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70화 (170/220)

170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케틀린은 하카브의 말로 인해 그 거대한 마력을 지닌 사람이, 디에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케틀린은 경악했다. 그녀가 아는 디에즈라고는 일라베니아의 5황자 디에즈밖에 없었다. 디에즈? 그가 마인이었다고?

“이런, 그대의 손이 더러워졌군. 내 옷에 닦아도 된다.”

찰싹 소리가 났다. 디에즈가 집적거리는 하카브의 손을 쳐 낸 모양이었다.

뚜벅, 뚜벅.

계속되는 하카브의 질척임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디에즈가 철창을 잡았다.

철컹.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검은 쇠가 울었다. 그의 눈이 천장과 벽 깊숙이 파고든 철창의 끝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철컹! 한 번 더 세게 흔들렸다. 하카브는 디에즈가 그녀를 꺼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그가 철창을 흔들고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최하층으로 오면서 디에즈가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갇혀 있는 마인들의 해방. 그자가 어떤 죄를 저질렀건 마인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침 하카브의 호위가 병사의 시체 안에서 열쇠를 꺼내어 왔다. 하카브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더 닦거라. 아, 디에즈 여기에 열쇠가…….”

쾅!

손짓하며 호위를 닦달하는 하카브의 말 위로, 귀가 먹먹하게 멀어 버릴 정도의 굉음이 덮쳤다. 하카브는 놀라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마력으로 강화된 일격이 철창을 타격했다. 하지만 우수수, 천장에서 흙먼지와 돌가루가 떨어질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디에즈가 다시 한번 철창을 세차게 두드렸다. 철창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이 벽을 울렸다.

쾅!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철창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쾅!

철창이 닿아 있는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으로부터 작은 돌조각이 떨어졌다.

디에즈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큰소리가 잦아들었음에도 투두둑, 도르륵. 돌이 굴러떨어졌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뱉었다.

쾅!

캉, 콰드득, 끼이익.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서서히 휘어지던 철창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돌벽이 검고 긴 강철을 뱉어 냈다. 갈라진 틈새에서 조각난 돌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케틀린은 보이지 않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수년간 그녀를 가로막던 거대한 철창이 무너진 모습은 본 적 없어 쉬이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그들이 쌓아 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그 소리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케틀린은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가슴팍부터 올라간 그녀의 손이 디에즈의 얼굴에 닿았다. 케틀린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남자의 눈물을 닦았다.

그들은 성을 빠져나왔다. 케틀린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년간 갇혀 있으면 감옥이라고 해도, 정이 드는 건가? 뭐가 그리 아쉬워서 그래.”

케틀린은 팔짱을 낀 채 입맛을 다셨다.

“엘피디오를 놓고 온 게 아쉬워서요. 갚아 줄 것이 많은데. 아이고.”

오래 갇혀 있던 탓에 근육이 약해졌는지 케틀린은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했다. 말 위에 앉은 그녀가 휘청이자, 뒤에 앉은 하카브의 호위가 그녀를 지탱했다.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하카브가 이런, 하면서 혀를 찼다.

“어쩌면 좋나. 미안하게 되었다 키티. 네 몫인 걸 몰랐어.”

“네? 죽이셨어요?”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죽기는 했지. 디에즈가 갑자기 찔러서 깜짝 놀랐지 뭐냐.”

하카브는 그때를 잠시 반추했다.

엘피디오와 디에즈, 그리고 자신까지 같이 있던 때였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던 중, 어쩌다 ‘로젤린’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하카브가 계속해 로젤린에 대해 탐욕을 드러내자, 엘피디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난리도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도 아니건만, 발타의 후계자가 황실의 ‘것’을 눈독 들이니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로젤린 경이야, 충실한 황실의 기사지요. 이번 무투 대회도 황실에 대한 충정을 내세우기 위해 참가한 것이니 말입니다. 다양한 경험을 위해 지금은 리카르디스의 밑에서 수행하고 있으나 이제 그녀도 슬슬 방황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피디오의 말을 들은 하카브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엘피디오는 얼굴을 붉히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왕자에게만 특별히 말해 드리죠. 지금쯤이면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제 인장이 찍힌 청혼서가 도착했을 겁니다.]

하카브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로젤린 경은 리카르디스 황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하, 그거야 어린 시절의 소꿉장난 아니겠습니까.]

그때쯤, 옆에 가만히 인형처럼 앉아 있던 디에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몰랐군요, 엘피디오 황자께서 로젤린 경을 마음에 두셨을 줄이야.]

[순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카브 왕자. 우리들의 위치에서는 마음에 두고, 두지 않고가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필요 하느냐’, ‘필요하지 않으냐’인 것이죠.]

그리고 눈 깜짝할 새였다. 엘피디오는 제 배에 박힌 날카로운 손톱을 보고 나서야 통증을 느낀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는 기절했다.

하카브는 기절할 만큼 좋아서 넘어갈 뻔했다. 아름다운 흰색 털의, 야수의 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림자! 디에즈가 로젤린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때만 떠올리면 극도의 흥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케틀린에게 설명하는 지금도 하카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도는 중이었다.

“뒤처리에 고생을 제법 했지. 그래, 그건 중요하지 않다, 키티 들어 봐라. 내가 꼭 일러 주고 싶었다. 그때 디에즈가 ‘그림자’인 걸 처음 알았는데 말이다.”

“그림자? 발타 전승의 그거요? 진짜로 있는 거였어요?”

“그래, 그래. 디에즈가 그거였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그때 디에즈가 얼마나 아름다웠냐면…….”

뭐, 엘피디오를 난도질하는 하얀 야수의 손이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둥. 엘피디오를 죽일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둥. 덕분에 황제에게 큰 선물을 보낼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디에즈의 덕이 아니겠냐는 둥. 케틀린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던 정보들은 대충 흘려들었다.

그림자. 케틀린은 그 거대한 마력의 정체를 깨우쳤다. 과연, 하카브 왕자가 ‘나의 검은 달’ 운운을 할 법한 일이었다.

몇 대를 거슬러 간, 위대한 영혼 힉살라의 왕비. 유일하게 여자로서, 평민 출신으로서 문헌이 이름을 남긴 갈라타. 미모나 학식이 뛰어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말도 더듬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천치라는 평을 받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힉살라의 왕비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얻게 된 경위에는, 그녀가 아주 강한 마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게 된 때로부터 강한 마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녀가 나타났다. 발타의 어떤 이도 견줄 수 없는,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마력. 힉살라는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출 정도로 총애했다고 전해졌다. 바로 그 시기부터, 발타의 문헌에 비밀스러운 서류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형태를 따라 ‘그림자’라 불리는 존재들에 관한 것이었다. 마력을 숭배하는 발타에게 그 존재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위대한 것이었다.

케틀린 또한 검은달의 간부가 되고 나서 그 문헌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직접 본 적 없으니 아무래도 전적으로 믿기 힘들었는데…….

디에즈의 마력을 코앞에서 느끼고 나니, 그 말을 믿지 않는 쪽이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엘피디오는 좀 괴로워했나요?”

“가죽을 벗길 때는 좀 아파 보이던걸. 그때까지 살아 있었거든.”

“듣던 중 다행이네요.”

“거기에다가 신관 옷을 입혀서 버려 둔 덕에 황족 대우를 받지 못하고 화장됐으니, 마음 풀어라, 키티.”

시체를 불에 태우는 방식은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신관들이나 하는 장례였다. 황족들만이 묻히는 영광의 땅을 버젓이 두고서, 태워져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황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디에즈가 급작스럽게 일으킨 사건을 뒤처리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장난질까지 치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엘피디오를 향한 감정은 소소하지만 차곡차곡 쌓아 제법 몸집을 불린 상태였다. 그가 겪었다는, 나름의 고난 정도로는 맞바꿀 수 없었다.

몇 년간 당해 왔던 일에 더하고, 곱한 것에 곱절을 돌려주려고 했는데. 어쨌거나 죽인 사람이 디에즈인 데다가 산 채로 얼굴 가죽이 벗겨졌다니 그나마 그걸 위안거리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케틀린이 코를 킁킁거렸다. 아까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뭘 이렇게 태우셨어요?”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불이, 또한 그 불에서 나는 연기가 얼마나 숨 막힐 듯 밀도 높은지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탄 냄새가 지나가는 바람 표면에 얇게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먼 곳에서 거대한 불이 났으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엘피디오의 석영 성. 주인이 없어서 기름칠하는 것이 수월했다더구나.”

“진즉에 말씀해 주시지. 기분 좋아졌어요.”

하카브랑 케틀린이 마주 보고 웃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코로 전해지는 붉은 빛과 검은 연기의 향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하카브도 그녀를 따라 불타는 석영 성을 바라보았다. 수도 거리 구석구석에 보일 만한 거대한 화재였다.

“역시 신호는 화려한 쪽이 좋구나. 눈에 잘 띄니 말이다. 슬슬 그쪽도 시작할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성이 불타는 광경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군중 중 누군가였다. 어떤 덩치 큰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다른 사람의 등에 식칼을 박고 있었다. 흰자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해 있고, 몸 여기저기에 근육과 핏줄이 울룩불룩 움직였다. 남자는 이성을 잃은 듯 날뛰었다. 그 남자보다 덩치가 큰 사내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믿기지 않는 힘으로 다른 이들을 떨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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