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죽음은 시작이 아닌 끝일 뿐이다. 육체를 벗어 던져 무게가 없는 영혼은 그저 떠돌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신의 세계를 입에 담나.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눈물과 울음소리가 애써 포장해 두었던 죽음을 발가벗겨 사람들 앞에 집어 던졌다.
수백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은 마치 대신관과 황후 트리파, 그리고 엘피디오의 석관만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투둑, 투두둑. 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모두의 숨소리마저 가렸다.
다음 대의 황제가 되었을 제국의 1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그의 초라한 끝이 모두의 입안을 쓰게 만들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복잡한 마음을 무표정한 얼굴 아래 숨기고, 시체 없는 장례식이 거행되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트리파가 혼절해서 누군가에게 안겨 나가는 것도, 마지막에 석관 위에 대신관의 성수가 뿌려지는 모습도, 그 석관이 땅에 묻히는 것까지 모두. 장송곡이 멈추며 식의 끝을 알렸다.
리카르디스는 잎을 툭툭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물방울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떨어져 나갔다. 흐릿했던 인영이 또렷해졌다. 로젤린이었다.
구름이 뒤덮은 잿빛 공간 속,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이 빛을 잃어 더 어두워진 검은 머리카락에 조금씩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석관이 묻힌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보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왜일까. 왜 낯선 걸까. 그 이유를 생각하던 리카르디스는 곧 깨달았다. 로젤린은 타인의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언제 어디서나 시선이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기에, 리카르디스의 기억 속 로젤린은 언제나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상념에 잠겨 이런 적나라한 시선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로젤린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 속에서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참으로 낯선 일이었다.
그 순간 로젤린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더니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눈이 마주쳤다.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얘기했다.
“장례식은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합니다.”
주위의 동료 기사들이 로젤린을 갓난쟁이 보듯 바라보았다. 파르딕트는 고래무덤의 영지에서는 하루에도 두세 놈씩 죽어 간다며, 자랑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로젤린이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한때 암살까지 생각했던 인물의 죽음이지만 그렇게 기쁘지는 않네요.”
레이몬드가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동시에 기사단원 전원과 기사단장 스타스, 그리고 리카르디스까지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장례식이 끝난 지 오래라 남은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하얀 무리에서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로젤린이 입이 막힌 채 수화로 얘기했다.
[시도한 적 없음]
[여러 차례 반복해 생각만]
[적을 은밀히 죽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들키게 되리라 예상함]
[……라는 친구의 조언]
리카르디스와 스타스는 진심으로 그 친구에게 고마워했다. 스타스는 그 친구가 자신이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올가미 용병단의 임시 단원 쥬쥬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미묘한 반응을 보이긴 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더 굉장한 발언을 하기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빗속을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가끔 뒤돌아보았다. 엘피디오의 관을 보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도 로젤린을 따라 뒤돌았다. 장면은 먹구름 때문에 어두컴컴했으나, 안개가 낀 탓인지 희뿌연 빛이 감돌았다.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로젤린이 물어 왔다.
“전하도 기쁘지 않으세요?”
“음…….”
그가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엘피디오가 죽기만을 바라 왔지만…….”
세티스티아가 죽고, 이후 밀리아도 제 딸을 따라가듯 목숨을 잃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엘피디오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증오한다는 말로는 엘피디오와 자신의 관계를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기쁘지는 않군. 이건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 한 사람의 죽음에 인도적으로 슬픈 감정이 들어서는 아니야. 나는 그대와 달리 선한 사람이 아니거든.”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저도.”
“……슬프지 않다고 선하지 않은 건 아니지.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까.”
리카르디스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무튼. 이런…… 찝찝한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는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청소를 해야겠어.”
“청소……?”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한 리카르디스가 미소 지었다.
“기분이 찝찝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그가 살짝 눈짓하자 뒤따라오던 잇세리온이 빠르게 다가섰다.
“별관 어디…… 지하에 박아 뒀던가.”
“예, 전하? 무얼 말씀하십니까.”
“초상화.”
몇 년 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또 다른 황태자 후보, 리카르디스의 존재 덕분에 황제는 평안한 나날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에서 리카르디스의 생일이 찾아왔다.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황제의 말에 리카르디스는 오직 엘피디오를 괴롭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탁했다.
언제나 형을 가지고 싶었는데, 엘피디오 형님이 있어 너무 기쁘다. 둘이서 사이좋게 있는 모습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다. 내 일생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것이다!
물론 본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리란 예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들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고통에 익숙했고, 어린애 한 명 골리기 위해 그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소원은 곧 엘피디오의 석영 성으로 전달되었다. 엘피디오가 뭔 미친 개소리냐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고 했다. 그 소식이 그해 리카르디스의 가장 기쁜 선물이 되었다. 엘피디오의 반항은 황제의 강압적인 명령에 끝을 맞이했고, 자존심이 있어 그맘때 즈음 입지 않게 되었던 반바지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야만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초상화에는, 꽃으로 꾸며진 하얀 그네 의자에 아름다운 소년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있는 정다운 모습이 새겨지게 되었다. 보이는 곳에 걸어 두자니 흉물스럽고, 버리자니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별관 지하 어디에 처박아 두었었다. 돌연 그 흉물스러운 존재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엘피디오의 석관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황후 트리파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였다. 엘피디오는 자기도취에 빠진 인간이었다. 소설 속 영웅같이 근육이 울룩불룩한 모습의 동상을 세우고, 잔뜩 미화된 자신의 초상화를 성 복도에 쭉 늘여 놓고 감상하곤 했다.
그 많은 엘피디오의 초상들이 이번 사건으로 모두 불탔다. 성인식을 치른 엘피디오의 초상화는 황실에서도 보관하고 있었으나, 어릴 적의 모습을 담은 것은 전부 없어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가지고 있는 초상화는 대륙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엘피디오의 흔적 중 하나가 된 셈이었다.
황후는 야심 있는 여자였다. 엘피디오가 죽었으나 그의 동생 3황자 틸렌드가 있다. 그녀는 또다시 틸렌드를 내세워 자신을 어떻게든 황실에서 솎아 내려 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선물을 보낸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아무리 황후의 모습에서 어머니, 밀리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엘피디오 때문에 밀리아가 그렇게 되었는데. 수년간의 고통은 고작 엘피디오의 죽음 정도로 해소될 만큼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원한은 남아 있었다.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엘피디오는 이젠…….
“……초상화를 수정해라. 덧칠해서 나 하나 지우는 것쯤은 화공에게 일도 아니겠지. 엘피디오만 남긴 다음에 황후 폐하께 전달해 드리도록 해라.”
잇세리온이 헉, 숨을 들이켰다. 리카르디스에게는 말 못 했지만, 어렸던 리카르디스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가끔 지하실에 들러 보고는 했는데! 그, 그걸 지우고 엘피디오 전하만 남겨서 보내라고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대신하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니, 그 이전에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전하의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실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간 서로 죽이고 못 살던 적대 관계의 2황자가 제 아들이 죽자마자 초상화를 보내왔다. 이건 위로를 가장한 조롱이요, 가슴에 난 상처를 다시 헤집는 고도의 전략이다! 황후의 성정 문제가 아니라, 황실은 그것보다 더한 일도 일어나는 곳이었다. 선물 하나도 곱게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라 더욱. 상대가 자신이라 더더욱.
그럼에도 보내려는 이유는 리카르디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보내기에는 수많은 것이 필요하다. 초상화는 필요한 그 한 조각쯤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순수한 선의로만 보낸다고 말할 수 없으니, 황후 폐하께서 나쁘게 해석한다고 해도 별다른 변명은 못하겠어.”
동정이고 연민이었다. 그것에 엘피디오를 향한 원망이 얽혀 엉망진창이었다. 이 감정은 머리를 어지럽히다, 가슴에서 떠돌다, 시간이 지나면 발밑에 끈적하게 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의 발을 잡아끌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필요할 거다. 폐하께도, 나에게도.”
그렇기에 두고 가야 했다. 쓸데없는 것에 발목을 잡혀 자리에 멈춰 설 수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돌려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가 나누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