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8화 (202/220)

8

국경이 잠시 허물어졌다. 발타의 왕, 힉살라 아돈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이었다.

병사들은 하얀밤 기사단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귀환한 기사들의 증언에 따라 그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총원 백다섯 명 중 돌아오지 못한 기사는 서른여덟 명. 결코 작은 피해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절단을 습격한 집단이 검은달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전투는 훌륭한 승리였노라고 역사책에 자리할 만했다. 갈수록 몸집을 불리는 집단, 검은달이 ‘파편’이라는 독으로써 한층 더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른여덟의 피해로 살아 돌아온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이 모두가 이델라브힘의 도움이 아니겠느냐며 얘기했다.

“이, 이델라브힘이시여…….”

“우웨엑!”

발타의 깊은 숲, 프리움. 병사들은 앞에 펼쳐진 광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구역질했다.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 또한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거쳐, 시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접해 본 경험이 있음에도. 참혹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앞섰다.

시체들은 부서지고, 찢어지고, 갈라지고, 뭉개져 있었다. 푸른 잎에 엉겨 붙은 피가 거뭇거뭇하게 굳어 늪지대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각난 인간의 시체와 특유의 썩는 냄새가 그 풍경의 처참함을 더욱 강조시켰다. 그나마 위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시체들이 전부 검은달의 습격자라는 사실이었다.

“이, 이게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신입 병사가 고개를 위로 고정시킨 채 말을 더듬었다. 그의 눈동자에 상반신만 남아 있는 시체가 비쳤다. 피가 한 방울 뚝.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대도 한참 시간이 걸릴 만한 어마어마한 높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상상력을 발휘해 보아도 어떤 경위로 어떻게 전투가 진행되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2황자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의 부단장 부관, 큰뿔산양 레이몬드 안디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장소에서 검은달과 전투를 치른 자는 상급 기사 로젤린 에스터, 오직 그녀뿐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이름은 여타 다른 무리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상급 기사쯤 되면 실력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대충 파악되는 시체의 수만 해도 이십 여구가 넘어섰다. 심지어 그들 모두가 악명 높은 검은달의 일원이 아니던가. 일개의 기사 한 명이 강하다고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전투 지점으로부터 거슬러 가며 사절단의 시체 한 구, 한 구를 수습했다. 여기저기에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으나, 그 어떤 곳도 아까의 광경을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삼 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해 모든 임무를 끝냈다. 병사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마차와 말에 올랐다. 발타의 숲을 벗어나기 전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신입 병사가 머뭇머뭇 말을 꺼내었다.

“그게……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까요?”

누군가가 답해 주길 바란 것이 아닌 듯했다. 그는 멀어지는 숲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 * *

“마인이라는 거 있지!”

“누구?”

“우리 성에 계신 손님!”

“어머, 어머! 진짜?”

어린 하녀들이 소곤소곤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눴다.

잠자는 공주님처럼 며칠간 깨어나지 못했던 그 손님이 마인이라고? 세상에나. 이델라브힘의 가호를 받는 2황자 전하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이 어찌나 흥미로운 얘깃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저마다 알고 있는 그 ‘손님’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초록색 머리라더라, 자그마하고 순하게 생겼다더라, 부엉이를 한 마리 데리고 있다더라. 맞는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소문이 어떻게 비틀리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였다.

그들의 대화가 다소 컸던 탓일까. 계단을 오르던 여자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하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췄다.

‘흠…….’

그녀도 며칠 전 부터 들어 왔던 이야기였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간만 나면 그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통에 이제는 내용을 죄다 외울 정도였다. 이 입에서 저 입을 거치며 엉망이 되어 버린 소문들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만은 여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것.

여자는 잡념을 떨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깨어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기에.

“우리 잠자는 공주님이 일어나셨네. 오랜만이야, 로젤린 경.”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성사되는 경우는 첫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로젤린은 여자를 알지 못했다. 처진 눈을 가지고도 유약하다거나 순해 보이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경사도가 높은 눈썹 각도 때문인지, 붉은 입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로젤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젤린’의 기억 안에 이 여자가 있는지 뒤적여 보았다. 로젤린의 의문에 차 있는 눈빛을 읽은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정식으로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란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경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지 뭐니? 내가 요즘 이렇게 깜박깜박한다니깐.”

여자가 익숙한 태도로 로젤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도 멀뚱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열은 내렸고, 혈색도 좋네. 어디 아픈 곳 있니?”

“아니오. 아프지 않습니다.”

“잘 됐네, 그럼 식사나 할까? 아플 때는 잘 먹어야 해.”

여자가 하녀와 눈을 맞추며 적당히 손짓했다. 로젤린은 식사라는 단어에 몸을 들썩였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로젤린을 보며 여자가 아하하 웃었다.

“눈을 뜨고 있는 쪽이 훨씬 좋구나.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도 안 했었네. 마른가시나무의 세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좀 더 알기 쉽겠니?”

아, 과연. 로젤린은 그제야 누워만 있는 제 모습을, 보아 왔다던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사냥 대회 사건 때의 실종 직후에 한 번, 그리고 이번 발타 사절단 건으로 한 번. 우연히도 항상 의식이 없을 때마다 그녀의 영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친밀감을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인 듯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항상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폐는 무슨. 경이 올 때마다 항상 일이 터져서 말이지, 그걸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

마카롱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세실은 거대한 독수리의 불만 가득한 소리를 듣고는 자신의 말을 반추해 보았다. 아, 확실히 다르게 해석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 말고.”

마카롱이 가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를 멈췄다. 세실은 “굉장한걸, 말을 다 알아듣는 거니?” 하며 신기해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려 왔다. 세실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손짓했다. 중년의 남자가 성큼 발을 들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들과 복식이 비슷했으나 더 화려했다.

“백작님. 강철발굽 백작이 손님을 뵙고자 합니다.”

“이것 보라니깐. 내가 일이 터진다고 했지?”

세실은 딱 달라붙은 드레스를 입고도 능숙하게 다리를 꼬았다. 일이 터져서 재미있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손님이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전하거라. 비슷한 이야기만 몇 번째인지, 대체. 노망이라도 난거야? 하여간 귀찮은 늙은이라니깐.”

로젤린은 눈만 깜박거렸다. 기사의 입에서 나온 손님이라는 말이 어쩐지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실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로젤린 경을 찾는 사람이 아주 많아. 당장 수도로 귀환 시켜야 한다는 둥, 잡아가야 한다는 둥. 헛소리들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걱정 마렴.”

그녀가 손을 들자 하인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튼을 열었다. 넓은 창으로부터 빛이 쏟아졌다. 날카롭게 비죽비죽 솟은 회색의 탑이 줄지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탑의 꼭대기마다 거대한 발리스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어느 곳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전장의 한 중앙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귀족의 성이라기보다는 이곳은 마치…….

“이곳은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철의 요새 비스타. 내가 허가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으니.”

요새. 맞다. 그 이름이 딱 어울렸다. 어떤 사소한 장식으로도 꾸며져 있지 않은, 오직 적을 공격하고 막아 내는 것에 치중한 형태였다.

“설령 내 울타리 안에 마인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로젤린은 창밖에 두던 시선을 돌렸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우리 얘기할 게 많을 것 같네. 그렇지?”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상을 채웠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식사 준비 시간만큼 잠시 중단되었다. 로젤린은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는 무사하십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세실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볼에 보조개가 폭 파였다.

‘본인의 안위보다 2황자가 중요하다는 건가? 신성 제국에서 마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태평한 건지, 담대한 건지…….’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안위를 더 걱정하던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했다. 의식 없는 로젤린을 안아 든 채 마른가시나무 성에 입성한 2황자 리카르디스였다. 어찌나 유별나게 굴던지. 다른 사람이 로젤린을 대신 안아 들겠다 한마디 했을 때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던 것이 떠올랐다.

그에 그치지 않고 제 기사를 직접 침대에 눕히고, 겉옷과 부츠를 벗겼다. 제국의 황자가 손수 할 만한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뜻한 물을 대령하라 닦달을 해 대는 기세는 당장 누구의 목이라도 칠 듯 매섭더니,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닦아 내는 손길은 솜털보다 부드러웠다. 닿으면 부서질세라, 만지면 깨질세라.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얼른 황성으로 돌아가야 했음에도 최대한 시일을 늦춰 출발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로젤린이 하고 있는 행동도 딱 그와 같았다. 저가 마인이라는 사실이 들켰든 아니든 간에 황자 전하께서는 무사하신 겁니까? 부터 묻고 있으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실이 턱을 괴고 대답했다.

“어제 황성으로 출발하셨단다. 좀 피곤해하셨지만, 다친 곳은 없으셨어.”

“그렇습니까.”

로젤린의 시선은 먼 창밖을 떠돌았다.

[다친 곳은 없으셨어.]

그 한마디에 로젤린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일어난 이후로 내내 조급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다.

피를 토할 때마다 자신을 꽉 끌어안던 단단한 품.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던 젖은 속눈썹. 먼지가 쌓여 있던 오두막의 냄새. 숨죽인 울음소리. 그 조각난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괜찮아. 로젤린 괜찮다. 내가 여기 있어. 다정한 말이 그의 눈물과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로젤린…….]

흔들리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건강하시단다. 걱정 마렴.”

로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기사의 임무 그 이전에 리카르디스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다.

물론 마카롱으로부터 그가 무사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긴 했으나, 마카롱의 ‘무사’와 다른 사람들의 ‘무사’는 기준이 좀 다른 편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픈 곳, 상한 곳 없이 괜찮으냐를 기준으로 둔다면, 마카롱은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기준으로 두는 느낌이라. 영 신빙성이 없었다.

“적어도 5일 동안 의식불명이었던 경에게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니니까.”

로젤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5일?”

그 극렬한 기세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로젤린은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5일 동안 의식불명? 그렇다는 말은…… 내가 5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의도치 않았던 단식 기간을 정확하게 알게 되자마자 배가 고파 왔다. 로젤린은 주린 배를 잡은 채 테이블 위를 빠르게 훑었다. 무표정하던 기사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음식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세실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까의 생각을 정정해야 할 듯했다. 서로 아끼는 건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황자 전하 쪽의 감정이 더 깊어 보였다. 로젤린은 본능이 우세한 모양이고.

“어서 들렴. 전하께서 경이 일어나거든 환자식 그딴 거 말고 고기를 먹이라 하시더구나. 그냥 고기도 아니고 맛있는 고기라면서. 어찌나 민망해하면서 말씀하시는지, 나도 모르게 웃었다가 잇세리온 비서관에게 눈총 받았지 뭐야.”

로젤린이 눈을 반짝였다. 전하…… 감사합니다…… 진심을 다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충성하겠습니다…….

세실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의 반 이상이 고기였다. 로젤린은 흐물흐물해진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잠들어 있던 미뢰가 깨어나 축포를 터트리고 화려한 파티를 벌였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짚고 밀려오는 감동을 추슬렀다.

“입에는 좀 맞니?”

“네!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아,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 마인이라면서?”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앞과 뒤가 이어지지 않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다. 로젤린은 씹던 걸 꿀떡 삼키고 나서 “아니오.” 하는 건조한 대답을 했다.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세실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로젤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혼자서 검은달의 암살 부대를 막아 냈는데도 아니니?”

“네. 그들이 좀 약해서.”

“파르딕트 경의 그 커다란 방패를 맨손으로 부쉈다 하던데. 그래도 아니야?”

“네. 제가 좀 강해서.”

세실이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을 퍽퍽 치며 웃었다. 렉시드. 얘 좀 봐. 너무 웃긴 거 있지. 그녀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생각보다 뻔뻔한 구석이 있구나. 그런 점 싫지 않아.”

하얀밤 기사단의 명성은 이번 전투로 인해 한층 더 높아졌다. 생환의 가능성이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던 험난한 길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을안개의 스타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푸른등불의 카일로.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주목받는 이름이 있었으니…… 2황자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였다.

로젤린의 전투는 평범한 인간 기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은 물론이거니와 사망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전투 현장을 찾았던 병사들 또한 그 사실을 인지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은밀하게 퍼졌다. 누군가의 보고서에서, 어느 주점 술 취한 병사의 입에서, 기사들 간의 연락망을 통해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그의 고래만 한 방패를 단숨에 부쉈느니, 검은달의 암살자들을 파리처럼 보이게끔 하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느니 하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부터. 손을 한번 휘둘렀더니 산과 강이 갈라졌다던가, 절대 죽지 않는다던가, 2황자 전하를 아기 새 들듯이 한 손으로 들었다던가 뭐라던가 하는 과장이 보태진 것까지. 진실 여부를 판별하기 힘든 여러 소문이 섞여 있었으나, 인간의 힘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는 점만은 별다른 왜곡을 거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소문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크게 주목한 것이 하나 있었다. ‘파편’은 마력과 독의 결합이라더라! 해독제가 없다더라! 그렇다면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소문은 그녀의 아버지인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 끝맺었다. 장장 스물세 장. 상당한 분량의 해명 문이었다. 로젤린의 탄생 일화, 태어나자마자 엄마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둥의 자랑을 빙자한 쓸모없는 내용들을 다 치고 간추려 보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결론만이 남았다.

일라베니아 제국이 마인을 배척하니 갓난아이 시절부터 그 죄와 업보를 제 딸이 지고 가야했던 것이 아니냐. 우리 딸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니들이 잘못한 거다. 니들이 그렇게 이빨만 까던 때에 내 딸은 제국의 고귀한 2황자를 위해 제 목숨을 바쳤느니, 그 업보의 무게가 2황자 목숨의 무게보다 무거운 것이겠느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일라베니아가 들썩였다. 2황자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불길한 검은 달의 힘을 가진 마인이라니. 누군가가 신성한 제국에 나타난 흉조가 아니겠느냐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크레안 티다니온조차도 2황자의 앞길을 보살피는 것이라 말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비스타를 벗어나 대륙 구석구석에 퍼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호사가들의 그럴싸한 말로 인해 희대의 악인도 되었다가, 세상에 더없을 영웅도 되었다. 어린아이들조차 로젤린의 이름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나, 5일 간 자고 엿새째 느지막한 오후에 깨어난 장본인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세실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단다.”

세실은 그녀가 잠들어 있던 때에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들려줬다. 마른가시나무 기사단과 붉은수레바퀴 기사단이 국경을 넘어 사절단을 보호한 그때의 일부터, 지금 대륙을 들썩이게 만든 마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세실은 유심히 로젤린을 관찰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탓이었다.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이 파헤쳐진 상황이 아닌가. 두려워할까, 제 말을 의심하며 부정할까.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 격렬한 감정 속에서 진실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젤린은 세실의 예상을 벗어나,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버지께서 제가 마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마인이…….”

의자 등받이 위에 앉아 있던 독수리가 날개로 그녀의 머리를 퍽 쳤다.

“입니다. 마인…… 맞습니다.”

독수리와 한 여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니……? 세실이 떨떠름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밝혀도 괜찮습니까?”

“뭐…… 예전이랑은 상황이 다르니 말이야.”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력과 독의 혼합물 ‘파편’에는 성력이 어떤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그렇다면 마독 ‘파편’에서 마력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수만 있다면, 분리된 독은 충분히 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로젤린이 ‘파편’에 중독되기 한참 전부터 떠돌던 가설이었다. 그러나 마인이 없으니 검증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렇다 할 해결 방안도 나오지 않고 그저 지지부진하게 말만 끼얹는 사람만 늘어나는 판국에, 그녀가 파편에 중독되고 살아난 것이다. 영원히 가설로 묻혀 있을 뻔한 것을 로젤린이 이번 일로 입증해 준 셈이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 마인의 평가는 노예 이하. 일라베니아 제국 내에 있는 마인이라고 할지라도 발타의 암살자 집단 ‘검은달’과 한통속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검은달’의 존재로 인해 마인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을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핍박받고 살해당해 발타로, 다른 먼 곳으로 이주하거나 숨어 버린 사람들. 심지어는 찾아낸다고 한들 일라베니아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결코 일라베니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달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인간 병기들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강하며, 2황자 리카르디스를 위해 목숨도 바칠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제국의 기사 로젤린. 이 시국에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일라베니아의 마인이었다.

‘근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그녀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비스타를 벗어나 일라베니아 전역에 퍼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작정하고서 퍼트리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 존재를 시시각각 부정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마인, 그녀에 대한 동정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가며 만들어진 흐름은 뒤집기 힘들다.

그러나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로젤린은 속이 꽤나 답답할 것이다. 세실이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을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하지만, 그 가면 같은 얼굴 아래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치열하게 부서지고 있을 테지. 가엾어라. 이 어린 아가씨가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거센 풍파가 아닌가. 세실은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사실 조금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때 로젤린의 옆, 의자 등받이에 앉은 독수리가 부리의 넙적한 부분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 로젤린은 후식으로 올라온 마카롱을 독수리에게 내밀었다.

“이게 마카롱이야.”

“……?”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굉장히 중대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 만한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안했나? 태평하게 독수리와 마카롱을 나눠 먹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하게 안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혹시, 이 사태에 대해서 별 생각 없는 거 아냐?’

마카롱을 먹은 독수리가 달콤함에 취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음음…….” 따위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흥이 난 몸짓들이 방금 전 세실의 생각에 답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카롱을 먹어 보니 웬걸. 평소보다 잘 구워지긴 했다.

* * *

“서른여덟이라. 그리고 우리는 여덟 명이고?”

하카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틸라크로부터 전투 보고를 막 받은 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하얀밤 기사단에게 실례겠어. 그쪽은 사망자가 서른여덟. 그리고 우리는 생환자가 여덟이라 말해야 정확하니 말이다.”

아틸라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한 명, 한 명이 인간 병기나 다름없는 정예부대가 처참히 무너지다니. 심지어는 2황자의 생포 또는 척살이라는 임무도 완수하지 못했다. 돈은 돈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들어가고 소득은 없는 것이다. 도리어 잃으면 잃었지.

“사망자도 아니고 생환자가 여덟이라…….”

하카브가 낯부끄러운 보고 내용을 계속 읊었다. 아틸라크만 죽을 맛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국경을 넘어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도왔습니다.”

“음? 황금정원이나 푸른등불도 아니고, 마른가시나무와 붉은수레바퀴라. 이거 참신한데……. 무슨 생각으로 움직인 거지? 사절단을 보내서 친교를 맺은 직후인데 전쟁이라도 할 참인가? 황제가 절대 좌시하지 않을 텐데…….”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2황자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마른가시나무는 중립. 붉은수레바퀴는 1황자 파라고는 하나, 굳이 따지자면 현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자였다. 2황자를 도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돕는 것은 둘째라 치더라도 애초에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사절단이야 힉살라의 허가를 받았다지만 그들은 어떤 인가도 받은 적 없었다. 말인즉슨 그들이 국경을 넘은 이 일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비록 국경 코앞에서 2황자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2황자가 발타에 오기 전, 사절단의 인원을 늘려도 되겠느냐는 공문을 보낸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랬지. 허가했으나 엘피디오가 훼방을 놓아 원래 인원대로 오지 않았던가. 아, 그랬군. 비는 인원이 있었어.”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의중을 알아챘다. 발타의 국경을 넘은 사절단의 인원은 허가받은 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기사단을 포함한다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들이 원래 예정된 사절단의 인원이었다고 한다면 발타쪽에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애초에 허가 인장을 찍은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한 방 먹었군. 엘피디오가 하도 난리를 쳐서 증원을 막았다기에 별다른 수작이라고 생각을 못했다.”

하카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아마 리카르디스는 엘피디오의 반응 또한 예측했으리라. 엘피디오만큼 알기 쉬운 사람도 또 없으니. 만약 처음부터 삼백이라는 인원이 있었다면, 그 수에 맞춰서 습격을 준비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노림수가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강아지라고 생각해 작은 포획 틀을 준비해 갔더니, 다이어울프가 기다리고 있던 셈이었다.

“엘피디오는 배 아파 죽을 지경이겠군. 저가 한 말에 걸려 넘어지다니. 우스운 일이야. 나도 같이 걸려 넘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쯧, 하여간 쓸모없는 인사 같으니.”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공성 무기가 축소된 것 같은 무기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기들이었다. 백작은 ‘파편’의 등장 후 접근전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석궁보다는 훨씬 크고 발리스타보다는 작았다. 무게가 가벼워 들고 다니기에 용이했으며, 파괴력도 상당했다. 강력한 공격이 계속해서 쏟아진 결과로 검은달은 참패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단은 주로 평민과 용병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작은 압도적인 잔혹함을 원했고, 그런 경우에는 아무래도 귀족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이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쓸고 간 자리의 시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뭉개지곤 했다.

이번 전투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전투를 한 자가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 누가 일러 주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수작질도 어지간해야 화가 나지, 도를 지나치니 남는 건 두려움뿐이었다.

솔직히 하카브로서도 좀 질릴 정도였다. 전장에서 공포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하카브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그녀의 성정이 잔혹해서 벌이는 일이라기보다는 그 수단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성이 있는 미친개. 그래서 더욱 골치 아팠다. 발타의 전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 그녀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잘린 머리통은 따로 모아서 무언가 글자의 형태를 그려 놓았다는데, 아틸라크가 정확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았다. 하카브는 대충 감을 잡았다. 심한 욕설 따위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답군.”

하카브는 고개를 좌우로 잘게 흔들었다. 이후, 아틸라크의 보고는 그가 예상한 선에 흘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전투했고, 2황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보호 아래 무사히 귀환했느니 뭐니.

하카브는 턱을 괴고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붉은수레바퀴라…….’

그 이름을 듣고 있으니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무심한 표정을 고수하던 얼굴이 어른거렸다.

로젤린. 2황자의 호위 기사였으니 아마 죽지 않았을까? 가장 위험한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위치였으니. 아쉬웠다. 역시 빼돌려야 했나. 하카브는 곧 그 아련한 감정을 싹 지워야만 했다. 아틸라크가 제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로젤린에 대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검은 머리의 기사? 로젤린?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라고?”

“예, 전하. 검은 머리의 여자 기사가 서른 명이 넘는 습격 대원들을 상대했다고 합니다.”

아틸라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뒷골목의 건달들이 이따금 일 대 십칠로 싸워서 이겼느니 하는 허풍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검을 들어 보고, 조금이라도 전투와 전쟁을 해 본 자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경우에는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한없이 낮아진다. 심지어는 두 배, 세 배도 아닌 서른세 배에 달하는 적과 싸워 승리했다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았다고 해도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습격 대원들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미 여기저기 다쳐서 피 흘리고 있는 기사에게 전멸을 당할 것이라고. 정말 누가 알았겠는가.

그 전투에서 살아난 습격 대원은 한 명뿐이었다. 그가 보고하기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괴이하게 변한 검은 손을 휘두르며, 바람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고 했다. 그녀가 많이 지쳐 확인 사살을 하지 않고 돌아선 게 천운이었던 것이다.

그는 무서운 학살자가 전투 현장을 떠나고도 죽은 듯 누워 있었다고 했다. 한참 전에 사라진 그녀가 남긴 공포가 온몸을 짓눌러 왔었다고.

검은달에 들어오는 자들은 가장 먼저 감정을 죽이는 일 부터 했다. 그리고 백 명 중 다섯 명 정도만 살아남는 극도의 위험한 훈련들을 거쳤다. 오직 임무를 위해, 오직 검은달만을 위해, 크레안 티다니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이번 습격대에 뽑힌 인물들은 그중에서도 소수의 엘리트들이었다. 포로로 잡힐 시에 당장 자결하라는 명령까지 거리낌 없이 수행할 정도였다. 그런 이에게 마음 깊숙이 공포를 박아 넣다니, 얼마나 압도적인 전투였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이기는 싸움에 지고 돌아왔다. 총책임자로서 아틸라크는 한동안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치욕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정작 그 보고를 듣는 하카브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는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마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뿐. 그렇다면, 마수처럼 기이하게 변한 팔과 마인의 범위조차 뛰어넘은 힘이라면?

그 낯설고 기괴한 현상이 지표가 되어 길을 안내했다.

“로젤린, 그대는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멀리 있는 누군가를 그렸다. 하카브의 얼굴에서 뜨겁고 생생히 날뛰는 감정이 비치기 시작했다.

“로젤린. 그대가…….”

하카브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대가 ‘그림자’였을 줄이야…….”

대단하다. 이것은 마치 운명 같다. 이 세상이 그대와 나를 만나게 했는가. 내가 그대에게 끌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자세히 봐 둘 것을 그랬다. 하얀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흐트러진 검은 머리. 곧게 피고 있던 허리. 담담한 말투.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겉모습만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대는 그 푸르른 눈동자로 나를 어떻게 바라봤었지? 그대의 부드러운 피부 아래를 흐르고 있는 마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강하게 요동치며 울리고 있었나? 잔잔하게 소리 없이 그대를 휘감고 있었나?

하카브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디에즈가 어째서 내게…… 아니다. 어쨌든 연락을 해 봐야겠어.”

“예, 전하.”

“로젤린과 접촉하기 전까지 2황자는 당분간 건드리지 않는다. 괜히 밉보여서 점수를 깎을 필요는 없지. 이미 상당히 깎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2황자의 안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귀중한 존재였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 마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 일라베니아가 낳은 최초의 괴물. 죽음의 그림자.

하카브는 입술을 짓이기던 것을 멈추고 낯빛을 싹 바꾸었다.

“아틸라크.”

“예, 전하.”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너무 느리다. 그냥 내가 일라베니아로 가야겠다.”

아틸라크는 그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힉살라 아돈의 후계자 1왕자 하카브. 그가 지금 국경 너머 저 위험한 곳에 발을 디디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하카브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하카브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심장을 찢을 듯한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로젤린. 그대는 나의 검은 달인가?

* * *

리카르디스가 들고 온 검붉은 조각은 마력의 결정이라는 거창한 임시 이름이 붙여졌다.

신체가 이상할 정도로 발달된 암살자 집단. 마력을 이용한 독 ‘파편’.

최근 검은달이 휘두르는 두 가지 강력한 무기의 공통점은 마력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검은 조각이 그 무기를 이루는 근간이리라 생각했다. 마력의 결정을 어떻게 얻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이것이 일라베니아가 여태껏 풀지 못했던 문제의 해답이 되리라 직감했다.

일라베니아의 위업은 ‘축복의 밤’과 마력 숭배 집단 ‘검은달’. 두 가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축복의 밤을 띄워 얼마나 대륙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검은달의 위세를 약하게 했는지가 역대 황제의 치세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번 세대에 검은달의 몸집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아 대륙이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고질적인 문제 이외에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굶어 죽고, 검은달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대륙을 휘감는 불안감은 나날이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베니아의 현 황제 라이노는 이러한 사태를 조금도 완화시키지 못했다. 타고난 혈통과 귀족들 간의 긴밀한 정치 놀음으로 황위를 거머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약했던 신성력. 계속해 발목을 잡고 있는 근심거리가 다시 대두되었다.

황제의 자리야 이델라브힘이 내려 준 것이라 떠받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감히 의심이라는 것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마땅히 자리에 앉을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인가 하고.

능력은 없지만 눈치는 있어, 황제 라이노 또한 그러한 기류를 읽었다. 그는 불안했다. 네 살이었던 엘피디오의 신성력이 뛰어나다는 얘기까지 통제할 정도였다. 10살에 갑자기 나타난 2황자 리카르디스가 엘피디오와 황태자 위를 두고 다투지 않았더라면, 엘피디오는 성인이 되는 날 황제로 즉위했을 것이다.

두 아들의 밥그릇 싸움 덕분에 제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황제, 라이노. 역대 최악, 최약이라는 오명을 쓴 지금 이때에, 리카르디스가 검붉은 마력의 결정을 가지고 왔다.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오랜 숙적 검은달과의 악연을 끝맺음 지을 첫 단추가 될 수 있으므로.

1황자 엘피디오도 당분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크나큰 환대를 받을 것이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위기를 완벽하게 기회로 삼았다. 하여간 2황자도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잘 마중 나갔지 뭐니.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도 노고를 치하해 주시겠지.”

세실은 ‘노고를 치하’라는 대목에서 검지와 엄지를 붙여 원을 그렸다. 흔히들 화폐를 상징할 때 사용하는 손동작이었다. 로젤린과 마카롱은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심히 추측해 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하고서 포기해야 했다.

“페르탄도 무언가를 얻을 테지. 그 고지식한 남자가 그걸 바라고 움직이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네 아버지는 전후 처리로 리카르디스 전하와 같이 수도에 올라갔으니 당장은 볼 수 없단다. 너무 아쉬워 마렴. 그 목석 같은 인간이 나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너를 맡기고 간 거란다.”

“네.”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딸을 두고 2황자와 수도로 올라갔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나, 로젤린의 입장에서는 무정하다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 뚱하고 날카롭고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은 그 서운함의 방증이리라. 불쌍한 것.

세실은 눈썹을 아래로 한껏 휘며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주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탓이었다. 로젤린과 오래 지낸 사람이 아니면 그녀의 표정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여전히 수심이 깊어 보이기도, 불만 가득 차 보이기도 하는 로젤린의 표정에 세실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붉은수레바퀴 백작 말고도 경을 잘 부탁한다고 한 사람이 여럿 있었지. 사람들이 너무 드나들어서 문이 다 닳을 정도였단다. 정말 인기가 굉장하던 걸?”

로젤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일자로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어머, 말을 돌린 게 정답이었나 보네.’

세실은 내심 기뻐하다가 곧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다는 말에 저렇게 뻔뻔하게 대답하다니. 아니, 사실이니 뻔뻔한 건 아닌가?

그녀의 동생 칼릭스는 매일매일 서신과 선물을 보내며 제 누이를 잘 부탁한다 연락했다.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도 바쁜 일정 속에서 그녀를 찾았고,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는 제집마냥 그녀 옆에 붙어 있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많은 하얀밤 기사단원이 다녀갔다. 상급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었으나 바다협곡의 네스터는 그중 유별나게 많이 드나들었다. 심지어는 황금정원의 클로에까지 로젤린을 잘 부탁한다며 금보다 귀하다는 온갖 약을 보내왔다. 그녀의 연락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깜짝 놀랐었다. 거대한 상단과 정보 집단의 수장 격이라 말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여러 가지 정보를 위해 사람을 두루두루 사귄다고 들었으나,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할 정도면 표면적인 친분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속내를 알 수 없고 음흉하다는 평을 받는 클로에와 로젤린을 번갈아 떠올리자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황금정원의 클로에가 큰뿔산양의 레이몬드와 약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들의 기묘한 친분은 그로부터 온 것이리라.

2황자 리카르디스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그녀를 찾았다. 누워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보는 세실이 속이 다 간질간질해질 지경이었다.

아침은 고기 요리, 점심은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디저트, 저녁은 다시 고기 요리. 리카르디스 황자는 병문안 꽃 대신 갖은 음식들을 들고 와서는 로젤린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맨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황당하던지. 갓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병문안 선물은 좋은 말로는 개성적이고 솔직한 말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는 한 손에는 고기 꼬지, 한 손에는 케이크 접시를 들고, 얼른 일어나라며 그녀에겐 들리지 않을 타박을 했다. 세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투와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2황자와 다른 모습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처음으로 2황자 리카르디스를 본 것은 전장에서였다. 열여섯, 그가 막 성인이 된 해였다.

[‘나팔이 울리면 도망간다’에 내 전 재산을 걸겠어]

[전쟁이 누구 놀이터도 아니고 말이야…….]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뒤에서 수군거렸다. 황실 암투가 험난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전쟁과는 다른 종류였다. 황성에서의 싸움이 독이라면, 전쟁은 보다 가까운 칼날이라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그리고 10살부터 줄곧 황성에서 살았던 어린 황자에게 이런 종류의 전투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모두가 염려의 눈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어린 황자의 안위보다는 그가 전장에 투입됨으로써 일어날 흐름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황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두의 걱정을 깔끔하게 불식시켰다. 청년과 소년의 사이에 놓여 있던 아름다운 황자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지에 끈적하게 말라붙은 피,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황폐한 광경이 그렇게나 어울릴 줄이야. 황자는 처음부터 전쟁터에서 자라난 나무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 세실은 요즘도 이따금씩 그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2황자의 모습만을 지켜봐 왔던 그녀로서는, 지금의 황자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또 큰 한고비를 넘겨 안전한 울타리 내에 있으면서. 공을 세워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으면서도.

[로젤린.]

누워 있는 제 호위 기사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 조금 궁상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희생 없는 전쟁은 없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로젤린, 식당에 초콜릿 폭포가 흐르고 있어. 바나나에 초콜릿을 묻히고 견과류 위로 한번 굴리기까지 할 예정이야.]

리카르디스는 이제 와서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듯 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로젤린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이것 봐, 이 고기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군. 요리사의 솜씨가 좋은 모양인데.]

2황자 리카르디스는 16살의 첫 전투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성장했다.

[내가 다 먹어 버리기 전에 어서 일어나.]

그런데 왜 그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일까. 전장에서조차 어떤 두려움도 모르는 것처럼 다잡고 있던 마음을, 왜 저렇게 흔들리게 내버려 두는 건가.

[로젤린.]

2황자는 수도로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제 호위 기사의 옆을 지켰다. 그녀는 결국 황자가 있는 동안에는 깨어나지 못했으나,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가끔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렸다. 2황자는 그럴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 * *

하루 먼저 출발한 리카르디스를 따라잡기 위해, 로젤린은 깨어난 그날 바로 짐을 꾸렸다.

“아픈데 가기는 어딜 가니!”

딱 걸렸다. 세실이 모질게 그녀의 짐을 뺏었다. 로젤린은 평소보다 훨씬 단호한 표정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니!”라고 하고, 전혀 안 아프다고 해도 “안 아프기는 뭐가 안 아프니!” 하고 재차 혼날 뿐이었다.

로젤린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온건한 감금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 2황자 리카르디스의 합의로 발생한 상황이었다. 물론 거기에 감금당한 당사자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안위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온 대륙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황성에 도착해 로젤린의 신변에 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그녀가 보호받기를 원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그의 딸이 성치 않은 몸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구경거리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모든 일이 처리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킬 견고한 벽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그 견고한 벽은 가까이에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 비스타. 그녀가 경계의 학살자 내지는 미친개라고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으며, 그 미친개를 함부로 건드릴 간이 부은 자는 많지 않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과 리카르디스에게 빚을 만들어 둘 기회는 흔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명의 이해관계가 얽혀 로젤린은 당분간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로젤린이 알 리 만무했다. 세실의 만류에도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리카르디스가 미리 남겨 놓은 편지 한 장을 읽고서는…….

계속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세실이 칼릭스가 비스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다급하게 전했다. 얼마 뒤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로젤린은 어느 정도 납득을 했는지 은밀히 준비하던 탈주 시도를 손에서 놓았다.

세실은 사절단과 검은달 사이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바빴다. 황실로 보낼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이번 전투로 인해 검은달의 동향이 바뀌는지에 대한 면밀한 관찰 또한 필요했다. 로젤린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세심하게 그녀를 챙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래 사람들로부터 가끔 그녀에 대한 보고를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금 세실이 막 받은 그 보고에는, 당분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 때문에 로젤린이 무료함에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환자이자 손님을 너무 오래 방치한 감이 없잖아 있어, 세실은 반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도 보고, 담소도 나눌 겸.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실은 제 두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시장이라도 좀 둘러보면서 놀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독수리랑 체스를 둘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심심했던 걸까…….

로젤린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하, 한 수만 물러줘.” 하고 답지 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독수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근엄한 대가리를 하고는 비숍을 물어 대차게 로젤린의 킹을 후려쳤다. 로젤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남은 쿠키를 독수리의 입에 물렸다.

그 결과로, 로젤린은 지금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구경 할 수 있게 되었다. 백작이 사람을 붙여 주겠다 했지만 사양했다. 성 밖을 나서는 그녀의 뒤로 세실의 혼란스러운 눈빛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쬐며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로젤린은 마카롱과 체스를 둔 일 때문에 미친 사람 취급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다지 상관없었다. 덕분에 성을 벗어나게 되지 않았던가. 어쩌면 마카롱에게 게임을 지고 있어서 백작이 더욱 걱정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좋은 날이었다. 쥐로 변해서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마카롱이 코를 실룩이며 햇살 냄새를 맡았다.

로젤린은 ‘로젤린’이 된 후로 거의 성 내부에서만 생활을 했다. 붉은수레바퀴 성, 일라베니아의 황성. 발타의 궁전, 그리고 지금의 마른가시나무 성까지. 초반에는 인간의 생활양식들을 배워야 해 바빴고, 이후로는 임무 때문에 벗어날 틈이 없었다.

이따금 바람 울리는 소리만 나는 적막한,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정리되어 단조롭게까지 느껴지는 공간을 뒤로한 로젤린은, 새롭게 펼쳐진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우락부락한 용병들은 드잡이를 하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퍼져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옷의 색과 규격, 걸음걸이 하나하나 통제되어 있지 않은 무질서한 거리를 보자 그녀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바쁘게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2황자 전하의 그…….”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거리가 한층 더 술렁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수도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로젤린이 요양 중인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가 아니던가. 로젤린의 인상착의 정도는 진즉에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검은 머리와 녹색 눈. 일라베니아 여성 평균 키를 웃도는 장신. 그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으니 못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돼, 마카롱.”

소문의 그녀가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한 채 중얼중얼 혼잣말을 시작했다. 로젤린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로젤린은 행인들이 자신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에 예민해진 마카롱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작은 쥐가 주머니 속에서 찍찍찍 격렬하게 역정을 냈다. 눈 두 개, 귀 두 개, 코 하나 입하나 달고 있는 사람 처음 보느냐며, 저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해 버리겠다는데 구체적으로는 풀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위였다.

“안된다니깐.”

혼잣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자 다들 그녀로부터 몇 발짝 멀어졌다. 요양 중이라더니 몸이 아니라 머리가 아픈 거였어? 안 그래도 마인이라는 사실만 해도 껄끄러운데, 심지어 상태가 살짝 안 좋기까지 하다니! 옷깃을 스치는 가벼운 인연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칼릭스가 무기를 들지 않은 사람을 다치게 하면 무서운 곳에 간다고 하지 말래.”

어린아이에게 일러 주듯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내용이 살벌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장 거리를 채우고 있는 우락부락한 장정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 구석으로 제 몸을 욱여넣었다.

“아, 칼릭스?”

그녀는 목에 걸려 가슴께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주머니를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내 동생이야. 착하고 예뻐.”

로젤린은 거리를 구경하다 과일이 잔뜩 쌓여 있는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붉은 사과가 반지르르 윤이나 탐스러워 보였다. 꼬르륵, 그녀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밥을 먹은 지 오래 됐네. 한…… 두 시간 쯤.’

거리를 구경하느라 배고프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젤린이 가게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나, 나, 날이 참 좋지요.”

사실 그에게 날씨가 좋은지 안 좋은지를 판별할 만한 여력은 없었으나, 다년간 쌓아 온 상인의 혼이 먼저 반응했다. 로젤린은 쌓여 있는 사과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물었다.

“이 사과를 제가 먹어도 되겠습니까?”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허락을 꼭 받으세요]

로젤린은 칼릭스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멍하니 그녀의 질문을 되뇌었다. 사과 하나에 얼마죠? 사과 몇 개 주세요. 따위가 아닌, 사과를 먹어도 되겠느냐? 그냥 먹겠다는 얘기인거지, 지금? 강탈하려는 주제에 왜 이렇게 정중한 거지? 과일 가게 주인은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녀를 곁눈질로 보았다. 쭉 찢어진 눈매는 매서웠고, 표정은 싸늘했다. 심지어는 역광이라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에, 과일 깎는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그녀의 눈동자만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맹수에게 포착된 초식동물의 기분이 이러할까.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다.

남자는 결국 “사과 한 개에 5쿠퍼입니다.”라는 말 대신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로젤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살폈다.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이리저리 들추던 그녀가 한 개를 들어 올렸다. 쌓여 있는 것들 중 가장 크고, 색이 예쁘고, 과실 향이 풍부한 사과였다. 주인은 결국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와중에 가장 맛있어 보이는 걸로 고르기까지 하는 거야?

로젤린은 사과를 제 옷에 슥슥 닦은 후, 목을 숙여 인사하고 다시 거리를 걸었다. 가게 주인의 복잡한 심정은 로젤린이 떠나고 나서도 가실 줄을 몰랐다.

이 사태는 로젤린이 붉은수레바퀴 성의 하녀들에게 배운 단편적인 정보가 그대로 고착되어 버린 탓에 일어나게 되었다.

[아가씨, 걱정 마세요. 도련님은 돈이 아주 많으시거든요.]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많던 로젤린에게 하녀 일리야가 한 말이었다. 돈이 무어냐 묻는 로젤린의 말에 일리야는,

[많을수록 좋은 거랍니다.]

라는 애매한 답변을 남겼었다. 때문에 로젤린에게 돈의 개념은 ‘많을수록 좋은 것.’, ‘마침 칼릭스가 많이 가지고 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칼릭스나 레이몬드에게 말하면 된다.’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성 내부에서만 생활하고 돈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어찌 보면 예견된 참극이었다.

로젤린은 단검을 꺼내어 사과를 작게 잘랐다. 주머니에 넣으니 마카롱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사과를 갉으면서 마카롱이 물어 왔다. 대가로 뭘 줘야 하지 않으냐고? 물물교환?

마카롱이 인간 모습으로 산 중턱의 오두막에 살 때 알게 된 것이라 했다. 물건을 가지려면, 그 가치와 상응하는 무언가와 교환해야 한다고. 여기는 큰 마을이라서 다른 건가? 사람들이 인심이 좋네. 마카롱의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그런 걸 배운 적은 없는데…… 그러면 나중에 토끼라도 잡아 주면 되는 것일까? 마른가시나무 백작님에게 물어봐야 할 듯했다.

마카롱과의 대화, 외부적으로는 혼잣말로 보이는 행위를 지속한 결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줄어들었다. 로젤린의 발길이 향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쫙 갈라졌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편하다! 로젤린은 흐뭇해하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길거리에서 나무 꼬챙이에 꿰어 파는 닭고기도 먹고, 막 구운 빵 위에 꿀과 버터를 뿌려 주는 디저트도 먹었다.

물론 전부 값을 치르지 않았다. 그냥 가게의 주인들에게 먹어도 되느냐 정중하게 묻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소문의 그녀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 *

칼릭스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서신을 전달받은 이후 곧바로 붉은수레바퀴 영지를 떠났다. 반드시 영지를 지키고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싹 무시한 처사였다.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인 에델바이스 또한 놀란 듯 보였다. 칼릭스는 객관적으로 착하고 순종적인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부터 제 아버지와 부딪쳤다. 마찬가지로 착한 자식의 표본이었던 누이의 첫 반항이었다. 얼마 후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한 그녀의 다짐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졌다. 칼릭스는 그녀의 결단을 동경하면서도 미련하다 생각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는 대대로 황실의 신임을 받아 왔던 가문이었다. 일라베니아 황실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그 곁을 지킬 몇 안 될 이름이었다. 만약 제 누이가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는 그녀가 됐을 것이다.

칼릭스는 로젤린만큼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을 본 적 없고, 그녀만큼 냉혹하고 냉정한 사람 또한 본 적 없었다. 어렸던 자신에게 등 돌릴 만큼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던 리카르디스의 존재를 어찌나 질투했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때는 어린 날, 그것도 열여섯이라는 장성한 시기이긴 했으나 지금보다는 어린 날에 그녀에게 물었더랬다. 어떻게 붉은수레바퀴를 놓으실 수 있으세요 누님? 당신의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이 아니었던가요?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달고 있던 자로서 조금, 아니 많이 섭섭하고 서러운 마음에 따졌다. 누이는 고운 얼굴을 무너뜨리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라 그래.]

그것은 칼릭스가 납득할 만큼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그래야만 하는 때라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 누님의 선택일 뿐인데, 왜 누군가가 떠밀어서 결정해야만 했다는 듯이 얘기하는 건가요? 물론 내뱉지는 못한 생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편지를 받자마자 영지를 떠난 제 모습을 보며, 예전 누이가 한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가 자신에게도 왔다는 것을 알았다.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이어받을 자에게 아버지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붉은수레바퀴를, 일라베니아를 최우선으로 두고 생각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 그것을 모두 저버리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로젤린의 손도 놓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래야만 하는 때였다.

흙먼지가 일어나는 풍경에 칼릭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편지를 받고 달려가던 중이었다. 이미 비스타에는 발을 들였고, 저 멀리 삐죽삐죽 솟은 성이 보였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백작님?”

“네 누이. 시장에서 놀고 있을 거야. 걱정 마렴, 치안이 제법 좋단다, 내 영지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말에 칼릭스가 얼굴을 굳혔다.

“혼……자서 말입니까?”

그는 마차도 버리고 마을마다 말을 바꿔 가며 달려온 피로를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아련하게 잠겼던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감상도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칼릭스의 애처로운 표정을 미처 눈치 못 챘는지 세실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아니 아마…….”

칼릭스와 뒤를 따르던 붉은수레바퀴 백작령의 기사들이 침을 꼴딱 삼켰다. 적어도 사고 치면 수습할 만한 인재들은 딸려 보냈겠지?

“마카롱이랑 같이 나갔지?”

“……예?”

“그, 네 누이가 데리고 다니는 독수리 있잖니. 엄청 똑똑하던데? 체스를 굉장히 잘 두더라고. 아니, 로젤린 경이 못하는 건가? 어쨌거나.”

퍽 즐겁다는 말투였다. 모두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칼릭스는 고삐를 채어 방향을 급히 돌렸다.

“누님을 찾아!”

“예!”

기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말을 재촉하는 칼릭스의 시야로 바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비스타에 들어서면서부터 숱하게 보아 온 것이었다.

[두려움 없는 칼날만이 비스타의 문을 열 수 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언제나 무력을 귀하게 다뤘고, 그만큼 비스타에는 용병과 전사들이 넘쳐 났다. 문제는 바라지 않던 양아치와 삼류 건달 또한 잔뜩 모여들었다는 점이었다. 칼릭스는 영지를 다스린 경력이 길지는 않지만, 시장은 그런 이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제 누이는 혼자서 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 황실에서 근무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워낙 급변하는 정세 때문에 2황자의 월장석 성에만 머물렀을 텐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말하기를 독수리, 그것도 체스를 굉장히 잘 두는 독수리가 함께 있다지만 마음이 놓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얼마간 말을 달린 후, 칼릭스는 시장의 초입에서 내려섰다.

역시나 비스타였다. 거리의 팔 할을 차지하는 것이 남자. 또 그 남자들의 팔 할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용병이었다. 인상이 사납고 행동도 거친 자들이 많아 칼릭스는 더욱 심란해졌다. 누님에게 괜한 시비라도 거는 놈이 있으면 어쩌지? 그들의 안위와 안녕이 걱정되었다.

비스타는 넓고 좁은 거리와 낮고 높은 건물들이 혼잡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름의 규칙성은 있겠지만 초행이다 보니 길이 제법 어려웠다. 사실 길이 쉽다 해도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목적지가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길이 쉽든 어렵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저 조급할 뿐이었다.

“꽃 사세요!”

상인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는 가녀린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칼릭스는 주위를 둘러보다 골목 구석,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골목 벽에는 곰팡이인지 이끼인지 모를 것들로 얼룩덜룩했다.

그런 쾨쾨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야 비스타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님에도 유독 눈에 띄었다.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하얀 꽃송이 때문일까. 칼릭스는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면 그는 지금 나름 오래 헤어져 있던 제 누이와의 해후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다고는 하나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손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식은땀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하얀 꽃에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제 누이라면 꽃보다는 입에 넣을 수 있는 무언가를 더 좋아할 테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축하의 의미로 꽃을 건네곤 하니까. 그리고 사선에서 살아 돌아온 제 누이에게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같은 말보다 수고하셨다, 돌아오셔서 기쁘다는 말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칼릭스의 갈등을 읽어 냈는지 소녀들이 눈을 반짝였다. 어려도 장사꾼은 장사꾼이었다.

“어서 오세요! 열 송이에 1쿠퍼예요! 첫 손님이시니 한 송이 더 드릴게요!”

올망졸망한 눈들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부 다오. 잔돈은 필요 없다.”

칼릭스는 무심한 듯 새침하게 소녀들에게 은화를 한 개씩 건넸다. 어린 장사꾼들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종이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려는 듯했다.

칼릭스는 얼룩덜룩한 벽에 잠시 몸을 기대었다. 행인들이 ‘거 사람. 그렇게 안 생겼는데 보기와 다르게 상냥하구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보여, 낯이 화끈해졌다. 아닌데. 그냥 누이에게 줄 선물을 샀을 뿐인데…… 라고 말하는 쪽이 더 구차해 보일 터라 칼릭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꽃을 이렇게 대량으로 사 가는 손님이 없었던지, 포장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칼릭스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가만히 있는 이 순간에도 제 누이가 철창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며 ‘배고파 칼릭스. 감옥의 밥은 맛이 없어. 수프에 고기가 내 새끼손톱만큼 들어가 있어.’라고 말하는 광경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혹시 이십 대 초중반의 검은 머리 여성을 본 적 있나?”

얇은 풀 줄기로 리본을 묶던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이십 분 전쯤에 뵈었어요.”

칼릭스가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소녀들의 증언으로 제 누이와 자신이 같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칼릭스가 반색하자 둘이 소근 소근 얘기를 나눴다.

“저기에서 파는 꼬지 네 개 가져다주신 것도 얘기해야 돼? 돈 안 내신 거 같던데…….”

“쉿, 에밀리. 조용히 해.”

칼릭스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누님…… 그러고 보니 제가 화폐와 경제 원리를 안 가르쳐 드렸군요…… 어쩐지 황성에서 편지를 보내실 때마다 월급을 동봉하시더라니…….

칼릭스는 제 누이로부터 판매하는 음식을 갈취당한 상인에게 값을 치렀다. 물론, 구리 동전이 아닌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보상이었다. 상인이 너무나도 감격해서 울음을 터트렸기에 칼릭스는 더욱 미안해졌다.

그는 또 다시 걸었다. 꽃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뒤에서 소녀들이 손을 흔들었다. 칼릭스는 자신이 두 손 가득 안고 있는 꽃다발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앞에 내놓은 자그마한 꽃다발이 전부가 아니었어? 뒤에 천으로 덮어 놓은 바구니까지 전부 꽃이었을 줄이야.

꽃다발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컸다. 이건 꽃다발이 아니라, 꽃이 잔뜩 핀 들판의 일부분을 떼어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많은 시선이 칼릭스를 맴돌았다. 그는 약간의 수치심을 감내하며 어지러운 거리를 휙휙 둘러보았다. 금색, 갈색, 보라색, 하늘색. 온갖 머리 색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가운데, 검은 머리만 보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칼릭스는 근처 가판대의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남자가 제 누이의 행방을 알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상인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아, 칼릭스 경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칼릭스는 잠시 당황했으나, 로젤린이 현재 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유명 인사라는 사실을 금방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와 매우 닮았다는 것 또한. 그렇다 쳐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자신을 반가워하니 좀 황당하긴 했다. 칼릭스가 떨떠름하게 로젤린의 행방을 물었다.

“로젤린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손에 큰 사과를 들고 저쪽 길로 가시더라고요. 어찌나 복스럽게 잘 드시던지.”

그 ‘복스럽게 잘 드신다던 사과’가 어느 과일 가게에서 강탈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미치자, 반가운 소식을 그저 웃으며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칼릭스는 상인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칼릭스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했다. 빵집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기는, 백퍼센트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딸랑, 하고 종이 울렸다. 빵집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 모자를 쓴 주인장이 꽃다발을 들고 있는 칼릭스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아이고 누나한테 준다고 꽃다발 들고 온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순식간에 다섯 살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칼릭스 경 아니십니까. 과연 소문대로시구먼요.”

……소문? 칼릭스는 그의 말이 심하게 신경 쓰였으나 아차하고 정신을 차렸다. 제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누이의 행방이 더 급했다.

“아, 로젤린 경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잔뜩 드셨죠.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사람들이 전부 사 먹지 뭡니까! 많이 팔렸으니 그것만으로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시기였다. 거기에 굳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상인들을 갈취하고 다닌다는 얘기까지 더할 필요는 없었다.

한데 기류가 좀 미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인인 데다가, 갈취까지 한 상대를 보는 눈길이 생각보다 고왔다. 칼릭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결론을 냈다. 아까의 상인과 지금 가게 주인의 말로 짐작해 보건대, 복스럽게 잘 먹는 젊은이를 예뻐하는 어른들의 공통적인 경향이 발휘된 것이 아닐지.

칼릭스는 주인에게 대금을 치르고 나온 후 더욱 급해졌다. 긴 여정이었다. 그 먼 거리와 시간만큼 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커져가기만 했으나, 지금은 걱정의 종류가 좀 변질되었다. 누님……의 아련함에서 누님! 의 다급함이 뒤섞여 버린 탓이었다.

주위 행인들과 턱턱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거친 사내들이 눈을 부라리기 전에 칼릭스는 “눈 똑바로 뜨고 다녀!” 하고 버럭 성질냈다. 그의 인상도 인상이고, 체구도 체구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남자들은 그저 입을 딱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칼릭스가 노파에게 아주 살짝 부딪친 후 정중한 사과를 건네는 모습을 본 남자들은 더욱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의 다급한 움직임에 거대한 꽃다발이 움직이며 시야의 반을 가렸다. 꽃다발이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울컥울컥 솟았다. 하얀 꽃송이 사이로 사람들의 머리가 흔들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중 검은색을 언뜻 본 것 같았다. 칼릭스는 왁 소리쳤다.

“누님!”

검은 머리는 사람들에게 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략 이 초간의 공백 후 인파 사이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로젤린이었다. 그녀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게 도약한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개구리, 하늘로 쏘아진 화살, 장애물을 넘는 검은 군마와 같이 장렬한 기세로.

억, 내가 미쳤지! 칼릭스는 경솔한 자신을 욕했다. 로젤린은 낮은 상가의 지붕에 멋지게 착지했다. 사람들이 오오, 하며 감탄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로젤린이 곧 칼릭스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시선에 따라 칼릭스에게 거리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못 찾았나 의문이 들 정도로, 매우 눈에 띄시는 군요, 누님…….

“칼릭스!”

로젤린은 곧 다시 펄쩍 날아올라 칼릭스 앞에 착지했다. 사람들이 짝짝짝 박수쳤다. 대단한 묘기였다. 마인이라더니 아주 팔팔하게 잘 뛰는구만! 아, 저 남자는 아까 로젤린 경이 말하던 그 동생인가 보네. 왜 있잖아, 그 돈 많고 예쁘다던 칼릭스. 아, 그 예쁘고 착하다던 칼릭스? 아, 그 귀염둥이 칼?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가 칼릭스에게 들려왔다.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존재를 최대한 지워 보고자 노력했다. 누님 대체 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

“누님…….”

“응.”

대체 무슨 말을 하셨느냐고 물으려던 칼릭스는 로젤린의 시선과 딱 마주치고 말을 흐렸다.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건강해 보였다. 어디 하나 부러진 곳 없어 보였고, 피부도 상처 하나 없이 여전히 고왔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호의로 인해 볼에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도리어 며칠간 쉬지 않고 달려온 칼릭스가 더 아파 보일 지경이었다.

아, 어찌나 다행인지. 칼릭스는 한참이나 묵혀 두었던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절도고 무전취식이고 뭐고. 사고 치고 다니셔도 되니 그저 건강하기만 하셔라.

칼릭스는 부끄러움에 발개진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거리의 소음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로젤린이 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로젤린은 그 믿음에 보답하듯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응.”

로젤린이 칼릭스를 와락 안았다. 둘 사이의 꽃다발이 구겨졌다. 꽃향기가 더욱 물씬 풍기며 두 사람을 감쌌다. 행인들이 붉은수레바퀴 남매의 상봉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감동의 눈물을 닦아 내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도 수치스러움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을 잡고 그녀가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여기서 먹었어. 이것도 먹었어. 저것도 맛있어. 어찌나 야무지게 먹고 다녔는지 으리으리한 식당에서도 이만큼 다채롭고 호화롭게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가게마다 멈춰서 외상값을 낸 결과, 로젤린은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를 대충 이해하게 되었다.

물건에는 그에 따르는 합당한 대가, 값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인 상식을 대단한 이치라도 되는 양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의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해졌다. 사회에 내보내기에는 너무 일렀던 건가…… 라는 생각을 하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 누이를 야생동물 방생하는 듯 취급하는 이 패륜적인 발상은 뭐란 말인가. 칼릭스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칼릭스는 흐트러진 꽃다발을 다시 예쁘게 정리한 후 그녀에게 건넸다.

“선물입니다, 누님.”

“예쁜 냄새.”

로젤린은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로 냄새를 킁킁 맡았다. 먹을 게 아니었지만, 그녀는 예쁜 냄새에 퍽 만족한 기색이었다.

“아, 맞아. 나 이거 레이몬드한테 배웠어.”

로젤린은 곧 꽃 한 송이를 꽃다발에서 뽑아내, 길쭉한 줄기를 반으로 뚝 자르더니 칼릭스의 귓가에 곱게 꽂았다.

“예쁘다.”

“…….”

로젤린은 어떤 모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싫다고 얘기하지 못할 만큼 환하게 웃었다.

‘레, 레이몬드 이 인간이…….’

칼릭스는 잠시 표정을 일그러트렸으나, 지금의 로젤린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 온 자의 숙련된 솜씨로 감정을 빨리 갈무리했다. 내 귀 위에는 꽃이 얹어져 있지 않아.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건…… 내가 잘생겨서야. 약간 미친 척 자기 암시를 해야 했으나, 나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칼릭스도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넘기며 꽃다발에서 한 송이 뽑아냈다. 그는 줄기와 이파리, 꽃 받침대까지 다 떼어 내고 로젤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살짝 빨아들여 보세요.”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던 로젤린이 꽃술 뒷부분을 머금고 쪽쪽 빨았다. 헉, 이것은! 로젤린의 눈이 확장되었다.

“이게 팬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그 꿀의 정체입니다.”

“이건, 굉장히…… 굉장히 대단하다. 칼릭스.”

로젤린이 상기된 표정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거대한 꽃 한 다발을 전부 똑같은 방식으로 섭취했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을 장성한 두 남녀가 하고 다니니 눈에 보통 띄는 게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남매가 새끼 강아지라도 되는 양,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온화한 시선이 칼릭스 내부에서 들썩이는 수치심을 눌렀다.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은 살인자보다 무섭고 역병보다 불길한 존재다. 로젤린이 2황자 리카르디스의 목숨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그 인식만큼은 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 가족과 감동적인 재회를 하고, 정겹게 손잡고 돌아다니는 일상은 그들의 인식을 부수기에 아주 적당했던 듯했다. 귀에 꽃을 꽂고 있는 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감내하며 돌아다니는 이유는, 칼릭스가 그 분위기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만 흘러간다면, 귀에 꽃을 백번을 더 못 꽂을까. 이것도 나름 임무라면 임무인 셈이니 창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칼릭스는 나름의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어, 도련…….”

로젤린을 찾으러 흩어졌던 기사들이 남매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다가 어정쩡하게 다시 내렸다. 아가씨는 꽃을 물고 쪽쪽 빨고 있고, 도련님은 귀에 꽃을 꽂고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갑자기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들은 스쳐 가는 인연인 것처럼 그대로 사라졌다. 칼릭스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

그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 사이, 로젤린의 눈동자가 사람으로 꽉 찬 거리를 순식간에 꿰뚫었다. 키가 크고 작은 사람. 뚱뚱하고 바싹 마른 사람. 어지럽게 오고가는 발걸음과 각자의 사정들로 시끄러운 공간. 로젤린은 그 수백의 기척 속에서 익숙한 기운의 파동을 느끼고 오감을 예민하게 다듬었다. 주머니 안의 마카롱도 꿈틀거렸다.

가깝지는 않은 거리였다. 지나가는 남자와 부딪치는 척하며 지갑을 훔쳐 간 소년에서 느껴졌다. 순간적이고 아주 미약한 파문이었으나, 로젤린과 마카롱은 놓치지 않았다.

검은달의 마인들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마인이었다. 소년의 마력은 몸 안의 생명력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그것’들에게는 생명이 없었으나, 그 점만 제외한다면 똑같은 성질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지금의 로젤린에게는 이미 생명력이 섞이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비슷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누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로젤린은 한참동안 답하지 않고, 그저 소매치기 소년이 사라진 골목을 계속 주시했다. 칼릭스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으나, 눈동자 속, 깊은 무언가가 바람에 파란이 이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로젤린이 잠시 후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은 어두운 골목을 향한 채였다.

“마인을 봐서.”

쫓아갈까 말까 고민 하고 있었어. 로젤린은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칼릭스는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었다. 제 누이는 몰라도 자신은 적을 확신 못하는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많은 거리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성에 가서 마저 얘기하시죠. 마차를 부르겠습니다.”

칼릭스가 휘파람을 짧게 끊어 세 번을 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붉은수레바퀴의 기사들이 남매를 둘러쌌다. 사람들이 오가는 어지러운 거리 위로 석양이 붉게 물들었다. 로젤린이 잠시 멈춰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 * *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남매를 맞이하기 위해 성문 바로 앞까지 나왔다가 박장대소했다. 칼릭스의 귀에 얹혀 있는 한 송이 꽃 때문이었다. 어찌나 안 어울리는지.

더군다나 그 웃기는 꼴이 로젤린의 작품이란 사실이 빤한 시점에서, 제 누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 계속 그 웃긴 꼴을 하고 있는 노력이 가상하기도, 귀엽기도 했다. 그녀는 옆에 서 있는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장의 어깨를 잡고 헐떡이며 웃었다. 칼릭스는 울컥해하면서도 끝내 제 손으로 꽃을 뽑지는 못했다.

세실은 오랜 여정으로 지쳤을 칼릭스를 생각해 식사나 파티에 초대하지 않았다. 사람의 몰골을 보고 비웃는 둥의 배려라고는 없는 사람치고는 썩 괜찮은 배려였다.

“아, 검은달의 마인이 아니라 그냥 마인이었습니까?”

칼릭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응, 그냥 마인. 다른 사람 지갑 훔치더라.”

그 자식, 교육상 안 좋은 것을 보이다니! 잡아서 치안대에 넘기고 말겠다. 그건 그렇고…….

“비스타에는 마인이 많다는 소문이 항상 돌았죠. 사실이었나 봅니다.”

뜬소문만 무성했건만 그것이 진실이었을 줄이야. 그 많은 마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죽는 것이 반, 도망친 것이 반. 그리고 도망친 자들 중에 발타로 넘어간 자들이 또 거기에서 반 이상. 어찌 되었든 일라베니아 내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구태여, 일라베니아에 마인이 어디 있겠느냐? 하고 묻는다면 모두 비스타를 가리킬 것이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황실의 힘은 강해진다. 반대로 수도에서 먼 변방일수록 황실의 권한은 약해진다는 말이었다.

수도에서 가장 먼 변방의 영지 비스타는 그 요건을 아주 완벽하게 충족했다. 일라베니아의, 이델라브힘의 영광 이전에 전쟁과 전투에서 당장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지면 이델라브힘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길 수만 있다면 마인의 힘이라도 빌리겠다! 불손한 이야기도 왕왕 나오는 영지이니 만큼 마인들이 지내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밑에는 강한 기사와 용병들이 많았다. 그들 중 누구라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마인일 수 있으나, 세실이 덮는 이상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강한 전사로 활약하는 자들도 있지만, 음지로 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점을 이용해서…… 나쁜 일들을…… 한다고 하더군요.”

비스타에 마인이 많으리라는 얘기를 한 뒤부터 로젤린은 자주 창밖을 쳐다보았다. 먼 산을 보는 것 같기도, 작은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칼릭스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에게 마인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미지의 존재라는 큰 차이가 있음에도 어쩐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마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힘의 종류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누님, 그런데…….”

칼릭스는 마른 입술을 매만지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갑자기 꺼낼 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응.”

“그…… 음…… 쥐는 대체…… 뭡니까?”

칼릭스는 로젤린의 깊은 상념을 깨야 할 만큼,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쥐가 너무 신경 쓰였다. 가슴을 쭉 펴고 두 발로 서 있는 작은 짐승의 자세가 심히 기세등등했다. 로젤린은 아차, 깜박했네.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제 어깨 위의 쥐를 슬쩍 바라보았다.

“마카롱, 얘가 내 동생 칼릭스야. 칼릭스, 여기는 내 친구 마카롱.”

칼릭스는 충격받았다. 제 누이에게 교육을 한 적 있던 부분이었다. 높은 사람에게 먼저 낮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그 다음에 낮은 사람에게 높은 사람을 소개해야 한다는 예의. 그녀가 저 좋은 머리로 잊었을 리도 없을 테니, 제 누이는 지금 저 회색 쥐를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생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마카롱이라는 이름을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서 들은 적 있었다. 체스를 잘 둔다던, 그 똑똑한 독수리?

“마카롱은 독수리가 아닙니까?”

“맞아. 아주 크고 멋있지.”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칼릭스에게 자랑했다. 칼릭스는 제 누이의 화법에 큰 문제를 느꼈다. 너무 단답형이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엮이면 단답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내 동족이야.”

아, 이건 이해해 버리고야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범한 애완 쥐였던 마카롱이 이제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칼릭스뿐이 아니었다. 마카롱도 깜짝 놀라 로젤린의 어깨 위에서 펄떡 한 번 뛰었다. 그리고는 쌀알 같은 손으로 그녀를 철썩 치는데, ‘미쳤어, 이 기지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로젤린 혼자만 태평한 태도로 부츠 끈을 풀고 있었다.

“괜찮아.”

쥐, 아니 마카롱을 보니 두 발로 펄쩍펄쩍 뛰며 제 누이를 위협…… 뭐 비슷한 것을 하는 중이었다.

“아냐, 안 그래. 우리 칼릭스 착하고.”

칼릭스가 그 말에 남몰래 씨익 웃는 모습을 보고 마카롱은 아주 기가 찼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이 집안의 특성이었나?

마카롱은 콧방귀를 뀌더니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발걸음으로 털레털레 바닥으로 내려갔다.

“맙소사…….”

칼릭스의 입에서 신음이 섞인 감탄이 튀어나왔다. 작은 짐승이 검게 물들더니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 같았다. 짙고 검은 안개는 폭발하는 듯 부풀었다가 인간의 형태로 빠르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 숨 쉬면 저런 모습이 되는 걸까. 기이한 광경이었다.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 그림자의 등이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생동감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것을 기점으로, 손끝, 발끝부터 검은색이 사라져 갔다. 칼릭스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회색의 눈동자가 칼릭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담한 체구의 갈색 머리 여자였다. 로젤린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마카롱이 자연스럽게 로젤린의 시중을 받았다.

“뭐든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

여자가 갑작스레 말을 시작했다. 잠시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가는 듯 자연스러웠다. 옷매무새의 정리가 끝나자 여자가 목 뒤로 손을 집어넣어 옷 속에 들어가 있던 머리카락을 빼내었다. 로젤린의 겉옷 위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흩어졌다.

“절대적인 신뢰도 영원한 관계도 없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쪽이지.”

마카롱은 칼릭스의 바로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로젤린의 식은 홍차로 목을 살짝 축인 후에 빙그레 웃었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칼릭스는 어색하게 제 손을 매만졌다.

“그래서 네가 무엇이건 간에, 너도 믿지 않아. 착하고 예쁜 칼릭스.”

“……네.”

여자의 얼굴은 부드럽고 가는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하고 약한 인상이라 평할 수 있었으나, 회색 눈동자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키는 건 어렵고 버리는 건 쉽지. 부디 네가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뭐랄까, 그렇게 되면 내가 너의 인생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드네…….”

마카롱은 제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어려워진 미래를 훔쳐보는 점쟁이의 고뇌 같았다.

감정은 생생하고 행동거지도 자연스러웠다. 과거의 야생동물 같던 로젤린이 수많은 교육과 경험을 거쳐 훌륭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긴 했지만, 마카롱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칼릭스는 첫 만남에 악담을 퍼붓는 그녀의 행동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마카롱의 모든 면이 놀라웠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얼씨구, 대답은 잘해요.”

마카롱이 빈정대는 것을 듣고 로젤린이 내 동생 괴롭히지 말라며 끼어들었다. 칼릭스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내 동생’ 그 세 글자에 칼릭스의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마카롱이 기가 찬다는 듯 환상의 한 쌍을 번갈아 보았다.

“이것들이…… 놀고 있네…….”

“그런데 저…….”

칼릭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카롱이 눈썹만 까딱이며 계속해 보라는 뜻을 내보였다.

“이럴 때 할 말은 아닌 건 알지만…….”

“왜 이렇게 사족이 길어?”

칼릭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마카롱이 본명이십니까?”

“……잘도 본명이겠다, 그렇지?”

마카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칼릭스이 머쓱하게 제 목을 쓸었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으니깐 말이야, 그저 편의상으로 얘가 갖다 붙인 거지.”

“왜 이름이 없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모든 사물에는 으레 이름이 있기 마련이니. 마카롱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상한 걸 다 묻네. 부를 필요도 없고, 불릴 이유도 없으니까.”

이름이 없는 무언가와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마치 심장이 없는 사람을 보는 듯했는데, 그 심장이 없는 사람이 ‘없어도 잘 살아 있으니 굳이 심장이 있을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다소 기괴하기도, 서글프기도 했으나 말하는 당사자가 보통 태연한 게 아니라, 그저 그런가?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특별하게 너는 마카롱 경이나 마카롱 님이나 둘 중에 하나로 부르는 걸 허락해 주마. 로젤린 동생만 아니었어도 너는…… ‘마카롱’의 ‘ㅁ’도 부를 깜냥이 안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해.”

“……예, 마카롱 님…….”

또한 유명 디저트의 이름을 극존칭을 사용해서 불러야 한다는 그 이상한 기분 때문에, 칼릭스는 앞선 싱숭생숭한 의문은 곧 잊게 되었다.

* * *

덜컹 덜컹.

마차가 작게 흔들릴 때마다, 소년은 창문에 바싹 붙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좋은 마차는 처음이었다. 소년이 전에 타 본 마차들은 죄다 쿠당탕, 덜커덕덜커덕!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구석으로 처박히는 일 또한 예사였고.

그런데 이 거대한 마차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이 거친 길을 달리면서도 고작 덜컹, 덜컹 정도의 소음과 가벼운 흔들림뿐이었다. 그마저도 부드러운 시트가 다 흡수를 하고 있어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 위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카르디스.]

앞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고개를 돌리자 어깨까지 오는 은발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네, 어머니.]

[티아 좀 안고 있어 주겠니?]

곱슬거리는 은발의 어린 소녀가 그녀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어 동생을 건네받았다. 네 살이 되어 부쩍 무거워진 동생을 리카르디스가 낑낑거리며 고쳐 안았다. 세티스티아가 그의 품에서 칭얼거렸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동생에게서 우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리카르디스가 미소 지으며 세티스티아의 등을 토닥였다. 그 사이 여자는 옆에 앉아 있는 청년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오늘 안에는 도착 하겠니, 잇세리온?]

[예, 주인님. 해가 지기 전에는 황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요.]

[별다른 일이라.]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 한쪽 눈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마차만큼이나 거대한 덩치가 그 흉흉한 인상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책임자로 뽑힌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페르탄이 마차에 가까이 접근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밀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별 다른 일은 없나요?]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밀리아가 탄식했다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라도 있길 바랐건만. 그녀의 옆에서 잇세리온이 허둥지둥하다 그녀의 소매 자락을 슥슥 당겼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고 말리는 모양새였다. 밀리아가 호호 연극적으로 웃다가 별다른 일이 생기면 꼭꼭 알려 달라 말했다. 페르탄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주인님!]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잇세리온.]

[저, 저분이 누군지 아시잖아요. 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 모르겠어. 황제 폐하의 충실한 개잖아.]

[주인님!]

잇세리온이 비명 지르듯 그녀를 부르자 밀리아가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잇세리온이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가씨의 단잠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두 사람이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을 보다가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세티스티아는 다시 밀리아의 품 안에 있었고, 자신은 잇세리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슥슥 비비자 잇세리온이 곧바로 잔소리를 했다.

[비비면 안 됩니다 도련님. 눈 나빠져요.]

[응…….]

[좀 더 주무세요.]

잇세리온이 리카르디스의 등을 쓸며 다시 재우려 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나 왔어?]

[이번에는 정말 거의 다 왔어요.]

리카르디스는 다시 창문에 후다닥 붙었다. 아까와 풍경이 달랐다. 풀과 나무 대신, 반듯한 건물들이 군집해 있는 깨끗한 거리였다.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살던 리카르디스에게는 모든 것이 크고 멋있어 보였다. 그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자 뒤에서 잇세리온이 웃었다.

[도련님, 저기요. 위를 보세요.]

잇세리온의 손가락을 따라 방향을 옮기니 태양을 찌를 듯 높게 서 있는 새하얀 성들이 보였다.

[황성입니다.]

아름다웠다. 리카르디스가 태어나 본 것 중 가장. 그는 하얀 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주의를 일깨운 것은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밀리아의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

뒤를 돌아보자 밀리아가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 잇세리온. 가까이 오렴.]

여느 때와 같은 미소 위로 어둠이 내려앉은 것을, 리카르디스는 눈치챘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밀리아도 세티스티아를 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잇세리온은 잔소리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란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둥글게 모여 앉은 지금의 모습에,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이 널찍한 마차가 자신과 잇세리온, 르원 형제의 비밀기지같이 변했다 생각했다. 누구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우리 편만 들어올 수 있는.

밀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비밀스런 정적을 지키다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마차가 황실의 문을 지나친 그 순간.

[여기는 아주 추운 곳이야.]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말하는 ‘여기’가 그 아름다운 하얀 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름이 다가와 풀잎은 푸릇하고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뜨거워지는 이때에, 그녀가 말하는 추위는 리카르디스에게 와 닿지 못했다.

[영원히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고,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 불어와.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어둠이 내려앉아 추위를 한층 더 혹독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야.]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통해 다시 한 번 하얀 성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아까보다 가까워진 성은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웠으나, 밀리아의 말을 듣고 보니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겨울의 자작나무 숲같이 보이기도 했다.

[모든 공간, 모든 사람들이 너에게 겨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리카르디스.]

[네, 어머니.]

[버텨 내기 위해서는 이 얼음 숲보다 더 차갑고, 더욱 혹독하게 변하는 수밖에 없어.]

더 차갑게, 더욱 혹독하게. 밀리아의 말이 서리처럼 리카르디스에게 달라붙었다. 밀리아가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등을 감싸 안듯 그들을 모았다. 세 사람의 머리가 맞닿았다. 그들 사이에서 세티스티아가 꼬물거렸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세티스티아를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리카르디스. 힘들거야. 괴로울 거야. 하지만, 견뎌 낼 수 있어. 사람은 약하지만,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으니까.]

밀리아가 그 말을 하며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심각한 분위기를 읽지도 못하는 어리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괴로움은 리카르디스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하얀 성이 더욱 가까워졌다. 밀리아는 그 눈부신 광경을 보며 말을 흘렸다.

[참아 내고 기다려야 해, 리카르디스.]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녀의 말은 리카르디스에게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밀리아가 했던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닌, 빠른 미래에 실현될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확실한, 고통스러운 미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까지요?]

밀리아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웃는 모습이 괴로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밀리아가 무어라 얘기했으나, 지금의 리카르디스는 그 답을 잊어버렸다. 그저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한, 의미 없는 말이었으리라.

* * *

황제는 최근 더 없이 인자해졌다. 사절단이 귀환한 후부터였다. 제 손으로 사지로 떠밀었다 해도, 어찌 부모의 마음이 편했겠느냐. 제 아들이 무사히 귀환한 모습을 보니 그 사실만으로도 기뻤으리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황성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면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마저도, 황제가 기분 좋은 이유는 단순히 사절단이 무사히 돌아와서가 아니라, 그들의 귀환으로써 황제가 얻게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상한 바와 같이, 황제는 큰 선물을 받고 매우 흡족해진 것이 맞았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와 일라베니아의 동맹 서약서와 함께, 고급스럽고 작은 상자를 황제에게 건넸다. 전자는 사절단의 표면적인 목적이었고, 후자는 실질적으로 황제가 원했던 것이었다.

발타가 사용하는 강력하고도 위협적인 무기의 근원, 마력의 결정이었다. 아직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도 밝혀내지는 못했으나, 그 존재만으로도 앞으로의 전황을 기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황제는 기뻐했다. 황제는 선물을 받은 이후로 불면증을 깨끗이 떨쳤노라며 리카르디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죽으라고 보낸 길에서 살아오다 못해, 선물까지 들고 온 대단한 업적을 이룬 리카르디스에게 귀족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황제가 엘피디오를 잠재적인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이야 알겠으나,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리카르디스가 괜찮은 패라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힘들어졌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다든가, 신성력이 엘피디오를 훨씬 웃돈다든가하는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 이외에도, 그 험난한 사선을 거쳐 살아남은 리카르디스에게 진정 신의 가호가 따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라베니아 사람 특유의 종교적 기조가 발휘된 것이다.

월장석 성에 부쩍 손님이 늘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사절단이 출발할 당시만 해도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던 귀족들이 줄을 이어 방문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는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며 차츰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렇게 얻은 이득과 세력을 활용해 엘피디오를 견제해야 하는 지금, 리카르디스는 보다 중요한 안건으로 한시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중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리카르디스가 비스타를 떠나는 그날까지도 일어나지 못했던, 그의 호위 기사 때문이었다.

로젤린의 이름이 거대하고 힘 있는 자들의 입에서 오르고 내렸다. 다행히도 황제의 힘이 일시적으로나마 실려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로부터 로젤린을 뺏기란 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직감한 자들이 이번에는 그녀를 흠집을 내려 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는 심보였을까. 헛소리를 하는 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황자 전하를 구해 냈다고 하지만 마인이다. 암살자들을 손쉽게 이긴 것을 보니 뭔가가 수상하다. 어쩌면 검은달과 짜고 치는 연극이 아니겠느냐는 음모론이 돌기 시작했다.

“개소리가 참신한데.”

다양한 개소리를 모아 온 서류를 보며 리카르디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의 반응과 같이, 개소리가 퍼질 만큼 녹록한 세상이 아니었다. 검은달에 속하기에는 로젤린이 달고 있는 이름이 너무나 강력했다.

붉은수레바퀴. 황실의 역사와 나란히 영광을 짊어진 가문이었다. 강하고, 충성심이 뛰어나고, 제국의 명령이라면 한 몸 불사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사냥개.

그런 가문의 딸에게 첩자의 신분을 씌우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제할 것은 제하고 부풀릴 것은 부풀려 이미 세상에 풀린 지 오래였다.

세상에 더없을 충신,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불길한 힘을 지닌 마인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마음으로 그녀를 받아들인 2황자 리카르디스.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얘기였다. 그리고 군중들은 소설 같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빠르게 받아들이고는 했다. 그녀가 검은달의 암살자라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는 기지개 한번 펴 보지 못하고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조사를 강경하게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엘피디오의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델라브힘의 열렬하게 믿는 가문들도 속해 있었다.

이틀 뒤. 그녀의 처우에 관한 마지막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전하?”

리카르디스는 스르륵 눈을 떴다. 몇 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보니, 의자 위에서 짧게 졸고 말았다. 잇세리온이 옆에 서서 걱정이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반쯤 감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꿈에 나오셨는데…….”

잇세리온이 눈을 깜박였다. 리카르디스는 밀리아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 없었다. 혹시 잠꼬대인가? 잇세리온이 그 몰래 식은땀 뻘뻘 흘려 가며 고민했지만 리카르디스는 산뜻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지금의 내 상황과 절묘하게 이어지는 듯한, 으음…….”

리카르디스는 목을 잡고 고개를 좌우로 꺾어 가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이 짧은 동작으로 그간 쌓였던 피로가 풀릴 리 없으나, 기분을 환기시키는 정도는 되었다.

“물렁하게 굴다가는 잡아먹힌다는 경고를 하러 오신 것 같아.”

밀리아의 얘기를 하는 리카르디스의 표정과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잇세리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까보다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황비님다우시군요.”

“정신이 번쩍 들었지 뭔가. 그래서, 무슨 일이지?”

최근 들어 자신의 수면 시간을 가장 걱정하는 잇세리온이 깨울 정도면 그의 선에서 해결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잇세리온의 뒤에서 상급 기사 르원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온 게 별 일이 아니야? 리카르디스가 르원을 발견하고 작게 미소를 띠었다.

“르원.”

르원이 한쪽 무릎을 숙이며 주먹을 가슴 위에 올렸다.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전하를 뵙습니다.”

“수고 많았다.”

르원은 잇세리온의 동생으로, 홀쭉한 제 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몸집은 두 배로 두꺼운 상급 기사였다. 하얀밤 기사단 상급 기사들의 주 임무는 리카르디스의 호위였으나, 르원은 달랐다.

성 외부에 독자적인 집단을 만들어 위험인물을 감시하고 때로는 실질적으로 손을 쓰기까지 했다. 기사보다는 용병이나 암살자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상급 기사들이 표면의 임무라면, 르원은 완벽한 뒷면의 일을 도맡은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그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으나, 르원이 그를 위해 기꺼이 나섰다. 이런 일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며.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나설 일이 많지 않았던 르원은, 최근 로젤린 덕분에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발타의 동향이 어수선합니다. 듣자 하니 하카브 왕자가 건국제를 맞이해 일라베니아에 올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요. 클로에 양이 전달을 부탁한 사항입니다.”

“……그럼, 정확하겠군. 아니 대체 그 자식은…….”

리카르디스가 이마를 짚었다. 하카브의 생각을 알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궁금해졌다.

“엘피디오 전하께 선물을 보내고 왔습니다. 내일쯤 받아 보시겠죠. 다른 목표들은 잠잠합니다. 겁을 준 게 유효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더럽게…….”

잇세리온이 르원의 다리를 퍽 걷어찼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공격한 적이 없으시다 보니.”

리카르디스가 목 안쪽으로 웃음을 삼켰다.

“원래 안 그러던 놈이 그래야 더 무서운 법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말이야.”

르원은 이후로도 처리한 몇 개의 일과, 그로부터 알게 된 몇 가지 정보를 보고했다.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가장 괴로운 건, 내가 관심없는 사람들의 은밀한 기호까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 뭐랄까…… 회의감? 그래, 그 회의감이 너무 짙다는 거야.”

“……예, 뭐……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말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아니야 뭐든 아는 게 힘이라고……도 했고 근심이라고도 했지. 이제야 그 말뜻을 절감하고 있다.”

리카르디스는 피곤해 보였다. 몇 주째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얼굴에도 그 영향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르원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전하?”

“아니.”

르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보통은 하게 해 주시지 않습니까?”

“보통 그런 요청 뒤에는 청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따라오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그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알 것 같은 기분이라. 로젤린 경……으로 시작하는 문장 아니었나?”

“정확하십니다. 해도 됩니까?”

“안된다니까.”

르원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리카르디스는 그가 하고자 하는 질문을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로젤린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인지. 어째서 일개 호위 기사를 위해 이 위험을 감수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이리라.

다소 무정해 보일 수 있지만 르원은 로젤린을 먹이로 던져 주는 쪽이 더 이득일 거라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은 하얀밤 기사단의 일원이다 보니, 르원도 로젤린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르원에게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대상은 리카르디스였다.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정작 그를 위험에 빠트린다면, 르원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로젤린을 쳐 낼 수 있었다. 애초에 리카르디스가 말을 한마디도 꺼낼 수 없게 해서 버리니 마니 논의 할 수조차 없었지만.

“르원.”

“예, 전하.”

리카르디스는 피곤한 듯 턱을 괴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나는 무얼 위해 싸우나?”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리카르디스가 황제의 자리에 절대 앉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르원이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물었다. 어떻게 감히 자신이, 그에게 그저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이 의미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르원이 내뱉지 못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르원?”

르원이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 *

디에즈는 이른 아침부터 엘피디오의 석영 성에 방문했다. 성문 앞에는 엘피디오의 시종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손수건을 댄 채로 디에즈를 맞이했는데, 천에는 이미 피가 배어 있었다. 척 봐도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있었다. 시종도 상처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동하며, 방문한 손님을 안내하는 목적에만 충실했다.

“…!…!……!”

응접실 바깥에서부터 갖은 욕설로 시끄러웠다. 제국의 황자가 대체 어딜 쏘다니기에 저런 추잡스러운 욕설을 알고 있는 건지. 디에즈가 한숨 쉬었다.

엘피디오가 욕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제 이복형 리카르디스. 이번 사절단 일로 콧대가 금강석 성 끝까지 솟았다던. 물론 이 또한 엘피디오가 한 말이었다.

디에즈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문이 열렸다. 응접실은 엉망이었다. 탁자 위는 이미 한번 헤집어 놓았는지 서류며 책 따위가 바닥에서 나뒹굴고, 화병이 소파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나자 씨근대던 엘피디오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어깨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형님.”

엘피디오가 거친 동작으로 소파에 소리 나게 앉았다.

“앉아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엘피디오가 피식 웃더니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디에즈, 네가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나는. 이번에는 좀 멍청한 것 같고. 그 말을 한 게 다른 놈이었으면 이게 얼굴로 날아갔을 거다.”

엘피디오가 제 옆에 거꾸로 뒤집혀 있는 화병을 툭툭 건드렸다.

“죄송합니다.”

디에즈가 엘피디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돌아온 직후에 호출당한 뒤로 처음이었다. 해독 약이 없노라, 받아 내지 못했다 전했던 이후로 처음. 다행히도 마인이 있다면 ‘파편’의 힘을 상쇄할 수 있음이 입증되어 디에즈는 그에게 따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소득이 없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열한 살 이후로부터 줄곧 그 자식으로 인해 ‘무슨 일’ 이 많이 있었지.”

엘피디오가 협탁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며, 잔뜩 인상을 쓰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디에즈가 황급히 일어나 파이프에 불을 붙여 주었다.

엘피디오가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방 안에 연기가 퍼졌다. 디에즈는 코를 움찔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연초가 아니었다. 분노로 젖어 있던 엘피디오의 눈동자가 차츰 진정되는 게 보였다. 최근 일라베니아 내에서 금지하는 마약인 것 같았다.

“끊으세요, 형님. 몸에 좋지 않습니다.”

엘피디오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착하구나, 디에즈.”

눈치도 볼 줄 모르는 멍청한 놈. 착하다는 말에 담겨 있는 뜻이었다. 엘피디오가 느릿하게 머금은 연기를 내뱉었다. 방 안에 그 몽롱한 냄새가 가득 차오를 즈음 엘피디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카르디스가 선물을 보냈다. 발신인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확실해. 물론 수신인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석영 성에 보냈으니 나에게 보낸 게 맞을 테고.”

“아, 리카르…….”

디에즈가 무어라 말하려 하자 엘피디오가 급하게 검지를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니, 리카르디스 형님께서요? 좋은 선물입니까? 따위를 내뱉으면 진짜 열 받을 거 같으니까 입 닥치는 게 좋겠다. 디에즈.”

디에즈가 입을 닥쳤다.

“검은달 놈들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서 내가 곤란해졌어.”

“죄송합니다, 형님.”

“급한 대로 일라베니아 내의 길드에 도움을 좀 받았지. 맡겨만 달라고 떵떵거리더니…… 쓸모없는 새끼들…….”

검은달이 손을 빌려주지 않자, 급한 대로 일라베니아의 암살 길드를 이용했다는 얘기였다. 확실히, 검은달도 막아 내는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런 삼류 암살자를 못 막아 낼 리 없었다.

“아침에 성의 요리사가 솥을 열었다가 졸도했지. 그 안에 시체를 욱여넣었다더구나. 시체의 문신으로 그 길드 소속인 걸 알아냈고.”

디에즈는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보낸 ‘선물’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엘피디오가 피식 웃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데.”

암살자를 죽이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머무는 금강석 성 다음으로 경비가 삼엄한 석영 성에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고 시체를 가져다 놓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디에즈가 놀란 것은 그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을 리카르디스가 이루어 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암살자를 보내면 처리하고, 막아 내기만 한다. 전장에서 공을 세워 얻게 된 권력이 위협적일지언정, 물리적으로 엘피디오를 공격하려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동생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었을 때조차.

그런 그가 지금 처음으로 날아온 화살을 다시 돌려보냈다. 얼마나 잘 벼려져 있건, 그 무기가 얼마나 강하건 검집 안에서 꺼낼 줄 모르던 리카르디스가, 처음으로 엘피디오를 향해 날을 겨눈 것이다.

엘피디오가 평소보다 흥분한 기색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째서일까.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만히 숨죽이고만 있던 리카르디스가 왜 지금에 와서? 사절단 일로 힘을 얻었다고 생각해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생각해서 반격의 서막을 올린 것일까? 아니다. 사절단 일로 많은 치하를 받기는 했지만, 그전부터도 리카르디스는 수많은 공을 세워 왔다. 그렇다면 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디에즈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엘피디오가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선에서 돌아온 그 대단하신 영웅님 말이야. 그녀가 리카르디스의 행동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엘피디오가 또 인상을 찌푸린 채 두리번거렸다. 디에즈가 얼른 일어서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재떨이를 집었다.

“그대로 들고 있거라.”

탁자에 놓으려 하자 엘피디오가 디에즈에게 명령했다. 디에즈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다. 디에즈가 들고 있는 재떨이 위로 엘피디오가 파이프를 툭툭 털었다. 재가 날리며 후끈한 기운이 그의 피부에 닿았다.

“그런데 나는 뭔가 더 있을 거 같다. 황금정원까지 움직이며 페르탄의 딸을 보호하고 있다더구나. 심지어는 안 하던 협박까지 하고…… 물론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마인이 필요하니, 그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단순히 도구로 보는 것 같지 않아.”

엘피디오가 서 있는 디에즈를 흘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눈높이가 비슷한 상대와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한단다, 디에즈.”

자신이 올려다보는 상황이 기분 나쁜 듯, 엘피디오가 고상하게 명령했다. 디에즈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에는 공손히 재떨이를 들고 있는 채였다. 엘피디오는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세티스티아가 어릴 때부터 알아 왔다 하니, 오랜 인연이겠지. 리카르디스는 그래 보여도 좀 무른 구석이 있으니, 어쩌면 그녀를…….”

엘피디오가 웃었다. 눈동자가 뱀의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사람은 소중한 게 생기면 약해지기 마련이지. 내가 왜 널 부른지 알겠느냐?”

“…….”

“네가 붉은수레바퀴의 여식과 친하다지.”

“예, 형님.”

“역시 넌 쓸모가 있어.”

디에즈는 엘피디오의 무릎만 보며 말을 어물거렸다. 엘피디오가 담배 파이프를 강하게 재떨이에 툭, 떨어트렸다. 디에즈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틸렌드 그 병신 새끼보다 널 좋아한다고 했었지.”

3황자 틸렌드는 엘피디오의 동복동생이었다. 성격이며 외모며 그와 쏙 빼닮은 인물이었으며, 야망 또한 그에 뒤지지 않았다.

“너는 분수를 알아.”

엘피디오는 그 말을 하며 디에즈를 위아래로 훑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재떨이 역할을 하는, ‘분수’를 디에즈에게 자각 시켰다.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해, 디에즈. 내 말 알아먹었어?”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디에즈가 입술을 꽉 물었다. 로젤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성에 창백한 얼굴로 잠자고 있던. 그리고 더 과거의 일도.

어깨에 오는 짧은 머리의 그녀는 햇빛 아래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인다. 새삼스럽게 엘피디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소중한 게 생기면 약해지기 마련이지.]

디에즈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깨달았다. 참담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잊은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자신을 너무 약하게 만들었다.

“……형님.”

“그래.”

“저는 형님이 황금으로 빛나는 월계관을 쓰는 날을 항상 그리고 있습니다.”

엘피디오가 씩 웃으며 디에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이 좋구나.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잔하자.”

* * *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눈을 뜬지 이 주 하고도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수도, 티가드에서부터 반가운 편지가 왔다. 몸이 다 낫거든 하얀밤 기사단에 복귀하라는 명령서였다. 로젤린이 편지를 받자마자 짐이고 뭐고 챙기지도 않고 떠나려는 것을 칼릭스가 겨우 말렸다.

칼릭스도 편지를 받았다. 리카르디스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황가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있는 서신을 받았음에도 칼릭스는 좀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로젤린에 관해 할 말이 있다는 내용이었고, 칼릭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노라 생각했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의 만남은 생각보다 오래 거슬러 가야 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수습 기사로 입단 했을 때부터니, 햇수로만 7년이 다 되어갔다. 몇 없는 여자 기사라는 이유 때문에 로젤린은 입단하자마자 세티스티아의 호위가 됐었다. 세티스티아는 로젤린을 매우 좋아했고, 리카르디스는 제 동생이라면 끔벅 죽는 시늉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셋이 어울리는 시간도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한번 심하게 비틀렸지만, 로젤린은 그때에도 리카르디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노력으로써 이어진 시간이었다. 비록 그 속에 어떤 감정들이 얽히고설켰는지는 몰라도.

그러니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아무리 무관심했더라도 이전의 로젤린과 현재의 로젤린을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테다. 기억상실이라는 어설픈 변명으로 눈을 가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칼릭스는 조금씩 닳은 그 한계가 지금에 와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했다.

리카르디스는 결코 아둔하거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지만, 덮어 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덮어 두고 있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가 파르딕트 경의 방패를 맨손으로 부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자자하게 퍼진 로젤린에 관한 소문 중 하나였으나, 칼릭스는 그 얘기가 진실임을 직감했다. 같이 듣고 있던 로젤린이 “맞아, 내가 부쉈어.” 하고 뿌듯하다는 듯이 얘기해서 칼릭스의 마음은 더욱 갑갑해져 버렸다.

파르딕트는 거친 뱃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고래무덤 가문에서도 독보적인 체구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파르딕트의 방패는 그보다도 더 유명했다. 명장 누구의 솜씨로 삼 년만에 태어난 걸작이라던가 뭐라던가. 사람들은 방패의 크기와 두께를 보며 놀라워했다.

그걸 맨손으로 부숴 버렸다는데…… 칼릭스는 그 얘길 듣고 마카롱을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독수리 마카롱은 새의 대가리를 하고도 뜨끔하는 표정을 짓더니 모른 척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는 잠시 순찰중이라 같이 없었단다.

아무튼 그때, 파르딕트의 방패를 부수라 명령한 사람이 리카르디스라고 하니 이건 뭐 들킨 건 확정이었다. 그녀가 돌보다 단단한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칼릭스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제 누이가 이 성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대미문의 강력한 마인이 나타났음에도 주변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로젤린이 2황자를 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나쁜 얘기가 나오려고 하면 어디서부턴가 정보가 미묘하게 비틀리며 순화되었다. 로젤린이 어릴 적부터 얼마나 총명하고 자애로웠느냐를 알 수 있는 과거의 사소한 얘기들이 골목 사이마다 돌아다녔다.

더불어 밝혀지지 않았던 2황자의 미담들 또한. 삼 년 전에 전국에 구휼미를 대대적으로 풀었던 모래절벽 자작이 사실은 2황자의 또 다른 신분이었다나 뭐라나.

대륙 여기저기에 손을 뻗은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자, 돈이 흐르는 줄기를 따라 정보를 옮기는 황금정원 가문의 솜씨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리카르디스가 있으니 그가 주도했다 말해야 정확할 지도 몰랐다. 2황자는 이런 여론 몰이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손, 누구의 발을 빌렸는지 티 나게 행동하고 있었다.

로젤린의 뒤에 2황자 리카르디스가 있음을 알라는 얘기였다. 그와 그녀의 주적들에게.

일주일 전, 로젤린의 처우에 관한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리카르디스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되었다는 소식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칼릭스에게 전해 줬다.

“……만장일치가 말이 되나?”

칼릭스의 비서, 알터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었다.

“2황자 전하께서 생각보다 수완이 좋으신가 봅니다.”

1황자 파가 포진한 그 회의에서 만장일치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는 것은 단순한 수완의 문제가 아니었다. 칼릭스가 알터를 흘끗 바라봤다. 알터가 눈썹을 까딱하며 알아온 또 다른 정보를 풀었다.

“회의가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몇몇 귀족 가문에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는군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공론화 시킬 수 없는…… 어, 그러니까 좀 구린 구석이 있는 부분들이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들은 우연히도 전부 1황자 파에 속하는 귀족 가문들이었다고 하는군요. 덕분에 회의에서 힘 뺄 여력이 없었고요.”

“그것 참 공교롭게 되었어.”

“대단히 굉장한 우연이죠.”

칼릭스는 알터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좋은 결과였으나, 과정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다소 소극적이게 방벽만 쌓던, 여태껏 리카르디스가 해 온 방식과는 달랐다.

칼릭스는 그 남자를 변화시킨 것이 어쩌면 제 누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 얼토당토않은가 싶다가도, 그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닌 듯도 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리카르디스는 울타리 밖을 서성이던 제 누이를 확실하게 그의 영역 안으로 집어넣고 보호했다. 그 덕분에 칼릭스는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것처럼 칼릭스도 그에게 볼일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좋은 기회였다.

칼릭스는 편지를 품 안에 넣었다.

“수도까지 긴 여행이 되겠군요, 누님. 채비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가는 거야? 에스터는?”

칼릭스는 감격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인 아버지도, 자신도 없는 영지를 걱정하는 제 누이의 발전이 너무나 대견했다.

“붉은수레바퀴 산하의 붉은말 남작가가 맡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 마르슈 아저씨가.”

로젤린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말 자작에 관해서 내가 일러 준 적이 있던가? 곧바로 창밖에서 마카롱이 날아오자 그의 신경은 금세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님께 부탁해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응.”

로젤린이 더없이 해맑게 웃었다.

“그럼 하던 걸 마저 할까요?”

칼릭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턱 펼쳤다. 로젤린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누님, 붉은수레바퀴 가문 이름의 유래를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로젤린의 교육 시간이었다. 시간이 남는 겸 부족했던 상식을 채우기 위해 칼릭스가 책상 앞에 앉았다. 어지간하면 제 동생의 말을 잘 따르는 로젤린도 공부 시간은 티 나게 싫어했다. 매번 도망가고 숨었지만, 그녀에 관해서는 통달한 칼릭스가 매번 찾아내었다.

이번에도 주방에서 주방장과 노닥거리던 로젤린을 칼릭스가 잡아 왔다. 책상 앞에 앉아서도 로젤린은 끝까지 딴청을 피웠지만, 칼릭스가 크레페 케이크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대치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카롱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제 누이를 먹을 거로 교육하다니 저 자식도 좀 너무하다.

“전장의 수레바퀴.”

“훌륭하십니다.”

적군의 피로 물든 수레바퀴로부터 가문의 이름은 시작되었다. 과거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지 로젤린은 금방 답을 내놓았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쳤다. 마카롱은 침대 위를 뒹굴며 깔깔 웃었다.

“정말 너희들의 아버지와 딱 어울리는 가문 명이야.”

로젤린이 부상으로 기절해 있는 동안, 마카롱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을 본 적 있었다. 정말……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마카롱은 “이야, 이야.”, “진짜.” 따위의 감탄사를 계속 내뱉었다. 로젤린이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또 있어. 운명의 수레바퀴라고도 한 대.”

“잘도 끼워 맞추고 있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야? 완전 웃겨.”

칼릭스가 의자에 앉아 뚱하게 쳐다봤다. 그 표정이 더 웃겨서 마카롱은 낄낄 웃었다.

* * *

칼릭스는 수도로 떠나기 전 로젤린이 보았다던 마인을 찾고자 했다. 검은달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파편’과 마력의 결정으로 탄생한 인위적인 마인 부대를 무기 삼아 지니고 있었다.

로젤린이 아무리 강하고, ‘파편’을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들 개인으로서는 해 낼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검은달에 속하지 않은 마인의, 마인들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인이 많은 비스타라고 해도 자신이 마인이라며 이마에 써 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로젤린이 얼굴을 알고 있는 소매치기 소년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칼릭스는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로젤린과 마카롱에게 이 건에 대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숨어 살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다 있는 거겠지.”

마카롱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더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칼릭스는 마카롱의 비협조적인 반응과 태도에 익숙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순순히 도와주겠다 하는 쪽이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로젤린의 차가운 반응이었다.

“아니. 칼릭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칼릭스의 입에서 저절로 사죄의 말이 나왔다. 그때 로젤린의 표정은 뭐랄까. 마음 속 깊숙이 무언가를 묻어 둔 사람 같았다. 그렇다. 사람 같았다.

칼릭스는 여러모로 충격을 받아, 두 번 다시 마인을 찾아보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넉넉하게 잡아 뒀던 준비 기간이 단축되었다. 칼릭스가 오후에 곧바로 떠나자는 말을 꺼낼 즈음에는 로젤린은 평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됩니다, 도련님!”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기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호위 없이 단 둘이 수도로 올라가겠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기사들이 펄펄 날뛰었다.

“굶어 죽는 대신 산으로 숨어들어 도적 행세를 하는 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험하시니 같이 가겠습니다.”

칼릭스는 그들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기사들의 시선도 그를 따라 돌아갔다. 남자들의 시선이 한 번에 모이자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

나를 왜 봐? 응?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이 두 남매를 배웅하기 위해 바쁜 일정 속에 짬을 내었다.

“나랑 칼릭스에게 줄 화관을 만들기로 약속했잖니, 로젤린.”

칼릭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울컥한 기색이 비치자 백작이 깔깔 웃었다.

“순탄한 여정이 되길 빌어. 네 주위에는 항상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야.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하렴.”

백작은 로젤린이 제 딸이라도 되는 마냥 애틋한 기류를 형성했다. 로젤린의 손을 잡고 연신 쓸더니, 끝에 가서는 와락 껴안기까지 했다. 백작이 로젤린의 품에 쏙 들어갔다. 로젤린도 어설프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너도 잘 가렴. 누나 손 잘 잡고 다니고. 페르탄에게 안부 전해 주고.”

백작은 이후 손을 휘휘 저으며 칼릭스를 배웅했다. 대접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났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저 까탈스러운 성미의 백작이 누이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싶을 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준비한 마차 세 대는 로젤린이 사양했다. 너무 느리단다. 당연히 먹을 식량이며, 물이며, 옷이며 사람을 실은 마차는 말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로젤린은 지금 그것을 다 버리고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수도로 갈수록 마을도 많으니 노숙은 별로 안 할 테지만 고생은 꽤나 할 게 분명했다.

“정말 안 챙겨 가도 되겠니? 힘들 텐데…….”

“네.”

로젤린이 당당하게 대답했고, 칼릭스는 울고 싶어졌다. 붉은수레바퀴 성에서부터 비스타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그 추억의 날들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칼릭스.”

무뚝뚝한 목소리 속에서 들떠 있는 그녀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삼키고 처진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로젤린은 말에 올라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어쩐지 길게 엮일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백작이 쪽 소리를 내며 손 키스를 그녀에게 날렸다. 그게 무슨 행위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로젤린은 곧 어설프게 백작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게 어찌나 귀여웠는지 백작은 한참을 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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