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9화 (2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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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은 결코 지치지 않았다. 분명 같은 걸 먹었는데…… 양이 좀 많기는 했지만 아무튼 같은 종류였다. 칼릭스는 그럼에도 제 누이가 대체 뭘 먹었기에 저렇게 펄펄 날뛰는 건가 의문스러워졌다.

그녀의 조급함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는 칼릭스도 최선을 다해 로젤린의 속도에 맞춰 말을 몰았다. 하지만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곧 한계를 맞이했다. 칼릭스는 창백한 얼굴로 헛구역질을 했다. 하도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태어나기를 강골로 태어나 그 아버지 밑에서 단련받았다. 전쟁도 겪어 봤고 일부러 몸을 괴롭게 하는 훈련도 수없이 했다. 그래도 평생에 걸쳐 감기 걸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한 번도 심하게 앓은 적 없었는데. 고작 삼 일 만에 이 지경이 되다니. 삼 일 만에.

로젤린이 급하게 말을 세웠다. 잠시 신경을 못 쓴 사이 제 동생이 반쯤 시체 같은 꼴이 되어 있지 않은가. 하늘을 보니 해가 산 너머로 넘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가 뜨기 전부터 달리긴 했지. 조금 오래 달렸나? 말도 힘든지 거친 콧김을 씩씩 내뱉는 중이었다. 오래 달렸구나…….

로젤린이 말에서 내려오자 칼릭스도 굴러 떨어지듯 내려왔다.

“괜찮아?”

칼릭스는 괜찮다는 말 대신 욱욱하는 헛구역질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제 수통을 열어 칼릭스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나머지 손 한쪽은 동생의 등을 두드리기도 하고, 그의 이마를 쓸어 넘기기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이었다.

‘이제는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는군요. 감개무량합니다…….’

칼릭스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하늘을 선회 중이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가볍게 착지했다.

“뭐야, 얘 왜이래. 아픈 거야?”

“그런가 봐.”

“어디가?”

삼 일 동안 노숙하면서 세 시간만 선잠을 겨우 자고, 밤낮없이 미친 듯이 달리면 이렇게 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카롱은 규격 외라고 하더라도 제 누이는 인간의 모습이라 방심했다. 그들은 전혀, 일말도 칼릭스가 왜 아픈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더라도 그것을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이렇게 허약한 생물이 있지? 라고 생각하는 눈빛들이었다. 마카롱은 칼릭스를 약골이라며 놀릴 생각에 내려왔지만, 그의 낯빛을 보고 심각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날붙이로 생긴 아주 아주 작은 상처로도 죽는 재주가 있는 종족이었다.

“죽지 마라.”

독수리의 눈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새의 농담에 하하 웃다가 그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한 것을 알아챘다. 진심이었나…… 그의 웃음이 뚝 끊겼다.

한 마리와 한 여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의사를 불러오느니, 몸에 좋은 약초를 찾아 오겠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칼릭스, 죽으면 안 돼……!”

마침 그들의 옆을 지나가던 상단의 마차가 멈춰 설 정도의 비통한 목소리였다. 상단주가 도움을 주겠다며 친절을 발휘했다. 칼릭스는 수치스러움에 발개진 얼굴로 사양했다. 말을 장시간 타다 보니 컨디션이 좀 안 좋아졌을 뿐이라고.

백발이 희끗한 상단주는 칼릭스를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기더니 매일 삼십 분 정도의 운동은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칼릭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로젤린은 상단주에게서 괴악한 이름의 약을 몇 포 구입했다. 무슨 뱀의 꼬리를 말려 빻은 것이라나.

칼릭스는 약을 먹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반항했다. 하지만 인간 여자로 의태한 마카롱의 합세로 그 반항은 무의미해져 버렸다. 칼릭스는 자신보다 한참 가느다란 여자 두 명에게 붙잡힌 채, 무언가의 가루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먹어야만 했다.

혀를 마비시킬 정도의 저릿한 쓴맛과 비린 맛의 환상적인 조화였다. 절로 눈물이 나왔다. 칼릭스는 너절해진 낯으로 입가를 쓸며 제발 천천히 가자고 부탁했다. 요즘따라 울 일이 잦았다. 그것도 주로 로젤린, 제 누이와 관련된 일로만. 로젤린이 칼릭스의 눈물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동생의 눈물 때문인지 로젤린은 자주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타인과 함께하는 여행의 속도를 깨우친 듯했다. 밤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마을이 보이면 적당히 잘 곳을 찾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큰 영지에 도착할 쯤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늦은 밤이라 불빛마저 잠들어 있었으나, 타지의 손님을 반기는 여관들이 바다의 횃불처럼 길을 안내했다. 멀리 있는 여관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때였다.

로젤린이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계속 좌우를 훑었다. 그녀의 행동을 칼릭스가 주시했다. 길이 좁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것도 아닌 한적한 밤 거리. 그녀가 신경 쓸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칼릭스는 로젤린의 감각이 일반적인 인간이 느끼는 범위보다 훨씬 폭 넓고 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녀만 감지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칼릭스가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누님?”

로젤린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빛은 흐릿한 빗줄기 너머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는 했지만 칼릭스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된 행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말수가 줄기 시작했었다. 비를 싫어하시나?

빨리 어디든 들어가서 그녀를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칼릭스는 로젤린이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하늘을 날고 있던 마카롱이 슬슬 쉬기 위해 내려왔다.

“마카롱 님. 저한테 오세요.”

로젤린의 주머니로 들어가려던 독수리가 삐애애액 울부짖으며 칼릭스를 위협했다. 대놓고 불만스러워 하는 모습에도 칼릭스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누님이 피곤하시니, 어서 이리 오세요.”

마카롱은 로젤린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그녀를 살펴보더니 순순히 칼릭스에게 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진짜 상태가 안 좋잖아?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이상 상태가 혹시나 ‘그것’들의 특성인가 생각했지만, 마카롱의 상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카롱이 쥐로 변해서 칼릭스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간식으로 넣어 둔 땅콩 몇 알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뒤로 하고 로젤린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 그녀의 감각이 넓게 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주위를 떠돌았다. 골목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다.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말소리와 웃음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로젤린은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빗소리와 희미한 몇 개의 불빛.

기시감이 들었다. 겪어 보지 못했으나, 가슴을 두드리는 이 불안함과 온몸을 눅눅하게 만드는 습기가 익숙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후드를 더 꾹 눌러쓰고 말을 재촉했다.

일행은 곧 여관에 도착했다. 칼릭스가 일꾼에게 말을 맡기는 사이, 로젤린이 먼저 건물로 향했다. 빨리 안에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로젤린이 여관의 문고리를 잡았다. 물에 젖어 한층 차가워진 온도가 로젤린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렸다.

어둠이 깔려 있는 밤, 문을 경계로 빛이 쏟아졌다. 환한 배경 가운데로 역광으로 검어진 사람의 인영이 흔들렸다. 로젤린은 숨을 멈췄다.

쾅!

굉음이 울렸다. 마침 여관 밖을 나서려던 남자가 로젤린에 의해 흙탕물에 처박혔다. 남자는 일격에 기절했고, 그 남자를 기절시킨 장본인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깜박 깜박거렸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물론 뒤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칼릭스는 그보다 더 당혹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 서 있었다.

‘혹시 저 남자가 암살자였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황하시는데?’

칼릭스의 미심쩍은 눈빛에 로젤린이 들고 있던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아, 실수였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로젤린의 재빠른 사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일행은 노발대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칼릭스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 거듭 사과하고 물질적인 보상을 했다. 일행과 그 당사자는 싱글벙글한 낯으로 사람이 놀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느냐 했다. 로젤린은 그 긴 피해 보상의 시간동안 그저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로젤린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여러 번 반복하며 형태를 다듬었다. 점점 선명해졌다.

조용한 숲을 울리는 빗방울 소리. 어두운 밤. 빛이 쏟아지던 작은 공간. 그 빛 사이에 있는 남자. 우연히 맞물려진 상황이 로젤린의 안에 깊게 가라앉아 있던 몇몇 단편적인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로젤린’의 기억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시점부터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발밑이 꺼지는 공포를 느꼈고, 어두운 숲을 달리고 있었고, 넘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로젤린’은 숨소리를 죽인 채 막사 앞에 서 있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천막의 틈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로젤린’의 시야가 흔들렸다. 하얀 털로 뒤덮인 야수의 손과 날카로운 손톱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이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미동도 없던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꿈틀, 움직였다.

기억이 다시 순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급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천막이 펄럭이며 바람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쫓아 온 자의 공격으로 인해 등이 찢긴 채 앞으로 넘어져 몇 번을 굴렀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밟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달린다. 그리고 예정대로 절벽에서 떨어진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로젤린은 인간이 된 이후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는 했으나, 그렇게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아주 강렬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그녀가 주먹을 냅다 질러, 남자가 화려하게 날아감과 동시에 부서졌다. 그 거친 움직임으로 로젤린의 후드는 벗겨진 상태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투두둑. 혼란은 부서지고 차가운 물줄기가 현실을 상기시켰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황실에 ‘그것’이 있다. 로젤린을 죽이려 하던 ‘그것’이.

* * *

칼릭스가 무서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막 씻고 나온 로젤린은 칼릭스를 보자마자 다시 들어가서 씻고 싶어졌다. 마카롱은 가라앉은 방 안의 기류를 읽고 조용히 칼릭스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로젤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칼릭스의 이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 저택에 있을 때, 무언가를 깨트려 날카로운 조각에 다치거나, 목욕하고 머리를 안 말리고 나오면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요?”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봤다. 나도 다 사정이 있었던 건데. 하지만 칼릭스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재차 물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요, 누님?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제가?”

“무서운 곳에 간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누님도 무서운 곳에 가야겠군요.”

칼릭스가 벌떡 일어나 로젤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디든 끌고 가려는 시늉을 해서 로젤린은 몸에 힘을 딱 주고 버텼다. 큰 돌덩이처럼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무서운 사람들 보고 와서 누님 잡아가라고 해야겠습니다. 여기요! 무서운 아저씨!”

칼릭스가 왁 소리를 지르자 로젤린은 기겁했다. 마카롱도 펄쩍 뛰면서 칼릭스의 목덜미를 찰싹찰싹 쳤다. 꼭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며 말리는 느낌이었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

칼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쁜 사람……?”

그의 목소리가 조금 풀린 것을 느낀 로젤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서워서 그랬는데. 일부러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실수. 그래서 진심으로 사과도 했는데…….”

그녀의 말에 칼릭스는 당황했다. 로젤린에게 무섭다는 감정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으음, 신음하고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왜 무서우셨습니까?”

칼릭스는 침대에 앉아 있는 로젤린을 올려다 볼 수 있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로젤린의 손이 차가워, 칼릭스는 그녀의 손을 슥슥 문지르며 제 체온으로 덥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질문에 한참 동안 고민했다. 과거, ‘로젤린’의 기억. 기억에 실려 온 감정의 파편. 말로 풀어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머리를 굴린 후 말했다. 몇 개의 촛불이 칼릭스의 눈에서 떠다녔다.

“나를 죽인 사람인줄 알고.”

칼릭스의 눈동자가 촛불을 집어삼키며 더욱 형형해졌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손아귀 힘이 일순 강해진 것을 느꼈다. 잘못 봤다고 착각할 만큼 아주 짧게 몸이 덜컹이기도 했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잠겼다.

“……누님을 죽인 사람이, 있습니까?”

자상한 표정이었음에도 로젤린의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두렵다기보다는 몸이 살기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어, 그러니까. 나를 죽인 건 아닌데, 그때 사냥 대회 날에…… 막 비가 와서.”

“네.”

로젤린은 더듬더듬 끊겨 있는 기억을 말했다. 칼릭스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네, 그랬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타오르기도 했고, 차가운 무언가로 뒤덮이기도 했다.

로젤린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얘기했다. 또 다른 ‘그것’을 보았고, 존재를 들켰고, 비 오는 어두운 숲을 도망갔고, 떨어졌고, 나를 만났노라고.

로젤린은 어쩐지 변명해야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손 쓸 방법도 없었다는 것까지. 칼릭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슥 쓸었다.

“그랬습니까.”

“으응.”

칼릭스는 이미 로젤린이 과거 제 누이의 기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은 사소한 행동이라던가, 과거 그녀의 말투, 정보. 그것들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지금 그녀가 마치 자신이 겪은 일인 양 말하는 모든 것들이 ‘로젤린’의 기억으로부터 왔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칼릭스는 아픈 사람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다. 로젤린이 그 떨림을 눈치채고 이름을 불렀다.

“칼릭스…….”

작은 말소리는 잔잔한 바람같이 포근했다. 로젤린. 제 누이였다. 칼릭스는 눈을 감고 그녀의 손등 위에 얼굴을 묻었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누님.”

“괜찮아? 약 먹을래?”

깜깜한 시야 위로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젤린이 제 무릎 위에 엎어진 칼릭스의 뒷머리를 살살 쓸었다. 곧게 뻗은 목덜미가 촛불에 희게 빛났다. 희게 질린 것일지도 몰랐다.

“무서우셨습니까?”

“응, 막, 심장이 쾅쾅하고 막.”

로젤린은 실제로도 제 심장을 쿵쿵 쳤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지만, 울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칼릭스는 상상했다. 로젤린의 말을 토대로. 어두운 숲속, 쫓아오는 추격자, 뛰는 심장, 두려움, 절벽. 찰나의 부유감.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로젤린이 가슴을 치는 것으로부터 오는 진동이 칼릭스를 크게 흔들었다. 쿵, 쿵! 마치 온몸을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프셨어요?”

“아, 막 등이 찢겨서 피가 나고, 뼈가 막 부서져서…….”

찍, 마카롱의 소리가 시야 밖에서 울렸다. 로젤린은 어, 하면서 당황스러워하더니 말을 급하게 바꿨다.

“별로 아프진 않았어.”

신빙성 가는 말이 아니었다. 마카롱이 뭐라 언질을 준 것이리라. 마카롱은 제 누이보다 인간의 생태나 감정 따위에 더 밝았으니.

“진짜로.”

덧붙이는 말이 상냥해서 사랑스러웠다. 칼릭스는 울었다. 그 어두운 숲길을 달리던 두려움과,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미안했다. 혼자서 떨었을 누이가 가여웠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이 손길의 상냥함이 부디 누이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칼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젤린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화장실 쪽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부은 눈을 비비며 침대를 내려가려던 칼릭스는 놀라서 제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침대 아래에 물컹한 무언가가 있었다. 완전히 밟기 전에 눈치챈 것이 다행이었다.

로젤린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는지 바닥에서 이불을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며칠 노숙하는 동안에 그녀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피로가 오늘와서야 퍼진 것인지 도로롱 도로롱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깨지 않았다.

칼릭스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옮겼다. 물론 로젤린이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상대가 칼릭스라는 것을 알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되짚었다. 확실히 제 누이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는 생각해 왔다. 왜 하필 그 절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막사의 정 반대편에서 왜 혼자? 칼릭스가 아는 로젤린은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라. 사람의 팔에 달려 있는 마수와 동물의 손. 확실히 기괴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는 제 누이가 도망쳤다는 행동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무언가가 더 있다.

벌컥.

방의 문이 열렸다. 낯선 남자가 태연하게 방 안에 발을 들였다. 칼릭스는 의자 위에 걸쳐 놓은 검집을 재빠르게 잡아챘다. 스릉, 순식간에 날의 형태가 반쯤 드러나 아침 햇살에 예리하게 빛났다.

“좋은 아침.”

남자는 칼릭스의 경계를 담담히 흘러 넘겼다. 태연자약하게 작은 침대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인상이 분위기에 힘입어 더욱 흉흉해졌다. 남자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부스럭거리면서 빵과 과일을 꺼내었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침입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태연했고, 방을 착각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혹시? 칼릭스는 이 방에 없는 한 마리를 떠올렸다.

“……마카롱 님……?”

남자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더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드럽게 맛없네. 이건 너 먹어라.”

그러고는 한입 베어 문 사과를 던지는데…… 마카롱이다. 이 남자는 분명 마카롱이었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큼지막한 사슴 고기가 들어간 스튜가 먹고 싶어서. 잠시 나갔다 왔지. 네 돈 좀 썼다?”

“아…… 예, 뭐…….”

그러고 보니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이 낯설지 않더라니…… 칼릭스의 눈빛을 느꼈는지 마카롱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빵을 씹다가 다시 말했다.

“옷도 빌렸다?”

“아…… 네…… 뭐…… 그런데 왜 굳이 남자 모습으로……?”

“여자 혼자 다니면 피곤한 일이 많아.”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카롱은 제 누이보다 인간에 대해 잘 아는 듯했다. 제법 세심한 부분까지.

“이 남자는 친구랑 놀러 왔다가 호수에 빠져 죽었지. 친구가 등을 밀더라고. 호수에서 기어 나오는 걸 발로 막 짓밟고…….”

“아뇨, 보통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진 않죠.”

칼릭스는 속으로 남자의 죽음을 잠시간 애도했다. 마카롱은 체리를 한 알 먹더니 오, 하며 감탄했다.

“이건 맛있네. 로젤린 줘야지.”

“…….”

요즘 따라 제 취급이 한없이 낮아지는 기분이었는데, 단순한 기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마카롱 님.”

“부르지 마라. 그래봤자 안 줄 거니까.”

아니 저 인간이 정말…… 체리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닌데도 칼릭스는 울컥했다.

“어제 누님의 말…… 기억하시죠.”

남자가 체리의 씨를 불량스럽게 바닥에 툭 뱉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에 비하면, 그의 눈은 착실하게 칼릭스를 담고 있었다.

“누님이 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 자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란 건 부정할 수가 없군요. 살아 돌아온 누님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할지도 모릅니다.”

마카롱이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웃었다.

“어려울 텐데.”

이 종족…… 자신감이 정말 넘쳐 난다.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위험 요소를 주위에 둘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누님께서도 기억해 내신 만큼 경계할 테지만, 상황상 나서기 힘든 경우도 있을 테니, 마카롱님께서 잘 좀 봐주시죠. 혹시 누군지 알아내신다면, 저에게 꼭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맡겨 놨냐?”

“꼭 좀 부탁드립니다!”

칼릭스가 울컥해서 외치자 마카롱이 낄낄 웃었다. 마카롱은 봉투를 뒤적이며 빵을 꺼내더니 쭉 찢어 먹기 시작했다.

“뭐, 기본적으로 그놈이 다른 인간들을 죽이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저거는…….”

마카롱이 말한 ‘저거’는 빵 냄새를 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로젤린이었다. 머리는 산발을 해서는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마카롱이 애잔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많이 모자라니깐…….”

로젤린이 고소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빵으로 손을 뻗쳤다. 마카롱이 그녀의 손을 찰싹 쳤다.

“드러운 기지배. 세수하고 손 씻고 와!”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로젤린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낯선 남자가 마카롱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마카롱의 말을 따라 세수하러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바라보던 마카롱이 고개를 돌려 칼릭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쭉 찢어져 있었다.

“건드리면 곱게는 못 죽지.”

농담처럼 가벼운 어조임에도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아 말해 주겠는데…….”

“네.”

“저게 저렇게 진짜 심각한 수준으로…… 좀 거시기 해도.”

남의 누이를 이거 저거하면서 거시기 하다며 욕하는 통에 칼릭스는 뚱해졌다. 마카롱이 피식 웃으며 칼릭스의 볼을 꼬집었다.

“쟤 마력이 제법 대단한 수준이라서 말이지. 어디 가서 쉽게는 안 당할 테니까, 안심하라고.”

로젤린, 제 누이가 강하다는 것쯤은 이미 칼릭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카롱이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또 궤가 다른 이야기인 듯했다. 마카롱이 중얼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마력이 강하단 말이지…….”

“마카롱 님보다 말입니까?”

“아아니?”

아, 역시 마카롱이 더 강한 것인가? 칼릭스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카롱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나를 포함한, 이때 동안 만난, 마력을 가진 모든 것들 중 가장.”

칼릭스는 그의 말을 곰곰이 되뇌었다. 마력을 가진 모든 것들 중, 가장 마력이 강하다? 칼릭스는 알 수 없는 세계라 하더라도, 마카롱의 말이니 믿을 수는 있었지만…….

칼릭스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온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눈은 퉁퉁 부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마카롱이 로젤린을 맹한 어린아이 다루듯 할 때마다 칼릭스는 번번이 울컥해했지만, 실은 그 또한 제 누이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을 했다.

그저 먹을 거 좋아하고, 예쁜 것도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로젤린. 그런 그녀가 매우, 굉장히, 엄청나게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마카롱이 로젤린의 산발이 된 머리를 하나로 땋았다. 로젤린은 체리를 먹다가 화색을 지었다. 맛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칼릭스는 마카롱이 던져 준 맛없는 사과를 먹었다. 곧 로젤린이 그의 입에 체리를 넣어 줬다. 달콤하고 맛있었다.

일행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칼릭스가 잎사귀 말 뱀 말린 걸 빻아서 어쩌구를 먹고, 울기 전.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쉬지 않고 달리던 때와 비슷한 속도였다.

로젤린은 칼릭스를 염려해 쉬어 가자고 했으나, 칼릭스는 초췌한 얼굴로도 멈추지 않았다.

* * *

놀랍게도 칼릭스는 살아서 수도에 도착했다. 그들의 행군은 과하게 빠른 감이 있었다. 칼릭스처럼 단련된 남자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다.

성문 앞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이 도착해 있었다. 레이몬드였다. 로젤린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말 위에서 펄쩍 뛰어 날아드는 모습에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그녀를 받았다.

“위, 위험하잖아!”

로젤린이 아기 원숭이처럼 레이몬드에게 덜렁 안겨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조금 더 쉬다 오지, 왜 이렇게 빨리 올라왔어! 얼굴 까칠해진 것 좀 봐.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자기 전에 충분히 보습하라 그랬지, 내가. 하여간 좋은 거 사다 주면 뭐해! 바르지를 않는데!”

“발랐어.”

“이거 입에 침도 안 묻히고 거짓말하는 것 좀 봐!”

그는 로젤린이 생긋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몇 번 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꼭 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렸는데, 일주일 걸릴 거리를 사 일 만에 주파할 정도면 회복을 좀 과하게 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리라.

레이몬드는 그녀를 꼭 안은 채 시선을 돌렸다가 기겁했다. 말 위에 앉아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 있는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살이 쏙 빠져서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고, 눈 밑은 거뭇거뭇했다.

“카, 칼릭스?”

“경과 제가 이름만 부르는 친근한 사이었을 줄은 몰랐군요.”

심지어는 굉장히 까칠하기까지! 로젤린이 멀쩡하기에 눈치 못 챘는데, 역시 여행의 속도가 빠르긴 빨랐나 보다. 어린놈 답지 않게 언제나 냉철하던 칼릭스가 저렇게 흐트러질 정도면.

칼릭스는 “누님은 언제까지 안고 계실 작정이시죠? 그러다 엄한 소문이라도 돌면 책임지실 겁니까?” 하고 까칠함을 계속 과시했다.

뒤늦은 반항기가 도래한 걸 보니, 정말, 정말 힘들었나 보다. 레이몬드는 어설프게 웃으며 로젤린을 놓아줬다. 칼릭스의 까칠한 모습을 본 로젤린이 연장자한테 그러면 못쓴다고 훈계했다.

“네, 누님. 잘못했습니다.”

이 자식…… 선택적 까칠함이냐…… 레이몬드는 그를 눈으로 흘겼다.

로젤린은 먼저 단장실에 들러 복귀 보고를 해야 했다. 여행 내내 입고 있던 긴 후드에는 먼지가, 부츠에는 진흙이 잔뜩 엉겨 있었다.

로젤린은 그 꼴로도 태연하게 단장실로 향하려 했으나,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말렸다. 기숙사 가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가야 한단다. 조금 귀찮았지만 인간 세상을 조금이나마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에, 로젤린은 그것이 필요한 과정이란 것을 인정했다.

기숙사에 도착했다. 로젤린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가에는 빗자루와 물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로젤린의 수습 기사,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부지런히 청소 하는 중인 듯했다. 슥슥 삭삭. 쉬지 않는 빗질 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 있었다.

로젤린은 방문 바로 옆의 벽에 딱 붙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조금 기다리니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닥을 울리는 소리의 무게. 걷는 습관과 보폭을 고려한 결과.

‘레티시아.’

그녀였다. 성큼성큼 소리가 다가왔다.

3.

2.

1.

쉬익!

눈으로 인지하기도 전에 로젤린의 손이 먼저 움직여, 빗자루를 들고 막 방을 나서는 레티시아의 목덜미로 향했다. 로젤린은 그녀의 완벽한 사각에 들어가 있었다.

수습 기사들을 교육하던, 다른 말로는 습격하던 초반에는 수도로 목덜미를 내려쳤다. 어느 정도 위기감이 있어야 한다는 로젤린의 판단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습격을 감행할 때마다 그들이 번번이 기절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반나절씩.

하루에 세 번 습격당한 에버하르트가 24시간 중 20시간을 누워 있게 되자 로젤린도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그냥 목덜미를 잡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수습 기사들이 기쁨의 눈물을 줄줄 쏟아 냈었다. 사실 그마저도 막는 것을 힘들어 했으나, 최근에는 제법 높은 수준으로 주위를 읽게 되었는데 상급자가 자리를 비운지 오래되어 해이해진 것은 아닐지.

로젤린은 평소보다 날카롭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자락이 흐트러지자, 그 미세한 소리를 들은 레티시아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빗자루를 등 뒤로 돌렸다.

탁!

로젤린의 공격이 정확하게 빗자루에 막혔다. 오, 제법인데. 로젤린이 씨익 웃었다. 레티시아는 사나운 얼굴로 뒤돌았다.

“누구…… 악! 로, 로젤린 경!”

레티시아가 공포인지 기쁨인지 모를 비명을 내뱉었다. 로젤린이 판단하기로는 공포 쪽에 좀 더 가까웠다.

“훌륭합니다. 레티시아.”

문밖에서 터져 나온 레티시아의 비명 같은 외침에 방 안의 에버하르트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로젤린은 그 순간 복도에 있던 물 양동이를 들어 그에게 냅다 던졌다. 에버하르트는 화살같이 앞구르기를 시전해서 양동이를 피했다. 멋진 솜씨였다.

그의 뒤에서 양동이가 구르며 굉음을 냈다. 에버하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른 힘을 이용해 부드럽게 일어났다.

“로젤린 경! 언제 오셨, 아니, 검은 달을 가르는…….”

“아, 검은 달을 가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경례를 먼저 해야 했는데 반가운 마음이 앞서 말이 횡설수설 두서없이 나왔다. 로젤린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훌륭해졌습니다. 저는 아직 복귀전이니 인사는 생략해도 좋습니다.”

로젤린이 없는 사이에도 열심히 수련한 것이 딱 티가 났다. 로젤린의 칭찬에 두 사람이 연신 몸을 들썩이며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들과 떨어져 있었던 게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쑥쑥 자라 있었다. 실력도, 육체적 성장도. 로젤린과 눈높이가 비슷했던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키를 넘어섰고, 진즉에 로젤린보다 컸던 레티시아도 훌쩍 자라 칼릭스와 비등할 정도였다.

“건강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생각보다도 빨리 돌아오셨군요. 혹시 몰라서 미리 청소해 놓길 잘했네요.”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는데요.”

수습 기사들은 로젤린 옆에 딱 붙어서 조잘조잘 아기 새처럼 떠들어 댔다. 로젤린 경이 습격해 주지 않아서 좀 허전했다는 둥,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습격했다는 둥. 요즘 다른 수습 기사들이 우리들을 부러워 한다는 둥, 조금은 쓸모없는 내용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여 가며 반응했다.

로젤린은 깨끗해진 방 안을 보면서 후드의 끈을 풀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눈치챈 레티시아가 에버하르트에게 눈짓했다. 나가라는 뜻임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에버하르트는 뭉그적대며 방안을 떠나지 않았다.

“저도 키가 많이 커서 레티시아를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티시아가 저보다 더 자라더군요. 평생 지나도 따라잡기 힘들지 않을까요?”

별 쓰잘머리 없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로젤린은 옷을 벗는 걸 멈추지 않았다. 후드와 겉옷에 이어 이제는 셔츠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터라 레티시아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가 에버하르트의 갈비를 팔꿈치로 푹 찍으려 했지만, 피하는 것만은 이제 수준급이 되어 버렸는지 간단하게 막았다.

‘이게!?’

레티시아는 울컥해서 그를 밀어냈다.

“나가.”

“잠시만 좀 더…….”

“좀 더 보겠다고? 미친 거 아냐? 꺼져!”

“좀 더 얘기하겠다고!”

에버하르트는 밀려나지 않았다. 말라깽이 같던 예전에 비해, 근육도 키도 성장한 덕분인 듯했다. 이게 왜 버티고 난리야!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며 소음을 만들어 냈지만 로젤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로젤린 경, 비스타는 어떠셨어요?”

“맛있는 게 많았습니다.”

“아, 맞아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까 다른 지방의 음식들도 되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에버하르트는 레티시아에 의해 슬금슬금 밀려나면서도 끝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눈은 초롱초롱하고 얼굴에는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영웅을 만난 소년 같은 반응이었다. 로젤린을 존경해 마지않는 레티시아가 질릴 정도였다.

아직까지는 힘의 우위를 점하는 레티시아가 겨우 승리했다. 로젤린이 세 번째 단추에 손대기 전에 그를 몰아낸 것이다. 그녀는 로젤린의 제복을 챙겨 주고 나오자마자 에버하르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부, 부러져! 부러졌나? 부러졌어!”

“로젤린 경이 옷 갈아입는 방 안에 있고 싶으면 네 하잘 것 없는 걸 떼어 놓고 와…….”

살기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에버하르트가 움찔했다. 하기야, 자신이 생각해도 좀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다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뿌리들은 소탈한 영웅들을 좋아한다고 레티시아!”

“제국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의 영애에게 소탈하다는 말을 잘도 붙이는구나.”

“전혀 권위를 세우시지 않는 분이잖아.”

에버하르트는 귀족답지 않다는 말을 재주 좋게 돌려 했다. 레티시아도 후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고생의 순간이 눈앞에서 아른아른했다.

에버하르트도 비슷하게 고생했지만 받아들이는 게 좀 다른 듯했다. 뿌리 출신이라 그런 것 같았다. 구색만 어설프게 갖춘 ‘뿌리’라는 가문 이름은 그들이 평민이라는 것을 전혀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부각시키는 역할만 했다.

그들이 이 귀족 세계에서 천대받고 멸시받는 일은 전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뿌리들끼리의 연대 하나만큼은 끈끈했지만, 외부적으로 기댈 곳이 전혀 없었는데…….

대륙을 강타한 그 영웅담의 주인공이 제 상급 기사이니,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보니 다가오는 게 남다른 듯했다.

그녀가 마인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급 기사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얘기가 자자하게 공표된 날. 에버하르트는 지금과 같이 흥분하면서 “끝내주는데!”라는 말을 했다가 레티시아에게 얻어맞았다. 하여간 언동을 고급스럽게 좀 쓰라 했더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에 대한 감상은 몇 개월 주기로 바뀌고 있었다. 실력 없는 기사에서 죽음에서 생환한 자. 그리고 지금은 전장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마인이라는 점이 문제될 뻔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다른 기사단과 귀족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하얀밤 기사단을 하나로 뭉치게 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들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끓어올랐다.

아니, 기사가 충성심 뛰어나고 잘 싸우면 됐지! 마인이니 아니니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요즘도 촌스럽게 마인이 불길하다고 박해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 어느 시대 사람이지, 당신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그녀를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넣기에 급급했다. 욕해도 내가 해. 우리 하얀밤 기사단원을 왜 네가 욕해!

언제나 정중하고 고결했던 하얀밤 기사들이 시정잡배들처럼 껄렁한 폼과 빛나는 눈으로 사냥감을 물색하고 다녔다. 로젤린의 ‘로’ 자만 나와도 어디선가 하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귀신 같은 솜씨로 인해 모두들 입단속을 해야만 했다.

이번 사절단 임무로 한층 더 지위가 높아진 2황자의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이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들썩이는 성을 안정시켜 놓은 당사자들은 더 이상 그녀를 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인인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2황자 전하께서 그녀를 받아들이셨는데 더 할 말 있느냐고 사람들을 겁박하고 다닌 게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다들 조금 찜찜해 할지언정 마인이라는 것을 문제 삼지는 못했다.

게다가 로젤린과 함께 싸운 하급 기사와 상급 기사들은 모두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다. 생환가능성이 거의 없던 2황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 자체가 그 방증이었다. 아마 로젤린이 아니었더라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며, 2황자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 했을 테다.

로젤린과 직접 등을 맞대고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은, 아 역시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쩐지 세더라니 마인이었구나.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더라니. 마인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상급 기사들의 얼굴에서는 다행이다, 라는 숨겨진 뒷말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복도 사방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창 너머, 멀리서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연무장까지 흘러갔나 보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까운 계단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릴 쯤엔 전부 정리가 끝났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복도에 햇빛이 쏟아졌다.

* * *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설원의 월계수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그대에게. 오랜만이로군, 경. 앉지.”

칼릭스는 리카르디스의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딴눈을 팔면 안 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이라니.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인 칼릭스가 발을 들일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군. 이 주 뒤쯤에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닌가?”

칼릭스는 여기서 황자가 걱정하는 사람이 제 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는 태연하게 잘도 묻고 있었다. 하기야 황자와 자신은 그런 시답지 않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긴 했다.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많이 회복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픈 부분이 조금 남아 있다는 건가?”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이십니다.”

“식욕은?”

뭘 묻고 있는 거지, 이 황자는? 남의 누이 식욕 사정을 왜 저가…… 칼릭스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빤히 보고 있음에도 리카르디스는 뻔뻔한 낯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을 촉구했다.

“들르는 음식점마다 주방장이 인사 나올 정도는 되십니다.”

리카르디스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까랑 비슷한 행동인데 의미가 확연하게 갈렸다.

“아플 때는 잘 먹어야지.”

“그……렇습니다…….”

뭔가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도, 제법 진지한 태도를 보이며 묻고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도 그렇고, 황자도 그렇고. 까다롭고 까칠한 자들이 푸딩처럼 말랑말랑한 태도를 보였다. 이상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로젤린 경은 소고기 파인가, 돼지고기 파인가?”

물론 이런 질문들은 영 이해할 수 없었으나 황자가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어 그저 웃어넘기지 못했다. 대체 자신이 왜 2황자 리카르디스와, 2황자의 집무실에서, 제 누이의 식성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회의감이 몰려왔다.

칼릭스가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지자, 리카르디스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수석 비서관 잇세리온이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큼, 흠. 하면서 무형의 재촉으로 옆구리를 찌르기까지 하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칼릭스는 포기하고 열심히 과거를 돌이켜 보며 제 누이가 소고기 파인지 돼지고기 파인지를 판별했다.

“구워 먹는 건 소고기를 좋아하시지만 양념된 건 돼지고기를 조금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고기면 잘 드시는 편입니다.”

“생선보다는 육류겠지?”

“사실 생선도 좋아하십니다. 가시를 좀 거슬려 하시긴 하는데, 발라 드리면 잘 드십니다. 짭짤하고 쫄깃한 생선보다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쪽을 선호하시고요.”

“질보다 양인가? 양보다 질인가?”

“기본적으로 양이기는 하지만, 최근 입맛이 고급스러워지셨는지라 어느 정도 질이 따라 주기는 해야 합니다.”

잇세리온은 진지한 표정으로 깃펜을 열심히 놀렸다. 칼릭스는 흘끗 그 종이에 써진 내용을 봤다. 방금 전에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상하게 쓸데없는 그 정보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회의 결과를 써 내려가는 듯 신중한 표정이었다.

“초콜릿과 생크림 중에서는?”

“생크림을 더 좋아하십니다.”

잇세리온은 그럴 줄 알았다며 칼릭스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칼릭스의 얼굴 위로 피곤이 오도독 돋을 때쯤이었다.

“그럼, 그녀는?”

“예?”

그는 잇세리온이 건넨 로젤린의 입맛 보고서를 눈으로 훑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누이는 무엇을 더 좋아하냐고.”

칼릭스는 집무실에만 들어올 때만 해도 마음에 단단히 울타리를 세우고 방패를 들고 있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막아낼 만큼 공들여 세운 울타리였으나, 리카르디스의 이상한 질문 때문에 틈이 생겨 버렸다.

“그러고 보면 초콜릿 케이크를 자주 먹었지. 우리 세티스티아랑 같이.”

칼릭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반추할 정신도 없었다.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세티스티아의 입맛에 맞춰 준건지 잘 모르겠어.”

칼릭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제 누이를 위해 밤낮없이 고생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2황자쯤 되는 위치라면 제 이득을 위해 약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을 테다. 지금 일라베니아에서 ‘마인 로젤린’은 좋은 패. 단순한 도구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칼릭스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 아래 생각이 들쭉날쭉하게 뒤섞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칼릭스를 잠자코 지켜보다, 깃펜을 들어 ‘소고기’라고 적힌 품목 밑에 ‘레몬 밤 마리네이드.’라고 적었다. 칼릭스의 딱딱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지금 뭘 적는 거야…….’

황당했다.

“7년이나 내 밑에 있었는데.”

“…….”

리카르디스가 엄지손가락으로 제 눈썹 뼈를 훑으며 말을 흘리듯 내보냈다. 칼릭스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 뭐랄까 그 표정이…….

양립할 수 없는 붉은수레바퀴의 자식에게 보여 줄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가 자신의 울타리를 허물어서 속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제 누이를 끌어다가 보여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림이라도 그려서 보관하고 싶었다. 기뻐하지 않았을까? 누이의 일생을 크게 차지하고 있던 그 사람의 한구석, 그 한 자락을 누이도 차지하고 있었네요.

칼릭스는 속이 울렁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 기쁜 것도 같았다. 칼릭스는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확연하게 기쁜 기색이 묻어 있는 목소리라 좀 창피했다.

“쌉싸름한 홍차와 달콤하고 고소한 쿠키의 조합을 좋아하셨죠. 브라우니도 좋아하셨을 겁니다.”

“그거 기쁜 소식이로군. 티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니까, 또 억지로 먹였나 했지.”

리카르디스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세티스티아 황녀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끔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 * *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을 찾아온 손님으로 인해 잠시 대화가 끊겼다. 칼릭스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황금정원의 클로에.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이자, 큰뿔산양 레이몬드의 약혼자였다.

칼릭스가 가볍게 묵례했다. 클로에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는 서류 뭉치만 대충 리카르디스에게 전달하고 곧바로 방문을 나섰다. 레이몬드를 보고 가라는 그의 말에도 “바쁜 거 빤히 아시는 분께서.” 하는 대답만 남기고 사라졌다.

“흥미로운 소식이군. 이 주 전, 라고슈 왕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정보를 잘 은폐했는지 이제야 소식이 들어왔어.”

칼릭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라베니아 제국 아래 발타 다음으로 가장 큰 왕국 라고슈. 현재 라고슈를 다스리는 바이페렘 플로에토는 암암리에 발타의 하카브 왕자와 은밀한 관계라는 말이 돌고 있는 여자였다.

“플로에토를 실각시키고 싶어 하는 무리가 있나 본데, 아마 좀 힘들 것이다. 사랑에 빠져 사리분별이 흐려졌어도 결코 세력이 약하지는 않으니.”

“……라고슈의 바이페렘이 하카브 왕자와 음……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까? 좀 상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으나 리카르디스는 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 그런 사이다. 하카브가 어떻게 꼬여 내었는지 아주 죽고 못 살지. 올해 일라베니아의 건국제에 하카브가 온다고 했으니 깨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겠군. 불쾌하다. 내전이 길게 이어져서 플로에토가 못 오기를 바랄 뿐이다.”

“뭐…… 그런 식으로 일라베니아를 압박하려는 요량인가 봅니다. 일라베니아 측에서 라고슈를 경계하며 병력을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는 이득이 있을 테니까요.”

“내전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라야겠군.”

리카르디스가 서류에 슥슥 몇 글자를 더하더니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까보다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었다. 뭔가 급하거나 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리라.

칼릭스는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리카르디스는 호오, 호.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비스타에서 귀엽고 예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하고 돈도 엄청 많기로 유명하다는데, 알고 있었나?”

큽. 칼릭스는 역류하는 찻물을 겨우 삼켰다. 급한 서류가 아니었잖아! 아니, 라고슈 왕국의 내전이 발생했다는 중요한 안건 다음에 왜 저런 쓰잘머리 없는 것이 끼어 있어!

칼릭스는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제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이런. 오해하지 말게. 로젤린 경의 소문에 딱 붙어서 와 버린 탓이니. 그래서 리쉬의 꿀은 맛있던가? 하나씩 먹어서는 성이 안 찰 텐데. 가는 길에 하나 선물하지. 이렇게 종이에 쌓인 꽃다발 말고, 유리병에 담긴 걸로다가.”

“…….”

이제는 대놓고 놀리고 있었다. 시장 거리에서 제 누이와 꽃을 물고 꿀을 쪽쪽 빨고 다닌 소식이 수도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서류를 한 번, 그리고 칼릭스를 한 번 번갈아 보는 행동으로 그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읽던 리카르디스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경의 누이가 힐리사고 왕국의 변방에서 크레안 티다니온의 현신이라고 불린다는군.”

정말로……? 칼릭스의 미심쩍어 하는 표정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인가 보다.

“다행히도 나쁜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일라베니아에서 멀어질수록 크레안 티다니온의 악한 성향은 순화되고는 하니. 그저 대단한 신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아무튼 간에 이 소문은 좀 위험한 것 같군…… 흠. 잇세리온, 클로에에게 이건 일단 묶어 두라고 하지.”

“예, 전하.”

칼릭스는 지금 실시간으로 정보가 분류되어 퍼지게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확실히 이 건은 수도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특히나 황제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었고, 그런 정보들은 뒤틀려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황자가 제 누이의 울타리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눈앞에서 보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일개 호위 기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나 손을 쓴단 말인가?

칼릭스의 눈에 미심쩍은 빛이 올라오자, 리카르디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로젤린이 맹한 만큼 칼릭스가 배로 빠릿빠릿한 느낌이었다.

“이봐, 경.”

“예, 전하.”

칼릭스의 눈동자는 로젤린의 것과 똑 닮은 녹색이었다. 닮은 것은 색뿐만이 아니었던 건지 날카로운 눈매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물어뜯기도 좋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눈앞에 있는 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못하는 사냥개를 사냥개라 부를 수 있나?”

칼릭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일라베니아 황실의 사냥개. 번견으로 불리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성상, ‘개’나 ‘개새끼’ 따위의 말을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으나, 보통은 당사자가 없는 뒷담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지만 우선적으로 열이 조금 올랐다. 리카르디스가 그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하더니 혀를 찼다. 쯧.

‘아니 혀까지 차?’

칼릭스의 얼굴에 울컥하는 기색이 비치자. 리카르디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해는 하지 말게. 1황자 쪽 노친네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기분 나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래. 경이 마음을 못 정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살짝 넘어왔다는 걸 머리는 이해하는데 아직 마음이 이해하지 못했나 봐. 계속 시비를 걸고 싶은걸 보니. 그대도 애매하게 선에서 놀지 말고 확실하게 태도를 정하는 게 좋겠어.”

꿀을 선물해 주겠노라 놀릴 때부터 유달리 공격적이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나.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그대가 비록…… 그다지 좋지 못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을지언정,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세상 아닌가. 아, 그렇다고 경과 내가 친구라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말 하나하나를 참…… 칼릭스의 뚱한 표정을 본 리카르디스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칼릭스의 얼굴에서 로젤린이 보였다. 닮은 구석이 많은 남매였다.

“경은 로젤린 경과 아주 똑 닮았군.”

비웃음에 가깝던 입매가 부드러워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칼릭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놀랐다. 저런 눈빛을 하는 사람이었나, 저 사람이?

칼릭스는 제 마음에 여러 겹 방어벽을 둘러 두었다. 리카르디스가 이상한 방식으로 하나둘 깨고 들어왔으나 마지막 한 겹이 든든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이 마지막 벽은 무엇보다 두껍고 단단해 무엇으로 깨어 버릴 수 없다 생각했는데, 글쎄 이게…….

녹아 내렸다. 그의 미소에 사르르. 칼릭스는 제 표현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 깊숙이는 이해하지 못 했던, 믿지 못 했던 일말의 불신이 정말 눈 녹듯 흘러내려 어딘가로 떠내려가 버렸다.

단순히 제 누이를 위해 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저 믿음이 갔다. 그 담담한 말투 때문인지, 날카로우면서도 이따금 풀어지는 표정 때문인지, 누군가를 그리는 다정한 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폐부를 찌르는 말을 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칼릭스는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아버지?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붉은수레바퀴 가문? 그, 1황자 엘피디오? 아니면 그 엘피디오의 아버지인 황제? 그 누구도 정확하게 제 누이의 아군이 아니었다.

제 누이는 강했다. 하지만 그 강함이 귀족 세계에서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라는 무기를 쥐고 흔들기 위해 많은 자들이 손을 뻗칠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의 힘만으로는 제 누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로젤린은 언제나 누구도 손 내밀어 주지 않는 낭떠러지에 혼자 서 있었다. 그 아슬아슬하던 행위는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끝맺어졌고, 칼릭스는 바보 같은 짓을 두 번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하다못해 손을 잡고 같이 떨어지는 일이라도 해야겠다. 이것이 더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졌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이목이 확 집중되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칼릭스가 얼마나 로젤린을 닮았는가’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꿇자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슥 들렸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 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미친…….”

이건 리카르디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잇세리온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흘려 버렸다. 리카르디스의 표정도 구겨져 있었다. 칼릭스는 두 사람의 경악 어린 시선을 뒤로 계속 말을 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칼릭스 경! 인생은 너무나도 길고……!”

잇세리온은 어버버 말을 더듬으며 그를 만류했다. 칼릭스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리카르디스를 마주 보며 흔들리지 않았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칼릭스 경. 이게 갑자기…… 아니, 내가 확실히 하란 건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알지 않나?”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악! 미, 미쳤어! 미쳤나 봐! 칼릭스 경. 이게 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의 동공이 점점 더 커졌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명은 무릎을 꿇고, 두 사람을 벌떡 일어나 초조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우리 대화로 풀지! 경!”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이를 겁니다!”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낮지만 확고한 마침표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머릿속에 경종이 땡땡 울렸다.

“이게, 무슨 지금…….”

리카르디스는 말문이 막혀 그저 칼릭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하고 벌떡 일어섰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남매가 양 옆에서 번갈아 가며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 사람 황당하게 하는 것이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성인가?

칼릭스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잇세리온은 그 짧은 사이 너절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심각한 얼굴로 잠시 입을 가리고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도 이 돌발 행동의 여파가 컸는지, 십 분의 시간이 말없이 흘러갔다.

“그러니까 경이, 지금…… 내 기사가 되겠노라 선언한 게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만,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그럼 왜 이, 이, 이 사달을 만든 겁니까!”

잇세리온이 버럭 성질냈다.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제 결심을 보여 드리고자.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저라는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무력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지…….”

“저는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달고 있을 때,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일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간다고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후계자의 이름이 계속 남아 있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희 누님처럼 말입니다. 이 이름을 달고 만일의 사태에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게 힘을 모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아까의 칼릭스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심쩍고, 수상하다는 듯이. 숨기지도 않고 아주 대놓고 흘겨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멀쩡한 의자를 두고 다들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착석했다.

“칼릭스 경,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이냐면.”

“예, 전하.”

“꿀 한 조각 따러 갔다가 벌집이 통째로 떨어진 기분이다.”

“그렇습니까.”

“벌집 주위로 벌들이 날아다니긴 하는데, 독이 없는 종류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이제 남은 건 꿀이 가득한 벌집을 들고 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으로 벌의 궤도를 그리는 시늉을 했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칼릭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리카르디스는 저 태평한 남자의 머릿속을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여간 이 검은 머리 남매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말하라. 물어도 되겠느냐고 하지 않는 것은 그대가 내 사람이라고 서약했기 때문이다.”

칼릭스는 손을 깍지 끼고 엄지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제가 새삼스럽게 전하의 인품에 반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그건 바라지 않으니.”

리카르디스는 진절머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퍽 징그럽다는 듯 보는 시선에 칼릭스는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저 누님께서 전하를 놓지 못하기에.”

“단순한 가족애로 위험한 길을 걷고자 자처하는 것이냐.”

칼릭스는 “예.” 하고 대답했다. 딱딱한 결심이 묻어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봤다.

그는 이런 표정을 하는 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결의를 가지는지 잘 알았다. 아주 예전의 로젤린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단단하게 굳어 쉽게 부서지지 않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속이 갑갑해졌다. 정말 이 남매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일방적인 희생을 건네받은 기분이 얼마나 엿 같은지 설명을 해 주고 싶지만…….”

“…….”

“우선적으로 이 말부터 하지.”

리카르디스는 벌떡 일어나서 탁자 한 편에 놓아 둔 화병에서 꽃을 확 뽑아냈다. 잇세리온이 악 소리를 냈다. 그 귀한 꽃을……!

리카르디스는 화병의 물을 받아 칼릭스의 이마에 철퍽하게 묻혔다. 물이 뚝뚝 콧날을 따라 떨어졌다. 갑자기 물세례를 받은 칼릭스는 눈만 깜빡거렸다.

“영광의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를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의 기사로 임명한다.”

“전하!”

잇세리온이 소리쳤다. 손뼉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나마 불발이건만, 제대로 짝 소리가 나 버렸다.

“……솔직히 받아 주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손에 묻은 물기를 칼릭스의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그가 기가 막혀 하는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우직한 성질 머리들은 잘 알고 있지. 그대가 간자가 되기 위해 허언할 성격도 아니거니와, 다른 건 몰라도 제 누이를 끔찍이 아끼는 것만은 알겠다. 그대의 손으로는 결코 로젤린 경을 위험에 빠트리지 못 할 테지. 나는 그대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두려움을 믿는다. 잃어 본 자들만이 아는, 두려움을 믿는다.”

“예, 전하.”

칼릭스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리카르디스는 이후로도 한참을 더 칼릭스와 얘기했다. 한 치의 변함없는 표정을 고수하는 두 남자 옆에서, 잇세리온의 얼굴만 핏기가 빠져나간 듯 새하얘졌다가, 새파래지기를 반복했다.

미지의 존재, 의태가 가능한…… 마력을 다루는…….

정보가 오고 갈 때마다 잇세리온이 ‘헉, 억!’ 따위의 감탄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몇 번이나 중단 되었다.

칼릭스는 말하는 틈틈이 리카르디스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미 정보를 습득 했거나, 미리 짐작을 했다는 듯 침착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놀랍게도, 그는 칼릭스의 예상보다도 로젤린에 대해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홍차로 목을 축인 후, 잠시 손장난을 하며 머뭇거렸다.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전하?”

“얼마나 대단한 걸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나.”

“그, 대체 제 누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칼릭스는 드물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제 누이가 전과 완전 별개의 존재임을 어찌 알았느냐고?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모르는 쪽이 이상하지 않나? 사고 전까지만 해도 수습 기사들에게도 팔씨름을 지던 사람이, 기억을 잃고 난 뒤로는 암살자를 맨손으로 때려 잡고 제압하는데?”

“아버지께서 해명한 것과 같이 그저 마인임을 숨겨 왔다고는 생각 안 하십니까? 솔직히 제가 보기에는 그쪽이 더 설득력 있는 터라.”

리카르디스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로젤린 경이 태어날 적부터 마인이라는 말을 했었던가.”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단 한순간도. 로젤린 경이 정말 마인이었다면 세티스티아의 위험을 두고 보지는 않았겠지. 그녀와 내가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못했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신뢰할 수 있어.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칼릭스는 목이 잠긴 채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예, 전하.”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함구하라.”

로젤린이 과거의 ‘로젤린’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자신이 알고 있노라 제 누이에게 알리지 말라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깊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올 어떠한 이득이나 손실을 재어 보려 했으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 또한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가 제 누이에게 해가 될 만한 무언가를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명 받듭니다.”

순순한 대답에 도리어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미심쩍다는 듯 변했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뭐…… 그대가 어느 정도 나에 대한 믿음을 가졌노라 생각해도?”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까딱하자 칼릭스가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것 참 영광인 걸.”

리카르디스의 빈정거림을 듣던 칼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귀한 분의 시간을 너무 뺏었군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클로에를 통해서 연락하도록 하지. 영지로 내려갈 건가?”

“아니요. 당분간은 수도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칼릭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카르디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과연 붉은수레바퀴. 제 누이에 죽고 못 사는 모습을 보여도 실상은 전장에서 날뛰는 사냥개다.

‘처리해야 할 일이라…….’

리카르디스는 그 일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로부터 ‘로젤린’의 석연치 않은 죽음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뒤를 쫓은, 야수의 손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

그는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천천히 머릿속에 광경을 그렸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의 정체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여자, 남자? 나이는, 직위는, 목적은?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로젤린이라면 근무 중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도, 다른 이의 천막을 함부로 드나들지도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검지로 탁자를 딱딱 두드렸다.

‘그렇다면 임무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크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그녀에게 따로 임무를 내렸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 사냥 대회에서 죽은 부단장과 관련이 되어 있을 테다. 부단장이 그때 당시의 부단장 부관, 나단을 두고 굳이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얘기는…… 그 심부름의 대상과 로젤린이 친분이 있는 사이였을지도.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하시더군요.]

공격은 망설임이 없었다. 목표물이 절벽에서 떨어질 때까지의 집요한 추적. 단순한 쾌락 살인이라기보다는 목격자를 없애겠다는 목적이 분명하다. 정체를 숨기고 황성에 들어온 것 또한 단순한 흥미에 그치지 않으리라.

살아 돌아온 로젤린을 죽이려 하지 않은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그녀가 제 발로 직접 발타라는 사지에 들어갔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경계했을 텐데, 그 수상한 낌새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속마음을 능숙하게 속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위험인물인 셈이다.

로젤린은 사지에서 또 다시 살아 돌아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만약 그녀를 죽인 ‘그것’이며, 지금의 상황에 놓여 있다면, 반드시 로젤린의 죽음으로써 이야기를 끝맺길 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소름이 돋았다. 로젤린에게 가는 화살을 다 쳐 내고 있다 생각했건만, 그보다 더 위험한 무언가가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니.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유일한 변수라고 부를만한 게 있다면, 로젤린과 그자가 같은 성질을 띤 존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들 반응을 예상할 수 없었다. 호의? 적의? 스물다섯이 되는 동안 인간으로밖에 살아 보지 못한 자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변수는 일단 그대로 둔다. 이용하기엔 너무 불확실한 요소였다. 행운과 우연에 기댈 만큼 가볍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천천히, 조심히, 자세하게 풀어 나가야만 한다.

조급함에 놓치는 것이 없도록.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앉으라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앉겠습니다. 얘기가 길어질 듯하니.”

칼릭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번듯한 장식 하나 없이 생활과 집무에 필요한 가구만 갖춰 놓은 이곳은 일라베니아의 수도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저택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은 아들이 왔음에도 창가에 서서 바깥만 보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영지를 지키라 명령했다.”

“누님께서 아프셨습니다. 또한 2황자 전하로부터의 서신이 있었기에, 월장석 성에 발을 들여놓은 것뿐입니다.”

페르탄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누님이라고 부르고 있느냐.”

영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무시한 것, 또한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로서 월장석 성에 출입한 것. 두 가지의 큰 건을 두고 페르탄은 다른 점을 콕 집었다.

“알고 계셨군요. 누님께 그다지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칼릭스도 제 아버지가 모를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로젤린이 마인이라 해명한 사람이 그가 아니던가.

칼릭스가 아는 한,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녀를 마인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은, 아버지가 정확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로젤린’이 죽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또한 지금의 로젤린이 다른 사람이라는 점도.

“건방지게 굴지 말거라. 제 누이의 치마폭에서 좀 벗어났나 했더니, 안 본 사이에 아주 세 살배기가 되었구나.”

“붉은수레바퀴의 요람에서 벗어나 걸음마를 하는 중입니다. 자랑스럽지 않으십니까.”

페르탄은 몸을 완전히 돌려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붉은수레바퀴는 총명하고 강한 후계자가 있으니 걱정 없으리라. 숱하게 들어온 말이었으나…….”

그가 창가에서 테이블로 걸어왔다. 칼릭스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는 어리석고, 약하구나.”

칼릭스는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페르탄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케이크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먹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죽음을 알고 있음이 확실한데,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을 듣지 않고 누이를 보호하려던 자신을 질타할 뿐이었다. 칼릭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네가 붉은수레바퀴를 잊어버린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누이는요!”

쾅!

칼릭스가 테이블을 치자 찻잔이 흘러 넘쳤다. 페르탄은 손에 묻은 크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너마저 붉은수레바퀴를 위험하게 만들지 마라. 그것이 네가 달고 있는 이름 위에 서는 자로서의 의무이자, 숙명이다.”

“재밌는 말씀을 하십니다. 엘피디오야 말로 발타 이전에 일라베니아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입니다.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함부로 황족의 이름을 거론하지마라.”

“황제는 무능하지만 제 밥그릇만 있으면 만족하는 인물입니다만, 엘피디오는 무능하면서 남의 밥그릇까지 탐을 냅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아버지가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대륙 위의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엘피디오는 제 배 불리기만을 원할 텐데 진정 붉은수레바퀴만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칼릭스는 눈이 뒤집어져서 씩씩거렸다. 페르탄의 왼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흉터가 있는 부위는, 그의 통제를 벗어나 속내를 드러내고는 했다.

“엘피디오 전하는, 통제 할 수 있는 위험이다.”

그 개차반을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이라 말하다니. 바닥을 치던 존경심이 조금 올라왔다.

“그러나 리카르디스 전하는…… 위험하다.”

흘러넘친 홍차를 가만히 바라보는 페르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칼릭스는 그의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리카르디스 전하가 엘피디오보다 위험하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고.”

페르탄이 읊조리는 말은 반항기 넘치는 아들이 아닌,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 * *

황제 라이노는 분노했으나, 그를 지배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었다. 그 대상이 제 핏줄이라 할지라도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이상 그것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1황자 엘피디오는 두 살 무렵부터 라이노를 넘어서는 성력을 지녔다. 그의 모친이 지니고 있던 성력을 대물림 받은 것인지, 가까운 친족끼리의 근친혼으로 인한 돌연변이의 탄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두 앞으로를 기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중요한 건 ‘앞으로 완전히 성장한 엘피디오가 얼마나 큰 성력을 지닐 것인가’가 아니었다. 자신을 넘어섰다는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어린아이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그 자체였다.

어차피 축복의 밤은 누구도 띄울 수 없을 텐데, 이런 시대에 신성력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이델라브힘의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그에 걸맞은 사람이 없었기에,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때에 엘피디오가 태어났다.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고귀한 혈통, 그 첫 번째 아들. 신에게 선택받은 증거인 강한 신성력. 물려받은 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금발. 비록 아직 어릴지언정,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황제의 재목이 되리라.

자신이 내려놓는 것과, 뺏기는 것은 손에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라이노는 십여 년 후, 제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길 운명에 처했다. 비참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 감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미래의 일. 그사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 않나. 기다리자. 황제는 숨을 죽이고 세월을 보냈다.

엘피디오가 일곱 살이 되었다. 총명하여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고,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었다. 몇 명의 아래 형제들이 있으나, 엘피디오는 자신이 황제가 되리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라이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위험이 거대하게 차올라 목을 조였다. 그 아이가 성력이 약했더라면, 비천한 어미를 두었다면, 적자가 아니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이는 얼마든지 또 있다. 엘피디오는 너무나 큰 위험이다. 죽여야 한다!

그가 생각한 것 중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제 아들을 죽인 비정한 황제라 불리는 것이 제 아들에게 패배해 꼬리 말고 도망가는 무능한 황제보다는 나았다.

라이노는 일라베니아와 같이 발맞춰 걸어온 충실한 번견,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명령했다.

[엘피디오를 죽여라.]

갖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유일하게 망설인 순간이었다. 그의 가문은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황제를 지키는 일은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것. 그것이 몇 대를 걸쳐 온 오랜 사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명령은 후대를 위해 자라고 있는 새싹을 짓밟는, 그의 사명과 반하는 일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라이노의 욕망을 읽어 냈다. 그는 엘피디오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이 원할 때까지 군림하고 싶을 뿐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생각했다.

엘피디오를 살려야 한다.

선대 황제는 병에 걸려 죽는 그 순간까지 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가 특별하게 신성력이 강했던 것도, 특별하게 유능했던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아들 덕분이었다. 모두가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리는 하나. 싸움은 불가피 했다. 선대는 한 명의 후계를 정확하게 꼽지 않았기에 싸움은 선대가 죽을 때까지 치열하고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황제의 다른 아들들은 능력이 따라 주지 않을뿐더러 야욕이 없었다. 모두 엘피디오가 차기 황제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엘피디오에게도 그만한 대항마가 있다면, 황실에서 그가 유일해지지 않는다면…….

[아이를 찾겠습니다.]

[아이?]

[월계수의 고귀한 혈통이 아니더라도 신성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아이들은 있습니다.]

황제는 그 말만으로 백작의 모든 뜻을 알아챘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깊게 생각했다. 곧바로 황제가 씩 웃었다.

[아이를 찾아라.]

[명을 받듭니다.]

[엘피디오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사내아이.]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머릿속으로 아직 찾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그렸다.

일곱 살 전후의.

[엘피디오와 비등하거나 그를 넘어서는 신성력.]

강한 신성력을 지닌.

[황실의 혈통이 될 테니 아름다운 머리 색을 지닌 것은 당연해야 한다.]

밝은 금발이나 은발의 아이.

[명석하면 그 또한 좋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면 될 터.]

평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으니, 교육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적어도 이 년, 삼 년.

[그 아이의 부모가 될, 귀족 가문 또한 찾으라. 과거 내가 시찰을 간 적 있는 지역 안에서. 그 아이는 그때 태어난 것이다. ]

평민에게서 난 자식은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러니 변방의 영지에 시찰 갔을 때, 여인과 정을 통해 낳은 아이라 속이자는 것이다.

[이름은…… 그래. 리카르디스가 좋겠다. 다음 아이가 태어나거든 붙여 주려 했었지. 위대한 치세를 펼친 일라베니아 황제의 이름이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아이는 자라고 자라 엘피디오와 다투게 될 것이다. 쓰임새가 다 하는 날에 사라지게 될 황제의 꼭두각시.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휩쓸릴 작은 운명이 안타까웠으나 신성력은 황실의 전유물이다. 그 강한 힘을 지니고 황실에 오게 될 운명 또한 신의 안배이리라.

페르탄은 곧 한 명의 아이를 찾아냈다. 아이는 작은 야생동물 같았다. 뒷골목의 고아 출신. 쓰레기를 주워 먹고 구걸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바싹 마르고 볼품없다. 꾀죄죄한 데다가 행동거지가 사납다.

그러나 흙먼지에 가려져 있던 밝은 은발은 아름다웠고, 맑은 눈동자는 총기가 넘쳐 보였다. 나이 대도 적당하며, 신성력은 이례적인 수준. 고아이기에 핏줄의 개입도 없다. 완벽한 적합자였다.

아이는 변방의 겨울석류 자작 가문에 맡겨지게 되었다. 겨울석류 자작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고, 제 딸이 황비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덜컥 승낙했다.

자작의 딸, 밀리아는 지나가는 음유시인과 사랑에 빠져 일 년 전 여자아이를 낳은 후, 집안에서 구금되다시피 지내 왔다. 미혼의 몸으로 천한 평민 남자의 아이를 낳다니, 알려지면 귀족 사회에서 대대로 회자될 수치였다.

겨울석류 자작이 그 일을 숨긴 결과로 집안의 사용인들도 아이의 아버지를 모른다고 했다. 그 치밀함 덕분에 밀리아가 리카르디스의 부모 역으로 발탁된 것이다. 딸이 한 명 있는 흠이 있었으나, 그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리카르디스였다.

밀리아는 자신이 이 고아 소년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그 때문에 몇 년 뒤에는 바라지도 않던 황성에 끌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페르탄이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오는 당일 날에 들었다. 기겁할 일이었다.

그러나 밀리아가 처음 본 리카르디스에게 한 말은.

[어머, 오빠 생겨서 좋겠네, 우리 티아!]

였다. 밀리아의 품안에는 그녀를 똑 닮은 은발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가 안겨서 우꺄우꺄 소리를 내며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밀리아가 손을 올려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잔뜩 경직 시킨 채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뺨을 맞으리라 예상했던 것 같았다.

소년은 그녀의 김빠진 반응에 자신도 김이 빠진 듯 바짝 세운 가시를 눕혔다. 언제나 반항심 넘쳐 보이던 소년이 밀리아의 손길 한 번에 누그러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페르탄은 몇 개월 주기로 리카르디스를 보러 갔다. 바싹 마르고 작았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홀쭉했던 볼이 부드러워지고, 뻣뻣하고 정돈이 안 되어 있던 머리도 빛이 부서져 내리는 아름다운 은발이 되었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항시 구부정하게 몸을 옹송그렸으나, 곧게 뻗은 자세는 태생을 의심하기 힘들 정도였다.

겨울석류 가문에 끌려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많이 깨우친 듯했다. 아이는 총명했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 탓도 분명히 있었으나, 손가락에 박인 굳은살은 필사의 노력을 비추고 있었다. 고작 일 년 사이의 변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단발머리의 소년이 밀리아의 딸, 세티스티아를 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애정을 듬뿍 담고 있었다. 밀리아는 그런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소년은 더 이상 그녀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어린 새싹이 봄의 햇빛을 부드럽게 담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가족.

가족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연극을 위해 모아 둔 꼭두각시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페르탄은 가문을 뒤돌아 나가며 저 멀리 화원에서 어린 동생과 소꿉놀이하는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가 오바, 오빠. 하면서 알 수 없는 옹알이 같은 걸 섞어 무어라 말하자, 리카르디스는 더 없이 행복하게 웃었다.

햇빛이 비추는 작은 정원 속. 아름다운 은발의 소년과 소녀. 여기저기 들꽃이 피어 있고 아이의 장난감 위로 무당벌레가 앉아 있다.

평화롭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었다. 그녀가 제 오라비를 따라 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별장에서 돌아오는 길, 수십의 무리가 습격을 감행한 결과 마차가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마차의 파편이 황녀의 복부를 찔렀으나 그녀는 즉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었다. 자신보다 더 오래 그녀가 살길 바랐던 리카르디스는, 제 동생이 보다 빠르게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음에 더 괴로워했다.

어린 황녀를 관통한 나무 파편에는 리카르디스의 문양이 조각난 채 새겨져 있었다. 습격한 자들은 그 마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그 문양의 주인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 이야기를 리카르디스에게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슬픔에 잠겨 오랫동안 웅크렸지만, 곧 다시 일어섰다. 세티스티아가 떠났다 하더라도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슬픔에 온전히 잠기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페르탄이 보아 왔던 밀리아 황비는 영민하고, 당차고 좀 이상한 여자였다. 어딘가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 거친 황실에서도 기죽지 않고 제 딸, 아들을 위해 우뚝 서 있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은 이후, 밀리아 황비는 미쳐 버렸다. 보통의 사람처럼, 보통의 사람보다 더. 어떤 것에도 부서지지 않게 꼿꼿이 버티고 있던 그 힘에 반발력이 작용한 듯, 더 괴롭고 아프게 부서졌다.

하루 온종일 울다가 실신하고, 깜깜한 밤에 세티스티아의 방 안을 거닐고, 갑자기 수풀로 뛰쳐나가는 등. 속으로 삭이지 못한 슬픔을 표출하는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일부일 뿐이라, 그녀의 안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격정적인 감정은 마모될 줄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밀리아는 황폐해지고 쇠약해졌다. 어딘가 다치고 베이지도, 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밀리아 황비의 곁을 계속 지켰다.

페르탄은 밀리아를 자주 찾아갔다. 어떤 죄책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밀리아가 방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페르탄은 그녀가 아이를 잃은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해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밀리아 황비는 페르탄을 보고 화내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흐려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밀리아 황비는 페르탄에게 악을 쓰며 저주하는 대신,

[네가, 내 아이를 죽인거야.]

그녀가 소중하게 지탱하고자 했던 제 아들, 리카르디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정신이 이상해졌다기보다는, 꾹 눌러 담았던 그녀의 진심이 드디어 터져 나온 것이라고 페르탄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 말을 참아 낼 힘이 없었던 게 아닐까.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에게 모진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움직였다. 턱 근육이 씰룩이고 눈썹이 일그러졌다.

괴로워 보였다.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마주한, 무엇보다 아픈 칼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 내었다. 밀리아가 그 안에 담아 낸 것을 쏟아 낼 대상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밀리아 황비는 금이 가 있는 얇은 유리 같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너무 무거웠다. 무겁고 날카로워 그녀 자신조차 상처 입혔다. 리카르디스는 밀리아가 그 무겁고 날카로운 것들을 자신에게 쏟아 내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비워 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탓하지 만은 않았다. 미안하다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고 울기도 했다. 내가 너무 약해서 미안해. 리카르디스. 혼자서 버텨 내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숨이 닳는 듯 헐떡이며 울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에게 향하는 질타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페르탄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 했다.

세티스티아 황녀의 기일로부터 178일 후. 리카르디스는 밀리아 황비를 떠나 보냈다. 사인은 익사였다. 자살이었는지, 약해진 몸을 이끌고 산책하다 실수로 호수에 빠진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페르탄은 리카르디스를 찾아갔다. 밀리아의 서신에 길들여진 탓이었을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월장석 성으로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그저 커튼을 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울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나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정돈되지 않아 어지러웠다.

침묵을 지키던 리카르디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내가 없었다면 엘피디오는 죽었겠군.]

손톱이 서로 부딪치며 딱, 딱 불쾌한 소리를 울렸다.

[그래서 날 찾은 거였어.]

페르탄과 황제는 단 한 번도 리카르디스에게, 그가 황자로 둔갑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 적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엘피디오와 싸워 온 그 세월은 모든 이유를 가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말대로, 황제는 제 친아들을 배제하면서까지 제 욕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페르탄이 황제에게 아이를 찾자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엘피디오는 죽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이거 참…… 대단하군. 대단해…….]

그가 소파의 손잡이를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뼈가 날카롭게 돋아난 손등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멋대로 주고…….]

그가 고개에 힘을 빼고 앞으로 툭 숙였다. 머리가 흐르며 그의 얼굴을 가렸다. 움찔거리는 입술만 보였다.

[멋대로 빼앗아.]

페르탄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는가, 백작. 그대가 그랬지. 신성력은 황실의 전유물. 내가 힘을 지닌 것 또한 황실로 오게 될 운명을 신이 안배한 것이라고.]

방 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선명하던 햇살이 가득했는데,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것이었을까. 더욱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남자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렇군. 나는…… 이런 운명이었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런 운명이었어…….]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으며, 그 또한 운명이었으리라. 운명의 수레바퀴라고도 불리는 가문다운 태도를 언제나 고수했다.

그러나 페르탄은 이때 최초로 후회를 하게 되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흔하디흔한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일라베니아의 평화를 위한 초석.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붉은수레바퀴가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손에 남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바란 건 아니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러나 이미 그 길로부터 너무나 많이 걸어왔으며, 돌아본다고 해도 돌아갈 수는 없다. 앞으로를 준비하는 것이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붉은수레바퀴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서서히 깨져 가고 있는 어린 소년의 미래를 본 페르탄은, 그 순간만큼은 또 다른 운명이 그에게 찾아오길 바랐다.

* * *

로젤린의 귀환 소식에 기숙사 건물은 시끌벅적했다. 덕분에 로젤린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갇혀 있어야 했다. 어지간하면 리카르디스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더러는 눈물을 보이며 제 귀환을 축하해 주는 동료를 두고 떠나기에는 로젤린이 사회적으로 너무 성장한 상태였다.

쌀쌀맞게 굴던 상급 기사 몇몇조차도 부드러운 미소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로젤린 경.” 하면서 갓 태어난 강아지 새끼 솜털만큼 간지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변화가 몹시 반갑고 행복했던 로젤린은 쏟아지는 축하를 잔뜩 음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흐뭇해하는 로젤린에게, 에버하르트가 작은 의견을 냈다. 동료 기사들을 더 깜짝 놀라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문 뒤에 웅크려 숨어 있다가 갑작스레 앞구르기를 하며 튀어나온다든가, 큰 나무 상자에 몸을 구기고 들어가 있다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뚜껑을 열어 주는 순간 펄쩍 날아오른다든가 하는 식의 이벤트로 사람들의 깜짝 지수를 더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로젤린은 연무장의 나무에 숨어 있다 지나가는 파르딕트도 놀라게 만들었다. 파르딕트는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갑자기 나타난 로젤린을 보고 기겁해서 뒤로 넘어졌다. 그 뒤 그녀의 귀환에 기뻐하기보다는 그녀의 행위에 화냄으로써 로젤린의 기세를 한풀 꺾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로젤린은 행복함에 잠시 잊어버렸던 본 목적을 되찾아 왔다. 리카르디스를 만나러 가야 했다.

로젤린은 복도를 걷다 네스터와 마주쳤다. 얼굴을 붉힌 네스터는 자신이 상급 기사로 승급했노라, 은근히 자랑하며 그녀가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물론 그 은근한 자랑을 알아들을 리 없는 로젤린은 “아, 네 그렇습니까.” 정도의 건조한 답변밖에 해 줄 수 없었다.

저 멀리 보니 정원사가 나무를 솎고 있었다. 로젤린은 네스터와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네스터가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정원사가 가지를 솎거나 꽃을 새로 심을 때면 로젤린은 항상 그 곁을 떠돌았다. 운이 좋으면 잎이 한두 개 떨어진 꽃 무리를 거저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정원사의 발치에 떨어진 꽃과 풀줄기 중, 본인의 기준으로 예쁜 것들만 주워 모아 아래 둥치를 끈으로 묶었다. 어설프게나마 꽃다발의 형식은 갖출 수 있었다. 냄새를 맡으니 향긋했다. 로젤린은 뿌듯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길에 로젤린은 부단장실에 들러야 한다던 레티시아와 다시 마주쳤다. 로젤린의 간식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녀가 바구니에 샌드위치며, 케이크며, 과일이며 잼이며, 여러 가지를 바리바리 싸들고는 로젤린에게 안겼다. 로젤린은 당장 꽃보다 향기로운 빵을 음미하고 싶었으나, 드물게 식욕보다 목적이 앞선 상태였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간이면 리카르디스는 집무실에서 서류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정문을 향하던 로젤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문으로 가면 시종이 미리 방문자를 알리기 때문에 그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가야지.’

레이몬드와 잇세리온, 나단과 스타스가 창문으로 드나들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 했으나, 지금은 그들의 잔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리카르디스가 깜짝 놀라며, 아니 로젤린 경! 세상에! 언제 온 건가! 아니, 이 꽃다발은? 완벽하다. 역시 내 기사야. 보고 싶었다! 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른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져 왔다.

‘역시 창문으로 들어가자.’

로젤린은 호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벽을 기어오르다가 상급 기사 카일로에게 딱 걸렸다. 완전 혼났다. 로젤린은 제 원대한 계획을 필사적으로 피력했다. 카일로는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로젤린에게서 작은 쿠키 하나를 뇌물삼아 받아 들고는…….

“두 개 더 주시죠. 협상은 없습니다.”

라고 했다. 너무 강경한 태도라 두 개를 더 줘야 했다. 로젤린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고 카일로는 그녀의 반응에 은근 즐거워했다. 여동생이 두 명 있다더니, 놀리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로젤린은 테라스에 도착했다. 커튼은 반쯤 드리워져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천 자락이 팔락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과 풀벌레, 새가 저마다 요란하게 울었다. 그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로젤린을 단숨에 노곤하게 만드는 잔잔한 울림이었다.

로젤린은 꽃다발과 간식 바구니를 든 채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숨소리로 인해 그가 얕은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꽃다발과 간식 바구니를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리카르디스는 잔뜩 인상을 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 주고 싶었다. 로젤린은 테이블 옆에 있던 협탁을 끌어 의자 삼아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팔을 얹어 턱을 괴어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흔들렸다. 커튼이 춤을 추고 그 움직임에 햇빛이 고스란히 리카르디스에게 쏟아졌다. 그가 인상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로젤린이 턱을 괸 채 다른 손을 들어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과 그녀의 손이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그림자가 크게 드리웠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로젤린이 혼자 씩 웃었다.

그러고도 한참 지났다. 사십 분쯤. 팔이 아프지는 않지만 심심했다. 로젤린은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제 손 그림자를 변형시키며 놀았다. 햇빛이 강한만큼이나 그림자가 선명했다. 강아지, 여우, 새, 백조, 나비. 칼릭스가 과거의 로젤린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며, 지금의 로젤린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림자 나비가 나붓나붓 날갯짓하며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움직였다. 그때 리카르디스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자신이 베고 있는 제 손으로 볼을 문질렀다. 어딘가 가려운 듯이.

곧, 스르륵하고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이 두어번 깜박이더니 로젤린을 눈에 담았다. 그녀가 밝은 창밖을 쳐다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이마와 콧날의 선이 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다.

‘꿈인가?’

리카르디스는 엎드린 채로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사방에 햇빛이 시릴 정도로 내려쬐고 있음에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얼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로젤린이 두 손을 교차로 한 상태로 모으고 있었다. 날개 같았다.

그녀의 손이 그림자를 만들어 제 눈을 따가운 햇빛으로 부터 가려 주고 있었다. 손가락 틈새로 빛이 깜박깜박 점멸했다가 다시 나타났다.

테이블 위의 식은 홍차가 아직 향을 내고, 습도 하나 없이 바싹 마른 공기는 상쾌했다. 햇빛이 쏟아지며 테이블의 나무 무늬를 선명하게 다시 그리고, 공중에는 먼지가 반짝였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이블 위에 거대한 꽃다발과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간식 바구니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꽃 냄새와 달콤한 음식 냄새. 갖은 풍요롭고 예쁜 것으로 둘러싸여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사치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왜 지금의 이 순간을 꿈보다 더 꿈같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방금 깼는데도 잠이 몰려왔다. 무언가가 끝난 것 같기도,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로젤린이 그의 숨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전하!”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를 불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테이블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똑바로 앉아서도 별 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속눈썹이 나른하게 팔랑였다.

‘깨신 것 맞나?’

로젤린은 아직 꿈의 세계에 반쯤 정신을 걸쳐 둔 것 같은 그를 깨우기 위해 테이블 위의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전하, 제가 왔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위풍당당한 목소리에 비해 꽃다발을 건네는 손길은 수줍기 그지없었다. 리카르디스가 멍하니 꽃다발을 안았다. 들쭉날쭉 엉성한 데다가, 꽃봉오리가 없는 줄기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몇 개 있는 꽃조차 잎이 한두 개 떨어진 걸로 봐서는 어디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곧 꽃다발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색색의 꽃잎에서 향기가 흘러 넘쳤다. 푸릇한 빛깔의 향기가 선명해, 눈꺼풀 안쪽에도 색이 만개했다. 부드러운 이파리가 입술과 피부를 간지럽게 스쳤다. 가슴 안쪽 가득 봄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로젤린.”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뜨니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설픈 꽃다발이 아니라 갖은 보석과 귀한 것을 선물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꽃다발을 안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줬다.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예쁜 것만을 담아 소중하게 모아 온 것이리라. 자리에 쭈그려 앉아 한 송이 한 송이 판별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리카르디스는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몇 번이나 삼켰다가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보고 싶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네가 왔다.

* * *

[별 다른 일은 없나요?]

겨울석류의 밀리아가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페르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 있길 바랐던 것 같은 대답이었다. 페르탄은 당황했으나 단단하게 굳어 있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밀리아는 가만히 페르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당황을 읽혀 버린 느낌이었다. 페르탄은 가볍게 묵례하며 물러섰다.

날은 맑고, 길은 정돈되고, 바람도 잘 불지 않는 좋은 여행길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별다른 일’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황성이 코앞이었다.

그맘때쯤 다시 창문이 열렸다. 곧 황실의 일원이 될, 리카르디스가 창문에 찰싹 붙어 높디 높은 황성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찬사가 들리는 듯했다. 페르탄도 순백의 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군집한 성을 바라보았다. 티 한 점 없이 아름다웠다.

성에서 시선을 돌려 마차를 바라볼쯤에는 호위 대상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페르탄은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머리가 굳어 눈동자만 굴렸다. 바로 그때 마차 안쪽에서 소곤소곤 속삭이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마차 바닥에 호위 대상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아주 추운 곳이야.]

페르탄은 그녀가 말하는 ‘여기’가 그 아름다운 하얀 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히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고,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 불어와.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어둠이 내려 앉아 추위를 한층 더 혹독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야.]

가혹한 운명이 찾아오리라. 열 살 난 어린 아이에게 닥칠 것이라 예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고 싸늘하게.

밀리아는 거듭해서 경고했다. 이곳은 영원한 겨울이야. 버텨 내야 해. 더 차가워지고, 더욱 혹독해지더라도. 괴롭더라도 견뎌야 해. 사람은 약하지만,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페르탄은 밀리아의 말이 그녀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버텨야 해, 더 차가워지고 괴로워도 견뎌. 나는 약하지만, 너희를 위해 강해지겠어. 그렇게.

[언제까지요?]

페르탄은 자신이 질문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당황했다. 그 괴로움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일까.

밀리아도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하고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페르탄은 밀리아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이 자신과 같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잠시간의 공백 후, 밀리아가 어린 소년의 어깨를 꽉 쥐었다.

[봄이 올 때까지.]

영원한 겨울 속의 봄. 그려지지 않는 미래였다. 그녀 또한 그 모순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때까지 반드시 기다리는 거야, 리카르디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밀리아를 올려다보던 리카르디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방긋 웃었다.

[네, 어머니.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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