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레이몬드가 로젤린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연회장의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아직, 1군에 속하는 위험 인물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발타 사절단 대다수가 입장했습니다. 철저하게 확인한 바, 무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숨겨 오려고 한다면 피부나 몸 아래에 박는 수단도 있음이 입증되었기에 어지간하면 접촉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발타 쪽 인사가 다가오면 ‘아, 빈혈이…….’ 같은 대사를 하시고 로젤린 경의 품에 쓰러지시면 됩니다. 곧바로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까 엘피디오를 비웃는 게 아니었는데. 알겠다, 아무튼 그 강철발굽의 장녀는?”
“테레지아 양을 말씀하십니까? 왜 이름으로 안 부르시고.”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악운을 부르는 주문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다.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아까 만났을 때 너무 당황해서 실수로 불러 버렸어. 오늘은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무슨 상황에든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게 대비하라.”
레이몬드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시달리셨으면…….
“로젤린 경의 이름을 말하면 이상하게 좋은 일이 생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내 행운의 주문 같은 거지.”
그 짧은 틈 사이 로젤린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일을 잊지 않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을 보고 레이몬드는 흐린 눈을 하고 먼 산을 쳐다봤다.
세 사람은 발코니에서 나와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잠시간 사라졌던 리카르디스가 나오자 눈을 번쩍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로젤린은 발코니에서 있었던 일로 이상하게 들떴던 마음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리눌렀다. 그녀의 감각이 다시 예리하게 주위를 경계했다. 화색이 돌던 얼굴은 차갑게 식고, 눈빛은 날카롭게 세워졌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가리고 볼을 살짝 붉혔다. 그의 입에서 작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귀여워…….”
“…….”
레이몬드는 옆에서 기가 차는 중이었다. 아니, 누구 한 놈만 걸려라. 뼈를 마디마디 역으로 꺾어 버리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귀엽다니. 모로 보나 귀여운 것보다는 멋있는 쪽에 가깝지 않나. 눈에 대체 뭐가 씌었기에?
“……이제는 거침이 없으시군요, 전하…….”
리카르디스가 흠칫 놀라더니 레이몬드를 째려보았다.
“그런 건 적당히 모른 척하는 거다. 딸 빼앗겼다고 언제까지 툴툴거릴 생각인가, 좀생이처럼. 이 제국에 나만큼 괜찮은 남자가 있을 것 같나.”
“그, 그건…… 그렇긴 합니다.”
객관적 사실이라도 스스로 하기는 힘든 말이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로젤린에게 쏠렸다. 그녀는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부채를 펴 살랑살랑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쯤 되는 행동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가 사자갈기의 드윗을 보게 되었다.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드윗, 아르페커와는…… 무슨 대화를 그리 길게 나눴나, 로젤린 경.”
로젤린이 고개를 올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아, 아르페커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하라 했습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라고.”
리카르디스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까 전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 아닌가. 덕분에 더욱 머리에 열이 올랐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제가 그렇게 말했더니, 백작님이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사자 갈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기에 제가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물었더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일러바치는 내용을 듣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점점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저 멀리에 여자들에게 파묻혀 있는 사자갈기의 드윗이 보였다. 로젤린은 계속해서 대화 내용을 읊었다.
“동료들이 사자 대가리 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동안, 덜덜 떨면서 숨어 있다가 배부른 사자가 잠자고 있을 때야 슬그머니 창을 쥐고 오는.”
리카르디스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그녀와 함께 말했다.
“비겁한 기회주의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로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을 아십니까?”
“……사자갈기 가문을 비하하고 싶을 때 쓰는 욕이나 다름없는…… 아니, 욕이다. 흠, 그걸 제 입으로 꺼내다니…….”
대화를 같이 듣고 있던 레이몬드가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만, 저래 보여도 형을 꺾고 후계 자리를 잡은 놈이다. 내가 최근 이뤄 낸 것이 엘피디오에게 위협적으로 보일지언정, 위험하지 않아. 사자갈기는 그걸 충분히 알 수 있는 가문이지.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손을 내민다?”
단순히 수작 부리는 것으로 보기에는, 상대의 덩치가 컸다. 그런 잡스러운 수작질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에 자존심이 무슨 문제겠느냐만, 리카르디스가 본 귀족들은, 특히 대귀족, 중앙 귀족이라 불리는 그들에게는 죽는 것보다 자존심이 중요할 때도 많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접근이 불쾌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순간 적절한 도움이 왔다. 어느새 다가온 클로에가 레이몬드와 팔짱을 끼며 작게 속삭였다.
“원래도 아주 간섭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최근 들어 황후 폐하께서 사자갈기 가문을 쥐고 흔드는 게 좀 심해졌지요. 가문의 돈은 내 거, 내 거도 내 거. 이런 식이다 보니, 사자갈기 내에서는 불만이 좀 쌓였다 하더군요. 뭐 황후 폐하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야 딸을 밀어주고 싶겠지만, 그는 늙은 사자이고, 젊은 사자는 혈기가 좀 넘치는 모양이네요. 얘기를 한 번 들어 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리카르디스가 로젤린과 엮인 드윗에 대해 껄끄러움을 온 표정으로 나타내자 클로에가 빙그레 웃었다.
“품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적당히 얘기를 들어 주는 척하고, 드윗이 2황자와 접촉했다, 엘피디오 전하 측에 알려서 배반자로 낙인찍히게 한 다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재산과 정보를 토해 내게 하는 수단으로 그냥 이용만 해도 되니까요. 영 내키지 않으시면 그렇게 쓰고 버리셔도 되지 않겠어요?”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저런 흉악한 말을 하다니. 정말…… 훌륭했다. 리카르디스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두 사람의 음모를 말렸다. 우선 얘기나 들어 보죠, 얘기나!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의 흉악한 획책에 흐뭇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피디오가 저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뎅…….
그때,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너른 연회장을 한가득 메웠다. 대신전의 종이 황제가 등장할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설원의 월계수,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 황제 폐하 듭십니다!”
모두의 이목이 계단 위를 향했다.
쿠구궁…….
무거운 문이 열렸다. 하얀 예복을 입은 금발의 미중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은 엘피디오의 어머니, 황후 트리파가 정답게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발을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오지 않고 가만히 서서 아래에 선 사람들을 응시했다. 제국민들과 건국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타국의 인사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온화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기점으로 많은 이들의 눈이 바빠졌다. 황제의 호위인 얼음창 기사단, 그리고 위험한 인물이 도사리고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는 하얀밤 기사단원들까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방을 경계했다.
한데 아직까지도 하카브는 물론이거니와 디에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주위를 주시했다. 로젤린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천천히 파티 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반응하지 않았으니, 인조적인 마인이나 마력, ‘파편’의 위험은 없다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건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바랄 게 없으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황제는 고개를 숙인 자들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몇 발자국씩 물러나며 길을 만들었다. 그가 흐뭇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황제는 계단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황좌로 이동했다. 이 너른 파티 홀에 있는 단 두 개의 의자에 황제와 황후가 착석했다.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가 등장하고 십 여분 후에야 모두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황제는 이 자리를 찾은 모든 이에게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득하기 바란다는 의례적인 인사로 포문을 열었다.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하나의 주제로 매년 얘기하다 보니 특별함이 있을 리 없었다. 고만고만한 문구의 반복들. 어쩐지 작년에도 들었던 것 같고, 재작년에도, 한 십여 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다들 애써 감명 깊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저마다 딴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리카르디스도 황제가 거들먹거리며 떠들어 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그의 주위로 펼쳐진 상황에만 집중했다.
사람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황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믿겨지지 않는 고요함.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우뚝 선 이 공간 속에……
“어?”
어느 귀족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황제 라이노와 주위 모든 사람의 매서운 눈빛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하지 않고, 어느 한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남자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별이 총총한 어두운 밤을 명화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줄지은 창문들. 그 지극히 평범한 광경 속, 이상한 것이 보였다.
“불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멀리, 다른 성이 불타고 있었다. 성의 어느 한구석 작게 발화한 것이 아니라, 성 자체를 땔감 삼아 활활 타오르는 불빛은 연회장 내부의 조명이 무색할 정도였다.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밤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