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91화 (191/220)

191화.

딤라는 제르타예들의 말을 들으며 손으로 눈을 덮었다. 이 자식들을 어쩌면 좋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명, 두 명,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소리가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딤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딱. 유별나게 큰 소리도 아니었음에도 제르타예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반대.”

딤라가 말하자 다들 손을 우수수 들어 올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찬성.”

두 명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찬성의 이유를 들어 보니 가관이었다. 일라베니아를 돕는 척하다가 뒤통수를 치고 오겠단다. 딤라는 지팡이를 휘두르고 싶어졌다. 그 와중에 단 한 명 만이 손을 들지 않았다. 제일 먼저 발언한 남자였다. 관디테와 딤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갈라·제르타예. 형제는 왜 어느 쪽도 손을 들지 아니했나?”

“마음 같아서는 반대에 들고 싶었지만, 이런 중대한 사항을 의논도 하지 않으시고 ‘참전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딤라는 일라베니아의 콧대 높은 귀족들과 겸상을 하느니, 말똥 더미 위에 앉아서 식사를 하겠다는 쪽이었다. 그런 딤라가 일라베니아를 지지하는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

딤라가 갈라·제르타예의 가주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다른 이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보이느냐?”

“소심함?”

“결정 장애?”

“생각! 생각, 이놈들아!”

딤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소심함과 결정 장애라고 말한 남자와 여자를 두들겨 팼다. 다른 제르타예들이 딤라의 건강을 염려해 말리는 사이, 관디테가 갈라·제르타예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일라베니아에서 귀한 사람을 만났다.”

“그게 누굽니까.”

“일라베니아에 있는 갈라·제르타예의 핏줄들.”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주 상냥하고 귀여운 형제들이었노라. 특히 로젤린 경의 경우에는,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곤 했지.”

갈라·제르타예의 가주, 세와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생? 언니가 아니라? 그가 모호한 표정을 하자 관디테가 흐흐 웃었다.

“냉혹한 추위만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 내리라 생각했으나, 씹다 뱉은 음식물같이 미적지근한 온도를 지닌 일라베니아에서도, 과연 제르타예는 제르타예였다.”

딤라에게 교육받더니 일라베니아에 대한 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혹여, 제 핏줄 때문에 일라베니아의 일에 관여하시려는 겁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딤라가 했다.

“아주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만, 가장 중요한 건 제르타예가 누구의 곁에서 타오르고 있느냐 아니겠나.”

“……2황자 리카르디스를 말씀하십니까.”

“라이노의 첫째 아들놈이 죽어 지금 가장 유력한 다음 대의 황제 후보이기도 하지.”

“그에게서 무얼 보셨습니까?”

그의 말에 딤라는 가만히 지팡이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부족하기는 하다만,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달은 달이라 희미하게 빛나더구나.”

딤라가 관디테를 바라보자, 소녀가 열두 명의 제르타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영원한 서약으로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결코 잊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결정은 오로지 라고슈만을 위한다. 갈라·제르타예.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싸운다고 하지만, 결코 그것은 그 둘만의 일이 아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지났던가. 그 사이 대륙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끼어 도무지 쓸 만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쓸어 버릴 것은 쓸어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긴다.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싹이 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 종국에는 라고슈까지 피어날 수 있도록.”

딤라가 뒤이어 말했다.

“일라베니아에서 만난 황자는 그나마 싹수가 있는 놈이었다. 설원의 월계수에서 어떻게 이렇게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놈이 있나 싶을 정도였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으나, 라이노 그 소인배가 제 권력 유지해 보겠다고 아들을 전쟁터로 밀어 넣었지.”

제르타예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딤라의 말에 호응했다.

“그놈을 놓치면 아마 100년 뒤쯤에나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 나올 게다. 일라베니아의 영향력은 대륙 전역에 미친다. 단순한 남의 나라, 옆 나라의 권력 다툼이 아니란 말이다. 또한, 발타 놈들이 일라베니아의 추악한 치부를 들춘 상황이다. 일라베니아는 전례 없이 휘청이고 있어. 이번 전쟁에 대륙의 명운이 달렸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슈 왕실이 지원하는 것은 일라베니아가 아닌,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가 될 것이다. 그놈과 함께 발타를 쳐 내고, 일라베니아의 썩은 물을 교체한다.”

딤라의 말에 아까까지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제르타예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장난기 어린 모습들은 전부 사라지고, 혹한의 땅을 누비는 강한 전사들만이 남았다.

열두 개의 꺼지지 않는 촛불은 각 영지로 흩어져 병력을 소집하고 전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섰다.

* * *

일라베니아 중부.

일라베니아 제국군이 오늘 머무르게 될 영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대지는 나무와 풀이 말라붙어 있음에도 황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닦인 도로와 거리를 돌아다니는 분주한 사람들. 반듯한 건물 굴뚝에서 퍼져 나오는 따스한 연기까지.

추위에 잠든 희끄무레한 땅을 석양이 뒤덮자 황금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로젤린은 부쩍 성장해 다른 군마들보다 몸집이 훌쩍 커진 초콜릿의 위에서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발돋움을 했던 곳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령, 에스터.

저 멀리 가시같이 삐쭉삐쭉 솟아 있는 성의 첨탑이 보였다. 가슴 안쪽에 성에가 끼는 듯 그리움이 번졌다.

붉은수레바퀴 성에 다가가던 하얀밤 기사단원과 리카르디스를 맞이하러 온 이는 조만간 백작위를 계승할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였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영광을 그대에게.”

로젤린도 칼릭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안 본 사이 더 말랐는지, 인상이 날렵해져 예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쩐지 죽은 페르탄이 생각났다. 이 거대한 영지와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칼릭스가 날카로운 인상을 누그러트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두 남매는 나란히 이동했다. 잘 지냈느냐 안부를 주고받는데, 칼릭스가 모호한 방식으로 말을 끌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용건을 꺼내지 못하고 빙 둘러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로젤린이 참지 못하고 묻자 칼릭스가 끙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칼릭스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예전 같으면 무얼? 하고 물었겠으나, 로젤린은 사라진 주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 로젤린의 어머니. 그녀가 제 딸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부고 때문에 많이 힘드신 상황이라…….”

“응.”

칼릭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전과 같이 누님을 맞이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로즈, 로즈.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던 마른 여인이 생각났다.

“응.”

로젤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칼릭스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2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상을 치르는 중이라 집 안이 번잡하여 불편함을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시는 동안 편안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에델바이스는 백작 부인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말라 있었다. 수척한 낯빛이 그녀를 더 야위어 보이게끔 했다.

“축복을 그대에게, 백작 부인. 환대에 감사하오. 오늘 하루 잠깐 머무르고 갈 예정이지만, 일행이 많아 피해를 끼칠지도 모르겠군.”

“아닌 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칼릭스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낯빛이 좋지 않은데,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을 듯하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에델바이스는 칼릭스에게 손님 안내를 맡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뒤돌아서서 무언가를 찾던 그녀와 로젤린의 눈이 마주쳤다.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곧 계단 위로 사라졌다.

성의 모든 방과 연회장, 공간이 넉넉한 곳은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지낼 수 있게 간단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인과 하녀들을 따라 성에 따라온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흩어졌다.

해가 저물었다. 로젤린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서 목욕하고,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음식을 섭취한 후 자신의 방에서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로 방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의 허락에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에델바이스였다.

“잠시 시간 괜찮니?”

애써 웃고 있는 낯이었다. 로젤린은 가만히 에델바이스를 보다가 그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에델바이스는 시선을 떨군 채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얘기는 대충 들었단다.”

그녀는 손톱을 문지르거나 살갗을 비비는 행동을 했다.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그 말 이후 다시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구나.”

에델바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로젤린을 훑었다. 머리, 이마, 눈, 코, 입…… 발끝까지. 에델바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왼손 좀 줘 보겠니?”

로젤린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에델바이스는 샅샅이 로젤린의 손을 훑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끝에 작게 난 점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로젤린에게 다가온 에델바이스가 성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 아래에 작은 흉터가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풀썩 앉아서는 그녀의 헐렁한 바지를 걷었다. 정강이를 따라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에델바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로젤린은 그녀가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래…….”

흐느끼는 소리가 거칠어졌다.

“한 군데도 다르지 않은데 어떻게 내 아이가 아니야…….”

그녀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에델바이스를 부축해서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발작하듯 로젤린의 손을 떨쳐 내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보였다. 혐오감도, 두려움도 아닌 오직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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