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지가 벌써 얼마던가. 로젤린이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최근 리카르디스는 그녀 앞에 설 때면 초조함을 감추는 것에 급급했다.
똑똑똑.
누군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최근 월장석 성에서 일하게 된 시녀였다. 갈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지닌 자그마한 여자의 이름은 미레이미, 일명 ‘미미’였다. 올가미 용병단의 쥬쥬와는 남매 관계라는 ‘설정’이란다.
미미는 황실 시녀가 되기 위한 조건 중 그 어떤 것도 충족하지 못했지만, 월장석 성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물론 그 뒷배는 성의 주인 리카르디스였다.
“전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잇세리온이 있어서인지, 미미는 시비도 걸지 않고 분주히 다과를 차리기만 했다. 정상적으로 일하는 미미를 보자니 과거 생활 청산하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무법자를 보는 듯해 리카르디스는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어, 그런데 보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까딱, 하고는 의심의 빛을 담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디저트의 개수가 좀 많은 듯싶은데.”
“어머? 전하께서 아까 디저트를 많이 드시고 싶으시다 하셨잖아요?”
미미가 뺨에 손을 대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팔자(八)로 휜 눈썹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셨잖아요?”
얼마 가지 않아 온건한 협박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 성격이 가 봤자 어디를 가겠나. 과거 청산은 무슨…….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원래도 바빴던 잇세리온을 내보내는 일은 손쉬웠다. 잇세리온이 나간 후의 미미는 제국의 황자가 아직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량한 자세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한껏 양껏 담아 온 디저트를 냠냠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본인 몫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하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하 앞에 있는 접시, 그거는 전하 거, 이거, 이거, 이거는 로젤린 거. 나중에 먹여. 그리고 나머지는 다 내 거. 이야, 전하 이름 대니까 주방장이 혼을 쏟아부어서 만들던데. 앞으로도 종종 해도 되나?”
“……들키지만 말고.”
월장석 성내에서 주인의 이름을 사칭해 디저트를 빼돌리는 간 큰 시녀가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겠지만.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우리 전하께서는 마음도 넓으시지.”
미미는 입에 크림을 묻히고 낄낄거렸다. 그러더니 아차, 하고는 제 치맛자락을 뒤졌다. 보기 좀 그런 광경이라 리카르디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고는 있겠지? 여자 남자 이전에, 품위의 문제야.”
“나도 격식을 아는 사람이니까, 걱정은 마시죠, 전하.”
한참 치마 안쪽을 뒤적거리던 미미가 “아, 찾았다.” 하고는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미의 손에는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종이를 툭 하고 그의 앞에 던졌다. 종이가 들어 있던 장소도 장소고, 건네준 사람이 그녀이기에 의심을 지울 수 없어, 리카르디스는 찝찝한 감정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이게, 뭐지……?”
격식을 아는 사람, 미미가 포크를 쪽 빨며 씩 웃었다.
“내 마음.”
엉덩이 부근 치맛자락 안쪽에서 나온 그녀의 마음. 정말 너무 찝찝했다.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을 집게처럼 해서 접힌 종이를 폈다. 젖었다 마른 것인지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으나,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미는 종이를 읽어 내리는 푸른 눈동자를 지켜봤다. 무표정한 얼굴,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그 눈동자가 종이의 끝자락에 닿았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아마 그 종이의 존재에 대해, 혹은 종이에 적힌 내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리카르디스는 종이를 다시 두 번 접어 모서리를 잡고는, 반대쪽 손바닥에 툭툭하고 쳤다. 그의 시선은 바깥 창의 어딘가와 상념 깊은 곳을 지나 마침내 미미에게 다시 닿았다.
“혹시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인가?”
목소리에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미는 시간을 잘 맞춰 적당히 우러난 차를 마시고, 입안 가득 감도는 향을 즐긴 다음에야 대답했다.
“겸사겸사 그것도 전해 주고 싶긴 했지.”
리카르디스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과거 설원의 월계수처럼 강한 힘을 타고나는 마인 가문이 있었다. 제국의 음해를 받은 그들은 오랜 세월 감금당해 있다가 탈옥한다. 그러나 일라베니아의 땅을 채 벗어나기 전에 죽는다. 그날로부터 축복의 밤은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내가 따로 신전 관계자에게서 알아낸 것과 발타에서 몇 천 장 흩뿌리고 간 이 종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대략적인 정보지.”
“세상에나 어떻게 그런 일이? 무섭기도 해라.”
미미가 심드렁한 말투와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그 이후, 마수라 불리는 흉포한 존재들이 생겨났다. 산과 들, 숲.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과 마을. 어디고 나타나서 목숨을 앗아 가는 마수는 일라베니아를 떨게 만들었지. 개체 수가 많이 줄어든 지금까지도 말이야.”
발타에서 검붉은 보석을 가지고 올 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최근 마수의 몸에서 생성되는 결정이라 판명되었다. 또한 로젤린의 증언으로 마독 ‘파편’, 인조적인 마인 부대가 지닌 마력과 결정의 마력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까지도 알게 된 상황이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던 마수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진화해서 일라베니아의 목을 죄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수는 어디에서 왔는가?
“사라진 마인 가문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의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즈음, 공교롭게도 축복의 밤 또한 자취를 감추었어. 그들이 아니더라도 강한 마인은 또 태어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들이 죽은, 혹은 사라진 이후부터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강한 마인이 죽고 다음 세대에 남은 것은, 또 다른 강한 마인이 아닌 마수였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라 볼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축복의 밤이 오래 찾아오지 않은 폐해로 마수가 생겨났을까?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은 기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처음이니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 단순히 그 이유로 마수가 생겨났다면, 강한 마인은 왜 태어나지 않았는가? 대륙을 소생시키는 그 강한 힘이 어딘가에 있다면, 일라베니아가 아닌 그 누군가의 눈에라도 띄어야 말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카르디스는 잠시 멈칫하고는 미미를 바라보았다. 강한 힘을 지니고, 다른 생물의 형태를 흉내 내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리카르디스는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맛있어 전하? 취향이 독특하시네.”
그는 미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깍지를 낀 채 엄지로 턱을 꾹 누른 리카르디스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소설을 가슴에 품은 남자가 마카롱을 응시했다.
“어디 있을까. 그들은, 그들의 힘은.”
정적이 인 공간 속에 바람이 불었다. 마카롱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었다. 다소 불량한 자세였다.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바로 여기에.”
그러고는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 그녀가 팔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리카르디스의 뒤쪽이었다. 그는 자신의 뒤, 창밖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저기에.”
그리고 귀를 후비며 무성의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든가, 없든가 하겠지.”
미미의 얼굴이 곧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너……무 심각하게 놀라는 거 아닌가?”
정말, 너무 놀랐다. 리카르디스는 마카롱이 답변을 마치자마자 손을 내려놓다가 생크림 케이크를 깍지 낀 손으로 박살 내고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떨어트린 포크를 어마어마한 반사 신경으로 발로 찼다가 튕겨 오른 포크에 코를 맞았다. 마카롱은 정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꼴을 로젤린이 봤어야 했는데.”
통탄하는 어조였다. 놀리는 의도가 느껴졌지만 리카르디스는 미처 신경 쓰지도 못했다. 머리에서 생각을 담당하는 기관만 슬쩍 빼서 얼음물에 담가 놓은 것 같았다. 동면에 들어간 물고기의 사고가 이러하리라.
리카르디스는 얼얼한 코를 쓱 문질렀다. 그 과정에서 손으로 으깬 케이크의 잔해가 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마카롱은 콧잔등 위에 생크림을 묻히고 있는 그를 보고 놀리기 위해 열었던 입을 그대로 닫았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아픈 사람은 놀리는 거 아니니까.
“……그대가 정말…….”
대화의 간격이 길어지며 침묵이 지루해질 찰나, 리카르디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일라베니아 황실의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된 그 마인 중 한 명이라는 건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답을 말해야 한다니 귀찮기 짝이 없었다. 마카롱은 상황이 특수한 만큼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일 테니. 마카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의 기억은……?”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마카롱은 날카롭게 미소 지으며 턱을 살짝 들었다.
“모두 알지는 못해도, 알 만큼은 알아.”
“……대체, 어떻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카르디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갈색 머리 여자의 본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육신이 없는 검은 그림자 같은 형태, 죽은 것을 흡수하며 의태 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과는 다른 모습. 동물과 식물, 사람까지. 생명을 가진 것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진화하거나, 퇴화를 반복하며 생을 이어 갔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 또한 그러한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나 그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진화와 퇴화는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축복의 밤이 사라진 시기와 마수가 생겨난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존재가 무엇이라 해도 변화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