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76화 (176/220)

176화.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로젤린은 잠결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무언가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로젤린은 벽에 걸린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꿈은 길고도 짧았다.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냄새. 어두컴컴한 공간, 저 멀리에서 보이는 희미한 횃불의 빛. 끈적한 철창, 곰팡이와 이끼가 낀 바닥과 벽의 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덜덜 떨 수밖에 없던 그때의 감정과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눈을 뜨니 머리는 혼몽했고, 잠에서 덜 깬 몸은 축축 늘어져 현실이 도리어 꿈같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눈물도 닦지 않고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코를 훌쩍이고 있는 사이, 멀리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똑똑, 문을 두드린 소년이 정중하게 “들어가겠습니다.” 얘기하고는 문을 열었다.

아무리 깊게 잠들어도 타인의 기척을 예민하게 읽어 내는 로젤린은 언제나 헤사가 깨우기 전에 일어났다. 그래서 헤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먼저 일어나 계셨네요.”라는 말로 아침 인사를 대신 할 예정이었는데…….

로젤린과 눈이 마주친 헤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얼어붙어 십 초 정도 숨을 쉬지 못했다. 너무 충격받아 눈알도 못 굴리던 소년은 멍하니 다가가 그녀의 입에 아침 사과 한 조각을 물려 주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고, 로젤린은 눈물을 그쳤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유령처럼 방 안을 떠돌아다니며 몸에 익은 청소만 관성적으로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모,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당도 높은 사과…….”라며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몹시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시트를 끌어당겨 아직 덜 마른 눈물을 문질렀다. 헤사가 가져온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헤사가 챙겨 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몸단장을 끝내고 나니 헤사가 머리를 정리해 묶어 줬다. 소년은 아직까지도 흘끗흘끗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로젤린은 헤사의 시선을 뒤로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엉망이던 아까와 달리, 평소 같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꿈속에서부터 계속 들러붙어 있던 감정만은 계속해서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헛소리하면 그냥 무시해.”

리카르디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최선이란 걸 알고 있으나, 로젤린을 물어뜯을 준비가 끝난 승냥이 굴로 직접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뜩잖은 듯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쯧, 혀를 차고는 노망난 영감들 같으니, 라고 악담했다가 아차 하고 로젤린의 눈치를 살폈다. 로젤린은 기분이 저조한 와중에도 그를 보며 살짝 웃을 수 있었다.

“어떤 말이 헛소리입니까?”

“일부러 놓아준 게 아니냐. 이런 거.”

“아, 정말 헛소리네요. 알겠습니다, 그냥 무시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와서 박히는 날카로운 눈빛들을 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앉으며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노려보듯 둘러보았다.

“오늘은 부디 그 돌림노래 같은 지겨운 얘기에서 벗어나 성과를 얻고 돌아갔으면 좋겠군. 어제의 약속을 잊지 않길 바란다. 강압적이고 난폭한 어투, 여러 명이 질문을 겹치며 추궁하는 식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기사는 죄인이 아니고, 순수하게 그대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 친히 걸음 한 것이란 걸 유념해라.”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질문은 리카르디스가 대충 이러한 경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고 짚어 준 예상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디에즈 전하가 로젤린 경 당신만 독대하길 바라지 않았나, 무슨 얘기를 했나, 체리트 전하의 위치를 들었으면 디에즈 전하를 제압해도 되는 게 아니었나, 그 후 하카브를 쫓으면 되는 일 아니었나, 설마 모종의 거래를 하고 놓아준 거 아니냐. 등등.

시선은 찌를 듯 예리하고, 어조는 칼날 같았다.

로젤린은 세간에 떠도는 악의 어린 소문들이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 중이었다.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보지도, 알지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설명하면 될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 수많은 시선 가운데 자신은 이미 죄인이었다. 로젤린은 그들이 바라는 대답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써 눌러두었던, 꿈속에서부터 이어받은 감정이 널뛰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무언가가 퍼져 나갔다. 검고, 약하고, 작은 것들이 온몸을 뒤덮어, 몸 위를 기어 다니고, 살갗을 물어뜯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쾌한 감각에 로젤린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그녀 때문에 회장이 술렁였다.

“……경?”

걱정하는 리카르디스의 목소리에 로젤린은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감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디에즈 전하와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에 황녀 전하의 위치만을 가르쳐 주며, ‘파편’을 먹여 두었다고 했다. 일라베니아 황실에 내가 아는 또 다른 마인이 없기에, 우선적으로 황녀 전하의 치료를 위해 돌아온 거다.

로젤린은 무미건조하게 응답했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은 누군가가 펄펄 날뛰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그냥 수면제를 복용한 것으로 판명 나지 않았소!”

“디에즈 전하께서 ‘파편’을 먹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주할 시간을 벌어야 하니 거짓말을 하셨겠죠.”

또 다른 남자가 질문했다.

“하카브 왕자가 일라베니아에서 가장 관심을 둔 인물이 경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원하는 대답이 빤하게 보였다. 로젤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흘렸다. 그녀의 실소에 회장이 다시 한번 싸늘해졌다. 로젤린은 개의치 않고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다 하더군요.”

“공적인 자리 이외에 접촉이 있었나?”

“없습니다.”

재빠른 대답이었다.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태연한 거짓말에 리카르디스는 내심 감탄했다.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거짓말도 잘했다.

가만히 이 토론을 지켜보던 젊은 귀족이 질문했다.

“일부러 놓아주신 것은 아닙니까, 로젤린 경?”

로젤린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가 남자의 질문을 헛소리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도망갈 수도 있던 디에즈 전하께서 굳이 경을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들을 떼어 놓고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적인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는 얘기를, 경의 입으로만 전해 들었지요.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혼자였고, 디에즈 전하며, 발타의 그 어떤 누구도 잡아 두지 못했습니다. 구한 것은 애초에 위험하지도 않았던 황녀 전하뿐.”

회의실에 모여 있는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의문을 품지 않으려야 품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결백을 증명할 만한 사람이나 물건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로젤린은 눈을 한번 감고, 숨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꾹 누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곧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는 결백합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말밖에 할 줄 모르시는 것도 아닐 테고.”

이쯤, 리카르디스가 손을 들고 만류하려 했으나, 로젤린이 대답한 게 먼저였다.

“그렇다면 제가 결백하지 않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공간에 잠시간 정적이 일었다. 로젤린을 공격하던 남자는 잠시간 입꼬리만 씰룩였다.

“모든 정황이…….”

“어떻게 정황만으로 사람을 죄인이라 확정 지으려 합니까. 저의 결백이 저의 증언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처럼, 저의 죄 또한, 정황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로젤린이 짧게 혀를 찼다.

“증거부터 가져오시고 이 논쟁을 계속하든가 말든가 하시죠.”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던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내 기사가 저렇게 말을 잘해? 순간 과거 ‘로젤린’을 보는 것만 같았다.

“로젤린 경…… 그대가 말하는 요지는 알겠네만, 무례하군.”

로젤린은 나이가 지긋한 귀족을 바라본 후,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몸을 곧게 세웠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난데없는 충성 맹세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로젤린은 다른 사람들도 익히 따라 말할 수 있을 법한 서약문을 줄줄 외웠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로젤린은 가슴에 두었던 주먹을 다시 등 뒤로 하고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한 번씩 쭉 마주 보았다.

“그렇게 제 목숨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제 목숨을 받으셨습니다. 단순한 정황, 제가 마인이라는 이유에서 생겨난 얄팍한 의심 정도로 폄하 당할 만큼 가벼운 맹세가 아닙니다.”

“아니, 그 맹세야…….”

로젤린이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못 알아먹은 귀족 한 명이 반박하려 반쯤 몸을 일으켰다. 해 봤자, 맹세 그거야 어기면 그만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리라. 리카르디스가 느릿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설마 맹세쯤이야 어기면 그만 아니냐는 발언을 하려던 것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군. 그쪽이야 맹세를 밥 먹듯 어기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기사들은 그렇지 않은 터라.”

남자는 정말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입을 합 다물었다. 리카르디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그 의심은 목숨을 걸고 맹세한 로젤린 경에 대한 무례이고, 또한 그녀의 목숨을 받은 나에 대한 무례다. 이 자리에 로젤린 경이 참석한 것은, 요즘의 불안 속에서 그 정황이 한편으로 나쁘게 받아들여지리란 사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절하게 해명이 아닌 설명을 하러 왔지. 로젤린 경은 검은달의 암살자를 제압하며 검은 달을 가르겠다는 맹세를 증명했고, 그대들이 충격받아 따뜻한 침대에서 요양하는 동안 밤새도록 거리를 뛰어다니며 백성들을 구해 약한 자를 보호하겠다는 맹세 역시 증명했다. 티가드의 수많은 백성이 로젤린 경을 칭송하는 소리는 듣지 못한 건지 듣기 싫은 건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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