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71화 (171/220)

171화.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남자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케틀린은 마수처럼 날뛰는 사람들에게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기운을 읽었다. 이 근처뿐 아니라, 수도 저 멀리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구름에 가려졌던 무수한 별이, 바람이 지나며 제 모습을 일시에 드러내는 것처럼.

케틀린이 말 위에 앉아 씩 웃었다.

“제법 장관인데요.”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의 말에 하카브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연회장을 휘저어 놓은 발타인들 또한, 마독 ‘파편’은 아니지만, 독을 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행히도 건국일을 맞아 다수의 신관들이 연회장에 있었던 터라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리카르디스는 혼란스러운 연회장 내부를 정리하는 것에 앞서, 하얀밤 기사단을 모았다.

“하카브를 쫓는다.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해.”

엘피디오가 죽었다.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파란이 일게 될 것이다. 발타와의 전쟁 이전에 일라베니아 내부에서 무언가가 먼저 터져 나올 수도 있었다. 갖은 준비를 한 상대를 두고 최선의 대비를 할 수 없는 전쟁의 끝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발타 쪽에도 일라베니아와 걸맞은 혼란을 선물해야 하리라.

하카브는 발타의 힉살라, 아돈을 대신해 왕실을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질 경우, 발타의 움직임에는 당분간 제동이 걸리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놀란 황제고, 기절한 황후고 뭐고 간에 제일 먼저 하카브를 쫓으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다들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막 도착한 성 기사들과 밖에 경비를 서던 병사들의 무기를 잠시 빌렸다. 빌려주는 사람들과 합의가 되지는 않았으나, 급한 상황이라 하나하나 설명할 틈이 없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부단장 마르틴에게 검을 뺏어 왔다.

로젤린은 긴 드레스 자락을 찌익 찢었다. 들쭉날쭉하게 찢어진 드레스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살랑거렸다. 시종들이 급하게 말을 몇 마리 데리고 왔다.

다들 번듯하게 차려입은 모양새로 말에 올라탔다. 하, 이랴! 급하게 말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성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수도를 둘러싼 성벽에는 동, 서, 남, 북. 총 네 개의 문이 있다. 그들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알지 못했다. 곧 비상종이 울리게 되면, 여기저기 횃불이 밝혀짐과 동시에 네 개의 문은 전부 닫힐 것이다. 닫힌 문을 뚫고 갈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들키지 않고 도망갈 구멍이 따로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남쪽 문, 가장 경비가 강한 곳은 피할 것이다. 서쪽, 상인들이 많은 거리. 그 속에 섞이려고 하는가? 목격자가 많으니 피할 수도. 북쪽,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삐이익----

먼저 살펴보러 떠났던 마카롱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삐익, 삑 삑, 깩! 독수리가 무언가 조잘조잘 얘기하자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카롱이 수상한 무리는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흩어졌다고 말해 줬다. 둘 중 어느 쪽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로젤린은 이상하게 서쪽이 신경 쓰였다. 서쪽 거리는 로젤린이 축제 날 길을 잃고 들어갔던 암흑가가 있던 곳이었다. 디에즈를 만났던 곳.

그때 길을 잃어버렸다는 디에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었으나, 그 또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말을 붙여 몰았다.

“전하! 서쪽 아란페디스 거리의,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골목을 아십니까? 축제 날에 검은 뱀이 그려진 가면을 쓴 디에즈 전하와 만난 적 있습니다.”

로젤린의 말을 들은 하얀밤 기사단원 모두가 고삐를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로젤린도 재빨리 그들을 따랐다. 아란페디스의 검은 독사. 일라베니아의 암흑가 큰손 중 가장 유명한 자였다. 디에즈가 그의 표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뒤에서 파르딕트가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그때 길 잃어버렸을 때 만난 거야? 그걸 지금 말해?

“로젤린 너 진짜!”

“……아니, 전…… 그때는…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것은 빨리 인정해야 했다. 눈치 보던 로젤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씩씩 화내려던 하얀밤 기사 단원들이 일시에 숨을 죽였다.

그녀는 서쪽 거리뿐 아닌, 수도 비스타 전역에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마수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이질적이었다. 검은달의 인조 마인 부대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보다도 더 이성을 잃고 날뛰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수도에 있었다면, 분명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은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석영 성의 화재를 신호로, 검은 독사가 마수의 결정을 무작위로 사람들에게 심고 다닌 결과였다. 마수의 결정은 마치 잠자고 있는 씨앗 같아 아주 가까이에서도 미약한 마력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그것이 사람의 몸을 토양 삼아 자라나기 시작하면 폭발하듯 기운이 터져 나왔다.

로젤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대충 예상되었다.

“서쪽 거리를 마수의 결정과 같은 종류의 마력이 뒤덮었습니다. 수, 스물…… 아니, 스물다섯. 서른셋. 일곱, 계속 늘어납니다. 여기저기에서 날뜁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확인했습니다. 거리에 많은 피해가 예상됩니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순순히 잡혀 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르원!”

그가 소리치자 무리에 있던 르원이 빠져나와 다른 곳을 향했다.

“치안대에 상황을 알리고 지원 요청하겠습니다! 로젤린 경!”

“맡겨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로젤린도 무리에서 확 튀어 나갔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곧, 무리가 향하는 정면에서 얼룩무늬의 소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머리로 들이받고, 짓밟아 뭉개는 소의 입에서 게거품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소의 다리와 머리에서 굵은 혈관과 근육이 울룩불룩 크게 부풀어 올랐다. 금방에라도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기괴한 형상이었다.

큰 거리로 가기 전의 좁은 길이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동료들을 뒤로하고 뛰쳐나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충돌하기 몇 초 전, 로젤린은 고삐를 쥐고 말 위에 섰다.

“로젤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로젤린을 목격한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젤린이 고양잇과의 동물처럼 유연하게 착지하고는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그녀의 시야가 휙휙 바뀌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소, 바닥, 하늘.

그리고 다시 코앞에는 흰자위가 붉은 짐승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쿵! 로젤린이 한쪽 발을 박아 넣듯 디뎠다. 그녀의 몸 안 구석구석을, 짐승이 가진 것보다 훨씬 강하고 거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타고 돌았다.

쾅!

살과 근육이 있는 두 생물이 부딪쳤다고 믿기지 않는 딱딱한 굉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로젤린의 맨발이 바닥에 박혀 드드득 밀려났다. 그러나 고작 한 걸음 반 정도의 거리.

소의 난폭한 질주로 시끄러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잠들었다. 짐승이 앞발을 들며 일어서려 했으나 로젤린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굴러다니는 부서진 나무 각목을 발로 차서 올려 빠르게 잡아챘다. 짐승의 단말마를 끝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피를 닦고 있는 로젤린의 뒤로, 타고 온 말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그녀가 가뿐한 몸놀림으로 등자를 밟고 올라탔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멍하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리카르디스를 에워싸고 달렸다. 독수리는 기사단의 한참 위에서 로젤린과 나란히 비행 중이었다. 거리는 엉망이었다. 사람들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비명을 질렀다. 아까까지 누군가의 얼굴을 핥던 짐승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익숙한 피 냄새를 뚫고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로젤린은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길 중, 가장 마력의 기운이 적게 느껴지는 곳을 판별해 달렸다. 위험한 상황이 오면 로젤린이 훌쩍 말에서 뛰어 벽을 밟고 누군가를 덮치고는 했다. 그러고 재빨리 다시 뛰어서 말 위에 앉는 묘기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삐이익---

마카롱이 길게 울었다. 무언가가 보인다는 신호였다. 로젤린이 눈을 변형시키며 한계까지 시력을 강화했다. 저 멀리, 말에 타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람들의 혼란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느긋한 걸음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로젤린이 이를 악물고 박차를 가했다. 그 순간, 그 일행 중 가장 뒤에 있던 누군가가 말의 고삐를 쥐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후드를 벗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까만 하늘 아래에서도 밝게 빛났다.

로젤린이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고작 스무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원들도 곧 도착했다.

“디에즈……전하.”

로젤린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불타오르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 때문에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디에즈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했어요, 로젤린. 무사해 보여 다행입니다.”

언제나 했던 인사말과 함께였다. 로젤린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하늘을 떠돌던 마카롱이 어느 지붕 위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나단이 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단원들도 모두 검을 뽑았다. 로젤린도 망설이지 않았다. 디에즈는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에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내가 먼저 한 짓이지만 겪어 보니 생각보다 더 유쾌하지 못한 일이로군요. 어쨌거나…… 검은 치우는 쪽이 좋을 겁니다. 로젤린,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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