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한참 뒤, 에델바이스가 비틀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어지러운지 마른 손으로 이마를 짚고선 헐떡였다. 로젤린은 말없이 그녀가 숨을 고르길 기다렸다. 에델바이스는 등받이에 눕듯이 기댄 채,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투두둑. 코끝까지 습한 냄새가 나더라니, 비가 내렸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델바이스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고슈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꽃 이름을 붙여 주는 경우가 많단다. 추운 곳이라 꽃을 보기 힘들거든. 어쩌다 한번 보게 되는 날이면 얼마나 놀랍던지. 그 아름다운 색, 앙증맞은 크기. 너무 예쁘고, 너무 소중하지 뭐니. 그래서 내 딸에게도 꽃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어. 비록 일라베니아에서는 고리타분하다고 받아들여질지언정.”
로젤린이란 꽃 이름은 없었다. 아마 여러 사정에 부딪혀서 애칭만이라도 꽃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리라. 로젤린은 자신을 로즈, 로즈. 하고 부르는 에델바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너무 예쁘고, 너무 소중하지 뭐니.]
정말 그런 목소리였다.
“조금 더 멋있는 이름을 지어 줄 걸 그랬나? 로젤린이 제 이름을 싫어했거든.”
에델바이스는 지친 듯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이마를 덮고 있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는 길을 응원해 줄 걸 그랬나. 어미라는 사람이 볼 때마다 그렇게 뭐라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
그녀의 손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같이 있을 걸 그랬나. 그렇게…….”
에델바이스는 위험해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행복하고, 빛났던 모든 시간이 후회로 뒤덮여, 색이 바래어진 기분에 나는 지금…… 너무나도, 비참하구나.”
로젤린은 걸음을 돌려 담요를 가지고 돌아왔다. 에델바이스의 무릎에 담요를 덮자 그녀가 흠칫 놀라서 눈을 가리던 손을 떨어트렸다. 무릎을 꿇고 담요를 정리 중이던 로젤린과 그녀의 눈이 딱 마주쳤다. 에델바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로젤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착하구나.”
그녀가 물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참 착해.”
에델바이스가 손으로 눈가를 훑었다.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에델바이스가 말을 꺼낸 것은 대략 십 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의 이 고통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손을 꼭 마주 쥐었다.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하지만 나의 잘못 또한, 아니야.”
그녀의 상체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에델바이스는 마주 쥔 손 위에 이마를 대고서 천천히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나는 너를 보는 게 몹시 괴롭구나. 앞으로도 너를 볼 때마다 내 행복했던 지난 시간마저 후회하게 되겠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단다.”
숨을 몰아쉬던 에델바이스가 천천히 일어났다. 로젤린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쳤다. 에델바이스는 지쳐 보였다. 눈동자에는 흐릿하고 혼몽한 빛만 감돌 뿐이었다.
“건강하렴. 전쟁에서도 다치지 말고. 그리고.”
그녀가 로젤린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아주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보자꾸나.”
에델바이스가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로젤린에게서 멀어졌다. 로젤린은 이것이 그녀가 건넨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다.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웠다. 자신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인.”
에델바이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로젤린이 그녀의 야윈 뒷모습에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건강하세요.”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달칵 문이 열리고, 달칵 다시 닫혔다. 방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 * *
로젤린은 익숙한 침대에 파묻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코를 킁킁거리니 내리는 비 냄새가 한껏 들어왔다. 그녀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소리였다.
한데 지금은 피부에 닿는 끈적한 공기가 짜증 났다. 잠들 즈음이면 톡 소리를 내서 정신을 깨우는 빗소리가 거슬렸다. 내일 또 행군을 해야 하는데, 진흙 때문에 초콜릿이 고생할 생각을 하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런저런 일과 공기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가며 투덜거리던 로젤린은 자신의 사고가 어느새 아까의 대화로 흐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봐도 결국은 돌아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노력할 수도 없는 일이고,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바뀔 수 없는 일이란, 피치 못한 일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정말 너무나도…….
똑똑.
천장을 쳐다보기만 하던 로젤린은 급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누가 방 앞을 지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누구와 만나 대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
로젤린은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목소리의 잔상을 따라 스르륵 움직였다.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달칵.
열린 문 틈새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해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거라 로젤린은 확신했다. 문을 열자마자 은은하고 청량한 향이 밀려왔다. 리카르디스였다.
“들어가도 될까.”
진군하는 내내 볼 수 없었던 편안한 옷차림새였다. 냉엄한 표정으로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그가 은색 갑주를 벗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딱 다물린 입술,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와 온몸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날카로운 기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 분위기가 다르구나. 로젤린은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더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카르디스는 야심한 시각, 다 큰 아가씨의 방에 들어가도 되냐는 대범한 요청을 한 것치고는 무척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들어올 생각은커녕, 방안을 흘끗흘끗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아차 하고는 발걸음을 옮기긴 했으나, 목을 가다듬는다든가, 손으로 아랫입술을 구깃구깃하게 만진다든가 하는 갖은 쑥스러움을 동반한 채였다.
로젤린은 자신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는 리카르디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온 적 없는 이가 서 있는 광경은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한 채 멈췄다. 무얼 보나 싶어 로젤린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떨궜다. 하얀 맨발이 보였다. 리카르디스의 방문에 놀라 슬리퍼를 신는 것도 까먹은 탓이었다. 예전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맨발로 성을 활보했다지만, 지금은 예법에 통달했다 자부하는 로젤린으로서는 참 민망한 일이었다. 발이 절로 꼼지락거렸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침대 아래에 있는 슬리퍼를 가지고 왔다. 건네받으려고 로젤린이 손을 뻗었으나, 슬리퍼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더 아래로. 로젤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리카르디스는 슬리퍼를 쥔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둔한 로젤린이 봐도 그가 뭘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직접 신발을 신겨 주려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너무 충격받아서 리카르디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울 뻔했다. 다행히도 그게 더 실례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에 멈출 수 있었다.
“저, 전하.”
로젤린은 당황하는 제 목소리가 낯설어 더욱 당황해 버렸다. 리카르디스는 기어코 슬리퍼를 신겨 주고서야 일어났다.
“신고 다녀야지. 다치면 어쩌려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가슴팍에 시선을 둔 채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낮은 테이블을 끼고 앉았다. 로젤린은 그제야 리카르디스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작은 트레이에는 투명한 찻주전자와 유리잔, 그리고 찻잎을 담아 두는 나무 상자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차를 드시려는 건가?’
그런데 물이 없었다. 그리고 이 늦은 밤에 갑자기 차를? 뭘까 싶어 바라보고 있자, 리카르디스가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쓸었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차를 마시고 싶은데, 그대가 깨어 있을 것 같아서.”
리카르디스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얘기했다.
“……그냥 그대와 같이 마시고 싶어서 왔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걸 문을 두드리고서야 알았어. 내쫓을 건가?”
약간 불쌍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로젤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젓자 리카르디스도 마주 웃었다.
“그런데 물이 없군요. 가서 떠올까요?”
“……아니, 이건. 특별한 차라서.”
리카르디스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체 얼마나 특별한 차이기에?
리카르디스가 비어 있는 투명한 찻주전자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우선, 빗물을 받아야 해.”
그러고는 딱딱한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거칠게 열었다.
굳이 빗물을? 이렇게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로젤린도 자리에서 일어나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돌출된 부분에는 꽃 화분 몇 개가 올려져 있었고, 찻주전자는 그 옆에서 같이 비를 맞는 중이었다.
투두독.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가 투명한 유리에 달라붙었다. 한 방울이 더 붙으니 무거운지 그제야 스르르 안으로 떨어졌다. 로젤린이 집중해서 바라보는 모습에 리카르디스가 남몰래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맑은 빗물이 담긴 찻주전자를 든 채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로젤린도 창문을 내리고 리카르디스를 따랐다. 큰 램프 위에서 물은 서서히 온도를 높여 갔다.
로젤린은 흔들리는 불빛을 보다가, 이따금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