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월장석 성,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섭정관 딤라의 월장석 성 방문 건으로 로젤린 경에게 많은 시선이 쏠려 있습니다. 무투 대회의 출전이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될지 회의적입니다.”
“이미 로젤린 경의 이름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어요, 나단 경. 이제 와서 숨겨 보았자 더 궁금해 질 뿐이에요. 자물쇠를 달아 놓으면 열고 싶고, 숨겨 놓으면 찾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걸요.”
클로에가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처럼 말이에요.”
리카르디스는 피곤함이 묻어 있는 얼굴을 쓸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딤라와 리카르디스의 만남은 큰 화제를 낳았다. 하카브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딤라가 일라베니아의 2 황자를 만나러 그의 성까지 친히 행차했다. 단순히 안부만 물어볼 리 없으니 대단한 건이 오갔지 않겠냐는 소문이 돌았다.
여러 나라의 고위 인사들이 모인 일라베니아 황실이 들썩였다. 심지어는 황제, 라이노까지도.
그것이 리카르디스가 피곤한 이유였다. 몇 시간을 금강석 성에 붙잡혀 있다 겨우 풀려난 참이었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닌데…….’
황제는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한 이유가 오로지 로젤린을 보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보다 윗세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딤라의 성정이 어떤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핏줄들을 아끼고, 타국을 배척하는.
더군다나 하카브의 일로 라고슈가 큰일을 겪은 시점에서 후계자가 되지도 못한 타국의 황자와 동맹?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사실을 기반해, 딤라가 로젤린을 만날 겸 최근 발타의 땅에서 큰일을 당할 뻔한 자신을 위로하고자 방문하셨다고 대충 둘러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먼 곳을 보며 그녀의 이름을 꺼냈다.
[흠…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라…….]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관자놀이를 손마디로 꾹꾹 눌렀다. 골치가 아팠다.
“로젤린 경을 숨기는 것은 임시방편도 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황제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으니 숨기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리카르디스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 거렸다. 손가락이 딱, 딱, 딱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를 둘러싼 측근들이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축복의 밤’에 대한 정보를 알면서도 마인인 로젤린 경을 내 곁에 머물게 하는 이유는 내가 그 의식에 대해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거기에다 그녀가 붉은수레바퀴라는 사실이 이점으로 작용한 듯해. 황제에게 붉은수레바퀴는 충실한 사냥개. 그리고 로젤린은 그 자식이니. 황제는 그녀 또한 제 손 위에 있다 생각하는 것일지도. 또한 황제의 미약한 신성력으로는 축복의 밤을 부를 만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니 그녀의 존재가 무용지물이지 않나. 그러니 그녀를 그저 검은달의 대항마로 내세우려 내 곁에 뒀던 것이다. 내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인물이니.”
클로에는 깃펜을 들었다. 종이에는 회의 내용이 아니라 꽃이나 하트모양의 낙서 따위로 도배되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그간 잠잠했던 이유를 따져 보자면 몇 가지를 더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로젤린 경의 존재가 점점 커져 가니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야. 좀 달래야 할 필요성이 있겠어.”
“어휴, 미운 47살.”
클로에가 펜대를 손 위에서 휙휙 돌리며 말하자 나단이 웃음을 꾹 참았다.
“무투 대회가 코앞이로군.”
“그대로 내보내실 생각입니까?”
“폐하께서 오늘 로젤린 경이 무투 대회에 나오는지 물어보더군. 나가야겠지. 준비된 무대에서 예정대로 활약하게 둔다. 마력은 보이지 않지만 무력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풀려진 소문이 입증되는 순간이며, 일라베니아 황실과 나란히 걸어온 붉은수레바퀴의 충실함이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다.”
“우승자가 되어 수많은 자가 우러러 볼 때에, 모든 영예와 영광을 황제 폐하에게?”
“생각보다도 그런 빤히 보이는 유치한 게 먹히기도 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것에 끔뻑 죽는 인간이고.”
다들 잘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결승이 끝난 후에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로젤린 경의 교육은…….”
“레이몬드에게 맡기겠어요.”
“그러고 보니 클로에, 결혼 준비로 바쁠 텐데, 오래 잡아 둬 미안하군.”
“어머, 걱정 안하셔도 괜찮답니다. 준비는 레이몬드가 혼자서도 빈틈없이 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 드레스를 고르러 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 복잡한 결혼 준비를 혼자서 하고 있다고? 심지어는 웨딩드레스도 혼자 고르러 가는 거야? 남자들이 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두 눈을 꾹꾹 누르던 리카르디스가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 로젤린 경에게 상대를 죽이지 말라고 얘기해 두는 편이 좋겠군.”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해 두겠습니다.”
스타스가 대답했다.
“내장이라든가, 눈알이라든가, 팔을 뽑는다든가,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한다든가. 아무튼 관객들이 잔인하게 느낄 법한 전투 방식은 안된다고도.”
“……적당히 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 * *
장관이었다. 로젤린과 그녀의 제자들이 대련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우르르 몰려왔다.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며 묵직한 일격을 날리는 레티시아, 정석적인 검술이 눈에 띄게 노련해진 에버하르트. 그리고 새로운 수습 기사 헤사는 가볍지만 날카로운, 변칙적인 공격을 사용했다.
같은 인물을 스승으로 두는 제자들은 비슷해지기 마련인데, 로젤린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모두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공통적인 점을 꼽자면, 무서울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막 하급 기사가 된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오랜 기간 하급 기사였던 자들에 비하면 아직 실전이 부족했지만, 실력만큼은 훌륭했다.
레티시아의 거대한 검이 로젤린을 향해 내려앉았다. 그녀의 붉은 갈색 머리가 머리끈을 탈출해 거칠게 흩어졌다. 하급 기사들에게 암암리에 붉은 사자라 불린다고 했던가. 레티시아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챙!
무식한 힘의 대결에 검이 비명을 질렀다. 다른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과연 로젤린을 업고 팔굽혀펴기를 백 개 넘게 하는 탄력적인 근육의 소유자다웠다.
로젤린이 검을 사선으로 쳐 올려 시선을 분산시키며 발로 레티시아의 무릎 관절을 공격했다. 퍽, 공격은 유효할 만큼의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레티시아가 다리를 들어 올려 정강이의 단단한 부분으로 그녀의 매서운 발길질을 막았다.
보통의 대련이라고 하면 검투와 박투를 나누어 진행하고는 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실제의 전투에서 검으로만, 주먹으로만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직접 체감했다. 갖은 암기와 더러운 수를 사용하며 제자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숱하게 겪은 결과,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초기 고전하던 모습을 탈피해 이제 제법 능숙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레티시아의 움직임을 눈으로 훑던 로젤린이 빙긋 웃었다. 큰 무기를 휘두르는 것치고는 빈틈이 크지 않다. 이정도면 합격선이었다.
로젤린이 뒤로 풀쩍 물러서며 대련의 끝을 알렸다.
“하, 하아……. 로젤린 경. 시합 전에 너무 격하게 움직이시…….”
태연한 로젤린의 얼굴을 본 레티시아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지 않았군요……. 격하게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레티시아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에버하르트가 건네주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헤사가 달려와 로젤린에게 시원한 홍차와 달콤한 쿠키를 내밀었다. 트레이 위에 티 매트까지 깔아놓은 완벽한 차림새였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소년을 미친 사람 바라보듯 했다.
“로젤린 경! 오늘은 날이 더워 산미가 더해진 과일 차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훌륭합니다. 새콤달콤 맛있습니다.”
“예. 새콤달콤.”
헤사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로젤린을 올려보았다. 무언가를 깊게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자, 소년은 그제야 만족한 듯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는 것이 기분 좋아 예상보다도 시간을 더 크게 할애했다. 헤사는 햇살 아래 조는 동물처럼 눈을 나른하게 깜박였다.
“로젤린 경. 이제 슬슬 가 보셔야 합니다.”
“이동하도록 합시다. 레티시아 경, 에버하르트 경.”
두 사람의 입이 쭉 째졌다. 누군가에게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살짝 마카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보다 커다란 제자들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귀여웠다. 로젤린을 필두로 두 명의 하급 기사, 한 명의 수습 기사가 뒤를 따랐다.
무투 대회에서 우승하는 자는 거액의 상금과 명예를 거머쥐었다. 다음 해의 무투 대회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대륙에서 최고로 강한 자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녔으니, 검 좀 다루고 싸움 좀 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축제라 할 수 있었다.
용병과 평민들의 참가 수가 참가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신청 또한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용기의 증명이고 자신감의 표출이며, 공적으로는 자신이 몸담은 기사단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한 하나의 선전 수단이었다.
때문에 하얀밤 기사단에서도 매년 많은 기사들이 참가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에서 무투대회에 참가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참가하라며 몇 명에게 권해 보기도 했으나 모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삶이 지루합니까? 굳이 왜? 무엇을 위해 나가야 합니까? 라는 식이었다. 그 어떤 다른 누구보다도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녀의 힘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우승은 로젤린이 따 놓은 당상인데 대체 무슨 영광을 보려고 몇 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드려 맞아야 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파르딕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 죽여 버려.”라고 했다가 부단장 나단에게 몹시 혼났다. 진짜 죽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지만 로젤린도 이제는 그런 말은 적당히 걸러 들을 정도로는 성장했기에, 뼈 한두 개 정도면 되는 건가? 하고 받아들인 상태였다.
타 기사단의 경우, 로젤린을 아니꼽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부풀려진 자극적인 소문들 사이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으므로.
그나마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마인이라는 사실 하나뿐인데, 일라베니아의 기사가 고작 마인 한 명에게 겁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무투 대회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고, 강한 자들이 여기저기 도사렸다.
로젤린이라는 기사를 시험하고 싶은 자들이 반, 그녀의 강함은 충분히 인지했으나 호기롭게 도전하는 이들이 반. 대기실을 가득 메운 거구의 남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어떤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 느긋한 태도가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실력에 기반한 자신감인지, 근거 없는 소문을 잡아먹은 자만감인지. 예선전은 비공개로 치러졌기에 아직까지 그녀의 실력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넓은 대기실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잇세리온이었다. 로젤린 혼자 참가자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하얀 제복도 제복이고, 몇 없는 여자 참가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머리색도 까맣기 때문인지 유독 눈에 확 띄었다.
“로젤린 경!”
“아, 비서관님.”
설마 무투 대회에 참가한 건가? 매일 책상 앞에서 머리를 굴리는 사람답게, 잇세리온은 주위 남자들의 딱 반쪽이었다.
‘하지만 체구가 강함을 결정하는 건 아니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함이 감돌았다.
“봐드리지는 않습니다.”
“아, 아니, 아니. 저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멀쩡히 있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요. 전하께서 경을 찾으셔서 온 겁니다!”
잇세리온은 등골이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경험을 했다. 로젤린은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라는 말을 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잇세리온은 다행이라는 그 말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이리라 직감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하.”
계단 아래에 있는 리카르디스는 오늘따라 더욱 빛났다. 그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에도 금사와 은사, 보석으로 치장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건국일이 가까워 질 즈음이면 황족들의 씀씀이는 헤퍼지고 치장은 화려해졌다. 오랜 기간 동안 대륙을 지배해 온 패왕의 저력을 보이는 것이다. 한낱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었으나 보여 주기식이 중요할 때도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것을 잘 알았다. 평소에는 황족 반지만 착용하고 다니며, 화려한 것이라고는 제 얼굴뿐인 그도 온갖 장신구로 꾸며야 하는 때가 왔다. 피할 수 없으니 그저 최대한 장신구의 개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뿐.
건국제가 있는 달이 오면 월장석 성,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서는 시녀와 그가 체스를 두는 게 어색한 풍경이 아니었다. 10개에서 시작해, 시녀가 이기면 장신구 하나 더, 리카르디스가 이기면 장신구를 하나 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치사해도, 치사해도 이 정도로 치사할 수가. 머리 좋기로 유명한 황자와 정규교육만 겨우 받은 하급 귀족 출신 시녀의 체스 게임. 이게 말이 되냔 말이다.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내기였다. 때문에 장신구의 개수는 항상 3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시녀들이 클로에나 잇세리온에게 도움을 요청한 결과였다.
그런데 올해는 이게 무슨 횡재인지. 리카르디스가 치사하고 구질구질하게 체스 게임 운운하지 않고, 가만히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영혼까지 끌어 모아 그를 치장했다.
밝아지는 시녀들의 표정만큼 리카르디스의 표정은 가라앉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우시다, 누가 보석인지 모르겠다는 헛소리들을 들어서 슬슬 열 받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것을 좋아하던 누군가를 위한 치장이었는데, 이게 뭐하는 미친 짓인지 공허한 마음이 들쯤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로젤린의 표정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녀의 살짝 열린 틈새로 느릿한 숨이 내뱉어졌다. 열에 가득 찬 눈동자였다. 리카르디스는 목을 가다듬으며 달콤한 고뇌와 함께 꿀꺽 침을 삼켰다.
“흠, 음. 로젤린 경, 몸 상태는 어떤가?”
형식적인 질문에 로젤린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구름같이 부드럽고 봄바람처럼 따뜻한 감정을 단 한 번도 담은 적 없다는 듯. 매섭고 사납게. 덕분에 리카르디스도 진정할 수 있었다.
“만전의 상태입니다.”
눈빛이 형형했다. 그 한마디로 전투 상태로 돌입한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다치지 마라. 그대는 이런 쓸데없는 행사로 다쳐도 될 사람이 아니야.”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았다. 중요한 행사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낸 리카르디스가 입가를 만지며 웃었다.
“그대가 이겨 봤자 좋은 거라고는 고작…… 내 기분?”
“아.”
로젤린은 제 가슴 중앙에 손을 내려놓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무척 중요한 행사로군요.”
리카르디스는 잠시 누구한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곧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가리고 몇 초간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었다. 로젤린은 그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무투 대회를 성공리에 끝내겠다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전하.”
“그래, 로젤린 경.”
“결승전에서 이긴 다음의 절차에 대해 레이몬드에게 배웠습니다.”
무투 대회의 우승자는 황제에게 직접 검을 하사받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런데 아직 32강전도 치르지 않은 로젤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제 자리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자의 영예를 전하께 바치고 싶었는데, 계속 황제 폐하께 바치라고 그래서…….”
로젤린이 우물우물 뒷말을 흐렸다.
“꼭 하라고 해서 폐하에게 하기는 할 겁니다만,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말하는 요지를 깨달았다. 그가 숨기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영예와 영광을 바친다 어쩌고 하는 의례적인 말들이 마음에 걸린다는 거다. 자신이 충성한 것은 리카르디스, 2황자이니.
“해도 된다. 그래도 그대는 나의 기사가 아닌가.”
목소리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로젤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치지만 마라.”
“다치지 않습니다.”
“빨리 돌아와라.”
“금방 끝내겠습니다.”
잇세리온이 대기실에 있을 모든 참가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리카르디스는 머뭇거리다 한 발짝 그녀에게 더 다가갔다. 사이로 사람 하나도 못 지나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로젤린이 시선을 위로 올려 리카르디스를 쳐다봤다. 당혹스러운지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었지만 결코 다른 곳을 향하지는 않았다.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어떤 경계도 의심도 없이 이 거리를 받아들이는 로젤린의 모습에 리카르디스의 가슴 안쪽이 간지러워졌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흐르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간질, 간질. 얼굴 표면부터 느껴진 감각이 손끝까지 펴져서 로젤린은 몸을 굳혔다.
리카르디스의 큰 손이 로젤린의 귀와 턱, 목 부분을 덮었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목의 살갗을 스쳤다. 닿은 부분이 예민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얼굴이 가까워져 로젤린은 눈을 꾹 감았다. 곧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제 눈을 가렸다.
“이것은 내 가호다.”
따뜻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말랑한 볼을 슥 쓸었다.
“그러니 반드시 승리해라.”
막 볕에 말린 이불에 폭 쌓인 기분이었다. 한참 몽롱한 꿈의 경계선에 걸쳐 있던 로젤린은, 달큼한 냄새에 눈을 번쩍 떴다.
여태껏 리카르디스의 미모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미처 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눈을 감고 있자 마치 꿀 같은, 황홀한 디저트 같은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그의 체취와 섞여 그녀의 본능을 일깨웠다.
로젤린이 코를 킁킁 움직이며 한층 그에게 다가섰다. 목에 다가갈수록 향이 짙었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 떨었다. 로젤린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냄새를 맡던 그녀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들던 와중, 그녀의 코가 리카르디스의 턱을 가볍게 스친 탓이었다.
“전하에게서…….”
시선이 딱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눈동자 속에서 욕망을 읽어냈다.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 분위기 지금 뭐야. 나쁘진 않은데 뭔가 좀……. 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의미 없는 반항은 끝을 맞이했다. 등에 벽이 턱 닿았다.
“부드럽고.”
로젤린의 눈이 나른하게 가늘어졌다. 그녀가 리카르디스의 허리 옆의 벽을 제 손으로 짚었다.
“달콤한.”
리카르디스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잘생기고 박력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경? 어디 계십니까?”
바로 그때, 시합 준비를 돕는 사람이 그녀를 찾았다. 한 마리의 맹수와, 그 맹수에게 먹히고 싶어 하는 이상한 먹잇감의 기묘한 대치는 끝을 맞이했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를 올려 보는 눈동자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기고 오겠습니다. 모든 것은 전하를 위해.”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 중이었지. 굳어있던 리카르디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로젤린을 배웅했다. 잇세리온이 저 멀리 뒤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전하…… 가시밭길을 걸으시는……우리 가엾은…….
* * *
예선전은 이틀 전에 끝났다.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은 1차적으로 걸러진 실력자들뿐이었다. 한 번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남자들의 태도는 거칠고 호기로웠다.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다닌다거나, 시선이 마주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기 싸움을 했다. 여기저기에서 험악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에도, 로젤린은 찬찬히 제 검을 훑어볼 뿐이었다.
“2조 32강전 준비해 주십시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
그녀가 일어서자 모든 사람이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떨치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남자들에게는 영웅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에게는 꿈에서 그리던 멋진 기사님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는 기회의 장, 무투 대회. 그 인기는 매년 폭발적이었으나, 올해는 암표 상인이 다섯 배로 늘어날 만큼 열기가 더욱 뜨거웠다.
붉은 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소문의 그녀! 일라베니아의 마인! 상상만 하던 그녀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삼십 년, 아니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로젤린의 출전으로 무투 대회 관할 행정원들만 죽어 나갔다.
로젤린이 미리 좋은 자리를 구해 놓은 덕에 칼릭스는 느긋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마차가 무투회장 앞에 도착했다. 하인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는 어떤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평범한 마차 속의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검은 머리, 녹색 눈동자! 붉은수레바퀴였다.
“어어! 아, 죄송합니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디서 온 줄 뻔히 알면서 귀찮게 묻기는. 하지만 그 또한 열심히 일하는 중이니 딱히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릭스는 표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들뜬 기색으로 친절을 발휘하려던 남자는 제안이 거부당하자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릭스는 남자의 태도가 ‘칼릭스’가 아닌, 제 누이 ‘로젤린’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직감했다.
평민들이 들어가는 입구 쪽을 흘끗 바라보니, 한 중년 남자가 [내 전 재산을 부탁해 로젤린!] 이라고 적힌 반듯한 직사각형의 천 조각을 들고 있었다.
“…….”
뭐, 인기가 대단했다. 비록 삐뚤어진 일확천금의 꿈을 가진 자의 성원이라 할지라도, 평판이 나쁜 것 같진 않아 안심이었다.
‘2-7……2-…….’
계단을 오르며 표에 적힌 자리를 찾던 칼릭스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지정된 자신의 좌석 옆에 낯익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 은색 눈동자. 순한 인상의 얼굴과 작은 체구를 가진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 클로에였다.
클로에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 올려 보였다. 의외라기보다는, 왜 이제 왔느냐 하는 타박성 짙은 표정이었다.
“클로에 영애.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요. 앉으시는 편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칼릭스 경. 뒤에 계신 분이 기다리시네요.”
“아, 이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영애.”
우물쭈물하던 여인 한 명이 칼릭스의 사과에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두 손 꼭 쥐어 용기내고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어 보려 했으나, 칼릭스는 이미 자리에 앉은 후였다. 여자가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칼릭스는 자리에 앉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클로에가 있다면 레이몬드도 있을 줄 알았는데. 큰뿔산양의 기사들은 보이는 반면 그는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요즘 굉장히 바쁘답니다. 매년 어김없이 반복되는 축제라 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수도로 사람이 몰리는 시기이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슬슬 시작하려는 것인지 대회의 진행을 원활하게 도울 병사들이 나와서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다. 칼릭스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를 돌리며 손장난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말할 생각이시라면…….”
옆을 슬쩍 보니 클로에가 풋,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없네요.”
“제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로젤린 경을 안다고 그 동생까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유명한 용병왕과 황실 제 2기사단 ‘깊은숲’의 상급 기사가 경기장에 올라 왔다. 종이 세 번 울리며 대회가 시작되었다. 변칙적인 용병들의 검술과 정직하고 파괴력 있는 황실 정통 검술의 격돌은 지루한 대련과 달리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았다. 클로에도 추임새를 넣어 가며 관전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남자의 결투를 바라보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다더니, 확실히 볼 만하군요.”
클로에는 한참 어린 남자의 말에 담겨있는 승부욕을 읽어 냈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그녀는 호선을 그린 입술을 부채 아래로 감췄다.
“용병왕에 금화 한 개.”
클로에의 말에 칼릭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깊은숲에 걸어 보죠.”
둘 다 말없이 관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한참 밀리던 용병왕이 갑자기 기세를 바꿔서 미친 듯 무기를 휘둘렀다. 매서운 일격들이 계속 이어지며, 깊은숲의 상급 기사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용병왕의 승리였다. 와아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승리자 용병왕 페이던! 페이던!
클로에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칼릭스도 경기장을 주시한 채 주머니를 뒤져 금화 한 개를 그녀의 손바닥에 놓았다.
“누가 봐도 황실 기사의 승산이 높지 않았습니까?”
“그런가요? 참고로 저 용병왕 페이던은 상단 일로 몇 번 만나 본 적 있답니다. 초반에 고전하는 척 해 달라는 부탁을 잘 들어줬지 뭐예요?”
“…….”
“그런 눈빛으로 볼 필요는 없어요. 상대가 강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상대가 어떤 검술을 쓰는지,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그 정도는 알 수 있으나 강함의 척도는 숫자와 글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저 역시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없답니다.”
칼릭스의 집요한 눈빛에 클로에가 부채를 펴서 제 얼굴을 슬쩍 가렸다.
“물론 저 상급 기사보다 페이던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요.”
역시 알았잖아……. 칼릭스의 부루퉁해진 표정을 보고 클로에가 눈웃음을 지었다. 뚱한 얼굴이 로젤린과 아주 판박이였다.
“다음은 강철발굽 백작가와 물보라 기사단의 대결이로군요. 물보라가 이길 거예요.”
“이쯤 되면 점쟁이가 따로 없군요.”
페이던과 패자가 경기장을 내려가고, 두 사람이 올라왔다. 사회자가 그들의 이름을 쩌렁쩌렁 외쳤다.
“강철발굽 백작가의- 충실한 기사! 윌로스 경!”
“황실 제 4기사단. 물보라의 하급 기사- 핀 경!”
결과는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칼릭스 경. 저는 앞으로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할지 알 것 같아요. 물론 모두 최후의 승자는 예상하고 있을 테지만, 그 과정까지 짚어 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겠어요?”
“좀 힘든 일, 정도로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까?”
“그럼요. 생각보다도 황금정원의 귀는 아주 넓게 열려 있어요.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사람이 있는 곳에 정보가, 정보가 있는 곳에 돈이. 제 지론이에요.”
상단과 정보 단체를 이끄는 사람다운 말이었다.
“저는 사소하다 말할 수 있는 정보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랍니다. 그 노력이 칼릭스 경께서 놀라워하신……이 대회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했어요. 심지어는 오늘 만나지도 않은 레이몬드의 속옷이 연분홍색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답니다. 대단하지요?”
“아니요. 저는 그 정보, 알고 싶지 않습니다.”
칼릭스가 정색하자 클로에가 살짝 웃었다. 눈꼬리가 처져 더욱 순하게 보였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요? 칼릭스 경이 그런 어마어마한 행위를 강압적으로 그분에게 몰아붙일 것이라고! 저는 정말 상상도, 예상도, 짐작도 못했어요.”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한 행위라니. 굉장히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자극적인 문구였다. 물론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2황자 리카르디스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고 조목조목 짚어 가며 말할 수 없기에 우회한 표현이겠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껄끄러웠다.
물보라 기사단의 하급 기사가 승리했다.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하인들이 부지런히 치웠다. 클로에는 팔짱을 낀 채 경기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저는…… 예상 못한 요소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칼릭스 경.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잘 만들어진 배가 한 척이 있어요. 하지만 순항을 결정하는 것은 배의 능력만이 아니죠. 바다가 잔잔하길, 그 속에 송곳처럼 튀어나온 암초가 없길 바라야 해요. 여기서 우리는 그날의 날씨와, 암초의 위치를 습득해 폭풍과 암초를 피해갈 수 있겠죠. 하늘에 맡긴다, 운에 맡긴다. 저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늘에 맡길 때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끝낸 후 뿐이에요. 그리고 생각보다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폭넓고, 깊고, 끝없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클로에는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암초같이 갑자기 튀어나온 칼릭스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피를 보는 것 자체도 불쾌한 듯 보였다.
“말이 길어졌네요. 요컨대, 칼릭스 경이 그분에게 갑작스럽게 밀어붙인…… 어마어마한 그 행위는…….”
“표현을 좀 바꾸면 안 됩니까?”
“어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무튼, 제국의 굵직한 일 정도는 제 노력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칼릭스 경은 그렇지 않았으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칼릭스는 그녀가 의문스러워 하는 부분을 충분히 이해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후계자가 갑자기 길을 벗어나다 못해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으니. 솔직히 그 자신도 살짝 미친 짓 같다 생각했다. 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더욱 경악스러웠으리라. 충성 맹세를 했을 때의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위는 함성 소리로 시끄럽고 먹먹한 가운데 두 사람의 침묵은 그보다도 무거웠다. 한참 뒤 칼릭스가 대답했다.
“그분에게 이미 말씀드렸으며, 또한 그분 또한 이해하셨으리라 믿었습니다만.”
“건너건너 듣는 얘기는 생각보다 제게 큰 믿음을 주지 못하더군요.”
“건너건너 듣는 얘기로 판을 짜시는 분 치고는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군요.”
클로에가 씩 웃었다. 어찌 보면 건방질 수도 있는 말이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우가 다르니까요. 이것은 키를 쥐고 있는 선장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앵무새 역할을 맡고 있는 저에게도 중요하답니다. 배에 타려는 선원을 정하는 것은 선장이지만, 앵무새도 저 선원이 일을 잘하나 못하나 정도는 궁금할 수 있잖아요.”
참신한 표현이 웃긴지 칼릭스가 슬쩍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클로에가 타박하듯 부채로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탁. 소리는 당연히 묻혔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다들 울부짖는 수준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등장이었다.
저 멀리 땋은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늘어트린 로젤린이 보였다. 건물에서 막 나와 햇빛을 받는 그녀는 노곤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클로에가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칼릭스는 주머니를 뒤지며 슬쩍 일어섰다. 로젤린의 등장에 펄펄 날뛰며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그가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여전히 앉아 있는 클로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손에 들린 것을 쫙 펼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찾아보니 가판대에서 팔더군요. 몇 개 더 사 놨는데 필요하면 드리도록 하죠.”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하며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아버지가 나와도 우승은 로젤린]
칼릭스가 체면도 버리고 열심히 천 조각을 흔드는 모습을 본 클로에는 눈물을 닦아 내야만 했다. 이게 그 대답인가. 누이 사랑이 지긋하단 말이렷다. 생긴 것보단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무투회장이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환호성 때문에, 시합은 진행되지 못하고 잠시 미뤄졌다.
* * *
로젤린의 상대는 불화살 용병단의 단원이었다. 용병단의 유명세와 더불어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자였다. 사절단의 일만 아니었더라도 카델, 그가 더 유명했을 정도였다.
로젤린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거구의 남자는 사나운 인상을 찌푸려 더욱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수염이 숭숭 나 있는 거친 남자들이 관중석에서 카델의 이름을 연호했다. 저 쥐방울만한 계집에게 본때를 한번 보여 주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병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한껏 움츠러든 뒷모습이 초라했다.
넓은 경기장 위에 남자의 흉흉한 기세가 가득 찼다. 진행 요원이 진땀을 흘리며 카델의 눈치를 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과 더불어 조치에 들어갑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두 대전자 사이에 끼어 있는 남자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자기소개입니다……. 물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델이 껄렁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디 한번 그 잘난 솜씨 좀 보자고.”
남자의 협박을 멍하니 흘리던 로젤린은 그의 뒤쪽 관중석에서 천 조각을 흔들고 있는 칼릭스를 발견했다.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카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왜, 왜 날보고 웃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로젤린이 손을 번쩍 들어 붕붕 흔들었다. 칼릭스가 천 조각을 바꿔 들었다.
[사랑해요 로젤린]
칼릭스가 있는 방향의 관중석이 난리가 났다. 날, 날보고 손을 흔드셨어! 날 보고 웃으셨어! 착각이 파도처럼 우르르 일어났다.
카델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는 중이었다. 진행요원이 매우 지친 표정으로 “집중해주세요…… 이제 시합 곧 시작 하겠습니다…….” 하고 말 안 듣는 두 참가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두 사람이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자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만이 올라와있는 경기장에 전쟁터와 같은 흉흉한 기운이 가득 찼다. 바람이 칼날을 지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뎅, 무거운 종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은 검을 들었다. 카델도 들고 있는 검을 꽉 그러쥐었다.
뎅, 두 번째 종이 울렸다. 눈과 눈이 서로를 포착했다.
뎅. 세 번째 종이 울리며 시합이 시작되었다.
쿠우웅…….
큰 타격음이 종소리의 여운을 뚫고 공간에 울렸다. 사각형의 경기장 밖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났다.
“어?”
“지금 무슨 일이…….”
구경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경기장을 벗어나 벽에 처박혀 있는 게, 오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이 맞나? 바닥에서 한참 떨어진 위쪽에 박혀있던 카델이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처참한 패배자의 모습에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카델이 맞다!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눈 깜짝할 새 승패가 갈렸다. 바람같이 돌진한 로젤린은 상대가 무기 한번 휘두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비! 저 극악무도함! 남자들이 온갖 괴성과 짐승 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여자들도 비명을 지르며 들고 온 꽃을 경기장 안으로 던졌다. 앞선 경기들 또한 훌륭했으나,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승리는 오직 확연한 실력 차만이 이뤄 낼 수 있는 것이므로.
진행자는 멍한 얼굴로 그녀와 카델을 번갈아 보다가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스, 승리자는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에스터!”
우수수 꽃비가 내렸다. 로젤린은 몸을 곧게 펴고서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기사의 경례에 무투회장은 다시 한 번 터질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병사와 신관, 의사가 카델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뒤로, 로젤린은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전자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 마련이었다. 신관이 언제나 대기 중이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몇십 분 동안 생사를 건 격투로 소모된 심력을 채울 수는 없었다.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며칠이나 걸리는 이유였다.
오늘은 16강전과 8강전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이틀 전 구매했던 표는 그 당일에만 사용 할 수 있기에, 오늘은 새로운 표를 사야했다. 덕분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돈도 돈인데, 구하는 일 자체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려웠다. 평민뿐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하지만 몇몇 귀족들과 건국을 축하하러 온 타국의 왕족들은 초대권이 있었기에 자리싸움 따위는 먼 얘기…… 여야 했는데. 싸움은 치열하면 더 치열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누구 옆에 앉느냐’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오전에 치러진 16강전 뒤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돌아왔다. 비어 있던 자리가 하나둘 채워질 쯤 그들은 유달리 눈에 띄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선 경기에는 없던, 발타의 유력 후계자 하카브 왕자였다.
하카브의 오른쪽에는 그의 동생 간제가 앉아 있으나, 왼쪽 자리는 비어 있는 상태였다. 힐끔힐끔 눈치 보던 작은 왕국, 마람의 왕세자가 그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갔다. 비어 있는 왼쪽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카브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간제를 향하고 있던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망설이던 왕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격조 하였습니다, 하카브 왕자.”
하카브는 그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웃었다.
“격조라. 저희가 만난 적 있습니까?”
남자의 얼굴이 발개졌다. 과거 타국에서 만난 적 있으나 그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자기소개부터 다시 해야 하나 갈등하고 있을 때 하카브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농담입니다. 알세 마람. 왕세자의 얼굴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마람의 왕세자는 불쾌한 농담에도 불구하고 하카브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색을 지었다. 간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하카브를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에 쥐락펴락. 아주 가지고 논다 놀아.
그사이 알세 마람은 하카브에게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느냐 물었다.
“이런, 왕세자. 미안합니다. 자리를 잡아 놓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쯤 알고 있으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해해 줄 수 있습니까?”
“아, 그, 그럼요. 하하.”
“어찌나 배려심 깊은지. 연회 때 뵈면 마저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아, 그…….”
“즐거운 시간되시길.”
하카브가 웃는 얼굴로 왕세자를 쫓아냈다. 왕세자는 떠나는 중에도 그를 흘끗흘끗 돌아보았다.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고 싶은 모양인데 하카브가 다시 간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니 방도가 없었다.
이후로도 마람 왕세자가 거의 잡상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몇 명의 도전자가 하카브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일 분을 넘기지 못하고 다른 자리로 떠나야 했다.
옆이 소란스러운데도 간제는 팔짱을 낀 채 무투회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카브가 간제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머리에 제 머리를 콩 대었다.
“인기가 많은 것도 피곤하구나. 뭘 그리 보니, 간제. 아직 시합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냥요.”
“그냥 뭐?”
하카브가 그녀를 감싼 어깨에 힘을 줬다. 간제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의 손을 떨쳐 내었다.
“사람들의 머리통을 구경중이에요. 방해하지 마시죠, 오라버니. 거슬려요.”
“머리통? 왜. 따다 주련?”
“알록달록해서 신기하잖아요. 리비타에는 검은색뿐이니.”
“그렇지? 나도 사실 적응이 안 된다.”
하카브는 뭐가 웃긴지 호탕하게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간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곱게 정리했다.
“간제. 내 옆에 누가 앉을지 맞춰 보겠느냐?”
“바이페렘.”
“똑똑하구나.”
“모르는 쪽이 멍청한 거지요.”
“그러게 말이다. 멍청한 놈들이…… 너무 많아.”
하카브는 흠 숨을 짧게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를 탐내는 눈빛들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간제는 그의 웃는 표정의 진정한 뜻을 읽어 냈다. 아까 자신에게 말한 것처럼 머리통을 죄 따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바이페렘.”
하카브가 아까 하던 말을 이어했다.
“어느 쪽을 말하는 걸까.”
어느 쪽이라? 간제가 말한 ‘바이페렘’은 당연히 딤라였다. 현재의 바이페렘 관디테가 딤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간제는 지금 제 오라비가 말한 ‘바이페렘’이 딤라가 아닌 관디테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린애를 기다린다고? 간제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바이페렘 관디테는 말을 할 줄 아는 나이긴 한가요?”
관디테는 다가오는 생일에 11살이 되는 나이라 했다. 그 얼마 안 되는 나이보다 두어 살 어려보이는 외양이긴 했으나 당연하게도 일고여덟 살도 말은 할 줄 알았다. 간제는 소녀를 갓난쟁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소녀가 말을 이해하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할 만큼 성장했느냐 의문스러워 하는 것이었다. 하카브도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옹알이는 하던데 말까지는…… 글쎄. 우선 만나 봐야겠지.”
“섭정관이 있으면 말 한마디 붙이는 것도 힘들 텐데요.”
“어제 우연히 일라베니아의 신관들이 라고슈 사절단이 머무는 성에 들렀다는 소식을 들었지. 섭정관의 건강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야.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라는 말을 담는 남자는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간제는 심사가 조금 뒤틀렸다.
“웃지 마세요, 오라버니. 꼴 보기 싫어요.”
“이놈 간제. 대체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그때 입구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다. 시종 몇을 데리고 온 바이페렘 관디테였다. 하카브의 예상대로 딤라는 보이지 않았다.
빈자리를 탐색하는 관디테를 발견한 하카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다가서자 시종들이 관디테에게 한 발짝씩 더 붙었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기색을 보이다 시종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시종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런, 바이페렘이 아니십니까. 운명적인 만남이로군요.”
“왕자.”
소녀는 자신보다 근 두 배가 커 보이는 하카브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얼굴에는 경계의 빛이 올라와 있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제가 자리를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소녀의 시선이 뒤에 있는 시종을 향했다. 그는 결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깜박, 깜박. 관디테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서 손쉽게 갈등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카브의 위험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정중하게 건네 온 요청을 물리치자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왕자.”
하카브가 씩 웃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제 옆자리로 관디테를 안내했다. 하카브라는 껄끄러운 인물을 제외하자면, 키가 작은 관디테에게도 잘 보일 만한 좋은 자리였다. 문제는, 큰 의자에 앉으려니 그녀가 낑낑거리며 올라가야할 만한 높이였다는 것이다. 왕의 위엄과 체면이 땅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관디테가 망설이자 하카브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바이페렘.”
그러고는 제 큰 손을 내밀어 그녀의 무릎 위치쯤에 대었다. 누가 보아도 밟고 올라가라는 얘기였다. 관디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내드린다 했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바이페렘. 제 어깨를 잡으시고 올라서면 됩니다.”
무릎을 굽히자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소녀가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하카브의 어깨를 잡고 밑에 있는 손을 밟았다. 관디테가 무게를 실어도 그의 손은 미동도 없이 소녀를 받치고 있었다. 하카브는 손을 올려 소녀가 앉는 것을 돕고 나서야 자리에 착석했다.
간제는 웃는 얼굴로 바이페렘에게 인사했다. 관디테도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하카브는 두 사람이 인사하는 것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로젤린 경을 보러 오셨습니까, 바이페렘?”
관디테는 흠칫 몸을 굳힌 일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도도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일라베니아의 용맹한 전사들을 보러 왔다.”
“그 어느 용맹한 자라 하더라도 혹한을 이겨 낸 라고슈의 전사만 하겠습니까.”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가 기쁜 듯 감정을 조금 내보였다. 간제는 환장할 것 같아 관디테를 따라온 시종들을 흘겨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보호자도 없는 저 어린아이를 독사 굴로 데리고 온 건지. 라고슈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운다더니, 빈말이 아닌 듯했다.
관디테는 경계를 아주 지우지는 않았지만, 나름 즐겁게 하카브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어려운 말과 정치 용어를 빼고, 자신이 본 라고슈의 눈 덮인 산, 굳어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결정, 해안가에 남아 있는 고래의 뼈 등. 그 놀라운 광경이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졌는지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듯 조곤조곤 풀어 냈다.
하카브의 얘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관디테는 동물처럼 바짝 털을 세우고 경계하는 모습을 누그러트렸다.
“테라스로 한번 나갔다가 위에서 얼어붙는 얼음덩어리…… 이름을 들었는데 까먹었군요.”
“고드름이다.”
“예, 고드름이 떨어져서 머리를 맞고 휘청거리다 얼어 있는 바닥을 밟아 미끄러졌지 뭡니까. 아무도 못 본 것이 그나마 위안입니다.”
“아하하!”
소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카브는 소녀를 따라 웃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날이 플로에토와 만난 첫 날입니다. 바이페렘.”
관디테의 표정이 딱 굳었다. 유폐된 전 바이페렘의 얘기가 나오니 다시 경계의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에 대해 많은 말을 들으셨을 겁니다. 위험하다, 나쁘다. 대륙에 피바람을 몰고 오는 자라고. 그 어떤 것도 변명하지 않을 테지만, 제가 구태여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플로에토, 그녀만큼은…….”
하카브의 눈동자는 저 먼 라고슈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진정 라고슈를 위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이 거대한 대륙에 아버지를 자처하는 일라베니아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 거대했고, 또 다른 힘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녀가 나라를 팔아먹은 여왕이라는 오명을 감수하고도 저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모두 라고슈를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라고슈의 행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슈의 위대한 뜻을 품고 있으나, 방향이 달랐을 뿐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절자, 배신자. 수많은 오명이 플로에토를 둘러싼 지금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바이페렘. 부디.”
하카브가 제 입술을 질근거렸다.
“그녀를 용서하라, 어두운 곳에서 꺼내 달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플로에토가 왜 저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한번만 생각을 해 주시길 청합니다. 바이페렘께서 보셨던 라고슈는
어땠습니까……. 대륙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막 즉위하신 바이페렘께 이 이야기는 너무 가혹하리란 것을 압니다. 하지만 라고슈의 추운 땅을 밟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형제.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킵니다. 그런 형제들이 하나둘 죽어 가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위대한 바이페렘. 라고슈의 영원한 서약이시여. 그 소리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대사 준비해 왔나? 아주 말이 강같이 흐르네. 간제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괜 채 하카브의 헛소리를 감상했다. 어리다고는 해도 지금의 바이페렘 또한 플로에토가 실각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관련되어 하카브가 위험하다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처음 소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라고슈에 대한 얘기로 경계심을 조금 풀고, 금기나 다름없는 화제를 직접 꺼내어 어린 소녀를 흔들었다. 플로에토를 그리는 눈빛에서 모두가 위험하다 손가락질 한 남자의 진실어린-진실 어려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카브의 보기 역한 연극이 진심처럼 보이는 이유는 출중한 연기 실력뿐 아니라, 그가 한 말들이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많은 형제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아버지로 누릴 것은 누리되 죽어가는 땅을 외면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아득바득 모아 그러쥐고 남은 영광 한 톨 새어 나갈까 전전긍긍하기만 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비단 라고슈뿐만이 아니었다.
관디테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카브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관디테는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래를 보던 시선을 하카브에게 옮겼다. 하카브가 애절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 지었다.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으셔도 되니, 부디 라고슈의 형제들을 살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두서없는 말로 바이페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시합을 알리는 사람이 나와 소식을 알렸다. 로젤린의 대전자가 기권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등장하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이 일시에 아쉬운 소리를 냈다.
관디테는 로젤린의 경기 소식에도 하카브의 얘기를 반추하는 듯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녀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카브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시든 만디라.”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카브의 표정이 의문스럽다는 듯 바뀌자 소녀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라고슈 높은 곳에서 자라는 만디라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만큼 귀중한 약초다, 왕자. 시든 만디라. 만디라가 시들어 봤자 만디라지. 조금 상하거나 형태가 변하는 걸로 값어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라고슈의 속담 중 하나다”
부연 설명이 있어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왕자에게 일라베니아는 시든 만디라인가 보군. 하기야 과거의 광영이 줄었을지언정, 쉬이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니. 형세는 비등한 것인가 왕자? 라고슈의 힘이 발타에 실리지는 못해도 일라베니아에 실리면 안 된다라…….”
하카브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옆에 있던 간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 어린 영양같이 눈을 깜박이던 초식동물이 기세를 싹 바꾸었다. 하카브의 말에 경계를 내보이던,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모습마저도 전부 가장에 불과한 것 같았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이 몸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러는지는,”
관디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알겠다. 섭정관은 나이 들고 라고슈는 아직 혼란하다 이 말인가. 전 바이페렘의 얘기까지 꺼낸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아직 완전히 그 일파를 뿌리 뽑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소녀는 표정 없이 하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 경의 경기가 취소되어 매우 상심할 뻔했으나, 오늘의 외출은 이 몸에게 값졌노라. 왕자가 재밌는 얘기를 들려 준 덕이다.”
같잖지도 않은 연극 한 편 잘 보았다는 어투였다. 간제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가 제 입을 가렸다. 네 발로 걷던 애완동물이 두 발로 걷는 걸 본 느낌이었다. 관디테가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기대되어 새벽 늦게까지 자지 못해 피곤하다. 왕자, 내려가는 것을 도와다오. 이제 슬슬 이 몸의 낮잠 시간이다.”
하카브는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아까와 같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을 받쳐 주었다. 소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손을 밟은 후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감사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간제는 당장 쫓아가서 소녀의 볼에 키스하고 싶었다. 간제의 엉덩이가 들썩이던 그 때, 소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하카브를 보며 소녀가 생긋 웃었다.
“하카브 위 리비타. 이 빚은 언젠가 갚도록 하겠다.”
아주 가까운 과거에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하카브는 총총 멀어지는 어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참 후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딤라를 아주 빼다 박았군. 라고슈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정말 정이 안가. 내 아내들이 그립구나.”
간제는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흐흑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몸을 떨어 대며 웃고 있자 하카브가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놨다.
* * *
첫째 날
32강전 4초
둘째 날
16강전 21초
8강전 0초(부전승)
셋째 날
4강전 23초
준결승전 45초
누가 승자가 될지, 누가 패자가 될지 알지 못해 두근거리며 가슴 졸이던 매해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4초 만에 승리한, 전무후무한 성적의 참가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부전승 제외하면 역대 가장 빠른 승리였다.
32강전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첫 경기 이후로 모두 확신하게 되었다. 믿기 힘들던 그 소문들이 진실에 매우 가깝다고. 정말 딱밤으로 암살자를 죽였단 말인가? 정말로 콧김을 불었더니 암살자들이 날아갔단 말인가? 물론 영 아니올시다 싶은 소문들도 여전히 섞여 있었으나, 다들 믿는 기색이 역력했다.
8강전까지 치러진 두 번째 개방일로부터 이틀 뒤. 다시 무투회장이 열렸다. 오늘도 로젤린은 4강전과 준결승전에서 멋지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32강전의 상대, 불화살 용병단의 카델은 신성력은 뛰어난 신관이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로젤린도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다음 경기부터는 조금 더 힘을 풀고 상대하기 시작했다.
21초, 23초, 45초. 모두 1분은 넘지 못했으나, 로젤린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상대들을 많이 봐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45초의 결투 후, 로젤린은 다시 경례를 했다. 승리 이후에 항상 보이던 모습이었다. 몇몇 승리자처럼 물구나무를 선다든지, 한쪽 눈을 감으며 키스를 날린다든지 하는 요란한 행위를 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모습보다 강렬하게 관중들에게 새겨졌다.
어린아이들이 그녀를 흉내 내어 주먹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고 눈동자는 투명하게 반짝였다.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올곧다. 강하고, 멋지고, 정의로운. 좋은 수식어가 잔뜩 붙어있는 자만이 쟁취해 낼 수 있는 자리였다. 동경의 대상이란 것이 대개 그러하듯이.
꽃비 속에서 경례하던 로젤린의 모습은 칼릭스가 봐도 설렐 정도였다. 개국 이래로 이렇게 멋진 기사가 있었나? 아마 없었을 것이다. 칼릭스는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뭐랄까…….
칼릭스는 말을 잃어버렸다. 다음에 커서 로젤린 경과 결혼하고 말겠다는 소녀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아니 그 소녀의 어머니가 “신분 차이가 너무 커서 안 될 거야.”라고 얘기한 다음부터였던가.
아무튼 단순히 신분 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인지, 칼릭스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물들어 있었다. 울지도 자리배치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을 본 클로에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오늘도 그제와 똑같은 자리 배치였다.
“미래의 매형이 매우 아리땁네요, 칼릭스 경.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게 흠이 될까요?”
“……제국…….”
“제국 법상 동성혼은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말은 말아요.”
칼릭스는 진절머리 난다는 식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레이몬드와 클로에가 어떻게 만나 어떻게 사귀게 된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은데…….
클로에는 [남편이 나와도 우승은 로젤린] 이라 적혀 있는 천 조각을 들고서는 흥겨운 축제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귀자고 먼저 말한 사람도 레이몬드고, 먼저 청혼한 사람도 레이몬드예요.”
“혹시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라도 있습니까?”
“어머? 설마요. 정말 재밌는 분이라니깐.”
말을 말자.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옮겼다. 경기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이동하는 로젤린이 보였다. 가까운 관중석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자리 싸움에 져서 무력하게 밀려나 있었다. 승리자들은 그 남자 군단의 반이나 될까 싶은 가느다란 아가씨들이었다. 다들 손수건과 꽃다발 따위를 로젤린에게 내밀고자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친 상태였다.
“로젤린 경! 여기 한번만 봐 주세요!”
“경! 제 손수건을 받아 주세요!”
“로젤린 경!”
여자들에게서 전운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그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맹수들의 격돌 같았다. 그리고 난간은 맹수들의 거친 싸움을 버텨 낼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삐걱 소리와 함께 난간 한 쪽이 우그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리를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두었던 여자 두 명이 비명을 질렀다. 치마가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가느다란 몸뚱이가 바닥을 향했다. 칼릭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갖은 환호와 소란 속에서 로젤린은 난간이 비틀리는 소리를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인간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약한 생물이었다. 염려의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던 터라, 사고가 일어남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었다.
꺄악, 꺅. 소리가 채 울려 퍼지기도 전에 로젤린은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미끄러지는 듯 난간 앞에 도달한 로젤린의 위로 여자 두 명이 떨어졌다. 한 명은 왼쪽 팔로 받고, 한 명은 오른쪽 팔로 감싸 안았다. 눈을 질끈 감은 여자들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굉장히 놀란 듯했다.
‘음. 좋아. 잘 받아 냈어.’
로젤린은 내심 흡족했다. 일순 크게 비명 소리가 울렸던 사고 현장이 조용해졌다. 여자들이 눈을 떴다.
“악! 로, 로젤린 경!”
“꺄악!”
로젤린의 팔과 어깨에 걸쳐진 여자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앞선 비명보다 높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다시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봤어? 와……. 여자 두 명을 그냥 깃털처럼 드는구만!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 남자들이 제 빈약한 근육을 만지작거렸다.
로젤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여자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초점을 잃어 갔다. 좋은 향기…… 부드럽고…… 멋있어…….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욕망을 느낀 로젤린이 흠칫 몸을 굳혔다. 곧 안전하게 바닥에 도착한 여자들이 달콤한 한숨을 내뱉었다.
“난간에 기대면 위험합니다.”
난간에 붙어 있는 문구를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했으나, 여자들은 크게 감명 받은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두 번 다시는 난간에 기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사람들 같았다.
로젤린은 한 명의 치마가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치지는 않았지만, 깊게 찢어져 허벅지가 보일 정도였다.
“옷이 찢어졌습니다.”
“어, 어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로 향했다. 당황한 여자가 가려 보려 했지만, 크게 찢겨 나간 조각이 있어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로젤린이 제복 겉옷을 벗으며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로젤린이, 그 유명한 기사가 자신의 허리에다 제복을 묶어 주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로젤린의 얇은 셔츠 깃이 여자의 볼을 간지럽혔다. 칼릭스는 멀리서 여자의 눈을 보고 말았다. 아, 안 돼.
로젤린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찢겨진 부분이 가장 잘 가려지는 위치를 찾아 냈다. 하얀 제복이 여자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로젤린 경. 이 보답을 어찌 해야 할지…….”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경…….”
여인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수습 기사들이 떠오르는 맑은 눈망울들이었다. 로젤린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들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안 돼요 누님! 그만, 그만하세요! 칼릭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로젤린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무사하신 걸로 됐습니다.”
로젤린은 살짝 묵례한 후 돌아섰다. 여자들은 아쉬워하며 멀어지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몇 걸음 가던 그녀가 멈춰서 고개를 살짝 틀었다. 옆 눈으로 여자들을 흘끗 다시 바라본 로젤린이 말을 이었다.
“옷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여인들과 로젤린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결 좋은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난간 위의 여자들이 들고 있던 꽃송이에서 꽃잎이 날아왔다.
미친, 바람까지 왜 저래. 칼릭스는 절망했다. 심각하게 멋있었다. 심지어는 제 누이의 목소리가 제법 낮은 편이라는 것이 이 상황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난간 안쪽에서 지켜보던 아가씨들의 눈빛도 몽롱해졌다. 어두운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 가는 로젤린의 뒷모습을, 그들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강하고 상냥한 기사님의 향기는…… 달콤했다. 로젤린이 실제로 경기 전에 달콤한 과자를 많이 먹고 왔기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 * *
결승 상대는 황실 제 1기사단 ‘얼음창’의 부단장, 마르틴으로 결정되었다. 얼음창 기사단은 가장 강하고 가장 충성심이 깊은 자들이 있는 황제의 최정예 무력 집단이었다. 그들은 가진 충성심만큼이나 황제로부터 많은 영광을 하사받고는 했다. 이런 무투 대회에서 승리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매년 많은 기사들이 무투 대회에 출전하고는 했지만, 얼음창 기사단에서 참가자가 나온 적은 없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심지어는 그냥 단원도 아니고 부단장의 직위에 오른 자였다. 얼음창의 이름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영예로웠으며, 부단장쯤 되는 사람이면 무투 대회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욱 많을 수도 있었다. 출전의 이유가 모호했다.
32강전, 1분 12초.
16강전, 7분 45초.
8강전, 6분 22초.
4강전, (부전승)
준 결승전, 9분 59초.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경기 내용이 훌륭하다는 점에서 마르틴의 이름이 로젤린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모두 십 분을 넘기지 않고, 심지어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길면 한 시간 넘게도 싸우는 것이 무투 대회의 일반적인 풍경이었건만, 얼음창의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준비가 끝났다. 앞선 패자들의 붉은 흔적이 심란하게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마르틴은 찝찝한 마음으로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로젤린이 보였다.
2황자의 방패이자 창, 검, 화살, 뭐 이거저거 혼자서 다 해 먹는 주인공이 저기 있었다. 마르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억눌렀다.
성력은 숱하게 접할 수 있었으나, 마력은 그렇지 않았으니. 검 좀 다루고 강하다는 말 좀 듣는 기사들이 몸을 들썩이며 하얀밤 기사단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틴도 그 수많은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로젤린과 검을 맞대고, 대련도 하고 결투도 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강한가. 정말로 딱밤으로 암살자의 머리를 날렸는가! 마력은 얼마나 강하고 불길한 힘인가. 보고 싶었다. 기사단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리고 권력 없는 자들의 출세 관문이나 다름없는 무투회장에 발을 들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물론 무투 대회 이전에, 하얀밤 기사단에 공동 훈련 계획서를 찔러 넣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얀밤의 기사단장, 스타스는 얼음보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따로 일정이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대련만 한번 해 보겠다는데 무척이나 깐깐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마르틴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했다. 높은 자리에서 관람중인 황제의 존재도 잊을 정도였다. 진행자가 다가오다 선뜩한 기운에 발을 잠시 주춤거렸다. 참가자 마르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무기, 허용. 몸싸움, 허용. 암기와 독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상대가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 상대가 미리 패배를 시인하는 경우, 상대가 사망하는 경우, 상대가 전투 불능이라고 제가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항복을 했음에도 공격을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는 탈락입니다. 미리 주의해 주세요.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해 주세요."
마르틴은 제복에 슥슥 손을 문질러 닦은 후 로젤린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국 1 기사단, 얼음창 소속 부단장 마르틴이다.”
“하얀밤의 상급 기사 로젤린입니다.”
맞잡은 손이 작고 가느다래 놀랐다. 이 손으로, 이 체구로 어떻게 그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지? 근육의 구조가 다른가? 진행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려 했지만 마르틴이 말을 먼저 꺼냈다.
“로젤린 경.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예?”
“나는 경이 모든 경기에서 힘을 온전히 내보인 적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마르틴이 화색을 띠었다.
“봐주는 것 없이. 최선을 다해, 전력으로 나를 상대해 주게.”
로젤린은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관중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앉아 있는 그 어디쯤이었다. 그녀는 곧 스타스를 찾아내었다. 그는 갑자기 닿은 시선에도 당황하지 않고 고개부터 저었다. 먼 경기장에서 무슨 대화 내용이 오갔는지도 모르면서, 뭐든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듯 보였다.
“안된다는데요.”
“누가! 아, 누구인지는 대충 알겠군. 아니 어째서!”
“제가 최선을 다하면 상대방이 죽는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마르틴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등골이 오싹했다. 교란을 위한 거짓말이나 허세가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사단장님이 절대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스타스 경이 매우 현명했군. 알겠다.”
두 사람이 몇 발짝 멀어졌다. 진행자는 참가자 두 명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옆에서 벌벌 떨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댕, 댕, 댕. 세 번의 종이 울렸다. 충돌은 없었다. 불어온 바람에 흙먼지만 일어났다. 마르틴과 로젤린이 대치 상태로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침만 삼켰다.
로젤린이 자세를 낮췄다. 격돌 전, 마르틴은 그녀의 기세를 읽고 몸 앞에 검을 세워 방어 했다. 캉!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의 검을 막은 마르틴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거대한 짐승에게 치인 것 같은 궤도였다.
마르틴은 금속 가루가 탁탁 튀어 오르며 빛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는 가운데 그녀의 인영만 다른 시간을 걷는 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촤아악, 마르틴의 부츠가 바닥을 긁었다. 잽싸게 검을 바닥에 박아 넣은 덕에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한 발자국 뒤에 경기장의 끝이 있었다. 경험이 빛을 발했다.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용했다. 아직까지도 충격에 손과 검이 징징 떨렸다. 이것이 그녀의 힘? 대단했다. 굉장하다! 마르틴이 웃었다. 그가 쏜살같이 대전자를 향했다. 로젤린도 한걸음 나아갔다.
챙!
두 번째 충돌이었다. 마르틴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재빨랐다. 로젤린이 평가해도 그 정도였으니, 인간으로 친다면 최상급이었다.
왼쪽, 오른쪽, 허리, 심장, 다리. 굵은 혈관이 있는 지점을 날카롭게 베어 내려 했으나 그 어떤 공격도 그녀를 스치지 못했다.
45초. 로젤린의 대전자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르틴은 방금 그 시간을 넘어섰다. 공방은 생각보다도 지속되었다. 적당히 하라는 스타스의 경고를 잊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검을 나누고 있는 이 시간이 순수하게 즐거웠다. 마르틴도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근육의 질은 훌륭하고, 체격이 너무 크지 않아 검도 재빨랐다. 남성의 이점을 챙겨 일격, 일격이 가볍지만도 않았다. 로젤린은 최선을 다해 겨루고 있지는 않았으나, 수습 기사들과의 대련처럼 완전 봐주는 것도 아니라 좀 신이 났다.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마르틴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검의 간격 안쪽, 마르틴의 품이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로젤린은 남자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순식간이었다.
“항복하시겠습니까?”
마르틴의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고작 오 분도 안 되는 새에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마르틴은 씩 웃더니,
“한번만 봐주지 않겠나?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데.”
라고 했다.
어, 의외의 반응인걸. 보통 이러면 졌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진행자가 승리자를 외치려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 보통 이쯤에는 졌다고 하던데? 자기들끼리 알아서 봐달라고 하고, 알아서 봐준 다음에 2차전을 준비하는 지금의 상황을 대체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관중석도 술렁였다.
두 사람이 다시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으나 곧 빠져들어 관전했다.
마르틴은 몇 번이나 한번만 더 봐달라고 했으며, 로젤린은 몇 번이나 그 제안을 승낙했다. 심지어는 검을 제외한 박투도 실행되었고, 달리기 시합과 팔씨름까지 경기장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진행자의 얼굴이 볼 만했다. 딱히 팔씨름을 하지 말라 규정되어 있지 않아 말릴 수가 없었다.
결승전, 우승자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 소속)
대전 시간, 1시간 13분 29초 (대전자 마르틴이 허벅지 씨름 후, 근육 경련으로 항복)
* * *
리카르디스는 힐끔 눈알만 굴려 옆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유례없이 이상한 결승전을 목격한 황제의 표정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허벅지 씨름은 그래도 좀 버티는 것 같더니, 아깝게 되었다.”
나쁘지 않다 못해 굉장히 즐기기까지 한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눈웃음 지으며 황제의 말에 수긍했다.
“로젤린 경이야 마력이라는 수단으로 신체를 강화한다 치더라도, 마르틴 경은 정말 훌륭하군요. 역시 폐하의 호위 기사답습니다.”
기분 좋은 듯 허허 웃는 황제를 보며 리카르디스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음창의 부단장이 무투 대회에 나오면 어쩌자는 건지…….
얼음창은 황제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집단이었다. 로젤린이 승리하는 경우 황제의 심사가 크게 뒤틀릴 가능성도 있었다. 다행히 경기 내용이 이상하게 튀는 덕에 기분 나쁘고 말고 할 상황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리카르디스, 엘피디오마저도 넋을 빼놓고 관전했다. 반복 달리기 시합을 할 때에는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사람들 다 모여 있는데, 경기가 이게 뭡니까.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겠습니다.”
입 벌리고 볼 때는 언제고, 엘피디오가 정신 차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황제의 제일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하, 비약이 심하시군요 형님. 일라베니아 황실의 권위가 고작 기사 두 명 때문에 흔들리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마르틴 경의 이름을 연호하는 수많은 자들을요. 더군다나 무투 대회에서 만나는 참가자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도 합니다만, 두 사람은 검으로 얘기하고 땀으로 우정을 쌓았습니다. 건국제의 흥을 돋운다는 그 취지에 적합한 경기가 아니었습니까, 폐하?”
“그렇지, 그렇지. 다들 즐거워하니 되었다.”
엘피디오가 그게 뭔 개소리야. 라는 눈빛으로 리카르디스를 흘겨보았다. 입에서 흐르는 게 말인지 유수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사르르 웃었다. 엘피디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피디오와 리카르디스가 기싸움 하는 광경은 낯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디에즈는 어린 황녀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젤린 경은 팔굽혀펴기를 몇 개 쯤 더 하실 수 있을까요, 오라버니? 백 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 정말요. 정말 대단하네요. 혹시 저를 목마 태워 주실 수도 있을까요? 저 요즘 무거워졌는데. 로젤린 경은 힘이 세니까 되지 않을까? 나눠받는 말들이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하인들이 분주히 경기장을 치웠다. 곧 우승자를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나설 차례였다.
“감개무량합니다 폐하. 황실의 기사가 우승하는 것이야 자주 있던 일이었으나, 이번은 더욱 그 승리가 크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힘을 지닌 자가 승리하였으나, 그녀는 붉은수레바퀴. 일라베니아와 황제 폐하의 충실한 기사입니다.”
리카르디스의 큰 재주 중 하나였다. 헛소리, 빤한 아부를 굉장히 진정성 있게 들리게 하는 능력. 클로에는 “전하의 호소력은 얼굴에서 나와요. 정말로.”라고 말했는데, 본인은 긴가민가 하는 기색이었다.
황제는 리카르디스의 말에 완전 취해 버린 듯했다.
“마인을 품으시는 폐하의 자비로우심이 진정 하늘에 닿으셨는지요? 만백성이 칭송하며 우러러볼 위대한 업적입니다.”
황제는 감동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리카르디스도 생긋 웃으며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챙. 유리가 울리는 소리가 청명하고 즐거웠다. 슬쩍 돌아보니 라헤안시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막고 있었다.
‘형 비위도 참 좋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황제가 안 보는 사이 청포도 한 알을 뜯어 그에게 콱 던졌다. 라헤안시가 재주 좋게 입으로 받아먹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황제만 경기장에 내려가야 했지만, 과하게 흡족해 버린 탓인지 리카르디스도 같이 대동했다.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횃불로 밝혀진 몇 개의 복도를 지나쳤다. 넓게 트인 공간으로 나오자마자 햇빛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황제는 양옆에 일렬로 서 있는 병사들과, 얼음창 기사단을 지나쳐 경기장 중앙에 있는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따라 관중석에 있던 자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자. 일라베니아의 통치자. 대륙의 주인. 황제의 등장이었다. 그 누구도 황제의 허락 없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이 한 시간이건, 하루건 간에.
정적이 깔린 경배에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부글부글 끓는 욕망이 느껴졌다.
가장 좋은 걸 먹고, 가장 좋을 것을 입고, 말 한마디로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자는 배부를 줄을 몰랐다. 언제나 목말라했다. 그 끝 모를 갈증이야 말로 그를 황제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황제 라이노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자의 위에 서 있겠다는 음습한 욕망은 아름다운 권좌와 함께 대물림 되었으므로.
리카르디스가 볼 때에는 이성적인 척하는 반 미치광이였다. 가장 고상한 척하는 미친놈이 권좌에 앉아 있다. 하지만 권좌에 앉았던 자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니. 그렇다면 전후 관계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미친놈들이 권좌에 앉은 게 아니라, 권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할지도 몰랐다.
신의 이름으로 빛나는 그 자리가 정녕?
“고개를 들라.”
근엄한 목소리에 로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딱딱하고 날카로웠다.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 확실하게 티가 났다. 긴장이라도 한 걸까? 그 로젤린이?
황제는 사나운 그녀의 인상에 놀랐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로젤린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없으니 웃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로젤린. 우승 축하한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지만 로젤린은 알아들은 듯했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얼굴 표정이 스르륵 풀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황제 라이노는 그나마 덜 사나워진 로젤린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말을 편안하게 걸었다.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황제 폐하를…… 훌륭한 경기였다. 건국의 달을 맞이한…….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검을 하늘로 치켜들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꽃과 꽃잎이 휘날리는 가운데 황제가 로젤린에게 검을 하사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들였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가장 높이 계신 위대한 분. 황제 폐하께 이 자리를 바칠 수 기회가 오다니…….”
[이쯤에서 목멘 듯이 목소리를 좀 떨어 주면 돼.]
[목멘 목소리는 뭐야.]
[……목을…… 조른 것 같은 목소리?]
목멘 목소리가 졸지에 목을 맨 목소리로 둔갑해 버렸다. 잇세리온이 옆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레이몬드를 쳐다봤다. 둘은 열심히 토론했다. 마지막에는 목 아래를 꾹 눌렀을 때 답답한 그 느낌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합의를 봤다.
“붉은수레바퀴의 오랜 이름에도, 또한 보잘 것 없는 로젤린이라는 이름에도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쯤에서는 눈물을 약간 글썽인다.]
[눈물이 안 나면.]
[눈 오래 뜨고 있으면…… 될…… 걸?]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빨개지는 정도까지는 해냈다. 황제는 흐뭇하게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에게.”
[말을 한번 더듬는다.]
[공적인 자리에서 왜 실수를?]
[……그런 약은 수가 필요할 때도 있단다, 로젤린…….]
“죽음의 위기가 저를 휘두를 지라도,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위한 초석이었다면. 수 천 번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또 다시. 몇 번이고. 죽음을 넘어서라도.”
[<입술을 파르르 떤다> 별표.]
“아름다운 일라베니아. 영광의 일라베니아. 그 울타리와 방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빛나고 날카로운 황제 폐하의 검이 될 자의 이름입니다.”
[<눈을 한번 꾹 감았다가 뜬다. 강렬한 눈빛> 밑줄 쫙.]
[강렬한 눈빛은 어떻게 하는 거야.]
[그래, 그거야! 잘하네]
그때 당시 로젤린은 그냥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타고난 강렬한 눈빛에 황제는 깊은 감명을 받은 기색이었다. 모두가 칭송한 강한 무기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황제는 흡족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붉은수레바퀴로구나!”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하늘 높이 치켜 세웠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로젤린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단단하고 힘이 넘치지만, 은은한 부드러움이 날카로움을 상쇄시켰다. 관중들이 그 목소리에 홀린 듯 일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맞춰 같이 외쳤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꽃이 끊이지 않고 뿌려졌다.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삐이익---
리카르디스와 로젤린, 그리고 하얀밤 기사단원들에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사람들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마구 헤매었다. 사람들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휙휙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관중들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 저기!”
독수리다! 누군가가 말하자 관중석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경기장 위로 높게 날아다니던 독수리가 원을 그리며 관중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묘기를 보였다. 와아아! 비명인지 환호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경기장 내부를 멋지게 휘젓던 독수리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하강했다.
그 독수리 또한 로젤린만큼이나 유명인사라, 얼음창 기사단원들도 크게 경계하지 않고 구경했다. 독수리는 중앙에 와서 느릿하게 날갯짓했다. 휘잉. 휘잉.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눈을 빛내던 거대한 맹금류가 로젤린이 팔을 내밀자 천천히 내려앉았다. 황제가 혼이 쏙 나간 얼굴로 독수리와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폐하의 곁에 머무시니 일라베니아는 영원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리카르디스는 눈치챘다. 로젤린도 은근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마카롱의 깜짝 이벤트인 모양인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제 주인이랑 똑같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율이 일 정도의 광경이었다. 이델라브힘의 사자, 독수리. 선명한 햇빛 아래 그의 영광을 노래하던 때에 독수리가 나타났다. 마치 하늘 높은 곳의 이델라브힘이 땅 아래를 굽어 살피는 것만 같았다.
일라베니아가 영원하리라는 승리자의 의례적인 말이 무한한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독수리의 날갯짓을 본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신의 이름과 나라의 영광을 드높이는 말이었다. 그네들이 불길하다 박해하던 마인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모두 열기에 취해 있었다. 정말 망각이라도 한 듯이. 그 어떤 승리의 순간보다 무투회장은 크게 진동했다. 웅웅, 공간을 울리는 수백의 목소리는 사람들 마음 안쪽 깊은 곳의 무언가를 타오르게 했다. 황제 또한 분위기에 심취하여 군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외울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거대한 공간, 군중의 목소리에 휩쓸린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진 채 바라보았다. 미소 띤 얼굴은 그 아래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대충 마무리는 되었나.’
황제는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고 손 댈 수 없을 만큼 커져 가는 로젤린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젤린이 보여 주기식이라 할지라도 무릎을 꿇은 채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대게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황제도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나기처럼 내리는 꽃잎들 사이로 로젤린과 리카르디스는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은 군중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황제를 흘끗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러고는 하사받은 검을 슬쩍 가리키고, 리카르디스를 콕 집어 가리키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대충 자신에게 영광을 바치겠다는 말일 것이다. 눈에 안 띄려 작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왜 그렇게 웃는 건지 이해 못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마지막에는 빙그레 웃었다.
함성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렸다. 마카롱이 다시 날아올라 회장을 휘저었다. 로젤린은 비행 궤적을 눈으로 그리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황제가 걸어왔던 통로. 그늘진 내부는 밖의 환희가 닿지 않는 듯 차가워 보였다.
그 속에 태양 같은 머리색을 가지고도 어둠에 완전히 녹아든 남자가 서 있었다. 로젤린은 그가 누군지 잠시 알아보지 못했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익숙한 남자가 낯설었다.
사랑스러운 디에즈, 상냥한 디에즈. 모두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과 장면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이 순간에? 어째서?
“영광의 일라베니아!”
사람들이 환성과 꽃잎이 널리 퍼질수록 디에즈의 얼굴은 무섭게 구겨졌다. 칼날같이 서늘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양처럼 뜨겁게 일렁이던 황금색 눈동자가 눈물에 차갑게 굳어 가는 듯 보였다.
어째서? 멀리 있어서 묻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옆에 있었다고 한들 묻지 못했을 것이다. 디에즈 전하, 당신은 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눈빛으로 그렇게 비참하다는 듯 울고 있습니까?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디에즈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음에 놀라지도, 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로젤린과 빤히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 * *
로젤린은 꽃비가 내리는 공간을 벗어났다.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는 어두웠다.
그녀는 방금 목격했던 장면을 몇 번이고 반추했다. 환하게 웃는 디에즈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모습까지. 속이 쓰려 왔다.
디에즈의 눈동자는 그의 친부, 제국의 황제 라이노와 환성이 가득 차 있던 공간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황제의 얼굴이 다르게 보이기라도, 그 공간의 환성이 다르게 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자신 또한 황제와 대면했을 당시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막연한 거부감. 일라베니아 황성을 처음 봤던 순간에 느꼈던 기분과 비슷한 것 같았다. 황제가 리카르디스의 적이라는, 로젤린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이유만으로는 부족한 감정이었다.
그녀의 감정은 주로 명확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 화가 나면 화가 나고, 리카르디스가 예쁠 때는 벅차오른다. 그랬기에 로젤린은 자신이 대단히 이성적이라 판단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지도 못하고, 크게 겪어 본 적도 없는 감정이 제 집 마냥 속에 들어와 있으니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복잡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헤허헉!”
저 멀리 보이는 대기실에서부터 복도 끝까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퍼졌다. 웃음소리와 괴성이 섞인 흥겨운 소리였다. 생각에 깊이 빠져 잠시 인지하지 못했던 듯했다. 로젤린은 어두운 복도를 후다닥 달려 방문을 열었다. 빛이 확 쏟아졌다.
“로젤린 경!”
칼릭스, 레이몬드, 파르딕트, 르원, 슈텐, 네스터, 바스티안, 클로드.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헤사까지. 하얀밤 기사단원 중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맡은 사람만 빼고 다 와 있는 것 같았다. 넓은 대기실이 거구의 기사들로 꽉 찼다.
“로젤린! 요 예쁜 것! 역시 내 제자야!”
레이몬드가 그녀의 등과 무릎 뒤에 팔을 넣어 번쩍 안아 올리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재밌어.”
발이 붕 뜨는 감각이 즐거웠다. 로젤린이 재밌다고 하자 레이몬드가 “그럼 한 번 더!” 하고 뱅글뱅글 돌렸다. 다들 로젤린의 발에 맞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거나 도망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레이몬드를 욕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 헤사는 로젤린에게 단련된 탓인지 갑작스러운 공격을 능숙하게 피했다. 과연 내 제자들. 틈을 타 로젤린이 흐뭇해했다.
“로젤린 경!”
여기저기에서 그녀를 불렀다. 축하한다! 축하합니다! 경기 멋있었다! 등을 퍽퍽 두드리는 섬세하지 못한 손길이 쏟아졌다.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헹가래를 했다가, 볼을 꼬집기도 하고. 정신이 아주 쏙 빠질 정도였다.
로젤린의 머리 위로 샴페인이 쏟아졌다. 범인은 파르딕트였다. 좋다고 웃고 있던 그는 레이몬드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헤사와 칼릭스도 매섭게 파르딕트를 노려봤다. 수건을 들고 와서 로젤린의 머리를 닦았지만 곧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장난기 넘치는 기사들이 마구 술을 뿌려 대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젖고 바보처럼 으허허 웃어 댔다. 다 큰 남자들이 취해서 휘청거렸다. 로젤린이 오기도 전에 일차적으로 술판이 벌어진 탓이었다.
“마르틴 경도 강하지만 역시 로젤린 경이지.”
기분이 좋아진 로젤린이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제일 강합니다.”
그녀가 하면 잘난 척도 아니었다. 잇세리온이 잠시 들어왔다가 술 냄새 나는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질색했다.
“이 미친 인간들!”
다들 우헤헤헤 웃는 꼴이 제정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잇세리온은 급하게 돌아 나가려 했지만, 곧 산만 한 기사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샴페인 마사지를 받아야만 했다. 잇세리온의 친 동생인 르원이 주도적으로 했기에 모두들 마음 놓고 부었다. 로젤린도 소심하게 한 컵 분량을 계량해서 동참했다.
“로젤린.”
“응.”
“잘했어. 멋있었어.”
레이몬드가 바보처럼 웃었다. 로젤린은 그로부터 꽃목걸이와 샴페인 한 병을 받았다. 목걸이도 걸고, 샴페인도 터트렸다. 뻥! 소리가 나며 거품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로젤린이 그 샴페인을 제 머리 위에 뿌리며 눈을 감았다. 뜨겁던 머리가 식어 갔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이 바닥을 뒹굴고 술에 흠뻑 젖었다. 취한 남자들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화려한 검집을 밟고 차고 다녔다. 로젤린도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 위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흥이 오른 남자들이 윗옷을 벗었다.
“넌 안 돼.”
레이몬드가 경고했다. 칼릭스도 문득 불안한지 그녀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기사들은 어느새 자리를 준비해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로젤린과 마르틴의 경기에 영향을 받은 듯했다. 파르딕트가 잇세리온을 이겼다. 고래와 토끼의 싸움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제가 이겼군요, 수석 비서관님!”
“당연히 그러시겠지!”
억지로 팔씨름을 다섯 번을 더 해야만 했던 잇세리온의 말이었다. 로젤린이 아하하 웃으면서 손뼉을 짝짝 쳤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에게 팔씨름 신청을 받고 다시 버럭 화냈다.
“제가 그걸 하겠습니까?!”
로젤린은 이 상황이 웃겨서 까르륵하며 반쯤 넘어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상급 기사들이 잇세리온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질척거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어느새 고양이 한 마리가 대기실에 들어와 바닥에 흘려진 샴페인을 할짝거렸다. 눈이 가늘어진 것을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다른 기사들 모르게 한 병을 슬쩍 숨겨 두었다.
그때, 누군가가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모두 웃고 즐기는 와중에도 경계를 놓지 않고 있었기에 작은 소리를 포착해 내었다. 상체 탈의 후 근육을 자랑하던 파르딕트가 문을 열었다.
“억!”
그러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거구로 가려져 열린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으나 무언가를 직감할 수 있게 하는 반응이었다. 남자들이 벗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런……. 좋은 때를 방해하였구나.”
오랜 세월을 보내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기사들은 방문자의 정체를 깨닫고 미친 듯이 몸단장을 했다.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파르딕트면 족했다.
로젤린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폴짝 내려왔다. 파르딕트는 여전히 상체를 탈의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로젤린이 그의 등짝을 찰싹 쳤다.
“비켜, 파르파르.”
그래도 비키지 않아서 쭉 밀어내야 했다. 로젤린은 그제야 마주친 딤라와 관디테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이페렘! 섭정관!”
입을 가리고 웃고 있던 관디테가 얼굴 표정을 겨우 가다듬고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우승을 축하한다 로젤린 경. 멋진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노라.”
“감사합니다, 바이페렘.”
딤라가 쯧 혀를 차면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왜 이렇게 젖었니. 찬기 들면 어쩌려고. 일라베니아의 축하 행사는 그다지 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로젤린에게 샴페인을 끼얹은 기사들이 쥐죽은 듯 침묵만 지켰다. 칼릭스가 웃음소리를 내며 문가로 다가왔다.
“섭정관. 일라베니아의 풍습이 이러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얀밤 기사단 특유의 행사가 아닐는지.”
아니, 저, 저 인간이? 잇세리온이 뒤에서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딤라와 관디테, 로젤린과 칼릭스는 자리를 옮겨 한적한 복도 중앙에 멈춰 섰다. 딤라는 그새 구해 온 천으로 그녀를 둘둘 말았다. 로젤린은 전혀 춥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에 좋은 모습을 보고 갈 수 있어 다행이구나.”
칼릭스와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똑같은 남매의 표정에 관디테가 웃었다.
“일라베니아를 떠나십니까?”
“그래. 더 빨리 떠나야 했지만, 갈라·제르타예의 아이가 큰 무대에서 활약한다는데, 그것은 보고 가야겠다 싶어 오늘까지 미루었지.”
이 시기에 일라베니아에 들리는 이유는 대개 건국제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투 대회는 고작 시작에 불과하며, 건국일은 한참 남아 있는 상태였다.
“플로에토를 끌어내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바이페렘께서 발타의 왕자가 아직 라고슈 내에 세력을 남겨 둔 느낌이라 말씀하시기도 했고. 그 얘기가 아니더라도 남의 축제가 아닌 나의 상처를 돌봐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
“아직 여독이 쌓여 있으실 텐데……. 긴 여행길이 귀한 분의 몸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칼릭스가 걱정스레 딤라와 관디테를 바라보았다.
“신관들을 부지런히 불러 여기저기를 손보았단다. 엄살을 피웠더니 멈추지 못하고 성력을 퍼붓다가 한 놈은 쓰러지기까지 했지 뭐냐. 덕분에 몸도 기분도 좋아졌구나.”
딤라는 악당같이 웃었다. 아, 며칠 성에서 나오지 않으시더니, 다음 여정을 위한 준비였던 것인가. 칼릭스는 안심도 되고, 웃기기도 해서 웃음을 흘렸다.
딤라가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손 가죽이 두텁고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훌륭한 전사의 손이야.”
“네. 오늘도 멋있게 이겼습니다.”
로젤린이 입꼬리를 쭉 늘려 웃었다. 제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10살 먹은 관디테는 혼자 밖에 내보낼 수 있으나, 로젤린은 절대 혼자 내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일정을 바꿔야 하나 싶을 정도의 불안함은, 로젤린 전에 만나고 온 리카르디스를 떠올리고 나서야 가라앉게 되었다.
하얀 아기 새 때문에 잠깐 흐트러졌던 남자의 본 모습은 라고슈의 고요하게 눈 내리는 밤처럼 위험했다. 애초 리카르디스라는 이름을 들은 것 또한, 로젤린과 관련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외가의 힘이 강하지 못했으나 본인의 능력만으로 1황자 엘피디오와 비등한 세력을 거느리게 된 2황자 리카르디스. 명석한 머리, 시류를 읽는 눈과 귀, 처세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함, 죽음에서 번번이 살아 돌아온 운까지.
여러 가지가 뒷받침 되었으나 지금 리카르디스의 위치는 그러한 능력만으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른 집념과 악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현재 대륙에서 존재하는 사람 중 가장 성력이 강한 것 또한 그의 무기일 뿐,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얼굴 뒤에는 칼날처럼 위험하고 날카로운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위험이 다가왔을 때, 또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때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런 사내가 로젤린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보았으니, 로젤린의 위험이 리카르디스로 인한 것일지라도 어딘가 마음이 든든해지기는 했다.
“수많은 위험과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이 손으로 해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
딤라는 남은 한쪽 손으로 칼릭스의 손도 잡았다.
“칼릭스. 로젤린. 갈라·제르타예의 아이들아.”
“예, 할머님.”
“예.”
“제르타예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어떠한 짙은 어둠도 밝히고, 세차게 불어오는 눈 폭풍 속에서도 영원하며, 흔들리고 작아질지언정 결국에는 다시 불타오른다. 너희들은 따뜻한 곳에서 자라났으나, 품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믿는다.”
딤라가 잡은 두 사람의 손에 힘을 주었다. 주름진 손, 굽은 어깨. 작은 노인이었건만, 손아귀 힘에 손끝이 저릴 정도였다.
“이것이 내 유언이다.”
칼릭스는 눈을 크게 떴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몸을 바르게 세웠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대륙의 정세가 어지러운 가운데, 자신과 제 누이가 라고슈에 가는 일도, 또한 그녀가 다시 일라베니아에 방문하는 일도. 너무 멀어 희미해 보이는 미래였다. 그리고 그 긴 흐름 속에 딤라는 풍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로젤린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그녀는 잠자코 있다가 무릎을 꿇었다. 칼릭스도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두 남매의 이마가 꽉 잡은 딤라의 손에 닿았다. 딤라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남매의 볼에 한 번씩 키스를 했다.
“따뜻하게 입고 다니거라. 이것도 유언이다.”
“예.”
“……예.”
“밥은 세 그릇씩 다 비우고, 고기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이것도 유언이다.”
“예, 잘 먹습니다!”
“…….”
라고슈의 사절단이 떠났다는 얘기는 금세 퍼졌다. 남의 축제에 찾아와 놓고 즐기지도, 축하하지도 않고 떠난 그들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축제의 주인공인 황제가 조용한 데다가, 내전이 종식되었다고는 해도 혼란은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중심을 잡아 줄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좀 늦게 방문해서 건국일에 맞추면 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의문점도 물론 제기 되었다. 설마 딤라가 일라베니아의 건국일을 축하해 줄 마음이 없었던 것일까? 물어보지 않았고 답을 들어 보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정신이 없었던 거겠지. 아니면 급하게 라고슈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 말은 무수했다.
물론 딤라는 부러 건국일을 피해서 온 게 맞았다. 누구 좋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