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짝짝짝짝짝…….
방 안을 울리는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과 그녀의 하인들, 큰뿔산양 후작가의 하녀들, 그리고 클로에까지. 모두 감명 깊은 표정으로 박수쳤다. 그 옆에서 레티시아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듯한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이 어찌나 완벽한 작품이란 말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 없는!
“아름다우십니다, 로젤린 경. 정말로요.”
“고맙습니다, 레티시아 경.”
클로에는 지난날의 악몽을 잠깐 떠올렸는지 눈물을 글썽이더니 손수건으로 톡톡 눈물을 훔쳐 냈다.
“로젤린 경, 한 번만 제자리에서 돌아 볼래요?”
로젤린이 빙그르르 돌았다. 하얗게 빛나는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클로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남작 부인, 정말….”
“예, 제 인생의 역작입니다! 제 모든 기술과 인력을 동원한!”
로젤린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구경했다. 과거 로젤린의 어머니, 에델바이스가 사 준 드레스도 소매와 치맛자락이 풍성하고 반짝반짝해서 예쁘긴 했지만, 그녀의 안목으로도 지금의 드레스가 자신에게 훨씬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마를 둥글게 부풀린 일반적인 드레스가 아니었다. 몸의 선을 따라 딱 달라붙어 내려오는 드레스 라인은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었으나 엉덩이 아래를 기점으로 뒤편으로 넓게 퍼졌다. 흰색의 천에는 레이스와 자수를 덧대었고, 반짝거리는 보석도 촘촘히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드레스의 상체 부분은 몸 안쪽을 감싼 불투명한 흰색 천 위로 레이스가 겹쳐져 있는 형태였다. 덕분에 가슴을 덮은 하얀색 천으로부터 하얀 꽃과 식물이 퍼져 나가며 자라나는 것같이 보였다. 그 레이스는 어깨와 쇄골을 넓게 드러내며, 팔을 꽉 감싸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겹쳐진 천이 없이 레이스로만 덮은 팔과 가슴 윗부분은 로젤린의 살결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로젤린이 신은 신발 또한 하얀색에 보석으로 촘촘히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대체 보석이 몇 개가 달린 것인지 모를 화려한 귀걸이를 장착한 상태였다.
“귀가 엄청 무겁습니다. 무기로 써도 될 것 같은데요.”
로젤린은 여차하면 귀걸이를 던져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클로에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케이크!”
“예?”
“그 귀걸이 한 쌍이면 케이크 860개 정도를 살 수 있어요, 로젤린 경!”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저, 저는 대체 귀에 뭘 걸고 있는 겁니까?”
860개의 케이크?
“로젤린 경도 참. 귀걸이를 걸고 있잖아요? 참고로 옷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니까요. 먹다가 묻히고, 누구 패서 피 묻히면 안 되는 거 아시죠? 피는 잘 빠지지도 않아요.”
“먹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어쩜, 착하기도 하지.”
엄청난 결의가 느껴졌다. 클로에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움직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목각 인형에다가 드레스를 입혀 둔 것 같았다. 클로에가 호호 웃었다.
“무도회 드레스가 아니라 예복 같네요. 하얀색이라 그런가.”
건국제 무도회에서 흰색이 허용되는 것은 오직 황족의 피를 이은 자들과 그들의 파트너뿐이었다. 수백 중에 오십 명도 안 되는 숫자. 모르긴 몰라도 많은 자들의 이목이 쏠릴 게 분명했다. 그것은 비단 그녀가 입은 드레스의 색뿐 아닌 많은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을 테다.
“약간의 문제를 꼽자면…….”
지금 로젤린은 갓 태어난 동물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네 발로 기어 다닐 것 같았다.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엉덩이 넣고.”
클로에가 뒤로 쭉 빠져 있는 로젤린의 엉덩이를 밀었다.
“가슴 펴고. 턱은 살짝 아래로.”
클로에는 계속해서 로젤린의 턱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날개 뼈 중앙을 부드럽게 눌렀다. 평소에 보던 로젤린의 곧바른 자세였다.
“음, 좋아. 이렇게 다녀야 해요, 알겠죠 로젤린 경? 엉덩이 빼면 혼나요.”
클로에가 가볍게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쳤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 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클로에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참을성도 없으셔라.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마중 나오신 것 같아요.”
로젤린은 조심조심 움직이다가 그녀의 말에 화색을 지었다. 로젤린이 급하게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했다.
“저, 어디 이상한 곳은 없습니까?”
“그럼요.”
“예쁩니까?”
클로에가 새끼 고양이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쩜…… 귀엽기도 하지.
“세상에서 제일.”
클로에가 단언하는 말에 로젤린의 자신감이 상승했다. 라리티아 남작 부인도, 그녀의 하녀들도, 레티시아도, 클로에도, 모두 깜짝 놀라며 칭찬해 주지 않았나.
로젤린,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의 자신은 매우 심각하게 예뻤다. 이 정도면 전하께서 깜짝 놀랄 것이다! 로젤린이 마음의 준비를 끝낸 모습을 보고 클로에가 손짓했다. 문이 열렸다.
* * *
성을 둘러싼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병장기가 철컥, 덜그럭 소리를 울리는 바깥과 달리, 벽 하나를 두고 안쪽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춤을 추기도 하고,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황실 내에서 가장 넓은 파티 홀은 과장을 보태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 내, 무도회에 입장 가능한 단원들은 모두 참석한 상태였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 속 웃고 있는 그들은 연회를 즐기는 듯 보였으나, 그 누구의 눈에서도 방심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어떤 감미로운 음악도, 맛있는 음식도 기사들의 경계를 늦추지는 못했다.
아직 황제와 디에즈, 하카브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목적 없이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과 인사를 나눴다.
“인기가 좋으십니다, 단장님.”
파르딕트가 음식 접시를 들고 스타스에게 접근했다. 인기가 좋다는 말을 하면서도 시기나 질투 같은 감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스타스에게 연이어 춤을 신청한 여자들이 스물이나 갓 넘었을까 싶은 어린 영애들이라 그런 듯했다. 스타스가 그의 말을 듣고 픽 웃었다.
“그러는 경은 인기가 없군.”
스타스도 파르딕트가 춤을 신청하고 거절당하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다. 파르딕트가 껄껄 웃었다.
“수도 아가씨들의 취향은 아닌가 보죠. 알루웨에는 제가 한번 뜨면 난리가 납니다.”
“자네 가문 영지라고 날조하지 말게.”
“날조라니요, 제가 단장님을 한번 고래무덤에 초대해야겠습니다.”
툴툴거리던 파르딕트가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 위에 놓인 유리잔을 잡았다. 스타스가 그의 발을 꾹 밟았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에서 ‘우리가 놀러 왔나?’라는 뜻을 읽어 내고 파르딕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과 왕족이 드나드는 문은 1층, 황족과 그 파트너가 입장하는 곳은 2층으로 연회장 안의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2층 문이 열리면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든, 대화하든, 음식을 먹든, 밀회를 나누든 상관없이 그곳으로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빛이 부서져 내리는 가운데 하얀 옷을 입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는 황족들의 자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건 고귀함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2층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설원의 월계수,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전하 듭십니다!”
“강철발굽, 테레지아 브레헤 백작 영애 듭십니다!”
엘피디오였다. 인성과 상반되는 외모인 만큼이나 하얀 예복이 잘 어울렸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오는 아가씨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고고한 자태를 선보였다. 스타스는 직감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든 것이 황족의 입장이 아닌, 그 옆의 아가씨로 인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파르딕트도 그 여자를 보고 커헉, 하는 소리를 냈다.
“강철발굽의 미친 개망나니가 언제 풀려났습니까?”
스타스가 깜짝 놀라 그의 발을 다시 꾹 밟았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소리 낮추게.”
“아차, 아차. 예.”
강철발굽의 미친 개망나니, 테레지아. 과거 리카르디스에게 하루에 청혼서 스무 장을 보내고, 그의 뒤를 몰래 염탐하고, 그의 자는 모습을 보기 위해 높은 나무에 올라가는 등……의 화려한 전적을 가진 아가씨였다.
이후, 참다못한 그녀의 아버지 강철발굽 백작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 별장에 처박았다더라, 그 별장에서 하루에 몇십 장씩 성전만 필사하고 있다더라, 소문만 무성하게 있었는데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테레지아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조숙녀인 양 사랑스럽게 웃으며 엘피디오와 나란히 발맞춰 내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엘피디오를 둘러쌌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세력이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였다. 엘피디오는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갖은 공을 세웠더라도, 지지 기반이 단단하니 불안감이 가시는 모양이었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그건, 정말 그렇군.”
외적으로 보기에는 둘 다 잘생기고 예쁘니 흠잡을 구석 없지만,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흠잡을 구석밖에 없다는 게 정말 잘 어울렸다. 강철발굽 백작이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제 딸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 그녀의 특이한 기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타스는 돌아다니는 르원을 손짓해 불렀다.
“경계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 예의 주시하라.”
“예. 단원들에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르원에게 그 경계 대상이 누구라 꼬집어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스타스는 거대한 커튼이 물결치는 뒤에서 르원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아직…… 모습을 안 보이시는군.”
그의 귓가로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에 가려져 있는 스타스를 보지 못했기에, 그를 지척에 두고 그의 주인을 욕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마인 하나를 등에 업고는 기세등등하지 않소. 이러다간 폐하가 건국일을 선포하고 난 다음에야 연극의 주인공처럼 나타날는지도.”
“이번 파트너도 붉은수레바퀴라 합디다.”
“내, 참. 리카르디스 전하도 전하거니와, 붉은수레바퀴의 딸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있으면 물어라도 볼 것인데 허구한 날 변방에만 박혀 있으니 원!”
“어렸을 때부터 그 집 딸이 유난스럽지 않았습니까. 출신이고 뭐고 간에 얼굴이 반반하니 홀랑 넘어갔겠지요. 정신 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
“…….”
남자들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들은 그들의 진영에 붉은수레바퀴의 딸보다 유난스럽고, 미천한 출신이고 뭐고 간에 반반한 얼굴에 홀랑 넘어간, 정신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또 다른 영애의 존재를 자각한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심기 불편한 듯 크, 크흠 하며 애써 강철발굽의 테레지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일라베니아를 끌어갈 유력한 후보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자들이 웃는 낯으로 엘피디오에게 접근했다. 스타스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기듯 바라보았다. 음악이 두 번 정도 바뀌었을 때였을까.
여기저기, 왼쪽, 오른쪽, 뒤쪽. 서로를 향하거나 아슬하게 빗겨 나간 시선들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목이 살짝 위를 향해 있었기에, 스타스는 리카르디스가 무도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전하 듭십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백작 영애 듭십니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멍하니 위층을 바라보았다.
“……천사?”
아까 전에 천한 출신, 얼굴만 반반…… 운운했던 자의 목소리였다. 확 뒤바뀐 그의 태도를 그저 웃어넘길 수 없었던 이유는, 스타스가 그 남자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장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 건국일마다 단출한 차림새로 나타났던 리카르디스 또한 아름답고 손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고고한 한 송이의 꽃 같았으나……. 체스 게임의 승패로 장신구를 더하고 빼는 구질구질한 나날을 탈피한, 시녀들의 혼이 담긴 치장의 저력은 가히 치명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아, 아름다워!”
사실 건국제에 황족들이 입는 하얀색 예복은 매년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한 형태였다. 다른 이들처럼 색으로 승부할 수 없으니, 화려한 형태를 덧대고, 금실, 은실을 사용한 화려한 자수를 덧대고, 또 두르고.
촌스럽다거나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과하다고 느낄 만한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아주 적당히, 과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단정하여 어딘가 금욕적으로 느껴지는 옷의 형태! 색은 고고하고, 형태는 단아하고, 장신구는 화려하게 띄워 주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마침표는, 얼굴로!
어린 아가씨들이 눈물지었다. 다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환각을 보았다.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그런 환각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결 좋게 빛나는 은발, 몸의 선을 따라붙는 복식은 섬세한 자수로 인해 더욱 그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여러 개의 반지와 치장한 장신구들이 도리어 모자라 보일 정도의, 저 얼굴. 저, 몸. 완벽하다. 신이 빚은 피조물 중 가장 완벽한 형태!
리카르디스가 살짝 뒤를 돌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다들 그 후광에 가려 그의 파트너를 깜빡 잊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이 공간 안에 리카르디스를 모르는 자는 있어도 로젤린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타국의 귀족들은 그녀를 소문으로만 들었다. 마인이고 되게 강하고 뭐, 검은달을 작신 밟아 주었고, 1황자 파에 속하는 가문임에도 자신의 신념으로 2황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희한한 행보만큼이나 그녀의 외적인 부분도 많이 퍼져 있는 상태였다.
좋게 봐 줘도 평범한 수준이라는 평가였다. 매섭고, 날카롭게 쭉 찢어진 눈매도 눈매고, 체구도 아담한 맛이라고는 없이 길쭉하고 튼튼하고 탄탄하니 여기저기 보이는 어린 아가씨처럼 아기자기하고 풍성한 솜사탕 같은 드레스가 어울릴 리가 없었다.
‘음…….’
어?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아니 예상과는 달랐다.
리카르디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계단 하나하나를 내려오는 발걸음은 사뿐사뿐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았다. 여러 조명이 비춘 피부는 진주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가운데,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입술은 과하게 붉지 않아 자연스러웠다.
계단의 뒤로 로젤린의 하얀 드레스 자락이 스르륵 끌렸다. 몸의 선에 딱 달라붙다가 엉덩이 아래부터 퍼지는 드레스는 인어의 꼬리처럼 우아하게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였다.
굴곡진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트려 날카로운 눈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매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같이, 맹수의 눈과 같이 어딘가 장엄한 기세가 느껴졌다. 어깨는 바르게 펴져 있고, 곧은 자세는 기품이 어려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는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고작 스물 조금 넘은 여자에게서 받을 만한 느낌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 여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로젤린을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의식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녀는 개별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생각해 보자면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으나, 붙여 놓고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남자 혼자 멀대같이 크거나, 여자가 난쟁이처럼 보일 정도의 부자연스러운 키 차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둘의 조화에 한 몫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보다도 이따금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미소 짓는 두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서 분위기가 녹아들며 맞춰지고 있었다. 같지 않아 겹쳐질 수는 없으나, 한 그림의 퍼즐같이 맞아떨어지기는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조화가 제법 묘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는 로젤린만 담고 있었다. 환한 조명 아래 로젤린은 말 그대로 반짝, 반짝. 빛나는 중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풍경이 휙휙 달라졌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넋을 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그 끈질긴 시선에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딱, 두 시선이 맞아 떨어졌다.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까까지 검날같이 주위를 겨누던 예리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리카르디스는 무형의 기운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허리에 제 손을 두었다. 로젤린이 멍한 표정을 천천히 누그러트리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빛을 받는 눈가가 반짝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에 난 땀을 자신의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바보처럼 굳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멈춘 시간 속에 그녀의 머리카락, 눈, 눈썹, 얼굴에 있는 솜털부터 옷의 차림새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보이는 반면 머리는 점차 혼몽해졌다. 문이 열리고, 아름답게 꾸민 로젤린을 본 후 아무 말도 못한 채 일 분이 그냥 흘러 가 버렸다.
문이 열렸을 때만 해도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기대를 품고 있던 로젤린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침울해졌다. 자신이 바보처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실망한 듯 보였다.
그녀가 비 오는 날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본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시간이 이미 너무 흘러 버렸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건만, 놓쳐 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클로에가, 상단에 큰 타격을 입어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는 그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지금, 파트너가 몇 시간 동안 씻고, 향유로 문지르고, 닦고, 만지고, 바르고, 입는 개고생을 하고 나타났는데, 예쁘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 그러고도 전하가 남자입니까? 그러고도 사람이야! 하고 윽박지르고 싶어 하는 살벌한 얼굴이었다.
이후 리카르디스가 진심을 다해 예쁘다고 칭찬했음에도 로젤린은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그대가 제일 예뻐!]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진짜야, 내가 본…….]
[전하가 더 예쁘십니다…….]
확실히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자면 여지없이 그렇다 해야 할 테지만, 리카르디스는 곧이곧대로 ‘그건 그렇지’라는 대답을 할 정도의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그는 로젤린의 말에 부정한 후, 최선을 다해, “저기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나? 경이 너무 예뻐서다.”라던가, “오늘따라 하늘의 별이 흐드러졌다. 경이 너무 눈부셔서 별인 줄 알고 마중 나왔나 보다.” 따위의 10세 미만 소녀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법한 개수작을 부렸다.
로젤린은 그 내용보다 리카르디스의 필사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마음을 풀고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 자체를 받아들인 건 아닌 듯해, 리카르디스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이곳을 쳐다보는 젊은 남자들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정확히 로젤린을 담고 있었다. 흥미, 혹은 호감이 느껴지는 눈빛.
리카르디스가 가볍게 제 볼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놈팡이들이 나중에 로젤린에게 접근해 손에 입 맞추며 아름다우시다 개수작질을 하겠지.’
애써 걸고 있는 온화한 표정 위로 살벌한 기세가 비쳤다. 심지어는 로젤린이 예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할 거라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려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자신이 ‘아름답다’ 라고 한 말은 의례적인 칭찬이라 받아들였으면서! 물론 거기에 제 잘못이 있으니 그녀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쏟아지는 시선과 감탄에 로젤린이 으쓱하는 걸 본 리카르디스는 혈압이 올라서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안된다. 이대로는 안 돼. 진짜. 내가 제일 먼저 기쁘게 해 줄 거야. 다가오는 놈은 죽인다.
잠시간 머릿속으로 모의 살인을 했던 리카르디스가 제정신을 되찾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남을 탓할 게 아니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더해서 못할망정, 할 말은 해야지.’
나란히 발맞춰 걷던 중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불렀다.
“로젤린.”
눈이 마주쳤다. 리카르디스는 마음속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오늘 그대가 매우 아름다워,”
하고 그녀의 허리에 얹은 손에 힘을 줬다.
“내 마음이 설렌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13살 소년도 자신보다는 말을 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허접한 칭찬 문구에, 로젤린은 전에 없는 반응을 보였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속눈썹이 깜빡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지금 망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로젤린이 수줍어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로젤린은 수줍어하는 게 맞았다.
로젤린은 여태껏 리카르디스가 한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은 죄다 그의 내면에 가득 쌓여 있는 상냥함의 발로라 생각했다. 하얀 거짓말.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머리를 헝클어트릴 정도로 고민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둔한 로젤린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칭찬이 더해질수록 리카르디스 전하는 참 상냥하시구나 하는 생각만 강화되어 가던 중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연회장. 로젤린은 여지없이 자신이 할 일을 수행했다. 위험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느라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누군가의 끈질긴 시선을 빠르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집요한 눈길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눈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이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대리석에 반사된 빛무리가 넘실거리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리카르디스였으나, 환한 조명 아래의 그는 정말 벽에 그려진 그림이 튀어나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표정이 로젤린의 마음 어딘가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허리에 올라와 있는 단단한 손의 감촉에 몸 안쪽부터 떨려 왔다.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리카르디스는 말했다.
[오늘 그대가 매우 아름다워 내 마음이 설렌다.]
설렌다! 로젤린은 그제야 제 몸 안쪽을 잘게 떨게 만드는, 마음 어딘가가 간지러워 계속 웃음을 배어나게 만드는 이 이상한 마음이 ‘설렌다’라는 말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데 이런 마음을 리카르디스가 먼저 말했다. 설렌다고. 놀라운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도 설레고 있었다니!
가슴을 뜨겁게 만들던 열은 점점 부풀며 머리로 올라갔다. 고개를 툭 떨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묘한 열로 인해 머리가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전에 없던 감정의 자각과 함께 유례없는 반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수줍어하는’ 반응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챘다 하더라도 ‘아, 그렇지요? 저도 오늘 제가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반응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니.
이, 위대한 도약, 인류의 발전은 언제나 한 발짝 먼저 걷는 사람으로부터……. 리카르디스는 마음속으로 횡설수설했다.
“저도.”
작은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가 움찔해서 머릿속에서 방방 뛰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몰아내었다. 역시 ‘저도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는 빠지지 않는 것인가.
“저도 전하께서 매우 아름다우셔서,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로젤린이 흘끗 위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에 있던 작은 리카르디스가 폭사했다.
그는 입을 턱 가리고 잠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애써 가라앉히려 해도 달아오르는 얼굴은 막을 길 없었다. 그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이 괴로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 발타.”
난데없이 속삭이는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엘피디오, 디에즈.”
한 단어, 한 단어 내뱉을수록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점점 원상 복구 되었다. 너무 좋은 마음을 너무 싫은 마음으로 억누른다는 극단적인 방법이긴 했으나 효과는 좋아 보였다.
“하카브.”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은 리카르디스는 완벽하고도 멋진, 아름답고 여유로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눈동자에 의문의 빛을 띠고 바라보는 로젤린을 보고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굽힌 팔을 슬쩍 내밀었다.
“가실까요, 레이디.”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사람들 사이를 거닐던 로젤린은 스타스를 발견하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음식 냄새에 취한 듯 몽롱하던 눈동자의 빛이 예리해져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있는 너른 홀을 훑어본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푸른등불 공작, 큰뿔산양 후작, 바다협곡 백작, 황금정원 자작 등, 리카르디스의 아래에 있는 가문 이외에도 줄지어 그에게 인사하러 다가왔다. 그때마다 로젤린은 한걸음 앞에 나서서 다가온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심장박동과 눈동자,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수작을 부리려 하지 않은지 판별하기 위함이었다.
“실례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느릿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덫에 걸린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가볍게 숨을 쉬며 눈을 깜박이고, 한 걸음 물러서면 그때는 통과라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파트너로 참석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위를 데리고 온 건지, 파트너를 데리고 온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외양이 많이 달라졌다 생각했으나, 로젤린은 여기서도 여전히 로젤린이었다.
로젤린은 잠시 부단장 나단에게 불려 가 또 혼났다. 리카르디스 전하를 뵙고자 하는 사람마다 예비 범죄자 취급을 해 가며 위아래로 훑어보면 어쩌냐고 펄펄 날뛰었다. 로젤린은 멍한 얼굴로 나단의 잔소리를 흘렸다. 귀담아듣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로젤린이 혼나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저 멀리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엘피디오에게 시선을 두었다. 눈이 마주치자 엘피디오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것인지, 미간의 주름이 평소보다 약했다.
리카르디스는 혼나고 돌아온 로젤린과 함께 그에게 다가갔다. 속이라도 긁어 놓을 요량이었으나, 엘피디오가 불쾌하다는 듯 발걸음을 돌려 떠난 탓에 아쉽게도 다음의 기회로 미뤄야 했다. 르원이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 엘피디오 전하께서도 나름 성장하신 것 같군요. 예전 같으면 앞뒤 안 가리고 전하께 시비를 걸었을 텐데요. 그러다 도리어 혈압이 오르셨겠지만.”
“형님이 약해진 모습을 보니 가슴 한쪽이 아릿해지는군.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연회가 계속되는 중에도 엘피디오는 리카르디스만 보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급한 용무가 있다는 듯 가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조차도 엘피디오가 리카르디스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두 형제간의 관계라면 같은 성 안에 있는 것도 힘든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냐며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평소의 리카르디스였다면 엘피디오를 주의 깊게 살폈을 테지만, 지금은 보다 중요한 건에 신경이 쏠려 있는 상태였다.
일라베니아의 또 다른 유력 후계자인 리카르디스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일은 당연했다. 때문에 연회장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전부 예비 암살자 내지는 적으로 규정하며 곁을 지키던 로젤린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문다든가, 음식 테이블 쪽을 원수라도 되는 양 쳐다보다가 눈물을 찔끔 흘린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보는 사람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슬퍼한 통에, 리카르디스는 결국 그녀를 보내 줘야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왼쪽은 레이몬드, 오른쪽은 파르딕트, 뒤쪽은 슈텐으로 평균 키 192cm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싼 후에야 마음껏 먹고 오라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불안해하던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스타스와 나단, 카일로 포함한 호위들에게 보호받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도도하지만 재빠른 발걸음이 얼른 먹고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지 십오 분.
‘고작 십오 분 만에.’
로젤린을 둘러싼 192cm의 벽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음식 테이블에서 이게 맛있네, 저게 맛있네 하며 희희덕거리던 네 명의 기사들에게 화려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돌도 부수는 악력을 지닌 기사들이 자그마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식은땀을 흘리는 꼴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진귀한 광경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여자 무리를 끌고 왔던 장본인은 얘기를 나누는 시늉만 하고는, 로젤린을 쏙 빼앗아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몬드와 슈텐, 파르딕트은 여자들에게 신경 쓰느라 동료 기사 한 명이 사라진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멀리서 그 광경을 목격한 리카르디스만 혈압이 올라 잠시 관자놀이를 누른 채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당장 로젤린에게 걸어가려 했지만, 주위를 둘러싼 손님들로 인해 결국 분한 듯 입술을 짓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굶길 것을, 이라는 잔인한 생각이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스쳤다.
로젤린을 빼돌린 남자는 연회장의 수많은 발코니 중 한 곳에 당도하고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붉은 커튼이 닫힌 듯, 열린 듯 애매하게 반쯤 걸쳐진 곳이었다. 남자는 가볍게 커튼을 젖히며 발을 들이려다가 안쪽의 선객을 보고 멈칫했다. 커튼을 다 닫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에 심취해 있던, 한 몸처럼 붙어 있던 남녀가 입술을 부딪친 그 상태로 눈을 크게 떴다.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로젤린은 예전에 클로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자와 남자는 몸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 로젤린은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적나라한 시선에 몸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던 자들은 당황했다. 커튼을 열어젖힌 남자만 태연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이런 실례.”
남자는 짧은 사과 후에 붉은 커튼을 꼭꼭 닫아 주고, 로젤린을 데리고 다른 발코니로 향했다.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텅 비어있었다.
남자는 붉은 커튼을 묶고 있는 끈을 풀지 않았다. 보통 커튼을 치는 경우는, 비밀스러운 대담과 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기 위한 용도였으므로 끈을 푸는 그 순간 갖은 소문이 퍼질게 분명했다. 로젤린은 거기까지는 몰랐지만, 굳이 그의 행동에 의문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아치 모양의 경계가 연회장 안쪽의 광경을 고스란히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발코니는 안쪽보다도 조용하고 어두웠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로젤린이 연회장으로부터 눈길을 돌린 순간, 그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밝은 금발을 뒤로 넘겨, 잘생긴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눈빛은 그윽하고 코도 오뚝했다. 총체적으로 평하자면 미남이라 말할 수 있었으나, 어딘가 오만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돌연 싱긋 웃었다. 웃으니 인상이 달라져, 쿠키 한 개 정도는 그냥 줄 수 있을 법한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다 해도 낯선 사람은 항시 경계하라는 얘기를 달고 살았던 덕에 로젤린은 의심스럽다는 듯 탐색의 눈으로 남자를 주시했다.
“리카르디스 전하에 대한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토론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제 얘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돌아가 봐야 합니다.”
“급하시군요, 우선 숨 좀 돌리죠.”
남자가 음료가 담긴 잔을 로젤린에게 건넸다.
“나를 기억합니까, 로젤린 양?”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로젤린은 잔을 받은 후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릴 적에는 자주 만났었지. 로젤린 양도 나를 오라비라 부르며 잘 따랐고 말입니다.”
존대에 애매하게 반말이 섞여 있어, 어찌 보면 무례할 수 있으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남자가 잔을 들고 있지 않은 로젤린의 반대쪽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려 그 위에 입술을 꾹 찍었다. 그가 손등에 입을 붙인 채 말했다.
“기억이 없다니, 이게 우리의 첫 만남이 되겠군. 사자갈기의 드윗. 드윗 아르페커가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인사드립니다.”
사자갈기라고 하면…….
사자갈기 공작가. 엘피디오의 어머니이자 일라베니아의 황후인 트리파의 가문이었다. 누구와 비슷하게 생겼다 했더니, 드윗의 얼굴에서 엘피디오가 언뜻 보였다. 같은 금발이라도 엘피디오와 디에즈보다, 엘피디오와 드윗이 더 형제 같아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드윗이 디에즈보다 성격이 더 나빠 보이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교육받았던 일라베니아 고위 귀족에 대한 정보 속에서 ‘드윗’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사자갈기 공작가의 차남. 그러나 출중한 능력으로 장남을 꺾고 후계 위를 공고히 함.
그러니 자신을 드윗이라 소개한 이 남자가 사자갈기 공작가의 차기 공작이라는 소리였다. 엘피디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가문의 후계자.
어렸을 적 만났다는 말은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의 얘기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의미가 없다 못해, 좋지 않게까지 변질될 수 있는 과거의 인연.
이 남자는 왜 자신을 부른 것일까. 로젤린의 눈은 드윗의 입에서 ‘사자갈기’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경계의 빛을 담고 있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아르페커 백작님.”
남자는 자신의 작위를 로젤린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칼릭스에게 갖은 교육을 받은 로젤린으로서는 제국의 단 4개밖에 없는 공작 가문, 심지어는 엘피디오 세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의 후계자 작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초상화가 없어서 얼굴을 못 알아봤다지만.
“기억상실이라더니 익히는 속도가 빠르군요. 로젤린 양은 예전부터 머리가 좋았죠. 그런데 아르페커 백작님이라니. 로젤린 양에게 그렇게 불리니 기분이 굉장히 미묘한데요. 그냥 예전처럼 편안하게 오라버니라 부르면 됩니다.”
“예, 오라버니.”
“…….”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 계속 그렇게 부르면 될 것 같아서.”
드윗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이거, 기분 묘한데,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답군요, 로젤린 양. 오늘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어여쁜 숙녀가 되다니. 어릴 때 칼릭스 경을 괴롭히던 남자 애들의 발을 몰래 걸곤 하던 말괄량이였는데.”
로젤린은 지금 누군가가 칼릭스를 괴롭힌다면 발을 몰래 거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 로젤린 양이 나보고 혼인해 달라며 쫓아다녔던 건 기억합니까? 이렇게 예뻐질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확 결혼해 버렸을 텐데.”
“예?”
로젤린은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드윗은 씩 웃으면서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거야 원, 빌려준 적 없는 100골드도 받아 낼 수 있겠는데.”
로젤린은 그제야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의 눈이 날카롭고 뾰족하게 바뀌자 드윗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날 너무 딱딱하게 대하니 그냥 농담 한 번 해 봤습니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도, 황성 경비병처럼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얼굴이라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상처받아요.”
그는 연극배우같이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젤린은 한껏 분위기 잡은 드윗의 촉촉한 눈빛을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지켜보았다. 딱히 할 말도 없던 터라, 입마저 딱 다물고 있자, 그의 반듯한 얼굴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드윗이 쳇 하는 소리를 잇새로 내뱉었다.
“기억을 잃는다고 기본 성격이나 성향이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군. 황성 경비병을 꼬시는 쪽이 더 빠를 것 같은데, 이거.”
드윗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우고 불량한 자세로 난간에 슬쩍 기대었다. 거리가 몹시 가까우나 정중하던 아까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로젤린은 드윗의 바뀐 태도보다, 그가 내뱉은 말이 신경 쓰여 되물었다.
“저를 꼬시고 계셨던 겁니까?”
주위에 남자들이 많은 직업의 특성상, 로젤린은 ‘꼬신다’는 은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고상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은 이상하게 여자 문제가 엮이면 고상함을 벗다 못해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고, 덕분에 저렴해 보이는 어휘도 몇몇 개 익힌 상태였다.
드윗은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내보였다.
“인사한답시고 손등에 입술을 오 초 정도 붙이고 있으면 대부분은 알아채던데……. 더군다나 그 가까운 거리에서 갖은 교태를 부리며 웃고 집적거리면…….”
어쩐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입술이 손등에 닿아 있는 시간이 3.7초 정도 길더라니!
“왠지 허무해지기 시작했어. 솔직히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은 아니라서요, 내가 가까이서 근사한 미소를 보낼 때 두근거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텐데. 얼굴 한번 빨개지지 않다니. 로젤린 양의 심장은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거 아닙니까? 리카르디스 전하 곁에 너무 오래 있었나. 월장석 성의 여성 관계자들은 전부 시집을 늦게 가거나 못 갈 겁니다.”
뭔가 좀 재수 없었다.
“본인의 능력이 부족한 거 아닙니까?”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꽉 차다 못해 흘러넘쳐 애먼 여자들의 눈을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탓입니다. 저기에도, 리카르디스 전하께 홀린 여자가 한 명 있군요.”
드윗의 말에 로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안쪽, 저 멀리에 리카르디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리카르디스에게 푸른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다가가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 추가되었다며 아까 나단에게서 정보를 받았었다. 강철발굽의 테레지아. 과거 수많은 사건을 일으킨 문제아였다. 리카르디스를 향한 그 경악스럽고도 집요한 수많은 사건이 한 사람이 일으킨 일이었다니. 로젤린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로젤린이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드윗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워어, 진정해요 로젤린 양. 지금 어떤 얼굴인지는 아십니까? 누구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인데. 지금 본인이 얼마나 유명 인사인 줄 모르는 모양이군요. 눈에 띄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테레지아라도, 이렇게 사람 눈이 많은 곳에서는 잡혀갈 정도의 일은 저지르지 못할 테니 안심해도 될 겁니다.”
확실히, 과한 경계 때문에 나단에게 혼난 지 삼십 분도 흐르지 않았다. 지금 달려가서 테레지아를 떼어 내고 구속하려 한다면 이번에는 나단이 정말 뒤 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저 호위만 하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눈에 띈단 말인가! 하여간 유명한 것도 너무 피곤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계속해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웃고 있었지만, 테레지아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는 본능까지는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레지아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지탱했다. 리카르디스의 품 안에 테레지아가 폭 안겼다.
로젤린은 순간 속에서 확 하고 솟아오르는 불길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우악스럽게 부채를 쥐었다. 대가 휘더니 파작,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테레지아가 리카르디스의 팔뚝을 은근히 더듬고 있었다. 로젤린의 얼굴에 살기가 비쳤다. 그녀는 테레지아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부채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이로 부채의 끝을 잘근잘근 물고 싶은 걸 참고 있던 로젤린은 무언가가 자신의 허리를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이 낯선 감각에 제 허리를 쳐다보았다. 아까까지 어깨 위에 있던 드윗의 손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로젤린의 고개가 드윗을 향했다. 드윗이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하지만 눈에는 열을 담고 그녀를 응시했다.
“설마 지금 그 은밀한 신호를…… 실수라고 말하지는 않겠죠, 로젤린 양.”
“예? 무얼 말하는 겁니까?”
드윗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실수였나 본데…….” 하고 중얼거렸다.
“여성들이 쓰는 부채의 사용법을 배운 적 있습니까?”
부채의 사용법? 여러 형태와 여러 움직임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 로젤린은 자신의 부채가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가 있는지 확인했다.
“…….”
로젤린은 반 정도 펼쳐진 상태로 입술에 닿아 있는 부채를 조심스레 내리고는 드윗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의 얼굴에 퍼져 있는 흐린 미소에 로젤린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는 클로에에게 이미 배워 알고 있었다.
‘키스해 주세요’ 였다. 그 ‘키스’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행위라는 사실과 더불어, 어딘가 야시시한 느낌이라는 것을 로젤린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초면의 사람과 나눌 만한 행위도 아니었고,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확실하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슬쩍 숙이고 웅얼거렸다.
“실수였습니다. 제가 기억상실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렇게까지 잘 아는 건 아니라서.”
“신사분이니 숙녀의 실수는 모른 척 넘어가셔야죠.”
드윗이 피식 웃었다.
“확실하게 나를 모르는 군요, 로젤린 양.”
그의 손가락이 로젤린의 턱 끝에 닿더니, 아래를 향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딱히 그 흐름에 거스르지 않았던 로젤린은 드윗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과거에 로젤린 양이 내게 한 말이 있습니다. ‘드윗 영식께선 신사는 못 되시겠군요’라고.”
드윗은 고개를 숙여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는 신사를 찾으셨나. 아가씨.”
로젤린은 그의 어깨를 슬그머니 밀며 묘한 기류를 깨트렸다.
“제가 오라버니라고 안 불렀나 봅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백작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 ‘로젤린’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다니. 대체 드윗 이 남자,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로젤린이 께름칙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에도 드윗은 연신 혀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벌레 쳐다보듯 하던 로젤린 양이 순수한 표정으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기회를 놓치다니. 멍청한 짓을 했어. 이래서 사람은 한때의 욕망에 몸을 맡기면 안 된다고 그러는 건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습니까?”
“로젤린 양은 내 자유로운 행동을 그다지 곱게 보는 부류가 아니었고, 나는 형처럼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던 로젤린 양을…… 내심 돌이나 한 달간 건조한 바게트라고 생각했던 부류였지.”
로젤린은 갓 구운 바게트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사이가 안 좋았군요.”
“그렇다고 지금 나쁠 필요는 없지. 안 그렇습니까 로젤린 양? 나는 지금의 로젤린 양이 제법 마음에 들거든. 약간……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어쩐지 욕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로젤린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드윗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로젤린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꼬시지 마시죠.”
“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만. 아무튼, 나도 예전처럼 물불 안 가리던 때보다는 얌전해졌고, 로젤린 양도 예전보다는 유해졌지 않습니까. 오늘을 기회로 만나면 인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같이 놀러 나가기도 하고, 로젤린 양은 저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그렇게 지내죠.”
“싫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데. 특별한 이유라도?”
“개인적으로는 백작님이 좀 웃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자갈기는 전하와 반목하고 있으니, 저 또한 반목할 수밖에요.”
드윗이 씩 웃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드윗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자 갈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다.”
로젤린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또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진 것인지. 정말 틈을 줄 수 없는 남자였다. 로젤린이 부채로 그의 입을 툭 막고는 되물었다.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동료들이 사자 대가리 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동안, 덜덜 떨면서 숨어 있다가 배부른 사자가 잠자고 있을 때야 슬그머니 창을 쥐고 오는.”
그가 웃었다. 부채에 가려져 입이 보이진 않았으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비겁한 기회주의자.”
그 말을 마친 드윗이 몸을 뒤로 물리며 로젤린과 거리를 벌렸다. 그래 봤자 겨우 한 발짝 떨어졌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대화거리가 좁은 사람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자갈기가 대외적으로 내세운 건 용맹함이 맞으니 아무 데서나 ‘사자갈기는 비겁한 기회주의자’ 이런 말 하면 큰일 납니다, 로젤린 경.”
“그러면 말을 해도 되는 곳이 있습니까?”
“로젤린 양이 이 말을 전해 주고 싶은 사람에게 하면 될 것 같군요. 뜬금없이 엘피디오 전하께 말하고 싶은 기분만 되지 않는다면.”
로젤린은 누구에게 말을 해도 좋나 혼란스러워했으나, 드윗이 말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엘피디오 세력의 주축이나 다름없는 사자갈기의 후계자가 자신의 가문을 비겁한 기회주의자라 칭했다. 완벽한 엘피디오의 편이 아니며, 흐름이 뒤바뀌면 자신 또한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니 자신의 주인 또한 바뀔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모로 보나 엘피디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아니니, 그의 주적인 리카르디스에게 이르라는 말이겠지만, 로젤린은 아직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드러난 로젤린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녀가 부르르 떨자, 그것을 추워서 나온 행동이라 착각한 드윗이 겉옷을 벗으려 했다.
턱.
드윗은 손목을 감싼 단단한 악력에 순간 악,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 홱 고개를 돌려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남자가 눈을 빛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이 높게 올라왔다가 다시 푹 가라앉았다. 급히 뛰어와 숨이 찬다기보다는, 속에 들끓는 화를 진화시키려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에 더욱 희게 빛나는 은발이 하얀 옷 위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제국의 2 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였다.
“……드윗 아르페커…….”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드윗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리카르디스는 엘피디오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그에 비하면 한없이 정중하고 점잖은, 그야말로 ‘황실의 고귀함’이란 단어를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인식이 박혀 있던 터라, 드윗은 지금 리카르디스가 ‘……이 새끼…….’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환청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드윗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웃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대답 없이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드윗은 자신이 뭘 잘못했나 돌이켜 생각했다.
만약 리카르디스가 자신과 로젤린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다면?
로젤린의 ‘키스해 주세요’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이 집적거리는 모습까지 모두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각도 상 키스를 했다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다 큰 성인 여자 남자가 밤의 연회에서 끈적한 기류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끼는 부하가 타 세력의 간부쯤 되는 인간과 노닥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던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연회 한 도중에, 집요한 테레지아를 포함한 그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다 두고 왔다고? 뭔가 좀 이상했다.
드윗은 리카르디스의 등 뒤로 연회장을 확인했다. 아까까지 리카르디스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인사마저 제대로 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 발코니에서 일어난 일을 보자마자 체면이고 사람들의 이목이고 뭐고 간에 무작정 왔다는 얘기였다.
그제야 드윗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맹수 같은 눈빛이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만약 시선으로 찌를 수 있었다면 난도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설마…….’
드윗이 당황스러운 감정을 얼굴에 내보이자,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천천히 그의 손을 풀어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자, 당황스러워하는 남자, 화내는 남자.
누가 봐도 순진한 아내를 꼬여 낸 불한당을 족치러 온 남편…… 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별다른 거사도 치르지 않았건만 익숙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다니. 드윗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가 아픈 손목을 어루만지며 살짝 묵례했다.
“로젤린 양에게 볼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저는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로젤린은 그 순간까지도 뭐가 뭔지 몰라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드윗은 도망치듯 발코니를 떠나다 조금 멀어졌다 싶을 때 뒤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커튼을 묶고 있던 끈을 돌아보지도 않고 끌렀다.
스르륵. 그게 끝이었다.
드윗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의 가슴을 한바탕 휩쓸고 간 위기와 허망한 감정을 곱씹었다. ‘그’ 리카르디스 전하가, ‘그’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을?
드윗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다가 저 멀리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가씨들을 보고는 근사한 미소를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붉은 커튼이 연회장에서 나오는 빛을 가렸다. 음악 소리가 바로 옆의 큰 공간에서부터 흘러나와 잔잔하게 들려오고 있음에도, 어두워진 발코니는 완전히 연회장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로젤린은 들뜬 기색으로 리카르디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드윗과의 얘기가 끝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빨리 만나게 되어 몹시나 기뻤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런 로젤린과 달리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사자갈기놈이 억지로 한 건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예? 뭘 억지로 합니까?”
“설마,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건. 저, 개 같은.”
리카르디스는 이를 갈면서 지금은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드윗이 사라진 발코니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까 물러간 드윗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올 기세였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채 대신 쥐어 잡은 것은 자신의 머리였다. 정돈된 머리를 헤집는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서 있었다. 잘 보니 살짝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리카르디스는 다른 곳을 보며 분을 삭이다가 다시 로젤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로젤린의 입가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억지로 뭘 해? 드윗이 뭘 했더라?
리카르디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단단한 손마디가 로젤린의 입술을 부드럽게 스쳤다. 리카르디스는 그에 그치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화장이라도 하듯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로젤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리카르디스의 손이 닿은 입술부터 시작해 가슴 안쪽 깊은 곳까지 솜뭉치가 굴러가는 듯한 간지러움이 번졌다.
그녀는 이상하게 리카르디스의 눈을 쳐다보기 힘들어서 그의 손이 원수라도 되는 양 뚫어지라 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말없이 정적을 지키고 있었기에, 결국은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동자가 발코니 밖 정원을 은은히 밝히고 있는 등불로 인해 일렁이고 있었다.
“……입술 화장이 지워졌군.”
아까 음식을 먹을 때, 크림이 입에 묻어서 혀로 삭삭 핥았더니 조금 지워졌더랬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세상에, 몹시 야성적이고 멋있었다. 로젤린의 가슴이 설레었다.
리카르디스가 난간에 있는 샴페인 잔을 들어 손수건을 살짝 적셨다. 그러고는 로젤린의 입술을 벅벅 닦았다. 아플 정도로 쓸렸다. 로젤린이 얼굴을 찡그리자 리카르디스가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하…….” 하고 깊은숨을 쉬었다.
“백작이 그대와…… 합의되지 않은 행위를 억지로 한 것이라면, 법으로 처벌 가능하다. 내가 증인이니. 결투 재판을 하겠나? 실수인 척하고 죽여도 된다. 내가 무마해 주겠다.”
로젤린은 더욱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은 저에게 합의되지 않은 행위를 억지로 한 적은 없으십니다.”
그러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럼 합의된 사항이란 말인가? 그대가 허락했다고? 그러고 보니 입가에 부채를 먼저 가져다 댄 건, 젠장. 로젤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고? 그래, 그대도 이제 스물세 살, 다음 달 생일이 지나면 스물네 살! 어엿한 성인이라는 걸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그래도 상대는 가려야지 사자갈기의 드윗? 드윗 아르페커? 그 자유분방한 하반신을 가진 몹쓸 망종…… 아니, 나와 반하는 세력의 남자와?”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그를 달래기 위해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백작님은 전하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고 합니다.”
로젤린은 아까 드윗에게 들었던 말을 훌륭하게 써먹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의 눈에 불이 붙었다.
“로젤린 에스터!”
로젤린은 그제야 분위기를 읽고 입을 합 다물었다. 정확하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가 말한 내용을 반추했다. 합의된 사항. 입가에 부채를 먼저…….
이거다.
입에 부채를!
‘혹시 입을 맞췄다 생각하시는 건가?’
로젤린은 답을 유추해 냈다. 확실히, 다른 세력의 유력한 가문 후계자와 자신이 입을 맞추다니, 간자라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분노는 그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었으나, 로젤린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 저는 백작님이 리카르디스 전하에 대한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토론을 하자고 해서……. 아차,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한테 사자갈기는 용맹하지 않다는 얘기를 전해도 좋다고 했는데요, 제가 전하께 말씀 드리고 싶다고 말했었던가요?”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화를 풀기는커녕, 돋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로젤린은 동작을 크게 하며 어떻게든 설명을 이어 가려 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입가에 부채를 가져다 대었는데, 백작님이…….”
로젤린이 아까와 같이 부채를 입에 가져다 댄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콱 잡았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그녀를 당겼다. 리카르디스의 구두가 로젤린의 두 발 사이로 틈새를 비집듯 들어갔다. 몸이 닿는 가까운 거리.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음산했다. 로젤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대답을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키스해 주세요……!”
로젤린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어두워진 푸른 눈동자 속에서 불티가 튀는 것 같더니, 손목을 틀어쥔 그의 손아귀 힘이 세졌다. 로젤린이 의문을 가지고 리카르디스를 올려다본 순간, 얼굴이 가까워졌다. 로젤린은 숨을 헉 삼켰다. 코끝이 닿았다. 그 가까운 거리에서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았다.
“알고 있었어?”
베일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로젤린이 덜컥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뒤 머리를 감쌌다. 곧 차가운 손끝이 로젤린의 뒤 목과 귓불에 닿았다. 마찰 되는 살갗의 온도가 로젤린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이후 닿은 것은, 차갑고 시린 목소리가 아니라, 싸늘해진 누군가의 입술이었다. 로젤린의 입술이 거칠게 짓눌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읍!”
로젤린은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나아가, 입술 위를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으읍!”
로젤린은 벌레를 발견한 6살배기 어린아이가 입을 가리고 경악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놀랍고, 간지럽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을 잔뜩 채웠다.
“저, 전하! 잠시, 만요!”
로젤린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숨 가쁜 애원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 무표정한 얼굴 속, 미동 없이 자신을 포착한 눈을 보고 부르르 떨었다.
로젤린이 한걸음 물러서자 리카르디스가 한걸음 따라붙었다. 몇 번 반복된 짧은 술래잡기는 로젤린의 등이 벽에 닿고서야 끝났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리며 여전히 당황하는 중이었고, 리카르디스는 벽에 자신의 구두코가 닿을 정도로, 그녀와 바싹 붙어서 섰다. 몸이 틈새 없이 딱 달라붙었다. 로젤린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온기와 심장 소리가 리카르디스를 부드럽게 짓눌렀다. 그는 가만히 로젤린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로젤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로젤린의 엉덩이 위, 허리 부근에 올라와 있던 커다란 손이 스르륵 움직이며 그녀의 날개뼈 아래까지 지그시 쓸어 올렸다. 몇 겹의 천 위로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의 손가락이 로젤린의 척추를 따라 들어간 부분을 부드럽게 덧그렸다.
로젤린은 하, 아.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닿은 부위부터 오싹오싹한 감각이 퍼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로젤린은 차마 리카르디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목과 턱선만 바라보았다. 턱이 움직였다. 시야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싫으면 밀어내.”
정수리에 무언가가 가볍게 내려앉더니 쪽, 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훽 들어 올렸다. 리카르디스는 어딘가 날카로워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분명 밀어내라 했어.”
로젤린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행위가 덮쳐 올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맨 정신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로젤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앞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학습이 아니라 본능이었나?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았다.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입술과 입술이 몇 번씩이나 부드럽게 맞닿기만 했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열 오른 로젤린의 온도와 융화될 때까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입가와 입술에 끈질기게 입 맞췄다. 서서히 로젤린의 움츠러든 어깨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경직된 몸이 서서히 이완되고 있음을 느끼고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살짝 깨물고, 그 자리를 핥고, 빨아 올리고, 딱 다물린 입술의 틈새를 정성스럽게.
츱, 츱, 물기 젖은 소리가 울리자 로젤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아, 한숨인지 소리인지 모를 것을 내며 입을 벌리자 뜨거운 혀가 소리를 짓누르며 들어왔다.
저, 전하의 혀, 혀, 혀가. 들어와서는 입안 여기저기를! 앞니 뒤를! 송곳니와 천장을! 내 혀를 이렇게 저렇게!
그녀의 감탄은 곧 감각에 침식당했다. 팽팽한 이성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꽉 결박한 기분 좋은 압박과 자신의 뒤 목을 감싼 리카르디스의 차가운 손끝, 입안을 뜨거운 온도로 채우는 그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던 리카르디스의 예복이 로젤린의 손길로 인해 흐트러지며 구겨졌다.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드러난 살결 위를 흐르며 간지럽혔다. 그의 체취와 섞인 향수 냄새가 그녀를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아, 기분 좋아. 로젤린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간지러움에 익숙해지자, 봄날 햇살을 맞듯이 온몸이 노곤해졌다.
리카르디스의 심장 소리가 귀가 아닌 몸으로부터 전해졌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예복 아래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온기와 맥박, 그의 숨이 그녀를 가득 감싸 안고 있었다. 로젤린은 생각했다. 내가 아이스크림이었다면, 녹아 버렸을 거야. 손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흐물흐물하게.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숨을 들이마시다 그의 입안에서 향긋한 과실 향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여태껏은 너무 놀라서 미처 몰랐던 듯했다. 자신이 마신 것과 같은 종류의 샴페인이 분명했다. 같은 맛이었다. 그런데 그 질 좋은 샴페인을 마시는 것보다, 리카르디스의 향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입을 붙이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입가를 핥더니 입술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그 후로도 핥고, 빨고, 문지르고. 한참을 지분거리던 그가 숨을 가볍게 몰아쉬다 머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리카르디스 시선이 로젤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촉촉하고 붉어진 눈가, 젖어 있는 입술을 훑어 내렸다. 리카르디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로젤린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리카르디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와…… 저, 전하. 정말…… 좋은 냄새가…….”
리카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다 그녀의 입술을 왕하고 깨물었다. 입술로 잡아채듯 한 것이라 아프지는 않았다.
“냄새만 좋나?”
“예?”
리카르디스는 자존심 상해 보이는 낯으로 이를 갈며 말을 씹어 내뱉었다.
“기분은 안 좋았냐고. 이왕 한 거, 알아야 할 건 알아야겠다. 어느 쪽이 더 기분 좋았지? 누가 한 키스가 더 좋았나! 나야, 드윗 아르페커야! 내가 잘생겼나, 그놈이 잘생겼나! 솔직히 재력으로 보나 얼굴로 보나 내가 낫지 않나? 그대의 취향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를 하루 24시간 중 12시간 이상을 보면서 어떻게 다른 남자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거지? 솔직히, 내가, 좀 잘생겼어야 말이지!”
분통을 터트리는 리카르디스는 평소라면 못할 말을 마구 쏟아 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품에 딱 달라붙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코앞에서 리카르디스가 입술을 짓이기듯 씹고 있었다.
아까까지 부드럽게 닿던 입술이었는데, 그렇게 아프게 눌리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로젤린이 그의 입술을 쓸었다. 리카르디스가 흠칫, 몸을 굳혔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로젤린의 손을 피했다.
“……겨우 참고 있으니 자극하지 말고, 대답부터 하지 그러나.”
리카르디스가 곁눈질로 그녀를 재촉했다. 로젤린은 약간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훨씬 잘생기셨고…….”
리카르디스가 흥, 하며 콧방귀를 꼈다. 당연히 그렇겠지라는 자신감이 엿보였지만, 드윗처럼 재수 없지 않았다. 물고기는 물 밖에서 살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이치였기 때문이었다. 물고기는, 물에 산다. 리카르디스는, 잘생겼다.
로젤린은 어딘가 심통 나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키스는 백작님과는 안 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혀를…… 그러니까 입만 맞췄나?”
“아니요, 백작님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가까이 하긴 했지만, 제가 부채 사용을 잘못했다는 걸 아시고 그냥 얘기만 나눴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십 초 정도 그녀의 말을 잠자코 해석하기만 했다. 곧 ‘안 했다’의 의미를 혀뿐 아닌 입술도 부딪치지 않았다는 ‘안 했다’로 알게 된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리카르디스는 화들짝 놀라며 로젤린을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마치 자신이 왜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한 발짝 뒷걸음질한 리카르디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쥐구멍을 포함한 숨을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 가득한 얼굴을 큰 손으로 뒤덮어 가렸다. 시간이 흐른 후, 리카르디스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청해라.”
“예?”
“결투 재판을 신청해라. 실수로 죽여도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지. 신청해라. 그리고 날 죽여. 심장은 여기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린 그대로, 다른 쪽 손으로 주먹을 쥐어 제 심장을 퍽 쳤다. 극단적이기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로젤린은 그새 부어 열감까지 느껴지는 입술을 매만졌다.
로젤린은 아까 리카르디스가 했던 말 중, 합의 어쩌고 하는 대목을 떠올려 냈다. 그러니까, 지금의 키스는 억지로 한 것이라 잘못했다 말하는 것이 아닐까.
로젤린은 섬세한 레이스의 문양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
“싫으면 밀어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충성 맹세를 했다고 배려해 줄 필요 없다. 나는 그대가 이런 행위에 대한 통념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을 거고. 그런 약삭빠른 계산이었던 것이지. 나는 잘생겼고, 솔직히 그대도 나한테 호감이 좀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잘생겼으니까, 그대가 잘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계산을…… 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은연중에 했을 거다. 금수보다 못한 머저리에게는 죽음이 차라리 자비로울 터. 죽여라.”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서며 그의 팔에 살포시 손을 올려 두었다. 아까 전, 강철발굽의 테레지아가 그를 더듬었던 곳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손으로 내내 가리고 있던 눈을 드러내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복잡 미묘하고, 죄의식이 가득 들어찬 눈빛이란 걸 로젤린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또다시 심장의 위치를 알려 주고 찌르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 말이 나오기 전, 로젤린이 천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제가 정말 싫어했다면, 전하께서는 계속 키스하지 못하셨을 거란 걸, 잘 아실 텐데요.”
리카르디스는 다른 사람이 로젤린에게 입맞춤을 강요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머리가 반파되어 있는 결말밖에 나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실적인 위로였다.
“……그건…… 정말 그렇군.”
로젤린은 계속해서 찡그려져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다급해 몇 마디 더 내뱉었다.
“기분 좋았습니다.”
리카르디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제 귀 뒤를 이상하게 만지면서 입천장을 핥아 주실 때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더니 난간 위로 푹 엎어졌다. 로젤린이 그의 곁에 다가가 섰다.
“전하?”
“……이건…… 수치도 모르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좋다고 그 말을 되새기며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 자괴감의 발로이니……. 그대는 상냥함으로 더 이상 나를 찌르지 마라……. 시궁쥐에게 햇살은 너무 눈부시다…….”
키스를 한 사람은 죽어 가고, 당한 사람은 그를 위로하는 이상한 광경이 수분 이어졌다. 리카르디스는 한참 후에야 마음을 조금 다잡고 몸을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
“예.”
“방금, 그, 걸. 내가 한, 입, 입. 마, 앚…… 이입…….”
“키스요.”
“……………그래. 그것.”
로젤린의 입에서 키스라는 말이 나오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가 자신의 입을 가리고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행위는 상대방의 허락이 떨어져야지만 할 수 있는……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끼리의 교감이다. 그대가, 기, 기분이, 큭……. 기분이 좋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맨 처음 그 행위를 할 때 그대의 의지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강요한 것은 명백한 무례야. 나는 그대에게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어. 이건 정말…….”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로젤린. 그대의 용서를 고맙게 받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이 무례에 대해 그대보다 조금 더 잘 알기 때문이야.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가해자가 나라고 할지라도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존재를 없애 버려라. 그대와 같은 공기를 마실 만한 가치가 없는 쓰레기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전부터 극단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한탄하며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로젤린은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하께서 반복해 사과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하, 저도 키스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습니다. 클로에 양에게 배운 적 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로에? 대체 그녀가 무얼 어떻게?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하신 거 아닙니까?”
리카르디스가 입을 턱 가렸다. 곧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머리가 좋군.”
난데없는 칭찬에도 로젤린은 뿌듯했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던 리카르디스가 똑바로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불었다. 그의 머리가 넓게 퍼지며 달빛에 빛났다. 아름다운 꽃이 휘날리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대의 완벽한 지식에 경탄하며 양심 없이 묻겠는데, 로젤린.”
“예, 전하.”
“내가, 그대에게.”
리카르디스가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긴 속눈썹이 떨렸다.
“입을 맞춰도 되겠나?”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울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나 세차게 뛸 수 있었는지는 또 몰랐다. 리카르디스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컸다.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 들더니, 귀 끝에 열이 몰렸다. 로젤린은 괜히 손장난을 하다가 예, 하고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이마에 쪽 소리 나게 키스하더니 볼에도 입을 맞췄다. 닿는 부위마다 열이 번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코와 코가 스쳤다. 로젤린이 간지러워 웃음을 터트리자 리카르디스가 코앞에서 빙그레 웃었다.
그 다정한, 온기가 느껴지는 시선과 표정에 로젤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저며 오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로젤린이 내내 그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따뜻한 입술이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가에 살포시 닿았다. 정중하고, 부드럽고, 아주 연약한 것이 부서질까 염려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았다.
짧은 키스가 계속되며,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쪽쪽,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쪽, 다른 표현. 사랑한다는 말이야, 쪽.
부러 쪽 하고 내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로젤린이 흠칫흠칫 반응했기에, 리카르디스는 더욱 적극적으로 소리를 냈다. 로젤린은 아까처럼 제 혼을 쏙 빼놓던 혀 놀림을 기대했다가, 새가 쪼는 새 모이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되어 약간 억울했다. 눈을 살짝 치켜뜨자,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맞춘 채 입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로젤린의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뭐지, 사랑한다는 표현인데 왜 이렇게 몸 둘 바 모르는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마는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장난기 넘치게 미소 짓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를 보자니 눈도 시리고, 가슴도 시리고, 그에 반해 얼굴과 몸은 뜨겁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로젤린이 바라보자 리카르디스가 제 가슴에 올라와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입 맞췄다. 손끝, 손마디, 손바닥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붙이고 있다가 다시 얼굴을 확 붉혔다.
“그대는 정말…….”
그러고는 그녀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듯 묻었다.
“……예뻐.”
웅얼거리는 소리가 손바닥에서 울렸다. 뒤 목에 소름이 돋아 로젤린은 부르르 떨었다.
“너무 예뻐.”
살짝 젖어 있는 목소리였다. 작게 속삭이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로젤린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통과했다. 로젤린은 잘게 떨다가 손 위에 있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리카르디스가 붉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로젤린은 눈을 굴리며 망설이다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리카르디스처럼 혀를 막 이렇게 저렇게…… 하는 그건 몇 번 더 하고 배워 봐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디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로젤린도 닫힌 붉은 커튼을 바라보았다. 커튼에서 그런 딱딱한 소리가 날 리 없으니, 누군가가 발코니 문가를 두드렸다고 봐야 했다.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살짝 촉촉한 입가를 문질러 닦고,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분주한 손놀림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무슨 일인가.”
“……손님들이, 찾으시기에.”
레이몬드였다. 단란한 분위기를 깽판 친 놈의 정체를 눈치챈 리카르디스가 흠칫하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보호자가 밖에 있었을 줄이야.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하시고, 나오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울음을 삼키는 비통한 목소리였다. 내용은 정중했으나 말투는 그만 좀 쪽쪽 대고 나오라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혹시 울고 있나, 레이몬드 경?”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눈부신, 이, 좋은…… 날에요…….”
저 피눈물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레이몬드는 안쪽에서 일어난 분홍빛 기류를 읽어 낸 게 틀림없었다. 리카르디스는 화끈해진 얼굴을 손 부채질로 식혔다.
그는 조금 후, 뻔뻔한 낯을 가장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로젤린 경의 입술 화장이 지워져서 그런데, 시녀를 좀 불러오지 그러나.”
“크흐흑…….”
역시 울고 있었다. 조금 미안했다. 금이야 옥이야 길러 온 고명 딸 비슷한 존재인 로젤린을 자신이 덥석 삼킨 게 아닌가. 누가 그러게 정신 팔려서 로젤린을 놓치라고 했나.
레이몬드가 터덜터덜 걸어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때, 익숙한 음이 두 사람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가 달빛 아래에서 춤을 췄을 때 작게 들려오던 그 노래였다. 로젤린이 눈을 번쩍이더니,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한쪽은 제 등에, 한쪽은 마주 잡은 채로 자세를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크게 뜨자 로젤린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춤을 출 수 있을지 모릅니다. 솔직히 연회장 내부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기에. 저에게 춤이냐 먹을 거냐 하면, 아무리 배부른 상태라고 해도 춤을 선택할 가능성이 너무 낮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스스로를 참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은 음악에 따라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어 하다가, 그녀의 움직임에 이끌려 같이 춤을 췄다.
공간에 흘러 들어오는 작은 음악 소리와 함께 풀벌레가 울었다. 달빛과 정원의 등불에 로젤린의 드레스가 반짝반짝 빛나며, 연회장이 무색할 정도의 아름다운 빛을 어두운 공간에 그려 냈다.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쳤다. 로젤린은 뱅글뱅글 도는 동작을 하며 여지없이 웃다가, 리카르디스의 눈에 비친 달빛을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은 거대하고 선명한 달빛을 그려 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언젠가 본 적 있는 환한 달빛이었다.
* * *
여성용 화장품을 가지고 온 레이몬드가 발코니의 문가를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그새 마음을 많이 정리한 듯이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들어온 직후, 화장이 말끔하게 지워진 로젤린의 입술을 본 레이몬드는 큭, 하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완벽하게 로젤린의 화장을 고쳤다.
“전하께서는…… 배가 부르시겠습니다…….”
애 입술을 아주 그냥………. 리카르디스는 레이몬드가 눈물과 함께 삼킨 뒷말을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양심이 아주 조금은 찔렸기에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밤하늘에 떠 있는 별 개수만 헤아렸다.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연회장의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아직, 1군에 속하는 위험 인물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발타 사절단 대다수가 입장했습니다. 철저하게 확인한 바, 무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숨겨 오려고 한다면 피부나 몸 아래에 박는 수단도 있음이 입증되었기에 어지간하면 접촉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발타 쪽 인사가 다가오면 ‘아, 빈혈이…….’ 같은 대사를 하시고 로젤린 경의 품에 쓰러지시면 됩니다. 곧바로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까 엘피디오를 비웃는 게 아니었는데. 알겠다, 아무튼 그 강철발굽의 장녀는?”
“테레지아 양을 말씀하십니까? 왜 이름으로 안 부르시고.”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악운을 부르는 주문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다.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아까 만났을 때 너무 당황해서 실수로 불러 버렸어. 오늘은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무슨 상황에든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게 대비하라.”
레이몬드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시달리셨으면…….
“로젤린 경의 이름을 말하면 이상하게 좋은 일이 생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내 행운의 주문 같은 거지.”
그 짧은 틈 사이 로젤린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일을 잊지 않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보고 레이몬드는 흐린 눈을 하고 먼 산을 쳐다봤다.
세 사람은 발코니에서 나와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잠시간 사라졌던 리카르디스가 나오자 눈을 번쩍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로젤린은 발코니에서 있었던 일로 이상하게 들떴던 마음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리눌렀다. 그녀의 감각이 다시 예리하게 주위를 경계했다. 화색이 돌던 얼굴은 차갑게 식고, 눈빛은 날카롭게 세워졌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가리고 볼을 살짝 붉혔다. 그의 입에서 작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귀여워…….”
“…….”
레이몬드는 옆에서 기가 차는 중이었다. 아니, 누구 한 놈만 걸려라. 뼈를 마디마디 역으로 꺾어 버리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귀엽다니. 모로 보나 귀여운 것보다는 멋있는 쪽에 가깝지 않나. 눈에 대체 뭐가 씌었기에?
“……이제는 거침이 없으시군요, 전하…….”
리카르디스가 흠칫 놀라더니 레이몬드를 째려보았다.
“그런 건 적당히 모른 척하는 거다. 딸 빼앗겼다고 언제까지 툴툴거릴 생각인가, 좀생이처럼. 이 제국에 나만큼 괜찮은 남자가 있을 것 같나.”
“그, 그건…… 그렇긴 합니다.”
객관적 사실이라도 스스로 하기는 힘든 말이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로젤린에게 쏠렸다. 그녀는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부채를 펴 살랑살랑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쯤 되는 행동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가 사자갈기의 드윗을 보게 되었다.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드윗, 아르페커와는…… 무슨 대화를 그리 길게 나눴나, 로젤린 경.”
로젤린이 고개를 올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아, 아르페커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하라 했습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라고.”
리카르디스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까 전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 아닌가. 덕분에 더욱 머리에 열이 올랐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제가 그렇게 말했더니, 백작님이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사자 갈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기에 제가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물었더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일러바치는 내용을 듣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점점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저 멀리에 여자들에게 파묻혀 있는 사자갈기의 드윗이 보였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대화 내용을 읊었다.
“동료들이 사자 대가리 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동안, 덜덜 떨면서 숨어 있다가 배부른 사자가 잠자고 있을 때야 슬그머니 창을 쥐고 오는.”
리카르디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그녀와 함께 말했다.
“비겁한 기회주의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을 아십니까?”
“……사자갈기 가문을 비하하고 싶을 때 쓰는 욕이나 다름없는…… 아니, 욕이다. 흠, 그걸 제 입으로 꺼내다니…….”
대화를 같이 듣고 있던 레이몬드가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만, 저래 보여도 형을 꺾고 후계 자리를 잡은 놈이다. 내가 최근 이뤄 낸 것이 엘피디오에게 위협적으로 보일지언정, 위험하지 않아. 사자갈기는 그걸 충분히 알 수 있는 가문이지.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손을 내민다?”
단순히 수작 부리는 것으로 보기에는, 상대의 덩치가 컸다. 그런 잡스러운 수작질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에 자존심이 무슨 문제겠느냐만, 리카르디스가 본 귀족들은, 특히 대귀족, 중앙 귀족이라 불리는 그들에게는 죽는 것보다 자존심이 중요할 때도 많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접근이 불쾌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순간 적절한 도움이 왔다. 어느새 다가온 클로에가 레이몬드와 팔짱을 끼며 작게 속삭였다.
“원래도 아주 간섭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최근 들어 황후 폐하께서 사자갈기 가문을 쥐고 흔드는 게 좀 심해졌지요. 가문의 돈은 내 거, 내 거도 내 거. 이런 식이다 보니, 사자갈기 내에서는 불만이 좀 쌓였다 하더군요. 뭐 황후 폐하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야 딸을 밀어주고 싶겠지만, 그는 늙은 사자이고, 젊은 사자는 혈기가 좀 넘치는 모양이네요. 얘기를 한 번 들어 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리카르디스가 로젤린과 엮인 드윗에 대해 껄끄러움을 온 표정으로 나타내자 클로에가 빙그레 웃었다.
“품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적당히 얘기를 들어 주는 척하고, 드윗이 2황자와 접촉했다, 엘피디오 전하 측에 알려서 배반자로 낙인찍히게 한 다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재산과 정보를 토해 내게 하는 수단으로 그냥 이용만 해도 되니까요. 영 내키지 않으시면 그렇게 쓰고 버리셔도 되지 않겠어요?”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저런 흉악한 말을 하다니. 정말…… 훌륭했다. 리카르디스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두 사람의 음모를 말렸다. 우선 얘기나 들어 보죠, 얘기나!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의 흉악한 획책에 흐뭇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피디오가 저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뎅…….
그때,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너른 연회장을 한가득 메웠다. 대신전의 종이 황제가 등장할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황제 폐하 듭십니다!”
모두의 이목이 계단 위를 향했다.
쿠구궁…….
무거운 문이 열렸다. 하얀 예복을 입은 금발의 미중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은 엘피디오의 어머니, 황후 트리파가 정답게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발을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오지 않고 가만히 서서 아래에 선 사람들을 응시했다. 제국민들과 건국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타국의 인사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온화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기점으로 많은 이들의 눈이 바빠졌다. 황제의 호위인 얼음창 기사단, 그리고 위험한 인물이 도사리고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는 하얀밤 기사단원들까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방을 경계했다.
한데 아직까지도 하카브는 물론이거니와 디에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주시했다. 로젤린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천천히 파티 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반응하지 않았으니, 인조적인 마인이나 마력, ‘파편’의 위험은 없다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건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바랄 게 없으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황제는 고개를 숙인 자들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몇 발자국씩 물러나며 길을 만들었다. 그가 흐뭇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황제는 계단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황좌로 이동했다. 이 너른 파티 홀에 있는 단 두 개의 의자에 황제와 황후가 착석했다.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가 등장하고 십 여분 후에야 모두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황제는 이 자리를 찾은 모든 이에게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득하기 바란다는 의례적인 인사로 포문을 열었다.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하나의 주제로 매년 얘기하다 보니 특별함이 있을 리 없었다. 고만고만한 문구의 반복들. 어쩐지 작년에도 들었던 것 같고, 재작년에도, 한 십여 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다들 애써 감명 깊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저마다 딴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리카르디스도 황제가 거들먹거리며 떠들어 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그의 주위로 펼쳐진 상황에만 집중했다.
사람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황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믿겨지지 않는 고요함.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우뚝 선 이 공간 속에……
“어?”
어느 귀족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황제 라이노와 주위 모든 사람의 매서운 눈빛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하지 않고, 어느 한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남자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별이 총총한 어두운 밤을 명화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줄지은 창문들. 그 지극히 평범한 광경 속, 이상한 것이 보였다.
“불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멀리, 다른 성이 불타고 있었다. 성의 어느 한구석 작게 발화한 것이 아니라, 성 자체를 땔감 삼아 활활 타오르는 불빛은 연회장 내부의 조명이 무색할 정도였다.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밤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삐익!
기사단장 스타스가 손가락을 물어 휘파람을 불었다. 흩어져 있던 하얀밤 기사단원이 리카르디스를 둘러쌌다. 로젤린도 빠르게 전투태세로 돌입해 그를 등지고 다른 사람들의 동향을 살폈다. 스타스의 경고에 정신을 차린 얼음창 기사단도 잽싸게 황제와 황비를 보호했다.
저 멀리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황제가 등장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난 불? 사고라 보기에는 공교로웠다. 만약 누군가가 발견했다면 진작에 소화 작업에 들어갔어야 했다. 말인즉슨, 성의 경비가 뚫렸다는 것.
리카르디스는 한순간에 성을 잃게 된 주인을 바라보았다. 엘피디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침착해 보이긴 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황제를 보며 르원에게 물었다.
“하카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디에즈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얼 원하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디에즈. 원한을 가진 자. 발타와 손을 잡고 전쟁을 준비하는 자. 황제의 목을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황제는 불타는 성으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저것은 단순한 속임수다. 이미 위험은 불타는 석영 성을 벗어나 이 홀에 숨죽이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일수록 황제의 보호는 더더욱 강해진다.
“2황자 전하!”
얼음창 기사단이 하얀밤 기사단에 협력을 요청했다. 황족들을 모아 같이 보호하려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에게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러한 사태에는 보통 황족들을 같이 보호하고는 했다. 디에즈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상황을 바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족들을 한곳에 모을 필요성? 어째서?
엘피디오는 잽싸게 보호의 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린 황녀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이번 신관은 목이 잘렸어! 머리는 아직 발견 못했어!]
머리가 없는 신관의 시체.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그걸, 얼굴이 없는 그 시체를!’
어떻게 신관의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신관이라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얼굴 가죽을 뒤집어썼더군요.]
단서를 따라 사고가 흘렀다. 그는 자연스레 로젤린의 호위 첫날을 떠올렸다. 익숙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날카로운 비수를 속에 숨기고 있던 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봤다. 얼음창 기사단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단단한 경계를 세우고 있으나, 위험은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아닌, 뒤에 있었다. 황제의 옆에!
리카르디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한 발짝 내디딘 그 순간.
옆에 있던 로젤린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그녀는 석영 성이 불타는 것을 기점으로 마력을 몸에 둘러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둔 채였다. 시각, 청각, 후각. 눈으로, 피부로, 귀로 와 닿는 모든 정보를 그녀는 초에도 수백 개씩 읽어 냈다. 그러던 중, 리카르디스가 황족들이 보호받는 무리로 이동하던 순간 그녀는 느꼈다.
사취. 시체의 썩는 냄새였다. 진한 향수의 냄새가 억누르고 있으나, 로젤린을 그 아래 가려져 있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황제가 위험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에 이루어졌다.
로젤린은 구두를 벗어 던지고,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던 무리에서 확 달려 나왔다. 저 멀리에서 리카르디스에게 급히 다가오던 레이몬드가 무엇을 눈치채고는, 자리를 잡고 두 손을 모았다.
“로젤린!”
그녀의 발이 레이몬드의 손을 꾸욱 밟았다. 레이몬드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확 튕겨 올렸다. 로젤린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았다.
휘익, 로젤린이 공중에서 빙글 빠르게 돌았다. 무언가가 빛을 받아 반짝이며 날아갔다. 얼음창 기사단은 갑작스레 황족을 향해 공격해 온 그녀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챙그랑.
로젤린의 귀걸이와 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진 비수가 대리석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어깨를 밟고 한 번 더 뛴 다음 황족들이 모인 곳에 있던 남자를 덮쳤다.
“꺄악!”
황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를 제압했다.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얼음창 기사단이 로젤린을 막기 위해 무기를 뽑았으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한명씩 맡아 그들의 팔이나 관절을 꺾으며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이게 무슨, 불경한!”
“스타스 경, 이게 무슨 짓이오!”
당장에라도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베어 넘길 듯 이를 갈던 남자들은 정확하게 오 초 뒤,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1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의 손을 완벽하게 제압한 로젤린이 그의 얼굴, 턱 뒤를 더듬더니 콱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얼굴 가죽이 짝 소리와 함께 벗겨지며, 코와 골격이 뭉개진 흉한 얼굴이 드러났다.
꺄아아악!
황후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엘피디오가 들고 있던 단검에 찔릴 뻔한 황제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뒤늦게 자리에 도착했다. 수백 쌍의 경악 어린 시선이 모인 곳. 리카르디스는 얼빠져 정신 못 차리는 얼음창 기사단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폐하를 보호하라,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암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엘피디오가 왜 다가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로젤린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가까이에 접근하면, 그녀가 반드시 알아챘을 것이기에. 대체 언제부터 낯선 자가 ‘엘피디오’의 가죽을 쓰고 있었나?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돌이켜 생각하다가 디에즈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황제는 엘피디오와 얘기 중이었다. 어쩌면, 디에즈는 황제가 아닌 엘피디오를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로젤린의 밑에 깔려 제압당해 있던, 엘피디오의 얼굴 가죽이 벗겨진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밤, 크레안 티다니온께 이 광영을 바칠 것이다!”
남자가 이를 콱 물었다. 입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로젤린이 암살자의 머리를 콱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찍었지만, 이미 그가 무언가를 뱉어 낸 후였다. 남자의 입에서 튄 거뭇한 액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5황녀 레이비아의 드러난 다리에 한 방울 투둑, 튀었다.
황녀 레이비아가 덜덜 떨다가 제 다리를 쓰다듬었다. 한 방울 피부에 닿은 액체로부터 살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파편’은 아니었으나, 극악한 독인 듯했다. 레이비아가 다리를 붙잡고 아악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꺄악!”
그걸 기점으로 연회장은 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우왕좌왕하는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발타의 고위 인사들이 일시에 비수를 꺼내 들고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 남자, 아이, 노인 가릴 것 없고 목표도 없이 머리를 잡아서 목을 찌르고, 도망치는 등을 가로지르고, 심장에, 눈에, 배에, 치명적인 일격이 박혔다. 연회장에 피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하얀밤 기사단은 더욱 결집해 리카르디스를 둘러쌌다. 그들에게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리카르디스의 목숨이었다. 모든 단원들이 연회장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하는 지금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을 나눌 수 없었다.
로젤린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피 흘리고 비명 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만 봐야 했다. 하나, 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춤을 추던 사람들이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그 위를 살아 있는 자들이 살고자 무심히 밟고 지나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느 어린아이의 심장에 길쭉한 암기가 박혔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심장에서부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들을 본 순간, 로젤린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조명을 받아 빛나는 핏방울에 사람들의 절규가 비쳤다.
로젤린은 어쩐지, 이 장면이 굉장히 익숙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떨려 왔다. 숨이 턱 막혔다. 아이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며 대리석에 가까워졌다.
쿵!
소년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비명이 가득 찬 난장판 속, 그 작은 소리가 들릴 리 없으나, 로젤린은 머릿속에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걸 기점으로 로젤린은 깨어났다. 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사태를 주도하던 남자들은 점차 제압되었다. 연회장을 지키던 기사,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검을 내려놓고 왔으나, 본디 무기를 들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긴 자들이 전면적으로 나섰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큰뿔산양 후작, 크레이튼. 큰뿔산양의 아렌트, 바다협곡의 자식들, 강철발굽 백작, 사자갈기 공작가의 후계자를 포함한 일라베니아의 귀족들과, 타국의 사람들도 몇 나서서 남자들을 제압했다. 그중 회색 머리칼을 가진 낯선 시종이 나선 이들 중 가장 많은 머릿수를 처리했다.
하지만 사상자는 이미 너무 많이 발생한 후였다.
“으으으…….”
“아파…… 살려 주세요…….”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진 채 피 흘리고 있었다. 제압되어 있는 검은 피부의 남자들이 마구 웃었다.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남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 력 589년 건국일을 맞이해, 선물을 보낸다!”
호위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황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진실을 숨기는 비겁자여, 우리는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피로 쌓아 올린 권좌가 무너질 때가 되었다! 이미 너희들의 손으로 인해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던 그것이, 이델라브힘의 빛과 함께 스러져 갈 때가 되었다! 보아라, 위대한 밤, 크레안 티다니온의 빛이 떠오르리니!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너에게 보낸다! 네 혈육의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머리를 툭 떨궜다. 바닥으로 피가 번졌다. 제압당해 있던 모든 발타인들 또한 일시에 숨이 끊겼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 연회장의 벽에 붙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남기고 간 정적은 끈적하고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영 성을 불태우는 불꽃은 더욱 커져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케틀린은 인상을 구깃구깃하게 만들고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허공을 훑었다.
그녀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일라베니아 황성의 지하 감옥은 악명 높기로 유명했고, 그만큼 감옥에 머무는 일 분, 일 초는 고통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괴로운 나날뿐이었으나, 건국일이 되자 그 어느 때보다도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건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이, 건국일이랍시고 이델라브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대기 때문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연회장을 가득 채운 음식들은 그날그날 바로 소비될 만한 양이 아니었고, 남은 음식은 자연스럽게 시종이나 시녀, 이런 말단 병사들의 앞까지 돌아왔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포식하는 기간. 귀족 나으리들이 먹는 고급스럽고 맛있는 걸 먹으니 절로 흥도 나고, 근무수칙에는 어긋나지만, 수통에 담아 온 술을 같이 마시니 더 신나고. 그래서 흥얼흥얼 지하 감옥을 가득 울리게 노래를 불러 대는 것이다.
그걸 더욱 괴롭게 만드는 요소는 가장 큰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병사 두 명 중 한 명은 음치고, 나머지 한 명은 박치라는 점이었다. 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훌륭한 가희가 부른다고 해도 짜증 날 판국이었던 터라, 케틀린은 누워서 감상하다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아, 못 들어 주겠네, 진짜……. 입 닥쳐 얼간이들아!”
술 취한 병사들이 노래를 멈추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 건방진…….”
철컹.
케틀린은 병사들이 벽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창을 드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도 온몸이 성하지 못하게 두드려 맞으리라. 그래도 그녀는 저들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멈춘 것만 해도 기뻤다.
“이런, 혼잣말을 한다는 게 그만.”
말투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듯 고분고분했으나, 그녀의 가운데 손가락이 기상 넘치게 그들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일라베니아 거리에서 통용되는 욕으로, 해석을 하자면 네…… 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남자들이 허리춤을 더듬어 열쇠를 다급히 찾는 소리가 들렸다. 케틀린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곧 익숙한 고통이 찾아오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병사들이 열쇠를 구멍에 철컥 끼워 넣었다.
“오늘 그 고약한 성질 머리를 고쳐 주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방진 것 같으니!”
남자가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쾅!
그때, 큰 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벽에 충돌한 것 같은 소리였다. 병사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상은 없었다. 위층에서 난 소리가 아닐까. 수감자가 사고를 쳐서 혼쭐을 낸 것인가?
으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계단 통로를 타고 실려 왔다. 병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황급히 케틀린이 갇힌 감옥의 철창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평소 같았으면 네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여자 하나 못 이겨서 꽁무니 빼고 도망친다고 욕설이라도 해 주었을 케틀린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얗게 변해 버린 눈이 천장 그 어디쯤을 훑었다. 남자들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이었다. 몇 개의 벽 너머, 한참 높은 위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으나…….
거리, 위치. 모든 것을 혼동하게 만드는 이 거대한 마력의 기운이란! 케틀린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최하층을 지킬 네 명의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모두 위층으로 올라갔다. 케틀린은 철창은 잡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금속음과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익숙한 소음과 상황이었으나,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한 마력의 기운이 그녀의 감각에 섞여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 냈다.
마력은 가까워졌다. 한 층, 한 층 더 아래. 천천히 움직이는 마력은 여유롭다기보다는, 사냥감을 진득이 주시하는 뱀의 움직임같이 느껴졌다. 케틀린은 오랜만에 초조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마력보다 한 발짝 먼저, 소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돌계단을 지그시 누르며 다가오는 느긋한 발걸음 소리였다.
동향을 살피며 숨죽이던 최하층의 수감자들과 남은 병사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십 초 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냄새나고 더러운걸.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
여유작작하게 감옥의 풍경을 품평하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케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십여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으나, 잊을 리 없었다.
하카브였다. 병사들도 얼굴을 알아봤는지 창을 들고 그에게 돌진했다.
“아악!”
하카브가 부나방 같은 병사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병사들은 하카브를 둘러싼 호위들에게 공격받아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용감한 것과 무식한 건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그렇지 않나, 아순.”
“예, 전하. 정말 용감하군요.”
“……그래.”
지하 감옥의 왕처럼 떵떵거리던 병사들의 몰락에, 수감자들이 환호하며 철창에 달라붙었다.
“이봐, 나, 나를 꺼내 줘!”
“죽여주는데! 진짜 죽였으니까!”
“잘생겼네…….”
고문과 오랜 감금으로 약간 미쳐 버렸는지 독특한 감상평이 많았다. 하카브는 그들의 감상평에 씨익 웃고는 케틀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다 키티. 살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케틀린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키티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저 인간이 진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녀는 하카브가 자신을 구하는 목적으로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을 거라고, 새끼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인간은 쓰기 쉬운 도구와 다름없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 이번 건국제에 흥미로운 게 있어서 보러 왔지. 겸사겸사 네가 살아 있는지도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그런데 왜 시선이 약간 빗겨 나간…… 아, 눈이 안 보이나?”
“한 오 년 전쯤부터요. 아니, 그렇다고 일라베니아에 직접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또 아틸라크가 보고만 있던가요. 배를 두른 지방이 머리에도 꽉 차 버리기라도 했나 보죠?”
“말리고 싶어 하기는 하던데, 얘기는 못 꺼내던걸. 모두가 자네 같은 줄 아나, 이 사람아. 어디 보자…… 열쇠가…….”
하카브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죽지 않고 바닥을 기어 다니던 병사가 컥컥 거리더니 열쇠를 꺼내 집어삼켰다. 하카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졌다.
“키티. 병사가 열쇠를 삼킨 것 같은데.”
“가르면 되잖아요.”
“더럽잖나.”
“옆에 애들은 뒀다가 수프 끓여 드시려고 그러시나. 원래도 직접 뭐 하시지도 않는 분이 왜 그러신대.”
“아니, 내가 직접 하려고 했다. 대충 십…… 년쯤 감옥에 갇혀 있던 내 사람을 구하는 감동적인, 그런 상황이니까.”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인 것도 아니면서 감동은 무슨 감동. 케틀린이 철창을 잡고 흔드는 시늉을 했다. 대 마인용으로 설치된 두꺼운 강철이 깊게 박혀 있었다. 약해진 몸이 아닌 평범한 육체로 마력을 운용했다 하더라도 부수지 못했을 것이라 의미 없는 시도였다.
하카브의 호위들이 철창을 향해 발길질했다. 소리만 요란했고 꿈쩍하지 않았다.
“약해 빠진 놈들만 골라 데리고 다니시네요.”
“그 약해 빠진 놈 중에 아순이 있단다.”
“……개중 좀 힘찬 발길질 소리가 있더라니, 아순 너였구나? 오랜만이다, 세상에.”
하카브의 호위, 아순이 앞이 보이지 않는 케틀린에게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상황인지 모르겠어서 하카브는 하하 웃었다.
“전하, 빨리 꺼내 주세요.”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성격 급하기는. 애들보고 침 좀 닦아서 가져오라 하마.”
십 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 보고 할 말은 아니었다. 케틀린은 어이없어서 별다른 말을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쿵!
위층에서 또 소리가 크게 울렸다. 케틀린이 깜짝 놀라 위를 바라보자 하카브가 반색했다.
“아, 역시 느껴지나?”
“못 느끼는 게 이상하죠. 대체 저…… 저건 뭔가요?”
“떽. 키티. 저거라니. 그러면 못쓴다.”
케틀린은 눈이 멀어 하카브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잔뜩 들떠 있는 목소리에서 그의 표정을 연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분은 누구시죠?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마력의 크기라서 좀 놀랐네요.”
“저…… 사람은.”
하카브가 말을 끌었다. 케틀린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나의 검은 달이다.”
어우……. 케틀린은 닭살 돋은 팔을 슥슥 쓸었다. 예전에도 시 같은 걸 좋아하더니, 그 기호는 여전한 듯했다.
그러나 케틀린은 ‘검은 달’이라는 이름을 하카브가 얼마나 귀중히 여기는지 잘 알았다. 으레 발타라는 나라가 마력을 숭배하기를 저를 낳은 어미보다, 제 목숨을 구한 은인보다, 수천 명을 살리고 죽은 위인보다 대단하다 여겼으나, 하카브는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띌 정도로 마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력을 타고나는 자가 많은 발타 왕조에서, 미숙아로 다름없이 취급받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난 설움이 표출된 것일까? 느끼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힘을 숭배하는 그의 모습은 솔직히 케틀린이 보기에는 좀 우스운 감이 있었다. 동경, 갈망. 글쎄 그 끈적한 욕망을 표현하면 좋을지.
그런 하카브가 천천히 다가오는 위협적인 마인을 검은 달이라 칭했다. 그의 검은 달. 그의 크레안 티다니온.
통로에서 다시 한번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하카브처럼 보란 듯 느긋하지도 않고, 일라베니아 황실 한가운데에서 사고를 친 사람처럼 다급하지도 않았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에 케틀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거대한 기운, 무서운 살육자, 피 냄새를 몰고 오는 사람의 행동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속을 완벽하게 가리는 위장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괴리감이 들었다.
발걸음 소리가 같은 공간안에 울렸다. 케틀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바짝 서 있는 긴장 속에서 하카브가 사랑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디에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케틀린은 하카브의 말로 인해 그 거대한 마력을 지닌 사람이, 디에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케틀린은 경악했다. 그녀가 아는 디에즈라고는 일라베니아의 5황자 디에즈밖에 없었다. 디에즈? 그가 마인이었다고?
“이런, 그대의 손이 더러워졌군. 내 옷에 닦아도 된다.”
찰싹 소리가 났다. 디에즈가 집적거리는 하카브의 손을 쳐 낸 모양이었다.
뚜벅, 뚜벅.
계속되는 하카브의 질척임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디에즈가 철창을 잡았다.
철컹.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검은 쇠가 울었다. 그의 눈이 천장과 벽 깊숙이 파고든 철창의 끝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철컹! 한 번 더 세게 흔들렸다. 하카브는 디에즈가 그녀를 꺼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그가 철창을 흔들고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최하층으로 오면서 디에즈가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갇혀 있는 마인들의 해방. 그자가 어떤 죄를 저질렀건 마인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침 하카브의 호위가 병사의 시체 안에서 열쇠를 꺼내어 왔다. 하카브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더 닦거라. 아, 디에즈 여기에 열쇠가…….”
쾅!
손짓하며 호위를 닦달하는 하카브의 말 위로, 귀가 먹먹하게 멀어 버릴 정도의 굉음이 덮쳤다. 하카브는 놀라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마력으로 강화된 일격이 철창을 타격했다. 하지만 우수수, 천장에서 흙먼지와 돌가루가 떨어질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디에즈가 다시 한번 철창을 세차게 두드렸다. 철창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이 벽을 울렸다.
쾅!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철창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쾅!
철창이 닿아 있는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으로부터 작은 돌조각이 떨어졌다.
디에즈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큰소리가 잦아들었음에도 투두둑, 도르륵. 돌이 굴러떨어졌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뱉었다.
쾅!
캉, 콰드득, 끼이익.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서서히 휘어지던 철창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돌벽이 검고 긴 강철을 뱉어 냈다. 갈라진 틈새에서 조각난 돌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케틀린은 보이지 않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수년간 그녀를 가로막던 거대한 철창이 무너진 모습은 본 적 없어 쉬이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그들이 쌓아 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그 소리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케틀린은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가슴팍부터 올라간 그녀의 손이 디에즈의 얼굴에 닿았다. 케틀린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남자의 눈물을 닦았다.
그들은 성을 빠져나왔다. 케틀린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년간 갇혀 있으면 감옥이라고 해도, 정이 드는 건가? 뭐가 그리 아쉬워서 그래.”
케틀린은 팔짱을 낀 채 입맛을 다셨다.
“엘피디오를 놓고 온 게 아쉬워서요. 갚아 줄 것이 많은데. 아이고.”
오래 갇혀 있던 탓에 근육이 약해졌는지 케틀린은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했다. 말 위에 앉은 그녀가 휘청이자, 뒤에 앉은 하카브의 호위가 그녀를 지탱했다.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하카브가 이런, 하면서 혀를 찼다.
“어쩌면 좋나. 미안하게 되었다 키티. 네 몫인 걸 몰랐어.”
“네? 죽이셨어요?”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죽기는 했지. 디에즈가 갑자기 찔러서 깜짝 놀랐지 뭐냐.”
하카브는 그때를 잠시 반추했다.
엘피디오와 디에즈, 그리고 자신까지 같이 있던 때였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던 중, 어쩌다 ‘로젤린’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하카브가 계속해 로젤린에 대해 탐욕을 드러내자, 엘피디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난리도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도 아니건만, 발타의 후계자가 황실의 ‘것’을 눈독 들이니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로젤린 경이야, 충실한 황실의 기사지요. 이번 무투 대회도 황실에 대한 충정을 내세우기 위해 참가한 것이니 말입니다. 다양한 경험을 위해 지금은 리카르디스의 밑에서 수행하고 있으나 이제 그녀도 슬슬 방황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피디오의 말을 들은 하카브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엘피디오는 얼굴을 붉히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왕자에게만 특별히 말해 드리죠. 지금쯤이면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제 인장이 찍힌 청혼서가 도착했을 겁니다.]
하카브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로젤린 경은 리카르디스 황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하, 그거야 어린 시절의 소꿉장난 아니겠습니까.]
그때쯤, 옆에 가만히 인형처럼 앉아 있던 디에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몰랐군요, 엘피디오 황자께서 로젤린 경을 마음에 두셨을 줄이야.]
[순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카브 왕자. 우리들의 위치에서는 마음에 두고, 두지 않고가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필요 하느냐’, ‘필요하지 않으냐’인 것이죠.]
그리고 눈 깜짝할 새였다. 엘피디오는 제 배에 박힌 날카로운 손톱을 보고 나서야 통증을 느낀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는 기절했다.
하카브는 기절할 만큼 좋아서 넘어갈 뻔했다. 아름다운 흰색 털의, 야수의 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림자! 디에즈가 로젤린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때만 떠올리면 극도의 흥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케틀린에게 설명하는 지금도 하카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도는 중이었다.
“뒤처리에 고생을 제법 했지. 그래, 그건 중요하지 않다, 키티 들어 봐라. 내가 꼭 일러 주고 싶었다. 그때 디에즈가 ‘그림자’인 걸 처음 알았는데 말이다.”
“그림자? 발타 전승의 그거요? 진짜로 있는 거였어요?”
“그래, 그래. 디에즈가 그거였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그때 디에즈가 얼마나 아름다웠냐면…….”
뭐, 엘피디오를 난도질하는 하얀 야수의 손이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둥. 엘피디오를 죽일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둥. 덕분에 황제에게 큰 선물을 보낼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디에즈의 덕이 아니겠냐는 둥. 케틀린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던 정보들은 대충 흘려들었다.
그림자. 케틀린은 그 거대한 마력의 정체를 깨우쳤다. 과연, 하카브 왕자가 ‘나의 검은 달’ 운운을 할 법한 일이었다.
몇 대를 거슬러 간, 위대한 영혼 힉살라의 왕비. 유일하게 여자로서, 평민 출신으로서 문헌이 이름을 남긴 갈라타. 미모나 학식이 뛰어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말도 더듬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천치라는 평을 받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힉살라의 왕비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얻게 된 경위에는, 그녀가 아주 강한 마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게 된 때로부터 강한 마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녀가 나타났다. 발타의 어떤 이도 견줄 수 없는,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마력. 힉살라는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출 정도로 총애했다고 전해졌다. 바로 그 시기부터, 발타의 문헌에 비밀스러운 서류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형태를 따라 ‘그림자’라 불리는 존재들에 관한 것이었다. 마력을 숭배하는 발타에게 그 존재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위대한 것이었다.
케틀린 또한 검은달의 간부가 되고 나서 그 문헌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직접 본 적 없으니 아무래도 전적으로 믿기 힘들었는데…….
디에즈의 마력을 코앞에서 느끼고 나니, 그 말을 믿지 않는 쪽이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엘피디오는 좀 괴로워했나요?”
“가죽을 벗길 때는 좀 아파 보이던걸. 그때까지 살아 있었거든.”
“듣던 중 다행이네요.”
“거기에다가 신관 옷을 입혀서 버려 둔 덕에 황족 대우를 받지 못하고 화장됐으니, 마음 풀어라, 키티.”
시체를 불에 태우는 방식은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신관들이나 하는 장례였다. 황족들만이 묻히는 영광의 땅을 버젓이 두고서, 태워져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황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디에즈가 급작스럽게 일으킨 사건을 뒤처리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장난질까지 치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엘피디오를 향한 감정은 소소하지만 차곡차곡 쌓아 제법 몸집을 불린 상태였다. 그가 겪었다는, 나름의 고난 정도로는 맞바꿀 수 없었다.
몇 년간 당해 왔던 일에 더하고, 곱한 것에 곱절을 돌려주려고 했는데. 어쨌거나 죽인 사람이 디에즈인 데다가 산 채로 얼굴 가죽이 벗겨졌다니 그나마 그걸 위안거리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케틀린이 코를 킁킁거렸다. 아까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뭘 이렇게 태우셨어요?”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불이, 또한 그 불에서 나는 연기가 얼마나 숨 막힐 듯 밀도 높은지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탄 냄새가 지나가는 바람 표면에 얇게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먼 곳에서 거대한 불이 났으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엘피디오의 석영 성. 주인이 없어서 기름칠하는 것이 수월했다더구나.”
“진즉에 말씀해 주시지. 기분 좋아졌어요.”
하카브랑 케틀린이 마주 보고 웃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코로 전해지는 붉은 빛과 검은 연기의 향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하카브도 그녀를 따라 불타는 석영 성을 바라보았다. 수도 거리 구석구석에 보일 만한 거대한 화재였다.
“역시 신호는 화려한 쪽이 좋구나. 눈에 잘 띄니 말이다. 슬슬 그쪽도 시작할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성이 불타는 광경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군중 중 누군가였다. 어떤 덩치 큰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다른 사람의 등에 식칼을 박고 있었다. 흰자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해 있고, 몸 여기저기에 근육과 핏줄이 울룩불룩 움직였다. 남자는 이성을 잃은 듯 날뛰었다. 그 남자보다 덩치가 큰 사내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믿기지 않는 힘으로 다른 이들을 떨쳐 냈다.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남자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케틀린은 마수처럼 날뛰는 사람들에게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기운을 읽었다. 이 근처뿐 아니라, 수도 저 멀리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구름에 가려졌던 무수한 별이, 바람이 지나며 제 모습을 일시에 드러내는 것처럼.
케틀린이 말 위에 앉아 씩 웃었다.
“제법 장관인데요.”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의 말에 하카브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연회장을 휘저어 놓은 발타인들 또한, 마독 ‘파편’은 아니지만, 독을 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행히도 건국일을 맞아 다수의 신관들이 연회장에 있었던 터라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리카르디스는 혼란스러운 연회장 내부를 정리하는 것에 앞서, 하얀밤 기사단을 모았다.
“하카브를 쫓는다.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해.”
엘피디오가 죽었다.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파란이 일게 될 것이다. 발타와의 전쟁 이전에 일라베니아 내부에서 무언가가 먼저 터져 나올 수도 있었다. 갖은 준비를 한 상대를 두고 최선의 대비를 할 수 없는 전쟁의 끝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발타 쪽에도 일라베니아와 걸맞은 혼란을 선물해야 하리라.
하카브는 발타의 힉살라, 아돈을 대신해 왕실을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질 경우, 발타의 움직임에는 당분간 제동이 걸리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놀란 황제고, 기절한 황후고 뭐고 간에 제일 먼저 하카브를 쫓으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다들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막 도착한 성 기사들과 밖에 경비를 서던 병사들의 무기를 잠시 빌렸다. 빌려주는 사람들과 합의가 되지는 않았으나, 급한 상황이라 하나하나 설명할 틈이 없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 마르틴에게 검을 뺏어 왔다.
로젤린은 긴 드레스 자락을 찌익 찢었다. 들쭉날쭉하게 찢어진 드레스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살랑거렸다. 시종들이 급하게 말을 몇 마리 데리고 왔다.
다들 번듯하게 차려입은 모양새로 말에 올라탔다. 하, 이랴! 급하게 말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성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수도를 둘러싼 성벽에는 동, 서, 남, 북. 총 네 개의 문이 있다. 그들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알지 못했다. 곧 비상종이 울리게 되면, 여기저기 횃불이 밝혀짐과 동시에 네 개의 문은 전부 닫힐 것이다. 닫힌 문을 뚫고 갈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들키지 않고 도망갈 구멍이 따로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남쪽 문, 가장 경비가 강한 곳은 피할 것이다. 서쪽, 상인들이 많은 거리. 그 속에 섞이려고 하는가? 목격자가 많으니 피할 수도. 북쪽,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삐이익----
먼저 살펴보러 떠났던 마카롱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삐익, 삑 삑, 깩! 독수리가 무언가 조잘조잘 얘기하자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카롱이 수상한 무리는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흩어졌다고 말해 줬다. 둘 중 어느 쪽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로젤린은 이상하게 서쪽이 신경 쓰였다. 서쪽 거리는 로젤린이 축제 날 길을 잃고 들어갔던 암흑가가 있던 곳이었다. 디에즈를 만났던 곳.
그때 길을 잃어버렸다는 디에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었으나, 그 또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말을 붙여 몰았다.
“전하! 서쪽 아란페디스 거리의,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골목을 아십니까? 축제 날에 검은 뱀이 그려진 가면을 쓴 디에즈 전하와 만난 적 있습니다.”
로젤린의 말을 들은 하얀밤 기사단원 모두가 고삐를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로젤린도 재빨리 그들을 따랐다. 아란페디스의 검은 독사. 일라베니아의 암흑가 큰손 중 가장 유명한 자였다. 디에즈가 그의 표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뒤에서 파르딕트가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그때 길 잃어버렸을 때 만난 거야? 그걸 지금 말해?
“로젤린 너 진짜!”
“……아니, 전…… 그때는…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것은 빨리 인정해야 했다. 눈치 보던 로젤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씩씩 화내려던 하얀밤 기사 단원들이 일시에 숨을 죽였다.
그녀는 서쪽 거리뿐 아닌, 수도 비스타 전역에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마수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이질적이었다. 검은달의 인조 마인 부대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보다도 더 이성을 잃고 날뛰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수도에 있었다면, 분명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은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석영 성의 화재를 신호로, 검은 독사가 마수의 결정을 무작위로 사람들에게 심고 다닌 결과였다. 마수의 결정은 마치 잠자고 있는 씨앗 같아 아주 가까이에서도 미약한 마력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그것이 사람의 몸을 토양 삼아 자라나기 시작하면 폭발하듯 기운이 터져 나왔다.
로젤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대충 예상되었다.
“서쪽 거리를 마수의 결정과 같은 종류의 마력이 뒤덮었습니다. 수, 스물…… 아니, 스물다섯. 서른셋. 일곱, 계속 늘어납니다. 여기저기에서 날뜁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확인했습니다. 거리에 많은 피해가 예상됩니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순순히 잡혀 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르원!”
그가 소리치자 무리에 있던 르원이 빠져나와 다른 곳을 향했다.
“치안대에 상황을 알리고 지원 요청하겠습니다! 로젤린 경!”
“맡겨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로젤린도 무리에서 확 튀어 나갔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곧, 무리가 향하는 정면에서 얼룩무늬의 소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머리로 들이받고, 짓밟아 뭉개는 소의 입에서 게거품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소의 다리와 머리에서 굵은 혈관과 근육이 울룩불룩 크게 부풀어 올랐다. 금방에라도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기괴한 형상이었다.
큰 거리로 가기 전의 좁은 길이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동료들을 뒤로하고 뛰쳐나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충돌하기 몇 초 전, 로젤린은 고삐를 쥐고 말 위에 섰다.
“로젤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로젤린을 목격한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이 고양잇과의 동물처럼 유연하게 착지하고는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그녀의 시야가 휙휙 바뀌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소, 바닥, 하늘.
그리고 다시 코앞에는 흰자위가 붉은 짐승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쿵! 로젤린이 한쪽 발을 박아 넣듯 디뎠다. 그녀의 몸 안 구석구석을, 짐승이 가진 것보다 훨씬 강하고 거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타고 돌았다.
쾅!
살과 근육이 있는 두 생물이 부딪쳤다고 믿기지 않는 딱딱한 굉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로젤린의 맨발이 바닥에 박혀 드드득 밀려났다. 그러나 고작 한 걸음 반 정도의 거리.
소의 난폭한 질주로 시끄러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잠들었다. 짐승이 앞발을 들며 일어서려 했으나 로젤린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굴러다니는 부서진 나무 각목을 발로 차서 올려 빠르게 잡아챘다. 짐승의 단말마를 끝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피를 닦고 있는 로젤린의 뒤로, 타고 온 말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그녀가 가뿐한 몸놀림으로 등자를 밟고 올라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멍하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리카르디스를 에워싸고 달렸다. 독수리는 기사단의 한참 위에서 로젤린과 나란히 비행 중이었다. 거리는 엉망이었다. 사람들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비명을 질렀다. 아까까지 누군가의 얼굴을 핥던 짐승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익숙한 피 냄새를 뚫고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로젤린은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길 중, 가장 마력의 기운이 적게 느껴지는 곳을 판별해 달렸다. 위험한 상황이 오면 로젤린이 훌쩍 말에서 뛰어 벽을 밟고 누군가를 덮치고는 했다. 그러고 재빨리 다시 뛰어서 말 위에 앉는 묘기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삐이익---
마카롱이 길게 울었다. 무언가가 보인다는 신호였다. 로젤린이 눈을 변형시키며 한계까지 시력을 강화했다. 저 멀리, 말에 타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람들의 혼란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느긋한 걸음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로젤린이 이를 악물고 박차를 가했다. 그 순간, 그 일행 중 가장 뒤에 있던 누군가가 말의 고삐를 쥐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후드를 벗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까만 하늘 아래에서도 밝게 빛났다.
로젤린이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고작 스무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곧 도착했다.
“디에즈……전하.”
로젤린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불타오르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 때문에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디에즈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했어요, 로젤린. 무사해 보여 다행입니다.”
언제나 했던 인사말과 함께였다. 로젤린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하늘을 떠돌던 마카롱이 어느 지붕 위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나단이 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단원들도 모두 검을 뽑았다. 로젤린도 망설이지 않았다. 디에즈는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에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내가 먼저 한 짓이지만 겪어 보니 생각보다 더 유쾌하지 못한 일이로군요. 어쨌거나…… 검은 치우는 쪽이 좋을 겁니다. 로젤린, 당신도.”
“제법 화려하게 일을 저질렀더구나, 디에즈. 하카브 왕자는 어디 있지?”
리카르디스가 제 할 말만 하자 디에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먼저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디에즈는 그 말을 하며 로젤린은 찬찬히 훑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굳어졌다. 디에즈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자신의 뒤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의 뒤에 있던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가 디에즈의 눈짓을 보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디에즈가 그걸 받아 하얀밤 기사단원들 쪽으로 던졌다.
모두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디에즈가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위험한 건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위험한 건 아니었다. 반짝이는 작은 구두였다. 어린 영애들이 신을 법한…….
리카르디스는 잠시 무언갈 생각하다가 이를 갈며 분노했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네가 지금……!”
“연회장에 체리트가 없던 걸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덕분에 얘기가 빨라지겠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형님. 형님은 그 선에서 넘어오지 마시고…….”
디에즈의 말대로, 리카르디스는 건국일을 맞이한 연회에 체리트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어린 7황녀는 디에즈를 잘 따랐고, 그는 그것을 잘 이용한 모양이었다.
“로젤린, 당신과는 못 다한 얘기가 있어서. 잠깐 같이 걸을까요?”
“헛소리 하지 마라, 디에즈!”
“체리트를 데리고 갈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적당히 거지 소굴에 던져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을 먹는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도는 곳인데요.”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디에즈를 처단하고 하카브를 쫓아야만 했다. 목숨의 무게는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잘 알았다. 체리트를 살리는 것, 하카브를 죽이는 것.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했다.
하카브가 살아 돌아가게 된다면 분란과 전쟁은 가속화될 것이다. 어떤 때보다 하카브를 둘러싼 방어가 얕은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만…….
리카르디스는 한번 어린 동생을 잃어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디에즈는 어쩌면 그런 약점을 파악하고 체리트를 인질로 데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체리트를 구하기 위해서는 로젤린을 홀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디에즈에게 어떤 일을 당했던가. 그가 로젤린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던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등을 헤집었다. 날카로운 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노렸다.
계속 된 시도는 점점 치명적이게 변하고 있었으니. 이번은 정말로 위험할지도 몰랐다.
체리트를 구하고자 하면 하카브와 로젤린을 놓친다. 로젤린과 하카브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체리트가 죽는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잘 알고 있음에도 리카르디스는 망설였다.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시체가 얼마나 차가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여린 살결 위의 상처들은, 성력을 아무리 붓는다고 해도 낫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마지막 모습만 가슴에 박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으리란 걸,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검을 뽑는 그 순간부터 전투는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말인즉슨, 인질의 안위는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는 것.
하카브를, 죽여야 한다.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죽여야만, 반드시! 검 손잡이를 잡은 남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았다. 몸 안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손끝부터 굳어 갔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고 나서야, 자신이 계속해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로젤린의 시선이 맞닿았다. 로젤린이 경직된 리카르디스의 손을 꽉 쥔 채,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전하. 걱정 마세요.”
여기저기 거리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화재로 인해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울음소리와 비명은 점점 커졌다. 주변이 소란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요란하게 울려 대는 가운데. 그녀 혼자 달빛 아래에서 고요하게 서 있었다.
삐이익----
밤하늘에 묻혀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독수리가 울었다.
로젤린이 하늘을 한번 보더니, 리카르디스와 기사 단원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불꽃이 담겼다.
“황녀 전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언제나 초연했던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리카르디스가 가진 것과 비슷한 종류의 분노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 또한 누군가를 잃은 적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어린 황녀 세티스티아의 시체를 안고 하루하고도 반나절간 부서진 마차 안에서 울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야 떠올려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는 차마 로젤린을 붙잡을 수 없었다.
* * *
서쪽 성벽 문은 닫혀 있었다. 하카브는 어떻게 나간 것인지, 또 디에즈는 어떻게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되었다.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디에즈와 같이 있는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벌컥 문을 열어 줬다. 큰 정문이 아닌 병사들이 다니는 작은 문이긴 했으나, 그 또한 성벽 밖과 연결된 길이었기에 큰 차이는 없었다.
“오늘 비상종 울린 거 알고 계시죠? 이거 함부로 열어 드리면 안 되는데…….”
여자는 씩 웃으며 그들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던져 줬다. 평소에도 그래 왔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로젤린은 히죽히죽 웃는 병사들의 얼굴을 외워 뒀다. 이 나쁜 사람들.
두껍고 높은 성벽을 지나자 공기는 확 달라졌다. 고요하고 어두웠다. 로젤린은 말의 갈기를 쓸며 앞서 걷는 그들을 따랐다.
디에즈의 일행은 검은독사라 불리는 여인 한 명과 일라베니아인으로 보이는 사람 넷, 발타인으로 보이는 사람 넷. 도합 열 명의 소규모 무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카브는 어디 있을까. 로젤린이 곰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는 걸 보니 멀리 있는 모양이었다.
삐이익, 마카롱이 낮게 날며 울었다. 삑, 깩, 뺙, 깨르르륵…… 뭐라고 시끄럽게 우는데, 욕이었다. 디에즈를 향한 것이었다. 디에즈는 대충 알아들었는지 눈썹을 휘며 웃었다. 언제나 보여 줬던 그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으나, 로젤린은 이번은 경계를 놓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찔렀기 때문이 아니라, 납치한 소녀의 구두를 무성의하게 바닥으로 던졌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얘기했다.
“황녀 전하께서는요.”
“하카브 왕자와 함께 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귀하게 여겨 달라 했으니. 걱정 마세요.”
“하카브 왕자는 어디 있습니까.”
“먼저 떠나라 했으니, 저보다 앞에 있겠죠.”
“나에게 무얼 원합니까.”
“그냥 얘기나 할까 싶어서요.”
그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쏟아지는 밝은 밤이었다.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디에즈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어서. 그래서.”
얘기를 하자고,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해 놓고서는 디에즈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느새 좁은 숲길이었다. 나뭇잎이 하늘을 얼기설기 가리기 시작하자 무리의 위에서 날던 독수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나무 위를 토도도 뛰어다니는 다람쥐가 그들을 줄기차게 쫓아왔다. 숲길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디에즈가 말의 고삐를 쥐었다. 말이 제자리에 멈춰 서며 투레질을 했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떨어졌다. 디에즈는 그 아래에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조금 더 뒤로 빗겨 나가 있었다.
로젤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지나온 성벽, 거리들, 여기저기 불씨를 틔운 화재와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 성까지.
그의 눈동자에 비쳐 황금색으로 덧칠해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내가 이 말을 앞서 하지 않았던 것은…….”
디에즈의 흐릿했던 시선이 로젤린에게 닿았다.
“그래도 당신이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리카르디스의 옆에서 검을 들고 있을 것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로젤린이기 때문에.”
토도도도, 다람쥐가 근처 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디에즈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건, 그래요. 내가 하려던 말은 아니지만,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로젤린. 당신이 형님을 따르고 지키고자 하는 건, 그녀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 오래된 기억에, 고작 조각난 기억에. 나의 것도 아닌 기억에 매달리는 건 왜, 어째서.”
잔잔했던 남자의 목소리는 갈수록 분노에 차 흔들렸다. 한 자, 한 자. 그의 감정이 꾸역꾸역 들어가 있어 그녀도 잘 느낄 수 있었다. 조각난 기억, 나의 것도 아닌 기억? 로젤린은 과거 ‘로젤린’과 자신을 애써 분리하려 하지 않았기에 디에즈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알을 깨고 나온 짐승이 처음 본 무언가를 따르는 각인일까요? 이전에도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그저 관성적인 행동에 불과할까요. 정말로 당신이 하는 모든 사고, 관념. 그 모든 것이 당신만의 의지로 이뤄지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 속에 당신이 있기는 해요?”
디에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는 행동은 로젤린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라고. 리카르디스를 지키고, 그를 위해 검을 드는 행동까지 모두.
디에즈는 대충 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분노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큰 숨소리를 내는 짐승의 위에 앉아, 힘을 빼고 앉아 있는 디에즈는 어쩐지 살아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녹아서, 부서져서 달빛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로젤린…….”
“나쁜 장난을 즐기는군요, 황자.”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디에즈는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방해꾼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이 책 내용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빠르게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것이 아이들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하카브가 책장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 부류의 아이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황자는 그런 아이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요.”
하카브는 제 턱 아래에 겨우 오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태양 빛을 한껏 받은 황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켰다는 자각이 있는 것 같음에도, 행동거지는 여전히 느긋했다. 디에즈는 또 다른 책을 뽑아서 눈으로 대충 훑고 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의 5황자, 설원의 월계수 디에즈.
파티 홀에서 몰래 빠져나가기에 뒤를 밟았더니, 도서관. 심지어는 타국의 인사에게는 열람권이 없는 구역까지 들어가는 게 아닌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하카브 왕자. 어린아이의 실수나 장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어찌 이런 금지 구역까지 오셨는지.”
책을 읽는지 넘기는 것인지 모를 빠른 속도였다. 디에즈는 다시 책을 덮고 끼워 두었다. 하카브가 제 턱을 쓸며 웃었다. 확실히 발타의 1왕자와 제국의 5황자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였다. 일라베니아도 발타도 아닌 라고슈 왕성 내 위치한 도서관. 그 금지 구역 안쪽이었으니.
“서로의 허물은 묻어 두는 걸로 하시겠습니까, 황자?”
“그렇게 하죠.”
디에즈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파티 홀에서 생글생글 사랑스럽게 웃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전부 다 연극인 모양이었다.
태양 빛을 받는 황금보다 찬란하다는 둥, 디저트 위를 흐르는 벌꿀보다 달콤하다는 둥, 디에즈 황자가 눈길을 주는 곳에는 그곳이 라고슈라 하더라도 꽃이 필 것이라는 둥의 찬사를 받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툭툭 내뱉는 말투, 타국의 고위 인사를 앞에 두고 눈길도 주지 않는 태도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그의 평가와 대비되었다.
“한…… 안 가십니까?”
한가하십니까? 로 들렸다.
하카브는 그가 펼쳤다가 꽂는 책의 제목들을 쭉 훑었다. 죄다 역사 관련이었다. 그것도 일라베니아와 관련된.
하카브는 머리를 굴렸다. 일라베니아 내에 역사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국의 황자라 어지간한 책은 다 볼 수 있을 텐데, 굳이 타국의 도서관, 금지 구역까지 왔다는 것은…….
‘이것 참.’
하카브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조차 몰랐던 디에즈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가 끼우기를 반복하는 소년의 어깨 위로 제 손을 뻗어 책장을 짚었다. 디에즈는 졸지에 그와 책장 사이에 갇히게 되어 버렸다. 디에즈가 고운 얼굴을 확 찌푸렸다.
“발타에도 재밌는 책들이 많습니다, 황자.”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디에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카브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디에즈는 편하게 책장에 등을 기대며 그와 마주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싱글벙글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저는 그런 걸 좋아합니다.”
“말해 보시지요.”
“미신, 속설.”
“좋군요. 저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있을 수도 없는 소설.”
“주로 사람들은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고는 하더군요.”
“터무니없는 것.”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도서관 내부는 어두웠다. 그 속에 황금빛의 황자만이 고요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에 잠긴 보물 상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
하카브가 웃었다. 그쪽 핏줄은 어지간하면 바보거나 멍청이뿐인데, 황실의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머리가 비상했다. 일라베니아에 쓸 만한 인물은 리카르디스뿐인 줄 알았더니…….
“재미있군요, 황자. 마침 제가 그런 이야기를 압니다. 일라베니아의 사람이 듣기에는 한없이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소설일 테지요. 흥미가 있으십니까?”
“저희가 있는 곳이 어딘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흥미가 없었으면 금지 구역까지 왔겠냐. 숨겨져 있는 말을 알아듣고 하카브가 웃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린다면, 황자는 저에게 뭘 줄 수 있습니까?”
디에즈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더니 그의 말에 답했다.
“일라베니아.”
하카브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5황자가 주겠다는 대가치고는 크기가 너무 크다. 그래도 당찬 기세 하나와 내용 자체는 썩 마음에 드는 터라, 그 값을 후하게 치기로 했다.
* * *
발타로 귀화한 일라베니아 병사로부터의 증언이다. 정리된 문서는 소실되어, 그 당시 증언을 그대로 속기한 내용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른 병사들의 증언과 대조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수감자들은 식사 시간, 용변이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 것. 수칙 첫 번째입니다.]
[특별히 수칙으로 정해졌던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그런 겁니다. 너희들이 날고 기어 봐야 다 우리의 관리하에 있다. 그런 거를 보여 주는 거기도 하고요. 아무리 녹슬어 있다지만 대단한 무기였던 만큼, 철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랬군요. 이해가 갑니다. 또 다른 수칙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수칙 두 번째는, 함부로 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병사들의 이목을 피해 불온한 대화가 오고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는 기침 소리로 신호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숨 쉬는 것 하나하나도 주의 깊게 살피고, 처벌했습니다. 허튼 생각을 못하도록요.]
[오, 물론이죠. 그런데 어린 수감자들은 그걸 이해하기 좀 어려워했을 것 같은데, 그 경우는 어떻게 했죠?]
[어…… 그러니까…….]
(10세 미만 어린 수감자들에게도 똑같이 체벌이 적용되었음을 확인함. 지속적인 학대.)
[대답하기 어려우면 넘어가셔도 됩니다. 다른 걸 얘기해 볼까요?]
[네, 네네. 아, 그리고 식사는 아침에 한 번으로 제한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예 굶는 날이 있고요.]
[일반 범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나요?]
[아니요. 사람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수감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배급하고, 특별 수감자들보다 양도 많습니다. 특별 수감자들은…… 아시잖습니까.]
[그렇죠. 마인이니까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어요.]
[맞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특별 수감소가 창설된 초창기만 해도 어휴, 밥을 제대로 먹이니까 철창 뚫고 아주 날아다녔다 합니다. 십 년 전만 해도 그런 사고가 빈번했다니, 점점 양이 줄어든 거죠.]
(……중략)
[감옥 내에서 태어난 애들도 많습니다. 근 이십 년 정도 됐으니까, 어린 애들은 뭐 다 감옥 출신이라 봐야죠. 일단 네 살 정도까지는 어미랑 같이 두고, 입이 트일 무렵이면 떼어 놨습니다. 아이들을 아이들끼리 따로 모아 둡니다. 여차하면 인질이 될 수 있게요. 아무튼, 그렇게 태어난 애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요?]
[감옥에서 부모가 살갑게 이름을 붙여 주겠습니까, 누구야 하면서 안아 줄 수나 있습니까. 부를 필요도 없고, 불릴 이유도 없으니 이름도 없었죠. 병사들이 부를 때는 그냥 야, 너. 하거나 창대 끝으로 툭툭 치거나 했죠.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고, 상부 지침이라. 예, 상부 지침.]
[네, 상부 지침. 하하.]
[어렸을 때부터 들은 게 없다 보니 열 몇 살 되는 애들도 제대로 말을 못해요. 필요한 단어 몇몇 개 빼고는 모르죠. 그러다 보니 사고 능력도 떨어지더라고요. 멍청하고 행동이 더뎌요. 먹을 거밖에 모르고 그냥. 멍하니 있다가 자고, 하라는 거하고. 그런 식이죠. 그런데 사실, 그게 좀 편해요. 어른들이랑 달리 다루기 편리하니까요. 아,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다른 병사들이 그렇다 하더라고요.]
(……중략)
[대신전 특별 수감소 내에 근무하면서 불편했던 점이 뭐가 있었나요?]
[지하 깊은 곳이다 보니까 습하고 춥습니다. 곰팡이도 잔뜩 펴 있어요. 일주일만 근무해도 다들 기관지에 무리가 와서요, 어우. 다들 배정되기 싫어했죠. 그런데 월급날 되면 그런 것도 사실 뭐 버틸 만했어요.]
[힘들었겠어요.]
[힘들죠, 정말 힘듭니다. 아무리 마인이라 해도 그런 환경이다 보니 나이 들거나 어린 수감자들은 못 버티더라고요. 몇 주에 한번 꼴로 시체가 생겨요. 그런데 그 시체를 어쩌겠어요. 치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감옥 안에 눈알이 희번득한 놈들이 있어요. 아주 오금이 저려요. 이건 뭐 철창 열자마자 폭동이 일어나겠다 싶죠. 실제로도 몇 번 시도가 있었고요. 그렇다 보니 상부에서 어지간하면 철창문 열지 말라 공문이 내려왔거든요. 철창문 안 열고 어떻게 시체를 치우겠냐고요. 환장합니다. 갈고리로 시체 끌어내서 안쪽에서 조각낸 다음에 꺼내야 해요. 냄새도 더 지독하고 처리 과정도 더 귀찮아도 어쩌겠어요. 아주 인간 백정된 기분이라니까요.]
(중략)
[이제 사건 당일 날에 대해 말해 주시겠어요?]
[제가 저녁-새벽 교대 조거든요. 갑옷 챙겨 입고, 장비하는데 뭐 밖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특별 수감소 문이 열렸다고 그러지, 마인들은 도망갔다 그러지, 신관들은 살해당했다고 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더라고요. 여기저기 불타고 있어서 불도 꺼야겠고. 쫓아도 가야겠고 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알고 보니까 도망가고 시간이 제법 흐른 후였습니다. 목격자고 뭐고 다 죽이고 가서 몇 시간 동안이나 몰랐던 거예요. 아무 죄 없는 어린 수습 신관들까지 죽였다는데, 아주 잔인한 놈들이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저는 일단 감옥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잡을 수 있으니까. 과거 마인 사냥을 할 때는 마인을 앞세워서 마인을 추적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서로를 감지할 수 있는 게 서로뿐이니까요.]
[네.]
[아무튼 그렇게 내려갔더니, 감옥 철창이 전부 열려 있지는 않은 거예요! 그게 다 특별 수감소 방침 덕분이죠. 감옥 열쇠를 모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상부에 신청해서 허가받고 받아 오고…… 절차가 아주 복잡합니다. 운 좋게 열쇠 몇 개를 구했지만, 전부 구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보이더군요. 철창이 다른 감옥에 비해서 두껍고 튼튼하다 보니, 약해진 몸으로는 부수지 못했던 것 같고요. 아무튼, 이거 됐다 싶어서 살펴보는데 세상에…… 갇혀 있는 수감자들이 다 죽어 있지 뭡니까. 병사들이 죽였을 리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놈들이 도망가면서 데리고 가지 못한 제 부모, 형제, 자매, 친구, 자식. 다 죽이고 간 겁니다. 얼마나 오싹하던지. 짐승도 그렇게는 안 할 겁니다.]
* * *
시간을 오래 거슬러 가야 하는 이야기이다. 축복의 밤이 매년 잊지 않고 찾아오던 그 시대.
이미 일어난 일이니,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황제는 축복의 밤을 불러오는 영광이 반으로 나뉘는 것을 탐탁잖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권력자 밑에는 언제나 머리를 굴려 수를 쓰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니. 그때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으리라.
황실은 먹음직한 미끼를 걸어 두고 몇몇 마인을 사주했다. 권력이나 물리적인 협박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 또한 서슴지 않았다.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황실이 있었으나,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돌을 던져야 하는 대상을 사건을 일으킨 몇몇 마인이 아닌, 그 힘을 가진 자들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이 온건하지 못하고 다소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는 사실 또한 그 커다란 일의 배경이 되었다.
그중 강한 마력을 타고나는 혈족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황제와 영광을 나눠 가지던 자들이었다. 몇 세대 걸쳐 쌓아 온 우정이 한순간에 꺾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들은, 보호라는 이름을 앞세운 황제의 거짓된 약속에 속아 넘어갔다.
사건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사람들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황실 깊은 곳에 숨어 있으라. 오랜 우정이 그대들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마인에 대한 원성은 잦아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마인을 향한 거부감은 더더욱 날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때가 무르익고서야 황실이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수천이 넘는 황실의 병력이 대대적으로 움직였다. 평화롭던 대륙에 피 냄새가 퍼졌다. 누구는 사냥이라 했고, 누구는 학살이라 했고, 누구는 정화라고 했다.
마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죽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했다. 대륙에서 마력이라는 힘과 마인이라는 존재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황실의 대신전, 그 깊숙한 곳. 강한 마인들은 감금되어 오랜 시간을 보냈다.
몇몇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달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다른 신생아들보다 가볍고 작았다.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이 컸다.
그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감옥 안의 모든 마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엄청난 마력의 기운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역사가 일렀다. 몇 세대에 걸쳐 강력한 왕이 태어난다. 마력을 타고나는 그들의 핏줄에서도 유독 강하고, 응축된 마력을 타고나는 자라 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이 상황을 타개해 주리라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한 마력과 함께 운명을 거머쥐고 있다는 왕의 탄생이 기쁘고, 또 슬퍼서.
아이는 자랐다. 이름도, 어떤 보살핌도 없이.
어린 마인들을 모아 두는 몇 개의 옥방 중 하나. 작은 방 한 개 분량의 감옥 안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누우면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였다. 낮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매질을 당하거나 물세례를 맞았다. 저녁에는 다닥다닥 붙어서 잠을 잤다.
아이는 유독 약해서 자주 앓았다. 다른 아이들이 더러운 천 조각 따위를 아이에게 덮어 주곤 했다. 아이의 사고는 마음껏 저 바깥의 공기를 맡으며 뛰어다니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더뎠으나, 더러운 천 조각의 온기로부터 배우지 못한 애정을 느끼기도 했다.
감옥 안은 춥고 습했다. 곰팡이가 펴 있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이가 보아 온 공간은 변함없이 이랬던 터라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 배고플 뿐이었다. 아이가 쥐나 벌레를 입에 넣으려고 하면, 아이보다 두어 살 많은 또 다른 아이가 서둘러 뺏었다.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 언제나 조용했던 감옥이 시끄러워졌다. 무섭게 매질하고, 걷어차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피가 고여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흘렀다. 아이들은 갑작스런 상황에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오랜 기간 학습되어 온 효과로, 그저 벌벌 떨며 굳어 있을 뿐이었다.
철창문 몇몇 개가 열렸고, 수감되어 있던 마인들이 감옥 안의 병사들을 모두 죽였다. 그들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다. 탈옥.
아이가 있는 옥방의 철창문도 열렸다. 어느 여자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두려움에 찰싹 매달렸다.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데,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혼날 텐데, 아플 텐데. 배가 고프고 괴롭게 되는데.
어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울고 있었다. 그 무섭던 병사들을 죽이면서도 울었고, 열리지 않는 다른 방 앞에서 철창을 두드리며 울었다. 태어난 이후로 접해 보지 못했던 큰 소음과 소란.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어른들은 탈출하지 못한 마인들이 사냥개가 되어 자신들을 추적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또한, 도망친 자들을 잡건, 놓치건 간에 이미 탈옥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지내 왔던 것보다 더더욱 괴로운 나날이 그들에게 펼쳐질 거란 사실 또한 잘 알았다. 그들이 창을 들고 가족의, 연인의, 친구의, 자식의 심장을 꿰뚫은 이유였다.
여자에게 안겨 계단을 오르던 아이는 뒤에서 퍼지는 비명에 몸을 떨었다. 병사들은 진작에 다 처리했으니,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하지만 아이의 사고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그저 퍼지는 비명과 울음소리에 가슴이 덜컹. 절로 눈물이 날 뿐이었다.
아이는 곧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지하를 벗어났다.
휘이이, 바람이 불었다.
둥그렇고 새하얀 무언가가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까만 천장에는 빛나는 조각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 처음 보는 세계였다. 아이는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근육이 퇴화한 탓에 넘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산 길목에서 상단을 급습해 마차를 얻었다.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일을 채집해 먹을 걸 구했다. 아이는 처음 맛보는 달콤한 과일을 허겁지겁 삼키다가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수일이 흘렀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다. 간악한 마인들이 탈옥했다는 방문이 여기저기 붙었다. 포위망은 점점 좁아졌다.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으나 목적지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 어둡고 추운 공간에서 보다 멀어지길 바랐다.
그들은 산 깊숙이 들어갔다. 한두 명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흔적이 남았다. 저 멀리 사냥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른들은 넘어지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손으로 잡아끌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이 되었다. 검은 숲, 검은 나무 사이사이로 횃불이 빛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하늘 위에서 별과 달빛이 찬란하게 내리쬐었다.
사람들은 울었다. 절망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종국에는 허름하고 녹슨 날붙이를 꽉 쥐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금속음이 아이의 마음을 무섭게 다그쳤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불빛들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날에는, 영영 하늘의 빛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어둡고 무서운 공간 안에 다시 갇히게 될 것이다.
아이는 두려웠다. 두근, 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작은 몸 안에서 마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다가오는 병사들이 소리쳤다. 저기에 있다! 저것들을 당장……! 화살이 날아와 아이의 옆에 있던 소년의 머리에 꽂혔다.
아이의 눈동자에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이 비쳤다.
그들의 역사가 이른다.
몇 세대에 걸쳐 한 번씩, 강한 마력과 함께 운명을 거머쥔 왕이 탄생한다.
[아… 아, 아아아악!]
몸이 찢어지는 고통에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의 여린 몸은 그 거대한 힘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육체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비명이 울린 숲속. 마인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하나, 둘 떨어트렸다. 그들이 덜덜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에게 동조해 마력이 널뛰며 폭주했다. 모두의 안에 흐르는 마력이 몸집을 키우며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이 괴롭다는 듯 몸을 뒤틀며 피를 토했다. 오랜 세월 시든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아파, 괴로워, 무서워, 죽여! 도망쳐야 해, 복수를, 더 깊은 곳으로, 부디 누구라도! 기억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가리가리 찢겨 나갔다.
바닥에 작게 웅크려 제 몸을 할퀴고 있던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펑!
그와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터지듯 퍼졌다. 나뭇가지가 꺾이고, 작은 돌들이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병사들은 갑자기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밀려날 정도의 강풍이었다.
한차례 무언가가 휩쓸고 간 숲이 조용해졌다.
바닥을 기어 다니고, 풀숲에 숨어 찌르르 울던 벌레와 산새, 굴 속에 있는 작은 짐승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맹수들이 숨을 죽이고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맞이했다.
사람들이 괴롭게 울부짖던 자리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뭉글거리며 작게 흔들, 흔들거렸다. 뒤가 비쳐 보이는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나무의 그림자? 움직이는 검은 바위? 숲의 귀신? 어떤 이름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남은 기억의 잔재가 그들을 이끌었다. 더 깊게, 더 깊은 곳으로.
병사들이 원했던 것은 살아 있던 마인이었으므로, 시체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는 그대로 버려졌다. 그들의 시체 위로 햇살과 달빛이 지나기를 며칠. 그들의 시체는 순환의 법칙에 따라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검은 덩어리들이 벗어 놓고 간 광기 어린 감정의 파편 또한, 남김없이.
이후, 그 산에 서식하는 짐승들의 공격성이 매우 높아져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이 원수라도 되는 양, 수년간 차곡차곡 쌓아 온 원한이라도 있는 양. 거칠고, 매섭게 인간들을 공격했다.
그 사나운 맹수들은 마인의 광기를 닮았다 해서 마수라는 이름으로 묶여 살아가게 되었으나, 검고 불투명한, 연기 같은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이따금 그림자나, 귀신, ‘그것’ 따위로 불릴 뿐이었다.
사람들의 입을 오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렇게 시작한다.
아, 내가 숲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봤는데 말이야…….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터무니없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야기이다.
ㅡ2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