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72화 (172/220)

172화.

“제법 화려하게 일을 저질렀더구나, 디에즈. 하카브 왕자는 어디 있지?”

리카르디스가 제 할 말만 하자 디에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먼저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디에즈는 그 말을 하며 로젤린은 찬찬히 훑었다.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굳어졌다. 디에즈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자신의 뒤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의 뒤에 있던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가 디에즈의 눈짓을 보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디에즈가 그걸 받아 하얀밤 기사단원들 쪽으로 던졌다.

모두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디에즈가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위험한 건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위험한 건 아니었다. 반짝이는 작은 구두였다. 어린 영애들이 신을 법한…….

리카르디스는 잠시 무언갈 생각하다가 이를 갈며 분노했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네가 지금……!”

“연회장에 체리트가 없던 걸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덕분에 얘기가 빨라지겠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형님. 형님은 그 선에서 넘어오지 마시고…….”

디에즈의 말대로, 리카르디스는 건국일을 맞이한 연회에 체리트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어린 7황녀는 디에즈를 잘 따랐고, 그는 그것을 잘 이용한 모양이었다.

“로젤린, 당신과는 못 다한 얘기가 있어서. 잠깐 같이 걸을까요?”

“헛소리 하지 마라, 디에즈!”

“체리트를 데리고 갈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적당히 거지 소굴에 던져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을 먹는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도는 곳인데요.”

리카르디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디에즈를 처단하고 하카브를 쫓아야만 했다. 목숨의 무게는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잘 알았다. 체리트를 살리는 것, 하카브를 죽이는 것.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했다.

하카브가 살아 돌아가게 된다면 분란과 전쟁은 가속화될 것이다. 어떤 때보다 하카브를 둘러싼 방어가 얕은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만…….

리카르디스는 한번 어린 동생을 잃어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디에즈는 어쩌면 그런 약점을 파악하고 체리트를 인질로 데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체리트를 구하기 위해서는 로젤린을 홀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디에즈에게 어떤 일을 당했던가. 그가 로젤린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던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등을 헤집었다. 날카로운 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노렸다.

계속 된 시도는 점점 치명적이게 변하고 있었으니. 이번은 정말로 위험할지도 몰랐다.

체리트를 구하고자 하면 하카브와 로젤린을 놓친다. 로젤린과 하카브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체리트가 죽는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잘 알고 있음에도 리카르디스는 망설였다.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시체가 얼마나 차가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여린 살결 위의 상처들은, 성력을 아무리 붓는다고 해도 낫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마지막 모습만 가슴에 박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으리란 걸,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리카르디스가 검을 뽑는 그 순간부터 전투는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말인즉슨, 인질의 안위는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는 것.

하카브를, 죽여야 한다.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죽여야만, 반드시! 검 손잡이를 잡은 남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았다. 몸 안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손끝부터 굳어 갔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들고 나서야, 자신이 계속해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로젤린의 시선이 맞닿았다. 로젤린이 경직된 리카르디스의 손을 꽉 쥔 채,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전하. 걱정 마세요.”

여기저기 거리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화재로 인해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울음소리와 비명은 점점 커졌다. 주변이 소란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요란하게 울려 대는 가운데. 그녀 혼자 달빛 아래에서 고요하게 서 있었다.

삐이익----

밤하늘에 묻혀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독수리가 울었다.

로젤린이 하늘을 한번 보더니, 리카르디스와 기사 단원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불꽃이 담겼다.

“황녀 전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언제나 초연했던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리카르디스가 가진 것과 비슷한 종류의 분노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 또한 누군가를 잃은 적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어린 황녀 세티스티아의 시체를 안고 하루하고도 반나절간 부서진 마차 안에서 울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야 떠올려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는 차마 로젤린을 붙잡을 수 없었다.

* * *

서쪽 성벽 문은 닫혀 있었다. 하카브는 어떻게 나간 것인지, 또 디에즈는 어떻게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곧 풀리게 되었다.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디에즈와 같이 있는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벌컥 문을 열어 줬다. 큰 정문이 아닌 병사들이 다니는 작은 문이긴 했으나, 그 또한 성벽 밖과 연결된 길이었기에 큰 차이는 없었다.

“오늘 비상종 울린 거 알고 계시죠? 이거 함부로 열어 드리면 안 되는데…….”

여자는 씩 웃으며 그들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던져 줬다. 평소에도 그래 왔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로젤린은 히죽히죽 웃는 병사들의 얼굴을 외워 뒀다. 이 나쁜 사람들.

두껍고 높은 성벽을 지나자 공기는 확 달라졌다. 고요하고 어두웠다. 로젤린은 말의 갈기를 쓸며 앞서 걷는 그들을 따랐다.

디에즈의 일행은 검은독사라 불리는 여인 한 명과 일라베니아인으로 보이는 사람 넷, 발타인으로 보이는 사람 넷. 도합 열 명의 소규모 무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카브는 어디 있을까. 로젤린이 곰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는 걸 보니 멀리 있는 모양이었다.

삐이익, 마카롱이 낮게 날며 울었다. 삑, 깩, 뺙, 깨르르륵…… 뭐라고 시끄럽게 우는데, 욕이었다. 디에즈를 향한 것이었다. 디에즈는 대충 알아들었는지 눈썹을 휘며 웃었다. 언제나 보여 줬던 그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으나, 로젤린은 이번은 경계를 놓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찔렀기 때문이 아니라, 납치한 소녀의 구두를 무성의하게 바닥으로 던졌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얘기했다.

“황녀 전하께서는요.”

“하카브 왕자와 함께 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귀하게 여겨 달라 했으니. 걱정 마세요.”

“하카브 왕자는 어디 있습니까.”

“먼저 떠나라 했으니, 저보다 앞에 있겠죠.”

“나에게 무얼 원합니까.”

“그냥 얘기나 할까 싶어서요.”

그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쏟아지는 밝은 밤이었다.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디에즈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어서. 그래서.”

얘기를 하자고,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해 놓고서는 디에즈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느새 좁은 숲길이었다. 나뭇잎이 하늘을 얼기설기 가리기 시작하자 무리의 위에서 날던 독수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나무 위를 토도도 뛰어다니는 다람쥐가 그들을 줄기차게 쫓아왔다. 숲길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디에즈가 말의 고삐를 쥐었다. 말이 제자리에 멈춰 서며 투레질을 했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떨어졌다. 디에즈는 그 아래에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조금 더 뒤로 빗겨 나가 있었다.

로젤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지나온 성벽, 거리들, 여기저기 불씨를 틔운 화재와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 성까지.

그의 눈동자에 비쳐 황금색으로 덧칠해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내가 이 말을 앞서 하지 않았던 것은…….”

디에즈의 흐릿했던 시선이 로젤린에게 닿았다.

“그래도 당신이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리카르디스의 옆에서 검을 들고 있을 것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로젤린이기 때문에.”

토도도도, 다람쥐가 근처 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디에즈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건, 그래요. 내가 하려던 말은 아니지만,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로젤린. 당신이 형님을 따르고 지키고자 하는 건, 그녀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 오래된 기억에, 고작 조각난 기억에. 나의 것도 아닌 기억에 매달리는 건 왜, 어째서.”

잔잔했던 남자의 목소리는 갈수록 분노에 차 흔들렸다. 한 자, 한 자. 그의 감정이 꾸역꾸역 들어가 있어 그녀도 잘 느낄 수 있었다. 조각난 기억, 나의 것도 아닌 기억? 로젤린은 과거 ‘로젤린’과 자신을 애써 분리하려 하지 않았기에 디에즈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알을 깨고 나온 짐승이 처음 본 무언가를 따르는 각인일까요? 이전에도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그저 관성적인 행동에 불과할까요. 정말로 당신이 하는 모든 사고, 관념. 그 모든 것이 당신만의 의지로 이뤄지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 속에 당신이 있기는 해요?”

디에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는 행동은 로젤린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라고. 리카르디스를 지키고, 그를 위해 검을 드는 행동까지 모두.

디에즈는 대충 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분노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큰 숨소리를 내는 짐승의 위에 앉아, 힘을 빼고 앉아 있는 디에즈는 어쩐지 살아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녹아서, 부서져서 달빛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로젤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로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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