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4화 (20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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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입술의 감촉이 볼 위에 오래 머물렀다. 실제로는 이 초 가량이었으나 엘피디오는 그에 배가 넘는 시간이라 느꼈다. 참아 보려 해도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마치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이 찧은 사람 같은, 짜증과 고통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하카브는 그런 얼굴을 보고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하카브 왕자.”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엘피디오 황자.”

리카르디스보다도 생생한 반응이라 재밌었다. 엘피디오의 석영 성. 그 화려한 응접실에 두 나라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들이 마주 보고 앉았다.

“무투 대회는 어떠셨습니까?”

“말로만 듣던 일라베니아의 무투 대회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잠도 설쳤습니다. 과연 부족한 수면이 불만스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경기들이었습니다.”

하카브의 반짝이는 눈은 엘피디오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경기의 내용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엘피디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마지막 결승전만 아니라면 훌륭한 경기가 많았다. 로젤린의 존재 때문에 참가자들 대다수가 검증된 강자들이었고, 자연스럽게 무투 대회의 수준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결승전 후, 황제에게 검을 하사 받는 로젤린의 모습은 무척이나 멋졌다. 엘피디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 독수리가 경기장을 둥글게 휘젓고 바람을 일으켰다. 이델라브힘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위엄 어린 등장이었다. 기분 좋아진 황제가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모습을 생각하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리카르디스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한심한 인간 같으니…….

엘피디오의 눈이 사나워졌다. 하카브는 조용히 분노를 곱씹고 있는 엘피디오를 바라보았다. 눈과 얼굴에 욕망이 비쳤다. 욕망 또한 생각의 일부. 이렇게 생각을 내보이는 자가 쉽지 않을 리 없다. 하카브가 이를 보이며 시원하게 웃었다.

“로젤린 경의 무위는 말로만 전해 들었습니다. 눈으로 보니 더욱 대단하더군요. 일라베니아 제국의 미래가 환하게 빛나는 걸 본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지금 이 자리에 다른 누가 있다고 이렇게 금칠 중인거지? 엘피디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먼저 얘기를 꺼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쪽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엘피디오는 기어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 그대로 아쉬운 쪽은 하카브가 아니라 엘피디오였다.

“발타의 사절단 일로 큰 사고를 당한 내…… 동생. 리카르디스가 최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어 형으로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근심이 뿌리 뽑힌 것은 아니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군요. 검은달이 언제쯤 다시 뜰는지…….”

그러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하카브 쪽으로 옮겼다.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호탕하게 웃던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미소였다.

“검은달이라…… 그들도 피해가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강대한 마인이 일라베니아에 있으리라곤 예상도 못한 것 같더군요. 하하, 같은 일라베니아 사람들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요. 그래도 그렇게 철저하게 숨긴 덕에,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난 듯합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엘피디오가 이를 갈았다. 네 정보가 부족한 탓이 아니냐. 네 옆집에 마인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뭐 했느냐 타박을 받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셨지요. 그러나 습격대를 물리쳤다고는 해도, 검은달은 건재하지 않습니까. 치밀하고 끈질긴 집단이니 고작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국의 황자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크나큰 일을 벌인 자들인 것을요. 그게 실패로 돌아간 이상, 당분간은 정황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닐까요. 대륙의 모든 눈과 귀가 검은달을 주목하고 있을 테니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제 살만 깎아 먹는 꼴이 되리란 걸 알겠지요. 그들의 우두머리도 머리를 달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는 머리가 없구나. 엘피디오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이 시기에는 타국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만큼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 괜히 염려되어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기회! 하하. 좋은 말입니다.”

일라베니아까지 기어 들어왔으면 뭐라도 해 보라는 말에 엉뚱한 반응이 나왔다. 엘피디오가 미간을 좁혔다.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하카브는 기회! 기회. 중얼거리며 무릎을 치기도 했다. 찰랑이는 금빛 장신구가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욕망이 일렁였다. 엘피디오가 의문을 가질 정도의 적나라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황자.”

하카브는 엘피디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탁자 언저리에 맴돌았다. 하카브가 느릿하게 제 턱을 쓸었다.

“저는 기회를 얻으러 온 겁니다.”

하카브의 눈이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경기 모습을 그리던 때와 마찬가지로.

* * *

“아름다우세요.”

거울 속의 로젤린이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헤사가 작은 거울을 들고 와 뒷모습도 비쳐 주었다. 머리카락이 머리 뒤통수에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사이사이 땋은 머리들이 같이 묶여 있는 게 멋스러웠다.

오늘의 머리도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도 제 머리에 철썩 맞지 않을 것이다. 로젤린이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이자 헤사도 웃으며 끄덕였다.

헤사가 온 이후로 로젤린의 머리 모양은 다양해졌다. 땋기도 하고, 가르마를 바꾸기도 하고, 반 묶음을 해 보기도 하고, 뜨거운 인두를 들고 와 머리를 펴기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시녀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업무며, 검술이며, 성에서의 생활이며 배울 것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는지.

피로한 소년의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년은 우와 우와 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피곤함도 싹 잊은 듯이 행복하게 웃었다.

지켜보던 레티시아가 감탄했다.

“나보다 솜씨가 훌륭해.”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서요.”

레티시아가 손을 내밀자 해사가 짝 소리 나게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선임 두 명과 헤사는 처음보다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다. 하급 기사가 된 두 명은 괜한 텃세 따위를 부리지 않으며 동생처럼 그를 대했다. 로젤린 이외의 사람에게는 벽을 세우던 헤사도 점차 딱딱함을 허물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에버하르트와는 티격태격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귀여운 장난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하 웃던 레티시아가 무섭게 표정을 바꿨다. 손에는 소매에 가려져 있던 뭉툭한 나무 단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로젤린의 목덜미를 향해 나무 단검이 쇄도했다.

로젤린은 고개만 까딱해서 뒤에서 오는 공격을 피했다.

레티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려찍었다. 어깨 쪽이었다. 로젤린은 휙 몸을 돌려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바깥쪽으로 크게 돌렸다.

“악!”

근육의 뒤틀림을 따라 레티시아의 몸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완전하게 등을 보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어진 나무 단검을 낚아채, 그녀의 목에 바짝 갖다 대었다.

레티시아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졌습니다.”

풀려난 레티시아가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거울 앞에 있는데 공격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 보이는데.”

“설마 거울을 앞에 두고 공격하겠냐는 허를 찔러 보려 했습니다만…….”

“안 하는 게 좋겠군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로젤린은 그녀를 거울 앞에 앉혀, 위치가 뒤바뀐 상태로 아까의 상황을 재현했다.

“이렇게 하면 보이니까.”

로젤린이 레티시아의 뒤로 숨었다. 거울에 얼굴은 비치지만 몸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이 상태로 찔러야 효과가 있을 거고.”

그녀가 나무 단검으로 레티시아의 공격을 그대로 흉내 냈다.

“팔이 움직이는 게 보여 경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오른손보다는, 왼손으로.”

왼손이 은밀하게 레티시아의 목 뒤를 찔렀다. 거울로 보아도 완전한 사각이었다.

“그리고 레티시아 경은 말을 끝낸 후에 공격을 하셨는데 좋지 않습니다. 웃음이 끊기는 지점, 말이 끊기는 지점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딱 좋으니, 기왕이면 말을 하는 도중 시도하는 편이 성공률이 높을 겁니다.”

“아…… 부족했습니다.”

“또한, 몸이 움직이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미묘한 변화를 예상하고 조절하면 좋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헤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검술 훈련이라기보다는…… 마치 암살 훈련?

로젤린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하급 기사로 승급하자마자 훈련 내용을 조금 바꾸었다. 로젤린의 습격을 막는 훈련은 그대로 두되, 그들 또한 로젤린을 공격하는 것으로.

정공법으로 상대가 될 리 없었기에 로젤린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두 하급 기사의 몸짓은 미묘하게 암살자를 닮아 가는 중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 했던가. 정확하게 아는 만큼 보이기 시작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아, 빈틈.”이라던가 “지금이면 죽일 수 있어.” 따위를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공격하기 쉬운 최적의 상황과 때를 깨우쳐 갔다. 무고한 하인 몇 명과 기사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상황이 발생한 후, 두 사람은 무심코 말을 흘리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헤사 또한 제 선임자들이 그러했듯, 하루에도 몇 번씩 습격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로젤린뿐만 아니라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에게도. 하지만 헤사는 예전의 아기 사슴 같던 그들보다는 훨씬 훌륭한 야생의 감을 가지고 있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공격은 10에 8을 막고, 로젤린의 습격도 높은 수준으로 알아챘다. 막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긴 했지만.

헤사에게 부족한 부분은 정통 검술이었다. 로젤린은 자신도 처음에는 그랬다며 그를 위로했다. 기초 검술을 레이몬드에게 배웠다고 하니, 옆에 있던 레이몬드가 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 했다. 마침 지나가던 큰뿔산양 후작이 자신은 선대 후작에게 배웠다고 해서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저 기초에 불과한 검술이 몇 대째 내려오는 가문의 대단한 비법처럼 탈바꿈되었다. 헤사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대 큰뿔산양 후작님께 누가 안 되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후작이 흐뭇해하며 헤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갔다.

이상하게 제 가문이 엮여 버린 레이몬드는 로젤린과 함께 헤사를 열심히 가르쳤다. 덕분에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더 암살 훈련인지 뭔지를 반복하던 로젤린과 레티시아는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 있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훈련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헤사도 덩달아 놀라 로젤린이 챙겨 가야 할 간식 바구니를 잽싸게 챙겼다.

“다녀오세요, 로젤린 경. 레티시아 경.”

소년은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공간이 조용해졌다. 헤사는 뻑뻑한 눈을 몇 번 비비고, 여기저기 굳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팔을 위로 쭉 늘렸다.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정을 몇 주간 반복하다보니 피로가 축적된 듯했다.

‘아!’

주방에 잼을 졸여 둔다 올려놓고는 깜박했다! 헤사는 황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헤사는 빠르게 업무를 익혔다. 로젤린에게 맡겨진 일부터 시작해, 그녀의 머리 모양을 어떻게 다양하게 예쁘게 할 것인가에 이르는 소소한 일까지.

꽉꽉 짜인 하루 24시간 중 뺄 수 있는 시간은 수면 시간뿐이었으니, 최근 줄어든 잠과 반대로 실수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레이몬드가 로젤린에게 선물한 찻잔을 깨트리기도 했고,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려 그녀의 상심한 표정을 보기도 했다.

이번 잼을 졸일 때에도 로젤린이 뒤에서 서성이면서 기대하는 티를 팍팍 냈는데, 이것마저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젤린이 울상을 지으며 탄 밑 부분은 그대로 두고 위의 잼을 떠먹으려는 장면이 연상되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헤사는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발타에서 온 사절단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여기는 손님들이 머무는 성과 한참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마력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무거운 족쇄가 끊긴 것처럼 가벼워져, 바닥을 딛는 간격이 넓어지고 빨라졌다. 돌아서 가야 하는 길도 벽을 타고 훌쩍 넘었다.

바닥에 착지해 앞으로 뛰어나가는 그 순간. 헤사는 바로 뒤에서 덮칠 듯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으나 그보다도 뒤에 있던 사람이 헤사를 찍어 누르는 것이 먼저였다.

퍽!

얼굴이 바닥에 세게 부딪혀 머리가 울렸다. 입이 가려지고 뒷목을 잡힌 채 짓눌렸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식은땀부터 흘렀다. 떨고 있던 헤사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이 내뱉는 것은 아니었다.

저벅. 누군가가 가까이 걸어왔다. 얼굴 위로 남자의 그림자가 크게 드리웠다. 헤사는 자갈 위를 기어가는 개미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코앞에 신발이 보였다. 일라베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 아니었다.

“이런, 놀랐나 보구나.”

자상한 목소리였다.

“풀어주어라, 아순.”

등 뒤에서 압박하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헤사는 덜덜 떨며 바닥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황금빛의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가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멀리서나마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발타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악!”

하카브가 헤사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불쑥 일으키자 소년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얼굴이 조금 상했구나. 괜찮느냐.”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칠게 다뤄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도 놀라서 말이지.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을 보게 될 줄이야.”

하카브는 헤사가 친한 동생이라도 되는 듯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볼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헤사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깜박 거리기만 했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맞기는 한 것 같은데. 나쁜 놈, 죽일 놈, 무서운 놈이라는 평가와 대비되는 행동을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긴가민가했다.

“어린아이가 고생 많이 했겠구나, 이곳은 마인들에게 사나운 곳이니 말이다.”

사탕이라도 주며 꾀어낼 것 같은 상냥한 말에 헤사는…….

‘무슨 헛짓거리지?’

전혀 넘어가지는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보다 웃으며 접근하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헤사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소년의 경계를 읽은 하카브가 씩 웃었다.

“우선적으로 할 얘기부터 해 볼까……. 헤사 군.”

알려 준 적 없던 이름이 낯선 이의 입에서 나왔다. 헤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오늘은 수도에 있는 큰뿔산양 후작의 저택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창문을 열어 두니 마차 안으로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왔다. 로젤린은 창문 턱에 팔을 건 채 밖을 구경했다.

기분 좋아 콧노래를 부르니 레이몬드가 엉망진창인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사슴 고기 스튜, 버터크림 샌드위치, 과일 소스 스테이크, 어쩌고저쩌고. 음식의 이름을 나열했을 뿐인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실력 덕분에 훌륭하기까지 했다. 마차는 엉터리 노래에 맞춰 춤을 추듯 덜컹이며 달렸다.

큰뿔산양의 저택은 웅장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고풍스러운 감은 있어도 세심하게 관리되어 도리어 그게 멋스러웠다. 그 앞에 펼쳐진 정원에는 분수와 화단이 촌스럽지 않게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을 반기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수도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저택을 떠올렸다. 정말 구색만 맞춘, 큰 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큰뿔산양 저택이 예뻐 부러웠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이 구경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아니 신나서 그녀를 끌고 다니며 설명했다.

중앙에 큰뿔산양 동상이 하나 있는데, 뿔 한쪽만 새것이었다. 이거 내가 어릴 적에 타다가 부러트려서 이 부분만 새로 해서 붙였잖아. 하고 레이몬드가 낄낄거렸다. 로젤린도 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레티시아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안 됩니다.” 하고 정색했다. 레이몬드도 그녀의 의중을 깨닫고 나서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미련이 남은 듯 큰뿔산양 동상을 주시하는 로젤린은 두 남녀에게 질질 끌려갔다.

집사와 하녀장, 하녀와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큰뿔산양 후작가는 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역사가 깊은 후작가에 어울리는 점잖은 태도였다.

펑!

레티시아는 감탄하다가 갑자기 터진 굉음에 비명을 질렀다.

“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꽃잎과 종이 조각이 2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레티시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꽃비를 아연하게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1층으로 옮겨 왔다.

아까까지 점잖게 두 손을 앞에서 모으고 있던 하녀와 하인들이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악기를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철컥철컥 박자를 쪼개는 금속 악기도 있었다. 사용인들은 몸을 들썩이고 머리를 휘둘러 가며 격렬하게 연주했다. 광란의 음악 연주회 한가운데 로젤린과 레티시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저 위의 계단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내려왔다. 레이몬드와 꼭 닮은 남자였다.

노래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복식을 한 여자와 남자들이 화음을 쌓으며 등장했다. 눈 감는 것 하나, 팔을 뻗는 동작 하나하나가 똑같은 것으로 그들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로젤린에게 화관을 걸었다. 노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레티시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레, 레이몬드 부관님.”

레티시아가 애타게 상사를 찾았다. 당신의 집이니 당신이 좀 어떻게 해 보라는 간절한 뜻이 담겨 있었다. 종이 조각과 꽃잎으로 시야가 어지럽고, 가득 찬 악기 소리가 시끄러워 정신없었다. 한참 둘러보던 레티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었던 레이몬드는 하인들 사이에 끼어서 신나게 연주 중이었다. 레티시아의 시선을 느낀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했다.

“아, 우리 형.”

전혀 알아채지 못했구나. 레티시아는 탄식했다. 누군지 궁금했던 게 아니라, 아니. 누구라고? 우리 형?

레티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연극배우나 가수가 입을 법한 의상은 화려하다 못해 요란할 정도였다. 노래 실력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 레티시아는 그가 이 환영 행사를 위해 고용된 가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가 큰뿔산양 후작의 장남, 아렌트였다니. 레티시아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한 가문의 후계자가 왜, 저러고 있어……?

아렌트는 레티시아를 발견하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꽃을 그대로 잡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 싫어. 레티시아가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슬그머니 물러났으나,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다. 아렌트는 기어코 레티시아의 귓가에 꽃을 꽂아 주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만 깜박이고 있던 로젤린도 손뼉을 치며 즐기고 있었다. 적응력이 경이로웠다. 레티시아는 존경의 눈으로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아렌트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계단에서 내려왔던 여자들이 로젤린을 둘러싸며 춤을 췄다. 장신구의 짤랑이는 소리가 화음에 녹아들었다. 로젤린이 웃으며 그녀들과 함께 춤을 췄다.

“로젤린 경……!”

과연 무예의 기재! 반복된 춤사위를 그새 외우고 완벽하게 추고 계신다. 헤사가 봤으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에 저장했을 광경이었다. 저택의 입구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무대는 끝을 향해 달렸다.

레이몬드는 기분이 고양된 것인지 무릎을 꿇고 이로 만돌린을 연주했다. 훌륭한 솜씨라서 더 어이없었다. 금속 악기가 차르르르 울리며 노래가 끝났다.

“환영합니다, 손님!”

다들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머리에 꽃잎을 덕지덕지 단 채로 박수쳤다.

“감사합니다.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었다. 레티시아만 빼고. 아렌트가 으하하 웃으며 다시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서들 오게, 어서들 와! 오랜만의 손님이라 다들 신났지 뭔가!”

“갑작스런 방문에도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손님은 언제나 반갑지. 오랜만이로군, 로젤린 경. 요만할 때 봤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아렌트가 제 가슴께에 가상의 선을 그으며 얘기했다. 지금의 로젤린 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수준이었다. 아마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일 적에 봤던 모양이었다.

후에 레이몬드가 말해 줘서 알게 된 사실은, 둘 다 리카르디스의 아래에 있다 보니 제법 자주 만났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로젤린이 사냥 대회에서 사고를 당하기 바로 전에도 만났다고 했다. 불과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이고, 십 대 후반 들어 성장이 멈췄으니 아렌트가 말한 ‘요만한 때’가 마지막일 리 없었다.

아마 그의 기준에서 작달막한 소녀가 쪼르르 돌아다니며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이리라 레이몬드는 추측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로젤린과 언제 만나든 번번이 “로젤린 경. 많이 컸군. 요만했었는데.” 하면서 손녀 보는 할아버지같이 굴었다고 했다.

그걸 모르는 로젤린은 ‘로젤린’이 요만할 때에 그와 만났겠거니 생각하며 아렌트의 인사를 받았다. 그의 짙은 나무 색 눈동자에 호의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아렌트는 레티시아에게 아까 자신의 순발력이 어땠냐며 물었다.

“손님이 한 명 더 오는 걸 몰라서 화관을 하나만 준비했지 뭔가! 내가 아까 떨어지는 꽃을 공중에서 잡았을 때, 크으… 좀 멋지지 않았나?”

“……네.”

“뭘 좀 아는 친구로군, 으하하!”

아렌트가 다시 한 번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레티시아는 체한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웃었다.

레티시아는 그때서야 떠올렸다. 그녀의 가문인 서리나팔이 변두리의 작은 영지라 미처 접점이 없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큰뿔산양 후작가의 유별난 가풍은 유명했다. 흥도 많고 음악도 좋아하는 집안이라 주기적으로 공연을 펼치는 것은 예사였다.

레티시아는 이곳이 큰뿔산양 영지의 성이 아님에 감사했다. 만약 그곳에 방문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달 동안 여행길에 올랐던 손님을 붙잡고 장장 세 시간의 축하 공연을 펼쳤다던가. 오싹했다.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레이몬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래 부르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잠시 사라졌던 아렌트가 화려한 무대의상을 벗고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왔다.

“형, 어디가려고?”

“황성에. 아버지가 점심 전까지 오랬는데 손님이 온대서 기다렸지 뭐냐, 으하하!”

“으하하학, 완전 지각이네!”

안부터 밖까지 아주 쏙 빼닮아 있었다. 두 사람은 정말 누가 봐도 형제였다. 하인과 하녀들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과 꽃을 치웠다. 작은 조각들이라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박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안 뿌리면 되잖아.’

레티시아는 잠시 머리를 쓸다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넘겨 버렸다. 귓가에 꽂힌 한 송이 꽃은, 고민하다가 제복 상의의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넓은 응접실에는 이미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그마한 여성, 황금정원의 클로에였다. 레이몬드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볼에 입 맞췄다. 기사단 내에서도 장신인 레이몬드의 품에 클로에가 쏙 들어갔다.

“내 부드러운 우유푸딩.”

“내 달콤한 허니버터캔디.”

“……”

레티시아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상사의 연애는 눈앞에서 보고 싶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처음 보는 농도 짙은 애정 표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얼마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레티시아가 그녀의 눈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클로에는 레이몬드에게 반쯤 안긴 상태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어서와요. 집안이 어수선한 상황이라 손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네요. 무례를 용서해요.”

레티시아는 오싹했다. 그 대단한 환대 공연이 제대로 맞이한 게 아니었다니. 로젤린이 가볍게 묵례했다.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에 양.”

“감사합니다, 영애.”

클로에가 눈을 접으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적막에 의문이 들 때쯤 클로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아픈 곳은 없나요?”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아까보다 더 환하게 미소 짓는 클로에의 표정에서 로젤린은 그녀가 자신에 대해 쌓아 왔던 걱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른가시나무 백작 성에 있을 당시에 치료에 쓰였던 귀한 약초들은 전부 클로에가 보내 준 것이었다. 입에 쓰고 맛도 없어 슬쩍 버리고 싶었으나, 약과 함께 동봉된 편지를 읽고서는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예쁘고 단정한 필체. 조곤조곤 안부를 묻는 평범한 내용에서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클로에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시피 했더라도.

그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마치 그 편지의 필체와 내용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 같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인사를 나누는 사이 테이블 위에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아 보이는 다과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레이몬드는 결혼 준비로 자리를 떠야만 했다. 결혼식이 코앞임에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보는 약혼녀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이몬드는 풀죽은 강아지처럼 계속 뒤를 돌아봤다. 결국 클로에가 일어서서 뽀뽀도 해 주고 엉덩이도 두드려 줘야 했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로젤린은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레티시아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봐도 괜찮은 건가 이거.

클로에가 레이몬드를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로젤린은 쿠키를 먹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먹고 싶은 마음이 어디 가지는 않았기에 손에 들린 쿠키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클로에 양, 하나만 여쭤 보아도 됩니까?”

“어머, 그럼요.”

“방금 전에 레이몬드 경과 입을 맞춘 것은 어째서인지.”

클로에는 다시 “네?” 하고 되묻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니까요.”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렇게 입을 맞춥니까?”

역시 못 보게 했어야 했는데! 레티시아는 로젤린과 클로에를 번갈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에요. 키스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든요.”

로젤린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클로에는 매끄럽게 대응했다.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상냥함이 비쳤다.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마에 하는 입맞춤도 비슷한 겁니까?”

클로에는 눈을 빛내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거리상으로 많이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으나 느낌상으로 더 좋은 청중의 태도가 되었다.

“이마에 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어요. 누가 경의 이마에 키스했나요?”

레티시아가 로젤린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눈동자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로, 로젤린 경…… 대체 누, 누가…….”

클로에는 눈짓으로 레티시아에게 타박을 줬다. 그래 가지고는 잘도 말하겠다는 식이었다.

로젤린은 방 안의 분위기를 대충 눈치챘다. 하카브 왕자가 볼에 뽀뽀했던 때에도 다들 무척 화내지 않았던가. 지금도 약간 그런 게 아닐까? 대놓고 말하면 혼나거나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로젤린이 머뭇거리자 클로에가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재촉하거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아 로젤린의 마음도 조금씩 풀려 나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도 이상하게 친숙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가진 고민을 죄다 말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로젤린’이 레이몬드의 수습 기사였던 시절. 그녀는 좀처럼 하얀밤 기사단에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녀 자체로는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받쳐 주지 않으니 상황은 나날이 악화될 뿐이었다.

몇몇 교류를 나눴던 친구들은 1황자 파에 속해 있는 가문의 영애들이었기에 진즉에 소식이 끊겼다.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는 일을 반대했던 집안에 기댈 수도 없었다.

상관인 레이몬드는 로젤린을 살갑게 챙겨 주었으나, 약한 것이 용납되지 않는 무력 집단에서 로젤린은 제 방황을 온전히 내보일 수 없었다. 그런 때에 만났던 것이 클로에였다.

그녀는 로젤린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레이몬드가 바깥의 스승이라면, 클로에는 내부를 정리하며 차곡차곡 쌓는 법을 알려 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서로의 위치에서 바쁘게 일한 덕분에 일 년에 한두 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시간도 많이 흘렀고, 지금의 로젤린은 그 기억마저도 희미했으나, 감정만은 남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신뢰. 호의.

로젤린은 입가를 더듬거리다가 얘기를 꺼냈다. 여러 번 눈치를 보며, 몇 번 말을 멈추긴 했지만 대화는 느릿하게라도 이어졌다. 한번 물꼬가 트이니 순식간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올라와 있었지만, 손은 스스로의 허벅지를 쥐어뜯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사절단이 일라베니아로 돌아올 때의 전투 전, 이마에 입을 맞추시며 축복을 내려주셨고, 최근에 무투 대회 전에도 한 번 더 이마에 입 맞추셨다. 다른 기사들한테 그러는 모습을 못 봤는데, 이게 이상한 거냐? 가 긴 말의 요지였다.

레티시아의 손에서 떨리는 찻잔이 잔 받침대와 부딪쳐 달그락달그락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클로에는 웃음을 꾹 참고 시선을 내렸다. 이 순간만은 레티시아를 타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

그 대단한 얼굴로 하는 것이 고작 소꿉놀이란 말인가. 하기야 상대가 이렇게 백지 같은 상태이니.

“전하께서 경을 매우 아끼시나 보네요.”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기쁜 말이었던 듯했다.

“전하께서는 종종 그렇게 기사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시곤 해요.”

뻥이다.

“무운을 빌고 축복을 하는 거죠. 그래도 모두에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말, 전하께서 믿고 의지하는 기사에게만 하는 거라 자주 못 봤을 뿐이에요.”

뻥이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의지했다니! 로젤린은 들뜬 기색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웃음을 꾹 눌렀다.

“그거 아나요, 경?”

“예?”

“전하께서 경에게 하듯이, 경도 전하께 해도 되는 거예요. 그거.”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레티시아가 입을 떡 벌렸다.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바닥을 가볍게 제 볼에 대었다.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눈 하나 깜박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니. 레티시아는 섣불리 끼어들지도 못하고 초조해했다.

“마찬가지로 전하의 무운을 비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기사가 무운을 빌어 주니, 얼마나 든든하시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아, 그렇군요.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럼요. 좋아서 뒤로 넘어가실 거예요.”

정말로 넘어가겠지. 로젤린은 대단한 정보를 들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 * *

로젤린은 제복 상의를 벗었다.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팔을 벌려 주시겠어요?”

응접실 한가운데에 서서 허수아비처럼 팔을 들고 있자, 자그마한 여자들이 달라붙어 줄자로 여기저기 치수를 쟀다.

“정말. 사내들의 무심함이란.”

클로에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무도회가 코앞인데 드레스가 아직이라니.”

“전에 맞춰 둔 게 있어서 그걸…….”

“입고 가려고 했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요. 내 웨딩드레스를 선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으니 말이에요.”

로젤린이 입을 다물었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클로에가 로젤린을 큰뿔산양 후작저에 초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건국제의 무도회가 목전인데 드레스를 준비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어서. 붉은수레바퀴 백작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칼릭스까지 챙기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날카로운 척하면서 맹한 구석이 있는 게 제 누이랑 판박이였다.

로젤린의 어머니인 에델바이스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새로운 드레스를 달에 한 번씩 보낼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핑크색과 연노랑색의, 막 사교계에 데뷔하는 열여섯 살 영애들이 입을 법한 스타일의 드레스는 거짓말로도 로젤린에게 어울린다 말할 수 없었다. 클로에라면 그것을 입을 바에 벗고 가는 게 낫다 생각했다.

심지어는 명성이 널리 퍼지고, 무투 대회에서 우승해 다시 한 번 ‘로젤린’이라는 이름을 알린 이때.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린 이때. 건국제 무도회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이때에 하필 그런 드레스들을 입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성의 상체 모양의 목각 토르소에는 로젤린이 들고 온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소유하고 있는 드레스를 몇 벌 가지고 오라기에, 레티시아가 챙겨 온 것이었다. 에델바이스가 샀던 그 드레스였다. 클로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이것은? 악몽?

“부인, 제발…….”

드레스샵을 운영하는 남작 부인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할수록 예쁘다는 인식이 아직까지 윗세대에는 있어서 그런지, 프릴과 리본을 선호하시는 경향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은 심각하네요, 이것은…….”

로젤린의 드레스를 당장이라도 불살라 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이걸 입고 무도회에 가셨으면 두고두고, 자자손손대대 얘깃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로젤린 경.”

“좋은 겁니까?”

남작 부인이 작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요!”

반응이 굉장히 격했다.

“아닙니다!”

“네…….”

격정적인 반응에 로젤린이 그녀의 눈치를 봤다. 에델바이스가 보낸 옷 중 가장 빛나고 화려한, 그녀의 심미안으로 보기에 예쁜 드레스였는데…….

로젤린과 레티시아는 뭐가 문제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클로에는 가슴이 답답했다. 하여간 기사란 족속들은 검밖에 없다. 여자건 남자건 정말.

남작 부인은 방에 늘여 놓은 옷감과 토르소들을 치웠다. 치수는 쟀고, 입을 사람도 직접 봤으니 이제부터는 그녀의 영역이었다.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네요.”

초췌한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괜히 미안해져서 그녀에게 쿠키를 건넸다. 남작 부인은 쿠키를 씹어 넘기며 응접실을 나섰다.

저녁 식사를 한 후, 로젤린은 클로에에게 이것저것 교육받았다. 드레스를 입었을 때의 주의 점, 행동, 예법 등. 알고는 있지만 놓치기 쉬운 세세한 부분까지. 1부터 10까지 모두 주입해야하나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로젤린이 어느 정도 예법을 기억하고 있어 시간이 단축되었다.

덕분에 남은 시간이 생겼다. 클로에가 부채를 꺼냈다.

“부채 사용법을 배워 보겠어요.”

수강생 두 명이 와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귀족 여성들을 부채로 말을 대신하기도 하죠.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나요, 로젤린 경, 레티시아 경?”

로젤린은 인상을 쓰며 한참을 고심했다. 그녀는 곧 예비로 건네받은 부채를 오른쪽 뺨에 톡 대었다. 일반적으로 말을 긍정하는 뜻으로 쓰이는 행동이었다.

“훌륭해요. 부채를 접어 오른쪽 뺨에 살짝 대면, 네. 왼쪽은 아니요. 라는 뜻이에요. 가장 기본이 되는 동작이죠.”

레티시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냥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대체 왜……?

로젤린은 가르쳐 주는 것을 빠르게 흡수했다. 어찌나 다양하고 많은 부채 언어가 있는지, 레티시아가 질려서 고개를 절로 저을 정도였다.

클로에가 부채를 활짝 펴, 코와 입을 가렸다.

“이 동작은 이성에게 사용할 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에게 마음을 여는 중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다른 뜻이 하나 더 생겼더군요.”

클로에는 그 상태 그대로 살짝 인상만 썼다. 일그러진 눈썹이 보였다.

“이건 ‘내가 당신을 한 대 치고 싶으니 기다리세요.’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나에게 매우 무례한 행동을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둘러…… 말하는 건 아니구나. 대놓고 말하는 거죠. 아까와 비슷하지만 표정 하나로 뜻이 조금 달라졌지요?”

로젤린은 곧 부채를 펼쳐 클로에와 같은 동작을 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클로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젤린 경. ‘제가 당신에게 마음을 열게 기다려 주세요.’를 해 보시겠어요?”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나운 눈매의 단점이었다. ‘내가 널 죽이러 갈 테니 목 씻고 기다려라.’라고밖에 안보였다.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생각해 보니까 요즘에는 잘 쓰는 표현이 아니네요. 그냥 쓰지 말도록 해요.”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로젤린은 부채를 왼손으로도 들었다가, 돌렸다가, 반쯤 펼쳤다가, 빠르게 부치기도 하고. 다양하게 사용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로젤린 경, 레티시아 경.”

“네…….”

“네…….”

둘 다 잔뜩 지쳐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기사 두 명이 풀죽은 모습에 클로에가 웃었다.

“아차, 그리고.”

클로에가 부채를 반쯤 접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이건 키스해 주세요. 라는 뜻이에요. 이번 무도회에서 써 볼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풀죽었던 레티시아가 부활해서 기함했다.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설레는 몸짓이었다. 로젤린이 ‘키스해 주세요’를 연습하는 것을 본 레티시아가 그녀의 손에서 부채를 뺏었다. 클로에가 호호 웃으며 그들을 구경했다.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올 쯤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클로에에게 선물로 받은 부채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 너머에 월장석 성이 보였다. 레티시아는 거리에 살 것이 있다며 아까 전에 헤어진 터라,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로젤린뿐이었다.

그녀는 기숙사로 향하다가 건물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헤사였다. 로젤린이 가까이 다가가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에도 고양잇과 맹수들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다녀 기척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러 무게를 실어 소리를 내자, 헤사가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로젤린 경.”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헤사는 땅을 짚고 일어섰다. 어린 얼굴에 고뇌가 잔뜩 담겨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게. 별일은 아닌데요…….”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시선은 마주칠 줄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어두운 수풀을 향했다가, 다시 바닥. 로젤린은 자세를 낮춰 헤사와 눈을 맞췄다.

“무슨 일입니까.”

헤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낮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데 혹시…… 같이 찾으러 가 주실 수 있나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로젤린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사는 월장석 성에서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는 성 밖에 위치한 화려한 정원이었다. 등불이 비추는 장식물과 분수대는 낮의 햇살을 받을 때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다. 로젤린이 호오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까지 나왔었군요. 뭘 잃어버렸습니까?”

헤사의 눈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레이몬드에게 선물 받은 자신의 잔을 깨트렸을 때, 또한 서류를 분실했을 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소년은 발치만 바라본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지금처럼.

대체 뭘 잃어버렸기에! 로젤린의 마음에도 슬쩍 걱정이 자리 잡을 때였다. 헤사에게서 돌연 마력의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헤사?”

무언가에 대한 방어도, 공격도 없었다, 어떤 행위를 위한 것이 아닌, 목적성 없는 마력은 로젤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물건을 잃어버렸다더니 갑자기 마력은 왜 사용하는 것일까?

그 순간 로젤린은 정원 저 멀리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의 기척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여기. 헤사와 그녀가 있는 분수대 앞으로.

헤사가 고개를 휙 들어 로젤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눈망울 한가득 눈물을 채우고 있던 모습과 달랐다. 눈썹을 찌푸리고는 있지만 울고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얘기를 들어 주세요 로젤린 경. 그분은 분명 일라베니아의, 2황자 전하의 적이기는 하지만…….”

로젤린은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벅저벅. 사방에 포진한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로젤린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뜬금없이 소년의 몸을 휘감은 마력. 그것을 기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빤하지 않은가. 마인이라는 뜻이었으며, 로젤린이 알기로 자신과 헤사를 제외한 수많은 마인들의 정체라면…….

“로젤린.”

하카브의 호위들밖에 없었다. 남자는 열에 달뜬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구릿빛의 사내가 두 사람만 있던 장소로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분수대를 둘러싼 미로 정원의 수풀 벽 바로 너머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포진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카브가 헤사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헤사가 자신을 이곳에 부른 배경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젤린 경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대로 말씀드리면 오지 않으실 것 같아서…….”

입술을 짓이기는 행동에서 소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한숨을 푹 쉰 다음에 헤사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소리는 가볍지 않았다. 헤사가 이마를 붙잡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있던 소년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먼저 기숙사에 가 있으세요. 나는 조금 있다 갈 테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헤사는 이마를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정원을 빠져나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로젤린이 앞에 있는 하카브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던 건 그림자 진 그녀의 뒷모습뿐이었다.

헤사의 기척이 멀어졌다. 그녀를 대단한 명화라도 되는 듯 황홀한 눈빛으로 감상하던 하카브가 움직였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오랜만이다, 로젤린.”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하카브가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가왔다. 뭘 할지 알 것 같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질 쯤, 로젤린은 한 걸음 물러섰다. 하카브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인사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하기 싫습니다.”

“그사이 교육을 했나 보군. 치사한 사람들 같으니.”

“일라베니아에서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불필요한 접촉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친밀한 사이가 되면 불필요한 접촉을 해도 괜찮은 건가?”

로젤린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도.”

하카브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거 희소식이군.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특별한 용건이 있어. 로젤린.”

하카브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거슬려 표정 없이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우선 자세를 바꿀까. 그대의 목이 고생하는 중이니. 이렇게.”

하카브가 몸을 숙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의 상황과 완전히 반전되었다. 이제는 하카브가 로젤린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로젤린은 답지 않게 당황했다. 음, 이거 좀, 느낌이 이상하다. 남자가 살살 눈웃음을 쳤다.

“어때.”

“매우 불편합니다.”

“목이?”

“아뇨. 전하의 행동이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딱 부러지게 교육 잘 시켰군. 그냥 즐기도록 해, 로젤린. 나를 그 위치에서 보는 사람은 힉살라 아돈뿐이다. 병을 앓고 계시니 얼마 뒤에는 아무도 없을 테고.”

로젤린은 열심히 고민하다가 알맞은 답변을 찾아냈다.

“유감입니다.”

하카브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로젤린. 그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아, 네. 기쁘시겠습니다.”

하카브가 잠시 자신의 눈을 덮고 어깨를 들썩였다. 시간이 흐른 후, 드러난 흑갈색 눈동자는 등불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약간 물기 어린 걸 보니 조금 운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기쁘다. 곧 모두가 나를 이렇게 올려다봐야 한다는 것이, 치가 떨릴 만큼 기뻐. 하지만 로젤린.”

하카브가 대뜸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제 얼굴 쪽으로 가까이 끌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는 기행까지 벌였다. 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막을 틈도 없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

“아니오? 딱히 원하지 않습니다.”

단조롭던 대답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뭔 소리신지? 라고 황당해하는 표정까지. 아니라는 대답이야 대충 유추했더라도 상대방이 이렇게 헛소리를 들은 듯한 반응을 하니, 하카브도 약간은 상처받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게 아니야. 길은 많을수록 좋으니, 그저 내 제안을 기억해 두기만 해. 분명 그대는 언젠가 일라베니아에…….”

남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말을 고르는 중인 듯했다.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

하카브는 조금 더 파괴적이고 적나라한 단어들은 물러 두었다. 현재 일라베니아 황실 소속의 기사에게 일라베니아 욕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때가 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니 기억해. 발타에서도 한번 말했었지. 리비타의 문은 그대에게 열려 있다.”

로젤린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걸고 있었다. 하카브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제가 리비타에 가면 문을 열어 주신다고.”

하카브가 쿡쿡 웃었다.

“청혼하는 거야. 내가 그대에게.”

청혼? 혼인 전에 남자가 여자에게, 혹은 여자가 남자에게 상대의 허락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하카브와 자신의 결혼? 상상도 가지 않을 뿐더러 살짝 불쾌하기까지 했다.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싫다 말하려 했지만 하카브가 말을 덧붙이는 게 빨랐다.

“나는 내 말에 부정하는 답을 듣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로젤린. 그러니 그대에게…… ‘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하도록 하지. 그대는 권력이나 재물에 욕심이 있는 부류가 아닌 것 같으니…… 좋아.”

하카브는 말하는 중간중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로젤린은 그 만행에도 개의치 않고, 그의 뒷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발타는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의 우군이 된다.”

쿵! 머리를 세게 한대 맞은 것 같았다. 하카브는 적이었고, 그녀는 어지간해서는 적을 앞에 두고 제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경악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용의 중대함을 체감한 것이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그때’와 같은 입 발린 동맹이 아니야 로젤린. 이건 정말…… 나로서도 큰 결심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또한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로…….”

하카브가 로젤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꾹, 한번 누르고 떨어진 입술은 다시 그녀의 손마디에 닿아 더듬듯 천천히 내려왔다.

“그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손톱 끝까지 그의 입술이 닿았다. 목 뒤로 돋은 소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카브는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으로 일단 용건은 끝.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딤라에, 리카르디스에. 하여간 얼마나 꽁꽁 숨겨 두던지. 치사하게 말이야. 하카브는 짐짓 인상을 쓰며 제 노고를 더 설명하려다, 빙그레 웃는 것으로 그 말을 대신하기로 했다.

언제나 무심하게 다른 사물을 바라보던 시선이 변했다. 로젤린의 평정이 무너진 것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간절히 바라보는 그 모습에 하카브는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거…… 생각보다도 기분 좋은걸.’

그는 자신이 매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발타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펜던트였다.

“자아, 이건 맹세의 증표로 주도록 할까.”

하카브의 한쪽 손이 그녀의 제복 단추를 풀어 냈다. 로젤린은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곧바로 분수대에 막혔다. 남자는 멀어졌던 만큼 다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제복 안, 셔츠의 단추까지 두세 개 풀어 냈다. 목이 드러나자 하카브가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로젤린은 입을 다문 채 그의 행동을 묵인했다. 하카브가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맡아 두도록 하지.”

“아…….”

로젤린의 셔츠 안쪽 걸려 있던 싸구려 목걸이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 축제 때, 리카르디스의 눈동자 색과 비슷해서 샀던 펜던트였다. 망설이는 사이 하카브는 그녀의 목걸이를 자신의 소매 안쪽에 쑥 넣었다.

돌려 달라 말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어색하게 제 쇄골 아래 늘어진 차가운 금속을 만지고 있자, 달 아래의 검은 남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목을 훑었다.

“잘 어울리는군. 아름답다 로젤린.”

한마디를 더 덧붙이려던 하카브의 뒤로 또 다른 구릿빛 피부의 사내가 나타났다.

“전하.”

하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눈치챘다. 평범하게 정원을 산책하러 온 사람들이 입구에 발을 들여 놓은 듯했다. 아쉬워하던 하카브가 수풀 벽에 나 있는 꽃 한 송이를 뽑아 그녀의 귀에 꽂았다.

“좋은 답을 기다리겠다.”

연신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남자는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주위를 둘러쌌던 하카브의 호위들이 넓게 퍼지며 정원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하카브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멍했다. 벌어진 셔츠와 제복 단추를 다시 꼭꼭 여몄다. 목걸이를 걸어 주던 차가운 손끝의 감촉이 떠올랐다. 뱀같이 느릿하게 피부 위를 흐르던 손길. 로젤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원의 입구에서는 아까 전, 큰뿔산양 후작 저에서 돌아왔을 때에 보았던 광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의 그림자가 작달막했다. 로젤린은 코로 숨을 후 내쉬었다. 헤사가 후다닥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검은달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헤사?”

“예? 절대로 아닙니다!”

눈동자, 심장 박동, 얼굴 근육의 미세한 반응은 헤사의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젤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왕자 전하께서 뭐라 했습니까.”

“……경께서는 2황자 전하와 황실을 지키기 위해 한 몸 바칠 테지만, 과연 황실도 그러하겠느냐고요. 몇 세대 전만 해도 마인 사냥을 주도 했던 나라의 성질이 과연 시간이 흐른다고 변하리라 믿느냐고…….”

[군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일라베니아의 마인이 얼마나 가혹한 취급을 받는지. 나는 일라베니아와 2황자의 적이긴 하나, 결코 그녀의 적은 아니다.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잘 생각해라. 2황자의 입지는 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허상에 불과하지. 황제는 사지로 제 아들을 몇 번이나 집어넣은 사람이다. 중요한 건 그런 위험한 길을 걷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로젤린이 있다는 것. 여차하면 그를 대신해 죽을 각오로 말이야. 내 말 이해하나? 그의 곁에 있으면 아무리 강한 마인이라 해도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다.]

로젤린은 다소 기형적일 정도로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자라 왔다. 황실을 지킨다.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그 반짝이는 사명을 황실은 단순한 화살 받이로 이용할 뿐인데, 어찌 내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른 길도 있노라 알려 주고 싶을 뿐이라고.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숨겨 두어 만날 방도가 없는데 어찌하겠느냐. 네가 진정 로젤린을 좋아하고 따른다면, 그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 반듯하게 생긴 남자가 구구절절하고 애절하게 말했었다.

입 발린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무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하카브가 짚은 점들을 헤사 또한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로젤린은 나라의 영웅처럼 받아들여지지만 그 또한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의 마인. 그 위치가 어떤지 헤사는 뼈저릴 정도로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수작질에 동조하게 되었는데…….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쳐다보는 로젤린을 보노라니, 시간을 되돌려 했던 짓을 취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와, 왕자 전하께서…… 무어라 하시던가요……?”

로젤린이 그의 양 어깨를 꽉 쥐었다.

“헤사. 나를 걱정한 건 좋지만, 하얀밤 기사단의 모두는 리카르디스 전하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번 일은 헤사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말의 끝이 흐려졌다.

하얀밤 기사단은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2황자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그렇다면 하카브의 위험성을 아예 배제 하는 것을 넘어, 그의 힘을 리카르디스에게 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기사 로젤린. 붉은 수레바퀴의 로젤린. 리카르디스를 지키는 자신은…….

왜 그 제안에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 왜 리카르디스의 얼굴만 떠올랐던 걸까.

헤사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제 어깨를 꽉 쥐고 있는 로젤린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하고 멋있는, 바닥만 바라보는 자신과 달리 언제나 앞을 보는 로젤린. 그런 그녀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헤사는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로젤린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후회 따위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했어요…… 로젤린 경.”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소년의 물기 젖은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로젤린은 끝내 위로하지 못했다.

* * *

유난히도 밝고 선명한 밤이었다. 하늘이 맑게 개어 별빛 달빛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받은 서류를 뒤적였다. 주전파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 와 있는 지금의 좋은 기회를 그들이 그저 손 놓고 있을 리 없었다. 어느 뒷골목으로 돈이 흘러 들어갔다는 걸 보니 암살이라도 할 요량인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성질을 못 이기고 서류를 집어 던졌다. 죽이지도 못하고 벌집만 들쑤시는 꼴이 될 것이 빤한데, 이 멍청한 자식들이…….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에 호위 병력을 더 붙여야 하나? 리카르디스가 욕을 뇌까렸다. 멍청한 놈들 때문에 두 배로 고생하게 생긴 셈이었다.

‘아니 리카르디스 황자, 저를 위해……?’

따위로 시작할 감사 인사를 하카브에게 들을 생각만 해도 혈압이 올랐다.

리카르디스는 성질내며 와인 잔을 크게 기울였다. 몇 번 더 행동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병이 비어 있었다. 취기가 도니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침대로 향하던 그의 발길이 테라스에서 우뚝 멈췄다. 리카르디스는 창을 열고 나가 나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로젤린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쯤 성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한참 더 밖을 바라보다가 몽롱한 기운에 눈이 스르륵 감기려 하자 그때야 발길을 돌렸다. 푹신한 침대에 폭 빠진 몸이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방에 발을 들인 것은 그가 깊게 잠든 후였다. 방 안에 새근새근 평온한 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의 곁에 다가갔다. 그림자에 어두워진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남자를 훑었다. 감고 있는 눈. 달빛에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긴 속눈썹. 하얀 피부. 평소와는 다른 편안한 차림새. 흐트러진 셔츠 자락, 그리고 그 사이의…….

로젤린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느슨하게 풀려 있는 셔츠 안쪽,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이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자락을 벌렸다. 숨어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잎을 닮은 푸른색.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은 펜던트였다.

그걸 보는 순간 로젤린은 제 가슴이 덜컥 멈춘다고 생각했다. 손이 떨렸다.

[잘 어울려, 아름답다.]

제 목덜미를 만지던 구릿빛 사내가 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남자가 만졌던 부분을 지우듯 따라 더듬었다. 서늘한 금속이 만져졌다. 하카브가 청혼을 하며 준 목걸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벽에 걸린 거울이 보였다.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 위로 금색의 화려한 장신구가 걸려 있었다.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발타는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의 우군이 된다. 기한은 그대가 원하는 때까지. 평생을 바란다면 평생을 바쳐 엘피디오로부터, 또한 황제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로젤린은 어느 정도 자신의 강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강하다고 하는 인간들보다도, 그런 인간들의 합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로젤린은 사절단 일을 겪으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리카르디스를 지키지 못하는 때가 오리란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리카르디스를 둘러싼 위협은 단순한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던 이때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거대한 집단과의 동맹이 체결되는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말 한마디. 좋다는 말 한마디면 될 텐데.

로젤린은 제 갈등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나는…… 전하를…….’

침대 끝이 살짝 내려앉았다. 로젤린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키고 싶어.’

리카르디스가 몸을 뒤척이더니 반대로 누웠다. 이제는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은 뭔가 울컥 서러워졌다.

‘나는 전하의…….’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두운 방 안이 더욱 까맣게 잠겼다. 로젤린이 눈을 감았다.

‘곁에 있고 싶어.’

그녀 안에 새롭게 움튼 욕망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는 명백했다.

아직 새벽이 걸려 있을 때 리카르디스는 깨어났다. 술을 먹고 자서 그런지 눈을 뜨고도 꿈을 꾸는 듯 멍했다. 한기가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품에 있는 따뜻한 무언가를 끌어안았다. 제 두 팔 안에 폭 들어오는 따뜻한 것이 압박이 괴로운 듯 “으응…….” 하고 소리를 냈다.

“아…… 미안…….”

“네…….”

리카르디스가 팔에 힘을 풀고 안고 있는 무언가를 토닥였다. 손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겼다.

……부드러워?

번쩍 눈을 뜬 리카르디스는 한가득 펼쳐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향연에 소리 없이 경악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자신의 왼팔을 베고, 오른팔에 꼭 안겨 자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끌어안은 게, 로, 로젤린. 뭐, 그대가. 왜, 여기에. 아니 이불은 어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니, 아니. 왜 로젤린이 여기에? 꿈속을 헤매다 깨어났더니 더 이상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눈동자를 마구 굴리며 당황스러워 했다.

바람소리도 읽는 예민함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로젤린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숙면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보면 자그마한 자극에 일어날 것같이 보이긴 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등을 어린아이 어르듯 가볍게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인데 잠을 깨울 수 없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 가면서. 리카르디스의 손길에 로젤린의 찌푸려진 미간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입꼬리를 움찔거리던 그는 곧 아까와 비슷할 정도로 경악하게 되었다.

로젤린이 꿈틀대며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허리에 그녀의 팔이 턱 얹어졌다. 그는 헉 소리를 겨우 참아 냈다. 비극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셔츠가 어제보다 더 벌어져 있는 탓에, 그녀의 이마가 쇄골 바로 아래 가슴에 찰싹 붙었다. 자고 있어 그런지 몸이 따끈따끈했다.

……맞닿은 피부의 온도가 당황스러웠다. 색 색, 숨이 맨 살결을 간지럽혔다. 리카르디스는 가슴부터 시작된 감각이 제 온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머리 끝까지 간질, 간질. 버틸 수 없을 만큼 등골이 오싹거렸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하늘에서 땅을 비추는 위대한 이델라브힘이시여. 성스러운 빛으로 어린 백성들을 이롭게 하시고…….’

리카르디스는 성서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암기했다. 그가 아는 것 중 가장 가슴을 차갑게 만들게 하는 문구들이었다. 다행히 소용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끼어 있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어 로젤린에게 덮어 주었다. 로젤린이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우물거리더니 씩 웃었다. 포근해서 기분 좋은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괴로워하다가 다시 성서를 외웠다. 아니 왜 저렇게 귀여운 거야.

둥그스름한 이마, 시원시원하게 쭉 뻗은 눈꼬리, 긴 속눈썹, 곧은 콧날, 먹는 꿈을 꾸는지 연신 오물거리는 입까지.

주위를 경계하며 암살자들을 척척 잡아내고 위험이란 위험은 다가오기도 전에 차단해 버리는 대단한 호위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기척마저 읽어 내는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완전히 늘어져서 자고 있었다. 누군가의 무방비한 모습에 가슴이 설레는 날이 올 줄이야.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여덟 시간이면 여덟 시간 내내 로젤린의 자는 모습만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제 슬슬 잇세리온이 일어날 때라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팔을 슬쩍 들었다. 그래도 로젤린은 깨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고른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딱딱한 팔베개를 사용하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새벽과 아침 사이의 희미한 햇살에도 문양의 굴곡을 따라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는 금색의 펜던트. 로젤린의 셔츠 안쪽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펜던트의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리카르디스가 모를 리 없었다. 따스하게 데워지고 있던 가슴 안쪽의 온도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현 힉살라, 아돈의 직계 혈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함의 증표는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인 발타인 중 하카브 왕자와 간제 왕녀만이 지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하카브의 검은 눈동자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욕망이 떠올랐다.

‘하카브 위 리비타…….’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왕가의 표식을 줬으니, 단순히 내 부하로 오라는 둥의 시시한 얘기가 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 마력이 수준 이상이라고 하면 신분의 고하는 막론하고 왕실과 혼인으로 엮어 버리는 것이 그네들이 하는 일이었으니. 하카브가 무슨 말을 했을 지는 빤했다. 제 열네 번째인가 열다섯 번째 부인이 되라는 그런 얘기였을 테다.

그런 헛소리를 로젤린이 ‘아, 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받은 목걸이를 고이 걸고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뭔가 혹할만한 제안이 있었을 텐데.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볼과 입술이 부어 통통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서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양 볼에 음식을 잔뜩 욱여넣은 채 씹고 있는 광경을 연상했다. 냠냠. 때를 맞춘 듯 로젤린이 또 꿈속의 무언가를 먹었다. 그녀의 입속에 머리카락 한 올이 무서운 기세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손으로 슥 빼내 줬다.

‘……설마 먹을 거라던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로젤린이 거기까지는 아니…… 겠지. 리카르디스는 미심쩍은 믿음을 기반으로 미심쩍게 확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뭘까. 로젤린이 왜 하카브에게 받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걸고 있는 것인지…….

그때, 스르륵하고 로젤린의 눈이 열렸다.

아침 햇살을 받는 눈동자가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풀잎 위에 고여 있는 새벽이슬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로젤린의 표정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잠에 취해 있는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로젤린은 자신이 뭘 베고 있는지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서 리카르디스의 반대쪽으로 한 바퀴 굴렀다. 하지만 침대가 넓었기 때문에 굴러 봐야 침대 위였다. 로젤린은 엎드린 채 눈을 크게 뜨고 깜빡깜빡 거리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눈매를 휘며 환하게 웃으니 로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은 잘 잤나, 로젤린 경?”

“어, 아. 저는……그, 전하의 등을 보다가 잠시 앉아 있었는데…….”

횡설수설하며 이불을 꼭 쥐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 와중에도 정말 웃음이 나오긴 했다. 로젤린은 당황하다가, 제 목에서 흐르는 목걸이의 감촉을 느끼고는 펜던트를 잡아 얼른 옷 안으로 숨겼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뭔지 알고 있군.’

로젤린이 셔츠 단추를 잽싸게 잠그고는 힐끗, 옆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즈음의 리카르디스는 선량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걸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나갔던 일은 잘 마무리 되었고?”

로젤린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거짓말이라고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별일 없이?”

목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을 바랐던 대답에 긍정만 돌아올 뿐이라, 리카르디스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거 다행이군.”

목걸이를 숨기는 손길은 다급하고, 시선은 흔들렸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불안을 똑똑히 읽어 내었다. 로젤린의 마음을 뒤흔들 만한 일은 몇 가지 없을 것이다. 먹을 것, 가족, 친구…… 그리고 ‘2황자 리카르디스 황자’의 안위까지.

리카르디스는 그중에서 분명 ‘2황자 리카르디스’가 하카브의 제안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 예감했다. 그녀를 흔들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교만이 아니었다.

과거 ‘로젤린’의 영향 때문인지 지금의 그녀 또한 호위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집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같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배우고 성장했으나,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일관된 태도 덕에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로젤린 안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의논을 하고 싶었다면 진즉에 말했을 것이다. 입을 딱 다물고 목걸이를 숨기고 있는 지금은 리카르디스도 인내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하카브의 수작질로 흔들리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안을 내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수단이라 할 수 없었다. 그가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는 셔츠를 꼭 쥐고 있는 로젤린의 하얀 손을 계속해 담고 있었다. 소중한 물건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그저 숨기기 위해 쥐고 있을 뿐이란 걸 알고 있었으나, 머리와 가슴이 각기 따로 사고했다.

차갑게 돌아가는 이성 아래 속은 활활 불타올랐다. 타고 남은 것은 검은 재였다. 거뭇거뭇한 감정의 흔적들로 속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황성에 들어 온지 십오 년. 수많은 사건을 거치고 울고 웃던 그에게 처음으로 낯선 감정이 생겼다. 눈동자가 바다 속 깊은 곳의 빛을 띠었다. 그것은 하카브가 로젤린을 볼 때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껄끄러운 침묵에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봤다.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턱을 괴고 있는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로젤린의 허리에 큰 손이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대로 힘을 줘 로젤린을 자신의 쪽으로 쭈욱 끌어당겼다. 시트가 두 사람 사이에서 구겨졌다.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코 앞까지 끌려갔다. 어, 약하고 여린 우리 전하께서 힘이 생각보다 세다! 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더 끌어당겼다. 몸이 맞닿아 꾹 눌리자, 그녀가 뻣뻣하게 굳었다. 경직된 초록색 눈동자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비쳤다. 실크처럼 흘러내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한 가닥 아침 햇살에 빛났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내려 깔며 웃었다. 로젤린의 숨이 멎었다. 미모에 넋을 잃고 있어 미처 몰랐는데, 거리가 좀…… 많이 가까운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자각한 로젤린이 깜짝 놀라 한쪽 손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셔츠 자락이 벌려져 있는 탓에 손바닥에 탄탄한 가슴이 그대로 닿았다. 로젤린은 더 당황해 버렸다. 피부가 부드럽다 못해 매끄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가, 자신이 왜 그 가슴에 손을 대었는지 깨닫고는 다시 밀었다. 그리고는 다시 당황해서는 떼었다가, 아차 맞다 하고 또 꾸욱 밀었다.

뭘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지.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로젤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전하 뭔가 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만류, 그녀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이마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허억,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이, 이상한 것 같…….”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경.”

공기 속으로 녹아내릴 듯 아련한 미소였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한줄기 햇빛이 드리운 자연 광경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믿을 수 없는 외모에 쩍 굳어 버렸다.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하카브 위 리비타. 그 야심찬 남자가 ‘리카르디스’를 패로 걸었다니. 대항마로 세울 수 있는 것 역시 ‘리카르디스’밖에 없지 않겠는가.

* * *

월장석 성의 시녀장, 한나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예,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부쩍 귀가 어두워진 터라…….”

“아니,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똑바로 들은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 봄 햇살에도 스러질 것같이 연약해 보이지만, 그 속에 가시와 짙은 향을 품고 있는 장미 같은 치명적인 느낌으로 치장해 달라 말씀하신 것이…….”

“정확하다. 그 느낌으로.”

시녀장은 리카르디스의 이상한 명령에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시녀장도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던 잇세리온이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한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치장은 무슨. 얼굴에 뭐 하나 바르는 것도 질색하시는 분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저러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잇세리온 비서관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전하께서는 이미 희미한 봄 햇살에도 스러질 것같이 연약하지만, 가시와 짙은 향을 품고 있는 장미 같은 느낌을 지니고 계신걸요. 금강석을 깎아서 금강석을 만들어 달라는 말과 진배없습니다.”

“…….”

그의 뒤에서 상급 기사 르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형제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툴툴거렸다.

“이것 봐, 한나. 잇세리온은 말이 통하지를 않아.”

확실하게, 말도 뜻도 통하지 않았다. 한나는 방 안에 모여 있는 시녀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리카르디스가 말한 내용을 다시 반추했다. 따스한 봄 햇살. 그 연약한 무형의 기운에도 스러질 만큼 연약하게. 애처롭게. 하지만 그 속에 짙은 향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장미…….

척 봐도 연애다. 월장석 성에서 일했던 10년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주인의 연애 기류! 한나는 전율했다. 드디어, 월장석 성에도 봄이 오는가!

한나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황급하게 시녀를 모두 끌고 나갔다. 보물 창고를 털어올 기세였다. 시녀들이 빠진 방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르원이 제 턱을 긁적이다가 슬그머니 리카르디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잇세리온과 르원 형제도 무슨 일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설마…… 연애하시나? 월장석 성에도 꽃이 피는 거야? 은근슬쩍 물어보려던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를 먼저 불렀다.

“르원.”

“어…… 예?”

“어제 로젤린 경이 누구와 만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알아 와.”

꽃은 무슨. 자라난 꽃도 칼로 베어 낼 것 같은 차가운 눈이었다.

“또한, 오늘 누구를 만나 무슨 대화를 하는지까지도.”

팔짱을 끼고 저 너머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글쎄…… 장미의 치명적 어쩌고에 가깝긴 했지만 봄 햇살에 아련하게 흩어지는 어쩌고는 아닌 것 같았다.

“또.”

로젤린 경. 대체 무슨 짓을 했나. 르원이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헤사라 했던가.”

“헤사가 누굽니까?”

“로젤린 경의 새로운 수습 기사. 불러와라. 그녀 모르게.”

르원은 머릿속으로 명령을 다시 되새겼다. 로젤린 경이 어제 한 일. 로젤린 경이 오늘 할 일. 로젤린 경의 생활 전반을 돕는 수습 기사.

“레이몬드 경도.”

심지어는 보호자까지.

‘진짜 무슨 짓을 한 건지…….’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잔뜩 들뜬 걸음으로 돌아오는 시녀장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는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나의 기대대로 연애가 조금은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연애 초기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보다는 끈적끈적하고 각종 술수가 난무하는 치정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한나가 과연 그걸 바랐을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길이 없어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걷던 사람 같지 않았다. 로젤린은 비틀거렸다. 취객이나 배고픈 강아지처럼 비실거리는 걸음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멈췄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멍하니 있다가 기숙사 건물을 지나치기도 했다. 목적지를 지나쳤다는 것도 이십분 후에야 알았다. 그러다 보니 기숙사 방의 문고리를 잡은 것은 리카르디스의 방에서 나오고 정확히 한 시간 사십구 분 후였다.

달칵.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정돈된 방 안. 거대한 침대 아래에 헤사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본인의 방에서 안자고 왜 바닥에서…….

‘아…… 맞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소년을 본 순간, 로젤린은 여태껏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렸다. 하카브가 건넨 목걸이, 그와 함께 받은 제안, 심지어는 하카브의 존재까지. 아침의 리카르디스가 너무 충격적인 탓이었다.

로젤린은 시트를 끌어 헤사에게 살포시 덮어 주었다. 침대 위로 옮겨 주고 싶었으나, 소년은 두 선임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예민한 야생의 감을 가지고 있었다. 건드리는 그 순간 깨어날 것이 분명했다.

로젤린은 바닥에서 자는 소년을 빤히 바라보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대가 나에게 오는 그 순간부터…….]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경.]

하카브의 제안 위로 리카르디스의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뭘 고민을 해 보려 해도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목걸이가 신경 쓰여 한번 꺼내 보아도, 아까 닿았던 리카르디스의 단단한 가슴이, 이번에는 진짜로 고민 좀 하자 싶어도, 자신을 끌어당기던 큰 손과 이마에 짙게 눌러진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까지!

온 머릿속이 리카르디스였다. 로젤린은 제 허벅지를 꾹 눌러 보았다.

‘뭔가 이것보다…… 탄력 있고 피부 결은 부드러운데 단단하고…….’

탄탄한 가슴의 감촉이 선연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눌러 보고 싶었다.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맞아, 막 얼굴이 화끈하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진짜 아름다우시지.]

언젠가 동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당시에도 공감했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정말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얼굴이 화끈하고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았다. 여태껏 그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로젤린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 안쪽에서 금속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맞다.’

하카브. 또 까먹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번에는 집중해서 잠깐 그의 제안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혼인하면 리카르디스를 건드리지 않을 뿐더러 지켜 주기까지 하겠다. 혼인…… 혼인이라.

[이델라브힘께서 왜 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드셨는지 아십니까, 누님?]

[……어…… 음….]

[혼자서는 그릇된 행동이나 결정을 내릴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문에 종종 실수를 저지르고는 합니다. 그걸 서로서로 도우며 보완하라 신께서 저희들을 함께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누님, 어떤 일이 있다면 고민만 하지 마시고 믿을 만한 사람들과 함께 그 생각을 나눠 보는 게 어떨까요. 사람 머리 하나보다는 사람 머리 둘, 둘보다는 셋이 나은 법이죠.]

물론, 칼릭스가 말한 내용은 성전에 서술 된 바 없으므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제 누이가 발타에서 단독으로 위험한 행동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죄다 알게 되었고, 기겁했다. 한 번 더 강하게 경고할 필요성이 있었다. 거대한 세계를 이루는 신을 끌어들여야 하는 정도의 규모로.

덕분에 인상 깊게 새겨져 있었다. 골머리를 앓고 있으려니 칼릭스의 조언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고민해서 무얼 하겠나. 답이 나오지를 않는데.

마카롱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제부터 통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로젤린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정략혼이라. 뭐 흔한 일 아닙니까.”

“귀족 세계에서는 뭐…… 그렇지.”

상급 기사 카일로와 파르딕트가 나란히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파르딕트의 등에 걸터앉고, 카일로의 등에 발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하나, 하면 내려가고. 하나, 하면 올라왔다. 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재밌었다.

“카일로 경은 혼인하셨습니까?”

“하나, 아직이지만 약혼녀는 있습니다. 정략 관계이긴 하지만…… 뭐 나름 사이는 좋습니다.”

“파르파르는?”

“하나, 애가 셋이다.”

“정략혼?”

“참나, 이 얼굴을 봐.”

음. 정략혼이군. 연애를 할 수 있을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십 번째 팔굽혀펴기를 한 카일로가 팔을 편 채로 멈추고는 피식 웃었다.

“연애에서 결혼까지 성공했다고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는 유명합니다.”

로젤린은 헉하고 제 입을 가로막았다.

“징그럽게 쫓아다니고 추하게 매달렸다고. 부인께서 얼마나 노고가 크셨을지…….”

파르딕트가 벌떡 일어서 카일로를 덮쳤다. 두 사람 위에 앉아 있던 로젤린이 튕겨나갔다. 그녀는 그대로 뒤 구르기를 하고는 편안하게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기 위해 구른 사람 같았다. 로젤린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남자의 싸움을 구경했다.

막 연무장에 발을 들인 레이몬드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 바닥에 앉으면 옷 더러워지잖아.”

보자마자 잔소리였다. 로젤린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어 깔고 앉았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두 남자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는데, 시선이 따가웠다. 나무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흘끗흘끗 내려다보는 레이몬드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레이몬드가 온 김에 물어볼까? 로젤린이 생각할 즈음 그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내뱉었다.

“혹시! 나에게 무슨 할 말 없니, 로젤린!? 그냥, 뭐 사소한 고민거리라던가, 음. 그런 거 있잖아? 사소한 자신의 미래라던가…… 하는 그런…….”

로젤린은 기다렸다는 듯 레이몬드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그녀도 하얀밤 기사단에 하카브가 어떤 존재인지 쯤은 알고 있던 터라, 조금 둘러 말하긴 했다.

귀족 세계에서 흔하다는 정략혼. 조건과 조건만 맞으면 결혼하지 않나. 본인의 목적과, 그 조건이 맞아 떨어진다면 하는 쪽이 나은 것일까? 목적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정략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너무 철없는 일이겠지? 다들 하는 건데 너무 껄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딱 그 정도.

레이몬드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애써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볼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로젤린 무슨 소리야. 요즘 세상에 고리타분하게 정략혼이라니.”

“요즘도 많이 하잖아.”

“당연히 하는 사람들이야 있지. 가문의 세를 불리거나 동맹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 없이. 그저 조건만 보고! 하지만 로젤린, 결혼은 신성한 거란다!”

레이몬드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일생에 한 번뿐인,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앞으로 하나의 길을 걸어가리라 약조하는 그 기회를 단순히 조건만 보고 결혼한다고? 심지어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건 팔려 가는 거야. 결혼이 아니라!”

“맞아, 맞아. 사랑이 전부가 아니겠어.”

어느새 싸움을 끝낸 파르딕트가 레이몬드를 옹호했고, 그의 뒤에서 카일로가 툴툴거렸다.

“연애결혼한다고 정략결혼하는 사람 너무 무시하시네.”

레이몬드가 잠시 카일로를 이끌고 저 멀리에 있는 큰 나무 뒤로 쏙 들어갔다.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것 같아 청각을 강화해 가면서까지 귀를 쫑긋 세웠으나, 어떤 작은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신호로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레이몬드와 다시 돌아온 카일로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정략혼은 쓰레기입니다, 로젤린 경. 두 번 다시 제 앞에서 그런 끔찍한 단어는 입에도 담지 마시죠. 소름 돋습니다.”

“…….”

뭔가 아까랑 말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그걸 제안하는 놈들도 똑같이 쓰레기입니다. 저희 아버지처럼.”

“어우, 그건 좀……. 말이 심하시네요, 카일로 경……. 아무튼, 카일로 경도 이렇게 말하잖아 로젤린. 내가 뭐라 했어!”

“……바닥에 그냥 앉지 마라?”

“아니, 아니 뭐…… 그것도 맞긴 한데.”

레이몬드가 그녀의 두 어깨를 꽉 쥐었다. 로젤린은 어젯밤 자신이 헤사의 어깨를 잡고 훈계하던 때를 떠올렸다. 친구 레이몬드에게서 과거, 동경했던 상급 기사 레이몬드 경의 얼굴이 보였다.

“로젤린 에스터. 넌 네가 가진 힘에 비해 소극적으로 구는 경향이 있어. 네가 그 조건을 이뤄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상대방의 손에 너의 목적을 쥐여 주려는 거야? 똑똑한 녀석이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우리가 검을 들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지키려고?”

“기사의 귀감이라 눈물이 나올 뻔했네. 그것도 맞아. 하지만 본디 검은 무기야 로젤린. 적을 베고 찌른다. 싸워 이기기 위한 무기. 너는 그 무기를 쥘 자격을 지닌 기사고, 그렇다면 휘둘러야지. 싸워서 쟁취해 내야지. 지레짐작 두려워하지 말아.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패배를 시인하는 만큼 기사에게 굴욕적인 일이 어디겠어. 너는 강한 아이잖아.”

로젤린의 질문은 그저 ‘정략혼’에 관련되어 있었으며, 자신이 그 대상이라고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다. 레이몬드가 말한 내용에는 그런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지만 로젤린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몬드와 카일로가 휴 하고 그녀 몰래 한숨을 쉬었다.

파르딕트는 계속해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었다. 거, 참. 부단장 부관은 입으로 되는감. 하며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레이몬드가 그의 발을 퍽 찼다. 세 명의 남자가 다시 다투기 시작해, 로젤린은 그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푸른 하늘 저 너머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로젤린은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상급 기사 슈텐, 하급 기사 바스티안, 클로에와 네스터외에도 정원사와 주방장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 덕에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정략혼의 기원이라든가 정략혼의 폐해. 수많은 실패 사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카브의 욕과 레이몬드와 클로에의 연애담까지.

로젤린보다 인간관계와 정략혼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조언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로젤린은 단추를 풀었다. 옷 안쪽에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장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젤린은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끌렀다. 손으로 만지작거리니 잘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저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에, 그녀는 목걸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어느새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이 보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하루 종일 정략혼과 하카브에 대한 욕을 듣고 있을 때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상상 속의 리카르디스가 문 너머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마음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차가운 문고리가 체온으로 데워질 때까지 가만히 잡고 있었다.

후, 크게 숨을 내뱉은 로젤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어?’

뭐지? 또 내가 상상을 하고 있는 건가?

석양빛이 하얀 커튼에 투과되어 어스레 떠도는 집무실 안에 꽃이 잔뜩 장식되어 있는 탓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촛대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들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흔들흔들 춤을 췄던 탓일까? 아니면 그렇게 장식된 공간 속, 갖은 장신구로 치장한 남자가 오늘따라 더욱 청초해 보인 까닭이었을까? 로젤린은 몇 초간 움직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서류를 보고 있던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

남자가 눈을 휘며 웃자 눈가가 반짝였다. 로젤린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 아니…… 왜 이렇게 오늘…… 비, 빛나시는 거지? 혼란스러운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실제로 리카르디스는 평소보다 빛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유, 갖은 장신구, 화장까지. 솜씨 좋은 시녀장의 손길을 거친 리카르디스는 그야말로…….

‘요정?’

요정의 왕 같았다. 같은 현실에 있다고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의 탄탄한 몸을 감싼 옷은 여느 때보다 노출이 심한 스타일이었고, 심지어는 옷감 자체도 하늘하늘하게 얇아 보였다. 그가 몸을 살짝 숙이자 헐렁한 옷이 가슴과 복근을 드러냈다. 날렵하게 꽉 짜인 근육의 결이 탄력 있어 보였다.

로젤린의 시선은 흘러, 부츠나 구두를 신지 않은 리카르디스의 맨발로 향했다. 사람의 발이 이렇게나 예쁜 기관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크고 발가락도 길쭉하고, 뼈대도 곧고 예쁜 데다가, 그 위를 가로지르는 핏줄까지도 예뻤다. 바깥 복사뼈에서 다리로 올라가는 선도 어찌나 선명하고 아름다운지. 로젤린은 살짝 분홍색 빛이 도는 그의 복사뼈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로젤린? 무슨 문제라도 있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던 로젤린은 이제야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위 기사들은 물론이고 잇세리온마저 없었다. 꽃과 촛불로 장식되어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는 방 안을 휘휘 둘러보고 있으니 리카르디스가 말을 이었다.

“아, 오늘은 다들 급한 일이 있어서…… 나 혼자…… 있었다.”

로젤린이 입을 떡 벌렸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호위 기사가 급한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워? 카일로 경……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잇세리온 비서관님도 너무했다.

눈을 내리깔며 말을 흐리는 남자의 미소에는 어딘가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방과 이 성까지 모두 리카르디스의 것이었으나, 이 거대한 공간에 그만 홀로 남은 듯 외로워 보였다. 로젤린의 가슴 한가득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 차올랐다. 노을 지는 하늘보다도 어딘가 마음 한쪽을 시리게 만드는…….

리카르디스는 목덜미를 쓸다가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와 주어 기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는 리카르디스에게서 새벽의 차가운 비를 이겨 내고 마침내 꽃을 피워 낸 은방울꽃 같은 청초한 아름다움이 비쳤다. 로젤린은 벅차오르는 감동에 손을 잘게 떨었다.

겨우 정신 차린 그녀가 머뭇거리며 원래 호위하는 자리로 걸어가려 하자,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리카르디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리 와. 아무도 없는데 뒤에 있지 말고.”

그러고는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로젤린은 다른 사람, 기사단장, 기사단장 부관, 부단장, 부단장 부관, 수석 비서관에게 들키면 크게 혼날 걸 알면서도 기어코 그의 옆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돌연 생긋 웃었다.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커튼 틈으로 선명한 붉은 빛이 들어왔다. 테이블 위의 유리잔에 반사된 노을이 그의 볼에 한 점 묻어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로젤린은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고? 슬슬 그대가 올 때인 거 같아 미리 준비해 뒀다.”

테이블 위에는 스테이크와 갓 구워 아직 따끈한 식전 빵과 수프,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와 각종 과일이 꽃과 촛불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그걸 권할 때서야 음식의 존재를 눈치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지만 그녀는 손을 뻗지 못했다. 가슴 안쪽을 꽉 채운 감정들로 인해 배가 부르기까지 한 것 같았다. 로젤린이 망설이고 있으니 리카르디스가 포도 한 알을 떼어 그녀의 입안에 쏙 넣어 주었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그가 생긋 웃었다.

로젤린은 난생 처음으로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넣고, 씹고, 삼키는 행동만을 반복했다. 먹는 모습이 관찰당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리카르디스가 흐뭇하다는 듯 웃는 모습에 신경이 쏠려 그랬던 것일지도. 로젤린은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체한다’라는 감각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로젤린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컥컥거리며 불편해하자 리카르디스가 옆에 두었던 서류를 들었다.

“편하게 들어.”

그가 씩 웃으며 손을 뻗어 로젤린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훔쳐 내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로젤린이 굳어 있는 사이,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느긋하게 기대었다. 서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진지했다.

스테이크 한 점, 그를 한 번 흘끗. 빵 한입, 그를 한 번 흘끗. 열심히 일하는 로젤린의 입보다도 그녀의 눈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가 쳐다보고 있을 때에는 한 없이 부담스러웠는데, 시선이 떨어지니 이상하게 아쉬웠다. 그래도 음식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다. 이제야 맛이 좀 느껴지기 시작해, 로젤린은 먹는 일에 금세 집중했다. 과일 한 조각 남기지 않고서야 식사가 끝났다.

로젤린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손바닥을 마주해 삭삭 비볐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의 등에 팔을 걸치고 살짝 고개를 틀어 나른한 눈빛으로 서류를 읽어 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렸다.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터질 것 같고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로젤린은 오늘 여러 동료와 지인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그 얘기들로 결심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말해야겠다 생각했던 것까지도.

로젤린이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전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혹시 지금 바쁘…….”

“바쁘지 않다. 전혀.”

리카르디스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읽던 그 표정 그 자세 그대로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휙 뒤로 던졌다. 공중을 펄럭거리며 날던 종이 몇 장이 바닥에 착지했다.

“저 서류는…….”

“내 일기다.”

“아, 일기요.”

진지하게 읽어 내던 그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업무만큼은 아니지만 일기도 중요했다.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꼬박꼬박 쓰라고 해서, 로젤린도 벌써 책 한 권 분량을 거의 다 채운 상태였다. 덕분에 나날이 글씨체도 예뻐지고 어휘력도 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유려한 글씨체 또한 일기로 단련이 된 것이 아닐까.

“그래, 무슨 일이지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깍지를 끼어 꼰 다리 위에 올려 두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하카브 왕자한테 청혼을 받았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상냥한 표정을 유지 중이었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음……. 뭐라 하면서? 최대한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나 나를 그 위치에서 볼 수 있어. 발타의 힉살라가 영원히 그대의 발 아래에서 그대를 경배하며, 사랑을 바칠 것이다.’라고 한 다음에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게 아니야. 길은 많을수록 좋으니, 그저 내 제안을 기억해 두기만 해. 분명 그대는 언젠가 일라베니아에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코웃음을 쳤다. 싸늘하게 냉소하는 표정이 평소의 그와 같았다.

“알만 하군. 로젤린,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 줄까? 나는 일라베니아가 무슨 짓을 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대가 있어야 실망도 있는 법이거든. 황실에 들어온 이래로 기대라는 것은 가져 본 적도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어. 도리어 하카브가 그대가 일라베니아에 실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를 꺼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래도 됩니까?”

일라베니아의 황자 전하이신데?

“안 될 게 뭐가 있나. 생겨 먹기를 지긋지긋하게 생겨 먹은 곳인데. 그래. 그리고 또 무어라 하던가.”

“‘그러니 기억해. 발타에서도 한번 말했었지. 리비타의 문은 그대에게 열려 있다.’ 하고 청혼하는 거라며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욕했다. 이 개 같은 자식. 어린애한테 사탕 주면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그랬군. 그것 참 불쾌했겠어.”

“예. 많이 불쾌했는데 참았습니다.”

빠른 대답에 리카르디스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로젤린이 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금색의 펜던트.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시선도 금색의 장신구를 떠돌았다. 잠시간 침묵이 깔렸다.

“전하.”

“그래.”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하카브 전하가 전하의 우군이 되어 준다 했습니다. 엘피디오 전하로부터, 황제 폐하로부터. 보호해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짧은 순간이 조급했다. 실상 새벽부터 계속된 기다림이기 때문이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그녀가 뱉은 대답은 ‘하겠다’도 아니고 ‘하지 않겠다’도 아니었다.

“전하,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전하를 지킬 겁니다. 하지만 저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로젤린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금속이 흐르듯 움직였다. 자그락, 자그락. 불쾌한 소리였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는 말하지 못한다.”

“사람은 너무 쉽게 다치고 죽습니다.”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로젤린은 꾹꾹 눌러 참고 있던 한마디를, 참고 참다가 내뱉었다.

“그게 두렵습니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목걸이를 가만 응시했다. 거절하겠다 결심을 해서 풀어 내기까지 했음에도, 하카브의 제안은 아직 그녀의 손 위에 있었다.

연약하고 위태로운 리카르디스를 보니 문득 불안해졌다. 옆에서 꼭 붙어서 지켜야겠다는 결심과, 자신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뒤섞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했고, 그에 따라 다짐을 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가슴 안쪽 깊은 곳부터 느껴지는 한기는 손끝을 차갑게 만들었다.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아래서부터 로젤린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리카르디스의 손 위에 로젤린의 손이, 그리고 그 위에 하카브의 목걸이가 올려져 있었다. 닿은 곳부터 따스해졌다.

“어제 좋은 아침이라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이 오늘은 없을 수도 있다. 하나둘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기억했던 사람들도, 그 다음날에는 없다. 결국 내일에 남을 것은 나뿐이다. 괴로움의 몫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혼자 짊어져야만 하겠지. 죽음마저 반갑게 느껴지는 고통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그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그 감정만이 나를 이루는 전부이기 때문에.”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로젤린’. 그녀의 끊어진 기억 속 리카르디스는 누군가가 떠나는 모습만을 보아 왔다. 그가 피눈물을 흘리던 때부터 사망자 명단을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때까지. 로젤린은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해’가 더욱 처절하게 와 닿았다.

“우리에게 잃는다는 것은 가깝고 또 익숙하다. 겪은 적 있기에 그게 얼마나 아픈지도 잘 알아. 그래서 피하고 싶고 두렵다. 그렇지?”

로젤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로젤린. 나는 사람은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리카르디스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손목뼈를 문질렀다.

“로젤린.”

“……예.”

“로젤린 에스터.”

“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예.”

“가장 날카롭고 가장 빛나는.”

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 로젤린은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려 내었다. 자신이 무투 대회에서 우승했을 적, 황제에게 했던 입 발린 문구였다. 로젤린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하카브의 목걸이에서 벗어난 시선은 그보다도 빛나는 사람을 담았다.

“나의 검.”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로젤린은 그를 멍하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예. 전하.”

리카르디스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아프지는 않지만 아주 단단하게. 로젤린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힘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펼쳐진 손은 점점 웅크려졌다. 그녀의 손 안에 있던 하카브의 목걸이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대는 나를 위해 강해져라.”

그리고 기어코, 로젤린의 손은 온전히 무언가를 잡아 낸 모양새가 되었다. 더 이상 찬란한 금색으로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부러질 듯 연약해 보였던 남자는 한 꺼풀 무언가를 벗어던진 것 같았다. 흔들리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결코 무르지 않았다.

“나는 그대를 위해 강해지겠다.”

리카르디스의 말로 작게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다짐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로젤린의 안에 가득 차 있던 우울이 울컥울컥 밀려 나왔다. 눈가가 살짝 젖었다.

리카르디스를 잃는 상상만 해도 사고를 멎게 만드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카브의 제안에 갈등한 이유였다.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과거 ‘로젤린’으로부터의 학습. 가슴 안쪽을 할퀴어 그 상처마다 뜨거운 쇳물을 들이붓는 듯 녹아내리며 타오르는 감정. 두 번은 버텨 낼 수 없을 거라, 어리숙한 그녀의 사고보다 그녀의 본능이 먼저 깨달았다. 제안을 거절하겠다 결정했지만, 하카브의 목걸이를 손이 닿는 곳, 언제고 다시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까득…….

그녀의 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금속과 금속이 비벼지다 못해 강한 압력에 서로 쓸릴 때 나는 비명 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쥐고 있는 로젤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떨림이 그녀의 혼란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꽉 쥐어져 있는 주먹에 뼈가 도드라졌다. 서로가 서로의 틈에 들어가던 장신구가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탕!

쇳더미 위로 쇠가 떨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공간을 파도처럼 덮쳤다가 사라졌다. 귀에 이명이 일 정도로 강력한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서 후드득 목걸이의 잔해가 떨어졌다. 반쯤 구겨진 펜던트와 부속물들이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에 반짝거리며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로젤린이 주먹을 쥔 채, 그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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