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뿌리 출신의 수습생들은 어지간히 실력이 뛰어나지 않는 이상 상급 기사의 눈에 들기 힘들었다. 고만고만한 실력들이라면 상급 기사도 당연히 친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가문의 자식들을 데려왔다. 스승이 없는 이상 큰 성장을 보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이 뿌리 출신들 대다수가 수습생에만 머무르는 이유였다.
그 와중에 로젤린의 휘하에는 뿌리 출신의 기사가 두 명이나 있었다. 동료 상급 기사들이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 취급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복도를 걷던 중, 로젤린은 파르딕트와 만났다.
“어이, 로젤린.”
“파르파르.”
두 사람이 주먹을 부딪쳤다. 파르딕트가 가르쳐 준 인사법이었다.
“너 또 뿌리 출신 데리고 왔다며. 수집하는 거야? 대체 왜 뽑았어, 걔는?”
로젤린은 생각하다가, “귀여워서.”라고 했다. 파르딕트는 잠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어쩔 수 없긴 하지…….”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습니까!”
“오, 이게 누구야. 레이몬드 부관.”
레이몬드는 헤사가 로젤린 휘하에 들어갔음을 등록하는 서류를 대신 작성하고 접수한 후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듣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귀여워서 뽑았다고 하질 않나, 그럼 됐다고 하질 않나.
“로젤린 이 녀석! 사람을 얼굴만 보고 판단하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
“마른가시나무 백작님한테.”
남자는 얼굴이 전부란다. 마른가시나무 성 내부의 연무장을 같이 구경하던 중 세실이 한 말이었다. 로젤린이 보기에도 반쯤 헐벗은 남자들은 턱 선이 각지고 콧날이 우뚝하여 아주 잘생긴 편이었다. 로젤린은 세실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보기에 좋았다.
“얼굴만 보고 뽑은 애들도 있대.”
“백작님…….”
레이몬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과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면 그런 말을 하고도 남겠지.
세 사람이 복도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지나가던 상급 기사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로젤린에게 새 수습생이 생겼다는 시답잖은 건을 주고받다, 주제는 흐르고 흘러 ‘제일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누구인가?’로 바뀌었다.
“역시…….”
“한 분밖에 없지.”
“디에즈 전하도?”
“엘피디오 전하도 얼굴은 괜찮지.”
“그래도 역시…….”
이견 없이 만장일치였다. 월장석 성의 주인, 리카르디스가 1위에 올랐다.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전하 같은 미모를 가진 사람은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그 나머지였다.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맞아, 막 얼굴이 화끈하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진짜 아름다우시지.”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도 전하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른 적 있었는데! 다들 그랬구나. 전하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거였어. 로젤린이 “저도요. 심장이 막 두근거렸습니다.” 한마디 보태니 레이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그렇다면서 로젤린과 손뼉을 짝짝 부딪쳤다.
이 모든 광경을 애칭 슈슈, 슈텐만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축제 당시 로즈와 도련님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공기를 보았다. 가슴 안쪽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기류가 분명 있었건만, 로젤린이 지금 완전히 길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로젤린 너는 거기에 끼어 있으면 안 돼…… 이 멍청이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피부도 엄청 좋으시지 않나.”
누군가의 말에 로젤린이 자신은 전하의 피부를 만져 봤다며 자랑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어우야, 하면서 로젤린의 어깨를 툭 밀면서 낄낄대는데 슈텐은 환장할 것 같았다.
“엄청 매끄러우셨습니다.”
로젤린이 말했다. 아, 로젤린. 진짜…… 아. 로젤린…….
* * *
“뭐지.”
“…….”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한 눈빛인데. 왜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지 슈텐 경?”
남자의 눈빛에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비 오는 겨울 날 거리에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안 그래도 싫어하는 장소에 가는데, 더 찝찝하게 만들지 말고 당장 그만둬.”
슈텐의 어깨가 축 쳐졌다.
리카르디스를 실은 마차는 대신전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황성 내에 있지만, 마차를 타고 삼, 사십분은 가야 하는 먼 거리였다.
날씨가 좋아 창을 열어 뒀더니, 옆에서 말을 타고 있던 슈텐이 내내 저런 표정을 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확 기분이 상해 버렸다.
계속해서 힐끔거리는 슈텐의 눈빛이 몹시 불쾌했던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반대쪽 창문으로 로젤린이 멍하니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 위에서 앉은 다리를 하고 있는 재주가 아주 멋졌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뒤를 따르던 레이몬드를 불렀다.
“레이몬드 경.”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잠시 이리로.”
리카르디스는 레이몬드가 말을 몰아 다가오자 그의 윗주머니에 있는 과자를 쏙 빼앗았다. 당당한 도둑의 태도에 레이몬드는 아, 어, 입술을 오므리기도 벌리기도 했지만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강탈한 과자를 그대로 로젤린에게 던졌다. 그녀는 마차의 반대쪽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날아오는 과자를 확 낚아챘다. 손을 펴 건포도 오트밀 쿠키의 정체를 확인한 로젤린이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그머니 움직이더니, 마차의 앞에서 호위하는 기사단장 스타스의 뒤통수 어디쯤을 떠돌았다.
“근무 중인데 먹어도 됩니까?”
“된다. 크게 다친 후이니 잘 먹어야지.”
리카르디스의 대답에 로젤린이 입꼬리를 쭉 늘려 웃었다. 최상단에 위치한 결정권자가 자신의 편이라 마음이 든든한 듯했다. 삐이익!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물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빠져나왔다. 화답하듯 하늘 위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마카롱이 하강해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았다.
“같이 먹자, 마카롱.”
이름이 이름이라 그런지 오트밀 쿠키 대신에 마카롱을 먹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마카롱에게 쿠키를 물려 주고 제 입에도 하나 쏙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 경.”
“예. 전하.”
“수습 기사를 한 명 더 들였다면서.”
마차 주위를 호위하던 다른 상급 기사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리카르디스가 제 사람들을 아끼는 거야 유명하다지만, 수습 기사를 한 명 더 들였니 안 들였니 정도의 소소한 것을 알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요새 리카르디스의 관심은 유별나게 로젤린을 향하고 있었다.
“예. 헤사입니다. 전에 전하와 같이 밤에 마셨던 산딸기 와인이랑 비슷한 머리 색을 가졌습니다. 웃을 때 눈이 완전히 접히는데 아주 예쁘고 귀엽습니다.”
레이몬드는 심하게 사레들렸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레이몬드는 “너, 로젤린 언제 전하와……!” 따위와 같이 무언가를 추궁하고자 했으나, 슈텐이 재빠르게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아, 맞다.”
아옹다옹 다투는 두 남자의 공방을 보던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완쾌 선물로 받은 검은 군마, ‘초콜릿’을 마차 곁으로 바짝 몰았다. 안장 위에 일어선 그녀는 자연스럽게 창을 통해 마차로 쏙 들어갔다.
빈 안장 위에는 마카롱이 그녀 대신 앉아 고삐를 물었다. 초콜릿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등 뒤를 슥 한번 보기는 했지만 문제없이 운행되었다.
“……안장이 불편했나?”
“아니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합니다.”
보통은 묻고 들어오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여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로젤린은 창문을 전부 닫는 와중 동공이 확장된 레이몬드와 눈이 마주쳤다.
탁.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경악 어린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가벼운 손길로 문을 닫았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전하.”
“불안하게 자꾸 왜 이럴까. 아직 수습 가능한 정도일 수도 있으니 얼른 말해 봐.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사실 굉장히 초조하다.”
“전하. 제 새로운 수습 기사가 마인입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 위치가 올라갔다. 그가 제 눈썹을 한번 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미묘하게 큰 사건인 듯 아닌 듯…… 이 정도는 괜찮군.”
또 다른 마인. 어딘가에는 살고 있었을 테지만, 시기와 장소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잘은 몰라도 대륙에 자자하게 퍼진 명성에 따라오는 어떤 작용일 것이다. 그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모르겠으나.
“검은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귀엽습니다.”
귀엽다고 검은달이 아닌 건 아니지만, 확실히 검은달이 귀엽지 않기는 했다. 나름 확실한 구분법인가.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흘렸다.
“일라베니아 내에도 마인은 있을 테니.”
“전하, 방금 한 얘기는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시면 안 됩니다.”
헤사가 부탁한 적은 없으나,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밝혀지길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밀.
“약속하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코앞에 불쑥 튀어나온 로젤린의 새끼손가락을 보고 당혹스러워 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니. 세티스티아가 살아 있을 적에나 몇 번 해 본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머뭇거리자 로젤린이 손을 그의 얼굴에 더욱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무언의 압력이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에 꿰었다.
로젤린은 얽힌 새끼손가락을 두어 번 세차게 흔들고 엄지를 딱 붙여 도장까지 찍었다. 이 어설픈 서약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코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헤사가 전하께 폐가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 예쁘다는 소년이 진정 검은달의 암살자일지언정, 갖은 수단을 동원해 회개시키겠다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말인 만큼 반드시 지켜지리라.
둘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서성이는 로젤린의 보호자, 레이몬드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두 사람 다 무시했다.
“그때의 사냥 대회 이후로는 대신전에 가 본 적이 없겠군.”
“예.”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천천히 구경 시켜 주고 싶지만, 나를 붙잡고 늘어지려는 자들이 많아. 느긋하게 둘러볼 시간은 없을 테지.”
“인간들만 없으면…….”
먼 곳을 바라보는 로젤린의 눈빛이 선뜩하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말을 붙였다.
“안 된다.”
가만히 기도 잘하고 있는 신관 털 한 올 건드릴 생각 말라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안 합니다.”
저를 뭐로 보냐는 식으로 흘겨보는데, 리카르디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안 된다’는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걸 보니.
뎅-
멀리서 하늘을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뱃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씩 품고 있는 자들이 기거하는 곳의 상징치고는 꽤나 아름다웠다. 신전이 코앞이었다.
그 순간, 로젤린이 불에 꼬리 데인 고양이처럼 펄쩍 뛰는 듯 일어섰다.
쿵!
로젤린의 머리와 충돌한 마차가 굉음을 냈다. 거대한 마차가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로젤린!”
로젤린이 머리를 감싸고 낑낑거렸다. 리카르디스가 급하게 그녀의 정수리 부근을 문질렀다.
밖에서 스타스가 마차 창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 있느냐 물어 왔다. 리카르디스는 대충 얼버무렸다.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는, 좀 바보 같은 일이 있어났노라 하면 그녀의 체면이나 위신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정작 그 당사자는 제 체면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로젤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리카르디스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서 한참 끙끙거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머리를 문지르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잡아 올려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따뜻한 손의 온도에 로젤린은 고통이 좀 덜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왜 갑자기 일어나고그래.”
왜 그랬더라. 로젤린은 그의 질문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종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도망가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아까 전 마차가 흔들거렸듯이, 마음이 계속 요동쳤다. 로젤린은 다시 리카르디스의 허벅지에 머리가 닿게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다리를 꽉 안고 있는 채였다.
리카르디스는 난데없는 로젤린의 애교…… 비슷한 것에 당황하다가 다시 그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로젤린은 머리로부터 밀려드는 따뜻한 기운에 눈을 감았다.
“많이 아프나?”
다정한 목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음의 파동이 흔들고 간 마음이 다시금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 * *
대신전에 도착했다. 금강석 성만큼이나 화려한 건물이었다. 오라고, 오라고, 제발 한번만 방문해 주시라 아무리 빌어도 오지 않던 2황자의 방문에, 신관이며 성 기사들이며 할 것 없이 신나서 달려 나왔다.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뵙습니다.”
“축복을 그대들에게. 대신관 라헤안시를 만나러 왔을 뿐이니, 신경 쓸 것 없다.”
“귀한 분이 오셨으니, 안내를…….”
“필요 없으니 물러가라. 어릴 적부터 다닌 곳이니 눈감고도 갈 수 있다.”
노쇠한 신관이 눈물을 보였다. 2황자 전하께서는 몸은 멀리하시지마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대신전과 함께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믿고 있었노라며 감격해했다. 아니 뭘 어떻게 하면 그 말이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치를 떨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것같이 애타게 매달리건 말건 리카르디스는 제 갈 길을 갔다. 한마디라도 붙이고 싶어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는 자들도 있었으나, 거구의 하얀밤 기사단원들의 호위 망에 전부 걸러졌다.
로젤린은 집단의 후미에서 리카르디스를 따르다가, 뒤돌아보았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와서 박혔던 탓이었다. 눈이 마주친 어린 신관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더러운 거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하얀색 일색인 인파를 죽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젤린을 보며 전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얼굴을 일그러트린 가면들을 수백 개 걸어 놓은 공간 속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두피부터 시작해 뒷목 아래까지 거미가 천천히 기어가는 듯한. 그런 기분.
오랜만에 느끼는 적의는 낯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리카르디스는 저 앞에 있었다. 레이몬드가 의문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로젤린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아치 모양의 문을 지날 때였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소리를 따라 뒤를 돌았다.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성 기사들이 창을 교차하며 로젤린의 앞을 정확하게 막아 서고 있었다. 로젤린은 멈춰 서서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뜨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음, 하고 입술을 물며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가, 교차된 창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녀를 내려다보던 성 기사들이 당황해서 창의 위치를 조정했다.
“……지금 뭘 하는 짓이지?”
성 기사들은 서릿발이 내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2황자 리카르디스는 무뚝뚝하지만 쉽게 화를 내는 성품이 아니라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시선, 딱딱하게 굳은 와중에도 이따금 꿈틀거리는 턱 근육까지. 누가 보아도 분노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은 다시 한 번 자세를 낮췄다. 성 기사들이 얼어 있는 틈을 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창을 움직여 가로막자, 로젤린이 아쉬움에 작게 혀를 찼다.
입구에서 출입을 허가 하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말없이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물러나고, 나머지 하나는 무슨 일인지 묻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다.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벗어난 로젤린의 이상한 행동에 성 기사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 자존심도 없어? 왜 기어서 들어오려는 거야?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물었을 텐데.”
성 기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신전 법률에 따르면 마인은 이 축복의 문을 통과할 수 없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이마를 짚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간에는 잔뜩 주름이 잡힌 채였다.
그의 입이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이런…… @#$^&%##……….”
욕이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는 자들이나 사용할 법한 걸걸한 욕이 기어코 그의 이성을 뚫고 나오고야 말았다. 성 기사들은 2황자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진귀한 광경에 몸을 굳혔다.
로젤린은 바닥에 배를 붙인 채 턱을 괴고 사태를 관전했다.
“너의 위대하신 이델라브힘께서 그리하라 하더냐?”
“이, 이것은 몇백 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나의 자비로우신 이델라브힘께서 그리하라 하더냐!”
리카르디스는 앞에서 바짝 굳어 있는 성 기사들을 보며 한 자 한 자를 씹어 말했다.
“세상에 빛이 되어 축복을 내리시고, 이 땅 위에 열매 맺게 하여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시는 이델라브힘께서. 마인이 불길하니, 내 신전에, 발걸음 하게 하지 말라, 네게 직접 말하셨느냐 물었다.”
“그, 그것이…….”
“신전의 법률이라 말했나? 일라베니아의 탄생과 시작된 신전의 법. 높으신 이델라브힘의 뜻이기에 영광스럽고 숭고하다. 하나, 시대마다 위대하신 선황들마다 조금씩의 차이를 보인다. 이 말뜻이 무엇이느냐면.”
리카르디스는 저벅저벅 성 기사를 향해 걸어갔다.
“만물을 비추시는 분, 이델라브힘. 그분의 뜻은 미천한 우리들로는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는 거다. 이 미천한 머리로는.”
리카르디스가 성 기사의 머리를 퍽 쳤다. 아프지는 않지만 딱 기분 나쁠 정도로.
“영원한 뜻은 있으나 영원한 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가운데 이델라브힘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시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 황제 폐하께서 로젤린 경을 마인이 아닌 내 호위 기사로 인정하여 머물게 하셨으니…… 그대들은 지금 황제 폐하의 인정을 받은 나의 호위 기사에게 시비를 건 셈이지.”
성 기사들이 바짝 얼어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고귀한 황자에게서 나올 법한 압력이 아니라, 무슨 맹수를 눈앞에 둔 것 같았다. 하얀 피부가 얼어붙은 듯 서늘하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시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며 두 개의 창 중 하나를 콱 틀어쥐었다.
“내 사람에게 겨눠진 날카로움은 나를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들은 급하게 창을 거두었다. 리카르디스에게 창을 잡힌 성 기사도 창을 제 품으로 가져오려 했으나, 리카르디스의 손에 잡힌 상태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맨 처음에는 그가 잡고 있는 것도 까먹고 휙 당겨 보았지만 꿈쩍도 안했다.
성 기사의 얼굴이 발개졌다. 교리를 공부하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단련만 해 왔던 자신이, 곱게 자란 2황자에게 힘으로 밀리다니.
리카르디스는 창을 잡은 채로 가만히 그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창을 그의 가슴에 퍽 소리나게 밀어 붙였다. 거칠게 무기를 건네받은 성 기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로젤린은 눈만 굴리고 있다가 가로막고 있던 이들을 잽싸게 지나쳐 리카르디스의 뒤에 섰다.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들은 이제 그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이 작게 숨을 쉬자 리카르디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가 손수 더러워진 로젤린의 제복을 툭툭 털어 주었다.
“경, 괜찮나?”
리카르디스가 자세를 낮춰 그녀를 걱정 어린 다정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디스가 굳은 표정을 애써 누그러트리며 웃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네.”
리카르디스의 손길과 다정한 시선에 속 안에 꾹꾹 뭉쳐 들어찬 것들이 풀려 나갔다. 역시 황자 전하가 최고였다. 로젤린은 아직까지 어쩔 줄 모르는 성 기사들을 보며 악당같이 씨익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기분을 조금 풀 수 있었다.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로젤린은 스타스와 레이몬드, 슈텐과 바스티안, 잇세리온에게 번갈아가면서 위로받았다. 다들 한마디씩 건네며 그녀의 입에 작은 과자를 하나씩 넣었다. 로젤린은 시무룩해하면서도 분주히 입을 움직였다.
대신관들은 신전 내에 각각의 별관을 가지고 따로 생활했다. 라헤안시가 머무는 별관은 다른 대신관들의 건물에 비하면 작은 축에 속했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로젤린은 입을 떡 벌리고 구경했다. 리카르디스가 혀를 쯧 찼다.
“명색이 신관이라는 놈들이…….”
라헤안시를 돕는 신관이 이미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젤린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봤다. 축제 ‘그림자 없는 밤’에서 라헤안시 뒤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뵙습니다.”
“축복을 그대에게. 라헤안시 대신관은?”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방문하셨노라 전했으나…….”
젊은 신관의 시선은 리카르디스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그의 머리 끝, 발끝, 손끝, 어깨 끝 등을 다양하게 배회했다. 리카르디스는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알 만하군.
“뒹굴고 있겠지. 알겠으니 물러가라.”
“저희 대신관님께서 현재 몸이 미령하시어…….”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다만, 변명은 되었다. 라헤안시 대신관의 방만함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는 앞서 걸었다. 고단함이 느껴지는 발걸음이었다. 한참을 더 깊게 들어가고, 몇 번의 복도를 지나치니 커다란 문이 나왔다.
신관이 앞서 들어가 라헤안시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리려 했으나, 리카르디스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신관이 초조하게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방 안은 어지러웠다. 바닥에는 예복이, 침대 위에는 걸레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분홍색 머리의 라헤안시는 그 걸레와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구는 중이었다. 그는 엎드려서 성전을 읽고 있었는데, 먹고 있는 과자 부스러기가 성전 위로 후드드 떨어졌다.
라헤안시는 “아앗, 기름 번진다.”라고 중얼거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신관이 라헤안시의 그 꼴과 방문한 2황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델라브힘을 부르짖는 몸짓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문을 열기 전에 초조해하던 신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 내놓아도 참 부끄러웠으리라.
“아, 형 왔어?”
리카르디스는 그 처참한 꼴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누가 온다더니만, 형이었네. 말을 하지. 마중 나갔을 텐데.”
신관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손한 눈초리로 라헤안시를 노려보았다. 분명 설원의 월계수, 2황자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방문하셨다고 또박또박 일렀건만, 저가 성전 읽으며 한 귀로 흘린 건 생각도 안했다.
“……모두 문밖에서 호위를 해라. 이곳에서 위험한 것은 위생 수준뿐이니. 그리고 로젤린 경은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 있는 게 좋겠다. 레이몬드 경이 그녀와 함께 있도록.”
“예, 전하.”
머뭇거리던 로젤린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또 다시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는 로젤린을 보며 리카르디스는 제 입술을 한번 가볍게 물었다. 곁에 두고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어떤 대화가 오고 갈지 모르니 일단은 잠시 물러 둬야만 했다. 물러 둬야…… 물러 둬야 하는데…….
돌아서는 뒷모습이 여간 작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로젤린 경. 누군가가 시비 걸면 패도 된다.”
“안 됩니다.”
스타스가 차분하게 반박했다.
“깐깐하기는.”
“로젤린 경은 신전 관계자에게 손대지 말고. 무슨 일이 생기거든 레이몬드 경이 대응한다.”
레이몬드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자신감 넘치는 몸짓이었다.
“예, 적당히 패겠습니다!”
스타스가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슈텐 경이 레이몬드 경 대신 그녀와 함께 건물 밖에서 대기한다. 유사시에 슈텐 경이 대응하도록.”
레이몬드와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스타스를 쳐다봤다. 기사단장이 무거운 침묵으로 그들의 불만을 가볍게 눌렀다.
* * *
슈텐과 로젤린이 방을 나와 이동했다. 생각보다도 로젤린의 귀가 성능이 훌륭해, 예상된 지점보다 멀리 와야만 했다.
슈텐은 기둥에 몸을 기댔고, 로젤린은 복도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저 멀리 하얀 건물의 둥근 지붕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반짝거리며 흩어지는 빛무리에 로젤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곧 다시 눈을 뜬 이유는, 아까 대신전 입구에서 겪었던 종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자신을 꿰뚫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신관들마다 로젤린의 검은 머리를 보고 멈춰 섰다. 그들은 흘끗 쳐다보기도 하고 대놓고 역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 어느 공간보다 이델라브힘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이곳은, 그 어느 공간보다도 크레안 티다니온의 힘을 배척했다. 로젤린이 아무리 2황자 리카르디스를 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녀가 마인이라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로젤린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마주하고 있자 슈텐이 그녀를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신관들이 슈텐의 사나운 얼굴을 보고는 슬슬 도망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로젤린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잔상처럼 남아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갑자기 리카르디스가 보고 싶었다. 괜찮나? 경?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맞추는 그를 보면 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로젤린의 입술은 하도 매만져 붉게 부어 있었다.
그 뒤로도 사람들은 끝없이 지나갔다. 그들이 속삭였다.
마인, 마인이야. 그 로젤린. 2황자의 호위 기사. 더러워. 붉은수레바퀴! 불길한…….
자신을 향한 악의는 하얀밤 기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도 종종 겪었으나 이것은 달랐다. 좀 더 집요하고, 좀 더 사납고, 좀 더 자신을 파헤치려는 듯했다. 슈텐의 어깨 너머로 늙은 신관과 눈이 마주쳤다. 최악의 살인자를 보는 눈빛이 그러 할까.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역하고 냄새나는 것을 모아둔 찌꺼기를 마주한 얼굴이 그러할까.
로젤린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이 입을 가리자 슈텐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속이 좋지 않아?”
“기분 나쁩니다.”
“먼저 성으로 귀환해. 내가 보고 할 테니.”
“싫습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떠올렸다. 이런 공간에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슈텐은 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대충 눈치챈 듯했다.
“붉은수레바퀴의 고집이란. 대신전에서 전하를 공격할 만한 간 큰 인간은 없어. 공격은 무슨, 전하를 머리에 이고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널렸다고.”
로젤린이 입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리질하자 슈텐이 휴 한숨을 쉬었다. 가라, 싫다. 가라고! 싫다고! 공방을 벌이고 있는 도중, 한산해졌던 복도 끝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널찍한 복도에서 굳이 가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으니 그저 지나가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로젤린 경?”
익숙한 목소리에 로젤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디에즈가 다가오고 있었다. 축제 날 길을 잃었을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5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5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디에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을 그대들에게. 로젤린 경 무슨 일 있습니까?”
그는 건성으로 인사를 넘기고는 로젤린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입을 가린 채 대답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디에즈는 그녀의 대답에 호들갑 떨며 괜찮으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저 멀리서 로젤린을 바라보며 소곤대는 신관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디에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디에즈가 슈텐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물을 때는, 아까의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두번째송곳니 슈텐입니다.”
“그래요, 슈텐 경. 경들이 여기 있는 걸 보니 형님이 근처에 계시는 것 같군요. 로젤린 경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제가 잠시 데려가 쉬게 해도 되겠습니까? 두 번째 건물의 뒤편에 작은 정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장소이니, 그쪽에 있겠습니다. 형님이 나오시거든 데리러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슈텐 경? 두 사람 다 이동하면 나중에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부탁해도 될까요.”
디에즈가 눈을 접으며 사르르 웃어 보였다. 슈텐은 그 미소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보호자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디에즈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동했다. 언제나 차분했던 걸음걸이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빨랐다. 로젤린도 그에 맞춰서 반쯤은 달리듯 이동했다. 디에즈는 중간중간 계속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돌아볼 때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다. 자신이 그녀를 잘 잡고 있는지 확인 하는 것 같았다.
* * *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고 할 것 없이 제 멋대로 자라 있었다. 디에즈가 말한 대로 공간 안에는 어떤 사람도 없었다. 막 이곳에 발을 들인 로젤린과 디에즈. 둘뿐이었다. 부서진 분수에는 물이 메말라 있었지만, 갈라진 틈으로 담쟁이덩굴이 감싸듯 자라고 있어 멋스러웠다.
탁 트인 공간에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로젤린은 싱그러운 풀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더러워, 어떻게 저런 불길한 것이 신전에…… 속삭이던 말들이 모두 사라졌다. 귓가를 울리는 것은 새 소리와 이따금 울어대는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뿐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거기에 하나의 소리가 더해졌다. 로젤린은 눈을 떠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디에즈가 풀숲을 기웃거리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아직 다 익지 않아 푸른빛을 띠는 열매와 산딸기들이 알록달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로젤린이 와 감탄했다. 디에즈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속 안 좋은데 먹어도 괜찮겠어요?”
“먹어서 누르면 됩니다.”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데 뭐가 웃긴지 로젤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디에즈는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제 겉옷을 벗어 펼쳤다.
“앉아요, 로젤린.”
로젤린은 겁도 없이 황족의 옷 위에 착석했다. 디에즈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 위로 산딸기와 채집한 여러 열매들을 올려놓고 자신도 제 옷 위에 앉았다. 알록달록한 과일 위로 나무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로젤린은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상급자가 음식에 손에 댈 때까지 침만 삼켜야 하는 것이 하급자의 운명이었다. 로젤린은 우선 얌전히 기다렸다. 흐흥. 노래를 부르며 열매를 한번, 그를 한번 번갈아 보며.
“안 드십니까?”
갖은 눈치를 줬다. 디에즈가 산딸기 하나를 집어 그녀의 입에 쏙 넣었다.
아, 달콤하다. 로젤린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기분을 환기시켜 주려 애쓰면서도, 그녀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웃고, 바람에 나무 그림자가 움직이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음. 뭐가 고마울까요?”
“신전 안에서 꺼내 주신 거요. 감사합니다.”
굳이 따지면 이 정원 또한 신전에 속해 있었으나, 그건 로젤린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정돈되어 있고, 하얗게 빛나는 곳. 사람들이 불온한 시선을 보내는 공간과 이곳은 같은 신전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제 멋대로 자라 있는 수풀. 부서져서 담쟁이덩굴에 감싸인 분수. 여기저기 매달린 과실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디에즈는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있을까. 그에게도 이곳이 필요한 때가 있었을까?
디에즈는 감사하다는 로젤린의 말에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렸다. 오뚝한 콧날과 입술만 보이는 옆모습임에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쯤은 보였다. 기쁘다는 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축제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요즘의 디에즈는 좀 이상했다.
디에즈는 한참 뒤에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쓸더니 웃었다.
“정말 로젤린은…… 에파 같아요.”
“에파……는 뭡니까?”
디에즈가 머뭇거렸다.
“이건,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절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에파는…… 제가 어릴 적 기르던 개…….”
말하던 디에즈가 황급하게 단어를 바꿨다. 특정 동물이 욕같이 들린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했다.
“……강아지입니다.”
“아, 제가 개 같다고요.”
“강아지. 입니다.”
디에즈가 정색했다. 좀 더 귀엽고 온건한 단어를 추구하려는 듯했다. 강아지라고요. 한번 더 강조해서 로젤린은 고개를 재빠르게 끄덕이며 네, 강아지. 하고 대답했다.
“제가 며칠 걸려 숙제를 해 놓으면 찢어 놓고, 겨울날 쌓인 눈으로 열심히 얼음집을 만들면 달려와서 부수고는 했었죠.”
이거, 욕이구나! 로젤린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강아지’가 아닌 ‘며칠 걸린 숙제와 얼음집을 파괴하는 강아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렇게 크게 욕먹을 만한 짓을 했나…… 사사건건 그의 일을 훼방 놓은 애완동물과 비슷하다는 욕을 들을 만한…… 로젤린은 충격 받았다.
“특히 얼음집은 동상까지 걸려 가면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만든 거였는데요.”
나쁜 에파…… 로젤린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그날 밤에 에파가 감기에 걸렸는지 콧물 흘리면서 헥헥 거리기만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얼음집을 부술 때만 해도 저런 개, 아니 강아지 당장 갖다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얼음집이고 뭐고, 그저 아프지만 않게 해 달라며 이델라브힘께 기도했었죠.”
그러니까 결국 좋아하기는 했다는 건가? 혼란스러워 하는 로젤린의 표정을 보고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곧 그가 로젤린에게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디에즈가 이런 장난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에즈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얄미워.”
디에즈가 꼬집던 것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감싸듯 그녀의 볼을 덮었다. 꾹 눌러서 로젤린의 입이 새의 부리처럼 튀어 나왔다. 디에즈가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로젤린은 난데없이 놀림당하는 느낌이라 어쩐지 심통이 났다.
* * *
“앉아, 형.”
“어디에?”
“거기 있잖아. 곰 인형 들춰 보면 의자 나올……걸? 미안해, 좀 지저분하지?”
“지저분한 걸 아는 머리였다는 게 더 놀라울 뿐이다.”
잇세리온은 재빠르게 라헤안시가 지목한 곳을 들춰서 의자를 발굴했다. 손수건을 꺼내서 삭삭 닦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기사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라헤안시는 성전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탈탈 털었다. 침대 위에서. 리카르디스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축복의 밤에 설교하는 거 잘 봤다. 곧잘 하더구나.”
라헤안시가 느슨한 눈을 휘면서 활짝 웃었다.
“어어? 봤어? 아, 정말 왔으면 왔다고 하지. 부끄럽게…….”
그가 으헤헥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비 꼬았다.
“진짜 회심의 설교라고 생각했거든. 크, 폐하께서 보셨으면 아주 그냥…….”
혼났겠지.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기분 좋아하는 어린애의 심기를 거스르는 악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근데 말투는 왜…… 그랬던 거냐?”
“이번에 했던 설교가 내 첫 데뷔였거든. 좀 위엄 있어 보이게 하려고 살짝 바꿔 봤는데, 웬걸. 끝내주지 뭐야.”
정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대신관 경력을.
“할배들이 나 어리다고 시비 걸어서 바꾼 말투가 설교에도 이렇게나 유용할 줄이야.”
“살아 봤자 얼마나 더 산다고. 어린 네가 이해해라.”
다소 수위 높은 농담에 라헤안시가 좋아서 넘어갔다. “어, 얼마 못 산대…… 이히힉끽……!” 하면서 좋아하는데 농담한 리카르디스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바라지 않은 이복형제자매들이 많은 편이었다. 황자만 여섯, 황녀는 일곱. 도합 열세 명. 그러나 리카르디스와 교류하는 형제는 손에 꼽았다.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배가 다를 뿐 아니라, 씨도 다른 자식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데다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와 더불어 본인의 성정까지 교류를 끊는 것에 한몫 더했다.
그 중, 유일하게 라헤안시와는 이따금 만나서 차를 마신다든가 안부 인사를 나누는 둥의 소소하지만 질긴 교류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황자 리카르디스와 라헤안시의 우애가 깊다는 얘기가 돌지 않은 것은, 라헤안시가 더 이상 설원의 월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종의 역할을 맡은 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을 지녔다. 어떤 가문의 라헤안시, 위대한 누구의 아들 라헤안시가 아닌 그저 한낱 미천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권력 싸움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이 리카르디스가 라헤안시를 좀 더 편하게 여길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라헤안시는 손수 차를 끓여 와 테이블처럼 보이는 잡동사니 위에 다과를 차렸다.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손대지 않았지만, 라헤안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배들이 한번만 만나 달라고 노래를 부를 때는 무시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온 거야?”
“오늘 마침, 대신관들 일곱 중에 넷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더군. 그나마 덜 마주칠 수 있으니 오늘이 적기였지.”
“신전에 사람 심어 놨다는 말을 대신관 앞에서 그렇게 태평하게 해도 되는 거야?”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꼬면서 웃음을 흘렸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라헤안시를 응시했다.
“그 노친네들이 퍽이나 모르겠다.”
“하기야. 그래서 뭐. 형이 가지고 온 결정에 대한 연구 결과? 그건 아직 멀었는데?”
“그건 알아서 하고. 오늘은 그 건이 아니라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라헤안시는 자신이 차려 놓은 다과를 즐기며 제 이복형제를 주시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리카르디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났다. 아, 거참 잘생겼다.
“라헤. 마력은…… 대체 뭐지?”
라헤안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린아이 때부터 배우는 개념을 지금 다시금 알려 달라는 건 아닐 테고? 마력, 마력. 크레안 티다니온. 검은 달로부터 오는 불길한 힘. 성력과 정 반대의, 상극의, 섞이지 못하는…….
“우리 똑똑한 형…….”
라헤안시가 제 머리를 매만지면서 웃었다. 곱상한 얼굴인데도 히죽 웃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발타에 가서 축복의 밤에 대한 단서라도 얻었어?”
“……역시 넌 알고 있었군.”
“명색이 대신관인데.”
라헤안시는 긴 의자에 늘어져 반쯤 눕는 듯, 반쯤 앉은 듯한 묘한 자세를 유지했다.
“사실 나는 신참 대신관이라 다 알려 주지는 않지. 내가 따로 공부하고 알아낸 것도 있고. 우리 스승님이 알려 준 것도 있고.”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 입에서 나온 스승님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라헤안시가 스승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아직 설원의 월계수 라헤안시라 불릴 때, 그에게 신학을 가르친 대신관 윈디트일 것이다. 신전에서는 스승이란 호칭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어릴 적 입에 익은 탓인지 라헤안시는 신전에 들어가고서도 그녀를 종종 스승님이라 부르곤 했다.
리카르디스는 슬그머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하얀밤의 기사단원들과 잇세리온뿐이었다. 그가 어울리지도 않는 눈치를 본 이유는, 몇 년 전 처형당한 대신관 윈디트에게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걸 내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만민을 두루 살핀다는 선량한 성직자의 얼굴 뒤에는 다른 모습이 있었으니, 다름이 아닌 사이비 교주였다. 대신전과의 가르침과 반하는 교리를 설파하며, 백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라베니아는 충격에 빠졌고 대신관 윈디트는 사형당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라헤안시가 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라헤안시가 대신관이 되는 것을 꺼려하는 자들이 많았다. 대신관 윈디트는 상급 신관 라헤안시를 곁에 두고 교리와 법률,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접촉이 많았던 만큼 라헤안시도 당연히 물들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는 당연했다.
하지만 라헤안시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제 결백을 증명했고, 그가 윈디트에게 이상한 교리를 사사 받았다는 증거 또한 한 장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저 의심에만 그치고 넘어갔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라헤안시의 혈통이 톡톡히 작용했다. 아무리 성을 버렸다고는 하나, 황제는 제 핏줄이 그런 오명을 쓰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사건 당시 리카르디스도 대신전의 신관들이 라헤안시를 추궁하는 것을 모두 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신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헤안시는 눈물 콧물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어린애처럼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 모른다니까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모른다니까아! 일라베니아를 음해하는 미친 여자에게서 뭘 배웠으려고! 엉엉 목 놓아 울어 당연히 윈디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스승이 알려 주고 간 것이 있다고?
“너, 윈디트의 가르침은 받지 못했다고 했잖아.”
“내가 스승님 밑에 몇 년을 있었는데 설마. 그 말을 믿었다니 형도 생각보다 순진한걸…….”
이 자식이? 리카르디스는 그를 흘겨보았다. 라헤안시는 의자에서 뒹굴 거리면서 낄낄댔다.
“형, 윈디트는 딱히 종교를 창설하고 교리를 설파하고 다닌 적은 없어. 사이비 교주라니 말도 안 돼.”
“사형당해서 억울했겠군.”
“그저 일라베니아와 황제 폐하 욕을 심하게 하고 다녔을 뿐이야.”
“……사형당해도 억울하지는 않았겠는데?”
라헤안시는 “확실히…… 내가 들어도 그 말은 좀 심하긴 하더라…….” 하면서 과거를 반추하는 눈을 했다. 대체 무슨 욕을 하고 다닌 건가, 전 대신관 윈디트…….
“다른 곳도 아닌 발타에서 ‘축복의 밤’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단순히 성력만으로 하얀 밤과 검은 달을 불러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필요한 것은 두 개의 힘. 두 사람. 성력과 마력을 지닌 자. 그리고 문헌에 적힌 걸로 보아, 일시도 중요한 것 같더군. 굳이 따지자면…… 보름달이 뜰 때?”
라헤안시가 무성의하게 박수를 짝짝짝 쳤다. 대충 맞다는 얘기이리라. 발타의 신전에서 눈치챘던 것이지만, 황제 다음으로 ‘축복의 밤’에 가까운 대신관이 확인해 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형. 현재의 일라베니아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일라베니아가 의도적으로 마인과 마력의 필요성을 지워 버린 거야. 윈디트는 그걸 알고 몰래 퍼트리고 다니다가 딱 걸렸어.”
리카르디스는 신전이라면 질색인 터라, 대신관들과 친분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윈디트도 그저 오며 가며 스치듯 봤을 뿐이었다. 그렇게 배짱 좋은 사람이었을 줄은 또 몰랐다.
“확실히 황제 입장에서는 곤란할 만했겠어.”
“뭐,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그렇다면 왜 일라베니아에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느냐…… 하면.”
“현 황제의 역량 부족과, 숨어 버린 마인들?”
“그것도 있지만, 형. 일정 수준의 성력을 가진 사람이 ‘축복의 밤’의 조건이라면, 마력도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이 필요하잖아?”
라헤안시는 새삼스러운 말을 되짚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럼에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의 월계수의 핏줄들은 대대로 성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 역할에 부합했던 거지. 그래서 대대로 하얀 밤을 불러 왔고.”
“그렇겠지.”
“그러면 형. 마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핏줄은? 지금 어디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맞는 말이었다. 설원의 월계수. 그 이름을 달고 있는 자들은 성력의 양과 상관없이 대다수의 인원이 성력을 타고 났다. 그것이 하얀 밤을, 축복의 밤을 불러오는 자격을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라 하여 모든 정당성과 권리를 손안에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헤안시의 말대로, 마력을 타고나는 핏줄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록에서도, 어떤 역사책에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인의 존재와 마력의 역할을 필사적으로 지우는 일라베니아 황실의 특성상 그 또한 가려진 부분일지는 몰랐으나,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없었을 수도?”
그래서 이런 얼간이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라헤안시는 반쯤 감긴 눈을 더욱 느슨하게 했다. 이제는 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시선을 어디에도 맞추지 않고 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눈이었다.
“있었어.”
존재를 확정하는 그의 짧은 말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가리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라헤안시가 그저 제 감만으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윈디트에게서든, 대신관만 열람할 수 있는 서고를 통해서든…… 이것은 진실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들은 분명 존재했다. 강한 마력을 타고나는 혈통.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일라베니아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인가? 숨어 버린 것인가?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설원의 월계수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성력을 가진 자는 대륙 여기저기에서 태어났다. 때로는 황족을 넘볼 정도의 성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보통의 경우에는 신전에서 그들을 데리고 와 신관으로 길렀다. 강압적인 절차를 밟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으나, 큰 보상이 따랐기에 부모들은 순순히 아이를 넘기곤 했다.
이와 같이 몇백 년 동안 성력이 강한 자들이 대륙 곳곳에서 태어났다면 마찬가지로 상당수준의 마력을 가진 자도 태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혈통이 아니더라도 마인은 있다. 그럼에도 일라베니아 황실이 몇백 년 동안 하얀 밤을 띄우지 못했다는 얘기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마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혈통이 세상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강한 마인이 씨가 마른 것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무슨 일이 분명 일어났다. 그 모종의 일로 인해 대륙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 시발점에는 아마 일라베니아 황실이 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실소했다. 이거야 원. 멍청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독식하려다가 상을 뒤엎은 꼴이었다. 설원의 월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창피해질 지경이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은게 다행이라 여기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라헤안시가 말을 이었다. 의자에서 뒹굴거리던 것은 언제 멈췄는지 똑바로 앉아서 과자 기름이 묻은 성전을 뒤적이고 있었다.
“지금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강한 마인이 한 명 있다지.”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날카로운 눈빛을 걸었다.
“비밀에 접근한 사람일수록 로젤린 경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할 거야.”
산뜻한 봄바람이건만 서늘하게 피부를 훑는 듯했다. 닭살이 돋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앞날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한마디였다. 리카르디스도 체감했으나, 이복동생이라 해도 대신관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줬다. 옛날 명망 높은 대신관 몇은 예언 따위도 종종 하지 않았다던가.
첨탑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은 문밖을 향했다. 멀리에 있을 로젤린을 그려 보았다. 많이 불안해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리카르디스는 다음을 기약하며 일어섰다.
라헤안시도 하늘하늘한 잠옷을 훌러덩 벗고 바닥에서 뒹구는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생각보다 성실하게 하는구나.”
“이래 봬도 대신관이라우…… 다음에 또 봐.”
“라헤.”
라헤안시는 하얀 대신관용 모자를 쓰면서 씨익 웃었다.
“정겹게 왜 그래 형. 형은 나한테 묻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음 꼭 그렇게 부르더라.”
“항상 대답을 피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냐.”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분주한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라헤안시. 라헤. 세티스티아가 그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애칭이었다.
라헤안시는 형제들 중 유독 리카르디스와 친근하게 지내는 듯했으나, 리카르디스의 손을 들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축복의 밤. 하얀 밤. 뭐 그런 것들. 리카르디스가 전장에서 구르면서, 암살자의 칼날을 피하면서 알기 바라 왔던 어떠한 단서, 정보, 진실들. 라헤안시는 그 일부를 알면서도 결코 리카르디스에게 가르쳐 준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리카르디스가 품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라헤안시는 목걸이를 침대 아래에서 낑낑거리며 꺼내면서 말했다.
“솔직히 형은 빨리 죽을 거라 생각했어. 내 예상대로라면 한 육 년 전쯤에 죽었어야 했는데. 정말 대단해 형.”
“칭찬 참 고맙구나, 동생아.”
리카르디스는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라헤안시는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슥슥 정리하는 중이었지만, 전혀 정리되고 있지 않아 결국 리카르디스가 도와줘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지. 아무에게나 기밀을 누설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 이쪽도 나름 목숨이 걸린 일인 걸.”
“한데?”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하나로 묶었다. 머리카락 하나가 당긴 것인지 아프다고 난리를 쳐서 느슨하게 다시 묶어 줘야 했다. 지저분한 머리를 묶고 나니 훨씬 인물이 살았다. 라헤안시는 거울속의 자신에게 윙크와 사랑을 화살을 한번 날린 다음에야 대답했다.
“이제야 목숨을 걸어 봄 직하다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거울에 비친 라헤안시의 얼굴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히죽히죽 웃지도, 나른하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다. 어느 한 곳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라헤안시는 곧 뒤돌아서 씩 웃었다. 언제나 보아 왔던 미소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아까 리카르디스를 안내했던 신관이 초조한 얼굴로 라헤안시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는 이래 봬도 대신관이라 하더니, 역시 빼먹은 전적이 몇 번 있는 게 아닐까.
라헤안시는 이크이크, 지각이다 지각. 하면서 입만 바쁜 시늉을 했다.
“담에 또 봐, 형.”
“얼른 가기나 해라.”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라고.”
라헤안시는 치근덕대면서 끝까지 뭉그적거리더니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많은 정보가 쏟아져 머리가 아파 왔다. 리카르디스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썼다. 몇 세대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강한 마인의 출현. 이걸 단순하게 ‘와, 대단하다.’ 라던가 ‘와, 멋있다.’와 같은 감상으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별관을 나왔더니 저 멀리 슈텐이 홀로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에게 다가가 로젤린의 행방을 물었다.
“디에즈 전하와 잠시 신전 내에 있는 정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대답에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상태 안 좋은 동료를 왜 애먼 사람에게 맡기냐며 슈텐은 몹시 혼났다. 리카르디스는 씩씩 성내다가, 앞장서 안내하는 슈텐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정돈 되지 않은 허름한 정원 속. 큰 나무 그늘 아래 두 남녀가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바닥에 펼친 손수건 위에는 붉고 노란 열매가 올라가 있어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좀, 가깝지 않아?’
많이 가까운 거 같은데? 거의 딱 붙어 있지 않은가. 어깨도 닿은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멈춰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무어라 말하자 디에즈가 열매 하나를 집어 로젤린의 입에 쏙 넣어 줬다. 그녀의 볼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겼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저 천사 같은 얼굴로 이 무슨 음탕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르원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전하. 전혀 음탕하지…… 않았습니다만…….”
“저 손길에 음심이 가득한 것이 보이지 않나 르원.”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남자의 질투. 흉했다.
“르원.”
“예, 전하.”
“저 자리를 어떻게 하면 가장 엉망으로 파할 수 있을 것 같나? 가슴에 생긴 상처 때문에 열매는 물론이고, 동그란 것까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저는 전하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나는 나 혼자 컸으니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 제가 전하의 기저귀까지 갈아 드린 게 기억나지 않으시냐. 일곱 살 때 처음 만났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냐. 하면서 두 사람이 아옹다옹 하는 사이에 그늘 아래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리카르디스의 바람대로 깨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열매를 황홀하게 바라보던 로젤린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낮춘 자세, 까딱이며 풀고 있는 손가락, 크게 뜬 채 한 번 깜박이지도 않는 눈. 누구 하나 잡을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로젤린은 척척 걸어오다가 도자기를 들고 있는 여인의 석상을 부쉈다.
쾅!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났다. 르원이 짤막하게 감상을 말했다.
“우리 편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로젤린은 조각상 여인에게서 도자기를 강탈하고는 더욱 흉흉한 기세로 다가왔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멈춰 섰다. 그녀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도자기를 날릴 준비를 했다. 하얀밤 기사단이 양 옆으로 쫙 갈라졌다.
로젤린이 채찍으로 후려치듯 도자기를 날렸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했다. 도자기의 종착지는, 지나가던 어떤 신관의 머리였다.
퍽, 파삭.
정확하게 머리를 강타한 도자기는 산산조각 났고, 신관은 스르륵 쓰러졌다. 성난 호랑이 같던 로젤린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여러 시선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암살자입니다.”
“……그러길 바랐다.”
지나가던 선량한 신관의 머리를 깨 버리길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자리를 수습하라 기사단원들에게 명령했다. 곧 그는 디에즈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돌아보았다. 손수건 위의 열매가 잔뜩 으깨져 있었다. 로젤린이 앞만 보고 오느라 밟아 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저렇게까지 처참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남자의 순정을 짓밟다 못해 으깨다니!
‘로젤린,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디에즈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눈동자가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성정이 순하고 유약한 아이라, 이런 폭력적인 장면을 즐길 리 없을 텐데?
디에즈의 황금색 눈동자가 로젤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게.”
로젤린은 헤사의 도움을 받아 몇 장의 보고서를 작성한 후, 기사단장실에 들렀다. 검은달과의 전투 보고서였다. 전투 내용이야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지만 형식상으로 필요한 절차였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어서 오게, 로젤린 경.”
방 안에 발을 들인 로젤린의 시선이 스타스를 벗어나, 그의 앞에 있는 탁자 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탁자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에게로. 연한 갈색에 노란빛이 섞인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발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종이었다. 고양이는 골골 소리를 내며 기사단장의 부드러운 손길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로젤린을 쳐다보더니 노란 눈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묘기를 선보였다. 마력의 기운이 순식간에 짐승에게 감돌았다.
‘……마카롱이잖아.’
로젤린은 오늘 내내 마카롱을 보지 못해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사단장의 집무실에 있을 줄이야.
로젤린의 눈길이 탁자 위의 고양이에게 닿는 걸 보고 스타스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사절단 이후로 종종 보이더군. 마차의 짐 사이에 숨어 온 게 아닐까 싶은데…… 먹이를 한번 줬더니 가끔 찾아오지 뭔가. 참 똑똑한 고양이야.”
스타스는 그 이후로도 “우리 미미가 다른 사람들이 주는 건 안 먹는데…….”부터 시작해서 “파르딕트 경과 슈텐 경은 만지려다가 물렸는데…….”까지 미미가 자신을 진짜 너무 좋아한다는 얘기를 은근슬쩍 자랑했다.
미미는 배부른 고양이가 햇살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 같은, 만족감 넘치는 표정으로 스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인간을 귀여워하는 이상한 광경이었으나, 둘 다 즐거워 보이니 뭐 잘된 것 같았다.
로젤린은 보고서를 포함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는 서류도 함께 제출했다. 스타스는 로젤린이 한몫의 상급 기사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고 감명 깊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러 번 보고서를 훑었다.
“대회 출전은 기사들은 힘들지만 주군에게는 힘이 되는 일이지. 각 세력의 크기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말이네. 수고해 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이니 최선은 다하지 말게.”
로젤린은 미미와 스타스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이번 달부터 다음 달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라며 칼릭스가 일러 줬다. 로젤린이 최초로 겪은 축제, ‘그림자 없는 밤’을 시작으로 다음 달까지 사냥 대회, 무투 대회, 건국일, 무도회 등등. 온갖 행사가 잔뜩 포진해 있었다. 심지어는 그 사이에 지인의 경사도 끼어 있었으니, 다름이 아닌 레이몬드의 결혼식이었다.
많은 일라베니아 제국민들은 이 시기에 결혼을 하려 했다. 건국의 달에 맺어진 부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와 그의 약혼녀인 황금정원의 클로에도 이때를 맞춰 결혼하기로 했다.
리카르디스의 안위가 워낙 아슬아슬하다 보니, 부하인 레이몬드도 몇 번씩이나 결혼을 미뤄야 했다. 레이몬드는 발타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결혼하자는 청혼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갔었고, 다행히 살아 돌아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몬드는 손수 쓴 청첩장을 로젤린에게 건넸다. 신랑 측 들러리로 서게 된 로젤린은 축사를 맡을 뻔했지만, 하얀밤 기사단 모두의 만류로 불발되었다.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오늘의 할 일 목록을 하나하나 그었다. 보고서 작성했고, 서류 단장님한테 드렸고…….
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일정한 소리에 하나가 더 덧대어졌다. 또 다른 발걸음 소리는 로젤린을 끈질기게 따라왔다. 느긋하고 차분한 걸음걸이였다. 우연하게 길이 겹친 듯했기에 로젤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걷는 사람의 보폭이 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몇 걸음도 지나지 않아 로젤린은 그 사람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로젤린에게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파르딕트나 슈텐과 비견될 만한 거구의 남자였다. 그녀가 흘끗 위를 올려다보자 역광에 침식되어 더욱 어두워진 검은 머리가 보였다.
검은 머리, 왼쪽 눈의 흉터, 거구. 날카로운 인상.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 에스터. 로젤린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페르탄은 그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화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였으나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명백히 로젤린에게 맞추고 있었기에, 그녀도 페르탄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낯선 이에게 듣는 소리치고는 퍽 친근한 호칭이로군. 나를 어떻게 알아 봤는가?”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그렇군.”
“아버지는 살벌한 인상이라고 말해 준 적 있습니다.”
“……그렇군.”
로젤린은 살벌한 인상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페르탄을 본 순간 바로 깨우칠 수 있었다. 페르탄도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제 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한 번 로젤린을 흘끗 내려다봤다. 구불거리는 결 좋은 검은 머리, 푸르른 녹음이 드리운 눈동자, 건강하게 혈색이 도는 하얀 피부.
페르탄은 분명 알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히 제 딸과 다른 점이 하나라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눈앞의 무언가는 ‘로젤린’ 그 자체였다. 심지어는 눈빛, 말투, 표정까지 똑 닮아 있었으며, 그것이 흉내를 낸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표출된다는 점에서, 페르탄은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혼동이 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로젤린이 태어날 때부터 마인이라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당연히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준수한 실력을 가진 평범한 기사였을 뿐이었다. 검술 명문가인 바다협곡의 자식을 이길 만한 실력도 없었을뿐더러, 2황자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족족 잡아낼 만큼 뛰어나지도 못했다. 그 아이는 검은달의 병기들을 상대로 살아 돌아올 만큼, 그들을 모두 가리가리 찢어 버릴 만큼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페르탄은 제 딸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그것’을 먼저 보기 전에, 그녀가 싸웠던 전투 현장을 먼저 접했다. 조각나 흩어진 살점이 눅눅한 습기 아래 썩어 가는 처참한 모습에, 페르탄은 비로소 그녀가 로젤린이 아님을 완벽하게 자각했다.
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페르탄의 생각보다도 오래 살아남았다. 준수한 실력이라고는 해도,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2황자 리카르디스의 곁에선 준수한 실력 정도로는 부족했다. 로젤린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다.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운명이었기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어째서 제가 원래의 로젤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겨 주시는 겁니까?”
페르탄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훤히 뚫려 있는 공간에서 “제가 로젤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같은 말을 대놓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너를 위한 게 아니다. 자칫 했다가는 붉은수레바퀴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기에 묻기로 결정한 것이다.”
“슬프지 않으십니까?”
페르탄이 걸음을 멈췄다. 로젤린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로젤린의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뻔했다. 붉은수레바퀴 성의 사람들. 영지민들. 제 의무조차 저버리고 저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지키겠다며 떠난 아이다.”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덩치가 커 위협적인 반면, 말투는 잔잔했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로젤린은 이미 죽은 자식이었으니.”
페르탄은 이 말을 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다. 죽은 로젤린에게 이런 모진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온하게, 정말 남의 일이라는 듯이. 그제야 페르탄은 그녀를 좀 더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
이야기의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폐부를 찔러 왔다. 페르탄은 거친 수염을 몇 번 쓸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끊어내 놓고 슬퍼하기에는 좀…….”
염치가 없지 않겠나. 로젤린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단순히 고민을 하는 표정이라는 사실을 페르탄은 알 수 있었다. 과거 로젤린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지금의 그녀와 똑같았다.
한참 눈동자를 또르륵또르륵 굴려 가던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는 말씀이신 거죠. 정확하게?”
“…….”
전혀 이해를 못했군. 페르탄은 얼굴만 제 딸과 같은 이 미지의 생물이 조금……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단순하게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명료하게, 정확한 자신의 감정을.
페르탄이 이를 한번 악문 후에 말했다.
“슬프다는 얘기다.”
입 밖으로 꺼내니 더욱 현실감 있게 들리는 말이었다.
슬펐다. 고통이 뼛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비록 자신이 로젤린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로젤린이 자신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그의 얼굴에 회한이 담기건 말건, 로젤린은 “아, 역시 그렇습니까?” 같은 말을 하면서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의 속을 후벼 파 놓고는 저렇게 후련해하다니. 기가 찼다.
페르탄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냐.”
“아프지 않습니다.”
“리카르디스 전하 곁에서는 더욱 다칠 일이 많겠지.”
“괜찮습니다.”
“네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너 또한 죽을 것이다.”
죽은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생명체를 보는 것치고는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 속에 담긴 염려를 읽었다.
“죽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한 상냥한 말이 아니었다. 표정과 말투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집과 오기로 똘똘 뭉쳐 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과거와는 다르되, 과거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페르탄은 홀린 듯 물었다.
“무엇 때문에 리카르디스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거냐.”
페르탄은 생각을 더듬어 머릿속에 그려 내었다. 단발머리의 어렸던 리카르디스부터, 더 과거의 꾀죄죄했던 몰골의 거지 소년의 모습까지.
대체 로젤린과 그 모습을 한 무언가는 리카르디스에게서 뭘 보았기에 지키고자 하는 것일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일어날 결과만이 근심이었다. 그래서 하지 말라 했다. 그 길을 걷지 말라, 해서는 안 된다 질책했다.
황실을 위한 희생양, 그리고 그 희생양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딸. 그것만 생각하면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수백 시간 맞은 듯 손끝이 서늘해졌다. 원망은 갈 곳 없이 떠돌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몸이 난도질 되고 나서야 궁금해지게 된 것이다.
제 딸은, 로젤린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일지언정.
페르탄은 손등 위로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팔짱을 끼고 제 발치를 응시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음, 음…… 흠. 끙……. 새끼 강아지가 간식 보채는 듯 이상한 소리까지 내 가며. 아주 열성적이기 그지없었다.
‘로젤린이…….’
로젤린은 입을 벙긋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그녀는 ‘로젤린이 부탁했습니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 내뱉지 못했다. 관성적으로 새겨 두었을 뿐, 그것이 정답이 아니게 된 지는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 왔다. 깊은 숲속.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을 죽이고, 때로는 안개 속을 부유하는 듯한 감각에 잠겨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가끔 깨어나 죽은 무언가로부터 마력을 섭취하며 존재해 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존재했을 뿐, ‘그것’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육체적인 죽음은 닿지 못하는 영역이었기에.
그런 때에 ‘그것’은 ‘로젤린’과 만났다. 그리고 로젤린이 되었다.
스치는 바람 하나, 내려 쬐는 햇살 한 점에도 로젤린은 전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 처음으로 만나는 세계의 모습은 놀랍고, 아름다웠다. 가슴 안쪽 차곡차곡 쌓아 온 기억들은 갈수록 찬란하게 빛났다. 생생한 감정들에 심장이 박동했다. 로젤린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인간들 속에서 지내 온 짧은 시간은 ‘그것’의 모든 시간의 합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부디 지켜 주세요.
내가 지키겠다.
과거 ‘로젤린’과의 약속이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라는 자신의 맹세로 변한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게 언제부터, 또 왜 그렇게 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냥 제 마음이 그를 지키고 싶은 것인데, 왜 지키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페르탄에게 대뜸 물었다.
“그럼 아버지는 왜 붉은수레바퀴의 영지와 일라베니아를 지키려고 하십니까?”
페르탄은 허를 찔린 듯 잠시 수염을 씰룩였다. 남자의 인상이 배는 사나워졌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페르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라 그렇다.”
“그렇군요.”
로젤린은 빙그레 웃었다.
“저에게도 전하가 소중하기 때문에, 지키겠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확신에 차 있었다. 페르탄은 그녀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힘을 느꼈다. 굳건한 의지와 신념. 가슴 안쪽에서 타오르며 사람을 나아가게 만드는 그 힘.
고작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존재라면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존재는 무엇인가?
바닥을 휘감던 바람이 넓게 천장으로 퍼져 울렸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람의 결을 그리듯 흔들렸다.
“너는 대체 무엇인가?”
페르탄의 질문에 이리저리 이동하던 로젤린의 시선이 그의 흉갑에서 멈췄다. 로젤린은 은색 갑주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너는 대체! 대체, 누구야!]
문득,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서 칼릭스의 칼날 위로 비춰 보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림자.]
햇살을 받는 여자의 생명력이 약동했다.
[로젤린의 그림자다.]
“로젤린입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 * *
[조만간…… 식사나 한번 같이 하자.]
페르탄이 헤어지며 했던 말은 낯설지 않았다. 황성에 들어온 이후 로젤린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어 온 인사말이었다. 헤어질 때마다 뭘 그렇게 식사를 하자고 하는지. 로젤린은 신나서 “예!” 하고 힘차게 대답을 했더랬다.
그러나 ‘조만간 식사…….’로 시작하는 상투적인 문구가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쯤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로젤린은,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 언제 식사를 할 거냐며 닦달을 해 댔다.
먹을 것에 대한 그녀의 집념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크나큰 실수였다. 결국 그들은 의례적인 인사말 한번 잘못했다가 불편한 인물과 불편한 식사를 해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이후 모든 일을 알게 된 레이몬드가 로젤린에게 그런 인사는 그냥 하는 말이라 가르쳤고, 로젤린은 왜 사람들은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그냥 하냐며 씩씩 성을 냈었다. 어쨌거나 로젤린도 ‘조만간 밥…….’ 운운은 인사나 다름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는데…….
[붉은수레바퀴라는 이름의 꽃이 있다면 꽃말은 ‘쇠고집’,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일 것이다.]
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르고 내리는 가문답게, 페르탄은 그 말이 진심인 모양이었다. 약속이 이뤄진 것은 바로 삼일 뒤였다.
고급스러운 식당은 유명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내부는 음식점이라면 응당 들려야 할, 사람들의 담소 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바쁜 웨이터의 발걸음 소리. 그 어떤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전의 기도 시간이 이 정도로 고요할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석상처럼 굳어 꿈쩍도 하지 않고 눈만 분주히 움직였다.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이 방금 전 입구를 통과한 세 사람에게 모였다.
검은 머리, 녹색 눈. 거구에 흉흉한 인상!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황실의 충실한 번견,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인물들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붉은수레바퀴의, 그 로젤린까지!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라베니아에서 보기 힘든 품종의 고양이가 그들을 뒤따라 총총총 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음식점은 동물 출입 금지였으나, 종업원은 미처 만류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두들 그러고 있듯이.
보통 권세가 대단한 귀족이라면 식사를 조용히 즐기고 싶다거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한 층을 통째로 예약할 테지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그런 섬세함 따위는 없는 남자였다. 밥은 먹는 것. 식당은 밥을 먹는 장소. 그러니 식당에서 밥만 먹으면 되었지 뭐가 달리 필요하겠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자세히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아니, 왜 다른 층으로 안 가는 거지? 구석 진 곳은 돈도 없고 예법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앉는 자리인데, 왜 저들이 저기에 있지? 혹시 경고인가? 우리가 지금부터 여기서 밥 먹을 거니까 다 꺼지라는 얘기인가? 그런데 식당은 동물 출입 금지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에서 의문을 읽어 낸 칼릭스만 괴로워했다. 그냥…… 보이는 남은 자리가 여기라 앉은 겁니다…… 고양이는…… 미안합니다…… 제 말을 듣는 분이 아니셔서…….
칼릭스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천천히 훑었다. 앞에는 페르탄, 오른쪽에는 로젤린이, 길쭉한 테이블 위에는 고양이 미미가.
‘이델라브힘이시여…….’
칼릭스에게만 가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이 시간으로부터 이틀 전. 로젤린이 아버지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거라며 칼릭스에게 자랑한 일로부터 시작됐다.
함께 식사?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 약속 뒤에 모종의 음모 따위가 도사리겠거니 생각해, 칼릭스는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음모나 비열함 같은 단어와 거리가 한없이 멀다는 것쯤은 자식으로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인물 ‘로젤린’이 있으며, ‘죽은 딸의 모습을 한 존재와 식사를 나누는 그 딸의 아버지’라는 예상 밖의 상황으로부터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외의 문제가 또 있었을 줄이야.
아버지의 행동이 누이에게 미칠 여파를 생각한 건 좋았으나, 두 사람이 외부로 끼칠 영향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칼릭스는 자리로 이동하던 중,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
아버지와 누이만 문제라고 생각했지. 설마 자신의 존재까지 더해져 위압감을 배가시킬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식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내부의 공기가 훅 바뀌었다. 악단이 연주를 멈추고, 음식을 먹던 입이 멈추고, 하다못해 공기도 멈춘 것 같았다. 앞에 둔 음식이 차게 식어 가도 칼질 한번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칼릭스뿐이었다.
페르탄은 로젤린이 메뉴를 열심히 고민하는 십 분 가량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젤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탄이 그제야 첫마디를 꺼냈다.
“결정 했느냐.”
“네.”
“결정 했느냐, 칼릭스.”
“……네.”
칼릭스는 지금의 상황에서 뭘 먹든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조건 체할 거라고.
저번에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비스타로 내려간 일은 차치하고,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너무 거북했다. 아버지와 누님의 조합? 거기에 더해 마카롱님까지?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환장할 것 같았다.
페르탄이 손을 들자 종업원이 바닥에 구를 듯 다급하게 다가왔다. 나이와 복식을 보건대 평범한 종업원은 아니었다. 이 식당의 주인이거나 총 지배인이지 않을까.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로젤린이 메뉴판을 펼치고 가장 상단의 메뉴를 가리켰다.
“양 갈비 스테이크와 단호박 수프 세트를 하시겠습니까?”
“여기부터.”
첫 마디가 심상치 않았다. 나이 든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여, 여기부터?
로젤린이 가장 하단의 메뉴를 손으로 짚었다.
“여기까지 전부.”
종업원이 딸꾹질을 했다. 로젤린은 만족한 듯 눈을 깜빡이며 씩 웃었다.
로젤린이 메뉴판을 덮으려 하자 마카롱이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그녀의 손등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양 갈비 스테이크를 툭툭 가리켰다.
“아, 양 갈비 스테이크 하나 더.”
주문을 받는 남자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칼릭스가 급하게 마카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게.
“우리 미미가…… 굉장히…… 똑똑해서….”
굉장히 똑똑한 미미가 칼릭스의 손을 할퀴었다. 상처가 쓰라렸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한 말인 줄 아나…….
곧 음식이 나왔다. 로젤린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주문 덕분에 테이블 두 개를 붙여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두 개의 테이블이 빈틈없이 접시로 가득 채워졌다. 다른 사람들의 음식은 다 식어 먹음직한 빛을 다 잃어버린 반면, 두 개의 테이블 위를 채운 음식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입맛이 없는 칼릭스 마저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페르탄이 먼저 스푼을 들었다.
“들자.”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칼릭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숨 막혀 뛰쳐나가고 싶었다. 세 사람은 어떤 대화도 없이 음식에만 집중했다. 조용하던 음식점에 이따금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울렸다.
칼릭스가 음식을 깨작이자 로젤린이 스테이크를 주사위 모양으로 잘라 칼릭스의 입에 들이밀었다.
“왜 안 먹어. 아- 해.”
“……누님, 그러니까 저는…….”
“아.”
칼릭스가 무기력하게 아- 하고 입을 벌리자, 로젤린이 그의 입에 큰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넣었다.
“이거도!”
그러고는 구운 아스파라거스도 칼릭스의 입에 잽싸게 넣었다. 그는 입을 우물거리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로젤린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동생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나 채소 먹기 싫어서 고기랑 같이 넣어 준 거로군…….’
갈수록 똑똑해진다고 해야 할지, 영악해진다고 해야 할지.
사람들은 로젤린이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술렁였다. 로젤린 경이…… 음식을 많이 시켰어! 로젤린 경이…… 스테이크를 동생한테 먹였어! 로젤린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을 하는데, 조만간 그녀가 숨을 쉬는 것도 신기해할 듯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것보다는 스테이크를 소스에 찍어 먹는 고양이가 더 신기하지 않나 싶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페르탄이 불쑥 말을 꺼내 왔다. 칼릭스는 고기 조각을 미처 다 씹지 못한 채 삼켰다. 내 딸도 아닌 무언가와 너는 사이가 퍽 좋아 보이는구나 하는 왠지 모를 질책처럼 느껴졌으나, 로젤린은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네.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페르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로젤린과 마카롱, 페르탄은 대식가답게 모든 음식을 해치웠다. 칼릭스도 꾸역꾸역 한 접시는 비웠다. 로젤린이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먹으며 살살 녹아 가고 있을 때, 페르탄이 다시 말을 꺼냈다.
“잘 먹었느냐.”
“네. 맛있었습니다.”
“그러면 됐다.”
뭐가 됐는데요! 칼릭스는 미처 묻지 못했다. 칼릭스는 제 아버지가 어떤 목적 아래 그녀를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묻거나,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거나,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둥의 훈계라던가. 혹은 그녀를 제거하려 하던가.
그런데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결정 했느냐’라든지 ‘들자.’,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 잘 먹었으면 됐다.’와 같은 말만 하고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지 않은가. 마치 이게 목적이었다는 듯.
“나는 내일 부로 다시 변경에 내려간다.”
“건국제가 곧 다가오는데, 지나고 가지 않으십니까?”
“느낌이 좋지 않다.”
발타가 한창 공작중이니, 요즘의 국경은 지난 수년간 보다 훨씬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제 아버지가 남들보다 감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불안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황제가 건국제까지 만이라도 황성에 남아 있으라 분명 얘기 했을 텐데, 아주 거침이 없었다. 누가 붉은수레바퀴 아니랄까 봐.
“……몸조심하세요.”
칼릭스는 입술을 긁적이며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로젤린도 칼릭스를 따라 “몸조심하세요.” 하고 얘기했다. 페르탄은 제 아들과 로젤린을 한 번씩 눈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릭스.”
“예.”
“네 어머니에게는 내가 말해 두었다.”
“……네.”
로젤린의 일을 말했다는 얘기이리라. 대륙 전역에 제 딸이 마인이라는 얘기가 퍼졌는데 에델바이스가 모를 리 없었다. 로젤린이 죽었고 제 딸의 탈을 쓴 무언가가 제 딸인 양 활동하고 있다는 상세한 얘기를 과연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칼릭스는 제 어머니가 혼절하거나 기절한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이 몰려왔다.
“갈라·제르타예의 후예다. 네 어머니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강한 사람이니,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안부 편지나 보내 거라.”
“……아버지도 어머니 얼굴이나 보고 내려가시죠. 얼굴은 안 까먹으셨습니까?”
칼릭스가 울컥해서 반격했음에도 페르탄은 전혀 타격받지 않은 듯했다.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그는 겉옷을 걸치고는 마지막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과 페르탄은 서로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로젤린 에스터.”
“네.”
그는 로젤린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 줄에 걸려 있던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가 페르탄의 손으로 굴러 들어갔다. 칼릭스가 벌떡 일어섰다. 가문에서 아주 연을 끊겠다는 것인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 것이었으나, 페르탄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반지를 주머니에 넣거나 어디에 버리지 않았다.
로젤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은수레바퀴는…….”
“네.”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네.”
“나는 나의 일라베니아를 지킬 테니.”
페르탄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중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칼릭스는 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어두운 밤의 고요가 깨질 때였다.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에 무단으로 입단 신청을 하면서부터 붉은수레바퀴 성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로젤린과 페르탄은 며칠, 몇 주, 몇 달을 다퉜다.
제 아버지는 담담하다. 제 누이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툼은 결코 담담하지도, 온화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렸던 칼릭스는 어두운 밤을 소란하게 만드는 그들의 싸움을 두려워했다.
그때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라베니아를 지키세요!]
페르탄은 언제나 가르쳤다.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어렸던 칼릭스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는 말을 단어 그대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일라베니아 제국, 자신이 속한 나라를 지킨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 아버지와 로젤린의 입에서 나오는 ‘일라베니아’라는 단어는 항상 다양하게 변화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처럼. 그 단어가 가진 단순한 뜻을 넘어서 더욱 거대해졌다.
[저는 저의 일라베니아를 지키겠습니다.]
그때의 제 누이에게 묻지 못해, 지금은 모른다. 그녀의 일라베니아는 단순히 리카르디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어슴푸레하게 띤 형상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었다. 대단한 것, 위대한 것, 가장 소중한 것.
“너는 너의 일라베니아를 지켜라.”
칼릭스는 어쩐지 제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것 같다 생각했다. 과거 로젤린이 관계를 끊어 내기 위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지금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관계의 두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것 같았다.
“네.”
로젤린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페르탄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그리고는 로젤린의 어깨를 툭툭 도닥이고 나서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푸딩을 주문했다. 칼릭스는 눈, 코, 입을 제각기 구겨서 제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표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분위기 못 맞추는 건 제국 제일이었다.
페르탄은 곧 예쁜 박스에 포장되어 나온 푸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로젤린에게도 한 박스 선물한 후였다.
로젤린은 그가 밖에 나설 때까지도 손에 끼워진 반지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투박하고, 예쁘지도 않은 그 반지를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한 손에는 푸딩 박스를 꼭 껴안은 채였다. 칼릭스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참 잘 어울리는 부녀지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