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89화 (189/220)

1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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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으로 임명되기 바로 하루 전, 황제가 리카르디스를 호출했다. 전장에 보내려는 의도가 명확했으므로, 서로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리카르디스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적의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2황자’의 모습. 임명서를 보고도 눈하나 깜빡 안하며 여유롭게 내용을 읽어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되니 괜히 눈치가 보이는 건 황제 쪽이었다. 그는 리카르디스의 눈치를 보다가 목을 가다듬고 급히 얘기를 꺼내었다.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황가의 의무이니.”

리카르디스가 싱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황가의 일원으로 어찌 손 놓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책임이 막중한 자리이기는 하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황제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눈빛이 그를 맴돌았다. 황제는 잠시 후 허허 웃으며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일라베니아에 악재가 따르는 상황에서, 황태자 위를 내리는 것이 마땅치 않다 여겼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만백성이 널 반길 것인즉. 그때야말로 적기가 아니겠느냐.”

리카르디스는 황제가 겸양이 섞인 대답을 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니, 제가 어떻게 황태자 위를 받겠느냐…… 따위의. 리카르디스는 대답 대신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리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폐하. 혹시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황제는 은근한 당황을 내비쳤다.

“무얼 말하느냐.”

“어릴 적, 저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뒀을 때 말입니다. 제가 어리석어 ‘하얀 밤’이 가지는 의미를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해, 그 이름을 달라 청했었지요.”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잊을 리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황족들의 호위는 황실 기사단이 번갈아 가며 맡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경우는 특별했다. 특별하게 두각을 드러내며, 엘피디오의 지위를 위협했다. 그래서 특별하게 위험해졌다. 또한, 황제인 자신이 그 소년을 특별하게 필요로 했다. 여러모로 특별했던 셈이다.

암살자 따위의 손에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던 터라, 호위가 더욱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단이 창설을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리카르디스가 금강석 성을 찾아왔다.

[제 호위 기사단에 ‘하얀밤’의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폐하.]

황제는 정말 너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미처 화내지도 못했다.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에서, 심지어는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은 지가 삼백여 년이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일개 황자의 기사단을 ‘하얀밤’이라 칭하겠다?

이것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역모였고,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리카르디스를 황태자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허, 허. 경직된 웃음만 내뱉었다. 리카르디스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의 안전을 위해 특별히 호위 기사단의 창설을 허가해 주셨음을 충분히 인지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긴 하나, 저의 쓰임새를 완전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폐하. 조금이나마 이 싸움이 비등해 보이도록, 힘을 실어 주시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또한, 대외적으로는 제가 대신관 누구보다 신성력이 뛰어나니 하얀 밤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하사했다 하신다면, 과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그때까지도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온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물론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엘피디오를 저지하기 위한 꼭두각시라는 사실 정도야 알아챘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모든 항목에서 수재 이상의 평가를 받는 그때의 소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자신이 황실에 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참으로 맹랑했다. 네가 네 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날 데리고 왔지 않으냐, 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제 치부를 온전히 내보였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서긴 했으나, 특별 호위 기사단이 창설되어야 할 만큼 위험한 길에 타인을 끌어들였다는 일말의 죄책감이 순간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리카르디스가 ‘하얀밤’의 주인이 된 이유였다. 물론 언젠가 가깝거나 먼 미래에 곧 사라지게 될 이름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던 덕도 컸다.

황제는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렸던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청년은 부서지는 햇살 아래에서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계의 가장 큰 축복, 일라베니아의 가장 큰 영광. 하얀밤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하사해 주신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이름을 지닌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겠습니까.”

껄끄러웠다. 그때의 죄책감이 살아나는 듯, 언젠가 사라질 ‘하얀밤 기사단’의 미래가 떠오르는 듯. 황제는 입안에 고여 넘어가지 않는 침을 차와 함께 넘겼다. 리카르디스가 맞은편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발타가 일라베니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할지라도, ‘하얀밤’이 결국은 그 어둠을 걷어 내고 제게 승리를 가져다주리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황제의 낯이 굳었다.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하얀밤’은 단순히 그의 기사단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황제는 다르게 느꼈다. 그가 축복의 밤을 불러내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가슴 속 깊은 곳, 가장 뜨거운 심장 언저리부터 싸늘하게 식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리카르디스는 축복의 밤을 부를 권한뿐 아니라, 축복의 밤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대한 지식 또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나, 불안은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 리카르디스가 얼마나 특별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몇 개의 가정이 황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몇 개의 가정에서 뻗어 나간 수십 개의 미래 속에서도 황제는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전쟁에 리카르디스를 내보낸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발타라는 큰 위협을 걷어 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지녔다 믿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드시 그 장소에 그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황제가 그린 수십 개의 그 어떤 시간 속에서도 리카르디스는 전장에 있었으며, 또한 수십 번의 죽음을 맞이했다. 반드시 이뤄져야만 할 미래였다. 지금의 리카르디스가 말한 ‘하얀밤’이 의미하는 것이 반역과 관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순수하게 제 안위만을 바라는 소인배라 할지라도.

황제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평소와 같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하다, 리카르디스. 너에게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전장으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예정된 미래가 안배된 곳으로 떠나,

“무사히 돌아오길 이델라브힘께 빌고 있으마.”

부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전장에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어찌나 하고 싶어 하던지.”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꼰 채 무성의하게 말했다. 방 안에 있는 소파, 의자, 테이블 등 적당히 엉덩이 댈 곳에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분개하거나 탄식했다. 욕도 들렸다.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황제에게 우수한 아들이란 정말 너무나도 위협적일 것이다. 그것이 발타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우수한 아들이라면 더더욱. 리카르디스 휘하 세력의 대다수는 그가 평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나, 그러한 이유로 황제가 그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을 납득하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 두었다.

“못난 자식이라 기대에 부응해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괜찮지 않을까요? 폐하께서도 선황께 못난 자식이셨어요.”

클로에가 나긋나긋하게 황제를 욕했다. 남자들이 급하게 입을 가리고 웃음을 삼켰다.

“오늘 모이게 한 이유는, 우리의 적은 발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해서다. 일라베니아도 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니, 발 뺄 기회는 지금뿐이다. 여태껏 나를 따라 준 공로로 대가 없이 보내 주겠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 없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리카르디스가 턱을 살짝 들고는 싱긋 웃었다.

“보통은 이런 분위기에서 손을 들기는 힘들지. 내 노림수가 먹혔군.”

리카르디스의 농담에 사람들이 웃었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올렸다. 파르딕트였다.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경은 안 돼. 가려면 목을 두고 가.”

“예? 왜 저는 안 됩니까? 아차, 그게 아니라 질문이 있어서 손을 들었습니다, 전하.”

리카르디스가 순식간에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농이었다. 뭔가.”

파르딕트가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로젤린이 있는 쪽이었다. 정확히는 로젤린의 옆. 칼릭스에게.

“……칼릭스 경이 왜 여기 있습니까?”

그래, 왜 칼릭스 경이 여기에…… 왜 여기에 있어? 엘피디오가 죽었다고 돌아섰나? 아까부터 신경 쓰였어. 방 안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소란 속에서 리카르디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내 사람이었다.”

“예?”

“예에?”

“언제부터…….”

“몇 개월 전에 나의 인품을 흠모하였노라 고백했었지.”

“…….”

기가 찬다는 칼릭스의 표정에 모두가 리카르디스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로젤린만 눈을 빛내며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랬어? 우리 전하의 인품을 흠모했어? 언제 충성 맹세를 했어?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칼릭스가 제 누이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다들 그가 제 누이 때문에 왔겠거니 하며 대충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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