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65화 (165/220)

165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 저는 백작님이 리카르디스 전하에 대한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토론을 하자고 해서……. 아차, 백작님이 말하고 싶은 사람한테 사자갈기는 용맹하지 않다는 얘기를 전해도 좋다고 했는데요, 제가 전하께 말씀 드리고 싶다고 말했었던가요?”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화를 풀기는커녕, 돋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로젤린은 동작을 크게 하며 어떻게든 설명을 이어 가려 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입가에 부채를 가져다 대었는데, 백작님이…….”

로젤린이 아까와 같이 부채를 입에 가져다 댄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손목을 콱 잡았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그녀를 당겼다. 리카르디스의 구두가 로젤린의 두 발 사이로 틈새를 비집듯 들어갔다. 몸이 닿는 가까운 거리.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음산했다. 로젤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대답을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키스해 주세요……!”

로젤린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어두워진 푸른 눈동자 속에서 불티가 튀는 것 같더니, 손목을 틀어쥔 그의 손아귀 힘이 세졌다. 로젤린이 의문을 가지고 리카르디스를 올려다본 순간, 얼굴이 가까워졌다. 로젤린은 숨을 헉 삼켰다. 코끝이 닿았다. 그 가까운 거리에서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았다.

“알고 있었어?”

베일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로젤린이 덜컥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순간,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뒤 머리를 감쌌다. 곧 차가운 손끝이 로젤린의 뒤 목과 귓불에 닿았다. 마찰 되는 살갗의 온도가 로젤린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이후 닿은 것은, 차갑고 시린 목소리가 아니라, 싸늘해진 누군가의 입술이었다. 로젤린의 입술이 거칠게 짓눌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읍!”

로젤린은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나아가, 입술 위를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으읍!”

로젤린은 벌레를 발견한 6살배기 어린아이가 입을 가리고 경악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놀랍고, 간지럽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을 잔뜩 채웠다.

“저, 전하! 잠시, 만요!”

로젤린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숨 가쁜 애원을 했다. 리카르디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 무표정한 얼굴 속, 미동 없이 자신을 포착한 눈을 보고 부르르 떨었다.

로젤린이 한걸음 물러서자 리카르디스가 한걸음 따라붙었다. 몇 번 반복된 짧은 술래잡기는 로젤린의 등이 벽에 닿고서야 끝났다.

로젤린은 눈동자를 굴리며 여전히 당황하는 중이었고, 리카르디스는 벽에 자신의 구두코가 닿을 정도로, 그녀와 바싹 붙어서 섰다. 몸이 틈새 없이 딱 달라붙었다. 로젤린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온기와 심장 소리가 리카르디스를 부드럽게 짓눌렀다. 그는 가만히 로젤린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로젤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로젤린의 엉덩이 위, 허리 부근에 올라와 있던 커다란 손이 스르륵 움직이며 그녀의 날개뼈 아래까지 지그시 쓸어 올렸다. 몇 겹의 천 위로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의 손가락이 로젤린의 척추를 따라 들어간 부분을 부드럽게 덧그렸다.

로젤린은 하, 아.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닿은 부위부터 오싹오싹한 감각이 퍼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로젤린은 차마 리카르디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목과 턱선만 바라보았다. 턱이 움직였다. 시야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싫으면 밀어내.”

정수리에 무언가가 가볍게 내려앉더니 쪽, 소리가 울렸다. 로젤린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훽 들어 올렸다. 리카르디스는 어딘가 날카로워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분명 밀어내라 했어.”

로젤린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행위가 덮쳐 올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맨 정신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로젤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앞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학습이 아니라 본능이었나?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았다.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입술과 입술이 몇 번씩이나 부드럽게 맞닿기만 했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열 오른 로젤린의 온도와 융화될 때까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입가와 입술에 끈질기게 입 맞췄다. 서서히 로젤린의 움츠러든 어깨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경직된 몸이 서서히 이완되고 있음을 느끼고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살짝 깨물고, 그 자리를 핥고, 빨아 올리고, 딱 다물린 입술의 틈새를 정성스럽게.

츱, 츱, 물기 젖은 소리가 울리자 로젤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아, 한숨인지 소리인지 모를 것을 내며 입을 벌리자 뜨거운 혀가 소리를 짓누르며 들어왔다.

저, 전하의 혀, 혀, 혀가. 들어와서는 입안 여기저기를! 앞니 뒤를! 송곳니와 천장을! 내 혀를 이렇게 저렇게!

그녀의 감탄은 곧 감각에 침식당했다. 팽팽한 이성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꽉 결박한 기분 좋은 압박과 자신의 뒤 목을 감싼 리카르디스의 차가운 손끝, 입안을 뜨거운 온도로 채우는 그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던 리카르디스의 예복이 로젤린의 손길로 인해 흐트러지며 구겨졌다. 리카르디스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드러난 살결 위를 흐르며 간지럽혔다. 그의 체취와 섞인 향수 냄새가 그녀를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아, 기분 좋아. 로젤린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간지러움에 익숙해지자, 봄날 햇살을 맞듯이 온몸이 노곤해졌다.

리카르디스의 심장 소리가 귀가 아닌 몸으로부터 전해졌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예복 아래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온기와 맥박, 그의 숨이 그녀를 가득 감싸 안고 있었다. 로젤린은 생각했다. 내가 아이스크림이었다면, 녹아 버렸을 거야. 손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흐물흐물하게.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숨을 들이마시다 그의 입안에서 향긋한 과실 향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여태껏은 너무 놀라서 미처 몰랐던 듯했다. 자신이 마신 것과 같은 종류의 샴페인이 분명했다. 같은 맛이었다. 그런데 그 질 좋은 샴페인을 마시는 것보다, 리카르디스의 향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입을 붙이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그녀의 입가를 핥더니 입술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그 후로도 핥고, 빨고, 문지르고. 한참을 지분거리던 그가 숨을 가볍게 몰아쉬다 머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리카르디스 시선이 로젤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촉촉하고 붉어진 눈가, 젖어 있는 입술을 훑어 내렸다. 리카르디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로젤린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리카르디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와…… 저, 전하. 정말…… 좋은 냄새가…….”

리카르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다 그녀의 입술을 왕하고 깨물었다. 입술로 잡아채듯 한 것이라 아프지는 않았다.

“냄새만 좋나?”

“예?”

리카르디스는 자존심 상해 보이는 낯으로 이를 갈며 말을 씹어 내뱉었다.

“기분은 안 좋았냐고. 이왕 한 거, 알아야 할 건 알아야겠다. 어느 쪽이 더 기분 좋았지? 누가 한 키스가 더 좋았나! 나야, 드윗 아르페커야! 내가 잘생겼나, 그놈이 잘생겼나! 솔직히 재력으로 보나 얼굴로 보나 내가 낫지 않나? 그대의 취향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를 하루 24시간 중 12시간 이상을 보면서 어떻게 다른 남자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거지? 솔직히, 내가, 좀 잘생겼어야 말이지!”

분통을 터트리는 리카르디스는 평소라면 못할 말을 마구 쏟아 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품에 딱 달라붙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코앞에서 리카르디스가 입술을 짓이기듯 씹고 있었다.

아까까지 부드럽게 닿던 입술이었는데, 그렇게 아프게 눌리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로젤린이 그의 입술을 쓸었다. 리카르디스가 흠칫, 몸을 굳혔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로젤린의 손을 피했다.

“……겨우 참고 있으니 자극하지 말고, 대답부터 하지 그러나.”

리카르디스가 곁눈질로 그녀를 재촉했다. 로젤린은 약간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훨씬 잘생기셨고…….”

리카르디스가 흥, 하며 콧방귀를 꼈다. 당연히 그렇겠지라는 자신감이 엿보였지만, 드윗처럼 재수 없지 않았다. 물고기는 물 밖에서 살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이치였기 때문이었다. 물고기는, 물에 산다. 리카르디스는, 잘생겼다.

로젤린은 어딘가 심통 나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키스는 백작님과는 안 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혀를…… 그러니까 입만 맞췄나?”

“아니요, 백작님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가까이 하긴 했지만, 제가 부채 사용을 잘못했다는 걸 아시고 그냥 얘기만 나눴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십 초 정도 그녀의 말을 잠자코 해석하기만 했다. 곧 ‘안 했다’의 의미를 혀뿐 아닌 입술도 부딪치지 않았다는 ‘안 했다’로 알게 된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리카르디스는 화들짝 놀라며 로젤린을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마치 자신이 왜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한 발짝 뒷걸음질한 리카르디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쥐구멍을 포함한 숨을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 가득한 얼굴을 큰 손으로 뒤덮어 가렸다. 시간이 흐른 후, 리카르디스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청해라.”

“예?”

“결투 재판을 신청해라. 실수로 죽여도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지. 신청해라. 그리고 날 죽여. 심장은 여기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가린 그대로, 다른 쪽 손으로 주먹을 쥐어 제 심장을 퍽 쳤다. 극단적이기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로젤린은 그새 부어 열감까지 느껴지는 입술을 매만졌다.

로젤린은 아까 리카르디스가 했던 말 중, 합의 어쩌고 하는 대목을 떠올려 냈다. 그러니까, 지금의 키스는 억지로 한 것이라 잘못했다 말하는 것이 아닐까.

로젤린은 섬세한 레이스의 문양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

“싫으면 밀어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충성 맹세를 했다고 배려해 줄 필요 없다. 나는 그대가 이런 행위에 대한 통념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을 거고. 그런 약삭빠른 계산이었던 것이지. 나는 잘생겼고, 솔직히 그대도 나한테 호감이 좀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잘생겼으니까, 그대가 잘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계산을…… 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은연중에 했을 거다. 금수보다 못한 머저리에게는 죽음이 차라리 자비로울 터. 죽여라.”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다가서며 그의 팔에 살포시 손을 올려 두었다. 아까 전, 강철발굽의 테레지아가 그를 더듬었던 곳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손으로 내내 가리고 있던 눈을 드러내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복잡 미묘하고, 죄의식이 가득 들어찬 눈빛이란 걸 로젤린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또다시 심장의 위치를 알려 주고 찌르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 말이 나오기 전, 로젤린이 천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제가 정말 싫어했다면, 전하께서는 계속 키스하지 못하셨을 거란 걸, 잘 아실 텐데요.”

리카르디스는 다른 사람이 로젤린에게 입맞춤을 강요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머리가 반파되어 있는 결말밖에 나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실적인 위로였다.

“……그건…… 정말 그렇군.”

로젤린은 계속해서 찡그려져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다급해 몇 마디 더 내뱉었다.

“기분 좋았습니다.”

리카르디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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