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광경에 칼릭스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알몸의 남자가 방 안을 배회 중이었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지? 칼릭스는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알몸의 남자와 단둘이 있기 위해 서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돌이켜 본 칼릭스의 얼굴에 회의감이 짙게 드리웠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레이몬드만큼이나 장신인 잿빛 머리의 남자는 태평하게 돌아다니다가 와인장을 발견하고는 화색을 지었다.
“오, 비싸 보이는 게 많은데.”
남자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와인장에 진열된 것 중 가장 비싼 와인이었다.
남자가 손날로 병의 목을 퍽 소리 나게 쳤다. 윗부분이 칼날로 잘린 것처럼 예리한 단면을 보이며 떨어져 나갔다. 유리 조각이 들어가는 걸 염려한 것인지 단면을 후후 불던 남자가 와인을 들이켜고는 크으, 아저씨 같은 소리를 냈다.
아끼는 와인이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음에도 칼릭스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이없어서.
“……마카롱 님. 언제 오셨습니까?”
“아까. 빨리빨리 좀 다니자.”
마카롱이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편해 보였으나 꼴 보기 싫었다. 알몸이다 보니 유독 중심이 눈에 띄었다.
“옷을…… 드릴까요?”
입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아니. 곧 날아가야 해서 귀찮고.”라는 마카롱의 대답에 무산되었다. 정말 보기 싫었다. 칼릭스는 그를 최대한 외면한 채 테이블로 걸어가며 말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물건이 도착했거든요.”
칼릭스가 서랍을 뒤적여 가죽으로 감싼 물건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았다. 마카롱은 와인 병을 대충 소파에 던지고 그것을 냉큼 집었다.
“그거 맞네.”
칼릭스는 소파에 번지는 붉은 자국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파편’입니다.”
사냥 대회 당시 검은달의 암살자들이 사용했던 무기로, 예전에 로젤린에게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협조로 얻어 낸 암기는 붉은수레바퀴 영지 내에 있는 성에 줄곧 보관 중이었다.
몇 주 전, 마카롱이 ‘파편’을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없겠냐며, 없어도 구하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만 하지 않았더라도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파편’의 위험성이 가장 대두되었던 사절단이 돌아왔을 때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왜 지금 ‘파편’을 구해 달라고 한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은 금세 풀렸다. 황성에 또다시 위험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발타의 사절단이라는.
마카롱은 성급한 손놀림으로 끈을 풀어 감싸진 가죽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녹슬어 있는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카롱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보지 못할 무형의 기운을 읽어 내었다. 단검에서 검고 붉은 것이 일렁였다.
마카롱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타에서 보았던, 인간들의 몸에 심어져 있던 검붉은 기운. 거칠게 박동하며 사납게 날뛰는 마력. 이것을 마력이라 불러도 되는 것일까? 씨앗은 같으나 발아 과정과 꽃의 종류가 다르다. 인간들도 참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대?
마카롱이 단검을 얼굴 가까이 들었다. 칼릭스가 몸을 움츠리자 사납게 생긴 남자가 그를 비웃었다.
“쫄지 마라.”
“……네.”
“고분고분한 게 귀여운 맛이 있었네. 알았으면 진즉에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거였는데. 아주 쪼금.”
“볼일이나 보시죠, 좀!”
마카롱이 낄낄 웃었다. 그는 단검을 들고 샅샅이 훑었다. 남아 있는 ‘파편’의 양은 아주 적었으나, 이 정도로도 인간에게는 치명적이라 했다.
‘흠…….’
잠시간 고민하던 마카롱이 단검으로 제 손등을 그었다.
“마카롱 님!”
칼릭스가 악 소리를 지르며 마카롱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하지만 이미 상처를 통해 ‘파편’이 스며든 후였다.
“미쳤습니까?”
“이놈의 자식이?”
마카롱이 칼릭스를 퍽 쳤다. 칼릭스는 옆구리를 붙잡고 인상을 썼다.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
“나한테 안 통하는 거 빤히 알면서 그러니. 오,”
마카롱이 손등을 보며 실실 웃었다. 좀 미친 사람 같았다.
“‘파편’이 주제도 모르고 사납게 날뛰고 있어.”
칼릭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마카롱의 상처와 얼굴을 번갈아 봤다. 로젤린이 ‘파편’을 결국 이겨 냈으나, 며칠간 생사를 오갈 정도로 마독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마카롱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칼릭스의 혈압이 올랐다.
마카롱은 눈을 감고 몸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편’은 인간의 신체를 흉내 낸 겉껍질을 헤집고 날카롭게 내부로 파고들었다. 검붉은 마력이 혈관처럼 몸 안에 퍼졌다. 파고든 신체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며 지배하려던 ‘파편’은 곧 짙고 깊은 암흑 속에 발길을 멈췄다.
검은 바다가 ‘파편’을 도리어 뒤덮기 시작했다. 퍼졌던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춤추던 ‘파편’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나의 촛불까지 남김없이 집어삼킨 마카롱이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칼릭스가 보였다. 마카롱이 씩 웃었다.
“별거 아닌데?”
칼릭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종족은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인간들은 고작 이런 거로 난리가 나는구나…… 가엾어라…….”
마카롱이 애처로운 눈빛을 가장하며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손등의 상처도 언제 있었냐고 말하는 양 말끔했다. 칼릭스는 제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에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했는데…….
“약해 빠져 가지고서는…… 세상에, 애벌레랑 다를 게 뭔지…….”
열 받았다. 칼릭스는 마카롱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마카롱은 기분 나쁘게 히죽댔다.
마카롱은 펄떡펄떡 날뛰는 칼릭스와 놀아 준 후, 테이블 위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녹슨 암기. 자신에게는 하등 쓸모도 소용도 없는 것.
일정량 흡수하긴 했으나 아직 ‘파편’은 잔존하고 있었다. 마카롱은 잠시 그것을 보다가 일어섰다. 시야 정면에 마카롱의 신체가 한가득 들어와 칼릭스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카롱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의 형체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피부색에서 갈색으로, 검은색으로 검게 물들며 무너졌다.
칼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자리에는 검은 그림자 같은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흐르는 듯, 무너지는 듯, 흩어지는 듯, 연기같이, 밤하늘을 한 줌 떠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칼릭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온전한 ‘그것’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것’은 바람에 흐르는 구름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탁자에 있는 암기를 완전하게 덮쳤다.
칼릭스는 마카롱의 의도를 알아챘다. 약해 빠졌다고 놀리긴 했으나, ‘파편’이 인간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마카롱도 잘 알고 있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온전히 흡수하려는 것이 아닐까.
검은 안개 안에서 무언가가 물결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마카롱의 표면에 닿은 손바닥에 간지러운 무언가가 스쳤다. 칼릭스는 용기를 내서 손을 더 깊이 넣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밀도 높은 공기 같기도 하고, 미세한 모래 입자 같기도 했다.
이게 마력인가? 칼릭스는 몸을 떨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보지 못할 종류의, 힘의 응집체. 경이로운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검은 안개 뒤로 촛불이 아른하게 비췄다.
검은 하늘의 별같이 빛났다. 아름다웠다.
마카롱은 곧 황성으로 돌아왔다. 고고한 하얀 성들이 하늘로 뻗어 있는 일라베니아 황실 성은 미관상 보기에는 좋았다.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게 주관적인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마카롱은 이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짜증나고, 어딘가 껄끄러웠다. 자주 밖을 떠돈다고 해도, 그 껄끄러운 장소를 집이라도 되는 양 꼭 돌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로젤린 때문이었다.
수풀 사이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붉은 잡초를 보고는, 색이 예뻐 먹고 싶다며 고민하던 로젤린이 떠올랐다. 그 모습만 생각하면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독수리는 밤하늘을 날다가 에휴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의 방. 큰 창을 뒤덮는 그림자는 곧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네발짐승으로 변했다. 마카롱은 앞발을 할짝거리고 세수를 했다.
커다란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니 헤사가 들어왔다. 시트를 갈고 고양이 미미를 실컷 만진 소년이 뿌듯한 얼굴로 방을 떠났다. 후에 로젤린이 돌아왔다. 미미를 발견한 로젤린이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고양이의 보드라운 배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갔었어.”
“아, 칼릭스한테.”
“뭐 했는데?”
“뭐 좀 먹고 왔어.”
‘파편’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로젤린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나를 두고 혼자 뭘 먹고 왔다고? 딱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었다. 고양이가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어린애는 먹는 거 아냐.”
“나 다 컸어. 스물세 살.”
“이게 어디서 먹히지도 않는 공갈을 쳐. 통할 사람한테 하자.”
로젤린이 칫 하고는 다시 마카롱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마카롱이 골골대고 있자 로젤린이 아차 하며 일어섰다. 다급하게 찬장에서 꺼낸 물건은 샴페인이었다. 그녀가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을 당시 기사들이 마시던 종류였다.
마카롱이 반색하며 잽싸게 인간 여자 모습으로 의태했다. 두 사람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 커다란 샴페인이 금세 동났다. 취하지 않는 두 사람은 입맛만 다셨다. 취하는 기분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상큼한 과실 향을 맡으니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로젤린은 정말 취한 인간처럼 좀 들떠 보이는 기색이었다. 왜 기분 좋아 보이냐 물었더니,
“전하가…… 진짜…… 너무 아름다워.”
라는 답변이 돌아와 마카롱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심심한 반응에 열성적으로 리카르디스의 어디가 아름다운지 설명했다. 반짝거리는 눈가가, 오뚝한 콧날과 각진 턱선이, 탄탄한 가슴이, 복사뼈가!
“…….”
마카롱은 복사뼈가 어떻게 생기면 아름다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고서는 창문을 통해 나갔다. 또다시 리카르디스에게 간다고 했다.
고요한 방이 밤에 잠겼다. 로젤린이 나간 창을 가만히 바라보던 인간 마카롱은 다시 고양이로 돌아갔다.
고양이는 소파에서 테이블로 풀쩍 뛰었다. 달큼한 과일의 잔향에 꼬리가 절로 살랑거렸다. 마카롱은 쓰러져 있는 샴페인 입구를 할짝거렸다. 이상하게 잠이 몰려왔다. 정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한 마리의 고양이가 탁자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 * *
아아아악!
비명 소리에 깨어난 마카롱은 자신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감싼 공기에 피 냄새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슴 안쪽이 무서울 정도로 박동하고, 온몸이 당장 흩어질 것처럼 떨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다!
귓가에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도망쳐야 해! 숨어야만 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이 다급한 뜀박질은 그 목소리를 따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누가 쫓아와서? 뭐가 무서워서!
뒤를 돌아보았다. 밤중에도 환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이 보였다. 헛구역질이 나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머리를 숙이자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런데 뭐지, 이 피 냄새는. 어디서, 어디서 계속 피 냄새가…….
얼굴 위로 흐르는 게 눈물인지 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숨어야 해. 도망쳐야…… 더 깊은 곳으로……. 그런데 손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이었더라. 머리가 멍했다. 생각 위로 목소리가 덧대어졌다.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금속 무기의 날카로운 소리가 가슴을 두드리고 헤집었다.
아이들이 엉엉 운다. 그 소리에 가슴이 저며 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디 있지? 둘러보아도 아이들은 없었다. 어둑한 숲길이었다.
빨리 가자. 빨리 도망가자. 더 멀리.
아, 피가.
자꾸만 피 냄새가.
* * *
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환한 풍경이 창밖에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수의 등불이 하얀 성을 둘러싸고 빛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나,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귀족들은 번번이 놀라운 광경에 입을 모아 찬사했다. 밤에도 영광으로 빛나는 일라베니아!
“아름다워.”
하카브 또한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등불의 향연에 크게 감명 깊어 했다. 소파에 편안하게 드러누워 보는 창은 마치 한 편의 명화라 보아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로 인해 이따금 빛이 흔들거렸기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위명이 헛되지 않는군. ‘축복의 밤’이라……. 어둠을 몰아내는 영광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어. 디에즈, 그대도 구경하지 그래. 매년 보는 거라 감흥이 없나?”
디에즈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술을 따르고, 삼키고, 테이블에 놓고, 다시 따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말술인 건 알고 있지만 혼자서 두 병을 넘게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술 한 잔도 못 마실 것처럼 생겨 놓고서는.
“디에즈. 오늘따라 수심이 깊어 보여.”
“골치 아픈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왕자부터 시작해서.”
디에즈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 봤다.
“농담도 잘하긴.”
“진담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청혼을…… 하…… 설마 로젤린 경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으실 테고.”
“생각보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 뒤에 있는 인물들이 워낙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기대는 살짝 접고 있다.”
“살짝이요?”
“한…… 이 정도.”
하카브가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을 살짝 접었다. 모서리를 새끼손톱만 한 정도로. 디에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하카브가 피식 웃으며 포도를 집어 먹었다.
“시작이 반이라지 않나.”
디에즈는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하 한숨을 쉬었다. 항상 번듯하게 펴져 있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감정이 드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순간, 디에즈의 눈빛이 변했다. 부드러운 눈매에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그의 시선이 창문이 있는 방향으로 흘렀다.
“밤손님이로군요. 왕자의 피를 취하고 싶은.”
“이런. 며칠은 더 두고 볼 줄 알았더니. 성격 급한 사람들일세.”
디에즈는 테이블 위에 켜져 있던 초를 후, 하고 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방 안에 있던 불을 전부 소등했다. 방 안이 금세 어둠에 잠겼다. 디에즈와 하카브의 호위들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기다렸다.
창문 밖에서 금속음이 연쇄적으로 울렸다. 창을 통해 내려다보니 복도에서 흰색 제복을 입은 자들과 어두운 회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싸우는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멍청하기까지 해서 호위들에게 걸린 것 같은데…….”
하카브가 웃었다.
“최근에 리카르디스 황자가 성 주위의 병력을 늘려 줬거든. 나를 위해.”
“리카르디스가 서류를 던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그거 무척이나 보고 싶은걸.”
하카브가 정말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쨍그랑!
그때, 창문이 깨지며 파편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디에즈가 서 있는 창이 아닌, 테라스 쪽이었다. 생각보다는 아주 멍청한 건 아닌가. 양동 작전이라…….
디에즈가 창의 커튼을 쳤다. 방 안은 한층 어두워졌다. 암살자들은 어둑한 내부에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초 하나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커튼 너머로 비치는 희미한 등불의 빛으로 어렴풋이 형체만 알아볼 정도였다.
방 안에 서 있던 하카브의 호위들이 검을 빼 들었다. 순수한 마인들로 이루어진 호위 부대였다. 디에즈가 암살자들을 향해 걸어가며 호위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나서지 마세요.”
하카브가 포도 한 알을 더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어쩐지 웃음기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아순. 디에즈 황자 전하께서 나서지 말라 하신다.”
두 명의 침입자가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달려왔다. 어설픈 위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법 훈련된 암살자인 듯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침입자의 검이 사선을 그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 공격을 바라보던 디에즈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등에 부딪친 무기가 부서져 날아갔다. 암살자가 주춤 물러서며 당황했다.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디에즈의 손이 남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커헉. 비명은 짧았다. 순식간에 목이 뒤틀린 한 남자의 인영이 허물어졌다.
다른 암살자는 디에즈를 지나쳐 하카브를 향해 달렸다. 디에즈는 뒤에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 탁자를 향해 찍어 내렸다. 탁자가 부서지며 과일이 사방으로 날았다.
디에즈가 부서진 나무 조각을 집고는 암살자의 머리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단단한 두개골의 저항은 그의 힘 앞에 의미 없이 무너졌다. 파삭, 뼈와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피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와인이 튀고 피가 흐른 그 와중에도 디에즈의 옷은 더러워지지 않았다. 디에즈는 거울 옆에 장식되어 있던 화병의 꽃을 뽑아 바닥에 버렸다. 화병 안에 남은 물이 찰랑거렸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손에 물을 부어 전투의 흔적을 씻어 냈다.
디에즈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전투도 소강상태인 듯했다. 흰 대리석 위로 피가 너절하게 뿌려져 있었다. 창문 유리에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의 모습이 비쳤다. 디에즈는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미간의 주름을 폈다.
디에즈는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성 여기저기를 빛내고 있는 등불이 보였다. 밤하늘 별보다 밝고 환한 빛무리가 은하수같이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름다웠다. 영광의 일라베니아.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하게 빛나는 하얀 밤 속에서 기어코 어둠을 찾아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야간 경비를 맡았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와 왕녀 간제가 머무는 성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그놈이 뭐가 예쁘다고 밤을 새워 경비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직접 기사단장 스타스에게 항의했다가 혼났다. 전쟁이 일어나면 책임질 수 있느냐는데, 확실히 그건 두 사람이 책임지기 힘든 사안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경비하겠습니다. 기사단장 스타스는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손에 쿠키를 쥐여 주고 내보냈다. 두 명은 기사단장실을 나오며 묘한 표정을 했다.
“…….”
“……지금 우리를 로젤린 경 취급하신 것 같은데?”
요즘 다들 간식을 가지고 다니더라니, 묘하게 신경 쓰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이것을 칭찬 간식이라 명명했다. 어쨌거나, 기껏 받았으니 맛있게 먹는 게 도리였다.
레티시아는 마카다미아 쿠키였고 에버하르트는 치즈 블럭이 박힌 쿠키였다. 반반 나눠서 사이좋게 나눠 먹다가 헤사를 만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짐을 잔뜩 들고 있는 헤사는 볼을 다람쥐처럼 빵빵하게 채우고는 갈 길을 떠났다.
하카브가 머무는 성에 온 두 사람은 물보라 기사단의 하급 기사 두 명과 교대했다. 다양한 기사단에서 차출된 기사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시간만큼 제멋대로인 게 없었다. 어찌나 밤이 긴지. 똑같은 여섯 시간이라 하더라도 낮보다 밤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모두가 만든 정적이 지루했다. 심심한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와 끝말잇기를 했다. 에버하르트가 헤사에게 배워 온 실뜨기 놀이도 했다.
늦은 밤까지도 성의 시녀들이 돌아다녔다. 비슷한 처지라 가볍게 인사하고 스쳐 지나갔다. 시녀들이 꺅꺅 소리를 내며 에버하르트를 몰래 훔쳐봤다. 에버하르트는 멋진 척하며 어깨를 쭉 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눈을 가늘게 떴다.
“봤어, 레티시아?”
“어…… 네 멍청한 모습…….”
에버하르트가 씩씩댔다. 최근 키가 훌쩍 커서 비등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촉새 같고 바보 같은데. 이런 남자의 뭘 보고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레티시아. 너는 어떤 남자가 좋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남자.”
에버하르트가 풀 죽었다. 그런데 순간,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전투 직전의 날카로움이 에버하르트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상을 눈치챈 레티시아가 시야를 넓게 했다. 무언가 거슬렸다.
“레티시아.”
“알아.”
벌레 우는 소리가 멎었다. 무언가에 놀란 새 두 마리가 갑자기 날아올라 두 사람의 위를 가로질렀다.
“3번 주요 호위 지점!”
에버하르트가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무에서 암살자 다섯 명이 쏟아졌다. 기사들을 피해 들어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는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티시아가 왁 소리를 터트렸다. 일정 거리를 두고 경비 중인 다른 병사와 기사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3번 주요 호위 지점, 남자, 다섯! 아니.”
레티시아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부로 두 명 침입!”
그녀가 말을 마치는 그 순간 암살자가 짧은 검을 내질렀다. 레티시아는 스으 숨을 들이마시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쿵!
그녀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온몸에서 전달된 팽팽한 힘이 그녀의 검에 실렸다. 돌도 부숴 버릴 듯한 파괴력이 남자의 무기와 함께 팔을 잘라 내었다. 레티시아의 살벌한 얼굴 위로 피가 튀었다.
“아아악!”
레티시아는 팔이 잘린 남자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 에버하르트에게 암기를 던지려는 암살자의 머리채를 잡아서 벽에 찧었다. 한 사람을 빠르게 무력화 한 에버하르트가 눈짓으로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레티시아가 이를 갈았다. 첫 실전을 감히, 하카브를 호위하는 것에 쓰게 만든 이, 쓸모없는 자식들…….
감정이 실린 묵직한 공격들이 암살자들에게 쏟아졌다.
후웅!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났다. 레티시아의 검격에 암살자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흩어졌다.
암기 따위가 날아와도 귀신같이 알아채 쳐 내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했다. 황실 기사 특유의 탄탄한 기초도 빛을 발해,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른 호위 인력이 그들을 도우러 올 무렵에는 이미 정리가 끝나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암살자를 발로 차는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지원하러 온 기사들이 움칠 몸을 떨었다. 같은 하급 기사인데 묘하게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레티시아는 그 새에 살아 있는 암살자 두 명을 포박해 놓았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지원하러 온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십니다. 처음 뵙는 분들이군요. 하얀밤 기사단의 하급 기사 레티시아입니다.”
피가 묻어 있는 얼굴로, 피가 묻어 있는 손을 내미는 것치곤 태평한 태도였다.
* * *
황성이 왈칵 뒤집혔다. 타국의 왕족이 간밤에 암살 위협을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2황자 리카르디스가 황실 기사단의 협력을 받아 미리 호위 병력을 늘려 둔 덕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암살자를 잡아 낸 것도 하얀밤 기사단의 하급 기사 두 명이었으니, 리카르디스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암살자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된 것이 다섯. 두 명은 생포했으나 고문하던 중 혀를 깨물고 자결했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발타의 후계자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는 암시만 남긴 사건이었다.
하카브 왕자는 제 안위가 달린 문제임에도 넉넉한 태도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일라베니아의 건국일을 모두가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던가. 그러니 모두가 기뻐할 만한 결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짧게 언급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가 강대국의 압력 때문에 속없이 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날카롭게 갈린 무기가 검집에 들어가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완성되지 못한 검은 검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모든 일에 대비책을 세워 뒀음을 알 수 있었다.
암살자를 간밤에 보낼 정도로 하카브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던 자들도 몸을 웅크렸다. 그들이 건들고 있는 게 벌집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그걸 이제야 알아 처먹었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등신 같은 작자들이라고도 했다. 분명 인간이라면 그런 생각을 못할 것이니, 절지동물의 형상일 것이며, 그것도 머리가 없을 게 분명하다고 악담했다.
하카브는 자신이 머무는 곳을 찾은 리카르디스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감격, 감동, 환희. 자신의 호위 인력을 빼서라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겁니까? 라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리카르디스 황자, 저를 위해…….”
진정성 있게 떨리는 하카브의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안에서 들끓는 욕설이 행여나 빠져나올세라, 아주 꼭꼭.
하카브가 갖은 수작질로 로젤린을 흔들어 놓은 직후라 감정이 더욱 악화된 시점에서 하카브에게 감사 인사를 듣고 있으려니 절로 열이 뻗쳤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서 나쁜 일을 당하면 안 된다는 것쯤이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암살자들의 성공을 은근히 바라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카브는 국경을 넘은 우정에 감격하며 리카르디스를 끌어안았다. 심지어는 양쪽 볼에 키스하기까지. 리카르디스는 제 25년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살의가 넘친 적이 있던가 다시 삶을 돌이켜 보았다.
물론 하카브를 마주하고 있는 얼굴은 변함없이 근사했다. 하카브가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리카르디스는 생긋 웃었다.
“제국에 온 손님이 큰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일라베니아의 축제를 위해 나쁜 일을 덮어 주신 배려는 감사하나,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처리할 일이 있어 급히 돌아가 봐야 합니다, 왕자. 식사 초대는 다음에 부탁드리지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마음 잘 추스르시고 다음번에도 웃는 모습으로 반겨 주시길 바랍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힘써 주셨는데…….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물론입니다, 황자.”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두 손을 꽉 쥔 채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생기고 아름다운 리카르디스의 얼굴. 냉철함이 언뜻 비치는 그의 행동에서는 어떤 파문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하카브는 사절단 이후 리카르디스를 줄곧 주시해 왔다.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행동으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순히 부하를 위하는 것치고는 과할 정도였다.
그것이 잘 갈고 닦아 날카로운 검을 아끼는 마음인지 다른 종류의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어쨌거나.
그러니 로젤린을 결혼이라는 수단으로 뺏어 오려 했다면 이렇게 웃고 있지만은 못할 텐데. 정말 그녀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한 것일까?
‘이런…… 정말 기대를 해 봐도 되는 것인지.’
하카브의 미소가 짙어졌다. 로젤린도 로젤린이지만 이 남자가 흔들리는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그때 리카르디스가 아차,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품을 뒤지더니 곱게 자수가 놓인 주머니를 하나 꺼내었다.
“소란에 잃어버리신 것 같더군요, 왕자. 제 기사가 주워 온 물건입니다.”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손에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한 겹의 천 안쪽에서 잘그락잘그락 굴러다니는 작은 금속의 더미가 느껴졌다. 하카브는 그것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거 참. 정말…….’
주머니 입구를 열어서 보니, 예상했던 대로 자신의 목걸이였다. 로젤린에게 줬던 청혼의 증표가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카브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오, 이럴 수가.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자. 주워 준 기사가 누구입니까?”
“상급 기사 레이몬드 경입니다.”
“레이몬드라면…….”
“저번 방문 때 왕자와 첫 번째로 인사를 나눈 자입니다.”
아, 그 남자. 발타식 인사를 나눌 때 입을 꼴 보기 싫게 쭉 내밀며 제 볼에 침질한 남자였다. 로젤린에게 준 목걸이를 다른 사람이 어딘가에서 주웠을 리 없었으나, 뭐라 추궁할 수도 없었다. 하카브는 가볍게 코로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 것으로 감정을 정리했다. 아쉽긴 해도 로젤린이 그렇게 쉽게 넘어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쪽도 쉽게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한두 번 차인 정도로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기는 하지만, 청혼하며 줬던 물건을 부숴서 다른 남자의 손에 들려 보내다니. 아주 약간 상처받기는 했다. 하카브가 생긋 웃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때마침…….”
그는 말을 꺼내며 소매를 뒤적였다. 그의 손에 푸른색의 싸구려 펜던트가 딸려 나왔다. 그걸 보는 순간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한층 싸늘하게 굳었다.
“저 또한 ‘레이몬드’ 경의 분실물을 가지고 있었군요. 돌려줄 때를 찾아 다행입니다. 레이몬드 경에게 제 말과 함께 전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발타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중요한 물건을 되찾아 주어 고맙다. 보답하고 싶으니 언제고 찾아와 달라고요.”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손에 펜던트를 꼭 쥐여 주며 가까이에서 눈을 맞췄다.
“부디.”
클로에는 주인이 없는 집무실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인기척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성의 주인이 귀환한 모양이었다. 한데 그 발소리가 누구에게 쫓기는 듯, 혹은 무언가를 쫓아가는 듯 급박하기 그지없었다.
쾅!
문이 열렸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 라고슈 최북단의 공기가 저렇게도 냉혹할까. 시종 대신 제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리카르디스의 얼굴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문을 먼저 열려고 하던 시종이 무안한 손을 허공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성난 기색으로 단추 세 개를 쭉 풀었다. 열린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리카르디스의 행동에서 분을 삭이려는 노력이 비쳤다. 하지만 곧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다시 씩씩. 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뒤따라 들어온 잇세리온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리카르디스의 주위를 맴돌았다. 리카르디스는 한쪽 손은 허리에 얹고, 한쪽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오 분 정도 시간을 보낸 후 입을 열었다.
“잇세리온.”
“예, 전하.”
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제발 하카브도 지금 나만큼 열 받았을 거라 말해라.”
잇세리온은 여유작작한 미소를 띠고 있던 하카브의 얼굴을 떠올렸다. 잡기를 집어 던지지 않는 것이 용해 보이는 리카르디스보다 훨씬 평온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잇세리온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타국에 발을 들여 로젤린 경에게 접근했으나, 그 야망이 코앞에서 부서지다 못해 산산조각이 난 채로, 현재 로젤린 경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에게 그 부서진 야망을 건네받은 하카브가! 훨씬 더 상심하고 속이 쓰라린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하! 부서진 목걸이를 건네는 전하의 미소가 얼마나 근사했는지, 저라면 얄미워서 아주 바닥을 굴렀을 겁니다!”
잇세리온이 필사적으로 항변하자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후우……. 숨결 하나하나에도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좋아, 그럭저럭 기분이…….”
돌연 기세를 바꾼 리카르디스가 소파에 있던 쿠션을 낚아채듯 잡아 벽으로 집어 던졌다. 부드러운 섬유가 그런 파괴적인 소리를 낼 수 있을 줄이야. 클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잇세리온의 필사적인 항변에도 불구하고 리카르디스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벽에다 던진 그의 인내심이 대단할 뿐이었다.
클로에는 분노에 제 몸을 맡기고 활활 불타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가만히 지켜보며 홍차를 저었다. 우유가 섞여 금세 탁해졌다. 각설탕을 네 개 넣을 무렵에는 리카르디스도 간신히 무언가를 집어던지지 않게 되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군. 그래, 무슨 일이지 클로에?”
다리를 꼬며 소파에 기대는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달리 야성미가 넘쳤다. 클로에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서류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하카브 암살 건에 발을 들인 귀족 목록을 알아 오라고 하셨잖아요, 전하.”
“그래, 그 쓸모없는 인간들. 가만히나 있던가,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머저리 같은 작자들. 뭘 하나 해도 그런 식이겠지. 불쌍한 인생들이로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외딴곳에 홀로 쓸쓸하게 죽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평소보다 더 독기 어린 비난이었다.
“그거 말고도 좋은 소식을 들고 왔으니 그만 화 푸세요.”
“좋은 소식이라. 그대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그건 좀 기대되는군.”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감흥 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클로에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유순한 인상으로도 음흉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싸했다.
“하지 마.”
리카르디스의 말에도 클로에는 예의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로젤린 경의 드레스가 완성되었는데, 세상에. 정말 너무너무…… 너어무 예뻐요.”
리카르디스의 손이 움찔했다. 클로에가 그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파트너가 없는 것 같던데…… 로젤린 경에게.”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하지그래.”
클로에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전부 말했는걸요? 좋은 소식.”
싱긋 웃은 클로에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방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돌연 다시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아차.”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초조하게 만지다가 그녀의 뒷말에 몸을 떨었다. 홍차가 흘러넘쳤다. 클로에와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딱 부딪쳤다. 눈매가 능글맞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의 드레스가 공교롭게도 하얀색이었던 것 같기도…….”
리카르디스가 두 손을 들었다. 귓가가 절로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건국일을 맞이한 무도회에 하얀색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황족, 또한 황족의 파트너뿐이었다. 애초 그녀의 드레스를 제작할 때 황족의 파트너가 되리란 사실을 감안했다는 것이었다.
“그만 괴롭히고 나가 봐.”
“네에, 아 맞다. 네스터 경도 파트너가 없다지요? 로젤린 경의 일정을 물은 뒤 꽃집에 갔다던데요? 어쩜, 낭만적이기도 해라.”
“젠장,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리카르디스가 빠르게 클로에를 지나쳤다.
“네스터 경은 꽃다발을 들고 가는데 전하는 그냥 가세요? 빈손으로?”
클로에의 말에 그가 급하게 멈춰서 거울 속 모습을 한번 확인했다.
“괜찮다. 나는 얼굴이 있으니.”
“네에?”
그는 어이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웃었다.
“귀엽기도 하시지.”
잇세리온이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황급히 리카르디스를 따라 나갔다.
* * *
바다협곡의 네스터는 잠시 제 목적을 잃고 자리에 서 있었다. 주위의 구경꾼들이 그러하듯, 똑같이.
헤사가 달리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나무를 밟고 올랐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두세 걸음 만에 사람의 키보다 높이 올라간 소년이 나무에 쿵, 발을 굴렀다. 위로 자란 나뭇가지를 디딤돌 삼은 것이라,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향했다. 몸에 추를 달고 있는 듯 묵직한 공격과 함께였다. 자그마한 인영이 회전하며 공중에 날카롭게 검을 그었다.
로젤린은 발을 살짝 움직여 반걸음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피해 냈다. 소년의 목검이 공중을 가르고 바닥에 박혔다. 헤사는 검을 그대로 손에서 놓아 버리고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허리와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 전, 어깨와 팔로 몸을 튕겨 내었다. 로젤린을 향한 발차기가 칼날처럼 예리했다.
턱, 로젤린이 매서운 발차기를 손으로 막아 냈다. 소년이 공중제비로 폴짝폴짝 물러났다. 구경꾼들은 감탄하는 소리를 차마 막지 못하고 흘려 버렸다. 네스터도 본 목적을 잊고 손뼉을 쳤다.
사람들의 소리에 헤사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수습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중하느라 구경꾼들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헤사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매일 로젤린의 머리카락으로 공예를 하는 솜씨는 다 어딘가에 버리고 온 듯이.
로젤린이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다가온 헤사의 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바람이 불며 소년의 머리를 더욱 흐트러트렸다. 헤사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머리카락과 로젤린의 손길이 간지러워 눈을 감았다.
[헤사, 좋은 아침입니다.]
하카브에게 이용당했던 이틀 뒤의 아침. 로젤린이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네며 헤사를 맞이했다. 헤사는 문가에 가만히 서 있다 눈물을 흘렸다. 주적이자 타국의 왕족의 말에 혹해서 제 직속상관을 속이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도, 소년은 어떤 벌도 받지 않았다. 로젤린은 물론이고 일라베니아 2황자이자 하얀밤 기사단의 주인인 리카르디스에게도.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 언제나 소년에게 이뤄졌던 공식이 파괴되자 남은 것은 혼란뿐이었다. 로젤린이 더 이상 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은 둘째 치고서, 버림받을지 말지의 기로에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로젤린은 흔들렸던 모습을 완전히 떨쳐 내고서 무뚝뚝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헤사가 눈물만 뚝뚝 흘리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벅벅, 마치 창문을 닦아 내는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지만 그게 너무나도 반가웠다.
이후, 로젤린이 잼은 어디 있느냐 물었고, 헤사는…….
[발타의 하카브 왕자 전하께서 저를 오래 붙잡고 있으셔서, 태웠습니다. 전부 왕자 전하 때문입니다.]
하고 사실에 기반하여 죄를 떠맡겼다. 로젤린은 분노하며 하카브에 대한 적의를 한층 더 불살랐다.
헤사의 실수는 하카브와 로젤린, 리카르디스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받은 르원, 잇세리온. 몇몇의 주요 인물들만 알고 있었다. 얘기가 퍼졌다고 가정했을 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헤사를 수습 기사로 계속 둘 생각이면 함구하는 것이 좋다며 리카르디스가 조언한 결과였다. 헤사는 언젠가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떨어지는 무게를 이용해서 힘을 더하는 건 좋았지만, 동작이 너무 큽니다.”
“네.”
“공격이 빗나가도 바로 발차기를 하는 건 좋았습니다. 보통 아래에서 발차기가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하니까요.”
헤사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로젤린도 마주 웃어 주었다. 오늘의 간식에 대해 얘기하던 헤사가 순식간에 낯빛을 바꿨다. 로젤린의 저 뒤에서 거대한 꽃다발을 끌어안고 달려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로젤린 경.”
바다협곡의 네스터였다. 헤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지긋지긋한 인간 같으니…….’
소년은 ‘상급 기사’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로젤린을 찾아올 정도의 시간도 없을뿐더러, 다른 기사의 일정을 이렇게 세세하게 알 정도로 할 일이 없지 않다는 얘기였다.
“네스터 경.”
네스터는 아까의 헤사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대련 잘 보았습니다. 언제나 대단하십니다. 이 수습생도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겠군요.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되다니, 참 운 좋은 녀석입니다. 부러워…….”
이 사람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있잖아. 네스터가 하하 웃으며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머리를 짓누를 듯한 거친 손놀림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스터 경?”
“아, 그렇지.”
남자의 볼에 다시 홍조가 돌았다. 꼴 보기 싫었다. 헤사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이, 이걸. 로젤린 경.”
네스터가 보석과 레이스,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꽃다발을 내밀었다. 지금 저걸 꽃집에서부터 훈련장까지 들고 왔단 말이지. 좀 웃겼겠는걸. 헤사가 속으로 냉소했다.
“건국제 무도회에 가실 때 파트너가 없으시다면…….”
“있습니다.”
헤사가 냉큼 끼어들었다. 네스터가 소년에게 눈을 부라렸다.
“로젤린 경께서는 파트너가 있습니다, 네스터 경. 안타깝게도 기회는 다음. 콜록콜록…….”
생을 기약해 보심이. 뒷말은 억지로 내뱉은 기침 소리와 섞였으나 네스터는 분위기상으로 대충 알아들었다. 네스터가 뭐라 말하기 전, 헤사는 그가 로젤린에게 내밀고 있던 꽃다발을 채 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라, 마치 네스터가 헤사에게 꽃다발을 바치고자 얼굴을 붉히고 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네스터는 제 빈손을 쳐다보며 이 어이없는 기분을 소년에게 피력하고자 했다. 헤사가 그의 눈빛을 읽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네스터 경. 하지만 로젤린 경께서는 곧 호위 임무로 본성에 가셔야 하니, 제가 대신 잘 가져다 놓겠습니다.”
로젤린 경의 방이 아닌 어딘가에. 네스터는 이 들리지 않는 뒷말도 읽어 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쥐방울만한 게…….
로젤린은 헤사가 언급한 제 파트너가 누구인지 열심히 유추하는 중이었다. 딱히 들은 기억은 없지만, 헤사가 있다고 했으니 있는 것이리라.
네스터는 파트너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파트너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알 리 없으니 대답할 수도 없었다. 로젤린이 헤사를 바라보았다. 헤사는 방긋 웃는 얼굴 뒤로 당황스러워했다. 침묵이 길어질 즈음, 헤사는 저 멀리 걸어오는 빛나는 남자를 목격했다.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헤사의 뇌리에 한줄기 섬광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전하입니다!”
소년이 소리쳤다. 그리고 멀리서 걸어오던 전하, 리카르디스는 깜짝 놀랐다. 헤사가 확정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전하께서 로젤린 경의 파트너로 무도회에 가실 겁니다!”
“바로 그거야!”
리카르디스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헤사의 말을 받았다. 리카르디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자신이 말을 내뱉고도 좀 얼떨떨해했다. 헤사도 당황스러운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네스터는 한 남자와 한 소년의 미묘한 기류를 읽었다. 뭐가 좀 이상한데……?
리카르디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경례하려 하자 리카르디스가 가벼운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는 마치 전력으로 달려오기라도 한 듯,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땀이 그의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리카르디스는 건국의 달을 맞이해 한층 더 화려해진 상태였다. 아름다운 예복, 귀걸이, 목걸이, 반지. 갖은 장신구와 더불어 본래 가지고 있던 잘난 얼굴까지.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아름다움에 모두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햇살이 비친 땀 구슬이 영롱했다. 내리깐 눈동자를 덮은 속눈썹이 다이아몬드의 균열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건조한 입술을 혀가 느릿하게 쓸고 지나갔다. 붉은 입안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헤사는 제 나이에 이런 장면을 보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상급 기사인 로젤린은 훌륭한 23살로서 똑바로 리카르디스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잘게 떨고 있는 상태였다. 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움의 허용치를 넘어 버린 게 아닐까. 헤사가 막연하게 추측해 보았다.
어느 정도 그 가설이 맞는 것 같긴 했다. 로젤린이 떨리는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파르딕트에게 배운 ‘최고’라는 표현이었다.
“오늘따라 더욱더 눈이 부십니다, 전하!”
로젤린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격정적인 표현이었다. 마치 세기의 미술 작품이라도 보는 듯한 희열이 서려 있으니, 리카르디스도 머쓱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유혹을 흩뿌리고 있긴 했으나, 제 외모에 관해 아주 무지하진 않았다.
기분이 미묘했다. 그 목석 같던 자에게서 저런 반응을 이끌어 낼 정도라니. 요즘따라 부쩍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긴 하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고…… 마음이 복잡했다.
“제가 전하와 무도회에 갑니까?”
로젤린의 물음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곧은 시선에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꼈으나,
“듣지 못했나, 그대? 클로에가 전해 줬다고 들었다만.”
굉장히 매끄러운 연기를 펼쳤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깜박하며 헤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헤사가 남몰래 웃었다. 은혜 갚을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었다.
* * *
언제나 손님이 끊이지 않는 월장석 성이 레이몬드와 클로에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사람들로 한층 더 복잡해졌다.
큰뿔산양과 황금정원. 그 외에도 수많은 가문이 참석해 성이 북적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모르는 얼굴은 없었다. 경사스러운 날인 만큼 모두 웃는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은 아주 좋은 날이다. 이델라브힘의 가호가 미치는 것 같으니, 두 사람이 아주 오래오래 잘 살지 않겠느냐. 가벼운 다과와 함께 시작된 의례적인 대화들은 곧 미묘하게 흘러갔다. 만나기에 힘들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 오랜만이오. 건국의 달에는 처음인가. 건국의 달이라고 하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번에 하카브 왕자가 오지 않았습니까. 하는 식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주제가 무겁게 변했다. 예복을 입은 신부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왕자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움직임이 제한되는구만. 엘피디오 전하와는 자주 만나는 것 같긴 합디다.”
“굳이 따지자면 엘피디오 전하께서 하카브 왕자가 있는 성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죠. 하카브는 그다지 그들의 동맹을 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아요.”
방 안에 모여 있는 중년 남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카브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1황자 파에 속하는 귀족들과의 만남을 추진한다든가, 여기저기 다니며 분탕질을 친다든가 하는 행위가 일절 없었다는 얘기였다. 굵직한 행사에 얼굴을 비추긴 했으나 건국제에 참석한 타국의 귀족들이 으레 보이곤 하는 행보와 다름없었다.
적지에 발을 들일 정도의 거대한 음모나 목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강한 마인, 로젤린에게 한번 접근하려 했다지마는, 그 이후로는 접촉하려는 시도도 없다고 하지 않나. 또한 그들로서는 일국의 후계자가 단순히 로젤린만을 위해 갖은 위험을 감수한다는 가정을 도무지 떠올려 낼 수 없었기에 의문은 계속해 커져 가는 중이었다. 대체 무얼 원하는 것일까.
물론,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하카브가 정말 로젤린 한 명만을 위해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표면적으로 발타가 마력을 귀하게 다루는 나라이긴 했으나, 마력은 단순히 강한 무기의 역할만을 맡고 있지는 않았다. 축복의 밤. 죽어 가는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씨앗을 키워 꽃을 피워 내는 강력한 힘의 한 축이 아니던가. 만약 비밀을 알고 있다면 로젤린을 단순한 ‘강한 마인 한 명’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라베니아 고위 인사의 암살 같은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크게 눈에 띄는 구석이 없다 할지라도. 클로에가 팔짱을 끼고 발을 까닥였다.
“감시의 눈이 줄어드는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카브 왕자 쪽으로 빠진 호위를 유지하는 게 좋겠어요.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당분간 수고를 더 해 줘야 할 것 같네요. 부탁드려요, 나단 경.”
나단은 퀭한 눈으로 초콜릿을 섭취했다. 당이 부족한 기분이었다. 클로에가 생긋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모두 무운을 빌어요.”
“클로에 영애, 그대 또한.”
“무운을 빕니다.”
피곤해 보이는 중년 남자들이 동시에 초콜릿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들 당분에 목말라 하는 모습이었다. 큰뿔산양가의 하녀장이 급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영애, 준비를 서두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 저도 모르게 그만. 입고 있는 게 웨딩드레스인지 수의인지도 분간 못 할 만큼 정신없어서 말이에요.”
클로에의 농담에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하녀장만 크게 숨을 들이쉬며 기함했다.
“영애! 그런 무서운 농담을 하시다니!”
하녀장의 무서운 눈빛에 남자들이 분주히 얼굴 근육을 단속했다. 웃겼는데. 확실히 신부 입에서 수의라는 단어는 문제가 있나? 웃겼는데.
그들은 날카로운 눈살에 못 이겨 모두 응접실을 나갔다. 하녀장은 거울 앞의 클로에를 부지런히 단장했다. 클로에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신경 쓸 일이 끊이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여자가 피곤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똑똑. 열려 있음에도 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클로에는 고개를 돌려 예의 있는 방문자를 확인했다.
“클로에 양.”
“로젤린 경.”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로젤린의 손에는 하얗고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여기저기 흔하게 볼 수 있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잡초와 형, 동생 하는 정도의 취급을 받는 꽃이었다.
리쉬. 클로에가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로젤린의 소문을 수집하고 다닐 때가 생각났다. 그녀가 동생 칼릭스와 같이 꿀을 쪽쪽 빨고 다녔던 그 꽃. 반가움에 손이 먼저 나갔다.
“리쉬네요. 고마워요.”
로젤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맛있습니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었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 줄기 하나하나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했다. 하얀 레이스로 감싸긴 했으나 어정쩡하고 리본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꽃집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지?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어, 어이구우! 이렇게 귀한걸!”
클로에가 급하게 꽃다발을 쓰다듬자, 로젤린이 뿌듯해했다. 로젤린은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을 설명했다. 레이스는 어머니가 보내 주신 드레스에서 뜯었다. 리본은 저번에 레이몬드가 준 마카롱 포장지에 있던 건데 예쁘다. 리쉬 꽃은 월장석 성 정원에서 잘라 왔다. 정원사 아저씨한테 혼났지만 제일 활짝 핀 걸로 골랐다. 리본 묶는 건 헤사가 가르쳐 줬다. 로젤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했다.
이 작은 꽃다발에 그렇게 긴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클로에는 그녀의 말을 깊게 집중해서 들었다. 황금정원, 하카브, 1황자, 발타 어쩌고를 잠시나마 잊을 정도로.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탓에 클로에의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내렸다. 로젤린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굉장히 반짝반짝하고 예쁩니다.”
“어머, 그래요?”
클로에가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웃었다. 로젤린이 그녀의 은색 눈동자를 더 깊게 들여다봤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내가 기분이 좋았던가? 클로에는 잠시 생각했다. 우중충한 남자들과 골머리 썩는 말들을 했을 때만 해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쁠 것도 없었지만.
클로에는 리쉬 꽃다발을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약한 향기가 풋풋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집무실이었던 공간이 신부 대기실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을 하는 날이었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에, 그런가요? 라는 말 대신.
“그래요. 좋은 날이라.”
그렇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날이라서. 그 말에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 * *
이델라브힘께서는 그 빛 아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사랑은 깨지기도, 변하기도 하지만 결혼은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죽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위대한 이델라브힘께서 두 사람의 언약을 가호하시니, 사랑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맹세는 영원할 것입니다.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작위, 나이 따위로 분류되어. 이름이 상하 관계로 쓰이는 삭막한 관계는 더 이상 그만.
[신부] [신랑]
함께 발맞춰 걸어가겠다는 여러분의 다짐과 함께, 부부의 이름은 왼쪽, 오른쪽. 사이좋게, 나란히 놓이게 됩니다. 결혼하세요.
결혼은 인생의 중대한 행사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 하더라도, 그 순서를 되짚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신부와 신랑은 웨딩드레스와 정장을 입기 전, 하얀색의 예복을 먼저 입습니다. 호수에 해가 가장 빛나게 떠오를 때, 신부와 신랑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이델라브힘의 축복 아래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호수라고? 깊지 않으냐고요? 물론 깊습니다. 아니, 깊다니! 그럼 안 위험하냐고요? 당연히 위험합니다. 어릴 적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수영을 필수적으로 익히게 했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야 수영과 결혼의 상관관계를 유추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겠지만, 다 큰 여러분은 다 알 수 있을 테죠. 결혼식을 장례식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물에 빠지는 사고가 빈번했습니다. 죽는 사고도 가끔 발생하고요. 물론 익사뿐만 아니라, 마수가 결혼식에 난입한 사고까지 종합한 결과입니다. 여러 가지 위험을 배제하고자 최근에는 인공 호수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그래도 배우자가 될 분이 자연 호수를 고집하는 경우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영은 배워 두는 편이 좋겠군요.
신부와 신랑이 헤엄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는 가정을 하고 다시 결혼식 얘기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호수에 들어갑니다. 호숫가의 얕은 부분도 좋고, 깊은 중앙도 좋습니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르고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비출 때, 두 사람은 맹세합니다. 주고받아야 하는 언약문은 그다지 짧은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편도 아니니, 꼭 외워 두도록 합시다.
신의 이름 아래 하는 언약은 결혼식의 과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언약문은 무려 일라베니아의 역사와 함께한 글귀라고 합니다. 몇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 온 언약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영광의 일라베니아! 축복의 이델라브힘!
신관이 두 사람의 언약을 이델라브힘께 전달하면, 호수 밖으로 걸어 나오면 됩니다. 호수를 둘러싼 많은 하객들이 손뼉을 치며 축복하고 있을 겁니다. 신부는 젖은 예복을 벗고 웨딩드레스로, 신랑은 정장으로 갈아입으세요. 이제부터는 인간들의 축제이니! 서류에 대충 사인하고 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물론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해서 배우자의 죽음을 앞당기려 하는 분도 있습니다. 부디 여러분은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 * *
“이 약 파는 것 같은 책자는 뭐지?”
리카르디스는 총 세 장으로 구성된 작은 책자를 뒤적였다.
“최근 인공 호수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을 주도하는 어떤 상단의…… 상단주가 작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클로에 양이 결혼 준비하면서 받은 것인데 심심할 때 보면 아주 재밌다네요. 참고로 상단주는 세 번째 부인을 맞이했다는군요.”
리카르디스는 코웃음을 쳤다.
“배우자의 죽음을 앞당겨 맹세를 갈라 버리자는 내용이 더욱 와닿는군.”
월장석 성 내에 있는 호숫가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큰뿔산양, 푸른등불, 바다협곡, 고래무덤, 가을안개. 여러 가문과 더불어 몇몇 황족들까지. 상단을 이끄는 클로에는 물론이거니와, 레이몬드가 워낙 발이 넓은 덕이었다. 친분이 있는 몇몇만 초대했음에도 월장석 성의 후원이 가득 찼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사람들, 그 한구석에 이질적인 분위기의 무리가 있었다.
우중충한 남자들이 한 테이블을 끼고 인상을 찌푸린 채, 카드를 뒤적이고 있었다. 파르딕트와 큰뿔산양 후작가의 후계자 아렌트, 몇몇 익숙한 고위 귀족들이 보였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갈색 머리의 낯선 여자였다. 그녀가 패를 펼치자마자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시시덕거리며 금화를 쓸어 모았다. 누가 봐도 도박판이 아닌가.
돈이 다 떨어졌는지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그 남자에게 가려져 있던, 그 누구보다 카드 게임을 즐기는 중인 4황자이자 현 대신관 라헤안시를 발견했다.
“왔다! 왔어! 으헤헤!”
아주 집안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있었다.
“다 받고, 칩 몽땅 들어갑니다! 쫄리면 패 덮으시든가, 으헤헤헤!”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기양양하던 라헤안시는, 정확히 십 초 뒤에, 아까 전의 여자에게 모든 돈을 내어 줘야만 했다. 라헤안시가 훌쩍훌쩍 울자 따라온 신관들이 양산을 펼쳐서 그를 가리고자 노력했다. 대신관이라는 인간이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꼴이 수치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산에 신전 표식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어 그들의 노력은 도루묵이 되었다.
여자는 담배 피우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금화들이 전부 그녀 앞에 쌓였다.
그녀가 다시 미친 듯이 판돈을 올렸다. 좋은 패를 잡았구나 싶어 모두들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항복했다. 결과적으로 여자는 그 판을 먹지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그녀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여자가 떠난 도박판. 라헤안시가 그녀의 패를 뒤집어 봤다.
“투, 투 페어?”
고작 투 페어로 올 인을 한다고? 무시무시한 블러핑의 대가였다. 모두들 떠난 그녀의 자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세상이 형성된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디에즈는 5황녀 레이비아와 7황녀 체리트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의 가슴과 허리쯤에 오는 작은 황녀들이 디저트를 먹겠다고 디에즈를 잡아끌었다. 디에즈는 무력하게 끌려갔다.
지방 영지에만 있던 황금정원 자작도 보였다. 서른 넘게 결혼하지 않는 장녀에 대한 걱정을 훌훌 털어 버린 표정이었다. 식은 시작도 안 했건만, 누가 제 딸의 결혼식이 아니랄까 봐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그의 퉁퉁한 배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황금정원 자작 부인이 남편의 흥건해진 배를 보고 깔깔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하얀 예복을 입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하얀색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관.
두 사람의 영원한 맹세를 이델라브힘께 전달할 신관 역할은 리카르디스가 맡게 되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두 신하가 맺는 혼인인 만큼이나 리카르디스가 먼저 주례를 자처했다.
클로에는 좀 불만스러워했다. 신부가 주인공인 결혼식에 리카르디스가 더 예뻐서 눈에 띈다는 이유였다. 물론 리카르디스는 농담인 줄 알고 넘어갔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오랫동안 귀에 머물렀다. 식이 시작할 때였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월계수 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호숫가로 발을 옮겼다. 라헤안시가 쪼르륵 뒤따라와 그에게 성전을 건넸다.
“내 거 써, 형. 무려 대신관님의 성전이라고. 특별히 형에게만 빌려줄게”
그가 꼴 보기 싫을 정도로 으스댔다. 리카르디스는 받은 성전을 곧바로 라헤안시의 뒤에 서 있던 신관에게 돌려줬다.
“잇세리온, 내 것을.”
“예, 전하.”
어디서 도박하고 온 손으로 과자 기름 묻어 있는 성전을 건네주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의 앞날에 흙탕물을 끼얹고 싶어 작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라헤안시는 축 처져 하객들 사이로 돌아갔다.
모두 호숫가로 모였다. 성에서부터 호수까지 하얀 천이 길을 인도하고 주위는 꽃으로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신부와 신랑이 손을 잡고 나올 때였다. 성의 문이 열렸다.
“……?”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신랑과 신부는 어디 갔는지,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구기고 있는 로젤린만 보였다. 햇살에 눈이 부셔 찌푸리고 있는 것은 알겠지만, 순간적으로 움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도 흠칫했을 정도였다.
로젤린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가 들러리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은 친분이 있는 어린아이들이 귀엽게 차려입고 신부와 신랑이 가는 앞길에 꽃을 뿌렸다. 때문에, 이렇게 건장한 데다가 무표정한 들러리는 하객들로서도 최초였다.
로젤린의 코가 잠시 움찔거렸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만 눈치챘다. 먹고 싶은 걸 참고 있구나. 훌륭하다 로젤린.
로젤린이 발걸음을 옮기며 꽃을 뿌렸다. 던지는 솜씨가 좋아 가벼운 꽃잎들이 사방으로 잘 흩어졌다. 그녀의 뒤로 새하얀 예복을 입은 신랑과 신부가 등장했다. 두 사람이 로젤린의 뒤를 따라 호수를 향해 걸었다.
클로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반면에 레이몬드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인해 그의 예복이 마구 흔들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꼬집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파르딕트는 어허헉 웃으면서 저 꼴을 보라며 비웃다가 나단에게 눈총을 받고는 곧 제 입을 단속했다.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찬송가였다. 인간의 모든 생, 모든 일은 신이 주관하므로.
부서지는 햇살이 찬란하게 두 사람을 축복했다. 신부의 볼이 과일처럼 싱그러웠다. 레이몬드는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표정을 일그러트리다가 종국에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8년 짝사랑, 4년 연애 기간의 결실이 눈앞에 보이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클로에는 아이고 못살아. 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띠고 제 예비 남편을 바라보았다.
콧물 줄줄 흘리며 우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본 파르딕트는 바닥에 엎어져서 울듯이 웃었다. 나단이 참지 못하고 그의 등을 매섭게 때렸다.
두 사람이 발을 멈춘 호숫가 옆에는 리쉬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 건국력 589년, 달은 기울고 이델라브힘의 광휘가 떠올랐으니, 호수로 찾아온 두 사람을 축복할 때이다.”
그의 말에 답하듯 레이몬드와 클로에가 잠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그의 빛 아래에 한 날, 한 시. 언약을 맺고자 하는 자는 누구인가.”
클로에가 싱긋 웃었다.
“이델라브힘의 딸. 일라베니아의 딸. 황금정원의 첫 번째 딸. 사람과 사람의 유대로써 황금의 꽃을 피우는 자. 클로에 일립소가 영원한 사랑을 찾아왔습니다.”
레이몬드는 아직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붉어진 눈가를 슥슥 쓸던 레이몬드가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이델라브힘의 아들. 일라베니아의 아들. 큰뿔산양의 두 번째 아들. 위대한 안디 산맥의 절벽을 건너뛰는 용맹함을 지닌 갈색산양. 레이몬드 안디가 영원한 사랑을 맺고자 합니다.”
스스스, 바람이 불어 월계수의 잎을 스쳤다. 호수가 푸른 하늘과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았다.
* * *
로젤린은 처음 본 결혼식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호수에 들어간 두 사람이 서로 언약문을 주고받고, 마지막에 리카르디스의 성력이 두 사람을 비췄다.
호수의 표면에는 태양과 리카르디스의 성력이 아른아른하게 겹치며 마치 두 개의 태양이 하나가 되는 듯한 광경이 그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봐도 어딘가 엄숙하고 마음속에 깃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금정원 자작은 위험할 정도로 울다가, 부인이 건네주는 초콜릿을 먹었다.
짧은 예식이 끝났다.
흠뻑 젖었던 클로에와 레이몬드는 웨딩드레스와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잔잔한 찬송가도 축제에서 들릴 법한 신나는 음률로 바뀌었다. 두 사람의 언약을 지켜볼 때의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어디 가기라도 한 듯이 모두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폭탄주를 제조해서 레이몬드에게 다가갔다. 짓궂은 표정의 기사들은 그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새 신부에게 막혔다.
“어머. 세상에. 우리 허니버터캔디가 들어가서 헤엄쳐도 될 만한 어마어마한 양이네요.”
기사들이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몬드의 별명이 허니버터캔디라는 것은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고래무덤의 남자들은 대단한 말술이라지요. 찔끔찔끔 마시는 치졸한 짓은 안 한다고.”
“잘 아시는군요, 부인! 고래무덤의 남자들은 정말 고래처럼 들이마시지요!”
파르딕트가 껄껄 웃었다. 클로에는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 보며 수줍게 웃었다.
“보고 싶네요.”
“예?”
“고래처럼 마신다면서요? 보고 싶어요. 제가 고래는 본 적이 없어서.”
어라. 뭔가 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했으나 파르딕트는 자신이 들고 온 폭탄주를 단숨에 들이켜야만 했다. 새 신부가 보고 싶다는데,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독주가 많이 들어가 있었던 탓에, 파르딕트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어느 구석에서 쓰러져 있어야 했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던 로젤린이 밟고 지나가도 일어나지 못했다.
하객들은 결혼식의 유물 같은 새 신랑 괴롭히기를 할 수 없었다. 웃는 얼굴 뒤로 무시 못 할 압력을 내뿜는 다람쥐 같은 새 신부 때문이었다. 허니버터캔디는 우유푸딩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몬드.”
“전하!”
요즘 통 볼 수 없던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디에즈를 보고 반색했다. 주위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못했다. 디에즈가 리카르디스와 반하는 여러 세력과 얽혀 있음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이몬드도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부관으로서,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디에즈가 단독으로 하카브와의 접선을 했다는 정보를 들은 순간부터, 레이몬드는 완벽하게 그를 적으로 인식했다. 수년 동안 그래 왔듯이 환한 미소를 보인 것은 실수에 가까운 일이었다. 등을 돌렸다 하더라도 오랜 친구를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레이몬드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제 어수룩함이 씁쓸해, 어색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결혼.”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합니까.”
디에즈가 멀리서 하객들과 얘기를 나누는 클로에를 한번 보더니 다시 레이몬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랜 염원 아니었습니까. 앞으로 행복만 가득하길 이델라브힘께 간절히 빌겠습니다.”
디에즈는 두 손으로 레이몬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손길이 따스했다. 금색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미소는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오랜 친우의 경사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레이몬드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입가가 어색하게 떨리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그는 우헤헤 소리를 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렇습니다. 내 오랜 염원! 진짜 행복해서 죽을 것 같네요.”
“벌써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밤까지는 살아 있어야죠.”
디에즈가 천사 같은 얼굴로 엉큼한 농담을 했다. 레이몬드는 그의 옆구리를 제 팔꿈치로 쿡 찌르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디에즈는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다며 황족 상해죄로 체포하겠다고 정색했다. 가엾게 여겨서 오늘 밤은 넘기게 해 준단다. 두 남자가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렸다.
이 평화는 한때에 불과했다. 폭풍이 오기 전야. 그 고요함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란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정세가 흐르며 격류와 같은 것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디에즈 또한.
레이몬드는 직감했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과 디에즈가 함께 있다면, 그 장소가 어디건 간에 필히 전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이리라고.
레이몬드가 디에즈를 와락 안았다. 디에즈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잔잔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레이몬드는 그를 숨 막힐 정도로 꾹 안았다.
이, 바보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하고 등을 후려칠 수 있는 때로부터는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사나운 눈초리들이 주위를 배회했다. 칼릭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입 크기의 음식을 집어 먹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붉은수레바퀴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진흙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가장 끈질긴 눈빛을 보내는 젊은 귀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바다협곡 백작의 삼남인가 사남인가 하는 자였다. 남자는 일순 움찔했으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제 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폈다.
칼릭스는 입안에 있는 음식을 씹으며,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납고 집요한 시선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끈기 없기는.’
칼릭스는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에서 잔을 집었다. 서늘한 온도가 느껴졌다. 유리잔 하나까지 차갑게 해 두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물 자국 하나 없는 표면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이 차가운 온도에 녹아들었다. 칼릭스는 태연하게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월장석 성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감당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큰뿔산양과 황금정원의 행사였으니, 당연히 하객의 98%는 2황자 파였다. 중립도 간간이 보였으나 1황자 파에 속하는 가문은 자신뿐이었다.
“우리 로젤린…….”
옆에 있는 자그마한 여자가 우는 시늉을 했다.
“동생이 친구가 없는 걸 알고 있을까?”
“오늘은 시비 안 걸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짙은 갈색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린 마카롱이 눈을 크게 뜨고 깜박였다.
“이건 시비가 아니라 진실인걸……?”
약속을 지킬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쯤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나오는 한숨을 와인과 함께 넘겼다.
오늘 아침, 칼릭스는 결혼식에 갈 준비로 분주했다. 레이몬드로부터 받은 초대장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 라고 생각하고 있을, 아, 그냥 의례적으로 보낸 거겠거니 하며 건조하게 초대장을 무시하고 있을, 한때는 내 수습 기사였던 로젤린의 동생, 칼릭스 경에게 진심을 담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