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끄에엑!”
밖에서 추한 비명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얕은 잠에서 깨어나 뻑뻑해진 눈을 깜박였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커튼 틈 사이로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요즘 잠잠하더라니, 다시 시작인 건가?
리카르디스는 몸을 일으켰다. 영 창의성 없는 작자들이었다. 밤과 새벽 사이. 완벽한 어둠은 사람들이 마땅히 경계하기에, 그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때. 고요함에 조금의 어수선함이 더해지는 시간.
이 푸르스름한 시간을 노린 자들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다니. 끈질기다고 해야 하는지 끈기가 있다고 해야 하는지.
밖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든 말든 리카르디스는 차분한 손길로 이불을 정돈했다. 무슨 소란이건 간에 로젤린의 선에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암살자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기사였다.
새벽 내내 말라붙은 입안이 깔깔했다. 리카르디스는 물을 마시며 테라스로 향했다. 암살자는 굳이 안 봐도 그만이나, 로젤린에게 그만하고 올라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해야겠다. 자신에게는 이른 아침이지만 아마 로젤린은 간식으로 생각하고 총 네 끼를 챙겨 먹을 것이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이러고 있으니 좀 미친 사람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커튼을 치고 테라스의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로젤린, 적당히 하고 경비대에 넘겨…….
리카르디스는 기함했다. 로젤린의 아래에 제압되어 있는 저 남자는.
‘저 연분홍색 개털은!’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난간에 몸을 실었다.
“로젤린! 죽이면 안 된다!”
“히이익!”
남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죽음의 문턱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곧 경비를 맡던 기사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새벽을 틈타 리카르디스의 방 안에 몰래 침입하려 했던 자의 이름은 라헤안시. 신분은 대신관이었다.
“잘 아실 만한 분께서…….”
스타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면이 팔리는 듯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속된 말로 쪽팔렸다. 곧 두 명의 신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은 면구스러워 하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보호자로 호출된 신관들은 저희 대신관님께서…… 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문구와 익숙한 사죄의 표정으로 스타스의 기분을 빠르게 풀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알 것 같았던 터라, 리카르디스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란은 빠르게 종식되었다. 칼을 빼 들고 무섭게 달려온 기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돌아갔다. 리카르디스는 테라스 위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 손을 까딱하는 것으로 불청객의 입장을 허락했다.
라헤안시는 로젤린의 안내를 받아 월장석 성에 정식으로 발을 들였다. 로젤린은 뒤에서 쏟아지는 끈질긴 시선에 흘끗 돌아보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눈이 딱 맞았다. 라헤안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로젤린을 보고 있었다.
“자네가 그 유명한 로젤린 경인고?”
“예.”
라헤안시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은 ‘그’, ‘유명한’ 따위의 수식어가 제 이름과 붙어 있으면 “아닙니다. 헛된 위명이지요.”와 같은 겸손한 반응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겸손을 기대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너무 당당한 대답이었던 터라 라헤안시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는 로젤린도 맞고 유명한 것도 맞다.
“새벽부터 미안허이. 몰래 리카르디스 황자 전하만 뵙고 가려고 했는데 일이 어찌 이렇게 커져 버렸누.”
“몰래 벽을 타고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정식으로 방문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
음, 매우 정석적이다. 그걸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깜짝 놀라게 해 주려 했던 게지. 내가 도리어 깜짝 놀랐지만 말이네. 자네 대체 어디 있었던 겐가? 이 몸이 분명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주위에 누가 있는지 확인을 했었는데.”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수풀 밑으로 기어오시더군요.”
라헤안시의 뒤에서 걷고 있던 신관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추한 꼴을 또 보이셨다니…….
로젤린은 라헤안시가 월장석 성의 담을 넘을 때부터 쭉 보고 있었다. 살금살금 수풀 밑으로 기어오던 라헤안시가 지렁이를 손으로 눌러 터트리는 모습도. 이후에 비명을 지르려다가 주위를 의식하고 급하게 입을 가렸으나, 안타깝게도 지렁이를 터트린 쪽의 손이라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았다.
“상상도 못했느니. 대단히 훌륭한 기사로구나!”
“그렇습니다.”
라헤안시가 껄껄 웃었다. 딱딱하고 정석적인 기사의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가끔씩 묘한 면이 보인다. 재밌는 기사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리카르디스의 방 앞이었다. 소란에 깨어난 잇세리온이 퀭한 눈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머리가 눌려 엉망이었다.
로젤린이 잇세리온에게 “머리 모양이 이상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잇세리온은 힘없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어쩐지 새 같아 보인다고도 했다. 잇세리온은 알겠으니 제발 들어가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수면 시간이 짧아 화낼 힘도 없는 듯 보였다. 라헤안시는 소동의 주범으로서 제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리카르디스는 편한 옷을 입고 탁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쪽 손에 서류를 들고 읽어 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이 좀 인간미가 있어야지. 방금 일어난 것이 명백한 차림새임에도 얼굴이나 눈이 부어 있는 기색조차 없었다.
콧날은 여전히 우뚝하고 얼굴선은 여전히 날렵하다. 서류를 읽는 눈이 잠에 조금 잠겨 있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나른한 분위기를 형성해 평소와 다른 아름다움을 비출 뿐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새벽빛이 방 안을 어슴푸레하게 떠도는 가운데 남자의 은발이 반짝였다. 참 그림 같은 광경이다. 라헤안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이복형의 눈부신 자태를 감상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리카르디스 황자 전…….”
하. 라는 말이 나오기 전 리카르디스가 성질내며 라헤안시에게 서류를 집어 던졌다. 라헤안시는 볼썽사납게 몸을 구기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형!”
“형 같은 소리가 나와 지금? 사람들 다 깨워 놓고 이게 무슨 민폐냐! 내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어!”
신관 두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이 새벽부터.”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찾아올 아주 급한 이유가.”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있겠지. 라헤안시.”
라헤안시는 그 살기 넘치는 모습에 잠시 흠칫했다가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
“그러엄!”
“앉아.”
“어! 알았어, 형!”
대답이 재빨랐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의 맞은편에 덥석 앉았다. 두 신관들이 다시 신전으로 돌아간 뒤. 테이블에는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라헤안시가 반색하며 쿠키를 집었다.
“아, 이 맛 그리웠어. 월장석 성 주방장이 솜씨가 좋단 말이지.”
서두가 불길했다. 역시 그냥 놀러 온 거 같은데. 리카르디스의 눈이 뾰족해졌다. 라헤안시가 볼 가득 쿠키를 넣은 채 입을 열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후두두 떨어졌다.
“아, 별일은 아니고.”
이 자식이 진짜? 리카르디스가 울컥하자 라헤안시가 희희덕대며 말을 이었다.
“신관이 살해당했어.”
별일이었다.
“황실 내의 숲에서 시체로 발견됐는데 짐승의 소행이라 하더라고. 크게 번질 일은 아니야. 오늘의 보고 끝!”
별일이라면 별일이고 별일이 아니라면 아니었다. 신관이 죽은 일이야 중대사일 수 있지만, 굳이 이 새벽에 월장석 성까지 와서 얘기할 건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고 빤히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뭔가 덧붙여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라헤안시가 히죽 웃었다.
“하여간 눈치 빠르다니깐.”
“빨리 말해.”
“아 뭐, 진짜 별거는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이번 사건에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싶어서.”
리카르디스는 찻잔을 느릿하게 만지며 그가 말했던 내용을 반추했다. 신관이 죽었다. 황실 안의 숲에서 발견되었다. 짐승의 소행이다. 확실히 미심쩍었다. 어지간하면 대신전 안에서만 생활하는 자가 황실 숲까지 간 것도 이상하고, 그곳에 사람을 해칠 만한 맹수가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시체를 봤어. 아주 난도질이 되어 있었는데, 아, 생각하니까 또 속이 울렁거려.”
라헤안시가 입을 가렸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신체 일부가 사라진 곳이 없어. 딱히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사냥을 했다? 뭐 영역 침범이나 여러 가지 가능성도 있지만, 시체가 너무 걸레짝이야.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원한이 가득 찬 살인 사건의 시체 같은 꼴이었다고.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또 무리가 있어. 손톱자국이나 힘이나. 뭐 여러 가지 정황상. 그래도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는데 시체를 발견한 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짐승의 소행이다! 땅땅. 결론이 났어. 뭐 그거야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건국의 달에 들어선 이때. 심지어는 발타의 왕자와 왕녀가 일라베니아에 있는 이때. 신관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한 사람의 불행을 넘어서, 일라베니아의 명성에 금을 가게 할 수도 있었다. 일라베니아가 단순한 대륙의 패왕이 아닌, 신의 영광을 업고 있는 신성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신관이 온전히 칼로 난도질당했다 하더라도, 짐승의 소행이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그렇게 공표할 판이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범인의 모습이 흐릿하다면, 일라베니아가 내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냥 참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헤안시가 차를 후르르릅 소리 내며 마셨다. 저놈. 대신관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예법을 깡그리 잊어 먹은 것인지.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때를 기가 막히게 맞추지 않았어? 그 짐승인지 인간인지 하는 거 말이야.”
라헤안시가 히죽히죽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찻잔을 들었다. 약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리카르디스는 그 속에서 신관이 살해당하는 여러 과정을 그려 보았다. 신관은 으악, 으아악 소리를 내며 몇 번이고 죽었다. 한번은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가진 짐승. 한 번은 검을 들고 살의를 비치는 인간.
그는 두 종의 범인 후보와 지금의 시기를 맞춰 보았다. 라헤안시가 말했듯, 시기가 공교롭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으나 보다 높은 가능성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마치 이 사건이 유야무야 묻힐 것을 알기라도 한, 무언가가 저지른 일이 아닌가 하고.
“뭐 신전 쪽에서 사건을 덮겠다니 내가 더 할 건 없지만. 그냥 알아 두라고. 이 황실 어디 한구석에 위험한 게 있다는 거잖아? 이 아우가 형님이 걱정돼서 새벽부터 달려왔는데 뽀뽀는 해 주지 못할망정 화부터 내다니! 못됐어! 이그, 심술쟁이!”
“나가.”
“죄, 죄송합니다, 형님…… 아침만 먹고 가게 해 주세요……. 신전 밥 더럽게 맛없는 거 다 아시면서…….”
라헤안시는 당장 쫓겨나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먹을거리를 입에 욱여넣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라헤안시가 냠냠 쩝쩝하며 추잡스러운 소리를 냈으나 혼내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졌다. 그가 한 말이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황실 어느 한구석. 위험한 무언가가 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라헤안시를 부럽다는 듯 쳐다보던 그녀는, 닿는 시선을 눈치채고 그와 눈을 맞췄다. 가만 바라보기만 하자 로젤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찌푸린 채 애써 미소 지었다.
사냥 대회 하루 전. 리카르디스는 대회가 개최되는 장소에 미리 도착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간이 천막들이 줄지어 있고, 손님들이 걷기 편하시라 융단까지 깔려 있었다. 산이라기보다는 나무가 많은 정원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내일 대회가 개최되면 갖은 음식이 올라갈 테이블 또한 미리 정리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숲 안에 생겨난 거대한 파티 홀을 감상했다. 사냥 대회를 위해 고용된 용병들과 하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 일원들밖에 없었다.
그들이 하루 일찍 미리 도착한 이유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 다른 곳.”
산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말 위에 앉아, 길을 안내하는 용병에게 도도하게 명령했다. 몇 번이나 마음에 차지 않는다, 좁다, 넓다, 나무가 너무 많다, 사람의 왕래가 잦다 해 가며 퇴짜를 놓기만 열두 번째. 지금으로 열세 번째가 되었음에도 용병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연신 숙여 댈 뿐이었다.
용병단 ‘올가미’는 사냥 대회를 위해 산을 정리하는 역할로 고용된 수많은 용병단 중 하나였다. 황실에서 고용되었다 해도 높으신 분에게 직접 의뢰를 받는 게 아니라, 그 높은 분의 아랫사람의 아랫사람의 하인에게 전달받을 뿐이었는데, 이게 웬걸.
눈앞에는 역대 최고의 신성력을 지닌, 어떤 위험한 전쟁에서도 승리만을 이끄셨다는, 만민을 두루 살피시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삼천 명을 실명시킨 전적이 있다는! 그 설원의 월계수, 2황자 리카르디스 전하가 계시지 않은가.
올가미 용병단의 단장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발언을 가슴에 꼭꼭 새겼다. 가언으로 삼을 것 같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한 의뢰 내용, ‘숲 속’, ‘사냥 대회 당일 날 참가자들이 발길을 하지 않을 만한 곳, 몸을 움직일 만한 공터’, ‘길이 복잡하지 않아 잘 익힐 수 있을 것’의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를 왜 찾아 달라고 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를 돌아다닌 후, 단장은 고객의 요구에 응하는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리카르디스의 “좋군.” 한 마디에 단장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리카르디스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물리고 로젤린과 장소를 둘러보았다. 따라오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일 꼭 이곳에 와야 해, 로젤린 경. 기억할 수 있겠나?”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나온 장소를 반추했다. 나무, 돌, 지형, 수풀의 모양. 하나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절대 이 장소를 벗어나면 안 된다.”
“예. 그런데 왜 벗어나면 안 됩니까?”
“위험한 것이 그대를 쫓고 있다는 소식을 칼릭스 경에게 들었다. 내가 그자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공간이니 말이야. 게다가 언제나 동료들과 함께 있던 그대가 혼자 떨어져 행동하는 만큼, 내일은 그자에게 좋은 기회가 될 테지.”
로젤린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나를 쫓고 있다던 위험한 것. 나도 압니다.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그것’의 정체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는지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아, 그거, 위험하죠. 압니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정보를 제한하자니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얼굴조차 모른다고 들었다. 기다리다 보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돌은 불가피하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라, 경.”
“마음의 준비…… 말입니까?”
“이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누구일 줄 알고? 내가 무기라도 빼고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러나. 레이몬드면? 칼릭스면? 얌전히 맞아 주고 있을 건가?”
로젤린이 숨을 헉 들이켜며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충격적이고 상처받은 듯,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리카르디스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웃었다.
“만약이라는 거지. 누군지 모르지 않나. 그러니 내일 숲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그대와 얼마나 친밀했건,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건. 절대 믿어서는 안 돼.”
“예…….”
“사건이 일어나리란 걸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황의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지. 그게 장소를 정한 이유다.”
로젤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장소?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지금 당장의 위험은 피할 수도 있다. 경이 사냥 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니. 하지만 그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지겠지.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자가 언제 어디서 그대를 노릴지 모르게 되지 않겠나. 일라베니아의 정세는 현재 몹시나 불안하고, 지금보다 상황은 점점 나빠질 가능성이 많아. 위험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으려는 이유다. 최악을 피해야 하기에 차악을 선택해야만 해.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로젤린, 경이지만…… 미끼도 경이다. 위험이 없을 수 없어.”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다. 그래서 안전장치가 필요해.”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이자 리카르디스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 뒤쪽, 굵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마카롱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로젤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카롱도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저 멀리에 있는 터라 보이지도 않았고, 마른 나무만 늘어져 있는 이 장소에는 리카르디스, 로젤린, 마카롱밖에 없었다.
“마카롱 경.”
로젤린이 고개를 홱 하니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로젤린을 계속 따라다닌다면 그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황실에 있었던 만큼, 로젤린을 따라다니는 독수리는 저와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로젤린 경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이번 사냥 대회에서 그자의 꼬리라도 잡아야 해. 그러니 로젤린이 혼자 다닌다는 점이 내일의 일에 전제되어야 한다.”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억, 헉. 같은 존재라고 알고 있을 가능성? 말에 담긴 내용보다, 그걸 말하는 사람이 리카르디스라 경악스러웠다. 독수리는 미동 없이 가만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애 다 죽어 간 다음에야 건지러 가라고?”
“이번을 놓치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본인이 쫄려서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그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겠지?”
“상황은 최악을 상정해야 한다. 상대는 과거의 로젤린을 한번 죽였던 사람. 그대 또한 그자의 능력을 모르지 않나. 그대들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자의 능력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한계치까지 올린 것뿐이다.”
로젤린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리카르디스와 마카롱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전하는 왜 마카롱이 말하는데 놀라지 않는 거지? 마카롱은 정체가 들켰는데 왜 저렇게 태연해? 어, 어…….
“로젤린 경.”
“예! 로젤린입니다!”
로젤린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마력을 쓰지 않으면 감지할 수 없는 게 맞나? 그대들끼리도?”
“예, 그렇습니다.”
“청각을 강화한다던가,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것에도 마력을 사용해야 하고?”
“……예. 그렇지만 안 써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들립니다.”
“그렇다면 그자도 경의 뒤를 따르며 별다르게 마력을 운용하지는 못하겠군. 그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고민했다. 물론 내일 반드시 일이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을 대비해야만 했다. 때문에 위험인물이 로젤린을 뒤따른다는 가정 아래 계획은 세워졌다.
로젤린은 내일, 사냥 대회가 시작하면 이곳으로 온다. 동족이라는 독수리가 보이지 않음에 의문을 가지고 의심할 수는 있으나, 그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리카르디스가 용병단 ‘올가미’에게 한 의뢰는 모두 두 가지였다.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아낼 것’,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이 장소로 오는 길목 길목에 포진해 있을 것.’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일반적인 인간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니 뒤를 쫓아서는 안 된다. 그저 사냥 대회의 진행을 위해 산 여기저기 퍼져 있는 용병들 중 하나로 보이게끔 한다.
그 사이에 마카롱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올가미’ 용병단의 단장과 얘기해 두었다. 그들과 함께 신입 용병 단원인 척 숲속에서 대기한다. 마카롱은 기다리다, 용병 단원들로부터 누군가가 로젤린을 쫓아갔다는 정보를 듣고 움직인다.
하지만 단순히 로젤린이라는 유명 인사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마카롱이 움직이는 때는 마력을 느낀 후여야만 한다. 마력을 사용한 것이 추적자이든 로젤린이든 간에 그만큼 상황은 위험하다는 뜻일 테니.
용병 단원들은 마카롱이 떠나고 이십 분 후. 마카롱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정된 이 장소로 이동한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 상황이고, 마카롱과 로젤린이 합세한 싸움에서 그 시간 동안 결판이 나지 않는다면 상대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라는 얘기였다.
용병 단원들은 강하지 않으나, 인원이 많다. 그에 배가 되는 눈이 있다. 정체 모를 것은 제 목적과 본 모습을 숨기는 상황이고, 일반인들의 눈은 마카롱과 로젤린의 힘보다 그것을 강력하게 제재할 무기가 되리라.
간단히 계획을 설명해 주었더니 로젤린이 연신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마, 마카롱은 그냥 착한 독수리…….”
인간으로 변한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전하. 마카롱은 평범한 독수리입니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따위를 말하고 싶었던 듯 보였다.
“그래그래, 착한 독수리지만, 내일만 잠깐 인간으로 변해 있으면 된다. 그 다음 날부터는 다시 착한 독수리를 하도록 하자.”
리카르디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로젤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읍, 어버버……. 당혹스러워하는 로젤린과 달리 마카롱은 코웃음만 지었다.
“내 눈을 벗어난 그 짧은 사이 죽으면 어쩌려고.”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했지 않나. 그자의 능력이 미지수이긴 하지만, 로젤린 경이 강한 것 또한 사실이니. 마력을 감지하고 그대가 도착하기까지의 몇 분. 그걸 로젤린 경이 감당해 주리라…….”
“믿어?”
“믿는다.”
로젤린은 숨죽인 채 마카롱과 리카르디스의 대화를 들었다. 시간이 지났다.
“너는 내게 뭘 바라는 거지? 그자를 만났을 때 내가 뭘 하길 바라? 쫓아내기를? 생포해서 네 앞에 끌고 오기를? 아니면…….”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그자를 죽이기를 바라느냐? 라고 묻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끝이 흐려진 질문 속에는 적의가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 리카르디스는 의아했다.
마카롱은 그자를 모르지 않던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마치 아는 사람이나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듯, 둥글게 감싸고도는 모양새였다.
“로젤린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그대가 바라듯이.”
리카르디스의 대답은 누군가를 해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가 어떻게 되든지, 로젤린만 무사하다면 그걸로 족했다. 맹금류의 따끔한 눈빛이 누그러졌다. 마카롱이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하늘을 메울 듯 거대한 날개였다. 마카롱이 움직이자 바람이 불어왔다.
“손을 빌려주겠어.”
“감사를 표한다.”
“네게 감사를 받을 이유는 없지. 가는 길이 같았을 뿐이니까.”
“가는 길이 같음에 감사한다.”
“그 또한, 가 봐야 알 문제겠지만.”
마카롱이 크게 날갯짓하며 높이 떠올랐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 뒤 주위를 둘러봤지만 마카롱은 사라진 후였다. 거대한 날개가 사라진 공백이 눈에 띄었다. 리카르디스는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잠시간 눈에 담다,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자신의 목 뒤가 바짝 굳는 것 같다고 느꼈다. 혼란스러웠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자신을 쳐다보는 리카르디스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이 깊은 추론을 못한다고 해도,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이야기했다.
[상대는 과거의 로젤린을 한 번 죽였던 사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죽었음을 안다!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과거 ‘로젤린’과 완벽한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는 말이었다. 마카롱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사실 그녀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력을 사용하고, 변이가 가능하고, 무엇이건 간에! 들켰다. 들통 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젤린, 그녀는 자신이 굉장히 치밀하게 행동했노라 자부했다. 그는 알 도리도 방법도 없었으리라.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혼란스러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로젤린은 뒷걸음질 쳤다.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서 도망을 쳐야만 할 것 같은, 벗어나고 싶은 그런 느낌에 발이 먼저 슬금슬금 움직였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수상한 기색을 눈치챘다. 눈으로 재빠르게 도주 경로를 훑는데, 모르는 게 이상했다.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쫙 피며 만류했다.
“잠깐, 로젤린 경. 로젤린. 나와 얘기 좀 하지.”
그가 애써 웃으며 목소리를 한껏 누그러트렸지만, 로젤린은 덫에 걸린 쥐 같은 표정을 고수하며 여전히 발을 꼼질꼼질 뒤로 옮겼다.
“로젤린!”
사실상 그녀가 마음을 먹는다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세 걸음, 눈치 보며 물러서던 로젤린이 기세를 확 바꿔 뒤돌아 도망쳤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드러난 숲. 몸을 숨길 곳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내달리니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기함하며 그녀를 쫓았다.
지금, 내가, 이, 나이에, 나 잡아 봐라 놀이를, 전심전력으로!
리카르디스는 언제나 암살 위협을 달고 살았던 몸이라 상급 기사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받고는 했다.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로젤린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체력과 순발력, 운동 능력이 고루고루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체력, 순발력, 운동 능력이 죄 인간의 기준을 훌쩍 넘어선 이가 상대이다 보니, 한계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거친 숲을 내달리는 로젤린은 실로 한 마리의 야생동물 같았다. 이대로는 그녀와 대화는 고사하고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예상 그대로, 잠시 눈을 깜박한 사이 그녀의 인영은 숲에 스며들어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관성적으로 달리다가 얼마 후 멈춰 섰다.
‘그래…… 쉬운 여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지만…….’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물리적으로.
리카르디스는 눈을 번쩍 떴다.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 네가 가 봤자 어딜 가겠어. 내 주위 반경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을 벗어나지 않은 그 어디쯤이겠지!
“윽!”
리카르디스는 어디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신음하며 나무에 팔을 걸쳐 기대었다. 그는 헉헉, 숨을 급하게 몰아쉬다 마른기침을 했다. 그리고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며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가 보아도 심장 어디가 아파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거기에 더해 송골송골 배어 나온 땀이 그 병색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빠르게 사라졌던 만큼, 그보다 더 빠르게.
“전하!”
나무 위에서 로젤린이 훌쩍 나타났다. 나뭇가지를 잡아 한 바퀴 돌고 바닥에 착지하는 모습이 넋 빼놓고 볼 정도로 멋졌다.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리카르디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연기를 계속 펼치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후다닥 달려와 리카르디스의 어깨를 짚었다.
“시, 신관을!”
로젤린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신성력이 강한 사람이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잠깐 잊은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제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산책은 잘 다녀왔나, 로젤린 경?”
서슬 퍼런 음색에 로젤린이 화들짝 몸을 떨었다.
“저를 속이신 겁니까?!”
그 아기 고양이 같은 순진한 얼굴로! 로젤린의 얼굴에 배신감이 잔뜩 퍼져 있었다.
“속이긴 누가 속여. 경이 걱정할까 봐 애써 통증을 누르는 중이야.”
리카르디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성의하게 말했다. 모로 보나 거짓말이었지만 로젤린은 의심의 눈빛을 지우고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더럭 잡았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얼굴이 가까웠다. 키 차이 때문에 항상 그녀를 내려다봤으나, 지금은 로젤린이 무릎을 꿇은 리카르디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찌푸려진 눈썹에서 걱정이 아른아른 비쳤다.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 이제 와 거짓말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이?”
빤한 개소리에도 로젤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마음이 아픈 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거지? 리카르디스의 의문은 곧 풀렸다. 로젤린이 두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후, 그의 가슴 왼쪽에 귀를 대었다. 리카르디스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뭘 확인하는지 물어도 되나?”
“평균 심장박동수를 확인하는 겁니다. 제가 헤아리는 시간은 시계와 0.5초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급한 대로. 말하지 마시고 가만히 있어 주십시오.”
그런 재주도 있었단 말이지. 하여간 여러모로 대단했다. 보통은 손목에 손을 대고 확인하겠지만, 거기까지는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얌전히 있었다.
가슴에 얼굴을 바짝 붙인 로젤린은 집중하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검은 속눈썹이 길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심장이 이상합니다, 전하! 너무 빠르게 뜁니다!”
로젤린이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르디스는 흠칫 놀라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던 손을 선회해 급하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 그렇겠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겠지. 빠르게 뛰는 중이니까.”
“많이 아프십니까?”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말아. 그저 심각하게 연약해서 세심한 주의와 관심,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할 뿐이다. 외로우면 남몰래 울고는 하지. 그런데 그런 날 두고 도망쳐?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놓고 도망쳐? 내가 숲 어딘가에서 쓰러져서 쓸쓸하게 혼자 죽건 말건 나 몰라라 하면서?”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로젤린이 뾰족한 것으로 찔린 듯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도망가는 중이었다는 사실과 왜 도망을 가려 했는지에 대해 모두 떠올린 기색이었다.
“그…… 전하께서…….”
로젤린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더니 입술을 매만졌다. 리카르디스는 침착하게 그녀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다 안다고 그러시니까, 그러면 제가 로젤린인데 로젤린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
단호한 대답에 로젤린은 덜컥 겁을 먹었다. 그녀는 깊고 황량한 숲을 떠돌 시절, 자신이 마주쳤던 인간들이 보인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괴물, 귀신!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다. 코앞에 둔 죽음보다 자신을 두려워했다. 로젤린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알고 있지’라고 대답을 내뱉은 입술에서 시선을 올려 리카르디스를 조심스레 살폈다. 침착하게 감정을 가다듬은 남자의 표정은 평소보다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나 그것이 도리어 두려웠다.
리카르디스에게 비치는 제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에 시간을 돌아가, 형태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에 스며들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은 급하게 시선을 그의 발치로 떨구었다. 리카르디스가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 왔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더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로젤린.”
하, 한숨을 내쉬는 남자의 행동에 로젤린은 눈물이 울컥 나왔다. 그녀를 보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젤린이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으나 그의 손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로젤린 에스터.”
뭔가 화를 꾹 누르는 목소리였다.
“예…….”
“내가 왜 그대에게, 내가 그런…… 정보들을 알고 있노라 얘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코와 입가에만 제 시선을 두었다.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도 확인했다. 그녀가 숲속을 훑는 것을 눈치챈 리카르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정말.”
리카르디스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몸이 닿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허리에 제 두 손을 감았다.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도망갈 생각 말고 날 봐. 지쳐서 더 이상은 쫓아갈 수 없으니. 말했지, 연약하다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쓰러질 수도 있다.”
뿌리치자면야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다. 로젤린이 가만히 그의 품에 있는 이유는, 리카르디스가 먼저 손을 뻗어 오는 지금의 상황에 크게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모진 말이 나오고, 경악스러운 말이 떨어진다 해도 감수할 수 있을 만한. 안도감.
그의 목에서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품이 단단하고 따뜻했다. 몸이 노곤노곤 흐물흐물하게 녹을 만큼이나.
리카르디스는 경직된 몸을 서서히 이완시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알리지 않았던 것은, 불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비밀은 중대했고, 그 중대한 건에 대해 그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몰랐어.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조차 하지 못해. 물론 좋게 흘러갈 수도 있지. 그러나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이것이 그대의 치부라면? 그대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리카르디스는 잠시 한숨을 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로젤린.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상황을…… 최악을 상정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그대를 상처 입히고 휘두르는 일이 될까 봐. 지금처럼.”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 줄 몰라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에 있어 상대방의 입장에만 신경을 기울이는 그 행위가, 사납고 따가울 리 없었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로젤린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었다. 불안함에 꼬인 실타래는 이미 슬금슬금 풀려, 종국에는 완전히 풀어질 것을 알면서도 한 번 더.
“제가 왜 상처 입지 않기 바라십니까?”
로젤린의 손이 그의 팔에 살포시 닿았다. 이번에는 리카르디스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남자가 씩 웃고 대답했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니까 그렇지.”
로젤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몇 초 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 행복하게.
리카르디스는 도주로를 훑던 그녀의 눈빛, 필사적인 달음박질, 흔들리는 시선에서 그녀가 가진 불안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꽝꽝 얼어 있고 꾹꾹 뭉쳐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건만. 자신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로젤린은 쌓아 뒀던 불안한 감정들을 모두 해소한 듯 보였다.
그녀가 가진 불안이 적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말을 크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마음 한편이 어딘가 아려 왔으나…….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전하께서 저를 좋아하신다고!”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표정으로 로젤린을 보았다. 이 사람, 분명 이성 간의 감정은 배제한, 사람 대 사람의 호감으로 받아들였겠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니깐. 참 경도, 그것도 몰랐나?”
“아닙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뭐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뤄 낸 듯 의기양양하게 히히 웃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래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 * *
“검은색인데, 약간 불투명합니다. 크기는 한 이 정도 됩니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겠다. 로젤린은 신나서 예전 ‘그것’일 때의 모습을 설명해 줬다. 바닥에서부터 제 허리까지 둥근 모양을 손으로 그려 가며 아주 열성적이었다.
“아주 귀여울 것 같군. 그 모습으로는 이제 변하지 못하는 건가?”
“예.”
“아쉬운걸,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 마카롱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못하지는 않겠지만 안 하겠지.”
리카르디스는 잠시간의 만남으로도, 마카롱의 성격을 많이 파악했다. 적의가 넘쳐흘렀다. 그것은 다년간 숱하게 느꼈던 살의는 아니었으나, 꼬장꼬장 늙은 귀족들이 그를 바라볼 때의 시선과 비슷하기는 했다. 아니꼬워, 죽겠다. 라는 표정이었다.
어찌 되었건 호의적인 감정은 전혀 아니었기에, 그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마카롱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로젤린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 시무룩한 기색을 띠었다.
한참 말없이 있던 그녀가 갑자기 소매를 급하게 걷었다. 로젤린의 하얀 손에 힘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헉, 숨을 삼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녀의 피부가 점점 짙어지고 질겨졌다. 가죽이 뒤덮이더니 다시 그 위를 단단한 비닐이 덮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합쳐지며 네 개의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변했다.
리카르디스는 깜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아주 멋있군!”
닿는 감촉도 감촉이고, 온도도 서늘해서 더욱 오싹했다. 말로 듣는 것과 보는 것, 느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쉽다는 말에 뭐라도 보여 주자는 갸륵한 마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변이를 마치자마자 손부터 잡고 봤다.
“이야, 이거 참…… 멋있어. 아주…… 뾰족뾰족해.”
여전히 칭찬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로젤린은 방긋 웃으며 기뻐했다.
“이거 한번 휘두르면 사람 몸도 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검은달 놈들의 시체가 다들 그 모양이었던 거군.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검고 거대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단단한 비늘, 날카로운 손톱. 보다 보니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게 아주 멋스러웠다. 집중해서 만지고 있자 로젤린이 신나서 눈 색도 바꿨다가, 동공도 맹수의 것처럼 길게 바꿨다가, 키를 조금 키웠다가, 줄였다가. 얼굴 골격도 조금 바꿔 가며 열심히 자랑했다.
“정말…… 굉장해.”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라, 그 말 이외의 것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로젤린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리카르디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평소 같으면 얼굴을 붉혔을 자신의 행동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열중해서 만졌다. 역시 이 얼굴이 제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물었다.
“로젤린.”
“예.”
“음…… 그대는, 예전 로젤린 경의 기억을 일부이긴 하지만 가지고 있는 듯한데, 내 추측이 맞나?”
“예, 시간이 갈수록 로젤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고는 합니다. 전하께서 저에게 막 성질냈던 것도 압니다.”
그, 참. 쓸모없는 것을 떠올리고 그래! 리카르디스는 울컥했다.
“그건, 미안하지만…… 아니, 나는 그대에게 성질을 내지 않았어! 그녀에게 냈었지! 물론, 그것도…… 잘한 것은 아니야. 미안하게 되었어. 아무튼!”
말하다 보니 뭔가 좀 미묘했다. 과거 ‘로젤린’의 기억이 있는 탓일까. 로젤린이 그녀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로젤린이 그대 안에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모든 기억이 떠오르면…… 어떻게 되나. 그러니까, 지금의 그대는 음…… 없어지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달리 느릿하게, 또 잠시 말을 멈추기까지 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다.
“제가 케이크라면.”
굉장한 도입부였다.
“로젤린은 밀가루 정도일까…… 생각합니다.”
굉장한 표현력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감탄했다.
“제가 케이크라면, 로젤린이 케이크의 몇 조각을 차지하고, 제가 그 나머지를 차지하는 식이 아니고, 밀가루에 버터와 우유, 달걀을 더하고 이스트도 넣은 후 오븐에서 구워 내고 생크림을 바르고 제철 과일을 올린 상태가 저입니다. 원료가 그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밀가루가 케이크와 동일한 존재이지는 않으니, 케이크는 케이크, 그저 주된 재료가 밀가루일 뿐입니다. 그런 느낌인데, 아시겠습니까?”
“무시무시한 표현력이었다. 내 기사가 문학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알았군.”
로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어마어마했다는 듯 뿌듯해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웃었다.
“그러면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그대의 사고는 그대의 것이긴 하나, 그녀의 생각과 기억에 기반한다는 것이겠군.”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을 보고 있으나, 한순간 과거의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지금의 온전한 그대에게 묻건대. 로젤린 경의 마지막은. 그녀의 마지막과 생각은 어떠했나?”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로젤린의 마지막?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전하를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가. 끝까지 미련한 사람이었군.”
로젤린은 순간 울컥했다. 미련하다니, ‘로젤린’한테!
그러나 인상을 찌푸리며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보자니,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후, 한숨을 쉬다가 한참 뒤에야 로젤린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대는 지금…… 밀가루야.”
“저는 인간입니다.”
“아니, 그대가 로젤린을 밀가루라 칭하지 않았나.”
아, 그런 의미였나.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나는 지금 눈앞의 그대를 케이크의 재료인 밀가루라고, 딱 지금만 그렇게 그대를 생각하겠다.”
“예.”
잘 모르겠지만 전하가 그렇다니 그런 것이리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예, 전하.”
리카르디스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그대에게 보낸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의 두 손을 잡았다.
“모든 것에, 감사한다.”
그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괴롭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조여 오는 악력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로젤린은 넋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자. 리카르디스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무 이상한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한참 후 고개를 들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이던 리카르디스가 말을 망설이다 입 밖으로 겨우 내뱉었다.
“그녀라면 내 말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로젤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로젤린이기도 하니까 제 생각을 말해도 됩니까?”
“그래도 된다.”
“네, 가슴이 덜컥하고…….”
로젤린의 말에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찌푸린 채 애써 웃었다.
“어디가 아프신가 생각했습니다.”
아, 얘가 어디가 아파서 갑자기…….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던데……. 따위의 반응이라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을 내팽개쳤다. 애수에 잠겼던 얼굴에 독기가 올라왔다.
“슬퍼하거나 눈물 펑펑 흘리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정말 이 여자들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하는데, 담백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성질났는지 씩씩거리며 뒤돌아 갔다.
“난 미치지 않았지만! 아무튼, 고맙다!”
로젤린은 돌아선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실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로젤린의 감각은 시간을 거슬러 갔다. 그의 등을 보던 오랜 나날들이 떠올랐다.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해 어렸던 때부터, 위태로웠던 때. 눈이 부시게 아름답던 날. 비참하게 울던 날까지. 로젤린의 시간 시간마다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모든 풍경에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색이 다시 덧칠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가슴 시리게 행복하고, 벅차오르게 슬펐다. 흘러가 버린 시간 속에 개화한 감정들은 빛무리처럼 흩어졌다.
이미 지나가 의미 없다 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이렇게 가슴 안쪽을 잔뜩 부풀게 할 정도로 가득 메운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운 것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로젤린은 잘 모르겠다 생각했다.
저 멀리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진 두 사람을 찾는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은 웃으며 그의 곁에 섰다.
* * *
날이 밝았다. 비어 있던 공간에 사람들이 채워지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여러 황족들과 귀족들, 타국의 손님들. 기사단과 병사, 하인들. 넓은 산이 터져 나갈 정도로 복작복작했다.
몇몇 귀족들은 몇 개월 전,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침투했던 그때를 잠깐 상기했다. 위치, 장소, 시기. 연관성을 가진 요소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사냥 대회’라는 이름에 막연히 불안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때의 사건이 일어났던 국경 지대가 아니었다. 무려 대륙의 아버지.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가 아니던가. 불길한 마의 힘을 믿고 설치는 자들이 함부로 발을 들일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발타와 거리가 먼 만큼이나 다들 안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산은 이미 몇 주 전부터 통제에 들어갔다. 사냥꾼과 용병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위험 요소를 처리했다. 수상한 인물은 물론이요, 눈을 피해 숨어 있던 마수들도 모두 그들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우스갯소리로 일라베니아 황실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 이 산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귀부인들이 양산을 들고 돌아다니는 광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한 달 내에 행사가 이렇게 많은지. 지긋지긋했다.
“웃으셔야 합니다, 전하.”
잇세리온이 리카르디스의 뒤에서 조용히 타박했다. 인형 복화술을 하듯 입술 모양에는 변화가 없었다.
“지금 굉장히 의미심장한 표정인 건 아십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갑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웃고 있는 건 좀 바보 같아 보이지 않겠나?”
“다들 바보처럼 웃고 있습니다. 숲에 숨으려면 나무가 되셔야지요.”
그의 말대로, 다들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황제가 있는 거대한 막사를 의식해서인지, 정말로 이 사냥 대회가 즐거워서인지.
지나가던 귀족 무리가 리카르디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잇세리온과 마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사람 참!”
“어허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전하!”
이 상황에 녹아들기에 어색함 없는 바보 같은 웃음소리였다. 귀족들은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다가 저들끼리 다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딱 멈췄다.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하얀색 예복을 입고 있는 신관 무리가 눈에 띄었다. 혹시 모를 부상 때문에 대신전에서 차출된 자들이었다. 라헤안시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주위에 있던 어린 신관들이 급하게 그를 잡았지만, 다 같이 우르르 넘어지고 말았다.
다들 못 본 척하거나 몰래 웃고 있는 가운데,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또다시 굳어졌다. 잇세리온은 제 이마를 턱 짚었다.
황실의 숲속. 신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떠올랐다. 위험한 것이 가까이서 도사리는 가운데 아직 정체도 모른다니. 로젤린의 힘, 마카롱의 존재. 자신의 성력까지. 어지간하면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상대방이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날카롭게 주위를 훑다가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나무에 어깨 한쪽을 기대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햇살의 나른함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의식도 못 하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바로 그겁니다 전하!”
뒤에서 잇세리온이 소곤거렸다. 천 년 동안 얼어 있던 얼음도 녹여 버릴 만큼 따스한 미소라며 금칠을 했지만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에게 신경이 쏠려 있는 터라 듣지 못했다.
하얀밤 기사단에서는 로젤린과 슈텐, 클로드가 대표로 사냥 대회에 출전했다. 저 멀리 클로드와 슈텐은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느라 바쁜데 그녀만 태평했다. 대신 손이 남는 단원들이 로젤린의 검 상태를 확인하고, 화살도 확인하고, 수통이랑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허리띠에 보조 가방을 단단하게 매는 사이, 네스터가 로젤린의 군마 ‘초콜릿’의 등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
다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리카르디스는 애써 그 유난의 광경을 넘겼다. 기사 단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로젤린이 슬그머니 보조 가방에서 육포를 꺼내었다. 큰 육포 조각을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입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은 감고 있는 눈으로도 리카르디스의 기척을 읽어 냈는지 대뜸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맛있나?”
로젤린이 눈을 반짝 떴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는 육포를 하나 꺼내서 리카르디스에게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건네받지 않고 곧바로 입으로 육포를 잡아챘다. 쫀득하고, 부드럽고, 적당히 짭짤하고 맛있었다. 보조 식량으로 배분되는 육포보다 상등품인 듯했다.
“맛있는걸.”
로젤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해풍에 말린 최상품입니다. 바싹 마른 듯 보이지만, 식감은 쫀득쫀득하고, 말린 고기의 진한 육향과 짭짤함이 일품입니다. 세 번의 말리는 과정 중, 마지막에 꿀과 과즙을 바른다고 하는데요, 그 덕에 은은한 단맛이 감돕니다. 이것이 육포의 전반적인 맛을 아우르며 배가시키는 것 같습니다.”
“…….”
그냥 ‘맛있습니다’ 정도의 답변을 예상했던 터라 좀 당황스러웠다. 어제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요즘따라 로젤린의 어휘력이 부쩍 늘었다. 생각해 보니 그저 음식 관련으로만 국한된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맛있다니 됐군.
물론 로젤린은 나단에게 불려 가 근무 중에는 군것질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예전 같으면 고분고분했을 그녀가 반항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금식이 원칙인 것은 주의가 흐트러지기 때문이 아닙니까, 부단장님? 저는 먹으면서도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씨알도 안 먹혔을뿐더러 더 혼났다.
“사실…… 전하도 드셨습니다.”
물귀신 작전도 통하지 않고 매우 혼났다.
* * *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막사를 둘러보며 위험 요소를 확인하고 있던 때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올가미 용병단의 쥬렌즈라 합니다. 전하.”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 눈빛에 아니꼬워 죽겠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가 만약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카르디스는 이 잿빛 머리의 남자가 마카롱이라는 사실을 분명 알아챘으리라 생각했다.
“별로 안 친한 사람들은 쥬쥬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렇게 불러 주시죠.”
“……친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제가 워낙 싸가지가 없어서.”
여성체의 이름은 뭐라 했더라. 미미였나. 잘은 모르겠지만, 요즘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미미니 쥬쥬니 하는 이름의 인형이 유행한다던데. 미묘하게 입에 담기에 껄끄러운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로젤린도 독수리에게 ‘마카롱’, 자신이 선물한 군마에게는 ‘초콜릿’이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혹시 이 종족, 이름 짓기는 영 꽝이라던가?’
리카르디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서라.”
“가암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목소리 같지 않았다. 잇세리온은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고, 주위의 호위들도 로젤린을 제외하고는 눈빛이 매서워져 있었다.
“제가 수줍음이 많습니다. 전하.”
“그런가. 그것 참 놀라운 정보인데.”
“낯도 많이 가려서 말입니다. 호위를 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전하.”
스타스가 남자를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로젤린에 대한 정체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강한 마인. 세간에 알려진 것과 동일했다. ‘그녀의 뒤를 위험한 자가 쫓고 있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 부른 사람이다.’쯤으로 마카롱을 알고 있기에, 경계가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되, 될 것 같은데.”
로젤린이 소심하게 의견을 냈지만 묻혔다.
“내가 부른 손님이다. 로젤린 경만 남고, 모두 나가 있어.”
스타스는 가만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타스는 경례하고 단원을 이끌고 막사를 나섰다. 사람들이 없어지자 마카롱과 로젤린이 동시에 바깥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잘은 몰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충분히 물러난 것인지 두 사람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마카롱은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실은 불량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거 되게 귀한 몸이시군요, 전하. 제 얼굴을 모르시니 잠깐 비추고 가려 했습니다만 이거 무서워서 두 번 찾아오겠습니까?”
“보통의 평민이나 용병은 황자를 독대한다고 찾아오지 않으니 그대를 수상쩍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어쨌거나.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다. 쥬렌즈.”
“친근하게 왜 이름을 부르고 그러십니까. 쥬쥬라고 불러 주시죠.”
리카르디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마카롱의 말을 외면했다. 곧 죽어도 쥬쥬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언뜻, 눈에 비친 것 같기도 했다. 마카롱은 옆에서 제 입에 육포를 넣어 주는 로젤린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서로 깊은 얘기는 할 만큼 한 것 같고. 사냥 대회도 다가오니 굳이 얼굴을 맞대고 있을 필요는 없겠죠. 이 잘생긴 얼굴 잘 봐 두시죠. 기간 한정이기는 하지만 아군이기는 하니까 헷갈리지 마시고.”
“확실하게 익혔다.”
잘생긴 얼굴을 운운한 건, 분명 진심이겠지.
“계획이랄 것도 없지만. 어제 한 말은 모두 기억하나?”
마카롱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전하.”
말이 짧아졌다.
“그 계획이랄 것도 없는 그, 계획에…… 전하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확신이란 것은 태어나서 가져 본 적이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정황을 살피며 최악의 상황을 준비할 뿐.”
“어떤 최악이 올 줄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전하는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게 여기고 그에 맞춰 대비를 한 거겠지.”
“따지자면, 그러하다.”
마카롱이 삐뚜름한 미소를 띠었다.
“너는 그놈의, 나의, 로젤린의 뭘 알고 있어?”
존대고 뭐고. 증발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개의치 않고 짧은 고민 후 대답했다.
“마력에 근원을 둔 존재. 여러 형태로 변이가 가능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로젤린과 그대가 다른 것은 살아 있는 생물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의 차이. 그 때문에 로젤린 경은 완전한 변이가 불가능하다. 그자는 어떤 부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내가 틀리게 알고 있는 부분이라도?”
“꼴을 보아하니 칼릭스랑 얘기 좀 했겠구나 싶고, 그놈이 먼저 얘기할 리는 없으니 그쪽에서 어느 정도 가설을 세우고 애를 탈탈 턴 모양인데…….”
맞다. 리카르디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카롱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너는 네가 알고, 모르는 세 명의 사람이 각자 나에 대해 뭘 아느냐 하면, 당신들은 포유류로, 두 발로 걷는 생물이고, 평균 악력은 얼마고, 지능이 높아 먹이사슬의 상단에 위치한…… 따위를 말할 생각인가 봐?”
리카르디스는 잠깐 머뭇거렸다.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았느냐,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던가? 저 존재들을 아우르는, 그들을 관통하는? 생물학적 정보가 아닌?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지.”
마카롱이 로젤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돌렸다. 리카르디스가 그를 잡으려 할 찰나 마카롱이 얼굴만 살짝 뒤로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별다른 수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시비 걸고 싶었어.”
쓸데없이 솔직했다. 이것도 종족의 특성인가? 어이가 없어진 리카르디스는 힘없이 대답했다. 시비 걸고 싶었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래.”
* * *
황제 라이노가 사냥 대회를 맞이해 연설했다. 다들 바보같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선수들의 출전 준비가 끝났다.
사냥 대회는 총 여섯 시간으로, 그 사이 동물을 가장 많이 잡은 자가 우승하게 된다. 각 동물마다 점수가 있으며, 당연히 잡기 힘든 개체에 더 높은 점수가 붙었다. 이미 산에는 각종 동물을 풀어 둔 상태였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위험한 맹수는 배제해 놓았다.
로젤린은 짙은 흑색 털을 가진 말의 고삐를 쥐고 공터로 나왔다. 사절단 이후,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선물한, ‘초콜릿’이었다. 로젤린이 초콜릿의 허리를 토닥였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에게 다가가며 초콜릿의 목덜미를 슥슥 쓸었다.
“내가 어제 했던 말. 모두 기억하지 로젤린?”
“네. 이기지 말 것.”
리카르디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은 화창하고 따스한 날 덕분인지 평소보다 더 나른해 보였고, 그 태도는 전투태세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생각이 전혀, 조금도, 생각에도, 꿈에도 없는 듯했다.
무투 대회에 이어 사냥 대회까지 석권하면 그녀의 이름이야 드높여지겠지만, 다소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황제의 질투라던가. 낯이 화끈해져서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할 말이지만, 실제로 가능성이 농후했다.
때문에 사냥 대회의 1등은 티 나지 않게 얼음창 기사단에 넘기기로 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치지 말 것.”
“다쳐 오면 감봉할 거야.”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씩씩 분노를 표출했다. 다친 건 난데, 왜 내 월급이 깎여야 해!
“삼 개월 동안.”
물론 농담이었지만 로젤린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삼 개월 동안 감봉이 되었을 시, 칼릭스에게 줄 용돈을 제외하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추정하고서는 절망했다. 쥐, 쥐꼬리…… 중얼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게 아닌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 몰래 웃었다.
“그러니 다치지 말고.”
“네. 반드시!”
로젤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이렇게 결연한 표정은 본 적도 없었다. 발타에서 일라베니아로 오는 길, 자신을 지킨다 말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볼에 떨어진 속눈썹을 떼어 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웃고 있던 눈이 진지하게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개가 더 남았지? 기억하나 경?”
“네. 누구도 믿지 말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작고 낮게 속삭였다. 가까이 있는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였다.
“그리고 절대로…….”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 것. 말을 미처 내뱉기 전,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전하.”
자주 듣진 않았지만,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특색 있는 목소리라 잊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이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간제였다. 발타 일행이 도착한 첫날 이후 보지 못했던 발타의 3왕녀가 사냥 대회에 대뜸 나타났다. 그녀는 호위 및 감시 역할을 하는 발타의 전사들을 대동한 채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리카르디스는 좀 놀랐다. 발타의 사절단이 처음 도착한 날 이후로 보이지 않기에, 솔직히 죽었거나 어디 한구석 잘못됐을 줄 알았는데, 멀쩡해 보였다.
“같은 황실 내에 있으면서도 퍽 오랜만인 듯싶습니다.”
간제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로젤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다음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반복된 학습의 결과였다. 로젤린의 예상대로, 간제는 눈을 스르륵 감으며 리카르디스의 볼로 향했다. 로젤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눈치채기도 전에 로젤린은 바람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억.”
리카르디스는 강력한 힘을 가진 무언가에게 갑작스레 뒤로 끌려갔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기사단장 스타스에게 내팽개치고 그가 있던 위치에 자리 잡았다. 간제는 다가오던 힘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로젤린의 볼에 입을 맞추게 되었다. 쪽.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나.”
간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스타스의 품에 반쯤 안긴 채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 불쾌할 법도 한데, 간제는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연신 싱글거렸다. 로젤린도 고개를 숙여 간제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경쾌했다.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손으로 각자의 입을 가렸다. 이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 것 같은데…….
“발타의 세 번째 딸을 뵙습니다.”
간제는 코앞에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손은 여전히 로젤린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로젤린 경. 이렇게 가까이서 볼 거라고는…… 세상에, 피부 좋은 것 좀 봐.”
간제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로젤린이 저지른 일은 무례하다 걸고넘어질 수 있었으나, 간제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누구에게 키스하든지 인사를 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되었다는 태도였다.
리카르디스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여전히 찰싹 붙어 있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혔다.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경이 참 친근합니다. 제 오라비가 숨 쉬는 것보다 경의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 걸까요?”
간제의 뒤에서 호위가 자신의 눈을 덮고 가만히 분을 삭이고 있었다. 고생이 많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사냥 대회에 출전한다지요?”
“예.”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랍니다. 몸조심하시고요.”
“맹수는 전부 처리를 해 두었다 전달받았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제 오라비가 탐낼 만도…….”
“어허허험!”
간제의 호위가 급하게 목을 풀었다.
“제 오라비, 하카브 왕자가 로젤린 경을 탐내는 이유를 알겠지 뭡니까!”
하지만 간제는 전혀 그를 생각해 주지 않았다. 한 번 더 반복하다 못해 강조하기까지. 호위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하얀밤 기사단의 눈치를 봤다. 단원들의 표정이 서늘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간제가 빙그레 웃으며 로젤린을 꼭 껴안았다. 로젤린도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귓가에 숨소리가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맹수뿐만이 아닙니다, 경”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 로젤린과 간제는 서로 눈을 맞췄다. 간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곧 로젤린에게서 떨어진 간제가 리카르디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 저에게 배정된 막사가 글쎄, 병장기를 모아 두는 곳 바로 옆이지 뭡니까! 우당탕 쿠당탕 아주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환에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막사를 옮겨 달라 한번 부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 참 자상하십니다.”
간제가 두 손을 모으며 생긋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마지막으로 로젤린을 돌아봤다. 눈빛에 담겨 있는 걱정을 읽었는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했던 말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안심하고 돌아섰다.
리카르디스는 간제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사냥 대회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을 향해 쏠렸다. 정확히는 간제와 간제의 호위 전사들을 향하는 것이었다. 구릿빛 피부, 검은 머리카락, 기묘하게 휘어 있는 무기의 형태. 하나하나가 일라베니아인에게는 위협적이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줄지은 막사마다 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늘어져 있던 기사들이 눈빛을 달리하고 탈출로를 점검했다. 숲에서 술래잡기하던 라헤안시를 잡아와 다들 제 막사로 데려가고자 했다. 웃고 즐기던 것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맑은 웅덩이에 떨어진 미꾸라지 한 마리. 간제는 그 모습을 쭉 둘러보며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기가 차서 허, 숨을 내뱉었다. 하카브도 없는 이 자리에 왜 나타났나 했더니.
간제는 자기 자신과 발타인들을 ‘사냥 대회’라는 곳에 떨어트려, 그때의 상황을 상기시켰다. 검은달의 암살 부대가 일라베니아의 땅을 침범했던, 그날.
그러니 이것은 경고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며, 내 오라비인 하카브 왕자 또한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있다. 검은달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니. 경계하라, 조심하라.
단순히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간제가 일라베니아 측을 일깨우기 위해 이 장소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살짝 뒤를 돌아봤다. 상급 기사들의 눈빛이 예리해져 있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이것 참, 대단한 미꾸라지가 아닌가.
바보 같은 웃음소리가 사라진 정적인 공간 속에서 리카르디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뵈어 참 좋군요.”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숨넘어갈 정도로 웃어 댔다.
* * *
부우우, 사냥 대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수십 필의 말이 한순간에 내달렸다. 로젤린의 뒷모습이 숲속에 푹 파묻혔다.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게 되자,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막사로 돌아갔다.
사냥 대회는 총 여섯 시간. 기사들이 돌아오기까지는 모두 자신에게 배당된 막사에 쉬거나, 연회장을 통째로 옮겨온 것 같은 저 밖에서,
“하하하!”
“호호호!”
저렇게 또 웃고 있어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당연히 전자를 택했다. 신경 쓸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바보처럼 웃을 여력 따위는 없었다.
밖에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던 간제가 막사로 들어가자 또 흥겹게 즐기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물론 경계야 늦추지는 않겠으나, 그녀 한 명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얘기였다. 누가 봐도 인위적인 저 웃음소리들은 아마 간제, 그녀 한 명만을 위한 연극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도 나름 손님이라면 손님인 셈. 리카르디스는 제 정신력과 시간을 소모해 간제를 파티에 데려가 에스코트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쉬고 있겠습니다. 조금 뒤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참, 그녀는 말하는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다. 그 얘기를 같이 듣고 있던 스타스는 막사에 물 샐 틈 없게 호위를 배치해 놓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드러누웠다. 준비된 간이침대에는 사냥 대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짐승의 털가죽이 올라와 있었다. 짐승의 누린내가 아닌, 향긋한 목재나 풀 냄새가 났다. 로젤린이 생각났다.
한참 누워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음악이 뚝, 끊겼다.
“꺄아악!”
막사로 기사들이 들어옴과 동시에 비명 소리가 울렸다. 르원.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 상급 기사 카일로, 파르딕트.
그들은 리카르디스를 등지고 사방을 경계하는 태세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눈빛에 비하면 그다지 태도가 다급해 보이진 않았다. 아주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건가? 부단장 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형 마수가 침입했습니다. 곧 정리될 테지만, 만약을 대비해 안을 지키겠습니다.”
“인명 피해는?”
“아직까진 없습니다. 간제 왕녀 덕분에 막사와 파티장을 둘러싼 호위 병력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던 터라.”
크르르…….
짐승이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디스는 보이지 않는 막사 밖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검을 든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온몸을 난자당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도 인간들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 싶어 할 뿐이었다. 제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모든 생물의 근원적인 부분이 결여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침대 위에 앉아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리가 그치길 기다렸다.
리카르디스는 막사를 나왔다. 상황은 정리된 후였다. 귀부인들이 남편의 품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군중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대가리가 잘려 있는 늑대 한 마리였다.
“늑대?”
분명 마수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여기저기 붉은 빛의 피를 뿌리고 쓰러져 있는 마수는 산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늑대의 생김새와 같았다.
마수는 일반적인 동물의 크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또는 눈이 하나라든가, 입이 크다든가, 주둥이가 길다든가, 팔 한쪽이 뒤틀려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기형적인 부분이 눈에 띄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늑대 형태의 마수에게서는 그런 점을 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말에서 그 의문을 알아챈 스타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마수입니다. 흰자위가 빨갛고, 이상할 정도로 공격적이며, 갑옷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잇세리온.”
“예, 전하.”
“세터 아카데미의 교수 데미안이 말했던 것 기억하나?”
뜬금없는 물음에도 잇세리온은 곧바로 대답했다.
“마수는 동물이 진화를 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학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인간이 진화하면 마인이냐며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 그가 했던 주장이 떠오르는군. 정말 그냥…….”
평범한 동물 같은데. 리카르디스가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평범한 동물이라면 이렇게 위협적인 무기가 가득한 곳에 홀로 쳐들어오지도 않고, 갑옷을 일그러트리는 힘을 지니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괴한 야수는 그저, 죽을 때까지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일그러진 목적성을 지닌 돌연변이에 불과했다.
스타스가 마수의 사체 위에 제 망토를 덮었다. 그 끔찍한 참상에 눈을 돌리고 있던 자들,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웃고 떠들던 자들까지. 짧은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깨닫고 자리를 떴다.
리카르디스는 조금 더 자리를 지켰다. 수레에 마수의 사체가 실려 나갔다. 뚝뚝 흐르는 피가 수레바퀴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뒤를 돌아 막사를 향했다.
막사를 지키던 레이몬드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인지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 수 있었으리라. 그 소동에도 얼굴 한번 안 비춘 인물일 것이 빤하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마치 제 막사인 양 편안하게 앉아 있는 간제의 모습을 보니 황당하기는 했다.
“왕녀.”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간제는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소곤거렸다.
“호위를 다 떼어 놓고 왔습니다.”
그 호위들을? 간제가 입만 열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꾹꾹 눌러 대던 그자들을? 그들은 결코 간제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그녀의 입에서 퍼질 얘기들을 단속해야 하는 자들이므로. 반드시.
“주위가 소란스러운데 혼자 다니시는군요, 왕녀.”
간제가 빙그레 웃었다.
“다들 제 막사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겁니다.”
“……왕녀를 두고?”
“시끄럽게 쫑알대기에 재워 버렸습니다.”
막사를 나서던 스타스와 레이몬드가 멈춰 섰다.
“어떤 방법과 어떤 의도로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자들이 있으면 못 할 얘기가 많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간제가 생긋 웃으며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스타스가 리카르디스의 앞을 막아섰다. 간제가 반대쪽 손을 들어 보였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품에서 길쭉하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나왔다.
“환각과 수면 작용을 하는 약재와 독을 적당히 배합한 향입니다. 제가 만들었지만, 효과가 아주 좋은데, 혹 필요하시다면…….”
“음…… 아니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진 않군요.”
리카르디스는 눈짓으로 기사들의 경계 태세를 물린 후에 그녀 앞에 앉았다. 간제는 발타에서부터 쭉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행동으로, 말로. 얘기하자, 얘기를 나누자. 당신과 나. 둘이서.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끈질기고 거침없는 행보가 단순히 개인과 개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라베니아 대 발타? 이름뿐인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하카브라는 왕을 두고서 감히?
눈이 마주쳤다. 간제가 눈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리며 생긋 웃었다.
“리카르디스 전하.”
“안 합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건 좀 당황스럽군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아시고? 마저 들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싫습니다. 혼인 얘기를 하려던 것 아닙니까.”
간제가 와 하고 감탄하며 마구 박수쳤다.
“저희 왕실에 미래를 읽는다는 명목으로 한자리 꿰차고 있는 늙은이가 있는데 말입니다. 훨씬 솜씨가 좋으십니다.”
“그거 영광이군요.”
리카르디스가 깍지를 낀 채로 느릿하게 손마디를 훑었다. 간제가 휴 숨을 내뱉었다.
“참 아쉽습니다. 발타의 귀한 아가씨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미모의 주인공을 남편으로 꿰찰 기회라 생각했는데요.”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눈이 높군요, 왕녀. 미안하지만 나도 눈이 높습니다.”
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잠시 후 깔깔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어딘가 미묘해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번 찔러 봤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그녀가 단순히 자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척 봐도, 누가 보아도 그녀는 하카브의 눈에 어긋나 있는 존재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혈육의 정?
하카브는 그렇게 달콤한 말이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러고도 제 오라비의 눈에서 멀어질 일만 골라 했다. 죽지 않았다고는 하나 다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
간제는 어쩌면, 혼인이란 이름의 동맹을 맺고자 이 자리에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하카브의 계산속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함부로 덜컥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건이 아니었다.
“발타에서는 사람의 말을 세 번까지는 들어 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간이, 상황이 달라지며 무언가 변할지도 모르니, 심사숙고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남은 두 번의 기회는, 저 또한 물러 두겠습니다. 무언가 변하는 게 있을 때까지.”
세 번의 기회라. 그에게도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므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리카르디스도 같이 일어났다.
“막사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왕녀. 마수가 처리되었다고는 하나, 한 마리가 아닐 수도 있으니.”
“세상에…… 지금 일 분 전에 찬 여자를 데려다주겠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기에 왜 호위를 전부 재우고 그럽니까.”
간제가 입을 쭉 빼고 툴툴거렸다. 막사의 천을 잇세리온이 걷으려고 하던 차, 간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리카르디스도 따라 멈춰선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전하?”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뭐든 빨리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수라 하시니 생각나서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마수가 언제 생겨났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 생겼느냐? 뭐, 이델라브힘이 세상을 비춘 그 날부터니, 대충…… 몇천…… 몇만…… 모르겠다. 리카르디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오래됐겠지 뭐. 무뚝뚝한 대답에서 그 뜻을 읽어 낸 간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에서 아는 내용이 조금 다르더군요. 그저 여흥으로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문헌상으로는 대략 삼백여 년 정도? 그때부터 마수가 나타났노라 이릅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을 찬찬히 되새겼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역사의 보고다. 어릴 적부터 갖은 교육을 받았으나, 그런 비슷한 얘기라고는 한 톨도 본 적 없었다.
마수는 동물, 식물과 같이 그저 세상과 함께 탄생한 무언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고작 몇백 년 전에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라는 얘기가,
“아.”
당혹스러웠다. 리카르디스가 제 입을 가렸다.
‘시기가…….’
시기가 맞아떨어진다. 축복의 밤이 사라진 때와.
[그러면 형. 마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핏줄은? 지금 어디 있을까?]
설원의 월계수. 그 반쪽이 되는 마인 가문. 그들이 사라진 때와.
우연일 리 없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며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어 있는 곳이 많아 그 조각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상이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잘게 손을 떨었다.
머릿속에 붉은 수레바퀴가 굴러간다. 마수의 피에 흠뻑 젖은 바퀴가 융단을 더럽혔다. 생을 위함이 아닌 누군가의 죽음을 위해 존재하는 돌연변이. 목에 칼날을 박고도 분노를 터트리던 ‘그것’의 포효가 생생했다.
* * *
282년. 막 싹이 움터 오는 봄. 아직은 쌀쌀하던 때.
들판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강한 힘으로 사지를 뽑아 낸 비참한 모습으로, 심장이 사라진 채였다.
282년, 첫 번째 꽃망울이 터지던 날.
전의 사건과 비슷한 형태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 또한, 인간이 한 것이라 믿겨지지 않는 잔인한 모습이었다. 그 시체가 짐승의 소행이 아니라 판단한 이유는, 발톱이나 이빨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283년, 햇살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계절.
지방 영지의 작은 마을 하나가 몰살당했다. 또한, 앞선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범인은 그 마을에 살던 마인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사람들을 죽였노라 증언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전역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하얀 밤과 검은 달을 부르는 위대한 힘 중 하나. 마력을 가진 자들이 갑자기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사람들은 서서히 마인을 피하기 시작했다.
284년, 붉은 낙엽이 바닥에 깔린 때.
황실 역사서에 정식으로, 마인이 인간을 잡아먹었다는 얘기가 기록되었다.
284년, 밀이 고개를 숙이는 때.
마인들이 일으키는 끔찍한 사건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황실 또한 더 이상 이 모든 일을 좌시할 생각이 없다며 성기사들을 전면에 내세운 사냥을 시작했다. 온 대륙, 온 영지에서 사람의 살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몇몇 강한 마인이 황실로 잡혀가는 걸 봤다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확실치 않았다.
286년,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날.
남루한 차림의 마인 한 명이 거리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마인이 저지른 모든 끔찍한 살인 사건들은 황실의 음모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을 전파했다. 남자는 순찰하던 병사에 의해 즉결 처형당했다. 그 마인이 왜 도망가지 않고 사람 많은 거리를 뛰어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을 타고 흐르는 광기가 도진 것이리라.
287년, 축복의 밤.
일라베니아에 불길한 그림자를 몰고 온 마인들의 존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는 마인이 없으면 하얀 밤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했으나, 올해에 뜬 하얀 밤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마인, 그 불길한 것들이 빛을 가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내리쬐는 아름다운 나라.
일라베니아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