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좀, 번거롭지.”
“아뇨. 재밌습니다.”
붉은수레바퀴 성의 하녀들과 하던 소꿉놀이도 생각났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말로.”
리카르디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나무 상자를 열었다. 짙은 청색의 마른 꽃잎이 담겨 있었다. 그가 조그마한 집게로 꽃을 집어 잔의 중앙에 놓았다. 그러고 유리잔의 표면을 따라 따뜻해진 빗물을 흘렸다. 투명한 물에 짙은 남색 빛을 띠던 꽃의 색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찻물의 색이 몹시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분이 흐른 뒤, 잔에 담긴 물이 아름다운 남색으로 물들자 리카르디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잠시 눈 좀 감고 있으면…….”
“예?”
“누, 눈 좀.”
로젤린은 그의 요청에 따라 눈을 감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코끝에 상쾌한 과실 향이 느껴졌다.
‘레몬?’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리카르디스가 음흠흠 큼큼하며 심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떠도 된다.”
“와…….”
아까까지 푸른 빛에 가까운 남색이었던 꽃차의 색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분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색이 달라진 거지?
잠시 의아해하던 로젤린은 과거에 헤사가 말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푸른색의 블루멜로우라는 꽃차는 레몬즙을 떨어트리면 분홍색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로젤린이 감탄하며 ‘블루멜로우인가요?’ 하고 묻기 바로 직전, 리카르디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이야.”
“예?”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숙인 채, 이마에 손등을 맞대고는 다시 한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의 찻잔에, 행복해지는, 요정의, 마법을, 걸었어.”
“…….”
로젤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멈췄다. 아니요, 전하. 이것은 블루멜로우라는 꽃차이며, 차 안에 들어 있는 특정 성분이 레몬즙과 만나 분홍색으로 변한 겁니다. 하고 미처 말할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진정 이 현상을 마법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자신과 에델바이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는 것 또한.
칼릭스가 말해 준 것일까. 그래서 걱정이 되었던 걸까. 머릿속으로 찻주전자를 비장하게 들어 올리던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몰래 숨겨 온 레몬즙을 잽싸게 뿌리고 어딘가로 숨겨 놓았을 거라 생각하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물 아래 잠겨 있는 것 같은 습하고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잠기게 했던 물이 레몬을 만난 블루멜로우의 색처럼 분홍색으로 물드는 듯했다.
로젤린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마시자 따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은은하면서도 시큼한 맛이 너무 웃겨서 로젤린은 블루멜로우 차를 뿜을 뻔했다. 그녀는 자아를 가지고 나서 이렇게까지 깔깔깔 웃고 싶었던 때가 없었다.
속이 간질간질하고, 귀에는 열이 몰리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붕 뜨는 기분. 이게 뭘까.
[행복해지는, 요정의, 마법을, 걸었어.]
어쩐지 답을 알 것만 같았다. 로젤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리카르디스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효과가 굉장합니다.”
손등에 이마를 괸 채 자괴감에 빠져 있던 리카르디스가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래?”
“예. 솔직히 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마시자마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비밀이야.”
그렇게 말한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던 수치심을 걷어 냈는지, 한결 가벼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사기를 쳤다는 걸 자각한 리카르디스는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하던 걸 멈추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콧잔등을 쓸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대가 기분이 좋지 않고, 슬플 때마다 내가 마법을 걸어 줄게.”
로젤린은 손안에 따스한 찻잔을 쥐고 그를 응시했다.
“그대가 행복해지게.”
그저 이 말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한 모금 더 차를 마신 후 빙그레 웃었다.
21
일라베니아 남부, 놋쇠저울 영지.
일라베니아 제국군은 중부 관문에서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휘하에 있던 변경 주둔군과 일부의 병력을 흡수하여 남하했다. 제국군의 목적지는 놋쇠저울 성곽도시로, 발타군이 중부 관문에 도달하기 전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곳이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제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거기다 날씨까지 좋았던 터라 예상했던 날보다 이틀은 더 빠르게 도착했다. 저 멀리 도시를 보호하는 거대한 성곽이 보였다. 전투의 열기와 시끄러운 병장기 소리는 이미 대기를 울리고 있었다.
발타군이 성곽을 에워싼 상태였다. 여기저기 늘어놓은 투석기와 공성 무기들, 하늘 위로 바늘 같은 화살이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성문을 뚫을 듯한 거친 공세였음에도 리카르디스는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함락되지는 않았군.”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뒤따라오는 로젤린에게 향했다. 그녀는 고삐를 쥔 채 말 위에 서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든 로젤린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남쪽 성벽, 발타의 병사들이 보입니다.”
발타군이 공성 탑이나 사다리를 통하여 아슬아슬한 균형을 무너트렸다는 얘기였다. 몇 배가 되는 놋쇠저울군을 상대하는 발타군의 형국이 불리하긴 했으나, 며칠간 수성에 진이 빠졌던 놋쇠저울 병사들의 사기를 꺾을 수는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바람이 세게 분다 싶더니, 거대한 독수리가 일라베니아 제국군을 향해 날아왔다. 전황을 둘러보기 위해 떠났던 마카롱이었다. 마카롱은 말 위에 서 있는 로젤린을 발견하고 내려왔다.
로젤린이 팔을 내밀자 마카롱이 그 위에 살포시 안착했다. 그녀의 귓가에 대가리를 가까이 한 독수리가 남에게 들리지 않게끔 부리를 작게 열고 닫으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밟고 있던 안장에 앉았다. 그리곤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접근해 속삭였다.
“남쪽 성벽 위에 삼천 킬로미터 밖에서 봐도 눈에 띌 정도의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얼간이가 있다고 합니다.”
리카르디스는 환장할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영주인가.”
괜히 볼모로 붙잡혀서 몸값을 요구받거나, 성문을 개방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곤란하건만. 리카르디스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독수리가 다시 한번 로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늙어서 노망난 거 아니냐는 데요.”
“……지금만큼은 마카롱 경의 악담에 동조하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군.”
리카르디스는 재빠르게 지휘를 내렸다. 기동력이 좋은 기병대를 먼저 보내야 할 듯했다.
“중앙군의 기병대와 궁기병대가 먼저 출진한다. 본격적인 섬멸전에 앞서 발타군의 신경을 교란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병대가 궁기병대를 엄호하여, 후방에 있을 고위 지휘관들을 사살하라. 결코, 깊게 파고들지 말라. 그리고 로젤린 경.”
“예, 전하.”
“그대도 같이 출진한다.”
마카롱과 얘기하던 로젤린이 건틀렛을 만지작거리며 먼 전장을 바라보았다.
“명을 받듭니다.”
그녀의 기세가 베일 듯 날카롭게 표출되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곧 출정 준비가 끝났다. 리카르디스는 기병대의 선두에 자연스럽게 합류해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로젤린이 기병대장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무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다른 어떤 곳도 바라보지 않고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리카르디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리카르디스는 말에서 내려 지휘관들과 짧게 논의를 하던 참이었다. 다가오는 로젤린을 발견한 그가 손을 들어 잠깐 회의를 멈췄다. 군마를 타고 있는 그녀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젤린이 투구를 벗자 가볍게 묶어 둔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흘러내렸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전하.”
이상하게 너무 불안했다. 그냥 인사를 건네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으나 로젤린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이 리카르디스의 위기 경보를 마구 울려 댔다.
“나중에는 말씀을 못 드릴 것 같아서요.”
리카르디스의 마음속에 있던 불안감이 점점 커져 갔다. 심호흡한 그는 로젤린을 올려다보며 차근차근 얘기했다.
“좋다. 나는 지금 강철 같은 마음으로 무슨 말을 들어도 흠 하나 나지 않는,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이 될 준비가,”
로젤린이 고삐를 짧게 쥔 채 몸의 무게중심을 리카르디스 쪽으로 옮겼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되어, 있…….”
지 않았다. 이마에 따스한 감촉이 닿았다. 철컹, 철컹! 와장창! 뒤에서 누군가가 무기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리카르디스가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후련한 표정으로 다시 똑바로 말 위에 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느리게 상황을 인식했다. 그러니까 로젤린이 지금, 일라베니아 제국군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춘 것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너무 놀라서 강철처럼 굳어 버렸다.
“무운을 빕니다, 전하.”
미소를 날린 로젤린이 투구를 쓰고 고삐를 돌렸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멋있는 뒷모습인지. 얼굴이 발개진 리카르디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굳어만 있었다.
[그거 아나요 경?]
[예?]
[전하께서 경에게 하듯이, 경도 전하께 해도 되는 거예요. 그거.]
[그렇습니까?]
[마찬가지로 전하의 무운을 비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기사가 무운을 빌어 주니, 얼마나 든든하시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아, 그렇군요.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럼요. 좋아서 뒤로 넘어가실 거예요.]
레티시아는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접근할 때부터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발걸음을 급히 재촉했었으나, 늦어 버린 후였다. 레티시아는 차마 그 광경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손으로 두 눈을 가려야만 했다.
‘이델라브힘이시여…….’
에버하르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굳어 있는 동료 기사들에게 “아, 로젤린 경이 치명적인 기억상실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하고 연극적인 말투로 여유롭게 떠나 버린 당사자를 대신해 열심히 변명하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