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80화 (180/220)

180화.

리카르디스는 어떤 장면을 상상했다. 현재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었으나 그곳에 로젤린이란 존재는 없었다. ‘만약’으로 시작하는 의미 없는 가정 속의 장면은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자신은 혼자였다. 죽은 엘피디오의 관을 보며 혼자 끈적한 감정을 곱씹고 휘둘린다.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으니 멈춰 있기만 한다. 버릴 필요를 못 느끼니 끌어안고 있다. 점점 가라앉다가, 가라앉다가. 결국 그렇게 끝맺는 이야기였다. 한 명이 있는 세상과 한 명이 없는 세상은 그렇게 달랐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을 응시했다. 로젤린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어 로젤린의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담았다.

“가지고 갈 건 가지고 가야지. 그건 더 이상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며칠 뒤, 리카르디스의 선물이 황후 트리파의 성에 도착했다. 잇세리온은 아마도 초상화가 부서진 상태로 반환될 것이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암살자까지도 같이 딸려 오리라 예상해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월장석 성에 도착한 것은 황후의 인장이 찍힌 편지 한 장뿐이었다. 고맙다는 한마디만 쓰여 있었다.

* * *

몇 세대가 지나는 긴 시간 동안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던 균형이 무너졌다. 발타는 ‘검은달’이라는 광신도 집단 이름 뒤에 숨어 일라베니아를 자극하고, 일라베니아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발타를 압박했다. 지지부진하게 작은 전투들이 줄곧 이어지기는 했으나, 이걸 두 나라 간의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사소한 분쟁에 불과했다.

그렇게 수백 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균형을 깨트린 쪽이 발타라는 사실은 일라베니아의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결코 전쟁을 먼저 시작하지 못할 겁니다. 국력의 차이는 명백하며, 하카브 왕자도 그걸 모를 만큼 아둔한 자가 아닙니다. 지는 싸움이 취향이라면 또 모를 일이지만 하하.’라고 호언장담한 것이 무색하다 못해 머쓱해지기까지 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발타의 수상쩍은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아니며, 생각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머저리들만 수뇌부에 앉아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타가 하는 전쟁 준비를 수십 수백 년간 계속된 무력시위의 일환이라 여겼다. 왕실이 건재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극일 뿐이라고.

더군다나 두 나라 간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파편’과 인조적인 마인 부대 정도로 그 틈을 메울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발톱을 드러낸 발타의 일격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건국제 무도회의 참사 이후, 일라베니아는 병력을 대대적으로 움직여 하카브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은 잡지 못했다. 어떻게 확보했는지 모를 도주로와 어떻게 심어 놨는지 모를 첩자들 등.

여러 가지 활약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무도회를 기점으로 국경 지역에 크고 작은 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일라베니아의 권력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에 대비해야만 했다.

전투가 잦던 국경 지역은 발타의 공세에 빠르게 대응했으나, 평소와 달리 승리로 가는 길은 버거웠다. 발타의 병력이 예상했던 수와 힘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어디에 숨겨서 대체 어떻게 키운 건지도 모를 훈련된 병력이었다.

한 가지 더 경악스러운 사실은, ‘파편’과 인위적으로 만든 마인 부대는 아직 투입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세 개로 나누어진 남부 국경 관문을 맡은 국경 사령관들의 활약으로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뿐이었다면 좋으련만, 국경뿐 아니라 수도 티가드도 피해가 막심했다. 국경 관문처럼 대규모의 병력과 마주하지는 않았으나, 병사보다 암살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소규모 집단의 행패로 주요 인물 몇몇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 일라베니아 제국 군사 조직의 우두머리, 총사령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이게 무슨, 개…… 계시 같은 말인지. 하하.”

무슨 개 같은 소릴 하냐는 말을 가까스로 바꾼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황실에서 온 전령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황실 전령을 대함에 적당해 보이는 태도는 그린듯한 미소 하나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기사단장, 렉시드는 세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눈만 굴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해 보라…… 렉시드, 들었니? 어떻게든 해 보래.”

세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차갑게 웃고는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후, 그녀의 입에서 연기가 퍼져 나왔다. 세실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사건이 일어난 지가 언제고, 발타 놈들이 여기저기 쳐들어와서 깽판 놓은 지가 언제인데. 이 사태에 대한 해결 방법이랍시고 전령을 보낸 게 병력을 보내며 권한을 위임할 테니 집결하여 연계하라. 이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든 해 봐라? 잘 막아 봐라? 믿는다, 힘내라?”

“아, 아니 마른가시나무 백작! 말을 꼬아서 듣지 마시오. 현재 황실은 엘피디오 황자 전하와 총사령관까지 변을 당하시어, 병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놈이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텐데? 그나마 없는 쪽이 개소리가 덜해서 일이 빨리 진행되기는 하겠네. 그리고 엘피디오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건 제국의 백성으로 함께 눈물 흘릴 일이기는 하다만, 발타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잖아? 무얼 먼저 처리해야 하겠다는 감이 오지 않나? 살아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지.”

“중앙 상비군은 일라베니아를 지킵니다, 백작! 발타의 공세가 지난 수십 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사나움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요. 하지만 아직 그 마인 부대의 움직임을 못 읽어 내지 않았소. 그 부대가 수도로 침투하는 가정을 아주 배제할 수 없음을 알 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중앙의 병력을 분산시키란 말이오! 변경 주둔군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병력이 있지 않소. 계속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은 백작의 무능을 나타내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 잘 생각하고 발언하기를 바라오.”

세실이 눈을 접어 웃었다.

“말 잘했군, 남작. 그래, 아직 마인 부대는 물론이거니와 그 지독한 독마저도 투입되지 않은 상황이지. 이 말이 뭘 뜻하냐면, 전쟁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다는 거야. 일라베니아나 발타나 서로 충분히 여력을 남겨 둔 상황이지. 하지만 이쪽은 하카브가 수도에서 분탕질을 치는 바람에, 위쪽 분들이 너무 불안해하시네? 중앙에서 병력을 많이 빼 주지 못하겠다네? 이게 뭐냐면, 병력의 분산이에요. 왜 분산시키겠냐고, 상대적으로 국경의 방어벽을 얇게 하려는 수작질이 아니겠느냔 말이야. 왜 방어벽이 얇으면 좋을까? 뚫기 쉬울 테니까!”

그녀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진동에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소음을 만들어 내자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게 일라베니아 제국 전체 병력의 삼 할 정도가 주둔하고 있는 관문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남은 병력으로 막아 낼 수 있을까? 다들 하카브가 사고 치고 간 것 때문에 무서워서 머리가 잠시 굳은 모양이라 내가 좋게 좋게 말로 지원 요청하면서, 여기 뚫리면 네놈들도 다 뒤진 목숨이다. 친절하게 알려 준 것 아닌가.”

세실이 파이프를 한번 물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후우, 연기를 내뱉자 남자가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세실이 줄줄 얘기할 동안 얼빠진 듯 입만 벌리고 있던 검은파도 남작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황제 폐하께서 보낸 엄중한 명령에 감히……! 이 무례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사태가 끝나고 나서도 인간 백정 짓으로 가까스로 유지하던 지위를 달고 있을지는 내 확답해 드리진 못하겠소.”

세실은 생긋 웃으며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었다.

“눈치라고는 없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엉덩이 차 버리기 전에 얼른 밖으로 꺼지라는 내 뜻은 읽은 건가 남작? 잘 가시게, 배웅을 꼭 받고 싶다고 해도 그다지 해 주고 싶지는 않아.”

검은파도 남작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다가 크게 콧방귀를 뀌고서는 발걸음을 돌렸다.

쾅!

세게 문이 닫히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실은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었다.

“피곤해라…….”

“와인을 준비하겠습니다.”

“전시인데 무슨 소리야 라고 하고 싶지만, 한 잔만 딱 마실까?”

“한 잔 정도는 전시에 마시기 딱 좋은 수준이죠.”

렉시드가 문가에 서 있던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세실은 눈을 감은 채 아차, 하고 말을 이었다.

“렉시드. 황제 폐하의 전령이 언제 온다고 했지?”

방금 전에 16세 사춘기 남자아이처럼 씩씩대며 나간 남자가 황제의 전령임을 모르고 한 얘기는 아니었다. 뜬금없을 법한 발언에도 렉시드는 조금의 의문도 갖지 않은 듯 보였다. 그가 와인 한 병을 하인들에게 건네받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당도하기 전에 실종되었다더군요. 요즘 시국이 보통 흉흉해야 말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실이 눈을 감은 채 씨익 웃었다. 그녀는 오지 않은 황실 전령의 짐에서 황실의 문양이 찍힌 또 다른 서신을 발견했다. 수신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었다. 전선에서 한 몸 불사르는 공을 치하함과 동시에, 이제 그만 좀 수도로 올라오라고 징징거리는 내용이 고급스럽게 적혀 있었다.

“아니 이 늙은이가…… 나는 알아서 잘 싸워 보라더니?”

세실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황제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은 투견이고, 저쪽은 충견이니. 국경 지역에서 허무하게 죽을 인물은 대체 가능하지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구르라고 하면 구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사람은 구하기 힘들 것이다.

위험한 순간에 써먹게 옆에 데리고 있으려는 모양인데, 내용을 살펴보자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꿈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복은 죽음으로 여기던 인간이 몇 번이나 계속된 것 같은 권고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뭐…… 전달할 필요는 없겠군. 몇 번 동일한 내용을 받은 모양이니.”

세실은 테이블 위의 촛불에 서신을 가져다 대었다. 닿은 부분이 검게 물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아직 너울거리는 불꽃을 품은 재가 테이블 위로 투둑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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