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라베니아의 수도, 티가드를 떠나는 사절단의 모습에는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빛나는 갑옷과 무구를 장착한 기사들. 갈기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백마 무리.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아 있는 하얀밤 기사단의 깃발들. 그 웅장하고도 위압감이 드는 한가운데, 화려한 마차에 몸을 실은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보였다.
사절단의 앞길에 꽃과 색색의 종이조각이 뿌려졌다. 여인들은 창문으로 몸을 불쑥 내밀고 손수건을 던졌다. 누가 보면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커다란 환성이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리카르디스의 찌푸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축제보다도 흥겨운 분위기였다. 리카르디스가 하얀밤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할 때면, 그곳이 어디든 어김없이 좋은 결과를 쟁취해 왔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발타를 향하는 목적이 전쟁이 아닌, 친교를 위함이라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고 위험한 여정일 것이다.
이델라브힘의 나라를 호시탐탐 넘보는 더러운 들개의 집단. 검은달. 최근 변경에서 잦은 전투가 일어나 민중 사이에서도 많은 동요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 때에 고귀한 황자의 몸으로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고 하니, 어떤 이가 그 길을 환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성에서부터 티가드를 벗어나는 모든 길에 인파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와아아-
함성소리에 리카르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 시끄럽고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잇세리온이 옆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황성을 떠나기 직전에 1황자 엘피디오가 찾아온 이후로 줄곧 이 상태였다.
[길고 위험한 여정이 되겠구나. 무사히 돌아오기를, 이델라브힘께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겠다. 리카르디스.]
입에서 나오는 내용과 다르게 엘피디오의 히죽거리는 낯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속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리카르디스는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도록, 이 동생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형님.]
네가 검은달과 손잡았다는 증거를 열심히 찾아내서 널 엿 먹이고야 말겠다, 멍청아. 라는 리카르디스의 뜻이 잘 전해졌는지, 엘피디오의 히죽대는 낯이 굳어 버렸다. 두 형제는 그 후로도 웃는 얼굴로 덕담을 몇 번을 더 주고받았다.
엘피디오의 덕담대로 위험한 길이었으나 본격적인 위험은 아직 형태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그를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종잇조각 몇 개가 리카르디스의 얼굴에 착 붙었다. 그의 인상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잇세리온이 종잇조각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 내었다.
“어휴 우리 전하, 더우시죠?”
잇세리온이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리카르디스를 달랬다.
사절단에는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 또한 기사단장 스타스는 가을안개 백작으로서. 푸른등불 후작의 차남, 호위 기사 카일로는 후작 대리로서 사절단의 일을 도울 예정이었다.
하얀밤 기사단 이외에도 리카르디스 휘하의 가문들이 기사단의 인원을 몇 명씩 추려서 사절단에 동행시켰다. 모두가 2황자파라 불리는 세력들이었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비껴나간 인물이 한명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5황자 디에즈. 예정에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발타의 1왕자, 하카브와 타국에서 교류한 적 있다는 명분에서였다.
디에즈는 굳이 분류하자면 엘피디오의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이 없고 원체 성정이 순해 적극적으로 권력 다툼에 끼어든 적은 없었다. 그저 성 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조용하게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 디에즈를 사절단이라는 지저분한 권력 다툼의 최전선으로 끌어낸 자는 엘피디오가 분명했다. 물론 디에즈가 물질적인 무언가를 얻고자 그를 따른 것은 아닐 테고, 그저 엘피디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엘피디오가 검은달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 동맹은 끈끈한 신뢰로써 형성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있으리라. 여기서 서로의 이익이라 함은 리카르디스, 자신의 죽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일라베니아 2황자의 죽음이라는 뜻을 이뤄내고 난 후에는 토사구팽의 시간이 분명히 온다.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지는 미지수라 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관계 위에 믿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위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상 엘피디오는 결코 발타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디에즈가 필요했다. 죽어도 상관없는 일회용 눈. 겸사겸사 하카브와의 연락책이기도 할 테고.
엘피디오가 자신을 곱게 보내 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선언이라도 하는 듯 디에즈를 붙여 놓은 모양새가 의심스러웠다. 하기야 디에즈가 엘피디오 측의 사람이라고 한들 리카르디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여태 그래 왔듯,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다. 리카르디스에게 깊게 박혀 있는 최초의 맹세였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위 중인 상급 기사들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말 위에 앉아서 권태롭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기사 또한 그 속에 있었다. 햇빛이 눈부신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손수건과 꽃송이를 머리에 잔뜩 달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를 향해 날아가는 것은 종이 쪼가리 하나라도 전부 쳐내고 있는 반면에 본인의 몰골은 생각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저 우스꽝스러운 꼴의 기사 덕에 여러 번 살아남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위기에서 자신을 몇 번이고 건져 올리곤 했던.
[전하.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만은 제가…… 꼭…… 목숨을 바쳐서라도…….]
로젤린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불꽃같은 자였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아른거리는 불티를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맹세가 단순히 형식적인 언어에 불과하다던가, 금방 사그라들 종류가 아님을 알았다.
‘이 여자는 죽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 언젠가 목숨을 바치고 죽을 자다. 그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수많은 시체 위에 서 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원했든 아니든 간에 제국의 2황자라는 고귀한 자리를 위한 희생은 불가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은 쌓여 갔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따금 눈을 감기라도 하고 싶었건만. 로젤린의 존재가, 그녀의 눈빛이 끝없이 그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2황자 리카르디스를 지킨다. 로젤린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어떤 영광도, 기사로서의 명예도 바라지 않았다. 고요하게 들끓는 그녀의 감정이 버거웠다.
리카르디스는 다시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같지만 그때와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하는 행동의 본질도 지킨다는 맹세 하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눈 어딘가에 서려 있던 비장한 결의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금 더 사무적이라고 해야 할지, 받는 돈만큼 일하겠습니다. 같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물론 새벽까지 제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행동력만큼은 예전의 로젤린을 떠올리게 했지만. 어쨌거나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첩자 역할로 따라붙은 5황자 디에즈, 클수록 무거워지는 환성의 중압감,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제 엿 같은 심정까지. 시종일관 그의 표정이 뚱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좋은 표정이 나올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 위에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따끈한 햇빛을 받고 있는 제 호위 기사를 보노라니 몸이 노곤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잇세리온이 부지런히 그의 기분을 풀기 위해 말을 걸어 왔다.
“날이 참 좋지 않습니까, 전하? 그저께까지만 해도 비가 많이 내렸는데, 이델라브힘께서 전하의 앞길을 굽어 살피시나 봅니다!”
그저 혼잣말처럼 한번 말해 본 것에 불과했는데, 그 순간 리카르디스의 무거운 입술이 열렸다. 턱을 괴고 있는 그의 자세만큼이나 나른한 목소리였다.
“날이 좋긴 하군.”
잇세리온이 신나서 더욱 떠들었지만 시끄럽다는 타박만 돌아왔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정말 좋은 날이었다.
* * *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밤을 보낼 만한 마을 한두 군데는 항상 있었고 큰 영지를 지날 때면 영주의 성에 머무르며 피로를 풀었다.
리카르디스는 오랜 시간 엘피디오와 부딪친 만큼 그의 성격을 질릴 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앞뒤 잴 줄 모르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멍청함과 무식함. 분명 가는 길 또한 온갖 암살자며 함정을 풀어 놓아 험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풍 전의 하늘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최후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을 때 목을 물어뜯는다. 사냥의 기본 방법이었다. 이때까지 엘피디오는 그 기본조차 갖추지 못해서 사냥감을 번번이 놓치는 부류였으나, 이번만큼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기회의 가치를 높게 치는 듯 했다. 말인즉슨 생각보다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기다림의 미학을 깨달았으니,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순간은 발타에서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이 될 것이다. 발타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의 전쟁은 하카브도 바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더더욱 2황자의 죽음은 그들과 관련이 없어야만 했다. 발타를 떠난 뒤 우연히 도적을 만나서 사망했다던가, 우연한 사고에 휘말렸다던가. 어떤 죽음이 되건 그 앞에는 ‘우연히’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가는 길만이라도 편하겠군.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들은 이제 일라베니아의 영토를 벗어나 발타의 끝자락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길이 험하고 복잡한 탓에 길잡이 몇 명을 고용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에도, 앞으로 하루 이틀간은 산에서 야영을 해야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야영, 노숙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듣고 있음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상급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기사이긴 했지만 그 이전에 귀족이었다. 야영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 해도 두 손 들어 반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군인 리카르디스조차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데 그들이 나서서 불만을 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급 기사들은 부지런히 막사를 세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 더 더워지고, 습해졌다. 발타의 기후는 일라베니아의 사람들에게 혹독했다. 기사들이 지쳐 가고 있는 것이 보여서 해가 지기도 전에 행군을 멈추라 명령했다. 이틀째 야영이었지만 빨리 쉴 수 있어서인지 날카로워진 기색들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물을 좀 드시지요, 전하.”
일곱 번째였다. 충신 잇세리온이 끊임없이 물을 권했다. 더워지는 기온을 염려한 탓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기사들이 마실 물은 충분한가?”
“아까 로젤린 경이 작은 샘을 발견했습니다. 막사가 세워지면 다들 수통을 채우라 하겠습니다. 전하, 물을 드시지요.”
잇세리온의 말은 또 한 번 무시당했다.
“수질은 괜찮고? 병이라도 걸리면 곤란한데.”
“로젤린 경이 마셔 보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흙과 자갈에 걸러진 깨끗한 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 로젤린 경이 어떻게 알지? 귀하게 자란 귀족가의 여식이 아니었나?”
글쎄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 잇세리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리카르디스의 입가에 수통을 들이댔다. 리카르디스는 짜증내면서도 한 모금 마셨다. 이후 곧바로 수통을 밀어내긴 했으나 잇세리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 생활을 한지 제법 되니, 훈련하면서 여기저기서 배웠지 않겠습니까?”
훈련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배웠다는 기사가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보다 더 샘을 빨리 발견한다고? 그녀의 유능함 덕인지, 길잡이의 무능함 탓인지. 아무튼 간에 어이없는 일이었다.
얼마 후, 리카르디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로젤린의 손에는 토끼 세 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그게…… 뭐지……? 로젤린 경?”
로젤린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토끼입니다.”
리카르디스는 한층 더 어처구니없어졌다. 토끼인 것은 보면 알았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토끼…… 세 마리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여서 리카르디스의 입을 기어코 다물게 했다.
어떻게 토끼를 잡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로젤린의 뒤를 따르던 길잡이에 의해 풀렸다. 그녀의 어마어마한 사냥 솜씨에 대해 극찬을 늘여 놓는 중이었다. 번개와 같았느니, 사냥의 신이니,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니 뭐니. 확실히 토끼야 약한 초식동물의 대표로 꼽힌다지만, 산에서 사는 토끼들은 재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활과 덫이 없다면 사냥꾼들도 잡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사냥 경험도 별로 없는 기사가 떡하니 세 마리나 잡아왔다. 심지어는 돌팔매질로.
로젤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와 리카르디스를 번갈아보다가 그에게 토끼 사체를 더럭 안겼다. 리카르디스의 옷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잇세리온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경악했다.
이후 그녀는 잇세리온, 호위 기사 카일로,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 레이몬드에게까지 불려 다니며 혼났다. 건량보다 막 잡은 고기가 맛있겠지라는 갸륵한 마음에 리카르디스에게 넘긴 것이었는데 억울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뚱한 표정을 보면서 잇세리온에게 명령했다.
“다들 육포 씹느라 힘들지 않나? 낮부터 자리도 잡았겠다. 사냥 대회라도 간단하게 여는 게 좋겠군.”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이, 토끼는 내 저녁으로 할 테니 손질해 오고.”
리카르디스의 말에 로젤린이 그를 향해 획하니 고개를 돌렸다. 부루퉁하던 낯이 어느새 활짝 펴 있었다. 그 재빠른 표정 변화에 리카르디스가 웃었다.
잇세리온의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기사들은 삼삼오오 조를 꾸렸다. 몇 조는 남아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고 몇 조는 사냥을 하러 떠났다. 그들이 돌아오고 나면 교대로 사냥을 나가는 방식이었다. 상급 기사들도 숲속으로 많이 떠났지만 로젤린은 멀거니 리카르디스의 곁을 지켰다.
잇세리온이 새 옷을 건네자, 리카르디스는 토끼의 피로 젖은 상의를 훌쩍 벗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헉, 헉! 막사 주변을 호위하던 하급 기사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로젤린도 눈앞에 드러난 백옥같이 투명한 피부를 눈으로 훑었다. 이델라브힘이 정성스럽게 한 올 한 올 뽑아낸 듯한, 은사 같은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며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이 채 가리지 못하고 드러난 하얀 목덜미, 툭 도드라진 날개 뼈. 울퉁불퉁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붙어 있는 가슴과 등의 근육, 척추를 따라 옴폭 들어간 허리선까지.
“…….”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그녀의 직업 특성상 남자들의 벗은 몸을 자주 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미세한 동요조차 없는, 그야말로 무심의 눈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다른 여자들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성별이어도 가끔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 그가 보기에 로젤린은 아주 희귀한 생물이나 다름없었다. 뭐, 호위 기사로써는 백점 만점에 백점을 줄 수 있는 좋은 태도였다.
다만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한 가지. 로젤린이 눈을 빛내며 제 몸을 계속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 수치심의 정의를 일깨웠다. 묘하게 추행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서 그가 한마디 하려고 할 찰나, 로젤린이 더럭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내내 무심했던 표정을 지우고 눈매를 부드럽게 휘면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우십니다.”
콜록콜록! 리카르디스는 사레가 들려 속이 쓰린 기침을 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물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찬사를 내뱉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급습하듯 튀어나온 미사여구의 파괴력은 컸다. 주위에 있던 다른 호위 기사들은 차마 기침을 뱉지도 못하고, 컥. 하고 목울대를 강하게 맞은 소리를 냈다.
끄, 끌어내…… 하고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몇년 전, 리카르디스에게 청혼서를 하루에 스무 장씩 보내며 쫓아다니던 한 영애에게 내렸던 조치이기도 했다.
“근육의 부피가 커다랗고 형태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저도 그렇게 울퉁불퉁하게 되고 싶은데, 아무래도 신체적 조건이 남자와 다른 부분이 많아서…… 부럽습니다.”
진심으로 부러움이 가득 들어찬 눈빛이었다. 아, 경계 해제, 경계 해제. 기사들이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이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시겠지…….”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래, 이게 로젤린이다. 이 기사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잠시간 흐트러졌던 마음은 무슨 일 있었냐는 양 잔잔해졌다. 마치 잘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색채가 아름답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감상평이었다. 딱히 기분 상할 부분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신경에 거슬렸다. 로젤린을 흘끗 바라보니 그녀는 허공에다가 유려한 손짓으로 리카르디스의 몸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 과하지 않나.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여성의 굴곡도 저만큼은 안 될 것 같은데…….’
로젤린은 곧 잇세리온에게 나쁜 손을 찰싹 맞고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 후 성희롱이라고 엄청 혼났다. 성교육을 해야겠다며 씩씩거리던 잇세리온은 레이몬드를 불러냈다. 보호자 호출이라는 명목이었으나 레이몬드는 2황자 수석비서관의 눈을 슬슬 피했다. “우리 로젤린의 보호자는……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누가 봐도 성교육 담당을 하고 싶지 않아 떠넘기는 거였다.
잇세리온과 레이몬드가 그녀의 성교육 문제로 아옹다옹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복근 위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녀는 수통을 꺼내서 제 손수건을 적셨다. 로젤린의 행동을 목격한 리카르디스는 ‘설마……?’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실례합니다, 전하.”
“설마.”
그의 입에서 아까 생각했던 그대로의 대사가 나왔다. 로젤린은 성큼 그에게 다가서서 손수건으로 복부 위에 말라있는 핏자국을 문질렀다. 복부를 스치는 천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새 피가 말랐는지 로젤린은 무릎까지 꿇어 가며 열성적으로 닦았다.
“…….”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지춤을 잡아 가며, 열성적으로 복부를 닦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아연하다? 참담하다? 글쎄, 어떤 언어로도 지금 그의 심정을 표현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모질게 팩 뺏었다.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린 이 호위 기사의 행동은 요즘따라 그를 자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대…….” 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아니, 진짜.” 하고 답답함을 호소하려다가, 결국에는 “되었다…….” 하고 아련하게 말을 흘렸다.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야 본인 몫을 사냥하러 떠났다. 리카르디스는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잇세리온과 레이몬드는 그 광경에 쩡하고 굳어 있다가 성교육 시간을 열 배로 늘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 *
한사람의 인영이 푸른 숲을 달렸다. 동물들은 바로 옆을 지나가는 로젤린의 모습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높은 나무의 나뭇가지를 타고 한 번의 발돋움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도달했다. 풍경이 순식간에 휙휙 바뀌었다. 나무들이 높게 솟아 있는 풍경은 일라베니아와 비슷했지만 기후가 다른 탓인지 숲을 감싸고 있는 향기가 조금 달랐다.
로젤린은 나뭇가지 위를 훌쩍훌쩍 건너뛰며 사냥감을 찾았다. 저녁거리였던 토끼 고기는 리카르디스에게 주었으니 따로 먹을 것이 필요했다. 인간으로 변이한 이후의 최고의 소득은 음식이었다. 인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기와 과일, 채소를 조리했다. 그것은 한 가지 재료만으로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다양하고 복잡한 맛의 조화를 이뤄 내곤 했다. 로젤린은 그 조화가 놀랍고 신기하고 맛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로젤린이 된 이후에야 맛있다는 감각을 깨달았다. 한 끼를 거르는 게 아쉬운 처지였다. 그녀는 신경에 날을 세워 너른 풍경을 온몸으로 지켜보았다.
나무를 타고 넘던 그녀는 익숙한 풍경과 조우했다. 아까 길잡이와 둘러보았던 구역 근처였다. 그러고 보니 덫을 설치했었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로젤린은 높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쿵, 땅을 울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작은 소음마저 흙바닥에 스며든 것처럼 고요했다.
비이이- 피이이-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러 동물을 먹어 본 적 있는 로젤린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사슴이었다. 그녀는 그 소리의 주인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꾼이 설치해 놓은 덫, 그물에 걸려 있는 어린 사슴이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반짝였다. 사슴은 꾸물거리며 그물에서 벗어나려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 같았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 사슴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옅은 갈색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 안쪽. 사슴의 형태 안에서 대류하고 있는 마력의 기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로젤린은 이 존재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지성을 가진 이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동족이었다. 마력은 운용하지 않는 한 감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동족을 만난 것 또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사슴 안에서 힘차게 대류하고 있는 마력은 의태 직전의 징후였다. 아마 자신이 이곳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그물보다 작은 생물로 변해서 빠져나갔으리라. 그렇다면 그냥 자리를 피하면 되는 건가?
그녀가 몸을 일으킬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금속음. 일정한 보폭. 단련된 자의 숨죽인 발걸음. 같은 사절단 일행이었다.
로젤린은 쪼그려 앉아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는 어린 사슴과 눈을 맞췄다.
“도망가.”
사슴은 그녀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네가 사라져야 도망가지. 책망의 눈길이었다. 눈앞의 어린 사슴은 동물의 대가리를 하고도 굉장히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한쪽 팔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손등 위로 파충류의 비늘 같은 것이 토도독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전에 먹은 악어의 특성이었다.
사슴은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의 손을 주시했다. 파충류의 거죽이 아닌, 그 형태 안에서 막 대류하기 시작한 마력의 기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슴은 그제야 눈치챘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과 같은 종족이었다. 로젤린은 재차 다시 말했다.
“가.”
사슴의 눈에 결의의 빛이 스쳤다. 그물에 얼기설기 얽혀 있던 어린 짐승의 다리에서 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옅은 갈색에서 나무의 색으로, 그리고는 완전한 검은색으로. 그것은 점차 퍼져서 사슴의 온 몸을 뒤덮었다. 사슴의 그림자처럼 온통 어둡던 형태가 조금씩 부스러졌다. 모래처럼, 연기처럼 퍼지고 흘렀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 하는 짧은 사이 어둠이 걷혔다.
사슴이 있던 자리에는 자그마한 다람쥐 한 마리가 대신 남아 있었다. 그 작은 동물은 연신 코를 씰룩거리며 로젤린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다람쥐는 재빨리 그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나무로 올라가기 직전 다시 한 번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얼마 후 덫을 확인하러 왔을 땐, 다람쥐나 사람의 흔적은 숲속에 스며들어 찾을 수 없었다.
* * *
산 중턱에 위치한 막사가 들썩였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황홀한 고기 냄새가 퍼졌다. 다들 물이 가득담긴 수통을 들고 마시면서도 잔뜩 취한 것처럼 행동했다. 축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흥겨운 분위기였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최고다, 로젤린!”
“멋있다, 로젤린!”
상급 기사들이 와하하 웃으며 그녀의 등을 퍽퍽 두드리고 지나갔다. 로젤린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 많은 인원이 먹고 있는 고기의 5할이 로젤린의 성과였으므로, 이 축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도 그녀가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마른 건량과 육포 따위로 배고픔만 간신히 달랜지 벌써 이틀째였다. 검과 갑옷의 무게를 감내하며 산을 오르는 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주인인 리카르디스가 사냥해서 알아서 잘 먹어 보라고 했지만, 대다수의 기사들이 훌륭한 검술 실력에 비해 사냥 솜씨는 형편없었다. 누구는 개구리를 잡아 왔고, 누구는 무언가가 먹다 남긴 동물의 사체 따위를 들고 와 야유를 받았다.
그런 때에 로젤린이 어깨에 멧돼지를 지고 어두운 숲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에 무게는 크기의 배가 될 것이 분명한 두툼한 멧돼지였다. 그녀는 막사에 멧돼지를 툭 떨치고는 하급 기사들에게 손질하라 했다. 가장 좋은 부위를 전하께 바치고 나면 알아서 먹으라고도 했다. 많은 자들이, 특히 개구리도 고기랍시고 잡아 온 네스터가 그녀를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멋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숲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나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싶은 네스터가 “방해가 안 된다면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방해됩니다.”
라는 로젤린의 한마디에 축 처져서 멧돼지를 손질하러 갔다. 얼마 뒤 숲에서 나오는 로젤린의 어깨에는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사냥꾼 출신의 길잡이는 감동의 물결에 허우적거리며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저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로젤린과 한마디 얘기라도 나누고자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잡아 온 사슴을 샅샅이 살필 뿐이었다. 이후에 약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로젤린은 그 이후로도 토끼와 날아가던 새, 야생 산닭을 몇 마리 더 잡았다. 그것에 더해 사냥에 성공한 자가 몇 명 있었다. 리카르디스 배 사냥 대회는 막사의 모든 인원이 풍족한 식사를 할 정도의 수확을 얻으며,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리카르디스도 야영치고는 호화로운 식단에 흡족해했다. 지쳐 가던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 일으키는 좋은 밤이었다. 몇 없는 여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고기를 구웠다. 로젤린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적당히 가죽만 벗겨 구워 먹는 남자 기사들에 비해, 여자 기사들은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지글지글 달궈진 돌판 위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공수한 것인지 모를 허브 따위도 보였다. 사절단에 포함된, 황족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요리사만큼이나 정성을 들이는 듯 했다. 리카르디스는 아마 제 접시 위에 있는 고기나 여기사들이 먹는 고기나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사들은 다 구워진 고기를 가장 먼저 로젤린에게 건넸다. 구워진 마늘의 고소한 향기와 허브의 향긋한 냄새가 자꾸만 식욕을 자극했다. 그녀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눈을 떼지 못했다. 무뚝뚝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격렬한 환희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단검으로 고기를 조금씩 베어 먹는 자들이 대다수였으나, 로젤린은 고기를 통째로 들고 와구 씹었다. 그녀가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입안에 육즙이 탁 퍼졌다. 로젤린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먹었다. 여자 기사들이 까르르 웃었다. 임무 중일 때나 남자 기사들을 대할 때보다 세 톤 정도 높은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고기를 뜯으며 한껏 음미했다. 주변의 흐뭇한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볼에 홍조가 띈 것 같은 착시가 보일 정도로 그녀는 행복해했다.
“맛이 어떠십니까, 로젤린 경?”
“매우, 매우 맛있습니다.”
“다행입니다. 20분 전에 라임과 로즈마리로 마리네이드했습니다. 구울 땐 레몬 밤과 마늘 가루를 섞은 허브 버터를 사용했고요.”
로젤린은 다소 충격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도 충격 받았다. 이 와중에 마리네이드까지 했어……?
“과연…… 그래서 이런 맛이…… 대단하십니다, 경.”
알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된 여자 무리에서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멍하니 여자 기사들, 특히 로젤린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15살 먹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리카르디스는 츳, 혀를 차고 접시 위의 고기를 씹는 것에 전념했다. 어느 정도 접시를 비운 리카르디스는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리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5황자인 디에즈 또한 식사 중이었다. 그는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어딘가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아있는 방향이 익숙했다. 그녀들이 앉아 있는 모닥불 쪽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사춘기 소년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으나 곧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디에즈의 눈길이 로젤린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안의 혓바늘이 돋은 것처럼 거슬렸다.
* * *
소란스러웠던 저녁 시간이 끝났다. 다들 막사로 들어가 고단한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드는 자도 많았다. 몇 조는 경계 보초 서며 조용한 막사를 지켰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 높게 자란 나무 위에 자리 잡았다. 2황자의 막사를 지키고 있는 상급 기사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로젤린은 굵은 나뭇가지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예전에는 그다지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는 반드시 자야 했다. 그것도 작은 소음과 미세한 살의에도 금방 깨어날 수준의 아주 얕은 잠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다.
토도도.
잠든 육체를 대신해 날카로운 감각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작은 생물의 발걸음 소리를 감지했다. 깃털 같은 무게에서 발생한 아주 작은 진동이었다. 로젤린은 눈을 번쩍 떴다.
“…….”
다람쥐였다. 또한 그녀가 구했던 사슴이기도 했다. 로젤린이 코앞에 있음에도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하고 작은 생물이었다. 다람쥐는 폴짝폴짝 뛰어서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 덕에 눈높이가 어느 정도 맞춰졌다. 다람쥐가 코를 씰룩이면서 쥐 같은 소리를 냈다. 찌치 찍-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로젤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 다람쥐는 먹은 적 없어서.”
다람쥐 말은 못 알아들어. 생략된 뒷말을 눈앞의 작은 동물은 알아들었다. 동그란 눈을 날카롭게 세우며 ‘귀찮게 하네.’라는 듯 팩 쳐다보더니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다람쥐의 털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흩어지며 넓게 퍼졌다. 검은 모래의 집단은 점차 몸을 불려 사람 한 명 만큼이나 커졌다. 흐물거리는 검은 형태의 안쪽에서 마력이 세차게 대류 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눈치채긴 했지만, 이 동족도 인간을 먹은 적 있는 듯 했다. 서서히 인간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를 늘어트린, 젊고 예쁜 여자였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녀의 풍만한 굴곡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로젤린은 조금 떨어진 리카르디스의 막사를 내려 보았다. 상급 기사도 저 멀리 있었고, 그들의 얘기를 들을 만큼 귀가 좋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 또한 없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몸을 움직이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어색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아, 아. 하면서 목소리를 확인하더니, 부드러운 눈매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몸은 역시 영 별로야. 근육이 허접해.”
“말 잘하네.”
로젤린은 자신이 막 인간이 되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들리는 단어를 어설프게 흉내 낼뿐으로, 지금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눈에 담긴 존경의 빛을 눈치채고 웃었다.
“인간으로 살아 본 적 있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매랑 살았지. 나를 손녀딸로 착각하더라고.”
맨 처음은 아예 말을 못하는 벙어리 흉내를 내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입이 트일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고. 세상에 그런 방법이. 로젤린은 감탄했다.
“그래도 인간이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서. 동물로 사는 게 훨씬 편하고 좋아. 그래서 좀 신기하네. 너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어? 안 불편해? 우리는 태생적으로 인간을 꺼려하는데 말야. 개체마다 좀 다른가?”
태생적으로 인간을 꺼려한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비스타의 깊은 숲에서 살 때만 해도 인간들을 피해 다니곤 했다. 인간보다 훨씬 강한 마수와 동물들은 무섭지 않았지만, 인간들에게는 알 수 없는 원시적인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이 된 이후로 서서히 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혹시 금기를 저지른 탓인가? 로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던 말을 그대로 흘렸다.
“금기 때문인가?”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금기?”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로젤린은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조용히 말하라는 뜻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검지를 손으로 찰싹 쳤다. 조용히고 뭐고.
“설마 살아 있는 인간을 먹은 거야, 너?”
“응.”
여자는 로젤린의 팔뚝을 한 대 더 쳤다. 찰싹하고 매서운 소리가 났지만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돌았어? 우리들 중에 암만 생각 없이 사는 애들이 많다지만 너는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본능조차 거스를 정도로 멍청한 건가? 대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거야, 너?”
로젤린은 조금 뚱해졌다. 자신도 다 사정이 있었다. 여자는 로젤린의 억울한 표정을 보고도 그녀를 한 대 더 찰싹 쳤다. 로젤린의 어미, 에델바이스에게도 이렇게 혼난 적 없는데…….
“도망치지도 못하잖아 이 기지배야! 너 이제 그 몸으로 죽어야 돼!”
“음.”
“음.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알고는 있었던 거야?”
본능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동물이 독버섯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것과 같았다. 저 독버섯은 위험해. 먹으면 안 돼. 먹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먹으면 위험할 것이다. 피에서 피로 전해지는 기억이었다. ‘그것’들의 금기 또한 그런 본능의 영역이었다.
‘살아 있는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로젤린의 육체로 생활한 것이 벌써 2개월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세계의 음식은 맛있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이루는 영양분이 되어 줄 뿐이었다.
슬슬 본체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것’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시체를 흡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녀는 조용한 밤. 미리 동물 사체를 준비해 놓고 의태를 풀었다. 아니 풀고자 했지만, 마력만 그녀의 껍질 안에서 고요하게 대류 할 뿐 어떠한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로젤린은 번개를 맞은 듯 충격 받았다. 변화를 하지 못해?
다른 생물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사실이었지만, ‘그것’에게는 손발을 잃은 것 보다 더 큰 결핍이었다. 죽음을 선고하는 날카로운 송곳니보다 무서운 위협이었다. 로젤린은 처음으로 인간이 된 후 벌벌 떨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이상 상태가 금기로부터 이뤄진 어떤 벌, 어떤 부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랑이의 근육조직을 빌려 온다던가, 매의 청각을 빌려 온다던가, 단단한 마수의 가죽을 빌려 온다던가 하는 부분적인 변이는 가능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더 이상 완전한 ‘그것’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이 로젤린의 껍데기를 막 뒤집어 쓴 초기에 이런 사실과 마주했었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황 속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그것’, 로젤린은 인간의 삶에 점점 녹아들고 있었다. 칼릭스라는 동생이 있었고 레이몬드라는 친구도 있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이 생물들의 세계에는 ‘그것’으로서, 동물로서 느낄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강렬한 감각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로서의 삶이 조금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체를 먹고 기다리고 또다시 잠이 드는 그 수백 년의 일상을 깨트린 인간의 삶이, 어쩌면 좋아지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마력에 희미하게 섞이기 시작한 어떤 종류의 힘을 느꼈다. 검은 머리의 인간 로젤린. 그녀의 안에 있는,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힘. 생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그 원초적인 힘, 생명. 그 생명이 조금씩 제 안에 녹아들며 융화되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것’들의 금기는 살아 있는 생물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안에 있는 생명력을 경계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로젤린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다른 생물을 흉내 낼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어? 누군가가, 어떤 무언가가 날 죽이고자 하면 그대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란 말인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치미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지? 어째서 누군가를 흉내 내야만 했던 거지? 죽고 땅에 묻혀 썩어 가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였다. 순환의 원리였다. ‘그것’은 그때서야 자신이, 또한 어딘가에 살고 있을 제 동족들이 이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죽을 것이다. 육체를 가지게 되었으니 어떤 사건 사고가 없더라도 이 몸에 담긴 힘이 닳는 날에는 숨이 끊어진다. ‘그것’은 로젤린으로서 죽을 것이다. 당연한 이치였다. 모든 생물과 생명이 그렇듯이.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완전한 의태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고자 했던 본능, 무언가를 공격하거나 죽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거부감 또한 수그러들었다.
그 이후로 로젤린은 가끔씩 꿈을 꾸거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이 아닌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고, 까만 숲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기도 했다. 때로는 제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착한 아이구나, 칼. 우리 칼릭스.’ 하고 다정하게 이야기 했다. ‘그것’은 이 기억들이 로젤린,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명의 조각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림자라 불리는 그들의 금기는 진정한 생명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생이라는 출발점이 있어야 죽음이라는 것에 닿을 수 있기에. 죽음을 경계했기에 생겨난 금기. 누군가는 섣부르다 말할 것이며, 누군가는 멍청하다 했지만 로젤린은 이미 생과 사의 기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로젤린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피부 아래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 * *
로젤린은 죽어 가는 검은 머리 인간을 만난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걔가 부탁을 해서, 살아 있는 걸 먹어야만 했던 거야. 여자는 예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로젤린을 보았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뭐라는 거야. 처음부터 설명해도 전혀 이해 못하겠거든? 그래, 뭐…… 가끔 원숭이 중에도 나무 못 타는 애들이 있긴 하더라…….”
어떤 무리든 좀 덜 떨어지는 개체가 있지…… 여자가 말을 흘렸다. 자신과 로젤린이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을 회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로젤린의 모습 뒤로 오랜 과거를 떠올렸다.
여자, 또 다른 ‘그것’은 금기를 저지른 동족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굶었던 동족은 운 좋게도 죽어 있는 뱀을 발견했다. 배고픈 동족은 커다란 뱀을 흡수했다. 설마 그 배 안에 아직 살아 있는 토끼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당혹스러워하며 토끼로 살아가던 그 동족은 자신의 의태의 능력이 소실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부분적인 변이는 가능했지만, 아무리 표범의 근육조직을 빌려 온다고 한들 토끼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이후, 그 동족은 사냥꾼에게 잡혀 갔다. 웃지 못 할 희극이었다.
무기가 없다면 인간은 약해 빠진 종족이다. 날카로운 손톱이나 송곳니도, 강한 근육조차 없으니. 토끼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여자가 보기에는 토끼나 인간이나 그게 그거였다.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집채만 한 마수로도 변할 수 있었다. 강함의 기준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덜떨어진 동족은 제 안위와 관련된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너는 말해라, 나는 들을 테니. 따위의 태도를 고수하며 인간들이 세워 놓은 한 막사만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은 데다가, 금기까지 저질러 의태가 불가능한 동족이라니. ‘그것’의 머리 한편에는 과거 토끼로 살다가 사냥꾼에게 잡혀간 또 다른 동족이 자꾸만 떠올랐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인간을 먹었거든.”
“응.”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이걸 확 그냥…….
“그 덕에 다른 동족들보다 좀 더…… 뭐랄까. 생각이란 걸 하는 편이더라고. 인간이 동물보다는 지성이 좀 높은 편이잖아?”
“응.”
여자가 로젤린에게 조금 다가왔다. 풀 냄새가 언뜻 로젤린의 코를 스쳐 지나갔다.
“인간이랑 지내기도 해서 공동체? 같은 걸 알아. 그래서 걱정이란 것도 한단 말이지. 좀 들어, 기지배야!”
리카르디스의 막사 근처를 기사들이 지나갔다. 로젤린의 신경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향하자 여자가 로젤린의 팔뚝을 철썩 때리며 성질냈다. 여자는 제 입술을 꾹 한번 깨물고는 로젤린의 어깨를 더럭 잡았다. 여자의 회색 눈동자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있잖아.”
“응.”
“금기를 저지른, 동족의 끝을 내가 지켜봐 줄게.”
겸사겸사 위험해 보이면 구해 주기도 하고. 인간 한 명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여자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뜰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깨달았다. 얘, 못 알아듣고 있네…….
그녀는 말을 고쳤다.
“앞으로 너 따라다니겠다고.”
로젤린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 하고 간단한 대답을 했다. 누구는 일생일대의 결정이었건만. 얘, 생각이라는 것은 하고 사는 거겠지? 여자는 다시금 제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거나…… 잘 부탁해.”
“응.”
로젤린이 손을 내밀었다. 여자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꼴에 이런 인사는 또 배운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였다.
* * *
“다람쥐?”
“이상하잖아. 다람쥐를 대체 왜 데리고 다녀.”
“사슴?”
“사슴이랑 같이 다니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 사냥꾼이 죽여서 어깨에 매달고 있더라고.”
“……곰?”
“사람이랑 같이 다니긴 하겠지. 곰의 위장 안에 사람이 잘 있겠지.”
두 여자는 여전히 나무 위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자는 로젤린을 따라가기로 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바깥의 존재는 크게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인간의 지능은 다른 동물들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어설프게 인간을 흉내 내는 제 모습에 의문을 금방 가질 것이다.
여자는 자신이 과거에 먹은 동물들의 종류를 나열했고, 로젤린은 하나씩 짚어 가며 선택했다. 하지만 다람쥐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사슴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곰과 마수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희귀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여자는 로젤린이 그랬듯이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습성이 있었다.
이후에도 뱀, 흑표범, 사슴벌레, 너구리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전부 기각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예전에 할매랑 살 때, 동물 데리고 다니는 사람 봤어!”
그녀는 간신히 떠올렸다.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에 살던 늙은 여자. 그녀의 오두막에는 가끔씩 사냥꾼들이 들려서 비를 피하고 갔다. 활과 덫을 위한 재료만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간간히 사냥개나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들도 있었다. 후보가 두 개가 생겨났지만 여자는 개도 매도 먹은 적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씩 웃었다.
“독수리는 먹은 적 있어.”
로젤린은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매나, 독수리나. 둘 다 맹금류의 커다란 날짐승이다. 그게 그거지 뭐. 여자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의태를 시작했다. 여자의 형체가 검게 물들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자는 온전한 독수리의 모습이 되었다. 덩치가 예상한 것보다 제법 컸다. 로젤린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감탄했다. 독수리는 태평하게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성대만 인간의 것으로 변이한 모양이었다.
“이 근처 왕이라고 불리던 독수리였거든. 마수랑도 싸우던 애야. 안타깝게도 수리부엉이가 저녁에 기습해서 죽었지. 밤의 수리부엉이는 낮의 독수리만큼 강하거든.”
3독수리는 제 날개깃을 부리로 정리했다. 로젤린은 그 날개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빠듯하면서도 매끄럽고 탄탄한 갑옷 같은 감촉이었다.
“매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은 장갑이랑 팔 보호대 같은걸 하고 있었어. 발톱이 날카로우니깐.”
독수리는 제 한쪽 발을 들어서 까딱거렸다. 송곳같이 날카로운 발톱이 보였다. 사냥꾼이 온갖 가죽을 가지고 있는 걸 본 적 있다. 그것을 대충 잘라서 두르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말하면 안 돼.”
독수리는 조류의 대가리를 하고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인간이 데리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완벽한 동물을 찾아내어 한 사람과 한 마리는 매우 만족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왔다. 막사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른 아침부터 사절단 일행이 있는 장소를 덮친 커다란 동물 때문이었다. 사냥꾼이 활을 쏘려고 했지만 로젤린이 황급히 나서서 만류했다.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공격하러 왔으리라 추측했으나 독수리는 얌전히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아 있었다. 마수라고 봐도 될 정도로 체구가 큰 독수리였다. 로젤린은 무겁지도 않은지 그 무게를 잘 지탱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건…… 또 뭐지, 로젤린 경?”
리카르디스는 어쩐지 어제가 떠올랐다. 대체 토끼를 어떻게 잡아 왔느냐는 뜻으로 그게 무엇이냐 물었더니 “토끼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던 그녀의 모습이.
“독수리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짜증났다.
“독수리가 왜 경과 함께 있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가?”
독수리와 로젤린은 조용히 당황했다. 사냥꾼들이 매를 데리고 다닌다고 했는데, 매나 독수리나 그게 그거인 거 같은데, 이상한 거 아니라 했는데. 왜 다들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리카르디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경?”
로젤린은 독수리를 쳐다보면서,
“아는 독수리입니다.”
라는 대답을 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독수리는 그녀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부리의 넙적한 부분을 로젤린의 머리에 부비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사나운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예전에 칼릭스에게 배운 마법의 말을 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확한 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살다보면 아는 독수리 한 마리쯤은 있을 수도 있지. 그 독수리가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던가, 일라베니아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발타의 땅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던가하는 문제는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결국 또 “그래…….”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동료 기사들도 처음에는 이 상황에 의문을 가졌지만 독수리가 첩자나 암살자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다들 로젤린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독수리의 날개를 한 번 만져 보기도 하고, 그 크기에 감탄도 하면서 나름 즐거워했다.
사냥꾼은 독수리가 얼마나 위험한 동물인지 알고 있어, 다가오지 못하고 한참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곧 독수리가 위험하지 않다 못해 온순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로젤린에게 접근했다.
“덩치도 크고, 부리도 튼튼해 보이고. 굉장히 멋진 독수리로군요. 언제부터 기르게 되신 겁니까, 로젤린 경?”
어제 만났다.
“……최근입니다.”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한 몇백 년 될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이름은 뭔가요?”
아, 이름. 독수리와 로젤린이 시선을 교환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로젤린은 잠시 고민했다. 이름을 알지 못하니 적당히 붙여야 할 텐데.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가 바삭하게 마른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로젤린의 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갔다. 바삭하는 음식 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마카롱.”
“……네?”
“마카롱입니다. 이름.”
독수리는 마카롱이 대체 무엇인지 가늠해 보는 표정이었다. 사냥꾼이 조금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쁜 이름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로젤린은 어쩐지 뿌듯해보였다. 사냥꾼은 마카롱이라는 이름이 독수리에게 붙여지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하고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뭐, 주인이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가볍게 넘어갔다.
마카롱을 먹어 본 마카롱은 제 이름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