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물론, 리카르디스에게 아부하기 위해 한마디라도 더 얹는 쪽이 훨씬 많기는 했다. 하지만 황제는 아직 시국이 불안정하니 그럴 때가 아니라며 결정을 미뤘다.
리카르디스는 발타와 전쟁이 정말 끝나고 평화로운 바람이 일라베니아 전역을 스치고 흐른다 하더라도, 황제가 말한 ‘그럴 때’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한 평민을 황태자로? 그것은 커다란 치욕일 것이다.
그렇다고 뜬금없이 머저리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3황자 틸렌드에게 황태자 위를 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왜 모든 조건이 충족된 2황자가 아닌 3황자에게? 그 의심의 씨앗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황제에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면 그중 어느 줄기는 진실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는 엘피디오의 대항마! 나약한 황제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평민을 데리고 와 방패를 삼았다!’
이 사실은 리카르디스에게도 약점이지만, 제 체면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황제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허물이고 치부였다. 꼭두각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이제 불태우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연회장에 발을 들인 황제는 무릎을 꿇은 군중 속, 꼿꼿이 서 있는 리카르디스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제서야 리카르디스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무릎을 꿇었다. 교본에 나올 법한, 우아하고도 기품이 넘치는 예의였다.
황제는 예상한 바와 같이 시시껄렁한 소리를 했다. 만약 중앙 상비군까지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을 것이다.
식료품이 동나고, 쿠퍼 한 개짜리 빵을 쿠퍼 열 개는 줘야 살 수 있을 것이며, 신경이 예민해진 자들끼리 잦은 다툼이 일어나 거리의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 아닌가. 불온한 분자들이 검을 들고 일어서면 백성들의 안전은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병력을 지원해 준 다음부터 전선에서는 연승하고 있지 않나. 그 정도로 충분했다는 거다.
대충 요약하자면 그쯤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참, 잘나셨어. 라는 감상뿐이었으나 귀족들 중에서는 감화된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맞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었다. 불안해진 민심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은 날붙이뿐만이 아니기에 그들을 안정시키는 것은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발타였다. 심지어 이번에는 일라베니아의 중심부에 사건을 터트리는 만행을 저지르며 큰 전쟁을 예고했는데, 그 대비는 미숙했다. 다행히도 전력이 우세해서 이기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리카르디스가 보기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리카르디스는 옆에 서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 많은 상념이 담긴 듯한 눈으로 황제를 보고 있었다. 가슴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불쾌감을 애써 누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전하가 얘기해.]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품고 있던 미미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리카르디스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로젤린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로젤린.”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순식간에 이완되었다. 리카르디스는 내심 흡족했다. 이상한 거 보지 말고 좋고 예쁜 거 보고 마음 풀라는 뜻에 부른 것인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그 순간,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의 시선이 리카르디스에게서 벗어나 바깥쪽을 향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가 바라본 방향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무슨 일이 터진 것일까. 이놈의 연회는 허구 한날, 하여간. 속으로 욕지거리를 한 리카르디스가 스타스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기 전부터 로젤린의 경계를 눈치챈 그들이 거리를 빠르게 좁혀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왔다.
의문이 깊어 갈 무렵, 아치 모양의 거대한 문으로 한 남자가 헐떡이며 들어왔다. 변경 주둔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런 연회에 입고 오기에는 부적절한 차림새였다. 심지어는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몇 걸음 걷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차린 것일 수도 있으나, 지쳐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니다.”
호흡이 거칠고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쨍그랑!
소리를 따라 시선이 모였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한 걸음 물러나게 하며 자신이 그 앞으로 섰다. 그가 밟고 선 바닥에는 그녀가 떨어트린 유리잔의 파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로젤린, 괜찮아.”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기묘한 정적에 리카르디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그 순간 숨을 가다듬은 남자가 연회장이 떠나가라 외쳤다.
“붉은수레바퀴 백작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 * *
땅을 까맣게 덮는 대군이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일되어 있는 잘 훈련된 병력, 질 좋아 보이는 무기와 수백 개가 넘는 공성 무기. 진은 말도 잇지 못하고 차츰 가까워지는 발타의 대군을 바라보기만 했다.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는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개의 가문 중 하나, ‘람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발타의 수도를 거점으로 한 대귀족 가문이었다.
진은 곧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벽 위에 올라와 있는 병사들 또한 그 어마어마한 압력에 굳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무기를 붙들고 있기만 한 병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다녔다.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활 제대로 들어! 기름 들고 와, 준비해! 진은 급하게 달려 성벽의 중앙, 페르탄이 있는 곳까지 금세 도달했다. 페르탄은 다른 사람들의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점점 전진하는 대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헉. 사령관님. 봉화를 올리고 증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이 정도 되는 대군이 나타났다면 총공세라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관문까지 공격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도나 중부의 지원은 너무 늦을 테니 우선적으로 남부에 있는 병력을 끌어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원 병력이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기헤란 산맥와 맞닿아 있는 남부 관문의 봉화가 불타올랐다. 발타의 궁수가 쏘아 올린 화살이 때를 알리며, 전쟁은 시작되었다.
공성전 1일 차.
산맥과 이어지는 거대한 관문은 견고했다. 그러나 발타 측에서 사용한 공성 무기가 성벽을 넘으며 큰 피해를 낳았다. 불에 타는 거대한 구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서는 방벽과 관문 내의 각종 구조물을 산산조각 냈다. 그것만으로도 피해는 막심했으나, 잘 꺼지지 않는 끈적한 화염과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 은밀하게 퍼졌다.
밤이 지나고 새벽의 여명이 떠올랐다. 햇살 아래 세 줄기의 봉연이 보였다. 다른 관문에서 보낸 신호였다. 세 줄기의 봉화는 ‘적군 국경 근접’을 뜻했다. 지원군의 발이 묶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공성전 5일 차.
대군이 총력을 벌였다. 발타군이 마침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앞선 며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라장이 펼쳐졌다.
진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대한 발타의 병사에게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남자의 발길질에 진은 몸을 구부리며 헛구역질했다. 투구가 나가떨어지자 어깨를 스치는 길이의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음험하게 웃는 병사가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 들었다. 피와 침,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보고 병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계집 아냐. 일라베니아는 내보낼 사내가 없어서 고추 없는 것들도 내보내나?”
사내의 조롱을 듣던 진이 눈을 번쩍였다.
“……대머리, 너. 발타 놈이 아니군.”
진은 사내의 말투에 발타가 아닌 왕국 마람쪽의 사투리가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아까까지 히죽거리던 남자의 낯빛이 변했다.
진은 단검으로 잡힌 머리카락을 끊어 내고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는 그렇게 자부심 넘쳐 보이는 고추에 냅다 검을 내질렀다. 남자가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진의 단검이 남자의 목젖 깊숙이 박혔다.
기헤란 남부 관문. 페르탄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성장시킨 기사와 병사는 마인이라는 초인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처참한 전투였으나 결국은 승리를 쟁취해내었다. 그 선두에는 어느새 얼굴에 하나 더 큰 흉터를 새긴 페르탄이 있었다.
진은 자신이 마주한 병사에게서 얻은 정보를 그에게 전달했다. 마람 왕국의 개입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에도 페르탄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 또한 알고 있던 정보인 듯했다. 발타 측의 병사들이 조롱을 퍼부을 때마다 항상 성벽 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니. 내용을 듣기는커녕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만 쏙쏙 빼먹고 있던 것이다. 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공성전 8일 차.
전투의 피로가 팔다리를 무겁게 했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동료들의 시체가 마음을 짓눌렀다. 간절히 바랐건만, 오늘도 해가 뜨고 말았다. 남부의 다른 관문에서 지원 요청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부 영지와 중부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끈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으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진은 붕대를 갈고 방을 나섰다.
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무기의 피를 닦아 내는 병사들에게서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 땅에는 피와 머리가 잘린 시체가 돌아다니기에, 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관문의 아침은 언제나 연기와 함께 시작했다. 매일 하나의 봉화를 올리며 이상 없음을 알리던 평화로운 때도 있었으나, 최근은 다섯 줄기의 봉화를 피워야만 했다. 다섯 줄기의 봉화는 적과 교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