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로젤린은 칼릭스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자 칼릭스가 이것 보라는 표정으로 미미를 흘겼다. 미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거는 너의 재밌는 얘기와 아무 상관 없이 그냥 기분 좋아서 웃은 거야. 원래 순한 애들은 가만히 있다가 혼자 웃고 그래.”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얘기하자마자 누님께서 바로 웃으셨는데요.”
로젤린이 흐흐 웃었다.
“웃기다.”
“보세요.”
“또 얘기해 줘.”
“잘 논다.”
칼릭스는 또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여러 재밌는 얘기들을 했다. 하나같이 재밌지도 웃기지도 않은 것들뿐이었으나, 최선을 다하여 ‘재밌고 유쾌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번에 아버지와 함께 갔던 음식점 있지 않습니까.”
“응.”
“저희가 앉았던 자리가 관광 명소처럼 되었다더군요. 이 자리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앉았던 자리, 이 메뉴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한 번 더 시킨 메뉴. 이런 식으로요.”
별거 아닌 이야기에 로젤린이 까르륵 넘어가자 미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뭘 잘못 먹었나 본데.”
“무슨 소리십니까. 제 화술이 뛰어난 것을요.”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에도 로젤린은 술 취한 사람처럼 헤헤거리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칼릭스가 손을 뻗었다. 굳은살과 흉터가 눈에 띄는 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든 아이의 요람을 흔드는 바람이 이러할까.
“무슨 일 있으세요?”
로젤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서.”
로젤린이 오리 입처럼 입술을 쭉 뺐다. 칼릭스가 잔잔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누님께서 왜 화가 나셨을까요?”
어린아이 어르는 듯한 말투에 미미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계속 나한테 뭐라 그러고.”
“나쁜 사람들이네요.”
“손가락질했어. 재수 없어.”
“교양 없는 인간들이로군요.”
“그걸 반대로 꺾어야지 그대로 두냐.”
로젤린은 짜증과 분노를 되짚어 가며 객관적으로 자기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재단하고. 여러 이유가 있으나…….
“그러니까, 내가 예전에는 모르던 걸 알게 되었는데.”
“네.”
“그걸 알게 된 이후로부터 모든 게 달라진 기분이야.”
“음, 그랬군요.”
“그래서 좀 혼란스럽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다시금 디에즈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무엇이 옳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가슴을 죄는 듯한 끈적한 분노와 불안함이 신경을 바늘처럼 가늘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일라베니아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잔혹했다. 그리고 제 가족과 친구들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무자비하게 굴었다. 그것이 불합리하고 지탄받을 일이라는 것은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지금 이 자리. 일라베니아의 황성에 있었다. 일라베니아의 기사로서.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나는 일라베니아의 강인한 울타리.
일라베니아는 나에게 죄를 저질렀고, 나는 일라베니아를 증오한다.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관념이 충돌하자 맹세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괴롭다고, 도무지 견딜 수 없다고 하면 그대로 놓아줄 것만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날 수 없으나, 일라베니아의 과거를 묻어만 둘 수도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칼릭스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응.”
“제가 누님의 모든 사정과 생각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제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응.”
“새로 마주한 사실은 이따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어요.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님. 그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누님에게 가장 중요하느냐……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젤린이 눈만 깜박이자 칼릭스가 살짝 웃었다. 음, 전혀 못 알아들으셨군. 하는 미소였다. 그리고 로젤린은 정확하게 못 알아들은 게 맞았다.
“가볍게 예를 들어 보자면…… 누님께서 맛있게 드시던 스테이크는 사실, 콩으로 만든 겁니다.”
로젤린은 너무 충격받아서 술병을 놓칠 뻔했다.
“어디까지나 예시입니다. 아무튼, 누님. 만약 모든 고기가 콩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기분이 어떨 것 같으세요?”
“너, 너무 혼란스러워.”
“그렇죠. 세상에나. 고기인 줄 알았는데, 콩이었다니.”
미미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얘기를 재밌게 하는 아이였는데, 아까는 왜 그랬담.”
“……안 바쁘십니까, 마카롱 님?”
“전혀?”
칼릭스가 미간을 좁힌 채 계속 얘기했다.
“……그래서 누님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속아 왔던 세월에 분노하게 되겠죠.”
아니, 콩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만 누님은 곧 깨닫게 됩니다.”
칼릭스가 깍지를 끼고 거기에다 턱을 괴었다. 칼릭스를 따라 로젤린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닐까?”
로젤린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콩 맛이 나는 고기보다, 고기 맛이 나는 콩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네?”
“그렇지요. 누님은 어떤 영양학적 정보보다, 맛을 중요시했던 겁니다.”
로젤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도 감탄했다. 정말 맞춤형 설명이라며. 칼릭스는 은근 뿌듯해하며 말을 이었다.
“누님께서 앞으로도 접하게 될 수많은 사실들은,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흔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칼릭스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덮었다.
“일라베니아의 유명한 시인이 사람의 생을 항해에 빗대었습니다. 긴 여행입니다, 누님. 때로 는 거친 파도에, 풍랑에, 폭풍에 배는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배가 흔들릴 때에 무거운 닻이 있다면 중심을 잡아 떠밀려 가지 않을 것이고, 나침반이 있다면 길을 잃어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나갈 수도 있겠죠.”
로젤린은 칼릭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슴푸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누님이 느끼는 혼란 속에 닻이 될 만한 중심과 나침반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걸 잘 생각해 보세요.”
나의 중심.
* * *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신전의 넓은 제단을 둘러싸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1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중앙에는 하얀 대리석이 원형으로 깔려 있으며, 중앙으로 갈수록 층계가 높아지는 형식이었다. 낮은 단을 세 번 올라서야 도달할 수 있는 중앙에는 사람들의 허벅지쯤 되는 높이의 제단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제단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하얀 석관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하얀 꽃에 둘러싸인 채 평안하게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석관의 뚜껑이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혀 있기 때문이었으나,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석관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엘피디오의 시신을 볼 수 없으리란 사실을.
하카브가 도망치고 리카르디스와 황녀 체리트의 증언으로 5황자 디에즈가 제국을 배반했음이 알려졌다. 발타와의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황후 트리파는 제 아들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에만 혈안이었다.
엘피디오의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황후는 거짓된 정보라 일축하고는 많은 인원을 동원해 황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들인 시간과 인력이 무색하리만큼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시체가 소각되었다는 소문의 신빙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후는 수색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엘피디오의 장례가 늦어진 이유였다. 만약 황제가 수색 중단과 장례식의 준비를 명령하지 않았다면, 황후는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재가 되어 사라진 엘피디오를 찾았을 것이다.
엘피디오의 신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암살자에게서 벗겨 낸 얼굴 가죽뿐이었다. 한 사람이 누워도 널찍한 관 안에는 머리 가죽과 황실 인장이 찍힌 반지만이 들어가게 되었다.
땅에 있을 때 이델라브힘의 빛을 널리 퍼트려 어린 백성들을 보살폈던 위대한 영혼은 드디어 육체를 벗어 던졌으니, 하늘로 가는 길은 영광뿐일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축복받은 영혼은 이델라브힘께 돌아가 영광스러운 신의 나라에 머물게 된다. 때문에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아직 그러한 관념을 모르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황후는 언제나 보여 왔던 고고한 태도를 내려놓고서는 머리를 풀어헤친 몰골로 석관 위에 엎어져 있었다. 석관을 쓰다듬다가, 손톱으로 긁어내리다가, 머리를 박고는 숨이 멎을 듯 울었다.
“아, 아아…… 폐하 제발. 엘피디오를 이렇게 보내시다니요! 전하의 첫 아이가 아닙니까! 어떻게 고작 가죽 한 장만을 남기고 영광된 빛의 길로 떠나라 하십니까! 눈이 없어 길을 보지 못하고 발이 없어 걷지도 못할 텐데, 엘피디오를, 어, 어떻게…… 폐하 제발. 조금만 더 찾으면 될지도 모릅니다. 발타의 간악한 것들이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끝까지 욕보이려 하는 수작일 뿐이니 제발, 폐하!”
아이 잃은 부모의 마음을 다들 감히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차마 그녀를 석관에서 떼어 내지 못했다. 석관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손톱이 너덜너덜하게 들린 트리파의 손에서 나오고 있었다. 황제는 딱딱해 보이는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대신관에게 눈짓했다.
나이가 지긋한 대신관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황후를 보고는 그대로 장례식을 시작했다. 성스럽고 서글픈 노래에 대신관의 축복이 한 구절 한 구절 더해졌다. 트리파의 울음소리는 영광스러워야 할 장례식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