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로젤린을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의식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녀는 개별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생각해 보자면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으나, 붙여 놓고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남자 혼자 멀대같이 크거나, 여자가 난쟁이처럼 보일 정도의 부자연스러운 키 차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둘의 조화에 한 몫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보다도 이따금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미소 짓는 두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서 분위기가 녹아들며 맞춰지고 있었다. 같지 않아 겹쳐질 수는 없으나, 한 그림의 퍼즐같이 맞아떨어지기는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조화가 제법 묘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는 로젤린만 담고 있었다. 환한 조명 아래 로젤린은 말 그대로 반짝, 반짝. 빛나는 중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풍경이 휙휙 달라졌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멋진지. 넋을 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그 끈질긴 시선에 로젤린이 고개를 돌려 의문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딱, 두 시선이 맞아 떨어졌다. 로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까까지 검날같이 주위를 겨누던 예리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리카르디스는 무형의 기운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허리에 제 손을 두었다. 로젤린이 멍한 표정을 천천히 누그러트리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빛을 받는 눈가가 반짝였다. 리카르디스는 손에 난 땀을 자신의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바보처럼 굳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멈춘 시간 속에 그녀의 머리카락, 눈, 눈썹, 얼굴에 있는 솜털부터 옷의 차림새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보이는 반면 머리는 점차 혼몽해졌다. 문이 열리고, 아름답게 꾸민 로젤린을 본 후 아무 말도 못한 채 일 분이 그냥 흘러 가 버렸다.
문이 열렸을 때만 해도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기대를 품고 있던 로젤린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침울해졌다. 자신이 바보처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실망한 듯 보였다.
그녀가 비 오는 날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본 리카르디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시간이 이미 너무 흘러 버렸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건만, 놓쳐 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클로에가, 상단에 큰 타격을 입어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는 그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지금, 파트너가 몇 시간 동안 씻고, 향유로 문지르고, 닦고, 만지고, 바르고, 입는 개고생을 하고 나타났는데, 예쁘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 그러고도 전하가 남자입니까? 그러고도 사람이야! 하고 윽박지르고 싶어 하는 살벌한 얼굴이었다.
이후 리카르디스가 진심을 다해 예쁘다고 칭찬했음에도 로젤린은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그대가 제일 예뻐!]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진짜야, 내가 본…….]
[전하가 더 예쁘십니다…….]
확실히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자면 여지없이 그렇다 해야 할 테지만, 리카르디스는 곧이곧대로 ‘그건 그렇지’라는 대답을 할 정도의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그는 로젤린의 말에 부정한 후, 최선을 다해, “저기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나? 경이 너무 예뻐서다.”라던가, “오늘따라 하늘의 별이 흐드러졌다. 경이 너무 눈부셔서 별인 줄 알고 마중 나왔나 보다.” 따위의 10세 미만 소녀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법한 개수작을 부렸다.
로젤린은 그 내용보다 리카르디스의 필사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마음을 풀고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 자체를 받아들인 건 아닌 듯해, 리카르디스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이곳을 쳐다보는 젊은 남자들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정확히 로젤린을 담고 있었다. 흥미, 혹은 호감이 느껴지는 눈빛.
리카르디스가 가볍게 제 볼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놈팡이들이 나중에 로젤린에게 접근해 손에 입 맞추며 아름다우시다 개수작질을 하겠지.’
애써 걸고 있는 온화한 표정 위로 살벌한 기세가 비쳤다. 심지어는 로젤린이 예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할 거라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려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자신이 ‘아름답다’ 라고 한 말은 의례적인 칭찬이라 받아들였으면서! 물론 거기에 제 잘못이 있으니 그녀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쏟아지는 시선과 감탄에 로젤린이 으쓱하는 걸 본 리카르디스는 혈압이 올라서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안된다. 이대로는 안 돼. 진짜. 내가 제일 먼저 기쁘게 해 줄 거야. 다가오는 놈은 죽인다.
잠시간 머릿속으로 모의 살인을 했던 리카르디스가 제정신을 되찾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남을 탓할 게 아니었다.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더해서 못할망정, 할 말은 해야지.’
나란히 발맞춰 걷던 중 리카르디스가 로젤린을 불렀다.
“로젤린.”
눈이 마주쳤다. 리카르디스는 마음속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오늘 그대가 매우 아름다워,”
하고 그녀의 허리에 얹은 손에 힘을 줬다.
“내 마음이 설렌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13살 소년도 자신보다는 말을 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허접한 칭찬 문구에, 로젤린은 전에 없는 반응을 보였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속눈썹이 깜빡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지금 망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로젤린이 수줍어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로젤린은 수줍어하는 게 맞았다.
로젤린은 여태껏 리카르디스가 한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은 죄다 그의 내면에 가득 쌓여 있는 상냥함의 발로라 생각했다. 하얀 거짓말.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머리를 헝클어트릴 정도로 고민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둔한 로젤린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칭찬이 더해질수록 리카르디스 전하는 참 상냥하시구나 하는 생각만 강화되어 가던 중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연회장. 로젤린은 여지없이 자신이 할 일을 수행했다. 위험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느라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누군가의 끈질긴 시선을 빠르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려, 집요한 눈길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눈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이 리카르디스가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대리석에 반사된 빛무리가 넘실거리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리카르디스였으나, 환한 조명 아래의 그는 정말 벽에 그려진 그림이 튀어나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표정이 로젤린의 마음 어딘가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허리에 올라와 있는 단단한 손의 감촉에 몸 안쪽부터 떨려 왔다.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리카르디스는 말했다.
[오늘 그대가 매우 아름다워 내 마음이 설렌다.]
설렌다! 로젤린은 그제야 제 몸 안쪽을 잘게 떨게 만드는, 마음 어딘가가 간지러워 계속 웃음을 배어나게 만드는 이 이상한 마음이 ‘설렌다’라는 말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데 이런 마음을 리카르디스가 먼저 말했다. 설렌다고. 놀라운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도 설레고 있었다니!
가슴을 뜨겁게 만들던 열은 점점 부풀며 머리로 올라갔다. 고개를 툭 떨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묘한 열로 인해 머리가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전에 없던 감정의 자각과 함께 유례없는 반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수줍어하는’ 반응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챘다 하더라도 ‘아, 그렇지요? 저도 오늘 제가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반응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니.
이, 위대한 도약, 인류의 발전은 언제나 한 발짝 먼저 걷는 사람으로부터……. 리카르디스는 마음속으로 횡설수설했다.
“저도.”
작은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가 움찔해서 머릿속에서 방방 뛰고 있는 리카르디스를 몰아내었다. 역시 ‘저도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는 빠지지 않는 것인가.
“저도 전하께서 매우 아름다우셔서,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로젤린이 흘끗 위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에 있던 작은 리카르디스가 폭사했다.
그는 입을 턱 가리고 잠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애써 가라앉히려 해도 달아오르는 얼굴은 막을 길 없었다. 그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이 괴로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 발타.”
난데없이 속삭이는 말에 로젤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엘피디오, 디에즈.”
한 단어, 한 단어 내뱉을수록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점점 원상 복구 되었다. 너무 좋은 마음을 너무 싫은 마음으로 억누른다는 극단적인 방법이긴 했으나 효과는 좋아 보였다.
“하카브.”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은 리카르디스는 완벽하고도 멋진, 아름답고 여유로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눈동자에 의문의 빛을 띠고 바라보는 로젤린을 보고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굽힌 팔을 슬쩍 내밀었다.
“가실까요, 레이디.”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