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정은 순탄했다. 암살자나 함정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을뿐더러 날씨도 좋았다. 일행은 일라베니아의 영토 내에서는 여러 마수들과 잦은 전투를 치렀지만, 발타에 들어서며 한결 여유로워졌다. 누군가가 미리 처리라도 해 놓은 듯이 마수를 발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은 것치고는 순탄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였다.
가끔 여우 같은 자그마한 마수가 막사를 덮치고는 했지만 하늘에서 빠르게 하강한 마카롱에게 번번이 공격당했다. 기사들은 그들보다 훌륭한 경비를 서는 마카롱에게 경의의 뜻을 담아 ‘마카롱 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경’이라는 것은 기사를 뜻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기사는 ‘약한 자를 보호하고 명예를 알며, 강한 신념을 가진 높은 지위의 인간’이라는 것 또한 알려 주었다. 그 후부터 마카롱은 기사들이 ‘마카롱 경’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우쭐거렸다. 매우 고압적인 태도였으나, 동물의 몸이라 티가 잘 나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인 덕에 어느덧 발타의 수도 ‘리비타’에 근접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발타의 궁은 일라베니아의 순백의 성과는 매우 달라 보였다. 여러 가지 색의 화려한 문양과 금이 조화롭게 섞여 궁을 뒤덮고 있었다.
사절단 일행은 외벽에 들어섰다. 열린 성문 안쪽에는 경비대가 대거 서 있었다. 붉은 흙 같은 갈색 피부의 남자들이었다. 로젤린은 발타인의 머리카락이 모두 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하얀 피부에 다양한 머리 색을 가진 일라베니아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생김새였다. 그들은 갑옷이 아닌 가죽을 무두질해서 만든 보호구를 주로 입고 있었다. 우거진 숲과 늪, 험난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발타에서는 활동성을 더 중요시 여겼다. 갑옷같이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다간 화살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경비대를 마주한 이후, 하얀밤 기사단의 분위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상급 기사들이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더 가까이 붙어 섰다. 하얗고 검은 집단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대가 양 옆으로 갈라지며 중앙에서 금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뚱뚱한 남자가 나타났다. 잇세리온은 몇 년 전 일라베니아에 방문했던 그와 만난 적 있었다. 발타의 재상, 아틸라크였다. 아틸라크는 두 무릎을 꿇고 발타식으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경비대의 많은 인원도 그를 따라 절도 있게 두 무릎을 꿇었다.
“오오, 일라베니아의 귀빈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힉살라 아돈의 충실한 종인 아틸라크입니다. 부족하나마 발타의 재상직을 맡고 있습니다.”
아틸라크가 인사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이 이완되었다. 지금 당장의 위험성은 없다고 판단한 기사단장 스타스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리카르디스가 긴 은발을 손으로 정리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햇살이 강한 날이었던 만큼 그의 머리칼이 발하는 빛 또한 평소보다 눈부셨다. 아틸라크는 일라베니아 2황자의 뒤에서 후광 따위가 비춰지는 것에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햇빛이 그의 뒤에서 찬란하게 산개하는 모습이 어찌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오랜만이군, 재상.”
리카르디스가 그에게 아는 척하자 재상이 호들갑을 떨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다. 덥지는 않으신지, 힘드시지 않으신지, 배고프지는 않으신지. 누가 보면 발타의 왕 힉살라의 종이 아닌 리카르디스의 종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사절단 일행은 곧 궁으로 안내되었다. 무장하고 있던 경비대가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둘러싼 채로 이동했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높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다. 비록 보이지 않는 안쪽에 빈민가가 위치하고 있어도, 궁으로 가는 길만큼은 반짝반짝하게 잘 닦여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을 음미하며 지나가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랜 숙적의 나라에 발을 들인 만큼 당장 위험하지 않더라도 경계하게 되는 것이었다. 로젤린도 리카르디스의 마차에 말을 가까이 붙여 몰며 주위를 경계했다.
“마카롱 경은?”
레이몬드가 골목을 주시하며 물어왔다. 항상 가까이 붙어서 날던 거대한 독수리가 사라지니 그 공백이 여간 커 보이는 게 아니었다. 로젤린은 잠시 하늘을 한 번 봤다가, 제 가슴을 한 번 내려다보며 우물쭈물했다.
“가까이에 있어.”
레이몬드는 넓은 하늘을 쭉 살펴보았다. 가까이에 있다더니 하늘은 구름 한 점, 독수리 한 마리 없이 푸른빛 일색이었다. 곧 궁의 모습이 보이자 레이몬드는 다시 경계 태세로 돌입했다.
레이몬드를 바라보던 로젤린이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가까이에 있는, 정확히는 심하게 가까이에 있는 마카롱이 보였다. 제복과 가슴 갑옷 사이에 들어갈 만큼 작은 생물이었다. 회색 털을 가진 쥐가 쌀알 같은 앞발로 잘 매달려 있었다. 궁 안에서는 독수리 같이 커다란 생물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리비타에 들어서기 전, 마카롱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척하며 곧바로 쥐로 변해 그녀에게 돌아왔다. 마카롱은 주머니를 발견해 들어가서는 찍찍, 소리를 냈다.
로젤린은 마카롱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발타의 성문이 열리고 경비대와 조우한 이후로 줄곧 눈치채고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시선은 차단되었지만 그녀의 감각이 주위의 광경을 그려냈다. 군마 무리, 기사들의 갑주가 철컹이는 소리. 마차의 수레바퀴가 흙 자갈 위를 굴러가는 가운데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불안정하고 난폭한 기운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마수 한 마리의 마력이 횃불이라면, 지금 이것은 주위를 온통 뒤덮은 산불처럼 범람해 있었다. 로젤린은 이것과 비슷한 기운을 느낀 적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홍차에 섞여 있던 ‘파편’과 ‘마수’ 라 불리는 흉포한 짐승들로부터.
아틸라크라는 재상에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절단을 둘러싼 경비대 한 명, 한 명이 모두 그 기운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그 탓에 마수가 많기로 유명한 마의 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진풍경이 그녀의 감은 눈 위로 펼쳐졌다. 이렇게 한곳에 응집해 있을 수 있는 힘이 결코 아니었다. 기괴한 광경을 마주하자 신경 하나하나가 저릿할 정도로 오싹했다. 팔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마카롱이 식겁해서 계속 무어라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카롱 또한 이렇게 마력이 응집되어 있는 경우는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로젤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타의 많은 백성들이 사절단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다행히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저 경비대가 특수한 집단인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불안한 마음에 리카르디스의 마차 근처로 말을 바싹 붙여 몰았다.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이 푸르릉, 소리 내며 성질낼 정도였다. 마카롱이 말의 투레질 소리를 듣고 얼른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말들에게 삿대질하며 화냈다. 늙은 할머니랑 살았다더니 욕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찍찍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서 로젤린은 마카롱을 다시 들여보냈다. 다행히도 이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발타는 넓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도의 중앙에 위치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에 도착했다. 사절단의 일정으로 1왕자 하카브와 만나기로 한 것은 이틀 뒤. 오늘은 막 도착한 만큼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틸라크는 사절단을 위해 궁 하나를 통째로 비워 두었다. 기사들이 먼저 리카르디스의 방을 샅샅이 확인하고 나서야 모두가 휴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로젤린도 방을 배정받아 갑옷을 벗고 무구를 손질했다. 갑옷 위에서 마카롱이 계속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쌀알만 한 눈동자가 가느스름해져 깨알만 해져 있는 걸 보니, 성질이 보통 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질적인 마력의 농도가 기분 탓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더욱 짙어졌다. 발타의 궁전을 고요하게 둘러싸고 있는 힘은 그들을 압도하듯이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이 넓은 궁전 전체가 커다란 마수의 입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로젤린은 검 날을 뽑아 들어 달빛에 비춰 보았다. 검이 날카롭게 빛났다.
“위험하면 도망가, 마카롱.”
찍찍. 마카롱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나는 도망 갈 수 없어.”
찌치지지찍! 쥐가 펄쩍펄쩍 뛰었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어. 이번에는 반드시.”
이번에는? 마카롱이 물었다. 로젤린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으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만 했다. 그를 지키는 임무에 실패한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로젤린과 마카롱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해답을 들려 줄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하얀밤 기사단을 모두 모아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발타까지 오느라 다들 고생 많았네.”
다들 새삼스럽게 왜 이러냐는 둥, 월급 올려 달라는 둥 농담을 했다. 스타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로젤린이 감탄하며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천년 묵은 돌 같던 기사단장의 미소란 제법 희귀했다. 주머니에 들어가 얼굴만 쏙 내밀고 있던 마카롱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였다. 잘생긴 수컷…… 어쩌고 말했는데 정확하게는 알아듣지 못했다.
“일라베니아로 귀환하는 길에 진정한 위험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이 궁에 발을 들이고 있는 한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다는 건……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네.”
상급 기사들이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스타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어두운 낯빛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미리 말해 두겠네. 기사단장인 나,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 경. 상급 기사 중에는 파르딕트 경, 카일로 경, 로젤린 경, 헤일 경. 그리고 하급 기사 중에는 네스터 경, 클로드 경, 바스티안 경, 슈텐 경, 아르만 경. 궁에서 전투가 발생할 시, 기사단장 제외 총 열 명의 인원이 2황자 전하와 5황자 전하를 모시고 발타의 궁을 탈출한다. 호명되지 않은 기사들은 무력으로 응전하며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모두들 언젠가의 맹세를 떠올리며 목숨을,”
바쳐라.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울림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의 모두가 몸을 곧게 세웠다. 강한 결의가 두려움을 억눌렀다. 어느 누구 하나 제 처지를 비탄하며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견고한 신념 아래 그들의 맹세가 다시금 새롭게 새겨졌다.
상급 기사 앞에 서 있던 부단장 나단과 그의 부관인 레이몬드가 스타스를 향해 경례했다. 이후 상급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그들과 똑같이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렸다. 스타스 또한 단단하게 굳어진 부하들을 보며 심장 위에 주먹을 올렸다. 기사단장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정적을 깨며 방안을 울렸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 * *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일행이 머무르는 궁에는 많은 눈이 붙어 있었다. 하녀와 하인들, 천장 위, 바닥 아래, 나무 위 등. 그러나 그저 사절단의 동향을 감시할 뿐, 어떠한 살의도 비치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타국의 시선은 로젤린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아니, 발타에서는 함부로 사람 죽이면 안 된다고 칼릭스가 그랬는데. 어쩌면 좋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이 행동은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닌가? 헷갈리신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반. 드. 시. 누님과 가깝다거나, 누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반. 드. 시.]
로젤린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기사단장의 방문을 노크했다. 가까운 사람이라 하면 레이몬드지만, 최근에는 같은 집단 내에 있으면서도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사절단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는 걸 봤을 뿐이었다. 이후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군가 생각해 보았더니 기사단장 모습이 딱 떠올랐다.
“들어오게.”
임시 배정된 기사단장실에 들어가니 스타스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많았다. 부단장 나단과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 상급 기사 몇이 지도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회의 중이었다. 레이몬드가 눈웃음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로젤린도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인가, 로젤린 경?”
로젤린은 머뭇거리다가 기사단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스타스는 답지 않게 당황했다.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젤린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봤다. 언제든지 달려가서 로젤린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 비장한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스타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듯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쭉 내밀어서 그 근처에 귀를 두었다. 그녀가 어떤 폭탄 발언을 할지 매우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배가 고픕니다? 내일 아침은 뭐가 나옵니까? 집에 돌아가도 됩니까? 뭐가 나와도 상사의 귓가에 남모르게 속삭일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쭉 빼고 있어서 조금 흉한 몰골이 되어 버렸지만 그 덕에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엿들을 수 있었다. 곁에 서 있던 부단장 나단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아이를 과보호하는 부모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사이 로젤린의 질문이 레이몬드와 스타스의 귓가로 흘러들어 갔다.
‘궁을 주시하는 자들이 있는데 죽여도 됩니까?’
“…….”
“…….”
스타스는 조용히 음…… 하며 신음하더니,
“안 된다.”
라고 했다. 레이몬드도 “안 돼, 로젤린.”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로젤린은 칫,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도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름 평화 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방문한 상태였다. 발타에서 전쟁을 일으킬 만한 명분을 일라베니아 측에서 먼저 제공할 수는 없었다. 궁을 주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서 먼저 그들의 목숨을 끊으면 도리어 사절단 쪽의 입장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은 인내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로젤린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기사단장의 귀로 돌진했다. 레이몬드도 다시 그 공간 사이에 파고들었다.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였다. 부단장 나단은 전보다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까?’
“안되네.”
“안 돼!”
전혀 알아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로젤린의 볼이 부루퉁해졌다. 그녀는 기사단장과 레이몬드에게 혼났다. 절대, 절대 절대로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먼저 덤벼 오지 않는 한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로젤린은 그 짧은 사이에 ‘절대’와 ‘안 된다’라는 말만 수십 번을 들었다.
그녀는 결국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 사이에서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어찌 되었거나 궁을 지켜보는 시선을 눈치챈 일만은 칭찬할 만했다. 로젤린은 기사단장에게 눈의 위치를 낱낱이 알려 주고 방을 나섰다.
로젤린은 돌아가는 도중에 리카르디스의 방에 한 번 더 들렀다. 검만 안 들었다 뿐이지 사방에 적이 포진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경계심은 늦춰질 새 없이 단단해져 갔다.
“실례합니다, 전하.”
로젤린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상의를 벗은 채, 하의마저도 막 벗고 있던 중이었다. 방 안에 같이 있던 상급 기사들과 잇세리온은 로젤린의 기습에 쩍 굳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그가 한 자 한 자 씹어 먹을 듯이 이를 갈며 말을 내뱉었다.
“나가.”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을 쭉 둘러보며 이상한 점은 없는지 구석구석 살폈다. 방 안에 있는 상급 기사들만 죽을상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골반쯤에 걸쳐진 바지를 붙잡고,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한참을 둘러본 로젤린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자마자 리카르디스는 제 옷을 패대기쳤다. 진짜 저 기사를 내가 진짜…….
* * *
방으로 돌아갔지만 마카롱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회색 쥐를 찾기 위해 침대 밑, 이불 아래, 창문 틀, 물 컵 안 등등을 살폈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몇 시간 전에 궁을 뒤덮은 난폭한 마력을 살펴보겠다고 방을 나섰는데, 해가 진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카롱을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현재 리카르디스를 호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상급 기사들이었다. 더군다나 발타의 왕궁이라는 위치적 특수성 때문에 호위 인력은 평소의 배로 불어난 상태였다. 로젤린은 안심하고 잠시 그의 곁을 떠나 있을 수 있었다.
“마카롱.”
복도에서 한참을 돌아다녀 봤지만 궁에 살고 있는 고양이만 몇 마리 발견했다. 자그마한 회색 쥐를 좋아할 것처럼 생긴 고양이들이었다. 불안감이 차올랐다. 로젤린은 걸음을 바쁘게 움직여서 사절단이 머무르는 궁을 벗어났다.
꽃이 피어 있는 화원이었다. 밤의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햇살을 받는다면 오색찬란하게 빛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꽃이나 풀의 냄새가 일라베니아와는 달랐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킁킁 코를 움직여서 냄새를 맡다가 아차하고 목적을 상기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카롱.”
한밤중의 고요한 화원에서 적국의 기사가 마카롱을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봤더라면 매우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때 로젤린의 예민한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작은 동물은 아니었다. 일부러 나뭇가지를 밟아 제 존재를 알리고자 하기에, 로젤린은 그 소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뒤돌아본 그녀의 시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발타인의 특징인 검은 머리와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낮에 본 퉁퉁한 재상 아틸라크와는 생김새가 매우 달랐다.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 둥그렇고 부드러운 눈매에 비해 인상이 사나웠는데, 눈썹이 짙고 골격이 단단해서 그런 것 같았다. 옷 또한 재상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화려했다. 바닥에 자락이 끌릴 정도로 더 길기도 했다. 남자는 로젤린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몇 번 걸으니 어느새 로젤린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군.”
정작 그렇게 말을 꺼낸 남자의 머리카락 또한 검은 색이었다. 로젤린의 머리카락보다 색이 밝아, 빛을 받는다면 흑갈색처럼 보일 것이다. 검은 머리는 일라베니아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흔한 색 또한 아니었다. 제국 내에서도 ‘와, 검은 머리네요’ 하는 소리를 간혹 들을 정도였으니, 발타인의 입장에서는 희귀하게 생각 될 법도 했다. 남자는 로젤린의 검은 머리카락이 흥미로운지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제복 위에서 떠돌았다. 수놓아진 하얀밤 기사단의 문양을 발견한 남자가 웃었다.
“황자의 기사인 것 같은데…… 제법 멀리까지 나왔군. 그대, 이름은?”
하대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남자가 발타의 높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그녀의 추측이 힘을 얻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강인해 보이는 좋은 가문 명이야. 이름도 예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연달아 칭찬하는 사람은 칼릭스와 레이몬드 이후로 처음이었다. 좋은 사람인 건가? 한데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로젤린의 본능이 남자를 경계했다. 남자는 로젤린이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눈치챈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다.”
로젤린도 아는 이름이었다. 발타의 1왕자. 병환을 앓고 있는 발타의 왕을 대신해서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능구렁이 같은 자라고 했다. 능구렁이라는 주석은 리카르디스가 달았지만, 칼릭스나 레이몬드도 비슷한 평가를 했다. 많은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도 했다.
‘…….’
로젤린은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무섭다기보다 기묘했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왕자가 웃는 모습에 로젤린은 급하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태껏 빤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자라고 했지. 혹시 그가 왕자라고 밝히기 이전에 무례를 저질렀던가? 이것은 어떤 사고의 한 종류가 아닌가?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아닌 듯 했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로젤린이 말하며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하카브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다음 행동을 저지했다. 로젤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곧 하카브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볼에 무겁게 눌러졌다. 그는 쪽 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로젤린의 코앞에서 하카브가 씩 웃었다.
“힉살라 아돈의 영혼이 그대와 함께한다.”
아, 발타로 떠나기 전에 레이몬드가 가르쳐 줬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연장자가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 먼저 볼에 입을 맞춘다. 이후 받은 사람이 입맞춤을 돌려준다. 가까운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사무적인 관계에서 까지 넓게 통용된다고. 하물며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볼에 입을 맞춘다고 하니, 일라베니아로 치면 그저 악수를 하거나 손을 흔드는 인사방법인 셈이었다.
“…….”
로젤린은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기사로서 보이는 정식적인 예우는, 일라베니아 황족 이외에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가볍게 묵례를 할 예정이었는데…… 계획이 와장창 다 깨져 버렸다. 이제 어떤 인사를 해야 하지? 일라베니아식? 발타식? 로젤린이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자, 하카브가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 가까이에 얼굴을 살짝 가져다 대는 모습이, 눈치가 없는 로젤린이 봐도 발타 식으로 돌려달라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하카브가 훌쩍 컸기에,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하카브가 로젤린에게 맞춰 몸을 조금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오던 참이었다.
“로젤린 경!”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젤린의 입술은 하카브의 피부를 스치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로젤린은 단단하게 안겨있는 상태였다. 남자의 가슴이 등 뒤로 느껴졌다. 막 뛰어 온 듯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로젤린의 어깨를 꾸욱 한 번 더 깊게 감싸 안은 후에 풀어줬다.
로젤린은 고개만 살짝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표정으로 하카브를 마주하고 있는 5황자 디에즈가 보였다. 사절단의 여정이 고단해도 한 번도 찌푸려진 적 없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그녀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장난이 지나칩니다, 하카브 왕자.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따르라니요. 로젤린 경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개방적인 인사와 개방적이지 않은 인사의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로젤린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제 등 뒤로 쏙 넣었다.
“발타에 오면, 발타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디에즈 황자?”
“저랑은 몇 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안하셨던 인사 같은데…….”
“그거야 뭐…….”
가벼운 어조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치고는, 맹수 두 마리가 격돌 직전 탐색전을 하듯 살벌한 분위기였다. 친분이 있다는 관계라 들었는데 그다지 살가워 보이진 않았다. 디에즈가 로젤린의 등을 밀어냈다.
“형님이 찾으시더군요. 먼저 들어가 보세요, 로젤린 경.”
“예.”
떠나는 로젤린의 등 뒤로 하카브가 웃음기 어린 인사를 건넸다.
“또 보도록 하지. 로젤린.”
로젤린은 하카브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화원을 벗어났다. 어쩐지 사람의 발소리가 많이 들리더라니. 쥐 한 마리 찾을 수 없던 아까와는 달리 수많은 인원이 화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디에즈의 심복들도 몇 있었고, 무장한 갈색 피부의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하카브의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몸 안에도 광폭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낮에 보았던 경비대보다 더 많은 양의 마력이었다. 로젤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울렁거렸다.
어두운 밤, 궁과 떨어져 있는 작은 화원. 주위를 지키는 사람들. 이 장소에서 디에즈와 하카브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게 아닐까. 그녀는 화원을 벗어나 천천히 궁을 향해 걸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예민하게 굴기는.]
[타국의 기사한테 치근덕대지 마세요. 없어 보입니다.]
[밤보다 깊은 검은 머리더군.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를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오늘 처음 일라베니아의 미의식을 아주 조금 이해한 것 같기도 해.]
[치근덕대지 말라니깐요.]
두 남자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안건으로 한참을 티격태격 다퉜다.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연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양고기 요리를 올려 달라고 하던 디에즈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주위에 로젤린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녀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디에즈와 하카브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들을 수 있는 반경을 점점 넘어서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귓가에는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로젤린은 사절단이 머무는 궁을 향해 급하게 달려가던 도중, 담벼락에서 마카롱과 만났다. 회색 쥐는 달리고 있는 로젤린의 머리카락에 재주 좋게 매달렸다. 그녀의 귓바퀴 뒤에서 마카롱이 찍찍 이야기했다. 궁을 돌아다니면서 마력을 몸에 지니고 있는 자를 많이 보았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데?”
마카롱의 대답에 로젤린은 사나운 얼굴을 한층 더 사납게 만들었다. 방금 전 하카브의 수족들을 보면서 떠올랐던 불길한 예감. 혹시나 이런 자들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닌가? 가늠할 수 도 없이, 셀 수도 없이?
그녀의 추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카롱은 짧은 다리로 많은 장소를 돌아다녔다. 경악의 연속이었다. 앞서 마주했던 기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압살 당할 것만 같았다.
마카롱은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나는 마인(魔人)을 만나 본 적 있었다. 마인이 가진 마력의 기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마력과 매우 흡사했다. 온건하고 조화로웠다. 이렇게나 난폭하게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이 폭주하는 힘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단순한 ‘마인’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순간 마카롱은 떠올렸다. 붉은 안광을 띄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공격하는, 그 사나운 짐승들. 마수. 커다란 짐승들조차 감당하지 못한 힘을 한낱 인간이 운용한다고? 마카롱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카롱은 감각을 벼려 넓은 궁을 훑어보았다. 밤보다 어두운 기운이 진득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로젤린은 높이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마카롱이 머리 안쪽에 몸을 파묻고 찍찍 소리를 내며 다 숨었다고 신호했다. 로젤린은 눈앞의 창문을 힘차게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기 바로 전. 호위 기사들은 창밖에 누군가가 있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검을 빼들고 경계 중이던 그들의 시야로 익숙한 이의 얼굴이 보였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검 끝을 그저 멀뚱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에 호위 기사들이 한숨을 쉬며 짜증냈다. 왜 멀쩡한 문을 두고서 창문으로 들어오고 난리란 말인가. 일단 로젤린의 얼굴이긴 했으나, 검은달이 다른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그들은 로젤린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발타의 성전을 읽고 있던 리카르디스는 기가 찬다는 듯 그 대치 상황을 바라보았다. 보통 호위 기사를 흉내 내려는 암살자라면, 결코 창문으로 들어오는 수상한 짓은 안 할 것이다. 저건 어느 모로 보나 백퍼센트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발타의 성전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발타에서는 아침밥으로 샐러드만 먹는다더군. 알고 있었나, 로젤린 경?”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로젤린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로젤린은 헉 숨을 들이켜며 제 입을 막았다. 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표정이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풀만 나옵니까?”
로젤린이 충격에 횡설수설하자 리카르디스가 무심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샐러드.”
호위 기사들이 검을 집어 넣었다. 그녀는 로젤린이 맞다. 음식을 좋아하는 사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분위기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저 모습은…… 흉내 내기도 힘들 것이다. 어느 누가 날카롭게 벼려진 검 날이 자신을 향하는데, 태평하게 음식 얘기나 하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2황자 전하의 말이 자신을 시험한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우리는 발타 사람이 아닌 데다가 손님이니 채소만 나오진 않겠지.”
리카르디스는 상황이 종료된 것을 보고 거짓말을 수습했다. 로젤린이 방긋 웃었다. 아침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상급 기사들이 어처구니 없어하는 사이에, 로젤린이 가볍게 창문을 넘어왔다.
그녀는 방 안에 있던 부단장 나단에게 잠시 구석으로 불려가 혼났다. 창문으로 드나들면 안 되겠지, 로젤린 경?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창문으로 들어와야 할 만큼 중대한 사항이 있으리라 믿고 있네. 그렇지, 로젤린 경?”
부단장 나단이 은근히 압박을 주었다. 리카르디스도 발타의 성전을 덮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렸다. 디에즈 황자의 건 이전에, 발타의 궁에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마력의 기운 때문에 불안해졌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 왔다.
칼릭스는 그녀에게 마력을 감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인(魔人)이라고 생각되어 어쩌면 하얀밤 기사단에서 제명 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로젤린은 걸릴 만한 주제는 걸러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카롱을 찾으러, 잠시 밖에 나갔습니다.”
“음……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계속 해 보게.”
“그러가다 이 궁에서 좀 벗어난 꽃밭에 들어갔습니다.”
“단독 행동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전혀 안 들었다는 건 잘 알겠네.”
나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도 턱을 괴고 그녀의 얘기를 집중했다.
“뒤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서, 뒤돌아봤더니 모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라고 했습니다.”
“뭐?!”
리카르디스는 인상 쓰며 버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단은 당황을 숨기려고 애써 보았지만, 콧수염이 씰룩거리며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다른 상급 기사들도 입을 쩍 벌렸다. 갑자기 왜 거기서 하카브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나단은 솔직히 로젤린이 쓸모없는 얘기를 하리라 예상하고서, 이미 혼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하카브, 발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인사만 했다고 한들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자가 그대에게 뭐라고 했나! 그대는 그자에게 뭐라고 했어!”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카브와의 우연한 만남. 그것을 계기로 무언가 틀어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잠시 위로 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하카브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군.”
방안에 순식간에 싸한 기운이 돌았다. 상급 기사 파르딕트가 제 귀를 후볐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리는 듯 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나단은 헛기침을 몇 번 하긴 했지만, 비교적 빨리 평정을 찾았다. 로젤린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왕자가 그렇게 말해서, 제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황자의 기사인 것 같은데…… 제법 멀리까지 나왔군. 그대, 이름은?’이라고 물어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
“그랬더니 왕자가 ‘강인해 보이는 좋은 가문 명이야, 이름도 예쁘고.’라고 해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
리카르디스는 으으음 하고 깊게 신음했다. 지금 자신이 뭘 듣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카브 그 자식은 왜 남의 기사에게 껄떡대고 있는 거지? 그는 로젤린을 남자로 치환해서 상황을 다시 상상해보았다.
몇 부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단순히 검은 머리 자체에 대한 호감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제가 경계하고 있자, 왕자가 ‘나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다.’라고 소개를 해 왔습니다. 그 전까지 왕자라고 생각 못하고 있었지만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도 매우 뿌듯해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왕자의 소개에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자에게 인사하는 법은 알고 있었군.”
리카르디스는 ‘용케’라는 단어를 겨우 빼고 그녀에게 칭찬 아닌 칭찬 비슷한 걸 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라베니아 식으로 인사하려고 했는데, 왕자가 먼저 볼에 입을 맞춰 와서…….”
“뭐?!”
“뭐!”
그 미친놈이! 검은 머리 자체에 대한 호감은 개뿔. 하카브 왕자는 로젤린에게 갖은 수작질을 하고 있는 게 맞았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부단장 나단도 애써 유지하던 평정을 깨트렸다. 그놈이 건드릴 여자가 없어서 이 어린애를! 나단이 무섭게 화냈다.
물론 로젤린이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그녀의 행동을 쭉 지켜봐 온 부단장에게는 아이만큼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상급 기사들의 기세도 흉흉해졌다.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이 감히 우리 동료를 건드려? 심지어는 그게 수작질이라고 인식도 못하는 맹한 애한테!
로젤린은 생각지도 못한 그들의 격한 반응에 말을 멈췄다. 머리카락 안쪽에서도 찍찍찍! 하는 울분에 찬 쥐 울음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찍찍거리는 격한 소리를 콜록콜록 헛기침을 내뱉어서 무마했다. 나랑 떨어져 있던 그 짧은 사이에 대체 어떤 놈팡이가! 마카롱이 분노했다.
로젤린은 티 나지 않게 몸을 움츠렸다. 정확한 분노의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발타식 인사에 대해서 다들 화내는 듯 보였다. 아까 전 5황자 디에즈 또한, 일라베니아의 사람에게 발타의 개방적인 풍습을 강요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
로젤린은 하카브에게 발타 식으로 인사를 돌려주려 했던 사실을 조용히 묻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혼날 것 같았다. 위기감을 비료로 삼아 눈치라는 꽃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또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지?”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디에즈 황자님이 오셔서 전하께서 부르신다고,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왔습니다.”
리카르디스와 나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히 눈치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이후에 일어날 수작질을 막아준 모양이었다. 당연히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부른 적 없었다. 디에즈가 이 맹한 기사를 돌려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벗어나는데…….”
“아직도 안 끝났나?”
리카르디스는 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떠나 있던 건 삼십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로젤린이 끄덕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디에즈 황자가 하카브 왕자에게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소리를 내어 억지로 웃었다. 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방 안의 분위기가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로젤린은 대충 이해했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적인 1황자의 전언을 가지고 하카브와 접촉했다. 그런 디에즈가 리카르디스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문득 머릿속으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디에즈가 다정한 손길로 제 얼굴에 붙은 꽃잎을 떼어 줬다. 햇빛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목소리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그 안에 호의가 가득 담겨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로젤린은 이 상황을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디에즈는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사람 내 편, 나쁜 사람 남의 편. 마음속에 정해 놓은 확고한 경계선이 있었으나 디에즈는 그녀가 분류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행보를 보였다. 그는 나의 적인 걸까?
“도착한 첫날부터 접촉하다니,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또 다른 말 들은 건 없나, 로젤린 경?”
로젤린은 풀벌레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장악하기 전까지, 점점 작아지던 그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들새의 청력을 빌린 귓가로 두 남자의 얘기가 고스란히 닿았다.
[엘피디오의 전언입니다.]
[이런, 미천한 발타의 아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
[‘마력과 독의 결합물이라니, 듣지 못한 것이다.’]
[정확히는 ‘파편’이라고 부르는 독이지.]
[‘마력과 독의 결합물이라니 듣지 못한 것이다. 서로의 앞날을 위해 맞잡은 손이었으나, 진정한 친우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하카브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 진정한 친우라는 부분이 특히 웃긴 듯했다. 디에즈는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순간에도 점점 소리는 작아졌다.
[‘어설프게 쌓아진 신뢰 관계 위에서 어떤 대업을 이루겠는가. 내가 그대를 믿은 만큼, 그대 또한 신뢰를 보여 주길 바란다…….’라고 하셨습니다.]
[말 한번 요란하게 꼬아 대는군. 요지는 해독제가 있냐는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카브는 짧게 침묵했다. 기분이 좋은 듯 나지막이 웃는 소리만 그 공백을 메웠다.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해독제는,]
하카브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작아지던 소리는 완전히 멎었다.
[없다.]
찌르르 풀벌레만 우는 밤이었다.
* * *
“위험합니다, 전하!”
어디에선가 로젤린이 날아왔다.
젠장! 리카르디스는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자세를 잡았다. 한 마리의 나비처럼 날아오는 로젤린을 받아 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쏜살 같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뒤로 넘어갔다. 넘어진 두 사람 옆으로 벌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레이몬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어서 벌을 쫓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자른다. 일라베니아에 돌아가면 기필코 자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밑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유별난 호위는 어젯밤부터 지속되었다. 로젤린은 혼란스러웠다. 이 거대한 궁을 뒤덮고 있는 이상한 마력 때문이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한두 군데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넘실댔다.
사물을 관찰하는 뛰어난 눈과 귀. 살기를 포착하는 동물적인 감. 마력을 읽는 ‘그것’의 특성까지. 평소 훌륭하게 공을 쌓았던 로젤린의 능력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알릴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먼저 공격을 해 오지 않는 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방패의 역할뿐이었다.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시야와 감각으로 보는 세상이 겹쳐졌다. 이질적인 마력 속의 꽃과 검. 무엇이 위험한지 순간적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제 본능을 따라 모든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는 하인. 궁에 사는 고양이. 날벌레. 심지어는 잇세리온과 기사단장 스타스까지.
로젤린이 경계하며 앞을 가로막자, 스타스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태한 태도보다야 나았다. 경계가 부족하기보단 넘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약간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 보여서 그냥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넘어갔더랬다. 그 안일한 판단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풀밭에 드러누워 앞발을 할짝거리는 고양이였다.
“전하! 제 뒤로!”
저 멀리서 식사하던 궁의 하인이었다. 로젤린의 외침에 사레가 들렸는지 한참을 콜록거렸다.
“피하십시오!”
바람에 날려 온 나뭇잎이었다. 계속된 과잉 호위에 짜증내던 잇세리온도 이쯤에서 포기했다.
“전하!”
쭉 뻗은 로젤린의 팔이 리카르디스를 막아섰다.
“그만! 제발 그만,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양, 발밑의 돌부리를 필사적으로 캐내려 시도할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자신이 무엇이 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아흔 살 노인도 아니고 갓난아이도 아니건만 대체 이 기사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제복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돌부리에 머물렀다. 마저 제거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워 보였다.
“이……!”
리카르디스는 순간 욱했지만 심호흡하며 겨우겨우 제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른 이였다면 괴롭힘의 일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로젤린이었다.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잘 알고 있다. 그래, 알고는 있지만…… 과해도 너무 과했다.
“나도 눈이 있어, 로젤린 경. 돌부리는 내가 알아서 피할 테니, 좀…… 그만하지.”
리카르디스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주위에서 사라지라고 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몇 분 전, 참다못해 휴식시간을 줘서 억지로 내보냈더니 고작 꿀벌의 출현과 함께 바람처럼 다시 나타났다. 떨어져 있는 시간과 거리에 비례해 그녀의 호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녀는 얘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한 채 계속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져 있는 모습이었다.
타국이라서? 오랜 숙적의 땅이라서? 기사단장의 말에 다시금 위험을 깨달아서? 아니면 그녀 혼자만 아는 무언가가 있어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돌아다니다가는 하카브 왕자를 만나기도 전에 로젤린 때문에 혈압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로젤린은 불안한 듯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곧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얼른 쫓았다.
* * *
리카르디스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몇 날 몇 밤을 새더라도, 고작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기도 했고, 방 안의 촛불이 꺼진 정도로 일어나기도 했다. 그에게 방심이 허락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심은 위기로 직결되며, 자는 순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위기는 개인 사정에 맞춰서 찾아오지 않는다. 리카르디스는 어린 나이 때부터 그 사실을 이미 깨우쳤다.
그 결과, 리카르디스는 수면을 취할 때에도 제 무의식을 어슴푸레 인식 할 수 있는 곳까지 끌어올려 둘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질병이라고 불릴지라도 리카르디스는 흡족하게 생각했다.
리카르디스는 방 안을 감싸는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고요하게 흐르던 공기를 가르고 다른 공간에서 바람이 밀려왔다. 부드럽게 천이 스치는 소리에는 풀냄새 따위가 섞여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몽롱하게 잠에 빠진 채로 기척을 읽었다.
‘…….’
창문이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알려지지 않은 통로로 온 손님일 것이다. 그럼에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로젤린.”
“네, 전하.”
리카르디스의 귓가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 또한 전혀 놀랍지 않다는 태도였다. 잠시 끊겼던 대화를 지속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머리맡에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방 안을 밝히고 있는 불빛이 희미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흔들리는 촛불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리카르디스는 잠결에 벌어진 셔츠를 정리했다
“어디로 들어왔지? 문 열리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천장에 길이 있었습니다.”
“뚫어놓은 발타 놈들이나, 그걸 찾아서 오는 경이나. 재주도 참 좋군.”
“처음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려고 했는데 파르딕트 경한테 걸려서…….”
혼났습니다. 그녀의 숨겨진 뒷말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잠에 취해서 흐리게 웃었다. 이 어두운 밤에도 제 호위 기사들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 중인 듯 했다. 그 로젤린으로부터 창문을 사수할 정도면.
리카르디스는 그녀에게 굳이 왜 왔느냐, 뭐 하러 왔느냐. 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내내 유별난 호위를 펼치던 로젤린의 모습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로젤린은 여전히 침대 머리맡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복도 밖에서 속삭이는 호위 기사들의 소리와 천장을 통해서 옅게 불어온 바람에도. 그녀는 다른 곳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리카르디스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지?”
“아침까지 있어도 됩니까?”
“……내일은 피곤할 일이 많아. 휴식을 취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 늦은 시간까지 극성맞은 호위는 멈출 생각이 없는가 보다. 정성이 나름 갸륵했기에 리카르디스는 나가라는 말을 온건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머뭇거리며 자리를 지켰다.
“전하의 침대 밑에 들어가서 휴식해도 됩니까?”
“…….”
리카르디스는 쩍 굳어 버렸다. 종잡을 수 없는 그녀에게 슬슬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안 돼. 나가.”
리카르디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로젤린은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 저쪽 구석의 소파라도…….”
“안 돼.”
로젤린은 침대 밑, 소파, 옷장, 천장, 탁자 등 여러 곳을 휴식하고픈 장소로 꼽았다. 물론 전부 리카르디스의 반경을 얼마 벗어나지 못한 장소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되뇌었다. 얘는, 기억상실이다…… 이 기사는…… 안타깝게도 기억상실이다…… 마음이 아픈 자다…….
그는 자신의 인내심이 이렇게 뛰어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로젤린은 계속된 거절에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봐, 경…….”
“무섭습니다.”
로젤린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리카르디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절실해 보이기까지 하는 강렬한 감정이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불꽃은 여전히 아른거리며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피어올랐다.
“사람은…….”
로젤린의 말이 점점 작아졌다. 마지막에는 숨과 함께 섞일 정도로 약한 소리가 되었지만, 그마저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으니까요.
리카르디스는 담담한 말 속에 담긴 진심과 두려움을 읽어 냈다. 그의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참 투명했다. 좋은 것은 좋다. 싫은 것은 싫다. 무서운 것은 무섭다. 그녀 자체의 수수께끼 같은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로젤린은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밤의 장막이 걷히기 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어둠은 위안을 주곤 했지만, 때때로 길을 잃게도 했다. 혼돈을 주관하는 크레안 티다니온의 시간. 그때에는 인간이 두르고 있는 베일이 걷히며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했다. 칼날을 무디게 하고 견고했던 방패를 녹슬게 했다.
리카르디스는 후, 한숨을 크게 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이 들려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리카르디스의 뒤로 로젤린의 열렬한 시선이 따라다녔다. 리카르디스는 소파를 침대 곁으로 끌어 옮겼다. 누워있다면 시선이 마주칠 수 있을 만큼 근접한 거리였다. 그는 긴 소파 위에 베개를 툭 떨어트렸다. 대충 몸을 누일 수 있는 정도의 공간으로는 보였다.
“침대 밑보다야 낫겠지. 로젤린 경, 누워.”
로젤린은 답지 않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누우라니까.” 재촉하는 말에 로젤린이 어정쩡하게 눕는 시늉을 했다. 머리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어서,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그제야 로젤린의 머리가 베개에 안착했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에게 이불을 올려 주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그녀 또한 자신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뭔가 좀 낯간지러운 상황이었다. 가족 이외에 이렇게 눈을 마주치며 침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아마 그녀가 최초였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공기가 다시 느슨해졌다. 로젤린은 말 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필요할 때 외에는 입을 떼지 않는 편이었다. 조용한 공간 속에 색색 숨 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지만 확실한 타인의 흔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 계속 떠돌았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으니…….
“…….”
혹시 예전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은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어린 동물처럼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약한 불빛에 비친 녹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아.”
돌연 로젤린이 소리를 냈다.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고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해 할 찰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리를 한껏 죽인 작은 목소리였다.
“전하, 들리십니까?”
“……?”
“밖에 파르딕트 경이…….”
리카르디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아까 전에 창문으로 들어가려던 로젤린 경을 막았다며, 레이몬드 경에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
마흔 넘은 아저씨 수준하고는…… 리카르디스는 말을 삼켰다. 로젤린은 잔뜩 들떠있었다. 퍽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했다.
“저는 여기 있는데.”
로젤린은 흥, 콧김을 불었다. 나쁜 짓 하는 어린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배덕에서 오는 흥분을 한껏 즐기는 모양새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리카르디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걸리면 분명 혼날 텐데, 뒷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얼른 자기나 해.”
“네. 좋은 꿈 꾸십시오.”
“…….”
누군지는 몰라도 예의범절을 잘 가르쳤나 보다. 잠들기 전 인사를 들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이없기도, 웃기기도 해서 리카르디스는 평소보다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래, 그대도 좋은 꿈을.”
고요히 시간이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막 잠에 빠지려는 순간,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경, 제발 그만 좀…… 잠에 취해 어물어물 말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불에 폭 감싸인 채 잠에 빠져들었다. 모처럼 깊고 편안한 꿈을 꾸며.
* * *
“약 구백 명 정도의 사망자가…….”
“아니지, 아니야. 로젤린. 구백 서른하고도 둘이야. 로젤린에게 불리지 못한 서른 두 명의 기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
옅은 하늘빛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눈앞에서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는 서류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일어난 검은달과의 전투 보고서였다. 그런 살벌한 정보가 어린 황녀 전하에게 들어갈 리 없었다. 그녀의 오라비, 리카르디스 전하의 집무실에 놓여 있던 서류를 몰래 읽은 것이었다. 들키면 혼나실 텐데. 리카르디스 전하는 어린 여동생에게 한없이 약했다. 투쟁뿐인, 매일매일 싸워 버텨야 하는 모습을 감추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탁상 위에 돌려놓지 않으시면 리카르디스 전하께 혼나십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소녀는 움찔 몸을 굳히더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서류는 슬그머니 탁자 위에 놓여졌다. 나는 그녀의 완전 범죄를 돕기 위해 서류의 위치를 조정했다. 조금 더 왼쪽에 있었고 각도도 달랐다. 세심함을 발휘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자그마한 체구 때문에 몸이 쏙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의자 위에서 발을 까딱거렸다.
“로젤린은 전쟁에 나가 본 적 있어?”
“네. 후방 부대였지만요.”
소녀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두려운 듯했다. 모름지기 전쟁터란 피와 살점, 절망만이 난무했다. 소녀는 미지의 광경을 가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나쁜 기억이라도 남아 있을까 염려되는 듯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제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무섭네.”
의아한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우울해 보였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 무서워.”
그녀도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많은 얘기를 들어왔을 것이다. 일라베니아와 검은달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 리카르디스 전하가 이복형제 엘피디오와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여태껏 제 오라비에게 얼마나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는지.
심지어는 황실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별장으로 피신하듯 내려온 상황이었다. 그녀의 불안은 당연했다. 나는 황녀 전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녀는 손길을 즐기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걱정 마세요, 황녀 전하.”
“응.”
“제가 지켜 드릴게요.”
세티스티아 황녀는 안전할 것이다. 자만심은 아니었다. 내가 입고 있는 하얀 제복. 하얀밤의 주인은 언제나 승리만을 이끌어 왔다. 다소 피해가 있을지라도 그는 언제나 승리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믿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대단한 분이었다. 심지가 굳고 고결한 분. 사방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황실에서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섰다. 안타까움과 자랑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교만한 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감히 바라건대, 언젠가 그분께서 흐트러지는 순간이 온다면…… 의지할 수 있는 기사로 성장하여 곁을 지켜 드리고 싶다.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소녀는 히히 웃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운 건지, 내 말이 기쁜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도 소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숲속 깊은 곳의 별장.
그 3층에 위치한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세티스티아 황녀가 발을 까닥이던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새벽에 온 파발마. 황자 전하와 비서관이 얼굴을 찌푸리고,
어린 소녀는 불안함에 내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리카르디스 전하, 급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미안하다, 세티스티아. 먼저 떠나야해. 너는 예정대로 내일 출발해.
……
내 마차를 두고 갈 테니 너는 편안하게…….
다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보슬비가 내리는 숲속. 마차가 덜컹이며 달렸다.
“저기에 2황자가 있다!”
“죽여라!”
“흰색 마차다!”
화살이 쏟아졌다. 사나운 금속의 마찰음이 빗소리를 뚫고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차는 벼랑 위를 필사적으로 달렸다. 커다란 돌덩이가 좁은 길을 덮쳐 왔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나는 소녀를 끌어안으며 정신을 잃었다.
“로, 로젤린…….”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 어…… 으…… 온전하게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신음소리만 새어 나왔다. 반파되어 있는 마차 내부에는 피 냄새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무, 사해서 다행이야…….”
날카롭게 부서진 마차의 파편이 소녀의 복부를 관통해 있었다.
아아아아악!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인지 울음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의, 아니 로젤린. 그녀의 목소리였다.
[무섭네.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것 같아서, 무서워.]
소녀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로젤린은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햇살이 따듯하게 쏟아지고,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공기는 포근했다.
[걱정 마세요. 황녀 전하.]
“부탁……이, 야. 오빠를…….”
[제가 지켜 드릴게요.]
* * *
로젤린은 동이 터오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밤의 꿈이 뒤숭숭했던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이 ‘로젤린’의 기억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로젤린은 말라붙은 눈물을 대충 손으로 쓸었다. 인간으로서의 첫 눈물은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속에 흘러갔다.
로젤린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다가 호위 중이던 레이몬드와 마주쳤다. 2황자의 방. 새벽. 심지어는 창문에서 남몰래? 레이몬드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나, 나는…… 널 그렇게 안 키웠다, 로젤린!”
잔소리가 길어질 듯했다. 로젤린은 그 기미를 읽어 내고는 잽싸게 도망쳤다.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레이몬드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뒷목을 잡았다.
방으로 돌아가니 찻잔 안에서 자고 있던 마카롱이 부스스 눈을 떴다. 검은깨같이 작은 눈이 깜박거렸다. 포동포동한 배 위에는 먹다 남은 옥수수 알갱이의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이놈의 기지배…… 너 밤늦게 싸돌아다니고…… 그러면 안 돼…… 찍찍거리는 소리가 잠에 늘어졌다. 바깥을 쳐다보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회담은 대부분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여러 세력이 모이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칼 대신 입을 휘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타의 회담은 긴장감 가득한 대부분의 나라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는 칼날을 가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분위기가 판이했다.
금과 다양한 색료로 화려하게 치장된 연회장은 수천 개의 등불과 촛불로 환하게 밝혀졌다. 수백 명이 있다면 그 수백 명의 다른 입맛을 모두 충족시킬 만한 온갖 진미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흥겹기도 한 노래 소리 가운데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축제나 연회라고 봐도 손색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유분방한 회담에도 공통적인 부분은 있었으니, ‘회담장 내부에서는 무기 소지가 불가하다.’라는 점이었다. 나라의 중대사가 오가며 국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위험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카브 왕자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 전원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무기소지를 허가한다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기사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언제 어디서든 무기 소지를 허가? 하카브는 오늘 있는 회담을 염두에 두고 얘기한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고작 몇 시간 전의 갑작스러운 통보라니. 더욱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비죽대며 웃었다.
“그 좋은 성격이 어디 갔나 했지. 괜한 동요를 일으키려는 수작이다. 모두 신경 쓰지 마라.”
리카르디스의 태평한 태도에도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무기 소지를 허용하다니. 예상 못한 위험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회담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또는 무장을 빌미로 걸고넘어지려 한다던가. 하카브 왕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절단 일행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계산속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대책을 의논할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끼고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상 우습게 보이는 건 좀…… 기분 나쁘군. 리카르디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회담장에 들어가는 모든 인원은 무장을 해제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다들 허리춤에 매어놓은 검집을 풀었다. 로젤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들고 가도 된다는데 대체 왜 무장을 해제하라는 건지. 그녀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느리게 검을 내려놓았다.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불렀다.
“네.”
“부츠 안에 있는 무기도 빼야지.”
로젤린이 부츠 안에서 슬그머니 단검 두 개를 꺼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사실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하카브는 다른 사람을 제 손 안에서 쥐락펴락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로 다른 이들을 흔들고, 그 모습을 즐기며 지켜봤다. 엘피디오는 그 성격을 개 같다고 했고, 리카르디스는 엿 같다고 표현했다.
“흔드는 대로 쉽게 흔들리면 쓰나.”
잇세리온은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이 어찌나 대담한 분이신지……!
리카르디스는 말없이 앉아 있는 디에즈를 쳐다보았다. 디에즈는 그의 결정에 옹호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흐르면 흘러가는 대로 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 같았다.
문이 달리지 않은 연회장은 아치형의 모양으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재상 아틸라크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이 회담장에 도착했노라, 우렁차게 알리는 소리와 함께 리카르디스는 빛나는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하카브 왕자가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금사로 수놓인 튜닉 위로 바닥까지 끌리는 기다란 천을 겹쳐 입은 차림새였다. 온갖 장신구가 그의 팔과 귀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카브는 사람 좋은 미소로 사절단을 환대했다. 긴장해서 억지 미소를 걸고 있는 사절단 일행과 다르게 정말로 기분 좋아 보였다.
하카브의 시선은 리카르디스의 뒤를 향했다. 그는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들의 허리쯤. 기사단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하카브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피디오였다면 분명 이런저런 무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역시 이쪽이 훨씬 번거롭겠어.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라베니아의 귀빈 여러분. 저는 힉살라 아돈의 첫 번째 아들. 하카브입니다.”
회담의 포문을 여는 인사에 리카르디스 또한 정중하게 응대하려 했으나, 하카브가 다가오는 게 먼저였다. 그는 거침없이 리카르디스를 향해 걸어왔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하카브를 막아섰다.
“스타스 경.”
리카르디스가 낮게 그를 불렀다. 스타스는 까닥 묵례하고 다시 물러섰다. 발타인의 대화 거리는 일라베니아인보다 훨씬 가깝다. 또한, 발타의 1왕자 하카브는 그렇게 아둔한 인물도 아니었다. 회담장에서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해하려는 시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스타스는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를 했다. 하카브가 회담 직전에 사절단 측을 흔들어 놓은 장치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검은 머리의 왕자는 기분 좋은 듯 눈웃음을 지으며 스타스를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의 주위로 호위가 허물어졌다. 하카브는 웃으면서 한 걸음 더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발끝이 서로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너무 가깝지 않나? 리카르디스조차도 인상을 굳힌 순간이었다. 하카브가 리카르디스의 한쪽 어깨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
로젤린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카브 왕자가 어떤 행동을 할지 깨달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왕자의 얼굴이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쪽.
공간을 메운 음악 소리를 뚫고 리카르디스는 들었다. 고막에 생생하게 박힌 그 소리를.
느꼈다. 볼에 꾹 눌러진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그는 굳은 고개를 으드득 돌렸다. 하카브 왕자의 얼굴이 바로 한 치 앞에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리는 평소와 달리 둔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방금, 내, 볼에. 이 왕자가…….
“꼭 뵙고 싶었습니다. 리카르디스 황자.”
하카브는 열세 명의 후궁에게 두루 사랑받는다는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근사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리카르디스는 얼굴을 파삭 구겼다. 디에즈도 드물게 눈살을 찌푸렸다. 볼에 입을 맞추는 인사는 발타의 풍습이었다. 간혹 타국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하는 경우가 간혹 있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중요한 회담자리에서, 심지어 타국의 사자에게 행해진 적은 없었다.
하카브 왕자의 돌발행동에 회담장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악기를 연주하던 악단도 살짝 삐끗했다. 하지만 곧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타의 귀족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발타의 왕자가 이렇게까지나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을 반기고 있다. 진의가 무엇이건 간에, 그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알아 두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사절단도 왕자의 뜻을 알아들었다. 몇백 년간 싸워 온 앙숙의 나라였지만 그 중심부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발타의 왕족, 귀족. 어느 누구도 적대감의 흔적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능숙하게 속을 가리는 웃는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 되는 것 보단 훨씬 나았다. 애정 어린 인사를 받은 리카르디스 황자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여하간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화기애애했다.
연회 같은 회담은 잘 진행되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일라베니아 사절단 측과 발타의 왕자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하카브 왕자는 사절단의 말을 경청했다. 검은달이 일라베니아에게 행하는 횡포에 크게 분노하기도 했고 검은달이라는 집단을 발타에서 뿌리를 뽑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보다 강한 신뢰로, 보다 더 굳건한 동맹을!”
하카브가 잔을 높이 들었다. 연회장의 모두가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그와 건배했다. 챙. 유리가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 속,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고요한 탐색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 *
곧이어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일라베니아의 사절단은 회담이나 연회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음악이 좀 더 흥겨워지고 술의 도수가 미세하게 높아진 것을 눈치챘다. 사절단은 완벽하게 경계를 풀지는 않았으나 그들 나름대로 틈틈이 먹고 마시며 풀어진 분위기를 즐겼다.
리카르디스는 많은 왕족과 귀족을 만났다. 몇째 아들, 몇째 딸. 누구의 친척, 누구의 팔촌, 누구의 이웃사촌. 리카르디스는 살짝 웃는 얼굴로 차분하게 응대했다. 한구석에서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유독 리카르디스를 향해 있기에 로젤린은 잠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안주가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술맛 끝내 준다.”
듣긴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술과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신경을 돌렸다.
로젤린은 여전히 리카르디스의 한 걸음 뒤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잇세리온이 이젠 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리카르디스는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로젤린은 배가 고팠다. 몇 시간째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의 뒤를 쫓고 있는 상황이라 심각하게 허기졌다. 심지어 처음 보는 음식들이 천지에 널려있는 공간이었다. 여기는 훈제한 고기가 쌓여 있고, 저기는 꿀에 절인 과일이 반지르르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흘끗흘끗 음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열망이 타올랐다. 배가 부르더라도 입에 욱여넣고 싶을 정도였으니, 배가 고픈 지금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위험한 곳에서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헉헉…… 헉 가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폐 깊숙이 음식 냄새라도 간직하기 위해.
“……이봐, 경…….”
리카르디스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흠칫 놀라서 돌아보았다. 로젤린이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식은땀도 나는 듯 했다. 대체 뭘 얼마나 먹고 싶기에…….
“예, 전하.”
“식사하고 와. 아무도 경에게 굶으라고 말한 사람 없어.”
“아닙니다. 곁에 있겠습니다.”
로젤린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손끝이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
웃기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기사 몇 명을 더 불러 모아 아까보다 촘촘하게 호위망을 구성했다.
“이 정도면 위험할 일 없으니 이만 가봐. 어떤 사태가 올지 모르는 거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지.”
로젤린은 머뭇거렸다. 그녀는 “그럼…….”이라는 말로 운을 띄우며 기사 두 명을 콕콕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이 두 명은 빼고, 파르딕트 경과 카일로 경으로 대체해 주시면 잠시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손가락질 당한 두 명은 하급 기사였다. 실력을 영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지목당한 바다협곡의 네스터가 우울한 표정으로 곧 파르딕트와 카일로를 불러왔다. 그들은 불려온 이유를 건네 들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음식을 먹으러 가는 와중에도 열두 번 정도 뒤돌아봤다.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인내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열세 번째로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열 받은 리카르디스가 레이몬드를 소환했다.
“가서 저 문제아에게 음식을 좀 먹이고 와!”
“……예, 전하…… 저희 애가 원래는 이러지 않는데…… 심려 끼쳐 드려 매우 송구…….”
“가!”
레이몬드는 면구스럽다 듯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 후에, 곧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로젤린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무어라 말하며 열네 번째로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가 뒷목을 잡기 직전, 레이몬드가 근처에서 먹기 좋은 크기의 음식을 집어 그녀의 입에 확 집어넣었다. 로젤린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레이몬드는 흐물흐물해진 로젤린의 손을 잡고 음식이 쌓여 있는 테이블로 이끌었다. 과연 로젤린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훌륭한 솜씨였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식사 수발을 착실히 수행했다. 새로운 음식 위주, 고기 위주, 달콤한 것 다음에는 짭짤한 음식, 그리고 다시 달콤한 것의 법칙을 지켜서 음식을 가져왔다. 여자 기사들에게서 맛있게 먹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했다. 로젤린은 신문명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만 지킨다면 끝도 한도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음식에 심취해 있는 중, 익숙한 목소리가 로젤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좋은 밤입니다. 즐기고 있습니…… 있네요, 로젤린.”
“네.”
“즐기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려 했지만,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디에즈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음, 굉장히 즐기고 있구나…….
레이몬드가 흐리게 웃으며 디에즈를 맞았다.
“여독은 좀 풀리셨습니까, 전하?”
“나야 편하게 앉아서 마차 여행을 했을 뿐인데요. 고생은 여러분들이 전부 했지요.”
“술은 과하게 드시지 마세요. 누군가가 억지로 권하면 마시는 척…… 하면서 손수건에 뱉으세요.”
디에즈가 푸하하 웃었다.
“알았다니까요. 걱정이 과합니다, 레이몬드.”
로젤린은 치즈와 고기가 켜켜이 쌓여진 음식을 먹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디에즈와 제법 허물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녀의 의문에 찬 눈빛을 읽은 건지 레이몬드가 답했다.
“아, 디에즈 전하와 나는 어렸을 때 같은 가정교사를 두고 있었거든. 그때부터 좀 친했지. 너는 내 수습 기사일 때부터 디에즈 전하와 알며 지냈고. 셋이 자주 놀러 다녔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하와 네가 도서관에 갈 때…… 내가… 억지로 끌려갔었지…….”
레이몬드는 먼 옛날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디에즈는 “맞아, 그랬었죠. 생각난다.” 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로젤린의 접시 위에 양고기를 올렸다.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양고기를 버터에 구웠다가 각종 향신료와 채소를 집어넣고 오랜 시간 삶는다고 하더군요.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로젤린은 냄새를 먼저 맡은 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났을 때부터 양고기 타령을 하더니, 대체 어떤 맛이기에?
“……!”
로젤린은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한 미식의 감각에 온몸의 힘이 풀릴 뻔 했다. 과, 과연. 발타의 전통요리! 그녀의 미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맛이었다. 결결이 스르륵 찢어지는 식감. 쫄깃하지만 질기지는 않고, 촉촉하지만 느끼하지는 않았다. 육즙과 채즙이 농축된 짭짤함과 달콤함. 양념의 배율 또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맛과 함께 향신료의 강렬한 감각이 어우러지며 그녀를 이성을 흔들었다. 로젤린의 눈에 환희가 서린 것을 본 디에즈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디에즈는 흐뭇해하며 양고기가 담긴 접시를 두 개 더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넸다. 로젤린이 볼이 불록해질 정도로 음식을 밀어 넣는 모습을 지켜보던 디에즈가 아차,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이것과 잘 어울리는 발타의 술이 있는데, 그걸 꼭 같이 먹어야 하거든요. 그걸 같이 마시지 않으면 호렘보를 먹지 않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 호렘보는 그 요리 이름이에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로젤린.”
디에즈가 연회장을 가로지르며 후다닥 뛰어갔다. 레이몬드가 그의 뒤로 소리 질렀다.
“뛰면 넘어지십니다, 전하! 조심하세요!”
디에즈는 자신의 나이가 세 살이 아니라 스물세 살이라는 얘기를 하더니 사람들 사이로 쏙 사라졌다. 로젤린은 냠냠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사이 좋아 보여.”
“그렇지 뭐. 좀 불경스럽게 표현하자면 소꿉친구 같은 거니까.”
“2황자 전하의 적인데도?”
레이몬드는 음료를 마시던 행동을 우뚝 멈췄다. 짧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시끄러운 연회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시선은 날카롭지 않았고 그저 목적 없이 부유했다. 경계가 아닌 생각을 환기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로젤린이 고기를 다 먹을 쯤, 레이몬드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로젤린. 내가 이래 보여도 공과 사는 잘 구분하는 편이거든.”
레이몬드가 제 가슴을 툭툭 쳤다.
“언젠가 필요하다면, 저분이 나아가는 길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진다면.”
레이몬드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로젤린의 입가에 묻은 양념이 그의 손수건에 닦여 나갔다.
“그때는 내가…….”
레이몬드가 빙긋 웃었다. 우는지 웃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닦여. 고개 살짝 들어 봐 로젤린.”
레이몬드가 인상을 쓰며 손수건에 물을 묻혔다. 로젤린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도 닦아 내어 입가가 쓰릴 정도였다.
“경계는 하되 너무 미워는 하지 마, 로젤린. 외로운 분이시니까. 어렸을 적에 전하가 기거하시던 백옥 성이 불타 버린 사건이 있었어. 두 살 밑의 왕자 전하와 전하의 어머니이신 황비 전하까지 전부 이델라브힘의 품으로 돌아가셨지. 전하만 창문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살아남으셨어.”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로젤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후에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리셔서 몇 년간 요양하셨는데…… 성으로 돌아올 쯤엔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았어. 모든 걸 잃어버린 5황자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그때 디에즈 전하를 거둬들인 분이 엘피디오 전하야.”
“실어증은 어디가 아픈 건데?”
아. 레이몬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시 말을 못하게 되는 병이야. 로젤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술 석 잔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오는 디에즈가 보였다. 그는 그늘 한 점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엘피디오 전하의 세력이 훨씬 컸으니까. 또 그때의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누군가를 품어 줄 만한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알고만 있어 로젤린. 티 내지 말고. 괜히 더 위해 주려고도 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응.”
레이몬드가 씩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착하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레이몬드와 마주하던 시선을 돌리니 디에즈가 막 당도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잔을 건네었다. 색 없이 투명한 술이었다.
로젤린이 디에즈에게 먼저 건배했다. 쨍 하는 맑은 유리 소리가 울렸다. 레이몬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급자는 상급자한테 먼저 그러는 거 아니야 로젤린…… 조금 이따가 일러둬야 할 것 같았다. 디에즈는 잠시 놀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곧, 황금색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을 가득 담으며 환하게 웃었다.
* * *
매일 매일이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연회는 삼일이나 계속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와 하카브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무의미한 대화들만 오고가는 지루한 시간이었을지언정, 겉으로 볼 때에는 탄탄한 관계를 쌓고 있는 과정처럼 보였다. 호위하던 로젤린도 하카브를 자주 보긴 했으나, 그는 가끔 보내는 눈인사 이외에는 일절 아는 체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던 때였다. 로젤린은 그 틈을 타서 배를 채우기 위해 연회장을 떠돌았다. 한참을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는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카브 왕자였다.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로젤린은 고기를 열심히 먹는 중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칼릭스가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때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로젤린은 음식물을 필사적으로 씹어서 삼키려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귀엽기는. 천천히 들게.”
로젤린은 입을 가리며 “네.” 하고 짧은 대답을 했다. 하카브는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감상했다. 시선은 검은 머리카락에 머무르기도 했고, 우물거리는 입가를 떠돌기도 했다.
“우리의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군. 지금이라도 입어 볼 텐가? 그대를 위해 기꺼이 선물하겠다.”
그쯤 되어 로젤린은 음식을 꿀꺽 다 삼켰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다.”
“전하의 곁을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카브는 눈썹을 조금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술잔을 건네며 한 발 더 다가섰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로젤린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젤린은 술잔을 받은 채 멀뚱히 그를 올려보았다.
“걱정마라. 이 궁 안에서 황자가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후로도 하카브는 끈질기게 권했다. 로젤린은 “괜찮습니다.”와 “아니오, 괜찮습니다.”만 반복하며 여섯 번의 시도를 모두 퇴짜 놓았다. 어조와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카브는 흠, 하며 팔짱을 꼈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왜, 나를 못 믿겠나? 황자를 해칠 것 같아서?”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카브는 허를 찌른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로젤린의 이어진 대답에 와르르 무너졌다.
“네.”
“…….”
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딱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었다. 하카브는 잠시 무표정해졌다가, 허리까지 굽혀 가면서 와하하 웃었다. 반달로 접힌 그의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대, 정말 마음에 든다. 황자를 떠나고 싶어지거든 나에게 와라.”
“싫습니다.”
하카브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연회장의 귀족들이 술렁이며 그 광경을 훔쳐봤다. 하카브가 웃는 모습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웃으면 우습게 보인다는 둥, 경박해 보인다는 둥의 이상한 체면치레를 하는 여타 귀족, 황족과 다르게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카브를 쉽게 보지 못했다. 미소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차가운 시선과 장신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미소가 즐거운 감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절대적인 포식자가 보이는 여유라는 점에 있어서 도리어 위축될 뿐이었다.
그런 하카브가 진심으로 유쾌해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흘려 가며 웃는 그의 모습은 오래 일한 시종들도 처음 목격했을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와라. 리비타의 궁은 그대에게 언제나 열려 있을 테니.”
로젤린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속이 빤히 다 들여다보였다. 하카브는 제 턱을 느릿하게 손마디로 쓸었다.
발타나 일라베니아나, 두 나라 다 사람 사는 곳 아니었나? 어쩌다 일라베니아에 이런 귀여운 게 나타난 거지? 흠. 하카브는 유쾌한 제 기분을 거스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즐겼다. 조만간 그녀가 죽어 버리게 되면 다시 느낄 수 없는 감정이 아닌가. 약간은 아쉬웠다.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내게 와 주면 좋으련만.
* * *
로젤린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연회장의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그녀는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흉흉한 눈빛으로 막아섰다. 지위고하 막론하고 사람들을 위협하던 그녀의 행동은 부단장 나단에게 불려 가 왕창 혼나는 것으로 끝을 맞이했다. 좋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바짝 경계하는 그녀의 태도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다. 호위도 좋지만 적당히 티 안 나게 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로젤린은 과도한 경계를 조금이나마 허물었다. 연일 계속된 연회 중, 수많은 만남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 하나 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카브 왕자의 말대로 이 궁 안에서라면 리카르디스의 안전은 보장되는 듯 했다. 그제야 리카르디스는 제 앞으로 할당된 음식을 한 접시 다 온전히 먹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로젤린이 독의 유무를 판별한답시고 항상 반 정도 먹고 그에게 넘겨줬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시끄럽고 화려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로젤린과 상급 기사 몇 명이 호위를 위해 그의 뒤를 따랐다.
“리카르디스 전하?”
뒤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한 사람 가면 한 사람 오고, 두 사람 가면 두 사람이 오는 연회장을 벗어났더니, 기어코 쫓아오기까지 한다. 발타인들은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돌아서며 파삭 구겼던 얼굴을 피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달이 밝은 밤입니다. 연회는 즐거우셨는지요?”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가느다란 눈매가 나른해 보였다. 그녀의 장신구와 복식으로 보아 고위 귀족에 해당한다는 사실쯤은 알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이 며칠간 고위귀족에 해당하는 수많은 발타인을 만난 상태였다. 솔직히 그 여자가 그 여자로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즐거움에 취하는 것 같아 잠시 달구경이나 할까 나와 보았습니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소근거렸다.
‘3왕녀 간제입니다.’
“……간제 왕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만나 뵈는 겁니다만, 절 알고 계시다니 기쁘군요.”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을 슬쩍 째려봤다. 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사 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그 또한 많은 인물들을 만나다 보니 착각했던 듯 했다.
“농담입니다, 둘째 날 인사 드렸었지요.”
……착각이 아니었다. 간제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홀로 남으실 순간을 호시탐탐 노려 보았어요. 연회를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큼 촌스러운 일은 없지만,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연한 만남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연회를 벗어나 주위에 사람이 없어진 때를 노려 찾아왔으니. 뭔가 용건이 있는 건가?
“제게 하실 말이라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전하의 미모에 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 버렸군요.”
간제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리카르디스의 대외적 가면에 조금 금이 갔다.
“감사합니다만…… 용건이 그게 전부라면…….”
“설마요, 지금은 그저 순간의 감상을 내뱉었을 뿐이랍니다.”
간제가 이어서 말을 하려던 순간, 복도 끝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또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린 그대로 멈춰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간제가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쓸모라고는 없는 작자들 같으니.”
간제가 신랄하게 방해꾼들을 비판했다. 퉁퉁한 발타의 남성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물러나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는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
“짧지만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간제 왕녀.”
간제가 무릎을 살짝 굽혀 그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금빛 장신구가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녀가 돌아서며 생긋 웃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황자 전하.”
리카르디스의 발길은 궁 내부에 있는 커다란 신전을 향했다. 간제 왕녀가 떠나기 직전 그에게 추천해 준 곳이었다. 어지러운 연회장보다도 어쩌면 볼 거리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연회장의 분위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장소였다.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웅장한 내부는 조각과 벽화로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신전 중앙에는 커다란 샘이 있었고, 그 위로 천장이 크게 트여 있어 달빛이 그대로 들어왔다. 반듯하고 동그란 모양의 샘은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졌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중요한 의식들은 언제나 물을 매개로 했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의 신화와 관련이 깊은 ‘약속의 호수’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인공 샘에서 시선을 돌렸다. 결혼 의식이 새겨져 있는 벽화가 보였다. 안쪽으로 파여 조각 되어 있는 동그란 원. 그리고 그 아래에는 호수 가운데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는 두 사람이 새겨져 있었다.
발타와 일라베니아의 결혼 예식은 매우 비슷했다. 몸을 담글 수 있는 물이 있다던가, 그 수면에 해가 떠오를 때 이루어진다는 점이 같았다. 해는 이델라브힘의 상징. 수면에 해가 비칠 때 결혼하는 두 사람은 빛의 신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받는다. 그렇게 믿어 널리 굳어진 관습이었다.
“…….”
결혼 의식은 발타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라고슈 왕국도 같았다. 대륙에 위치한 나라라고 불릴 수 없는 작은 부족들 또한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야 있었지만, 기본적인 큰 틀은 동일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밤이로군요.”
리카르디스는 대뜸 인사를 건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하카브 왕자였다. 동생 다음에는 오빠인가. 피로가 몰려왔다. 하카브는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황자.”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라, 리카르디스는 하카브 왕자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답지 않게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멀거니 서 있었다. 하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카르디스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가 보고 있는 벽화를 같이 감상하는 듯,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상급 기사 몇 명에게 로젤린이 제압당해 있었다. 또 그 유별난 호위를 하려다가 저지당한 게 아닐까. 상급 기사 파르딕트가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놨다. “내 일은 전하를 지키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드는 경을 막는 게 아니야!”라며 화내고 있었다.
“어디 저만 고생하고 있겠습니까. 하카브 왕자 역시 검은달 때문에 바쁘신 걸로 압니다.”
리카르디스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뜻이 달라졌다. ‘검은달이 요즘 사고치고 다니던데, 발타의 왕자로서 수습하느라 참 바쁘겠다.’라고 들리기도 했고, ‘너 요즘 나한테 자주 암살자 보내던데 참 부지런하기도 하더라.’라고도 들렸다. 물론 일라베니아와 발타의 유례없는 굳건한 동맹이 맺어진 상황에서야, 전자로 해석해야만 했다. 하카브는 그 중의적인 뜻을 파악했으면서도 살살 눈웃음을 쳤다. 껄끄러운 상대였다.
“황자께서 발타까지 친히 발걸음해 주신 만큼, 곧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두 사람은 지상에서 한 뼘 정도 붕 떠있는 것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혼잣말보다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를 상징하는 동그란 원. 음각으로 깊게 파여 있어 다른 벽화들보다 어두웠다. 보통 해는 양각으로 표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뭘까. 무언가가 목에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검은달이 새로운 독을 만들어 냈다고 하던데…….”
하카브 왕자가 이 주제로 먼저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흠, 얕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마력과 독을 섞은 것입니다. ‘파편’……이라는 이름이더군요.”
“오, 참신하군요.”
그런 이름은 난생 처음 듣는다는 양, 흥미로워 하는 목소리였다. 왕자의 연기는 수준급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의 반응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아까부터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해가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카브가 그런 리카르디스를 보며 미소를 입에 걸었다.
“파편,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파편이라…… 무엇의 파편일까요?”
“글쎄요…….”
천장을 통해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신전을 밝히고 있던 촛불 몇 개가 꺼졌다. 리카르디스가 시선을 주던 벽이 한층 어두워졌다. 안쪽으로 깊게 파여 있던 해의 조각 또한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변했다. 검고, 동그란…….
“검은 달, 일지도 모르겠군요.”
조용한 공간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벽화에서 눈을 돌려 하카브와 마주 보았다. 아까보다 어두워졌지만 하카브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은 똑바로 보였다. 정답이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깨달았다. 안으로 깊게 파져있는 이 동그란 원은 해가 아니었다. 달이었다. 검은 달. 하카브의 질문에 답하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했으나, 잃어버렸던 열쇠를 찾은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게만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여러 기억이 깨지고, 부서지고, 합쳐졌다. 과거에 찾았던 하얀 밤의 단서와 작은 실마리들이 몸집을 불리고 서로 얽혔다.
온 대륙을 관통하는 똑같은 방식의 결혼식.
이상한 일이었다. 이델라브힘을 믿지 않는 발타와 신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대륙 끝자락의 소부족조차 결혼 의식의 형태가 같다고? 어쩌면 이는 더 중요한 일을 가리키는 지표인지도 몰랐다. 보다 중요한,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보다 중요한, 어쩌면 생명과 관련된…….
만물이 꽃을 피우며 생명이 순환하는 밤. 축복의 밤은 일라베니아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에게 중대한 일이다. 대륙이 노쇠하면 어떠한 생명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일부의 조각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의식의 형태를. 눈앞의 벽화는 결혼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득한 먼 옛날부터 내려왔던 축복의 밤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어. 리카르디스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일라베니아 황실은 축복의 밤을 부르는 의식을 꼭꼭 감추고 있었다. 그들의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그들이 신의 사자라도 되는 양, 포장하기 위해. 하지만 사람들은 잊지 않고 기억해 왔다. 몇 세대가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사람과 사람의 약속 안에 축복의 비밀을 간직해 왔던 것이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에서…….]
지하 감옥, 그 깊숙한 곳에서 마녀라 불리는 여자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로 인해 하얀 밤이 아닌 검은 달을 찾아야 하나 추측했다.
리카르디스는 벽화에 그려진 검은 달 아래의 두 사람을 보았다. 하얀 밤만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검은 달만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얀 밤과 검은 달은 하나의 조각, 하나의 축복, 맞물려진 톱니바퀴였다.
이로써 목표가 명확해졌다. 강대한 마력을 다루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마인(魔人)이라 불리는 그들. 불길한 힘을 다룬다 해서 박해받고, 살해당하고, 꼭꼭 숨어 버린 이들을. 리카르디스는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