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2화 (206/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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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그림자 없는 밤’부터 시작된 줄지은 연례행사에 바쁜 것은 일라베니아뿐 아니었다. 대륙에 위치한 크고 작은 나라의 고위 인사들은 대륙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거대한 제국의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선물을 들고 문을 두드렸다.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하나둘 연회장에 모여들 쯤에는, 아름다운 음악과 눈으로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손님들을 반겼다.

매년 보는 고만고만한 얼굴들이라 특별하게 대화를 나눌 것이 없었던 터라,

“잘 지내셨습니까?”

“아, 저는 잘 지냈는데 경은 어떻게 지내셨는지.”

와 같은 지루한 안부 인사를 나누기 일쑤였는데…….

올해의 파티 분위기는 최근 몇 년간의 반복된 지루함이 무색하게 잔뜩 들떠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은 이번 건국제에 이례적인 일이 세 가지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마인 ‘로젤린’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에 관한 얘기는 일라베니아를 벗어나 대륙 구석구석, 커다란 왕국부터 작은 부족 단위의 무리에까지 전해졌다.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설렘을 지니고 홀 입구 쪽을 계속 흘끗거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발타와 비등할 정도로 강한 군사를 보유한 라고슈 왕국에서 아직 사절단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라고슈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으나, 그 이후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현재의 통치자, 바이페렘 플로에토가 이겼니 졌니, 죽었니 살았니. 정확한 정보가 없어 소문만 무성히 퍼져 나갔다. 일라베니아 측 사람들은 타국의 인사들이 라고슈의 내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일은, 발타와 관련되어 있었다.

매년 많은 왕족과 귀족이 무거운 몸을 끌고 왔으나, 발타만은 항상 예외였다. 힉살라 아돈이 아파서. 날씨가 좋지 못해서. 발타에 큰 우환이 있어서. 온갖 변명을 대고 발을 들일 줄을 몰랐건만 이번에는 정말로 일라베니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황성의 수많은 귀족들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온다는 얘기야 들었지만, 또 이런 저런 변명을 하면서 안 올 줄 알았지. 설마 왕위 계승자인 하카브가 직접 행차할 줄이야! 또한 3왕녀, 간제까지 국경을 건넜다는 소식에 연회장은 한층 더 들썩였다.

아무리 사절단으로 친교를 맺은 직후라고는 하나, 오랜 적대 관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사절단 일로 2황자 리카르디스가 큰일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이때. 발타는 언제나 하는 변명 ‘검은달과 발타 왕실은 어떠한 연관도 없다’라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그것이 그저 입 발린 소리임을 모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카브는 스스로 위험한 길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전의 리카르디스야 누군가가 등 떠밀어 어쩔 수 없이 발타의 사절단으로 가야 했다지만, 하카브는 경우가 달랐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지위를 거머쥔 왕자에게 누가 위험을 강요할 수 있을까.

발타의 현 왕인 힉살라 아돈마저도 하카브에게 명령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자의로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배포가 큰 건가? 그냥 미친 건가?

일라베니아 내에서도 급진적으로 전쟁을 주장하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먹잇감이 제 발로 들어온 지금의 상황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귀족들의 동향을 잘 주시해라 전달했다.

발타의 사절단이 도착한 이튿날, 리카르디스는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을 방문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무슨 꿍꿍이속인 걸까…….’

그 어떤 누구도 하카브가 순수하게 일라베니아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쟁의 준비, 실패했던 리카르디스 납치 계획, 갑자기 나타난 강한 마인의 존재…….

그가 어떤 목적으로 발을 들였는지 모르니, 무얼 방어하고 무얼 공격해야 할지 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쟁에 유리한 포석을 깔고 가려함인 걸까? 그렇다면 황제의 암살?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긴 했다. 육체가 강화된 발타의 인간 병기들이라면 충분할 테니. 하지만 하카브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발타의 사절단이 일라베니아에 온 그 순간부터 그 누구보다 경계 받는다는 사실을 알 텐데. 무슨 수로?

일라베니아가 그를 포위한 것이 아닌, 그가 적의 중심부에 들어와 심장을 노리는 형국처럼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곧게 피고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시야가 좁아진다. 직접 눈으로 보고, 읽어야 한다. 리카르디스는 열린 마차 창을 통해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하카브와 만나는 자리에 그녀를 대동하고 싶지 않았으나,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그녀뿐이었기에.

아. 한숨만 나왔다. 리카르디스를 실은 마차가 부지런히 달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리카르디스 황자.”

발타 왕성 내에서 봤던 것보다 화려했다. 금을 사용한 섬세한 장신구가 구릿빛 피부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를 보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

하카브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걸어왔다. 리카르디스가 뒷걸음치는 것보다 하카브가 그에게 다가오는 게 빨랐다. 와락. 껴안기고 말았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하카브 왕자. 그간 평안하셨는지.”

“걱정해 주신 덕에, 그렇습니다. 황자는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화려한 보석마저도 황자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귓가에서 속삭이던 남자가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술을 꾹 찍었다. 리카르디스는 상한 음식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하카브 왕자도 정말…… 여전……하군요.”

리카르디스가 그의 가슴을 밀어내어 하카브의 품에서 벗어났다. 순순히 풀어 주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했더니, 하카브의 눈은 자신의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찾았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들 사이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은 유독 눈에 띄었다. 하카브의 검은 눈동자가 로젤린을 보고 멈췄다.

“로젤린 경.”

봄볕의 따사로운 내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한쪽 치켜 올라갔다. 이 달달한 목소리는 대체?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로젤린은 그에게 묵례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하카브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의 검은 달! 나의 크레안 티다니온! 외치지 못한 말들이 욕망이 되어 속에서 드글드글 끓었다.

하카브의 뜨거운 눈빛을 눈치챈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카브가 두 팔 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로젤린 대신, 앞에 불쑥 나타난 레이몬드를 안게 되었다. 사내들의 단단한 가슴근육이 서로 맞닿았다. 하카브도 레이몬드도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입니다. 왕자 전하! 이렇게 반겨 주시니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레이몬드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하카브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토닥이며 볼에 키스했다. 레이몬드도 하카브의 볼에 쭈와압 키스했다. 그쯤 되면 흡입이라는 표현이 더욱 가까웠다.

하카브가 로젤린에게 가려고 할쯤이면 상급 기사 동료들이 앞으로 나와 그녀 대신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섯 번째, 수염이 까슬한 파르딕트에게 거칠고 긴 입맞춤을 받은 하카브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무기 없는 전투가 소강이 된 후, 남자들이 불쾌해 보이는 얼굴로 제 입과 볼을 슥슥 닦아 댔다. 리카르디스는 그 더러운 공방을 입을 가린 채 관전했다. 꼴 보기 싫었다. 안 좋은 쪽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하카브에게 잠시나마 미간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좋았는데, 보는 사람마저도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카브는 로젤린을 여러 번 돌아보며 계속해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기사만 열 명이라 포기해야 했다.

시녀가 응접실에 손님을 대접할 준비가 끝났노라 알렸다.

응접실에 들어선 로젤린은 잽싸게 주위를 훑었다. 미리 들어와 있던 호위들, 하카브와 같이 방문한 귀족들, 발타에서 같이 온 하인들과 숨 쉬지 않는 사물, 공간을 이루는 벽과 천장, 바닥까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주변을 살피는 로젤린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마디라도 하면 곧바로 튀어나갈 태세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로젤린은 판단을 마쳤다. 로젤린이 등 뒤로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상 무.]

기사단원들이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비치는 눈동자들에 의문이 담겨 있었다.

로젤린의 [이상 무] 신호는 다른 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폭 넓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표면적인 위협 뿐 아니라, 더 깊고 치명적인 ‘파편’과 인조적으로 만들어진 마인 부대의 기운 또한 감지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들도 데리고 오지 않았어? 하카브는 대체 무슨 배짱이지?

리카르디스가 자리에 앉자, 하카브가 따라서 맞은편에 앉았다.

“여정은 어떠셨는지.”

“녹음이 푸르고, 하늘은 쾌청하며, 과실이 영그는 아름다운 대지를 보니.”

하카브는 빙그레 웃었다.

황폐한 대륙 위에 자라나는 것은 썩어 가는 시체 냄새뿐이더라. 부모가 아이를 빵 두 덩이에 팔아넘기고, 죽은 마을에는 짐승조차 살지 못하는 지경이던데, 신의 영광을 그러쥐고 있다는, 일라베니아라는 나라가 죽을 날 받아 놓고 골골거리는 반송장이나 다름없으니.

“아, 내가 일라베니아에 왔구나 싶더군요.”

“좋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내리깔며 찻잔을 들었다. 그는 발타 사절단이 여행길에 보아 온 광경이 어떨지 예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대지는 무슨.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썩어서 굴러다니는 광경을 보고 나올 만한 감상은 아니었다.

그저 인사를 하고자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카브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니 리카르디스는 이상하게 배알이 틀렸다. 눈이 어떻게 됐느냐며 시비 걸고 싶었지만 그런 유치한 짓은 10살 전에도 해 본 적 없으므로. 그저 생각만으로 그쳐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익숙한 홍차의 향기를 맡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그가 피식 웃었다. 우연도 이 정도면 신의 장난이 아닐까.

로젤린이 잠잠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홍차에는 ‘파편’은 없을 것이지만 기분이 묘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카브가 의아하다는 듯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아, 손님을 앞에 두고 제가 실례했군요. 잠시 옛 생각에 빠졌던 터라.”

“무엇이 황자를 웃게 했는지 궁금하군요. 그 미소의 이유가 제가 아니라니 섭섭할 뿐입니다.”

아…… 짜증나, 이 남자. 리카르디스가 속마음을 숨기고 빙그레 웃었다.

“검은달의 ‘파편’을 마실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게 이 홍차와 똑같은 종류라.”

“이런, 그다지 재미있는 추억은 아니었군요.”

“그렇습니까?”

리카르디스도 하하 웃으며 잠시 날이 섰던 분위기를 전환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몸을 더욱 곧게 폈다. 지루한 대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온갖 위험에서 살아남은 단원들이, 지금의 대화에서 날카롭고 사나운 기류를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사절단이 돌아가는 길에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

하카브가 제 가슴을 쓸었다. 남자의 손에서 여러 개의 반지가 반짝반짝 정신 사납게 빛났다.

“제 심장이 멈춘 듯했습니다.”

정말 그대로 멈춰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카르디스는 얼음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사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자.”

“걱정해 주신 덕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게 어디 제 덕입니까. 들어 보니…….”

하카브의 눈이 리카르디스의 뒤편을 향했다. 리카르디스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 시선이 닿는 곳에 로젤린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카브가 로젤린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대단한 활약이 있었다고. 실례가 안 된다면 듣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직접.”

리카르디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그녀는 지금 제 호위중이라.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아니 잠시 이 앞으로 올 뿐인데…….”

“앞으로 그 훌륭한 얘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헛소리 하지 말라며 싹둑 잘라 내는 태도에 하카브는 흠, 하며 턱을 쓸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대답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시선은 끈질기고, 욕망은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이유 모를 한기에 둘러싸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 발은 들인 이유가 로젤린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델라브힘의 나라, 일라베니아.

크레안 티다니온의 나라, 발타.

당연한 것이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마인을 병적일 정도로 긁어모으는 그들에게, 로젤린이란? 억지로 정제하여 만든 마력의 결정으로 인위적인 마인을 만드는 발타라는 나라에게, 로젤린이란? 그 인간 병기들을 손 한 번에 부숴 버리는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하카브에게 로젤린이란……

만약 하카브의 목적이 온전히 로젤린에만 국한된다면? 곤란했다. 차라리 황제를 암살하러 왔다고 말을 듣는 쪽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이 갖은 위험 도사리는 곳에, 일국의 후계자가 로젤린만을 위해 발을 들였다? 제 안위의 안녕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각이 겹쳐질수록 하카브의 욕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하카브와 헤어진 후, 리카르디스는 곧바로 발타의 3왕녀 간제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하카브가 머무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별관에 머물러 있었다. 구릿빛 피부의 전사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다니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하카브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일행이 도착하는 것을 본 시녀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스치듯 짧은 만남 뒤에 나누었던 인사말이 떠올랐다. 또한 그녀의 마지막 말까지도.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황자 전하.’

상투적인 인사말이었지만, 발타의 고위 인사에게 들은 말이라 그런지 의미심장했었다. ‘내 오라비 하카브가 네가 집에 가는 길에 공격할 건데 몸조심해야 될 거다’ 쯤으로 들렸다. 그러나 앞서 한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인해, ‘잘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자’로 해석되기도 했다.

한 사람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또한 3왕녀 간제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한정적이고 적은 편이라, 그녀의 생각을 유추해 내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3왕녀 간제, 스물한 살. 연회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 궁전에서 주로 생활함. 끝. 끝이었다.

발타는 이미 입지를 공고히 다진 후계자가 있었다. 하카브 위 리비타. 그 어떤 세대보다 강하고, 냉혹한 후계자의 아래, 힉살라 아돈의 모든 자식들은 숨죽인 채 지내 왔다. 그것이 간제와 또 다른 자식들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였다.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하카브의 눈에 띄는 형제는 어김없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는 했다. 많은 왕자와 왕녀가 있었으나, 성년이 되기 전까지의 생존율이 극악한 관계로 몇 남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왕족 중 한 명이 3왕녀 간제였다. 수많은 하카브의 형제자매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그녀가 하카브와 동복남매라는 것이었다.

문이 열렸다. 리카르디스는 시녀의 안내를 따라 방안에 발을 들였다.

“간제 왕녀.”

“어머, 리카르디스 전하. 오셨군요.”

간제는 그가 이 성에 당도했다는 얘기를 미리 전해 들었던 듯했다. 테이블 위에 이미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그녀가 일어서 리카르디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방 안의 향기와 그녀의 눈매가 간제를 한층 더 나른하게 보이게 했다.

쪽. 간제가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 맞추고서는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어떤 달빛이 이보다 더 빛날 수 있을는지.”

분명 아까 비슷한 말 들었던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깊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별로 닮지 않은 남매라 생각했는데, 입을 여니 똑 닮았다. 리카르디스는 왕녀의 볼에 인사를 돌려줬다.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는 광경에 로젤린이 잠시 몸을 굳힌 채 입을 꾹 물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발타 식 인사야, 아까 레이몬드와 하카브. 파르딕트와 하카브. 리카르디스와 하카브도 다 했던 것인데. 갑작스레 이상한 감정이 덮쳐 왔다. 먹던 디저트를 뺏긴 것같이 심통이 나기도, 서럽기도 했다. 가슴을 헛헛하게 떠도는 감정에 로젤린은 입 안쪽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발로 카펫을 밟고 있다가 딴짓 한다고 파르딕트에게 혼나기도 했다.

리카르디스와 간제는 테이블을 끼고 마주 앉았다. 양 쪽 다 호위 인력이 많다 보니 전투 직전의 대치 상태처럼 보였다.

간제는 쯧, 혀를 차고는 고개를 까딱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도 작작하고 좀 나가 있으라는 얘기처럼 들렸으나, 호위하는 자들은 꿈쩍 할 줄을 몰랐다.

리카르디스가 괜찮다고 만류하려던 차,

“못 볼꼴을 보여 드렸군요, 전하. 오라비의 사람들인지라 제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마인 부대니 뭐니 하며 목을 꼿꼿이 세우고 다니던 놈들인데, 일라베니아에 와서까지도 저러고 있군요. 대신 사과드리지요.”

간제의 발언 때문에 다들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왕녀의 호위인 만큼이나 단순한 전사들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으나, 하카브가 직접 붙인 사람들인 데다가, 마인 부대?

로젤린이 감지해 내지 못했으니, ‘파편’으로 만들어진 인조적인 마인 부대는 아니었다. 순수한 마인의 경우, 마력을 운용하지 않으면 로젤린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카브가 믿는 구석이 이것이었나 보다. 순수한 마인으로 이루어진 전사들.

그리고 그 전사들은 간제의 발언에 눈썹을 높게 올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고, 곧 얼굴 표정을 수습했지만 그를 눈치채지 못한 기사단원은 없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들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리카르디스는 가면같이 웃는 얼굴로 간제를 바라보았다. 이 왕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혀 발타 쪽에 득이 될 발언은 아니었다. 무얼 바라는 걸까. 간제는 주위의 얼어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르르 녹을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걱정 마시지요. 누구를 해하라는 말은 없더이다. 그저 광견병 걸린 미친개처럼 날뛰는 제 입단속을 하라 붙여 놓은 자들입니다. 이놈들 기세등등한 게 꼴 보기 싫었는데, 마침 잘 와 주셨습니다. 전하께서 계시면 쪽도 못 쓸 인간들이니 말입니다. 뭐라 욕 좀 해 주시지요. 들어도 찍소리도 못할 겁니다.”

호위대의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제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당황한 기색을 숨겼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정치판에서 그가 제 진심을 내보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미쳤나?’

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곱게 자란 왕녀인줄 알았는데, 곱게 자란 미친 왕녀였다.

“……이토록 방문을 환대해 주시니, 기쁘군요. 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간제 왕녀. 여정은 어떠셨는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에 에둘러 답하며 급히 화제를 옮겼다. 간제는 욕해 달라는 말이 진심이었던지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곧 차를 홀짝이며 흑갈색의 눈동자를 굴렸다.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이마에 주름을 잡고 답했다.

“발타나 일라베니아나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비슷하더군요. 시체가 오죽 들끓는 게 아니라, 답답한 마차 생활만 했지 뭡니까.”

들어 본 적도 없는 참신한 대답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가리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들어도 무례한 말이었다. 하지만 간제의 말에 악의가 없음은 진즉에 파악했다. 정말 순수한 감탄과 감상뿐이라 그게 도리어 웃겼다. 잇세리온이 멍한 눈으로 간제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호위단의 단장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미쳤나? 봄날의 망아지 같은 왕녀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재앙 같은 입이 일라베니아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활개 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간제는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경악을 읽었는지 어설프게 웃으며 변명했다. 자신이 말한 것이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당신들의 나라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비위가 좀 약해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하도 참아 배가 당겨 오기 시작했다. 그녀 뒤에 시시각각 얼굴색을 바꾸는 호위 단장과 간제 왕녀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자아내는 이 기묘한 분위기가 어찌나 웃긴지.

호위대의 대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생각해, 하카브 왕자가 불렀다며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간제가 짜증냈다.

“소식을 알리는 사람도 들어오지도 않았고, 네가 나가지도 않았는데 오라버니가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어찌 알고그래? 오라버니와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사이더냐? 한 몸이기라도 해? 불쾌하니 썩 떨어져라.”

그녀는 씩씩 성을 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으로는 잔뜩 불만스러워 해도 순순히 따르는 걸 보면, 그녀를 호위하는 남자에게 제법 많은 권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멈추고 간제를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카브가 그녀를…….’

해친다든가? 여러 정보를 일라베니아 측에 넘긴 상황이니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하카브에게 혈육의 정 같은 게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형제들의 목은 물론이고, 동복형제 두 명도 망설임 없이 살해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나마 장소가 장소다 보니, 당장에 그녀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지만…….

리카르디스의 복잡한 속내를 눈치챈 것인지 일어서 있던 간제가 후후 웃었다.

“걱정 마시지요.”

“…….”

“오라버니는…… 하카브는.”

호위 단장이 또 쩍 입을 벌렸다. 왕자 전하의 이름을 감히! 이 왕녀를 진짜!

“나를 절대 죽이지 않을 테니.”

계속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잠깐이었고, 간제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달라붙었던 무언가를 털어 버렸다. 다시 웃은 그녀는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가련한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이번 만남도 짧았군요. 올해에 가장 아쉬운 순간이지 뭡니까.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는 간제의 말을 가로채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간제가 아하하 웃었다. 간제는 시녀와 호위단에게 쌓여서 곧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녀는 제 팔을 붙잡은 호위 단장의 손을 장신구의 뾰족한 부분으로 푹 찔렀다. 호위 단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 * *

연회는 연일 계속 이어졌다. 참석이 의무는 아니지만, 여러 정보와 교류가 오고 가는 장소였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붙어 있는 쪽이 이득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그런 이유로 매일 연회장에 얼굴을 보여야 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그는 점점 지쳐 갔다.

“망해 버려…… 일라베니아…… 흔적도 없이…….”

제국의 황자가 매일 밤 자신의 나라더러 망하라는 말을 내뱉고 풀썩 쓰러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로젤린은 일부러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녀만큼 믿음직한 호위도 없지만, 그녀만큼 불안한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로젤린이 벌일 수많은 예상 범위 내의 사건을 제외하고도 불안 요소는 많았다. 로젤린의 이름이 유명한 만큼이나, 그녀를 탐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축복의 밤에 대한 비밀을 모르더라도, 강한 무기라고 하니 탐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앞에 로젤린을 미끼로 내놓고 살살 꾀는 방법도 있으나, 미끼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파티에서 가끔 만나는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있어야 할, 누군가의 부재에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참석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저 멀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칼릭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스물일곱 번째 여인과 춤을 추는 리카르디스를 보며 짠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디스가 울컥해할 찰나, 칼릭스의 눈빛이 한층 더 슬퍼졌다. 비 오는 날 강아지를 보는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스물여덟 번째의 여인이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뒤에 선 잇세리온이 속삭였다.

“힐리사고의 왕녀, 지옐입니다.”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속삭였다.

“이래 보여도 아직 머리는 돌아가고 있다, 잇세리온. 어제 그녀가 나에게 다섯 번 찾아와 여섯 번 춤을 신청하고 내 발을 일곱 번 밟았는데 잊을 수 있을 리가.”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해 보이나? 리카르디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힐리사고의 왕녀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발길이 절로 흐르는 듯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신지요?”

힐리사고의 왕녀가 빙빙 돌려 말하며 빨리 춤을 신청하라 재촉했다. 리카르디스가 떨리는 입가를 애써 억누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려 할 때였다.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몇 명의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제 주인들을 찾아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찾는 상급 기사 르원을 발견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리카르디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옮기자 힐리사고의 왕녀가 작게 혀를 쯧 찼다. 돌아보니 사냥감을 놓친 맹수의 눈빛을 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르원이 다가와 리카르디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고슈의 사절단이 막 도착했습니다.”

그 말이 이르는 사실은 명백했다. 라고슈의 내전이, 끝났다.

“생각보다 빨리 정리됐군.”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 내부를 훑었다. 그는 저 멀리에 벽에 기대어 느긋하게 사태를 관전하는 하카브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입에서 입으로 “라고슈…….”나 “플로에토…….” 같은 단어를 서로 나르고 있으니 그 또한 라고슈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색 하나, 행동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는 바이페렘 플로에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카브의 자만이 아니었다. 바이페렘 플로에토의 세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왕족과 귀족을 규합시켜 그녀를 끌어내리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이번 대의 라고슈 왕족은 불의의 사고로 많이 죽어 나가, 그녀 외의 걸출한 인물은 찾기 힘들었다. 어리거나 어리석은 자들뿐이니, 내전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바이페렘, 플로에토가 실각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굳은 얼굴로 목각 인형처럼 르원을 슥 돌아보았다.

“플로에토가 실각했다고?”

그녀를 끌어낼 만한 인물이 라고슈에 남아 있었던가?

연회장이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커다란 아치 모양의 입구로 라고슈의 새로운 바이페렘이 걸어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그 인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귀족들이 나라를 쥐고 흔들려는 건가. 라고슈도 끝났군.”

저 어린아이가 귀족과 왕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플로에토를 끌어내자 했겠는가. 다 꼭두각시놀음이다.

하카브를 쳐다보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제 볼을 느릿하게 쓸고 있었다.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뭐 썩 나쁘지는 않다. 그런 뜻인 듯했다. 내전으로 결속력이 약해진 왕국을 다스리는 꼭두각시 왕 하나 구워 먹지 못하겠느냐 하는 자신감이 보였다.

발타가 나서기 전에 일라베니아가 손을 써야 했다. 북쪽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지배하는 라고슈. 그들은 앞으로 급격히 변화할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라고슈의 어린 왕에게 우르르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인파에 바이페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바이페렘은 눈에 띄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카브는 어린 바이페렘이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하카브의 시선이 소녀에게서 벗어났다. 그 순간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도 입구로 모여들었다.

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흑색의 지팡이가 홀의 바닥을 울렸다. 혼란과 소란을 잠재우는 묵직한 소리였다. 빛이 쏟아지는 입구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고집스러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는 라고슈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어린 바이페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총총 걸어갔다.

리카르디스가 르원을 돌아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눈빛에 르원은 어깨만 으쓱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굴렸다. 탁한 보라빛 눈동자, 작은 체구임에도 감히 내려다볼 수 없는 기세. 70대 중후반의 왕족?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으로 라고슈의 왕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설마……?’

리카르디스가 당혹스러운 낯빛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려 하카브를 찾았다. 아까 전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이던 남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있었다. 언제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여유로웠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비틀려 있었다.

그의 주위로 발타의 사절단이 급하게 모여들었다. 정보를 물어 온 자들이 하카브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이고 있었다. 하카브는 굳은 미소가 걸린 입술을 슥 쓸며 나이 든 여인만 주시했다.

‘곤란한데.’

리카르디스는 멀리서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의 반응으로 노파의 정체를 확신했다. 연회장이 술렁였다. 나이 든 귀족 몇몇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바이페렘, 딤라…….”

그녀는 작고 큰 부족으로 이루어진 약소국 라고슈를 규합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 올린 장본인이었다.

플로에토 3대 전의 바이페렘. 딤라의 등장이었다.

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부족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주 오래 거슬러가야 했다. 때는, 지도에 라고슈라는 이름이 없던 시절.

대륙 위에 자리 잡은 나라들이 서로 몸집을 불리고, 작은 부족들을 섬멸해 땅을 차지하고자 벌이는 정복 전쟁은 그 당시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러한 흐름에 따라 약한 자들끼리 뭉쳐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키는 일 또한 아주 흔했다.

라고슈도 그렇게 건국된 나라였다. 그 전까지 서로 검을 겨누던 열세 개 부족은 외부의 적으로 인해 빠르게 결속했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고자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그들의 맹세는 검고 단단한 라고슈의 돌에 조각되어 왕성의 최 하단부로 옮겨졌다. 라고슈의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서약 위에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길 바라며.

초대 왕을 선출하는 과정은 열세 개 부족의 다수결로 이루어졌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팔 한쪽이 없는 여자가 왕관을 쓰게 되었다. 라고슈의 건국을 위해 수년 동안 쉴 틈 없이 추운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부족들을 설득하고 협박했던 공로는 시간이 지난다고 빛 바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서약이나 다름없었다. 라고슈 왕의 호칭이 ‘영원한 서약’을 뜻하는 ‘바이페렘’으로 불리게 된 이유였다.

라고슈를 지키기로 맹세한 나머지 열두 명의 부족장은 ‘제르타예’라 불리게 되었다. 지하 깊은 곳 영원한 서약의 주위를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의미했다.

그들은 힘을 모아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아 내고, 서로가 서로를 지켰다. 영원한 서약의 내용 그대로. 그러나 한차례 대륙을 휘감아 몰아쳤던 전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피 냄새 나는 대지 위로 평화가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쟁취한 승리와 평화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달콤함에 불과했다. 많은 것이 변했으나, 그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춥고 척박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았다. 싸움은 예견된 것이었다.

분쟁을 외부로 돌리지 못했던 이유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휴전협정을 맺은 그때에 다시 침략전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 했다가는 다른 나라들의 동맹군에 라고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라고슈 내부. 그들끼리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승패가 갈림에 따라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 또한 갈라졌다. 비록 ‘라고슈’ 라는 이름에 묶여 있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균열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러한 분위기는 아주 오래 지속되어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 전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약소국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뭉치지 못하니 약하며, 약하니 성장하지 못한다. 악순환의 굴레였다.

그런 때에 딤라가 즉위했다. 그녀는 바이페렘의 칭호를 달자마자 왕실이 몇 대를 걸쳐 쌓아온 부를 조각내어 라고슈의 곳곳에 퍼트렸다. 작은 나라를 건국할 수 있을 정도의 방대한 금액이었다.

모두들 바보 같은 짓이라 했다. 돈을 쥐고 있기에 그 엉망진창인 나라를 통치할 수 있던 것인데, 딤라는 제 힘을 전부 나눠줘 버린 셈이었다.

왕은 백성을 보살피고, 백성은 왕을 존경하며 서로 간의 유대로 나라를 형성한다? 그저 이상뿐인, 헛된 바람들이라며 욕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딤라는 언제나 어떤 이상도 꿈도 가지지 않은 자는 위에 설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순응이라는 말로 눈을 감아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싸움을 피하는 비겁자들이여. 왕은 비겁해서는 안 되고, 결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막 즉위한 철부지 여왕의 이상론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권력자들이 딤라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왕의 말로가 어떻겠느냐. 그것은 비단 라고슈 왕국 내부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인접한 다른 나라들이 라고슈를 넘보기 시작했다.

겔리츠 왕국이 라고슈 왕국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서 하나의 마을을 섬멸했다. 본격적인 침략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겔리츠 왕국은 이후,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지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지게 되었다.

서로 물고 뜯기만 하던 부족들이 딤라 아래 빠르게 뭉쳐 일어선 것이다. 언제나 싸움을 달고 사는 전투 민족. 눈 폭풍에서도 살아남은 강한 전사들. 저들끼리 치고받아서 몰랐다 뿐이지, 그 칼날이 제대로 벼려져 외부로 향한 순간 모두가 그들의 위험함을 알게 되었다.

[추운 나라에서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형제들이여.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천년의 돌에 새겨져 열 두 개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영원히 비추리라.]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망각했던 서약을 딤라가 일깨웠다. 희미하게 꺼져 가던 제르타예의 불꽃들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물론 오랜 균열을 한 번에 이어 붙일 수는 없었다. 왕실을 경시하거나 더 나아가 반反 라고슈를 지향하는 무리도 더러 생겨나, 겨우 나아가고자 하는 라고슈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온건하게 베풀기만 하는 젊은 바이페렘에게 이 세대를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겔리츠 왕국과의 전쟁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타 부족을 약탈하는 행위가 라고슈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딤라는 땅 위에 흐르는 형제들의 피에 분노했다. 경고는 없었다. 자애로운 군주, 그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흉포한 전사는 형제를 해치는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날뛰던 자들은 그녀의 검 아래 무릎 꿇었다.

이후로도 딤라는 때로는 당근, 때로는 채찍으로 라고슈를 움직이고, 묻혀 있는 자원을 발굴해 타국과 무역교류를 성사시키는 등의 한 사람의 일대기라고 도무지 볼 수 없는 갖은 업적들을 이뤄 냈다.

딤라의 치세 이후 라고슈에 대한 인식은 급격하게 변했다.

‘저들끼리 잡아먹는 무식한 야만인의 나라’에서, ‘자칫하면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건드리면 안 되는 야만인의 나라’로. 그 얘기를 들은 딤라는 왕좌 위에서 굴러 떨어져 깔깔깔 웃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생을 바쳐 나라를 우뚝 세우고 물러났더니…….

손녀, 플로에토가 라고슈에 다른 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국가의 자원을 야금야금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약 딤라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해도 관 짝을 발로 차고 나올 만한 사태였으니, 지금의 상황에 그녀의 등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태껏 하카브가 딤라의 존재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녀가 은퇴한 지 수십 년은 지났거니와, 그 이후로는 일절 왕국의 일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설적인 바이페렘. 하지만 지난 시대의 인물이며, 옛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 옛날의 설화가 갑자기 튀어나와 살아 있는 인물이 된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하카브 뿐만이 아니었다.

플로에토는 유폐되고, 라고슈는 새로운 바이페렘을 맞이했다. 어린 왕, 관디테는 실각된 플로에토의 조카로 딤라에게는 증손녀가 되는 셈이었다. 딤라는 아직 어린 바이페렘을 보호하기 위해 은거를 마치고 섭정으로서 나섰다. 몇 대 전에 물러간 노쇠한 여왕이었으나, 아직 그녀의 힘은 라고슈 전역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다.

바이페렘, 아니 이제 섭정이 된 딤라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 바이페렘이 총총 걸음으로 그녀를 따랐다. 하카브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의 핏줄을 이런저런 수작질로 꼬여 내어 라고슈에 혼란을 야기한 자, 하카브. 그에 대한 딤라의 감정이 어떨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암만 거친 라고슈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팡이로 냅다 머리를 내려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온건히 인사만 오가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라고슈의 사절단을 주시했다. 딤라가 하카브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카브와 발타의 귀족들. 그리고 딤라와 소녀의 뒤를 따르는 라고슈 사절단. 두 무리가 대치했다. 연회장에 라고슈의 싸늘한 북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하카브가 웃는 얼굴로 먼저 정적을 깨트렸다.

“이 즐거운 자리에서 라고슈의 새로운 바이페렘을 뵈어 영광입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바이페렘 관디테는 하카브의 반 쯤 되는 키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려다보는 듯, 도도하게 턱을 들고 인사를 받았다.

“힉살라의 첫 번째 아들. 얘기는 익히 들었노라. 축복이 가득한 날에 만나 나 또한 기쁘다.”

익히 들었다는 얘기는 결코 좋은 게 아닐 것 같았다. 하카브가 웃으며 딤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제가 무어라 칭하면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과거의 이름은 빛 바랐으니, 지금은 섭정관에 족합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섭정관 딤라.”

그녀가 주름이 푹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나 또한 왕자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고대하였습니다. 기쁨이 아닐 수 없군요.”

리카르디스는 한기가 들어 제 팔을 쓸었다. 그의 옆에서 르원이 제 가슴을 툭툭 치고 있었다. 먹은 것이 체하는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저라면, 저 자리에서 울 겁니다.”

잇세리온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럴싸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하카브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없이 기뻐졌다. 리카르디스는 꽁꽁 얼어 있는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주 꿀맛이었다.

“이런, 하카브 왕자. 표정이 좋지 않은데, 혹 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었는지요.”

리카르디스도 샴페인을 뿜을 뻔했다.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하카브는 2초간의 공백 후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 2초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있겠…….”

“언젠가 한번 라고슈의 왕성에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왕자.”

딤라가 그의 말을 싹둑 끊었다. 하카브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섭정관.”

“플로에토도 왕자를 보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홀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로부터 벗어나 발치와 잔의 끄트머리, 샹들리에 주위를 배회했다. 너무나도 거북했다. 역시나 라고슈. 직진밖에 모르는 야생마 같은 나라였다.

달그락. 딤라의 지팡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일부러 떨어트린 것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실수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카브가 굳은 낯으로 그녀의 지팡이를 주워 주었다. 딤라는 하카브의 손길이 닿은 부분을 손수건으로 슥슥 닦으며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직접 주워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별 말씀을.”

“이만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 보아야겠습니다. 다음에 만나 또 즐거운 대화를 나누길 바랍니다.”

즐거운 대화… 아……. 누군가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돌아서서 걷다 하카브를 돌아보았다.

“라고슈는 은혜와 원한을 잊지 않습니다. 이 빚은 다음에 갚도록 하지요.”

지금 지팡이를 주워 준 일을 말하는 것인지, 플로에토의 일을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르원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잇세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손 좀 주물러 줘. 체한 거 같아.”

잇세리온이 제 동생의 손을 조물거리는 그때까지도 하카브는 가만히 딤라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가볍게 숨을 내뱉은 그가 경직된 미소를 그대로 걸친 채 연회장을 떠났다. 하카브 주위에 있던 발타의 귀족들도 우르르 빠져나갔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하지 못할, 회의가 간절해 보였다.

크게 팽창해 터질 것 같던 분위기는 그 분위기를 받치고 있던 한 축이 빠져나감으로써 완화되었다.

딤라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어린 바이페렘을 끌고 다니며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녔다. 한 나라의 왕과 섭정이라기보다는 증손녀와 증조모처럼 보일 뿐이었다.

누구 하나 그들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리카르디스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테라스에 나가 있다가 막 연회장에 발을 들인 남자였다. 그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보지 못했으나, 직감적으로 무언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숨죽인 공간의 기류와 사람들의 시선이 흐르는 중심을 금세 파악하고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딤라와 어린 바이페렘에게 닿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지 알아본 것 같긴 한데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라고슈의 사절단이 있는 쪽으로.

당황한 리카르디스는 스쳐지나가는 칼릭스의 손목을 탁 틀어쥐었다. 의문스럽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그의 누이와 똑 닮아 있었다. 사고치고는 쳤는지도 모르는 그 표정.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삭였다.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는 훌륭한 복화술이었다.

“칼릭스 경. 나는 경의 누이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갑작스러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지금 그대의 행선지에 대해 내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괜한 걱정이 맞나?”

칼릭스가 본인의 행선지, 딤라를 보고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걱정 마시죠.”

당당해도, 당당해도, 당당을 해도! 이렇게나 당당할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망설이다가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칼릭스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대체 뭘 걱정하지 말라는…….’

모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이 정적인 공간 속에서 한 사람만이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곧 그가 딤라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몇 대를 대물림 해 오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성정은 유명했다. 휘어질 바에야 부서지는, 제 이득을 위해 달콤한 말 하나 할 줄 모르는, 융통성이라고는 없고 고집스럽고 깐깐한.

그런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타국의 유명하고 힘 있는 왕족에게 접근할만한 이유? 감히 추론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칼릭스는 라고슈의 사절단 앞에 당도했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사고를 친다고 자신이 수습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로젤린에게 학습된 탓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칼릭스는 먼저 바이페렘 관디테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어린 바이페렘은 칼릭스와 몇 마디 나누더니 그 나이 대의 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다들 궁금해 슬금슬금 그들을 향해 몇 발짝씩 다가갔다.

칼릭스는 곧 무릎을 꿇고 딤라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가볍게 대었다. 라고슈의 아이들이 어른에게 보이는 예의였다.

“갈라·제르타예. 사벡의 큰아들 칼릭스입니다.”

챙그랑.

누군가가 떨어트린 포크가 대리석에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울렸다.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경악했다.

또 다른 증손주가 나타났다! 심지어는 그게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라니!

그, 그러고 보면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이 라고슈 출신이었죠? 왕족 방계 가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딤라가 오죽 윗세대 사람입니까. 라고슈에 잡히는 왕족 적당히 붙잡고 물어보면 전부 딤라의 손녀 손자, 아니면 증손녀 증손자라고요. 시끌벅적,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고 정신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좁힌 채 머리를 굴렸다. 잇세리온과 르원도 사태를 깨닫고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당장 섭정관 딤라가 칼릭스의 증조모라는 사실도 기겁하며 놀랄 일이었으나, 그보다 이 성안에 있을 또 다른 증손주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그녀 또한 붉은수레바퀴의 자식이 아니던가. 딤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로젤린을 둘러싼 정세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를지, 휩쓸리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했다.

잇세리온은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꾹꾹 누르며 얘기했다.

“타국에 있는 혈육을 반기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 그렇게 된다면 딤라 섭정관과 로젤린 경. 두 사람의 관계는 실상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라고슈 왕족들은 대대로 일라베니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쪽의 피가 섞인 증손주를…….”

라고 잇세리온이 말하는 순간 딤라가 무릎을 꿇은 칼릭스의 볼에 진하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주름진 손으로 칼릭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쓰다듬다가 꼬집기도 하고, 다시 반대쪽 볼에 입을 맞추고 활짝 웃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핏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살가웠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칼릭스는 무척이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딱딱한 얼굴을 부드럽게 녹이며 애정을 온전히 받아 내었다.

“매우 좋아하시네요. 일라베니아의 피가 좀 섞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나 봅니다. 큰 인물답게 큰마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르원은 여전히 체기가 가시지 않는지 제 명치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딤라는 칼릭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삼십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회장에 머물렀지만, 모두 딤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라고슈의 내전은 종식되었고, 어린 왕의 뒤에는 내가 있다’는 것.

라고슈 사절단과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빠져나간 연회는 한층 더 왁자지껄해졌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 바이페렘 관디테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조금 당황했노라.”

“처음으로 일라베니아의 연회에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국의 주요 인사가 모이는 자리라 중압감이 크셨을 텐데, 아주 의연하셨습니다.”

“음. 낚시대에 달린 미끼의 기분을 알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뜯어 먹히는 줄 알았다.”

관디테가 웃다가 칼릭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르타예의 후손을 만나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딤라는 두 증손주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칼릭스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쓸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네 얼굴에서 사벡이 보이는구나, 칼.”

사벡은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 에델바이스의 본명이었다. 높은 곳에 피는 에델바이스를 뜻하는 라고슈의 명칭, 사벡. 그녀가 일라베니아로 시집올 때에 사벡이 지닌 뜻을 일라베니아에 익숙한 형태로 바꾸었다. 이따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에델바이스 더러 “사벡, 당신.” 하고 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불렀기에 칼릭스도 잘 알고 있었다.

“……네!”

칼릭스가 붉은수레바퀴 백작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은 제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대체 어머니의 흔적을 어디서 찾은 것인지는 몰라도 증조모가 닮았다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여기가.”

딤라가 가리키는 곳은 눈이었다.

‘음…….’

칼릭스는 속으로 신음했다. 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중 특히나 닮은 곳이 눈이었다. 딤라의 시력이 많이 나쁜 듯했다. 눈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중, 딤라가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거짓말 못하는 성미는 붉은수레바퀴를 닮았느냐. 외관이야 붉은수레바퀴를 찍어 낸 듯하다만, 눈빛이 사벡을 닮았다. 제 가진 만큼의 다정함을 담아 낸 시선이야. 인간을 이루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물려주어 다행이구나.”

칼릭스는 어렸을 적부터 에델바이스에게 딤라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했지만,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하나도 안 무서웠다고.

아름답고 멋진 왕실보다 조금은 예스럽지만 고즈넉한 딤라의 별장을 가는 게 훨씬 좋아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들렀다고 했다. 딤라는 어린 손녀가 맹랑하게 제 발치에서 뒹굴 거리며 노는 모습에 호탕하게 웃었단다.

요즘도 에델바이스는 주기적으로 딤라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게 딤라가 말하는 다정함일까. 그렇다면 제 누이가 훨씬 닮은 것이리라. 그녀 또한 기사단 일로 바빠도 꼭 편지를 보내 주지 않던가. 먼 사람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상적인 행위도 오랜 기간 쌓이고 쌓이면 다정함이 되곤 하니까.

솔직히 자신은 증조모 앞이라 갖은 귀여운 체 하고 있지, 평소의 모습을 보면 그녀도 다정하다는 말은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더러 냉혈한이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이니, 제 아버지랑 겉과 속이 똑 닮았느니 말하는 사람들이 딤라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할지 조금 궁금했다.

“한데, 붉은수레바퀴는 어디 갔을까…… 연회장 안에서는 보지 못하였는데.”

딤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굳이 따지자면 칼릭스도 붉은수레바퀴였지만, 지금 그녀가 찾는 붉은수레바퀴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창밖의 먼 풍경을 보며 말을 흘렸다.

“그…… 일로 무척이나 바쁘셔서…… 변경의 수비를…….”

“안타깝게 되었구나.”

딤라가 혀를 찼다. 칼릭스는 ‘죽이지 못해서’라는 뒷말을 읽어 내었다.

라고슈는 발타와는 다르지만, 발타만큼이나 폐쇄적인 기질이 있다. 외부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고, 저들끼리 꽁꽁 뭉친다. 그래서 여타 다른 나라처럼 일라베니아 제국 사람과 혼인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딤라가 곱게 키운 에델바이스가 라고슈에 잠시 들린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반했다. 칼릭스는 제 어머니가 대체 아버지의 어디에 반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딤라는 혈압이 올라 몇 번 쓰러질 뻔했다고 한다.

얼굴은 딱딱하게 사납고, 성격도 무뚝뚝하다. 저런 놈은 여자 팔자를 망칠 놈이라 말을 해도 에델바이스는 사랑의 열병을 너무도 혹독하게 앓았다. 고집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딤라가 한풀 꺾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두 사람은 혼인하게 되었고, 딤라는 페르탄에게 덕담을 가장한 경고와 협박을 했다.

경고와 협박이 먹힌 것인지 원래 그럴 운명이었는지, 에델바이스는 나름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보냈다.

딤라가 받는 편지에도 번번이 행복하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으나, 일 년에 절반 이상을 다른 지역에 체류하는 남편을 둔 그녀가 외롭지 않을 리 없었다. 딤라는 가슴이 찢어졌다.

페르탄을 죽일 날만 받아 놓고 있던 그녀에게 일라베니아로 넘어온 이번은 좋은 기회였을 텐데, 그는 마침 며칠 전 국경을 지키러 떠난 상태였다.

칼릭스는 저번에 페르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이 좋지 않다.]

발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내려간 거야? 심지어 라고슈 사절단에 대한 정보는 황실에서조차 몰랐는데, 단순히 감 하나로 회피했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

딤라가 이렇게 성을 내는데도 관디테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분명히 라고슈에서도 욕을 많이 했겠지 싶었다. 칼릭스는 딤라가 제 아버지 욕을 하는 것에 열심히 맞장구 쳤다. 맞습니다. 아버지가 좀…… 그러시는 경향이 있죠.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너무 진심이라서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딤라는 칼릭스의 호응에 마음이 풀렸는지 성난 기색을 누그러트렸다.

“칼.”

“네, 증조할머님.”

“로젤린은 언제쯤 만나 볼 수 있겠니. 일라베니아에서 너희들을 보는 것만이 오로지 내 기쁨인데.”

로젤린을 불러 오겠다 말하려던 칼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연회장에서 만난 이후 줄곧 딤라를 집안의 어른처럼 대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단순한 누군가의 증조할머니가 아니었다. 넓은 혹한의 땅의 충성을 받는 위대한 바이페렘. 제르타예의 불꽃을 되살린 자. 그리고 발타와의 동맹을 끊어 낸 자.

바라건 바라지 않건, 모두들 그녀를 그렇게 볼 것이다. 힘을 쥐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염치도 없다 할 것이다. 평생 만나지도 않던 혈육을 보자마자 그걸 이용할 생각부터 해? 솔직히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미래고 안위고 다 버리고 뛰어든 판에 그 감정을 하나하나 음미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 염치 불고하고.’

칼릭스는 눈을 접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누님은 리카르디스 전하의 호위라 함부로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증조할머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월장석 성으로 모셔도 될는지요. 누이도 증조할머님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딤라가 리카르디스에게, 로젤린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월장석 성에 들어갔다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건, 어떤 거래가 오고가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모두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것이다.

딤라의 낯빛이 바뀌었다. 귀여운 손주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과거 라고슈를 호령했던 바이페렘의 위엄이 언뜻 비쳤다.

“붉은수레바퀴도 확실히 보이긴 한다만…….”

딤라가 칼릭스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역시 사벡을 더 닮았구나. 내가 제 뜻대로 움직이리라는 건방진 생각을 품은 것을 보자니.”

칼릭스는 겸연쩍은 듯 씩 웃고는 나름의 애교를 더했다.

“저는 증조할머니에게 생일 선물을 받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태어난 날이…….”

“한참 남았습니다.”

딤라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참 어이없어 한 이후에 칼릭스의 볼을 토닥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빤히 보이는 수작으로도 언제나 나를 움직였다는 것이, 사벡의 대단한 점이란다.”

“제가 어머니를 좀 많이 닮았습니다.”

칼릭스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 * *

월장석 성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칼릭스가 보내 온 서신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섭정관 딤라를 모시고 월장석 성에 방문해도 되겠냐는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서신을 다시 읽었다.

“누가 남매 아니라고 할까 봐. 칼릭스 경은 정말 로젤린 경을 쏙 빼닮았군.”

“사건 사고가 따른다는 점 말입니까?”

“시야 밖에서는 그 특징이 가속화 된다는 점까지 더해서.”

분명 좋은 기회이긴 했으나, 당황스러운 게 우선이었다. 딤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난 칼릭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딤라가 무거운 몸을 일으킨 것일까. 딤라는 자신이 움직였을 때의 풍파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월장석 성에 온다는 얘기는…….

“대체 뭘 한 걸까요. 칼릭스 경은.”

“비스타에서 위명이 자자한 귀염둥이 칼의 진면목이 드러났겠지. 그 남자는 저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강아지인 체 하는 게 특기인 것 같던데.”

“설마 섭정관께서 그걸로 마음을 움직이셨을까요.”

“어떤 거래가 오갔다고 하는 쪽이 더 마음이 섬뜩하지 않겠나? 대체 그녀가 뭘 요구했을 줄 알고?”

“아니요 전하. 저는 칼릭스 경의 애교 쪽이 좀 더 섬뜩합니다.”

“…마음만의 문제라면 충분히 이해는 간다만. 어쨌거나 흠…… 바빠지겠군.”

붉은수레바퀴 후계자의 이름을 달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 보겠다더니, 생각보다도 도움이 빠르게 왔다.

월장석 성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없으니, 다들 상상력을 발휘하며 소문을 크게 부풀릴 것이다.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리카르디스 2황자와 라고슈가 동맹을 맺었다는 허황된 얘기들이 나돌아 다니리라.

힘은 힘이 모이는 곳에 모이기 마련이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화려한 보석함에 불과하나 다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 엘피디오에게 붙어 있는 기회주의자들이 흔들릴 것이다.

딤라의 방문이 반가운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딤라의 혈육임이 밝혀진 지금, 로젤린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그녀를 탐내는 자들이 더욱 군침을 흘리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반대로 더더욱 손을 대기는 힘들어졌다. 욕심을 잘못 부렸다간 그 딤라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단 일라베니아의 귀족과 타국의 왕족뿐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발타의 기류가 심상치 않은 지금에는 더더욱.

라고슈의 힘이 어디에 실리느냐에 따라 판도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었다. 딤라가 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게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딤라의 눈치를 봐서라도 황제나 엘피디오마저도 로젤린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지 못할 것이다.

적절한 때의, 아주 적절한 도움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언제나 빛나던 월장석 성은 한층 더 빛나기 위해 꽃단장에 들어갔다. 로젤린도 몇 가지 교육을 받았다. 라고슈의 왕실 계보라던가 역사 따위의 거창한 것을 제외하고서, 딤라가 과거 라고슈의 위대한 바이페렘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에델바이스의 할머니가 된다는 것. 딱 그 정도의 표면적인 정보만 일러 주었다.

딤라가 거대한 힘을 쥐고 있는 권력자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는 식의 언급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젤린을 회유하여 딤라를 포섭하는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리카르디스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보다 의욕이 넘친 로젤린이 판을 아주 엎어 버리는 불상사가 굉장히 높은 확률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유가 더 크긴 했다.

애초에 딤라가 월장석 성에 방문하는 목적도 알지 못하는데, 뭘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준비도 없이 전장에 뛰어드는 일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백전노장. 어설픈 수작질은 금방 꿰뚫어 볼 게 뻔했다. 차라리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딤라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편이 중간은 가는 방법이었다.

약속의 때가 다가왔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리카르디스의 장신구가 번쩍 번쩍 빛났다. 로젤린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빛 무리에 계속 눈을 끔벅거려야만 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고 있을 때 마차가 도착했다. 칼릭스가 맨 처음에 내려, 딤라와 관디테를 에스코트했다.

“먼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페렘 관디테.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입니다.”

리카르디스가 살짝 묵례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짙은 밤색 고수머리의 어린 바이페렘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반겨 주어 고맙다, 2황자 리카르디스. 북풍의 냉기는 일라베니아에 미처 닿지 못하니, 닿는 걸음마다 피어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아주 기뻤다.”

“바이페렘의 기쁨을 위해 지고하신 분이 안배하셨나 봅니다.”

리카르디스는 관디테에서 딤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섭정관.”

리카르디스의 질문을 들으며 딤라는 그의 뒤에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번쩍이는 보석 빛에 정신 못 차리고 눈을 끔벅거리는 중이었다. 딤라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칼릭스와 시선을 맞췄다. 저게 내 증손녀가 맞느냐 묻는 눈빛에 칼릭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표정을 구긴 채,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눈을 깜박이는 누이의 모습이 약간은… 좀…… 많이…… 영특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라베니아와 라고슈의 고위 인사들이 만나는 자리라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해 칼릭스의 마음은 답답해져 갔다. 아니, 평소에는 저렇게까지는 아니고요, 저것보다는 좀 낫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상은 그 말 또한 안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자리를 옮기자고 리카르디스가 말하려던 차, 눈을 감고 있던 로젤린이 불쑥 움직였다. 그녀는 리카르디스를 지나쳐 딤라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관디테와 딤라의 호위 기사들이 깜짝 놀라며 칼을 반쯤 빼어 들었다.

캉!

반쯤 날을 보였던 검이 다시 검집에 처박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로젤린이 손잡이의 끝을 콱 짓눌러 밟아 검을 뽑으려던 호위의 행동을 저지시킨 것이다.

호위가 당황스러워 하는 사이 로젤린이 딤라를 향해 휙 주먹을 뻗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딤라를 주시한 채, 흉흉한 기세로.

“로젤린!”

“누님!”

악, 꺅 비명 소리가 퍼졌다. 로젤린이 딤라를 공격할 이유는 없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거기까지 추론할 여유가 없었다.

몇 초가 지나도 늙은 섭정관의 비명 소리라던가, 병장기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잇세리온이 한쪽 눈을 살짝 떴다. 로젤린의 주먹이 향한 곳은 딤라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얼굴 바로 옆이었다.

모두 숨소리도 못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로젤린이 주먹을 제 앞으로 가지고 와서 쫙 폈다. 손바닥 안에 거대한 벌이 한 마리 죽어 있었다.

“벌입니다.”

눈이 있으면 그 정도는 보인다.

“등검은말벌. 도감에서 봤습니다.”

그건 몰랐다. 이름이 유명해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도 독이 강하기로 유명한 종이었다. 관디테처럼 어리거나 딤라같이 노쇠한 사람들이 쏘일 경우에는 위험성이 더더욱 높아졌다. 미연에 사건을 방지한 것은 장하지만…….

로젤린은 자신이 밟은 검의 주인에게 사과하고 손잡이를 닦아 주었다. 남자의 표정이 몹시 이상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마무리했다. 뒤에서 관디테가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렸다. 무얼 원하는지 눈치챈 로젤린이 등검은말벌을 소녀에게 보여 주었다. 관디테가 오, 하며 눈을 반짝였다.

“가지시겠습니까?”

어린 바이페렘이 수줍은 듯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만 슥 내밀었다. 로젤린이 그 속에 벌레 사체를 곱게 잘 넣어 주자, 시녀들이 뒤에서 기겁했다.

리카르디스에게 다시 돌아오며 손을 탁탁 터는 로젤린은 정말로,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

다들 이 상황을 어떻게 흘려보내야 할지 몰라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탁탁.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눈 하나 꿈쩍 않던 딤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까 리카르디스가 물었던 ‘오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의 대답인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와 바이페렘 관디테, 섭정관 딤라와 로젤린, 칼릭스. 그리고 호위들까지 줄줄이 이동했다. 날이 좋아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복도를 걷던 중, 관디테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으나 로젤린이 잽싸게 옷깃을 잡아채서 똑바로 세웠다. 대롱대롱 매달려 목이 졸린 소녀가 기침을 했다.

로젤린이 쩔쩔매며 관디테의 상태를 확인했다. 칼릭스도 당황해서 제 누이와 같이 자세를 낮추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관디테는 이 상황이 웃긴지 줄곧 고수하던 무표정을 지우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관디테의 의견이 어찌되었건, 연이어 발생한 사고에 로젤린은 스타스에게 기둥 뒤로 불려 가 잠시간 혼났다. 먼저 보고하고 움직여라, 왕족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왕족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둘 다 좋은 뜻에서 했는데 혼만 나서 그녀는 심통이 났다.

월장석 성의 녹음이 푸르게 드리운 중앙 정원. 큰 나무 아래 그늘이 진 곳에 자리 잡은 테이블을 끼고 딤라와 관디테, 리카르디스가 착석했다. 칼릭스는 빙그레 웃으며 관디테에게 말을 꺼냈다.

“바이페렘. 이맘때 쯤 꽃이 만개하는 월장석 성의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라고슈의 수도 모리엔은 바다 근처에 위치해 라고슈의 다른 지역보다는 기온이 높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꽃을 흔하게 볼 수는 없었다.

관디테가 눈알 굴리며 딤라의 눈치를 봤다. 딤라는 혼자서 아주 다 해 먹지 그러냐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보았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잇세리온이 칼릭스를 보고 입을 가렸다. 저것이 소문의 그 귀염둥이 칼…….

관디테는 로젤린과 칼릭스를 대동하고 정원을 구경하러 떠났다. 두 명의 성인이 어린아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뒷모습을 딤라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그락. 리카르디스가 내려놓은 잔이 접시에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딤라는 그제야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갈라·제르타예의 아이들이 따르는 분을 만나 뵙길 긴긴 시간 고대하였습니다.”

네가 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리카르디스라는 작자냐. 와 같은 비꼼으로 들은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딱딱하고 사나운 미소였다.

“바이페렘을 비추는 도페·제르타예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섭정관 딤라. 다시 한 번, 바이페렘 관디테 전하와 함께 먼 걸음을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딤라의 주름진 이마가 꿈틀거렸다. 잠시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시선이 리카르디스를 가늠하고 있었다.

옛 사람들이란 제 찬란했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탓이었을까.

딤라는 일라베니아에 도착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공통된 기류를 읽었다. 그녀를 섭정관이 아닌 과거의 위대한 바이페렘으로 보았다. 현재의 작고 어린 바이페렘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것은 딤라를 띄워 주기 위한 것도 있었으나, 그들 자신 또한 그 대단한 딤라를 만났다는 사실에 크게 흥분해 저지른 실수였다.

[위대한 바이페렘으로 이름을 새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딤라는 멍청한 놈들의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대신 인자하게도 말로 설명해 줬다.

[케케묵은 과거일 뿐이니, 지금은 그저 바이페렘을 지키는 도페·제르타예 딤라. 그리 여겨 주시기를.]

그렇게까지 말해도 멍청한 놈들은 아이고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서 다시 금칠하기 바쁘더라. 그것을 단순한 겸양의 한 종류로 보았던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황제,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까지도. 딤라는 황제라는 놈이 달고 있는 것이 머리인지 장식물인지, 눈인지 옹이 구멍인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그런지 첫째 아들 엘피디오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고.

그래서 딤라는 리카르디스에게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온 상태였다. 낯은 반반하니, 그나마 장식물로서의 가치는 있겠다 생각했는데, 이것 보아라.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나마 제정신 박힌 놈을 하나 만난 것이다. 딤라는 조금 흥미가 동했다. 갈라·제르타예의 두 아이들이 따르는 인물이라는 사실 또한 그에 한 몫을 더했다.

딤라는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의 강퍅해 보이는 인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카르디스 황자.”

“예, 섭정관,”

“이 늙은 몸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길게 둘러 가는 법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라고슈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때에 제국의 어떠한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굉장히 단도직입적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었다.

“하나 말씀드리자면, 칼릭스 경을 회유해 섭정관을 모신 오늘의 일 뒤에 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모르는 일이시라?”

리카르디스가 더없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기껍지 않을 리 없으니. 모르는 일로 하기에는 너무 아깝군요. 차 한잔 하시며 편히 계시다 가시지요. 더 이상 섭정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리카르디스는 딤라의 잔을 직접 채웠다. 그녀는 차를 따르는 모습이 그렇게까지 우아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두고도 기죽지 않는 이는 몇 되지 않는데, 그런 척 위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대등한 위치에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걸 배포가 크다 해야 하는지, 아니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봐야 하는지.

딤라는 나뭇잎 그림자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그림같이 반짝이는 남자를 바라보다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는 지금까지 사람을 끝없이 마주해 피로하였습니다. 권하신 시간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딤라는 쉬겠다는 말을 한 이후로는 정말 대륙의 유일한 제국, 그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을 앞에 둔 것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같이 앉아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애초 딤라가 눈을 감고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는 불어오는 바람결을 제 눈으로 그렸다. 화창하게 좋은 날. 구름이 예쁘게 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날이었다.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편안히 앉아 있던 딤라가 어느새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 정원, 색색의 꽃이 만발해 있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공간. 그 끝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칼릭스. 그리고 로젤린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를 향할 때 매섭게 불타오르던 딤라의 눈동자는 한 겨울의 난롯불처럼 따스한 온도로 그들을 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고정했다.

관디테가 무어라 말하자 로젤린이 살짝 웃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평소 웃는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던 탓일까. 햇살을 받으며,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웃는 로젤린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주 웃으면 좋을 텐데. 저리 웃으니 얼마나 예뻐.

“리카르디스 황자.”

덜컥, 로젤린의 곁에 있던 정신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큰 나무 그늘 아래 북쪽을 다스리는 라고슈의 섭정관과 앉아 있던 그 테이블로.

“예, 섭정관.”

리카르디스는 동요했던 마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결국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딤라의 표정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너, 이 자식…… 하고 욕이라도 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가 뭔지 몰라 리카르디스는 당황스러웠다.

딤라는 고개를 휙 돌려 세 증손주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곧 그녀의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은 경악이었다.

“……섭정관? 무슨 문제라도…….”

“사벡의 큰 아이에게 일이 생겨 먼 추운 땅에서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그 마음고생을 끝나게 해 준 황자에게 감사인사도 드릴 겸 온 것이었으나…….”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과 슬쩍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월장석 성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한 것에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딤라는 여전히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본인을 위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딤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눈치챘다. 로젤린을 너무 빤히 바라보았던 게 문제였을까. 발뺌이라도 하려 입을 열었으나, 딤라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 보였다.

“……드러났습니까.”

“드러나다뿐이었을까요. 차라리 얼굴에 써 놓고 다니는 쪽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전하의 미모 덕에 시선이 분산될 테니.”

리카르디스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껄끄러운 상황을 외면하고자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는데, 시야에 로젤린이 들어와 더 당혹스러웠다. 하필 고개를 돌려도…….

쪼그려 앉아 관디테와 얘기하던 그녀의 옆모습이 햇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눈을 깜박, 깜박하던 그녀가 서서히 얼굴을 돌렸다.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리카르디스의 숨이 멎었다. 로젤린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덜컹, 심장도 멎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물을 뜨는 것처럼 두 손을 모은 채 쪼르륵 달려왔다. 아니야, 로젤린! 지금은 안 돼! 리카르디스는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딤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어찌하나 한번 보자는 모양새라 리카르디스는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전하, 섭정관.”

“음, 로젤린 경. 무슨 일로?”

“이걸 보십시오.”

테이블에 다가온 그녀가 모은 두 손을 불쑥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와 딤라의 시선이 그녀의 손 안쪽을 향했다. 삐약 뺙. 꺅. 작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하얗고 자그만 새가 나뭇잎을 겹겹이 쌓은 더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딤라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라고슈에서는 볼 수 없는 짐승이구나.”

“둥지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사람의 냄새가 나면 어미가 버린다고 해서, 나뭇잎으로 일단 감쌌습니다. 둥지로 올려놓기 전에 보여 드리고 싶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옆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딤라의 시선도 까맣게 잊은 채 미소 지었다. 예쁘고 귀여운 것을 보여 주고 싶어 소중하게 두 손 안에 가지고 왔다니. 이 얼마나 귀여운…….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하를 똑 닮았습니다.”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미소가 쩍 굳었다.

“하얗고 부드럽고.”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건장한 남자를 아기 새에 비유하는 그녀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졌다.

“귀여워서 지켜 주고 싶지 않습니까?”

리카르디스의 마음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너덜너덜해졌다. 내가 하얗고 부드럽고 귀여웠군…….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나… 그래…….

“그래…… 아주…… 귀엽다……. 로젤린 경, 덕분에 진귀한…….”

크윽…. 리카르디스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꾹 쥐었다.

“……경험을 했어. 어린 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고… 맙다. 로젤린 경. 어, 어미가 찾을지도 모르니 슬슬 돌려 놓는 쪽이 좋겠다. 나무……… 나무 위로 올라갈 때 조심하고.”

“예.”

로젤린이 방긋 웃고는 다시 관디테와 칼릭스에게 달려갔다. 딤라는 안쓰러움과 짜증을 반반 고루 섞은 시선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담은 여자에게서 하얗고 부드럽고 귀엽다는 말을 들은 남자의 심정이 어떤 꼴일지 대충 짐작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섭정관.”

“딱히 별말 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자가 은연중에 기대하는 게 있는 모양이라 한마디를 얹자면.”

리카르디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증손녀와 증조할머니가 돌아가면서 공격하니 정신이 혼미했다.

“결혼 전 사벡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무어가 그리 마음에 들었느냐 하니.”

그는 칼릭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미리 들어 놓아 사벡이 붉은수레바퀴 백작 부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고개 숙이고 딤라의 말을 경청했다.

“귀엽다 하더군요.”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손에 묻은 그 상태로 굳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얘기였다. 그 험상궂은 아저씨를 보고 귀엽다는 말이 나오다니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도 정말 보통은 아니었다.

“갈라·제르타예의 불꽃은 바이페렘 곁이 아니더라도 타오르는 모양이지만, 귀여운 것에 한정되는 모양입니다.”

딤라가 차를 홀짝 마셨다. 아까 전 여유만만하며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사내는 어디가고, 아기 새같이 파들파들 떨고 있는 귀여운 남자만 남아 있었다. 딤라가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이곳으로부터 멀고도 추운 땅에서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2황자 리카르디스에 대한 정보를 여럿 들었다. 그러나 많은 정보와 수식어가 고스란히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 위치의 사람이라면 그럴싸한 가면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고, 퍼지는 정보는 보통 그런 단편적인 모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몇 번 만나며 그를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증손녀의 도움으로 진짜 모습이 활짝 드러난 셈이었다. 딤라는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는 리카르디스를 보며 웃었다. 적어도 여유만만 해 보이는 얼굴보다는 이쪽이 마음에 들었다.

딤라는 자신의 주름진 손을 보았다. 오래된 시야는 먼지 낀 듯 부옇고, 늙은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은 간헐적으로 떨렸다. 몸 어디 한 곳 성한데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고장 날 일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삐걱거리다 보면 결국에는 멈추게 되리라.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과거 불 같았던 때보다 성미가 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황자.”

“……말씀하시지요.”

리카르디스는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내가 머무르던 별장은 오래 된 무덤이고,”

분주하던 리카르디스의 손이 딱 멈췄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덤을 기어 나온 산송장입니다.”

바람에 꽃잎이 실려와 찻잔에 떨어졌다. 짙고 맑은 홍차에 파문이 잔잔하게 일어났다. 딤라는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노인의 눈빛 속,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에게는 아주 익숙했다. 로젤린에게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종류였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가만 딤라의 말을 곱씹다 대답했다.

“무덤에서 일어나셔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영혼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딤라는 기침인지 거친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흑단 지팡이의 조각을 손으로 더듬었다.

“나는 산송장. 바이페렘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젖먹이라 불립니다. 라고슈는 상처로 너덜거려 두 살 난 아이처럼 부는 바람에도 울고,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들은 그 상처의 냄새를 맡고 주위를 빙빙 돌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지금, 대륙의 아버지는 보아야 할 것을 외면하는 비겁자에 불과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애써 숨겼다. 딤라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차를 마시고, 로젤린을 보고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라고슈를 어두운 길로 끌고 들어가려는 그 모든 것들을, 무덤으로 데려가는 일이 산송장의 마지막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딤라가 지팡이를 꽉 쥐며 저 멀리 바라보았다. 작은 걸음에 발을 맞춰 걸어가는 세 명의 혈육을 담는 눈길이 온화했다.

단순히 플로에토를 실각시키기 위해 오랜 은거 생활을 청산했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딤라의 눈은 라고슈를 벗어나 대륙에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에 닿았다. 거대한 두 집단의 싸움이다. 그 거대한 흐름 사이에 있는 것들은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일라베니아와 발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며, 모두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피와 비명이 휩싸는 거대한 흐름이기에 결코 좋은 방향이라 말 할 수 없었다.

딤라는 지금 분쟁과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겠노라는 의사 표명을 했다. 라고슈를 위해 싸우고, 다음 대의 라고슈를 위해 물러섰던 인물은 다시 한 번 라고슈를 위해 몸이 가리가리 찢기는 격류에 몸을 던지고자 일어섰다.

사실 라고슈로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둘이 치고받고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며 공멸하기를 바란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딤라는 잘 알고 있었다. 썩은 상처는 도려내지 않으면 새살이 나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왕국의 문을 걸어 잠그는 일은 그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후대에 미룰 뿐인 비겁한 일이노라고. 그녀는 미래의 라고슈를 위해 힘든 싸움을 감내하겠다 말한 것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될는지요, 섭정관. 혹…… 저에게 기대를 거시는 겁니까?”

너무 당혹스러워서 속마음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말하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건 알았으나, 이미 추한 꼴은 다 보인 후라 그런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기대는 누군가에게 걸 수 있는 종류의 마음이 아닙니다, 황자. 저절로 향하는 마음을 어찌 걸었네, 마네 하겠습니까. 그저 그 본인이 기대를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하는지라,”

딤라가 검지와 엄지를 아주 조금 띄워 얼굴 앞에 들어 보였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이만큼 이끌렸다는 얘기입니다. 그 아기 새 같은 귀여움 때문에 말입니다.”

리카르디스는 크윽 신음을 삼켰다. 딤라가 웃었다. 놀리는 맛이 있는 귀여운 황자였다.

아이들이 있는 쪽을 다시 쳐다보니, 관디테의 무릎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뒹굴 거리고 있었다. 관디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기 직전 상태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미미!”

관디테의 무릎 위에서 고양이가 배를 보이며 뒹굴 거렸다. 소녀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 감정을 자제하려 노력하며 부드럽게 짐승을 쓰다듬었다. 털 한 가닥 상할까 염려하는 조심스러운 손짓에 고양이 미미가 가르릉 거리며 기분 좋은 듯 울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던 중, 분수의 가장자리를 도도하게 걸어가던 미미를 만나고부터 관디테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로젤린이 “미미.” 하고 불렀으나, 미미는 그녀의 말을 싹 무시하고 고양이 세수만 했다. 관디테가 애절하게 고양이를 쳐다보는 모습에 칼릭스는 결국 힘겹게 걸음을 옮겨 미미에게 다가가야만 했다.

억지로 데려오려는 것인가? 작은 짐승이라고 해도, 발버둥 치면 어린 바이페렘에게는 위험할 텐데. 관디테의 시종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고양이의 뒷덜미를 덥석 잡거나 배 아래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는 등의 행동을 일체 하지도,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리에 쪼그려 앉아 짐승과 눈높이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본 시종들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바뀌었다.

칼릭스가 쪼그려 앉은 채, 고양이 미미의 귀에다 뭐라 속닥대었다. 미미는 한번 하악질을 하고 두 번 고개를 젓다가, 마지막에는 ‘흠…….’ 하며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총총총 도도한 걸음으로 걸어와 관디테의 다리에 제 부드러운 몸을 잔뜩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관디테의 무표정은 산산조각 났다. 소녀의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

소녀를 따르던 시종들만 이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칼릭스 경과 고양이 미미 간에 무슨…… 모종의 거래가 오간 거 같은데 아니야? 하는 의문이 잔뜩 담겨 있으나 칼릭스는 그들의 시선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의문도 회피했다.

그러고는 제 누이한테 다가가서 저번에 간 그 음식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은데요. 거기에 더해서 일일 노예권이요. 아 진짜……. 하면서 소곤거리는데, 시종들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관디테는 분수에 앉아 고양이를 본격적으로 쓰다듬었다. 미미는 귀찮을 법도 한데 거래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걸 다 감당해 내었다.

한참 놀다 돌아가니 리카르디스와 딤라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칼릭스는 재빨리 그들의 분위기를 읽었다. 음, 뭔가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딤라도 다른 귀족들을 압박할 때와는 다르게 편안히 있는 듯하고.

리카르디스가 웃으며 관디테를 맞이했다.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바이페렘.”

“음,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영광입니다.”

“아기 새와 고양이를 보기도 하고, 나무에 달린 열매도 먹었다. 아주 맛이 좋았다.”

잇세리온이 입을 턱 가렸다. 정원 여기저기에 널린 나무의 열매를 드셨다고요 바이페렘? 제대로 씻지도 않고, 깎지도 않고, 접시 위에 예쁘게 장식해서 진상한 걸 드신 게 아니고요?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왕이 그럴 리 없었다. 로젤린의 소행이 분명했다.

“로젤린 경이 목마를 태워 줘서 내 손으로 직접 큰 열매를 딸 수 있었다.”

부단장 나단이 살짝 뒷목을 잡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잇세리온이 로젤린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모두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모이자, 관디테가 입을 가리며 푸훗 웃었다.

“너무들 그러지 마라. 이런 것 또한 어릴 때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일 아니겠느냐. 로젤린 경은 나에게 앞으로 오지 못할 어린 시절을 선물해 주었으니, 그 또한 나에게 큰 기쁨이다.”

잇세리온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관디테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의 얼굴도 한결 편해졌다. 로젤린은 소녀의 뒤에서 제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로젤린 경은 예법을 더 익히는 편이 좋겠다. 남을 존중하고 내가 존중받기 위해 사람들끼리 정해 놓은 규칙이니, 고리타분하다 생각하지 말고 부단히 익히도록 하라. 미숙한 내 눈에도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인다. 제국인이 제르타예를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길 바라지 않으므로 노력하라.”

아, 역시. 그렇긴 하지요. 잇세리온은 풀이 죽었다. 로젤린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 혼나며 의기소침해졌다.

“예, 바이페렘…….”

이후 딤라와 로젤린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로젤린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어찌나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는 월장석 성에서는 애를 굶기냐고, 애가 이렇게 살도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게 안보이냐고 리카르디스를 닦달해 대서 그는 좀 억울했다.

딤라는 정말 평범한 할머니처럼 로젤린을 귀여워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광경에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딤라를 대단하고 무서운 바이페렘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로젤린에 대한 인식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마인 파문에 휩싸여 있었다. 여러 공으로 인해서 악의가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고슈에서는 마력과 성력이 가진 의미가 일라베니아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체감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리카르디스의 의문을 눈치챈, 로젤린의 입에 케이크를 주입하던 딤라가 말했다.

“마력이니 성력이니 하는 것은 제국인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라고슈의 추위는 마력보다 사납고, 봄날의 햇빛은 성력보다 따듯하니, 그저 그런 것 또한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대신전에서 들으면 난리가 날 소리였다. 그 위대한 힘이 어찌 한낱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느냐고. 역시 라고슈의 야만인이라며 펄펄 날 뛸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제 턱선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걸었다.

“섭정관은 신이 없다 생각하십니까?”

“있으면 대륙이 이 모양 이 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요. 섭정관의 말대로라면, 축복의 밤 또한 신의 힘이 아닌 자연의 힘일 텐데. 지금은 어째서 자연이 순환을 멈춘 겁니까?”

“그 말을 황자가 하니……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뼈 있는 대답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정보를 취합하여 그려낸 그림. 일라베니아 황실에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는 지금의 사태에 큰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진실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눈썹만 까닥였다.

“그건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흐르던 계곡도 산사태로 인해 길이 끊기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또한 자연의 흐름입니까?”

딤라가 피식 웃었다.

“산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지진 때문인지, 누군가가 산을 부숴 놓았는지.”

딤라는 로젤린과 칼릭스에게 용돈을 쥐여 준 후 월장석 성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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