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림자 없는 밤 3부
19
새벽이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황실의 석영 성을 포함해 수도 거리를 뒤덮었던 크고 작은 화재들은 사람들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 내린 단비로 끝을 맞이했다.
잿빛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퍼졌다.
“여기, 누가 제발 도와주세요!”
아주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은 고삐를 잡아 멈췄다. 병사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리를 감지하지는 못했으나, 로젤린과 함께 있던 몇 시간의 경험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구조 요청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수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인들의 난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안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에, 황실 기사들 일부가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중에는 로젤린도 있었다.
물론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연회장의 사건을 주도한 범인은 모두 수도를 떠났지만, 그렇다고 그게 모든 위험이 없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전에 없던 단호한 태도로 로젤린에게 치안대의 지원을 명령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구하라고.
로젤린은 밤새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 불길도 잡혀 갔으나,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수백이고, 다친 사람은 그의 배가 넘었다. 화재와 괴인들의 난동으로 건물은 부서지고 무너졌다. 간밤보다 훨씬 조용해진 아침이라 해도 로젤린의 귀에는 갖은 신음과 비명, 울음소리가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다.
로젤린이 걸음을 옮기자 병사 몇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무너진 건물 앞에서 사람들이 엉엉 울고 있었다. 로젤린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를 뒤로 넘기고 말에서 내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로젤린 경, 로젤린 경! 제발!
로젤린은 한숨을 후 쉬고는 무너진 벽에 다가섰다.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약한 신음이 들렸다. 생존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거뭇하게 물든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장정 다섯이 모여도 들지 못하고, 밀어도 움직이지 못하던 거대한 건물의 잔해가 가볍게 들렸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로젤린 경!”
유명한 로젤린의 활약을 밤새 지켜본 탓인지, 앳된 병사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초롱초롱하게 담겨 있었다.
로젤린은 쫄딱 젖은 채, 미처 성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반쯤 부서진 건물의 지붕 아래에서 비만 겨우 피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체력을 지닌 그녀라고 해도 지칠 만큼 고된 일정이었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건이 벌어질 줄이야.
로젤린은 나무 상자 위에 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병사들은 그녀에게 몇 마디 더 붙이고 싶었지만, 상대가 너무 지쳐 보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미련 가득한 목소리로 경례한 후 발길을 돌렸다.
“어? 이게 여기도 있네요. 꽁지 빠져라 도망치는 와중에 이럴 정신은 어디 있었답니까?”
돌아서는 어린 병사가 툴툴대며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쓰러진 과일 바구니 밑에 있던 종이는 여태껏 내리는 비에도 귀퉁이만 젖어 있었다.
“협력자가 있는 거 아니겠냐? 마인이겠지. 하여간 더러운 놈들 같으니.”
뒤돌아선 남자들의 뒷모습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자의 악관절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더러운 놈들. 한 번 더 욕설을 내뱉었다. 로젤린은 종이에 베인 듯 섬뜩한 기분에 잠시 몸을 굳혔다.
“그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병사들이 화색을 지으며 뒤돌아보았다. 진득하게 붙어 오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예! 이게 무엇이냐면!”
“제가 주웠습니다! 예, 로젤린 경! 여기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발타 그놈들이 얼마나 뻔뻔한지 황성과 거리에 그 사달을 내놓는 것도 모자라 일라베니아를 모욕했지 뭡니까!”
남자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왔다. 로젤린은 자리에 앉은 채 살짝 눅눅해진 종이를 건네받았다.
발타 욕을 한껏 퍼붓던 남자들은 지나가던 상관에게 걸려 모조리 끌려가야 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놀고 앉았어?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상관도 로젤린에게 다가와 수줍게 경례하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떠나갔다.
홀로 남은 로젤린은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갖은 욕설과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법을 빼고 요약하자면, 축복의 밤이 떠오르던 먼 옛날. 일라베니아가 홀로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마인을 음해하였다는 것.
또한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성력뿐만 아니라 마력도 필요했기에 마인들을 황실의 감옥에 오랜 세월 감금하고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 도망친 마인들이 모두 죽어 버리게 된 탓에 더 이상 축복의 밤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라베니아는 대륙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진실을 숨긴 비겁자 일라베니아여! 거짓된 영광을 내려놓고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로젤린은 마지막 문장에 시선을 오래 두다 중얼거렸다.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
멍하니 보고 있던 ‘단죄받을 시간이 도래하였다!’가 돌연 사라졌다.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종이의 행방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그녀의 앞엔 마찬가지로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인간 남자 형태의 마카롱이 보였다. 그는 어디서 주워 입은 것인지, 꽃이 수놓아진 연 분홍색 여성용 상의에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복식의 조화에 큰 관심이 없는 로젤린의 눈에도 괴악한 옷차림새였다.
마카롱이 한쪽 손을 허리에 놓고 삐딱하게 서서는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중간중간 감탄사를 넣던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보면 지들이 당한 줄 알겠어.”
그러고는 종이를 두 번 접어 주머니 안에 쏙 넣었다.
“왜 뺏어가.”
로젤린이 마카롱의 허벅지를 찰싹 쳤다. 비에 젖은 가죽 바지에서 아주 찰진 소리가 났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막힌 소리가? 로젤린이 가죽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탐냈다.
마카롱이 자신의 옷자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벅벅 닦았다.
“이게 진흙에서 뒹군 곰이야, 거지야. 분간을 할 수 없어. 꼬질꼬질, 드러워 죽겠네. 어디 가서 나 안다고 얘기하지 마, 창피하니까.”
곰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었다. 보통 평범한 선택지를 넣어 주지 않던가? 로젤린의 눈에 불만스러운 빛이 한껏 담겼다. 마카롱은 피식 웃고는 바닥에서 뒹구는 사과 두 개를 집어 내리는 빗물에 씻었다. 그러고 휙, 로젤린에게 사과 하나를 던졌다.
아삭, 사과를 한입 베어 먹은 마카롱이 반쯤 부서진 문가에 기대었다. 비 내리는 바깥 풍경만 보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키 큰 남자가 반쯤 가린 좁은 문틈 사이의 풍경을 응시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핏물과 잿물이 뒤섞인 바닥은 엉망이었다. 로젤린은 그 장면을 멍하니 흘리며 사과를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굴렸다. 팔꿈치에서 툭 튕긴 사과는 다시 로젤린의 손으로 들어왔다. 빗줄기가 만드는 일정한 크기의 소음이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혔다.
로젤린은 사과를 두 손으로 잡아 아삭아삭 씹었다. 입안 가득 상큼한 과즙이 퍼졌다. 로젤린은 그제야 자신이 굉장히 허기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사과를 씹으며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디에즈와 헤어지고 돌아오던 때였다. 어둠 속에서 아름다운 성이 불타고, 고개를 들어 보면 시릴 정도로 하얀 달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명한 기시감이 들었다.
[……영영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로젤린. 이미 물은 흐르기 시작했고,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아주 오랜 옛날의 기억일지도 몰랐다.
* * *
황실은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 제국의 장자가 죽고, 귀족들이 살해당했으며, 그 주범은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연회장 안에는 많은 신관이 있었으나, 쓰러진 모두를 살려 내지는 못했다. 발타의 비수는 급소를 스쳐 지나가는 법이 없었고,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리카르디스라고 해도 죽은 자를 살려 내는 기적을 일으키진 못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수도는 아직 혼란스러웠다. 그 탓이었을까. 적아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생겨났다.
그날.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만이 ‘디에즈’라는 제국의 배반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카브도, 3왕녀 간제나 고위 귀족 중 그 누구도, 하다못해 디에즈도 잡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나마 납치되었다 알려진 체리트 황녀를 찾아내긴 했지만…….
체리트는 디에즈가 주장했던 것처럼 위험하고 먼 곳에 있던 것이 아닌, 황실 숲에서 고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황실 숲에 대체 왜 있는지 모를 아기자기한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쿨쿨. 동화책 한 장을 떼어다 현실에 가져온 듯한 장면에 사람들은 많이 당혹스러워했다. 디에즈 황자는 애초에 그녀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해칠 생각도 없던 것이다.
체리트 황녀를 구한 일이 험난한 산과 강을 건너, 암살자들과 전투 끝에 이뤄 낸 것이 아니라 그런지, ‘체리트 황녀 전하 구출’ 건은 대수롭지 않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로젤린은 사람들에게 ‘디에즈와 하카브를 놓친 자’일 뿐이었다. 그 말이 ‘디에즈와 하카브를 놓아준 자’라고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장 하카브에게 터트리지 못한 많은 이들의 분노가 로젤린에게 쏠렸다. 연일 계속되는 회의에서는 조금 멀리 있는 전쟁보다 가까이 있는 로젤린의 죄를 명백히 밝혀내기를 더 바랐고, 열 받은 리카르디스가 여러 번 테이블을 뒤엎었음에도 사태는 진정될 줄 몰랐다.
계속해서 감추는 걸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게 아니냐. 떳떳하면 나와서 해명하라는 말만 되풀이될 뿐이라 리카르디스는 여러 조건을 걸고 딱 한 번 회의실에 그녀를 대동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