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198/220)

4

“오늘부로 2황자 전하의 호위 임무를 명받은 상급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이 목숨을 바쳐 임하겠습니다.”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로젤린은 수속과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서야 리카르디스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원목 탁자에서 종이를 팔락였다. 눈앞에서 누가 경례를 하건, 인사를 하건 말건 그다지 신경 쓰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무뚝뚝한 표정 아래로 숨을 후 쉬었다. 서임식 때의 일이 깊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를 조우하고서는 터질듯 뛰었던 심장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의 잘난 얼굴은 여전했으나 다행히도 심장은 문제없이 잔잔하게 순항 중이었다.

그는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읽으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잔득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그대의 목숨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로즈 경.”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려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은색 머리를 내려 보았다. 칼릭스에게 ‘대화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교류이다.’라고 배웠지만 리카르디스는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탁자와 종이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로즈. 로젤린의 어미 되는 에델바이스가 그녀를 로즈라고 불렀다. 칼릭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로젤린’의 애칭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질색하는 애칭이었다고. 그녀 자신은 꽃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고 생각했기에 로즈라는 호칭에 제법 타격을 입었었노라 현재의 로젤린에게 일러 주었다. 눈앞의 미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부른 것인가?

“듣고 있나, 로즈 경?”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하던 얼굴에 찬란한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입에 걸었다.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는 눈앞의 초라한 검은 머리의 여기사에게 ‘로즈’ 따위의 호칭을 입에 담고 있었다.

서임식 그리고 지금. 고작 두 번의 만남이었으나 저렇게까지 대놓고 티를 내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간간히 느껴지는 말과 시선에 담겨 있는 감정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저 ‘로즈’라는 호칭 또한 어떤 애정을 기반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게 옳았다.

로젤린은, 그녀는 어쩌면 이 남자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죽음의 코앞에서조차 이 남자를 지키고 싶어 했음에도 그것이 둘 사이에 어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리란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채근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을 열었다.

“듣고 있습니다, 전하.”

“아무튼 그 독과 암기 사이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생각보다 재주가 뛰어나군.”

“감사합니다.”

“기억에 조금 이상이 있다지? 스타스 경에게 들었어.”

한 사람의 중대사를 얘기하는 것치고는 담백하고 무성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 무성의함에 상처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지?”

리카르디스의 질문은 제법 어려웠다.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그 범위를 가늠할 만한 능력은 애초에 그녀에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칼릭스가 가르쳐준 말이 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타인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마법의 말이라고 했다.

그녀는 칼릭스가 일러준 대로 말하기 위해 “아무것도.”라고 운을 띄웠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맺기 전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알지 못해?”

“예, 그렇습니다.”

그는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밝은 은발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딱딱 끊어지는 단답형의 말투 때문인지, 언제나 안절부절 거리며 할 말이 있다는 듯 쳐다보는 절실한 낯이 아니라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자결하라고 명령해도 일말의 반항도 없이 알겠다며 칼을 꺼낼 것 같던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는 확실히 덜 거슬렸다.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지, 로즈 경.”

“예.”

로젤린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제 입에서 나온 호칭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전하. 명받들겠습니다, 전하. 하던 예전의 그녀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로젤린은 경례하고 나서 그의 탁자 바로 옆에 섰다. 리카르디스가 집무실에 있을 때의 배치는 문 앞에 두 명, 집무실 안에 두 명, 집무실 밖, 창가에 세 명을 두는 형태였다. 로젤린은 그 중 집무실 안에서 그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사실 어중이떠중이 같은 경우야 문 앞에서 다 걸러지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집무실 안까지 위험 요소가 들어올 일이 적었다. 그녀가 네스터를 박살 냈다고는 하지만 상급 기사들의 신임을 얻기는 아직 부족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험이 적은 집무실 안에 배치되었다.

그녀와 같이 집무실에 있는 호위기 사는 로젤린보다 2년 먼저 상급 기사가 된 자였다. 푸른등불의 카일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젤린을 쳐다봤다.

기억에 이상이 있어? 아무것도 알지 못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원래 말수가 적고 침착하며, 감정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조에 같이 편성된 적이 없다 하더라도 며칠간 지나다니면서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이상한 점을 전혀 못 느꼈다니. 그녀가 대단한 건지, 자신의 무신경함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카일로는 기사들이 쓰는 수신호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물어봤다. 로젤린은 그 수신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신지?’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도 잊어버렸다고? 이런 애를 지금 호위 임무에 쓰는 거야?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 * *

2황자의 월장석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백작, 후작, 남작, 누구의 전령, 초대장을 들고 온 누구의 시종, 군략가, 전략가, 학자, 기사. 문무를 가리지 않고 계급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월장석 성의 호위 기사들은 위험인물을 골라내기 위해 모두들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별 사건 없이 시간이 순탄하게 흘러감에 따라 그들의 칼날은 조금씩 평화로움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카일로는 하품이 찔끔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지금은 손님조차 없이 리카르디스가 여러 가지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양한 훈련을 하며 성 외부를 경비하는 하급 기사들에 비해, 상급 기사의 업무란 것은 굉장히 단조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만히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그 긴 시간을 인내하기 위한 체력 단련이었던 건가.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다.

리카르디스의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내리 세 시간을 일하던 그가 한숨을 길게 쉬는 것을 기점으로 그의 수석 비서관이 종을 울렸다. 곧 시종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리카르디스가 좋아하는 홍차와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간식거리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손을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이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시종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홍차를 은제 스푼으로 살짝 떠서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이 없다는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에 느슨해져 있었다. 창밖에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방안은 따뜻한 데다가 홍차의 향기까지 감돌았다. 휴식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오후였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그의 입술이 찻잔에 닿았을 때였다.

동상처럼 우뚝 서 있기만 하던 로젤린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찻잔을 쥐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덜컥 잡았다. 홍차가 흘러 넘쳐 그의 옷을 더럽혔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로젤린 경!”

카일로는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감히 한낱 기사가 고귀한 황자 전하께 손을 대다니! 대신해 펄펄 날뛰는 자가 있어서 리카르디스는 짓궂게 웃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로즈 경?”

“드시지 마십시오. 뭔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안의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카일로의 손이 검 손잡이를 배회하며 꿈틀거렸고, 리카르디스도 방금 홍차를 따라 준 시종을 쳐다보았다. 로젤린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지만 시종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티포트를 들고 있던 남자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자신이 방금 먹어 보았다며 독 같은 건 없었다고 항변했다.

“게, 게다가. 황자 전하께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든 아는 사실인데 무슨 소용이 있다고 제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로젤린은 높낮이 없는 태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독이 통하면 그런 짓을 하겠다는 얘기입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리카르디스는 오호라,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거 말 되는군. 아니면 통하는 독을 만들어 냈다던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쿵짝이 맞는 두 남녀를 보던 시종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움직였다. 잔뜩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의 눈동자에 살의가 비쳤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뜯었다. 피부 아래 묻혀있던 날카로운 암기가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시종을 경계하고 있던 카일로가 검을 뽑았지만 리카르디스와 얘기하던 로젤린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먼저였다.

챙!

로젤린의 얇은 검이 날아오는 암기를 쳐냈다. 아무도 그녀가 검을 뽑는 모습을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시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검은달 내에서도 암기의 대가였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 것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쳐 내다니. 신입 호위 기사는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듯 했다.

회심의 일격이 무산되어 흔들렸던 마음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암살자는 실패를 그대로 넘기고 두 번째 수를 준비했다.

그는 신발 밑창에 있던 단검을 꺼내고 리카르디스에게 몸을 날렸다. 로젤린에게는 트레이를 집어 던져 시야를 방해시킨 후였다.

그러나 암살자는 2황자에게 조금도 닿지 못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천장에 박혔다. 로젤린의 발길질 한 번에 남자의 손목이 완전히 꺾여 부러졌다. 그녀에게 날아갔던 트레이는 반파되어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반복된 훈련으로 인해 암살자는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팔이 완전히 부러졌다. 세 번째, 네 번째의 수는 폐기. 그렇다면 그 다음 수를 준비해야 하는데…….

눈앞에 이상한 게 보였다. 검은 머리의 호위 기사가 제 검을 호기롭게 내팽개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검을 왜?

“?!”

“?!”

“?”

검을 왜…… 왜 버려? 카일로도, 수석비서인 잇세리온도, 리카르디스 조차 조금 당황해 버렸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에게 돌진했다. 암살자의 시야를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가득 채웠다. 그녀의 뒤로 반짝반짝 빛나는 2황자의 은발이 사라져 갔다.

쾅!

몸과 몸이 충돌했다고 믿기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의 몸이 빠르게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단단한 벽이 굉음을 울렸다. 이변을 알아차린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나타났다.

“……?”

매서운 기세로 들어온 기사들은 곧 검을 집어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부나방처럼 이리저리 달려드는 암살자의 공격이 로젤린 한 명으로 인해 전부 무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챙챙, 잘도 쳐 내고. 퍽퍽, 잘도 팼다. 잠시 지켜봤으나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덤비는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컥 소리 내며 날아간 암살자는 문 앞에 서 있던 상급 기사들의 발치까지 굴러갔다. 그들이 넝쿨째 굴러온 그를 포박하려고 했지만, 로젤린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움칠 몸을 떨고 물러났다.

로젤린은 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암살자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오감이 예민하게 바짝 일어섰다. 많이 다친 외관에 비하면 숨소리는 아직 차분했다. 암살자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다음 수를 준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을 등지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종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올렸다. 퍽, 퍽, 퍽. 그녀의 주먹이 묵직한 망치처럼 둔탁한 소리를 낼 때 마다 남자들이 몸을 떨었다. 검으로 베어 낸 것도 아닌데 코와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시종의 얼굴은 겨우 몇 번의 주먹질로 뭉쳐 놓은 진흙 반죽 같은 꼴이 되었다.

죽은 거 아냐? 죽은 거 같은데? 리카르디스가 앞의 참혹한 꼴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카일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경! 로젤린 경 그만! 죽겠습니다!”

로젤린은 그의 말에 잠시 너덜너덜해진 시종을 들여 보았다. 신음소리와 심장이 뛰는 게 들렸다. 로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패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카일로가 기겁했다. 리카르디스는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배후를…… 캐야하니…… 로즈…… 아니 로젤린 경. 넘기고, 뒷정리만 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시종의 머리를 잡고 벽에 퍽 박았다. 수박 터지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그녀의 손에 잡혀 기절한 척 하고 있던 시종은 정말 기절해 버렸다. 열린 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흠칫거리며 그녀에게서 실신한 남자를 받았다. 따로 묶지 않아도 도망갈 힘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일단 포박하고 끌고 갔다. 시종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길을 만들고 있었다. 곧 들어온 시녀들이 떨리는 손으로 핏자국을 치웠다.

로젤린은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 * *

싸움이 끝났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어떻게 알았지?”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언제나 나른하게 늘어진 목소리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이 상황에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조금 전의 상황을 반추했다. 남자는 은제 스푼으로 홍차를 살짝 떠서 꿀꺽 삼켰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는 남자의 목울대 울리는 소리가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이후 남자가 홍차를 소매에 스며들게 뱉는 것도 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만지는 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평범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 장면을 보기 전부터 시종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썩어 가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질 만한 향기는 결코 아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는 시종의 얼굴 가죽을 벗겨서 쓰고 있었다. 약품처리를 했지만 완벽하게 부패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런 냄새를 풍기는 자가 평범한 인간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마시는 척을 했습니다.”

“눈이 좋군.”

“그리고 피 냄새가 났습니다.”

“코도 좋아. 대단한걸, 기대 이상이야.”

“감사합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암살자의 코인가 입에서 튄 피 몇 방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티 포트. 그리고 그 소란에도 용케 쏟아지지 않고 천천히 식어 가고 있는 문제의 홍차가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찻잔을 들자 카일로와 로젤린이 몸을 움찔거렸다. 당장에라도 찻잔을 후려치고 싶어 하는 표정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으며 잔을 얼굴 가까이로 가져대었다. 홍차의 정체를 가늠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향을 맡아 보려는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홍차를 마시기 위한 준비 동작처럼 보였다. 카일로가 기겁하며 만류하기 전에 로젤린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람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텁.

“로젤린 경, 지금 무슨 무례를! 전하 일단 찻잔을! 아니, 로젤린 경, 손을 얼른!”

로젤린의 손이 리카르디스의 입을 꼭꼭 덮었다. 로젤린은 아까 자신이 리카르디스의 손목을 잡았을 때 카일로가 큰 무례라고 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손목을 잡는 게 무례하다면 다른 걸 해야겠다. 라는 갸륵한 사고방식에서 나왔지만 상황은 도리어 악화되었다. 카일로는 뒷목 잡기 일보 직전이었고, 리카르디스는 어이없다는 듯 눈알만 굴려서 그녀를 올려보았다. 여전히 입은 막혀 있었다.

로젤린은 그의 손에서 찻잔을 뺏고서야 입을 풀어 줬다.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입가를 쓸었다. 제 그림자를 밟을까, 숨소리가 거슬릴까 초조해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고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파격적이었다. 조금 건방진 감이 있지만 아까 세운 공을 감안해 넘어가기로 했다.

“이리 내.”

“안됩니다.”

“안됩니다, 전하!”

“아니 됩니다 전하!”

로젤린, 카일로, 수석비서인 잇세리온이 차례로 반박했다. 잇세리온은 로젤린이 암살자를 두들겨 패는 동안 몸을 굳히고 있다가 리카르디스의 행동으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성큼성큼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이리 주시죠, 로젤린 경.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안 돼, 내 거야. 얼른 내놔, 경.”

“안됩니다! 스물다섯이나 드시고 이게 무슨 억지입니까, 전하! 독이 들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한테 주세요, 로젤린 경!”

로젤린의 양쪽에서 아주 난리였다. 청력이 좋아서 배로 괴로웠다. 누구에게 넘겨줘야하는지 한참 고민하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탁 잡아 왔다. 언제나 차가웠던 낯이 한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신성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니 나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 살배기 귀머거리 아이도 알고 있지. 그럼에도 독인지 무엇인지를 먹이려고 했어.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무슨 수를 쓴 것이겠지요.”

“나한테도 통하는 독인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기만 해도 눈이 멀어 버리고, 향기만 맡아도 뇌가 썩어 버리는 것일 줄 어떻게 알고 넘기란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요즘 잠을 못자더니 머리도 굳어 버린 건가, 잇세리온.”

“그렇다고 고귀한 몸으로 독을 감별하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신전 쪽에 한번 맡겨 보지요.”

“알량한 신성력 믿고 세금 축내는 무능력한 밥버러지들?”

“전하!”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가 다투는 사이 로젤린은 찻잔에 담긴 홍차를 관찰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발생한 작은 움직임, 그 파동에 수면이 흔들거렸다.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홍차 속에서 무언가가 분리되어 일렁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로젤린만은 눈치챘다. 그녀는 이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마의 성질. 마력이라 불리는 그것.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력과는 조금 달랐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마수들의 몸에서 떠도는 난폭한 마력과 비슷했다.

로젤린은 가만히 관조하다가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녀에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양이었다.

마력에 독을 결합한 새로운 물질. ‘성력과 마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 공식을 이용한 시도는 몇 달 전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 처음 나타났다. 로젤린은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를 떠나기 전, 칼릭스에게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많은 기사들이 죽었다. 신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얕은 상처를 입은 자들도 모두 죽었다. 암살 부대 ‘검은달’이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었다고 추정했다.

칼릭스가 가지고 온 암살자들의 무기가 몇 개 있었다. 로젤린은 그 암기에서 마력의 기운이 은은하게 묻어 있음을 눈치챘다. 정확히는 암기에 발려 있는 독에서 느껴졌다. 로젤린이 그 사실을 칼릭스에게 알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아, 탄식했다.

[그렇군요.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가 없으니…… 마력이 독과 완전하게 동화된 상태라면, 성력으로 아무리 치유하려고 해 봤자 어떤 간섭도 할 수 없었을 테니. 그런……거였군요. 놈들이 아주 위험한 걸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독이 신성력에 파훼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냥 대회의 일로 검증되었다. 수많은 기사들의 죽음으로써 입증되었다. 그들의 암살 시도가 날뛰는 것은 그 사실에 힘입은 것일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여전히 말다툼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툭 끊었다.

“사냥 대회에서 썼던 독인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리카르디스가 의심스럽다는 듯 인상을 쓰며 그녀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지?”

로젤린은 찻잔에서 시선을 들어 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칼릭스는 황실 쪽에서도 곧 독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침묵을 지키는 황실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독의 치유법을 연구 중인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황실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 아직까지 작은 실마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칼릭스 또한 로젤린의 언질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뿐이었다. 마력의 집합체인 제 누이는 예외로 치더라도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마력은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이라 하여 그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불길하다고 박해받았다. 이델라브힘에 대한 믿음이 강한 마을에서는 마인(魔人)을 화형시키는 풍습도 종종 있다고 했다. 마력을 몸에 품고 있는 마수는 언제나 인간의 천적이었으니. 인간을 향해 손톱을 세우는 그 불길한 힘의 그릇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바뀐다 하여도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마인들은 살해당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으며, 숨기도 했다. 그들은 점차 자취를 감춰 이제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의 수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것이 발타에서 새로 만든 독을 알아보지 못한 배경 중 하나였다. 마력을 가진 자가 없으니 당연히 알아보지 못할 수밖에. 그래서 칼릭스는 황실이 아직까지 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리라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누님 기억하세요. 혹시나 황궁에서 그 독을 다시 보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단 한마디만 말하시면 됩니다]

과거 칼릭스의 목소리와 로젤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으니까요.”

이 말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잇세리온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썹을 한쪽만 꿈틀거렸다. 황실에서도 사냥 대회에서 사용된 독의 조사를 시행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무색, 무미, 무취. 극악한 생존율을 보장하는 강한 독이라는 것 이외에는 밝혀지지 않았다. 성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긴 했으나 신관들의 신성력이 약한 탓이라 생각했다.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잇세리온은 의식도 못하고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 그렇군요. 신성력이 닿기 전에 이미 많이 진행되어서 죽은 게 아니라, 애초에 성력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습니다.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요! 굉장하군요, 로젤린 경! 일단 검증은 해 봐야겠지만 아마도 그게 맞을 것 같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 또한 로젤린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검은달이 새로이 만든 독은 분명 마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니, 연관이 있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사람조차 살려 내는 신성력을 가진 2황자. 검은달이 정보 조사에 치밀한 집단이란 건 차치하더라도 그의 신성력은 이미 온 대륙에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2황자에게 통할 것이리라 확정한 독이라면, 마력과 성력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공식을 이용하는 길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언제나 성력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낮게 끌어내리고자 했으니…… 독을 치유하지 못하는 신성력? 볼 것도 없었다. 이델라브힘의 권위가 땅으로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검은달이 가장 바라 왔던 일이다.

“그래 굉장하군. 이런 것까지 만들어 냈단 말이지. 성력이 치유할 수 없는, 성력이 간섭할 수 없는 독의 영역이라.”

정말 기분 엿 같았다. 독의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리카르디스 또한 신성력을 쏟아부어본 적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과 기름처럼 부드럽게 분리될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설마 이 독, 마력과 관련이 있는가?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독이라는 물질과 섞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자신도, 이델라브힘 조차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의심을 묻어 두기만 했다.

성력의 무력화. 이델라브힘의 추락. 검은달이 이루고자 했던 핵심적인 요소였다. 검은달이 가장 바라는 방식인 만큼, 그들의 적인 일라베니아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써 외면했던 건지도 모른다. 검증을 완벽하게 거치지는 않았지만, 오늘부로 리카르디스의 안에서는 확정이 났다. 검은달은 새로운 독을 만들었다. 어쩌면 이 대륙을 좌지우지할 만한 큰 패가 될 것이다. 대단하다. 적이라도 박수쳐 주고 싶었다.

리카르디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단 한 번도 편하게 살아온 적 없고 언제나 자갈이 가득한 흙길을 걸어 왔다고 생각했건만. 본격적인 진창은 이제부터였다.

소문은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호위 임무에 막 배치된 상급 기사 로젤린 경이 암살자를 떡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바닥에 뿌려진 피를 치우던 시녀 몇 명, 암살자를 인계받은 병사 몇 명. 그 목격자들에게서 그녀의 무용담은 확대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를 향한 암살 시도는 언제나 열렬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환한 대낮에 암기를 들고 직접적인 공격을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더군다나 성 내부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기까지 했으니. 그를 감싸고 있는 악의가 거세짐은 물론이요, 수법 또한 치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이자 성공으로써 마지막이 될 수 있었던 위험한 시도는 한 명의 호위 기사로 인해 단숨에 무너졌다. 일개 신입 호위 기사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았던 탓이었을까. 로젤린의 공은 더욱 빛났다.

로젤린의 수습 기사인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식을 들었다. 암살자 다섯이 리카르디스 전하를 해하려고 하자 로젤린 경이 마치 팔이 여덟 개라도 된 것처럼 휘둘러 모두 잡아내었다고 했다. 독과 암기가 난무하는 사이에서 로젤린은 생채기 하나 없었을 뿐더러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강처럼 흘렀다나 뭐라나. 과장이 섞인 진실이 자극적으로 변해 사람들의 입을 오르고 내렸다.

레티시아는 막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로젤린을 발견하고 에버하르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제복의 단추를 몇 개 풀고 느슨한 복장을 하고 있던 에버하르트가 급하게 몸단장을 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성안에 자자하게 퍼진 소문처럼 그녀는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듯 했다. 흰 제복 위로 마른 피가 엉겨 붙어 있어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로젤린은 평온한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로젤린은 붉은 노을이 퍼진 하늘을 등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나절 만에 월장석 성의 사신으로 불리고 있는 그녀의 별명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로젤린을 쳐다보았다.

호위 임무 첫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살자와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연무장에 수습 기사들을 살펴보러 와 주다니. 그들은 기합이 들어 빳빳하게 서 있었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열심히 검을 휘둘렀는지 서늘한 바람에도 땀이 식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와 칼릭스에게 여러 가지를 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에는 많은 수습 기사들이 있다. 하지만 기사단 내부에서는 기사라고 불리지도 못하고 고작 수습생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했다.

그러니 기사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하급 기사로 승급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목표인 셈이었다. 레티시아는 몰락 귀족 출신에다가 여자. 에버하르트는 평민. 수습 기사들 모두가 절실했지만, 그들 또한 매우 절실했다. 노력해 봤자 뒷받침해 주는 가문이 없다 보니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았다. 재정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검법을 배울 수 있는 환경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다.

어떠한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밑받침하는 파벌 이전에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검술 실력이었다. 그들이 아직 수습 기사에 머무르는 것은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 사이를 가로질러 놓은 기준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그런 둘을 하급 기사로 끌어올려야만 하는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로젤린은 어제 자기 전 곰곰이 생각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 인간에게 부족한 것. 로젤린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수습 기사들의 실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연무장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목검을 들었다. 둔탁한 목재의 감촉이 익숙했다. 그녀는 목검의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봅시다.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허둥지둥 당황했다. 그사이 로젤린은 자신의 얼굴 앞에 검을 세웠다. 대련 전의 준비 자세였다. 두 수습 기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네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할까? 눈빛으로 서로에게 순서를 미뤘다. 얼마 전 그녀에게 쥐어 터졌던 네스터의 모습이 아른아른거렸다. 그 자는 아직까지 얼굴에 멍을 달고 다녔다. 수습 기사 두 명을 지켜보던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잔잔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쿵, 무겁게 떨어졌다.

“둘, 다.”

“예? 예!”

“예!”

두 사람은 서두르며 목검을 잡아 들었다. 1:2의 대치. 로젤린은 검을 들고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쭉 훑었다. 겉핥기로만 배운 듯 어설픈 자세였다. 여기 저기 빈틈 투성이라 마수가 앞에 있었다면 진즉에 잡아 먹혔을 것이다.

로젤린은 팔에 힘을 실었다. 그녀의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으나, 이미 주위에는 그 작은 움직임과 상반되는 흉흉하고 거대한 기운이 떠돌았다. 당장에라도 그들의 목을 베어 낼 듯 날카로웠다.

“…….”

로젤린은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마치…… 아기 사슴 같았다. 아니 아기 사슴보다도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이렇게 왼쪽, 오른쪽, 밑, 위. 다양한 방향으로 위협을 해도 ‘응? 언제 공격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낯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검을 거둬들였다.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채, 대련이 종료되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로젤린에게 그들의 능력을 판별할 만한 탐색전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수습 기사들에게도 공통적으로 기본 검술을 배우는 시간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검을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관한 기본기에서 그쳤다.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검을 맞대는 대련시간조차 방어구와 목검을 사용해, 실전보다는 말 그대로 ‘대련’ 에 익숙해질 뿐이었다.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뭉툭한 나무 검을 휘두르는 것에서 위기감을 느끼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닐 것이다.

로젤린이 인간이 된 이후 느낀 것도 그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이라는 것이, 위기감이라는 것이, 본능이라는 것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어지간히 강한 인간이 아니고서야 인간은 정말 약한 종족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필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심각합니다.”

수습생 두 명이 눈에 띄게 축 처졌다.

“……어디가…… 심각…….”

“모든 게 매우 심각합니다.”

“아…… 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힐끗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로젤린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를 공격합니다.”

“네?”

“아침부터 자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든 제가 당신들을 노립니다. 로젤린의 높낮이 없는 고요한 말투와 내용이 오싹했다. 그들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다른 상급 기사에게 소속된 수습 기사들에게서는 이런 이상한 내용의 훈련 방법을 듣지 못했다. 수습생들이 검을 휘두르면 상급 기사가 부족한 점을 말해 준다던가 검법을 가르쳐 준다던가 하는 일반적인 가르침뿐이었다. 레티시아가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까딱하자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음, 로젤린 경.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로젤린은 조금 고민하더니 주머니에서 꽃이 잔뜩 수놓아진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레이몬드가 손수 자수해서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의아하다는 듯 지켜보는 수습 기사들의 시선아래, 그녀는 몸을 구부려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잡기 전 바로 한치 앞에서 멈췄다.

“제가 뭘 하는 것 같습니까,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눈을 마구 굴리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손수건을…… 주우시려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로젤린은 손수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연무장 옆에 있는 수풀에 다가가 얇은 나뭇가지를 콱 잡았다. 나뭇가지가 당장이라도 꺾여 질 듯 휘어져 있었다. 로젤린은 더 이상 힘을 주지 않고 또 멈췄다.

“제가 뭘 할 것 같습니까, 에버하르트.”

“나뭇가지를 꺾으려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로젤린은 나뭇가지를 꺾었다.

“방금 대련할 때에도 제가 여러 번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네?”

“예?”

그냥 가만히 서 있었잖아? 둘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냥 서 있기만 했는데…….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아…… 네…….”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이 한 행동과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물론 손수건을 잡지 않았고 나뭇가지를 꺾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후에 취할 행동은 누구든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대련했을 때에도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는 공격전의 징조를 뚜렷이 내보였을 것이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동자, 한쪽 발에 실리는 무게.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수축, 팽창하는 근육의 움직임 따위로.

로젤린 그 징조를 읽어 내지 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레티시아 또한 그녀가 하고자하는 말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붉혔다. 여러모로 부족하단 것이 낱낱이 드러났다.

“읽어 내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본능이 얘기하는 그 영역까지.

“네!”

“예!”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월장석 성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로젤린은 소문처럼 정말 굉장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들은 그녀에게 경례한 후, 뿌듯하게 기숙사로 귀가했다.

방심한 채 돌아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로젤린에게 공격당하는 걸 기점으로 그들의 세상은 180도 바뀌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지독한 냄새였다. 잇세리온은 어둡고 컴컴한 공간을 지나고 있었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곳이었으나 앞서서 걷고 있는 병사가 들고 있는 등불 덕에 어느 정도 시야가 트였다. 나방처럼 보이는 날벌레가 잇세리온을 지나쳐 뒤로 날아갔다.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저어 벌레를 쫓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리카르디스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곳까지 직접 행차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리카르디스는 얼굴 주위에서 펄럭거리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네가 병사에게 시키고, 그 병사는 또 말단에게 시키고, 그 말단은 그 말단에게 시키겠지. 답이 내게 돌아올 즈음이면 반년은 지났겠군. 기다리다가 숨 넘어 가겠어.”

잇세리온은 투덜투덜댔다. 확실히 그가 감옥을 찾지만 않았더라도 밑의 사람에게 시켜서 알아오라 했을 것이다. 하여간 성격이 급한 주인이었다.

그들은 나선형으로 돌고 도는 몇 백 개의 계단을 내려가 최하층에 도달했다. 철창 안에 갇힌 짐승 같은 인영들이 울부짖으며 마구 손을 뻗었다.

“예쁘게 생겼네. 이리와, 이리와 봐 예쁜이.”

“죽, 여줘. 죽여줘. 제발!”

“배고파요, 쥐가 음식을 다 먹어 버렸어! 개 같은 자식들! 죽여 버릴 거야!”

병사가 죄수에게 찬물을 뿌렸다. 차가운 물이 그들의 상처를 후벼 팠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울렸지만 아까보다는 잠잠해졌다. 잇세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불쾌한 광경이었다. 그는 이 더러운 감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나는 주인을 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조금 좁히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하지만 항상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평소와 똑같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무덤덤한 태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광경에 일말의 신경도 두지 않는 듯 했다. 잇세리온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를 따랐다.

최하층에서도 한참을 들어 가야하는 독방이었다. 병사가 창대로 철창을 두드렸다. 캉캉캉. 소리가 감옥을 크게 울렸다. 철장에서 녹슨 냄새가 났다. 피 냄새일지도 몰랐다. 안쪽에서 검은 형체가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어쩌면 밝은 금발이었을 머리카락은 흙과 피 따위가 엉겨서 갈색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기어 왔다. 두 손에 씌워진 수갑이 바닥을 긁으며 철컹, 철컹하는 소리를 냈다. 더러운 누더기를 몸에 대충 감고 있던 여자가 철창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하얀 눈동자가 빛났다.

“이델라브힘의 개가 왔나? 냄새가 나는걸.”

“크레안 티다니온의 노예를 보러 왔지. 신수가 훤한걸 보니 그간 평안했나 보군?”

“입만 살아 있는 데다가 재수까지 없는걸 보니 두 번째 월계수로구나.”

그녀가 갑자기 철창 사이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정확하게 리카르디스를 노려 왔다. 철컹! 수갑이 철창에 걸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한치 앞에 당도한 더러운 손끝을 보고도 리카르디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거리가 아주 조금 모자라 닿지 못했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창대 끝으로 그녀를 쳐내려 했지만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손버릇은 여전하고.”

“위로해 주려고 했지. 또 네 형이 괴롭힌 거니?”

잇세리온은 병사를 부르러 가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잇세리온이 작게 혀를 찼다.

“사람 기분 더럽게 하는 것도 여전하군.”

리카르디스는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손 위로 병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손에 닿는 차갑고 단단한 감촉에 잠시 흠칫 몸을 굳혔지만, 곧 철창 안으로 가져갔다. 유리병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듯 손으로 더듬기도 하고 흔들어 보기도 했다. 얇은 유리 너머로 찰랑이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그 안에 어떤 액체가 들어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손안의 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자, 리카르디스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를 위해 가져온 선물이야, 케틀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유리병을 열었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 차가운 공기에 들러붙어 있는 짙은 피와 오물냄새. 날카로운 쇠의 소리까지. 살풍경한 감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홍차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맴 돌았다. 그녀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동료들이 또 2황자의 암살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알리가르테는 리엔타 지방에서 나는 홍차 이름이었다. 날카로운 시선 가운데에서 그녀는 홍차의 종류까지 맞출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교양이 뛰어 나시군요, 레이디.”

팔짱을 끼고 철창 기대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목소리는 퍽 느긋했다. 그녀는 비죽 웃더니 홍차를 손바닥에 살짝 부었다. 코에 가까이 대어 냄새를 좀 더 깊게 맡기도 했고 손끝으로 만져보기도 했다. 그녀는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손바닥 안에 얕게 고여 있던 홍차에서 익숙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생생한 광경을 선사했다. 검붉게 물든 아지랑이 같은 것이 손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아주 미약한 양이었지만, 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조국, 발타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녀가 일라베니아에 잡혀 있는 사이 독과 마력의 결합물, ‘파편’의 제조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리카르디스는 확신을 얻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독에 그녀가 반응했다는 것은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한 기운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마인(魔人)인 만큼 소량의 마력이라고 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에서 눈을 떼고 다시 리카르디스 쪽을 쳐다보았다.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손목에는 녹슨 수갑을 차고 누구보다 허름한 옷을 입었으며 누구보다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의기양양해했고,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거친 목소리가 즐겁게 울렸다.

“무엇을 알고 싶지?”

“무엇을 알고 있지?”

그녀는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소 불손해 보이는 감이 있어서 잇세리온은 속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나는…… 리카르디스. 나는 아주 많은걸 알고 있어.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아. 또한 이델라브힘의 빛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것’이 나타난 이상 너희 더 이상 승산이 없어졌다는 것도. 난 다 알고 있어.”

“아주 혼자 잘났지.”

“……건방지기는.”

그녀는 잡혀 있는 3년간, 단 한 번도 일라베니아에게 정보를 넘긴 적이 없었다. 끈질긴 고문 끝에 뱉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이미 사건이 일어난 이후라 소용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고자 한 것은 리카르디스가 1황자 엘피디오보다 덜 재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선물이랍시고 가지고 온 것에서 오랜 숙원을 풀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이제 크레안 티다니온의 뜻대로 돌아갈 것이며, 고작 독의 정체를 하나 밝혀낸다고 한들 크게 바뀌는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일라베니아 제국에 검은 장막이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휩싸고 도는 희열에 몸을 잘게 떨었다.

“나에게 가지고 온 것을 보면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그래 맞아. 이것은 위대한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 감히 이델라브힘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완벽한 혼돈의 영역.”

“말을 개떡같이 하는 재주가 있었나?”

“……이 독에는 마력이 섞여 있어.”

“알아듣기 쉽고 좋군. 완벽해.”

이미 독의 정체를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 대신, 그 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술렁였다. 감옥이 그들의 동요로 들썩였다. 독과 마력의 결합이라니.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허름한 여자는 검은달의 간부였던 자였다. 신용할 수도 없지만 쉽게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신성력으로 치료되지 않는 독. 마력을 숭배하며 많은 마인들을 보유하고 있는 검은달. 그리고 마녀 케틀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까지. 많은 정황과 상황이 리카르디스의 의견을 밑받침했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의 뒤로 서 있던 남자들이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사각사각 써 내려갔다. 그 증언들은 황제에게, 엘피디오에게, 귀족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용건이 끝났음을 알렸다. 많은 비서와 보좌관들이 썰물처럼 감옥을 빠져나갔다. 고약한 냄새와 벌레가 가득 찬 이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남은 건 선물이야 케틀린. 몸에는 안 좋지만 그대의 정신 건강에는 좋을 테지.”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공간에서 제대로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문을 받는 삶을 스스로 끝낼 기회를 주겠다.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케틀린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온갖 악독한 고문을 일삼는 엘피디오와는 다르게 귀여운 맛이 있는 황자였다. 그녀의 웃음소리에서 그 뜻을 읽은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팍 구겼다.

“이 선물은 사용하지 않을 거야, 예쁜이.”

이 여자가 정말.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편안하게 죽지는 못할 거다.”

“모두가 크레안 티다니온님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눈이 멀어 버렸지만 그 광경은 환하게 보일 테지. 나에게는 살아서 그 장면을 봐야 하는 의무가 있어. 열심히 발버둥 쳐 보렴.”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죄수들이 다시 철창을 울려 대었다. 감옥이 비명과 고함소리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네가…… 되찾을 수…… 이 어둠 속에서…….”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잇세리온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는 통에 그 또한 독방 앞을 떠났다.

리카르디스는 솜씨 좋게 그녀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복원했다. 그녀의 입모양이 한 글자, 한 글자를 그려 냈다. 저주인가? 또는 어떤 것의 암시?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있는 독방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겠다, 리카르디스.

* * *

잇세리온이 조잘조잘 잔소리를 쏟아 부어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을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인 ‘검은달’. 그 간부였던 마녀 케틀린과 정답게 얘기를 나누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 독설이 정다워 보였다니 기가 찼다.

자신을 살해하고자 했던 독에 마력이 섞여 있음은 그녀의 말로써 확증이 되었다. 지하 감옥에서 그녀의 말을 같이 들었던 엘피디오와 황제의 사람들. 그들이 입증해 줄 것이다. 검은달, 또한 왕국 발타가 신성력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었음을. 그것은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적의 적은 많을수록 좋았다. 문제는 적과 손을 잡은 아군이 있다는 것이지만.

리카르디스는 침대에서 한참 뒤척이며 천장에 있는 문양을 눈으로 따라 그려 보았다. 언제나 쉽게 잠들지 못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힘들었다. 피로한 몸과 달리 정신은 생생했다. 어릴 때부터의 잦은 암살 시도 덕에 앓게 된 일종의 수면 장애였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고 검은 배경 위로 양 몇 마리를 세어 보고,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줄 법한 자장가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더욱 뚜렷해지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쉬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역시나 잠들기는 영 그른 듯했다. 긴 밤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줄,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언제나 많았다. 여태껏 불면의 날에는 주로 깃펜을 들고는 했으나…….

오늘따라 유독 와인이 차곡차곡 눕혀져 있는 수납장에 눈이 갔다. 리카르디스는 이런 날에는 책상 위에 앉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와인을 한 병 집어 들고 긴 소파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었다. 고작 몇 개의 촛불이 있을 뿐이라, 방 안은 밝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하얗고 희미한 빛이 와인 잔과 탁자를 비추고 있었다. 살짝 열려져 있는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달빛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둥그렇게 떠 있는 달의 일부가 보였다. 새하얗게 멀어 버린 여자의 눈동자 같았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는 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검은 달. 하얀 밤. 그것은 단순히 크레안 티다니온을 섬기는 광신도 집단의 이름도 아니고, 신성 제국 2황자의 기사단 이름도 아니었다. 지금은 노쇠하여 죽어 가고 있는 대륙의 찬란했던 과거.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빛의 신 이델라브힘은 그의 성력이 극으로 치달은 날,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밤에서 몰아내었다.

낮보다도 더 환한 축복의 하얀 빛이 온 세상을 비췄다. 만물은 소생했다. 땅과 하늘을 덮고 있던 검은 장막은 서서히 하늘의 한 편으로 물러났다. 어둠의 상징인 그림자 또한 사라졌으며, 이로써 대지에 내려앉은 일말의 어둠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하얀 밤이 세상을 뒤덮었다. 크레안 티다니온은 밤에서 쫓겨나 달에 몸을 숨기고,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이델라브힘의 밤이 사라질 때까지 검게 변한 달에 머물렀다]

……라고 알려진 것이 일라베니아, 아니 온 대륙에 퍼져있는 전설이었다. 전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단어가 어울리는지 잠시 판별했으나, 역시 단순하게 ‘전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 또한 알았다.

삼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밤과 검은 달이 뜨는 소생의 날, ‘축복의 밤’ 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몇백 년이라는 세월은 진실을 숱한 전설 중 하나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밤’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모든 나라들의 건국신화가 이르듯,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전설이 가지는 힘조차도 많이 퇴색 되어 버린 시대이긴 했으나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그림자조차도 사라지는 비현실적인 신의 세계, 짧은 시간. ‘축복의 밤’은 존재한다.

일라베니아의 황실, 신전.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숨겨진 낡은 서고. 여러 사람들이 써 내려간 책자에는 몇백 년 전, 일라베니아의 건국 때부터 반복됐던 하얀 밤과 검은 달의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1년…… 47년…….

236년…… 243년, 263년

297년…… 345년…… 3……4…….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이델라브힘의 축복을 빌어, 크레안 티다니온을 달로 몰아내고 하얀 밤을 불러왔노라. 그림자가 사라진 대지는 축복으로 물든다. 생명은 순환하며 싹이 움트고 꽃은 피어, 열매를 맺는다]

‘축복의 밤’을 부르기 위해서는 많은 성력이 필요했다. 막대한 성력을 가진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축복의 밤은 점차 소실 되어 갔고, 황제들의 역량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왕왕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현 일라베니아 황제로부터 2, 3세대 위 전대 황제들의 신성력이 강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부터도 축복의 밤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견들은 힘을 얻지 못했지만 없어지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도 조용히 묻혀 있었다.

축복의 밤이 뜬 마지막 기록으로부터 어느덧 몇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륙은 서서히 죽어 가는 중이었다. 성력과 성수로 축복한 땅은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곡식의 수확량과 열매 맺는 나무의 숫자가 점차 줄어드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신성력이 닿는다고 죽어 가는 땅이 완벽하게 회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축복을 하지 않으면 다시 메마른 땅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신전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친 결과, 신성력으로 땅을 살리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상자에게 약초를 달여 먹이는 정도의 일차적인 효과일 뿐이라는 결과로 확정지었다.

가시적인 효과는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 생명력이 순환하지 못하는 땅이 맞이할 결과는 뻔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눈을 피해 ‘축복의 밤’ 에 대해 조사했다. 황실에 있는 자료가 안 된다면 지역마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구전이나, 옛 도서관의 성서라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자료는 소실되었고, 오랜 얘기들은 변질되고 잊힌 후였다.

과정과 조건에 대한 상세한 진실은 황제만이 알고 있었다. 축복의 밤을 부르는 것은 오직 일라베니아의 황제만이 가지는 가장 큰 의무이자 고유의 권한이므로. 바꿔 말하자면, ‘축복의 밤’ 을 다른 자가 띄우는 행위는 황제에 대한 모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만약 ‘축복의 밤’ 을 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된다. 황위를 계승 받을 때까지는.

정말 어이없고 답답한 일이었다. 현 황제는 그 자체로도 성력이 미치지 못해, 다른 조건이 충분히 채워지더라도 ‘축복의 밤’ 을 부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득바득 권력을 쥐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축복의 밤’ 에 대한 정보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간 위에 서 있는 정점. 말 한마디로 수십, 수백, 수만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자에게 반발하는 행위였으니.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다소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날에는 황제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 누군가를 쳐내기 위한 검이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검이다. 때문에 전쟁터에서 구르는 와중에도, 큰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소중한 이들이 죽어 나갈 때에조차 ‘축복의 밤’ 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왔다.

형체조차 보이지 않아 흐릿하던 것이 오늘에서야 조금이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이델라브힘의 존재만으로 하얀 밤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겠다. 리카르디스.’

리카르디스는 와인을 물마시듯 들이켰다. 과연, 인정하기로 했다. 한 가지만을 찾아 왔다는 것을. 마녀 케틀린의 마지막 말에서 그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하얀 밤이 나타난 날에는 항상 검은 달 또한 같이 있었다. 하얀 밤을 찾지 못했다면, 남은 것은 오직 검은 달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와인 잔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리카르디스는 불그스름하게 물든 얼굴을 하고 창을 열었다. 그는 발코니를 향해 발을 떼기 전, 우뚝 굳어 버렸다. 정면에 높이 자라있는 나뭇가지 위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엉망으로 얼굴을 구겼다.

“이게…… 대체…… 무, 뭘 하는 거지 로젤린 경?”

그 답지 않게 당황해 말도 더듬었고 목소리도 한톤 높았다. 비명 안 지른 것이 용할 정도로 정말 깜짝 놀랐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나뭇가지 위에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는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호위 중입니다.”

“……그대의 호위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었나?”

“암살자가 제 호위 시간을 생각해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로젤린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 줬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 우거진 나무 안쪽에서 무언가를 잡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로젤린에게 당한 후인지 기절해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말도 못하게 유능한 제 호위 기사를 한 번, 나무 아래 피 흘리며 쓰러진 암살자를 한 번 보다가 사람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몰려왔다.

호위 기사들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로젤린을 한 번, 피떡이 되어 있는 암살자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그들의 미묘한 표정이 리카르디스와 매우 닮아 있었다. 로젤린이 그들에게 “수고하십니다.” 하며 경례했다. 그녀의 태평한 태도에 상급 기사들은 더욱 심란해졌다. ‘굉장히 유능하긴 한데…… 음…… 뭐…… 괜찮겠지…….’라고 생각을 마친 그들은 이 이상한 상황을 적당히 합리화하고 방을 나섰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방 안에 다시금 적막이 감돌았다.

리카르디스는 발코니 문을 닫고 들어가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나뭇가지에 앉아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젤린이 보였다. 그녀의 행동이 신경을 자극했다. 어떤 과거가 떠올랐던 건지도 몰랐다.

“로젤린 경.”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대답하라는 게 아니라 이리 오라고. 리카르디스는 조금 인상을 쓴 채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로젤린은 능숙하게 나무를 내려와 벽을 타고 리카르디스의 앞에 섰다. 순식간이었다. 눈치를 어디 버리고 온 대신에 실력을 얻어 온 건가?

리카르디스는 별다른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로젤린도 그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이 야심한 시각, 남자의 방에 들어서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제 주인에게 괜한 소문이라도 돌까 싶어 들어온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이렇게 보면 정말 기억을 잃은 것 같다가도, 제 주위를 맴도는 행태를 보면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리카르디스는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로젤린을 눈에 담다가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마실 텐가?”

“괜찮습니다.”

“마셔.”

“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손에 들린 잔을 받았다. 로젤린의 손마디가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반면, 로젤린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는 곧 와인 잔을 하나 더 가지고 와, 두 개의 잔을 직접 채웠다. 로젤린은 그가 와인을 따르는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음에도 리카르디스가 눈치챌 정도의 강렬한 시선이었다. 로젤린은 먼저 와인을 받고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잔에 와인이 마저 채워지자마자 잽싸게 움직였다. 바람과도 같은 속도였다.

쨍.

질 좋은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리카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로젤린을 쳐다봤다. 아까 채워지는 잔을 열렬히 바라본 것이 이런 이유였던 건가.

지금 나랑…… 건배를 한 거야, 이 호위 기사?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황당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도리어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잔을 나누고 나면 서로 가볍게 잔을 부딪쳐 소리 낸다. 로젤린은 칼릭스에게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재빠르게 해냈다. 명석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누님. 칼릭스의 박수갈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로젤린의 뿌듯한 표정은 그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칼릭스가 알았다면 무척이나 괴로워했을 상황일 테지만, 로젤린은 알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입가를 쓸었다. 요즘 따라 당황할 일이 많았다. 기억상실은 정말 사람을 크게 바꿔 놓는구나 싶었다. 그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지만. 그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허물을 묻었다. 로젤린이 굉장히 뿌듯해 보였기 때문에 차마 혼낼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진지하게 화내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로젤린의 돌발 행동으로 잠시간 까먹었지만, 리카르디스는 사실 그녀를 방 안으로 데리고 와서 몇 가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그녀를 이루고 있는 근본은 크게 바뀌지 않아 보였다. 우선 굳이 시키지도 않았건만 목숨을 걸고 제 곁을 지키려고 하는 점이 아주 똑같았다. 기억상실이라고 보고한 것이 거짓이 아닌지 여러 번 의심할 정도로. 하지만 기본적인 상식 따위를 어딘가에 몽땅 버리고 온 걸 보면 기억상실이란 말도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왜 제 곁을 맴도는 것인가. 로젤린은 어떠한 영광도 어떠한 명예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리카르디스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 붉은수레바퀴가 로젤린이라는 이름 앞에 있는 한, 그녀는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밝힌 적 있었다. 과거, 로젤린이 죄책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였다. 그 눈빛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로젤린을 크게 밀어내려고 했다.

부드럽게 손질된 긴 은발이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까슬하게 그의 감정이 올라와 있었다. 옷도 입다 만 것인지 벗다 만 것인지 엉망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었다.

[떠나, 떠나라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아주 지긋지긋해 죽을 것 같으니! 대체 왜 내 곁에 있는 거냐!]

지금보다 어렸고 지금보다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때라 해도 매우 격정적이었다. 그때 당시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사망했던 상황의 특수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온갖 집기가 부서진 방의 중간에 무릎 꿇고 있었다. 떨리며 흐느끼는 말이 그녀의 입술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하만은 제가…… 꼭…… 목숨을 바쳐서라도…….]

리카르디스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악을 썼다. 자학에 가까운 몸짓을 막기 위해 로젤린이 그에게 다가섰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개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대가 뭐라고 날 지켜! 네가 뭐라고 나를 지킬 수 있어!]

그 대화가 오고 갔던 장소였다. 로젤린이 다시 이 방에 발 들일 수 있으리라고, 리카르디스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기억상실 전의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과 달리 이렇게 차분하게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과거의 일 이전에 애초에 술잔을 나눌 만한 사이조차 아니었다.

리카르디스의 시야에 로젤린이 인상을 쓰는 모습이 담겼다. 단맛이 적은 와인이라 그런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둘은 별다른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와인을 따를 때 마다 로젤린이 계속 건배를 하는 바람에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후로도 로젤린이 혼나는 일은 없었다. 와인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 잔이 부딪치는 소리,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간간히 울렸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리카르디스와 인간의 언어가 아직 어려운 로젤린. 두 사람에게는 모두 괜찮은 시간이었다.

와인 한 병은 금방 동이나 한 병을 더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달콤해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산딸기 주였다. 로젤린의 구미에 맞았는지 아까보다 잘 마셨다. 그리고 한 병 더. 몇 시간 뒤에 또 한 병 더.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제 호위 기사의 모습은 묘하게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는 동이 터올 즈음에는 술에 떡이 되었다. 로젤린은 언젠가 네스터를 옮겼던 것처럼 리카르디스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겼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이불까지 곱게 덮어 주고 뒤돌아설 때 쯤, 그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대체 왜 곁에 있냐는 이상한 물음이었다. 로젤린은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하다 보니? 또는 직업이라서? 아니면 누군가와 약속해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하얀 밤의 주인을 지킨다.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로젤린은 붉은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는 리카르디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곧 그 말들은 숨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이불 아래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렸다. 로젤린은 흐트러진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 고요한 새벽이었다.

* * *

“하카브, 이 개자식이!”

정리정돈 되어 있던 탁자가 어질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많은 가신들이 보고 있음에도 그는 격렬한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엘피디오는 씩씩대며 화병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화병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밤이 까마득하게 내려앉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1황자 엘피디오의 석영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엘피디오의 호출 때문이었다. 2황자 리카르디스가 마녀 케틀린을 통해 새로운 독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미 몇몇 주요 고위 귀족과 황제의 귀에도 들어 갔을 것이다.

“뭐? 마력? 마력과 독을 섞어?”

엘피디오의 보좌관은 그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주인이 이렇게까지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경우에는 백번 조심해도 부족했다. 보좌관의 예상대로 그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엘피디오가 손바닥으로 보좌관의 머리를 퍽퍽 쳤다.

“야, 너 뭐 하는 놈이야. 뭐 하는 새끼냐고! 그런 거 먼저 알아오라고 그 자리 앉혀 놓은 거 아냐? 내가 언제 리카르디스 그 자식 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정보 주워 오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하카브 왕자 쪽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더러운 발타의 개자식! 하여간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 없어! 어떻게 일이 이지경이 되도록 다들 손만 빨고 있었나!”

엘피디오가 잔뜩 성내며 주위를 쭉 훑었다. 세간에 1황자를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는 귀족들이었다. 제국 내 외부로 명성이 자자한 가문의 수장들이건만, 그깟 독 하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검은달이 외부의 적이라고는 하지만 2황자 리카르디스를 제거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잠시나마 손을 잡았다. 검은달, 아니 발타에서도 그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리카르디스가 검은달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에 크게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검은달과의 동맹은 아주 빠른 속도로 성립됐다. 엘피디오의 세력만으로 견제할 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수월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수세에 몰린 형국에서야 그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듯 했다. 바리바리 숨겨 놓은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맹 후, 금방 결착이 날 것이라 생각한 승부는 아직까지도 일진일퇴를 하며 줄다리기 중이었다.

사냥 대회에서 기필코 처리를 하겠다고 하더니 실패했다. 이후에 암살자가 월장석 성내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해서 어떻게든 넣어 줬더니 그것도 실패했다. 심지어는 그날 막 호위 임무에 배치된 신입 상급 기사에게 피떡이 되었단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리카르디스 그놈이 얼마나 기고만장해할지. 상상만 해도 열이 뻗쳤다.

그 상황에서 리카르디스가 독의 정체를 알아냈다. 마력과 독이 섞인 혼합물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성력으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고. 엘피디오는 어이가 없었다. 성력이 무쓸모해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독의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엘피디오는 검은달로부터 그런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다. 하카브가 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전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만약 검은달의 발톱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면. 그 독을 해독할 방법이 없다면 자신 또한 위험해질 것이다. 아니 이미 위험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은 언제든 깨어질 수 있었다. 엘피디오는 그의 밝은 금발을 마구 헝클였다. 일이 엉망으로 꼬이고 있었다. 인상 쓰며 고민 중이던 강철발굽 백작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 하카브 왕자가 패를 전부 보이지 않았으리라고는 예상했던 일 아니겠습니까.”

“젠장, 그래도 이런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나? 리카르디스뿐만 아니라 이제 나, 그리고 그대들의 목숨까지 전부 하카브에게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우리가 리카르디스의 방패가 되어 준 사이에 그 개새끼들은 일라베니아를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주 환장하겠군!”

엘피디오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강철발굽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윗사람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는 어디에다 버리고 왔는지, 눈 씻고 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을 다독이며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 나가려고 해도 모자란 판국이었다. 이렇게 오밤중에 가신들을 불러서 온갖 성질을 낸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직 동맹을 맺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아직 바라는 것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것을 쥐고 한번 거래를 해 보시지요. 해독제가 없는 독은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그걸 받아내도록 하시지요, 전하.”

엘피디오는 씨근덕대는 것을 멈추고 그제야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뻔합니다. 축복의 밤을 불러내기 위한 시도는 일라베니아 제국뿐만 아니라 발타 왕국에서도 항상 있었습니다. 황제가 되면 열람할 수 있는 비밀 서고.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하얀 밤을 불러내기 위한 방법이 적힌 자료가.”

“있기는 하지.”

“방법을 안다고 할 수 있었다면, 저희도 진작 했겠지요. 하카브 왕자가 그 자료를 얻는다고 해도 결코 축복의 밤을 불러내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쓸모가 없는 정보라는 얘기입니다. 검은달에 넘어간다고 저희에게 치명적일 이유는 하나 없습니다.”

“흠…….”

엘피디오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나는 동안, 한 세대에 몇 명의 인원만이 겨우 알던 정보였다. 숨기고 숨겨 왔던, 어쩌면 예전에는 중요했을지도 모를 정보였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일라베니아가 대륙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강력한 무기일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쓸모가 없고, 남에게는 필요하다면 최대한 비싼 값으로 팔아 넘겨야지요.”

“그건…… 그렇지.”

“2황자 전하께서 파악한 독의 정체는, 이미 황제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을 겁니다.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전하.”

엘피디오는 고민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황제에게 검은달의 새로운 독의 정체가 알려졌다. 황제는 신성력과 황권의 권위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자였다. 그런 제 아버지의 성질 상, 그 독의 정보를 듣게 된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발타가 황제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는 행위보다 더 확실하게 결투를 신청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일렀다. 해독제 이전에, 발타는 아직 엘피디오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리카르디스를 죽이는 것이 먼저였다. 일라베니아에게 오랜 숙적이 발타라면, 엘피디오에게 가장 오래된 적은 리카르디스였다. 그를 경계하면서 해독제를 가장 빠르게 얻어내는 방법. 엘피디오는 눈을 번쩍였다.

“다행히 쓸 만한 패가 하나 있군.”

죽어도 상관없는. 엘피디오는 뒷말을 삼켰다. 수십 개의 눈이 엘피디오에게 와서 박혔다.

“디에즈를 불러와라.”

* * *

리카르디스의 아침은 늦게 시작되었다. 간밤에 갑자기 시작된 술 대결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꿀물을 가지고 온 잇세리온의 표정은 철없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즐비하게 굴러다니는 수많은 술병, 카펫에 얼룩덜룩 묻은 붉은 와인 자국. 아직 꿈나라에 있는 리카르디스에게서는 알콜의 향기가 풀풀 풍겼다.

몸을 흔드는 손길에 리카르디스는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빛의 방향 때문에 잇세리온의 짙은 갈색 머리가 검은색처럼 보였다. 그는 흠칫 몸을 떨고 눈을 비볐다. 보좌관 잇세리온이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순간 그를 로젤린으로 착각했다는 것이 창피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언제쯤 방을 나갔지?

술을 과하게 마셔서 두통이 약간 있는 걸 빼면 나름 숙면을 취했다. 덕분에 오늘은 모처럼 몸이 가벼웠다. 잇세리온이 미리 준비해 놓은 목욕물에는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코 밑까지 깊게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히 풀리자 어젯밤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까무룩 잠들기 전에 그녀가 무어라 말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막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던 엘피디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면에서 걸어오던 리카르디스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를 보고 더없이 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미소는 햇살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엘피디오는 그런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보고 더욱 얼굴을 구겼다. 저게 약을 처먹었나.

“이런,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떨떠름한 엘피디오의 답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날씨가 좋다는 둥, 이델라브힘이 굽어 살피는 좋은 낮이라는 둥, 자신에게 좋은 찻잎이 들어왔는데 선물로 드리겠다는 둥. 엘피디오는 그의 사근사근한 태도, 부드러운 말투에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다가 찻잎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최근 시도했던 회심의 암살이 빗나갔던 것을 상기해냈기 때문이었다.

월장석 성에 심어 놓은 세작의 말로는 새로이 호위 임무를 맡은 기사의 공이라고 했지만, 엘피디오는 믿지 않았다. 고작 호위 기사 한 명에게 들킬 정도로 검은달은 어수룩한 집단이 아니었다. 분명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리카르디스가 알아챘을 것이다. 엘피디오는 언제나 리카르디스의 능력을 깎아내리려 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항상 그의 유능함을 믿었다. 언제나 제 일에 훼방을 놓고 자신만만한 낯으로 저를 쳐다보던 그 오만한 눈동자. 잊히려야 잊힐 수가 없었다.

암살 집단을 지원하는 것에는 많은 수고와 노력, 자금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법 출혈이 컸다. 그만큼 기대도 많이 했는데 이 미꾸라지 같은 것이 또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엘피디오가 황제를 알현함으로써 형국은 다시 한 번 리카르디스에게 불리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저 곱상한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확실하게 드리워졌다. 엘피디오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리 축배를 들 수는 없었다. 상대는 그 리카르디스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도 어떠한 희생을 하고서라도 살아남는. 거머리 같은, 잡초 같은 생명력을 지닌 2황자.

엘피디오는 얼굴을 확 굳히고 리카르디스 곁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어깨가 서로 세게 부딪쳤다. 밀려난 건 엘피디오였다. 그는 붉은 얼굴로 씩씩대다가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걸어서 빠르게 금강석 성을 벗어났다.

리카르디스는 근사한 미소를 얼굴에서 싹 지우고 그와 닿았던 어깨를 툭툭 털어 내었다. 행동과 표정은 퍽 여상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아까의 엘피디오와 비슷해 보였다. 그의 분노는 몇 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수그러들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옆에 줄곧 서 있던 잇세리온 또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감정을 못 숨겨서야 원. 진지하게 대하던 내가 다 창피해지는군.”

“……비위 상하지도 않으십니까?”

리카르디스는 하하 소리 내며 웃었다. 아까 엘피디오에게 웃어 보였던 것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잔뜩 날카로워진 서늘한 얼굴이었다.

“내가 기분 더럽더라도 그놈이 더 기분 나쁘면 돼.”

“항상 느끼고 있지만 전하께서는 성격이…… 참…….”

“성격 참 좋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잡담은 그만하고 들어가지.”

황제의 집무실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안으로 들어갔다. 리카르디스의 방문이 알려지자, 곧 문이 열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 중앙에는 밝은 금발의 황제가 심기가 불편한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설원의 월계수, 영광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얀 밤의 축복을. 어서오너라 리카르디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서류에 눈길을 돌렸다. 몇 개 보이는 단어와 문구를 조합해 보니, 발타 왕국과 인접한 영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서임을 알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검은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황제가 얼굴을 구기고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마녀가 입을 열었다지.”

“예, 저번의 사냥 대회에서 처음 사용된 독입니다. 최근 월장석 성내에서도 사용되려 했지요. 이 서류를 보아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리 하거라.”

리카르디스는 제일 위에 펼쳐져있던 종이를 잡았다. 수십 장 쌓여 있는 서류의 제일 상단에는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사냥 대회가 있었던 넓은 영토 비스타를 다스리는 자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변경백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영토를 방어하는 의무만 있는 타 귀족과 달리, 타국을 먼저 침범할 수 있는 권리까지 지닌 작위였다. 자치적인 군사권을 가지고 있어 다른 백작들보다 힘이 강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위는 대대로 머리가 좋고 호전적인 인물이 물려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2년 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 위를 승계한 그녀는 전대, 선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전쟁광이었다. 여자라고 우습게 보던 이들의 말이 한순간에 쏙 들어갈 정도로 피가 자욱한 행보를 보였다. 마른가시나무 영지를 지키는 수가 많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전투에 대한 감각이 유달리 뛰어난 인물이었다. 군사를 잘게 흩트리고, 합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전술은 마치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많은 전술가들이 그녀를 그렇게 평했다. ‘경계의 학살자’, ‘미친개’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상황을 이끌어내는 이였는데…… 지금 리카르디스가 보고 있는 서류에는 그녀에 대한 인식과는 제법 다른 내용이 서술 되어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사십 명의 인원이 어둠을 틈타 산을 넘어와 사백이 넘는 피해를 내었다. 인간의 힘도, 신의 힘도 소용이 없었다. 검은달은 과거와는 다른 위협을 휘두르고 있으니 부디 황제께서 어린 백성들을 굽어 살피시어 일라베니아의 영광을 세세토록 전하길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 길게 늘여 적혀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영지에게 사백이라는 인원은 사실 그렇게 큰 피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영지뿐만 아니라, 인접한 다른 영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흐름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피곤해 보이는 낯을 연신 쓸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다. 언제까지 묻어 둘 수 있을는지…….”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게 어디 숨겨질 만한 사안이던가. 검은달이 만들어 낸 새로운 독은 어떤 의사의 힘도, 어떤 신관의 힘도 간섭하지 못했다. 사냥 대회 이후로 잠잠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독의 사용도 점차 늘고 있었다. 검은달과 잦은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변경의 영지들은 빠른 시간 안에 높은 치사율을 가진 독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나는 독의 쓰임새와 영향이 확대되기 전에 발타를 지도에서 없애 버리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리카르디스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엘피디오의 아버지가 맞았다. 정말 똑 닮은 부자지간이 아닌가. 검은달의 수뇌부가 발타의 왕실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왕실의 공식 입장은 항상 사실과 달랐다.

검은달이 발타에 주둔한다고는 한들 우리 발타 왕실과는 전혀 관련 없으며, 발타 또한 검은달을 축출해 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 얘기를 믿을 만한 나라는 대륙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로나마 그런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는 아직까지 큰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다. 한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과 달리 나라와 나라의 충돌은 커다란 피해를 낳기 마련이었다. 그랬기에 전쟁은 명분이 중요했다. 발타는 검은달이라는 집단을 왕실과 분리함으로써 명분을 싹 지워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는 명분이고 나발이고 전쟁부터 일으키자는데, 그 생각 없음에 두통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도 아니고 빛의 신을 모시는 신성 제국에서 다른 나라에 먼저 쳐들어가자고? 일라베니아 제국의 백성들조차 기함할 일이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전쟁 일으킬 생각은 아니겠지? 라는 뜻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황제도 그 뜻을 읽은 모양이었다.

“한데 엘피디오가 돌아가는 추이를 좀 더 살펴보자 하더구나.”

엘피디오가 황제보다는 머리가 조금 더 돌아갔나 보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황제는 팔걸이 부분에 손가락을 느릿하게 부딪치며 딱……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둘 사이의 침묵을 일정한 속도로 깨트리고 있었다. 이유 모를 불쾌함이 밀려왔다.

“사절단을 보내자는데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엘피디오 이 개새끼가. 리카르디스는 얼굴을 확 굳혔다. 황궁에 사는 모든 이가 그렇듯이 그 또한 제 감정과 표정을 숨기는 것에 매우 능숙했다. 그 엘피디오에게 조차 사랑스러운 남동생 역할을 해내지 않았던가. 지금의 리카르디스는 곧 수습했다고는 하지만, 제 감정의 파편을 황제에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다행히도 황제는 제 할 말만 늘여놓느라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발타에 사절단이 방문했던 게 2년 전이었던가. 제법 오래되었군. 슬슬 그 놈들을 압박할 때도 되었어…… 더러운 들개 놈들 같으니.”

“……발타와 인접한 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는 이 시점에서 사절단을 보내기엔 위험이 많이 따르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새로이 만들어진 독에 대해 연구도, 완벽한 해독법도 없는 이 상황은 그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돌아가겠지요. 사절단을 보낸다고 한들, 들이는 수고와 위험 비해 소득이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피디오가 왜 아침부터 황제를 찾았나 했더니 하여간에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황제를 부추겨서 자신을 사절단으로 보내 버리려는 것이다. 말이 사절단이지 지금의 상황에서야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하루에도 암살자 서넛을 보내며 죽이고자 간절히 염원했던 상대가 제 영역으로 걸어 들어온다는데……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사냥 대회에서 생환한 지 얼마 되었다고 황제는 또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다. 만약 2황자 리카르디스가 발타에서 죽게 된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전쟁의 명분은 없을 테니까. 사절단으로서 발타에서 무언가를 얻어 와도 그만, 리카르디스의 죽음으로써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생겨도 그만. 엘피디오의 얘기를 수락한 배경에는 그런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걱정이 과하구나, 리카르디스. 내가 누구더냐. 이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대륙을 축복하는 영광의 빛은 눈과 귀가 먼 자들 또한 느끼는 것이다. 고작 독 하나에 수그러들 광휘가 아니다.”

새로운 독으로 인해 상황이 발타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이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황제는 제 권위에 흠집이라도 간 듯 굴었다. 조금 까칠해진 태도와 목소리에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제 말에 토를 다는 꼴을 못 보는 인간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발타의 들개들이 워낙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인 데다, 요즘 들어 더욱 기세가 사나워졌다 보니……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무슨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어르고 달래는 것을 뭐 이리 지극정성으로 해야 하는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 그놈들의 기세가 사나워지기는 했지. 그래서 사절단을 보내려는 것이다. 네가 검은달을 누르는 것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 않느냐. 리카르디스라는 이름이 발타를 압박하기에 아주 효과적일 듯하구나. 제국의 2황자라는 고귀한 신분과 너의 이름 안에 이델라브힘의 영광이 함께할 테니 걱정 말거라.”

한번 만류하려던 것은 이미 실패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뜻을 거스르려는 시도를 두 번은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보이는 황제의 태도는 그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엘피디오가 솜씨 좋게 제 아비를 구워삶은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수많은 죽음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리카르디스는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황제가 허허 웃으며 리카르디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내겠다 공표하는 것은 며칠 뒤가 될 거라 했다. 리카르디스는 알겠노라 대답하고 황제의 방을 떠났다. 리카르디스의 뒤를 따르던 잇세리온이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친 숨소리로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살짝 뜯긴 입술로부터 피 맛이 비릿하게 느껴졌다.

“월장석 성으로 돌아간다.”

백색의 제복을 입은 호위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2황자 리카르디스가 발타로 떠나는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월장석 성은 낮게 가라앉았다. 몇 달 전 사냥 대회에서 수많은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사망했을 때만큼이나 어두운 분위기였다. 단순히 월장석 성의 주인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리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과 검은달. 국경을 두고 나란히 있는 두 세력 간의 분쟁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왔다. 검은달이 발타 왕실의 수족임을 모르는 자는 대륙 어디에도 없는 관계로, 일라베니아와 발타. 두 나라간의 분쟁이라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사절단이라는 책무는 그저 이름만 평화로울 뿐, 단두대에 목을 들이미는 행위나 진배없었다. 심지어 리카르디스는 검은달과 분쟁이 있을 때마다 선두에 서 있었으며, 또한 언제나 승리해 왔다. 발타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한 원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공이 빛나는 만큼이나 단두대의 칼날 또한 번쩍번쩍 빛나고 있으리라.

수많은 하인과 하녀들의 얼굴에 칙칙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가 보면 월장석 성벽에 장례 중이라는 표식의 하얀 천이라도 걸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얀밤 기사들 또한 주인의 처지에 분노함과 동시에 그들 자신의 미래에 깊은 애도를 보냈다. 바람 앞의 촛불보다 아슬아슬하고 보잘 것 없는 목숨. 누군가는 체념했고 누군가는 결의를 다졌다.

12월의 눈 쌓인 숲만큼 고요했던 월장석 성이 잠시간 떠들썩거렸다. 성을 방문한 손님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월장석 성을 향하던 발길을 끊었다. 행여나 그의 눈에 들어 발타로 같이 먼 길을 떠나야 할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누군가는 간사하다고 비난하는 행동이었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들을 이해했다. 자신이라 하더라도 얼씬도 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랜만의 손님이었다. 게다가 풍족한 선물과 함께였다. 발타의 왕자, 하카브가 좋아한다던 일라베니아 명장의 술과 각종 진귀한 보석, 산해진미, 아름다운 예술품이 늘여진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로젤린은 호위 임무를 위해 월장석 성으로 향하다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던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입을 떡 벌리고 산처럼 쌓이는 진귀한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벽부터 로젤린의 습격을 두 차례나 받아서 매우 피곤했지만 그것을 잊을 만큼 놀라워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스쳤다.

“로젤린 경.”

밝은 금발의 남자가 인파 속에 묻혀 있다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리카르디스에 비견할 만큼의 장신이었다. 그의 유순한 인상이 단단한 체격에서 풍기는 위압감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로젤린이 멀뚱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뒤에서 레티시아가 속삭였다.

‘설원의 월계수, 5황자, 디에즈 전하이십니다.’

로젤린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레이몬드로부터 그녀가 기억상실로 인해 지식과 상식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로 고위 귀족과 황족들의 인상착의와 이름, 작위와 직위 등을 다급히 암기해 둔 상태였다. 그들의 독특한 상급 기사를 보필하기 위한 업무의 일환이었다.

로젤린은 검술을 익히는 데에는 빠른 습득 속도를 자랑했으나, 책상에 앉아 하는 모든 작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사가 검을 잘 쓰면 됐지, 사람들의 얼굴이나 직위를 외우는 것이 뭐가 중요한 거지?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도리 없는 두 명의 수습 기사들은, 황족과 고위 귀족은 고사하고 황제의 얼굴도 모를 것이라는 레이몬드의 말에 농담이 과하다며 웃어 넘겼으나…….

이후 곧바로 남자 기사들의 공용 목욕탕에 태연하게 들어가려던 로젤린을 목격해, 웃음기를 얼굴에서 지워야 했었다. 그 아찔한 순간 덕분에 레티시아는 제 상급자의 상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하얀밤 기사단의 상급 기사 로젤린이 설원의 월계수 5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 또한 그녀를 따라 무릎 꿇었다.

“이런. 일어나세요, 경. 오랜만입니다.”

로젤린이 수습 기사 두 명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저랑 5황자 알던 사이입니까?’ 하고 묻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요동치며 흔들렸다. 모…… 모르는데…… 모릅니다…… 그들이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인상착의와 장신구를 보고 인물을 파악해 내는 능력과, 기억을 잃어버린 상급 기사의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은 별개의 것이었으므로. 이번 건은 그들의 권한 밖이었다. 수습 기사라고 해도 그녀와 함께한지 고작 2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로젤린은 다시 5황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봄날의 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많이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했는데, 이리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형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지요? 이번 사절단에도 같이 떠나겠군요.”

“그렇습니다.”

에버하르트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대화가 도무지 이어지질 않았다. 과거 로젤린도 지금의 그녀처럼 말 수가 적다고 듣긴 했으나, 지금은 상대가 황족이다 보니 자칫 무례하다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5황자 디에즈는 그녀의 말투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잘 됐습니다. 친한 이가 몇 없어 걱정했는데. 발타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로젤린 경.”

“……발타로 떠나십니까?”

로젤린이 드물게 되물었다. 그녀는 사절단으로 떠나는 인원 명단 중에 다른 황자들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5황자가 예쁘게 웃어 보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발타의 하카브 왕자와는 만난 적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친분이지만요.”

디에즈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사절단에 뽑힌 귀족들은 자신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온 듯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다녔다. 또는 그들의 가족이 대신 거무죽죽한 낯으로 참담해 하고 있거나. 하지만 눈앞의 남자, 5황자 디에즈의 반응은 그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발타의 전통 음식 중에 어린 양을 향신료와 함께 통째로 삶는 것이 있는데 그게 아주 환상적이라는 둥, 자신이 잘 아는 곳이 있는데 나중에 리카르디스 형님과 같이 가자는 둥. 5년 전 만났을 때는 하카브가 자신보다 키가 컸는데 최근 자신이 급성장해서 이제는 본인이 더 클 거라는 둥. 철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낙관적인 태도였다. 로젤린은 꼬박꼬박 네, 예, 기대됩니다. 네 맛있겠군요. 예. 참 크십니다.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참 발타의 풍습과 요리를 설명하던 디에즈가 눈웃음 지으며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습 기사들을 떨어트리고 따로 얘기를 나누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로젤린은 그의 은근한 신호를 알아들을 만한 눈치를 갖추지 못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만 5황자의 눈짓을 알아듣고 초조하게 손바닥의 땀을 제복에 닦았다.

“…….”

몇 초가 고요히 흐르며 그들 사이에 침묵이 늘어졌다. 디에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이 입을 딱 다물고 있는 행동을 보고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안절부절.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에버하르트를 뒤로하고, 레티시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로젤린을 확 떠밀었다. 무례하다고 혼나는 건, 혼나는 거고 지금은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제 상급 기사를 보필해야만 했다.

로젤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밀려나오자 디에즈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로젤린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가 움찔했다. 레티시아가 눈에 불을 켜고 격렬하게 디에즈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녀의 저의를 대충 깨달은 듯 했다. “왜 5황자 전하에게 손가락질을 합니까?” 라는 질문 없이 순순히 디에즈를 따라갔다. 수습 기사 두 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쉴 수 있었다.

둘은 제법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었다. 로젤린은 계속 월장석 성을 돌아봤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행동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어 냈다.

“잠깐이면 됩니다.”

“예.”

‘잠깐’이라는 기간이 정해졌음에도 디에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로젤린도 차분하게 그를 마주했다.

“걱정했습니다,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 경’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 남자와 로젤린은 친근한 사이였던 건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콧잔등 위로 꽃잎이 내려앉았다. 로젤린이 간지러움에 코를 찡그리자 디에즈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소 지은 남자가 로젤린의 얼굴에서 꽃잎을 살포시 떼어 냈다. 디에즈의 손끝에 달려있던 꽃잎은 불어오는 바람에 정처 없이 날아갔다.

로젤린은 바람을 좇던 눈동자를 굴려 그를 올려보았다. 스스럼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 남자와 로젤린은 친했나보다. 생각보다도, 훨씬.

“감사합니다.”

그녀의 변하지 않는 딱딱한 대답에 디에즈는 기운 없는 미소를 띠었다.

“정말이었나 보군요. 그대의 머리에 조금, 아, 실례. 기억에 이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저는 기억합니까?”

로젤린이 고개를 저었다. 디에즈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웃었다. 기억상실이란 병은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며 도리어 그녀를 위로했다.

디에즈는 사건 이후 그녀에게 일어난 일 하나하나를 알고 싶은 듯,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로젤린은 ‘네.’와 ‘아니오.’를 적극 활용하며 열심히 답했다. 디에즈는 그녀의 무성의해 보이는 대답에도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해소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레이몬드에게 들었습니다. 정말 이만하길 다행이군요. 이델라브힘께서 로젤린을 도우셨나 봅니다.”

“네.”

“전투가 막 일어났을 때, 제가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안 보여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막사와 그렇게 멀리 떨어진 절벽에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발견되었던 절벽이 막사와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까?”

네, 아니오, 괜찮습니다. 세 가지 답변을 돌려 가면서 사용하던 로젤린의 새로운 대답이었다. 디에즈는 그녀의 반응에 들뜬 듯 보였다.

“네, 정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찾는 게 좀 더 늦었다고 하더군요.”

“그랬습니까.”

“도움이 못되어 미안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줄곧 바빠서 한번을 찾아오지 못했는데, 건강한 모습을 봐서…… 음, 기쁩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로젤린.”

디에즈의 눈이 둥글게 휘어지며 곡선을 그렸다. 디에즈는 그녀가 봐 온 사람들 중에 가장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소를 따라 로젤린도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짧은 대답에도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디에즈는 곧 로젤린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까의 마지막 안부 인사가 그의 진짜 목적인 듯 했다.

로젤린은 지금까지 줄곧 가지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레이몬드에게도 들었던 적 있었다. 암살 부대가 새벽에 막 습격했을 당시에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노라고,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보지 못했다고. 그때는 단순히 인원이 많아서 확인하지 못했던 건가? 하고 두 사람 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었다. 하지만 오늘 5황자의 말로써 그 전투 당시, 또는 이전부터 로젤린이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 로젤린의 몸을 구성하자마자 몸을 치유하는 것에 많은 힘을 썼다. 추락했을 당시에 발생했으리라 유추되는, 부러진 뼈들. 그로 인해 압박되고 손상된 장기들. 가장 큰 치명상이 그것이었기에 살갗이 찢어지거나, 벌어진 외부적인 상처는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자니 등에 새겨진 상처도 범상치 않았다. 살가죽은 물론이거니와 근육까지 벌어져 뼈가 다 드러날 정도였으니. 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상처 하나로 충분히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암살 부대의 습격 당시 그녀의 부재. 막사와는 한참 먼 곳에 위치한 그때의 절벽. 등 뒤에 깊게 찢겨 있던 상처. 몇 가지 사실이 얼기설기 맞춰지며 여태껏 로젤린이 알고 있던 사실을 비틀었다.

어쩌면 그녀는 암살 부대의 습격 이전에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 * *

“칼릭스.”

칼릭스는 멍한 눈길로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이 봄바람만큼 부드러웠다. 안 본 사이 그녀는 더욱더 ‘로젤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젤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칼릭스를 와락 껴안았다. 그는 흠칫 몸을 떨다 곧 그녀를 마주 안았다. 뭔가 좀 쑥스러웠지만 손은 어느새 제 누이의 등을 도닥이고 있었다. 칼릭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누님.”

“응.”

햇빛을 받는 로젤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가면같이 온도 없는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안본사이 많이 사회화된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로젤린에게 슈크림이 들어간 상자를 건넸다. 로젤린은 상자를 열어 보지도 않고 활짝 웃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내용물을 파악한 듯 했다. 로젤린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면 단연코 고기라 말할 수 있으나, 디저트 계열 또한 뺄 수 없었다. 처음 생크림을 먹은 로젤린이 눈을 부릅뜨고서 몸을 뻣뻣하게 굳히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칼릭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로젤린은 냄새를 킁킁 맡으며 기뻐했다. 칼릭스는 제 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상자를 열어 슈크림 하나를 칼릭스에게 건넸다. 그는 제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슈크림과 누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설마 나에게 주는 건가? 음식을 나눠먹는 수준까지 도달했단 말입니까 누님? 칼릭스는 제 지난날 폭풍 같던 고난의 나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찔끔 흘릴 뻔 했다. 칼릭스가 감격스러움에 그녀를 아련하게 쳐다보자 로젤린이 조금 시무룩한 기색을 띄웠다.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가질 찰나, 로젤린이 박스에서 슈크림을 하나 더 꺼내어 칼릭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감격의 눈빛을 하나 더 달라는 재촉으로 봤던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슈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로젤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제과점이라더니, 슈크림을 음미하는 그녀의 눈이 잔뜩 가늘어져 있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워보였다.

“그런데 누님. 지금은 황자 전하를 호위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응.”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계셔도 됩니까?”

“응. 전하가 허락했어.”

로젤린이 말을 덧붙였다.

“죽기 전에 가족은 한번 봐야 하지 않겠냐하시던데.”

“……여전하시군요,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도…….”

리카르디스가 발타로 떠나는 사절단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칼릭스는 먼 황성까지 와야 했다. 2황자의 위험에는 당연히 제 누이의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물론, 칼릭스의 예상과 한 치도 다름없이 로젤린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복잡한 마음이 한층 더 커졌다. 누이를 잃는 심정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조각난 마음을 이제야 허술하게라도 이어 붙였건만, 또다시 그녀를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칼릭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직접적으로 황자 곁을 지켜야만 하는 상급 기사이니만큼 큰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하필이면 승급하자마자 발타로 가야하다니. 칼릭스는 목소리를 낮췄다.

“발타를 통치하는 1왕자 하카브는 분명 검은달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발타의 최고 통치자가 검은달이니, 발타 왕국 그 자체가 2황자 전하의 적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응.”

“……위험…… 하실 겁니다. 폐쇄적인 기질을 가진 곳이라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새로 합성해 낸 마독 이외의 다른 위험 요소들도 많을 겁니다. 정말 조심하셔야,”

“잠깐.”

로젤린은 한쪽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어 내었다. 그녀는 야생동물같이 고개를 휙 돌리며 높게 세워진 벽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곧 능숙하게 벽을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칼릭스의 귓가에 “으아악!” “꺄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사람을 덮친 건가! 다행히도 아직까지 제 누이가 지나가는 인간을 덮친 적이 없긴 하지만 칼릭스는 잘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야생성이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그 야생성은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울퉁불퉁 구겨진 공 같은 것이었다. 왼쪽으로 굴렸더니 오른쪽으로 튀어 오르고,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아래쪽으로 굴러가 버리고, 화가 나서 버리면 골 안으로 들어가 점수를 얻게 되는 그 미묘한 불규칙성.

그러므로 누이가 무언가를 뺏어 먹기 위해 누군가를 덮쳤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도리어 착실히 사회화가 되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누이의 모습이 낯설 뿐이었다. 울퉁불퉁 공 같은 그녀를 알게 된지는 고작 몇 달에 불과했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스무 몇 해를 보아 온 로젤린보다도 더 강렬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깊게 새겨졌다. 이 안정적인 불규칙성.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릭스는 로젤린을 따라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녀가 오를 때에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벽을 치는 소리가 났었다. 칼릭스는 도움닫기부터 땅이 파일정도로 깊고, 무겁게, 그리고 쿵쿵 두드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칼릭스가 높은 담벼락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바라볼 쯤엔, 로젤린이 한 남자를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죽이면 안 됩니다!”라던가 “다른 사람의 음식을 뺏어 먹으면 안 됩니다!”라고 급히 말하려 했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는 딱히 살의가 없어 보였고 그들의 손에도 먹을 것이 들려 있지 않았다. 칼릭스는 담 위에서 잠자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군청색 머리카락을 묶은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로젤린의 밑에 깔려있었다. 또한 적갈색 머리의 여자는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아 도망가던 여자의 앞에 탁 착지했다.

도망가던 여자, 레티시아는 고요하게 강림한 로젤린의 바지 자락을 보고 경기했다.

“히익!”

로젤린이 쭈그려 앉아 레티시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또 죽었습니다.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흐아…….”

“하아아…….”

로젤린의 선고에 두 남녀가 풀썩 바닥에 누웠다. 그들의 등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급박했던 순간의 심정을 대변했다.

“벽을 타고 오르는 소리도 못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못 들었습니다…….”

“심각하군요, 레티시아.”

“작게 듣긴 했는데, 그냥 벽을 콩콩 치는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벽을 디디며 올라오니 소리의 위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벽의 상단 부분에서 소리가 나면 당연히 경계를 했어야 합니다, 에버하르트.”

칼릭스는 그 알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제 누이의 깔끔한 존댓말에 감격했다. 영명 하십니다 누님……!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억울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모의로 몇십 번씩 죽어가며 습격당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바람을 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던 것이 어제였는데, 바로 오늘. 그녀의 발소리가 한층 더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그녀의 전력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로젤린의 습격을 못 막을 시, 혹독한 체력 단련 10세트를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체력 단련을 할 때마다 그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적이 없었기에, 한번은 에버하르트가 ‘단련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혹시 저희가 거짓말을 한다던가…….’ 하는 소심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의 물음에 로젤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 한번 해 보시죠]

라는 대답을 했다. 에버하르트는 순간 그녀가 화난 어머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대놓고 널 죽이겠다고 말하는 암살자보다 훨씬 두려웠다.

로젤린은 객관적으로 훌륭한 상급자였다. 잘 챙겨 주고, 잘 가르쳐 주고. 그럼에도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그녀를 좀 어려워했다. 단순히 그녀가 직속상관이라거나,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신비로운. 불가사의한.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얼추 그런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껄끄러워 하지 않던가. 그들 또한 그랬다. 로젤린의 유능한 검 실력과 기묘한 분위기 사이에서 그녀를 존경도 했다가, 조금 어려워도 했다가 하며 마구 헤매었다.

에버하르트는 흙바닥에 볼을 댄 채, 우뚝 서 있는 로젤린을 쳐다봤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녀가 에버하르트에게 눈을 돌렸다. 시선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눈이 딱 부딪치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로젤린은 그의 제복 목덜미 부분을 잡아 불쑥 일으켰다. 어미고양이가 새끼고양이의 목을 물고 옮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비슷한 방식으로 레티시아도 일으켰다. 공포에 후들거리던 심장과 다리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듯 했다. 로젤린이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주었다. 둘은 경직된 자세로 상급자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로젤린은 에버하르트의 엉덩이 부분에 묻어 있는 먼지들도 털어 내었다. 퍽, 퍽. 거친 손길이 거침없었다. 유독 엉덩이 부분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 로젤린의 손은 오랫동안 그 위에 머물렀다. 에버하르트는 침묵하며 제 상급자를 쳐다보았고 레티시아는 고개를 돌려 로젤린의 허물을 보는 것을 회피했다. 그리고 칼릭스는 담벼락 위에서 한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얼마간 겪지 못했던 두통의 재래였다.

에버하르트는 경직된 낯 안쪽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녀를 한 겹 감싸고 있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은 이렇게 미묘한 상냥함으로 중화되고는 했다. 그 때문인지, 친한 수습 기사들이 로젤린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은 “어…… 어…… 좋은 분이야?”하는 어색한 대답을 했던 지도 모른다. 레티시아는 “아! 로젤린 경 정말 좋은 분이야! 좋은 분인데…….”라는 찝찝함이 다소 묻어 있는 평가를 했지만, 뒷말을 더 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어쨌든 간에 둘 다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냈었다.

그들의 미묘하지만 좋은 사람인 상급자가 수습생들의 몸단장을 모두 끝냈다.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로젤린에게 경례 후 연무장으로 떠났다. 모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릭스가 담벼락에서 내려왔다. 그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님. 다른 사람의, 특히 이성…… 그러니까 남자의 신체부위를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오랜만의 “안 됩니다.”였다. 칼릭스의 타박하는 말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줬다. 인간이 된 ‘그것’ 이 최초로 뿌리를 내린 붉은수레바퀴 성. 그곳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안 만졌는데.”

만지지 않았다. 확실히 그 먼지를 털어 내는 매서운 손길은 ‘만졌다’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구태여 따지자면 때렸다? 쳤다? 에 가까웠다. 칼릭스는 그것을 깨닫고 “함부로 접촉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바꿨다. “특히 엉덩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낯부끄러워서 신체부위를 언급하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정확하게 이해를 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나, 어찌되었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칼릭스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둘은 너른 화단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눴다. 한 달여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누이는 한 시간만 눈을 떼어도 이런저런 사고를 쳤다. 한 달이 지났으니 정말 무수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끊임없이 조잘조잘 얘기했다. 색색으로 빛나는 화원의 느슨하고 화사한 공기가 누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예전의 과묵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랐다. 언어라던가, 행동이라던가.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도 주위의 공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딱 로젤린이었다. 흰색의 나비들이 그녀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로젤린은 머리에 꽃잎이 붙던, 나비가 앉던 간에 끊임없이 얘기했다. 듣기만 해도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도 똑같이 쓰여 있던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열심히 호응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레이몬드가 쿠키도 주고, 마카롱도 주고, 하급 기사랑 대련하고, 팼고, 이겼다. 병문안도 갔다. 리카르디스 전하를 만날 때는 심장이 막 뛰었다.

그게 뭐였을까. 심장이 왜 그렇게 쿵쿵한 걸까. 로젤린이 차분하게 물었다. 칼릭스는 한층 날이 선 뚱한 표정으로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성의 없는 답변이었다. 그리고는 “저도 리카르디스 전하를 보면 심장이 쿵쿵하더군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거짓말도 덧붙였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암살자 몇을 때려잡았다는 얘기까지 도달했다. 칼릭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사나워진 기세에 비해 목소리는 더욱 조용해졌다. 칼릭스의 얼굴이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암살자요?”

“응. 내가 다 잡았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껏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참새를 잡아 온 붉은수레바퀴 성의 고양이같이 가슴을 쭉 피고서.

“그건 왜 편지에 안 쓰셨습니까?”

“썼는데…….”

걸렸다. 월장석 성은 인간뿐 아니라 물품과 서류 따위에도 엄격한 경비가 적용되었다.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편지는 내용까지 전부 확인한 후 들어오고 나갔다.

로젤린의 편지도 당연히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월장석 성 내부의 사정, 심지어는 2황자의 안위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몰수였다. 암살자 둘을 때려잡았다는 편지의 내용 때문에 로젤린은 2황자의 비서인 잇세리온에게 까지 불려가 혼났다.

안 그래도 1황자파인 붉은수레바퀴 가문이라 주시하고 있었건만, 이런 내부 사정까지 제 집안에 흘리려고 해? 내 이 기사를 요절을 내 버리고 말리라! 하고 마음먹고 그녀를 불렀지만…….

[이런 내용을 쓰시면 곤란합니다, 로젤린 경.]

[어떤 내용을 말하시는 겁니까.]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암살자라는 단어가 있군요. 문제를 모르시겠습니까?]

잇세리온의 삐딱한 말에 로젤린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럼 암살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쓰면 보내도 됩니까.”라고 되물었다. 잇세리온은 입을 합 다물었다. 그때 잇세리온의 눈빛은 여름에 겨울옷을 꼭꼭 껴입은 사람을 보는 것과 흡사했다.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지? 미쳤나? 적당한 의문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회수한 로젤린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8살 수준의 어휘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가 철자도 조금씩 틀리고, 필체도 완전 어린아이 같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혹시 근 십여 년 간의 기억이 다 날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잇세리온의 화는 로젤린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인해 누그러들다 못해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총기가 넘치던 이였는데…… 잇세리온은 연민의 감정을 연보랏빛 눈동자에 한가득 담고는,

[안 됩니다.]

라고 했다. 연민이고 뭐고 간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후 로젤린은 암살자를 ‘검은 옷을 입은 인간’, ‘전하를 공격하는 사람’, ‘독을 들고 다니는 남자’ 등 다양하게 표현하며 잇세리온에게 번번이 불려 갔고, 지금은 대충 어떤 내용이 안 되는지 맥락을 파악하게 되었다.

칼릭스는 흐음 하고 목 안쪽을 울렸다. 확실히. 황자의 안위와 관련 있는 중요한 내용을 외부로 반출할 수 있을 리 없다. 제 누이만 걱정하다 보니 그런 기본을 망각했던 것이다.

편지로 얘기하지 못했던 수많은 그녀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로젤린은 왼손을 들면서 “이게 나야”라고 하고, 오른손을 들면서 “이건 암살자.”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왼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오른손을 제압했다. 이렇게, 이렇게 잡은 거야. 하고 2황자를 호위하며 잡았던 수많은 암살자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금의 그녀에게야 간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은 은밀하고 강하기로 유명했다. 예전의 누이라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사고에서 정말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 성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칼릭스가 먼 황성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두시라. 힘들고 모진 시련만 가득한 그 길을 걷는 것을 그만두시라, 그 말만을 전하기 위해 왔다. 베이고 다치고 죽는 것이 기사의 숙명이라지만 가족으로서 그 모든 일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지금의 ‘로젤린’이 진정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제 누이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나무만큼 높게 쌓아져 있는 담을 소리 없이 올라갔다. 악의의 냄새를 맡고, 타인의 얼굴거죽을 뒤집어 쓴 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뜻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것이 바위이건 강철이건 간에 그 얇은 검으로도 베어 낼 수 있었다.

로젤린이 그녀의 수습 기사들을 덮치는 모습에서, 칼릭스의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깨졌다. 떨어져 있는 사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면 그녀는 강했다. 맨손으로 성인 남자의 목을 비틀어 놓을 만큼. 그녀를 걱정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가 ‘로젤린’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로젤린이 제 누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누님.”

로젤린의 왼손은 여전히 오른손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왼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닿아오는 따듯한 온기에 로젤린이 그를 쳐다보았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누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로젤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철과일이 들어간 타르트나 케이크도 좋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칼릭스도 무뚝뚝한 낯을 무너뜨려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착한 아이구나, 칼.”

신나서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드는 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독하게 쓰리기도 하면서,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하는 그리운 울림이었다.

* * *

헉, 헉, 헉!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달리는 중에도 몸에서 흐르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이 아니더라도 상처의 깊이를 짐작 할 수 있을 만큼 진했다.

‘…….’

그자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비가 내려 망토를 입고 있었음에 감사했다. 어느 기사단 할 것 없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밋밋한 무늬의 망토였다. 그것만으로는 누구인지 판별하지 못할 것이다. 멀리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으며 핏기가 가셨다.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막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살고자 하얀밤으로 돌아간다면, 그가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알려야 했다. 알려야만 하는데! 생각해야 해. 그를 지킬 방법을!

“!”

달리던 도중 순식간에 발밑이 꺼졌다. 어두운 밤이라 풀숲에 가려진 절벽을 보지 못한 탓이다.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겨우 삼켜 내었다. 피 맛이 진득하게 입안에 달라붙었다. 깜깜한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것도 찰나.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프다고 인식하기 전부터 온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세게 부딪힌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묵직한 죽음이 온 몸을 짓눌러 왔다. 소리와 색이 점차 사라졌다.

“아…….”

이내 시야가 점멸했다.

“!”

어둠에 물든 나뭇잎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로젤린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녁의 찬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몸이 으스러지는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금 앉아 있는 곳이 그 꿈의 환경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일까. 피비린내 대신 느껴지는 산뜻한 밤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한 밤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리카르디스의 방, 발코니 앞의 나무 위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중이었다. 며칠 몇 주 동안 신경을 곤두세워 호위 했던 탓에 깜빡 선잠에 들었던 듯 했다.

리카르디스의 방을 바라보니 창을 통해 촛불이 아른거렸다. 초의 길이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흐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로젤린은 긴 꿈을 꾸었다.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꿈속의 ‘나’는 도망쳤다.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이미 상처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한계까지 달음박질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젖은 흙, 스치는 풀과 나무의 냄새가 아주 뚜렷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눈앞에 그려진 풍경 또한 현실과 다름이 없었다. 마치 실제로 겪어 본 것만 같은 생생함이었다.

‘그것’은 깨달았다.

‘로젤린…….’

‘로젤린’의 기억이었다. 쫓아오는 자는 보지 못했지만 도망치던 ‘내’가 몸서리치며 두려워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검은달의 암살자? 아니다. 암살자였다면 로젤린은 도망치기보다 검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기사였던 그녀의 본분이기도 했으니.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외에 그녀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스쳐 지나가는 나뭇가지에 하나둘 생기는 얕은 생채기들, 비구름에 가려진 달. 어둠이 내려앉은, 괴물의 아가리 안쪽 같이 깊은 숲. 나뭇가지를 우악스럽게 밟고 꺾으며 무섭게 쫓아오는 정체 모를 자의 발소리.

대체 누구였기에.

대체 무엇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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