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조금은요. 전하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대가 들고 있는 종이에 나온, 그 박해받은 ‘마인들’중 그대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대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기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 병사한테 창대 끝으로 맞았던 때에 숨도 못 쉬도록 아팠던 건 상세하게 기억나는데, 대부분은 흐릿합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젤린은 종이에 정신이 팔렸는지 그의 반응을 미처 보지 못했다.
“황성에서 지내다 보니 과거를 연상할 만한 부분이 많은 터라. 여기는 몇백 년 전이랑 그다지 변한 게 없어서요. 신전도 불에 타기는 했지만 복구한 모양입니다.”
한없이 어려 보였던 그녀가 갑작스레 몇백 년 연상처럼 느껴졌다.
로젤린은 들고 있는 종이를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종이에 적혀 있는 일라베니아의 수많은 악행들. 그 한 단어, 한 문장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리라. 리카르디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대가 나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따라간다고 한들, 나는 일라베니아 황가의 아들이다. 그대는 결국 일라베니아를 위해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대를 아프게 했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얘기야. 그리고 싸워야 하는 상대 중에는 죄 없는 병사들과…… 디에즈가 있겠지.”
리카르디스는 입술을 잘근 문 채, 종이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로젤린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대는 이 모든 걸 알고 나를 지키겠다 진정 말할 수 있겠나?”
“예.”
대답이 예상보다 너무 빠르고 명확해서 리카르디스는 약간 당황했다.
“음, 아까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일라베니아가 아니라 전하를 지키기 위해 참전합니다. 결과적으로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황가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로젤린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봤다. 리카르디스가 의아해할 즈음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친, 아들은 아니시니까? 그래서 이번 전쟁에도 황제가 내보내려 하는 것 아닙니까?”
리카르디스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은근슬쩍 ‘황제 폐하’에서 ‘폐하’라는 호칭을 빼 버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알고 있었나?”
“예.”
“언제부터?”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아버지와 많이 다투던 시기에 들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리카르디스는 고인이 된 페르탄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로젤린이 가진 맹목적인 충성심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발타가 내세운 명분이 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셨지만…….”
로젤린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것 또한 실질적으로 발타가 하고 있는 일을 봐야 합니다. 그들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얼마나 타당하건,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
리카르디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올곧은 사람이었다. 사랑과 자비에 관해 서술된 책에서 볼 법한 대답이었다. 피는 피로 씻기지 않는다. 죄를 죄로 덮어서는 안 된다.
“원한이 있느냐, 없느냐 하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원망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을 테고요.”
“……그렇겠지.”
“엘피디오 전하의 장례식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라베니아 황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모두 죽인다고 이 원한이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저는 대체 과거의 죗값을 누구에게, 얼마나 물어야 합니까?”
어려운 얘기였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누굴 미워해라, 누구는 미워하면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많이 배웠지만, 아직 모르는 것도 많기에 섣부르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 결정으로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결과가 따라온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생각하고요.”
“……글쎄, 그대는 모르는 게 많다고는 했지만, 굉장히 현명한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로젤린이 씩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이 와중에도 가슴이 설렌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로젤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먼 옛날에요.”
동화책의 첫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아주아주 먼 옛날’은 지독하리만큼 처절한 현실이리란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엄청 아팠습니다. 무섭고 괴로웠고.”
“……그래.”
“도망치고 숨고 싶었습니다. 흐릿하지만 기억이 납니다.”
시선을 멀리 둔 채, 인상을 간간이 찌푸려 가며 말하는 그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런데 딱 하나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지키고 싶다.”
리카르디스는 지나온 나날들의 로젤린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등을 보이며,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반드시 자신을 지켜 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그때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과거의 괴로웠던 시간보다 훨씬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그,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지낸 긴 시간이 겨울잠을 자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설명도 참 잘하는군.”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칭찬하자 로젤린이 웃었다. 그녀가 곧 말을 이었다.
“그렇게 긴 겨울잠을 자고 눈을 뜨니…… 붉은수레바퀴 성이었습니다.”
또 다른 시작의 첫 장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깃발의 붉은수레바퀴 문양을 보고 기억이 났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하얀밤의 주인을 지킨다.’ 아마 그것이 ‘로젤린’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
로젤린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제 과거와 현재는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소중한 걸 지킨다.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때에도 기억했습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가진 진정한 힘이 마력이나 육체의 강인함 따위가 아니란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은 그녀의 입으로 구체화 되었다. 지키고 싶다. 그 맹세 자체가 로젤린을 움직이게 하고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의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칼릭스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찾으라 했습니다. 알던 사실이 뒤바뀌고, 상황이 달라져 혼란스러울 때에 그것이 중심을 잡아 줄 수 있을 거라고요. 저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것이 제 중심입니다.”
로젤린이 말한 대로였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눈앞의 로젤린과 지금은 없는 ‘로젤린’.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단순히 외모가 같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것이 로젤린이 다른 이들에게 ‘로젤린’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이질적이지만,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는 그 어떤 것보다 단단했다.
“전하께서는 전쟁과 그로 인한 위험이 제가 감당해 낼 문제가 아니라 하셨지만, 저는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검을 들겠습니다. 전하와 하얀밤 기사단, 붉은수레바퀴, 포도밭과 상냥한 사람들, 어린아이들. 비스타의 상인들. 하지만…….”
침대에 바르게 누워 있던 로젤린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시트를 매만지고 있던 리카르디스의 손을 맞잡았다. 로젤린은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손을 살피듯이, 그의 길쭉하고 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맞닿는 같은 형태의 온도가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리카르디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의 힘이 닿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과거에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이번에는 지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지금의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 힘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가볍게 맞닿아만 있던 손이 간절하게 그의 손을 쥐었다.
“전하께서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닿았다. 로젤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피부에 닿았다. 무게가 실리자 깍지 낀 손이 서서히 시트에 닿았다.
“로젤린.”
“예.”
그는 로젤린의 아주 오랜 과거를 눈앞에 그렸다. 어린아이는 바싹 마르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아득한 긴 시간을 거슬러 가야만 했다. 너무나도 멀어 보여 차마 닿을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오랜 고통은 로젤린과 함께 겨울잠을 자고, 그녀와 함께 깨어나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손이 닿는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아주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로젤린은 아까 ‘아주 먼 옛날에는요’ 하고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위해 운을 띄웠던 것과 리카르디스의 말이 어딘가 비슷하다 느꼈다.
“예.”
“그대는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무섭지도 괴롭지도 않을 테고.”
이마가 맞닿아 있는 채라 숨이 가까웠다. 속살거리며 닿는 숨이 간지러워 로젤린이 살짝 웃었다.
“숨바꼭질과 술래잡기에 재능이 없는 나랑 놀아 주고 있겠지. 아마 십 초에 한 번씩 들키고, 오 초에 한 번씩 잡힐걸.”
그녀가 좀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카르디스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행복하고 좋은 기억들만 그대에게 남도록 내가, 반드시.”
“예.”
도와 달라는 말에 답에 어울리지 않는, 두서없고 장황한 말이었음에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밀리아, 세티스티아, 붉은수레바퀴 백작, 황제, 디에즈, 케틀린.
살아남기 위해 많은 것을 잃어 왔던 투쟁의 시간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하찮은 목숨이라 생각했으나, 오늘에야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