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197/220)

3

어둠의 신 크레안 티다니온을 몰아내고 세상에 빛을 가지고 온 이델라브힘의 나라.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대륙 구석구석에 널리 퍼진 위명에 걸맞은 크기였다.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백색의 성은, 아무리 멀리 내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그리고 아주 높게 펼쳐져 있었다.

로젤린은 마차의 창을 통해 아름다운 성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감상했다. 하얗다. 많다. 일정한 규칙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높은 성들은 자신이 살았던 숲과는 매우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아름다운 이곳은 [좋다, 싫다] 둘 중에 [싫다] 쪽에 가까웠다. 그녀의 본능이 울렁거렸다.

항상 로젤린의 곁을 지키던 칼릭스는 지금 그녀의 곁에 없었다. 수도 티가드로 떠난 것은 오직 로젤린뿐이었다. 그는 백작 대리로써 붉은수레바퀴령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칼릭스의 끝없는 잔소리와 걱정이 덕지덕지 묻은 시선의 기억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 됩니다.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이건 더 안 됩니다. 그건 정말로 하면 큰일 납니다, 안 됩니다. 뭘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게 많은지. 인간들은 고생을 사서 하는 종족이었다.

“로젤린!”

마차는 황성의 문을 지나고도 한참을 달렸다. 로젤린은 내리자마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몬드 경.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나한테는 편하게 해도 돼, 로젤린.”

레이몬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누군가의 노력을 엿봤다.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레이몬드는 마차에서 그녀의 짐을 같이 내렸다. 레이몬드 휘하의 수습 기사들도 그녀의 짐을 들고 기숙사로 날랐다. 깔끔하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아직 정식 서임을 받지 않았지만, 상급 기사로 승급했기 때문에 넓고 좋은 방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 넓은 곳에 채워 넣을 짐은 많지 않았다. 순백의 제복 몇 벌, 검 몇 자루, 평상복과 생활용품들. 그녀가 대충 짐을 던져 놓자 레이몬드가 차곡차곡 꺼내어 정리했다.

“평소보다 더 살벌한걸. 어째 드레스 한 벌이 없어.”

“칼릭스가 내 옷 다 유행 지났다고 수도 가서 사 입으랬어. 레이몬드보고 같이 가 달라고 하래.”

그 자식 나한테 다 떠넘기고 있잖아? 레이몬드는 속으로 칼릭스를 조금 욕했다. 뭐 그래도 제 동생 같은 아이를 위해서니, 휴일 정도는 반납하고 드레스 샵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젤린은 제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레이몬드는 정리하던 중, 제복 한 벌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자, 이거 받아.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나와. 아니! 나 나가고 벗어!”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에 로젤린이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레이몬드가 황급하게 눈을 가렸다. 제복을 입고 나온 로젤린은 한동안 레이몬드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옷 벗고 막 그러면 안 돼 알겠어? 어? 빨리 이 오라버니 앞에서 약속해. 새끼손가락. 도장.

로젤린은 한동안 계속된 잔소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꼬박꼬박 알겠다고 대답했다. 기숙사 복도는 넓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쭉 길을 걸으며 그녀에게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단장실에 가서 복귀했다고 알리는 게 우선이야. 서임식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기사단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좀 봐야 할 것 같고…… 아, 그리고 내일 상급 기사로 정식 임명된 후에는 수습 기사 몇 명이 붙을 거야. 최대 다섯 명까지. 네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수습 기사들이 지원하면 그중에서 뽑으면 돼. 자잘한 업무나 심부름 정도는 시킬 수 있는데, 시간 내서 돌봐 줘야 하는 게 좀 힘들긴 하지.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뽑아. 예식 순서랑 언약문은 외웠어?”

“응.”

“대단한걸, 잘했어. 그리고 로젤린 너…… 기억 잃은 건…… 음…… 어떻게 하기로 했어? 말해도 된대?”

“응.”

칼릭스는 고뇌했다. 말하자니 로젤린에게 불이익이 갈 것 같고, 말을 안 하자니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납득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행동이 다듬어졌다고는 하나, 로젤린의 예전 모습을 알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눈치챌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통제를 벗어나 이상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기 전에 미리 다른 수를 차단해야 했다.

로젤린의 병명은 기억상실. 하지만 기사단 업무를 보는 것에 지장은 없을 것이며, 기억을 잃었음에도 남아 있는 2황자에 대한 충심으로 기사단에 복귀하다. 그것이 로젤린의 이야기였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안내를 받아 단장실에 도착했다. 문 앞에 수습 기사 두 명이 서 있다가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고 문을 열었다. 로젤린은 탁자에서 서류를 살피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 깊게 패인 주름. 관록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이동했다. 레이몬드와 로젤린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가볍게 쥐고 손등이 보이도록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에 막 복귀했습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큰뿔산양 레이몬드.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기사단장, 스타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먹을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몸은 좀 어떤가, 로젤린 경.”

레이몬드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로젤린은 양손을 등허리에서 맞잡았다.

“괜찮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다행이야. 앞으로도 그 운을 전하를 위해 써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이번 상급 기사로 승급한 것 축하하네. 경이 부지런히 노력한 덕이지.”

“감사합니다.”

“임명식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는가?”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칼같이 오고가는 그들의 대화를 주시하다가 큼 흠, 목을 풀고 끼어들었다. 원래 말이 긴 편이 아님을 알더라도, 지금의 로젤린은 기사단장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짧게 끊어지는 말들이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장님.”

“말해 보게.”

“……실은, 로젤린 경의 몸은 다행스럽게도 완벽하게 회복되었습니다만…… 그…… 마음이 아직 조금 아픈지라…….”

스타스는 의문이 가득한 낯빛으로 레이몬드를 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 부단장 부관은?

“그게 무슨 소리지 레이몬드 경? 마음이 아프다니. 물론 심정은 이해하네. 나 또한 그대들처럼 동료를 잃었으니. 그러나 그 슬픔과 분노를 딛고 일어서는 게 우리들의 일이야.”

“…….”

너무 돌려 말했나…… 레이몬드는 입가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한순간에 지웠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로젤린 경의 기억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기억상실이라고 합니다.”

“……?”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는 기사단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잔뜩 올라왔다. 아주 희귀한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기억이 소실되었음에도 2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하얀밤의 맹세는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식의 습득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그녀가 임무를 진행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대로 복귀 명령을 진행했습니다.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서도 있습니다.”

스타스는 레이몬드에게서 소견서를 받아, 찬찬히 읽어 내렸다. 다른 내용은 다 흐릿한데 [기억상실] 그 단어만 아주 생생하고 뚜렷했다.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짧은 대답들이 이것으로부터 기인했던 건가.

그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서 소견서를 한번 그리고 로젤린을 한번. 계속 번갈아 쳐다봤다. 뭔가 1황자파의 계략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봤으나, 그녀의 올곧고 일관된 태도는 그 누가 보아도 2황자에게 진실 된 사람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1황자파의 붉은수레바퀴 가문이라는 그 출신만 아니었더라도 더 아꼈을 것이다.

검은 머리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걸 빤히 들으면서도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조금은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의 로젤린은 관대하고 담대했지만 이런 거짓말로 제 잇속을 챙기는 능수능란한 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성품을 잘 아는 스타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허황된 보고가 한없이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스타스는 얼굴에 복잡한 심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힘겹게 열었다.

“……몸은…… 좀 어떤가, 로젤린 경.”

아까와 같은 물음이었지만, 담긴 뜻은 조금 달랐다. 로젤린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똑바로 스타스를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타스는 조금 입가를 달싹이며 망설이다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레이몬드는 단장실에 남아 잠시간 그와 더 얘기를 나누었다.

단장실 밖에 서 있던 두 명의 수습 기사들이 그녀의 얼굴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얀밤 기사단 내에서 유명인사였다. 1황자를 비호하는 가문의 장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자신을 향한 여러 감정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칼릭스에게 미리 들어서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사단장이라는 자도 마찬가지 일 텐데.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으로도 그의 걱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레이몬드와 스타스가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문 밖에 있었지만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무엇의 세포를 조금 빌려 왔던 덕이었다.

“……로젤린 경이…….”

“그렇다면…….”

로젤린이 떠난 후에도 기사단장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질려할 정도였다. 로젤린은 레이몬드를 기다리며 벽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안타깝다, 로젤린. 검은 머리의 인간. 그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 *

로젤린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옆에서 레이몬드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여기저기서 찔러 대는 시선을 느꼈다. 지나가는 인간들 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부러 멀리서부터 찾아와서 제 얼굴과 생사를 확인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로젤린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것’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물들은 수년의, 수백의 시간과 몇 세대를 거쳐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하며 때로는 도태되기도 한다. 근처에 있는 생물을 흉내 내어 무리에 섞이고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했다. ‘그것’의 의태 능력은 이러한 환경에서 발달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집중되고 있는 이 순간은 그녀를 초조한 기분으로 몰아넣는 최적의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건가? 마수의 모습도 아니고, 눈이 하나 없는 것도 아니고, 팔이 한 짝 어떻게 된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형태인데? 혹시 나도 모르게 의태가 풀렸나? 그녀는 제 팔다리를 확인한 후, 제 등을 보기 위해 낑낑거렸다.

“뭐해 로젤린?”

“나 어디 이상해?”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레이몬드는 뱅글뱅글 도는 그녀의 모습을 쭉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네가 좋은 아이기는 하지만 로젤린. 그렇다고 해도 그게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해줄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상해.”

“좀 이상하고 어렵지? 인간관계가 원래 그래.”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에스터 백작. 1황자를 비호하며 전선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 백작위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자. 한마디로 일라베니아에서도 제법 괜찮은 입김과 힘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 가문의 딸이 어느 날 2황자의 기사단에 들어오더니 빠른 시간 안에 수습 기간을 마치고 하급 기사로 승급했다. 기사단장은 그녀를 조용히 지켜볼지언정 차별하거나 저어할 사람이 아니었고, 부단장은 다른 세력의 자식임에도 2황자를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갸륵하게 여기며 그녀를 몹시 아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다른 기사들이 보기에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니었음이 문제였다. 어린 주제에. 여자 주제에, 1황자 파 주제에, 그다지 실력도 좋지 않으면서! 주제도 수치도 모르는 자. 그들에게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냥 대회에서의 전투로 시체조차 소실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로젤린을 싫어하는 이들 또한 그때만큼은 애도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로젤린은 살아 돌아왔다. 그래도 한솥밥 먹은 사람으로서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그 소식이 싫지만은 않았다. 한데 승급이란다. 상급 기사로 임명받는단다. 그녀의 적은 소리 없이 불어났다. 황자 전하를 지키고자 목숨 바친 이들의 자리를 꿰차기엔 한없이 부족한 인물이라고 여겼기에. 심지어는 추모식 때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제 영지에 박혀서 놀다가, 서임식때 나 슬그머니 기어 나오다니. 어쩌면 저렇게까지 간악할 수 있을까.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었다.

상급 기사들은 자격과 능력이 모자란 기사가 굴러 들어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하급 기사들은 제 자리를 뺏긴 것 같아 분노했으며, 수습 기사들은 현재 로젤린의 직위가 그녀의 가문과 권력으로 얻어 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젤린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빛들은 그런 감정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집요하게 질척거리며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열렬한 구애의 눈빛보다 더 진했다.

레이몬드는 눈에 모를 세우고 주위를 쭉 둘러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하급 기사들이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축하는 못해 줄망정 뒤에서 수군거리고나 있는 작태를 보노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칼깨나 쓴다고 하는 어린 엘리트의 집단이다 보니 자존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기사도를 백날 배우고 외우면 뭘 하나. 그것은 의미 없이 어디론가 모두 흘러가 버린 것 같은데.

“로젤린.”

“응.”

“하나 말해 둘게 있는데…….”

“말해.”

“사실…… 너…… 친구…… 나밖에 없다……?”

그녀는 눈썹 한쪽을 들고 그를 올려봤다. 퍽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나 친구 많을 줄 알았는데.”

칼릭스도, 하녀들도, 레이몬드도, 기사단장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로젤린을 좋아하는 게 빤히 보였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거울로 로젤린이라는 인간을 볼 때면 풍성한 까만 머리털엔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데다 눈 색은 풀잎 같아 예쁘다고 생각했다. 살이 없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키가 훤칠하니 크고 근육의 질도 좋으니까 튼튼하고 멋져보였는데…… 인간들은 외적인 부분에 많이 좌우된다더니 그것도 다가 아니었나?

그녀의 또랑또랑한 표정을 보며 레이몬드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로젤린의 곁에 있어야만 했을 가상의 친구를 송두리째 뺏어 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찔끔 나온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걱정 마. 이 오라버니가 일당백의 친구니까!”

레이몬드는 제 머리를 그녀의 검은 머리에 마구 비볐다. 두피가 당겨서 조금 아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둘은 사이좋게 기숙사에 딸린 식당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걸 잠깐 잊을 정도로, 식사는 맛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 먼저 편지지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젤린은 제 동생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고 했다. 성은 하얀색이었는데 자신을 마중 나온 레이몬드가 있었고 기사단장도 만났다. 사람들이 쳐다봐서 불쾌했지만 때리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난 예쁜데 친구가 별로 없다고 한다. 밥은 맛있었다. 에스터의 밤과 같이 티가드의 밤 또한 달과 별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로젤린은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해 끝까지 쓰지 못하고 잠들었다. 책상에서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아침까지 깊은 잠을 잤다. 꿈에 로젤린이 나온 것 같았다. 널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더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능숙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었더니 로젤린은 그때처럼 미소 지으며 원래 그런 거라 이야기했다.

* * *

로젤린은 눈을 떴다. 복도에서 바지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늘을 보니 아침에 가까운 새벽의 색이었다. 오늘은 하얀밤 기사단의 서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책상에서 일어나 거울을 확인했다. 편지지로부터 새어 나온 잉크가 볼에 몇 개의 글자를 남기고 있었다.

씻은 후 제복을 갈아입고서 머리를 묶으니,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노크했다. 로젤린은 감각을 곤두세워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당백의 친구 레이몬드였다. 그녀는 방긋 웃고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야 로젤린.”

“좋은 아침. 레이몬드.”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의지할 수 있는 혈육과 집마저 떠나왔다.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그녀는 숙면을 취한 듯 보였다. 하얀 피부에 만질만질하게 윤기가 돌았다.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에도 이렇게까지 적응력이 좋았나? 애가 죽다 살아나더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보다.

레이몬드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갔다. 그녀는 서임식이 진행되는 넓은 제단을 보았다. 흰 돌이 크게 원을 그리고 있는 중앙에는 월계수가 있었고 그 옆에 독수리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칼릭스에게 들었던 인간의 신화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델라브힘이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로 자신의 분신을 인간들에게 보냈는데 그것이 독수리였고, 그 독수리가 앉은 월계수 나무를 중심으로 일라베니아 제국이 세워졌다던가, 그래서 일라베니아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제단마다 월계수 나무와 독수리 석상이 있다던가 하는 흘려들었던 정보들이었다.

그녀가 제단을 멀뚱히 구경하는 사이 흰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하나둘 모였다. 그들은 누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오와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것도 칼릭스에게 배운 것이었다. 맨 뒤에는 수습 기사. 중간 줄을 하급 기사, 앞줄에는 상급 기사가 서 있게 된다. 그 앞에 기사단장의 부관과 부단장, 부단장 부관이 상급 기사와 마주 보며 서 있는 형태. 제단의 한 가운데는 의식을 진행할 2황자가 차지할 것이고 그 옆에 기사단장이 그를 지킬 것이다.

로젤린은 아직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했으므로 하급 기사들과 같이 줄을 섰다. 여전히 곱지 않은 눈빛들이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상급 기사들은 어디 갔는지 대열에는 하급 기사와 수습 기사뿐이었다. 그 상태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부우우.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퍼지며 얽혀 있는 빛 무리가 그려진 흰색 깃발이 차례대로 올라갔다. 기사들은 탁, 탁 움직이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곧게 펴고 차렷 자세를 했다. 저 멀리 하얀 궁에서부터 상급 기사들이 발 맞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좌우로 감싸고 있는 중앙에는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제복이 아닌 신전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예복이었다. 그는 길게 찰랑이는 머리를 늘어트리고 제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 왔다. 달빛을 담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었다.

로젤린은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누구인지 미처 알기 전이었다.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혼란이 그녀를 덮쳐 왔다. 심장이 소란스럽게 쿵쿵 로젤린을 두드려 댔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독인가? 아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만 여느 생물과 다르게 자신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을 흡수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부작용인가? 아니, 그렇다면 진즉에 이상을 느꼈을 것이다. 로젤린이 숨을 가쁘게 쉬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꽉 눌렀을 즈음엔, 모든 기사들 또한 그녀와 같은 동작을 했다. 기사들의 경례 방식이었다. 로젤린은 우연의 일치로 그들 속에 녹아들었다.

상급 기사들은 중앙의 남자를 제단까지 호위한 후, 자연스럽게 돌아와 그녀의 앞에 섰다. 로젤린은 앞에 서 있는 상급 기사의 어깨 너머 단편적으로 보이는 그를 응시했다.

로젤린은 들은 적이 있다. 현 일라베니아 황실에서 유일하게 은발을 가진 황자. 설원의 월계수. 2황자 리카르디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하얀 밤의 주인이었다.

* * *

[2황자 전하의 생모이신 밀리아 황비님 께서는 변방 자작가 출신이십니다. 심지어는 황비님의 어머니께서는 평민이셨죠. 그래서 2황자 전하의 출신을 걸고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비천하네, 평민의 피가 흐르네 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자님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곤 하죠.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누님?]

[황자라서?]

[그것도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성력이지요. 그리고 황자님의 그 외모.]

[……외모?]

[남성 여성 가릴 것 없이 추앙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계십니다. 또한 이델라브힘을 상징하는 순백. 황자 전하의 눈부신 은발은 그것을 떠올리게 하죠. 거기에다 역대 황제들과 비견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성력의 양까지. 감이 좀 잡히십니까? 빛의 신을 모시는, 성력을 다루는 나라에서 황자 전하의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그 당시에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현재 그 뜻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미의식을 다 깨우치지 못한 그녀의 눈에도 2황자는 정신이 아득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깊고 선명한 물색의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 부드러운 입매와 도자기 인형 같은 투명하고 하얀 피부, 기사들과 비교해 보아도 흠이 없는 강건하게 단련된 몸까지.

리카르디스의 새하얀 옷과 머리칼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마저도 그의 곁을 비추는 것 같은, 그런 기이한 풍경이었다.

칼릭스, 레이몬드, 백작가의 하인들과 하얀밤 기사단의 단원들까지. 로젤린은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까지 본능에 호소하는 지독한 아름다움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가? 그의 겉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심장이 이렇게 뛴 것이었나?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외의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그냥 수긍했다.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예식은 이미 차례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2황자가 두꺼운 책을 펼쳐서 읽어 주기도 했고, 기사단장 스타스가 큰소리로 무언가를 외치자 기사단원들이 같이 복창하기도 했다. 로젤린은 입을 뻥긋뻥긋하며 따라하는 시늉을 했다.

신관처럼 보이는 이들이 세공된 넓은 접시를 가져와 제단 앞에 올려놓았다. 얇고 하얀 접시에는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델라브힘의 독수리가 앉은 월계수. 바로 그 앞에 있는 호수의 물이었다. 성수라고도 불렀다. 그 물 자체에 무슨 효력이나 효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의식을 치를 때마다 사용되는 것이었다.

서임식은 수습 기사에서 하급 기사로 승급되는 자들부터 시작되었다. 황자는 뒤로 물러나있어 기사단장이 대신 그들의 맹세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오르고 내렸다. 하급 기사에서 상급 기사로 승급하는 이들의 서임식이 시작되자 뒤로 물러서 있던 황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서임식은 리카르디스가 직접 진행했다. 모두 눈을 빛내며 하얀밤 기사단의 주인을 우러러보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로젤린의 이름이 불렸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 앞으로 나오라.”

그녀는 칼릭스가 가르쳐준 대로 걸었다. 한 발 한 발. 다리를 너무 벌려서는 안 되고 보폭이 너무 커서도 작아서도 안 된다. 목을 당기고 허리를 핀 채로 정면을 응시하며…… 그녀는 속으로 중얼중얼 칼릭스의 말을 반복했다. 제단 앞에 선 그녀는 검을 뽑아 땅에 박은 후 한쪽 무릎을 꿇어 준비를 끝냈다.

제단의 한 중앙에는 2황자가, 그의 오른쪽에는 기사단장 스타스가, 왼쪽에는 신관이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2황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걸 미쳐보지 못했다.

“하얀밤의 하급 기사 로젤린 에스터. 맹세하라.”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웅웅 울렸다. 로젤린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 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붉은수레바퀴 로젤린 에스터의 맹세를 듣는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그 잘난 맹세. 한번 해 보아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대는 이델라브힘의 빛이 되어 검은 달을 가르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그대는 약한 자의 강인한 울타리, 일라베니아의 부수지 못할 방패가 되어 명예를 지키라.”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영광의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을 상급 기사로 임명한다.”

리카르디스는 넓은 접시에 있는 물을 손에 찍어 그녀의 이마에 죽 그었다. 로젤린은 차갑게 닿는 감촉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는 밝은 은발이 찰랑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아무 감정 없는 무심한 눈동자가 로젤린을 잠시간 담다가 곧 흥미 없다는 듯 다른 곳을 향했다. 로젤린은 마지막 경례 후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레이몬드가 부단장 보좌로 임명 되는 짧은 의식이 있었다. 뒤를 이은 새로운 부단장의 서임식을 마지막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임명식이 모두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단을 떠났다.

기사단장이 폐회를 선언했다. 이내 백색의 제복을 입은 하얀밤 기사단의 단원들도 모두 흩어졌다. 로젤린은 이마를 슥슥 만졌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흔적은 이미 말라서 없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차가운 온도가 아직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 * *

의외로 평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상급 기사라고는 하나, 막 승급한 로젤린에게 황자 호위라는 중대한 임무가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그녀에게 돌아오는 몫의 일거리는 검술 훈련이나 문서 작업뿐이었고, 그 일감은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의 책상 위에 쌓였다.

깐깐한 부단장의 보좌로 일하며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던 그는 밤을 새면서 그녀 몫의 문서 작업까지 해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곧 레이몬드의 눈 아래에 시커먼 피곤의 흔적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생기만 간신히 붙어 있는 시체 같았다. 인간의 표정을 다 구분하지 못하는 로젤린이 보아도 좀 심각한 상태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는 감정의 의미를 진정 깨우친 때였다.

“미안……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서.”

로젤린의 시무룩한 반응에 레이몬드는 왈칵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마음만으로는 이깟 서류작업 따위 천년만년 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건 로젤린을 위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배고픈 자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방법을 알려 주라고 하지 않던가. 슬슬 그녀도 하얀밤 기사단에 정착할 때였다. 레이몬드는 애써 웃으며 시무룩한 그녀를 다독였다.

“아니야. 모르면 배우면 되지 뭐, 넌 머리가 좋아서 금방 익힐 거야.”

“응.”

“필요한 건 도서관에서 내가 빌려 올게. 지금쯤이면 연무장 비어 있겠다. 가서 검술 훈련하고 있어. 매일 하고 있지?”

“응. 방에서 매일매일. 남는 시간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 성실함이 어디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유명 제과점에서 사 온 쿠키를 그녀에게 건넸다. 큰뿔산양 저택의 강아지를 교육할 때에도 포상용 간식이 있었는데…… 까지 생각이 미친 그의 기분은 급격히 참담해져 버렸다. 어쨌거나 로젤린은 초코 칩이 박힌 쿠키를 맛있게 먹으며 레이몬드의 말을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충고에 따라 검술은 방 안에서만 수련했다. 준비가 덜 된 상황인 만큼 다른 기사들과 마주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넓어서 충분히 움직일 공간이야 있지만 연무장의 흙냄새와 땀이 날 즈음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까지. 그 어떤 것도 없어서 아쉬웠던 참이었다.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식사 후 조금의 휴식시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로젤린은 검을 뽑았다. 머릿속으로 두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레이몬드와 칼릭스는 그녀의 상념 안에서 끝없이 움직였다. 길고 무거운 검이 나비가 움직이듯 나긋나긋하게 춤추고 있었다. 어떤 때는 무게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다가도 어떤 때는 태산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로젤린은 주위를 감싸고 있던 적막을 깨트리며 움직였다. 일라베니아의 기본 검법이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짚어 가며 천천히 검을 흘렸다. 누가 보면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느렸지만, 움직임은 완벽함에 닿아 있었다. 햇살 아래 로젤린의 높게 묶은 검은 머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한참을 움직이던 로젤린의 감각에 불순물이 끼어들었다. 하얀밤 기사단에 오고 나서 줄곧 느껴 왔던 껄끄러운 시선이었다. 로젤린은 검술 연습을 지속하며 그 시선의 근원을 찾았다. 저 멀리 장신의 남자들 몇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달고 있는 견장의 모양에서 하급 기사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은 로젤린을 쳐다보다가 입을 모아 무언가를 얘기했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로젤린은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웃는다] 그 공식이 절대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숨길 생각도 없이 로젤린에 대한 감정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감정이 적나라한 것과 얼마간 인간으로서 쌓아 온 경험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들은 로젤린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녀에게 흠을 내고 싶어 하고, 그 틈을 비집을 순간을 보고 있었다.

[누님에게는 적이 많으십니다. 정확히는 적이 많은 곳으로 누님이 들어가신 겁니다. 그걸 각오하고 성으로 가셔야 할 겁니다.]

칼릭스가 해 주는 말들은 정말 하나같이 옳았다. 그녀는 적이 많았다. 같은 종족인 데다가 같은 옷을 입고, 더욱이 한 건물 아래 같이 사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내리고 싶어 하며 로젤린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신경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로젤린의 검은 여전히 느렸지만 몹시 날카로워졌다.

멀리서 그녀가 기초 검법을 연습하는 걸 지켜보던 하급 기사들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그들은 연무장 중앙에 있던 로젤린에게 금방 다가섰다. 로젤린은 그들이 오는 것을 느끼고 연습을 끝맺지 못한 채 중단해야만 했다.

다섯 명 전부 주먹을 심장 위에 올려놓으며 경례했다. 입을 한쪽으로 비틀며 웃고 있던 금발의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젤린 경.”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기사단은 상하 관계가 분명한 집단이라는 겁니다.]

칼릭스의 목소리 위로 웃음기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상급 기사로 승급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전에 같이 조를 짰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음…… 상상도 못할 일이었던지라, 축하 선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지 뭡니까.”

[……상하 관계가 분명한…….]

“…….”

아닌 것 같은데…… 상하 관계 분명하지 않은 거 같은데…… 로젤린은 과거의 칼릭스가 가르쳐 준 내용에 딴죽을 걸었다. 금발의 남자는 자신에게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이었다. 둔한 로젤린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로젤린은 외유내강을 넘어서, 겉으로 보기에 아주 물렁한 사람이었다. 같이 조를 짠 하급 기사들이 싫은 말을 해도 묵묵히 받아 넘기고, 이상한 장난질을 치거나 시비를 걸어도 상관에게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승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전했다. 계급으로 타인을 찍어 누를 생각도 없어 보였고, 다른 상급 기사라면 진즉에 처벌하고도 남았을 발언에도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로젤린은 원래 저렇게 생긴 사람이었다.

바다협곡의 네스터. 금발의 남자는 바다협곡 백작의 차남이었다. 그는 로젤린과 같은 시기에 하얀밤 기사단의 수습 기사가 되어 동기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네스터가 보기에 로젤린은 부족한 검술 실력을 머리로 채우는 전형적인 여기사였다. 전술이야 괜찮은 전략가를 옆에 두면 되는 것이고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검술 실력이 아니겠는가. 네스터는 사사건건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며 제 자존감을 채웠다.

하지만 로젤린이 먼저 하급 기사로 승급한 그 날부터 그의 자존심은 구깃구깃 구겨지고 말았다. 네스터 또한 곧 하급 기사로 승급하긴 했지만, 하루든 이틀이든 그녀가 먼저 앞서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급 기사로 승급하기까지 했다. 존경해 마지않던 기사단장의 안목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서임식을 황자 전하께서 직접 진행하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로젤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하급 기사들과 그녀의 사소한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비웃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도리어 제 꼴이 우스워 지는 것 같다고 생각할 쯤에 네스터는 보게 되었다. 로젤린이 기사 가문의 자식들이 여덟 살 때에나 하는 기본적인 검법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원래 펼치는 동작보다 수 배는 늦는 동작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허술할 수가! 그저 웃음만 나오는 실력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상급 기사로 승급해?

네스터는 웃었다. 하급 기사에게 지는 상급 기사는 없었다. 상급 기사들 중엔 여자가 없기도 했거니와 모두가 백전노장의 전사들이었다. 머리 좀 좋을 뿐인 여자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네스터는 자신이 그 차이를 직접 몸으로 깨닫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때 서로의 등을 맡겼던 것도 인연인데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로젤린 경.”

네스터의 뒤에 서 있던 하급 기사들이 웃음을 겨우 삼키는 게 보였다. 로젤린은 그들의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이럴 경우는 어쩌라고 했더라. 이런 경우는…….

[그래도 가끔씩 질투에 눈이 멀어서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이 있긴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누님이 검술이 약하다는 걸 꼭 걸고넘어지겠죠.]

다섯 번째로 칼릭스와 대련한 후에 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었다. 칼릭스는 연무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왼쪽 목덜미에는 로젤린의 검이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몇 번 짓다가 그녀를 향해 짓궂은 표정을 했다.

[검투건 박투건,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로젤린은 몇 개의 키워드를 기억해 내었다. 원하는 대로 해줘라.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 그래.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스터는 갑자기 몰려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네스터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상급 기사가 됐다고 검술 실력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줄 아는 건가?

“입회인을 두고 정식으로 하시죠. 대련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클로드 경, 바스티안 경. 부탁합니다.”

네스터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암기 금지, 검술과 체술의 종합적인 대련. 한 사람이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지속된다. 대련 중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로에 대해 책임은 없다. 낯선 기사 두 명이 로젤린에게 대련 조건을 읊어 줬다.

두 하급 기사의 입회 아래, 로젤린과 네스터의 대련이 준비되었다. 로젤린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묶을 쯤엔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무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연습이라도 하러 왔다가 우연한 광경에 눈을 뺏긴 듯 보였다. 결투처럼 입회인까지 두고 대치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즐거워하며 구경했다. 소문의 상급 기사 로젤린. 그리고 하급 기사이긴 하지만 검 실력이 깨나 좋다는 바다협곡의 네스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짧은 시간 안에 소문이 퍼졌는지 수습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이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간간히 상급 기사들도 끼어 있었다. 네스터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볼수록 로젤린을 끌어내리기에 용이할 것이다.

네스터는 빛나는 눈으로 로젤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여자치고는 큰 키. 미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흔하디흔한 생김새는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더욱 박한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주위의 소동에도 별 다른 반응 없이 몸을 풀고 있었다. 부서지는 검 날에 다치면 큰일이니 구경하던 자들도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로젤린과 네스터는 검을 뽑았다. 날이 검집을 스치는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두 사람 다 얼굴 앞에 검을 세웠다가 검 끝을 서로 마주했다. 얇고 가느다란 검과 크고 넓은 검의 대비가 극명했다. 챙.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속전속결!’

네스터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을 부러트릴 것 같은 우악스런 힘이 그녀의 검을 향했다.

챙!

금속끼리의 마찰음이 크게 울리더니 검신이 크게 하늘로 떠올랐다. 허공에서 뱅글뱅글 도는 검을 따라 햇빛도 반짝이며 반사되었다. 높게 떠있던 검은 공중에 머무르는 듯싶더니 이내 연무장 바닥에 퍽 박혔다.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검을 놓치는 것은 수습 기사들도 하지 않는 행위였다.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네스터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검을 놓친 건 로젤린이 아니었다.

네스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순간에 큰 충격을 받아 버린 손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떨리고 있었다. 마치 돌 벽에 대고 검을 내려친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대체 무슨 일이 나에게, 그녀에게 일어난 거지?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네스터는 눈을 굴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네스터는 그녀의 녹안을 보고 지금의 상황을 인지했다.

“이, 이게 무슨……!”

네스터는 고개를 돌려 입회하고 있던 동료들을 쳐다봤다. 클로드와 바스티안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네스터의 형형한 눈빛에 두 남자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암기 아냐. 속임수 없었어. 그 뜻을 읽은 네스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멀거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귓가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 잘 배우셨습니까.”

네스터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졌다.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기사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를 갈았다. 운이 좋아서 힘의 중심을 어찌 받아친 모양인데 그 정도로 의기양양해하기는!

“……조금 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

알겠다더니 왜 검을 집어넣지? 네스터의 의문은 곧 풀렸다. 그녀가 허리춤에 있던 검집을 풀어 멀리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황당해하는 사이, 로젤린은 주먹을 쥐어 박투 자세를 취했다.

지금 나랑 체술을 겨뤄 보자는 건가? 저 여자 미친 거 아냐? 체급도 체급이지만 여자와 남자는 종이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있다. 여자의 몸으로 기사가 되어 그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어야 할 그녀가 지금 주먹 너머로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네스터가 보기엔 로젤린은 그저 자신보다 한참 작고 마른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전쟁을 치룬 적 있는 네스터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압력이다. 자신의 본능이 진심으로 저 여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대련 초의 미소를 잃은 지는 오래되었다. 네스터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박투 자세를 취했다. 기사들 또한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바람이 불었다. 열을 식히는 바람에 나뭇잎이 한 장 실려 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로젤린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잎사귀였다.

그것이 네스터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하얀밤 기사단의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후 급히 서임식을 치루며 빈자리를 채우긴 했지만, 정상궤도로 올라서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현재 2황자의 성을 호위할 만한 인력은 넉넉했다. 문제는 2황자 리카르디스의 곁을 지킬 만한 실력을 갖춘 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예전엔 3교대로 빈틈없이 호위했었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2교대 호위조차도 겨우 해내고 있을 정도였다. 상급 기사로 올라온 자들의 급속한 성장이 필요한 시기였다.

레이몬드는 각 조마다의 훈련 성과를 보고받은 것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잠시 밖으로 외출했던 부단장 나단이 멍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레이몬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부단장님?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2황자 전하의 호위로 넣는다.”

“예엑?”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2황자 전하의 호위로 넣는다.”

“네엑? 아니, 제대로 못 들어서 되물은 게 아닙니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로젤린 경은 현재 매우, 마음과…… 머리가 아프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기억하네. 기억상실이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애가 들으면 얼마나 상심하겠습니까!”

나단은 헛소리를 하고 있는 레이몬드를 가는 눈으로 보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이 부관은? 기억상실을 기억상실이라고 하지 달리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레이몬드도 “아차, 이게 아니라!” 하고 급하게 말을 덧붙이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로젤린 경이 뛰어난 기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자 전하의 호위를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몇 달 훈련을 더 받은 후에…….”

“기사단장실에 가던 길이었지.”

“……?”

나단은 뜬금없이 말을 내뱉었다. 레이몬드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밖이 소란스럽더군.”

“사건으로부터 시일이 지나 좀 해이해졌나 봅니다. 더 굴리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아무튼 간에, 연무장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가봤는데…….”

“기특하게 훈련이라도 하고 있었습니까?”

“로젤린 경이 네스터 경을 개 패듯이 패고 있더군. 아니 로젤린 경은 동물을 때릴 것 같지 않으니 개라면 그렇게 안 팼겠어. 말을 바꾸지. 수련용 허수아비를 패듯이 팼다고.”

레이몬드는 입을 떡 벌렸다. 누가, 뭘 패?

“상대방이 하급 기사 바다협곡의 네스터 경이 맞습니까?”

“볼이 심각하게 부어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아마도 맞네.”

레이몬드는 네스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사건건 로젤린에게 시비 걸던 아주 저열한 놈이었다. 무례한 행동을 뒷받침하듯 검술 실력만은 제법 훌륭했고, 로젤린은 그런 네스터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넘어가곤 했다. 때문인지 네스터는 자신이 로젤린보다 위라고 생각하며 기고만장하게 구는 편이었다. 이번에 그가 승급하지 못한 것은 상급 기사가 단순히 검술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둘 중에 누구의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난지 레이몬드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당연히 네스터의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로젤린이 네스터를 개 패듯이 팼다고?

“네스터가…… 취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까? 아니면 앞서 누군가에게 쥐어 터지고 왔다던가?”

“……자네, 로젤린 경을 아끼는 것에 비하면 그녀에 대한 신용은 별로 없는 것 같군.”

레이몬드는 입을 합 다물었다. 확실히 로젤린에게 실례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퇴근하겠습니다!”

“1시 반에? 해가 아직 중천이네.”

“조퇴하겠습니다!”

“아주 난리가 났군. 휴식 시간 줄 테니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게.”

사랑합니다, 부단장님! 레이몬드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부단장실을 뛰쳐나왔다. 가문도 확실하고, 실력도 성품도 괜찮은 놈이지만 제 사람을 너무 과하게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나단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그녀에게 호위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올려야 하는 서류 몇 가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달렸다. 나단이 보았으면 인상을 찌푸리며 한소리 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를 걷고 있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녀에게는 어디 하나 작은 생채기도 찾을 수 없었다. 몇 분 전까지 대련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으며, 제복에도 흙이나 먼지 따위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팔 위에 얌전히 들려 있는 네스터만 아니었더라도 앞서 그렇게 격한 대련을 했다고는 도무지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로젤린 경?”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레이몬드는 자신의 두 눈을 마구 비볐다. 로젤린은 평온한 얼굴로 네스터를 들고 있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기사가 공주님을 안을 때처럼.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녀 뒤에는 익숙한 얼굴 두 명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하급 기사 클로드와 바스티안. 항상 네스터와 같이 다니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자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엉덩이를 맞은 어린 강아지같이 잔뜩 풀 죽어 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경, 그, 그건 아니 네스터 경은 어쩌다가…….”

그렇게 참혹한 꼴을 당한 거니……? 얕보던 상대에게 쥐어 터져서 기절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 모습이 매우 참혹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깨어 있었다면 수치심에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대련했습니다. 의무실에 가던 중입니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그녀가 대답한 [대련했습니다] 의 조금 더 길고 상세한 설명이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네 명은 사이좋게 의무실로 향했다. 의사와 의무실에 상주하는 신관이 네스터의 몰골을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뭐지? 낙마해서 말한테 밟힌 건가?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수라도 나타났습니까?”

어, 예리한걸. 로젤린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를 대신해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대련…… 했습니다…….”

“대련이요? 얼굴이 이렇게 떡이 될 때까지 하는 대련이 있습니까?”

의사가 그의 옷을 들쳐보았다가 여기저기 올라오기 시작한 시커먼 멍들을 보고 식겁했다. 그의 물음에 클로드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대련하기로 했는데, 첫 공격에 기절해 버려서 항복이라는 말을 못했…….”

클로드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어마어마했던 광경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강해진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식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 또한 잘 알았다. 로젤린은 기절해 버려서 항복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은 네스터를 계속 팼을 것이고, 그는 항복이란 말을 못해서 계속 맞았을 것이다. 그 광경을 조금 지켜보던 바스티안과 클로드가 기겁하며 대신 항복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음.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레이몬드는 의사에게 그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인력이 부족한 시기니 힘 써 달라고 했더니 인력이 부족한 걸 아는 사람이 한명의 인력을 박살 냈냐는 불손한 눈빛을 보냈다.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여기사가 그랬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괜히 자신이 찔려서 호탕한 웃음을 내뱉고 로젤린을 끌고 나왔다. 그녀는 대련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풀어서 손으로 대충 빗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고?”

“응. 걔 약해서.”

“그거 네스터 앞에서는 얘기하면 안 된다?”

“응.”

“그리고 다음부터 대련할 때는, 기절하면 항복이라고 말 안 해도 패면 안 돼. 알겠지?”

“응.”

어, 알았어. 나 알았어. 얘 문서 작업은 무리야. 절대 안 되겠네. 지금의 로젤린에게는 호위 임무가 적격이다. 조용히 곁을 서 있다가 수상한 자를 쥐어 패는 임무. 부단장의 선견지명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 * *

2황자가 머무는 월장석 성. 아침부터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은 만원이었다. 황금정원 자작, 바다협곡 백작, 가을안개 백작, 푸른등불 공작. 큰뿔산양 후작까지. 2황자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술렁였다. 푸른등불 공작이 가지고 온 정보 때문이었다. 2황자 리카르디스는 가장 상석에 앉아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물론 은제 식기의 색을 확인한 후였다.

“다들 놀라는 척 하기는. 빤한 일 아니겠는가? 타국의 암살 부대가 국경을 지키는 수천, 수만의 눈에 띄지 않게 넘어온 것 까진 그렇다 치고 말이야. 우연히 발견한 막사에 공격을 퍼부은 것뿐인데 2황자만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는 놀랍지 않나? 어떤 곳에도 1황자는 없었다니. 이거야 원, 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이니…….”

그의 말에 큰뿔산양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런 간악한 놈들. 어찌 일라베니아의 황자라는 자가 타국의 광신도와 손을 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래도 1황자 전하께서는 검은달과 손을 잡으셨다고 확정을 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발타 왕실이라고 정정할까요?”

“뭐 굳이 구분까지 할 필요가 있나. 검 은달 놈들이 왕실까지 들어앉아 있는데. 그놈이 그놈이지.”

리카르디스는 지루해하며 턱을 괴었다. 변함없이 치졸한 수법이었다. 제 형님이라는 자가 그러했다. 그 황제라는 자리가 대체 무엇이건데 그토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지. 우스울 뿐이었다.

“증거는?”

“쉽게 발 뺄 수 있을 겁니다. 도리어 덮어쓸지도 모릅니다.”

“나와 내 기사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음에도?”

“정치적인 쇼라고 말할 겁니다.”

“정확하군, 후작. 형님이 하실 만한 헛소리야.”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보다 황태자 위에 근접한 1황자 엘피디오. 그는 일라베니아라는 대륙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끌어갈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1황자로서 군주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두루 공부해 왔지만 주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꼴을 보지 못했고,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자란 탓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만한 성질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있는 황후, 정확히는 황후의 집안 사자갈기 공작가. 그 세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국에 몇 없는 공작위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요, 애초에 황실로부터 갈라져 나온 방계 가문이었기 때문에.

황후와 황제는 멀지 않은 혈연관계였으나, 황실은 성력을 위해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착이 엘피디오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황후 소생이라는 강력한 뒷배, 역대 황제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방대한 성력.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장자가 가문을 계승하는 일라베니아에서 엘피디오는 사실상 황태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은 일어났다. 엘피디오가 11살 되는 해, 황제가 새로운 비를 맞이했다. 시골 자작가의 비천한 출신의 황비. 가난한 탓에 사교계에서도 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다들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장점이라고는 곱상한 얼굴과 달빛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 색 밖에 없는 여자였다.

황제가 여색을 밝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다들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황성에 입성하며 데리고 온 두 명의 아이였다. 황비와 똑 닮은 머리 색의 열 살짜리 남자아이와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무려 황제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변방 시찰을 했던 때에 생긴 아이라나 뭐라나. 황실이 왈칵 뒤집혔다.

황실에 사생아란 없다. 그저 지위가 낮은 황녀 황자만 있을 뿐. 그럼에도 황제는 아이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왜지? 모두의 의문이 점점 커져 갈 쯤, 사내아이는 정식으로 황실 일원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신의 햇살이 비추는 영원의 나라. 그 이름을 드높일 두 번째 황자였다.

그리고 10살에 갑자기 나타난 황자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된다. 리카르디스가 1황자 엘피디오를 뛰어넘는 성력을 가지고 있음이 공표된 것이다. 신의 비호를 받는 신의 나라에서 성력이란 그 어떤 힘보다 강력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황태자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작 시골 자작가 황비가 리카르디스를 지킬 만한 힘은 없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입성을 미룬 것이리라. 그때부터 황실은 바람 잘 날이 없게 되었다. 유일무이하던 황태자 후보에 한 명이 더 이름을 써 넣게 되었으니.

당연하다는 듯 황실에서 황태자 수업을 받는 엘피디오와 달리 리카르디스는 직접 전쟁과 정치를 겪어 왔다. 그의 행보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자들이 한 명 두 명 붙어, 오늘날에야 1황자와 비견할 만한 세력이 갖춰졌다.

리카르디스가 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 이후부터 암살 시도는 꾸준히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은 이델라브힘의 하늘 아래 같은 공기 마시고 살 수 없다는 식의 필사적인 태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싸움에 휘말려 리카르디스의 하나뿐인 동복 여동생이 목숨을 잃었다. 리카르디스가 황태자위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그저 몸 풀기였다는 듯,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공을 세웠다. 그것에 초조함을 느낀 1황자가 사냥 대회라는 좋은 기회를 틈타 또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라베니아의 오랜 정적, 발타과 손을 잡고서. 정말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감도 안 잡히는 멍청함이었다.

“실패했으니 몸이 달았겠군. 내 기사들이 아주 솜씨가 좋아서 말이지…… 나를 이델라브힘에게 닿게 하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친히 말해 줘야 했을까, 백작?”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군요, 전하.”

바다협곡 백작이 연신 땀을 닦아가며 그의 말에 답했다.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농일세. 그래. 이번 시도는 제법 뼈아팠지. 내 수족들이 비스타에서 그렇게 의미 없이 죽어갈 인물들이 아닌데 말이야.”

리카르디스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일생을 편하게 살아오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슴에 남을 만한 밤이었다. 꽉 깨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얕은 신음소리. 병장기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 횃불이 공기를 태우고 나뭇가지를 밟는 사람들의 발소리. 황자 전하를! 리카르디스님을 지켜라! 상대는 독을 사용한다. 전하! 부디 몸을 피하시옵소서!

[하얀밤 기사단!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맺었던 언약 대로, 목숨을 바쳐라!]

그저 허례허식이라 생각했던 때도 있었건만, 그들은 정말 그때의 맹세처럼 자신을 지키다가 죽었다. 입 안이 썼다. 몇 년 동안 자신의 옆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고작 독 따위에 죽었다. 그가 성력으로 치유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그때 도망치지만 않았었더라도, 그들과 싸우기만 했더라도……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기만 했다. 어떻게든 돌려줘야 하는데. 이 엿 같은 감정을 그놈도 느끼게 해 줘야 하는데. 리카르디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최근 상급 기사들의 얼굴에 점점 피곤한 낯빛이 돌기 시작했다. 사냥 대회에서의 실패 이후 암살 시도가 수그러들기는커녕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독을 타랴 밤에는 비수를 들고 찾아오랴. 그들이 바쁜 만큼 호위들도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상태에서 제대로 교대할 만한 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더욱 힘겨워 보였다. 엘피디오 그 멍청이는 전략상 후퇴라는 말도 모르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엘피디오의 욕을 신나게 했다.

“의미 없이 죽은 것은 아니지요.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웃기는 소리야. 난 나를 위해 죽는 자는 필요 없다.”

“그래도 전하를 호위할 인원은 필요합니다. 마침 그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괴고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는 스타스를 쳐다보았다. 가을안개의 스타스 백작. 꼬장꼬장하지만 충성스러운 가신이 무슨 말을 할지 얌전히 기다렸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을 호위 임무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전하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주위 가신들의 표정도 확 찌푸려졌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일라베니아 제국 내에 또 있는 건 아닐 테고.”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스타스의 표정은 태평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경은 아주 농담을 잘하는군. 지금 엘피디오의 밑이나 닦아 주는 붉은수레바퀴를 내 곁에 두라고 얘기 하는 건가?”

“새 부단장 나단 경의 추천서가 열두 장이 쌓여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첨을 듣는 자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자도 아닙니다. 그가 부단장 부관일 때부터 같이 일 해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나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봅니다. 또한 제가 보았을 때에도 로젤린 경은 그녀의 가문만 아니었다면 괜찮다고 평할 수 있는 기사입니다.”

스타스는 나단의 추천서를 리카르디스에게 넘겨주었다. 리카르디스는 열두 장이나 되는 추천서를 차근차근 읽어 내렸다. 그 사이 바다협곡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스타스의 의견에 반박했다. 정말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다. 현 황제의 충실한 가신이기도 하지만, 1황자의 손 또한 들어 주고 있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자식을?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호위 임무를 맡겨?

“가문만 아니면 괜찮은 기사라지만, 그 가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오!”

“암살 시도는 더욱 늘어날 것이며 호위 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족하지. 칼을 잘 쓰는 자는 많지만,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자는 몇 없소.”

“그렇다면 그녀가 백작에게 확신이라도 준다는 겁니까? 그녀가 붉은수레바퀴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소.”

리카르디스는 눈으로 추천서를 읽으며 귀로 그들의 오고가는 말을 들었다. 호오, 생각보다 그녀는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가는 저 기사단장의 눈에 들다니. 리카르디스는 부단장의 추천서과 기사단장의 말에서 그녀에 대한 확신을 읽어 냈다.

그들의 언쟁 위로 하나의 목소리가 더 얹어졌다. 조용히 듣고 있던 큰뿔산양 후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콧수염을 만지며 눌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영 탐탁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얘기한다는 식이었다.

“내 아들놈이 그녀는 말만 앞서는 기사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입에 아주 달고 살더군요. 믿을 만하고, 충심이 깊은 데다 지휘관의 재능도 있고 애가 착하고 성실하고 어쩌고, 저쩌고. 누가 보면 내 아들놈의 손녀라도 되는지 알 겁니다. 요컨대. 자격은 갖추었다고…… 하더군요.”

후작의 지원으로 천천히 추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임에도, 2황자 전하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목숨을 바친 자. 성실하고, 명석하고, 명예를 알고 있는 자.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든 당신을 위해 죽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그 눈동자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나서지나 말 것이지. 멍청한 것. 모든 것이 다 스스로 부른 불행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가 엘피디오의 정보를 물어다 주는 파랑새가 될지도 모르지.”

리카르디스는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퍽 불쾌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어디 한번 지켜보기로 할까.”

* * *

기사단을 위해 오래 일했다거나 단순히 강한 기사라는 것. 상급 기사는 이런 두 가지의 조건으로만 선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한 명 한 명이 법, 예, 정치 모든 분야를 두루 익혀 언제든 병사들을 이끌 수 있는 지휘관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하급 기사들 중에서는 평민들도 간간히 있었지만, 상급 기사부터는 고위 귀족가의 자제들이 주를 이루었다.

현 하얀밤 기사단에는 열 명의 상급 기사가 있다. 수습 기사들은 존경하는 상급자에게 지원하고 상급 기사는 지원자의 가문과 성품, 발전 가능성 등 여러 가지를 따진 후 곁에 두었다. 수습 기사들은 상급 기사를 따르며 검을 배우고 그들의 일을 도왔다.

로젤린 또한 상급 기사로써 몇 명의 수습 기사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권리와 임무가 생겼다. 문제는 어느 그 누구도 그녀에게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밑에 있는 수습생들을 쥐어 패서 보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차라리 제 목을 베라는 식으로 반항하는 그들에게 끝까지 강요 할 수 없었다. 수습 기사들이 진심으로 그녀를 따르지 않는다면 힘든 것은 오로지 로젤린만이 감당하게 될 테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눈앞에 쌓여 있는 것은 로젤린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수습 기사들의 지원서였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와의 대련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그간 사람들이 로젤린에게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그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할 거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검 실력이 뛰어난 상급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 다소 성격이 괴팍한 상급 기사라고 해도 실력만 뛰어나면 지원율이 높았다.

하지만 하얀밤 기사단 모두가 아는 로젤린이라는 사람은 그다지 강한 기사가 아니었다. 과묵하고 성실하지만 리카르디스 2황자와 반하는 가문이었고, 여자인 데다가 약하기까지. 하급 기사들에게조차 얕보이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습 기사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부로 하얀밤 기사단 전체에 퍼져 있었던 인식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하급 기사 네스터는 힘과 기술이 조화롭게 강한 자였다. 그 나이 또래의 하급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있었는데…….

대련 시작 삼 초 만에 검을 놓치고 2회차에서는 첫 공격에 기절했으며, 심지어는 그보다 10센치는 작고 한참 가느다란 대련 상대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퇴장했다. 그의 퇴장이 충격적인 만큼이나 그녀의 승리 또한 강렬했다.

“해서, 찾아 온 거야. 뽑아 주셔야겠습니다. 로젤린 경.”

수습생들의 지원서를 들고 있는 레이몬드를 문가에 세워 둔 채, 로젤린은 제 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방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동화책 한 권, 붉은수레바퀴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 하나, 방금 레이몬드가 갖다 준 마카롱 세트를 늘여놓고서는 팔짱을 끼고 인상을 썼다. 매우 고심하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이마 사이에 잡혀 있는 주름을 보고 레이몬드가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야, 로젤린?”

“병문안.”

지금 그녀가 가려고 하는 병문안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던 바다협곡의 네스터. 그녀가 다친 상대에게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상식을 깨우친 것 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들이 문제였다. 동화책,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 마카롱 세트? 설마 이거.

“병문안 선물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지 로젤린? 빨리 아니라고 말해. 어서.”

레이몬드는 자기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을 했다. 로젤린은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병문안 선물.

“책에서 봤어. 병문안 때에는 꽃과 선물을. 빠른 쾌유를 비는 의미로 귀한 물건을 줘야 한다고.”

동화책이랑 마카롱이 귀한 물건에 들어가다니. 이런 귀여운 아이! 착한 아이! 레이몬드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반지는 주면 안 돼. 결혼하자는 얘기야, 그거.”

“아.”

로젤린은 반지를 슥 집어서 자신의 목걸이에 매달았다. 네스터와는 결혼하기 싫은 듯 했다. 그녀는 둘 중에 한참 고민하더니 마카롱 세트를 집었다. 물론 값비싼 유명 제과점의 디저트이긴 했다. 우락부락한 남자 기사에게 영 어울리는 선물은 아니었지만…… 알 게 뭐람. 제까짓 게 뭐라고. 로젤린이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 할 것이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선물 감사…… 합니다, 로젤린 경. 레이몬드 부관님.”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몸은 좀 괜찮습니까.”

네스터는 연한 파스텔 톤으로 포장된 마카롱 세트와 뿌리째로 뽑아 온 노란 야생화 무리를 흠칫흠칫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핑크색 레이스 리본으로 묶여 있는 상자와 아직까지 뿌리에서 흙이 떨어지고 있는 이 잡초의 조합은 대체 뭐지. 이 여자 날 엿 먹이는 건가?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황자 전하에게 하사 받듯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받았다.

“걱정해주신 덕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안 괜찮아 보였다. 목소리도 꺼끌꺼끌하니 거칠었고 얼굴도 하루 만에 팍 삭아 버렸다. 그때의 호승심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로젤린이 네스터의 말에 바로 붙여 답했다. 와락 구겨지는 그의 표정과 달리 로젤린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뒤에 서 있다가 제 눈을 가렸다. 솔직함이 과했다. 병실을 나가면 그런 말들은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라 꼭 가르쳐야겠어…….

네스터도 매우 당황하는 중이었다. 역시 이 여자 날 엿 먹이는 거 같은데.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 네…… 그러시군요…….”

걱정을 안 하셨다니, 다행…… 걱정을 많이 하면 잠을 설쳐서 몸에 안 좋고…… 네스터는 횡설수설했다. 그가 눈을 도통 마주치지를 못하자, 로젤린이 네스터의 턱을 손으로 올려서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네스터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몬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 고개를 한번 들어 보아라. 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손짓이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멍이 들었습니다.”

“예! 경이 어제…… 아니, 제가 약한 탓에!”

“멍이 들면 아픕니다.”

“네? 네, 그렇습니다. 멍은 아픕니다!”

“조심하십시오.”

까불면 또 패겠다는 소리인가? 두 남자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로젤린이 그의 턱을 고정하고 있던 한쪽 손을 움직여, 멍든 그의 얼굴 위로 흐트러져있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었다. 보기에 거슬려서 무의식중에 손이 나간 것이었다. 네스터는 그녀에게 얻어 맞는 줄 알고 경기하듯 몸을 떨다가 부드러운 로젤린의 손길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할 테니, 빨리 나으시죠.”

레이몬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로젤린을 쳐다보았다. 적막이 감도는 공간에 무뚝뚝한 기사와 한 남자가 이상한 기류를 형성했다. 네스터의 눈동자에 별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꽃향기를 실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온 것 같기도 했다. 레이몬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키며 꿔다놓은 보릿자루같이 멀거니 서 있었다. 시퍼런 멍이 들어 있는 네스터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스터는 멍든 홍당무 같은 얼굴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겨우 쥐어 짜내었다.

레이몬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그녀가 별 감정 없이 한 행동이란 건 알지만, 보기에 매우, 좀, 그랬다. 어느 소설에 나오는 남자 기사가 순진한 시골 아낙을 꾀는 손길 같았다. 순진한 시골 아낙 네스터는 그녀가 병실을 나설 때까지 열렬하게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환자라는 사람이 병문안 온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간이 의자에 손수건을 깔고, 그녀가 화단에서 뽑아 온 야생초와 야생화 무리를 예쁘게 화병에 꽂고, 동료들이 병문안 선물로 들고 온 귀한 과일들을 손수 깎아서 로젤린에게 대령했다. 로젤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잘 받아먹었다. 네스터는 시종일관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동을 나선 로젤린의 두 손에는 네스터가 준 병문안 선물이 가득 들려 있었다. 그녀는 신나 보이는 낯으로 병문안은 참 좋은 것이라 얘기했다. 레이몬드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거 뭐 한 거야, 로젤린? 막 손으로…… 네스터 경의 얼굴을 막…… 그거 있잖아.”

“쾌유의 뜻을 전했어.”

레이몬드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칼릭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로젤린에게 지원한 수습 기사들이 연무장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검을 휘두르며 연습하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두 명의 남녀를 보고 황급히 경례했다. 로젤린. 그리고 그녀와 절친한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였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열다섯 명의 인원이 입을 모으니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많은 수습 기사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기대에 가득 차 있는 눈빛들을 보고 레이몬드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로젤린이 제 수습 기사였을 때가 잠시 떠올랐다. 지금보다 어리고, 지금보다 머리도 짧고, 지금보다…… 똑똑했었지…… 아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레이몬드는 제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깔았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전부 모인건가?”

“예, 레이몬드 부관님.”

열다섯 명의 인원들이 일렬로 줄지었다. 대부분 남 기사였지만 여기사도 두 명 있었다. 레이몬드는 지원서를 로젤린에게 넘겨주었다. 그녀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가 뒤에서 아, 얘는 쟤야. 아, 이건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애야. 하고 일러 주었다. 지원서에는 그의 가문, 지원 동기, 특기 분야, 취미 등 다양한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로젤린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인간들과 오래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으로도 고작 종이 한 장에 한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담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로젤린은 레이몬드에게 서류를 다시 넘겼다.

로젤린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이들을 눈으로 쭉 훑다가 제일 왼쪽에 서 있는 기사의 앞에 섰다. 그녀가 다 읽지 않은 분량에 속한 지원자라 이름도 가문도 알지 못했다. 로젤린은 수습 기사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십 초, 삼십 초, 육십 초. 로젤린의 시선을 받고 있는 수습 기사는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목이 타는 갈증을 느꼈다. 그늘진 녹색의 눈동자가 호수의 가장 깊은 곳만큼이나 어두워 보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지원서에 뭔가 잘못 쓴 게 있었던가? 그렇다면 혼내도 좋으니 어떤 말이든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는 간절히 바랐다.

한참 뒤. 로젤린이 두 번째로 서 있던 수습기사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 번째 지원자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몰아쉬며 옆에 서 있는 동기의 안녕을 빌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급 기사 로젤린은 두 번째 지원자를 슥 한번 쳐다보고는 바로 세 번째 지원자로 넘어갔다.

무슨 기준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의 앞에서는 몇 분 동안 머무르는 반면, 누구의 앞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렇게 열다섯 명의 인원을 한 번씩 마주하고서야 레이몬드의 곁으로 돌아갔다.

“꼭 다섯 명 다 뽑아야 해?”

“아니 최대 정원이 다섯 명. 네 마음대로 해.”

“당신. 당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남자는 에버하르트, 여자는 레티시아.”

“에버하르트, 레티시아.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첫 번째로 그녀의 시선을 가장 오래 받은 군청색 머리의 남자 기사와, 키가 로젤린보다 큰 적갈색 머리 여자 기사가 지목되었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로젤린 경. 저는 올해로 3년 차 된 수습 기사, 서리나팔의 레티시아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뿌리의 에버하르트입니다. 수습 기사가 된 지는 4년입니다. 뽑아 주신 것에 후회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히죽히죽 올라오는 웃음을 결국 감추지 못했다. 로젤린도 무표정한 얼굴에 미미한 미소를 띠었다. 수습 기사는 상급 기사의 수족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지원서만 보고 수습생들을 뽑는 상급 기사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그들을 직접 대면하길 원했다. 종이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빛, 그들이 로젤린에게 담는 감정들 또한. 로젤린이 열다섯 명의 지원자를 꼼꼼히 살펴본 이유 또한 그런 것이었다.

얘는 눈빛이 영 더럽고, 얘는 로젤린을 얕보고 있고, 얘는 레이몬드만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서 왜 자신에게 지원한 건지 도통 모르겠고, 얘는 남들이 지원하니까 자신도 따라 지원했다는 식으로 의욕이라고는 없어 보이고. 총체적 난국 속에 딱 두 명이었다. 그들 또한 눈빛에 가득 욕심을 담고 있었지만 그것은 좋은 상급 기사를 만나 실력을 향상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는 어쩐지 존경의 빛까지 서려 있었다.

그녀의 육감은 뛰어났다. 공통된 언어를 가지며 그것으로 서로 교류하는 인간에 비해 산속의 많은 생물들은 그 개체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와 습성을 가지고 있어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그 덕에 길러지는 것이 육감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생물의 행동, 분위기, 또는 주위의 상황까지 두루 살펴야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오랜 시간 살아온 만큼, 다른 동물들로 많이 지내 온 만큼의 보는 눈은 있었다. 번드르르한 말로 치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로젤린의 눈에 두 사람은 제법 괜찮은 자들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을 섞어 놓아도 똑같이 이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다.

지목된 두 명을 제외한 수습 기사들은 기분이 매우 상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레티시아는 중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힘없는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 심지어는 ‘뿌리’의 에버하르트까지 뽑다니. ‘뿌리’는 작위를 받지 않은 평민 출신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가문 명이었다. 평민과 몰락 귀족? 고작 저런 이들을 곁에 둔단 말인가? 상급 기사쯤 되면 더욱 위로 올라가기 위해 세력을 모으기 마련인데 붉은수레바퀴 로젤린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속으로 불쾌한 감정을 삭이려 노력했다.

레이몬드의 손짓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만 남았다.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로젤린은 열렬한 그들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에버하르트, 레티시아.”

“예!”

“그대들은 수습 기사의 기숙사를 벗어나, 로젤린 경이 머무는 숙소 근처로 배정될 것이다. 로젤린 경의 생활과 임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고, 그대들이 하급 기사가 되어 황자 전하에게 충성을 바칠 때까지 계속된다. 그대들이 로젤린 경을 존경하며 따르는 만큼, 로젤린 경 또한 그대들을 가르치며 이끌 것이다. 이의 있는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에버하르트는 이제 숨기지도 않고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었다. 수습 기사는 이름만 기사지, 정식으로 서임받은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월급을 받지도 않고 기초적인 가르침 이외에는 어떠한 교육도 받지도 못했다. 허름하고 낡은 건물에 몇 십 명이 함께 살아가며 생활비 또한 자신이 충당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상급 기사는 스승이기도 했고 주군이기도 했으며, 안정된 생활을 보증하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쪽방을 벗어나 상급 기사의 기숙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로젤린의 방만큼 호화롭지는 않지만, 여태껏 지내 왔던 곳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직 하급 기사로 정식 서임받은 것도 아니지만 몇 년간의 고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눈시울을 붉히다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가다듬고, 활짝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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