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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천을 늘어놓았던 저택은 며칠간의 긴 침묵에서 벗어났다.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전투로 사망했을 거라 추측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가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상을 당했다는 표식의 하얀 천은 치우다 말았는지 반쯤 애매하게 성벽에 걸쳐져 있었다. 천을 거둬들이는 것보다 급한 일이 많았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도 잠시, 백작가의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표정을 잔뜩 굳힌 채로 들어왔다.
“누님은?”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아가씨는 방에 계십니다. 높이 계시는 분이 굽어살폈나 봅니다.”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음에도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크고 작은 상처들 때문에 출혈이 상당했으며 고열에 시달리는 상태였다고.
막 발견했을 당시에는 생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위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스타에서 치료받아야만 했다.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지만 그녀는 줄곧 눈을 뜨지 못했다.
하다못해 객사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그녀를 비스타에서 백작가로 옮기라 명했다. 환자의 몸에 무리가 가는 여정이었지만 놀랍게도 이튿날 아침, 그녀의 의식이 돌아왔다. 아가씨께서는 집에 돌아오고 싶었던 게지요. 집사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칼릭스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하인과 하녀 몇 명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층에 올라서니 퉁퉁한 백작가의 주치의가 막 로젤린의 방을 나오고 있었다. 그는 찌푸린 표정으로 급하게 올라오는 칼릭스를 보더니 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님은 좀 어떠신가.”
“아, 칼릭스 도련님. 아가씨께서는 이제 열도 내리시고…… 무사하신 것 같습니다…….”
말이 길게 늘어지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칼릭스는 가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침묵이 묵직하게 주치의를 압박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어코 한 단어를 더 토해 냈다.
“아마도…….”
말이 왜 저따위야. 무사하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건지. 한층 더 사나워진 칼릭스의 표정에 주치의 바시오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원래도 땀을 많이 흘리는 자였는데, 지금은 무슨 비라도 맞은 양 흠뻑 젖어 있었다.
전조가 좋지 않다. 칼릭스는 제 마음이 요동치려는 것을 겨우 다잡았다.
“누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 그것이.”
칼릭스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남매지간이라 하더라도 허락 없이 드나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칼릭스.’
어릴 적 많이 혼났던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방 주인의 허락을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칼릭스의 시야에 침대에 앉아 있는 누이가 들어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난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고 얼굴엔 작은 생채기가 여럿 있었다. 얼굴이 핼쑥해 보였지마는 며칠간 생사를 오갔던 사람치고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칼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 바시오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괜히 불안했던 것이다.
칼릭스는 미간에 잡고 있던 주름을 풀고 로젤린에게 다가섰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를 끌어 앉는 동안에도 그녀는 말똥말똥 칼릭스의 얼굴만 쳐다봤다. 제 누이의 무덤덤한 성격을 잘 알고 있으나, 그 험한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의 반응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어색했다. 얼싸 부둥켜안고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이렇게까지 평온할 일도 아닐 텐데…….
“누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시계 침이 똑딱이는 소리가 흘렀다. 칼릭스의 물음에도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일자로 다물린 입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류에, 칼릭스는 “누님?” 하며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예쁜 페리도트색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담았다. 로젤린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다가, 올라갔다. 그간의 고생을 입증하는 듯 거칠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몸, 좀 괜찮. 어, 디 불편하…… 아니?”
칼릭스는 그녀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확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위화감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의 행동이 당황스럽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젤린은 여전히 칼릭스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감정 한 톨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는 평소보다 서늘했다. 칼릭스는 제 낯을 몇 번 쓸어내리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목소리만은 차분하고 상냥했다.
“조금 쉬세요, 누님.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조금. 쉬……세요.”
“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뒤돌아선 칼릭스는 주치의를 째려보았다. 바시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방 밖을 나서는 칼릭스를 뒤따랐다. 문이 닫히고 복도에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릭스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 주변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바시오는 어린 주인의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차마 칼릭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송구스럽다는 듯 그의 발끝만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바시오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는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제 진단을 그에게 전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쳤다. 출혈도 심했다. 심신이 미약하여 잠시간 기억을 잃은 것 같다. 나이 든 노인들이 치매에 걸리면 언어 체계가 무너지기도 하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치매?”
칼릭스는 인상을 확 구겼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에게 ‘치매’ 따위의 단어가 붙여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바시오는 급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뇌는 아주 섬세한 부분이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언어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 드리고 싶었던 것이지 아가씨께서 치매에 걸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누님께서 날 기억 못한다는 얘기인가?”
“송구합니다만, 아가씨께서는 현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셨습니다. 하지만 방에 걸려 있는 가문의 문양을 보시더니 ‘붉은수레바퀴’라고 말씀하셨지요.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가능성이 높다 이거지.”
“아가씨는 지금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사실 이런 때에는 어떤 말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도련님. 다만 아가씨의 치료가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지금의 증세가 호전되리라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육체와 정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정론이다. 하나 틀림없는 말이었지만, 칼릭스는 답답한 마음에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릭스의 굳은 표정을 보는 하인과 하녀들이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는 제 머리를 엉망으로 쓸었다. 아까 방 안에서 보았던 누이의 행동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다.
항상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는 산발이고, 총기가 맴돌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성대에서는 거친 소리가 쉭쉭 새어 나왔다. 기사였기 때문에 항상 작고 큰 상처를 달고 살았던 누이였지만, 이런 경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래 아랫사람들은 주인의 행동 하나, 기분 하나에 큰 영향을 받는 자들이다. 아버지가 국경 수비 임무로 자리를 비운 지금 백작가를 통솔해야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쉬고 표정을 풀었다.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누이가 돌아온 기쁜 날에 할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성벽의 천을 마저 거둬들여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무사하다. 아버지께는 알렸나?”
“예. 도련님.”
“치료를 도와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군. 선물을 준비해 둬라. 서신은 내가 쓰도록 하지.”
“네, 도련님.”
“누님 방에는 전담 하녀를 정해 두고 소수만 드나들게 해라. 이상한 말이 붉은수레바퀴령에 나돌지 않도록.”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도련님.”
칼릭스의 명에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십 개의 하얀 천으로 뒤덮여 있던 커다란 성이 그 고고한 자태를 드러낼 즈음엔, 칼릭스 또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돌아오시라. 살아 돌아오기만 하시라. 그렇게 수백 번을 빌지 않았던가. 다른 기사단에 비해 로젤린이 속해 있던 2황자의 하얀밤 기사단은 유독 피해가 컸다.
2황자는 1황자와 함께 황태자 후보로 꼽히는 유명 인사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위명이 자자한 만큼 적 또한 많았다. 그 탓인지 이번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도 2황자를 집요하게 쫓더라는 얘기가 왕왕 들렸다. 다른 기사단의 배가 되는 피해가 발생한 것은 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로젤린이라는,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단원이 죽었으리라 하는 추측이 기정사실화되어 나돌았던 것이고.
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팔다리 어디 하나 못 쓰는 곳 없이 그 격전에서 살아남았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 또한 높다. 천운이었다.
“누님께서는 뭔가를 좀 드셨나?”
“점심에 환자식을 드셨습니다. 오래 굶으셔서 얼마 못 드실 줄 알았는데, 세 그릇 드시고도 탈이 나지 않는걸 보니 후에 저녁을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 식사도 누님 방으로 올려라. 같이 먹겠다.”
“네, 도련님. 곧 준비하겠습니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성벽을 물들이고 마지막 남은 하얀 천을 하인들이 거둬들이고 있었다. 천이 흩날렸다. 칼릭스는 멍하니 제 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깜박 깜박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는 행위를 어색하게 반복했다. 얕은 위화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칼릭스는 제 마음속의 그것을 차곡차곡 접어 한구석에 두었다. 하인이 식사 준비가 끝났노라 알려 왔다.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잘 돌아오셨다, 무사하셔서 기쁘다고.
저녁을 먹기 전에 얘기해야겠다.
* * *
결과적으로 칼릭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제 누이가 맨손으로 스테이크를 쥐고서 우악스럽게 뜯어 먹고 있는 지금의 이 장면 때문에.
볼은 다람쥐처럼 양쪽 다 불룩해져 있고, 손과 입에선 스테이크의 육즙과 적갈색의 소스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테이크의 피가 흐르며 미묘하게 공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가에 우뚝 섰다. 눈앞의 광경을 현실이라고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에서 이십 년 이상 근무한 노련한 하녀조차 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예법을 개한테 줘 버리고 살아 돌아온 아가씨. 맨손으로 스테이크를 잡으면 뜨거우실 텐데, 라는 걱정은 그녀가 고깃덩어리를 씹어 먹는 당찬 모습에 쑥 들어갔다.
문제는 마침 방에 들어서 그 모습을 목격한 칼릭스 도련님의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녀는 아가씨의 거친 식사를 도와야할지, 아련히 흩어지는 도련님의 정신을 보살펴야할지 정하지 못해 멀뚱히 서 있었다. 쩝쩝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칼릭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
“…음…… 벌써 고기를 드셔도 되는 건가? 부담이 되지는 않고?”
그는 눈앞의 광경을 애써 무시했다. 하녀 또한 아가씨 어깨의 실밥을 떼어줄지언정 그녀의 손에 들린 고기는 보이지 않는 양,
“의식이 없으실 때에도 수프와 환자식을 조금씩 흘려 넣긴 했다더군요. 아침에 드신 수프에도 고기를 잘게 다져서 넣었는데 별 탈이 안 나신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
칼릭스는 그녀 몫으로 나온 수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제 몫으로 나와야 했을 스테이크의 행방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그래.”
칼릭스는 간이 안 되어 있는 묽은 수프를 입에 넣었다. 밍밍해서 아무 맛이 없었지만, 그 맛을 음미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삼분의 일쯤 남은 스테이크를 입에 욱여넣었다. 칼릭스는 두 볼 빵빵해진 제 누이의 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면 어쩌시려고요.”
로젤린은 한번 끄덕이고는 꼭꼭 씹었다. 두 살 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항상 어른스럽던 누이였다. 이런 아이 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유년기의 누이와 식사를 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미소 짓고 있던 칼릭스는 도로 표정을 일그러트려야 했다. 로젤린이 손에 묻은 소스를 핥기 위해 혀를 날름 내밀고 있었다.
탁.
다행히 칼릭스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잡은 덕에 미수로 그쳤다. 칼릭스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제가 아직 거기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누님.”
전과 후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과 기사도가 담겨있던 누이의 소스 핥는 모습은 너무 파괴력이 컸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제지에 인상을 썼다. 줄곧 무표정이던 얼굴에 나타난 첫 감정이었다. 짜증.
칼릭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로젤린의 짜증이라니, 정말 희귀한 것이었다. 본디 그녀는 천성이 순하고 선했으며,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계기로 자신을 더 돌아보고 수련했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대대로 내려오는 쭉 째진 날카로운 눈이 한층 더 예리해져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불만 가득 찬 표정을 보고 황급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누님이 좋아하시던 아보카드 샐러드입니다. 이걸…….”
‘이걸 드세요’라고 말하려던 칼릭스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샐러드를 보는 로젤린의 표정이 한층 흉흉해진 탓이었다. 뭐야 이 풀떼기는.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드시지 말고…… 조금 있으면 스테이크를 가지고 올 테니 그걸 조금만 더 드세요. 조금만입니다.”
로젤린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끄덕였다. 칼릭스는 핑거볼에 담겨 있는 물로 그녀의 손을 대충 씻어 내었다. 그녀는 쩝 하며 아쉬운 소리를 내긴 했지만, 얌전히 그에게 손을 맡겼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리고 그녀는 참으로 담백한 남동생이었으며 누나였다. 그 흔한 포옹도 볼에 하는 입맞춤도 해 본 적 없었다. 손을 핥기에 더럭 붙잡았지만 이 짧은 접촉마저도 참 어색했다. 어릴 때에도 잡아 본 적 없던 누님의 손을 스물 하나 먹고 잡아 보는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핑거볼의 레몬을 집어 먹고 웩웩거려서 그의 감성을 다 깨 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그런 낯선 기분에 잠시간 싱숭생숭 했다.
“누님.”
로젤린의 눈동자가 굴러 칼릭스를 향했다. 웃지 않으면 째려보는 것 같다거나, 화가 난 것 같다던 평을 받는 날카로운 눈이었다. 똑같은 얼굴인데도 오늘의 여러 사건 때문인지 맹하게 보였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누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증조할아버지께 똑같은 질문을 했던 것이 기억나, 칼릭스는 큭 하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누님의 두 살 아래 동생 칼릭스입니다. 누님이 기사단 일로 바쁘셔서 최근에는 자주 뵙지 못했지요. 물론 편지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는 했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내시더군요. 아, 누님은 황실 기사단 소속입니다. 정확히는 2황자 전하의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의 하급 기사이시죠.”
로젤린은 칼릭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 보였다. “응.”이라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느껴졌다.
“아버지…… 그러니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국경을 수비하시는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마무리 할 일이 있어 곧장 오지는 못하시지만, 아버지께서도 누님 걱정을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이 더 사나워져서…… 지나가는 어린 영지민마다 자지러지듯이 울었죠.”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일라베니아 제국 평균 남자 키를 훌쩍 뛰어넘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부리부리하고 날카로운 눈, 밤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머리, 짧게 정돈된 수염. 왼쪽 눈의 세로로 난 긴 흉터까지. 흉흉한 생김새와 더불어 가문의 기사단을 이끄는 그의 사나운 기세는 붉은수레바퀴 영지의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힘을 더했다.
칼릭스는 영지를 시찰하며 돌아다닐 때 ‘카민! 너 말 안 들으면 붉은수레바퀴 백작님이 이노옴 한다! 이놈 백작님 보고 이놈 하라고 한다!’ 하면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거나 하는 장면을 종종 보고는 했다. 어이가 없었다. 깊은 산에 들어가면 그림자한테 잡아먹힌다던가, 거짓말을 하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수준으로 제 아버지가 쓰이고 있다니.
“아버지께서는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휘하의 가문들 또한 영지민을 함부로 대하지 않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와인도 있을 정도로 존경받고 계십니다.”
로젤린은 호오 그렇군, 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맛은 좋아?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웃음을 작게 흘렸다.
“하지만 누님은 못 드십니다. 포도 알레르기가 심하시거든요. 저희 영지의 대표 작물이 포도인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며 누님께서 항시 슬퍼하셨…….”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 제 누이가 뜯어먹던 그 스테이크. 거기에 뿌려져 있던 소스의 색이 붉은 빛을 띠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칼릭스는 와인을 졸여 만든 소스를 좋아했다. 별다른 주문이 없었으니, 자신의 몫으로 나온 스테이크의 소스는 그것이었으리라. 손으로 식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충격을 먹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제 누이는 조리가 되어 있든 아니든, 포도를 먹으면 피부의 붉은 발진과 함께 기도가 부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극심한 알레르기가 있다. 칼릭스는 창백한 낯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누님!”
로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칼릭스가 마구잡이로 몸을 살피는 대로 이끌렸다. 그는 그녀의 목과 가슴팍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진즉에 피부에 붉은 발진들이 생겼을 양과 시간이었다.
“숨 잘 쉬어지세요? 목 안이 붓는 것 같다던가, 하지는 않으십니까?”
로젤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해 보세요.”
“아.”
칼릭스는 그녀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에도 한참을 살폈다. 눈, 피부, 목, 그녀의 숨소리 하나하나 지켜보던 그가 숨을 크게 쉬며 풀썩 자리에 앉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상태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도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종을 울려 하인을 부르려던 차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전 칼릭스 몫의 스테이크를 가지러 갔던 하녀였다.
“아가씨!”
하녀가 다급히 외치며 들어왔다. 그녀 또한 지금의 상황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로젤린에게 다가가 자신이 한 것처럼 목과 가슴, 등을 확인했다.
“아가씨 숨이 제대로 쉬어지세요? 목이 붓는 것 같지 않으세요?”
로젤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 해 보세요, 아가씨.”
“아.”
하녀는 로젤린을 샅샅이 살피다가 한숨을 푹 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은 스테이크가 올라왔다. 지글지글 끓는 스테이크를 로젤린이 손으로 잡기 전, 칼릭스는 먹기 좋게 썰어 그녀 손에 포크를 쥐여 줬다. 그가 먹는 시범을 보인 후로는 로젤린도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아가씨가 드실 줄 모르고, 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다. 나도 잠시간 잊고 있었으니.”
“그래도 천만다행이네요. 이델라브힘께서 도우시나 봅니다. 어렸을 때 알레르기를 앓다가 완화되는 경우는 있다고 듣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알레르기 약을 식후에 드시는 편이 낫겠어요.”
하녀는 잰걸음으로 주치의를 찾아 나섰다. 칼릭스는 로젤린으로 인해 난잡해진 식탁을 하나하나 훑었다. 한입 먹고 내버린 아보카드 샐러드. 비어 있는 스테이크 접시. 흔적을 찾기도 힘든 와인 소스.
[정말 작은,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잘 살펴야해, 칼.]
그는 등골을 서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감각에 얼굴을 굳혔다.
[눈썹을 움칠거린다던가, 눈동자를 굴린다던가, 식은땀이 난다던가, 혀로 입술을 핥는다던가. 숨기려 해도 그 사람은 너에게 많은 정보를 얘기하고 있을 거야. 말로 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욱더.]
칼릭스는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예전의 로젤린을 겹쳐 보았다. 상상 속 그녀는 볼에 음식물을 묻히고 있지도 않았고 구불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지도 않았다. 목 끝까지 채운 하얀 제복. 하나로 높게 묶은 검은 머리, 생생하게 빛나던 올리브색 눈동자.
[말로 무장한, 거짓으로 위장한 자들의 이면을 읽어 내야 해. 너라면 잘 할 수 있어. 붉은수레바퀴의 사람들은 감이 좋으니…….]
그녀가 어릴 적 말했던 것과 같이 자신과 제 누이는 아주 예민했다. 문제와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검술 실력과 함께 뛰어난 동물의 감으로 유명한 자였다. 이상하게 후퇴하고 싶더라니 타국의 함정이 있었다더라,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어서 냅다 패고 잡아 봤더니 타국의 간자라더라. 하는 묘한 무용담의 소유자였다.
로젤린이 말한 대로 이상하게 발달된 감은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징일지도 몰랐다. 칼릭스는 인정했다. 줄곧 눈앞의 누이에게서 느껴지던 얕은 위화감. 단순히 기억을 잃어 버렸다던가, 행동 양식이 예전과 다르다던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였다.
칼릭스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로젤린을 담았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날름 핥고 있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면이 다르다면 그것은…….
* * *
로젤린은 극진한 보살핌으로 빨리 회복했다. 믿을 수 없는 회복 속도 때문에 바시오는 자신의 의술과 약 제조 실력이 이제는 신의 영역까지 손을 뻗친 건가 생각했다.
칼릭스는 매일매일 그녀를 찾아가 간호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참 눈물겨운 우애였다.
이따금 칼릭스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로젤린이 실종된 기간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던 것치고는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소문의 당사자,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차갑고 무뚝뚝한 성정으로 유명한 자였다. 사건이 마무리되었으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뿐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로젤린의 일과는 단순했다. 일어나면 밥을 먹고, 쉬다가 먹고, 또 쉬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먹은 후 잤다. 식사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때문에 멍하니 백작가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되었다. 방 안에서나 입는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곱슬머리는 묶지도 않아 산발이 되어 있는 매우 자유분방한 차림새로.
이에 집사는 명석하고 똑똑했던 아가씨가 백치가 되어 버렸다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고 칼릭스는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백작가에 이런저런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사고 전의 로젤린이 보여 온 행실 덕분인지 다소 그 소문의 내용이 이상했는데…….
“아가씨의 머리가 좀…….”이라는 서두로 시작했다가 옆에 있던 다른 하녀에게 등짝을 맞고서는 “역시 과하게 똑똑하셨었지…… 약간은 덜 똑똑해지셔도 괜찮아.”로 끝나기도 했고, “맨발로 걷는 게 몸에 좋대. 역시 우리 아가씨 영특해.” 혹은 “머리 풀고 계신 거 완전 와일드해. 유행을 이끌어 가는 신여성. 우리 아가씨 멋있어.”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칼릭스는 제 보좌관이 모아 온 로젤린에 관한 소문들을 쭉 읽어 내렸다. 칼릭스는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 누님께서…… 높이 계시는 분의 가호를 받아 6일 만에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 돌아오신 후 백작가에 퍼진 검은 죽음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오신지 하루 만에 눈을 뜨셨고, 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백작가를 두루 살피시어 민심을 안정시키셨으며 낮은 자들을 위해 제 머리 흐트러지는 줄도 모르고서 발 벗고 나섰다고?”
“네.”
“……그래…… 정말 발 벗기는 했지…….”
하녀들의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았지만, 칼릭스는 차마 그 말을 뱉지 못하고 흠 하는 소리로 묻어 버렸다. 주인의 허물을 감싸는 태도가 가상하다 못해 무서운 수준이었다.
“누님이 아이들한테 잘해 주셨다는 건 알았지만, 덜 익은 과실더러 황금 사과라고 하는 수준인데…… 뭐 누님께 해가 되는 건 아니니 주의만 조금 주도록 해.”
“아가씨의 인품이 빛나는 순간인 거죠. 뭐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 오찬을 함께하고자 하셨습니다. 아가씨도요.”
“알겠다. 누님은 내가 모시고 가지.”
로젤린은 오늘 또한 복도 한 편에 앉아 있었다. 칼릭스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 낮잠이라도 자는 듯 보였지만, 아래층의 하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입이 웅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입모양을 읽기 위해 집중했다.
‘하녀장님이 오늘은 시트 전체적으로 갈라고 하시더라. 아, 그렇지. 아가씨 실종 사건 때문에 정신없어서 저번 주는 그냥 넘겼었지? 다들 팔 걷고 나서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일 끝나고 놀러가자. 비비안도 이번에 옷을 좀 사고 싶다던데 같이 갈까? 응, 내가 비비안이랑 같은 구역이니까 말해볼게. 아, 저기 마침 비비안이. 비비안! 오늘 저녁 일 끝내고 시장에 같이 가자. 그래, 안 그래도 이번 주 중으로 사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하녀들의 목소리와 로젤린의 입모양이 겹쳐졌다. 칼릭스는 제 팔뚝 위로 오소소 돋은 닭살을 확인했다. 한두 번 목격한 장면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섬뜩했다. 그녀는 집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듣고 반복해서 학습하고 있었다.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는 언어를 습득해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처럼.
칼릭스가 상념에서 급하게 깨어났을 때는 그녀 또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어두운 복도 한구석에서 로젤린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칼릭스는 걸음을 옮겨 로젤린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어머니께서 돌아오셨어요. 같이 점심을 하자고 하십니다.”
로젤린이 반색했다. 분명 ‘어머니’가 아니라 ‘점심’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으리라. 칼릭스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손을 잡고 냉큼 일어났다.
“칼릭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인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참 대단한 학습 속도였다.
* * *
“괜찮은 겁니까?”
칼릭스의 보좌, 알터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찬에 가기 전, 로젤린은 잠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두 명은 근처 가까운 응접실에서 대기했다. 알터는 탁자 위에 놓인 오셀로 판의 나무 조각을 뒤적이고 있었다. 게임 하자는 건가 싶었더니 흑색 말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가 실종되었는데, 그것도 몰라. 다쳤는데, 그것도 몰라. 돌아왔는데, 그것도 몰라. 심지어 당장은 밝힐 생각조차 없으시죠? 엄청 섭섭해하시겠는데요.”
붉은수레바퀴 백작 부인. 에델바이스.
그녀가 딸의 실종소식을 들은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6일간 실종이 되었을 때에도,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서 치료를 받을 때에도, 또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 돌아왔음에도, 에델바이스는 어떠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에스터에서 제법 벗어난 바다가 보이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별장에 머물렀다. 특별히 앓는 병은 없었지만, 툭하면 쓰러지고 툭하면 아파서 요양이라는 이름하에 일 년에 반 이상은 그곳에 있었다.
칼릭스는 얼마 전, 에델바이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상황에서 제 누이가 실종되었고 백작가에서는 하얀 천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로젤린을 찾으면 연락해야지,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연락해야지, 집에 오면 연락해야지, 눈을 뜨면 연락해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삼일 전 겨우 연락해서 이틀 전에 소식이 닿았다.
물론 그 소식을 전하는 것도 그녀가 죽다 살아났다던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던가 하는 서술을 몽땅 빼먹은 채 [사냥 대회에서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집에서 심신을 안정시키며 요양 중입니다.]라고 축약해서 보내야만 했다. 만약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간 그녀는 실신할게 분명했다.
“그것도 얘기 안하셨죠?”
“뭐.”
“아가씨 머리가 좀.”
칼릭스가 눈을 시퍼렇게 빛냈다. 머리가 뭐. 내 누이 머리가 뭐. 뭐. 이상한 단어가 하나라도 나왔다가는 요절을 내 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가…… 좀…… 귀여워졌다는 거요.”
“…….”
칼릭스는 침묵했다. 알터는 그 침묵에서 긍정의 뜻을 읽어 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길이 천리만리였다.
로젤린은 곧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직 군데군데 붕대를 감고 있기는 했지만 소매가 길어 거의 감춰졌다. 얼굴의 자잘한 생채기쯤은 기사단 일을 하면서 항상 달고 있던 것들과 큰 차이도 없었다. 산발인 머리도 하나로 모아 곱게 정리 되어 있었고, 드레스도 입었다. 오랜만에 보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칼릭스와 알터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따라 쭉 내려와 드레스로 가려진 발치에 머물렀다. 눈치 빠른 하녀가 로젤린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들은 반질반질한 구두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신발도 신었군.
“우리 아가씨 완전 멀쩡해 보이네요!”
칼릭스의 팔꿈치가 알터의 옆구리를 매섭게 강타했다. 알터가 억 소리 내며 쓰러졌다. 칼릭스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짓밟고 로젤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누님. 어머니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 칼릭스.”
일주일간의 변화는 놀라웠다. 짧게 단어를 끊어서 얘기하던 첫날과 달리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여자 말투였다가, 남자 말투였다가, 존대를 했다가 반말을 했다가, 그날 들은 것에 따라 마구잡이로 변하긴 했지만 단어를 벗어나 문장을 구사하게 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집사는 우리 가문에 전무후무한 천재가 나왔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칼릭스는 이 집안의 분위기가 정말 극성맞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많이 부족했다. 막 입이 터서 들리는 말을 무작정 반복하는 아이와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단박에 이상함을 느낄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부터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 정도야 간단한 대답으로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어머니가 말을 걸면요?”
“네, 또는 아니요.”
“식사 하실 때는요?”
“포크랑 나이프랑 스푼을 써야지.”
“훌륭하십니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빛이 부서지는 샹들리에, 백작 부인의 귀환에 잔뜩 솜씨를 부려 화려해진 만찬장. 로젤린은 그 광경을 휙휙 소리 나게 둘러보는 중이었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갈색 머리의 여인과 다정하게 포옹했다. 그녀 또한 몇 개월 만에 본 아들을 품에 얼싸 안았다. 그녀는 곧 로젤린도 꼭 껴안더니 얼굴을 붙잡고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 로즈. 얼굴이 너무 상했구나. 아직 많이 아프니? 괜찮은 거야?”
“네.”
“숙녀 얼굴에 이게 뭐니 정말. 그런 기사단 당장 관두라고 했지!”
“아니요.”
만나자마자 쓸 수 있는 두 개의 대답을 전부 소모해 버렸다. 칼릭스가 급하게 끼어들어 둘 사이를 중재했다.
“어머니!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자리에 앉으세요.”
“그래, 그래. 내가 아픈 애를 붙들고 또 잔소리를 하고 있었어. 앉자꾸나.”
“네.”
로젤린은 참 꼬박꼬박 대답을 잘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하셔야 대화가 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제 누이는 한번 가르치면 잊지 않는 것 같았다.
급성 단기 교육이었지만 로젤린은 포크와 나이프를 곧잘 사용했다. 칼릭스는 제 눈물겨운 노력의 흔적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의 로젤린을 기억하는 에델바이스에게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듯 했다. 차마 입 밖으로 타박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살짝 인상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입을 너무 벌린다는 둥, 음식물 씹는 소리가 크다는 둥. 만약 로젤린이 다쳐서 요양 중이지만 않았더라도 진즉에 몇 마디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달그락.
로젤린이 스푼을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크게 울렸다. 에델바이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보다 한숨을 뱉었다. 천천히 그녀의 상태를 알릴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를 당겨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
“왜 그러니, 칼릭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그전에 나부터 말하자꾸나. 로즈?”
로젤린은 입안에 음식을 넣은 채 “네.” 하고 대답했다. 에델바이스의 표정이 확 찌푸려졌다.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이라고 당장에라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여자애가 매일 밖으로 다니기만 하고, 기사단이니 뭐니 하면서 다쳐 오잖니. 이번에도 그렇고 말이다. 이 어미가 항상 노심초사하며 걱정 하는 건 알고 있니?”
“아니요.”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누이의 정직함이 아찔했다. 에델바이스가 얼떨떨해 하고 있어서 그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 누님께선…….”
“아니 되었다. 그래. 집에서 좀 떠나 있었더니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구나.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니 로즈.”
“네.”
“이번에도 네가 다쳤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팔이 부러져도 출근하던 애가, 무슨 사달이 났기에 집안에서 쉰다는 얘기가 나오나 해서.”
“네.”
“그래서 이 어미가 별장을 떠나기 전에 여기저기 알아보았단다. 너도 가정을 이룰 때가 되었잖니…….”
“어머니!”
칼릭스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항시 입에 달고 살던 안건이었으나, 죽다 살아난 누이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물론 부모로서는 제 딸이 위험한 검을 놓고 좋은 집에 시집가 편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게 당연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로젤린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서로의 이상이 너무나 다른 탓에 둘은 번번이 부딪쳤다.
여자가 작위를 받고, 여자가 상인이 되고, 여자가 검을 드는 시대에 에델바이스는 과하게 고리타분한 감이 있었다. 심지어 에델바이스의 조국은 라고슈 왕국으로, 대륙의 어떤 나라보다도 여왕들의 집권 기간이 긴 나라였다.
“지금 꺼내실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보면 너보고 시집가라고 하는 줄 알겠구나, 칼. 누가 지금 당장 만나라고 그랬니? 좀 쉬다가 몸이 낫거든 한번 만나나 보라는 거야. 저 꽃다운 나이에 아깝게 이게 뭐니 대체. 이 어미가 어련히 괜찮은 사람 알아 놓았겠니? 서른하나에 젊은 백작인데 장사 수완도 아주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하더구나. 내가 에스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더니 동대륙에서 발굴되는 아주 귀한 보석을 주지 뭐니. 약혼하거든 이걸로 반지를 해서 우리 로즈가…….”
에델바이스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본인을 끼고 얘기하고 있음에도 꿋꿋하게 식사를 하던 로젤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식사법이 문제였다. 막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서 천연덕스레 뜯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순간 좌중이 침묵했다.
굳어 있던 칼릭스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보기 드물게 괴로운 소리를 내었고, 뒤에서 지켜보던 알터는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식사 예절 교육 당시, 떨어트린 것을 집어 먹지 말라는 내용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교육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시중을 드는 하인 또한, 바닥에 떨어진 빵을 치우려고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식탁보를 정리하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식탁보가 구겨진 게 신경 쓰여 다가온 사람 같았다. 상태 안 좋은 로젤린을 며칠간 보살핀 덕에 생긴 순발력이었다.
에델바이스는 지금 자신이 본 것이 ‘정말 현실인가? 뭔가 질 나쁜 장난을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 보아도 그녀의 딸은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 먹은 게 확실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로즈?”
로젤린은 주운 빵을 꼭꼭 씹어 삼키고 냅킨으로 입을 톡톡 닦았다. 그리고는 제법 도도한 표정으로,
“네.”
대답했다. 그야말로 100점 만점의 100점짜리 예절이었다.
* * *
칼릭스는 제 누이가 덜 똑똑해졌으며, 머리가 조금 귀여워진 것이라는 하녀와 알터의 말을 빌려 설명했다. 에델바이스는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조금…… 덜 똑똑해질 필요성이 있어서…… 조금 덜 똑똑해졌고…… 머리가 조금 귀여워지면…… 바닥에 떨어트린 음식을 주워 먹게 되는 거니?”
물론 그건 아니었다. 칼릭스는 제 어머니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약간의 정보를 흘렸다. 머리를 다쳐서 행동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의사의 말로는 곧 돌아온다고 하더라.
에델바이스는 눈물 흘리며 로즈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불쌍한 로즈…… 미인이 아니어도 똑똑한 아이라 안심이었는데…… 이제 얼굴도 머리도…….”
“……아니 그렇게 까지는…… 어머니…….”
로젤린이 집안에서 쉬는 동안 약혼을 진행하려고 했던 에델바이스의 모든 계획들이 전부 파기 되었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어느 백작에게 받아 왔다는 약혼석을 돌려주라고 하인에게 명령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수준의 아이를 시집보낼 순 없었다. 몸이 아픈 줄 알았더니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네 아버지는 아시니?”
“……머리를 조금 다쳤다는 건 아십니다.”
“우리 로즈가 약간…… 그…….”
에델바이스는 식사를 지속하는 제 딸을 보며 말을 최대한 골랐다.
“약간 덜 똑똑해진 건……?”
다들 미쳤다던가, 모자라다던가 하는 정확한 표현은 미루고 있었다. 칼릭스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에델바이스는 마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쓸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며 횡설수설하더니 쉬겠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에델바이스와 칼릭스는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많은 접시들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로젤린의 왕성한 식욕 덕분이었다. 그녀는 후식으로 나온 케이크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저 멀리 백작가의 요리사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주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 표정이었다. 칼릭스는 후우 숨을 내쉬었다. 길고 길었던 식사시간이 끝났다.
정신없는 오찬 후, 고풍스러운 원목탁자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칼릭스는 알터로부터 종이뭉치를 건네받았다. 자료의 양이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칼릭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알터가 흥 콧방귀 뀌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알아 오라던 자료?”
“제 피, 땀, 눈물입니다.”
칼릭스는 개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알터가 펄펄 날뛰었다. 어쨌든 이게 제 최선이라 얘기하는 것인데…… 누군가를 조사해 오라 명령하면 그 사람이 삼 년 전에 버린 속옷 색이 무엇이었는지까지 알아 오던 자의 솜씨가 아니었다. 그만큼 알기 어렵고 또한 알려져 있지 않은 정보라는 뜻이었다.
맨 처음 명령을 받은 알터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장성한 주인이 아이들의 입에서나 오르고 내릴 법한 허황된 괴담에 대해서 조사해 오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수족을 부리거나, 정보 길드를 통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 때문에 표정이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까라면 까는 게 하급자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알터는 정보를 수집하며 알게 되었다. 이 어이없는 명령이 단순히 자신을 골탕 먹이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순식간에 관통하는 그 섬찟함이란. 제 주인은 이것을 보지 않은 채로 진실에 대해 가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칼릭스는 알터가 가져온 자료를 한 자 한 자 읽었다. 십 분이면 다 읽을 짧은 분량을 꼼꼼히, 오랜 시간을 들여 정독했다.
알터는 시시각각 변하는 칼릭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들썩이기도 했고 제 턱을 마구 쓸기도 했다. 마지막 장이 팔랑, 덮임과 동시에 칼릭스는 이마를 짚고 거친 숨을 쉬었다.
자료는 [깊은 숲에 들어가면 그림자에게 잡아먹힌다.] 라는 유명한 괴담으로 시작했다. 그 또한 어릴 적 많이 들었던 얘기였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겁 없이 산을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의 일종이었다. 칼릭스 역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산을 경고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사나운 마수나 산의 위험함 그 자체를 그림자로 표현했다고 추측된다.
그 괴담은 영지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깊은 숲에 들어가면 그림자에게 잡아먹힌다.
숲의 그림자는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움직인다.
깊은 숲에는 사람을 흉내 내는 그림자가 있다.
숲의 그림자는 말을 한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깊은 숲’, 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이라는 장소의 특정과, ‘그림자’라는 존재의 확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