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일 출진하기 전에 총사령관 임명식이 있을 것이다. 직위를 받을 사람은 당연히 나고.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암살 명단 제0순위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겸사겸사, 전쟁에서 패한다면 그 책임 또한 물으려고 하는 것이고.”
“효율 좋은 책략이로군요.”
“그렇군. 참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군.”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었다.
“죽으라고 보내는 곳이다. 전쟁에서 발타의 기세를 눌렀다 싶으면 그때부터 내가 위험해지겠지. 그러나, 내가 참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 본다. 그 누구든 무슨 수를 썼겠지. 그래서 나는 기꺼이 검을 들고 전장으로 가겠다. 조금이라도 내가 내 운명을 택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가겠다. 그 사지 속에 아주 좁은 틈의 활로가 있으리라, 믿는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는 한 사람, 한 사람 눈에 담았다. 마지막은 로젤린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었다. 이런저런 서류로 어지러워진 테이블 위에 섬세한 문양이 그려진 서류가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가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를 대 발타의 병력을 이끄는 일라베니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델라브힘의 가호 아래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대륙을 불안에 떨게 한 발타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라.]
테이블을 짚고 있던 두 손이 꽉 주먹 쥐어졌다. 숨을 깊게 내뱉은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반드시 승리한다.”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총사령관,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일라베니아력 589년에 발발한 대 발타 전을 위해 출진하다.
* * *
햇살과 함께 꽃잎이 내려지는 공간 속, 일라베니아의 국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은 기시감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를 포함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모두 몇 개월 전, 사절단의 자격으로 발타로 떠났던 날을 상기했다. 정말 똑같았다. 수도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찬 장면과 사지에 제 발로 들어 가야 한다는 상황까지도.
달라진 점을 꼽자면, 그때보다 인원수가 많아졌다는 것과 더불어 일라베니아의 대군을 독수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삐이익---
독수리가 한 번씩 창공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낼 때면 병사들은 번번이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이델라브힘의 가호가 따른다며 무척이나 좋아한다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기가 올라갔다.
[미미나 쥬쥬로 따라갈 생각도 하긴 했지. 근데 인간 놈들이랑 부대껴야 할 생각하니까 토 나와서.]
하고 저 독수리가 악담을 했다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할지 조금 궁금했다.
평탄한 여정이 이어졌다. 리카르디스가 총사령관 임명을 받고 “전군, 출진.” 하며 검을 뽑았던 때만 해도 눈에 예기가 감돌던 병사들은 어느새 관성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다. 나라에 큰일이 닥쳤으나, 그것은 먼 곳의 일이라 여기는 평온하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마차 안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돌연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듯했다.
똑똑.
바깥에서 마차 문을 두드려왔다.
“무슨 일이지?”
“전하, 그…….”
하얀밤 기사단의 단장, 스타스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가 짧은 침묵 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손님께서 전하를 알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전쟁터로 진군하는 와중에 손님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이 확실한가?”
스타스는 면목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리카르디스는 창문을 열어 그 ‘손님’의 정체를 확인했다. 병사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분홍색 개털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피로가 밀려왔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두 눈을 다시 뜨고 쳐다봐도 연분홍색 개털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군.’
라헤안시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늙은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 당나귀는 무언가를 천천히 씹으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위의 라헤안시는 헥헥대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당나귀를 어떻게든 재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전혀 빨라지지 않았고 그냥 꼴 보기 싫은 효과만 더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노새를 탄, 라헤안시의 뒤치다꺼리를 일임하고 있는 신관 베르움이 보였다. 그의 피로하고 아연한 표정은 모든 상념을 재로 만들어 날려 버린 듯했다. 한참 느리게 다가온 라헤안시는 마차 옆에 당도하고 나서야 에휴 하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늙은 나귀와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대신관의 복장이었다.
“혀엉!”
“리카르디스 전하라 부르셔야 합니다.”
신관 베르움이 조용히 그를 타박했다.
“형! 이렇게 중요한 걸 두고 가면 어떻게 해!”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술렁였다. 어떤 중요한 걸 두고 갔기에 대신관께서 몸소 당나귀까지 타고 행차한 것이지? 뭘 전해 주러 오신 거지? 그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리카르디스만 자신이 두고 온 중요한 것의 정체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중요한 거? 그러고 보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걸 두고 왔었군.”
그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었다. 입 밖으로 내뱉기 싫었으나, 앞에서 저렇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으니 한번은 맞춰 줘야 할 거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창문에 팔을 걸며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 라헤안시를.”
라헤안시가 우헤헤 웃었다.
“그래! 날 두고 가면 어떻게 해! 바보, 바보!”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난데없이 펼쳐진 깨가 쏟아지는 형제들의 애정 행각에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리카르디스로서도 입 밖으로 내뱉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으나, 라헤안시가 코를 먹는 소리까지 내 가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름 보람을 느꼈다.
어쨌거나, 제 목숨 불사하고 따라나선 게 아니던가.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조차 까먹고 있었지만, 그의 합류는 반가웠다. 누가 뭐라 해도 일라베니아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이었다. 그 실체가 어찌 되었건,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라헤.”
늙은 당나귀를 재촉하던 라헤가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잘 왔다.”
아까와 달리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그걸 느꼈는지 라헤안시도 바보 같은 웃음을 지우고는, 조금 덜 바보 같은 미소를 띠었다. 가만히 그의 개털을 만지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곧 의문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허락은 맡고 왔나?”
라헤안시가 몸을 배배 꼬았다. 그의 뒤에서 베르움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은 되었다.
“자식 농사 폭삭 망하셨군, 황제 폐하께서도.”
“대륙이 죽어 가고 있으니 흉년이 들 수밖에.”
라헤가 낄낄 웃었다. 리카르디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결국은 웃고 말았다.
* * *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대륙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건이 있기에 앞서 일라베니아를 떠났던 라고슈의 바이페렘, 관디테에게도 그 소식이 닿았다. 왕좌에 앉은 소녀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고 과일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관디테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딤라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몇 제르타예들이 염려스러운 기색을 내보이자 관디테가 과일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설마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이 있던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요즘 발타가 수상쩍게 행동한 걸 모르는 형제도 없을 것이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바이페렘.”
관디테가 과일 한 조각을 다시 입안에 집어넣었다. 가득 퍼지는 새콤한 맛에 말랑말랑한 소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으으…… 아무튼 이것은 예견된 일이었노라.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은 없다.”
“걱정되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이페렘.”
오가는 말을 듣기만 하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발언했다. 관디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엇이냐.”
“혹시나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전쟁 때문입니까?”
혹한의 땅을 이끌어 가는 열두 명의 제르타예 전원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왕실 아래에 묶여 있다고는 하나, 원래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야생마 같은 사람들이었다. 중요한 행사도 귀찮다고 안 오는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해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은 바이페렘의 고유 권한이었다. 하지만 라고슈의 군신 관계는 복종이 아닌 동맹에 더욱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기에, 바이페렘 또한 제르타예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때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때문에 이렇게 제르타예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것은 라고슈에 큰일이 날 때뿐이었으며, 제르타예들이 알기로 현재 라고슈 내에는 큰일이 없었다. 일라베니아와 발타가 전쟁을 시작했을 뿐이지.
남자가 지적한 부분 또한 그것이었다. 혹시 그들이 싸우는 판에 끼어들겠다고 말하려고, 우리들을 다 불러 모았느냐? 라는 것이었다. 관디테는 손수건으로 입을 쓱쓱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가 염려한 대로, 그렇다. 나는 오늘 일라베니아와 발타의 전쟁에, 라고슈가 참전하겠노라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제르타예를 불러 모았다.”
열두 명의 제르타예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참전이라니요, 바이페렘. 그냥 두면 서로 잡아먹다가 공멸하게 되는 최상의 결과가 펼쳐질 텐데요.”
“그리고 그때 나서서 꿀꺽해 버리는 거지.”
“그거 좋은 생각인데, 아. 바이페렘께서는 어느 편으로 참전하시려고 한 겁니까? 발타는 아닐 테고, 설마 일라베니아?”
“웩.”
누군가가 역하다는 듯 혀를 쭉 뺐다.
“차라리 라펜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