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64화 (164/220)

164화.

그 말을 마친 드윗이 몸을 뒤로 물리며 로젤린과 거리를 벌렸다. 그래 봤자 겨우 한 발짝 떨어졌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대화거리가 좁은 사람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자갈기가 대외적으로 내세운 건 용맹함이 맞으니 아무 데서나 ‘사자갈기는 비겁한 기회주의자’ 이런 말 하면 큰일 납니다, 로젤린 경.”

“그러면 말을 해도 되는 곳이 있습니까?”

“로젤린 양이 이 말을 전해 주고 싶은 사람에게 하면 될 것 같군요. 뜬금없이 엘피디오 전하께 말하고 싶은 기분만 되지 않는다면.”

로젤린은 누구에게 말을 해도 좋나 혼란스러워했으나, 드윗이 말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엘피디오 세력의 주축이나 다름없는 사자갈기의 후계자가 자신의 가문을 비겁한 기회주의자라 칭했다. 완벽한 엘피디오의 편이 아니며, 흐름이 뒤바뀌면 자신 또한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니 자신의 주인 또한 바뀔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모로 보나 엘피디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아니니, 그의 주적인 리카르디스에게 이르라는 말이겠지만, 로젤린은 아직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드러난 로젤린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녀가 부르르 떨자, 그것을 추워서 나온 행동이라 착각한 드윗이 겉옷을 벗으려 했다.

턱.

드윗은 손목을 감싼 단단한 악력에 순간 악,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 홱 고개를 돌려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남자가 눈을 빛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이 높게 올라왔다가 다시 푹 가라앉았다. 급히 뛰어와 숨이 찬다기보다는, 속에 들끓는 화를 진화시키려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에 더욱 희게 빛나는 은발이 하얀 옷 위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제국의 2 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였다.

“……드윗 아르페커…….”

리카르디스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드윗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리카르디스는 엘피디오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그에 비하면 한없이 정중하고 점잖은, 그야말로 ‘황실의 고귀함’이란 단어를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인식이 박혀 있던 터라, 드윗은 지금 리카르디스가 ‘……이 새끼…….’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환청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드윗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웃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대답 없이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드윗은 자신이 뭘 잘못했나 돌이켜 생각했다.

만약 리카르디스가 자신과 로젤린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다면?

로젤린의 ‘키스해 주세요’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이 집적거리는 모습까지 모두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각도 상 키스를 했다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다 큰 성인 여자 남자가 밤의 연회에서 끈적한 기류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끼는 부하가 타 세력의 간부쯤 되는 인간과 노닥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던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연회 한 도중에, 집요한 테레지아를 포함한 그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다 두고 왔다고? 뭔가 좀 이상했다.

드윗은 리카르디스의 등 뒤로 연회장을 확인했다. 아까까지 리카르디스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인사마저 제대로 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 발코니에서 일어난 일을 보자마자 체면이고 사람들의 이목이고 뭐고 간에 무작정 왔다는 얘기였다.

그제야 드윗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맹수 같은 눈빛이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만약 시선으로 찌를 수 있었다면 난도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설마…….’

드윗이 당황스러운 감정을 얼굴에 내보이자,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천천히 그의 손을 풀어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자, 당황스러워하는 남자, 화내는 남자.

누가 봐도 순진한 아내를 꼬여 낸 불한당을 족치러 온 남편…… 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별다른 거사도 치르지 않았건만 익숙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다니. 드윗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가 아픈 손목을 어루만지며 살짝 묵례했다.

“로젤린 양에게 볼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저는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로젤린은 그 순간까지도 뭐가 뭔지 몰라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드윗은 도망치듯 발코니를 떠나다 조금 멀어졌다 싶을 때 뒤돌아보았다. 리카르디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커튼을 묶고 있던 끈을 돌아보지도 않고 끌렀다.

스르륵. 그게 끝이었다.

드윗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의 가슴을 한바탕 휩쓸고 간 위기와 허망한 감정을 곱씹었다. ‘그’ 리카르디스 전하가, ‘그’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을?

드윗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다가 저 멀리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가씨들을 보고는 근사한 미소를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붉은 커튼이 연회장에서 나오는 빛을 가렸다. 음악 소리가 바로 옆의 큰 공간에서부터 흘러나와 잔잔하게 들려오고 있음에도, 어두워진 발코니는 완전히 연회장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로젤린은 들뜬 기색으로 리카르디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드윗과의 얘기가 끝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빨리 만나게 되어 몹시나 기뻤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그런 로젤린과 달리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사자갈기놈이 억지로 한 건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예? 뭘 억지로 합니까?”

“설마,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건. 저, 개 같은.”

리카르디스는 이를 갈면서 지금은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드윗이 사라진 발코니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까 물러간 드윗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올 기세였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채 대신 쥐어 잡은 것은 자신의 머리였다. 정돈된 머리를 헤집는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서 있었다. 잘 보니 살짝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리카르디스는 다른 곳을 보며 분을 삭이다가 다시 로젤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로젤린의 입가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억지로 뭘 해? 드윗이 뭘 했더라?

리카르디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단단한 손마디가 로젤린의 입술을 부드럽게 스쳤다. 리카르디스는 그에 그치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화장이라도 하듯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로젤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리카르디스의 손이 닿은 입술부터 시작해 가슴 안쪽 깊은 곳까지 솜뭉치가 굴러가는 듯한 간지러움이 번졌다.

그녀는 이상하게 리카르디스의 눈을 쳐다보기 힘들어서 그의 손이 원수라도 되는 양 뚫어지라 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말없이 정적을 지키고 있었기에, 결국은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푸른 눈동자가 발코니 밖 정원을 은은히 밝히고 있는 등불로 인해 일렁이고 있었다.

“……입술 화장이 지워졌군.”

아까 음식을 먹을 때, 크림이 입에 묻어서 혀로 삭삭 핥았더니 조금 지워졌더랬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세상에, 몹시 야성적이고 멋있었다. 로젤린의 가슴이 설레었다.

리카르디스가 난간에 있는 샴페인 잔을 들어 손수건을 살짝 적셨다. 그러고는 로젤린의 입술을 벅벅 닦았다. 아플 정도로 쓸렸다. 로젤린이 얼굴을 찡그리자 리카르디스가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하…….” 하고 깊은숨을 쉬었다.

“백작이 그대와…… 합의되지 않은 행위를 억지로 한 것이라면, 법으로 처벌 가능하다. 내가 증인이니. 결투 재판을 하겠나? 실수인 척하고 죽여도 된다. 내가 무마해 주겠다.”

로젤린은 더욱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은 저에게 합의되지 않은 행위를 억지로 한 적은 없으십니다.”

그러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럼 합의된 사항이란 말인가? 그대가 허락했다고? 그러고 보니 입가에 부채를 먼저 가져다 댄 건, 젠장. 로젤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고? 그래, 그대도 이제 스물세 살, 다음 달 생일이 지나면 스물네 살! 어엿한 성인이라는 걸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그래도 상대는 가려야지 사자갈기의 드윗? 드윗 아르페커? 그 자유분방한 하반신을 가진 몹쓸 망종…… 아니, 나와 반하는 세력의 남자와?”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그를 달래기 위해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백작님은 전하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고 합니다.”

로젤린은 아까 드윗에게 들었던 말을 훌륭하게 써먹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리카르디스의 눈에 불이 붙었다.

“로젤린 에스터!”

로젤린은 그제야 분위기를 읽고 입을 합 다물었다. 정확하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그가 말한 내용을 반추했다. 합의된 사항. 입가에 부채를 먼저…….

이거다.

입에 부채를!

‘혹시 입을 맞췄다 생각하시는 건가?’

로젤린은 답을 유추해 냈다. 확실히, 다른 세력의 유력한 가문 후계자와 자신이 입을 맞추다니, 간자라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분노는 그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었으나, 로젤린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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