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나쁜 장난을 즐기는군요, 황자.”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디에즈는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방해꾼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이 책 내용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빠르게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것이 아이들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하카브가 책장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 부류의 아이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황자는 그런 아이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요.”
하카브는 제 턱 아래에 겨우 오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태양 빛을 한껏 받은 황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켰다는 자각이 있는 것 같음에도, 행동거지는 여전히 느긋했다. 디에즈는 또 다른 책을 뽑아서 눈으로 대충 훑고 있었다.
일라베니아 제국의 5황자, 설원의 월계수 디에즈.
파티 홀에서 몰래 빠져나가기에 뒤를 밟았더니, 도서관. 심지어는 타국의 인사에게는 열람권이 없는 구역까지 들어가는 게 아닌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하카브 왕자. 어린아이의 실수나 장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어찌 이런 금지 구역까지 오셨는지.”
책을 읽는지 넘기는 것인지 모를 빠른 속도였다. 디에즈는 다시 책을 덮고 끼워 두었다. 하카브가 제 턱을 쓸며 웃었다. 확실히 발타의 1왕자와 제국의 5황자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였다. 일라베니아도 발타도 아닌 라고슈 왕성 내 위치한 도서관. 그 금지 구역 안쪽이었으니.
“서로의 허물은 묻어 두는 걸로 하시겠습니까, 황자?”
“그렇게 하죠.”
디에즈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파티 홀에서 생글생글 사랑스럽게 웃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전부 다 연극인 모양이었다.
태양 빛을 받는 황금보다 찬란하다는 둥, 디저트 위를 흐르는 벌꿀보다 달콤하다는 둥, 디에즈 황자가 눈길을 주는 곳에는 그곳이 라고슈라 하더라도 꽃이 필 것이라는 둥의 찬사를 받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툭툭 내뱉는 말투, 타국의 고위 인사를 앞에 두고 눈길도 주지 않는 태도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그의 평가와 대비되었다.
“한…… 안 가십니까?”
한가하십니까? 로 들렸다.
하카브는 그가 펼쳤다가 꽂는 책의 제목들을 쭉 훑었다. 죄다 역사 관련이었다. 그것도 일라베니아와 관련된.
하카브는 머리를 굴렸다. 일라베니아 내에 역사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국의 황자라 어지간한 책은 다 볼 수 있을 텐데, 굳이 타국의 도서관, 금지 구역까지 왔다는 것은…….
‘이것 참.’
하카브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조차 몰랐던 디에즈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가 끼우기를 반복하는 소년의 어깨 위로 제 손을 뻗어 책장을 짚었다. 디에즈는 졸지에 그와 책장 사이에 갇히게 되어 버렸다. 디에즈가 고운 얼굴을 확 찌푸렸다.
“발타에도 재밌는 책들이 많습니다, 황자.”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디에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카브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디에즈는 편하게 책장에 등을 기대며 그와 마주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싱글벙글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저는 그런 걸 좋아합니다.”
“말해 보시지요.”
“미신, 속설.”
“좋군요. 저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있을 수도 없는 소설.”
“주로 사람들은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고는 하더군요.”
“터무니없는 것.”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도서관 내부는 어두웠다. 그 속에 황금빛의 황자만이 고요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에 잠긴 보물 상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
하카브가 웃었다. 그쪽 핏줄은 어지간하면 바보거나 멍청이뿐인데, 황실의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머리가 비상했다. 일라베니아에 쓸 만한 인물은 리카르디스뿐인 줄 알았더니…….
“재미있군요, 황자. 마침 제가 그런 이야기를 압니다. 일라베니아의 사람이 듣기에는 한없이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소설일 테지요. 흥미가 있으십니까?”
“저희가 있는 곳이 어딘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흥미가 없었으면 금지 구역까지 왔겠냐. 숨겨져 있는 말을 알아듣고 하카브가 웃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린다면, 황자는 저에게 뭘 줄 수 있습니까?”
디에즈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더니 그의 말에 답했다.
“일라베니아.”
하카브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5황자가 주겠다는 대가치고는 크기가 너무 크다. 그래도 당찬 기세 하나와 내용 자체는 썩 마음에 드는 터라, 그 값을 후하게 치기로 했다.
* * *
발타로 귀화한 일라베니아 병사로부터의 증언이다. 정리된 문서는 소실되어, 그 당시 증언을 그대로 속기한 내용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른 병사들의 증언과 대조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수감자들은 식사 시간, 용변이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 것. 수칙 첫 번째입니다.]
[특별히 수칙으로 정해졌던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그런 겁니다. 너희들이 날고 기어 봐야 다 우리의 관리하에 있다. 그런 거를 보여 주는 거기도 하고요. 아무리 녹슬어 있다지만 대단한 무기였던 만큼, 철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랬군요. 이해가 갑니다. 또 다른 수칙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수칙 두 번째는, 함부로 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병사들의 이목을 피해 불온한 대화가 오고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는 기침 소리로 신호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숨 쉬는 것 하나하나도 주의 깊게 살피고, 처벌했습니다. 허튼 생각을 못하도록요.]
[오, 물론이죠. 그런데 어린 수감자들은 그걸 이해하기 좀 어려워했을 것 같은데, 그 경우는 어떻게 했죠?]
[어…… 그러니까…….]
(10세 미만 어린 수감자들에게도 똑같이 체벌이 적용되었음을 확인함. 지속적인 학대.)
[대답하기 어려우면 넘어가셔도 됩니다. 다른 걸 얘기해 볼까요?]
[네, 네네. 아, 그리고 식사는 아침에 한 번으로 제한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예 굶는 날이 있고요.]
[일반 범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나요?]
[아니요. 사람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수감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배급하고, 특별 수감자들보다 양도 많습니다. 특별 수감자들은…… 아시잖습니까.]
[그렇죠. 마인이니까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어요.]
[맞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특별 수감소가 창설된 초창기만 해도 어휴, 밥을 제대로 먹이니까 철창 뚫고 아주 날아다녔다 합니다. 십 년 전만 해도 그런 사고가 빈번했다니, 점점 양이 줄어든 거죠.]
(……중략)
[감옥 내에서 태어난 애들도 많습니다. 근 이십 년 정도 됐으니까, 어린 애들은 뭐 다 감옥 출신이라 봐야죠. 일단 네 살 정도까지는 어미랑 같이 두고, 입이 트일 무렵이면 떼어 놨습니다. 아이들을 아이들끼리 따로 모아 둡니다. 여차하면 인질이 될 수 있게요. 아무튼, 그렇게 태어난 애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요?]
[감옥에서 부모가 살갑게 이름을 붙여 주겠습니까, 누구야 하면서 안아 줄 수나 있습니까. 부를 필요도 없고, 불릴 이유도 없으니 이름도 없었죠. 병사들이 부를 때는 그냥 야, 너. 하거나 창대 끝으로 툭툭 치거나 했죠.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고, 상부 지침이라. 예, 상부 지침.]
[네, 상부 지침. 하하.]
[어렸을 때부터 들은 게 없다 보니 열 몇 살 되는 애들도 제대로 말을 못해요. 필요한 단어 몇몇 개 빼고는 모르죠. 그러다 보니 사고 능력도 떨어지더라고요. 멍청하고 행동이 더뎌요. 먹을 거밖에 모르고 그냥. 멍하니 있다가 자고, 하라는 거하고. 그런 식이죠. 그런데 사실, 그게 좀 편해요. 어른들이랑 달리 다루기 편리하니까요. 아,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다른 병사들이 그렇다 하더라고요.]
(……중략)
[대신전 특별 수감소 내에 근무하면서 불편했던 점이 뭐가 있었나요?]
[지하 깊은 곳이다 보니까 습하고 춥습니다. 곰팡이도 잔뜩 펴 있어요. 일주일만 근무해도 다들 기관지에 무리가 와서요, 어우. 다들 배정되기 싫어했죠. 그런데 월급날 되면 그런 것도 사실 뭐 버틸 만했어요.]
[힘들었겠어요.]
[힘들죠, 정말 힘듭니다. 아무리 마인이라 해도 그런 환경이다 보니 나이 들거나 어린 수감자들은 못 버티더라고요. 몇 주에 한번 꼴로 시체가 생겨요. 그런데 그 시체를 어쩌겠어요. 치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감옥 안에 눈알이 희번득한 놈들이 있어요. 아주 오금이 저려요. 이건 뭐 철창 열자마자 폭동이 일어나겠다 싶죠. 실제로도 몇 번 시도가 있었고요. 그렇다 보니 상부에서 어지간하면 철창문 열지 말라 공문이 내려왔거든요. 철창문 안 열고 어떻게 시체를 치우겠냐고요. 환장합니다. 갈고리로 시체 끌어내서 안쪽에서 조각낸 다음에 꺼내야 해요. 냄새도 더 지독하고 처리 과정도 더 귀찮아도 어쩌겠어요. 아주 인간 백정된 기분이라니까요.]
(중략)
[이제 사건 당일 날에 대해 말해 주시겠어요?]
[제가 저녁-새벽 교대 조거든요. 갑옷 챙겨 입고, 장비하는데 뭐 밖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특별 수감소 문이 열렸다고 그러지, 마인들은 도망갔다 그러지, 신관들은 살해당했다고 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더라고요. 여기저기 불타고 있어서 불도 꺼야겠고. 쫓아도 가야겠고 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알고 보니까 도망가고 시간이 제법 흐른 후였습니다. 목격자고 뭐고 다 죽이고 가서 몇 시간 동안이나 몰랐던 거예요. 아무 죄 없는 어린 수습 신관들까지 죽였다는데, 아주 잔인한 놈들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