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87화 (187/220)

187화.

붉은수레바퀴 남매는 요 며칠간 굉장히 바빴다. 애도를 보내오는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고, 중부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령의 문제로 상의도 하고, 황제도 만나야 했고, 승계 문제 등등. 한 사람의 공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쏟아졌다.

칼릭스는 모두가 자신을 일에 잠기게 해서 미처 슬픈 감정을 떠올릴 수도 없게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대고는 고개도 뒤로 꺾었다. 칼릭스는 턱을 괴고는 테이블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둘 다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일이 대충 일단락되자 미뤄 둔 피로가 밀려왔다.

“힘들어.”

“저도요.”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슬펐는데 지금까지 슬픈 걸 까먹고 있었어.”

“……저도요.”

정말 그런 책략이었던 것인가? 칼릭스는 자신이 만약 바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제 아버지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 있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도 몇 번이나 건넜다.

쇠가 담금질 되며 서서히 단단해지듯,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페르탄의 죽음’에 단단해졌다. 부고가 도착했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는 지금도 눈물보다는 한숨만 나왔다.

“비극적인 일이 닥치거든 울기보다 헤쳐 나아갈 방법부터 생각하라 하셨죠.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시더니 성공하신 것 같네요.”

칼릭스는 어이가 없어져서 웃으며 얼굴을 마구 쓸었다. 그래도 피로가 걷어지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유산 문제는요 누님.”

“대충 알아. 내 몫은 거의 없지?”

매년 새로 작성하여 공증받는 유서에는 후계 문제를 비롯한 재산 분할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올해분은 확인해 보지 않았으나, 과거에 폐기된 여러 장의 유서는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에 투신한 이후부터 언제나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니 올해도 같은 내용일 것이다.

한때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였던 로젤린. 그녀는 구색을 겨우 갖출 정도의 결혼 지참금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인적, 물적 재산도 붉은수레바퀴 령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 로젤린이 파악하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아직 불완전했으니까.

“……알고 계셨네요.”

로젤린은 피곤한지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밤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다툴 때 아버지가 보여 주셨어.”

제 아버지지만 정말 성격 별로였다. 딸이 좀 다른 길을 간다고 바로 유산부터 줄이겠다 협박하다니.

“그때 씩씩 화내면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결혼 지참금을 어디에 쓰냐고, 그딴 돈 아버지나 많이 쓰시라 했지.”

점잖은 두 사람이 제법 격하게 다퉜던 때의 얘기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엄청 속상했는데, 나중에 그 유서가 도움이 많이 됐어.”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음, 처음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1황자 파의 첩자라며 의심받았거든. 그런데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딸을 내쳤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그런 의혹이 사라지게 된 거야.”

확실히 세간에 퍼진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제 딸을 첩자로 집어넣기 위해 그런 연극을 벌일 인간은 아니었다. 그가 내쳤다고 하면 내친 것이었다. 로젤린의 충성심을 그런 방식으로 확인했을 줄이야. 칼릭스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애초에 그런 효과를 노리고 유서를 작성하신 게 아닌가? 했던 기억이 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뭡니까 그 삐뚤어진 애정은. 어머니에게는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식들은 좀 강하게 키우는 편이셨으니까. 그래도 그게 정말 나에게 힘이 되긴 했어. ‘돌아갈 수 없으니까 앞만 보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정말 극단적인 응원이네요.”

로젤린은 살짝 웃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햇빛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심이 섰어.”

과거의 일을 말하는 것 같기도, 현재의 다짐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말이었다.

* * *

일라베니아의 최남단에 설치된 관문으로 형성되어 있던 전선이 밀려났다. 그것은 방벽 밖에서 이뤄지던 전투가 일라베니아 제국의 영지 내에서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기헤란 관문의 사령관이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판단으로, 근처 영지의 영지민들을 피신시켰다. 그러나 모든 영지를 챙길 수는 없었다. 발타와 인접해 있던 남부 영지의 대다수는 초토화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지금도 발타의 검은 손길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또 다른 남부 관문의 사령관인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전황이 완전히 뒤바뀌기 전에 병력을 보존하여 후퇴했다.

그녀의 영지인 비스타는 난공불락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방벽 하나만 세워져 있는 관문과 달리, 비스타에서는 이런저런 전략과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거친 공세에도 무너지지 않고 발타군 일부의 발을 묶어 둔 채 공방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런 자세한 소식이 아직 전달되기 전, 남부 관문이 함락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수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기병 몇 만, 보병 몇 만, 궁병을 몇…… 아무튼 시급한 상황이니 최대한 중부를 지원하여 일라베니아를 수호하고 더 나아가 발타를 뿌리 뽑을 수 있도록 하라.

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귀족 그 누구도 아닌, 2황자 리카르디스였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니 황가가 직접 나서는 것이 마땅하며, 승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리카르디스가 나서면 흔들리는 민심이 안정되지 않겠느냐는 명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리카르디스는 예상했었다. 때문에 험난한 앞길을 생각하며 침울해하지도, 기어코 다시 한번 자신을 사지에 밀어 넣으려는 황제의 태도에 분노하지도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전쟁에 관련된 문제로 며칠 밤낮을 새우다 오늘에야 겨우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서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글자들이 흔들거렸다. 몽롱하게 흐려지더니, 까무룩. 눈앞이 어두워졌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떴다. 아까와 달리 방 안이 어두웠다. 자신이 잠을 자는 것을 보고 옳다거니 한 잇세리온이 재빠르게 촛불을 끄고 나간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했다. 허리 위를 덮은 낯선 온기만 아니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그는 몸을 살짝 굳히고는 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검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형상을 어슴푸레하게 그려 냈다. 오랜만에 보는 로젤린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사후, 로젤린은 하루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장례 문제, 애도의 뜻을 보내오는 귀족들과의 만남, 전쟁을 위한 단련, 리카르디스의 호위 등. 어지간하면 힘들어하지 않는 로젤린이 연무장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조는 모습을 보고 레이몬드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는 소식을 리카르디스도 들었다.

오늘도 테라스 바깥 나무에서 호위를 하려다가 잠을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불을 끌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턱을 괴고 한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녀가 눈을 떴다.

“……로젤린.”

“예.”

“내 호위 기사에서 해임한다고 하면, 그대는 어쩔 생각이지?”

로젤린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몰래 따라가서 지키면 됩니다.”

“몰래 따라와서 지키지 말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네가 해 봤자 나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이 보였다.

“그때 욕실에서 분명 말을 잘 듣겠다 하지 않았나.”

로젤린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괸 채 몸을 모로 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 나는 그대를…… 전장에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아.”

그녀의 눈이 불만스럽게 변했다.

“이건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개인적인 사정 이외의 이유다. 굳이 따지자면, 그대의 사정 때문이지.”

로젤린이 누운 상태로 팔을 뒤로해 부스럭거리더니 등 쪽 어딘가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아마도 바지의 허리 부분에 끼워 둔 모양이었다. 마카롱도 그러더니, 요즘 묘한 곳에 종이를 보관하는 게 유행인가 싶었다. 로젤린이 꺼낸 종이는 마카롱이 저번에 자신에게 건네준 것과 같은 발타의 공작물이었다.

“이걸 보신 겁니까?”

“그것 전에도 조금은 알고 있었지.”

“어떻게 이게 저랑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요.”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 신기해하는 걸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찡했다. 귀여워.

“나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일라베니아의 황자 정도 되는 위치다 보니 이런저런 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더군.”

로젤린은 펼친 종이의 내용을 다시 읽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시선이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쯤에 도달하였다 생각했을 때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발타가 얼마나 악랄한 짓을 벌이고 있건 간에,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일라베니아가 과거에 저지른 일과 더불어, 그로 인해 벌어진 대륙의 몰락. 그 죗값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지. 그 명분과 그대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흐렸다.

“있음을…… 아, 알고 있나?”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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