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거야 원, 빌려준 적 없는 100골드도 받아 낼 수 있겠는데.”
로젤린은 그제야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의 눈이 날카롭고 뾰족하게 바뀌자 드윗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날 너무 딱딱하게 대하니 그냥 농담 한 번 해 봤습니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도, 황성 경비병처럼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얼굴이라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상처받아요.”
그는 연극배우같이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젤린은 한껏 분위기 잡은 드윗의 촉촉한 눈빛을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지켜보았다. 딱히 할 말도 없던 터라, 입마저 딱 다물고 있자, 그의 반듯한 얼굴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드윗이 쳇 하는 소리를 잇새로 내뱉었다.
“기억을 잃는다고 기본 성격이나 성향이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군. 황성 경비병을 꼬시는 쪽이 더 빠를 것 같은데, 이거.”
드윗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우고 불량한 자세로 난간에 슬쩍 기대었다. 거리가 몹시 가까우나 정중하던 아까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로젤린은 드윗의 바뀐 태도보다, 그가 내뱉은 말이 신경 쓰여 되물었다.
“저를 꼬시고 계셨던 겁니까?”
주위에 남자들이 많은 직업의 특성상, 로젤린은 ‘꼬신다’는 은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고상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은 이상하게 여자 문제가 엮이면 고상함을 벗다 못해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고, 덕분에 저렴해 보이는 어휘도 몇몇 개 익힌 상태였다.
드윗은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내보였다.
“인사한답시고 손등에 입술을 오 초 정도 붙이고 있으면 대부분은 알아채던데……. 더군다나 그 가까운 거리에서 갖은 교태를 부리며 웃고 집적거리면…….”
어쩐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입술이 손등에 닿아 있는 시간이 3.7초 정도 길더라니!
“왠지 허무해지기 시작했어. 솔직히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은 아니라서요, 내가 가까이서 근사한 미소를 보낼 때 두근거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텐데. 얼굴 한번 빨개지지 않다니. 로젤린 양의 심장은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거 아닙니까? 리카르디스 전하 곁에 너무 오래 있었나. 월장석 성의 여성 관계자들은 전부 시집을 늦게 가거나 못 갈 겁니다.”
뭔가 좀 재수 없었다.
“본인의 능력이 부족한 거 아닙니까?”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 리카르디스 전하께서 꽉 차다 못해 흘러넘쳐 애먼 여자들의 눈을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탓입니다. 저기에도, 리카르디스 전하께 홀린 여자가 한 명 있군요.”
드윗의 말에 로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안쪽, 저 멀리에 리카르디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리카르디스에게 푸른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다가가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 추가되었다며 아까 나단에게서 정보를 받았었다. 강철발굽의 테레지아. 과거 수많은 사건을 일으킨 문제아였다. 리카르디스를 향한 그 경악스럽고도 집요한 수많은 사건이 한 사람이 일으킨 일이었다니. 로젤린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로젤린이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드윗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워어, 진정해요 로젤린 양. 지금 어떤 얼굴인지는 아십니까? 누구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인데. 지금 본인이 얼마나 유명 인사인 줄 모르는 모양이군요. 눈에 띄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테레지아라도, 이렇게 사람 눈이 많은 곳에서는 잡혀갈 정도의 일은 저지르지 못할 테니 안심해도 될 겁니다.”
확실히, 과한 경계 때문에 나단에게 혼난 지 삼십 분도 흐르지 않았다. 지금 달려가서 테레지아를 떼어 내고 구속하려 한다면 이번에는 나단이 정말 뒤 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저 호위만 하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눈에 띈단 말인가! 하여간 유명한 것도 너무 피곤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를 계속해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웃고 있었지만, 테레지아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는 본능까지는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레지아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리카르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지탱했다. 리카르디스의 품 안에 테레지아가 폭 안겼다.
로젤린은 순간 속에서 확 하고 솟아오르는 불길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우악스럽게 부채를 쥐었다. 대가 휘더니 파작,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테레지아가 리카르디스의 팔뚝을 은근히 더듬고 있었다. 로젤린의 얼굴에 살기가 비쳤다. 그녀는 테레지아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부채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이로 부채의 끝을 잘근잘근 물고 싶은 걸 참고 있던 로젤린은 무언가가 자신의 허리를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젤린이 낯선 감각에 제 허리를 쳐다보았다. 아까까지 어깨 위에 있던 드윗의 손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로젤린의 고개가 드윗을 향했다. 드윗이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하지만 눈에는 열을 담고 그녀를 응시했다.
“설마 지금 그 은밀한 신호를…… 실수라고 말하지는 않겠죠, 로젤린 양.”
“예? 무얼 말하는 겁니까?”
드윗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실수였나 본데…….” 하고 중얼거렸다.
“여성들이 쓰는 부채의 사용법을 배운 적 있습니까?”
부채의 사용법? 여러 형태와 여러 움직임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 로젤린은 자신의 부채가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가 있는지 확인했다.
“…….”
로젤린은 반 정도 펼쳐진 상태로 입술에 닿아 있는 부채를 조심스레 내리고는 드윗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의 얼굴에 퍼져 있는 흐린 미소에 로젤린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는 클로에에게 이미 배워 알고 있었다.
‘키스해 주세요’ 였다. 그 ‘키스’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행위라는 사실과 더불어, 어딘가 야시시한 느낌이라는 것을 로젤린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초면의 사람과 나눌 만한 행위도 아니었고,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확실하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로젤린은 고개를 슬쩍 숙이고 웅얼거렸다.
“실수였습니다. 제가 기억상실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렇게까지 잘 아는 건 아니라서.”
“신사분이니 숙녀의 실수는 모른 척 넘어가셔야죠.”
드윗이 피식 웃었다.
“확실하게 나를 모르는 군요, 로젤린 양.”
그의 손가락이 로젤린의 턱 끝에 닿더니, 아래를 향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딱히 그 흐름에 거스르지 않았던 로젤린은 드윗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과거에 로젤린 양이 내게 한 말이 있습니다. ‘드윗 영식께선 신사는 못 되시겠군요’라고.”
드윗은 고개를 숙여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는 신사를 찾으셨나. 아가씨.”
로젤린은 그의 어깨를 슬그머니 밀며 묘한 기류를 깨트렸다.
“제가 오라버니라고 안 불렀나 봅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백작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 ‘로젤린’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다니. 대체 드윗 이 남자,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로젤린이 께름칙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에도 드윗은 연신 혀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벌레 쳐다보듯 하던 로젤린 양이 순수한 표정으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기회를 놓치다니. 멍청한 짓을 했어. 이래서 사람은 한때의 욕망에 몸을 맡기면 안 된다고 그러는 건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습니까?”
“로젤린 양은 내 자유로운 행동을 그다지 곱게 보는 부류가 아니었고, 나는 형처럼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던 로젤린 양을…… 내심 돌이나 한 달간 건조한 바게트라고 생각했던 부류였지.”
로젤린은 갓 구운 바게트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사이가 안 좋았군요.”
“그렇다고 지금 나쁠 필요는 없지. 안 그렇습니까 로젤린 양? 나는 지금의 로젤린 양이 제법 마음에 들거든. 약간……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어쩐지 욕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로젤린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드윗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로젤린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꼬시지 마시죠.”
“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만. 아무튼, 나도 예전처럼 물불 안 가리던 때보다는 얌전해졌고, 로젤린 양도 예전보다는 유해졌지 않습니까. 오늘을 기회로 만나면 인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같이 놀러 나가기도 하고, 로젤린 양은 저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그렇게 지내죠.”
“싫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데. 특별한 이유라도?”
“개인적으로는 백작님이 좀 웃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자갈기는 전하와 반목하고 있으니, 저 또한 반목할 수밖에요.”
드윗이 씩 웃었다.
“로젤린 양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은, 사자갈기는 리카르디스 전하와 반목하는 게 아니라, 엘피디오 전하를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같은 말이면 똑같이 말하면 되지, 왜 부러 입 아프게 다르게 말합니까. 들어 본 적 있을 텐데, 로젤린 양?”
드윗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자 갈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다.”
로젤린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또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진 것인지. 정말 틈을 줄 수 없는 남자였다. 로젤린이 부채로 그의 입을 툭 막고는 되물었다.
“그럼 누가 붙잡습니까?”
“동료들이 사자 대가리 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동안, 덜덜 떨면서 숨어 있다가 배부른 사자가 잠자고 있을 때야 슬그머니 창을 쥐고 오는.”
그가 웃었다. 부채에 가려져 입이 보이진 않았으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비겁한 기회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