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그런데, 그건 뭔가. 가끔 내 앞에서만 꺼내서 적던데.”
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 부인께 이를 목록을 적고 있습니다. 평소 사령관님께서 사랑의 편지를 보낼 때마다 끼워서 보내고는 하지요. 부인의 말은 들으실 것 같아서. 오늘은 또 ‘전투의 피로가 쌓였음에도 주무시지 않고 홀로 돌아다니심’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꽤 고전하실 겁니다. 소상히 일러 드릴 예정이라.”
어쩐지 답신이 올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머리 감고 잘 말리시는 게 좋다, 고기만 말고 채소도 드셔라, 혼자 돌아다니시지 마시고 호위를 대동하시라 같은 염려뿐이더라니. 페르탄이 피식 웃자 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죽을병에 걸리셨군요.”
아니, 죽을병에 걸리신 겁니까? 도 아니고 확정이었다. 죽을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 보좌관의 단언에 페르탄은 한 번 더 웃었다. 진은 소스라치게 한 번 더 놀라며 그에게 다가갔다.
“모시면서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뵈지 못했는데요. 국경 사령관 부관 배, 사령관님을 웃겨라 장기 자랑 대회에서도 안 웃으셨잖습니까. 바르디의 그 재주를 보고도 싸늘한 표정이셨는데.”
진은 초조해 보였다. 페르탄도 그녀의 불안을 이해했다. 수년간 무뚝뚝하게 명령 내릴 줄만 알던 상관이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고 있었으니. 페르탄은 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성벽 너머, 푸른 새벽을 깨트리는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의 검은 머리를 흩트렸다.
“느낌이 좋지 않다.”
전쟁에 거칠어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은 페르탄이 말하는 ‘느낌’이 얼마나 적중률이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도 전황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페르탄의 불안을 이해했다.
발타의 병력은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러나 발타와 일라베니아를 가로지르는 관문의 주둔군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위기감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마독과 인조적인 마인들이 아직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훌륭한 무기들을 내보이지 않는다? 분명 꿍꿍이가 있었다. 여러 상황을 가정했으나, 관문 주둔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밀려드는 발타군을 막아 내는 것뿐이었다.
진이 손톱을 잘근잘근 물자 페르탄이 그녀에게 사탕을 건네었다.
“저는 초콜릿이 좋습니다, 사령관님.”
페르탄이 품을 뒤져 사탕을 초콜릿으로 바꿔 줬다. 진은 초콜릿을 입안에서 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성벽 너머를 살피는 남자는 기류를 온몸으로 읽어 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페르탄이 말하는 ‘감’이 이런 느낌이라 생각했다. 가슴 안쪽이 술렁였다.
성벽 아래의 병사들이 페르탄을 발견하고 경례했다. 페르탄은 인사를 받아 준 후 품 안에서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어 성벽 아래로 후두둑 떨어트렸다. 병사들이 망토를 펼쳐서 재빠르게 받아 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제는 받아 내는 일도 능숙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의 짤막한 평화였다.
* * *
일라베니아와 발타를 가로지르는 세 개의 관문에서 시시각각 도착하는 파발이 일렀다.
승리하였노라.
승리하였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사람들은 불안을 떨치고서는 노래를 불렀다. 어떤 짙은 어둠도 빛으로 떨쳐 낼지니, 영광의 일라베니아!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일라베니아의 국기를 흔들었다. 잠시 잠잠했던 주점에도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환한 햇살 아래 웃음소리가 퍼졌다. 스타스는 고삐를 쥐어 걸음을 멈추고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옆에 있던 르원이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단장님.”
스타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문제가…….”
뻥! 샴페인의 코르크가 날아가며 소음을 냈다.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바닥에 술을 질질 흘려 댔다. 그걸 목격한 스타스의 표정이 더욱 모호해졌다.
“있군. 확실하게.”
르원도 눈썹을 까딱였다. 그 문제가 뭔지 알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축포를 터트리기는 좀, 많이 이르군요.”
“동감일세. 이만 가지.”
스타스가 말을 재촉했다. 르원은 그 뒤를 따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리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화재의 흔적에서 아직 탄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타스의 뒤를 따랐다.
월장석 성에 도착한 르원은 여러 보고서를 들고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문부터 두드렸다.
“들어와!”
분노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르원이 알기로 그가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낼 만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이 또 일어난 것이리라.
르원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최근 전선에서 올라오는 모든 보고를 분석하는 일 때문에 집무실 안은 엉망이었다. 그 중앙에 어딘가 초췌해 보이지만, 그것마저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리카르디스가 소파에 늘어져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을 때에도 어지간하면 딱딱한 자세를 고수하는 그답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와 달리 그냥 초췌해 보일 뿐인 잇세리온은 퀭한 눈으로 차를 따르고 있었다. 르원은 리카르디스의 곁에 다가가 그의 다리를 주물렀다.
“저 없다고 또 안 주무셨지요.”
하여간 나 없으면 잠도 못 잔다니까. 르원이 투덜거리자 리카르디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종아리를 꾹꾹 눌러 주는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부부간에 으윽…… 할 것 같은 그런 말은 말지. 지금은 뭐라 할 기력도 없으니.”
“무슨 일입니까, 이번에는 또?”
리카르디스가 팔로 눈을 가리고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에 금박을 입힌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르원은 리카르디스의 다리를 꾹꾹 마사지하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초대장을 펼쳤다. 짤막한 문구들을 다 읽은 르원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기나 저기나, 시기가 많이 이르군요.”
그 짧은 사이 잠들었는지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몽롱했다.
“뭐가 또 일렀기에?”
“사람들이 거리에서 축포를 터트리고 노래를 부르고…….”
으으윽, 그만…… 리카르디스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신음했다. 르원은 한껏 안쓰러움을 담아 그를 뒤집고는 머리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뭉친 근육을 풀었다. 맞은편에는 잇세리온이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르원은 대단한 마사지 기술로 리카르디스를 재워 버린 후 다시 방을 나섰다. 내일 밤, 황실 주최의 연회가 열린다.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 연회가 웬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런 때에만 열리는 연회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승전연이었다. 때때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열리기도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정말 승리에 심취해서 벌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너무 일러…….”
* * *
엘피디오의 죽음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귀족은 그 비극으로 일어날 손익 계산이 더더욱 중요한 부류였다. 몇 년간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 1황자와 2황자의 싸움은 리카르디스의 승리로 끝났다. 누구라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황태자였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일라베니아의 황제가 될 자!
최근 전선에서의 거듭된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전쟁에 관련된 그 누구보다 리카르디스가 조명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를 탐탁지 않게 보던 무리조차도 접근해 리카르디스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같았다. 특별하게 승리에 심취해 있지도, 전에 없이 거만하지도, 조금의 방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 걸고 있는 웃음은 상대방을 한 발짝 물러서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태도는 정중하지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고 끌고 가야 하는 한 나라의 후계자가 혼자서 전쟁이라도 치르는 기세였으니.
리카르디스는 귀족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구석으로 가서 파트너로 온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과 이런저런 음식에 손을 댈 뿐이었다.
“아, 이건 처음 먹어 봅니다.”
“일라베니아의 북부에서 간간이 잡히는 귀한 새의 알이다. 귀족들 중에서도 못 먹어 본 사람이 제법 있을 정도지. 많이 먹어 둬.”
부드럽고 농후한데, 거슬림 없이 조화롭게 톡 쏘는 향채 덕분에 입안이 즐거운 요리였다. 로젤린은 마음에 드는지 리카르디스가 밀어 주는 족족 접시를 비워 냈다. 르원이 그의 뒤에서 몰래 속삭였다.
“안 놀아 준다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전하.”
“그거 내 알 바는 아니군.”
“벌써 황제가 된 줄 아는 거 아니냐는데요. 황제가 되면 안 놀아 줘도 되는가 봅니다.”
르원의 시시한 농담에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때마침 종이 뎅 울렸다. 황제의 등장이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황제 폐하 듭십니다! 시종이 소리 높여 그의 행차를 알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으나, 그중 리카르디스만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는 평소보다 수척해 보였다. 장례식 이후 그는 며칠간 금강석 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 리카르디스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정도의 감상이겠지 싶었다.
제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아들을 견제하기 위한 꼭두각시 인형.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다음 황좌를 물려줄 뛰어난 아들이 죽고, 꼭두각시 인형이 살아남았다. 꼭두각시 인형은 충실하며, 훌륭했다. 그 누구도 황가의 핏줄이 아님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누구도 그 이외의 황태자 후보는 찾지 못할 정도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피디오의 장례식 이후로 후계자를 공표해야 된다는 귀족들의 발언이 늘어났다. 슬픔은 기쁜 일로 잊힐 테니, 훌륭한 인재가 다음 세대의 일라베니아를 이끌어나가리란 희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