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이 기헤란 관문은 물론이고, 며칠 전 적의 접근을 알렸던 바르비트 관문 또한 매일 다섯 줄기의 봉화를 올렸다. 봉화의 개수만큼이나 위험도는 점점 커졌으나, 진정한 위험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하늘이 연기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을 때야말로, 위험이 닥쳤다 말할 수 있었다. 관문이 제 기능을 잃고, 관문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봉화대까지 함락당하지 않고서야, 어떠한 신호도 보이지 않을 리 없으니.
진은 멍하니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허리에 찬 검이 한없이 무르고 약해 보였다. 꺾여서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남부 관문은 총 세 개. 그중 봉화가 올라오지 않은 바르비트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앙 관문이 무너졌고, 그곳 통해 발타의 군대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테다. 또한, 배후에 적을 남겨 둘 리 없으니, 곧 이 관문까지 물밀 듯 밀려오리라. 버틴다 해도 승산은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패배뿐이었다.
진은 페르탄을 찾았다. 시야가 흐려져 힘들었다. 멀리서 거구의 검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페르탄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모두에게 깃든 두려움이 그에게는 조금도 닿아 있지 않았다. 병사들은 기헤란 남부 관문의 사령관만을 바라보았다.
진은 페르탄이 자신의 어깨를 탁, 하고 붙잡는 손길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페르탄은 며칠 전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 확신했던 때와 같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진은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이러한 상황까지 예측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령관의 낮은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관문은 곧 함락당할 것이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사령관마저 완전히 손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망스러운 듯했다. 관문이 뚫리면 그때부터 펼쳐질 광경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으리라.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 나갈 것이고, 그중에는 병사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눈다.”
바닥만 바라보며 울던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의 말은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 부관 진에게 임무를 맡긴다. 말을 탈 줄 아는 자, 부상 당하지 않은 자들을 위주로 차출하여, 관문을 벗어나 가까운 영지민들을 피신. 중부 관문까지 도달한 후, 그곳의 병력과 연계하여 전선을 재구축하라.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도 눈물을 닦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나의 단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남는 자들은 분견대가 영지민을 피신시키고, 이동할 때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자, 검을 뽑아라! 의미 없는 개죽음은 아닐 것이다. 그대들의 시체가 쌓여 저들을 가로막을지니!”
페르탄이 거칠게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검 끝에 아침 해가 걸려 있었다.
“그 끝까지 내가 함께할 것이다!”
힘이 담긴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진은 기겁했다. 후퇴 후 전선을 재구축할 사람이 사령관이 아니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 그가 지금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기사, 보병, 창병, 궁병, 부상자 할 것 없이 울음을 그치고 무기를 뽑았다. 진은 페르탄에게 한걸음 급하게 다가섰다.
“사령관님!”
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페르탄은 그녀의 반박이 들리지 않는 듯 방벽 위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뒤를 따르며 항변했다. 사령관의 부재 시, 병력은 혼란에 빠진다. 황실에서도 사령관님의 귀환을 바라지 않더냐.
하지만 페르탄은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은 듯 위로 올라갔다. 시체가 쌓여 있는 땅이 보였다. 페르탄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해 누구보다 많은 피를 보았다, 진.”
“그리하여 훌륭하게 지켜 내셨습니다!”
“일라베니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죄를 많이 지었다.”
“모두가 그러합니다!”
페르탄은 뒤돌아 성벽 밖, 전장의 반대쪽인 일라베니아를 바라보았다. 저 울퉁불퉁한 산 너머에는 영지가 있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헤란 관문이 지키고자 하는 땅. 일라베니아.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그것만이 오랜 나의 사명이었으나, 그 원대한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해 많이도 헤매었다. 많은 죄를 짓고,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며, 그것만이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여.”
페르탄은 눈을 감았다. 먼 곳을 그리는 것 같았다. 산맥 너머의 가까운 영지, 그리고 멀리 있는 붉은수레바퀴 영지, 에스터까지.
“헤매다, 헤매다, 틀린 길을 멀리 갔다가…….”
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졌다. 자신이 보았던 페르탄은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지켜 낸 위대한 전사였다.
하지만 미처 위로의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것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후회가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관문을 지키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후회를 품고 있었노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의 가장 커다란 마음이었다.
“돌아갈 용기도 없어 걷다 보니 여기로구나.”
진은 결국 눈물을 투둑 떨어트렸다. 더 이상 그의 결정을 돌릴 수 없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페르탄을 지켜보았다. 훌륭한 전사이자, 지휘관, 기헤란 관문의 사령관, 그리고 존경했던 상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진은 무릎을 꿇고 그의 망토에 입을 맞췄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일라베니아 력 598년. 낙엽이 쌓이는 계절.
기헤란 산맥과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 완전 괴멸.
사령관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발타 다섯 가문 중 ‘람가’의 가주와 격돌 후 사망.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다.
병력 만 오천 중, 칠천의 분견대는 근처 영지의 주민들을 피신, 중부의 병력과 연계하여 전선을 재구축.
나머지 팔천의 병력은 장렬히 싸워 이틀의 시간을 버텼으나, 전멸하다.
* * *
[언제나 그리는 사벡에게.]
[아름다운 사벡에게.]
[바람이 스치는 기헤란의 성벽 위에서, 사랑하는 사벡에게.]
십여 장이 넘어가는 편지의 수신자란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의미로 채워져 있었으나, 형태가 전부 다른 것이 재주라면 재주였다. 편지는 열어 보지 않았다. 결국은 한 사람으로 귀결되는 수신자에게 전달하기 전까지 잘 보관할 뿐이었다.
어머니, 에델바이스에게.
칼릭스는 아버지의 부관이 보낸 편지 뭉치를 막 전해 받은 참이었다. 관문이 무너지고 급히 후퇴하는 중에 이런 걸 챙길 틈이 있었다니.
“…….”
칼릭스는 편지 표면의 마른 핏자국을 손으로 쓸다가 이내 뭉치를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설마 황제 폐하 앞에서도 그 표정이셨습니까?”
금강석 궁,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의 사후 문제로 황제를 짧게 대면한 칼릭스는 나오자마자 알터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도련님께서는 안 웃으면 흉흉해 보이니 선량한, ‘저는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미소를 잃으면 안 된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 이놈이? 인상을 찌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무표정이었는데 시비를 걸어? 칼릭스는 울컥하다가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알터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기력도 없었다.
작위 계승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되었다. 본래는 전대 백작이 살아 있을 때, 황제의 허가와 공증을 받고 이뤄지는 절차였으나, 페르탄이 전선에서 사망한 관계로 필요한 서류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서류는 죄다 붉은수레바퀴 영지의 성에 잠자고 있었다. 전시이다 보니 특례법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황제가 무척 깐깐하게 굴었다. 분명 뭔가 있겠다 싶어서 자세를 낮춰 황제의 기분을 맞춰 준 덕에 이유는 대충 알아내었다.
국경 사령관이던 제 아버지에게 황성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몇 번이나 전달했건만, 듣지 않았단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충성심은 내 익히 알고 있다 어쩌고 하긴 했으나, 결국은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도 의심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제없는 후계자에게 언제까지 작위를 안 물려줄 수도 없으니, 정식 절차대로 진행하는 정도의 시간은 두고 지켜보겠다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백작 위를 이어받지 않는 이상, 집단에서 큰 발언권을 얻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작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할 듯했다.
칼릭스는 황성에 온 김에 로젤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월장석 성에 도착한 칼릭스는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수습 기사 헤사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로젤린 경, 칼릭스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
안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칼릭스는 열리는 문을 따라 들어갔다. 따사롭고 밝은 창밖과 달리 방 안은 어둑하게 그늘져 있었다. 로젤린은 창가에 서서 막 들어오는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칼.”
“누님.”
헤사가 잽싸게 방을 나갔다. 칼릭스는 분위기 파악이 빠른 소년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헤사 군도 많이 컸군요.”
“처음 만났을 때보다 3.7센티.”
“…….”
그런 구체적인 수치를 바라지는 않았다. 제 누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수습 기사의 키를 꼬박꼬박 재 볼 만큼 섬세하지는 않으니, 눈대중으로 나온 수치이리라. 그럼에도 지나치게 상세해서 무서웠다.
“칼릭스도 좀 컸어. 1.6센티.”
칼릭스는 은근히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우선 승계 문제와 관련된 얘기를 로젤린에게 들려줬다. 당분간은 발이 묶이겠지만, 최대한 빨리 처리한 후 따라가겠노라고. 칼릭스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내쉬었다.
정적 속에서 두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것에 비하면 어딘가 퀭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