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가 사건 당일, 그 혼란한 와중에 자신더러 거리의 상황을 수습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눈치챘다. 홀로 디에즈를 따라갔고, 누구도 잡아 오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파문이 일어나리라, 리카르디스는 그때부터 예상했던 것이다.
“백성들은 무지하기에 속은 거고, 그대들은 배운 게 많아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 배운 사람답게, 정황만으로는 죄를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빠른 시일 내에 깨닫고 증거부터 들고 와라. ‘그런 행동을 했으니 그런 것이나 다름없다.’ 따위의 어린아이 떼쓰는 말은 말도록.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때에, 이런 쓰잘머리 없는 건수로 시간을 얼마나 허비하려는 셈이지? 발타 측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걸 보니 그대들은 죄다 간자인가?”
“저, 전하!”
귀족들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대충 가늠이 가는가 보군. 지금 나와 내 기사가 딱 그런 마음이니 잘 되새기길 바란다. 자, 슬슬 마무리 지어 볼까. 그대들은 의문이 있었고, 로젤린 경은 충실히 답했다. 이제부터는 그대들도 신중히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남자들은 입가를 가리며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싸늘한 정적 속에 회의는 생산성 없는 말이 몇 번 더 오고 가다가 마무리되었다.
회장이 텅 비었다. 로젤린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리카르디스의 눈을 애써 피했다. 그가 왜 쳐다보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디에즈와 대화를 나누고, 그가 준 작은 조각을 흡수한 후부터였다.
변화의 이유를 알고 있는 자신도 당황스러운데 리카르디스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었다. 그에게라도 디에즈와 나눈 대화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결국은 또 말하지 못했다.
[……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로젤린은 모호한 말로 후일을 기약했었다. 리카르디스는 ‘알겠다’고만 답했다. 그것이 더욱 미안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한 로젤린은 결국 한숨만 토해 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눈부셨던 과거의 맹세가 서서히 빛바래고 있음을 무슨 수로 그에게 말한단 말인가.
* * *
마침 교대 시간이었던 터라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수군수군, 저들끼리 얘기하며 로젤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를 타고 흐르는 부정함이 어딜 가겠어? 남자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더러운 것들 같으니.]
지하 감옥의 병사가 침을 퉤 하고 뱉는 소리가 겹쳐 울렸다.
탁.
로젤린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크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위협하지 않았음에도, 남자들은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흩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주위에 수군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반면, 심장은 빠르게 박동하며 가열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당장 어딘가에 터트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로젤린은 한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탁, 탁. 기사답게 규칙적이고 정돈된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요, 로젤린?]
디에즈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 한 점 없어 공기마저 멈춘 것 같던 순간이었다.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나쁜 짓’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말하는 디에즈의 표정은 평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숨쉬기 버겁고,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기억하지 못할 뿐. 하지만 사절단 이후로 조금씩 떠올릴 수 있었겠죠. 그때의 전투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분노의 파편을 받아들였으니까요.]
로젤린은 디에즈가 말하는 잃어버렸던 분노가 마독 ‘파편’, 정확히는 파편에 섞여 있는 마수의 마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파편을 흡수한 후부터 이상한 꿈을 꾸거나, 황실에 대한 거부감이 짙어졌음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가라앉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주 자그마한 계기면 충분합니다.]
그 말을 하고서 디에즈가 꺼내 든 것은 과거 마카롱이 발타에서 훔쳐 왔던 것보다 큰 마수의 결정이었다. 달빛을 받은 검붉은 결정의 빛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이건 당신이 잠시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는 것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흡수하지 않는다고…… 영영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로젤린. 이미 물은 흐르기 시작했고,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디에즈는 로젤린의 발치에 결정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이 결정을 따라 이동했다. 시야 밖에서 디에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걸 알게 된다고 당신의 다짐이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망설이겠죠. 이따금 이게 옳은 건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게 될 겁니다. 그렇길 되기 바랍니다. 부디. 그 망설임이 당신의 발목을 잡아,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멈춰 서게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디에즈는 다람쥐가 떨어트린 돌멩이에 한 대 맞고서도 평온한 표정으로 떠났다. 마카롱은 모든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디에즈가 준 결정을 회수하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젤린은 풀잎 사이로 빛나는 결정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시간이 지나, 꿈에서 흘린 눈물이 차고 넘쳐 현실에서 흐르기까지 일주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결정의 힘뿐만 아닌 다른 요소도 작용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어둠 속 불타는 하얀 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추는 아름다운 하얀 달까지.
과거와 비슷한 상황들은 로젤린이 잊고 있던 기억을 깨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이따금 흔들고는 했던 격렬한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변할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자신을 둘러싼 이 눈빛들이, 적의가, 불합리한 분노가,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자들의 모든 행동이.
‘짜증 나.’
로젤린은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계속 달렸다.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 해도 결국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았지만, 어디라도 좋으니 달아나고 싶었다.
사람들이 시선이 닿지 않을 곳, 숨을 수 있는 곳.
로젤린은 단숨에 달려, 벽을 타고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헤사가 미리 따뜻하게 데워 놓은 방 안의 공기가 훅하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로젤린은 눈을 찡그리며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누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고개만 반대로 휙 돌렸다. 테이블을 끼고 칼릭스와 인간 여자 형태의 마카롱, 미미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미미는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서는 칼릭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 누나 사춘기가 이제야 왔나 보다. 늦되네.”
칼릭스는 낄낄거리는 미미를 노려보았다.
“…….”
참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는데…….
로젤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미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미는 술을 마시고 크하, 하는 걸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뭘 보고 있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장 터질 것 같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미미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았다. 달콤한 과실 향이 목 뒤로 넘어가자, 영영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찝찝함이 조금 덜어진 기분이었다. 로젤린은 술병째로 홀짝홀짝 마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더럭 얘기를 꺼냈다.
“재밌는 얘기 해 줘.”
미미는 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고, 칼릭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는 중이었다.
“빨리.”
로젤린이 탁자를 탁탁 치며 재촉하자 미미가 합세했다.
“그래, 네 누나가 재밌는 얘기 해 보라잖아.”
칼릭스는 초조한지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떨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머뭇거리며 재밌는 얘기를 시작했다.
“음, 일주일 전에 알터가 눈에 커다란 멍을 달고서 집무실로 들어오더군요. 부상의 이유를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아서 묻지 않았는데, 알터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하면서 막무가내로 얘기를 시작하지 뭡니까.”
알터와 그의 여동생 일리야는 평소같이 말다툼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졌다고 한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고, 윗사람으로서의 아량이고 뭐고 간에 진심으로 상대하려 했는데 처참하게 패배했단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동생에게 지고, 분해서 울었다는 알터의 얘기가 너무나 재밌는지 칼릭스는 말하는 중간중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감흥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마치 보고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미미의 얼굴에는 싸늘함이 감돌았고, 로젤린은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하는지 몰라 가만히 술병 입구를 물고 있기만 했다. 정적이 길어지자 칼릭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저는, 재밌다고 생각했는데요.”
미미는 그 회심의 재밌는 얘기를 반추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놀리지도 못할 만큼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