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 *
쩍!
벼락이 돌을 쪼개는 듯한 소리였다. 손바닥이 뺨을 스친 것만으로 이런 소리가 날 수 있을 거라고는. 통증에 볼을 부여잡는 와중에도 호위대의 대장, 둔은 감탄했다.
“건방진 놈! 이거 놓아라!”
“악!”
지금 막 간제가 또 다른 호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간제의 팔을 한쪽씩 잡고 있는 호위들은 오랜 여행에도 지치지 않았으나,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주인의 패악에는 몹시나 고단해 보였다.
간제는 성난 들소보다 무섭게 씩씩댔다. 힘도 들소에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간제를 둘러싼 마인 호위대는 쩔쩔매며 그녀를 억류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치지 않게끔 간제를 제압하는 일이란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3왕녀 간제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인이었기에. 심지어는, 마력의 양으로 따지면 간제 쪽이 우세했다.
둔은 안되겠다 싶어 뒤에서 그녀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팔까지 끌어안겨 옴짝달싹할 수 없…… 어야 했는데. 간제가 발꿈치로 호위의 발가락을 무참하게 내리찍었다.
“아악!”
둔의 품에서 빠져나온 간제가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둔은 그대로 기절했다. 거친 몸싸움으로 산발이 된 간제는 눈을 형형히 빛내며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호위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간제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룩불룩 솟았다. 기절한 호위대장 둔을 대신하여 부대장이 나섰다.
“왕자 전하의 명령이셨습니다. 일라베니아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어떤 위험과 돌발 상황이 있을지 모르는 터라, 왕녀 전하께서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셔…….”
부대장의 얼굴에 화병이 직격 했다. 쨍그랑! 조각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부대장은 얼굴에 달라붙은 화병 조각과 코피를 쓱쓱 닦으며 말을 이었다.
“부득이하게 그런 결정을 내리셨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간제는 이를 갈았다. 지금 호위가 말하는 ‘부득이하게 내린 그런 결정’은 일라베니아를 빠져나오는 내내 골칫덩이를 수면제로 재워 놓는다는 계획이었다. 확실히 자신이 깨어 있었다면, [여기에 발타의 1왕자 하카브 위 리비타가 있습니다]라고 적힌 깃발을 만들어 흔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강제로 재워 둬?
간제가 긴 수면에서 막 깨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호위가 급하게 그녀의 입에 수면제를 들이부었다. 몽롱한 상태의 간제는 남자의 다급한 숨소리에 이변을 깨닫고 호위의 얼굴에 수면제를 냅다 뱉어 냈다. 순간적인 기지로 남자의 소중한 급소를 까 버린 후, 사투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뭉텅 썰려 나간 시간이 아까워서 열 받는 것은 차치하고, 호위 놈들이 괘씸해서 간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성질냈다. 호위들은 이제 그녀를 재우는 일은 포기한 듯 보였다.
간제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 건물의 구조, 새겨진 문양. 발타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여기저기 막힌 길이 많았을 텐데 재주 좋게 일라베니아를 벗어난 모양이었다. 발타의 수도, 리비타의 궁은 아니었다. 문양 양식이 달랐다.
“오라버니는.”
“……회의 중이십니다. 방해하지 말라 명하셨으니, 우선 허기를 달래고 계시면 저희가…….”
회의 중? 방해하지 말라 하였어? 간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주위의 호위들이 간제의 말에 답한 남자를 퍽 쳤다. 이 멍청한 놈이!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불을 질러서라도 방해할 인간인데……!
간제가 움직이자마자 만류의 손길이 사방에서 뻗쳐 왔다. 간제는 바닥을 굴러 회피하고서는, 창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왕녀 전하!”
“아악! 전하! 아, 내가 진짜!”
“저 개망나니가!”
간제는 바로 아래층의 돌출된 지붕에 착지한 후에 바로 옆 난간에 매달렸다. 호위들이 따라 뛰어내리려 했다. 그녀는 콧방귀를 뀐 다음에 아래층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쨍그랑!
수놓아진 커튼이 불룩 솟으며 간제가 나타났다. 그녀는 유리창 조각이 쏟아진 바닥에 구르며 벌떡 일어섰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눈만 크게 뜨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간제를 바라보았다.
간제는 툭툭 옷을 털며 유리 조각을 털어 내었다.
“눈 뜬 모습은 오랜만이구나, 간제. 건강해 보여 이 오라비도 마음이 놓인다.”
제일 상석에 있던 하카브만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구나. 너의 유능함 덕분일까, 호위들의 무능함 때문일까. 말해 주련?”
품에 숨긴 비수 같은 위험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간제는 머리를 탈탈 털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호위들이 무능했지요. 긴 시간 동안 잠만 자서 비실거리는 연약한 왕녀 하나 못 막을 정도면 알 만하지 않습니까? 죄 갈아엎고 새로 뽑아 주시지요. 기왕이면 잘생긴 놈들로요.”
간제는 맨발로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러 빈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의 중년 남자가 의자를 반대쪽으로 슬쩍 옮겼다. 리비타 왕실의 유명한, 목숨 내놓고 사는 미친 왕녀. 엮이면 피곤할 게 불 보듯 빤했다.
“그래서 여기는 어딘가요.”
“제가 대신 대답하도록 하지요, 왕녀 전하.”
간제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녀와 소년이 보였다. 그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발타는 왕실 ‘위’ 가문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큰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중 쌍둥이 남매가 가주를 맡은 가문이라면 ‘싱’ 외에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싱.”
간제가 먼저 정체를 유추해 내자 소녀가 빙긋 웃었다.
“남라 싱, 바유 싱.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소녀는 말 못하는 소년의 몫까지 말했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두 남매가 같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간제는 일어난 이래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싱은 금속이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검, 활, 갑옷과 각종 고문 기구까지 만들어 내는 전쟁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싱에 들렸다는 것은 아마도…….
간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테이블을 두고 하카브, 남라 싱, 바유 싱. 그리고 재상 아틸라크와 수년 전에 잡혀갔다던 검은달의 간부, 케틀린이 있었다. 또한,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도 다수 보았다. 그들은 간제의 시선이 닿자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췄다.
“차호트 람가,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단단한 근육이 눈에 띄는 장신의 여인과,
“브네학스 아문.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준수한 미남자와,
“코코 사르체.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흉악하게 생긴 거인과,
“완달 타탄, 고귀한 발타의 딸에게 인사드립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까지.
싱을 포함한 람가, 아문, 사르체, 타탄.
발타를 이끌어 가는 다섯 가문의 가주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어디 소풍 나갈 계획을 짜기 위해 모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간제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리카르디스 전하. 피차 힘든 싸움이 될 테니 알아서 잘 살아 남아 봅시다…….’
하카브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의 한 점을 빤히 바라보다 돌연 씩 웃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 * *
전운이 감돌았다. 시녀들은 연회 준비를 할 때처럼 항상 지쳐 있었고, 기사들은 실전 같은 대련과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징집, 군의 편제가 마무리되어 언제든지 출진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실은 아직까지 침묵하는 중이었다. 나라와 나라의 운명을 건 거대한 전투를 대비한 대군은 그대로 묶여 있고, 고작 일만여 명의 병력을 국경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없는 것보단 낫긴 한데, 크게 도움이 되는 정도는 아닌, 생색내기 좋은 딱 그 정도. 분통이 터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한 자, 한 자 분노를 채운 서신을 보낸 일도 이해가 갔다.
여유로워 보이는 황실의 움직임에 백성들은 안도했다. 별일이 아닌가 보다. 괜찮나 보다. 발타 놈들이 해 봤자지. 그런 식이었다.
황제가 정확하게 노린 바였다. 일라베니아는 누대에 걸쳐 서서히 몰락하는 중이었다. 축복의 밤으로 풍요로웠던 대륙은 메말라서 성수를 들이부어도 잠깐의 곡식을 허용할 뿐이었다. 황금의 땅이라 불리던 일라베니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절대적이던 권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만을 가진 자들이 늘어난 시점에서, 황실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면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먼저 터질 가능성도 있었다. 황제가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황실의 핏줄을 죽이고 일라베니아 한복판에서 간악한 짓거리를 저지른 발타에게 죗값을 묻는 것은, 잠시 요동치는 민심을 다스리고 난 이후일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로젤린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흔들거리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나가는 카일로에게 딱딱한 열매를 뜯어 던졌다. 갑자기 봉변당한 카일로가 분노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로젤린이 히죽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고압적이고도 오만한 미소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카일로와 다투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지만, 그전에 멍하니 허공을 훑던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로젤린은 이따금 하던 행동을 멈추고 상념에 잠겼다. 생각은 깊어졌고, 말하는 것도 전보다 능숙해졌다. 어리숙한 사고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최근 그녀에게서 과거 ‘로젤린’의 모습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했다.
변화는 가만히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큰 파문이 그녀를 흔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