건 거대한 전투를 대비한 대군은 그대로 묶여 있고, 고작 일만여 명의 병력을 국경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없는 것보단 낫긴 한데, 크게 도움이 되는 정도는 아닌, 생색내기 좋은 딱 그 정도. 분통이 터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한 자, 한 자 분노를 채운 서신을 보낸 일도 이해가 갔다.
여유로워 보이는 황실의 움직임에 백성들은 안도했다. 별일이 아닌가 보다. 괜찮나 보다. 발타 놈들이 해 봤자지. 그런 식이었다.
황제가 정확하게 노린 바였다. 일라베니아는 누대에 걸쳐 서서히 몰락하는 중이었다. 축복의 밤으로 풍요로웠던 대륙은 메말라서 성수를 들이부어도 잠깐의 곡식을 허용할 뿐이었다. 황금의 땅이라 불리던 일라베니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절대적이던 권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만을 가진 자들이 늘어난 시점에서, 황실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면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먼저 터질 가능성도 있었다. 황제가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황실의 핏줄을 죽이고 일라베니아 한복판에서 간악한 짓거리를 저지른 발타에게 죗값을 묻는 것은, 잠시 요동치는 민심을 다스리고 난 이후일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로젤린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흔들거리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카일로에게 딱딱한 열매를 뜯어 던졌다. 갑자기 봉변당한 카일로가 분노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로젤린이 히죽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고압적이고도 오만한 미소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카일로와 다투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지만, 그전에 멍하니 허공을 훑던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로젤린은 이따금 하던 행동을 멈추고 상념에 잠겼다. 생각은 깊어졌고, 말하는 것도 전보다 능숙해졌다. 어리숙한 사고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최근 그녀에게서 과거 ‘로젤린’의 모습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했다.
변화는 가만히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큰 파문이 그녀를 흔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지가 벌써 얼마던가. 로젤린이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최근 리카르디스는 그녀 앞에 설 때면 초조함을 감추는 것에 급급했다.
똑똑똑.
누군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최근 월장석 성에서 일하게 된 시녀였다. 갈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지닌 자그마한 여자의 이름은 미레이미, 일명 ‘미미’였다. 올가미 용병단의 쥬쥬와는 남매 관계라는 ‘설정’이란다.
미미는 황실 시녀가 되기 위한 조건 중 그 어떤 것도 충족하지 못했지만, 월장석 성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물론 그 뒷배는 성의 주인 리카르디스였다.
“전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잇세리온이 있어서인지, 미미는 시비도 걸지 않고 분주히 다과를 차리기만 했다. 정상적으로 일하는 미미를 보자니 과거 생활 청산하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무법자를 보는 듯해 리카르디스는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어, 그런데 보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까딱, 하고는 의심의 빛을 담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디저트의 개수가 좀 많은 듯싶은데.”
“어머? 전하께서 아까 디저트를 많이 드시고 싶으시다 하셨잖아요?”
미미가 뺨에 손을 대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팔자(八)로 휜 눈썹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셨잖아요?”
얼마 가지 않아 온건한 협박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 성격이 가 봤자 어디를 가겠나. 과거 청산은 무슨…….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원래도 바빴던 잇세리온을 내보내는 일은 손쉬웠다. 잇세리온이 나간 후의 미미는 제국의 황자가 아직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량한 자세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한껏 양껏 담아 온 디저트를 냠냠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본인 몫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하 앞에 있는 접시, 그거는 전하 거, 이거, 이거, 이거는 로젤린 거. 나중에 먹여. 그리고 나머지는 다 내 거. 이야, 전하 이름 대니까 주방장이 혼을 쏟아부어서 만들던데. 앞으로도 종종 해도 되나?”
“……들키지만 말고.”
월장석 성내에서 주인의 이름을 사칭해 디저트를 빼돌리는 간 큰 시녀가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겠지만.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우리 전하께서는 마음도 넓으시지.”
미미는 입에 크림을 묻히고 낄낄거렸다. 그러더니 아차, 하고는 제 치맛자락을 뒤졌다. 보기 좀 그런 광경이라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고는 있겠지? 여자 남자 이전에, 품위의 문제야.”
“나도 격식을 아는 사람이니까, 걱정은 마시죠, 전하.”
한참 치마 안쪽을 뒤적거리던 미미가 “아, 찾았다.” 하고는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미의 손에는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종이를 툭 하고 그의 앞에 던졌다. 종이가 들어 있던 장소도 장소고, 건네준 사람이 그녀이기에 의심을 지울 수 없어,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감정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이게, 뭐지……?”
격식을 아는 사람, 미미가 포크를 쪽 빨며 씩 웃었다.
“내 마음.”
엉덩이 부근 치맛자락 안쪽에서 나온 그녀의 마음. 정말 너무 찝찝했다.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을 집게처럼 해서 접힌 종이를 폈다. 젖었다 마른 것인지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으나,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미는 종이를 읽어 내리는 푸른 눈동자를 지켜봤다. 무표정한 얼굴,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그 눈동자가 종이의 끝자락에 닿았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아마 그 종이의 존재에 대해, 혹은 종이에 적힌 내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리카르디스는 종이를 다시 두 번 접어 모서리를 잡고는, 반대쪽 손바닥에 툭툭하고 쳤다. 그의 시선은 바깥 창의 어딘가와 상념 깊은 곳을 지나 마침내 미미에게 다시 닿았다.
“혹시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인가?”
목소리에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미는 시간을 잘 맞춰 적당히 우러난 차를 마시고, 입안 가득 감도는 향을 즐긴 다음에야 대답했다.
“겸사겸사 그것도 전해 주고 싶긴 했지.”
리카르디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과거 설원의 월계수처럼 강한 힘을 타고나는 마인 가문이 있었다. 제국의 음해를 받은 그들은 오랜 세월 감금당해 있다가 탈옥한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땅을 채 벗어나기 전에 죽는다. 그날로부터 축복의 밤은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내가 따로 신전 관계자에게서 알아낸 것과 발타에서 몇 천 장 흩뿌리고 간 이 종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대략적인 정보지.”
“세상에나 어떻게 그런 일이? 무섭기도 해라.”
미미가 심드렁한 말투와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그 이후, 마수라 불리는 흉포한 존재들이 생겨났다. 산과 들, 숲.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과 마을. 어디고 나타나서 목숨을 앗아 가는 마수는 일라베니아를 떨게 만들었지. 개체 수가 많이 줄어든 지금까지도 말이야.”
발타에서 검붉은 보석을 가지고 올 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최근 마수의 몸에서 생성되는 결정이라 판명되었다. 또한 로젤린의 증언으로 마독 ‘파편’, 인조적인 마인 부대가 지닌 마력과 결정의 마력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까지도 알게 된 상황이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던 마수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진화해서 일라베니아의 목을 죄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수는 어디에서 왔는가?
“사라진 마인 가문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의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즈음, 공교롭게도 축복의 밤 또한 자취를 감추었어. 그들이 아니더라도 강한 마인은 또 태어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들이 죽은, 혹은 사라진 이후부터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강한 마인이 죽고 다음 세대에 남은 것은, 또 다른 강한 마인이 아닌 마수였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라 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축복의 밤이 오래 찾아오지 않은 폐해로 마수가 생겨났을까?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은 기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처음이니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 단순히 그 이유로 마수가 생겨났다면, 강한 마인은 왜 태어나지 않았는가? 대륙을 소생시키는 그 강한 힘이 어딘가에 있다면, 일라베니아가 아닌 그 누군가의 눈에라도 띄어야 말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카르디스는 잠시 멈칫하고는 미미를 바라보았다. 강한 힘을 지니고, 다른 생물의 형태를 흉내 내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리카르디스는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맛있어 전하? 취향이 독특하시네.”
그는 미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깍지를 낀 채 엄지로 턱을 꾹 누른 리카르디스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소설을 가슴에 품은 남자가 마카롱을 응시했다.
“어디 있을까. 그들은, 그들의 힘은.”
정적이 인 공간 속에 바람이 불었다. 마카롱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었다. 다소 불량한 자세였다.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바로 여기에.”
그러고는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 그녀가 팔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리카르디스의 뒤쪽이었다. 그는 자신의 뒤, 창밖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저기에.”
그리고 귀를 후비며 무성의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든가, 없든가 하겠지.”
미미의 얼굴이 곧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너……무 심각하게 놀라는 거 아닌가?”
정말, 너무 놀랐다.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답변을 마치자마자 손을 내려놓다가 생크림 케이크를 깍지 낀 손으로 박살 내고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떨어트린 포크를 어마어마한 반사 신경으로 발로 찼다가 튕겨 오른 포크에 코를 맞았다. 마카롱은 정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꼴을 로젤린이 봤어야 했는데.”
통탄하는 어조였다. 놀리는 의도가 느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미처 신경 쓰지도 못했다. 머리에서 생각을 담당하는 기관만 슬쩍 빼서 얼음물에 담가 놓은 것 같았다. 동면에 들어간 물고기의 사고가 이러하리라.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코를 쓱 문질렀다. 그 과정에서 손으로 으깬 케이크의 잔해가 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마카롱은 콧잔등 위에 생크림을 묻히고 있는 그를 보고 놀리기 위해 열었던 입을 그대로 닫았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아픈 사람은 놀리는 거 아니니까.
“……그대가 정말…….”
대화의 간격이 길어지며 침묵이 지루해질 찰나,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일라베니아 황실의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된 그 마인 중 한 명이라는 건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답을 말해야 한다니 귀찮기 짝이 없었다. 마카롱은 상황이 특수한 만큼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일 테니. 마카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의 기억은……?”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마카롱은 날카롭게 미소 지으며 턱을 살짝 들었다.
“모두 알지는 못해도, 알 만큼은 알아.”
“……대체, 어떻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카르디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갈색 머리 여자의 본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육신이 없는 검은 그림자 같은 형태, 죽은 것을 흡수하며 의태 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과는 다른 모습. 동물과 식물, 사람까지. 생명을 가진 것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진화하거나, 퇴화를 반복하며 생을 이어 갔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 또한 그러한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나 그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진화와 퇴화는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축복의 밤이 사라진 시기와 마수가 생겨난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존재가 무엇이라 해도 변화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일 텐데.
마카롱은 창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탁자 언저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카롱이 머리를 헤집으며 멈췄던 말을 꺼냈다.
“걔가 한 거야.”
“……로젤린이?”
리카르디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젤린이 했다? 무얼 했다는 말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즘 어린놈들은 모르겠지만, 나 때는 말이야 마인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몇 세대에 걸쳐 아주 강한 힘을 가진 마인이 탄생한다고. 강한 힘은 필연적으로 운명을 이끄는 힘이 있어서 개인의 삶뿐 아니라 나라, 세계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뭐, 너희처럼 폐하, 전하, 죽으라면 죽고 살라고 명하시면 살겠어요, 그러지는 않았지만 우리들끼리 그 존재를 왕이라 부르고는 했지.”
“왕이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강한 힘을 지니고 운명을 이끄는 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일이 일어났던 시기에 몇 세대에 한 번씩 태어난다는 ‘왕’이, 로젤린이 있었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 우리를 결코 죽음에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이끌었지. 고통을 느끼는 육신과 오래 쌓인 분노의 기억,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모든 것을 죄다 버려 버리고서.”
리카르디스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머릿속으로 그려 보려고 해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광경이라 힘들었다.
“솔직히 나도 그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잘 몰랐어. ‘마력 엄청 많은 사람’을 왕이라 말하는 건 줄 알았지. 운명이니 뭐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찌 믿을 수 있겠어. 그래서 그때야 처음 알게 된 거지. 운명을 이끈다는 왕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한참 후에 떴다. 감정을 가다듬은 듯 눈동자는 고요했다.
“우리는 몇백 년의 시간을 지나 다시 원점에 돌아왔다. 이걸 운명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석고상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마카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터져 나오는 정보는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입술만 달싹달싹 움직이는 사이 마카롱이 다시 먼저 운을 뗐다.
“전하도 알다시피 내가 이렇게까지 친절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느냐면, 상황이 아주 드럽게 흘러가고 있어서야.”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
“나는 로젤린이 피 흘리기 바라지 않아. 두 번 다시는. 그 아이를 해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어. 이번만큼은 안돼.”
크게 격앙되지 않은 잔잔한 말투에는 칼날같이 단단하고 예리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전쟁에 못 나가도록 묶어서 감금시키지는 않을 거야. 내가 로젤린을 지키고 싶은 건 단순히 몸의 안녕뿐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아이는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지금 이 상황의 문제점은 단 하나.”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던 마카롱이 다시 소파 등받이에 푹 누웠다.
“……로젤린은 과거의 기억이 거의 없었어. 디에즈나 나처럼 일라베니아 놈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지. 기억한다고 해도 그저 그때 있었던 상황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조각 정도가 아닐까.”
마카롱은 잠시 숨을 고르고 얘기했다.
“좀 어렸거든.”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 리카르디스는 충격받아 한동안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그는 마카롱이 말하는 오랜 과거 속 로젤린의 모습을, 현재와 겹쳐서 상상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 강인하고 담대한 기사의 모습은 ‘좀 어렸거든’이라는 마카롱의 말을 듣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가슴 깊은 곳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얼마나 어렸나.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상황을 인지하기보다 단순히 그때의 감정만을 새겨 뒀을 정도.
어리둥절해한다. 먹을 것을 좋아한다. 감정이 앞선다. 마카롱, 디에즈와 달리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더디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말한다.
어린아이였다. 리카르디스는 비로소 그녀에게 어울리는 껍데기가 지금보다 한참 작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의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업적이 아닌 한 어린아이가 벼랑에 몰린 결과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는 숨죽이고, 도망쳤다. 그러나 위태로워진 마지막 순간에는 시간을 빠르게 돌려, 그들에게 덧씌워진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나게 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 들은 것과 칼릭스에게 들은 정보를 떠올려 ‘그것’의 모습을 그렸다. 죽음이 없어 두려움이 없는, 육체가 없어 고통이 없는, 기억이 없어 분노가 없는 ‘그것’들.
그 모든 형태에 아이의 희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존재에 껄끄러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지금 남은 건 연민뿐이었다. 불쌍하고, 너무 불쌍해서 목 안쪽이 고통스러웠다.
구름이 지나가는지 방 안은 잠시 어둑해졌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세게 누른 채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카롱은 희미하게 웃었다.
“디에즈가 로젤린을 불러내서 했던 말은 내가 하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야. 왜냐고 묻지 마라. 그냥 입이 안 떨어지는 거니까. 전하 같으면, 잘 살고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과거에 너는 더럽게 불행했어. 원수의 핏줄들이 코앞에 있는데 왜 당장 찔러 죽이지 않아? 하고 닦달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좀…… 그래. 아까 말했지.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로젤린의 몸의 안녕뿐이 아니라고. 디에즈 그 개자식도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한 걸 보면 나랑 비슷한 마음이었겠지.”
괜히 들쑤셔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도 공감할 수 있었다. 과거의 그 일 자체가 상처가 될 뿐 아니라, 과거의 일과 ‘로젤린’의 기억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기로에 서서 선택을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로젤린을 매우 힘들게 할 테다.
“나는, 로젤린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그래.”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긴 이야기를 들려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익히 보아 온 것이었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뭐든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의 얼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로젤린의 행복과 걔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행복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을지도 몰라. 그럴 경우에 우선되어야 할 건, 당연하게 본인의 의사야. 그리고 로젤린은 자신이 가진 기억과 발타 놈들이 뿌리고 간 종잇조각과 디에즈의 말로 어느 정도 과거를 깨우친 상태지. 그러고도, 지금 그 아이는 여기 있는 거야. 전하의 옆에. 고민은 좀 하는 것 같다만.”
마카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테이블에 성큼 발을 얹어 다가오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 찔렀다.
“로젤린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전하니까, 전하가 직접 한번 물어봐.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후에 로젤린이 남아 있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맹수용 쇠사슬을 준비해야겠지.”
농담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내가 내 욕심에 로젤린 경을 잡아 두고자 눈물 콧물 흘리면서 곁에 있어 달라, 지켜 달라 조르면 어쩌려고.”
마카롱이 훗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거 볼만하겠는데, 구경해도 되나?”
네가 잘도 그러겠구나, 하는 말투였다. 리카르디스라는 사람이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저 믿음은 어디서? 미미가 황당해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이봐요, 전하.”
“왜 그러나.”
“로젤린이 행복해지길 바라?”
뜬금없는 질문에 리카르디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이 행복해지길 바라냐니. 그런 건 당연히…… 리카르디스는 대답을 하려다 입술만 짓이겼다.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조용히 있자 미미가 웃었다.
“나도 그래.”
리카르디스가 울컥 솟은 감정을 가다듬는 사이, 미미는 볼일 다 마쳤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 못다 먹은 디저트를 섭렵했다. 냠냠 쩝쩝하는 소리에 들쑥날쑥하던 감정이 잔잔해졌다. 리카르디스는 마른세수를 하고 미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뭘 쳐다보냐고 한번 성질내다가, 자신이 그리는 행복한 미래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로젤린이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예쁘게 생긴 잡초도 한번 뜯어 먹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도 하고-물론 떨어지지 않겠지만, 이라는 사족이 붙었다- 어쩌다 다치기도 할 테지만, 시간은 상처가 나을 만큼 그 아이에게 허락될 것이라고.
마카롱이 그리는 미래에는 오직 로젤린뿐, 마카롱은 없었다. 그 사실과 더불어 그녀가 말하는 소소하고도 원대한 행복의 내용에 리카르디스는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야 말았다.
물론 그 눈물을 본 미미는 깔깔거리며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 * *
페르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높은 방벽 위로 흙먼지와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새벽 별이 지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이 전선에 부관보다 빨리 일어나시는 분은 사령관님이 유일하실 겁니다.”
페르탄은 머리를 묶으며 다가오는 부관, 진을 보았다.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 걸 보니, 페르탄이 어디에 있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허탕을 친 모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안 주무셨습니까?”
부관 진은 에휴 한숨을 쉬며 품에서 수첩을 꺼내어 무언가를 쓱싹쓱싹 적었다. 가끔 그녀가 하는 행동이었지만, 무얼 하는 건가 궁금해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묘하게 시선이 갔다.
“그런데, 그건 뭔가. 가끔 내 앞에서만 꺼내서 적던데.”
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 부인께 이를 목록을 적고 있습니다. 평소 사령관님께서 사랑의 편지를 보낼 때마다 끼워서 보내고는 하지요. 부인의 말은 들으실 것 같아서. 오늘은 또 ‘전투의 피로가 쌓였음에도 주무시지 않고 홀로 돌아다니심’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꽤 고전하실 겁니다. 소상히 일러 드릴 예정이라.”
어쩐지 답신이 올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머리 감고 잘 말리시는 게 좋다, 고기만 말고 채소도 드셔라, 혼자 돌아다니시지 마시고 호위를 대동하시라 같은 염려뿐이더라니. 페르탄이 피식 웃자 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죽을병에 걸리셨군요.”
아니, 죽을병에 걸리신 겁니까? 도 아니고 확정이었다. 죽을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 보좌관의 단언에 페르탄은 한 번 더 웃었다. 진은 소스라치게 한 번 더 놀라며 그에게 다가갔다.
“모시면서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뵈지 못했는데요. 국경 사령관 부관 배, 사령관님을 웃겨라 장기 자랑 대회에서도 안 웃으셨잖습니까. 바르디의 그 재주를 보고도 싸늘한 표정이셨는데.”
진은 초조해 보였다. 페르탄도 그녀의 불안을 이해했다. 수년간 무뚝뚝하게 명령 내릴 줄만 알던 상관이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고 있었으니. 페르탄은 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성벽 너머, 푸른 새벽을 깨트리는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의 검은 머리를 흩트렸다.
“느낌이 좋지 않다.”
전쟁에 거칠어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은 페르탄이 말하는 ‘느낌’이 얼마나 적중률이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도 전황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페르탄의 불안을 이해했다.
발타의 병력은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러나 발타와 일라베니아를 가로지르는 관문의 주둔군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위기감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마독과 인조적인 마인들이 아직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훌륭한 무기들을 내보이지 않는다? 분명 꿍꿍이가 있었다. 여러 상황을 가정했으나, 관문 주둔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밀려드는 발타군을 막아 내는 것뿐이었다.
진이 손톱을 잘근잘근 물자 페르탄이 그녀에게 사탕을 건네었다.
“저는 초콜릿이 좋습니다, 사령관님.”
페르탄이 품을 뒤져 사탕을 초콜릿으로 바꿔 줬다. 진은 초콜릿을 입안에서 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성벽 너머를 살피는 남자는 기류를 온몸으로 읽어 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페르탄이 말하는 ‘감’이 이런 느낌이라 생각했다. 가슴 안쪽이 술렁였다.
성벽 아래의 병사들이 페르탄을 발견하고 경례했다. 페르탄은 인사를 받아 준 후 품 안에서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어 성벽 아래로 후두둑 떨어트렸다. 병사들이 망토를 펼쳐서 재빠르게 받아 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제는 받아 내는 일도 능숙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의 짤막한 평화였다.
* * *
일라베니아와 발타를 가로지르는 세 개의 관문에서 시시각각 도착하는 파발이 일렀다.
승리하였노라.
승리하였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사람들은 불안을 떨치고서는 노래를 불렀다. 어떤 짙은 어둠도 빛으로 떨쳐 낼지니, 영광의 일라베니아!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일라베니아의 국기를 흔들었다. 잠시 잠잠했던 주점에도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환한 햇살 아래 웃음소리가 퍼졌다. 스타스는 고삐를 쥐어 걸음을 멈추고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옆에 있던 르원이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단장님.”
스타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문제가…….”
뻥! 샴페인의 코르크가 날아가며 소음을 냈다.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바닥에 술을 질질 흘려 댔다. 그걸 목격한 스타스의 표정이 더욱 모호해졌다.
“있군. 확실하게.”
르원도 눈썹을 까딱였다. 그 문제가 뭔지 알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축포를 터트리기는 좀, 많이 이르군요.”
“동감일세. 이만 가지.”
스타스가 말을 재촉했다. 르원은 그 뒤를 따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리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화재의 흔적에서 아직 탄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타스의 뒤를 따랐다.
월장석 성에 도착한 르원은 여러 보고서를 들고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문부터 두드렸다.
“들어와!”
분노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르원이 알기로 그가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낼 만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이 또 일어난 것이리라.
르원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최근 전선에서 올라오는 모든 보고를 분석하는 일 때문에 집무실 안은 엉망이었다. 그 중앙에 어딘가 초췌해 보이지만, 그것마저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리카르디스가 소파에 늘어져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을 때에도 어지간하면 딱딱한 자세를 고수하는 그답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와 달리 그냥 초췌해 보일 뿐인 잇세리온은 퀭한 눈으로 차를 따르고 있었다. 르원은 리카르디스의 곁에 다가가 그의 다리를 주물렀다.
“저 없다고 또 안 주무셨지요.”
하여간 나 없으면 잠도 못 잔다니까. 르원이 투덜거리자 리카르디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종아리를 꾹꾹 눌러 주는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부부간에 으윽…… 할 것 같은 그런 말은 말지. 지금은 뭐라 할 기력도 없으니.”
“무슨 일입니까, 이번에는 또?”
리카르디스가 팔로 눈을 가리고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에 금박을 입힌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르원은 리카르디스의 다리를 꾹꾹 마사지하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초대장을 펼쳤다. 짤막한 문구들을 다 읽은 르원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기나 저기나, 시기가 많이 이르군요.”
그 짧은 사이 잠들었는지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몽롱했다.
“뭐가 또 일렀기에?”
“사람들이 거리에서 축포를 터트리고 노래를 부르고…….”
으으윽, 그만…… 리카르디스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신음했다. 르원은 한껏 안쓰러움을 담아 그를 뒤집고는 머리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뭉친 근육을 풀었다. 맞은편에는 잇세리온이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르원은 대단한 마사지 기술로 리카르디스를 재워 버린 후 다시 방을 나섰다. 내일 밤, 황실 주최의 연회가 열린다.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 연회가 웬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런 때에만 열리는 연회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승전연이었다. 때때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열리기도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정말 승리에 심취해서 벌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너무 일러…….”
* * *
엘피디오의 죽음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귀족은 그 비극으로 일어날 손익 계산이 더더욱 중요한 부류였다. 몇 년간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 1황자와 2황자의 싸움은 리카르디스의 승리로 끝났다. 누구라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황태자였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될 자!
최근 전선에서의 거듭된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전쟁에 관련된 그 누구보다 리카르디스가 조명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를 탐탁지 않게 보던 무리조차도 접근해 리카르디스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같았다. 특별하게 승리에 심취해 있지도, 전에 없이 거만하지도, 조금의 방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 걸고 있는 웃음은 상대방을 한 발짝 물러서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태도는 정중하지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고 끌고 가야 하는 한 나라의 후계자가 혼자서 전쟁이라도 치르는 기세였으니.
리카르디스는 귀족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구석으로 가서 파트너로 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과 이런저런 음식에 손을 댈 뿐이었다.
“아, 이건 처음 먹어 봅니다.”
“일라베니아의 북부에서 간간이 잡히는 귀한 새의 알이다. 귀족들 중에서도 못 먹어 본 사람이 제법 있을 정도지. 많이 먹어 둬.”
부드럽고 농후한데, 거슬림 없이 조화롭게 톡 쏘는 향채 덕분에 입안이 즐거운 요리였다. 로젤린은 마음에 드는지 리카르디스가 밀어 주는 족족 접시를 비워 냈다. 르원이 그의 뒤에서 몰래 속삭였다.
“안 놀아 준다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전하.”
“그거 내 알 바는 아니군.”
“벌써 황제가 된 줄 아는 거 아니냐는데요. 황제가 되면 안 놀아 줘도 되는가 봅니다.”
르원의 시시한 농담에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때마침 종이 뎅 울렸다. 황제의 등장이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황제 폐하 듭십니다! 시종이 소리 높여 그의 행차를 알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으나, 그중 리카르디스만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는 평소보다 수척해 보였다. 장례식 이후 그는 며칠간 금강석 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 리카르디스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정도의 감상이겠지 싶었다.
제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아들을 견제하기 위한 꼭두각시 인형.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다음 황좌를 물려줄 뛰어난 아들이 죽고, 꼭두각시 인형이 살아남았다. 꼭두각시 인형은 충실하며, 훌륭했다. 그 누구도 황가의 핏줄이 아님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누구도 그 이외의 황태자 후보는 찾지 못할 정도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피디오의 장례식 이후로 후계자를 공표해야 된다는 귀족들의 발언이 늘어났다. 슬픔은 기쁜 일로 잊힐 테니, 훌륭한 인재가 다음 세대의 일라베니아를 이끌어나가리란 희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리카르디스에게 아부하기 위해 한마디라도 더 얹는 쪽이 훨씬 많기는 했다. 하지만 황제는 아직 시국이 불안정하니 그럴 때가 아니라며 결정을 미뤘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와 전쟁이 정말 끝나고 평화로운 바람이 일라베니아 전역을 스치고 흐른다 하더라도, 황제가 말한 ‘그럴 때’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한 평민을 황태자로? 그것은 커다란 치욕일 것이다.
그렇다고 뜬금없이 머저리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3황자 틸렌드에게 황태자 위를 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왜 모든 조건이 충족된 2황자가 아닌 3황자에게? 그 의심의 씨앗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황제에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면 그중 어느 줄기는 진실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는 엘피디오의 대항마! 나약한 황제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평민을 데리고 와 방패를 삼았다!’
이 사실은 리카르디스에게도 약점이지만, 제 체면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황제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허물이고 치부였다. 꼭두각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이제 불태우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연회장에 발을 들인 황제는 무릎을 꿇은 군중 속, 꼿꼿이 서 있는 리카르디스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제서야 리카르디스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무릎을 꿇었다. 교본에 나올 법한, 우아하고도 기품이 넘치는 예의였다.
황제는 예상한 바와 같이 시시껄렁한 소리를 했다. 만약 중앙 상비군까지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을 것이다.
식료품이 동나고, 쿠퍼 한 개짜리 빵을 쿠퍼 열 개는 줘야 살 수 있을 것이며, 신경이 예민해진 자들끼리 잦은 다툼이 일어나 거리의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 아닌가. 불온한 분자들이 검을 들고 일어서면 백성들의 안전은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병력을 지원해 준 다음부터 전선에서는 연승하고 있지 않나. 그 정도로 충분했다는 거다.
대충 요약하자면 그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참, 잘나셨어. 라는 감상뿐이었으나 귀족들 중에서는 감화된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맞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었다. 불안해진 민심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은 날붙이뿐만이 아니기에 그들을 안정시키는 것은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발타였다. 심지어 이번에는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사건을 터트리는 만행을 저지르며 큰 전쟁을 예고했는데, 그 대비는 미숙했다. 다행히도 전력이 우세해서 이기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리카르디스가 보기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리카르디스는 옆에 서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 많은 상념이 담긴 듯한 눈으로 황제를 보고 있었다. 가슴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불쾌감을 애써 누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전하가 얘기해.]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품고 있던 미미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리카르디스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로젤린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로젤린.”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순식간에 이완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내심 흡족했다. 이상한 거 보지 말고 좋고 예쁜 거 보고 마음 풀라는 뜻에 부른 것인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그 순간,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의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서 벗어나 바깥쪽을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가 바라본 방향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무슨 일이 터진 것일까. 이놈의 연회는 허구 한날, 하여간. 속으로 욕지거리를 한 리카르디스가 스타스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기 전부터 로젤린의 경계를 눈치챈 그들이 거리를 빠르게 좁혀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의문이 깊어 갈 무렵, 아치 모양의 거대한 문으로 한 남자가 헐떡이며 들어왔다. 변경 주둔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런 연회에 입고 오기에는 부적절한 차림새였다. 심지어는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몇 걸음 걷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차린 것일 수도 있으나, 지쳐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니다.”
호흡이 거칠고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쨍그랑!
소리를 따라 시선이 모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한 걸음 물러나게 하며 자신이 그 앞으로 섰다. 그가 밟고 선 바닥에는 그녀가 떨어트린 유리잔의 파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로젤린, 괜찮아.”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기묘한 정적에 리카르디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그 순간 숨을 가다듬은 남자가 연회장이 떠나가라 외쳤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 * *
땅을 까맣게 덮는 대군이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일되어 있는 잘 훈련된 병력, 질 좋아 보이는 무기와 수백 개가 넘는 공성 무기. 진은 말도 잇지 못하고 차츰 가까워지는 발타의 대군을 바라보기만 했다.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는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개의 가문 중 하나, ‘람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발타의 수도를 거점으로 한 대귀족 가문이었다.
진은 곧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벽 위에 올라와 있는 병사들 또한 그 어마어마한 압력에 굳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무기를 붙들고 있기만 한 병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다녔다.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활 제대로 들어! 기름 들고 와, 준비해! 진은 급하게 달려 성벽의 중앙, 페르탄이 있는 곳까지 금세 도달했다. 페르탄은 다른 사람들의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점점 전진하는 대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헉. 사령관님. 봉화를 올리고 증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이 정도 되는 대군이 나타났다면 총공세라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관문까지 공격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도나 중부의 지원은 너무 늦을 테니 우선적으로 남부에 있는 병력을 끌어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원 병력이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기헤란 산맥와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의 봉화가 불타올랐다. 발타의 궁수가 쏘아 올린 화살이 때를 알리며, 전쟁은 시작되었다.
공성전 1일 차.
산맥과 이어지는 거대한 관문은 견고했다. 그러나 발타 측에서 사용한 공성 무기가 성벽을 넘으며 큰 피해를 낳았다. 불에 타는 거대한 구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서는 방벽과 관문 내의 각종 구조물을 산산조각 냈다. 그것만으로도 피해는 막심했으나, 잘 꺼지지 않는 끈적한 화염과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 은밀하게 퍼졌다.
밤이 지나고 새벽의 여명이 떠올랐다. 햇살 아래 세 줄기의 봉연이 보였다. 다른 관문에서 보낸 신호였다. 세 줄기의 봉화는 ‘적군 국경 근접’을 뜻했다. 지원군의 발이 묶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공성전 5일 차.
대군이 총력을 벌였다. 발타군이 마침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앞선 며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라장이 펼쳐졌다.
진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대한 발타의 병사에게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남자의 발길질에 진은 몸을 구부리며 헛구역질했다. 투구가 나가떨어지자 어깨를 스치는 길이의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음험하게 웃는 병사가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 들었다. 피와 침,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보고 병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계집 아냐. 일라베니아는 내보낼 사내가 없어서 고추 없는 것들도 내보내나?”
사내의 조롱을 듣던 진이 눈을 번쩍였다.
“……대머리, 너. 발타 놈이 아니군.”
진은 사내의 말투에 발타가 아닌 왕국 마람쪽의 사투리가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아까까지 히죽거리던 남자의 낯빛이 변했다.
진은 단검으로 잡힌 머리카락을 끊어 내고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는 그렇게 자부심 넘쳐 보이는 고추에 냅다 검을 내질렀다. 남자가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진의 단검이 남자의 목젖 깊숙이 박혔다.
기헤란 남부 관문. 페르탄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성장시킨 기사와 병사는 마인이라는 초인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처참한 전투였으나 결국은 승리를 쟁취해내었다. 그 선두에는 어느새 얼굴에 하나 더 큰 흉터를 새긴 페르탄이 있었다.
진은 자신이 마주한 병사에게서 얻은 정보를 그에게 전달했다. 마람 왕국의 개입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에도 페르탄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 또한 알고 있던 정보인 듯했다. 발타 측의 병사들이 조롱을 퍼부을 때마다 항상 성벽 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니. 내용을 듣기는커녕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만 쏙쏙 빼먹고 있던 것이다. 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공성전 8일 차.
전투의 피로가 팔다리를 무겁게 했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동료들의 시체가 마음을 짓눌렀다. 간절히 바랐건만, 오늘도 해가 뜨고 말았다. 남부의 다른 관문에서 지원 요청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부 영지와 중부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끈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으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진은 붕대를 갈고 방을 나섰다.
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무기의 피를 닦아 내는 병사들에게서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 땅에는 피와 머리가 잘린 시체가 돌아다니기에, 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관문의 아침은 언제나 연기와 함께 시작했다. 매일 하나의 봉화를 올리며 이상 없음을 알리던 평화로운 때도 있었으나, 최근은 다섯 줄기의 봉화를 피워야만 했다. 다섯 줄기의 봉화는 적과 교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기헤란 관문은 물론이고, 며칠 전 적의 접근을 알렸던 바르비트 관문 또한 매일 다섯 줄기의 봉화를 올렸다. 봉화의 개수만큼이나 위험도는 점점 커졌으나, 진정한 위험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하늘이 연기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을 때야말로, 위험이 닥쳤다 말할 수 있었다. 관문이 제 기능을 잃고, 관문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봉화대까지 함락당하지 않고서야, 어떠한 신호도 보이지 않을 리 없으니.
진은 멍하니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허리에 찬 검이 한없이 무르고 약해 보였다. 꺾여서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남부 관문은 총 세 개. 그중 봉화가 올라오지 않은 바르비트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앙 관문이 무너졌고, 그곳 통해 발타의 군대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테다. 또한, 배후에 적을 남겨 둘 리 없으니, 곧 이 관문까지 물밀 듯 밀려오리라. 버틴다 해도 승산은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패배뿐이었다.
진은 페르탄을 찾았다. 시야가 흐려져 힘들었다. 멀리서 거구의 검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페르탄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모두에게 깃든 두려움이 그에게는 조금도 닿아 있지 않았다. 병사들은 기헤란 남부 관문의 사령관만을 바라보았다.
진은 페르탄이 자신의 어깨를 탁, 하고 붙잡는 손길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페르탄은 며칠 전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 확신했던 때와 같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진은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이러한 상황까지 예측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령관의 낮은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관문은 곧 함락당할 것이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사령관마저 완전히 손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망스러운 듯했다. 관문이 뚫리면 그때부터 펼쳐질 광경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으리라.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 나갈 것이고, 그중에는 병사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눈다.”
바닥만 바라보며 울던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의 말은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 부관 진에게 임무를 맡긴다. 말을 탈 줄 아는 자, 부상 당하지 않은 자들을 위주로 차출하여, 관문을 벗어나 가까운 영지민들을 피신. 중부 관문까지 도달한 후, 그곳의 병력과 연계하여 전선을 재구축하라.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도 눈물을 닦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나의 단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남는 자들은 분견대가 영지민을 피신시키고, 이동할 때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자, 검을 뽑아라! 의미 없는 개죽음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의 시체가 쌓여 저들을 가로막을지니!”
페르탄이 거칠게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검 끝에 아침 해가 걸려 있었다.
“그 끝까지 내가 함께할 것이다!”
힘이 담긴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진은 기겁했다. 후퇴 후 전선을 재구축할 사람이 사령관이 아니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 그가 지금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기사, 보병, 창병, 궁병, 부상자 할 것 없이 울음을 그치고 무기를 뽑았다. 진은 페르탄에게 한걸음 급하게 다가섰다.
“사령관님!”
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페르탄은 그녀의 반박이 들리지 않는 듯 방벽 위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뒤를 따르며 항변했다. 사령관의 부재 시, 병력은 혼란에 빠진다. 황실에서도 사령관님의 귀환을 바라지 않더냐.
하지만 페르탄은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은 듯 위로 올라갔다. 시체가 쌓여 있는 땅이 보였다. 페르탄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해 누구보다 많은 피를 보았다, 진.”
“그리하여 훌륭하게 지켜 내셨습니다!”
“일라베니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죄를 많이 지었다.”
“모두가 그러합니다!”
페르탄은 뒤돌아 성벽 밖, 전장의 반대쪽인 일라베니아를 바라보았다. 저 울퉁불퉁한 산 너머에는 영지가 있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헤란 관문이 지키고자 하는 땅. 일라베니아.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그것만이 오랜 나의 사명이었으나, 그 원대한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해 많이도 헤매었다. 많은 죄를 짓고,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며, 그것만이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여.”
페르탄은 눈을 감았다. 먼 곳을 그리는 것 같았다. 산맥 너머의 가까운 영지, 그리고 멀리 있는 붉은수레바퀴 영지, 에스터까지.
“헤매다, 헤매다, 틀린 길을 멀리 갔다가…….”
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졌다. 자신이 보았던 페르탄은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지켜 낸 위대한 전사였다.
하지만 미처 위로의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것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후회가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관문을 지키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후회를 품고 있었노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의 가장 커다란 마음이었다.
“돌아갈 용기도 없어 걷다 보니 여기로구나.”
진은 결국 눈물을 투둑 떨어트렸다. 더 이상 그의 결정을 돌릴 수 없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페르탄을 지켜보았다. 훌륭한 전사이자, 지휘관, 기헤란 관문의 사령관, 그리고 존경했던 상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진은 무릎을 꿇고 그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일라베니아 력 598년. 낙엽이 쌓이는 계절.
기헤란 산맥과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 완전 괴멸.
사령관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발타 다섯 가문 중 ‘람가’의 가주와 격돌 후 사망.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다.
병력 만 오천 중, 칠천의 분견대는 근처 영지의 주민들을 피신, 중부의 병력과 연계하여 전선을 재구축.
나머지 팔천의 병력은 장렬히 싸워 이틀의 시간을 버텼으나, 전멸하다.
* * *
[언제나 그리는 사벡에게.]
[아름다운 사벡에게.]
[바람이 스치는 기헤란의 성벽 위에서, 사랑하는 사벡에게.]
십여 장이 넘어가는 편지의 수신자란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의미로 채워져 있었으나, 형태가 전부 다른 것이 재주라면 재주였다. 편지는 열어 보지 않았다. 결국은 한 사람으로 귀결되는 수신자에게 전달하기 전까지 잘 보관할 뿐이었다.
어머니, 에델바이스에게.
칼릭스는 아버지의 부관이 보낸 편지 뭉치를 막 전해 받은 참이었다. 관문이 무너지고 급히 후퇴하는 중에 이런 걸 챙길 틈이 있었다니.
“…….”
칼릭스는 편지 표면의 마른 핏자국을 손으로 쓸다가 이내 뭉치를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설마 황제 폐하 앞에서도 그 표정이셨습니까?”
금강석 궁,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의 사후 문제로 황제를 짧게 대면한 칼릭스는 나오자마자 알터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도련님께서는 안 웃으면 흉흉해 보이니 선량한, ‘저는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미소를 잃으면 안 된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 이놈이? 인상을 찌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무표정이었는데 시비를 걸어? 칼릭스는 울컥하다가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알터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기력도 없었다.
작위 계승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되었다. 본래는 전대 백작이 살아 있을 때, 황제의 허가와 공증을 받고 이뤄지는 절차였으나, 페르탄이 전선에서 사망한 관계로 필요한 서류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서류는 죄다 붉은수레바퀴 영지의 성에 잠자고 있었다. 전시이다 보니 특례법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황제가 무척 깐깐하게 굴었다. 분명 뭔가 있겠다 싶어서 자세를 낮춰 황제의 기분을 맞춰 준 덕에 이유는 대충 알아내었다.
국경 사령관이던 제 아버지에게 황성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몇 번이나 전달했건만, 듣지 않았단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충성심은 내 익히 알고 있다 어쩌고 하긴 했으나, 결국은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도 의심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제없는 후계자에게 언제까지 작위를 안 물려줄 수도 없으니, 정식 절차대로 진행하는 정도의 시간은 두고 지켜보겠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백작 위를 이어받지 않는 이상, 집단에서 큰 발언권을 얻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작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할 듯했다.
칼릭스는 황성에 온 김에 로젤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월장석 성에 도착한 칼릭스는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수습 기사 헤사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로젤린 경, 칼릭스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
안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칼릭스는 열리는 문을 따라 들어갔다. 따사롭고 밝은 창밖과 달리 방 안은 어둑하게 그늘져 있었다. 로젤린은 창가에 서서 막 들어오는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칼.”
“누님.”
헤사가 잽싸게 방을 나갔다. 칼릭스는 분위기 파악이 빠른 소년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헤사 군도 많이 컸군요.”
“처음 만났을 때보다 3.7센티.”
“…….”
그런 구체적인 수치를 바라지는 않았다. 제 누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수습 기사의 키를 꼬박꼬박 재 볼 만큼 섬세하지는 않으니, 눈대중으로 나온 수치이리라. 그럼에도 지나치게 상세해서 무서웠다.
“칼릭스도 좀 컸어. 1.6센티.”
칼릭스는 은근히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우선 승계 문제와 관련된 얘기를 로젤린에게 들려줬다. 당분간은 발이 묶이겠지만, 최대한 빨리 처리한 후 따라가겠노라고. 칼릭스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내쉬었다.
정적 속에서 두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것에 비하면 어딘가 퀭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남매는 요 며칠간 굉장히 바빴다. 애도를 보내오는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고, 중부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령의 문제로 상의도 하고, 황제도 만나야 했고, 승계 문제 등등. 한 사람의 공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쏟아졌다.
칼릭스는 모두가 자신을 일에 잠기게 해서 미처 슬픈 감정을 떠올릴 수도 없게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대고는 고개도 뒤로 꺾었다. 칼릭스는 턱을 괴고는 테이블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둘 다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일이 대충 일단락되자 미뤄 둔 피로가 밀려왔다.
“힘들어.”
“저도요.”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슬펐는데 지금까지 슬픈 걸 까먹고 있었어.”
“……저도요.”
정말 그런 책략이었던 것인가? 칼릭스는 자신이 만약 바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제 아버지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 있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도 몇 번이나 건넜다.
쇠가 담금질 되며 서서히 단단해지듯,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페르탄의 죽음’에 단단해졌다. 부고가 도착했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는 지금도 눈물보다는 한숨만 나왔다.
“비극적인 일이 닥치거든 울기보다 헤쳐 나아갈 방법부터 생각하라 하셨죠.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시더니 성공하신 것 같네요.”
칼릭스는 어이가 없어져서 웃으며 얼굴을 마구 쓸었다. 그래도 피로가 걷어지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유산 문제는요 누님.”
“대충 알아. 내 몫은 거의 없지?”
매년 새로 작성하여 공증받는 유서에는 후계 문제를 비롯한 재산 분할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올해분은 확인해 보지 않았으나, 과거에 폐기된 여러 장의 유서는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에 투신한 이후부터 언제나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니 올해도 같은 내용일 것이다.
한때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였던 로젤린. 그녀는 구색을 겨우 갖출 정도의 결혼 지참금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인적, 물적 재산도 붉은수레바퀴 령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 로젤린이 파악하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아직 불완전했으니까.
“……알고 계셨네요.”
로젤린은 피곤한지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다툴 때 아버지가 보여 주셨어.”
제 아버지지만 정말 성격 별로였다. 딸이 좀 다른 길을 간다고 바로 유산부터 줄이겠다 협박하다니.
“그때 씩씩 화내면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결혼 지참금을 어디에 쓰냐고, 그딴 돈 아버지나 많이 쓰시라 했지.”
점잖은 두 사람이 제법 격하게 다퉜던 때의 얘기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엄청 속상했는데, 나중에 그 유서가 도움이 많이 됐어.”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음, 처음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1황자 파의 첩자라며 의심받았거든. 그런데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딸을 내쳤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그런 의혹이 사라지게 된 거야.”
확실히 세간에 퍼진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제 딸을 첩자로 집어넣기 위해 그런 연극을 벌일 인간은 아니었다. 그가 내쳤다고 하면 내친 것이었다. 로젤린의 충성심을 그런 방식으로 확인했을 줄이야. 칼릭스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애초에 그런 효과를 노리고 유서를 작성하신 게 아닌가? 했던 기억이 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뭡니까 그 삐뚤어진 애정은. 어머니에게는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식들은 좀 강하게 키우는 편이셨으니까. 그래도 그게 정말 나에게 힘이 되긴 했어. ‘돌아갈 수 없으니까 앞만 보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정말 극단적인 응원이네요.”
로젤린은 살짝 웃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햇빛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심이 섰어.”
과거의 일을 말하는 것 같기도, 현재의 다짐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말이었다.
* * *
일라베니아의 최남단에 설치된 관문으로 형성되어 있던 전선이 밀려났다. 그것은 방벽 밖에서 이뤄지던 전투가 일라베니아 제국의 영지 내에서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기헤란 관문의 사령관이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판단으로, 근처 영지의 영지민들을 피신시켰다. 그러나 모든 영지를 챙길 수는 없었다. 발타와 인접해 있던 남부 영지의 대다수는 초토화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지금도 발타의 검은 손길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또 다른 남부 관문의 사령관인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전황이 완전히 뒤바뀌기 전에 병력을 보존하여 후퇴했다.
그녀의 영지인 비스타는 난공불락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방벽 하나만 세워져 있는 관문과 달리, 비스타에서는 이런저런 전략과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거친 공세에도 무너지지 않고 발타군 일부의 발을 묶어 둔 채 공방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런 자세한 소식이 아직 전달되기 전, 남부 관문이 함락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수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기병 몇 만, 보병 몇 만, 궁병을 몇…… 아무튼 시급한 상황이니 최대한 중부를 지원하여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더 나아가 발타를 뿌리 뽑을 수 있도록 하라.
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귀족 그 누구도 아닌, 2황자 리카르디스였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니 황가가 직접 나서는 것이 마땅하며, 승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리카르디스가 나서면 흔들리는 민심이 안정되지 않겠느냐는 명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리카르디스는 예상했었다. 때문에 험난한 앞길을 생각하며 침울해하지도, 기어코 다시 한번 자신을 사지에 밀어 넣으려는 황제의 태도에 분노하지도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전쟁에 관련된 문제로 며칠 밤낮을 새우다 오늘에야 겨우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서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글자들이 흔들거렸다. 몽롱하게 흐려지더니, 까무룩. 눈앞이 어두워졌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떴다. 아까와 달리 방 안이 어두웠다. 자신이 잠을 자는 것을 보고 옳다거니 한 잇세리온이 재빠르게 촛불을 끄고 나간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했다. 허리 위를 덮은 낯선 온기만 아니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그는 몸을 살짝 굳히고는 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검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형상을 어슴푸레하게 그려 냈다. 오랜만에 보는 로젤린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사후, 로젤린은 하루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장례 문제, 애도의 뜻을 보내오는 귀족들과의 만남, 전쟁을 위한 단련, 리카르디스의 호위 등. 어지간하면 힘들어하지 않는 로젤린이 연무장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조는 모습을 보고 레이몬드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는 소식을 리카르디스도 들었다.
오늘도 테라스 바깥 나무에서 호위를 하려다가 잠을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불을 끌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턱을 괴고 한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녀가 눈을 떴다.
“……로젤린.”
“예.”
“내 호위 기사에서 해임한다고 하면, 그대는 어쩔 생각이지?”
로젤린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몰래 따라가서 지키면 됩니다.”
“몰래 따라와서 지키지 말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네가 해 봤자 나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이 보였다.
“그때 욕실에서 분명 말을 잘 듣겠다 하지 않았나.”
로젤린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괸 채 몸을 모로 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 나는 그대를…… 전장에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아.”
그녀의 눈이 불만스럽게 변했다.
“이건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개인적인 사정 이외의 이유다. 굳이 따지자면, 그대의 사정 때문이지.”
로젤린이 누운 상태로 팔을 뒤로해 부스럭거리더니 등 쪽 어딘가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아마도 바지의 허리 부분에 끼워 둔 모양이었다. 마카롱도 그러더니, 요즘 묘한 곳에 종이를 보관하는 게 유행인가 싶었다. 로젤린이 꺼낸 종이는 마카롱이 저번에 자신에게 건네준 것과 같은 발타의 공작물이었다.
“이걸 보신 겁니까?”
“그것 전에도 조금은 알고 있었지.”
“어떻게 이게 저랑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요.”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 신기해하는 걸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찡했다. 귀여워.
“나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일라베니아의 황자 정도 되는 위치다 보니 이런저런 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더군.”
로젤린은 펼친 종이의 내용을 다시 읽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시선이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쯤에 도달하였다 생각했을 때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발타가 얼마나 악랄한 짓을 벌이고 있건 간에,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일라베니아가 과거에 저지른 일과 더불어, 그로 인해 벌어진 대륙의 몰락. 그 죗값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지. 그 명분과 그대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흐렸다.
“있음을…… 아, 알고 있나?”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조금은요. 전하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대가 들고 있는 종이에 나온, 그 박해받은 ‘마인들’중 그대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대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 병사한테 창대 끝으로 맞았던 때에 숨도 못 쉬도록 아팠던 건 상세하게 기억나는데, 대부분은 흐릿합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젤린은 종이에 정신이 팔렸는지 그의 반응을 미처 보지 못했다.
“황성에서 지내다 보니 과거를 연상할 만한 부분이 많은 터라. 여기는 몇백 년 전이랑 그다지 변한 게 없어서요. 신전도 불에 타기는 했지만 복구한 모양입니다.”
한없이 어려 보였던 그녀가 갑작스레 몇백 년 연상처럼 느껴졌다.
로젤린은 들고 있는 종이를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종이에 적혀 있는 일라베니아의 수많은 악행들. 그 한 단어, 한 문장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리라.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대가 나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따라간다고 한들, 나는 일라베니아 황가의 아들이다. 그대는 결국 일라베니아를 위해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대를 아프게 했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얘기야. 그리고 싸워야 하는 상대 중에는 죄 없는 병사들과…… 디에즈가 있겠지.”
리카르디스는 입술을 잘근 문 채, 종이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로젤린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대는 이 모든 걸 알고 나를 지키겠다 진정 말할 수 있겠나?”
“예.”
대답이 예상보다 너무 빠르고 명확해서 리카르디스는 약간 당황했다.
“음, 아까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일라베니아가 아니라 전하를 지키기 위해 참전합니다. 결과적으로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황가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로젤린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봤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해할 즈음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친, 아들은 아니시니까? 그래서 이번 전쟁에도 황제가 내보내려 하는 것 아닙니까?”
리카르디스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은근슬쩍 ‘황제 폐하’에서 ‘폐하’라는 호칭을 빼 버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알고 있었나?”
“예.”
“언제부터?”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아버지와 많이 다투던 시기에 들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리카르디스는 고인이 된 페르탄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로젤린이 가진 맹목적인 충성심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발타가 내세운 명분이 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셨지만…….”
로젤린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것 또한 실질적으로 발타가 하고 있는 일을 봐야 합니다. 그들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얼마나 타당하건,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
리카르디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올곧은 사람이었다. 사랑과 자비에 관해 서술된 책에서 볼 법한 대답이었다. 피는 피로 씻기지 않는다. 죄를 죄로 덮어서는 안 된다.
“원한이 있느냐, 없느냐 하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원망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을 테고요.”
“……그렇겠지.”
“엘피디오 전하의 장례식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라베니아 황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모두 죽인다고 이 원한이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저는 대체 과거의 죗값을 누구에게, 얼마나 물어야 합니까?”
어려운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누굴 미워해라, 누구는 미워하면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많이 배웠지만, 아직 모르는 것도 많기에 섣부르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 결정으로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결과가 따라온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생각하고요.”
“……글쎄, 그대는 모르는 게 많다고는 했지만, 굉장히 현명한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로젤린이 씩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와중에도 가슴이 설렌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로젤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먼 옛날에요.”
동화책의 첫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아주아주 먼 옛날’은 지독하리만큼 처절한 현실이리란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엄청 아팠습니다. 무섭고 괴로웠고.”
“……그래.”
“도망치고 숨고 싶었습니다. 흐릿하지만 기억이 납니다.”
시선을 멀리 둔 채, 인상을 간간이 찌푸려 가며 말하는 그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런데 딱 하나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지키고 싶다.”
리카르디스는 지나온 나날들의 로젤린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등을 보이며,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반드시 자신을 지켜 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그때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과거의 괴로웠던 시간보다 훨씬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그,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지낸 긴 시간이 겨울잠을 자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설명도 참 잘하는군.”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칭찬하자 로젤린이 웃었다. 그녀가 곧 말을 이었다.
“그렇게 긴 겨울잠을 자고 눈을 뜨니…… 붉은수레바퀴 성이었습니다.”
또 다른 시작의 첫 장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깃발의 붉은수레바퀴 문양을 보고 기억이 났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하얀밤의 주인을 지킨다.’ 아마 그것이 ‘로젤린’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
로젤린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제 과거와 현재는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소중한 걸 지킨다.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때에도 기억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가진 진정한 힘이 마력이나 육체의 강인함 따위가 아니란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은 그녀의 입으로 구체화 되었다. 지키고 싶다. 그 맹세 자체가 로젤린을 움직이게 하고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의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칼릭스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찾으라 했습니다. 알던 사실이 뒤바뀌고, 상황이 달라져 혼란스러울 때에 그것이 중심을 잡아 줄 수 있을 거라고요. 저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것이 제 중심입니다.”
로젤린이 말한 대로였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눈앞의 로젤린과 지금은 없는 ‘로젤린’.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단순히 외모가 같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것이 로젤린이 다른 이들에게 ‘로젤린’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이질적이지만,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는 그 어떤 것보다 단단했다.
“전하께서는 전쟁과 그로 인한 위험이 제가 감당해 낼 문제가 아니라 하셨지만, 저는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검을 들겠습니다. 전하와 하얀밤 기사단, 붉은수레바퀴, 포도밭과 상냥한 사람들, 어린아이들. 비스타의 상인들. 하지만…….”
침대에 바르게 누워 있던 로젤린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시트를 매만지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손을 맞잡았다. 로젤린은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손을 살피듯이, 그의 길쭉하고 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맞닿는 같은 형태의 온도가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리카르디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의 힘이 닿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과거에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이번에는 지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지금의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 힘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가볍게 맞닿아만 있던 손이 간절하게 그의 손을 쥐었다.
“전하께서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닿았다. 로젤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피부에 닿았다. 무게가 실리자 깍지 낀 손이 서서히 시트에 닿았다.
“로젤린.”
“예.”
그는 로젤린의 아주 오랜 과거를 눈앞에 그렸다. 어린아이는 바싹 마르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아득한 긴 시간을 거슬러 가야만 했다. 너무나도 멀어 보여 차마 닿을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오랜 고통은 로젤린과 함께 겨울잠을 자고, 그녀와 함께 깨어나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손이 닿는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아주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로젤린은 아까 ‘아주 먼 옛날에는요’ 하고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위해 운을 띄웠던 것과 리카르디스의 말이 어딘가 비슷하다 느꼈다.
“예.”
“그대는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무섭지도 괴롭지도 않을 테고.”
이마가 맞닿아 있는 채라 숨이 가까웠다. 속살거리며 닿는 숨이 간지러워 로젤린이 살짝 웃었다.
“숨바꼭질과 술래잡기에 재능이 없는 나랑 놀아 주고 있겠지. 아마 십 초에 한 번씩 들키고, 오 초에 한 번씩 잡힐걸.”
그녀가 좀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카르디스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행복하고 좋은 기억들만 그대에게 남도록 내가, 반드시.”
“예.”
도와 달라는 말에 답에 어울리지 않는, 두서없고 장황한 말이었음에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밀리아, 세티스티아, 붉은수레바퀴 백작, 황제, 디에즈, 케틀린.
살아남기 위해 많은 것을 잃어 왔던 투쟁의 시간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하찮은 목숨이라 생각했으나, 오늘에야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