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0화 (20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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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디스의 환한 미소가 점차 의문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마주한 로젤린이 눈을 부릅뜬 채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숨도 멈춘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지? 무슨 일이지?

“로……젤린 경? 로젤린?”

한참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가 꿈틀, 움직이더니 이내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아…….”

아. 감탄사인지 아니면 어떤 단어의 시작인지 모호한 말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걱정스레 그녀를 지켜보던 리카르디스가 허탈함에 웃었다. 로젤린은 다시 한번 파들파들 떨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찬란하게 빛나는 미모에 연신 충격을 받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웃는 모습을 아주 보지 못한 것도 아니며, 그가 아름다운 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젤린이 이토록 경악하는 이유는 오늘의 리카르디스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감싼 주위 공기가 깃털처럼 가볍고 봄 햇살에 말린 시트처럼 포근했다. 행복하다는 듯 눈을 휘며 제 모습을 담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로젤린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말, 너무 완벽했다. 얼굴이……!

“…….”

어디로 보나 오랜만에 재회한 황자와 기사 사이에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보통은 잘 지냈느냐, 여행길은 힘들지 않았냐는 안부가 우선이지 않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대도 오랜만에 보니…….”

리카르디스는 적당한 뒷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다. 눈앞의 로젤린은 여전히 예쁘고 귀여웠지만, 지금 그 말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마와 볼에는 정체 모를 검댕이가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 여기저기 이파리를 달고 있는 지금. 예쁘다, 귀엽다는 표현은 놀리는 듯한 느낌을 줄 것 같았다.

“…눈이…… 더…… 뾰족해진 것 같군. 아주 멋있어.”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고작 이것밖에 못해? 독설가, 달변가, 15살에 학자와 토론을 했던 내가, 고작 눈이 뾰족해? 뾰족해서 멋있어? 미친 거 아니야?!

리카르디스가 자괴감에 휩싸여 무너져 갈 때, 로젤린은 한껏 흐뭇해하는 중이었다. 맞습니다, 제 눈이 좀 뾰족하고 멋있죠. 하는 듯이. 그제야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풀어졌다.

그가 손을 들어 로젤린의 머리에 파묻힌 나뭇잎을 떼어 냈다.

“아픈 곳은?”

“아, 장시간 말을 타느라 엉덩이가 조금,”

“그래! 그래, 이만 하지. 피곤한 사람을 붙들고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어.”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역시 방심하는 순간 튀어나오는군.’

정말 그녀는 여전했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로젤린 경!”

외출했던 잇세리온이 로젤린을 발견하고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건강해 보일 수가. 샌드위치를 씹어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것 같은 저 힘찬 목 넘김!

로젤린이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회복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건강해 보이는군요! 아이고,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데, 로젤린 경. 스타스 경에게 복귀 보고는 하고 온 겁니까?”

로젤린이 괜찮다고 하자마자 잇세리온이 낯빛을 싹 바꾼 채 따지고 들었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로젤린의 시선이 슬그머니 잇세리온의 얼굴을 벗어났다. 아니 이 사람이!

“어쩐지 스타스 경이 퇴근 시간인데도 집무실을 떠나지 않더라니! 초조하게 서류만 뒤적이더니만!”

“제가 갔을 때는 자리에 안 계셨기에…… 그래서 그냥……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오면 어떻게 합니까!”

리카르디스는 잇세리온을 의식하고 목 아래로 웃음을 꾹 눌렀다.

“아까 문밖의 호위 기사분들이 로젤린 경의 얘기는 안하던데…… 아앗! 또 창문으로 들어왔군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거 눈치 되게 빠르네. 분명 그런 뜻이었다. 잇세리온도 알아들었는지 잔소리를 마구 퍼부었다. 아까 칼릭스에게 인간을 벗어난 존재 어쩌고 얘기 들은 건 전부 잊은 눈치였다.

“잇세리온. 그쯤하고 넘어가지. 막 도착해서 피곤한 사람 아닌가.”

최근 들어 로젤린의 일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한 잇세리온은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제 주인을 쳐다봤다.

로젤린은 강력한 뒷배를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나쁘고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잇세리온은 그녀의 어설픈 비열함에 울컥하진 않았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열한 미소를 짓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표정과 눈빛.

잇세리온은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어, 억…… 설마. 아니겠지.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아니야! 부정을 해 보았으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인간에서 살짝 빗겨 나가 있는 존재를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눈빛이, 마치 꽃물로 물들인 어린 아이의 손톱 같았다.

여행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 했던가. 아니다, 전부 거짓부렁이다. 바람이다. 파괴력 있고, 종잡을 수 없는 돌풍이 여행자의 옷을 찢어 버릴 것이다!

잇세리온은 알몸이 되어 버린 제 주인의 처참한 몰골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장해제가 아닌가.

“가시밭길을 좋아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전하…… 왜…… 하필…….”

“……가시밭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잇세리온은 손수건으로 제 눈물을 찍었다.

‘흐흑 전하…… 이제는 눈치도 닮아 가시는 겁니까…….’

칼릭스로부터 분명 듣지 않았던가?

마력에 근간을 두고 있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잇세리온은 기함했었다. 대충 로젤린이라는 기사가 변화했다는 것쯤은 그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저 나이 대의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다르지.’ 쯤의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덕분에 충격도 두 배였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지 않은 듯. 침착하게 칼릭스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잇세리온이 아는 리카르디스는 상황과 정보를 합산하여 여러 가지 결과를 그려 내는 일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이런 상상도 하지 못할 안건에서조차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대화 내내 칼릭스에게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정보를 확인하는 식의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 나갔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로젤린을 대하는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비슷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친숙해졌다.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빛과 표정의 날카로움도 무뎌져 있었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살아 있던 때가 생각나는 얼굴이었다. 잇세리온은 웃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져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론, 화목하고 가슴 찡했던 상황은 곧 끝을 맞이했다. 샌드위치의 소스를 리카르디스의 손에 한 방울 떨어트린 로젤린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날름 핥았기 때문이었다. 잇세리온이 뒷목을 잡았다. 로젤린 경, 감히 황족의 몸에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얼굴이 발개져 있는 리카르디스도 이번만큼은 잇세리온의 잔소리를 막지 못했다.

한참 뒤 진정한 잇세리온은 자신이 집무실에 들린 진짜 목적을 상기했다.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팔락거렸다.

“전하. 성과가 좀 있었습니다.”

“어느 쪽?”

“백옥 성입니다. 어수선함을 틈타, 발타에서 접촉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백옥 성은 5황자 디에즈가 머무는 곳이었다. 발타가 엘피디오의 석영 성이 아닌 백옥 성으로 바로 접촉을 했다?

“엘피디오는?”

디에즈가 단순히 발타와 엘피디오의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면, 곧바로 엘피디오의 석영 성으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5황자 전하의 독단입니다.”

리카르디스에게 디에즈는 언제나 엘피디오의 뒤에 가려져 있는 흐릿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하게 엘피디오를 비호하며 등 뒤를 지키는 자가 아니었다. 엘피디오의 그림자에 숨어, 발타와의 독자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무엇을 위해서? 단순한 실리를 위함인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현 황태자 자리에 가까운 건 자신과 1황자 엘피디오였다. 군중들이야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황태자는 엘피디오였다. 황제가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

설령 리카르디스가 위에 서는 자의 소명을 가슴속 깊이 끌어안고 있어 훌륭한 황제의 재목이건, 설령 엘피디오가 멍청하여 나라를 다 말아 먹을 작자이건. 황태자는 엘피디오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표면상으로 드러난 황태자 위를 둘러싼 싸움의 형태는, 제법 무게가 비등하여 저울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황자들이 함부로 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싸움도 급이 맞아야 하고, 종이 맞아야 하지. 사자 싸움에 여우나 하이에나 따위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3황자 틸렌드는 1황자 엘피디오의 동복동생이다. 리카르디스 다음으로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으나, 사자갈기 공작가는 엘피디오에게 힘을 쏟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안 그래도 나날이 리카르디스의 몸집이 커지고 있는 판에 힘을 나눌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틸렌드 또한 야욕이 큰 사내였다. 혼자서 파벌을 만들어 엘피디오의 그늘을 피해 조금씩 세력을 확장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 황후에게 딱 걸려서 죽지 않을 만큼 혼났다. 형을 도와줘도 모자랄 판에 뒤통수를 치려고 하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이후 틸렌드는 얌전히 제 형의 왼팔인지 오른팔인지를 담당하여 싸움에서 물러났다.

4황자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와 마찬가지로 외가의 힘이 크지 못했다. 싸움에 끼어들기에는 지위, 세력 모두 부족한 점이 많았으나, 후계 구도에서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애초에 그가 권력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한 분란에 휩싸이기 싫었던 라헤안시는 일찌감치 싸움에서 손을 떼고 신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카르디스가 가끔 대신전에 들렀을 때나 종종 보는 얼굴이었는데 빈둥거리면서 잘 노는걸 보니 적성에도 맞는 듯했다. 어린 6황자와 7황자는 잘난 형들 아래 기죽어 얌전하게 지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과 엘피디오를 제외하면 이 싸움에 끼어들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 관계를 차분히 정립해 보니. 둘만 없다면, 1황자와 2황자만 없다면 디에즈가 상당히 왕좌에 가까운 위치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런 거였나. 거대한 맹수 두 마리의 싸움. 패자는 죽고 승자 또한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디에즈는 숨죽이고 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위태로운 승리의 상처에 제 발톱을 들이 미는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

두 남자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젤린은 최근 들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기 시작했다. 이런 무거워 보이는 상황에서는 갑자기 맥을 끊는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 아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종용될 거리도 아니라는 것쯤은 대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갉작갉작 엄지손톱끼리 서로 긁는 손장난만 하며 별다른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로젤린은 배가 고팠다. 고작 과일과 빵 몇 쪼가리를 먹는 것 정도로는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이 그녀의 위장을 감돌았다.

마침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꾸르륵 하는 우렁찬 소리였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얘기하던 두 남자가 대화를 중단하고 로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배가 고픕니다! 알아주시는 겁니까? 그녀가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을 지어서, 그들은 일순 잘못 들은 건가 착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배는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얼굴 근육을 씰룩이며 로젤린의 복부쯤에 시선을 두자,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배에서 난 소리입니다. 손이라도 번쩍 들어 보일 기세였다.

리카르디스는 입가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음…… 로젤린 경.”

“예! 전하!”

“혹시…….”

“예!”

“배가 고픈가?”

“예, 전하!”

이렇게 힘차게 대답할 것까지야. 상급 기사 서임식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이마를 짚는 척,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흐느끼며 웃었다.

“몸도 다 낫지 않은 사람이…… 흐흠, 배가 고프면 쓰나.”

“그렇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해. 오는 길, 정말 수고 많았다.”

“호위가 적습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요즘 들어 암살자들의 수준이 급격히 낮아졌지. 발타 쪽에서 몸을 사리는 것 같더군. 그대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하카브의 도움이 끊기자, 마음이 급해진 엘피디오가 암살자라면 닥치는 대로 보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도 막아 냈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고작 국내의 어중이떠중이 암살자들을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리카르디스는 어느 때보다도 쾌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줄도 알았다. 잇세리온이 가세해서 그녀를 달랬다.

“오늘만이라도 푹 쉬시죠, 경. 축제 날이 아닙니까. 온 거리에 먹을 것, 구경할 것, 먹을 것이 넘쳐 납니다.”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을 바라보았다. 지금 ‘먹을 것’ 두 번 얘기한 거 아닌가? 어쩐지 실수가 아닌 것 같았다.

“……전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반복된 먹을 것 얘기 두 번에 로젤린은 혹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리카르디스를 두고 갈 바에는 사흘간 굶겠다는 듯 결의에 찬 눈빛을 했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며 코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상관의 입장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로젤린은 황자의 명령이라 해도 잘 듣는 자가 아니었기에 숨어서 호위할 것이 분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축제에 볼일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습니까?”

로젤린이 반색했다. 잇세리온은 얼굴 표정을 구깃구깃하게 만들었다. 그런 일정 없습니다, 전하! 라고 반박할 마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과 지긋하게 눈을 맞추며,

“볼일이 있었어.”

하고 단정 짓는 바람에 말하기도 전에 막혀 버렸다. 잇세리온은 분한 마음에 큭, 윽. 하며 목 끝까지 차오른 온갖 말들. 안 된다. 위험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냐. 말이 되냐. 따위의 모든 것들을 속에서 잠재워야만 했다.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로젤린만 신났다. 리카르디스는 “그래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이라는 태평한 대답을 하며 불만스러워 하는 잇세리온에게 손짓했다. 준비하란다. 잇세리온은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옷이며 돈이며 축제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리카르디스 정도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 고작 호위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성 밖을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책임지는 스타스에게 그 소식이 들어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잇세리온에게 난데없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가 다급히 집무실로 찾아왔다. 무슨 일로 나가시느냐고 물으려던 스타스는 복귀 보고를 까맣게 잊은 채 신나서 희희덕거리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는 로젤린을 잠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왔다. 잠시 후 돌아온 로젤린은 스타스의 뒤에서 시무룩해져 있는 상태였다. 호되게 혼난 모양이었다.

이후, 스타스는 리카르디스로부터 ‘축제에 볼 일이 있어 가 봐야겠다’ 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로젤린에게 슬쩍 시선을 두었다. 매년 축제마다 소란스럽다며 질색하던 리카르디스가 수배는 시끄러울 게 빤한 거리로 나갈 이유가 짐작된다는 표정이었다. 황자가 기사를 위해 놀러 나가려 한다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타스는 최선의 인선을 위해 골똘히 고민했다.

야간 근무를 맡은 상급 기사 네 명. 파르딕트, 하가넬, 르원, 슈텐.

하급 기사 두 명. 바스티안, 클로드.

총 일곱 명의 호위 인력이 움직였다. 다들 하얀 제복을 벗고 가벼운 셔츠와 튜닉으로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산을 이루고 강을 이루는 축제 거리. 호위도 두 배로 번거로울 것이 뻔했지만, 축제에 간다고 하니 모두들 은근히 즐거워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도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복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쪽의 머리색은 밤하늘이고, 다른 한쪽은 아주 달빛 별빛마냥 찬란했다. 심각하다. 심각하게 눈에 띄었다. 잇세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사람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나서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 *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흥에 취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마차 안까지 실려 왔다. 로젤린이 잽싸게 창에 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어두운 밤이 잠시 사라진 듯 모든 공간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여기저기 다양한 색깔의 등불들이 비추는 거리에는 어린아이들도 돌아다녔다. 전국을 떠도는 서커스단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고, 모든 상가들이 한몫 잡기 위해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는 중이었다. 낮부터 쭉 이어진 축제는 밤이 되자 더 북적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하얀 밤과 검은 달이 뜬 날. ‘그림자 없는 밤’을 기리는 축제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마을, 큰 영지 할 것 없이 밝게 빛나며 밤을 몰아냈다. 사람들은 밝은 색의 옷을 입고, 검은색에 가까운 것은 모두 가리거나 깊은 곳에 숨겼다.

리카르디스는 이런 국가 행사에 대해 건조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으나, 마차에서 내린 로젤린을 보고는 거리의 모든 이처럼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됐나…….’

로젤린은 그야말로 굉장한 흥분 상태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삭삭 훑어보는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코를 움찔거리며 후각에 집중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 왔다. 배고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치명적일 것이다.

“꼬리가 붙었나?”

리카르디스가 르원에게 묻자, 르원이 로젤린을 쳐다봤다. 로젤린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 걸 확인한 르원이 답했다.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러면 됐군. 그대들도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지 않겠나.”

“전하!”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쓰며 파르딕트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혹시 설교용 단상이 필요하나, 파르딕트 경? 올라가서 크게 외쳐 보지그래.”

아프지 않긴 했지만 뜨끔은 했다. 확실히 계속해서 전하, 전하아! 하고 목 놓아 부른다면 누구라도 이곳에 귀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파르딕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싼, 누가 보아도 호위 대형을 짜고 있는 그들에게 목소리 낮춰 얘기했다.

“호칭 정리부터 하지. 일단 나는…… 도련님으로 할까.”

“예, 전하!”

“……도련님이라고.”

“예, 도련님!”

다들 약간 모자라긴 한데, 대답은 곧잘 했다. 리카르디스는 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복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단련된 두터운 몸과 곧은 자세는 숨겨지지 않았다.

검으로 인한 흉터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으나 불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가 보아도 기사였다. 알맹이가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 입으면 뭐하나. 리카르디스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그들을 질책했다.

“좀 이 거리의 분위기에 맞출 수는 없는 건가?”

기사들은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봤다. 고급스럽긴 하지만 돈 많은 평민들이 입을 법한 복식인데 뭐가 문제인 걸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본래 평민 출신이었던 르원만 피식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들은 서로 애칭을 부르는 게 좋겠어. 말투도 좀 비격식적으로 바꾸고. 그대들의 분위기가 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 속에 무뎌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파르딕트 경부터 시작해.”

“파르파르입니다.”

파르딕트를 제외한 여섯 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로젤린만 멀뚱히 “파르파르.” 하며 입으로 한번 되뇌어 암기했다. 그 다음으로 로젤린이 “……로즈입니다.” 하고 반 박자 늦게 답했다.

딱히 애칭이랄 것도 없고, 이 자리에서 재빠르게 만들어 낼 만한 능력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로젤린의 어머니인 에델바이스가 부르던 것을 떠올려 입 밖에 내보냈지만, 별로 좋아하는 호칭이 아니라 인상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이후로 하니, 루루, 비스탕, 크림, 슈슈 등의 귀여운 애칭이 건장한 남자들의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그들의 어머니가 사용하는 애칭이라는 사족이 덧붙여진 관계로, 리카르디스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참혹했다.

“환장하겠군.”

상처만 남은 애칭 정하기 시간이었다.

파르파르는 입에 낯선 호칭을 사용해 가며 어설픈 연기를 보였다.

“저, 기. 두 번째 골목의. 주점에, 숙성 사슴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들어 봤어, 로, 로즈?”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속지 않을 연기였으나, ‘클로드 경’, ‘슈텐 경’이라는 딱딱한 말 대신, “크림.” “슈슈.” 와 같은 애칭으로 부르다 보니 주위 행인들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게 보였다. 이런 어설픈 수작이 생각보다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이 로즈라고 불릴 때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동료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파르파르에게 “떽끼. 로즈 이 녀석! 이것도 다 작전이야!” 라고 혼난 후에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며 혼자 분을 삭여야 했다.

“로즈.”

그걸 지켜보던 도련님이 그녀의 입에 구운 닭다리를 물려 주었다. 굳어 있던 로젤린의 얼굴 근육이 스르르 이완되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심기가 불편해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그 이후로는 호칭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배고픈 로젤린보다는 배부른 로즈가 좋다는 것이 아닐까.

초반에는 누가 봐도 이름만 귀여운 기사들이던 그들이 서서히 행인들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도련님에게 별다른 위험이 없으리란 사실을 서서히 깨우친 것이다. 위험이라고 해 봤자 삼류 건달이나 소매치기 정도였는데, 파르파르와 하니, 슈슈의 덩치를 보고도 다가올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자들은 어김없이 나타난 로즈에게 제압되었다. 재빠르게, 하지만 상대를 다치지 않게 무력화 시키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녀의 밑에서 꿈틀거리며 벗어나려던 소매치기는, 로젤린이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는 몇 마디를 들은 후 시체처럼 미동 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로젤린이 방긋 웃었다. 마카롱에게 배운 몇 가지 험한 말들을 했을 뿐인데 효과가 엄청났다.

‘마카롱한테 말해 줘야지.’

로젤린과 기사들에게 걸린, 축제의 좋은 뜻을 해치려는 불순한 분자들은 전부 치안대에 압송되었다. 경례하는 남자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지만 워낙 유명 인사라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파르파르.”

“왜, 로즈.”

“저거 사 줘. 나 돈 안 들고 왔어.”

파르파르는 허, 참, 내. 어이가 없으려니. 너 나한테 빚진 거 있거든? 방패 값 물어내라? 툴툴대면서도 그녀가 사 달라는 소 염통 직화 구이의 대금을 치렀다. 이후 그녀는 하니 이거 사 줘, 슈슈 저거 사 줘, 비스탕 저거 사 와 하고 돌려 가며 빚을 지다가 안 되겠는지 도련님에게 돈을 꿨다.

“월급 가불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도련님. 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세상 공손한 태도라서 도련님은 알겠다고 했다. 기사들은 악세사리나 축제 기념품 등의 쓸데없는 것들을 사면서도 먹을거리가 보이면 꼭 하나씩 사서 로즈의 손에 들렸다.

그녀는 도련님에게 받은 과일과 크림이 잔뜩 들어간 크레페를 먹을 쯤에는 살짝 울먹이고 있었다. 매일이 축제였으면 좋겠다나. 마침 옆을 지나가던 어린 남자아이가 매일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똑같은 말을 해서 리카르디스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덮어야만 했다. 흑흑 소리가 나며 리카르디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우시는 겁니까, 도련님?”

“아니 잠시…… 머리가 아파서…….”

어떻게든 어물쩍 넘어갔다. 동그란 달이 밤하늘에 가장 높게 걸릴 쯤엔 기사들도 완벽하게 축제에 동화되었다. 이제는 도련님을 호위 하는 게 아니라, 도련님을 끌고 다니며 놀러 다니는 느낌에 가까웠다. 로즈와 파르파르는 죽이 잘 맞는지 많이 먹기 대회 또는 많이 마시기 대회마다 석권하며 축제를 만끽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련님 주위를 원의 형태로 호위하던 기사들의 간격도 더욱 좁아졌다. 키가 큰 사내들에 의해 앞이 잘 보이지 않자, 로젤린이 종종 헤매었다.

“이런, 이러다 길이라도 잃겠어. 이리와 로즈.”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어깨를 끌어 제 곁에 서게 했다. 기사들이 방패막이 되어 걷기가 수월해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리카르디스가 걸고 있는 꽃 목걸이의 향기가 진해졌다. 로젤린이 코를 킁킁거리며 꽃향기를 맡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제 가슴께에서 떠도는 로젤린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먹어도 된다.”

“네.”

로젤린은 칼릭스에게 배운 대로 이파리를 떼어 내고 꽃술 뒷부분을 머금고 쪽쪽 빨았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흉내 내서 연분홍의 꽃을 입에 물었다. 한 방울도 안 되는 달콤함이 꽃 향과 함께 입안에 물씬 풍겼다.

“……오랜만에 해 보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예전에 많이 했었지.”

리카르디스는 그 말을 내뱉으며, 칼릭스가 거리에서 꽃을 물고 다닌 일을 더 이상 놀릴 수 없게 되어 버렸음에 아쉬워했다.

로젤린은 어린아이들이나 살 법한 싸구려 악세사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조금이라도 반짝이는 게 보일라치면 멈춰 서니, 이쯤 되면 까마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로젤린은 알록달록한 물건이 무질서하게 올라간 가판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쭈그려 앉아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열성적으로 살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필요하다면 사 줄테니 몇 개 골라 봐.”

“아니요. 저 돈 많습니다.”

뭐어?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다 삼키지 못해 조금 내뱉어 버렸다. 로젤린은 색이 비슷한 펜던트를 두 개 들고는 열심히 등불에도 비춰 보고 눈에 가까이도 대어 보았다. 그리고는 큰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사겠습니다.”

“어머, 아가씨가 안목이 높으시네!”

“그럼요.”

장사치들이 으레 하는 말에도 로젤린은 뿌듯해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 옆에 딱 붙어서 칭찬했다.

“예쁜걸. 반짝반짝하고 투명해서.”

“네, 되게 예쁩니다. 도련님 눈동자처럼.”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딱 굳었다. 그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 어 뭐…… 내 눈이 좀…… 보석 같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 그래서…… 산 건가?”

“네, 예뻐서.”

리카르디스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덮은 후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오갈 곳 없이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가판대 위의 또 다른 펜던트에 닿았다. 예쁜 페리도트색. 리카르디스는 부끄러워하던 것도 잊고 손을 뻗었다. 그는 옆에서 구경 중이던 로젤린의 얼굴 옆에 펜던트를 딱 붙였다.

“이건 네 눈 색과 비슷하다. 로즈.”

“아, 진짜네요. 예쁩니다. 제 눈도 예쁘니까요.”

로젤린이 상체를 기울이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했다. 머리를 덮은 후드의 끝자락이 닿을 정도였다. 축제를 다니는 내내 후드로 가려져 잘 보지 못했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여기저기 달린 등불로 인해 하얀 얼굴은 은은하게 빛났다.

리카르디스는 펜던트의 가짜 보석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았다. 가늘게 뜨고 있는 눈가가 떨리고, 눈썹은 찌푸려져 있었다.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입이 바짝 말라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래.”

로젤린이 눈을 휘며 웃자 그녀의 눈동자 안에 담겨 있던 등불들이 반짝거렸다.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붉히고는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주 예쁘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로젤린은 용케 알아들었는지 “그렇지요?” 하고 신나 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이 모든 광경을 네 발짝 뒤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니와 루루는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전하…… 가시밭길을…… 걸으시는…… 우리 가엾은 전하…… 그들은 눈물이 고여 반지르르해진 눈으로 자꾸 먼 하늘만 바라봤다. 아래를 봤다가는 뚝뚝 흘릴 것 같았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리카르디스는 지금 로젤린을 단순한 부하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도 못한 종류의 감정이 표출되고 있어 기사들은 억 소리도 못 내고 굳어 버렸다.

물론 리카르디스 혼자만의 얘기인 것 같긴 했으나, 그래서 더 문제였다. 리카르디스가, 2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짝사랑을 한다? 심지어 상대가 로젤린 에스터? 소설로 나와도 허황되다고 욕먹을 판에, 눈앞에서 목격하니 충격이 세 배였다.

거기에다가 화려한 언변은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어린애 소꿉놀이하듯이 이거 예뻐, 저거 예뻐. 이러고 있으니 가슴이 갑갑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하지만 소꿉놀이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는 필사적인 노력이 보였기에 신하된 자로서 기사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졌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로즈! 저기에 맛있는 거 있다!”

파르딕트의 외침에 로젤린이 한 마리의 표범처럼 거리를 달려갔다. 하니가 열 받아서 파르파르의 정강이를 깠다. 루루도 이 고래 새끼……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파르파르만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하며 까인 정강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 * *

로젤린은 혼자가 되었다. 대왕 꼬치를 발견해 양손에 떡하니 들고 흡족한 마음에 자랑이라도 할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리카르디스도, 같이 이것저것 잘 사 먹던 파르딕트도,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파도같이 밀려들었고, 로젤린도 어어 하며 밀려나 발길이 닿는 대로 이동해야만 했다. 로젤린은 좁은 골목 사이에 몸을 쏙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로젤린은 벽에 기대어 시무룩하게 쭈그려 앉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대왕 꼬치 두 개가 서서히 식어갔다. 그녀는 침울함에 젖은 얼굴로 우선 꼬치를 먹기로 했다.

후후 불어 베어 먹으니 한 조각만에 입안이 가득 찼다. 소스는 달콤하고 껍질은 타서 살짝 눌어붙은 부분이 있어 고소했다. 먹다 보니 저조했던 기분이 좀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로젤린은 입을 부지런히 놀렸다. 어서 먹고 일행을 찾으러 가야 할 듯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쏘아 다니는, 흥분 상태의 로젤린을 본 리카르디스는 미리 이 사태를 예견했으므로…….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로즈?]

[대광장의 분수 앞에서 기다립니다.]

[훌륭해.]

잃어버렸을 때의 목적지 또한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대광장의 분수. 로젤린은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목적지를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꼬치를 다 먹은 후 로젤린은 술에 취한 남자가 알려 준 대로 걸어, 대광장에 도착했다.

‘대광장?’

무척이나 클 것 같은 이름에 비해, 좁은 거리가 얼기설기 이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밤인 줄도 모르고 빛나던 여타 거리와 다르게 너무 어두웠다. 마치 이곳만 잠들어 있는 듯.

악기를 연주하고, 행복함에 푹 빠져 노래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불콰하게 물든 얼굴로 실성한 듯 웃고 있거나, 또는 살벌하게 인상을 구기며 거리에 새로 들어온 인물을 훑어볼 뿐이었다.

‘음, 대광장 아니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 암흑가의 입구에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알았겠지만 로젤린은 이미 중심부까지 들어선 상태였다. 이쯤 오니 로젤린도 모를 수가 없었다. 뱀의 대가리를 자르고 단검에 묻은 피를 날름 핥고 있는 남자는 암만 보아도 축제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도 있으니. 그런 곳은 안 들어가는 게 좋아 로즈.]

대충 여기가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뱀의 피를 핥는 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로젤린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도중, 아까 지나쳤던 가판대에 눈길을 빼앗겼다. 작은 유리병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는데 뭔가 알록달록해 예뻐 보였다.

“이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눈썹 한쪽을 추켜세웠다. 그는 로젤린이 거리로 들어 올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몸짓이나, 깔끔한 후드나, 걸음걸이가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저절로 눈길이 갔다고 말하는 쪽이 정확했다.

눈이 삐지 않은 이상 잘못 들어올 리 없으니, 아마 새로운 고객쯤 되리라. 하지만 그가 파는 품목 중, 돈깨나 쓸 것 같은 사람이 살 만한 물건은 없었다. 뒷골목에 나도는 것 중에서도 유독 싸구려였기 때문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약이지만 아가씨가 살 만한 약은 아니겠군.”

“맛있는 건가요.”

와 정말로 이 사람은…….

‘완벽하게 잘못 들어왔구나.’

새로운 고객도 아니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얼른 이 거리를 떠나시게. 아가씨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보름달이 성의 끝에 걸리는 축제 날. 암흑가라 하더라도 아주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상인이 친절을 발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눈치가 심각하게 없어 보이는 이 아가씨도 축제를 즐기러 나왔을 테니, 부디 불운이 빗겨 나가길 바라며.

그러나 상인의 경고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가 그랬듯이 거리 골목골목에 있는 남자들 또한 로젤린의 ‘맛있는 건가요.’ 발언으로 새로운 인물이 고객이 아님을 완전히 깨달았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약을 담은 유리병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거리에 들어올 때부터 따라온 집요한 시선들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로젤린은 물건을 구경한다고 어정쩡하게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남자들이 검집에서 무기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뱀의 피가 묻어 있던 단검을 핥은 남자도 다가오고 있었다.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후였으니. 빨리 정리하는 게 최선이다. 로젤린이 몸 안에서 마력을 대류 시켰다.

‘한 사람당 한 방씩이면…… 기절시키거나 다리를…….’

머릿속으로 살벌한 생각을 하며 로젤린은 거리를 쟀다.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 가판대 상인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이 좋은 날, 불행해질 여자의 미래가 빤히 보였다.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로젤린을 넓게 둘러쌌다.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이 가진 목소리보다 더 낮게, 위협적으로 “이봐, 아가씨.”라고 말하기 바로 직전.

“거기 잠깐.”

저 멀리서 로젤린을 둘러싼 무리를 향해 누군가 말을 꺼냈다. 남자들이 뒤를 돌아봤다. 로젤린도 고개를 돌려 이 긴박한 상황을 깨트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자였다.

로젤린은 곰곰이 남자의 목소리를 반추했다.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그쪽은 내 일행인데.”

남자들이 코웃음을 쳤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쪽이 댁의 일행이라고 우리가 얌전히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

남자는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 멈춰 섰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눈부터 코까지 덮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있지.”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무거웠고, 베일 듯 서늘했다. 그제야 로젤린은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 잠시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 편이 너희들에게도 좋을 거라.”

가면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을 보고 남자들이 움칠 몸을 떨며 몇 걸음 물러섰다. 머리가 세모난 검은 뱀이 그려진 가면. 남자가 말한 대로 건드려서 하등 좋을 게 없다는 뜻의 표식이었다.

서쪽 암흑가를 지배하는 큰손, 검은독사의 문양이었다. 남자가 그 문양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은 검은독사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건드렸다가는 피를 볼 게 분명했다.

남자들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아, 아이고. 저희가 귀한 분인 줄도 몰라 뵙고…… 하여간 거리가 너무 어두워서 헤헤…… 제가 항상 등불 좀 많이 걸어놓자고 건의를 하는데도, 참…… 사람들이 그러면 다른 거리랑 차별화가 안 된다고 그러지 뭡니까…….”

“내가 너희들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남자들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슬슬 멀어졌다.

로젤린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물약을 파는 상인의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이 패의 주인에게 전해라. 거리의 들쥐 때문에 내 기분이 몹시…… 상했다고.”

검은 독사가 그려져 있는 패와, 질 좋아 보이는 보석이었다. 상인은 화들짝 놀라며 그걸 소중히 품 안에 넣고 가판대를 버려 둔 채 어느 골목 구석으로 사라졌다.

방금 사라진 놈들을 잡아 족치라는 말이었으나, 로젤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로젤린의 앞에 멈춰 섰다. 한참 망설이던 그가 로젤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도 로젤린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맞닿은 온기에 로젤린의 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는 만약 자신이 남자의 정체를 몰랐다 하더라도 이 손을 뿌리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말없이 골목을 걸었다. 반쯤 무너진 판잣집과 안쪽이 보이지 않는 가게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그 수많은 공간에서 음습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시선은 로젤린 그녀를 향하기도, 남자를 향하기도 했다.

어두운 밤. 어두운 골목. 뚝, 뚝……. 어디선가 물이 떨어져 고이는 소리. 퀴퀴한 곰팡이 냄새, 주위를 맴도는 시선까지.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숨이 거칠게 일어나고,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만이 만드는 걸음 소리가 마구 불어나 뒤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아까의 남자들이 쫓아온 것인가? 로젤린은 주의를 기울여 골목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집중했으나, 여전히 두 사람의 걸음 소리 뿐이었다. 로젤린은 마력을 사용해 청각을 강화했다. 작은 촛불이 아롱거리는 수십 개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속삭였다. 저들은, 저 남자는. 오래된 손님이. 여자를 건드려서는, 정체는? 사람들이 로젤린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여러 말이 겹쳐져 온전한 문장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 두루뭉술한 언어들이 뾰족하게 날카로운 형태를 띠고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마요.”

서릿발 같던 아까와 달리, 다정한 목소리였다. 마치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남자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고.”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누구도 당신을 위협할 수 없으니.”

온기가 묻어 있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제 안에서 서서히 조여 오던 기묘한 감각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가시처럼 곤두서 있던 신경과 거칠어졌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로젤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웃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남자는 잡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로젤린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어서 로젤린은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웃고는 다시 걸었다.

남자는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로젤린이 한참 헤맨 복잡한 거리를 금세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의 끝과 밝은 거리가 만나는 곳에 잠시 멈춰 섰다. 한 걸음 밖에, 로젤린이 찾고 있던 축제의 등불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가 가면을 벗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둠에 잠겨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본연의 빛을 되찾았다.

“저는 일이 있어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오늘 이곳에서 만난 건 비밀로 해 줄래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에게 혼나기 전에 디에즈와 만났다는 화제로 시선을 돌리려 했던 터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가 대충 로젤린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웃었다.

“길을 잃어버렸었거든요. 창피하니까 비밀이에요.”

길을 잃어버린 또 다른 사람으로서 로젤린은 자신이 창피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었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비밀.”

디에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무언가를 되짚었다. 그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그녀에게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거기 있었죠?”

언제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었다. 만남부터 지금까지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걸 보면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리카르디스 전하도 기사들더러 애칭을 사용하고 그 자신도 도련님 행세를 하지 않았던가. 로젤린은 디에즈 또한 그런 거라 생각하며 그의 이름과 정체를 말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일행을 만나려 사람들에게 물어서 대광장에 가려고 했습니다. 저도 길을 잃었나 봅니다.”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축제 날에 술 취한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어요. 그렇다 쳐도 완전히 다른 방향이긴 하군요. 이 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대광장이 나와요.”

디에즈는 문득 불안했는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누가 말 걸면 따라가지 말고, 한눈팔지 말고 곧장 가세요.”

성을 나올 때에 상급 기사들과 리카르디스, 잇세리온에게 번갈아 가며 들었던 경고 문구였다. 로젤린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드렁한 반응에 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맛있는 건 일행들 만난 다음에 사 먹고요.”

“네.”

정말 이렇게 믿음이 안 갈 수가!

불안해하는 디에즈를 뒤로하고, 로젤린은 가방 안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로젤린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로 향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사탕, 축제에 여성들이 쓰고 다니는 하얀 레이스 베일, 사냥용 올가미, 아이들 용 나무 단검, 먹다 남은 빵까지. 축제를 즐겨도 너무 즐긴 듯했다.

로젤린은 그 중에서 하얀 레이스 베일을 꺼내 들었다.

“여기요. 선물입니다.”

디에즈는 눈을 크게 뜨고는 베일과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선물을 받았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디에즈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데, 기쁨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선물을 줬을 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왜 저에게 이걸…… 주는 겁니까?”

로젤린은 눈알을 굴리다가 의문형으로 대답을 했다.

“잘…… 어울리실거 같아서?”

그냥 딱히 별 이유가 없었기에, 아까의 말을 그대로 답습했다.

“잘 어울리면 아무에게나 선물을 줍니까?”

선물을 줬더니 추궁을 받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웃지도 않고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당황했다. 어, 왜 선물을 주냐면…… 잘 어울리면 아무에게나 선물을 주냐면…… 그건 아니지만…….

“제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면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니깐.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무섭게 추궁할 때는 언제고 대답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하얀 베일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도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나?

“난…….”

디에즈가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 기쁩니다.”

만난 지 몇십 분이 지난 지금에 하기는 늦은 감이 있는 데다, 나누던 대화에서 어긋나 생뚱맞기까지 한 말이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저도 당신의 무사한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습니다!”

디에즈가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레이스 베일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피곤에 지친 사람이 침대에 기대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디에즈와 헤어진 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광장에도 먹을 것을 파는 상점과 가판대가 즐비해 있었다. 로젤린은 디에즈의 걱정 그대로 노점 음식에 눈을 빼앗겼다.

리카르디스 및 동료들과의 재회는 그렇게 멀어지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생태를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던 리카르디스 덕에 그녀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상급 기사들을 줄이 가장 길게 서 있는 음식 상점마다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로젤린이 ‘줄을 선 집’을 ‘맛집’으로 동일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고기 맛집 앞에서 로젤린은 파르딕트에게 딱 걸려서 잡혀 왔고, 모두에게 둘러싸여 혼났다.

“로즈!”

파르딕트가 허리에 손을 얹고 왁 소리를 질렀다.

“전…… 도련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이 녀석!”

로젤린은 입만 쭉 빼고 툴툴거렸다. 잘못한 것은 있으니.

“주인 잃은 개마냥 어찌나 불안해하시는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

부적절한 표현 때문에 파르딕트는 르원에게 걷어 차였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아, 자는 건가 싶을 정도의 평온한 얼굴이었음에도 로젤린은 힐끔힐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친 곳은?”

몰래 훔쳐보던 중 리카르디스가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내서 로젤린은 화들짝 놀랐다. 곧 그가 말한 내용을 반추한 그녀의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서렸다.

‘분명 혼날 때인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담담했다.

“……없습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뜨고 로젤린에게 다가왔다. 그보다도 키가 큰 사내들이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위협했을 적에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그녀에게 밀려왔다. 혼난다! 완전 혼난다!

“……그 의심의 눈빛은 뭘까. 아무튼 다친 곳이 없다니 그건 다행이군.”

앗, 오늘의 전하는 굉장히 상냥하다! 로젤린은 풀 죽었던 강아지의 탈을 벗어 던지고 방긋 웃었다.

“그렇다면 로즈. 헤어진 사이에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였거나, 혹은 치안대가 주목할 만한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나?”

싸움 직전까지는 갔지만, 직접적으로는 싸우지 않았으니까…… 말 안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없습니다!”

활기찬 대답에 리카르디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천천히 뒤로 젖혔다.

‘진짜로 없기는 한 것 같군…….’

리카르디스는 로젤린과 떨어진 이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떨어져 있는 내내 그는 눈을 뜨고도 악몽에 시달렸다. 로젤린이 소동을 일으키거나, 혹은 사건에 말려들거나, 또는 치안대를 패는 장면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상상 속 로젤린이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의 공통된 점은, 마지막은 항상 그녀가 감옥 안에 갇힌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수를 헤아려 놓아야 실제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으므로, 로젤린은 그의 머릿속에서 세 번쯤 반역자가 되었고, 다섯 번쯤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눈앞에서 히히 웃고 있는 로젤린을 보니 그제야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로젤린을 혼내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놓쳐? 그것도 먹을 거 때문에? 내가 음식만도 못하나? 나야, 먹을 거야! 하며 그녀를 들들 볶아 댔다.

그렇지만 파나 채소가 끼워져 있지 않은,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대왕 꼬치가 그녀를 현혹시킨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리카르디스는 “아, 그건 확실히…….”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양이 나무에 취해 버린 고양이처럼, 꽃에게 날아가는 나비처럼 홀렸으리라. 그쯤 되면 한눈을 판다기보다는 본능의 영역이 아닐까.

시무룩한 로젤린이 과일주를 마시고 다시 활기를 되찾았을 때였다.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광장의 정중앙, 설치된 단상 위에 하얀 예복을 입은 남자가 올라왔다. 옷의 차림새와 목걸이의 모양이 남자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대륙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 중 한 명이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거나 깔끔하게 정리한 타 신관들과는 겉모습부터가 좀 달랐다. 등불로 인해 금발같이 보이는 옅은 분홍색 곱슬머리는 부스스하게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헐렁해 보이기도, 거꾸로 입은 것 같기도 한 엉망인 옷매무새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예복인지 하얀 커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대신관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성전을 뒤적였다. 덕분에 모자도 더 삐뚤어졌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이 든 사람처럼 느릿했다. 하지만 환한 단상 위의 대신관은 스무 살이나 겨우 채웠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신관이 되기 위해서는 성력의 양도 중요했지만, 신의 믿음 아래 얼마나 오래 수련했는지 또한 무시할 만한 항목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 젊은 대신관은 아주 어릴 때 신전에 들어갔거나, 또는 세월을 무시할 만큼 뒷배가 단단하다는 얘기였다.

로젤린을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라헤안시 대신관님이 설교를 맡으신 모양이군요.”

설원의 월계수. 그 이름을 버린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4황자. 라헤안시였다.

하얀 밤과 관련된 국가 행사에는 항상 대신관들이 참가했다. 올해의 ‘그림자 없는 밤’은 라헤안시가 맡은 모양이었다. 황자 출신의 대신관이라지만, 늙은 대신관들의 압박을 피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성전 글귀를 읽어 주는 것이나,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 역시 신관의 일이었다. 하지만 귀족들과 달리 평민들에게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글을 모르니 성전을 줘도 소용없고, 내용도 이해 못하니 풀어 설명해 줘야 했다. 주머니에 은근슬쩍 찔러 주는 금은보화도 없으니, 이런 곳에 기꺼이 오겠다 하는 대신관이 있을 리가.

항상 인상을 찌푸리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을 숨길 시늉도 안하는 신관들을 보아 온 탓인지, 사람들은 라헤안시의 한껏 풀어진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귀한 대신관이 거리에 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다는 기색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누구에게든 저놈은 원래 나무늘보 같은 인간이라며 설명하고 싶었다. 도통 그럴 방도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만이라도 빠릿빠릿하게 굴면 안 되는 건가?’

라헤안시가 한쪽 손을 들었다. 조용하던 군중들이 한층 더 숨을 죽였다.

“어허어 보자 보자, 보름달이 일라베니아의 성 끝에 걸렸으니 이로써 그림자 없는 밤이 찾아왔도다, 백성들이여.”

리카르디스가 눈을 찡그렸다.

“……말투가 왜 저 따위지?”

리카르디스의 싸늘한 반응과 다르게, 광장의 사람들은 “오오……!” 하는 작은 함성과 함께 모두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와 기사들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굴욕적이었다.

“태초에 혼돈,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만이 세상을 메우고 있어 풀 쪼가리 하나 자라지 못했노니, 그 혼돈을 물러 내고 빛을 가져온 자가…… 누구?”

라헤안시는 성전을 대충 읽다가 귀 뒤에 손을 가져다 대며,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대답을 촉구하는 모양새 때문에 광장이 술렁였다. 매년 있는 그림자 없는 밤이지만 이런 설교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망설이는 게 보이자 라헤안시가 다시 “외쳐 봐, 누구!” 하고 얘기했다. 군중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이, 이델라브힘……. 하고 얘기했다.

“안 들리는구나 더 크게! 누구라고!”

“이델라브힘!”

“그렇다 이델라브힘이시다. 맨 처음 대답한 소녀여. 아주 영특하구나 상으로 성전을 주겠다. 금박이 붙어 있으니 갖다 팔면 돈이 꽤나 될 것이다.”

라헤안시의 뒤로 성수를 들고 있던 평신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세히 보니 관자놀이가 씰룩거리고 있었는데, 여간 골치가 아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단상과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소녀는 성전을 건네받고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눈동자만 굴렸다. 정말로 넘길 줄이야.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봤다. 미친놈…….

“이델라브힘께서 빛의 권능으로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을 걷어 내자, 비로소 세상이 보였나니. 세상이 이델라브힘의 빛을 보았노니.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려야 마땅하겠느냐?”

“이델라브힘!”

“그렇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구나, 백성들이여. 심각하게 똑똑하니 내 마음이 심히 흡족하도다.”

다들 입을 모아 이델라브힘의 이름을 외치는 광경이 아주 장관이었다. 라헤안시는 보슬보슬한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계속 말했다.

“그러나 크레안 티다니온도 원래의 세계를 가지고 있던 강력한 신이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은 사흘 밤낮을…… 아, 이 사흘 밤낮은 그저 표현상으로 집어넣은 말이니 괘념치 말라. 여하튼 그렇게 싸우고 싸웠으나 이 신들의 전쟁은 완벽한 승자와 완벽한 패자가 없이 끝나고 말았으니……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낮과 밤이다. 이델라브힘이 관장하는 낮과 혼돈의 장막이 덮이는 크레안 티다니온의 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신관들이 외워서 읽어 주는 문구들은 그들이 아는 단어로만 이루어져 어렵기 마련이었다. 글자를 좀 알고 배운 자들도 골머리를 썩어 가며 해석해야 하는 것이 성전인데, 라헤안시의 얘기들은 다소 약장수 같고 불경한 감이 있지만 귀에 쏙쏙 들어왔다. 다른 대신관과 황족들이 알면 기함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면 매년 찾아오는 그림자 없는 밤이 무어냐! 그것은 우리의 이델라브힘께서 최초로 밤을 빼앗은 날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힘. 성력이 극으로 치닫는 날, 밤의 장막은 사라지고, 온 세상이 축복의 빛으로 뒤덮이노니.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성전에는 이 축복의 밤은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 되어 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그 방증이라 한다. 으음 뭐…… 솔직히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평신관들이 또 뒤에서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잘나가다가 꼭 한마디를 덧붙여서…….

“아무튼 그리하여, 이델라브힘의 축복은 독수리와 함께 뭐, 호수로 내려와서 일라베니아 초대 황제 폐하께 뭐, 그 축복의 밤을 열 수 있는 권능을 주셨나니, 어허…… 이 부분부터는 내가 영 재미가 없어서……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대충 그리 알면 된다. 우리 황제 폐하 만만세다.”

“…….”

어떻게 뒷감당하려고 저러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저 배짱 두둑한 대신관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그는 제국의 2황자라는 지위 때문에 갖은 행사에 불려 다니는 몸이었다. 신성 제국의 특성상 행사는 신전이 엮여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지루한 설교 시간 또한 많이 접해 보았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이델라브힘의 뜻을 따르고 그의 축복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것이 신관이었으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영광은 이델라브힘보다 일라베니아의 황제에게 더 치우쳐 있었다.

신성 제국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위대한 신. 그러나 그 신에게 선택받은 황제가 더 위대하다. 신은 멀리 있고. 인간인 황제는 가까이 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교묘하게 인간인 황제에게 돌아가게끔 교육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정반대로 일라베니아의 위업을 대폭 줄이다 못해 거의 삭제해 버리기까지 했으니. 누군가가 이 설교를 문제 삼는다면 라헤안시에게도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일라베니아 제국력 589년. 대신관 라헤안시가 자비로우신 이델라브힘을 대신하여 그대들을 축복하는 바. 헐벗은 자에게 벗어 주고 굶주린 자에게 제 먹을 것을 내어 주란 말은 안 할 테니 나쁜 짓 하지 말고 건강하라. 이상 땡땡 끝이다. 자, 해산!”

라헤안시는 대충 손을 저으며 설교를 끝냈다. 그리고는 목이 타는지 평신관이 들고 있던 접시의 성수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졸지에 빈 접시를 들고 있게 된 신관의 표정이 볼 만했다.

“아, 아차. 맞다 맞다. 이 항아리에 내 축복을 담은 물이 있으니 한 모금씩 먹고 돌아가거라. 만병통치는 아니지만 감기 정도는 낫게 해 줄 터이니. 어허, 새치기하는 나쁜 아이에게는 줄 수 없다.”

단상을 쭉 둘러싼 큰 항아리들에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사람들은 설교가 끝났음에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성수라는 말에 눈망울을 반짝였다.

신관과 성 기사들의 무서운 눈빛 아래, 사람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성수를 마셨다. 신전에 헌금을 어지간하게 많이 내지 않는 이상에야 성수는 쳐다볼 수도 없는 귀한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집안에 아픈 사람들을 데리러 가는지 분주하게 광장을 빠져나갔다.

기사들은 짧지만 폭풍 같았던 설교를 반추하며 입을 여전히 다물지 못했다.

“괴, 굉장해.”

그 굉장하다는 말이 과연 좋은 쪽에 속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리카르디스는 그의 말에 동감했다. 굉장한 미친놈이었다.

하지만 단상을 둘러싼 저 수많은 항아리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와 엘피디오 다음으로 성력이 강한 편이었으나, 저 항아리들을 모두 성수로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몇 주동안 꼬박꼬박 만들고 모아 둔 것이 아닐까.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는 태도에 비하면 만민을 굽어 살피는 훌륭한 신관의 자세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고는 광장을 떠났다.

거리의 사람들은 성수를 먹었느니, 안 먹었느니. 그림자 없는 밤이 무엇인지 아느냐며 와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축제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잠시 사라졌던 로젤린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성수를 먹어 보고 왔다고 얘기했다. 특별한 맛을 기대한 것 같은데, 그냥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었다며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로젤린은 길을 잃은 전적이 있었던 터라, 또 자리를 함부로 비웠다고 혼났다.

‘아니 근데…… 성수를 먹어?’

먹어도 되는 거야?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절단이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 리카르디스는 ‘파편’에 중독되고 큰 부상을 입었던 로젤린을 치료할 때 한계까지 성력을 쏟아부었었다. 그때야 그저 로젤린의 정체를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고, 정확히 아는 게 없어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으나…….

생각해 보니 돕기는커녕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성력과 마력이 간섭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 불안정한 상태에 다른 종류의 힘이 들어갔을 때의 작용은 알지 못했다. 무지가 해악은 아니나, 다소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로즈. 잠시만 손을…….”

리카르디스가 손을 내밀자 로젤린이 그 위로 손을 탁 얹었다. 커다란 개가 손을 불쑥 내미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리카르디스는 곧 정신을 차리고 본 목적으로 돌아가 성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제 힘을 가르며 들어오는 성력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몸을 떠돌던 성력은 중간중간 어떤 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리카르디스는 그것이 마력일 것이라 추측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성력이 로젤린에게 조금 스며들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으로 흡수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녀 또한 성력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이는 몸으로 변화를 한 것 같았다.

마력과 성력의 만남은 아주 기묘했다. 물과 기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섞이지 않는 성질이지만, 서로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아직까지는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못한 존재였다. 일반적인의 상식을 온전히 기대하기에는 불안한 부분이 많았다. 정보가 필요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힘. 성력과 마력의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리카르디스는 성력과 마력을 연구하는 기관의 이름을 아주 잘 알았다. 그 기관의 이름은 신전이며, 연구자들은 신관이다. 그리고 대신전은 그 모든 정보들이 총망라된 집합체다. 대신관이라면 아마 황태자 위에 오르지도 못한 황자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라헤안시…….’

조만간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로젤린의 손을 꼭 잡았다.

“……길을 또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굉장히 현실감 있는 변명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의 옆에 바싹 붙어 걷다가 잡혀 있는 손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도련님의 손은 굉장히 크네요. 멋있습니다. 손가락도 길고.”

로젤린이 잡혀 있지 않은 손으로 리카르디스의 손등과 손가락을 덧그리듯 톡톡 두드렸다. 리카르디스의 귀 끝이 빨개졌다. 이후에 후드 자락을 슬쩍 들어 손에서 이어지는 팔목 라인을 은근히 과시하는데 르원은 차마 그 광경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했다.

모두 천천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중, 눈치 없는 파르파르가 “다들 이렇게 느려서 호위하겠어?”라는 망발을 내뱉었다. 파르파르는 하니에게 매우 혼났다. 육지로 올라왔으면 좀 인간 흉내라도 내란다. 언제까지 고래로 살 거야! 이어서 루루가 너무 진심으로 화내서 파르파르는 굉장히 시무룩해져 버렸다.

* * *

로젤린이 레이몬드와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찾아와 머뭇거리다 털어놓았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 보다 환하게 웃었다.

“아, 정말 축하합니다. 정말 잘됐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정말.”

‘정말’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엄청난 축하였다. 전(前) 수습 기사들은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에버하르트는 너무 울어서 말도 못할 정도였고, 레티시아도 마찬가지로 엉엉 울며 로젤린을 얼싸안았다. 에버하르트도 은근슬쩍 안기려고 했지만, 레티시아가 그의 발을 거세게 밟아 무산시켰다.

발타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만큼 공석도 늘어났다. 제국의 2황자라는 지고한 신분이기에, 애도의 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영지에 있는 동안 추모식과 승단식이 모두 끝났다.

슬픈 일이 있었지만 기쁜 일도 있었다. 몇 년째 수습 기사에서 머무르던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가 드디어 승급한 것이다.

하급 기사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다. 기본적인 지식과 예법 등의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숙사에서 받는 벌점이 기준보다 낮아야 하는 것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검술 실력이었다. 기초적인 체력 검사, 평소 검술 교관의 평가와 수습 기사들끼리의 대무까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그 까다로운 승단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로젤린 대신 그 승급 심사를 지켜본 레이몬드의 말에 따르면 에버하르트는 마치 다람쥐같이, 레티시아는 마치 표범같이 상대의 공격을 피해 냈다고 한다. 어찌나 날랜 솜씨인지 부단장 나단 경이 눈여겨볼 정도였다고.

“저는 공격을 피하는 능력만 좋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글쎄 상대방의 공격이 다 보이지 뭡니까. 로젤린 경이 저희들을 보는 기분이 그랬을까요?”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이 “네.” 하고 정직한 대답을 해도 바보처럼 웃었다. 정식 단원이 되었으며, 또한 봉급도 받고 이름뿐이지만 작위도 하사받았다.

뿌리 출신인 에버하르트는 더욱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레티시아도 가난한 영지의 아가씨였던 터라, 봉급의 얘기를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동생들에게 괜찮은 드레스를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작 그 여동생들은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모양이지만, 언니 마음은 또 다른 듯했다.

로젤린은 수습 기사들을 받아들인 이후 곧바로 제작했었던 검 두 자루를 그들에게 선물했다. 승급한 수습 기사들에게 스승인 상급 기사가 검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라는 레이몬드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받은 검을 더듬었다. 레티시아가 검을 들어 허공을 천천히 그었다.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유명한 장인이 그들이 선호하는 검의 형태와 무게, 손의 크기까지 고려해 만든,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고려하는 세심함은 로젤린이 아닌 레이몬드의 결과물이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스승의 은혜에 가슴이 사무쳤는지 눈물을 재차 쏟아 낼 뿐이었다. 눈알이 흐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어서 로젤린은 매우 당황했다. 기쁜데 왜 울지. 우는 그들을 붙잡고 물어봤더니 너무 기쁘면 눈물도 나온다며 에버하르트가 필담으로 알려 줬다.

아, 그래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그럼 매우 기쁜 거로군요. 로젤린은 흡족해하며 눈물을 더 흘리라고 권유했다. 우십시오. 더 우세요. 마음껏.

그 눈물의 현장 뒤에서 레이몬드가 머뭇거리며 “그, 그 검 말이야, 그거 내가…….” 하고 말하려 했지만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엉엉 우는 소리에 묻혔다. 그 뒤에도 “내가, 그걸!”이라든가, “그 장인에게 아무나 부탁 못하는데 말이야……!” 따위의 시도가 있었으나 역시나 두 하급 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결국 시무룩한 얼굴로 차만 홀짝였다.

하급 기사가 된 수습 기사들은, 상급 기사의 지도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자와 스승이 아닌 동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관계의 형태를 다시 쓰게 되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식으로 기사가 된 만큼 임무를 배정받아, 하루 종일 상급자를 따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기사가 되면 기사로서 일 인분은 하게 된 것이라 으쓱하게 되어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전과 같이 로젤린을 따르겠노라 자청했다. 임무를 제외한 시간을 그녀를 위해 쓰겠다고 얘기했고, 로젤린은 기뻐서 펄쩍 뛰며 그들을 한 번씩 안아 주었다. 몇 달 되지도 않은 인연의 끈이 질기기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발전했지만 부족한 부분도 많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보도록 하죠, 우리.”

두 사람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섬칫한 기운에 잠시 몸을 떨었다. 살짝 미친 짓 하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괘, 괜찮겠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소리 없이 시선을 주고받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로젤린의 편의를 돌볼 것이라 해도,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수습 기사가 더 필요하긴 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수습 기사들이 단련하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승급한 수습 기사들보다 새로 들어온 자들이 훨씬 많다더니, 너른 연무장이 꽉 찰 정도였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자들이 기사랍시고 등을 꼿꼿이 한 채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와 로젤린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시선은 로젤린에게 쏠려 있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연무장이 우렁차게 울렸다. 레이몬드가 피식 웃었다. 황제 폐하가 와도 저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편하게들 쉬도록 해.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될 만한 인재가 있는지 둘러 볼 뿐이니.”

편하게 쉬라는 레이몬드의 말은 그들의 반대쪽 귀로 흘러 사라졌다.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될 만한 인재?’

다들 잠시간 술렁이다 야욕이 넘치는 표정을 하고는 멋진 폼으로 검을 휘둘렀다. 너무 예상한 반응이라 웃겼다. 레이몬드는 혼자서 흐흐흥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엽게 놀기는, 병아리들.

선망, 존경, 호기심, 탐구.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시선들이 로젤린을 떠돌았다. 로젤린은 햇빛을 받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나른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이 열의에 가득 차서 검을 휘두르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하건 관심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근데 레이몬드.”

“왜 로젤린. 아, 쟤 봐라, 옷 벗는다. 너한테 복근을 보여 주려는 모양인데.”

레이몬드가 가리킨 남자는 아직 성장 중이긴 하지만 제법 잘생긴 축에 속하는 수습 기사였다. 은근한 눈빛을 하며 윗옷을 천천히 벗어 재끼는데, 마을 처녀들이라면 꺅꺅 소리 지르며 볼 만한 몸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젤린은 마을 처녀가 아니었고, 이 직장은 갑옷 같은 근육을 가진 자들이 돌멩이보다 흔한 곳이었다. 수습 기사의 몸은 마치 두부 같아 보일 정도의.

“지원서 안 받았잖아. 나한테 지원한 애들 모아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정도 복근이라면…….”

로젤린은 제복을 슬쩍 까서 제 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것이 더 훌륭해. 레이몬드가 식겁해서 그녀의 제복 상의를 얼른 내렸다.

“로, 로, 로젤린! 밖에서 그러면 안 돼!”

“쟤는 윗옷 아예 벗었잖아.”

레이몬드는 저놈이 잘못한 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 너! 어디서 기사가 단정하지 못하게 옷을 벗어! 일주일 근신이다!”

근육을 자랑하던 수습 기사는 축 쳐져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 나도 안 되고 쟤도 안 되는 거였어? 합리적인 결말에 로젤린은 수긍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어디까지 했더라.”

“지원서.”

“아, 그래. 지원서. 그건 딱히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서. 다들 네 수습 기사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을걸? 지금 네가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는구나?”

“내가 유명해?”

로젤린이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고 올려봤다. 레이몬드가 흐흐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와락 안아 어깨동무했다.

“그럼. 멋지게 리카르디스 전하를 구한 강한 기사 로젤린! 다들 널 좋아하고 존경하니까. 적당히 보고 너…… 내 수습 기사가 되어라…… 하면 다들 황송해하면서 네 발밑에 몸을 던질 거야.”

로젤린은 다들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대목에서 크게 감명 받은 눈치였다. 예전에 레이몬드에게서 “너…… 친구…… 나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게 충격이었던 만큼 기쁜 듯했다.

로젤린은 주위를 쭉 둘러봤다. 여자 기사, 남자 기사 할 것 없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쩐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생각나는 눈동자들이었다. 로젤린은 히죽 웃었다.

“기분 최고야.”

레이몬드도 그녀와 마주 보며 와하하 웃었다. 우리 로젤린 인기 많은데? 대단한데? 하고 빤히 보이는 식으로 추켜세워 줘도 굉장히 으쓱해했다.

두 사람은 연무장을 한참을 더 돌아다녔다. 레이몬드는 검을 휘두르는 수습 기사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고, 로젤린은 수습 기사들과 일 대 다수의 대련을 했다. 그녀와 대련하던 수습 기사들 중 세 명이 기절해서 실려 나간 이후, 로젤린은 검술의 시범만 보였다. 부단장의 부관과 유명한 상급 기사가 지도해 주니 다들 의욕이 충만해서 열심히 배우려 했다.

눈치 보며 머뭇거리던 수습 기사들도,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마카롱이 내려오는 것을 기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로젤린 경의 유명한 애완동물, 마카롱 경이 아닌가!

“와, 마카롱 경!”

“진짜 크다!”

“멋있어!”

“독수리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마카롱은 고개를 하늘 쪽으로 뻗는다던가, 날개를 한쪽을 슥 들어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수습 기사들에게 멋진 자태를 뽐냈다. 주인이나 애완동물이나 참 사람 좋아하는 애들이야……. 레이몬드는 흐릿하게 웃었다.

너른 연무장을 꽉 채우던 수습 기사들은 로젤린과 레이몬드의 근처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 때문에, 홀로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는 소년이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몰랐다. 마카롱의 날개깃을 쓰다듬던 로젤린도 소년의 존재를 눈치챘다. 산딸기로 만든 와인과 비슷한 예쁜 머리색을 가진 소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화들짝 몸을 떨었다. 열렬하게 쳐다볼 때는 언제고, 그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알아챈 로젤린이 도리어 놀랍다는 듯, 어린 얼굴에 경외가 서려 있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묵례했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만지기 전에는 마카롱 경, 만지는 걸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물은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만져야 된다고…… 어허어 마카롱 경! 그러면 못써! 후배들의 실수는 사랑으로 감싸 줘야지!”

레이몬드는 수습 기사 한 명을 공격하는 마카롱을 말리던 중 로젤린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 방향을 따라가니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 보였다.

“왜 그래, 로젤린.”

“쟤는 이름이 뭐야?”

아무리 하얀밤 기사단을 관리하는 자 중 한 명이라지만, 그 수많은 수습 기사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소년의 이름을 바로 떠올려 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애들 중 몇 안 되는 뿌리 출신의 헤사. 검술은 좀…… 많이 약하지만 박투에서는 두각을 보이더라고. 기본적인 전투 감각이 뛰어나서 선발됐어.”

수습 기사, 헤사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송이 들꽃이 들려 있었다. 수많은 수습 기사들을 헤치고 그녀의 앞에 선 소년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이고 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귀 끝이 발개져 있었다.

“이 꽃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로젤린 경?”

레이몬드는 당황했다. 이렇게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뇌물을 바치다니, 배짱이 대단한 놈이 아닌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이 건넨 꽃을 받았다.

꽃 줄기가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자 헤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귀 끝부터 퍼져 나간 붉은 기운이 온 얼굴을 물들였다. 소년은 불에 덴 것처럼 허둥지둥, 몸 둘 바 몰라 하다가 곧 결의에 찬 눈동자로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로젤린의 얼굴에 미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동시에 레이몬드의 팔 위에 앉아 있던 마카롱도 헤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소년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장박동과 함께 세차게 마력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최근 수없이 겪었던 검은달의 마력처럼 검붉고, 난폭하게 변질된 것이 아니었다. 색으로 친다면 순수한 검정. 티 하나 없는 완벽한 암흑. 고요한 힘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소년이 가진 마력은 로젤린의 것과 흡사했다.

로젤린의 떠나지 않는 시선에 헤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수습 기사들의 지도 및, 마카롱 경이 멋진 자태를 뽐내던 상황을 가르며 들어온 꽃 한 송이의 파급력이었다. 이 이상하고도 어색한 기류라니. 심지어는 헤사를 바라보는 수습 기사들의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슬쩍 눈치 보다가 연극하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로, 로젤린 우리 이제 슬슬 돌아갈까? 수습생들은 다음에 둘러보고?”

아, 수습생. 그러고 보니 수습 기사를 뽑으러 온 거였지. 로젤린은 본래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헤사를 향했다. 레이몬드가 다들 네 수습 기사가 되기만을 바랄 것이라며, 지원서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적당히 고르기만 하라고 했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돌아가자는 제 말에 그녀가 답한 줄 알고 반색했지만, 로젤린은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고,

“너, 내 수습 기사가 되어라.”

라고 말했다. 백 명에 달하는 수습 기사들이 있는 거대한 연무장에는 바람이 지나는 소리만 흘렀다. 바보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사가 로젤린이 말한 한참 뒤에 화들짝 놀라더니 입을 가렸다.

웃는지 우는지 놀랐는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하던 소년이 떨리는 몸짓으로 무릎을 완전히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었다. 주인에 대한 종의 경외에 모두가 상황을 깨달았다. 침묵이 깨지며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도 입을 떡 벌렸다. 아까 자신이 말한 “다들 황송해하며 네 발밑에 몸을 던질 거야.”의 완벽한 표본이 아닌가! 그건 비유였지 실제로 일어날 상황을 예견한 게 아니었는데!

* * *

레이몬드와 로젤린, 헤사는 자리를 옮겼다.

헤사는 방에 들어와 앉으라는 말을 들은 이후 줄곧 그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올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레이몬드는 신경 쓰였다.

“……자리에 앉는 게 대화하기에 용이하지 않겠나?”

헤사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허둥지둥하며 비어 있는 의자에 얼른 착석했다. 레이몬드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미간을 문질렀다. 예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뿌리 출신이기까지 하니.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서 소년이 자라난 환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 노예는 불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예 취급당하는 자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으므로.

소년의 성장배경이 안타깝기는 했으나, 수습 기사를 동정심으로 뽑을 수는 없었다. 공은 공, 사는 사. 레이몬드는 부러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상급 기사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는 수습 기사는 상급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훨씬 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충분히 인지한 것이 맞나?”

레이몬드는 이 소년이 로젤린을 보필하기에 부족해 보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헤사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서 손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아래만 쳐다보았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수습생이 상급자의 명예나 체면을 훼손하는 경우를 바라지 않는다. 이번의 돌발 행위도 포함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신중히 행동하라. 비록 정식 서임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얀밤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모든 언행이 본인만의 책임으로 끝나지 않음을 항시 기억해라.”

헤사는 고개를 더 푹 숙이고 아래 입술을 물었다. 눈동자가 반지르르해지고 눈 밑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로젤린 경은 어떻게 생각하지? 헤사 수습생이, 에버하르트 경과 레티시아 경의 공백을 충분히 메울 수 있을 것 같은가?”

못 메울 것 같지? 얘 하지마. 레이몬드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로젤린이 헤사를 바라보았다. 힐끔 눈치 보던 소년이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귀 끝이 또 빨개져 있었다. 로젤린이 빙그레 웃었다.

“모르면 배우면 됩니다.”

“누구한테……?”

레이몬드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배우라고 지금?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에게.”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그들 또한 임무가 있어서 수습생의 교육에 온전히 힘을 쓸 수 없다. 정말 괜찮겠나?”

아, 얘는 진짜 아닌 거 같아 로젤린. 다시 생각해 봐. 레이몬드가 또 표정으로 얘기했다.

“예. 괜찮습니다.”

로젤린의 말에 헤사가 고개를 들었다.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소년은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슥슥 문지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고집이 쉽게 꺾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일어섰다.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으로 헤사를 훑기는 했으나, 로젤린의 선택에 더 이상 입을 대지 않았다.

“하여간 고집불통. 내가 너 강아지 같은 거 몰래 주워 올 때부터 다 알아봤어.”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볼을 쭉 늘어트렸다.

“안 즈어앗어.”

“기억 못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거든, 로젤린.”

‘로젤린’이 강아지를 주워 오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혼나서 지금의 로젤린은 몹시 심통이 났다. 레이몬드가 딱딱하던 말투와 기세를 바꾸자 헤사가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수습생. 잘해라.”

“네!”

레이몬드가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고 나갔다. 헤사가 떠나는 레이몬드의 뒷모습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되, 된 건가?’

헤사는 자신이 꿈에서도 바라 왔던 일이 일어났음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꽃을 선물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꽃을 포함한 자신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헤사는 귀족들의 세계에서 ‘뿌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위명이 높아진 만큼 이번에 들어온 수습 기사들의 수준과 지위도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어느 대단한 가문의 누구.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그 어마어마하고 대단히 고귀한 사람들 사이, 뿌리 출신은 단 네 명뿐이었다. 백 명이 넘는 수많은 자들 중, 단 넷. 이 숫자가 ‘뿌리’ 출신에 대한 취급을 어느 정도나마 나타내고 있다 말할 수 있었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운이 좋아 꽃다발 사이에 끼어 들어온 뿌리 한 줄기. 딱 그 정도.

신분의 벽이 높으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나, 헤사는 입단 후에 그걸 더 뼈저리게 체감했다.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부풀어 떠올랐던 가슴은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찔리고 찢어져, 서서히 가라앉았다.

헤사는 늘 그랬듯 모든 기대를 내려놓았다. 사실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세간에 떠들썩한 그 무용담의 주인공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을 뿐.

그러나 수습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커다란 독수리의 비호를 받고 있는 로젤린을 본 순간. 헤사는 저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습 기사가 된 이후였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야.’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

2황자 리카르디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과 마인이라는 사실이 대두되며 로젤린은 큰 화제를 모았다. 헤사의 동기 대부분이 그녀의 수습 기사가 되길 바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로젤린 또한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수상한 뿌리 출신은 휘하에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단순히 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얕은 동질감 하나로 자신을 허락한 것인가? 물론 그러길 바라서 마력을 운용했으나, 솔직히 통할 거라고는 일말도…….

“헤사.”

“네!”

헤사가 경기하듯 몸을 떨며 대답했다.

“마력을 움직여 보겠습니까.”

헤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의 안을 관조했다. 검고 빛나는 마력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커다랗고 따듯한 것이 소년의 몸을 가득 메우고 박동했다. 밤하늘을 보는 기분이었다. 로젤린이 날카로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마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건 처음이라. 신기하군요.”

헤사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웃어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가 제 편이 되어 줄 것만, 되어 준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급자가 청하기에는 어쩌면 건방질 수도 있는 부탁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어 버린 것은.

“실례가 안 된다면, 로젤린 경의 마력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물론 헤사는 그 말을 내뱉고 0.1초 후에 바로 입을 가렸다. 미쳤나? 오늘따라 행동이 제어가 잘 되지 않았다. 마인들은 어딘가 다들 이상하고 미쳐 있는 구석이 있다더니!

“그러죠.”

로젤린의 대답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소년은 아, 이게 별 일은 아니었나? 하고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햇빛이 쏟아지던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창을 가리는 거대한 몸집 때문이었다. 마카롱 경이 어느새 날아와 창틀에 앉아 있었다. 맹금류의 왕이 날카로운 눈으로 헤사를 응시했다. 그 그림자에 잠식된 로젤린이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눈을 감았다. 곧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는 거대한 것이 몰려왔다.

소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륙에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은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다.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일라베니아는 곪을 대로 곪아 갔고, 그 모든 책임과 원망은 마인들이 지고 가야 했다. 헤사 또한 태어난 순간부터 그 낙인이 찍혀 있었다. 더러운 것, 불길한 것. 이델라브힘의 빛을 가리고, 대륙에 암운을 드리우는 저주받은 자들!

헤사는 언제나 순응했다. 싸운다 해도 얻는 것이 없었기에, 언제고 쉽게 얻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말들 또한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가진 힘이 불길하고 더러우며, 저주받았다고.

그러나 로젤린의 안에서 요동치는 강한 기운을 느낀 순간, 헤사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무언가가 파사삭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거대한 힘은 그녀 안에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헤사는 자신이 거대한 파도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끝없이 침잠하는 것 같다 느끼기도 했고, 하늘을 가득 메운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헤사는 눈을 감았다. 검은 바다 안은 따듯했다. 위로 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으며 물결을 따라 그물같이 반짝였다. 그 안의 부드러운 흐름이 자신을 좋은 곳으로 떠내려 보내 줄 것만 같았다.

헤사의 눈꼬리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아, 어쩌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수없이 들어 왔던 저주 같던 말들이 파도의 포말처럼 산산조각 나며 부서져 갔다.

* * *

“네에?”

콧노래를 부르며 로젤린을 찾아온 헤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뭐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해서 예쁨 받을 기대에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건만!

“원래 하얀밤의 수습 기사로 입단하면 상급 기사를 따를 때의 교육도 따로 받습니다. 헤사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로젤린은 거울을 보며 제복을 정돈하고 있었다. 헤사가 그녀의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그, 그렇긴 하지만…….”

“그래서 당장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 말하더군요.”

헤사가 그녀의 뒤에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놈이 쓸데라고는 없는 말을…….

“에버하르트 경이.”

에버하르트…… 헤사가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전 수습 기사였던 레티시아 경과 에버하르트 경이 남는 시간에 헤사의 교육을 도맡기로 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기로 했다니, 열심히 배우십시오. 솔직히 내게 주어진 업무의 반 이상은 레티시아 경과 에버하르트 경이 처리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돕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돕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헤사에게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업무라고는 처리할 줄 모르며, 네가 열심히 배워 오면 다 맡길 예정이라는 말을 굉장히 당당하게 했다. 하지만 헤사는 그녀의 태만한 업무 태도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헤사에게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하고 있다고 하지 않나! 전의 수습 기사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로젤린과 함께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수습 기사가 되리라!

헤사는 오후에 바로 전 수습 기사 중 한 명인 에버하르트와 만났다. 에버하르트는 헤사를 보자마자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머리로 뻗어 왔다. 헤사는 눈을 크게 뜬 채 경직했다. 다가오는 손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아프게 할 것 같았으나…….

그저 섬세하지 못하게 머리를 헤집을 뿐이었다. 에버하르트는 몹시 들떠 있던 상태라 제 손길에 잠시 굳어 버린 소년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작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하기 바빴다. 헤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하급 기사 에버하르트다 꼬맹아!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이게 그 에버하르트…… 헤사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에버하르트는 룰루랄라 콧노래만 불렀다.

“선배인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 가르쳐 줄게. 로젤린 경께서 내게 특별히 부탁하셨거든. 너……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지? 이야, 고생 좀 하겠네. 열심히 하자 꼬맹아?”

헤사의 눈이 돌아갔다.

“망할 꼬맹이!”

에버하르트가 씩씩거리며 등장했다. 레티시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굽혀펴기를 계속했다. 새롭게 로젤린의 수습 기사가 된 뿌리의 헤사.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후임자를 만나러 간다고 발걸음 가볍게 떠나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로젤린에게 전해 듣기로는 ‘음. 헤사요. 굉장히 귀엽습니다. 갓 태어난 고양이같이.’라는 감상이 다였다. 지금 에버하르트의 반응을 보자니, 확신하기 어려운 정보였지만.

“고오오이연놈! 시건방진 새끼!”

에버하르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 씩씩거렸다. 레티시아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에버하르트는 화내는 와중에도 마른 수건을 가지고 와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같은 뿌리 출신인 데다가 성별도 같으니 말이 잘 통할 거라며 그렇게나 거들먹거리더니…….’

레티시아가 쯧 혀를 차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에버하르트는 옆에서 헤사의 만행을 종알종알 얘기했다.

갑작스럽게 헤사가 결투를 신청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청한다 정중하게 얘기는 하고 있지만 눈빛이 호기로워 자라나는 새싹을 작신 밟아 줄 생각을 하던 에버하르트는…… 참패했단다.

검투에서는 간신히 이겼지만, 박투에서 굴욕적으로 명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렸단다. 그런 에버하르트를 내려다보는 수습생의 눈빛은 뭐랄까.

“씹다 뱉은 음식물에 벌레가 꼬여 있는 걸 보더라도 그것보다는 부드러웠을걸! 쥐새끼 같은 게 얼마나 이리저리 약 올리면서! 레티시아 혼내 줘!”

저런 놈이니 어린애랑 수준 맞춰서 놀고 있지…… 헤사뿐 아니라 에버하르트까지 통제해야하는 레티시아는 골치가 아팠다. 그녀가 수건에 얼굴을 묻고 후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버하르트가 비록 촐랑거리는 멍청한 촉새라도 무력은 무시할 게 못되었다. 그가 방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새로 들어온 수습생 또한 분명 괜찮은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리라.

“로젤린 경이 오니까 표정 싹 바꾸고는 꼬리에 불난 강아지처럼 어찌나 꼬리를 흔들어 대던지! 이중인격자야 완전! 레티시아 내 복수를 해 줘!”

레티시아가 에버하르트의 엉덩이를 퍽 찼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 자식은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된다. 누가 싸우고 오랬나. 일을 가르치고 오라고 했지.

일과를 마치고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문제의 수습생을 만나러 갔다. 에버하르트는 싸움 지고 나서 제 형을 데리고 가는 꼬마 애처럼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그 꼴사나운 어깨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내가 널 어떻게 해 버리겠어.”

레티시아의 서늘한 협박에 에버하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작달막한 소년이었다. 분홍색이 살짝 섞인 빨간 머리의 소년이 호기롭게 레티시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첫 만남에 보이는 적개심이라고 보기에는 과한 감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 멍청이가 무슨 초를 쳐 놓은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수습생 헤사. 나는 로젤린 경의 휘하에 있는 하급 기사, 서리나팔의 레티시아다.”

“헤사입니다.”

예의는 갖췄으나 눈빛이 불손했다. 에버하르트가 뒤에서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저 자식은 전쟁에는 내보내면 안 되겠다. 너무 단순해서 도발에 백이면 백 넘어갈 게 분명했다.

“수습 기사는 상급자의 일과에 따라 같이 움직인다. 수습생은 상급자의 수족이나 다름없으니, 로젤린 경이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임무를 하고,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해. 오늘은 그 일과에 대해서…….”

헤사가 손을 가볍게 들었다. 레티시아가 턱짓으로 발언을 허가했다.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에버하르트가 뒤에서 방방 뛰었다. 저거야 저거! 저놈이 저거 해서 내가! 잉잉 레티시아! 하는 속마음이 다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를 무시한 채, 소년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팔이 가느다랗다. 단련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 성장기인지 몸이 덜 자란 상태였다. 에버하르트의 복부를 타격하고 바닥에서 추하게 기어 다니게 할 정도의 타격을 주기에는 한참 모자라 보였다.

‘단순히 힘이 센 게 아니군.’

그렇다면 하나밖에 더 없지 않은가.

‘마인이다.’

로젤린 경이 받아들인 경위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소년이 마인이라면 나름 이해가 됐다. 레티시아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오늘은 수습 기사가 할 일에 대해 배운다고 했어.”

도발에도 안 넘어 오자 헤사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저 뒤의 원숭이는 잘 넘어오던데…… 하는 당황의 기색이 느껴졌다.

“……피하시는 겁니까?”

에버하르트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지만 레티시아는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우습지도 않았다.

“서리나팔의 가언을 알고 있나, 수습생?”

헤사가 눈썹을 치켜뜨고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시골 후미진 곳의 작은 영지라 잘 모를 테지. 서리나팔의 가언은 ‘서리나팔의 여자는 절대 지지 않는다.’ 이다. 이게 무얼 말하는 거라 보는가?”

“강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세상에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젤린 경이라면 또 모를까. 아니 로젤린 경도 나에게 체스를 지고는 하시니, 그분 또한 지지 않는 건 아니겠지.”

헤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숨기는 척하더니, 어린애는 어린애인지 감정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사소한 싸움의 승패 하나에 웃고, 하나에 울며 이겼네, 졌네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내가 수습생에게 이기면 어쩔 것이고, 지면 어쩔 것 같나. 진다 해도 그것은 앞으로 내가 강해지기 위한 밑거름이 될 뿐이다. 나의 패배가 전혀 중요한 싸움이 아니라는 거다.”

그건, 그냥 허울 좋은……. 헤사가 울컥해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레티시아가 말을 덧붙이는 게 더 빨랐다.

“서리나팔은 가언은 그것을 말한다. 진정 싸워야 할 때가 찾아왔을 때야 말로 물러서지 말라. 그것이 이기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마라 수습생. 수습생이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에버하르트가 아니다. 수습생이 해야 할 일은 로젤린 경을 보조하는 것. 그리고 오늘은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 수습생은 배우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깎아 먹고 있군. 병장기도 없이 전쟁에 나가는 꼴이다. 수습생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건 간에, 이번은 필패다. 싸움의 종류를 알고, 싸워야 할 때를 알아라.”

헤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이 레티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손을 꼬물거렸다. 레티시아가 픽 바람 빠지듯 웃었다.

뿌리 출신이 황성에서 얼마나 갖은 설움을 당했겠는가. 바짝 선 가시를 눕히려 해도 눕힐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서 원초적인 힘 대 힘으로 싸워 기를 누르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따끔하게 혼내야 하지만, 반성의 기미가 보였다. 천성이 나쁜 아이는 아닌 듯했다.

레티시아가 손을 무릎에 대고 상체를 숙여, 헤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소년이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눈치를 봤다. 그녀가 씨익 웃은 다음에 소년의 어깨룰 툭툭 두드렸다.

“배짱은 썩 좋아 마음에 든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에서는 물러나지 마라 헤사 경.”

헤사가 손의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에버하르트가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후로도 헤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뾰족하게 대했지만, 로젤린과 레티시아. 레이몬드에게만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고 본인도 열심이라 업무를 익히는 속도도 빨라 레티시아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업무를 익히는 도중 헤사가 뜬금없이 물었다.

“……서리나팔의 남자는 지기도 합니까?”

서리나팔의 ‘여자’만 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나 보다. 레티시아가 살짝 웃었다.

“서리나팔은 대대로 데릴사위를 들이거든. 데릴사위들은 가언을 변화시킬 영향력도 없을뿐더러, 가위 바위 보에도 열 내는 바보들이 많았다. 실제로 잘 지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궁금증은 풀렸나?”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헤사는 테이블에 엎드려서 숨넘어가게 웃었다. 어린 웃음소리가 유리 소리처럼 맑았다.

후에, 레티시아와 로젤린이 담소를 나누며 헤사를 ‘귀엽다’라거나 ‘귀엽고 착하다.’라고 얘기를 나눴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에버하르트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

인상을 찌푸린 두 남자가 골목 입구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거 노동 착취 아닙니까, 도련님?”

알터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 빤히 보이는 약한 척이 칼릭스에게 통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았으나, 그 나름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 칼릭스 에스터의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전선에 머무르는 시간이 긴 백작을 대신해 칼릭스는 주로 성안에만 머물렀고, 그 성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알터가 맡는 일 또한 쳇바퀴 굴러가듯 비슷한 일들뿐이었다.

그 일정한 굴레에서 벗어난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사냥 대회에서 로젤린이 실종되었던 때부터. 그때부터 알터의 순조롭고 무난한 생활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결국 스스로 달아 놓았던 ‘월급 도둑’이라는 흡족한 별명도 내려놓아야만 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요양을 마치고 칼릭스와 함께 수도로 떠났을 때, 알터는 비스타에 남아 마인을 찾기 시작했다.

발타로 떠나지 않은 마인들은 전투가 잦은 지역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칼릭스가 이 거리에서 소매치기 마인 소년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알터는 비스타부터 뒤졌을 것이다.

문제는 어딘가에 분명 있을 마인과 함께 마인처럼 무섭게 생긴 자들도, 마인처럼 강한 자들도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용병과 싸움꾼들이 쉼 없이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알터는 그들을 구별해 낼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직접 발로 뛰어다녀도 얻는 소득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 칼릭스가 하루 걸러 하루 닦달해 대는 서신들에도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며 차일피일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칼릭스가 자신이 직접 알아보겠다며 비스타로 내려왔다. 평소 차분한 성격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알터는 오랜만에 보는 제 주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최초의 하얀 밤과 검은달이 뜬 날 ‘그림자 없는 밤’ 축제부터 시작해서, 일라베니아 제국의 밤은 연일 빛나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갖은 색깔의 아기자기한 등불들이 거리를 밝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축제의 빛이 옅어지는 좁은 골목의 안쪽에 있었다. 칙칙한 회갈색의 후드를 뒤집어 쓴 칼릭스가 하얀색 일색인 거리에서 눈에 너무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후드를 벗자니 검은 머리가 너무 눈에 띌 테고.

알터는 좁고 어두운 골목과 대비되는 밝은 상 거리를 바라보며 종일 투덜거렸다. 노동 착취 투덜투덜, 휴식을 휴식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투덜투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투덜투덜…….

“알터. 지금 이 소리 들었나?”

“예? 무슨 소리?”

칼릭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두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알터는 거리의 소음을 뚫고 제 주인에게 들어갈 만한 특별한 소리가 있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칼릭스가 후드를 젖히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네 월급이 오르는 소리.”

짜릿한 돈의 맛! 알터가 감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 도련님…… 제가 까라면 까겠다고 말씀 드린 적 있던가요?

“제 취미가 노동 착취당하는 거라고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싱거운 말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크으, 역시 우리 도련님. 용건만 간단히! 시계도 도련님처럼 시간을 효율적으로 나누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하라고 좀.”

알터는 희희덕 웃으며 제 품에서 구깃구깃 접혀진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칼릭스는 그것을 잽싸게 펼쳐서 읽었다.

악필로 쓰인 정보들은 토막 나 완전하지 못했고, ‘?’라던가 ‘△’ 같은 기호로 뒤덮여 있었다. 총체적으로 살펴보자니 미심쩍은 구석이 있긴 한데 잘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월급 도둑을 째려봤다.

“마인도 아닌 제가 뭔 수로 확실하다 동그라미를 칩니까.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확정 지을 수 없는 노릇이고.”

알터의 말대로이긴 했다. 눈앞에서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펑펑 써 대어도, 마력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 종이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인뿐이었다. 칼릭스는 서류를 곰곰이 읽었다. 무슨 사거리 정육점, 무기점, 용병단, 불법 투기장…….

“그리고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동그라미죠.”

알터는 종이에 그려져 있는 것 중 가장 큰 세모를 가리켰다. 그 아래, [불법 투기장] 이라고 적힌 글자가 알터의 침에 의해 번져 있었다.

허름하고 반 쯤 무너져 가는 것 같은 건물이었다. 알터가 안내한 불법 투기장은 불법 투기장이라는 이름이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몇 번의 골목을 꺾어 숨겨진 문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허름한 건물에서 쨍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절그럭거리는 쇠사슬과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죽여!”

“죽어!”

눈알을 어쩌고 불알을 어쩌고! 부모님의 안부를 서로 묻는 관전자들의 거친 언사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반쯤 내부가 보이는 건물은 전혀 방음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저 사람들 불법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맞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이 장소를 못 찾는 게 아니라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리라.

칼릭스가 건물의 입구를 찾아 들어가려 하자, 거대한 남자들이 앞을 막아 섰다. 흉터가 여기저기 깊고 굵게 새겨진 데다가, 인상도 사납고 수염도 숭숭 나 있어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들보다 곱절은 더 사나운 인상의 소유자를 부모로 두고 있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방문객의 태도에 남자가 씩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로구만. 초대장은?”

칼릭스는 초대장을 받기 위해 알터를 돌아보았다. 알터는 입술을 흉하게 오므린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칼릭스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알터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허접한 곳에 초대장 같은 게 있을 줄은 몰랐죠.”

목소리가 컸다. 초대장도 없어 보이는 허접한 곳을 보물단지처럼 지키던 남자들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칼릭스는 진심으로 알터를 해고하고 싶어졌다.

혀를 찬 칼릭스가 품에서 금화 하나를 튕겼다. 남자가 공중에 떠오른 금화를 잡아챘다.

“이봐, 나는 이깟 돈이 아니라 초대장을…….”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주위의 다른 산적 같은 사내들도 흉흉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압박하며 한걸음씩 다가왔다. 알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충 돈을 먹인다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나.

“도, 도련님 그냥 우선 나갔다가…….”

칼릭스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먹보다 큰 주머니는 이미 두둑하게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고, 분위기 상 대충 그 안의 내용물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칼릭스가 남자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찰랑이는 금속음이 건물에서 퍼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뚫고 뚜렷하게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남자가 산적 같은 얼굴을 누그러트려 활짝 웃었다.

“잘 받았습니다, 손님! 즐거운 시간 되십쇼!”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나. 뭐 결과가 좋으니 됐지만…….

알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알터와 칼릭스 주위를 포진해 있던 많은 남자들이 꽃집 청년 같은 상냥한 미소를 띠며 문을 활짝 열어 줬다.

알터는 허망함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칼릭스의 뒤를 따라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이 병신 같은 새끼! 일어나! 일어나라고!”

“목을 졸라! 죽여 버려! 대가리를 박살 내!”

투기장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좁아 보였다. 사람들로 꽉 차 있는 탓이었다. 그 중앙에는 네 개의 나무 기둥을 세워, 쇠사슬과 밧줄을 칭칭 감아 놓아 장소를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그 안에서 두 남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한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그 위로 피 흘리는 남자가 올라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그 안에 있었으면 니들은 이미 뒤지고도 남았어, 소꿉놀이 하냐!”

야유가 쏟아졌다. 우리 할머니 운운하며 야유를 퍼부은 자가 어린 여자아이, 그것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라 몹시 혼란스러웠다. 피가 튀고, 술병이 날아다니고, 관전자끼리도 싸우고.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음, 개판이네.”

알터가 감상을 늘여 놓았다. 칼릭스는 구석에 나무 상자를 쌓아 올려 술 장사를 하는 자에게 와인 한 병을 샀다. 와인을 한입 머금은 칼릭스는 곧바로 손수건에 마신 만큼 뱉어 냈다.

그는 찌푸린 인상으로 와인을 째려보다가 알터에게 병을 넘겼다. 불법 투기장을 구경하느라 한눈팔고 있던 알터는 칼릭스의 행동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 덕에 칼릭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알터는 와인을 마시고 말았는지 욱욱하며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 사이 주위를 둘러봤다. 문신, 흉터, 반쯤 헐벗은 남자들, 담배 연기. 어린아이부터 노파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거는 액수도 천차만별이었다. 칼릭스처럼 후드를 눌러쓴 자들도 있었다.

‘이 안에…….’

마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데…….

힘을 숨긴다고 해도 양지보다는 그늘진 쪽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니, 영 이상한 장소는 아니었다.

“도련님.”

“왜.”

“저기 구석에 녹색 머리 보이십니까?”

알터가 가리킨 곳은 다음 결투를 위해 몸을 풀고 있는 자들이 대기하는 장소였다. 그 중, 유별나게 체구가 크지도 않고, 유별나게 강해 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남자가 보였다. 그 거친 이들 사이에 있기에는 어딘가 살짝 유약해 보였으나, 몸에 덕지덕지 붙은 흉터가 배경에 녹아들게 했다.

“제 세모의 주인공입니다.”

칼릭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동그랗고 맑았다. 소나 말 같은 초식동물이 떠오르는 눈동자였다.

“이 투기장의 붙박이라 하더군요. 허수아비 길레드.”

“투기장의 별칭이라 보기에는…….”

투기장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거칠고 땀내 나는 사내들의 무식한 싸움장. 그 만큼 별명들도 무식하고 거친 것들이 즐비했다. 예를 들자면 투견이라던가 손톱수집가, 사형집행인 따위의.

그러다보니 ‘허수아비 길레드’ 라는 평범한 이명이 도리어 튀어 보였다.

“소탈한 감이 있지요? 어딘가 비실비실해 보이고.”

“그렇군.”

“정확히 그겁니다. 수련용 허수아비같이 맞을 줄만 안다고 붙은 별명이라더군요. 싸움질은 허접한데 맷집만 좋다 합니다. 승률은 저조하지만, 가끔 터지는 행운의 한 방으로 배당금을 적당히 챙기기도 한. 그저 그런 나쁘지 않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싸움꾼입니다.”

허수아비 길레드는 목을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거대한 남자가 어깨로 퍽 치고 지나가며 시비를 걸자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투기장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기고 지는 패턴이 단순합니다. 은밀하고 복잡하게, 자연스러움을 위해 섞어 놓은 여러 경기들이 도리어 지표가 된 달까요. 물론 길레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정도의 소득이지만, 외부에 한패가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요. 제법 한 몫 잡았을 겁니다.”

“싸움 잘하고 연기 잘하는 사기꾼일 가능성은?”

알터가 와하하 웃었다. 투기장의 소음에 묻혀 그다지 눈에 띄진 않았다. 그가 칼릭스의 어깨를 탁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히 있지요!”

보통 저런 반응 뒤에는 ‘없다’ 따위의 반응을 기대하기 마련이라,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알터가 투덜거렸다.

“아, 제가 마인도 아니고 어떻게 압니까. 제가 저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세모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련님도 참. 그렇게 욕심 부리시면 배탈 납니다.”

“이 자식이 말만 번드르르해서는…….”

칼릭스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는 듯 꽉 막힌 목소리로 얘기하자 알터가 흐흐 웃었다.

“마인인 것은 알 수 없어도. 승부 조작은 확실하거든요? 심지어는 이 짓을 십 년 넘게 해 왔으니 돈도 제법 벌었을 테고.”

“그렇겠지.”

“그런데도 비스타를 떠나지 않는단 말이죠. 난다 긴다 하는 싸움꾼이나 용병들이 비스타를 찾는 이유는 금전적인 문제뿐이고, 그게 충족되면 위험한 국경 지대를 떠나기 마련인데…… 길레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가.”

“예, 발타라는 코앞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남아야 할? 비스타 내에 형성되어 있는 마인들의 연결 고리를 벗어나 외부로 향할 용기가 없다던가 하는 그런……?”

“비약인걸.”

“비약이죠. 정확히 알지 못하니 그려 보는 수밖에요. 생각보다 이런 수가 제법 통하기도 하거든요.”

와아악! 비명 소리인지 함성 소리인지 모를 것들이 섞여 있었다. ‘새끼손가락’이 경기장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새끼손가락’은 자신이 이길 때마다 상대의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기행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역시나 불법 투기장다웠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의 패배로 인해 대전자의 새끼손가락을 자를 수 없게 되었다.

허수아비 길레드가 올라갈 차례였다.

“길레드의 대전자는 떠오르는 신성이네요. ‘애꾸눈’ 카터. 왜 애꾸눈이냐면 이길 때마다 상대방을 애꾸눈으로…….”

미친놈들이다. 칼릭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길레드가 이길 겁니다. ‘애꾸눈’이나 ‘새끼손가락’처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입히는 대전자를 만나면 항상 이기더군요.”

그 순간 칼릭스는 허수아비 길레드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으로 가득 찬 이 난장판 속에서, 길레드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칼릭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알터와 칼릭스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칼릭스는 그에게 두었던 시선을 천천히 자신의 발치까지 끌고 왔다. 소리치고 악을 쓰는 사람을 수십 명 지나쳐야만 닿을 수 있는 먼 위치.

‘……설마, 이 거리에서 우리의 얘기를 들은 건가?’

잠시간 닿았던 길레드의 시선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비로소 칼릭스는 커다란 세모 위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었다.

* * *

“아이고 어서 오시죠!”

길레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어 주는 남자가 너무 해맑았다.

그는 불법 투기장에 있던 다른 동료들을 통해 수상한 두 남자의 정보를 몇 개 얻어 냈다. 처음 보는 인물들. 허수아비 길레드, 자신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왔다. 마인임을 의심한다. 승부 조작을 눈치챘다. 등등.

승부 조작 건을 통해 그 불법 투기장까지 흘러왔다니. 소설을 기가 막히게 잘 쓴다면 잘 쓰는 자들이고, 머리가 좋다면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비스타에서 몰래 ‘마인’이라는 물건을 찾는 사람 중에 그걸 떳떳한 곳에 사용하려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도, 약점 잡히는 것도 질색이라 여차하면 손에 피를 묻힐 각오까지 하고 왔건만.

“들어오세요,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자가 정말 해맑았다.

길레드는 재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두 사람 이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가 무거웠다.

의자에는 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코와 입만 간신히 보였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길레드는 긴장을 유지한 채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검을 잡을 때 생기는 굳은살이 있지만 거리에 숱하게 보이는 용병 같은 부류는 아닌 듯했다. 곧게 핀 허리와 태도 하나하나에 이런 뒷골목에서 보기 힘든 품위가 느껴졌다.

‘귀족인가…….’

길레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갑작스럽게 불러 내어 미안하군.”

“……아닙니다. 용건을 말씀하시죠.”

남자가 느릿하게 제 후드의 끈을 잡아끌었다. 후드를 완전히 벗어서 곱게 접어 소파 한 편에 놓아 두는 태연한 행동을 보며, 길레드는 눈을 홉뜨고 있었다.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녹색 눈동자. 그 특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귀염둥이 칼!”

칼릭스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불법 투기장에서 구르며 갖은 험악한 인상을 다 본 길레드가 움찔할 정도였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다.”

“아, 네. 카, 칼릭스 님? 경?”

“편한 대로.”

길레드가 머쓱하게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칼릭스.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이자, 대륙에 명성이 자자하게 퍼진 ‘마인’의 혈육. 비스타에서 돈 많고 잘생긴 데다가 귀엽고 착하기까지 하다고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문을 가진 사람치고는 인상이 영, 아니긴 했다. 잘생겼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저 날카로운 눈매에서 착하다는 단어를 떠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귀엽다는 얘기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길레드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했다.

“아, 예. 칼릭스 님. 저는 길레드라고 합니다.”

“일단 자리에 앉지.”

길레드는 아까 전에 비해 누그러진 기색을 보였다. 적의 대신에 자리 잡은 것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의 눈빛이었다. 대륙에 자자하게 퍼진 ‘붉은수레바퀴’의 이름 덕분이었다. 숨어 사는 마인들에게 로젤린의 얘기는 전설이나 영웅담처럼 퍼지고 있었고, 그 영향이 지금도 드러나는 것이었다.

“내 사정으로 인해, 그쪽이 원치 않았던 식의 접근을 하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저를…… 아니지, 마인인가요?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마인과 가장 가까이에 계신 분이 아닙니까.”

칼릭스는 말을 골랐다. 허울 좋은 핑계야 만들어 내자면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뒷골목을 전전하고 사는 대표적인 하층민. 그럴싸한 말로 간단히 손을 빌릴 수 있겠지만…….

어쩐지 그러기 쉽지가 않았다. 달콤한 말이 나가는 대신 입안은 쓰기만 했다. 칼릭스가 피식 웃었다.

“내 필요에 의해서.”

“제가 어디에 필요합니까?”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만일이라 하신다면?”

칼릭스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매끈한 탁자 표면에 그가 비쳤다. 탁, 탁, 탁. 일정한 소리를 내던 손가락이 멈췄다. 정적이 무거웠다.

“전쟁.”

길레드는 아, 하고 신음했다. 요새 비스타가 어수선하더라니. 골목골목 있는 주점마다 전쟁의 가능성이 알음알음 돌더라니. 누런 이에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을 가진 취객들이 말하는 것과, 정장을 차려입은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가 말하는 ‘전쟁’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칼릭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얘기를 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꺼내는 제안은 너와 네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마인들에게 건네는 제안이다. 결코 강제하지 않으며, 거부한다고 해도 불이익이 따르지 않으리라, 내 누이의 이름에 맹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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