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68화 (168/220)

168화.

삐익!

기사단장 스타스가 손가락을 물어 휘파람을 불었다. 흩어져 있던 하얀밤 기사단원이 리카르디스를 둘러쌌다. 로젤린도 빠르게 전투태세로 돌입해 그를 등지고 다른 사람들의 동향을 살폈다. 스타스의 경고에 정신을 차린 얼음창 기사단도 잽싸게 황제와 황비를 보호했다.

저 멀리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황제가 등장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난 불? 사고라 보기에는 공교로웠다. 만약 누군가가 발견했다면 진작에 소화 작업에 들어갔어야 했다. 말인즉슨, 성의 경비가 뚫렸다는 것.

리카르디스는 한순간에 성을 잃게 된 주인을 바라보았다. 엘피디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침착해 보이긴 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리카르디스가 황제를 보며 르원에게 물었다.

“하카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디에즈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얼 원하는 건가. 리카르디스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디에즈. 원한을 가진 자. 발타와 손을 잡고 전쟁을 준비하는 자. 황제의 목을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황제는 불타는 성으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다.

리카르디스는 하늘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저것은 단순한 속임수다. 이미 위험은 불타는 석영 성을 벗어나 이 홀에 숨죽이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일수록 황제의 보호는 더더욱 강해진다.

“2황자 전하!”

얼음창 기사단이 하얀밤 기사단에 협력을 요청했다. 황족들을 모아 같이 보호하려는 듯했다. 리카르디스는 황제에게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러한 사태에는 보통 황족들을 같이 보호하고는 했다. 디에즈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상황을 바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족들을 한곳에 모을 필요성? 어째서?

엘피디오는 잽싸게 보호의 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린 황녀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이번 신관은 목이 잘렸어! 머리는 아직 발견 못했어!]

머리가 없는 신관의 시체.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그걸, 얼굴이 없는 그 시체를!’

어떻게 신관의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신관이라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얼굴 가죽을 뒤집어썼더군요.]

단서를 따라 사고가 흘렀다. 그는 자연스레 로젤린의 호위 첫날을 떠올렸다. 익숙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날카로운 비수를 속에 숨기고 있던 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봤다. 얼음창 기사단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단단한 경계를 세우고 있으나, 위험은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아닌, 뒤에 있었다. 황제의 옆에!

리카르디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한 발짝 내디딘 그 순간.

옆에 있던 로젤린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그녀는 석영 성이 불타는 것을 기점으로 마력을 몸에 둘러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둔 채였다. 시각, 청각, 후각. 눈으로, 피부로, 귀로 와 닿는 모든 정보를 그녀는 초에도 수백 개씩 읽어 냈다. 그러던 중, 리카르디스가 황족들이 보호받는 무리로 이동하던 순간 그녀는 느꼈다.

사취. 시체의 썩는 냄새였다. 진한 향수의 냄새가 억누르고 있으나, 로젤린을 그 아래 가려져 있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황제가 위험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에 이루어졌다.

로젤린은 구두를 벗어 던지고, 리카르디스를 보호하던 무리에서 확 달려 나왔다. 저 멀리에서 리카르디스에게 급히 다가오던 레이몬드가 무엇을 눈치채고는, 자리를 잡고 두 손을 모았다.

“로젤린!”

그녀의 발이 레이몬드의 손을 꾸욱 밟았다. 레이몬드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확 튕겨 올렸다. 로젤린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았다.

휘익, 로젤린이 공중에서 빙글 빠르게 돌았다. 무언가가 빛을 받아 반짝이며 날아갔다. 얼음창 기사단은 갑작스레 황족을 향해 공격해 온 그녀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챙그랑.

로젤린의 귀걸이와 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진 비수가 대리석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로젤린은 얼음창 기사단의 어깨를 밟고 한 번 더 뛴 다음 황족들이 모인 곳에 있던 남자를 덮쳤다.

“꺄악!”

황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로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를 제압했다.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얼음창 기사단이 로젤린을 막기 위해 무기를 뽑았으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한명씩 맡아 그들의 팔이나 관절을 꺾으며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이게 무슨, 불경한!”

“스타스 경, 이게 무슨 짓이오!”

당장에라도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베어 넘길 듯 이를 갈던 남자들은 정확하게 오 초 뒤,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1황자,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의 손을 완벽하게 제압한 로젤린이 그의 얼굴, 턱 뒤를 더듬더니 콱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얼굴 가죽이 짝 소리와 함께 벗겨지며, 코와 골격이 뭉개진 흉한 얼굴이 드러났다.

꺄아아악!

황후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엘피디오가 들고 있던 단검에 찔릴 뻔한 황제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뒤늦게 자리에 도착했다. 수백 쌍의 경악 어린 시선이 모인 곳. 리카르디스는 얼빠져 정신 못 차리는 얼음창 기사단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폐하를 보호하라,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암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엘피디오가 왜 다가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로젤린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가까이에 접근하면, 그녀가 반드시 알아챘을 것이기에. 대체 언제부터 낯선 자가 ‘엘피디오’의 가죽을 쓰고 있었나?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돌이켜 생각하다가 디에즈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황제는 엘피디오와 얘기 중이었다. 어쩌면, 디에즈는 황제가 아닌 엘피디오를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로젤린의 밑에 깔려 제압당해 있던, 엘피디오의 얼굴 가죽이 벗겨진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밤, 크레안 티다니온께 이 광영을 바칠 것이다!”

남자가 이를 콱 물었다. 입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로젤린이 암살자의 머리를 콱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찍었지만, 이미 그가 무언가를 뱉어 낸 후였다. 남자의 입에서 튄 거뭇한 액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5황녀 레이비아의 드러난 다리에 한 방울 투둑, 튀었다.

황녀 레이비아가 덜덜 떨다가 제 다리를 쓰다듬었다. 한 방울 피부에 닿은 액체로부터 살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파편’은 아니었으나, 극악한 독인 듯했다. 레이비아가 다리를 붙잡고 아악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꺄악!”

그걸 기점으로 연회장은 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우왕좌왕하는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발타의 고위 인사들이 일시에 비수를 꺼내 들고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 남자, 아이, 노인 가릴 것 없고 목표도 없이 머리를 잡아서 목을 찌르고, 도망치는 등을 가로지르고, 심장에, 눈에, 배에, 치명적인 일격이 박혔다. 연회장에 피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하얀밤 기사단은 더욱 결집해 리카르디스를 둘러쌌다. 그들에게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리카르디스의 목숨이었다. 모든 단원들이 연회장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하는 지금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을 나눌 수 없었다.

로젤린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피 흘리고 비명 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만 봐야 했다. 하나, 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춤을 추던 사람들이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그 위를 살아 있는 자들이 살고자 무심히 밟고 지나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느 어린아이의 심장에 길쭉한 암기가 박혔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심장에서부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핏방울들을 본 순간, 로젤린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조명을 받아 빛나는 핏방울에 사람들의 절규가 비쳤다.

로젤린은 어쩐지, 이 장면이 굉장히 익숙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떨려 왔다. 숨이 턱 막혔다. 아이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며 대리석에 가까워졌다.

쿵!

소년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비명이 가득 찬 난장판 속, 그 작은 소리가 들릴 리 없으나, 로젤린은 머릿속에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걸 기점으로 로젤린은 깨어났다. 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사태를 주도하던 남자들은 점차 제압되었다. 연회장을 지키던 기사,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검을 내려놓고 왔으나, 본디 무기를 들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긴 자들이 전면적으로 나섰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큰뿔산양 후작, 크레이튼. 큰뿔산양의 아렌트, 바다협곡의 자식들, 강철발굽 백작, 사자갈기 공작가의 후계자를 포함한 일라베니아의 귀족들과, 타국의 사람들도 몇 나서서 남자들을 제압했다. 그중 회색 머리칼을 가진 낯선 시종이 나선 이들 중 가장 많은 머릿수를 처리했다.

하지만 사상자는 이미 너무 많이 발생한 후였다.

“으으으…….”

“아파…… 살려 주세요…….”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진 채 피 흘리고 있었다. 제압되어 있는 검은 피부의 남자들이 마구 웃었다.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남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일라베니아 력 589년 건국일을 맞이해, 선물을 보낸다!”

호위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황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진실을 숨기는 비겁자여, 우리는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피로 쌓아 올린 권좌가 무너질 때가 되었다! 이미 너희들의 손으로 인해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던 그것이, 이델라브힘의 빛과 함께 스러져 갈 때가 되었다! 보아라, 위대한 밤, 크레안 티다니온의 빛이 떠오르리니!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너에게 보낸다! 네 혈육의 피로써, 시작을 알린다!”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머리를 툭 떨궜다. 바닥으로 피가 번졌다. 제압당해 있던 모든 발타인들 또한 일시에 숨이 끊겼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 연회장의 벽에 붙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남기고 간 정적은 끈적하고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영 성을 불태우는 불꽃은 더욱 커져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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